하오대문下午大門
글쓴이  나한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下午大門)- 序
서(序).
"무공(武功)을 익힌 목적이 뭐냐?"
"무공이 아니고 내공(內功)이다."
"아 글쎄, 무공이 되었던 내공이 되었던 왜 익혔냐고?"
"그럼, 법현. 너 먼저 말해봐라. 계속 소림사(少林寺)에 처박혀
있을 일이지 장가는 왜 갔냐?"
"그거야 밥해주고, 빨래해주지 애 낳아주지, 거기다 밤에 사랑까지,
일거다득(一擧多得)이니까."
"나도 그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밤일 때문에 무공을 배웠다고, 임마!"
"그래? 효과는……."
"개뿔이 효과는……. 속도만 겁나게 빨라졌다, 쌰-앙!"
눈을 치뜬 야혼이 길쭉한 물체를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전리품처럼,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술을 딱 한 모금 들
이켰다. 목을 축일 정도로만.
해구신(海狗腎).
야혼(夜魂)이 가장 즐겨먹는 보약 중의 하나였다.
정력제랄까.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100년 만의 첫 청부
100년만의 첫 청부(請負).
100년 전.
강호무림에 거센 혈풍(血風)이 불었다.
명교(明敎)아니 마교라 명명된 자들과의 전쟁 때문이었다.
수십 만의 교도를 가졌던 명교는 주원장을 도와 명(明) 개국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반국가적인 이념을 가진 그들은, 지배자로 등극
한 주원장에게 더 이상 도움을 주는 세력이 아니었다.
명교를 사악한 집단인 마교(魔敎)로 선포한 주원장은 관(官)과 무림
(武林)의 세력을 동원하여 십만대산(十萬大山)에 있던 명교의 총단을
급습함으로써 장장 십여 년에 걸친 정마(正魔)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이야 주원장이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림인들의 임무로
바뀌었고, 마침내 칼을 찬 무인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강호인들이 전쟁
에 참여했다. 결국 정마 전쟁의 승리자는 황제 주원장이 아닌 정사무림
인들이 되었다.
그러나, 강호의 모든 무림문파와 세가들, 하물며 강호를 떠도는 뜨내
기 무인들까지 전쟁에 참여했으나 정마대전에 참여하지 못했던 유일한
문파가 있었다.  거지들의 모임인 개방마저 전쟁에 참여했음에도 말이다.
정사연합세력에서 불러주지 않았던 단 한곳의 무림문파.
세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하오밀문이라 하였다.
하오밀문(下午密門).
문(門)이라는 이름을 걸고 300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었지만 누구도
문파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림인의 범주에 끼지를 못하는 문파가 하오밀문, 일명 하오문(下午
門)이었다.
개봉(開封).
하남성(河南省) 북부에 위치한 성도(省都)로 춘추전국시대의 위(魏)
나라부터 시작하여 5대10국인 양(梁), 진(晉), 한(漢), 주(周) 및 북송(北
宋), 금(金) 등의 왕조가 이곳에 수도를 건립했던 중원 7대 고도중의
한 곳이다.
북쪽의 누런 강물인 황하(黃河)와 마주하고 서있는 야트막한 구릉
위에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퇴락한 장원 한 채가 서 있다.
간간이 불어오는 강바람에 덜컹거리는 빛바랜 현판은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하오밀문(下午密門).
300년 전, 겁천십웅(劫天十雄)의 일 인이었던 십전수(十全手) 구약종
(邱掠種)에 의해 개파(開派)한 하오밀문의 총단이 바로 이곳이다.
왕조보다 더 오랜 세월동안을 문파라는 이름을 걸었던 하오밀문임에
도 왜 이런 초라한 모습인지.
"휴우!"
하오밀문의 최 심처인 공공각(空空閣)에서 나직한 한숨소리가 흘러
나왔다. 팔자 수염을 기른 60대의 노인, 현 하오밀문의 문주인 대도(大
盜) 강웅삼(姜雄三)이었다. 망연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강웅
삼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서렸다.
지난 100년간 하오밀문은 무림의 문파로 거듭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조직을 정비하고 새로운 인물을 영입하는 등, 그들이 할 수 있
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세를 확장해 나갔으나 오직 외적인 성장에
불과했다.
여전히 하오밀문의 구성원은 소매치기나, 도둑들, 그리고 창기가 전
부였고, 무공을 익힌 무인은 없었다.
애초에 무공을 익힌 자들은 하오밀문에 입문을 하지 않았고, 설령 뛰
어난 오성을 가진 인재가 입문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줄 무공이 없었
다. 하오밀문에서 가장 강하다는 문주의 무공이 무림세력의 일반제자와
거의 같은 수준이었으니, 어쩌면 하오밀문의 몰락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무림인들의 무시와 멸시 속에서도 그들만의 자존심은 있었다.
한가지 방면에 있어서 만큼 최고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고 어느
정도는 이루었다. 바로 정보였다.
정보에 있어서 만큼은 개방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신속성과 정확성
을 자랑하지만 그 또한 전쟁의 시기나 난세에 쓰임새가 있을 뿐, 지금
처럼 평화의 시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어느 세력에서도 하오밀문에 청부를 해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강호세력에서 청부를 해왔는데……."
지난 100년이래 처음 들어온 무림세력의 청부인데 그게 문제였다. 자
칫 잘못하면 하오밀문을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었던 것
이다.
"어서들 오시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강웅삼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자리하는 인물들, 하오밀문을 이끌어
가는 당주들이었다.
비록 무림에서야 삼류문파로 무시당하고 있지만 조직체계는 결코 삼
류라 할 수 없었다. 문주를 필두로 하여 다섯 명의 당주(黨主)와, 그 아
래에 있는 열 명씩의 향주(鄕主)를 포함하여, 데리고있는 조직원들을
전부 합치면 거의 이천에 달하는 인물로 구성된 곳이 하오밀문이다. 문
도 수로만 보면 개방다음으로 큰 문파였다.
"그럼 여러분들이 전부 오셨으니, 결정을 내리도록 합시다."
문주 강웅삼을 비롯한 5대 당주가 오늘 결정을 내려할 사항은 청부
의 수락여부였다. 단순한 청부, 즉 빚을 받아달라거나, 아니면 바람난
남편의 상대여자를 찾아달라는 등의 일반 양민의 청부였다면 지금처럼
문주와 당주가 전부 모이지 않았을 터였다.
강호무림의 지배자이고, 정파의 대표라 할 수 있는 10파의 청부였던
거였다.
십만대산(十萬大山).
100년 전 정마대전의 격전지였던 십만대산의 명교 성지까지 가는 지
도(地圖)를 만들어달라는 청부였다.
단순한 지도 제작이 전부였지만 하오밀문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수락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십만대산이 광서성 남쪽에 있는 위치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아무나
갈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아니었던 탓이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당시 성모궁(聖母宮)으로 떠
났던 무림인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오밀문의 정보 담당인 비당(秘黨) 당주 심뇌(心惱) 마석흠(馬奭欽)
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성모궁(聖母宮).
명교의 정신적인 지주인 성모가 기거했던 백색의 궁을 말한다. 그당
시 10년의 세월에 걸친 전쟁에서 십만대산 곳곳에 흩어져 있던 명교도
들을 척살 했지만 단 한곳, 성모궁만은 어찌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성
모궁이 있다는 봉우리마저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해서 정사 연합맹은 강호무림의 최 절정 고수 100여명으로 구성된
성모척살대를 조직하여 길을 떠났다.
그러나, 성모궁을 향해 떠났던 성모척살대는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
다. 아울러 그들이 익히고 있던 무공들까지. 무공의 원본이야 각 문파
에 남아있을 터이지만 정마대전이 벌어졌던 십 년 동안 새롭게 터득했
던 그들의 무공이 성모궁과 함께 묻혀버린 것이었다.
구파일방과 사파연합체였던 마도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바로 십만대산을 금역(禁域)으로 선포해버렸습니
다. 자신들 외에는 누구도 십만대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버린 것이지
요"
결국 두 세력의 선택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각 문파의 비전이 잠들어
버린 십만대산 전체를 금역(禁域)으로 지정하고, 자신들만 들어갈 수
있게 해 두었다. 즉 십만대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파일방과 마도련
의 허락을 동시에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십여 년 동안은 구파일방이나 마도련도 성모봉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결국에는 포기를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30년
전 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잠사혈군(潛邪血君)을 말하는 겁니까?"
잠사혈군, 30년 전에 나타나 강호무림을 한바탕 휘저어 넣고 사라진
인물을 말한다.
"그자가 성모궁에서 무공을 익혔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구파일방
과 마도련은 다시 십만대산의 수색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년 인원을 선발하여 십만대산으로
들여보냈지만, 구파일방이나 마도련 어느 쪽도 성모봉을 발견하지 못했
다. 그나마 보냈던 무인들조차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한
마디로 십만대산행은 죽음의 길로 인식되어 버렸다.
"그들이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강웅삼이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절대의 세력이 하지 못한 일을
무공이랄 것도 없는 하오밀문에서 가능하겠느냐는 말이었다.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시도를 해볼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만일
성공한다면 우리 하오밀문의 염원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강호의 대문
파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이지요."
무공, 하오밀문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무림문파로 거듭나기 위
해서는 무공이 있어야 하건만 그들이 가진 무공이라고는 몇 가지 조잡
한 무공이 다였다.
"지금 하오비동(下午秘洞)에 있는 그 아이들에게 줄 무공을 구하는
길은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젊은이들의 입단이 거의 없었던 하오밀문이었지만 웬일인지 이번에
는 5명이나 되는 영재들이 들어왔다.
강웅삼을 비롯한 5대 당주들이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자들로 하오
밀문의 미래였다. 강호 명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하오밀문
의 염원을 걸머진 영재들.
"그 아이들을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쓸만한 인물들을 조사해 왔습니다."
붉은 궁장을 입은 삼십 대 중반의 요염한 여인이 강웅삼을 향해 환
한 미소를 지었다. 젊어서 이름깨나 날렸을 법한 아찔한 미소를 짓는
이 여인은 개봉의 기루를 담당하는 청당(靑黨) 당주 화소미(花小美)였
다.
"그런 인재가 있었단 말입니까?"
강웅삼이 의아한 얼굴로 화소미를 쳐다보았다. 개봉에 있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는 거의가 한번씩 하오밀문의 입단을 권유했었지만 이곳
에 살며, 하오밀문을 알고 있는 자들은 전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화소미는 개봉에 있는 인물 중에 일할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
다. 더구나 여기서 찬성만 한다면 문제없다는 표정마저 짓고 있다.
"누구입니까?"
"개봉사괴(開封四怪)입니다."
"그 괴짜들 말입니까?"
마석흠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개봉사괴, 그 또한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아니 잘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하오밀문의 인물들에게
는 가장 골칫거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육승(肉僧) 추기영
나이는 21세로 그의 전직은 상국사의 소사미였다. 어려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절에 맡겨진 이후 십여 년 동안 잘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도
망을 쳐버렸다. 도망친 이유 또한 가관이었다. 고기가 먹고싶다는 단순
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는 것이라고는 불경이 전부인 녀
석이 먹고살게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개봉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탁발승 흉내를 내며 살다가 그마저도
밥벌이가 안 되자 저잣거리에서 시주통을 만들어 놓고 목탁을 두드리
며 스님 행세를 하고 있는 자였다.
누구도 알지 못한다. 중 행세를 하는 그놈이 가장 좋아하는 건 누런
황구라는 사실을.
거패(巨覇) 태웅(態雄).
그 역시 추기영과 같은 나이로 5년 전 이곳으로 흘러들었다. 7척에
달하는 장신에 곰 같은 덩치를 가진 놈이었다. 그의 밥벌이는 두 가지
였다. 차력술과 비도술. 어디서 외공(外功)을 익혔는지 거대한 쇠망치를
준비해두고, 자신을 한 발짝이라도 물러서게 만들면 걸었던 돈의 두 배
를 준다고 하여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힘깨나 쓴다하는 이들이 그를 향해 쇠망치를 휘둘렀으나 지난 세월
동안 그를 물러나게 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렇게 차력술로 돈을 벌다가 손님들이 식상해하는 표정을 지으면
곧바로 그의 두 번째 특기인 비도술을 시전하여 손님들과 내기를 한다.
곰같이 생긴 놈이 제 손가락 만한 비도를 날리는 기술 또한 신기여서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옥면호리(玉面狐狸) 여호치(女好齒).
여인의 몸으로 개봉사괴의 일인에 당당히 끼어있는 인물. 그녀의 직
업은 소매치기이다. 개봉 최대의 사찰인 상국사에 행사가 있거나 아니
면 장이 서는 날 출현하여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는데, 경공이 엄청나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는 얼굴을 아는 사람도 아직 없
다.
쌍면연작(雙面燕雀) 야혼(夜魂).
야혼이란 놈을 처음 보면 누구나 놈의 잘생긴 얼굴에 혹하게 된다.
지나가는 처녀는 물론이고 아이 서넛 딸린 유부녀들까지도 이 녀석만 보
면 침을 흘리고 다리를 꼰다.
얼굴 생김새로 보았을 때는 여느 대갓집 자제라 해도 하등의 손색이
없지만, 하는 짓거리는 영 아니었다. 개봉사괴 중 가장 성질 더럽고 개
차반인 녀석이 바로 이놈이다. 해서 별호가 쌍면연작이 되었다. 그의
직업은 통틀어 3가지다.
오전에는 북문(北門)근처에 있는 도살장에서 소를 잡는 백정 일을
한다. 그 또한 고기를 얻기 위한 직업일 뿐이었다. 오후에는 그 반듯한
얼굴로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데 지금껏 그놈에게 걸려든 처자들이 셀
수가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개봉의 최고 실력자인 지부대인의 부인까지 건들었다는 소
문마저 은밀하게 돌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의 마지막 직업은 역시 저잣거리가 주 무대였다. 야바위 도박, 세
개의 통속에서 주사위가 들어있는 통을 찾아내는 도박으로 손님들의
주머니를 털어 돈벌이를 하는 놈이었다.
여자 후리는 기술이 주특기인 놈답게 놈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체력
은 정력이다' 라는 말이다. 살아가는 목적이 정력증강에 있다고 떠버리
는 놈이 바로 야혼이었다.
구걸을 하는 육승, 차력사 거패, 소매치기 옥면호리, 그리고 쌍면연작
야혼, 이 넷이 돈을 버는 장소인 서대시전(西大市廛)은 하오밀문의 가
장 큰 돈줄이 되는 곳이었다.
수시로 그들과 마찰이 생겨 싸움을 하곤 했으나 결코 몰아낼 수가
없었다. 네 사람 모두가 싸움꾼이었다. 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은데
일대 일로 싸워서 그들을 물리칠 제자들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더군다나 하오밀문에서 자꾸 공격을 해대자 급기야 년 놈들이 야합
을 해서 공동으로 대항을 해오는 것이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 되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서로
공생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말았지만 여전히 하오밀문의 골칫거리
가 그들이었다.
"무슨 수로 그들을 끌어들인단 말이오."
"저에게 맡겨두시면 됩니다. 한달 안에 녀석들을 하오밀문의 제자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 녀석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이용할 겁니
다."
마석흠의 물음에 화소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입니까?"
화소미를 제외한 5인의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따로따로 행동할
때도 끌어들이는데 실패했는데, 지금은 같이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 세 놈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전부 여자를 밝힌다는 겁니다.
그것도 거의 색골수준으로."
야혼이야 원래 그런 놈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지만 나머지 두 명도
여자를 밝힐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야혼은 주로 작업을 걸어 여자를
취하는 반면에 육승과 거패는 돈을 주고 여자를 샀던 것이다.
"옥면호리는 셋만 오면 무조건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두고 보시면 압니다."
"좋소이다. 그럼 화당주를 믿고 청부를 수락한다는 연통을 띄우겠
소."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쌍면연작(雙面燕雀) 야혼(夜魂)(1)
2장 쌍면연작(雙面燕雀) 야혼(夜魂)
상국사(相國寺).
전국시대 위(魏)의 황태자 신릉군의 저택을 북제 때 불교 사원으로
바꾼 절로, 처음에는 건국사(建國寺)라 하였으나, 당나라 예종이 상왕의
왕위를 계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상국사라 개칭된 곳으로 개봉의 명
물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4월의 나른한 오후.
내리쬐는 햇살이 버거운 듯, 섭선으로 얼굴을 가린 채 상국사 일주문
을 통과해 들어가는 인물이 있었다.
창백한 낯빛, 번지르르한 새하얀 백의에 반듯한 이마에 두른 유생건.
산책을 나온 듯 한가로이 걷고 있는 모습이 고즈넉한 절간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사내의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대웅전 앞 목탑 주위를 돌
고 있는 여인네들의 모습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모두들 무슨 사연인가 있어서 소원을 빌러 왔을 터이지만 사내가 나
타나는 순간부터는 본분을 잊었는지 탑돌이보다는 사내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휴후-!"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깊은 한숨소리에, 여인네들의 다리가 후들거
렸는지 잠시 탑돌이 행렬이 흐트러졌다.
힘에 겨운 표정으로 대웅전 계단에 걸터앉은 그의 모습은 다가가서
부축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오게 하였다.
"저기……. 어디 편찮으신가요?"
탑돌이를 하던 젊은 여인 한 명이 다른 여인네들의 질시의 눈을 뒤
로하고 사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안색을 살폈다. 병색이 완연한 사내
가 내심 측은하기도 했고, 조금 전부터 자신만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선천적으로 병약해서 그럴 뿐입니다. 휴-!"
약간은 힘이 없는 듯했지만, 묵직한 저음의 매력적인 음성이 흘러나
왔다.
"혹시 이곳에 약수가 있는 곳을 아십니까? 다른 곳에 또 있다고 하
던데…….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좀 힘들어서 말입니다."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면 몸이 괜찮아지겠다는 표정으로 여인을 쳐
다본다. 마치 안내를 해 달라는 듯한 얼굴로.
"글쎄요, 이곳에 자주오기는 하지만 다른 곳에 약수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여인이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연신 사방을 두리
번거렸다. 이윽고 원하는 바를 찾았는지 사내를 향해 잠깐 기다려보라
는 말을 남기고 재빨리 저쪽으로 뛰어갔다.
"저 밖으로 나가면 있다고 하더군요."
지나가던 스님을 붙잡고 약수터가 있는 곳을 물어 보았던 거였다. 사
내가 물을 먹지 못하면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지 그녀의 행동은 정성이
가득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으윽!"
일어서던 사내가 갑자기 가슴을 그러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세요?"
재빨리 사내를 부축한 여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한순간 사내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를 쳐
다보는 여인의 눈에 언뜻 안쓰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사내를 가만히 주시하던 여인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본 사
내의 몸을 부축하는 것도 모자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울금향(鬱金香)이 좋군요."
"네? 아…… 네."
여인이 깜짝 놀란 얼굴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향낭 속에 조금 넣어
가지고 다니는 울금향을 바로 알아차린 사내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했
음이다.
"그런데…… 어디가 아프신 지……."
"우욱!"
물컹!
갑자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여인의 어깨 너머로 걸치고 있던
손을 와락 말아 쥐었다. 순간 손바닥 가득 여인의 가슴이 잡혀들었다.
"하악!"
"쿨럭! 쿨럭!"
당혹스런 여인의 신음소리와 사내의 격렬한 기침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연신 고개를 흔들며 기침을 해대면서도 여인의 가슴을 쥐고 있
던 손을 풀지 않았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가볍게, 기침의 강약에
맞추어 쥐락펴락하고 있는 거였다.
마치 자신은 여인의 가슴을 쥐고 있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듯이.
'흐미, 죽이는군! 예상은 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기침을 하던 사내의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결코 지병 있는 환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먹이를 덮치기 전의 맹수처럼 날카로운 빛을 뿌
렸다.
"죄송합니다, 소저. 기침이 한번씩 터지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저기…… 근데 괜찮겠어요."
얼굴이 잔뜩 붉어져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도 사내가 걱정되는지 외
려 그의 몸 상태를 걱정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너 같으면 이 순간에 진정이 되겠냐? 한 달간 노력한 대가를 받는
이 마당에? 피가 뜨거워지고 아랫도리가 힘들어 죽겠구먼.'
야혼(夜魂).
희멀건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놈이 하오밀문의 당
주조차 개차반이라 하였던 쌍면연작, 일명 두 얼굴의 제비새끼였다.
그녀의 이름은 황수란. 개봉부 관부 서열 2위인 동지(同知), 황인효
의 둘째 딸이다. 벌써 한 달 전부터 그녀를 점찍어 두었지만, 다가가기
가 쉽지가 않았다.
정5품 관리의 딸이다 보니 언제나 몸종을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결
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몸종 없이 홀로 상국
사를 찾아왔던 거였다.
"얼굴이 더 창백하게 변했어요."
"물 한잔 마시면 바로 괜찮아집니다."
야혼이 빙긋 웃으며 여인을 쳐다보았다.
"아-!"
순간 황수란의 얼굴이 아득하게 변했다. 한순간 사내의 얼굴이 눈부
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핏기가 거의 없는 창백한 얼굴에서 태양 빛
이 솟구쳐 오르는 듯했다.
'그럼 창백하게 보이려고 분칠까지 했는데 혈색이 돌면 되겠냐?'
지금 얼굴은 야혼의 본 얼굴이 아니었다. 거의 다섯 달 동안 돈을
모아 반투명한 면구(面具)를 장만했다. 얼굴 표정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지금처럼 환자 행세를 할 때는 원래 얼굴에
분칠을 한 다음 그 위로 면구를 쓰면 영락없는 병자의 인상이 나온다.
얼굴이 붉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매일 밤 야바위 도박을 해서 버는 돈의 소용이 바로 그런 쪽이었다.
몸치장과 정력보강, 여인을 후리기 위한 치장에 절반 정도를 소비하고
나머지는 정력에 좋다는 모든 음식을 두루 섭렵하고 다녔다.
도살장에서 일을 하는 이유도 그 중 하나다. 처음 개봉에 정착하면서
부터 일하던 곳이기는 했지만 단순히 먹거리를 얻기 위한 곳으로는 최
고의 장소였다. 더하여 다른 것까지.
"꽤 멀군요."
약간 경사진 곳이었기에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던지 황수란이 가쁜
숨을 내 쉬었다.
'이것 봐라? 이 정도가지고 쩔쩔매면 문제가 되는데?'
"다리가 아프십니까? 힘드시면 그냥 내려……."
"아니에요, 다리는 아프지 않는데 간만에 오래 걸으니 숨이 차요."
야혼이 다시 내려가려는 행동을 보이자 재빨리 위쪽으로 잡아끌며
미소를 지었다.
'으이그! 쏠린다 쏠려, 이건 완전히 날 잡아 잡수 하고 주는 거잖아.'
황수란이 숨을 몰아쉬자 더운 숨결이 훅 끼쳐들었다. 덜렁대는 가슴
을 쳐다보는 야혼의 눈에 언뜻 핏발이 섰다. 벌써부터 아랫도리에서 심
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던 터였다.
'이 정도에서 춘약을 슬쩍! 너무 강해도 안돼. 발정난 암컷은 싫거
든?'
야혼의 손이 가볍게 흔들리자 분홍색 분말이 허공으로 날렸다. 여인
이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순간을 이용해서 춘약(春藥)을 뿌린 것이었
다.
"저곳이네요?"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한곳을 가리켰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무성한
나무숲에 가려진 그늘진 곳에 조그마한 옹달샘이 보였다.
"쿨럭! 쿨럭! 쿨럭! 하아! 하아! 저를 저곳으로 좀 데려다 주십시오.
힘들게 올라왔더니 기침이 너무 심하네요."
야혼이 옹달샘 조금 안쪽에 있는 동굴을 가리켰다.
"처음이 아니신가 보네요?"
거의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대번에 동굴을
가리키자 황수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조금 전에는 분명 모르고 있
다는 듯이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 같이 기분이 좀 나아지는 날에는 가끔씩 오는데 길을 잊어먹
었습니다. 병 때문……."
'내가 애용하는 방이다. 곰 새끼가 살았던 굴이었는데 쫓아내고 확장
공사 좀 했다. 내부도 아늑하게 곰 가죽까지 깔아두었고. 그리고 널
모른 체 하려면 길도 못 찾는 환자라고 해야할 것
아냐?'
잠을 자고 나서 뒤처리를 위해 기억을 잘하지 못한다는 말을 흘린
것이다. 그럴 경우는 거의 없지만 혹여 다음에 다시 만날 경우에 모른
척 하기 위해서였다.
"그랬군요……."
황수란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가끔씩 다니던 길을 잊어버릴
정도로 병약한 사내에 대한 동정심이었다.
"와! 좋군요. 언제 이렇게 만들어 두셨어요?"
동굴 안을 쳐다보던 황수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방안에 들어
온 것처럼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던 거였다.
작지만 서가까지 만들어져 있어 안쪽에서만 보면 동굴이라고는 생각
하기 힘들 정도였다 .
"일 년 전에 만들었습니다. 만일 죽는다면 이런 곳에서 죽고싶다는
생각으로요."
야혼의 얼굴에 쓸쓸한 기운이 가득했다. 마치 인생을 포기한 듯한 그
런 얼굴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괜한 소리를……. 그런데 오늘, 날이 좀 더운가 봐
요."
"참 성함도 안 물어봤네? 이곳까지 수고를 해 주셨는데."
"황수란이에요. 사는 곳은 개봉에 살고요. 아버지는……."
'안다 알어. 그냥 접대용으로 물어보았다. 뭘 그렇게 세세하게 말하
냐?  썅!'
구구절절 늘어놓는 황수란의 행동에 야혼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나에 대해서 말했으니 너도 알려달라는 뜻이 깔려 있는 듯해서였다.
"저는 주전상이라고 합니다. 사는 곳은 북경인데 일 년 전에 요양차
왔습니다."
야혼이 사냥감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이름이다. 우선
은 이 나라 황제의 성이 주(朱)씨라 했기에 그의 성을 땄고, 사는 곳을
북경이라 하면 나머지는 지들이 대충 알아서 판단한다.
황도에 살고 있는 황족(皇族)정도로.
"어머, 그러세요? 황궁(皇宮)은 아름답겠지요?"
야혼의 예상은 언제나 적중했다. 지금 황수란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북경에 산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는데 황실과 관련이 있는 인물
로 넘겨짚어, 꿈꾸는 듯한 얼굴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 더하여 호
흡마저 약간씩 가빠지고 있었다.
'좀더 자연스럽게 해야겠지? 지금쯤 약발이 오를 때가 되었으니까.'
황수란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야혼이 내심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미처 춘약 때문이지는 알지 못한 채 조금씩 뜨거워지는
몸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던 거였다.
"쿨럭! 쿨럭! 으윽!"
다시 격렬한 기침을 토해내던 야혼이 가슴을 틀어쥐며 바닥으로 쓰
러졌다.
"공자! 공자! 어떡하지? 정신을 잃어버렸어……."
갑자기 쓰러진 야혼 때문에 황수란이 쩔쩔매는 얼굴로 사방을 두리
번거렸다.
"으-! 물…… 물……."
"그래 맞다. 물을 먹으면 좀 괜찮아진다 했지?"
이곳에 올라올 때 야혼이 했던 말을 기억해낸 황수란이 동굴 안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물을 떠올만한 그릇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년아! 미쳤다고 그릇을 놔두냐? 입으로 가져와야 할 것 아냐. 엄
마가 준 그릇 아껴서 뭐 할래?"
"어떡한다……."
옹달샘에서 동굴까지는 십여 장 거리가 되었기에 손에다 받아올 수
도 없었다. 하다못해 넓은 나뭇잎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볼 터인데 일
이 안 되려 했는지 그 흔한 나뭇잎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르르……."
설상가상으로 기절해있는 야혼의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까지 들려오
자 흠칫 얼굴이 변한 황수란이 옹달샘 쪽으로 달음질쳤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은 황족 사내에게 물을 먹여야만
할 것 같았다.
입안 가득 물을 머금고 온 황수란이 서둘러 야혼의 입으로 가져다댔다.
그러나 꽉 다문 입술은 도무지 열리질 않았다. 할 수 없이 혀를 내
밀어 사내의 입을 뚫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힘을 써대자 어느 순간 사
내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혀와 물이 한꺼번에 사내의 입안으로 빨려들었다.
"아아!"
어쩔 수 없이 하고 말았던 깊은 입맞춤에 황수란이 신음을 내질렀다.
더군다나 사내는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혀를 빨아 당기고
있었다. 온 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확 밀려왔다. 문득 사내의 혀를 빨아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내가 왜 이러지? 이런!'
머릿속을 잠식해 오는 낯뜨거운 상상에 황수란의 얼굴이 붉게 물들
었다. 자신이 그런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았
다.
"으으……! 물……."
여전히 물이 부족한지 앓는 소리를 하며 신음을 흘렸다.
"또?"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황수란이 다시 옹달샘이 있는 곳으로 뛰어
갔다. 처음보다는 두 번째가 더 쉬웠다. 이번에도 역시 악다물고 있는
사내의 입을 강제로 뚫고 물을 넣어주었다. 단 두 번인데 익숙해졌다는
느낌마저 들며, 사내가 빨아주는 야릇한 혀의 감촉을 음미했다.
그리고 세 번째, 이번에는 무의식적인 듯 사내의 손이 가슴을 그러쥐
고 있음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 만져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머릿속 가득 들어찼다.
"하악!"
사내의 손길이 몸을 더듬고 있었지만 거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
히려 자꾸만 애먼 곳을 만지는 손길이 야속하기만 했다.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이곳에 오기 전에 뿌렸던 춘약이 드디어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던 거였다.
야혼이 쾌재를 부르며 손을 움직여 나갔다. 지금부터는 바쁘게 서두
를 필요가 없다. 이미 여인의 몸을 뜨겁게 달궈져있고. 세 번의 입맞춤
으로 마음마저 완전하게 풀어져버렸다.
'야혼의 여인들' 이란 책자에 이름을 등재시키는 마지막 절차만 남은 것이다.
"수란 낭자! 저의 아버님께 말씀 드려서 북경으로 데려가고 싶은
데…… 허락해 주실런지요."
부드럽게 가슴을 매만지며 말했다. 야혼의 작업방식이었다. 이미
넘어왔다고 해서 급하게 서두르는 법이 없다. 지난 5년간 몸으로 터득
한 산지식이었다. 마지막 여운을 즐기며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설 때까
지는 아직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것이다.
"공자님! 더워요? 어떻게 좀."
'어라? 지랄하고 자빠졌네.'
야혼이 피식 웃었다. 황수란에게 쓴 춘약은 그리 강한 게 아니었다.
참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는 그런 약이었음에도 그녀는 정
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몸에 열이 많으신가 보네요. 자자, 이렇게 하면 좀 편해 질 겁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황수란의 옷을 하나씩 벗겨 나갔다. 그러면서도 몸
을 만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 야혼이 가장 좋아하는 것.'
야혼의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그가 사냥감을 고를 때 가장 우선
순위로 치는 사항은 얼굴이 아니라 가슴이었다. 가슴 큰 여자만 보면
그녀가 유부녀 건 아니 건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지금 커다란 육봉(肉峰)을 드러내놓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황수란도
같은 맥락에서 선택된 여인이었다. 얼굴이야 별로 볼 것 없지만 가슴하
나는 끝내주게 큰 여자였다. 지부대인의 부인보다 더 큰 것 같았다.
파르라니 떨고 있는 유실을 가볍게 쥐며 가슴을 쓰다듬던 야혼이 이
번에는 치마를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반쯤 풀려버린 눈을 한 황수란은 야혼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부르르
몸을 떨며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우화! 최고다. 이 정도 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야혼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서렸다. 가히 폭발적인 몸매였다. 얼굴
은 그냥 수수하게 생긴 여인이 몸매는 환상적으로 빠졌던 거였다. 한
손으로 다 쥐어지지도 않는 거대한 젖가슴과 상대적으로 가늘어 보이
는 허리,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탐스럽게 굴곡진 엉덩이 선은 지금껏
그의 손을 거쳐간 여자들 중 열 손가락 안에 들 수 있는 엄청난 몸이
었다.
'완전히 횡재했군.'
여자는 벗겨놓고 봐야한다는 진리가 다시 한번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평범하게 생긴 얼굴에서 이런 몸매가 숨어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수란낭자 너무 아름답소이다. 평생을 같이할 만큼."
황수란의 귓불을 부드럽게 빨며 야혼이 나직이 속삭였다. 여전히 여
유 있는 얼굴에 느긋한 행동.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급하게 서두르지
않는다. 여인이 우는소리를 할 때까지 달구려는 심산이었다.
"주공자! 사랑해요."
'그럼 당연히 사랑한다고 해야지, 그래야 분위기가 살잖아.'
"나도 마찬가지오 수란. 나도 당신을 사랑하오."
'자 이제 마지막 작업을 해볼까?'
야혼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바지를 조금만 까내린 채 마지막
진입 준비를 했다. 여인을 후리는 작업 중 기본에 해당하는 사항이 옷
을 전부 벗지 않는 것이다. 언제 방해꾼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서 벌거벗고 그 짓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황수란의 두 다리를 버쩍 치켜든 상태에서 엉덩이를 힘있게 찍어눌
렀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쌍면연작 야혼(2)
푹!
퍼억!
두가지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하나는 여린 살에 무엇인가 박히는
소리였고, 또 한가지는 무엇인가에 걷어차일 때 나는 파열음이었다.
"이 새끼는 조금만 풀어주면 이 짓을 한다니까?"
날카로운 음성과 함께 엉덩이에서 밀려오는 엄청난 충격에 야혼의
몸뚱이가 한쪽 구석으로 거칠게 처박혔다.
여인이었다. 수수하게 생긴 여인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야혼의 항문
을 걷어찬 것이었다. 야혼은 데굴데굴 구를 수밖에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맞은 곳은 아래쪽인데 왜 호흡곤란이
오는지 그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에 게거품을 물며 온몸을 부
들부들 떨었다.
"너? 이런 썅년!"
한동안 호흡을 고르던 야혼이 눈앞에 있는 여인을 확인하고는 거친
욕설을 뱉어냈다.
옥면호리 여호치, 개봉사괴의 한 명인 그녀가 나타나서 야혼의 작업
을 방해했던 것이다.
"이런 개새끼! 너 뭐라 했어."
야혼의 말에 발끈한 여호치가 품속에서 조그마한 소도(小刀)를 꺼내
들고 다가왔다. 그녀의 시퍼런 비수가 향하는 곳은 야혼의 얼굴이 아니
었다.
조금 전 작업에서 딱 한번 제 역할을 했던, 아직 불끈 솟아있는 그놈
을 향해 천천히 뻗어가고 있었다. 괴짜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시
집도 안간 처녀가 남자의 발기한 양물을 노려보는 것만 해도 놀랄 일
이건만, 그놈을 잘라 버리겠다고 비수를 들이대는 행동이라니.
개봉사괴의 한 명이 된 이유가 바로 이런 행동 때문일 터였다.
"뭐해, 이년아! 빨리 안 사라지고."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멍한 표정으로 있는 황수란을 향해 상스런 욕설
을 뱉어낸 여호치가 다시 야혼을 향해 다가왔다.
"황소저 먼저 내려가 있으십시오. 이년은 북경에서 찾아온 제 정혼녀
입니다."
자신의 입에서 이년 저년의 상소리가 나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야
혼이 현 상황을 수습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알겠습니다, 주공자."
얼떨결에 대답을 한 황수란이 재빨리 자리를 떴다. 분홍빛 꿈이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뭔가 잔뜩 기대를 했는데 딱 한번 들어왔다 나가고는 끝이었다.
그러면서도 처녀는 가져가 버렸다.
"야! 여호치 말로, 말로 하자니까?"
도망치듯 멀어지는 황수란을 쳐다보던 야혼이 주춤주춤 물러나며 말
을 더듬었다. 얼마나 정통으로 맞았는지 온몸에 힘이 전부 빠져버렸다.
반항하고자 해도 힘이 없었다.
"셋의 여유를 주겠다. 그 동안에 네 녀석의 양물을 원상태로 만들지
못하면 이번엔 진짜로 잘라버린다."
정말 잘라버릴 듯, 한발 한발 다가서는 여호치의 눈에서 서릿발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한번 성을 낸 그것이 마음대로 조정이 되는 것이던가. 여전히
허공을 향해 고개를 쳐든 야혼의 양물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
다.
"야 이게 마음대로 조정되는 거냐?"
"하나!"
"호치야 제발 부탁이다. 그만 좀 괴롭혀라.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
고 이렇게 쫓아다니며 사사건건 못살게 구는 거냐."
후회막급이었다. 결코 같이 사는 게 아니었다. 하오밀문의 등살에 못
이겨 개봉사괴가 같이 살게 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땐 고의가 아니었다."
우연히, 정말 우연이었다. 물론 호기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남의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는 건 취향에 맞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일이
었다. 그때는 단순히 물을 먹고 싶다는 생각에 주방으로 갔다가 여호치
의 알몸을 보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시작되었다. 작업을 할 때마다 나타나서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금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셋!"
"으악!"
시퍼런 칼날이 양물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자 기겁을 한 야혼
이 한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약한 살기마저 풍기는 그녀의 비수가
정말 잘라버릴 것 처럼 횡으로 쓸어오고 있었던 거였다.
"이제야 줄었네."
한순간 고개를 숙인 야혼의 양물을 주시하는 여호치의 입매가 만족
스럽다는 듯 살풋 치켜 올랐다.
"이제부턴 너는 이놈이 빠지게 도망을 다녀야 할거야. 여기 동굴도
없애버리는 게 좋을 걸? 그리고 이건 압수다. 야혼 여인들? 까는 소리
하고 있네."
야혼의 양물을 툭툭 건들인 여호치가 걸어나가며 남긴 마지막 말이
었다.
그녀의 말대로 야혼은 정말 큰일이 나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
지(同知)의 딸을 겁탈하려 했으니 황수란이 그녀의 부친에게 말이라도
하는 날이면 바로 극형으로 이어질 상황이었다.
"야, 그 책은 주고 가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여호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지난 5년간의 인생이 담긴 책자였다. 그를 거쳐간 모든
여인들을 기록해둔 책자로 500장의 책장 중 절반정도를 채웠던 것이다.
"두고봐라, 여호치. 언젠가는 너를 내 밑에 눕히고 말테다. 그때도 지
금처럼 자르겠다고 난리를 치는가 확인하고 만다. 빌어먹을 년."
사실 여호치의 몸 또한 그가 본 최고의 몸이었다. 조금 전 실패한
황수란의 몸보다 훨씬 빼어났다 단지 한기가 풀풀 날리는 차가운 얼굴
만 빼면은 말이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몸을 떠올려도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가슴
큰 여자만 보면 무조건 요동을 치던 그놈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
다. 그 또한 묘한 일이었지만 야혼 본인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 아까운 곳을 없애려니 마음이 아프구나. 마지막 남은
은신처였는데……."
여호치의 말대로 무조건 없애버려야 한다. 일이 제대로 끝났으면, 다
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면, 자연스럽게 헤어졌을 터인데
여호치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져버렸다.
"나쁜 년…… 으윽!"
하초에서 밀려드는 고통을 참으며 동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말
최고의 날에서 최악의 날로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내 개봉을 뜨고 만다. 반드시 올해 안에 뜬다."
더 이상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사는 거야 도축이라는 확실
한 직업이 있으니 어딜 가더라도 굶어죽지는 않을 터였다.
"아이고 알이야. 어디 가서 좀 쉬어야겠다."
동굴을 전부 정리한 야혼이 어기적어기적 산을 내려왔다. 최소한 하
루정도는 요양을 해야할 것 같았다.
*   *   *
"자 골라봐! 서역에서 가장 귀하다는 향료가 은자 한 냥이요!"
주변을 오가는 행인들의 주머니를 노린 호객꾼들의 고함소리가 사방
에서 울려퍼지고, 환하게 불을 밝힌 주루에서는 술취한 취객들의 호탕
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서문 쪽의 마(馬)시장 부근에 형성된 개봉최고의 시전. 이곳에서 생
산된 물건은 물론이고, 멀리 서역에서 들여온 갖가지 진기한 물건들이
이곳저곳 타오르는 횃불 아래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야혼의 밤 직업이 있는 서대시전(西大市廛)이었다.
"자 여기서 주사위를 찾아내면 세 배의 돈을 드립니다. 마누라 그곳
을 찾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자자! 운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서대시전 북편으로  즐비하게 서 있는 기루 앞의 조그마한 좌판에서,
지나가는 행인을 향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꼬박 하루 동안을 숨어서 요양을 한 야혼이 몸이 좀 나아지자 밤일
을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어제와는 딴판으로 달랐다. 살
짝 검은 색으로 치장한 얼굴은, 여기저기서 일렁이는 불빛으로 꽤나 거
친 분위기를 풍겼다.
야혼의 주고객은 당연 기루에서 한잔 걸치고 나온 취객들이다. 그들
에게는 호기를 자극하는 몇 마디 말만하게 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자 보세요. 이놈을 찾는 겁니다. 흰색도 아니고 청빈루의 월향(月香)
이의 그곳처럼 새카만 이놈을 찾아내면 걸었던 돈의 세 배를 드립니
다."
"자넨 월향이의 그곳을 보았나?"
야혼의 호객소리에 혹한 행인 한 사람이 관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
왔다. 비틀거리는 모양새로 보아 초저녁임에도 술 한잔 걸친 게 틀림없
었다.
보통 이곳 서대시전에서의 취객들은 2차에 걸쳐 술을 마신다. 처음부
터 기루에서 술을 먹기에는 그 비용에 만만치 않기에 근처에 있는 조
그마한 주점에서 1차를 한 다음 기루를 찾는다.
기루를 찾는 주목적은 여자를 안는데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 보았지요. 같이 잠을 잔 적은 없지만 그녀의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았지 않았겠습니까. 근데 말입니다."
야혼의 은근한 말에 취객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청빈루라면 이
곳 서대시전에서 가장 비싼 곳이고, 몸을 팔지 않는 기녀들로 유명하
다. 그곳에 있는 기녀들 중 가장 빼어난 기녀 네 명을 청빈사기(淸貧
四妓)라 하는데 그중 한 명이 월향이었다.
개봉에서 난다하는 한량들의 갈구하는 대상이 바로 그녀들이었다.
"꺼억! 그래서?"
"자자! 돈을 거십시오. 월향의 그곳처럼 새카만 이놈을 찾으면……."
"좋네 돌리게 걸지."
돈을 벌겠다는 목적에 거는 게 아니었다. 야혼이 하다가 멈춘 다음 이
야기를 듣고 싶어서 통을 돌리라는 것이었다.
"네 잘 보십시오."
검은 색의 주사위 하나를 행인의 눈앞에 들이밀며 확인을 해준 야혼
이 맨 오른쪽 통에 집어넣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히 신기에 가까운 빠른 손놀림이었다.
탁! 탁! 타타탁!
빠르게 또는 느리게, 한순간 멈췄다 다시 움직이는 그의 손놀림은 거
의 육안으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월향이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미인의 조건으로 치는 삼백(三百),
삼흑(三黑), 삼홍(三紅), 삼협(三峽) 중에 삼흑을 가지고 있는 여인입니
다. 혹시 삼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을 건 사람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통을
돌리는 기술은 거의 경지에 달했지만 혹시라도 벌어질 불상사에 대비
해 묻는 말이었다.
"글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취객이 야혼 앞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주사위의 위치보다 야
혼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더 기다리는 듯했다.
"삼흑이란 말입니다. 자 거십시오."
"이 사람이……. 자 이곳이네."
중간에 말을 끊어버리자 행인의 얼굴이 다급하게 변했다.
"네네 알았습니다. 삼흑이란 우선 눈동자가 흑진주처럼 검어야 하고,
눈썹이 검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흔히들 머리카락이라고 하는데
실은 그곳의 털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그곳을 말하는데 아무렇게
나 까놓고 말하지 못하기에 머리카락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어이쿠 안
됐습니다. 제가 먹었습니다 그려."
야혼이 환하게 웃으며 오른 쪽에 놓았던 은자를 주머니 안으로 집어
넣었다. 은근슬쩍 월향이에 대한 말조차 거둬들이며.
"돌리게."
"또 하시게요? 알겠습니다. 제가 작년 여름에 청빈루 주변을 배회하
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디선가 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리는 겁
니다. 벌건 대낮에 말입니다."
꾸울꺽!
술 취한 사내의 목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이번에도 제가 먹었습니다, 그려. 한번 더 돌릴까요?"
"그렇게 하게."
사내에게서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저도 물건 달린 사내인지라 그냥 지나질 수가 없더군요. 그래 뒤쪽
으로 돌아가 담을 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월향이었습니다. 실오라기
조차 걸치지 않은 태어날 때 모습 그대로 씻고 있는 겁니다. 이번에도
제가 먹었습니다."
은자를 가져가는 야혼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지금껏 술꾼에게 벌
어들인 돈이 세 냥. 여기서 더할 것인지 아니면 그만 둘 것인지를 결정
해야하기 때문이었다. 도박도 단순하게 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뒤
탈이 없다. 그런데 사내는 다시 은자 한 냥을 꺼내고 있었다. 아주 자
연스러운 행동으로. 주머니 속에 아직 여유가 있다는 의미인 게다.
"그런데 말입니다."
야혼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은근해지고 낮아졌다. 이제는 앞에 있
는 취객에게만 들리게 하는 말이었다.
"그녀의 숲은 너무 검었습니다. 아랫배 부분을 온통 감싼 그 울창한
숲이라니……."
그 때를 떠올리는 듯 야혼의 숨결이 약간 거칠어졌다. 그러자 호객의
눈빛도 같이 풀어지며 거친 숨을 뱉어냈다.
"월향이는 아니지만 그녀와 닮은 기녀가 있는 곳을 소개해 드릴까
요?"
"그. 그곳이 어딘가?"
"네 저쪽에 황루(黃樓)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모녀(毛女)를 찾
으시면 됩니다. 제가 보냈다고 말하십시오."
"그런가? 알겠네. 많이 벌게."
벌개진 얼굴의 취객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방금 야바위꾼에게 걸려
은(銀) 4냥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 황루를 향해 줄행랑을 쳤다.
"사악한 중생이로세. 시주는 특히 만장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살살처(殺殺處)에 떨어질 것임이 분명하도다. 나에게 조금만 시주를 하
면 그 죄를 면하게 해줄텐데 의향은 없는고. 나무관세음보살!"
목탁소리와 함께 번쩍거리는 민대머리 하나가 야혼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둥그런 얼굴을 가진 육승 추기영이었다.
"왜 오늘은 돈벌이가 안 돼냐?"
목탁을 두드리는 것만 보면 추기영의 돈벌이를 쉽게 알 수가 있다.
손님이 많아 시주통에 돈이 좀 들어오면 목탁소리의 장단이 노류장화
들이 치는 거문고 소리처럼 흥겹지만,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두드려대는
경우에는 공쳤다는 표시인 게다.
"니미 씨팔타불이네, 시주. 비도 안 오는데 빌어먹을 보살들이 전부
어디를 쳐갔는지……."
"그러게 임마 나와 동업하자고 했잖아. 니 녀석이 바람만 잡아주면
지금보다 두 배의 매상은 가능하다고."
"니미럴 시주. 돈이 있으면 뭐하겠나. 쓸 곳이 없는걸. 벌써 두 달째
인신공양을 못했더니 부처님께서 진노하고 계신다네. 새벽마다 이 육승
을 닦달하는데 잘라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네."
"내일 오전에 도축장으로 와라, 내가 안 아프게 잘라주마."
육승과 거패의 고민거리였다. 돈을 준다고 하는데도 서대시전에 있는
기루에서 받아주지 않는 거였다. 서대시전에 돌고 있는 소문 때문이었
다. 육승과 거패가 화류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급속하게 돌아서, 기녀들
이 술 한잔 같이 먹는 것도 꺼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연 이삼일에 한번씩 기루를 출입하던 둘은 죽어날 지경이었다. 사
소한  일임에도 인상을 쓰며 게거품을 물곤 했다.
"뒈지려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을 붙잡고 용두질을 못할까."
나지막한 육승의 말에 살기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가뜩이나 화나는
데 기름까지 붙느냐는 의미였다.
"이 새끼야, 부처님 그것이 필요한 놈은 너지 내가 아니야. 어디서
대가리에 주름을 잡아 썅!"
야혼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추기영이나 태웅은 소문 때문
에 양물 목욕을 시키지 못하지만 야혼은 순전히 여호치 때문이었다. 더
구나 입맛마저 까다로워져 절대 기루에 있는 기녀들은 상종을 하지 않
는 터라 그 또한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이런! 호로 새끼들, 틈만 나면 싸움질이야."
컸다. 걸을 때마다 땅이 울릴 정도의 거구 청년이 두 사람을 향해
인상을 쓰며 다가왔다.
거패 태웅. 어벙한 표정의 얼굴이지만 겉모습을 보고 판단해서는 절
대 안 된다. 개봉사괴 중 가장 신중한 놈이 바로 그였다.
거의 칠 척에 달하는 거구를 가진 놈이 가장 좋아하는 게 손가락 만
한 비도인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부 36개의 비도가 그의 허리춤의 요대(腰帶) 속에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어서 와라. 곰탱이!"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30냥!
3장 : 30냥!
언제 인상쓰며 싸웠나 싶게, 두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거패를 맞이했
다.
"이거 황루에서 주더라."
태웅이 야혼 앞으로 조그마한 꾸러미 하나를 던졌다. 방금 손님을 보
내준 대가였다. 야혼이 푼돈을 버는 또 한가지 방법이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부추겨 주루를 소개시켜주고 구전을 받아먹는 일 또한 그에
게는 짭짤한 부업이었다.
"어제는 뭔 일 있었냐?"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쉰 적이 없었던 야혼이 나오지
않았기에 묻는 말이었다.
"어제? 아니 그냥 좀 쉬고 싶어서."
여호치에게 맞아서 거시기가 엉망이 되었다는 말은 절대 할 수가 없
었다. 해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거였다.
녀석들이 알게 되면 며칠 내에 이곳 서대시전에 전부 소문이 날 터
였다.
"근데 아직도 기루에서는  안 받아주냐?"
"그 때문에 미치겠다. 완전히 터져버릴 지경이다 지금. 육십대 할머닐
보아도 벌떡거린다."
태웅 역시 추기영과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두 달, 무려 60일 간을 계
집의 살 냄새를 맡지 못했더니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기루 한두 곳 엎어버리자니까?"
"야 새끼야. 사내 체면이 있지, 오입 못한다고 기루를 박살내랴?"
"그럼 미치겠다는 소릴 하지 말던지. 아니면 손장난을 하지 말던지,
날이면 날마다 손장난이나 하는 놈들이 체면은 무슨 체면이야, 임마."
"이건 분명 화소미 그년 짓인데. 증거가 없으니……."
그들도 화소미가 이런 소문을 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
만 정확한 물증이 없으니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포기한 줄 알았는데 아
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하오밀문에 들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하오밀문의 당주였기에 마음대로 잡아 족칠 수도 없어 더욱 답
답했다.
"이봐 오늘은 영업 안 해?"
태웅과 추기영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 일
단의 무리들이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저건 또 웬 화상이야?"
"오늘 영업은 끝났습니다. 굳이 시주를 하고 싶다면 저기 보이는 시
주함에다 넣어주시면 됩니다."
인상을 잔뜩 쓰는 야혼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추기영이 다
가온 무리들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하! 이놈 웃기네. 혹시 염불이나 욀 줄 아냐?"
"아미타불! 어디서 오신 분인지……."
누구인지 왜 모르랴. 이번에 저잣거리를 새로 맡게된 하오밀문의 향
주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단지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불문
율이 있었기에 참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추기영의 겉모습은 완벽한 중이었기에, 접대하는데 있어서는 일
행 중 가장 정중한 모습을 보인다. 일행을 제외하고는 절대 화를 낸다
거나 상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마치 득도한 고승처럼 말이다.
"나 육덕칠이다. 지금껏 동문 쪽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이번에 이곳으
로 영전을 해왔다."
그 또한 개봉사괴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개봉에서 감히
하오밀문에 반항하는 놈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언젠가 손을 봐주겠
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는데 마침 서대시전으로 발령이 난 거였다.
"나무관세음보살.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시주님. 그럼 영전기념으로
저기 보이는 시주함에 축의금이라도 좀 넣어주시는 게……."
"이 자식이 말끝마다 지랄타불이로세. 영전은 내가 했으니 축의금은
너희들이 내야지 왜 내가 돈을 내냐 임마, 안 그러냐?"
추기영의 볼을 쿡쿡 찌르며 이가 보이게 웃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만 해도 꽤 기대를 했었는데 막상 대하고 보니 전혀 아니었다.
동문 쪽에 있는 애들보다 훨씬 약해 보였다. 이런 자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의아한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당주자리도 가능할지 모르겠군.'
육덕칠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지난 5년간의 하오밀문 골칫
거리를 정리하게 되면 그 공은 전부 자신의 것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개봉사괴는 신고식 겸해서 육덕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희생물로 선
택했던 거였다.
"형님! 적당히 손봐주고 갑시다. 이런 아이들 데리고 무슨 장난입니
까."
거의 태웅과 덩치가 비슷한 장한이 육덕칠을 향해 말했다. 그 또한
동문 쪽에 있던 거양(巨陽)이라는 자로 이번에 육덕칠을 따라서 함께
온 인물이었다.
거양 역시 육덕칠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세 놈 중 싸움을 할만한 자는 곰같이 생긴 놈 한
명밖에 없었다. 지금 육덕칠과 말을 나누고 있는 놈은 왜소한 체격에
한 주먹이면 나가떨어지게 생겼고, 가만히 앉아서 콧구멍을 후비고 있
는 놈은 상판이 계집처럼 생겼다.
싸움꾼이면 절로 풍기는 투기자체가 없는 이런 자들에게 저잣거리를
내주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시주님은 제가 중이라는 걸 못 믿으시는 모양인데. 그럼 이게 뭔지
아십니까?"
추기영이 들고 있던 목탁을 육덕칠의 가슴 앞으로 내밀었다.
"이런 썩을 놈이. 그건 목탁이잖아 임마! 목탁만 있으면……."
퍼억!
그러나, 육덕칠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가슴 앞에 있던 목탁이 허공
을 가르며 턱을 강타해버린 것이었다.
창졸간에 턱이 부서지면서 뒤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이런 죽일 놈들이!"
육덕칠이 당한 모습을 본 하오밀문의 인물들이 우르르 세 사람을 향
해 달려들었다.
"싸움이다! 싸움 났다."
주변의 장사치들과 오가는 행인들이 급속하게 몰려들어 둥근 공터를 형성했다.
세상사 중에 가장 재미있는 일이 남들 오입하는 것과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지금 싸우고 있는 자들은 서대시전에서 가장 개차반들인 개
봉사괴였으니. 둥근 원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벌써 혀를 차
는 소리가 들려왔다.
멋모르고 개봉사괴에게 시비를 거는 자들에 대한 동정이었다.
와장창!
야혼의 살림밑천인 좌판이 한순간에 부서지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추기영에게 달려들던 거양이 그가 피하는 바람에 좌판을 덮쳐
버린 것이었다.
"이런 썅놈의 새끼들이 아예 죽으려고 지랄발광을 하는구먼."
상스러운 욕을 뱉어낸 야혼이 몸을 살짝 피하며 바닥에서 무엇인가
를 주워들었다.
언제나 좌판 밑에 넣어두고 있던 도(刀)였다.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
도축장에서 사용하는 팔 길이 크기의 직도(直刀).
그러나 직도를 사용하기 위함이 아닌 듯, 부러진 나뭇조각 몇 개를
주워들더니 끝을 뾰쪽하게 다듬으며 하오밀문 제자들의 공격을 살짝
살짝 피하고만 있었다.
이윽고 다섯 개의 나무 송곳을 만든 야혼이 구석으로 도를 던져 놓
으며 히죽 웃었다.
"야, 곰새끼, 이름이 뭐냐?"
자신에게 달려드는 거양을 보고 물었다.
"개자식 일단 네 놈을 잡고 나서 가르쳐주겠다."
처음부터 가장 약해 보이는 야혼을 노렸는지 거패를 비롯한 다섯 명
의 인물들이 거칠게 달려들었다.
"내가 제일 만만해 보인다 이거지?"
허리춤에 네 개의 송곳을 찔러 넣은 야혼이 오른 손에 쥐고 있던 하
나를 가장 앞서 다가오는 거양의 어깨를 가리켰다.
"썅놈의 새끼"
바닥에 걸죽한 침을 뱉어낸 후,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나가던 야혼이
얼굴로 내질러 오는 주먹을 어깨 쪽으로 흘리며 처음 목표로 잡았던
거양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나무송곳을 힘차게 박아 넣었다.
"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야혼의 고개 또한 한쪽으로 사정없이 돌아
갔다. 나무송곳을 찔러 넣는 순간에 다른 녀석의 주먹이 얼굴에 작렬해
들었던 거였다.
"약해!"
고개를 다시 원래의 위치로 휙 돌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허리춤에
있는 송곳을 하나 뽑아들어 날아오는 다리를 향해 힘차게 밀어 넣었다.
퍼억!
다시 등위에 느껴지는 충격에 몸을 한바퀴 굴리며 일어섬과 동시에
왼손에 들고 있던 송곳을 다른 한 놈의 다리를 향해 찔러버렸다.
그가 노리는 부분은 오직 다리와 팔이었다. 죽이려고 마음을 먹으면
못할 것도 없지만 하오밀문과 관계를 고려해서 참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씨팔새끼들이 안 그래도 혈압 올라 죽갔구만 어디 와서 행패
를 부려 개새끼들아."
입가에 새하얀 미소를 머금은 야혼은 한마디로 성난 황소 같았다. 하
오밀문 인물들의 주먹이 날아오던지 말던지 무조건 원하는 놈을 향해
돌진해 들었다.
도살장에서 일을 하다가 생긴 그의 싸움버릇이었다.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피할 수 있는 주먹은 피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맞으
면서 상대에게 접근하여 나무송곳을 박아 넣었다.
보통 때의 싸움방식이 그럴진대 하물며 지금은 여호치 때문에 근 한
달간을 여자를 굶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개봉사괴 중 세 놈의 공통점은 밥은 굶어도 여자는 절대 굶고 살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졌는데 세 사람이 공히 두 달에서 한 달간 여자알
몸 구경을 하지 못했다. 육덕칠을 비롯한 서대시전으로 새롭게 온 그의
부하들은 임자를 만난 꼴이었다.
"없어 새끼야."
다시 송곳하나를 뽑아들고 상대를 물색하는 야혼의 귓전에 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상대가 없었다. 야혼이 셋을 처리하는 순간에 추기영과 태웅이
세 명씩을 정리해버렸던 거였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아랫도리를 붙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개봉사괴의 마지막 인물인 옥면호리 여호치가 나타나 뒤쪽에서 두
놈의 낭심을 걷어차 끝내버렸다.
"색시, 오늘은 그 얼굴이냐?"
야혼이 웃는 얼굴로 여호치를 쳐다보았다. 속으로야 이를 바득바득
가는 한이 있더라도 겉으로는 웃어야 한다. 사실 개봉사괴 중에 가장
강한 이가 바로 여호치였다. 그녀가 익히고 있는 경공 때문이었다.
서로의 삶에 대해선 도통 말이 없었기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방면은 몰라도 경공(輕功)과 보법(步法)만큼은 그녀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치고 도망가면 잡을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살만 한가보네? 쌈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면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은 알 수 없지만 야혼의 색시라는 말에도
별 대꾸 없이 흘낏 아랫도리를  쳐다볼 뿐이다.
그녀가 면구를 사용하는 이유는 소매치기라는 직업의 특성 때문이었
다. 수십 개의 면구를 가지고 있어 같은 동료인 개봉사괴조차도 본 얼
굴을 알지 못한다. 다만 야혼만이 그녀의 목욕하는 걸 훔쳐보다가 얼굴
을 보았을 뿐이었다.
아침에 해어졌다 하더라도 그녀가 먼저 알은 체를 하지 않으면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여호치의 역용술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말이었다.
야혼이 면구를 구입하게 되었던 이유도 사실 그녀 때문이었다. 아울
러 변장하는 기술도.
"이곳에 가만히 죽치고 있는데 저 새끼들이 먼저 와서 달려들었다.
우린 살기위한 발악을 했을 뿐이고."
"살기위한 발악이 저거냐?"
여호치가 추기영을 가리키며 인상을 썼다.
추기영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지금까지도 육덕칠을 앞에 목탁을 들이
밀고 있었다.
"아미타불! 시주 이것이 무엇입니까?"
"목탁입니다. 제발……."
겁에 질린 육덕칠이 앉은걸음으로 물러나며 더듬거렸다. 입안이 온통
엉망으로 부서져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대답을 해야했다. 계속해서 같
은 말만 물어오면서 목탁을 휘둘러 대고 있었다. 그런데 단순한 목탁이
아니었다. 재질이 철로 된 철탁(鐵鐸)이었던 것이다.
처음 맞았을 때 바로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충격이 왔고 그 다음
부터는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퍼억!
여전히 같은 자리인 턱을 향해 철탁을 휘둘러 버린 추기영이 다시
또 물었다.
"시주! 이것이 무엇입니까?"
"저 병신 목탁하고 철탁도 구분 못하는 녀석이 무슨 향주라고."
지금껏 추기영이 주어 패고 있는 이유였다.
"철. 철탁입니다."
야혼의 말을 들은 육덕칠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이번에 한방 더 맞
으면 몇 개 남아있지 않던 모든 이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감 때문
이었다.
"맞습니다. 시주. 이건 철탁입니다. 철탁, 나무괸세음보살!"
철탁이라 인정해주어서 고맙다는 듯 철탁을 두드리며 불호를 외는
품새가 정말 중처럼 보였다.
"육승! 그 철탁에 피 좀 닦아라."
"본승의 임무는 이 철탁을 혈탁(血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해서 닦
을 수가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이젠 쌍면연작께서 일보시기 바랍니
다."
이래서 괴짜라는 말이 나왔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성격들. 어
찌 보면 정신이 나간 자들의 행동 같고 달리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사
람으로 행동을 하고 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철탁이라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육덕칠의 안면
을 망가트려 버린 것이었다.
"허억!"
쌍면연작이란 추기영의 말에 육덕칠이 나지막한 비명을 질렀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더구나 쌍면연작이라 하였다.
개봉사괴 중 가장 독종이란 놈에게 일을 보라니.
"이제 내 좌판 값을 계산하자고."
한쪽에 던져두었던 도(刀)를 들고 육덕칠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야, 덩치 너도 일루와."
가장 먼저 좌판을 덮쳤던 녀석을 부른 야혼이 빙긋 웃으며 도를 툭
툭 쳤다.
"이 손가락이 아까 우리 보현보살의 볼을 건드렸던 그 손가락 맞
나?"
보현보살이란 술과 고기를 먹는 파격적인 보살인데 야혼은 추기영을
보현보살로 부르곤 한다.
"다행이다. 손가락이 전부 열 개가 있어서."
"무슨…… 으아악!"
야혼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육덕칠이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쉿! 사람들 보잖아 임마."
육덕칠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부러트려버린 야혼이 빙긋 웃으며 나
지막이 말했다.
야혼의 잔인한 행동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고개를 내두르며 멀어
져갔다. 지금부터는 볼 수가 없다는 뜻이다. 야혼이 하고 있는 짓을 보
면 저녁 먹은 게 넘어오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기에 서둘러 자리를
피해버린 것이었다.
"형님! 잘못했습니다. 제발……."
"나도 알아. 그래서 벌주는 거고."
부드러운 얼굴로 육덕칠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는 가운데 손
가락을 천천히 손등을 향해 젖혀가고 있었다.
뚝!
"아악!"
"시끄럽다 그랬잖아 개자식아!"
고통을 이기지 못한 육덕칠이 고함을 지르자 그의 손을 땅바닥에 가
져다 붙이더니 이미 부러져 있던 손가락을 향해 들고 있던 도(刀)의 도
환을 이용해서 사정없이 짓이겨버린다.
"으으으! 으으으!"
"조용하니까 서로 좋잖아. 어른이 되어서 울면 되겠어? 뚝!"
"제발 형님……."
육덕칠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손가락이 부러지는 아픔보다 웃고
있는 야혼의 모습이 더 무서웠다.
투기가 없는 자들이 아니었다. 이자들의 몸에선 살기 자체가 갈무리
되어버렸다. 마치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기세
를 감출 수 있는 것처럼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은 감히 상대가 될 수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무공을 익힌 무인
이 아닌 싸움꾼으로서는 최고의 경지인 것이다.
"나는 21살밖에 안됐어 임마."
뚜둑!
두 개의 손가락이 동시에 부러지자 육덕칠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버렸다.
그러나 야혼의 행동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른손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엄지손가락을 부러뜨린 다음 다시 땅바닥에 대며 도를 들어
올렸다.
기절해 있는 놈의 손가락을 짓이겨버리겠다는 의미였던 거였다.
지금껏 야혼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거양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
었다.
"설마……."
거양이 두려운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보통 사람은 상대가 기절
해버리면 더 이상 손을 쓰지 않는데 앞에 있는 저자는 전혀 그럴 마음
이 없는 듯했다.
바닥에 손가락을 차례로 펴놓더니 그곳을 향해 도를 사정없이 내리
찍어버리고 있다. 더군다나 육덕칠의 손가락을 짓이기면서도 눈동자는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은가.
"아-악!"
몇 번에 걸친 절구질에 혼절해 있던 육덕칠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
며 다시 깨어났다. 기절했던 자를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하는 방법 또한
기절을 시킬 때와 똑같은 방법이었다.
"응? 빨리 왔네. 나는 좀더 쉬었다가 올 줄 알았지."
정신을 차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육덕칠을 쳐다보던 야혼이
이번에는 그의 왼손 엄지손가락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이제 절반밖에 안 왔어."
아직 손가락이 다섯 개가 남았다는 말이었다. 여전히 곰 같은 놈에게
시선을 둔 채 육덕칠의 엄지손가락을 사정없이 젖혀버렸다.
"아악! 아악!"
육덕칠과 거양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제 그만하지 동생. 그 정도면 저들도 동생을 알아봤을 것 같은
데."
다시 검지 손가락을 거머쥐고 있는 야혼의 등뒤에서 간드러진 여인
의 음성이 들려왔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는 화소미였다.
육덕칠은 원래 이곳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 데리고 온 자였다. 그런데
오자마자 당주인 자신에게 인사도 없이 이곳으로 출동을 해버린 것이
다. 제딴에는 첫인사 선물로 개봉사괴를 굴복시켜보겠다는 생각으로 왔
음에 틀림없었다.
육덕칠의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왔는데 깨지다 못해, 오줌까지 지리
고 있다.
"어? 큰 색시도 왔네?"
화소미를 힐끗 쳐다본 야혼이 다시 하던 일을 마무리 짓겠다는 듯
육덕칠의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아이! 동생 그만하고 우리 말로 하자고 말로."
"30냥."
'이런 도동놈 새끼.'
야혼의 어깨를 잡고 있던 화소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서른 냥이라
니 일가족이 6달을 먹고 살 수 있는 거금을 좌판 값으로 달라는 것이
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널빤지를 주어다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 시
장 누구랄 것 없이 전부 알고 있다.
"싫음 말고."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게 하지."
'개자식! 며칠만 기다려라.'
"근데, 덤으로 한번 주면 안되나?"
빙긋 웃으며 화소미의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팽팽하게 당겨진
옷을 당장에라도 찢고 튀어나올 듯 그녀의 가슴은 상당했다. 그녀 또한
야혼의 기준에 합당하는 여인이었기에 기녀와는 절대 자지 않는다는
불문율마저 깨트리게 만든 여인이 바로 화소미였던 것이다.
여호치에게 빼앗긴 야혼의 여인들이란 책자 가장 앞쪽 다섯 줄에 기
록될 여인의 한 명을 화소미로 점찍어 두었었다.
"호홍! 미안해서 어쩌나 나는 애들하고는 같이 안 자는데. 설령 내가
허락한다 하더라도 저기 있는 옥면호리가 허락하지 않은 것 같은
데……."
한쪽에서 도끼눈을 뜨고 야혼을 노려보고 있는 여호치를 가리키며
화소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보란 듯이 야혼 앞으로 가슴을
바짝 디밀며 요란하게 흔들어댄다.
"돈이나 줘!"
아랫도리에서 후끈한 열기가 치미는는 것 같아 재빨리 돈을 받아들
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에 또 놀러와!"
야혼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던 화소미가 고개를 돌
려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한심한 노릇이었다. 동문에서 난다긴다하는 놈들 10명이 전부 떡이
되어있었다.
"빨리 가서 치료받아 병신들아."
부하들에게 바락 소리를 지르며 횡하니 몸을 돌려 청빈루 쪽으로 걸
음을 옮겼다.
'네 놈이 동지(同知) 딸을 건드렸다 이거지? 우리가 모를 줄 알았더
냐? 내일부터 한번 당해봐라.'
야혼의 비밀 방은 진작부터 알고서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기
다리고 기다리던 기회를 잡고 말았다.
동지의 딸까지 겁탈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보고되었던 것이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우린 선수잖아!(1)
4장 우린 선수잖아.
으스름한 새벽, 야행복처럼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을 걸친 인물이 빠른
속도로 강변을 질주하고 있었다.
도축장으로 일하러 가는 야혼이었다. 언제나 그의 일상은 변함이 없
다. 해뜨기 전에 일어나 간밤에 갈아두었던 도를 챙겨들고 일터까지 달
음질을 한다. 그만의 운동법이었다.
서대시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게 강건한 신체였다. 심
심하면 시비가 붙는 술꾼들과, 하오밀문의 등살에 견디기 위해서는
최고의 몸을 만들어야했다. 더하여 여인을 후리는 작업을 위해서도
군살 없는 탄탄한 몸매를 유지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거르지 않았던 일이 바로 아침의 달음
박질이었다.
한번씩 휘휘 휘두르는 도(刀)에서 사뭇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음! 저 녀석인가? 무공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저런 속도를 보이
다니 놀랍군."
멀리 야혼의 달리는 모습을 쳐다보며 한 인물이 나지막한 탄성을 발
했다.
고결함, 나이를 알 수 없는 노인의 몸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기운
이었다. 마치 청명한 가을 하늘같은 투명한 기운이 노인의 전신에서 무
럭무럭 피어올랐다.
일부러 하는 행동이 아닌, 은연중에 풍기는 기운이 만인을 압도하는
자연지기(自然之氣)였다.
"소는 어떻게 잡는지 한번 볼까?."
이미 야혼에 대해 알고 있는 듯, 빙긋 미소를 머금은 노인이 몸을 움
직였다.
스스스!
엄청난 광경이었다. 야혼이 뒤를 따라 움직이는 노인의 발은 바닥에
닿지를 않았다. 약 세 치 정도 뜬 상태에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극강한 고수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초상비(草上飛)의 경공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자이기에 초상비라는 절대 경공을 저렇게 자연
스레 펼칠 수 있는지. 가히 경악할 지경이었다.
정체 모를 노인이 뒤따르는 것도 알지 못한 야혼은 강변 근처에 있
는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이 그가 오전 일을 하는 개봉 도축장이었다.
개봉은 야혼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10살 무렵 이곳에 정착
하여 벌써 10년 세월이 흘렀다. 그가 도축장에서 일을 하게 이유도 단
순했다. 항상 소를 잡는 곳이기에, 이곳에서 일을 하면 밥을 굶지 않겠
다는 생각에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직업이 되어버렸다.
"어서 오너라. 또 옥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다."
막 안으로 들어서는 야혼을 반갑게 맞아주는 노인. 이곳 도축장의 최고
실력자인 이정(李丁)이었다.
야혼에게 소 잡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에이, 영감님도, 이젠 맘잡았다고요."
야혼에게 있어서 옥이란 이곳 도축장만큼 친숙한 곳이다. 어제처럼
하오밀문의 인물들과 싸움이 있을 때야 별 문제가 없지만 일반인들과
싸움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따금 돈을 잃었던 자가 사기라고 강짜를 부리곤 하는데 그때마다
짓이겨놓는 그의 버릇 때문에 수시로 옥을 들락거렸다.
도축장에 일하는 사람들은 야혼이 나오지 않으면 으레 옥에 있겠거
니 라고 여길 정도이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오늘 야혼의 모습은 달랐다. 여자를 후리고 육덕칠의 손을 잔
인하게 짓이기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할아버지 앞에 선 손자의 모습으로 이정을 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축장에 처음 왔을 때 야혼을 거두어준 사람이 바로 그였던 까
닭이었다.
"빨리 준비해라. 어제 네 녀석이 안나오는 바람에 일이 많이 밀렸
다."
"예!"
도축장에 와서 야혼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바닥을 청소하는 일이다.
백여 장 떨어진 강에서 물을 길어와 오백 평이 넘는 바닥을 전부 청소
하고 나면 해가 훌쩍 떠올라 아침나절이 된다.
후다닥 아침을 뜨고, 소를 잡는 일을 시작하는데, 야혼의 주업이었다.
"이놈아 왜 자세가 어정쩡하냐. 소한테 받쳐죽고 싶냐?"
도(刀)를 들고 호흡을 고르는 야혼의 귓전에 이정의 호통이 들려왔
다. 여호치에게 맞은 아랫도리가 아직도 얼얼해서인지 자세가 약간 흐
트러져 있었던 거였다.
도축장에 들어온 소는 이미 밭에서 일을 해주는 말 잘 듣는 짐승이
아니다. 죽음을 예감해서인지 잔뜩 겁에 질려 있다가도 한번 발악을 하
게되면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다. 콧김을 내뿜고 달려드는 소는 어지간
한 맹수보다 더 거칠고 광폭하다.
그래서 도살을 할 때는 단 일도(一刀)에 소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기운이란 몸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머릿속에서, 마음에서 나온
기운이 진정한 기운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도(刀)를 벼릴 때를 생각해
라. 제대로 된 날을 세우기 위해 온 정신을 쏟을 때 그때의 마음으로
도를 직시하란 말이다."
"흐-흡!"
깊숙이 숨을 들이킨 야혼이 가슴 앞에 세운 도(刀)를 응시했다. 도의
길이는 전부 3척이다. 손잡이가 1척이고 나머지 2척이 날로 되어있는
직도의 끝은 사선으로 뾰족하게 되어있다.
그 끝으로 황소의 미간을 찌르게되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데 그 위
치가 문제였다. 소의 미간에서 검지손가락 한마디 정도 위, 그 지점이
정확한 위치이기에 오직 그곳만을 찔러야한다.
그 외의 장소는 소를 맹수로 만드는 곳일 뿐이었다.
원래는 소 한 마리가 들어가면 딱 들어맞는 우리에서 소의 얼굴을
고정시켜두고 작업을 하는데 귀찮은 일도 많고, 공포에 절은 소가 배설
을 수시로 하는 바람에 청소하기도 귀찮아서 바로 잡아버리곤 한다.
무릇 풀어놓은 상태에서 소를 잘 잡는 도백이 최고의 도백이라는 것이
다. 그런 면에서 보면 비천한 신분의 도백들이지만 이곳 또한 인간들이
서로 경쟁하며 살아가는 곳임에는 분명했다.
"자 들어간다!"
가장 안쪽에서 호흡을 고르던 야혼의 귓전에 인부 한 사람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보통 작업은 가장 안쪽 후미진 곳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곳에서부터 먼저 들어온 소를 한 마리씩 도축을 해 나가는 것이었다.
"타핫!"
먼저 들어온 소를 향해 달려나가며 수중에 도(刀)를 순식간에 찔러
넣었다.
도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고통 없이 빠르게 죽여주느
냐 하는 것이다. 비록 하찮은 짐승들이지만 공포심을 느끼지 못하도록
해주는 게 도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마치 한 마리의 늑대처럼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야혼의 몸이 움
직여 다녔다.
"호호! 대단한 청년이구먼. 이번엔 제대로 일꾼을 찾은 것 같은데…
…."
조금 전 야혼을 따라왔던 백삼의 노인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그가
보기에도 야혼의 움직임은 대단했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다는 사
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보법(步法)도 자연스럽고……."
소를 찌르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 다니는 야혼의 발놀림을 보고 자
연스러운 보법이라 하였다. 이미 어느 경지에 올라 있는 무인의 눈으로
보고 말하는 것이기에 결코 허언은 아닐 터였다.
자신만 모를 뿐이지 그의 몸놀림은 이미 삼류무사의 수준은 벗어나 있었다.
"좋아! 한꺼번에 달려드는 적은 어떻게 처리하나 한번 볼까."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노인이 밖에 대기하고 있던 소들을 향
해 싸늘한 기운을 발산했다.
꾸우! 쿠억!
"왜 이래 이거, 소들이 미쳤다. 야혼 피해라!"
안쪽으로 소를 밀어 넣던 인부가 고함을 지르며 도망쳤다.
노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살기를 감지한 30여 마리의 소들이
공포에 질린 채 발광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뒤쪽에서 다가오는 기운이었기에 소들이 갈 곳은 안쪽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우리를 박차고 야혼이 있는 곳으로 돌진해 들었다.
"이런 썅!"
한꺼번에 달려드는 소를 발견한 야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
왔다. 자칫 잘못하단 소에게 받혀죽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정(精)은 곧 생명력이다. 즉 온몸에서 나오는 힘을 곧 정이라 한다.'
"이건 또 뭔 소리여."
당혹스런 얼굴로 달려드는 소를 쳐다보던 야혼의 귓전에 창노한 음
성이 들려왔다.
"썅! 미친놈 새끼, 할 일이 없어서 이런 장난을 치냐?"
이미 귓전에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작금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얼 원하고 저지른 일인지, 그것까지는 알 순 없
지만 우선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노인의 말을 일절 무시하고 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조금이나마 여
유공간이 있을 때 소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기(氣)는 곧 호흡과 일치한다. 온몸에서 나온 힘을 사용함에 있어서
기를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서 약하게 또는 강하게 만들어 낼 수
있다.'
"개 같은 소리하지 말아!"
눈을 치뜨고 달려드는 한 마리의 소를 향해 쾌속하게 일도(一刀)를
찔러 넣은 야혼이 재빨리 몸을 굴려 다른 소의 뿔을 피했다. 그리고 일
어섬과 동시에 바로 다시 한번 도를 쭉 내밀었다.
'그럼 신(神)은 무엇이냐. 바로 마음이다. 힘을 쓰고자 하는 마음, 숨
을 쉬고자 하는 마음. 모든 일을 행하기 전에 생각하는 마음을 신이라
한다.'
"크억!"
날아오는 소의 뒷발을 피하기 위해 몸을 최대한 틀었으나 완벽하지
못했는지 옆구리에 강한 고통이 밀려왔다.
"이런 썅놈의 소새끼들이!"
눈동자가 획 돌아버린 야혼이 무작정 소를 향해 돌진했다. 원래 그만
의 싸움방식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피하지 않고 달려들어가며 적을
치는 방식.
'지금까지 말한 정기신(精氣神)을 하나로 합치면 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
이젠 소의 미간이고 뭐고 없었다. 양손으로 도를 틀어쥐고 걸리는 소
들을 잘라버리고 있었다.
소의 몸에서 솟구친 피로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돌진
해오는 소를 피해 옆으로 몸을 돌린 야혼은 도를 아래를 향해 세웠다.
"목을 자를 때는 한번에 모든 힘을 실어야 한다. 목뼈에 칼이 박히면
바로 끝장이라는 걸 명심해라."
이정이 야혼에게 해 준 말이었다. 피치 못할 일로 소의 미간을 노릴
수 없을 경우에 소를 죽이는 방법이라 했었다.
철벅!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소머리를 주워들어 뒤쪽에서 달려드는 놈의
면상을 향해 던짐과 동시에 그놈을 향해 뛰어들었다.
"타하!"
소의 미간을 향해 도를 찔러 넣은 야혼이 그 탄력을 이용하여 허공
으로 솟구쳐 올라, 옆에 있던 소를 향해 아래로 떨어지면서 목을 잘랐
다.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회전을 하며 두 다리를 잘라버리고, 앞으
로 무너지는 소의 목을 아래에서 위로 잘라버린다.
"헛헛! 정기신(精氣神)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 이미 터득하고 있었
구먼."
마의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무공의 기본인 정기신을 이미 터득
하고 있었다. 굳이 책으로 배우지 않아도 이곳에서의 삶이 깨닫게 했던
것이다.
정기신을 하나로 만든다는 건 별 것 아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
기 위해 휘두른 검(劒)이나 도(刀)는 마음을 싣게 되어있다. 지금 야혼
의 상태가 그러했기에 별다른 가르침이 필요 없었다.
"일단은 합격이구나."
정신없이 몸을 굴리며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는 야혼의 모습을 주시
하던 노인이 몸을 돌렸다.
도를 들고 나오는 이정 때문이었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는 그의
몸에서 삼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예인(藝人)의 경지에 달해있는 사람
이었다.
예인(藝人).
내공이 강한 무공의 고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한가지 방면에 평생
을 매진한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경지에 달하게 된다. 그런 사
람에게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기운이 풍겨 나오게 되
고 타인을 제압하는 힘의 원천 되는 것이다.
단 일 초의 상대라면 웬만한 고수보다 더 강함을 보일 수 있는 그런
자들을 가리켜 예인이라 부른다.
노인의 짐작대로 이정이 나오자 상황이 바뀌었다. 도(刀)를 가만히
들고만 있음에도 소들이 다가서지 못했다.
"뭐죠?"
야혼이 놀란 표정으로 이정을 쳐다보았다. 똑같은 소이건만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나타났다.
"마음이다."
이정에게서는 뜻밖에 간단한 대답이 나왔다. 광폭하게 날뛰는 소를
제압하는 방법이 강력하게 휘두르는 도가 아닌 마음이라 하였다.
"그게 정기신이 하나되는 거요?"
"호! 정기신이란 말도 아느냐? 그런 것 필요 없다. 그냥 모든 생각을
도(刀)에 집중하면 된다."
야혼에게 슬쩍 미소를 지은 이정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단순했다.
소를 가만히 직시하다 들고 있던 도를 미간을 향해 천천히 밀어 넣으
면 끝났다.
경이로움이었다. 이정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은 야혼도 알고
있었다. 60대의 힘없는 노인네가 단지 마음만으로 소를 제압해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느냐. 도(刀)에 마음을 실어야 한다고. 소를
죽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편하게 보내준다는 생각으로 도를 휘둘러야
한다고. 많은 수가 한꺼번에 달려든다 하여 마음이 흔들릴 필요가 없는
게야."
묘한 의미의 말이었다. 분명 소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할진대 많은 수
라 하였다. 끝맺는 말은 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 보거라."
자신과 똑 같은 동작으로 도에 집중하는 야혼을 향해 말을 건넨 이
정이 몸을 뒤로 뺐다.
구어억!
순간 십여 마리 남은 소들이 야혼을 노려보며 콧김을 품어냈다.
'나는 지금 도를 갈고 있다. 소를 쳐다볼 필요가 없다. 칼을 갈다가
가장 먼저 오는 놈의 미간을 향해 밀어 넣으면 된다.'
야혼이 마음속으로 도(刀)를 벼리기 시작했다. 도의 날을 세우는 작
업은 옥에 들어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쉬지 않았던 일이
었다.
이정의 지시로 하게 된 일이었지만 하루 중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시간이 도를 벼리는 때였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소를 베어야한다.
응시하고 있던 도면에 달려드는 소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동시에 야
혼의  도가 허공을 향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의 미간에 도가 찔러 넣은 상태 그
대로 뒤쪽으로 물러나며 다른 소를 찾았다.
미간을 찔렸던 소가 쓰러지자 왼쪽에서 달려들던 소를 향해 도를 들
어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발을 구르며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황
소가 우뚝 멈춰선 상태로 야혼을 직시하고 있었다.
마치 달려들 것인가 아니면 물러설 것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이놈아 기회가 생겼으면 바로 보내야지 뭐하고 있느냐?"
몇 발짝 물러나 있던 이정이 야혼의 오른쪽으로 다가오며 도를 찔러
넣었다. 아직은 야혼의 경지가 미숙해서인지 정면에 있던 한 마리만 멈
춰 섰을 뿐 다른 쪽에 있는 소들은 계속해서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제 너도 예(藝)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언제나 지금의 그 마
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소들을 향해 다가가면서 이정이 말했다. 예(藝)의 경지라 하였
다. 절대적인 무공을 지니고 있던 마의노인이 했던 그 경지를 이정 역
시 알고 있었다.
"들어가서 씻어라. 이곳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리시키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이제 네 녀석의 몸에서 풍겨나오던 살기는 거의 갈무리가 되었다.
아마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제 기본일 뿐이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너의 성취는 수배는 빨라질 게다. 무인의 길로 들어
선다면 말이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 야혼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야혼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기술을 이용해서
소를 흥분시킨 상대를 찾기 위해 나왔으나 아무도 없었다.
"씨팔놈! 벌써 발라버렸네."
"씻고 나서 고기나 가지고 들어가거라."
"알겠습니다!"
하루 일당을 고기로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온 야혼 앞엔 뜻밖의 소식
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호치에게 계속 방해를 받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의 오후 일과
는 여자를 후리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나갈 수가 없었다. 아니 집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사방 천지에 쫙 깔려 있는 관병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들고 있
는 초상화는 다소 어색하기는 했지만 분명 자신의 얼굴이었다.
"씨팔, 되는 일이 없어."
재빨리 몸을 돌린 야혼이 자신들만이 알고 있는 장소로 몸을 날렸다.
나머지 일행은 전부 그곳에 있을 터였다.
한 시진 정도를 달려 개봉 외각으로 나온 야혼이 도착한 곳은 강가
에 있는 조그마한 언덕이었다. 그 언덕 아래쪽의 바위틈의 작은 토굴이
그들만의 비밀장소였다. 사방을 예리하게 살피던 야혼이 재빨리 바위틈
으로 몸을 숨겼다.
"어서 와라! 이 썩을 놈아."
태웅이 인상을 구기며 야혼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우리까지 전부 공범으로 몰리게 했냐,
새끼야."
"무슨 소리야?"
"몰라?"
"그래 임마, 아침부터 죽을 뻔했구먼. 집 앞에 가니까 병졸들이 좍
깔려서 너희들이 무슨 사고친 줄 알았지."
"우리가 아니고 너다, 너 새끼야."
태웅이 게거품을 물며 야혼에게 삿대질을 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도 유분수지 볼일 본다고 밖으로 나와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관아에
끌려가 물고를 당하고 있었을 터였다.
"아미타불! 연작시주. 도대체 어떤 염뱅할 짓을 저질렀는지 전부 까
발려 보시게나."
"무슨 일은 임마. 가만, 그일 때문인가……"
"왜?"
"응? 그때 작업을 했었거든. 그러니까……."
"너 참, 편한 놈이다.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도 맘편하게 돌아다니는
것 보면."
태웅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일반 처자도 아니고 동지(同知)의
딸을 겁탈하려다 미수에 그친 녀석이 태연하게 일을 나오다니.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적해야할 놈이 아닌가.
"만일 그 때문이라면 연작시주는 이제 큰일났습니다. 그 튼튼하고 실
한 물건을 잘리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추기영이 안됐다는 표정으로 합장을 하며 야혼의 아랫도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제 이 철탁은 연작시주에게 필요한 물건이 되겠습니다, 그려. 연
장이 사라지면 번뇌가 없으니 불심에 정진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부처로 거듭나시길……."
"미친 새끼 지랄하네. 그럼 너는 목탁을 두드리는 놈이 왜 오입질을
못해서 지랄이냐."
"그거야, 여시주들이 그곳이 가렵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
구나 불심에 정진하는 기본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따르는 것뿐이라네. 아미타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
"어떻게 하기는, 소문낸 년을 찾아야지."
야혼의 얼굴에 싱긋 미소가 어렸다. 관아에서 죄인으로 찾고 있다는
말도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지 오히려 밀고한 당사자를
찾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아미타불! 그 젖퉁이 큰 년이 범인이 분명할 거네."
"맞다. 동지 딸년이 당했다고 말했을 리는 없고 하오밀문에서 알린
게 분명하다."
"썅년……."
야혼이 희미하게 웃으며 태웅을 쳐다보았다.
제  목:[하오대문] 하호대문(6)-우린 선수잖아(2)
삼 경.
서대시전에 있는 하오밀문 서부지부의 담을 넘어가는 삼 인의 인물
이 있었다.
"아미타불! 너무 조용하네 그랴."
"당연히 조용해야지, 안 그러면 바로 저승인데."
야혼의 얼굴에 진득한 살기가 어렸다. 비록 서로가 경쟁관계에 있지
만 상대를 밀고하는 짓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곳이 서대시전의 불문
율이었다. 하오밀문에서 먼저 그 불문율을 어긴 것이다.
팟!
정원을 가로질러 대청에 들어선 일행을 환한 불빛이 켜지며 맞이했
다. 이어서 들리는 화소미의 음성.
"어서들 오세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환한 미소를 머금은 화소미가 야혼 일행
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개봉사괴가 오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 주변엔 하오밀문의 부하들은 보이지 않았
다.
"이런 썅년이……."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동생은 벌집이 돼."
화소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위층 이곳저곳에서 활시위를 당기
고 있는 하오밀문 문도들이 나타났다.
"호! 활을 준비했다 이건가. 저것 몇 대 맞는다고 죽지는 않겠지?"
팍! 팍! 팍!
한발 나서는 야혼의 발 앞에 세 대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병신 새끼들, 쏘는 델 가르쳐 줄까? 여기야, 이 마빡 한가운데를 정
통으로 노려. 어두워서 안 보이나?"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은 야혼이 들고있던 도로 이마를 살짝
찔렀다.
"자 됐다. 이젠 잘 보이지?"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상처 주변에 동그라미를 그린 야혼이,
이 층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는 도를 들어올리며 화소미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저런 미친…….'
거의 자해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 야혼의 모습에 화소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녀석은 이미 죽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경상쯤이야
당해도 상관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는 게다.
'우리에겐 필요한 사람은 네가 아니다, 야혼. 적당한 징계는 상관없다
했단 말이다.'
이내 인상을 싸늘하게 굳힌 화소미가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려
는 순간 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뒈지려면 연장 너 혼자 있을 때 해라 새끼야. 화 당주, 바라는 게
뭐요?"
앞으로 나서려는 야혼의 뒷덜미를 잡아버린 태웅이 화소미를 향해
물었다. 신중한 얼굴로 화소미를 쳐다보는 태웅은 서대시전에서 티격태
격하며 싸울 때와는 또 달랐다.
'호! 대력패왕지체(大力覇王之體)라 이건가?'
태웅의 모습을 대한 화소미의 눈에 일순 이채가 서렸다. 힘쓰는 것을
제외하곤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 같은 태웅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있
어 이런 상황을 조장했다는 사실을 바로 꿰뚫어 보았다.
그런 태웅을 향해 화소미는 대력패왕지체라 하였다.
의원들이 인간을 체질별로 분류하는 것처럼, 무림에서도 무인을 분류
하는 기준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 만들어진 정설은 아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림인의 일대기를 연구하다가, 절로 붙여진 이
름이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무림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수천구신체(授天
九神體)의 체질을 타고났다고 하였다.
수천구신체를 타고나면 그 명석함은 말할 것도 없고, 무공을 익히는
능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였으나, 몇몇 신체를 제외하고는 태
생적으로나 외형적으로 구분할 수 없으니 위대한 무인으로 죽기 전에
는 알 방법 또한 없다고 봐야한다.
결국 하늘에서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신체는 호사가들이나, 무엇인가
구분하기를 즐겨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말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수천구신체(授天九神體)는 분명 존재했다.
과거 초(楚)나라 패왕이었던 항우(項羽)와 삼국시대의 관우(關羽)가
대력패왕지체를, 백년 전 명교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성모 천애설(天愛
雪)이 광애성모지체를 타고났고 하였다.
그들 또한 후세 무림사가들에 의해 수천구신체의 한 명이라 명명되
었을 터이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분명히 있었다.
난세(亂世), 그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중원천하가 혼란의 도가니 속에
서 허우적거리던 난세였다는 사실이었다.
난세 속에서 영웅이 태어난다는 말처럼 수천구신체 또한 난세 속에
서 탄생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수천구신체를 받고 태어난 자는 전부 영
웅이 된다는 소린데,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수천구신체중의 대력패왕지체를 태웅이 타고났다고 하였다.
"태 소협은 말이 좀 통하는군요. 일단 앉으세요."
"좋소이다. 들어보기나 합시다."
"전부 물러가라."
부하들을 전부 물린 화소미가 세 사람을 향해 말을 꺼냈다. 하오밀문
총단에서 그녀가 처리하겠다 했던 그 내용이었다.
"세 사람이 개봉을 떠나면 우리로서는 더욱 좋구요."
"그러니까, 월향(月香)이와 난향(蘭香)이 그리고 이번 사건을 무마시
켜줄 테니, 하오밀문의 일을 해달라 이 말입니까?"
화소미가 제시한 조건이었다. 청빈루의 4대 기녀 중 둘을 태웅과 추
기영에게 준다는 것과 이번 사건을 없었던 일로 해주는 대신에 한가
지 일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조건이었다.
"그럼 나는 남는 것도 없이 옥에 들어가서 썩어라 이거지? 아니면
야반도주를 하던가?"
야혼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화소미를 노려보았다. 두 놈에게 제시한 조
건과 자신에게 내건 조건은 엄청난 차이가 났다.
두 놈에게는 여자를 준다면서, 주업이 여자후리기인 자신에게는 옥에
들어가서 3개월 정도 있다가 나오라는 것이었다.
"동생에게 가장 유리한 방법이에요. 개봉을 떠나지 않으려면."
태웅이나 추기영은 야혼과 같이 산다는 이유 때문에 추격을 받고 있
지만 야혼은 현행범이다. 일반 양민을 겁탈해도 큰 죄이거늘 하물며 개
봉부 서열 2위인 동지의 딸을 겁탈했으니, 목이 잘려도 할말이 없는 중
죄인 것이다. 야반도주로 개봉을 떠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야혼이 개봉을 떠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해서 내건 조건이었다.
그녀의 생각 대로였다.
야혼은 결코 개봉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철이 들어 정착한 이곳은
그에게 있어서 고향이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이곳에 있고,
그의 삶이 있는 곳이다.
개봉을 떠나 새로운 곳에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껏 수시로 옥에 들락거리면서도 떠나지 않은 이유였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를 너무 우습게 보았다 요년아.'
"너희들은 이곳에 남아라. 이 기회에 나는 뜰란다."
야혼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화소미가 내건 조건에 솔깃
한 모습을 보이는 두 사람에게 미련 없이 이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어디로 갈 건데?"
'호호! 궁주님의 예견 대로네?'
태웅의 표정을 본 화소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개봉사괴가 전부
각각인 것처럼 보였지만 야혼이란 놈이 가장 대장이라는 말이 맞았다.
그런데, 하오밀문의 당주신분으로 있는 화소미가 궁주라는 말을 썼다.
강웅삼을 결코 궁주라 부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그녀가 궁주라고 부
르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말이 되는데.
"우리 세상 밖으로 한번 나가볼래?"
"원하는 게 뭔가 동생."
내심 야혼의 행동을 비웃으면서도 조건을 들어보려는 생각이었다. 간
단한 조건이면 들어주는 편이 일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
었다.
"조건? 아하! 그러니까 반드시 우리가 있어야 한다 그 말이구나."
뭔가 알았다는 듯 손뼉을 친 야혼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화소미를
쳐다보았다.
'이놈이…….'
야혼의 눈빛을 대한 화소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눈빛이 머
물러 있는 자리 때문이었다. 가슴, 얼굴을 쳐다보며 말하는 게 아니라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에 힘이 있었더라면 가슴을 가
리고 있던 옷이 벌써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일 인당 5백냥이 첫 번째 조건이고 두 번째는 우리 둘이 있을 때
말하지. 아울러 하오밀문에 있는 무공도 잠깐 보여주고. 물론 당신이
말한 조건은 그대로 지켜져야 하고."
"2천냥이 얼마나 큰돈일 줄 알고 하는 소린가?"
어이없는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2천냥이라니, 그 정도면 중원
무림단체에 청부를 넣어도 될만한 그런 액수였다.
그 돈을 얼굴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달라 하고 있다. 그 또한 첫 번
째 조건에 해당할 뿐이라니.
'총령 거절하세요. 저 자식은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아요.'
'궁주님 그러다 정말 떠나버리면.'
'저를 믿으시라니까요?'
"안되겠네, 우리의 흥정은 없었던 것으로 하세."
'엥? 이것 봐라. 저년이 빡세게 나오네.'
야혼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화소미의 행동으로 보았을 때 결코 간단
한 일이 아닐 거라는 판단에서 제시한 조건이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
을 당해 버렸다.
'그렇다고 쉽게 넘어갈 줄 알았냐?'
"에이, 씨팔! 정말 간다. 안 그래도 여호치 그 빌어먹을 년 때문에
뜨려고 했는데 잘됐네 뭐."
'헉! 이놈이.'
'저런 개새끼!'
화소미와 어둠 속 한 곳에서 동시에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야혼의 말
중에 여호치란 이름 때문이었다.
"야 연장! 그렇지 말고 좀더 이야기를 해보자. 뭔가 합의점을 찾아봐
야지."
몸을 일으키는 야혼을 뒤따르며 태웅이 말했다. 태웅이 야혼을 부르
는 호칭은 연작이 아닌 연장이었다. 그의 물건을 빗대놓고 하는 말이었
다.
"야! 새끼야. 첫 번째 조건도 안 먹히는데 흥정은 무슨 흥정. 너희들
은 월향이와 난향이 사타구니 속에 대가리 담그고 그냥 살아."
"그게 아니고 새끼야. 선수끼리 해결하는 방법이 있잖아."
"무슨……?"
"이거, 임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 엄지손가
락을 가만히 쑤셔 넣었다.
"그러다 실패하면."
"맞아죽어야지 별수 있냐? 사력(死力)을 다하면 이길 수 있다며."
태웅이 아이 머리통 만한 주먹을 야혼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좋다 씨팔! 한번 해보자."
결심을 했다는 듯 확고한 표정을 지은 야혼이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좋소이다. 솔직히 나도 개봉을 떠나는 건 싫어. 해서 말인데 우리
서로 선수잖아. 가장 잘하는 걸로 내기를 합시다. 밑천도 안 들고 몸뚱
이만 있으면 되니까. 이긴 사람의 말을 들어주기로. 마지막 조건이오."
'궁주님!'
이번에는 화소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설마 야혼이 그런 조건
을 들고 나올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몸을 탐내고 있다는 것은 알
고 있었지만 내기를 빙자해서까지 노릴 줄이야.
'알아서 하세요. 저는 뭐라 말하지 못하겠네요.'
"나쁜 새끼, 얼굴만 희멀거니 생겨 가지고. 다음엔 정말 잘라버리고
만다."
화소미가 궁주라 부르는 여인은 개봉사괴 중 한 명인 여호치였다. 2층
의 어두운 공간에 숨어서 아래를 쳐다보고 있던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가 자신의 알몸만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터였다. 광애성모지체를 타고난 그녀의 신체 때문이었다. 광애성모지체
를 타고난 여인의 몸매는 인간이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그녀의 몸을 보는 순간 모든 남성들이 이성을 잃고 색마로 돌변해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율법이 있었다.
광애성모지체를 타고난 여인의 몸을 보고도 이성을 잃지 않으면 그
사람이 곧 남편감이라는 율법. 궁주라고 해서 결코 바꿀 수 없는 율법
인 것이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반드시 필요해요. 추기영이
가지고 있는 철탁이 있어야만 광혼마림(狂魂魔林) 뚫을 수 있어요.'
'설마…….'
'맞아요. 그가 가지고 있는 철탁이 무음항마혈탁(無音降魔血鐸)이에
요.'
놀라운 말이었다. 추기영이 상국사에서 도망칠 때 훔쳐온 철탁을 두
고 불가의 보물이라는 무음항마혈탁(無音降魔血鐸)이라 하고 있다.
무음항마혈탁이 강호상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500년 전이었다. 천축
(天竺) 소뢰음사(少雷音寺)의 승려 200명이 포교를 목적으로 중원으로
침공해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감숙
성 기련산에서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강호 상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한 스님에 의해서 몰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스님이 사용한 법기(法器)가 바로 무음항마혈탁이었다. 원래 항마
혈탁이란 이름으로 불렸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철탁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공의 강약이 상관없었다.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했기에 무음(無
音)이라는 말이 앞에 붙어 무음항마혈탁이 되었던 것이다.
'저도 최근에 알아낸 사실이에요. 그당시 항마혈탁을 사용했던 스님
이 바로 상국사 주지스님이었어요. 강호 상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요.'
'그래도…….'
'화 총령. 우린 어차피 복수에 모든 것을 걸었어요. 남편이니 하는 말
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일뿐이에요.'
"좋아요. 수락하지요."
전음을 듣던 화소미가 결국 수락을 했다. 여호치의 말이 맞았다. 어
차피 여인이기를 포기하며 살았던 자신들이었다. 복수를 위해 100년의
세월을 숨어살았는데 그깟 잠자리가지고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었던
거였다.
"좋아요 동생. 단 이긴 사람의 말은 무조건 들어주는 것으로 하지
요."
"내일 아침에 와라."
추기영과 태웅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한 야혼이 화소미의 뒤를 따랐
다.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화소미가 과거 기녀출신이었다지만 자신
또한 5년의 한량생활을 했다. 눈빛만 봐도 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아차릴 수 있는 수준이란 말이다. 결코 지리라는 생각은 없었다.
'오홋! 저 살덩이 좀 봐! 완전히 물건이구먼.'
계단을 올라가면서 연신 좌우로 흔들리는 화소미의 둔부를 탐욕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서른을 훌쩍 넘긴 여인의 엉덩이가 아니었다. 전혀 처짐이 없이 동산
같은 거대한 육질이 빨리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부르르 떨리는 모습이라니.
갑자기 아랫도리에 힘이 불끈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서라. 아직은 아니다.'
큰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침실인가? 아늑하구먼…… 근데 여호치와는 무슨 관계가 있
는지 물으면 대답해주려나?"
'이놈이!'
순간 화소미의 얼굴에 차가운 살기가 맺혔다. 추기영과 태웅 때문에
야혼이 필요할 뿐이었는데 그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 신경 끄자. 어차피 궁을 위해 필요할 뿐이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동생. 여호치와 하오밀문을 연관짓는 건 너무
억측이 아닌가."
이내 살기를 풀며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놀랍군. 하오밀문의 당주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닌 모양이네. 무
공을 익힌 고수라 이건가!'
야혼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껏 화소미를 잘못 보았던 거였
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살기(殺氣)는 발광하는 황소 이상이었다.
오전에 30여 마리의 황소에 둘러싸여 있을 때 느꼈던 그런 기분이 들
었다.
'이러다 뒈지는 것 아냐?'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공을 익힌 고수가 무엇이 아쉬워 자신
들에게 흥정을 해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호치야 원래 다른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추기영이나 육승 그리고
자신은 말 그대로 꼴통들이다. 써먹을 데라곤 싸움질하는 것과 오입질
밖에 없다. 그런데 몸을 내기로 걸면서까지 굳이 잡으려하는 의도를 짐
작할 수가 없었다.
'에라! 썅 언제 생각하고 살았냐? 이기면 되지 뭘.'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7)-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란.
5장 .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란.
"씻고 하시겠소 아니면 그냥 하시겠소. 나는 그냥 하는 것을 더 좋아
하는데."
"아니옵니다, 상공. 저는 청결한 상태에서 하는 게 더 좋습니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대결은 시작되었다. 화소미의 성적취향을 파악하
기 위해 던진 말이었는데, 그녀는 평범한 여인네의 취향을 들먹이며 교
묘하게 피해버렸다.
'호! 약점을 알려주지 못하겠다 이거지? 그래도 오랜만일 테니 일단
분위기부터 잡아놓고 보자.'
욕실로 향하는 화소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야혼이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와 더불어 희뿌연 달빛이 방안
가득 밀려들었다.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상대의 모습을 적당하게
가려주는 어둠이었다.
'이건 결코 야비한 짓이 아니라오. 이 야혼이 언제나 써먹는 방법이
니까. 날이 날이니 만큼 오늘도 살짝.'
욕실문이 열리자 재빨리 품속에서 꺼낸 가루약을 조금 뿌렸다. 야혼
의 품속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상비약인 춘약이었다. 이미 무림인이
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알아차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뿌린 거였다.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긴장을 빨리 풀어줄 것이라는 계산에서
였다.
"아름답군! 혼자 살기는 정말 아까워."
'이럴 땐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의 기분을 최대한 편하게 해주어야한
다. 지금이 내기라는 사실을 잊도록.'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화소미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분홍빛 나삼을 걸치고 나온 그녀의 몸매는 서른이 넘었
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군살하나 없는 완전한 팔등신의 몸이었다. 다만 흠이라면 다른 여인
에 비해서 가슴과 엉덩이가 좀 크다는 것이었지만, 그 또한 야혼이 가
장 좋아하는 부분이었으니, 그의 눈에 비친 화소미의 몸매는 말 그대로
천하절색이었다. 다소 차가운 듯한 얼굴만 빼고.
"씻을 동안에 주안상이라도 준비하지. 그리고 자리옷은?"
"준비해 두겠습니다."
화소미의 몸매에 야혼이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욕실
을 나온 그녀 또한 혼란스러운 눈으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그냥 여인들을 겁탈하는 난봉꾼으로 보았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상대 여인을 위해 최대한의 배려를 해 두었다.
더구나 실내에 흐르는 미약한 춘약기운까지. 기분을 풀어주는 정도만
뿌려두었다. 지부대인 부인까지 손을 뻗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
리 색에 굶주린 여인이라 할지라도 무식한 날 건달 같은 자에게는 몸
을 허락하는 여인은 없다.
뭔가 매력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인 게다. 더구나 야혼의 얼굴이야 개
봉에서 알아주는 미남이었으니, 잘생긴 얼굴에 조금만 다정다감하게 대
해주면 결코 나쁜 놈이라 욕하지는 않을 터였다.
'어머! 내가 미쳤군. 미쳤어. 어린애한테. 지금은 내기다 내기.'
야혼의 얼굴을 떠올리던 화소미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아
무래도 술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비록 궁을 위해 허락했다고
는 하지만 연하의 남자다. 내기로 어쩔 수 없이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하
더라도 창피함이 앞섰던 터였다.
서둘러 간단한 술상을 준비해 방으로 올라오자 이미 목욕을 끝낸 야
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앉으시게. 임자!"
"훗!"
화소미의 입가에 살풋 미소가 어렸다. 어색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나
름대로 기방에서의 예절을 따라 한다고 하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허허! 술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지, 몸 버린다고."
술 석잔을 마셨을 뿐인데 화소미에게서 술잔을 빼앗아 한쪽으로 치
워버린다.
"자 그럼 어떻게 내기를 할 것인가 먼저 정해봅시다."
'아이고 이 짓도 하려니까 힘드네.'
화소미에게 전혀 부담 없는, 화기애애한 기분을 갖도록 하기 모든 노
력을 다하고 있었다. 5년간의 한량생활을 통해 배운 진리이기도 했다.
여자가 가장 빨리 쾌감에 도달하게 하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분위
기다. 또한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행위는 몸에 배인 습관이었다.
여인들에게 최고의 쾌락을 선사하면 절대 뒤탈이 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다음에 한번 더 만나주기를 원한다. 지난 세월 수많은 여인을
농락하고도 건재한 이유였다.
침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무작정 옷을 벗기고 달려드는 놈들은
죄다 하수다. 여자에게 수치심만 줄뿐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한다는 말
이다. 진정한 성이란 최고의 열락에 도달했을 때 서로가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한다.
"우선은 옷을 죄다 벗고 서로를 쳐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요. 만
지는 것은 안되고 자세는 자유롭게 취해도 상관없고요. 일 각 동안."
"허허! 바라는 바이오이다."
'내 몸을 보고도 반하지 않으면 그건 여자가 아니다. 그것 하나만큼
은 내가 자신 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반 장, 야혼은 훌렁 벗고 있는 상태로, 화소미
는 중요부분만을 살짝 가린 채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년 완전 선수네. 살짝만 보여줘서 애간장을 태워보겠다는 거냐 지
금?'
의미 없는 듯, 가볍게 움직이는 손짓 하나 발짓 한번이 전부 치명적
인 유혹의 손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수준에 달해있는지라 상
대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은 몸으로 승부를 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진정한 내기를 해봅시다."
"좋습니다. 상공. 우선은 먼저 시작하십시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하실 건 지요."
"구법(九法)으로 하겠소."
"좋습니다. 그럼 저도 같은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시작하리다."
두 사람의 내기는 간단했다. 서로 서로에게 애무를 하여 먼저 절정에
도달하면 지게 되는 규칙이었다.
야혼. 이름 그대로 밤의 혼이었다. 모든 정성을 다해서 화소미의 전
신을 어루만지며 끊임없이 애무를 했다.
가벼운 입맞춤을 시작으로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더니 흐르듯 볼
을 타고 부드럽게 목덜미를 애무하다가 다시 거슬러 올라 혀끝으로 입
술선을 더듬었다.
어느 정도 화소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싶자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
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허리께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관계를 가짐에 있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상대가 처녀일 경우에는
겁을 먹지 않도록 배려해야하고, 유부녀나 또는 이미 성(性)을 알고 있
는 여인일 경우에는 그녀의 두 번째 성감대를 찾는데 주력해야한다.
"하악!"
야혼의 손이 허리를 쓰다듬자마자 화소미의 입에서 거친 비음이 새
어나왔다.
야혼의 얼굴에 싱긋 미소가 어리고 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그 자리를
떠났다. 온몸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야혼의 손길은 십여 년간 잠들었던
화소미의 몸을 하나씩 깨웠다.
'이 사람. 어린애가 아니었어. 이미 경지에 달해있는 달인이었어.'
조금씩 뜨거워지는 몸에 화소미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마음이
너무 풀어져 있었던 탓이었다. 더구나 어린 사내와 잠을 잔다는 야릇한
상상이 그녀의 몸을 더 달아오르게 했는지 갑자기 주체하기 힘든 쾌감
이 밀려들었다.
"임자에게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어딘 줄 알아? 바로 이곳이야
그리고 탐스런 둔부고."
"흐윽!"
타는 불꽃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사실 화소미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부분이 방금 야혼이 말한 두 곳이었다. 타인에 비해 월등히 컸던 탓에
걸음걸이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부분에 대해 최고라고 칭하며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나왔다.
'큭큭! 생각대로 된다. 감히 이 야혼에게 도전을 해! 지금부터다 요년
아.'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야혼이 이전과는 다르게
거칠게 화소미의 몸을 훑었다. 가슴을 틀어쥐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유
실이 발딱 솟아오를 정도로 힘차게 흡입해 들었다.
두 손과 입술을 총동원하여 화소미의 전신을 유린하고 다녔다.
"하학! 아윽! 더 이상은, 상공. 어서……."
화소미에게서 애원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십여 년간 참았던 욕정이
봇물처럼 터져 버렸다. 이제는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듯 야혼의 엉
덩이를 무작정 잡아끌었다.
'여기서 한번 더 식혀야한다.'
"정신차려!"
"왜?"
순간적으로 들려오는 나직한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화소미가 붉
어진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행위를 멈춘 야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야혼의 다음 말에 기름처
럼 끓어올랐다.
"벌써부터 이성을 잃으면 건강 해친다고.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으
니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자고. 우선은 구법(九法)중에 용번(龍翩)에
서부터."
'이젠 내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를 위한다는 생각만 하
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당신……."
화소미 역시나 내기에는 관심이 없는 듯 야혼의 행위에 보조를 맞추
고 있었다. 가장 먼저 취하는 용번은 일상적인 정상위를 말하고, 두 번
째인 호보(虎步)는 호랑이가 걷는 모습이라 하여 후배위를 말한
다. 세 번째로 원박(猿博)은 원숭이가 나무에 걸쳐있는 모양을 나
타내는데 이런 식의 체위가 전부 9가지가 있다. 이를 통틀어 9법
이라 한다.
많은 성교방법이 있지만 특별하게 이런 체위를 구법이라 하여 연구
된 주된 이유는 서로가 몸을 상하지 않고 최대한의 쾌감을 이끌어 내
는데 있다 하겠다.
'에이고, 힘들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드디어 올 때까지 왔다고 생각한 야혼이 천천히 진입을 시도했다. 그
또한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거슬림은 곧바로 기분을 저하시킬
수 있기에 가급적이면 부드럽게, 애간장을 태우듯 들어가야 하는 것이
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야혼이 말했던 용번으로부터 시작한 관계는 물
고기가 비닐을 서로 비비는 형국이라는 8법인 어린접에서 극에 달했다.
야혼의 위쪽에 올라가 연신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화소미의 몸에서 비오
듯 땀이 흘렀다.
'드디어 이겼다. 야혼이 쾌재를 불렀다. 터져버릴 것 같은 욕정을 간
신히 참고 있는데 화소미의 몸에서 먼저 반응이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소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사실 화소미 또한 놀랐다. 과거 10년 이상 기녀생활을 했지만 야
혼만큼 전륜한 정력을 가진 이는 처음이었다.
결국 5법인 귀등부터는 무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하면서 그를 공략해 나가려했으나 8법까지 버텨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즐거웠어요. 정말 오랜만에 쾌락을 느꼈으니까요.'
가만히 내공을 끌어올려 자신의 국부를 향해 밀어내며 몸을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허억!"
지금껏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야혼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
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마지막 9법인 학교경(鶴交頸)에 도달했을 때 야혼이 손을 들고
말았다. 한순간에 역전 당해 버린 꼴이었다.
"비겁하게 무공을 쓰다니……."
참혹하게 일그러진 야혼이 화소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러나 비
겁이란 말 자체가 의미가 없었다. 자신도 이미 춘약을 살포하였으니.
"상공도 춘약을 썼으니 같은 조건이잖아요. 하악!"
야혼이 먼저 떨어진 것을 확인한 연후에야 화소미도 거친 신음을 토
해냈다. 이겼다는 마음에 지금껏 참고 있었던 쾌락이 봇물처럼 밀려들
었던 거였다.
"이 얼굴에 성격만 좋으면 금상첨화일텐데. 아깝네."
잠들어 있는 야혼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화소미가 혀를 찼다. 여
인에게는 그런 지극 정성을 쏟는 사람이 육덕칠에게 하는 짓은 완전
야차(夜叉)였다. 같은 얼굴인데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일단 옥에 들어가서 몸조리나 하세요. 하룻밤의 낭군님."
쿵! 쿵!
"병신! 고자 같은 놈!"
상판이 잔뜩 뭉개진 인영(人影)이 벽에 이마를 찍으며 자책 어린 한
숨을 내쉬었다.
서른이 넘은 화소미에게 처참하게 깨진 야혼이었다. 단지 화소미에게
만 깨진 게 아니었다.
"개자식들. 지들이 하라고 해놓고는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다음날, 잠에서 깨어나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가장 먼저 그를 반겨준
것은 추기영의 철탁이었다. 철탁이 사정없이 날아들었고 그 다음에는
태웅의 주먹이었다.
비도까지 빼들었다가 그것까지는 차마 던지지 못하겠던지 다시 한번
얼굴을 향해 주먹을 박아 넣은 다음 먼저 가버렸다. 위장을 하기 위해
면구를 뒤집어썼지만 온통 부어오른 자국은 가리지 못했다.
월향과 난향을 놓친 녀석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지만 혼자
결정했던 것도 아니고 세 사람이 합의하여 내기를 하자고 했지 않았던
가. 그런데 막상 일이 틀어지자 자기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는 듯 폭행
을 가해왔던 것이다.
마치 그런 약속을 언제 했느냐는 듯. 더군다나 얼굴 세 대로 끝난
것에 감사하라는 표정까지 지으며 말이다.
"5법까지는 내가 이겼었는데…… 분명 화소미도 움찔거렸다고. 그런
데 무공 때문이었어. 무공만 없었던들 내가 질 리가 없단 말이야."
아무리 분하고 원통해도 이미 끝난 내기였다. 그동안 정력에 좋다는
음식은 안 먹어 본 게 없었는데, 야바위로 번 돈의 절반을 먹는 것에
전부 소비했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패하고 말았다.
"내가 무공을 익히고 만다. 화소미 그년에게 이기기 위해서도 반드시
무공을 익히고 만다고. 우선은 몸부터 다시 점검해야지."
옥에서 야혼의 생활은 언제나 같았다.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바로 팔
굽혀펴기부터 시작하여 하루를 거의 운동에 소비했다.
딱히 그것 말고는 할 짓이 없는 곳이 또한 이곳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인물이 있다는 사
실은 알지 못했다.
"호! 어쩐지 뭔가 다르다 했더니 야차혈마지체(夜叉血魔之體)라 이건
가? "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야혼을 쳐다보던 노인이 나지막이 중얼거
렸다. 얼마 전 야혼의 뒤를 따랐던 바로 그 자였다.
이미 자연도의 경지에 도달해 있던 엄청난 경지의 무인.
그런데 개봉 제일의 파락호인 야혼을 보고 수천구신체 중 야수적인
잔인함을 가지고 있다는 야차혈마지체라 하였다.
"무공을 배우고 싶나?"
"엥? 이건 또 뭔 소리여?"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리운동에 열을 올리던 야혼이 깜짝
놀라며 문 쪽을 쳐다보았다.
마의(麻衣)를 입은 백발 백염의 노인이 초연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
보고 있었다.
"무공을 배우고 싶냐고 물었네."
"오라! 바로 당신이었군. 소를 풀어서 장난을 쳤던 사람이."
비로소 기억이 났다. 한참 바쁜 사람에게 정기신(精氣神)이 어쩌고
했던 바로 그자.
"근데 어떻게 알았소?"
가만히 노인을 쳐다보던 야혼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지금 자신의
얼굴은 그때 그 얼굴이 아니다. 하오밀문의 인물로 위장하여 옥에 들어
와 있는 상황인데 노인은 바로 알아보는 것 같았다.
"얼굴이 바뀐다 한들 기세마저 사라진다던가. 그 사람의 진실한 모습
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네."
'이상하군.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기연이 있었나?'
마의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에 보았을 때와 기세가 약간 달
라 보였던 거였다.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자네 소를 얼마나 잡았나?"
"10년이오. 근데 무공을 배우고 싶냐는 말은 무슨 말이오?"
'그 때문인가? 하지만…….'
예인의 경지를 말하고자 했으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일반인이 예
인의 경지 도달하는 것은, 무림인이 검을 기로서만 조정하는 이기어검
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만큼 어렵다.
강하기가 이기어검술을 펼치는 무인의 수준과 같다는 말이 아니라,
깨달음의 수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혼에게서 언뜻 그런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방금 자네가 그렇지 않았나. 무공을 익히고 싶다고."
'요즈음 왜 이리 이상한 일만 생기냐?'
웬 정신나간 놈인가 하고 노인을 살피던 야혼이 내심 부르르 떨었다.
가만히 서있는 것 같은 노인의 몸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기운
이 흘러나왔다. 화소미와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했다.
마치 망망대해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것을 두고 경외감이라 하는가……. 하지만 댁도 사람이라 이거
야. 늙어서 오입도 못하는 자에게 기죽을 건 없지.'
깊게 숨을 들이마신 야혼이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공짜는 아닐 테고 조건이 뭐요?"
'맞기는 한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혹시 자네 스물은 넘었나?"
"당연히 넘었지요. 21살인데."
"그런가……?"
'이상하군. 스물이 넘었으면 완전한 신체가 되었을 터인데…….'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수천구신체는 20살을 기점으
로 조금씩 그 기운을 외부로 발산하게 된다. 다른 신체야 크게 표나지
않지만 야차혈마지체는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변화가 심
하다. 살기(殺氣), 본인도 모르게 전율적인 살기를 발산하게 된다는 것
이다.
그 살기를 끌어내기 위해 기운을 발산했으나 미약한 반응밖에 없자
불완전한 야차혈마지체라고 단정짓고 말았다.
그러나, 추기영이나 태웅과 말을 트기 위해 야혼이 나이를 속이고 있
었다는 사실은 짐작하지 못했다. 굳이 노인에게 속이려했던 게 아니고
평소에 21살이라 말하고 다녔기에 저절로 나온 말일뿐이었다.
"한가지 일을 해주면 되네."
"먼저 일을 하려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뇨?"
"믿을 수 없다 이 말인가?"
"그야 당연한 일 아니오."
"그럼 내가 거짓으로 이름을 대면 어찌할 텐가."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주천상(朱天上) 일세."
"혹시 북경에 사시오?"
"그건 어찌 알았는가."
야혼의 얼굴이 괴이하게 변했다. 성이 주씨라 하였다. 더구나 북경에
산다고 한다. 노인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결코 여색을 밝힐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거짓말이란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여인들을 후릴 때 자신이 써먹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
닌가. 더구나 주전상과 이름도 비슷했다.
"혹시…… 황족이시오?"
"자넨 정말 귀신이군."
주천상 또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이 느물거리는 녀석은 잘도 맞췄
다.
"연세는 어찌 되시오? 중요한 질문이니까 속이지 말고 대답해 주시
오."
"올해 110이네 근데 그건 왜 묻는가."
"정말이시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무리 나이를 올려 잡아도 60대
이상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었는데 그 두 배라니. 한두 살도 아니고
거의 배 정도는 속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이것 봐라? 겉모습으로만 보면 지금도 여자를 꿀꺽할 수 있게 생겼
는데 나보다 90살을 더 처먹었다 이건가? 무공을 익혀선가?'
"그럼 무공을 익히면 밤일을 잘할 수 있는 거요?"
"밤일?"
주천상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른 체질도 아니고 불완전했지
만 하늘에서 점지했다는 야차혈마지체를 타고난 녀석의 입에서 밤일이
라니.
"에이! 남자끼리 왜 그러쇼.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쿨럭!"
급기야 주천상이 사래 걸린 듯 기침을 했다. 어이가 없음이다. 사내
로 태어났으면 적어도 세상을 호령해보겠다는 그런 포부정도는 있어야
하건만 이 녀석은 전혀 그런 게 없다. 무공을 익히려는 목적이 밤일 때
문이란다.
"내가 말하는 그곳으로 가면 밤일을 증진시켜줄 무공이 꽤 있을 거
네."
"그런 무공을 익히기만 하면 끝없는 정력을 가진다. 이 말이군."
뭔가 오기는 온 것 같은데 결코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는 것이었다. 감히 측정할 수도 없을 정도의 무공을 가진 노인이  심
부름 한번만 해주면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이런걸 두고 기연이라 해야하는데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처녀라 생각하고 작업에 들어갔는데 완전한 물간 여자였을 때 느껴
지는 그런 개떡같은 기분이 들었던 터였다. 더구나 자신으로서는 상상
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남을 시킨다는 게 아무
래도 미심쩍었다.
하지만 노인이 말해준 장소를 가면 정력제가 가득하다는데 그 또한
커다란 유혹이었다.
'일단 일이나 들어보지 뭐.'
"심부름이란 게 뭐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세. 내가 전해주는 무공으로 1초만 펼쳐주면
되네. 가야할 곳은 십만대산의 성모봉(聖母峰)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초극의 고수처럼 보이는 주천상 역시 십만대산의
성모봉을 원하고 있었다. 단지 구대문파와 다른 점이라면 그는 지도가
아닌 일정한 장소에서 1초의 무공을 펼쳐달라는 주문이었다.
"내가 그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아실 거요."
"그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되어 있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아니지 심부름 값을 준다니까. 내가 자네에게 20년의 공력(功力)과
1초의 도법을 줄 것이네."
"어디로 찾아가면 되오."
"수락한 건가."
"아니오 생각을 좀더 해봐야 할 것 같소."
"그런가? 그럼 앞으로 6개월을 더 머물 테니 그 안에 황동지 집으로
찾아오게."
"동지 황인효를 말하는 게요?"
"그렇다네. 6개월임을 명심하게. 그리고 이건 자네에게 전수해줄 무
공이네."
야혼에게 나뭇조각 하나를 던져주며 주천상이 자리를 떴다.
"씨팔, 주씨만 아니거나 북경에만 안 살았어도, 아니 황족만 아니었
어도 내가 이리 고민하지는 않는다. 셋 중에 하나만 빠져도……."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8)-출소기념
6장 출소기념
"엄청난 새끼구먼! 이게 전부 몇 개야?"
주천상이 남기고 간 나뭇조각을 쳐다보던 야혼이 나직한 욕설을 토
해냈다. 무슨 무공을 펼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손바닥만한 나뭇조각 한
면이 온통 선으로 가득했다.
40개까지 센 것 같은데 그 다음부터는 셀 수가 없었다. 단 1초의 도
법, 한번 휘둘러서 이 정도의 숫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야혼 또한 소를 잡을 때 도를 휘두르기에 나무판에 새겨진 도법의
가공함을 알 수 있었다.
소 한 마리를 잡을 때 자신이 쓰는 칼은 단 한번이 아니던가.
"엄청난 도법(刀法)이면 뭐하냐, 정력제가 없는걸."
사실 야혼이 원하는 건 이런 도법이 아니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도
법이 아니라 정력을 증강시켜줄 무공이었다. 도법(刀法)이야 소 잡는
기술에 필요한 정도만 있으면 될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에라이! 운동이나 하자! 체력은 정력이다. 체력은 정력!"
주천상이 주고 간 나뭇조각을 한쪽 구석으로 던져버리고 운동을 시
작했다. 흥정에 대해서는 하오밀문의 무공을 먼저 보고 결정하기로 하
였다.
"아이고 이 짓도 좀 쉬었더니 벌써 힘들어지네."
옥안에서 야혼이 하는 운동 중의 하나는 지금처럼 발꿈치를 들고 걷
는 연습이다. 엄지발가락으로 온몸을 받친다는 느낌으로 걷기 연습을
하면 그쪽으로 힘이 쏠려서 근육이 강해진다는 통설에 따라 수년간
거시기 강화훈련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던 운동이었다.
그 다음에 하는 운동이 기마자세, 흔히 마보(馬步)라고 하는 자세를
취한다. 이 자세는 다리의 힘을 강화해주는 역할은 물론 지속적으로 항
문에 힘을 가하게 하여 국부의 근육을 강하게 키워주는 필수적인 운동
인 것이다.
거의 온종일 정력을 높이는 운동으로 일관하던 야혼의 옥 생활이 드
디어 끝났다. 몸을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던 때문인지 3개월은 금
방 지나갔다.
"개자식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면회한번도 안 와?"
출옥을 하면서도 야혼은 연신 투덜거리며 상국사 뒤편을 걸었다.
화소미에게 진 바람에 월향이와 난향이를 품는 꿈이 날아갔다고 하
지만 사식은 둘째치고 면회한번 오지 않았던 태웅과 추기영이 야속했
다. 그러나 단지 그 때문에 산 속을 배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먹이감을 찾기 위해서였다. 옥에 들어가 있던 3개월 동안 거의 여자
를 굶었던 그였기에 출옥하자마자 으슥한 곳을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왜 계집년들이 씨가 말랐냐."
벌써 한 시진 정도를 헤매고 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가 눈에 띄
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인데 여자가 없을 리가 없었다.
야혼이 확실한 사냥감을 만났다며 눈을 빛낸 장소는 묘하게도 3개월
전 바로 그곳이었다.
황동지의 딸인 황수란을 유혹하다 미수에 그쳐 결국 옥에 들어가야
했던 바로 그 옹달샘이 있는 곳.
"이게 웬 떡이냐."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한 명도 아니고 무려 세 명의 여자가 야혼
이 있는 쪽으로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내밀고 세수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풍만함이란, 셋 중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천지신명이시어 감사합니다. 3개월을 굶었다고 세 년을 한꺼번에 보
내주시다니. 정말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가볍게 합장을 한 야혼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급하다 할지라도 세 명이나 되는 여인을 한꺼번에 덮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춘약은 이정도면 됐고."
상비약인 춘약은 출옥하자마자 바로 샀다. 세 명 정도는 한 방에 보
낼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럼 저년들에게 먹이는 일만 남았는데……. 잠시만 기다려라 요놈
아. 곧 천국으로 보내주마."
뿌듯하게 힘을 받는 아랫도리를 툭툭 치며 자리를 옮겼다.
"호호호! 언니 이곳 물은 정말 시원하다. 목욕이나 했으면 좋겠네."
"요월(妖月)아 뜨거워진 몸을 식히고 싶은 모양이구나."
"홍! 언니도 마찬가지 아니오. 청해(靑海)에서 이곳까지 오는 3개월
동안 사내구경을 못했더니 온몸에서 곰팡내가 나는 것 같아요."
"이곳 개봉에는 사내가 아예 씨가 말랐나봐요. 몸이라도 좀 풀어볼까
하고 이곳까지 왔는데 개미새끼하나 없네요."
"요령(妖靈) 네가 가서 쓸만한 놈 하나 잡아오면 되잖느냐."
연신 물을 끼얹으며 농을 주고받는 여인들, 요월과 요령이라 하였다.
그럼 남은 한 명, 언니라 불리는 여인은 요설(妖舌)이 분명할 터였다.
환락삼화(歡樂三花).
마도련(魔道聯)을 구축하고 있는 다섯 문파 중 여인들로만 구성된
요화문(妖花門)의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의 이름이 강호 상에 널리 알려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무공도 강했지만 그녀들의 독특한 남성편력 때문에 더 유명해졌
다. 그녀들의 표적은 다수의 인물이 아니었다. 오직 한 명, 단 한 명의
남성을 골라 세 여인이 합공을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렇다해서 상대 남성을 죽이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기에 강호 공적
으로 지목되지는 않았지만, 수개월 이상 요양을 해야만 몸이 회복될 정
도로 망가뜨려 버린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사내를 윤간(輪姦)하고 다니
는 여인들이 바로 환락삼화였다.
그런 환락삼화를 야혼이 노리고 있었다. 그와 똑같이 3개월을 굶었다
는 요화(妖花)들을.
"그만 놀고 가자! 그런데 아무나 붙잡고 물으면 하오밀문의 총단을
알 수 있을까?"
"당연하겠지요. 개봉에 있는 단체라고는 그들밖에 없는데."
그녀들 또한 개봉을 찾은 이유가 하오밀문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거절하지는 않겠지?"
"그럼요 언니. 구파일방의 일을 수락했는데 거절할 리가 없잖아요.
똑같은 걸 한 장 더 그리면 되는데."
요월이 별걱정 다한다는 표정으로 요설을 향해 말했다.
"언니 이게 무슨 소리죠?"
앞서나가던 요령이 귀를 쫑긋거리며 두 여인을 돌아보았다. 나직한
신음성이 그녀의 귀를 자극했던 거였다. 그냥 신음소리가 아닌 수컷이
내는 묵직한 음성이.
"어쩌면 우리의 몸을 식혀줄 사내가 있는지도 몰라."
세 여인의 얼굴이 동시에 빛나기 시작했다. 3개월간의 공백을 메워줄
사내의 목소리가 아닌가.
조급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서둘러 소리나는 쪽에 도착한 환락
삼화의 얼굴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어졌다.
몸이 불편한 듯 쓰러져 있는 남자의 얼굴 때문이었다. 지금껏 겪어본
남자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전륜한 미남이었다.
꿈속에나 만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황홀한 얼굴이 고통을 호소하며
다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야혼이었다. 상대의 신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여인들이 내려갈 길목
에 다리를 다친 것처럼 꾸미고 있었던 터였다.
"어머! 공자님 괜찮으세요?"
환락삼화의 막내인 요령이 재빨리 야혼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침착해라, 요령. 이건 완전히 대어다. 대어 중에도 초특급 대어. 이번
만큼은 내가 언니노릇을 하고 만다.'
그녀들이 한 남자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들 세 사람이 만
난 곳은 요화문에 입단하면서부터였다. 첫 만남에서 몇 번의 대화를 하
고 나자 서로가 같은 부류인 것을 알아차렸다.
남자가 없으면 하룻밤도 편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색골들. 서로간에
죽이 맞았던 그녀들은 급기야는 의자매를 맺었고 이름조차 전부 바꿨
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세 사람이 전부 나이가 같았기에 언
니 동생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녀들만의 유희가 시작되었다. 사내 한 명을 골라 세 명이
동시에 겁탈을 하고 그 남자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평가가 좋게 나온 여인이 그 때부터 언니가 되었다. 다
음 녀석이 걸릴 때까지. 세 여인의 손에서 남자들이 죽어나가지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여인들이 요화문의 환락삼화라는 사실을 전혀 알 리 없
는 야혼 또한 다가온 행운을 거머쥐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침착해라 야혼. 이년들은 최고다. 은근슬쩍 내비치는 저 가슴 좀 봐
라. 오늘은 마음껏 회포를 푸는 거다. 조금 전 옹달샘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야한다.'
"으으! 물이 있는 곳으로 좀 안내를 해 주시겠습니까."
과거 황수란에게 써먹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때와 달랐다. 지금은 몸이 약한 환자가 아닌, 산을 내려오다가 다리를
다친 평범한 사람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요? 제가, 제가."
서로가 야혼을 부축하기 위해 동시에 세 여인이 득달같이 달려들었
다.
'얼레? 이것들 봐라! 하긴 이 얼굴을 보고 안 넘어오면 그년들은 여
자가 아니지 암!'
야혼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여인들은 대담하게 행동했다.
'이럴 땐 세 년을 한번씩 안아보면 되는 거야.'
야혼이 가장 자주 써먹는 상투적인 수법, 부축하고 있는 여인의 어깨
에 손을 걸친 채 은근슬쩍 가슴을 더듬었다.
'허걱! 없다.'
순간 야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일반 여인이면 반드시 가리고 있어
야 할 그것이 없었다. 슬쩍 스치는 손에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촉은 분
명 유실의 느낌이었다. 허리 아래쪽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호홍! 이자 봐라? '
야혼을 가장 먼저 부축한 요령 또한 깜짝 놀랐다. 일부러 사내를 유
혹하기 위해 왼쪽 가슴을 최대한 밀착시키고 그의 오른손을 가슴 쪽으
로 당겼는데 은근슬쩍 만지는 것 같지 않은가.
더하여 아래쪽의 묵직한 느낌까지.
'좋아 그럼 좀더 확실하게 맛보게 해주지.'
"이쪽으로 좀더, 아앗!"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몸을 세우던 요령이 한순간 비틀거리며 쥐고
있던 야혼의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에 사정없이 밀착시켰다.
뭉클!
'헤엑! 좋구나. 이건 완전히 극상품이다. 이 탄력이란. 이제는 춘약을
좀 뿌리고, 다른 년의 몸을 확인해야지.'
"조금만 쉬었다가 갔으면 합니다."
다리가 많이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며 요령의 몸에서 물러났다. 그
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월이 달려들어 야혼의 몸을 부축하는 것이었
다. 이렇게 해서 옹달샘이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야혼의 수중에 있
던 춘약은 전부 소모되었다.
'언니 순서를 정해요.'
요령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요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녀들 또한 야
혼이 춘약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모른 체했다.
부상당한 것처럼 하고 있지만 단순한 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더욱 흥
분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무공이 있는 자도 아니기에 마음을 놓았다.
'원래대로 하는 거다. 언니인 내가 가장 먼저 해야지.'
남자를 윤간할 때 그녀들의 순서였다. 언니 동생을 정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에 순서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오늘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어 이년들아.'
두 여인에게 소리를 빽 지른 요설이 야혼을 쳐다보며 배시시 미소를
흘렸다.
"피곤하신 것 같은데 저 동굴에 가서 좀 쉬시지요."
'물론이지 이년아. 내가 바라는 것들을 어쩌면 그렇게 척척 알고 있
는지 대견할 뿐이다.'
조금 전부터 그랬다. 여인을 바꾸고 싶어서 다리가 아프다 했는데 저
들이 알아서 먼저 행동을 취하는 게 아닌가.
더군다나 어떻게 동굴로 끌어들이나 걱정을 했는데 안으로 들어가자
고 하고 있다.
'시팔! 오늘 한번 죽어보자.'
처음에는 정말 좋았다. 세 명이 번갈아 동굴을 들락거리며 자신을 만
족시켜주었기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계속해서 구름 위에 떠 있는 느낌이었던 터였다. 굳이 힘을 쓸 필요
가 없었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알아서 전부 처리를 하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제발 이젠 그만 좀 합시다."
야혼의 입에서 우는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써 두 시진은 지난 것 같았
다. 평소 같으면 두 시진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때야 정(精)을 뽑
지 않고 견디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지금처럼 끊임없이 정(精)을 뽑아내면 아무리 정력이 강한 놈이라
해도 버텨나질 못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여인들이 조금만 건들이
면 죽었던 놈이 다시 살아나며 그녀들을 받아들인다.
"당신은 지금까지 우리가 만난 남자들 중에 가장 훌륭한 물건을 가
졌어. 완전한 종마야. 잘 기억해둬, 우리 셋 중 누구의 실력이 가장 나
았는지. 그걸 제대로 못하면 당신은 죽은목숨이야."
야혼을 흘기듯 쳐다본 요령이 다시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
들 또한 최고의 기분에 휩싸였다. 평소에는 시전하지 않던 방중비술까
지 동원하여 야혼의 기분을 북돋았다.
'시팔, 이건 분명히 당하고 있는 거야, 이 야혼이 계집년들에게 돌림
빵을 당하는 거라고.'
울고 싶었다. 이 장소로 오는 게 아니었다고, 땅을 치고 후회를 했지
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갔다.
3개월 동안 갖은 노력을 다해 몸을 만들었는데 단 하루만에 빼앗기
고 있었다. 그것도 걸레 같은 년들을 만나서.
"어머! 코피가 나네? 드디어 내가 처녀를 깼다."
무서운 여인들이었다. 양쪽에 쌍코피를 흘리는 야혼을 보고 여자가
첫 관계를 가질 때 나오는 피라고 한다.
"이제부터는 덜 아플 거야 조금만 참어 응?"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야혼을 마치 첫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처녀 취급을 했다.
'씨팔 내가 기필코 무공을 익히고 만다. 저년들이 무공만 익히지 않
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될 리가 없다. 개 같은 년들.'
그로부터 한 시진을 더 시달리다 드디어 풀려났다.
그러나 아직 시련이 전부 끝난 게 아니었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야혼
을 두고 세 명의 여인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언니 동생의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정직하게 말해야해요. 내일이라도 내려가고 싶으면."
'그래 이년들아 다 말해주마. 네년들의 장점과 단점까지 전부 말해주
마.'
"우선은 댁, 요설이라 하셨소. 당신은 혀 돌리는 솜씨는 최고였소. 하
지만 하체 쪽은 좀더 연습을 해야 하오. 너무 요동이 크단 말이오. 그
리고 요월 당신은 엉덩이 돌리는 기술은 최곤데 그곳이 너무 크오. 볼
일을 볼 때마다 참았다가 조금씩 흘려보내는 연습을 하시오. 그럼 그곳
의 크기가 줄어드오. 마지막으로 요령 당신은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했
소, 하지만 너무 혼자 즐기려는 경향이 있소. 상대를 위해서 배려하는
게 아니오. 더 큰 쾌감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기분도 생각하면서
해야한다는 말이오."
"대단하군요."
세 여인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어렸다. 지금껏 수많은 남자들과 잠
을 잤고 그들에게서 평가를 받았지만 이자처럼 정확하게 단점까지 짚
어가며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아울러 성에 대해 확실한 철학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방
식이었던 것이다.
"좋아요 당신의 평가는 잘 들었으니 순위를 말해요."
"령, 월, 설이오."
"까야! 지금부터는 내가 언니다."
요령의 얼굴이 웃음꽃이 만발했다. 거의 2년만에 다시 언니가 되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참! 하오밀문의 총단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오잉! 그럼 그 곳을 찾아온 년들인가? 빌어먹을 정말 악연이군 하오
밀문은.'
어쩌면 몸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지금의 몸 상태를 대강 파악하건대 족히 5개월 이상은 요양을 해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망가져 있었던 거였다.
"내가 하오밀문의 제자요. 그곳은……."
야혼의 예감이 적중했다. 하오밀문의 제자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
게 얼굴표정이 변한 세 여인이 서둘러 야혼의 몸 상태를 살펴보기 시
작했다.
"이것 먹고 며칠만 요양하면 몸은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야혼에게 조그마한 환약하나를 던져준 여인들이 자리를 떴다. 혹시라
도 하오밀문에 전해져 곤란해질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개 같은 년들……."
옹달샘가에 앉아 보름달을 쳐다보던 야혼의 입에서 허탈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목이 말라 이곳까지 나오는데도
온몸에서 비오듯 땀이 흘렀다. 여인들이 주고 간 약을 먹었지만 쉽게
몸이 풀리지 않았다.
"아이고 오늘은 이곳에서 자야겄다."
엉금엉금 기어서 다시 동굴로 돌아온 야혼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 속가제자로 하지뭐!
7장 속가제자(俗家弟子)로 하지 뭐!
3일.
윤간을 당한 야혼이 동굴 속에서 잠을 잔 시간이었다.
"어이그, 배고파라."
피로가 풀려 일어난 상황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자야할 판인데 허기
가 져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아이고 다리는 왜이리 아프냐."
허벅지께에서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으나 피로 때문이거니 하고 일어
섰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안은 썰렁했다.
"천상 숨겨둔 보약을 먹어야겠네."
아무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먹을 음식조차 없었기에 결국 비밀창고를 찾았다.
비밀 창고,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크게 숨겨두거나 하는 물건은 없
었다. 다만 야혼이 평상시에 밥처럼 먹어대는 일명 정력제라 불리는 것
들을 숨겨둔 장소였다. 혼자 살 때야 숨긴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
았었는데 개봉사괴가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는 어쩔 수가 없었다.
태웅과 추기영의 눈에 띄는 날이면 그날로 전부 사라지기 때문이었
다. 그가 정력제라며 사 모으는 약들은 주로 사슴고기류였다.
정력에 가장 좋다는 녹혈(鹿血)은 구할 방법이 없었지만, 녹용(鹿茸)
부터 시작하여 사슴고기로 만든 육포와 사슴꼬리, 심지어는 사슴의 생
식기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녹용도 거의 다 먹었고. 남은 건 거시기하고 육포밖에 없네?"
결국엔 당장 먹을 수 있는 건 육포밖에 없었다. 효과 면에서야 말린
사슴의 생식기가 더 나을 터이지만, 그놈은 칼로 조금씩 깎아내어 술과
같이 먹어야하기에 지금 당장은 복용이 불가능했다.
그렇지 않아도 허한 몸인데 술까지 들어가면 완전히 망가질게 뻔하
기 때문이었다.
육포를 한 움큼 챙겨들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오자 여호치가 기다리
고 있었다.
"웬일이냐? 일 안하고."
"따라와라! 하오밀문에 가야한다."
"미안하다. 지금은 움직이기 곤란하다. 얼굴 보면 모르냐?"
"잘한다. 어떤 등신 같은 놈이 그 시궁창들에게 당했나 했더니 우리
쌍면연작이었구먼."
"그만해라. 네가 그런 말 안 해도 기분 더럽다."
육포를 몇 개 씹어먹던 야혼이 잠을 자기 위해 침대위로 기어올라갔
다.
"이거나 처먹고 자!"
야혼 앞에 조그마한 보자기 하나를 내려놓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
녀만은 야혼이 출옥할 시기에 맞춰서 옥으로 나갔었다. 그러나 시간이
엇갈렸는지 벌써 가버리고 없었다.
야혼이 갈곳이라 해봐야 몇 곳 없기에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다가
동굴 속에서 야혼을 발견했다. 코피를 쏟으며 자고있는 그를 보자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자고있는 야혼의 허벅지를 냅다 걷어차 버린 후
내려오고 말았다.
"고맙게 먹으마, 색시야."
여호치가 가져온 닭고기를 허겁지겁 뜯어먹은 야혼은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윽고 이틀만에 깨어나 생업의 장소인 서대시전으로 나왔다. 그런데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어야할 추기영과 태웅이 보
이질 않았다.
"어라? 씨팔! 새끼들이 없으니까 재미가 읍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추기영과 태웅이 있던 자리를 아쉬운 듯 흘낏 쳐다보던 야혼이 다시
주사위를 집어들며 고함을 질렀다.
"자! 찾아보십시오. 여기 있는 흰색의 주사위를 찾으시면 됩니다. 난
향이의 그곳처럼 새하얀 이놈을 찾으면 세 배의 돈을 드립니다. 어두운
밤에 마누라 그곳을 찾는 것 보다 더 쉽습니다. 난향이의 그곳에는 털
이 없어……."
퍽!
"어떤 쌍……."
한참 동안 호객행위에 열을 올리던 야혼이 뒤통수에 느껴지는 강렬
한 통증에, 욕설을 뱉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내 입을 닫고 말
았다.
"이 자식아! 장사를 해도 좀 건전한 방법으로 해라. 월향이하고 난향
이에게 무슨 억하심정 있냐? 왜 말끝마다 그녀들을 들먹이냐. 봤냐? 봤
냐고."
여호치가 눈을 부라리며 야혼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 그걸 꼭 봐야하냐? 겉모습만 보면 알지. 여자 보는 경력이 벌써
5년인데."
"그런 녀석이. 시궁창하나 구별하지 못하고 그렇게 당했냐?"
"그건 너하고 똑 같은 거다. 넌 3개월 동안 굶고 살 수 있겠냐? 하루
만 굶어도 배고파 죽는다고 난리 치는 사람이 누군데."
"그게 밥하고 같냐?"
"나에게는 밥이네. 그리고 그때는 찬밥 더운밥 가릴 시기도 아니었
고. 그만 가라 영업방해하지 말고."
"가자 하오밀문에 가야한다."
"그곳을 꼭 밤에 가야하냐? 오늘밤은 일하고 내일 가자."
"좌판 또 엎어주랴?"
"그렇게만 해봐라. 썅! 정말 끝장을 본다, 알았냐?"
여호치를 향해 인상을 팍 쓰며 아래쪽에 있던 도를 꺼냈다.
'이 자식이?'
여호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야혼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 때문이었
다. 마치 무공을 익힌 무인들의 몸에서나 보일 수 있는 그런 기세가 흘
러나왔던 거였다.
더구나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미약한 살기라니. 얼마 전 거양이 당
하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던 이유가 바로 저 얼굴 때문이었다.
비웃는 듯한 웃는 표정과, 그 속에 포함된 섬뜩한 기운.
"아무리 동거하는 사이지만 더 이상의 간섭은 용납하지 않겠다. 아울
러 육승과 거패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어 망쳐놓으면 너
는 물론이고 화소미도 죽는다. 명심해라 여호치."
"너?"
여호치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설마 야혼이 화소미와의 관계까지 알
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를 바보 취급하지 마라. 태웅이나 추기영도 마찬가지고. 내가 제
일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 누가 내 인생에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
라 하는 거야."
"죽고 싶은가 보구나 야혼. 너의 알량한 재주로 해보겠다는 거냐?"
여호치의 몸에서도 미약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여자 밝히는 짓 말고
는 할 줄 아는 게 없을 거라 여겼던 야혼이었다.
또한 광애성모지체인 자신의 몸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약간의 호감도 있었다. 일행 중 가장 필요 없는 사람이 그였음에도 불
구하고 태웅과 추기영 때문에 끼어준 면도 없지 않았었다.
"쿡! 썅년들."
와장창!
야혼의 좌판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여호치의 몸에서 살기를 감지한
야혼이 스스로 좌판을 걷어차 버렸다.
"우리 같은 놈들은 아무렇게나 이용해먹어도 된다고 생각했나? 그러
려고  지금껏 곁에서 맴돌았나?"
야혼의 몸에서 서서히 살기가 솟구쳐나오기 시작했다. 결코 여호치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세에 못지 않은 전율적인 살기였다.
여호치를 향해 도를 겨냥하고 있는 야혼의 눈에 섬뜩하리 만치 차가
운 기운이 서렸다. 여차하면 베어버리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럴 수가…….'
여호치가 경악스런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 야혼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살기만으로 자신
을 묶어버린 것이었다.
퍽!
"그만해라 새끼야.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랑싸움이냐."
팽팽한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추기영이 끼어들
었다.
"우리 연장이 왜 이리 신경이 곤두섰나? 윤간을 당해서 기분이 안
좋으신가. 이 태웅의 소원은 그렇게 한번 당해보는 것인데."
추기영의 뒤쪽에 있던 태웅이 부럽다는 얼굴로 몸을 비비꼬았다.
"당해 봐라 새끼야. 그럼 남자도 처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될 테니
까."
여호치에게 겨누고 있던 도를 거두어들인 야혼이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가자! 오늘밤 그곳에 가기로 했다. 호치 너도 빨리 와라."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여호치를 향해 소리를 지른 태웅이 야혼을 끌
고 앞서 나갔다.
"연장! 우리 어린애 아니다 임마. 적어도 앞가림 정도는 한다고."
"그럼 됐고. 새끼야."
야혼이 흘낏 뒤쪽을 쳐다보았다. 추기영이 여호치에게 뭐라 말을 하
면서 데려오고 있었다.
"호치야 맘 풀어라. 저 자식 더러운 성질 한두 번 겪어보냐?"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아울러 야
혼을 다시 보게 되었다. 결코 쉬이 상대할 인물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
이 들었다.
"씨팔! 저게 사람 사는 집이냐? 귀신 나오게 생겼구먼."
하오밀문 정문 앞에서 야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고 서 있는 장원은 과연 사람이 살고 있을까하
는 기분이 들 정도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어서들 오게."
들어서는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마석흠이었다.
"우리가 할 일이 뭐요?"
접객실이라고 안내된 허름한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야혼이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다.
"큰 일은 아닐세. 지도를 만드는 일이네."
마석흠이 일행에게 해야할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십만대산인가 하는 곳에 가서 지도를 만들어 오라 이 말
입니까. 우리보고 가서 죽으라는 말입니까?"
"무슨 소린가? 길을 찾아서 돌아오면 되는 일인데."
태웅의 말에 마석흠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단순한 차력사 정도로 여겼던
태웅이 십만대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십만대산에 관한 사항은 무림인들이나 알고 있는 사실일 뿐 일반 양
민들이 관심을 가질 곳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태웅은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듯한 투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릴 바보로 아시는 모양이군요. 십만대산 성모봉은 백년 전 명교의
성지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더구나 구파일방이
나 마도련에서 청부를 해왔을 정도면 간단한 일이 아닐 것 같은데요?"
'이 친구가…….'
마석흠이 놀랍다는 얼굴로 태웅을 쳐다보았다. 십만대산의 지도 제작
이라는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구파일방과 마도련에서
청부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바로 유추해내는 태웅의 머리에 탄복했다.
마석흠이 놀란 만큼 눈을 치뜨고 있는 사람은 또 있었다.
'엥! 성모봉? 그 사기꾼도 성모봉을 원했는데…….'
그 때문이었다. 옥에서 만났던 주천상도 성모봉에 있는 한 장소
에  가서 1초의 무공을 시전해달라 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가는 길이라면…….'
어차피 내기에 졌으니 가야된다는 사실은 자신도 알고, 마석흠을 향
해 난색을 표하는 태웅도 알고 있다. 다만 그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
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인 게다.
"자네들은 조건 없이 우리의 일을 해주기로 했던 게 아닌가?"
"아미타불! 그거야 남아있는 세월동안 여시주들을 해탈시켜줄 수 있
을 때 성립되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시체는 여시주를 만날 수가 없
지요. 할 수도 없고."
나지막하니 불호를 외던 추기영이 마석음을 향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 또한 잔뜩 불만이 어린 얼굴이었다.
"좋네 원하는 걸 말해보게."
"일인당 500냥."
"그런 너무 과한 조건이라고 생각되네만……. 전부 합쳐서 500냥을
줄 수가 있네. 그 또한 십만대산으로 가는 여비로 주는 돈일세."
"어쩔래."
태웅이 야혼과 추기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차피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건 계약금으로 하고 다녀오면 그만큼을 더 주쇼."
"그렇게 하세."
"그리고 하오문의 무공 좀 보여주쇼."
"무슨 소린가?"
야혼의 말에 마석흠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비록 삼류문파라고
하지만 제자도 아닌 자들에게까지 함부로 무공을 보여줄 수는 없는 것
이다.
"그럼 무공도 없는 우리를 죽음밖에 없다는 그곳으로 보내려고 했
소? 당신들도 나머지 청부금을 받으려면 투자를 해야할 것 아뇨."
옥에서 만난 노인 때문이었다. 그는 성모봉에 가는 조건으로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다. 그만큼 길이 험하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러
나 하오밀문에 쓸만한 무공이 없다는 사실은 야혼도 알고 있었다. 강한
무공이 있었다면 자신들이 서대시전에서 장사를 해먹고 살지도 못했을
터이니까.
다만 그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하오밀문의 제자가 될 의향은 있는가?"
그러나 마석흠도 강경했다. 결코 무공은 보여 줄 수 없다는 얼굴이었
다.
"정식제자는 싫고 그냥 속가제자로 하지 뭐."
"뭐라? 임마, 속가제자가 뭔지나 아냐?"
뜨악한 얼굴이 된 태웅이 야혼을 향해 이죽거렸다. 속가제자란 구파
와 같은 거대문파에서나 쓰이는 말이다.
비록 정식제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본산에서 그들에 대한 대우는 정
식제자 못지 않다. 바로 문파에 대한 자부심과 자금 때문이었다.
전부가 그런 경우는 아니라 할지라도 대개 속가제자라 하면 대부호
집안의 자제들이나 표국 등을 운영하는 자들이 많다.
가진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나 또는 표물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
필요한 게 거대문파의 이름이고, 속가제자란 명분으로 관계를 맺어두는
것이다.
물론 기부라는 명목으로 돈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른바 자
금과 힘의 결합이 속가제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하오문이 개떡같은 문파니까 속가제자가 필요 없
다 이 말이냐?"
"그렇다기보다는 하오밀문이 속가에 있으니까 별도의 속가제자가 없
어도 된다는……."
바로 앞에 하오밀문의 인물인 마석흠을 앉혀두고 차마 못할 소리라
말끝을 흐렸다.
"아미타불! 곰시주 말이 맞네. 무공이란 게 하루 이틀에 익혀지는 것
도 아니거니와 설사 절세의 비급이 있다손치더라도 우리 능력으로 가
당키나 하겠는가. 속가제자가 되는 것은 잊어버리게 연작시주."
분명 야혼에게 포기하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는데 얼굴을 붉힌 사
람은 마석흠이었다. 개뿔도 없는 것들이 뻐긴다는 말로 들렸던 거였다.
"좋네. 하오비동(下午秘洞)을 개방하도록 하지. 단 기간은 한 달이
네."
안쪽에서 강웅삼이 걸어나오며 일행을 향해 말했다.
"문주님!"
마석흠이 깜짝 놀라며 강웅삼을 쳐다보았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곳이라 하지만 하오밀문에서는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
하오비동이다. 그런데 그곳을 개차반들에게 개방해 주겠다는 말이 아닌
가.
"대신 자네들은 영원히 하오밀문의 속가제자임을 잊지 않으면 되네."
"그야 뭐 쉬운 일이지요. 벌어먹고 사는 일이 같은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문주님."
환한 표정을 지은 야혼이 강웅삼을 향해 깍듯이 문주님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가시죠, 문주님!"
"내일이 아니고 지금 가려고?"
"시간은 돈 아니겠습니까. 뜨끈뜨끈할 때 먹어야지요."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강웅삼을 재
촉했다.
"따라들 오너라."
속가제자로 인정한다는 듯 바로 하대를 하며 앞서 나갔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하오밀문 총단 건물 뒤편에 있는 5장여 높이의 절
벽아래였다.
"이곳이 하오비동이란 말입니까?"
"왜 초라하게 보이느냐."
"그게 아니고……. 도둑 들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야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강웅삼을 쳐다보았다. 비록 삼류문파라 하
지만 엄연히 하오밀문이란 이름을 걸고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비동이라 이름 지어놓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경비 한
명이 없기에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둑은 많이 들었다. 50년 전까지……. 주로 무림인들이었지만."
"네?"
강웅삼의 뒤를 따르던 네 사람이 놀라는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말을 안 해주었구나. 우리 하오밀문의 개파 조사님은 십전수 구약종
이란 분이셨다. 300년 전의 겁천십웅의 일인이셨고."
"그럼 그때는 무림인이 없었던 모양이구먼?"
약간 자부심이 어린 강웅삼의 말에 야혼이 코방귀를 끼며 중얼거렸
다.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던 사람이 세운 문파가 하오밀문일진
대 그들의 후예는 뒤에서 손가락 하나만 헤아리면 되는 위치에 있다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겁천십웅의 한 분임은 분명하다. 그분의 은거지가 하오비동이었고.
이곳에서 하오밀문을 세웠다."
"그럼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랬지.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지만 전부 10가지 기예
를 가지셨던 분이 가장 강하다는 1절에서 5절까지는 전수하지 않았다
고 한다."
태웅의 물음에 강웅삼이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오비동에 도둑이
들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300년 천하 십대고수의 일인이었던 구약
종의 무공을 얻어볼 욕심으로 많은 무림인들이 비동으로 도둑을 가장
하여 잠입해 들었다.
그러나 하오밀문에서는 도둑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을 막지
도, 쫓아내지도 못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화를 입게 되
기 때문이었다.
짐짓 모른척하고 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오비동에 들었던 도둑들 중 누구도 찾지 못했다는 말이군요."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백여 년간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분
의 유전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어느 순간부터 하오비동은 구약종의 마지막 은거지가
아니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도둑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그게 50년 전이었다.
"내공심법 이름이 뭡니까?"
"왜, 네가 한번 찾아보려고?"
호기심 어린 야혼의 물음에 강웅삼이 우울한 얼굴로 되물었다.
"300년 동안 못 찾은 놈을 무슨 수로 찾습니까. 궁금해서 그렇지."
"저기 적혀있지 않느냐?"
벽에 걸려있는 자그마한 편액을 강웅삼이 가리켰다.
도둑을 가장한 무림인들 때문에 적어두었던 거였다. 공연히 무공 이
름을 알겠다고 하오밀문의 제자들을 해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
기 위해서 미리 공개해 버린 것이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 태을건곤심법
8장 태을건곤심법(太乙乾坤心法).
"휘유! 책은 많네."
동굴 안쪽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여섯
개의 서가를 쳐다보던 야혼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더구나 천장 위쪽에 환기구까지 만들어 두었는지 그곳으로부터 희미
한 달빛이 비춰들었다.
"절반 이상은 조사님이 모으셨던 책이다."
하오비동 안에 구비되어 있는 장서는 대략 5000권 정도였다. 그 중
구약종이 모았던 책이 2천권 남짓 되고 나머지는 후대들이 채워두었던
것이었다.
"300년 전의 책이라며 깨끗하네……?"
"그럴 리가 있느냐. 훼손되기 전에 사본을 만드니까 저렇게 깨끗한거
지."
하오밀문의 중요한 일 중의 한 가지가 비동 안에 있는 장서의 관리
였다. 조사인 구약종이 남긴 두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책이기에 보관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공편?"
이리저리 둘러보던 야혼이 십여 권의 책이 꼽혀있는 서가에 멈춰 섰
다. 거의 7자 높이의 서가는 텅 비어있었다. 단지 시중 서점에서 볼 수
있는 무공서적 몇 권이 다였다. 이 텅빈 무공서가가 하오밀문의 현주소
였다.
"이쪽으로 오너라."
맨 안쪽에 있는 서가 뒤편에서 강웅삼이 4인을 불렀다.
"이곳이 조사님께서 남겨주신 무공이 있는 곳이다."
"오셨습니까, 사부님!"
석실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5명의 인물이 강웅삼을 향해 고개를 숙였
다. 강웅삼을 비롯한 수뇌들이 하오밀문의 미래라 하였던 영재들이었
다.
"수고들 하는구나. 진전은 있느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만……."
20대 후반의 장한이 계면쩍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호! 천하십대고수였단 말이 맞기는 맞는 것 같구먼?"
벽면을 쳐다보던 야혼이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출
입문에 면해 있는 벽면까지 포함하여 전부 6면으로 되어있는 석실의
각 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하오비동 입구에 있는 것처럼 편액으로 되어있는 게 아니라 석벽 위에
새겨진 글이었다. 극강한 내공이 없으면 결코 시전할 수 없는 고
도의 수법임에는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마치 붓으로 써놓은 것
처럼 정교했다.
"사형들께 인사해라."
"사형?"
사형이란 말에 야혼의 입꼬리가 홱 비틀렸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사
형이란 자들을 면면히 훑어보던 야혼의 표정이 마지막 인물의 얼굴에
머물면서 환하게 밝아졌다.
이곳에도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가 5명 중에 끼어있었던 것이다.
"야혼입니다, 사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른 4명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여인 앞으로 다가선 야
혼이 그녀의 손을 들어올리며 흔들어 댔다.
'허미 부드러운 거. 흔들린다. 흔들려.'
내심 쾌재를 부르며 여인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펑퍼짐한
옷을 입은 여인을 가늠할 때 지금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곤 했다. 손의
흔들림에 맞춰 가슴에 기복이 생겨나면 일단 목표물로 설정해 두는 그의
버릇이었다.
"나는 매난설(梅蘭雪)이다. 그리고 이 손 좀 놓아주겠느냐."
여인의 입에서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순간 동굴 안을 차갑게 식어버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여인만 보면 다른 건 안중에 두지 않는 야혼에게 그런 느낌이 들리는
만무했다.
"손이 참 곱군요, 사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한쪽 눈을 찡끗하더니, 이내 아쉬운 얼굴로 손
을 놓았다.
"연작시주, 이쪽에 있는 사형들께 인사나 하시게."
몸을 돌려 다시 벽면을 주시하고 있는 매난설에게 여전히 시선을 주
고 있는 야혼의 귓가에 추기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혼이오."
"육만우(陸萬羽)다."
자신을 육만우라 소개한 인물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강웅
삼 때문에 참고 있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내 인상을 풀며 나
지막하니 동료들을 소개했다.
"여기 둘째는 구칠우(俱七羽), 셋째는 서영상(徐領相), 그리고 막내
는……."
"초영완(草英頑)입……."
야혼을 향해 포권을 취하던 초영완이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야혼의 눈빛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공대의
말이 나올 뻔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머릿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강렬한
눈빛이었다.
'애도 한번 흔들어봐?'
초영완의 얼굴을 노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내
의 얼굴이 자신보다 잘생긴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소 왜소해 보이는 몸
에 커다란 눈까지, 머리만 풀어놓으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아름
다운 얼굴이었다.
'아서라, 며칠 있으면 알게 될 터인데…….'
초영완도 손을 잡고 흔들어 보려다 이내 포기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앞으로 한 달간은 같
이 생활할 터인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럼 수고들 하거라."
"일단 십전순가 실전수(失傳手)인가 하는 작자가 남긴 기술을 좀 볼
까?"
강웅삼을 배웅한 야혼이 뒷짐을 진 상태로 매난설이 있는 벽면으로
다가갔다.
"공공십팔수(空空十八手)?"
한 벽면의 절반 정도를 채우고 있는 무공의 명칭이었다. 아래쪽까지
쭉 읽어가던 야혼이 이내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름이 좋아 공공십팔수였지, 현란한 손 기술에 불과할 뿐, 무공이라
하기에는 그 위력이 너무 약했다.
일수에 18번의 손을 쳐내는 기법이라 하였지만 그 동작대로 따라하
면 힘을 실을 수가 없었다. 일반 양민들의 싸움에서나 쓰일 수 있는 수
법이었다.
"밥벌이에 이용하면 딱이겠다."
밤 직업인 도박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기술에 공공십
팔수가 더해진다면 최고의 기술이 나올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봐! 야혼이라 했나?"
공공십팔수를 몇 번 읽어보고 두 번째 벽면으로 다가가던 야혼 귓가
에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혼의 무례한 행동을 보다 못한 서영상이 나선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육만우와 구칠우 역시 인상을 쓰며 노려보았다.
"에이! 먼저 왔다고 텃새부리지 말라고. 그냥 한번 둘러보고 갈 테니
신경 끄쇼."
세 사람을 흘낏 쳐다본 야혼이 이내 벽면에 집중했다.
"바로 이거야!"
염라환희소(閻羅歡喜笑)란 글귀를 발견한 야혼이 환한 얼굴로 손뼉
을 쳤다. 염라환희소 역시 무공이라 할 수 없었다. 가루에서 웃음을 파
는 기녀들이 가져야할 마음가짐 따위를 적어둔 글귀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야혼의 얼굴은 신중했다. 마치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한자 한자 꼼꼼히 살폈다.
"이 자식이!"
보기 좋게 무시당한 서영상이 거친 음성을 흘리며 야혼을 향해 발을
날렸다.
벽면에 적혀있던 무공의 한가지인 무변무적퇴(無變無敵腿)였다. 상당
기간 연마했는지 허공을 가르는 서영상의 발길에서 제법 날카로운 기
운이 느껴졌다.
"퍽!"
"아이고!"
물컹!
서영상의 발길을 허용한 야혼이 넘어질 듯 앞으로 쏠리며 초영완을
껴안았다.
'아이고, 역시 맞았어. 감히 야혼의 눈을 속이려고, 5년이다. 요년아.'
손안 가득 느껴지는 육질에 등에서 밀려오는 고통도 잊었는지 야혼
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러나 초영완에게 보이는 행동은 그의 내심과는 전혀 달랐다.
"미안하오 초 사형."
"아……아니 괜찮……."
귓불을 살짝 건드리며 말하는 야혼의 목소리에, 잔뜩 얼굴이 붉어진
초영완이 말을 더듬었다. 가슴을 허락했다는 것보다 여자임을 들켰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곤혹스럽게 했다. 지난 3개월을 숨기고 있었는데 처
음 만난 사내에게 발각되어버린 거였다.
"고개 돌리지 말아. 저들이 눈치챈다고."
아주 친절하게 초영완의 귓전에 속삭인 야혼이 몸을 돌려 서영상을
쳐다보았다.
"씨팔! 사형이라기에 참으려 했더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아무리 하찮은 문파지만 가장 큰 죄가 하
극상이라는 걸 모르나?"
"쿡! 까고 자빠졌네 씹새끼. 야, 이 새끼야, 이 하찮은 곳에 뭘 얻어
처먹겠다고 기어들어 왔냐. 여기서 파고 있으면 그 십전순가 하는 작자
의 무공이라도 얻을 줄 알았냐?"
"아미타불! 연작시주. 말이 너무 과하오이다. 저들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겠지요. 뛰어난 기재들이 무공까지 속이고 들어온 걸 보면 말이오.
그냥 넘어가시게."
"허억!"
다섯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이런 개새끼!"
휘-익!
"니미씨발타불! 왜 나에게 주먹질이냐 이 개보살놈아."
야혼이 날린 주먹을 피한 추기영이 상스런 욕설을 토해내며 여호치
의 등뒤로 도망을 쳤다.
퍽!
"으아악!"
여호치의 등뒤에 숨은 추기영을 쫓아가던 야혼이 처절한 고함을 지
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너……."
"연장아 좀 아파도 참고 숨을 골라라. 하나, 둘. 하나, 둘."
여호치의 발길에 강타 당한 아랫도리를 감싸쥐며 헉헉거리는 야혼을
향해 태웅이 호흡을 고르라는 듯 솥뚜껑 만한 손으로 등을 두드렸다.
"개.자.식.아. 두드리니까 더 아프……."
툭, 툭, 아프게 쳐대는 태웅의 손 때문에 몸이 울리자 아래쪽에서 조
금 전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왔다.
"아미타불, 연작시주. 상대는 저쪽인데 왜 나에게 주먹을 휘두르십니
까. 이 개자식아."
"너 이 새끼…… 무.공을 익히고 있었어."
"병신아 무공이 하루아침에 익혀지냐. 내가 말해줬어."
여호치는 야혼이 추기영에게 손을 휘둘렀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다
섯 명의 제자들이 무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그녀도 알지 못
했다. 그러다 야혼을 공격하는 서영상의 몸놀림을 보고야 알아차렸던
것이다. 단순한 무변무적퇴가 아니었다. 숨기고자하는 의도로 내공을
전혀 운용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동안 무공을 익힌 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몸놀림이었다.
그런데 야혼은 추기영이 그 사실을 바로 알아차리자 그 또한 지금껏
무공을 숨기고 있었다고 지레 짐작하고 배신감에 공격을 했던 거였다.
"야이! 썅……그렇다고 내 재산목록 일호를 그렇게 차냐?"
야혼의 불만 어린 투덜거림은 들은 체도 않고 육만우 일행을 향해
여호치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모르지만 서로 신경 끕시다.
우리도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니까."
여호치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솟구쳐나오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지금껏 보아왔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
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기세가 풍겼다.
'가만히 있어 자식아. 너는 저들의 1초상대도 안돼."
인상을 쓰며 육만우를 향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야혼의 귓가에 여
호치의 전음이 들려왔다.
'씨팔! 그럼 너에게도 1초를 못 버틴다는 말 아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야혼이 다시 드러누웠다. 올해 들어 주변에 이
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외에는 거의 보지도 못했던 무림인들을 무더기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름 모를 노인네에서부터 마도련의 시궁창 그리고 화소
미와 여호치까지.
감히 발치에도 따라가지 못할 고수들이었다.
"야혼이라 했나? 자네 말이 맞네. 우린 십전수의 무공이 필요해서 왔
지만 하오밀문의 제자가 되었네. 십전수 그분의 무학을 얻던지 못 얻던
지 하오밀문을 위해 한번 정도는 일을 할걸세."
"좋아 좋다고. 나하곤 상관없으니까."
육만우의 말을 듣던 야혼이 툭툭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자신 또한
하오밀문이 좋아서 속가제자가 된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던 건 보고 나가 임마. 나머지는 그래도 도움은 되니까."
밖으로 나가는 야혼의 뒤통수에 대고 여호치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
는 벌써 다 훑어보았다. 무림인이 보았을 때는 별 것 아닌 무공들이었
지만 일반 양민들에게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시전에서 통이나 돌리는 놈에게 무슨 필요가 있다고."
입을 삐쭉거리면서도 야혼은 벽면으로 다가섰다. 세 가지 무공이 있
었다. 조금 전 서영상이 보여주었던 무변무적퇴(無變無敵腿)라는 발기
술과 추적술에 써먹는 만리추행술(萬里追行術), 그리고 마지막은 무풍
무영술(無風無影術)이라 쓰인 경공법이었다.
"야혼 너에게 가장 필요한 기술이야. 그러니 잘 보고 익혀둬."
"그래 맞다. 하오밀문의 업종에 딱 어울리는 기술만 남겨 두었구먼.
여기 있는 것 다 익히면 절대 밥 굶는 일은 없겠다 씨팔!"
"아미타불! 연작시주 말이 맞네. 십전수인가 하는 그 양반은 일부러
거지같은 무공만 남겼네."
"그건 뭔소리여?"
추기영의 말에 야혼이 눈을 치떴다. 일부러 무공 같지 않은 것들만
남겼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머리통 속에 여자만 채우지 말고 책도 좀 보라고 하지 않
았나. 책이라곤 허구한날 오입질하는 것들만 보고 있으니……."
"대가리 껍질을 까버리기 전에 대답이나 해라."
"십전수 그 양반은 하오밀문이 무림문파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건 돌 중 녀석의 말이 맞다. 하층민들을 돕기 위해 만든 문파인데
강한 무공이 왜 필요하겠냐?"
추기영의 단정짓는 듯한 말에 태웅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너희들의 말은 강한 무공이 있으면 그때부터는 하오밀문
이 아니다 이거냐?"
"두말하면 잔소리지. 연작시주에게 돈이 남아난다면 시전에서 사기도
박은 하지 않을 것 아닌가."
"이런 썅! 그게 어찌 사기도박이냐 개자식아. 고기 처먹고 오입질하
는 네가 가짜중이지."
"아미타불! 술 취한 새끼들의 돈을 털어먹는 게 사기가 아니면 뭔가
사기란 말인가. 연작시주."
"됐어 새끼야."
딴에는 하오밀문에 강한 무공이 있으면 더 이상 문파가 유지될 수
없다는 추기영의 말이 맞다는 생각에서인지 한발 물러났다.
강호 상에 쟁쟁한 이름을 날리는 문파가 하찮은 기녀들이나 점소이
등의 뒤를 봐줄 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문파의 명예에 누가 된다는
생각에 배척하고 떠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럼 여기서 뭐 빠지게 쳐다보고 있어봐야 헛일이잖아."
이번에는 위장 잠입한 다섯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미 강한 무공
을 가지고 있는 자들인데 헛고생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이곳이 마지막 은거지였다는데 찾아보면 나올지도 모르지.
겁천십웅이니 하며 지랄을 떨어봐야 지도 인간인데. 뭔가 남겨두었을
지도 모르지."
태웅의 말 또한 다섯 명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인간이란 묘한 구석
이 있어서 버려야하는 물건임을 알면서도 한곳에 처박아 두는 습성이
있다.
하물며 천하에서 수위를 다투던 그런 무공임에야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없애지 않고 어딘가에 숨겨두었
을 거라는 말이었다.
"나는 관심 없다. 너희들이나 찾아서 잘해 봐라."
"그럼 연장 너는 왜 이곳에 들어오고 싶어서 지랄발광을 했냐?"
"필요한 게 있을까 하고 들어왔지 뭐."
"무공들 익혀라. 나는 서가에 볼일이 있다. 보현보살 저놈의 말대로
독서나 해야겠다. 아이고 아파라 쌍!"
걸음을 옮기던 야혼이 갑자기 욕설을 뱉어내며 여호치를 노려보았다.
하초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던 거였다.
"너 씨팔! 내 새끼 낳아줄 것 아니면 차지마 알았어? 아이고 알이
야."
"괴물이군……."
여인네들 앞에서 태연하게 아랫도리를 주무르는 야혼을 쳐다보던 육
만우가 중얼거렸다. 또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다.
저들이 나눈 대화로 보면 시전에서 사기도박을 하는 자들이 분명할
진대 단순한 무공 몇 가지만 보고 십전수 구약종의 의도를 정확하게
추론해 냈던 것이다. 더구나 여호치의 무공은 상당했다.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강자였다. 묘한 일행이 들어왔다는 생각뿐
이었다.
"곰시주는 어쩔 텐가."
"음…… 일단 이곳까지 왔으니까 재미 삼아 찾아보기나 하지 뭐."
두 사람은 의견일치를 보았는지 각자 자리를 잡고 벽면을 주시했다.
적혀진 글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호치시주. 연작은 뭐하고 있는지 한번 찾아보고 오시지요."
"싫어 임마. 내가 왜 그 개차반을 찾아가냐?"
"둘이 친하지 않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남자 거시기를 만져주는 여자
는 기생하고 부인밖에 없다고 알고 있는데…… 호치시주는 기생이 아
니질 않습니까. 아미타불!"
"그럼 내가 너의 거시기를 차면 네가 내 부인이 되는 거냐?"
"곰새끼 너는 대가리 처박고 벽이나 보거라. 개불알타불아."
두 사람이 노닥거리는 모습을 쳐다보던 여호치가 고개를 흔들며 밖
으로 나왔다. 아랫도리를 차버린 행동으로 인하여 어지간히 풀렸다고는
하지만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았다.
야혼을 찾아 서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여호치가 그럼 그렇지 하
는 얼굴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동굴 내부에 있던 몇 개의 횃불을 가져다두고 서가 한 칸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 야혼의 모습 때문이었다.
"너 이것 때문에 속가제자가 된 거지."
"어! 왔냐? 대부분이 본 것밖에 없다 씨팔!"
여호치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보낸 야혼이 서가를 가리키며 투덜거
렸다. 색공편. 야혼이 서있는 서가의 이름이었다. 무공이라는 이름을 빌
렸을 뿐 거의가 방중비술을 다루는 책자였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1)- 태을건곤심법(2)
"이걸 다 봤다고?"
거의 200여권 정도 되는 책 중, 야혼이 골라놓은 것은 20권이 채 안
됐다. 단지 그것만 처음 보는 책이라는 말이었다.
"내가 독서량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 하냐. 소녀경을 가지고 글
을 배운 나다. 여기에 없는 책도 50권은 더 봤다고. 역사가 꽤 되었다
해서 뭔가 있을 줄 알았더니 괜한 헛걸음했네, 씨팔!"
"정말? 도대체 네 부모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여호치가 측은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소녀경이라는 방중비술
책으로 글을 뗐다는 말에 동정심이 일었다. 결코 평범한 태생이 아니라
는 말이었다 .
"부모? 그러니까 뭐 엄마나 아버지 이런 걸 말하는 거냐 지금?"
"응……."
"아버지는 모르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소녀경으로
글을 배웠고."
"그랬구나……."
"나 불쌍하지, 아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쌍한 놈은 없을 거야. 부
모도 없지, 가진 것도 없지. 그러니까 불쌍한 놈 살려주는 셈치고 한번
만 주라. 응?"
"에라! 썅!"
잠시 동안 동정의 낯빛이던 여호치가 이내 인상을 구기며 야혼의 아
랫도리를 향해 발을 날릴 채비를 했다.
"차지마! 한번만 더 차면 소문 내버린다. 너 거시기도 보현보살의 대
가리와 같이 생겼……."
"아예 잘리고 싶은 모양이구나."
조그마한 소도를 꺼내든 여호치가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당혹스런 빛이 역력했다. 얼굴만 본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의 신체 중 가장 큰 비밀마저 엿보았다는 말이 아닌
가.
"그러니 차지 말라고. 너는 나를 안 차고, 나는 말을 안 하고. 그럼
된 거잖아. 가서 일봐라. 나는 지금부터 독서에 열중할 테니까."
"나쁜 새끼."
야혼을 노려보던 여호치가 휙 몸을 돌렸다.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었는데 그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쓸데없는 약점
만 잡히고 말았다.
"기다려 봐라.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방법이 있나 한 번 찾아볼게."
안으로 들어가는 여호치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이내
퍼더버리고 앉더니 옆에 쌓아둔 책을 집어들었다.
"모름지기 사내란 이런 책을 봐야지. 흐미, 이 몸 좀 봐라, 완전 예술
이다, 예술."
한 장 넘기기가 아쉬운 듯 계속해서 남아있는 장수를 확인하며 천천
히 책장을 넘겼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은 책장을 뚫어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한편에
추려두었던 책이 점점 줄어들자 야혼의 인상도 조금씩 찌푸려지기 시
작했다.
한 장 한 장 세밀하게 정독을 하는데도 금방이었다. 상당히 두꺼운
책도 있었으나 거의 절반 이상이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보니 실제 내용
은 별로 없었다. 까닭에 한 권을 독파하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저……."
"어? 초 사형!"
아쉬운 얼굴로 마지막 권을 집었을 때 초영완이 다가오며 야혼을 불
렀다.
그러다 야혼 주변에 널려있는 책들을 쳐다보더니 이내 얼굴을 붉혔
다. 민망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춘화들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기 때문
이었다.
"신경 쓸 거 없어요, 사형. 입 꽉 다물고 있을 테니."
처음에야 어찌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한발 물러난 상
태였다. 전부가 무림인들이라는데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될 터였다.
혹시 기회가 생긴다면 몰라도.
"근데…… 몇 살이오?"
"17살입니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쯧쯧!"
'어쩐지 작다 했더니 어린애였구먼. 그래도 나이에 비해서는 상당하
던데……조금만 더 크면.'
안됐다는 듯 혀를 차고는 있지만 내심은 그게 아니었다. 간밤에 쥐어
보았던 소담스런 가슴의 감촉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 초영완이 재빨리 석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 있기가 민망했던 탓이었다.
'쩝! 아서라. 야혼아 상대는 무림인이다.'
초영완의 탐스런 엉덩이를 유심히 쳐다보던 야혼이 이내 고개를 돌
려 책장 위로 눈을 묻었다.
"아이고 이곳에 웬 경전이 이리도 많은가. 연작시주께서는 미리 말을
해주시지 않고…… 아미타불!"
한참을 책에 열중하고 있는데 바로 곁에서 희열에 찬 추기영의 목소
리가 들렸다. 마치 열반에 들기 전 고승이 내지른 대오각성의 외침소리
같았다.
"에라 이 돌중 새끼야. 저게 춘서(春書)지 불경이냐?"
"허허! 모든 불경들의 마지막 끝나는 말이 경이라는 걸 모른단 말인
가. 그러니 무식한 곰새끼란 말을 듣는 것일세. 자 보게나 곰시주. 저기
보이는 소녀경도 경으로 끝났지, 여기 있는 춘화경도 경으로 끝났지 않
은가. 아미타불!"
"그래서 경으로 끝났으니까 전부 불경이다 이 말이냐? 아예 이름을
바꿔라. 소녀불경이라고."
"그것 또한 좋은 생각이네 곰시주. 그런데 곰시주는 왜 자리를 까는
가. 들어가서 십전순가 하는 염뱅할 종자의 무공이나 찾지."
"너 같으면 그런 곳에 무공을 남겨 두겠냐?"
간밤을 홀딱 세우며 5가지 무공을 탐독했으나 눈물만 흘리다가 포기
하고 말았다. 300년 동안이나 찾지 못했던 무공을 찾아낸 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인 것이다.
"연작시주는 간밤에 독서를 많이 하셨구먼. 문사의 기질을 타고났나
보군요."
야혼이 쌓아둔 책들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추기영이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마치 재미있는 책을 골라달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우리 그만 나가자. 더 이상 볼 책도 없다."
하지만 야혼은 자리를 깔고 자세를 잡는 두 사람을 향해 심드렁하게
말했다. 색공 같은 게 있을 줄 알고 들어온 곳이었는데 도움되는 건 아
무 것도 없었다. 그나마 생경한 책들조차 다른 책의 내용을 뽑아내서
짜깁기 한 게 대부분이었다.
한달 동안 개방을 해준다 했었는데 하루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연작시주 기다리기 뭐하면 복습이나 하시게. 한번 보는 것보다 두
번 보는 게 더욱 도움이 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일세. 정력 증강에 말
이네. 그리고 소승은 이곳에 있는 경이라 쓰여진 글들이 불경으로서 가
치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니까……."
벌써 입안 가득 침이 고이는지 목젖이 울렁거릴 정도로 침을 삼키며
야혼을 쳐다본다.
"볼게 없어. 머릿속에 전부 들어있는걸 다시 보면 뭐하냐? 새로운 기
분이 들어야 다시 보지."
"그럼, 연장 너는 이곳에 있는 책을 전부 암기하고 있다 이 말이냐?"
"당연하지 야혼이란 이름 값을 하려면 그 정도는 기본 아니겠냐."
"도대체 얼마나 보면 암기가 가능하냐? 정-말 대단하다."
태웅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야혼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인 것은 알
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책 내용까지 암기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런 책이야 한번 보면 머릿속에 팍팍 박히는 거지, 몇 번씩 볼 게
뭐 있냐. 근데 정말 안 나갈래?"
"아미타불! 고맙네 연작시주. 속가제자가 되게 해주어서."
"이걸 다보고 가겠다고?"
"아니네. 두 번씩 보고, 아니 시주처럼 전부 암기하고 가야겠네. 그리
고 말시키지 말게나, 열불 터지려고 하니까."
야혼을 향해 인상을 찌푸린 추기영이 철탁을 들어 보이더니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차하면 철탁을 던져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
다.
"개자식들……."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이내 책을 집어들었다. 이곳 말고도 다른 서가
에 많은 책들이 있지만 적성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결코 보고 싶은 생
각이 없었다. 결국 추기영의 말대로 복습이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뭔가 발견했나?"
야혼 일행을 주시하던 육만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야혼 일행의
행동이 너무 신중했던 까닭이었다. 침삼키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
만 사락사락 들려올 뿐 벌써 두 시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책만 보
고 있는 3인의 행동이 이상했다.
더구나 마치 무슨 대단한 비전(秘傳)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가끔씩
나누는 의미심장한 눈빛까지.
"대형 한번 더 서가를 찾아볼까요?"
구칠우가 육만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머지 무공을 찾기 위해 벌써
1년을 머물렀고 더 이상 나올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들 또한 색공편을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그곳도 뒤져보았으나 단순한 방중술(房中術)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해보세."
5명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야혼 일행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문득 자
신들도 뭔가 해야겠다는 조바심이 쳐졌다.
"어이! 영완 사형."
무공편이라 적혀있는 서가 앞에서 서성대는 초영완을 야혼이 불렀다.
"무슨 일로……."
여전히 낯뜨거운 춘화가 그려져 있는 춘서를 펼쳐놓은 야혼 앞으로
다가온 초영완이 더듬거렸다.
"야, 연장, 독서하는데 방해되니까 좀 꺼져줄래?"
야혼의 목소리 때문에 깜짝 놀란 태웅과 추기영이 섬뜩한 얼굴로 노
려보며, 야혼이 옥에 가기 전에 선물했던 주먹과 철탁을 동시에 들어올
렸다.
"알았어 새끼들아. 따라오쇼 사형."
옆에 쌓아두었던 10권 정도의 책을 주워든 야혼이 한쪽 구석 후미진
곳으로 초영완을 데려갔다.
"사형이 나 좀 도와줘. 이번에 새로운 체위를 발견했는데 마땅히 시
험할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저 새끼들은 책 보느라 정신없고 여호치는
여자라서."
"감히……."
초영완의 눈꼬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랐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당장이라도 손을 내뻗을 것처럼 분노의 빛이 어렸다.
자신이 여자라 해서 희롱하는 행동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무공도
전혀 익히지 않은 파락호 같은 자가.
'참아라, 초령아. 저따위에게 손을 써봐야…… 응?'
이내 마음을 다지고 자리를 뜨려던 초영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춘
서를 들여다보며 자세를 잡고 있는 야혼의 행동 때문이었다. 무림인들
이 내공심법을 운기할 때 취하는 가부좌(跏趺坐)였던 것이다.
"아! 다른 게 아니고 여기 있는 학교경이란 자세는 원래 무릎을 꿇
어야 하거든? 근데 여기에 적혀있는 것은 지금 이 자세란 말이야. 또한
10천 7심이어야 하는데 4천 4심이고."
순간 초영완의 신형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4천 4심이란
야혼의 말 때문이었다. 야혼이야 교접을 할 때 4번은 약하게 4번은 깊
게 하라는 의미로 말했지만 초영완이 받아들 건 그게 아니었다. 호흡법
이었다. 운기행공을 할 때 진기의 운행에 맞추어 숨을 쉬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도와 줄 거야 사형?"
"그러지…… 뭐."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도, 야혼이 원하는 자세가 낯뜨거운 묘한 자세
라는 사실도 잊었다. 목메게 찾던 십전수 구약종의 내공심법을 찾았다
는 생각뿐이었다.
기묘한 자세였다. 가부좌를 한 야혼 위에 초영완이 포개 앉았다. 마
주보는 게 아니라 한 방향을 바라보는 자세였다.
"이상하네? 이 상태로 어떻게 진퇴를 하지?"
초영완의 허리를 붙잡고 몇 번이고 들어보려던 야혼이 이내 포기하
며 중얼거렸다.
"4천 4심 말고 또 다른 말은 없었나……요."
"엥? 사형도 관심 있나보네. 물론 있지, 처음부터 진도가 안나가서
그랬던 것뿐이라고."
'어라! 몸을 떨어? 나이도 몇 안된 게 조숙하네?'
초영완의 몸의 떨림이 내공심법 때문이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야
혼이 내심 음흉한 생각을 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걸어다닐 때는 몰랐는데 바로 위에 앉혀놓고 보니 그녀의 엉덩이 또
한 푸짐했다.
"근데 그건 남자의 정력증강에 필요한 거지 사형에게는 별로……."
"으음……! 그래도 알고 싶어……요."
귓전에서 나지막이 소곤대는 야혼의 목소리에 진저리치듯 몸을 부르
르 떨던 초영완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이거 정말 정력을 증강시키는 기술은 맞나보네."
그녀의 엉덩이와 맞닿은 부분에 힘이 들어가자 야혼이 흡족한 얼굴
로 중얼거렸다.
'허엇!'
터져나오는 비명을 삼킨 초영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정확하게
자신의 국부쪽을 찔러오는 이물감 때문이었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
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녀의 귓전으로 야혼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시 제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거참 이상하단 말이야. 교접을 할 때는 발바닥을 문질러주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말은 맞는데 정수리에 생각을 집중하라고 해 두었거든?"
'그럼 용천혈과 백회혈부터 운기를 시작한다는 말?'
당혹스러운 낯빛과 떨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했
다.
구약종은 내공심법을 춘서 속에 숨겨두었던 거였다.
그것도 단순하게 위장을 해둔 정도가 아니라, 춘서의 내용을 조금씩
바꾸는 방법으로 기록해 두었다.
300년의 세월동안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방중
술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 무림인은 결코 없을 테니까. 그건
색공의 고수라해도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 후로도 야혼의 실습은 하염없이 이어졌고 초영완은 등이 젖어들
정도로 진땀을 흘리면서도 야혼의 무릎 위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사형! 다했으니까 내려와. 다리 아파 죽겠다."
"아……알았어요. 사제."
야혼의 무릎 위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태을건곤심법(太乙乾坤
心法)에 골몰하고 있던 초영완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어맛!"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나지막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을 일
으키던 초영완의 엉덩이가 발기해있던 야혼의 그곳을 사정없이 짓눌러
버린 것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사형. 본능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4천 4심은 호흡법이예요."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2)-태을건곤심법(3)
"무슨 말이야, 사형."
"방금 전 사제가 했던 방법대로 하면서 호흡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기억할지 모르지만……."
그 정도는 말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전수 구약종의 내
공심법을 찾아낸 당사자인 야혼은 전혀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정력이 좋아질까?"
"풋!"
제법 심각한 어투로 묻는 야혼의 모습에 초영완이 나직한 실소를 흘
렸다. 참으로 편하게 사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300년 전 강호 십대고수의 일인이었던 구약종의 무공을 한낱 정력제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금방 몸으로 확인……."
'어맛! 내가 무슨 소리를…….'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초영완이 황망히 입을 닫았다.
"그걸 알 수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 거라고. 사형 때문이었는지 아니
면 그 내공심법 때문인지……."
"허억! 알고 있었나……요, 사제도?"
"사형 비밀로 해줘. 저놈들이 알면 안되거든?"
물론 처음에야 몰랐지만 달라진 부분을 연결하자 색공과는 전혀 다
른 문장이 만들어졌다. 직감적으로 구약종의 내공심법이란 사실을 알아
차렸다.
"알았어도 오히려 제가 부탁하려……."
야혼의 말에 초영완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그녀가 바라
던 바였다. 육만우 일행과 사형제지간이 되었지만 단지 무공을 찾기 위
해 같이 있을 뿐, 하오비동에서 얻은 기연까지 나누고 싶은 생각은 추
호도 없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육만우 일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마워 사형!"
'어이그, 정말 깨물어주고 싶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초영완을 쳐다보던 야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여자를 다룰 때 상투적으로 써먹는 방법에 그녀가 제대로 걸려
들었다. 상대방이 바라는 게 있을 때 미리 선수를 쳐 이쪽에서 원
하는 것처럼 하면 몇 배의 효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어주는데 최고의 방법이었다. 또한 그런 방법을
썼을 때 효과는 바로 나타난다. 더하여 생각보다 효과가 오래 지속된다
는데 장점이 있었다.
"……사제 조금 전 그거 다 기억해?"
바로 이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까 전전
긍긍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손수 가르쳐주려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거 모른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무림인만
아니면…… 아니 나이만 좀 들었어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림인이면서도 너무 순순하다는 게 문
제였다.
'에라! 참자, 참아. 가슴도 작던데.'
내심 갈등을 하던 야혼이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다.
"그 정도만 알아도 괜찮아. 그리고 오늘은 피곤할 테니 내일 와, 방
중비술에 관해 모든 걸 전부 전수해 줄 테니까. 앞으로 이곳에 계속 있
을 거면."
"무슨……."
"남자라면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거야. 부끄러운 게 아
니라고. 안 그러면 더 이상하게 본단 말이야."
"아…… 알았어. 사제."
야혼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초영완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여자라고
의심받지 않기 위해 춘서를 보라는 야혼의 말을 알아들었던 거였다. 아
울러 그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무공을 찾아보자고 했던 의미까지.
과연 그것만 있었을까.
"훗!"
초영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야혼이 싱겁게 웃었다.
'풋풋한 애 데리고 노는 것도 그것 못지 않게 쏠쏠하거든. 꼭 해야
재민가?'
"연작 쟤 사내 맞아?"
나지막이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챙기는 야혼을 향해 여호치가 다가
오며 물었다.
그녀 또한 초영완의 정체가 궁금했다. 예쁘장한 얼굴과 왜소한 몸매
는 아무리 보아도 남장여인처럼 느껴졌던 것이었다.
"내가 누구냐. 그걸 확인하려고 부르지 않았겠냐. 내 것에는 좀 못
미치지만 건실한 물건을 가진 남자다. 너도 봤지 내 그 우람한…… 야!
말하는데 그냥 가는 법이 어디 있냐."
팔뚝을 들어올려 열을 올리는 야혼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여호
치가 이내 몸을 돌렸다.
다음날부터 하오비동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초영완이 야혼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춘서를 뒤적이며 이
것저것 묻기 시작하자, 매난설과 여호치를 제외한 전원이 색공편이라
쓰여진 곳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뭔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춘서를 뒤적이고 있
으나, 무공을 발견한다는 사실 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는 와중에 초영완에 대한 야혼의 성교육이 시작되었다.
"우선은 여인을 선택하기 전에 나에게 해(害)를 끼칠 여인인가 아니
면 도움을 줄 여인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런 여인에게도 일정한 규격이
있는데 소녀경에 의하면 이를 가리켜 입상여인(入相女人) 즉 바람직한
규격에 해당하는 여인이라 부른다."
"아미타불! 그럼 입상여인과 교접을 하면 법도에 따르지 않아도 몸
이 상하지 않는다 이 말인가 연작시주?"
한참을 책에 몰두하고 있던 추기영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심심하
던 차에 잘됐다 싶은 얼굴이었다.
"그동안 공부 좀 했구나 제자야. 입상여인이란 무엇이냐. 천성이 상
냥하고 목소리에 윤기가 있으며, 가는 머리칼은 칠흑처럼 검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에, 그곳에는 털이 없으며 항상 냇물처럼 애액이 넘쳐흘
러야 하는 게야."
터럭이 없다는 말을 힘주어 강조하며 여호치가 있는 석실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미타불! 앞에 4가지야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나머지는 벗
겨보고, 해봐야 하지 않은가."
"그래서 수치로 기록해 둔 게 있다. 잡사비신(雜事秘辛)이란 책을 펼
쳐봐라, 곰 새끼."
태웅이 앞에 쌓여있던 책 중에서 잡사비신을 꺼내 이곳저곳을 뒤적
거리더니 이내 야혼을 쳐다보았다.
"앞에서 서너 장만 넘기면 있다. 그곳에 보면 이렇게 쓰여있을 게다.
어깨는 1자 6치, 엉덩이는 어깨보다 3치가 부족해야 하고, 어깨에서 손
가락까지의 거리는 2자 7치, 손가락에서 손바닥까지는 5치로 화사하게
길어야 한다고 말이다. 맞는가 곰 새끼."
말을 하는 와중에 초영완의 몸은 시험도구가 되었다. 어깨를 짚어보
고 팔을 길이를 잰다며 앞으로 쭉 뻗어내는가 하면 명주고름 같은 손
가락을 쓰다듬는 등 별 짓을 다했다.
"마, 맞다, 연장."
그런 야혼의 행동에는 관심도 없는 듯 태웅이 맞장구를 쳤다. 비단
태웅뿐만이 아니었다. 책을 보는 척하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머지
3명의 얼굴에도 감탄의 표정이 서렸다. 내용이야 대충 안다고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수치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
이었다.
"한가지에 몰두하다보면 나처럼 되는 거니 놀라지 말아라, 임마."
"그런 머리를 가지고 다른 걸 했으면 벌써 성공했을 것 같아서 그런
다."
태웅의 말에 모두들 동의하는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인생 우습게 보지 마라. 10년 넘게 노력해서 얻은 거다."
"그 세월동안 연마한 오입질과 사기도박이니 어련하겠냐?"
"니미시벌타불! 곰 새끼. 왜 자꾸 연작시주의 말을 끊고 지랄이냐. 듣
기 싫으면 저 구석에 처박혀서 손장난이나 해라 이 개자식아."
태웅에게 눈을 부라린 추기영이 들고 있던 춘서 한 권을 던지며 고
함을 질렀다.
"계속하시게 연작시주, 아미타불!"
"알았다 제자야. 그럼 위에 있는 사항을 전부 만족하는 여인이 있느
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 여인은 고금제일의
미녀일 테니까. 그래서 등장한 것이 미청, 안수, 순홍, 치백이다. 미청이
란……."
"당신들은 참으로 묘한 사림들이군요."
매난설이 여호치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문주인 강웅삼이 데리
고 왔을 때만해도 자신들과 같은 목적을 지닌 자들이거니 하고 생각했
었다. 그런데 며칠 겪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첫 날 석실 안쪽에 있던 5개의 무공을 쓱 훑어보고는 그 다음부터는
춘서만 죽어라 파고 있다.
마치 춘서 속에 비밀이 있는 것처럼. 그들의 행동 때문에 육만우를
비롯한 세 사람마저 끼여들었으나 아직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
었다.
"찾아낸 무공은 하오밀문에도 전해주실 건가요?"
"네……?"
느닷없는 여호치의 물음에 매난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이었다. 여호치의 짐작대로 그녀는 한 가지 무공을 찾아
냈었다. 허허환환보(虛虛幻幻步)라는 보법이었다.
석실 안에 적혀있던 만리추행술이란 추적술을 분석해서 찾아냈던 거
였다.
"1년만에 찾아냈어요."
매난설이 순순히 시인했다. 벌써 1년이란 시간을 하오비동에 머물러
있는 자신들이다. 순수한 의도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십전수의 무공을
찾기 위해 왔는데 1년 동안 아무소득도 없이 머물러 있다는 게 더 이
상하게 보일 터였다.
"간단하게 찾았어요. 제가 주시하던 만리추행술이라는 무공에서요."
간단하게 말하고 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가 안에 있는
모든 책들에서 만리추행술의 각 음(音)으로 시작하는 책을 전부 골랐다.
그 다음에는 구결의 숫자와 일치하는 장을 펼쳐 분석한 결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떠나지 못했다. 하나의 무공을 있다는 말은 다른 무공 역
시 숨겨져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육소협과 구소협이 함께 하나를 찾았을 테이고, 서소협도 하나
를 찾았을 거예요."
"그럼 두 개의 무공이 남아있다는 말이네요?"
"그럴지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내공심법은 못 찾은 것 같아요.
그게 없으면 나머지 무공은 절반의 위력밖에 나오지 않거든요."
"우린 십만대산으로 가요. 당신들이 익힐 무공을 찾으러."
"설마……."
"맞아요. 강문주도 당신들에 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하오밀문
의 정보력을 이용하면 신분을 알아내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잡고 싶은 모양이더군요. 강한 무공을 가져오라는 것을 보면."
"가능하다고 보세요?"
"십만대산에서 살아오는 걸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진짜 하
오밀문의 제자가 되는걸 말하는 건가요."
"십만대산은 무림고수도 살아오지 못한 곳이에요."
"글쎄요. 산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겠지요. 떠나더라도 강문주의 마음
이나 알아달라고 하는 말이었어요."
매난설에게 고개를 숙인 여호치가 밖으로 나왔다. 더 이상 머룰 이유
가 없었다. 야혼이 원했기에 들어온 것일 뿐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는
장소가 하오비동이었다.
"야 연작! 먼저 나가있을 테니까 끝나면 시전으로 와라."
"그래 알았어 색시. 어디까지 했지? 사형."
"네 사제! 여기 칠손팔익(七損八益)을 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
기는 사제의 설명과 다른 것 같은데……."
"그런걸 응용이라고 하는 거야, 사형. 즉 성적취향이라 부르는 거지.
음, 좋은 예가……."
"연작시주가 젖퉁이 큰 여인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것과 같은 이치
라 보면 되네, 영완시주."
"보현보살 말이 맞다. 이 책들은 진본도 아니고 여러 번 새로 쓰여진
거란 사실은 알지? 즉 다시 쓸 때마다 그 사람의 취향이 섞여 들어가
서 이런 식으로 잘못 쓰여진 부분이 있는 거야."
실은 야혼이 응용이라고 강조하는 부분이 새로운 무공이란 사실은
초영완만이 알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육만우 일행에게 숨기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었
다.
"그런데 사제가 좋아하는 여인은 어떤 기준……."
"연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여자의 기준은 내가 알지. 우선 가슴과
엉덩이는 커야하고, 그 다음은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서 흰자위가 보여
야 함은 물론이고, 눈 가장자리가 연분홍 빛을 띠어야 하다는 것 정도
지. 그러고 보니 영완 사형 여인이라면 합당하는 조건이 되겠네. 가슴
과 엉덩이만 빼고."
"오라! 우리 곰 시주도 이젠 고수의 반열에 들어섰구먼. 감축드리네,
곰 시주, 아미타불!"
"저놈하고 같이 살다보면 저절로 외워지는 거지, 알고 싶어서 그리된
것은 아니다. 내 사형에게 한가지만 일러두지. 너무 여자 밝히지는 말
게나. 자네도 연장처럼 될까 겁나니까. 나는 처녀장가 가고 싶거든."
"나도!"
"훗!"
"저거 봐! 벌써 닮아가고 있어. 안쪽에 있는 염라환희손가 하는 무공
까지 익혔나봐, 야혼보다 더해."
처녀장가를 가고싶다는 추기영의 말에, 초영완이 살풋 미소를 짓자
태웅이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십전수의 무공을 2가지나 찾아내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빛났다. 더구나 여태껏 보고 있던 책들이 전부 방중비술에 관한 것들이
었으니 살풋 붉어진 얼굴 때문에 한결 여인처럼 보였다.
"참 사형은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이제 3개월 됐어요."
"아미타불! 그래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군."
추기영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육만우를 비롯한 3인의 행동이 흠칫
굳어졌다. 초영완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찾지 않았냐는
말처럼 들렸던 터였다.
"아님 말고, 아미타불! 이제 그만 나가자 연작시주."
"그래 가자! 이곳에 있는 것도 지겹다. 사형 열심히 해봐. 이건 내
생각인데 사형도 나처럼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럴 리는 없을 거네요, 사제."
'사제 제가 가르쳐준 대로 꼭 하셔야돼요.'
아쉬운 얼굴의 초영완이 야혼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그동안 성교육
을 받으면서 틈틈이 내공심법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혈도부터 시작
하여 진기를 움직이는 방법까지, 무공에 대한 기초를 거의 가르쳐 주었
던 것이다.
어쩌면 야혼이 하오비동에서 얻은 가장 큰 기연은 초영완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을건곤심법을 익힐 수 있는 기본을 그녀로부터 배웠기에. 더
하여 태을건곤심법의 대단함도 알게 되었다.
과거 겁천십웅(劫天十雄)라 칭해지던 자들의 무공 중 내공심법에 있
어서 만큼은 태을건곤심법이 최고라 하였다. 어떤 무공에다 적용시켜도
되고 세상의 모든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천고의 내공심법이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기연을 얻은 당사자인 야혼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
반 관심이 없는지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으니.
정력에 도움이 안되면 바로 버릴지도 모르는 인간이 그였다.
"그리고 무공을 찾지 못하다해서 서운해하지 말라고. 어차피 하오밀
문 거잖아. 이젠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텐데 한번 안아보자."
초영완을 와락 끌어당긴 야혼이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사제!'
엉덩이를 쓰다듬는 야혼의 손길에 기겁을 한 초영완이 전음으로 소
리를 질렀으나 그의 행동은 태연했다. 마치 사랑스런 동생과 이별을 하
는 듯 자연스레 초영완의 허리까지 쓰다듬더니 이내 놓아주었다.
"가자 연장아 밤이 길면 꿈도 기니라."
"저놈을 찾으려면 서대시전에 와서 오입쟁이 개차반을 찾으면 됩니
다. 아미타불!"
추기영의 불호를 마지막으로 세 사람이 떠났다.
"허! 그들이 나가고 나니까 절간으로 변했네?"
조용한 하오비동 안에 육만우의 나직한 음성이 흘렀다. 그 또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많은 사람이 살던 곳에 있다가 갑자기 폐가에 들
어온 느낌이었다.
"왠지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자들이군요."
"글쎄……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서 그럴 거야. 다시 시작해 보자
고."
하오비동 안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구약종을 비기를 원하는 5
인.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본인들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현재
까지는…….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3)-내 자리라니까?
9장 내 자리라니까?
"한 달이라고 했는데 벌써 나온 게냐?"
비동을 나온 일행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던 강웅삼이 야혼을 향해
물었다. 일행 중, 하오비동에 제일 먼저 들어가고 싶어했던 자가 야혼
이었던 까닭이다. 채 5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나오기에 하는 말
이었다.
"젠장! 뭣 좀 있을까하고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없더구먼 뭐."
"당연하지 않겠냐. 300년 동안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만 해도 수백 명
은 족히 될 터인데 뭔가가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런데 말이오. 십전순가 그 양반 색공(色功)에 달인이었나보오?"
"호오! 그걸 알아냈단 말이냐?"
강웅삼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강호상에서는 십전수라 이름이 나있
었지만 그가 가장 약한 분야는 색공이었다. 아니 거의 백지 상태라 해
야 옳았다. 그런데 하오밀문을 창설하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기녀들에게 전수해줄 무공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색(色)에 대
한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 목적은 단순히 기녀들이 손님을 더 많이 끌어들일 수 있는 방
법 정도만 만들어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나 점점 색공에 심취
해들어 나중에는 색공 쪽에만 몰두했다고 하였다.
그의 그런 노력이 성취를 거두었는지는 미지수였지만 마지막 은거지
인 하오비동에서 중점적으로 색공만을 연구했다는 것은 문주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연구는 무슨……. 그런데 언제 떠날 겁니까."
짐짓 인상은 쓰고 있으나 야혼의 얼굴이 환해졌다. 무공을 색공 속에
숨겨둔 구약종의 의도를 이제야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다. 결국 태을건
곤심법도 그가 처음 익혔던 내공심법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음양의 이
치를 접목시켜 새롭게 만들어둔 심법이란 말이 아니겠는가.
"한 달 정도 있어야 될 게다."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당연하지 않겠느냐. 무림인들조차 실패한 곳인데."
"날고 긴다는 놈들도 못간 곳인데 우리가 가능하겠습니까?"
"무공을 익힌 자들의 가장 큰 단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든 일을
무공에만 의존하려는 습성이 저도 모르게 몸에 배어 있다는 거다. 십만
대산은 말이다, 무공이 높다해서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사실
을 그동안 무림인들이 증명했다. 일단은 쉬어둬라. 아는 사람들에게 인
사도 다니고."
"죽기 전에 작별인사나 하라고?"
"연장 너는 입이 열 개라도 할말없는 놈이야 임마. 너 땜에 이렇게
됐다는 걸 몰라?"
"야, 썅! 곰 새끼 네가 제안한 일이잖아. 그러고 젖퉁이 그년이 방중
술을 익히고 있을 줄 알았냐?"
야혼이 눈을 치뜨며 태웅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결과야 자신이 패하
여 이 지경이 되었지만 싸움을 부추긴 녀석은 태웅과 추기영이었다.
그런 제놈들의 잘못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두 녀석의 행동이 괘씸했다.
"자 받아라. 노자 돈의 절반이다."
세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가만 쳐다보던 강웅삼이 일행에게 꾸러미
를 내밀었다.
"문주님! 나는 돈 말고 다른 것을 구하고 싶은데……."
강웅삼이 내민 돈을 쳐다보던 야혼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돈 말고 필요한 게 또 있더냐?"
"돈이 있어도 구하질 못해서 그렇지요. 그 녹혈이라고……."
야혼의 말이 계속될수록 강웅삼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어렸다.
구해달라는 물건 때문이었다. 아니 물건이 아니고 살아있는 짐승을 원
했다.
"그러니까 100일 동안, 달인 인삼을 먹인 사슴을 구해달라 이 말이
냐? 너 도대체 나이가 몇이냐?"
"에이, 문주님도. 정력제 먹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 있소. 그리고 정력
이란 놈은 젊어서부터 관리를 잘해야 된다는 것 모르쇼. 그 놈의 콧잔
등에 삼릉침을 찔러 넣어서 피를 받아 마시면 며칠 밤을 해도 끄떡없
다는 것 아뇨. 그러니 한번 알아나 봐주시오."
"너희들은 왜 돈을 도로 놔!"
야혼의 말을 듣고 있던 태웅과 추기영이 돈 꾸러미를 다시 밀어 놓
자 강웅삼이 빽 소리를 질렀다. 두 놈마저도 야혼과 같은 생각으로 돈
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아미타불! 문주님 저희 둘도 연작시주와 같습니다. 꼭 알아봐 주십
시오."
"알았으니까 나가, 빨리 가라, 가! 그리고 이 돈은 가져가거라. 주고
싶은 사람을 주던지 주루에 가서 술을 먹던지 알아서 하고."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문주님."
재빨리 문을 향해 나가면서도 다짐을 받는 건 잊지 않았다. 꼭 구해
주어야 한다는 단호한 얼굴로.
"나쁜 놈들……. 노인을 앞에 두고 뭐, 정력제?"
"저놈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정력제라는 건 서대시전 장사치라
면 전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문주님."
개봉사괴가 하오비동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문주거처로 오다가 안
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었다. 마석흠 또한 말로만 들었지 그 정도로
정력타령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제 21살이면 어여쁜 젊은 처자만 보아도 하초가 뿌듯해질 나이가
아니던가.
"하여간 괴짜들입니다."
"그런데 말이네. 저 녀석들과 말을 하고 있으면 꼭 성공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강웅삼이 마석흠을 쳐다보며 말했다. 묘한 일이었다. 능력도 없고 오
직 잘하는 것이라곤 여자 후리는 기술밖에 없는 녀석들인데 좀처럼 실
패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60평생을 살아오면서 사람 보는 눈은
꽤 정확하다고 여겼는데 개봉사괴만은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하오비동에 있는 5명의 제자들보다 더 신뢰가 가는 아이들이
개봉사괴였다.
"잘 되면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우리로선 크게 손해날 일없으니까 마음 쓰지 마십시오. 잘되면 좋은
거고 실패하더라도 변할 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지……. 준비는 잘 돼가나?"
"네, 십만대산에 있는 독에 대해서는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는 중이
고, 그곳에 살고 있는 부족들도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강웅삼과 마석흠이 십만대산의 성모봉을 찾아가기 위해 생각해낸 방
법은 일반무림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곳의 환경을 위주로 모든 조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한 무공을
가진 자들보다는 사냥꾼이나 약초를 채집하는 일반 양민들이 살아날
가능성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계속 수고 좀 해주게. 녀석들에게도 최대한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할
것 아닌가."
"네, 문주님 그럼 쉬십시오."
강웅삼과 마석흠이 고민을 하고 있는 그 시간, 하오밀문을 나선 야혼
일행은 그들의 일터인 서대시전에 들어섰다.
"또 기루에 가냐?"
"5일을 굶었지 않냐? 늦어도 기다리지 말아라."
"내가 니들 마누라냐 기다리게? 화류병(花柳病)이나 조심해라."
"악담을 해라. 이 자식아."
야혼을 향해 인상을 찌푸린 태웅과 추기영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수중에 돈이 떨어져야 나오는 녀석들이니 아마도 10여일 정도는 만
나지 못할 터였다.
"오잉! 저 새끼는 또 뭐야?"
야혼은 잔뜩 인상을 구겼다. 집으로 들어가 쉬려던 참이었는데, 그
자리, 거의 매일 밤 주사위를 돌리며 돈을 벌던 자신의 자리에 딴 놈이
턱하니 좌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서대시전의 장사치들이지만 알게
모르게 지켜지는 규율은 있다.
그 중에 가장 우선시 되는 사항은 장사하는 구역이다. 어떤 인물이
한번 자리를 틀면 그곳은 타인이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물며 개봉사괴의 자리임에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런데 개봉사괴 중 가장 개차반이라 소문난 야혼의 일터에 한 인물
이 좌판을 벌려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야혼이 했던 똑같은 주사위 찾기 도박을.
"어서 옵쇼. 아주 쉽습니다. 어두운 밤에 마누라 그곳을 찾는 것보다
더 쉬워요."
너덜너덜한 넝마를 걸친, 나이를 알 수 없는 노인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야혼을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영감, 노망났소?"
"무슨 소린가 젊은이, 올해 나이가 65살이지만 아직도 젊은 처자들을
보면 입안에 침이 고이는데."
"그럼 이 자리에 대해서 들었을 텐데……."
"물론 듣기야 들었지, 내가 처음 이곳에 둥지를 틀자 많은 사람들이
말리더구먼. 서대시전에서 가장 개차반 놈의 자리니까 건들지 말라고,
그래서 하루를 기다렸지 뭔가. 그런데 이 개차반이 안 오더라 이 말이
야, 그래서 내가 자리를 잡았지."
"내가 그 사람이요."
"무슨 소린가? 자네가 그라니 잔말하지 말고 안 할 거면 좀 비켜주
겠나. 손님들이 쳐다보기만 하고 그냥 가지 않나."
못들은 건지 아니면 못들은 척 하는 것인지 야혼이 자신의 자리라고
밝혔음에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장사 방해한다며 인상을 찌푸
렸다. 당연 야혼의 눈동자가 백태를 보이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개차반이라고 했잖아 씨발탱아!"
"엥? 자네가 개차반이라고? 그런데 말이 좀 심하구먼. 아무리 배워먹
지 못한 새끼라도 그렇지 어른보고 씨발탱이가 뭔가, 씨발탱이가."
노인의 목소리도 야혼 못지 않았다. 서대시전이 쩡쩡 울리도록 고함
을 지르며 야혼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런 썅! 뒈지려고 환장을 했나. 노망이 들었으면 기저귀나 차고 방
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일이지 어디 남의 영업장을 탐내."
노인을 향해 거친 욕설을 쏟아낸 야혼이 좌판을 향해 발을 날렸다.
한순간에 부셔버리려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한 발길질이었다.
쾅!
"우욱!"
그러나 산산이 부서질 좌판을 상상했던 야혼의 기대와는 달리 사정
없이 발질을 했던 야혼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발을 감쌌다.
노인이 잡고 있는 좌판이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야 이 자식아. 젊은 놈이 힘 좀 있다고 노인을 차네! 아이고 늙은이
죽네 늙은이 죽어!"
"저런 개차반 같은 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른한테까지 그런 놈
인 줄 정말 몰랐네."
이곳 저곳에서 쑤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씨팔 한번 죽어봐라, 이 거지새끼야."
주변에서 욕을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이번에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도를 꺼내들고 장작 패듯 휘둘렀다.
"아 -!"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안타까운 탄성을 발하며 고개를 돌렸다. 노인
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야혼의 도가 그만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아이고 이놈이 사람을 죽이려 드네!"
그러나 구경꾼들의 상상을 뒤엎는 소성이 울렸다. 전혀 힘을 쓰지 못
할 것 같은 거지 노인이 간발의 차로 야혼의 도를 피해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좌판까지 들어 옆으로 옮기면서.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마지 생사대적을 앞에 두고 싸우는 것처럼 야
혼의 도는 허공을 갈랐고 그때마다 거지노인은 간발의 차로 도를 피해
냈다.
마치 비틀거리면서 자연스레 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무림인이 보았
다면 그가 사용하는 보법을 바로 알아보았을 터였다.
취선보(醉仙步). 술 취한 사람의 걸음걸이에서 창안되었다는 개방의
독문 보법 중의 한가지였다.
그런데 취선보를 펼치는 노인의 수준은 상당했다. 야혼의 공격을 살
짝 살짝 피해내고 있는 수법은 결코 일반제자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경
지가 아니었다. 적어도 장로급 이상이 되어야만 시전할 수 있는 높은
경지였던 것이다.
잠개(潛 ) 장대손(長大孫)이었다. 개방의 장로 중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이 놈 봐라? 내공도 없는 녀석이 취선보를 따라잡는단 말인가…….'
장대손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한갓 파락호라 조사된 녀석이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방에서 수집된 정보와는 전혀 달랐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도(刀)를 휘둘러대는 개차반이라는 사실은 제대
로 된 정보였는데 그 도가 문제였다. 제법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며 그
를 압박해 들었다.
"씨팔! 거지새끼면 구걸이나 하면 될 일이지 어디서 행패를 부려
썅!"
"야! 이 도둑놈아 지금 행패는 네가 부리고 있지 언제 내가 행패를
부렸다는 거냐. 늙은이는 막 패도 된다고 생각했더냐?"
찌이익!
장대손이 황급히 몸을 뉘었다. 횡으로 쓸어올 것처럼 하던 야혼의 도
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며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왔던 것이다.
'이놈이?'
장대손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야혼의 몸놀림 때문이었다. 우
격다짐으로 도를 휘둘러 오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틀이 잡혀
가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하게는 취선보를 따라 잡으며 자신의 길목을
미리 차단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움직임마저 자신과 비슷했다. 어설픈 동작이었지만 취선보를
익혀나가고 있었다. 개방의 독문보법이라는 취선보를.
'어디 한번 당해봐라 요놈아.'
장대손의 신형이 지금까지와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야혼의 공격을 흘
리는 것이 아니라 허점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퍽!
"우욱! 이런 씨발놈이!"
옆구리에 느껴지는 고통에 거친 욕설을 토해낸 야혼이 더욱 저돌적
으로 장대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개방의 장로, 소 잡는 기술밖에 없는 그에게 잡혀줄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장대손의 공격 또한 교묘했다. 확연하게 드러나
는 기술이 아닌 슬쩍 슬쩍 피하면서 우연찮게 공격을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퍽! 퍼억! 퍼퍼벅!
"커억!"
순식간에 대여섯 번의 타격음 소리와 함께 야혼의 몸이 거칠게 패대
기쳐졌다.
주변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서대시전 상인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전혀 힘을 쓰지 못할 것 같은 노인에게 서대시전의 개차반이
라는 야혼이 나가떨어졌다.
이곳에 야혼이 등장한 이래 그가 자신의 의지를 떠나 몰매를 맞는
모습을 처음 보았던 터였다. 누구도 깨트리지 못한 서대시전의 전설이
드디어 막을 내린 것이다.
"씨팔! 좋다고. 끝까지 가보자 이거지!"
한순간 멍한 얼굴로 장대손을 쳐다보던 야혼이 벌떡 일어섰다.
거지 노인이 무림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장대손을 노려
보던 야혼이 가만히 도(刀)를 들어올렸다. 황소를 잡을 때와 같이 모든
정신을 도에 집중했다.
"응?"
야혼의 모습을 지켜보던 장대손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다. 야혼의 기
세가 지금까지와는 확연하게 달라졌던 탓이었다. 한 줌의 살기(殺氣)도
없이 초연하게 서 있는 그의 모습에서 피할 수 없는 적을 상대할 때,
생명을 담보로 펼치는 동귀어진의 기세가 느껴졌던 거였다.
'내공도 전혀 없는 녀석이 어찌……. 설마 예(藝)의 경지에 달했단 말
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당할리야 없겠지만 정기신(精氣神)이
하나로 합쳐진 도를 완전하게 피해낸다는 장담을 하지 못하는 게 문제
였다. 설마 자리싸움에 목숨까지 걸어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었다.
"너희 같은 새끼들에게 이런 자리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에
겐 아냐. 이곳은 내 삶이라고, 개자식아."
퍽!
"또 사고 친다. 또 사고쳐. 네 녀석은 어떻게 조금만 풀어주면 이 짓
을 하고 있냐?"
구경꾼 틈에서 나온 여호치가 야혼의 목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너! 썅……."
여호치를 향해 뭐라 말하려던 야혼이 힘없이 쓰러졌다. 여호치가 손
에 약간의 내공의 실어 기절시켜 버린 것이었다.
"괜한 짓을 하셨습니다. 따라오는 것까지 말릴 사람은 없는데 말입니
다."
장대손을 향해 가만히 쳐다보던 여호치가 야혼을 들쳐업고 자리를
떴다. 그녀 역시 장대손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듯한 어투였다.
"놀랍군……. 우리가 실수했다 이건가?"
멀어지는 여호치를 쳐다보던 장대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본 여호치의 무공은 상당했다. 단순한 소매치기 정도로 보고된 여호치
의 무공이 결코 자신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더구나 자신이 이곳에서 야혼에게 시비를 걸었던 이유를 바로 알아
차리는 영특함까지, 절대 허투루 볼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자네들 일행에 끼어서 갈 것이네. 뒤따라가면 다른 문
파들이 싫어하거든.'
이를 들어내며 미소를 지은 장대손이 다시 좌판을 벌리며 영업을 시
작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4)- 내공을 주시오.
10장 내공을 주시오.
스으윽! 스으윽!
"야! 새끼야 잠 좀 자자. 무슨 청승이냐. 그만 좀 갈아라."
방문을 획 열어제친 여호치가 밖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희미한 달
빛이 내려 비치는 이슥한 밤, 한쪽 구석에서 들려오는 칼가는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벌써 한 시진이 넘도록 칼만 갈고 있는 야혼이었다. 칼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지만 오늘밤처럼 공을 들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온 정신을 칼에만 집중하고 있는지 부르는 소리도 듣
지 못하고 있었다.
간혹 숫돌 위에 물을 끼얹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저 자식이!"
견디다 못해 밖으로 나온 여호치가 야혼을 향해 다가가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가부좌를 한 채 칼을 갈고 있는 야혼의 몸에서 기이한 변화가 감지
되었던 것이다. 마치 하나의 도(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칼을 갈고 있는 게 아니었어……."
지금껏 같이 살아오면서 칼을 가는 야혼의 모습은 무수히 보았지만
지금처럼 가까이 본 적은 없었다. 단지 다음날 도살을 위한 준비작업으
로만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야혼이 갈고 있는 것은 칼이 아닌 혼이었다. 영혼을 도에 실어 벼리
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 야혼의 기세에 깜짝 놀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미 야혼은 도(刀)와 동화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경박한 말투나 행동 때문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 뿐, 지금
야혼의 상태에서 내공만 가미된다면 순식간에 고수의 반열로 들어설
정도로 대단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슉!
물기를 뿌리려는 행동인 듯, 앞에 있는 화초를 향해 횡으로 가볍게
도를 휘두른 야혼이 도면을 찬찬히 살폈다.
"오늘은 성공이네?"
"너?"
"어라? 색시, 아직 안 잤냐? 외로우면 말을……."
여호치를 향해 음흉한 눈길을 보내던 야혼이 한 걸음 물러나며 입을
닫았다. 매서운 눈을 한 여호치가 한발 앞으로 다가섰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가선 까닭은 야혼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야혼
이 휘둘렀던 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여전히 도면 위에서 파
르라니 떨고 있는 나뭇잎 하나. 마치 잘렸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한 듯
수액조차 나오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여호치가 고개를 내저었다. 진정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활검(活劒)의 경지를 목격하는 것이다.
활검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무림인들의 무기는 전부 사검(死劒),
즉 생명을 살상하는 도구이다. 무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순간, 그 당
사자는 극악한 공포를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상대의 무기가 다가오는 그 순간에 근육이 오그
라들며 온몸이 경직된다.
그런데 그러한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사하듯 편안한 상태로
상대의 무기를 받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마음상태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무기에서 죽음을 감지 못하
기 때문인 게다. 그때의 검(劒)을 무림인들은 활검(活劒)이라 부른다.
"많이 갈아서 이래, 이놈도 바꿔야 할 때가 됐나봐."
여호치가 도면을 가만히 주시하자 야혼이 안쪽으로 휘어져 들어간
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살장에서 일을 하면서 받았던 도를 지난 10년
간 갈아왔던 탓에 안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이 서 있었다.
"이대로도 좋은 걸 뭘."
도에 있는 나뭇잎을 가만히 떼어낸 여호치가 다시 방으로 걸음을 옮
겼다. 3명 중 가장 필요 없는 사람을 야혼으로 여겼었는데 그 판단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참, 왜 저 달덩이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그 내공심법
가짜 아냐?"
여호치의 뒷모습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야혼이 나지막이 중
얼거렸다.
방금 전, 칼을 갈 때는 다른 날과 달랐다. 나름대로 시험을 해 보고
난 후 본격적으로 익히겠다는 생각에 하오비동에서 얻었던 내공심법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작업을 했던 것이었다.
분명 몸은 개운해진 느낌인데 단지 그뿐이었다. 정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쪽에선 전혀 반응이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여체 중
최고라는 여호치의 뒷모습이 아닌가. 더구나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망
사옷까지는 아니지만 외출복과는 다른 얇은 자리옷임에도 말이다.
"안되겠다. 일단 그 사기꾼한테 가서 내공이란 걸 받아와야겠다."
어차피 가는 길인데 심부름쯤 해주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더하여 무
림인들을 만나 깨지다 보니 내공의 필요성을 조금씩 느꼈다.
*   *   *
"그래 심부름을 하기로 했는가."
"그런데 내공을 언제 주실 거요."
"그렇게 하지 뭐, 동지 그것 좀 가지고 나오게."
'어라? 정말 황족이 맞는가 보네?'
야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관직에 있는 황인효를 행해 반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이면 자신처럼 사기꾼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었다.
더구나 문을 열고 들어온 황인효가 공손한 얼굴로 보자기를 내려놓
는 게 아닌가.
"허억!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
야혼이 경악스럽다는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보자기에서 나온 약재가
놀랍게도 그림으로만 보았던 만년하수오였던 것이다. 그것도 4뿌리나.
"호오! 하수오도 알고 있었나?"
주천상 역시나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모를까 일반 양민
은 결코 알지 못하는 영약이 하수오인 것이다.
"이런 정력제를……."
야혼의 눈에 탐욕스런 빛이 가득했다. 정력에 좋다는 약재들을 연구
하다 보니 무림인들이 영약으로 치부하고 있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꿰고 있었다.
"만년하수오는 아니네. 거의 100년 정도 됐을 걸세. 이걸 복용하고
운기행공을 하면 20년 공력을 얻게 되네."
"그 정도만 해도 어디요. 이것만 먹으면 지금보다 두 배는 강해질텐
데."
20년 공력이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서 먹어달라는 듯 눈
앞에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하수오만 쳐다보며 연신 해죽거렸다.
"운기행공을 하지 않으면 약효가 거의 사라진다는 걸 명심하게."
"내가 내공심법이 어디 있다고 그러쇼?"
약효가 사라진다는 주천상의 말에 야혼이 하수오를 집으려던 손을
멈췄다.
"하오밀문의 제자가 되었는데 아직 내공심법을 배우지 못한 모양이
군, 문주에게 가르쳐달라고 하게."
"아하! 그럼 되겠네. 그런데……?"
"자네가 하오밀문의 제자가 된 것을 어찌 알았냐고? 이곳 개봉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관부에 보고된다는 사실을 몰랐나. 더구나 하오밀
문에 대한 일이라면 사소한 것들도 전부 파악하고 있다네."
"그렇겠군요."
딴에는 주천상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야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
부의 입장에서 보면 하오밀문은 언제나 주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의 대부분이 하오밀문의 제자들과 관련
이 있기도 하지만, 그들의 존재 때문에 개봉의 밤거리가 조용해지기도
하는 필요악이 하오밀문인 것이다.
"해서 하는 말이네만, 자네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곳 개봉에
서 하오밀문은 없어진다는 걸 명심하게. 물론 죽이거나 하진 않을 걸
세. 단지 그들이 영원히 옥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거지."
"그럼 제가 꼭 성공을 해야겠습니다 그려."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가 바보냐? 그 새끼들 없어지면 서대시전이
전부 내 자린데……'
사뭇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주천상을 쳐다보고 있으나 내심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서대시전에서 하오밀문 패거리들이 없어지는 것처럼 환
영할 만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하수오 옆에 있는 조그마한 환약을 쳐다보며 야혼이 물었다. 검은색
의 손톱 만한 환약이 조금 전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 그건 증폭단이라고 부르는 약일세. 자네가 성모봉에 도착해서
도법을 펼칠 때 복용하는 약이네."
'이 영감이? 좋아 좋다고. 하수오 4뿌리로 만족하라 이거지.'
"좋습니다. 이것을 먹고 일도(一刀)만 휘두르면 끝난다 이거 아닙니
까. 별것도 아니구먼. 그럼 다음에……."
혹시라도 무르자 할까봐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수오 4뿌리를 가슴속
에 꼭 품은 채.
"어르신 괜찮겠습니까?"
"왜 하수오가 아까워서 그러느냐?"
"아닙니다. 저 자가 그 일을 해 줄지……."
일을 하라고 도법을 줘 보낸 게 아니다."
"그럼……?"
"일이야 여호치 그 애가 다 할 테고 저 녀석은 마지막 순간에 그 아
이들을 제거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무슨 수로……."
황인효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여호치나 화소미의 무공은 이미
일류를 넘어섰다. 그런 그녀들을 야혼이 제거할 거라니. 믿을 수가 없
는 말이었다.
"내가 저 녀석에서 준 도법이 뭔지 아느냐? 염왕도법(閻王刀法)의 1
초인 염왕수라참(閻王修羅斬)의 구결이다."
"설마……."
경악스럽다는 듯이 황인효가 주천상을 쳐다보았다. 염왕도법이란 말
때문이었다.
염왕도법(閻王刀法). 300년 전 겁천십웅(劫天十雄)의 1인인 염왕마존
(閻王魔尊) 의 독문무공으로 도법에서는 그보다 강한 무공은 없다 하였
다.
1초인 염왕수라참을 펼치는데만 해도 1갑자의 공력이 필요하다는 엄
청난 도법이 염왕도법이었으니, 황인효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
다.
"30년 전에 1초의 불완전한 구결을 얻었느니라. 익히게 되면 무조건
주화입마에 들게 되어있다."
주화입마,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증상이다.
주로 운기행공 중에나 무공을 펼칠 때 자신의 능력이상을 억지로 뽑아
내려다 걸려드는 게 대부분이다.
주화입마에 들게 되면 나타나는 증상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온몸의 잠력이 폭발하는 광인(狂人)이 되어, 눈에 띄는 모든 것
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 아니면 반신 또는 전신불수의
폐인이다.
"그렇군요……."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황인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혼이 얻어간
1초의 도법은 죽음을 의미하는 무공이었다. 더구나 증폭단이라고 가져
간 알약은 주화입마를 더 앞당기는 약이었으니.
"중원 최고의 도법을 맛본 대가로 목숨을 내놓는다는 건 그리 손해
나는 장사가 아니지. 이번은 반드시 성공하게 될 거야."
주천상이 허공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6번째다. 그가 성모봉으
로 심부름꾼을 보낸 횟수였다. 지난 20년 동안 5번에 걸쳐 사람을 보냈
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원래는 이번 일도 일정에 없었다. 하지
만 여호치의 존재를 알고 나서부터 새롭게 추진했다.
야혼은 여호치 근처에 머물렀기에 선택 된 것이었다. 더하여 불완전
했지만 야차혈마지체를 없앨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문제는 녀석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
주천상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부분이었다. 하늘이 부여했다는 수천
구신체 중의 하나를 타고난 자가 오직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정력밖에 없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황인효를 시켜 뒷조사까지 해보았지만 세간에 떠
도는 소문이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 음식조차 정력과 연관지어 먹고 있
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공연히 잘사는 녀석을 무림으로 끌
어들인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었다.
"설령 살아온다 해도 제가 용서하지 못합니다."
황인효가 미약한 살기를 흘렸다. 서대시전에 돌고 있는 소문 때문이
었다. 딸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지만 겁탈 당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을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음에 분명했다.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잡아다
주리를 틀었을 터인데 참고 있는 것이었다.
"사소한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조직이나 정비하거라."
"죄송합니다. 교주님!"
갑자기 삼엄해진 주천상의 기세에 황인효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사적인 일을 들먹이는 실언을 했던 터였다.
그런데.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주천상을 향해 교주라 하였다. 중원천
지에 많은 무림의 세력이 있지만 교(敎)라 칭해지는 단체는 결코 존재
하지 않는다. 황족이라는 신분 말고도 또 다른 무엇인가 있다는 말인
데…….
"떠날 때까지는 그 녀석의 주변을 감시하거라."
"네, 어르신."
주천상의 모습이 완전하게 사라졌음에도 고개를 조아린 황인효의 몸
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시각,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한 야혼은 과
거에 여인을 덮칠 때 주로 이용하던 상원사 뒤편 그 동굴에서 잔뜩 찌
푸린 얼굴로 앞에 놓인 하수오를 쳐다보았다.
"당최 내공심법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하수오를 복용하고 운기행공을 해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굳이 내공심법을 얻기 위해 강웅삼을 찾아갈 필
요도 없이 실은 그보다 더 월등한 심법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효
과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일반 내공심법이었으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태을(太乙)
이란 말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것이었다.
태을이란 말은 보통 도가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고 혹시라도 도인(道
人)들이 연성하는 무공이라면, 정력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색을 멀리하는 심법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에라 씨팔! 일단 먹고 보자. 언제 처녀인지 아닌지 따지고 먹었냐?"
태웅이나 추기영의 눈에 띄면 그나마 남아나지도 않을 것임에는 자
명한 일이고 보니 바로 복용을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어이구 써라! 좋은 약인 것은 맞나보네."
바로 뱉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쓴 하수오를 오독오독 씹어먹으면서도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야혼이 몸에 좋은 약을 판단할 때 써먹는 기준
은 얼마나 쓰냐 하는 것이었다.
"어이그! 벌써 효과가 온다. 효과가 와!"
하수오를 몽땅 씹어먹고 조금 있자 몸에서 조금씩 열이 오르기 시작
했다. 재빨리 가부좌를 한 야혼이 태을건곤심법을 운용했다.
'호호! 이놈이 진기(眞氣)라는 놈인가 보네.'
구결을 운용하자마자 단전어림으로부터 이질적인 기운이 생성되며
천천히 몸을 타고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하여 온몸에서 조금씩
가려움이 일었다.
'헤엑?'
한순간 야혼의 몸이 움찔 떨렸다. 몸을 타고 움직이던 기운이 갑자기
기세가 커지며 몸 안을 유린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었다.
마치 몸 속에서 바람이 이는 듯했다. 황야에서 부는 바람이 먼지를
쓸어가듯 움직이며 그 크기를 부풀려나갔다.
'우욱! 이런? 집중하자 집중해…….'
숨이 턱 막히는 중압감에 놀란 야혼이 마음을 다잡으며 태을건곤심
법에 몰두했다. 초영완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운공을 할 때 절대로 잡
생각을 하지 말라했던 그녀의 말.
잠시 후 삼매경에 빠져버린 야혼은 알지 못했지만, 운기를 시작하면
서 열린 백회혈(百會穴)과 용천혈(湧泉血)로부터 기이한 힘이 그의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더구나 그동안 정력제라고 복용했던 수많은 약재들 중 아직 몸 속에
남아 있던 기운들까지 함께 들고일어나 내공으로 화해가고 있었다.
거의 2시진 정도 운기행공에 몰두하고 있던 야혼이 눈을 떴다.
"칼가는 거랑 별 차이 없잖아?"
온몸이 가뿐하니 가벼워진 느낌에 내심 기뻐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
렸다. 과거 십대고수였다는 사람의 내공심법이라 하여 사뭇 기대를 했
었는데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마다 도(刀)를 갈면서 느꼈던 기분과 흡사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다.
"씨팔! 어째 변비 걸린 것처럼 배가 묵직하냐?"
단전에 무엇인가 들어찬 기분이 영 불쾌했다.
"그래도 일단 한번 시험해 볼까?"
밖으로 나온 야혼이 동굴벽에서 보았던 무공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술은 무변무적퇴(無變無敵腿)라는
발기술이었다.
휘익! 휙!
사방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던 야혼의 발길이 허공을 강타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평소와 비슷한 힘으로 발길질을 해댔는데 마치
공간이 터져나가듯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건달들이나 써먹는 기술이라 했던 발기술이 내공심법과 어우러지자
강력한 위력으로 나타났다.
"오라 무풍무영술을 같이 섞는 거구먼?"
내공이 없을 때야 두 무공은 서로 다른 것이었지만 태을건곤심법이
가미되자 하나의 무공으로 합쳐지는 것이었다.
야혼의 몸이 더욱 빨라졌다. 아직 어설픈 감이 없진 않았으나 잠개
장대손과 싸울 때와는 천양지차의 몸놀림이었다.
"씨팔놈! 거지새끼 너 기다려라. 에라 손은 놀면 뭐하냐? 공공십팔
수!"
경악할 일이었다. 아무리 야차혈마지체를 타고났다지만 3가지 무공을
동시에 펼치고 있었다. 처음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기술이라 할지라도 한꺼번에 시전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
는 일이 아니었다.
연신 사방으로 움직이는 기술은 무풍무영술이었고 그 움직임을 따라
무변무적퇴와 공공십팔수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순간 허공 가득 천라지망이 형성되는 듯 야혼의 손발이 무수한 그림
자를 남겼다.
3일, 야혼이 동굴 속에 머물면서 내공과 무공을 접목시킨 시간이었
다. 어느 정도 능숙하게 펼쳐지자 동굴을 나섰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5)- 시험을 해봐야지.
11장 시험을 해봐야지.
"가만있어라 누가 좋을까……."
동굴을 나와 철탑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야혼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댔다. 시험 대상을 물색하는 중이었다. 평소 같으면
작업을 해서 대상을 찾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시험을 해 보아야할 상황이어서 기존에 거쳐갔던 여자들 중에서 선택을 하려는
것이었다.
"호치, 요년아. 네가 장부를 빼앗아 갔다해서 내가 기억을 못할 줄 아느냐? 남들이 써놓은 것도 한번 보면 대부분
기억하는데 하물며 내가 쓴거다 요년아. 첨이에게 가볼까? 좀 닳아지기는 했지만 달거리 하려면 3일 정도 남았으니까."
철탑 부근에 있는 선주객잔 주인의 딸이었다. 1년 전, 밥을 먹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여자로 작업 들어간지 1시진도
안되어 뒷산으로 직행했었다. 어째 쉽게 작업을 했다 여겼었는데 웬만한 기생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남자 경험이 많은
여자였다.
"그래도 성격은 활달하고 과거와 차이점을 분명하게 말해줄 년이 필요하니 별수 없네. 일단 시전에 가서 선물을 하나 산
다음에?"
결정을 내린 야혼이 공력(功力)을 약간 끌어올리며 무풍무영술을 전개했다.
"무공이 좋기는 좋구먼."
순식간에 뒤쪽으로 내달리는 주변 경치를 쳐다보며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무공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익히고 보니 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은 열심히 발을 놀리고 있는데도 숨이 차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갓 입문한
무공이 이럴진대 완전하게 익히면 얼마나 빠를까 하는 상상을 하자 절로 흐뭇해졌다.
내심 속가제자라도 되어 하오비동에 들어가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오! 이렇게 절묘할 수가."
선주객잔으로 들어가려던 야혼이 이내 걸음을 멈췄다. 굳이 객잔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음이다.
저 멀리 물을 길어오는 첨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다, 첨이."
첨이에게 다가간 야혼이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마치 먼길을 떠났다가 이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너! 이런 도둑놈 새끼!"
야혼의 얼굴을 알아본 첨이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았다. 1년 전의 일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3일
정도 꿈같은 시간은 보낸 뒤 다시 온다고 하며 떠났던 놈이 1년만에 눈앞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그럼?"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장가를 가고 싶은 여인을 만났는데 돈이 없었거든."
첨이의 묻는 말에 야혼이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왔어. 또 언제 올지도 모르거든. 그리고 이거."
"이게 뭐야?"
"응, 오다가 니 생각이 나서 하나 사왔어."
'이 정도 했으면 가서 기다리라고 해라 요년아. 뭘 감격스런 눈으로 쳐다보냐, 시전에 가면 널린 게 싸구려 동경인데.'
"고마워요, 혼랑! 가서 조금만 기다릴래요? 이거 가져다두고 바로 올게요."
"응! 알았어."
'혼랑? 그럼 저년에게 무슨 이름을 가르쳐 주었기에 혼랑이라 부르지? 결코 야혼이라 했을 리는 없는데…….'
걸음을 옮기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부터 작업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경우에는 대부분 이름을 기억하는데,
갑작스럽게 시도한 일에는 대부분 즉흥적으로 지은 것이 많아 기억을 못했다.
지금 첨이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름을 말해 주었을 터인데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에라! 썅, 이름이야 지가 부르는 것이지 내가 부르냐? 이것 봐라."
연신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윽고 1년 전 둘만이 애용했던  동굴에 다다랐다. 그런데 동굴 안으로 들어선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1년 동안이나 방치했던 동굴치고는 너무 깨끗했다.
"쿡! 지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정리는 내가 해 놓으니까 그동안 열심히 애용했구먼."
상국사 뒤편에 있던 동굴과 분위기는 비슷했다. 서가는 없었지만 바닥에 깔린 푹신한 이불이며 베개까지 여느 살림집 못지
않았다.
"기다렸지, 혼랑!"
서둘러 달려왔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의 첨이가 동굴 안으로 들어서며 들고 온 보자기를 내려놓았다.
"웬 음식까지. 술은 먹으면 안 되는데……."
"지금도 약 먹어? 몸이 많이 안 좋은가봐? 그때도 그러더니."
"하루아침에 좋아질 몸이 아니라서. 그래도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알 수 없지 뭐."
"그래? 어서 먹어 혼랑이 좋아하는 걸로 가져왔어. 마침 황구를 한 마리 잡아둔 게 있어서."
알 수 없다는 야혼의 말에, 첨이의 눈이 빛났다. 1년 전에도 분명 그랬었다. 몸이 좋아졌나를 시험해 본다면서 그 짓을
했던 것이다.
"고마워!"
'흐미, 그러고 보니 3일을 굶었잖아. 무공을 익히면 배고픈 것도 덜해지나?'
허겁지겁 걸신들린 사람처럼 개고기를 주워먹는 야혼의 모습을 첨이가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본다. 창백한 피부와 수염도 깍지
않은 야혼의 얼굴은 영락없이 객지를 떠도는 유랑객의 행색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좀 떠돌았지 뭐. 그런데 쉬운 일이 없더라. 하는 일마다 전부 실패하고 이곳도 우연히 지나가게 된 거야. 내일이면
떠나야하고."
"바보, 한 달만 빨리 오지."
"왜?"
"나 다음달에 시집가."
"그래…… 잘됐구나. 괜찮은 사람이겠지? 그럼 가야겠네."
"가긴 어딜 가. 그동안 몸이 얼마나 좋아졌나 봐야지."
시무룩한 얼굴로 일어서는 야혼을 향해 소리를 지른 첨이가 재빨리 그를 잡아끌었다.
"그래도 날까지 잡아두었다는데, 임신이라도 하면."
"3일 있으면 달거리니 상관없어. 그리고 내일이면 간다며. 이리와!"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
'요년도 엄청나게 놀았구먼.'
임신이 되지 않는 날을 파악하는 방법 또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야혼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임신이 되지 않을 때만을 짚어가면서 놀았다는 말이 된다.
"아직 혼랑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어. 전부 물이야 물."
'작업 끝났네. 이제 시험만 하면 된다.'
내심 쾌재를 부른 야혼이 거칠게 달려들었다.
잠시 후 동굴 밖으로 훈훈한 열풍과 함께 야릇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내공이란 것을 가진 후 성능을 시험하는 첫 관계였던 거였다.
해가 떨어진지 한참이 지나 서대시전에 불이 환하게 밝혀지자 야혼이 터벅터벅 들어섰다.
"거참!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조금 전까지 관계를 가졌던 첨이를 생각하며 하는 말이었다. 관계를 갖고 난 뒤 첨이는 일 년 전보다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크게 변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단지 움직임만은 엄청나게 빨라져서 훨씬 좋았다고 했을 뿐이었다.
"고년의 실력이 향상된 건가. 아니면 내가 녹슨 건가."
내공을 이용하면서까지 첨이를 휘돌렸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도 과거와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였다.
"씨팔, 내공을 운용하면서 찍어눌렀는데 속도가 빨라진 것은 당연한 거지. 그것 가지고 나아졌다면 되냐? 내공이 약해서
그런가? 다음에 또 오라고 했으니까 내공을 더 연마해서 가보면 알겠지. 저런 스발노므새끼가 아직도 있네?"
좀더 두고 봐야겠다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며 고개를 든 야혼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며칠 전에 드잡이를 벌였던 그 거지새끼가 아직도 같은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자신의 자리에서.
"씨팔놈! 이번에는 두 번째 시험이다."
장대손을 노려보던 야혼이 잽싸게 집으로 향했다. 무기를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이번에는 도만 들고 오려는 게 아니었다.
이미 하나 가지고는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해서 어린 시절 일 년 정도 사용하다 말았던 망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도를
잡기 전에 처음으로 사용했던 도구로 손잡이부터 전부 쇠로 만들어진 망치였다.
"개새끼. 오늘은 두 손으로 펼치는 공공십팔수를 한번 봐라."
두 개의 무기를 덜렁덜렁 허리춤에 달고 나온 야혼이 사방을 살폈다. 비록 약간의 내공을 가졌지만 거지 놈에게는 아직 상대가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꼬마야 심부름 하나 해줄래? 5문 주마."
"무슨 일인데요?"
야혼의 얼굴을 알아본 꼬마가 잔뜩 불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5문이라는 말에 혹한 얼굴로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응 저곳에 가서……."
"알았어요. 그 정도야 뭐 식은 죽 먹기죠."
환하게 웃음을 머금은 꼬마가 날쌔게 상점 쪽으로 달려갔다. 뜻밖에도 서대시전의 개차반이 시킨 일은 어려운 게 아니라는
듯이.
"개자식 오늘은 한번 죽어봐라."
장대손을 지그시 응시하던 야혼의 몸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이상하네, 그 개차반 녀석이 나올 때가 넘었는데 왜 안 오는 거지?"
장대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의 성격으로 볼 때 한 번 깨졌다고 하여 결코 포기할 놈이 아닌데, 벌써 4일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내심 불안했던 터였다.
그들 일행에 끼어서 십만대산으로 가고자 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던 것이다.
"이놈아! 어른 장사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저쪽으로 가서 놀아라."
앞에서 알짱거리는 꼬맹이를 향해 소리를 친 장대손이 주사위통을 잡기 위해 고개를 숙인 순간 좌판을 향해 무엇인가가
날아들었다.
투두둑! 타다닥!
순식간에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런 나쁜 녀석들 장난치지 말라니…… 허억!"
연기를 날리려 손을 휘젓는 순간 등에 와 닿는 섬뜩한 느낌에 장대손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피할 방위가 없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차가운 기운은 어떤 방향도 용납하지 않았다. 서대시전에 무림인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 더구나 터지는 폭죽소리 때문에 뒤에서 접근하는 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검(劒)이나 도(刀)가 아니길 빌 수밖에.'
한순간 모든 내공을 등으로 집중하며 뒤쪽으로 손을 휘둘렀다.
"커억!"
그러나 한발 늦었는지 강렬한 충격이 밀려왔다. 다행이 검이나 도가 아니었고 내공도 그리 많이 실려있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상대 또한 정신없이 몰아쳐 들어왔다.
"네 녀석은!"
장대손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대시전의 개차반 그놈이었다. 아이들을 이용해서 정신을 분산시킨 다음에 교묘하게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를 더 놀라게 하는 게 있었다.
바로 내공이었다. 분명 4일 전만 해도 내공이 전혀 없었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움직이는 손과 발에 제법 힘이
실려있어 자칫하면 낭패를 당할 판이었다.
"저건 공공십팔수, 무변무적퇴? 어떻게……."
기절할 노릇이었다. 야혼이 펼치고 있는 무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펼치고 있는 공공십팔수나 무변무적퇴는
하오밀문의 당주급 정도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무공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이 문제였다. 그가 알고 있는 무공과 전혀 딴판이었다. 무변무적퇴는 단순한 발길질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무수한 발 그림자가 사방에서 몰아쳤다. 또한 발길질과 함께 스며들어오는 손이라니. 아무 것도 아닌 두 무공이 섞여들면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놈아! 아무리 그래봐야 네놈은 안돼."
사방에서 몰아치고는 있지만 약한 내공 때문에 장대손에게는 그리 치명적인 공격이 되지 못했다. 다시 차분한 표정이 된
장대손이 그의 독문보법인 취선보를 펼치기 시작했다.
"웃기지 말라고. 그 보법은 이미 파악했어. 싸발탱아!"
어느새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도를 뽑아든 야혼이 취선보를 펼치며 피하는 장대손을 공격해 들었다.
그의 몸놀림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으로 무풍무영술을 펼치며 장대손을 따라잡았다.
"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장대손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를 뽑아들자 지금까지의 기세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도(刀)를 이용한 공공십팔수가
펼쳐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18개의 도가 사방에서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섬뜩한 살기를 뿌렸다. 단순하게 취선보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놈아 신선이 개를 잡을 땐 어떻게 잡는지 아느냐?"
결국은 그도 밑천을 내놔야 할 판이었다. 숫제 방어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치고 들어오는 야혼을 더 이상 방치하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이게 미친개를 때려잡는 취선타구(醉仙打狗)다 이 녀석아!"
갑자기 기세가 변한 장대손의 몸이 빛살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휘청거리듯 능청대며 정확하게 야혼의 도 사이로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럼 이건 술취한 거지새끼를 잡는 망치다 씹탱아."
가슴께로 다가온 장대손을 향해 야혼의 왼손이 빠른 속도로 꺾였다. 그런데 그의 손에 또 다른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도(刀)와 함께 가져왔던 망치였다.
"이런 썩을 놈이 말끝마다 욕이야. 네 녀석은 아비 에미도 없냐?"
도무지 어른 취급을 해주지 않는 야혼의 행사에 고함을 빽 지른 장대손이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진정으로 화가 났는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의 손에 희뿌연 기운이 서렸다.
"없으니까 욕을 하지 개자식아. 그런 너는 자식도 없냐. 새파란 놈 자리를 빼앗게? 누가 죽나 한번 해 보자고. 씨팔."
뿌옇게 변한 장대손의 손을 쳐다보던 야혼의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일렁댔다. 그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무공이 약한 자도 아니고, 백색의 광채를 뿜어낼 정도의 엄청난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닌가. 그런 자가 공연히 시비를 걸고
있는 게다.
힘 자랑하는 놈. 서푼어치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약자를 짓밟는 놈이었다.
'이건 또 뭔가?'
야혼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전율적인 살기에 장대손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또 다시 녀석의 모습이 변했던 터였다. 도대체
어떤 녀석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일단 제압하고 나서 차분하게 알아봐야겠군.'
개방의 장로로서 삼류무사 수준인 녀석에서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게 자존심은 상했지만 죽일 목적이 아니었기에 달리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아예 방어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저돌적인 공격 때문이었다.
'일단 망치부터.'
극성의 취선보를 전개하여 야혼의 좌측으로 돌아간 장대손이 자신의 머리를 찍어오는 망치를 슬쩍 피하며 오른손으로 야혼의
어깨를 잡아챘다.
우둑!
어깨가 탈골되는 소리와 함께 야혼의 손에서 망치가 떨어지고 장대손의 왼손이 야혼의 가슴팍을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나아갔다.
"허억!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던 장대손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녀석의 탈골된 어깨를 잡아챈 손을 끌어당기며 가슴팍에 일장을
가하기만 하면 끝나는 순간이었는데 위에서 떨어지는 도가 문제였다.
자신의 왼손을 막기 위해 다가오는 도가 아니었다. 서로 엇갈린 팔을 향해 진득한 살기를 머금고 떨어지고 있었다. 일장에
야혼을 죽이지 못하면 팔이 잘려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장대손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설마 제 팔이 있는데 그곳으로 도를 내리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얼굴에
미소까지 띠고 있지 않은가. 재빨리 어깨를 움켜잡고 있던 오른 팔을 빼내려 했으나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손을 이용해서 자신의 어깨를 붙들고 있는 것이었다.
"씨팔놈! 날 죽여도 네놈 팔 하나는 가져갈 거야. 개자식아."
"야! 이 미친 새끼야!"
"야혼, 이놈!"
챙!
크억!
두 마디의 고함소리와 함께 바닥에 있던 망치가 허공으로 솟아올라 야혼의 도를 튕겼다. 동시에 장대손의 왼손이 야혼의 가슴을
강타했다.
"어찌 이런……."
넋이 빠져버린 듯 멍한 표정의 장대손이 피에 젖은 오른팔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직 팔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우웩! 아이고 씨팔! 아까운 피 다 넘어오네."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낸 야혼이 어렵사리 일어서더니 반으로 부러진 도를 다시 들어올렸다.
"여호치 너 이 쌍년,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 너 때문에 저 새끼 팔 하나 놓쳤잖아 빌어먹을 년아."
"멈추지 못할까 이놈!"
"억! 영감님이 여긴 웬일이오."
"닥치거라 이놈! 어째 몇 달 안 보인다 했더니 아직도 싸움질이더냐? 따라 오너라."
도축장의 이정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야혼이 나오질 않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알아보러 왔다가 싸움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대협.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엄한 눈으로 야혼을 노려보던 이정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결코 도축장에서 소나 잡는 노인이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었다.
거의 일파의 종사나 보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아니오이다. 되려 제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상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오니 장대손 또한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노인이 나타나자마자 야혼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럼! 따라 오너라 이놈아!"
다시 한번 장대손을 향해 고개를 숙인 이정이 야혼의 귀를 틀어쥐며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영감님 놓고 가자고요. 이건 절대 내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무공까지 엄청난 저 시발탱이가 남의 자리를
빼앗았다고요. 힘있다고 지 맘대로 하는 새끼……."
한참을 뭐라고 씨부렁거리던 야혼이 픽 쓰러졌다. 기절한 것이었다.
"허허! 이 잠개(潛 )가 완전히 인간 말종이 되는 날이구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야혼을 쳐다보던 장대손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애초에 방법이 잘못되었다. 여호치의 말대로 정당하게
끼워달라고 했으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을.
"그러게 제가 말씀 드렸지 않았습니까. 그냥 오시면 된다고."
여호치였다. 그녀 또한 지금껏 야혼과 장대손의 싸움을 전부 지켜보았고 마지막에 쇠망치를 들어올려 야혼의 도를 막아낸 사람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저 녀석은 도대체 뭔가?"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야혼 때문이었다.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같이 죽자고 덤비는 녀석의 행동도 그랬지만, 마지막
자신의 전력을 다한 일장을 옆으로 흘려버리는 야혼의 몸놀림은 더욱 놀라웠다.
무공도 별로 없는 녀석이 분명할진대 가슴에 손이 닿는 순간 몸을 옆으로 틀어 대부분의 힘을 흘려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충격이 왔을 터인데 다시 일어서서 도를 겨누는 녀석의 독심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혼 저 녀석이 휘두른 망치를 보지 못했습니까?"
"망치……? 그럼 그게 도백철추(屠白鐵鎚)란 말인가?"
경악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장대손을 향해 여호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백철추(屠白鐵鎚), 어찌 보면 무림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일 수도 있었다. 중원 천하에 산재해 있는 백정들의 모임인 도백회(屠白會)의 장문영부라 할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를 잡는 백정이라 하여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천한 신분이라 하지만 그들의 전체 수효는 개방을 능가하는 곳이
바로 백정이었다.
강호상에 거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자들이 있었고 신분도 함께 면천되어 평민인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단지 소를 잡는 일을 통해서 무공의 완성을 보려고 하는 자들이었기에 백정 일을 그만두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조금 전의 그 양반이?"
"네 현 도백회의 회주예요. 역대 회주 중 유일하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지요."
"나는 그 사람보다 자네가 더 궁금하군. 우리 개방에서도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네가 말이네. 더구나……."
무공 때문이었다. 분명 도백철추를 들어올려 야혼의 도를 막아낸 기술은 허공섭물이었다. 이제 2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
허공섭물의 가공할 경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자신보다 더 강자가 그녀였다.
"잠개 선배께서 개방에 알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리고 저 녀석과 같이 살고 있는데 제가 모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도백철추를 가지고 못을 박는 놈인데요."
"괴물이군."
물음에는 아랑곳없이 그녀는 야혼에 관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 알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도백철추를 가지고 있다함은 다음대의 회주라는 말이었다. 그런 자가 도백회 최고의 신물을 가지고 못을 박는다니, 일반 무림의
문파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시죠 오늘 욕보셨는데 제가 식사대접이라도 할게요."
"자네가 왜 밥을 사. 잘못은 저 빌어먹을 놈이 했는데. 혹시 사귀나?"
"저 개차반을…… 훗!"
어이없다는 듯 여호치가 실소를 머금었다.
"그 녀석은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놈이에요."
'몇 년을 같이 살았지만 한 가지도 제대로 아는 게 없어요.'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6)- 거시기도 아니고 날을 세우라고?
12장 거시기도 아니고 날을 세우라고?
"몸은 괜찮으냐?"
"영감 나도 사람이오. 그 무지막지한 장을 받았는데 괜찮을 리가 있
소?"
"그래 사람이란 놈이 제 팔을 자르려고 해? 짐승도 그런 짓은 안 한
다 이놈아."
"나는 왼손이고 그 새끼는 오른손 아니오."
"그래서 니 녀석이 더 이익이다 이 말이냐?"
"당연하지요. 호치 그년만 없었으면 그 개자식 팔을 뎅겅 잘라버렸을
텐데."
"에라 이 썩을 놈아."
'도대체 이곳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정이 측은한 눈으로 야혼을 쳐다보다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10년
전 야혼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이곳에 무엇 하러 왔느냐."
"소를 죽여주면 먹을 걸 준다고 해서 왔소."
"좋다 그럼 이 망치로 저놈을 한번 죽여보아라."
"아무 곳이나 패면 죽는 거요?"
"머리를 때리면 된다."
"쉽구먼 뭐."
잠시 후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갓 10살 난 아이 몸에서  황소도
꼼짝 못하게 하는 전율적인 살기가 흘러나옴에 놀랐고, 황소의 머리를
잔인하게 짓이기는 행동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있음에도 전혀 놀라거나 동요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 차가워진 얼굴로 황소의 표정을 살피며 망치질을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야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더 가관이었다. 사람에 비하면 일
도 아니라는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던 것이었다.
'그 나이에 살인 경험이 있었어.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야혼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천성적으로 피를 보고도 무감각한 인간들
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은 도살장이었다.
'네 녀석이 야차혈마지체를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욱 이
곳에 붙잡아 두어야했다.'
까닭에 지금껏 야혼에게 가르친 것이 살기를 안으로 갈무리하는 방
법이었다. 수련을 통해서가 아닌 황소를 잡으며 자연스럽게 터득하기를
유도했던 것이다.
"십만대산에 간다고 했더냐?"
"엥? 영감도 알고 있었나 보네?"
야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오밀문에서도 수뇌들만 알고 있는 사실
을 도축장에 있는 이정이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네가 하오밀문의 속가제가가 된 것도 알고 있다 이놈아."
"그거야 하오비동인가 하는 곳에 들어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뭐."
"그래서 얻은 게 있었느냐?"
"태을건곤심법(太乙乾坤心法)인가 하는 것하고 천면만환공(千面滿幻
功)만 간신히 찾아냈소."
"정말이냐?"
이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300년 전 절대고수의 무공을 찾아
냈다는 야혼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음이다. 더구나 그런 엄청난 무공을
찾아낸 녀석은 전혀 달가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느냐?"
"대단하기는, 거지새끼 하나 못이기는 그런 무공을 가지고. 정력에도
별 도움도 안되더만."
"이제 막 시작한 녀석이 벌써 효과를 바라면 되겠느냐. 그래도 절반
이상은 익혀야지 효과가 나오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보약과 같은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하
고."
"그거야 앞으로 익히면 되는 것이고. 이놈아, 도대체 이게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대뜸 야혼 옆에 놓여있던 쇠망치를 들어올린 이정이 인상을 쓰며 야
혼을 노려보았다.
"못박는 망치지 뭐요. 때로는 소 잡을 때도 쓰이는 물건이고."
이정의 표정에 야혼이 찔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원래
들고 나오려던 생각은 없었는데 상대가 워낙 강했고, 도 다음으로 손에
익은 물건이 망치밖에 없었기에 무기로 썼던 것이다.
"내가 말했지.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니까, 보관에 각별히 신경
쓰라고. 이게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어떻게 되기는, 못 박을 때 쓰겠지요. 나도 그랬으니까."
"이거 하나면 네 녀석이 싸웠던 그 잠개와 비슷한 수준의 고수 50명
을 부하로 부릴 수 있다면 믿겠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쇼. 그 망치가 무슨 힘이 있다고 사람을 부리
오."
"정말이다 이놈아. 이것이 우리 도백회의 장문신물이란 말이다."
"거짓말하지 마쇼. 그런 걸 왜 날 주오. 영감이 가지고 있지. 엥? 그
럼 영감이 그 도백횐가 하는 곳 대장?"
이정을 향해 쏘아붙이던 야혼이 화들짝 눈을 치떴다. 말을 하다보니
이정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거지새끼와 같은 수준의 인물을 50명이나 부하로 거느리고 있는
대단한 존재가 아닌가.
"그렇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바빠서 말이다."
"하긴 영감이 가장 한가한 사람이니까."
"무슨 말이냐?"
딴에는 어린 야혼에게 자랑하는 게 뭣해서 다른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를 달았는데 액면그대로 믿는 표정이라니. 이정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영감님의 말이 맞다고요. 그런 쇠망치 들고 있어봐야 무겁기만 하지
어디에다 쓸 거요. 불러서 심부름을 시킬 거요 아니면 누구누구가 기분
나쁘게 했으니까 가서 잡아오라고 할거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 아
뇨. 그리고 막말로, 내가 망치를 들고 가서 '야! 너희들 전부 와서 내말
들어.' 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듣겠소? 지들이 가지고 있기는 귀찮으니
까 영감님한테 줘버린 거구만."
"하! 그래도 이놈아. 이건……."
"아이고 답답해 죽겠네. 영감은 무공이 없으니까 잡일하기 딱 좋은
조건이라 이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러니까 네 말은 잡일을 시키기 위해 이 도백철추를 나에게 주었
다고?"
"이제야 말을 알아듣네. 나라도 그렇게 하겠구먼. 그러니까 그 망치
는 못박는데 쓰면 딱이란 말이오. 그게 원래 만들어진 용도고."
"에라……."
"거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이거나 좀 봐주시오. 어떤 사기꾼 같은 새
끼가 준건데 가짜 같아서 말이오."
이정의 말허리를  잘라버린 야혼이 주천상에게 받은 도법 구결을 내
밀었다.
"이건 또 뭐냐? ……허억!"
야혼이 내민 종이를 쳐다보던 이정이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쏟아져 나오며 사방을 휩쓸었다.
"이것 누가, 누가 주더냐. 아니 그자가 어디에 있느냐."
"아이고 영감님. 저 환자라고요. 이것 좀 놓고 하자고요."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는 이정의 행동에 깜짝 놀란 야혼이 소리를
질렀다. 그저 보아달라고 내밀었을 뿐인데 도법이 적힌 종이를 쳐다본
이정이 마치 미친 성난 소처럼 흥분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 또한 도법
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이질 않는가.
"이런!"
자신의 추태에 깜짝 놀란 이정이 황망히 손을 풀었다. 너무 흥분해서
야혼이 환자라는 사실조차도 깜빡했다.
"켁! 켁! 곧 관속으로 들어갈 영감이 웬 힘은……. 그러니까 그 사기
꾼 새끼는 죽일 놈이다 이 말이네? 그 새끼를 만난 건 왜 그날 있잖소.
소가 발광했던 날……."
"그랬군, 드디어 다시 강호로 나왔단 말이군……."
야혼의 말을 듣고 난 이정이 원한에 사무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자,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자가 바로
그였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도법은 원래 300년 전 강호십대고수의 일 인
인 지옥마제 이청풍 그분의 무공이었다. 아울러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었고."
"그럼……."
"그렇다. 내가 그분의 후손이다. 100년 전만 해도 염왕도법의 4초식
은 전부 전해져 내려왔다. 나의 할아버지께서 십만대산으로 떠나기 전
까지는……."
이정의 조부 역시 명교의 맹신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100년 전 무림
과 관에서 십만대산에 있는 명교 총단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돌자 바로
그곳으로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께서 익히신 무공은 1초가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
버지가 명교 교도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관의 공격에 집이 불태
워지면서 비급도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원수를 알고 있음에도 복수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명교의 후예들이
었다. 명이라는 대 제국을 향해 누가 감히 복수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죽은 듯이 명교의 후예임을 숨기며 살아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
었다.
"그자가 나타난 것은 30년 전이었다. 내가 35살 때였지. 어떻게 찾아
냈는지 내가 염왕도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더구나. 그에게 전
가족을 잃고 단전마저 박살난 채 나만 살아 남았다. 그 때 날 구해준
사람이 전대 도백(屠白)이었다."
이정이 야혼을 향해 웃옷을 들춰 보였다. 정확하게 단전 어림을 횡
으로 쓸고 간 기다란 상처가 드러났다. 아마도 당시에는 쩍 벌어진 뱃
가죽 사이로 내장이 훤히 내비칠 만치 깊은 상처임에 틀림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그 사기꾼 놈을 없애달라고?"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아라. 네 녀석이 무슨 수로 그자를 없애냐.
더구나 황족이라며."
"그건 맞소 영감. 내가 아무리 정력제를 많이 처먹어도 안될 것 같습
디다. 늙어 죽기를 기다렸다가 무덤을 파헤칩시다.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오."
"에라 이 썩을 놈아, 말이나마 복수해주겠다고 하면 어디 덧나냐?"
"영감! 내가 아무리 여자를 좋아하지만 이 나라 공주는 따먹을 생각
절대 안 하오. 왜냐고? 해 봐야 안 되는 걸 알거든."
"됐다 이놈아. 혹시라도 운이 좋아 그곳에 도착하거든 이렇게 생긴
도(刀)나 찾아보거라."
야혼을 향해 인상을 쓰던 이정이 벽장 안에서 도(刀) 한 자루를 들
고 나왔다. 과거 지옥도(地獄刀)라 불린 염왕마존의 독문병기와 똑같이
생긴 도였다.
"날도 없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도를 쳐다보던 야혼이 인상을 쓰며 볼멘소리를 했다. 전신이 검정색
인 점은 여태 쓰던 도와 거의 흡사했지만 가장 중요한 날이 없었다.
"가는 길에 심심할 거 아냐?"
"그러니까 영감님 말은 이걸 갈아서 날을 세우라 이 말이요? 이게
뭐 거시기요. 세운다고 바로 세워지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야혼이 고함을 질렀다. 조금이라도 날이 서 있
는 도라면 시도라도 해보겠지만 이건 완전히 몽둥이 수준이었다.
손목에 대고 그어봐야 벌건 자국만 남을 뿐이었다.
"염왕도법을 12성 완전하게 익히기 위해서는 외부로 살기가 표출돼
서는 안 된다. 오직 지옥도(地獄刀)에만 모든 살기가 집중되어야 하는
게야."
혈해도법을 익히는 요체였다. 비록 지금 가진 게 1초식밖에 없지만
그마저도 완성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지옥도를 만들며 익히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가 쓸데없이 내공을 익힌 탓에 살기가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앞으로 여자들에게 접근하기도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엥? 그건 무슨 소리요 영감."
지금껏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야혼이 여자 이야기가 나오자마
자 한껏 관심을 드러냈다. 내공 때문에 여자에게 접근을 못하게 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건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내공심법을 익힌 궁극적인 목적이 정력 때문인데 자칫하면 써먹지도
못할 정력만 키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내공이 높아지면 살기도 덩달아 강해진단 말이다. 차라리 어느 정도
경지를 넘어서면 그런 현상은 없어지는데 네 수준으로는 가당치도 않
는 일이니 살기(殺氣)를 죽이는 연습을 할밖에. 그리고 그 도법은 버려.
가짜니까."
야혼 앞으로 벽장에서 도와 같이 가져왔던 종잇장을 내밀었다. 염왕
도법의 1초인 염왕수라참의 완전한 구결이었다.
"어디 보자……."
두어 번 찬찬히 훑어보던 야혼이 다시 이정에게 건넸다. 거의 100여
자에 달하는 구결을 벌써 다 외었다는 의미였다.
이정 역시나 당연하다는 듯 야혼이 내민 종이를 받아들었다. 야혼의
능력을 모를 리 없었다.
"잊지 말아라. 들고 있는 도와 같은 모양새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도백철추는 당분간 회수한다. 돌아오면 그때 다시 주마."
"치사하게, 내가 죽을까봐 그런 거지요."
"당연하지, 이건 내 것이 아니거든."
"더 줄건 없소? 죽으러 가는데……."
"네놈이 죽어? 다른 건 바라는 거 없다. 다시 볼 때는 고자나 되었으
면 하고 바랄 뿐이다."
"이 영감이 아예 악담을 하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고자가 뭐요. 고
자가. 행여 그런 소리 하덜 마쇼. 나 갈라요."
몸을 일으킨 야혼이 도축장을 나섰다. 이정에게 건네 받은 뭉툭한 도
와 그 도를 갈아야할 연마석을 품에 지닌 채.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7)- 건들지마! 다쳐!
겨울 초입으로 들어선 하룻날, 서대시전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개봉사괴가 십만대산을 향해 길을 잡았다.
"섭섭한가 보네. 우리가 떠나서 말이야."
배웅 겸 몇몇 사람들이 들고 나온 음식을 손에 들려주자 야혼이 방
긋 미소지었다.
"아미타불! 우리가 아니고 연작시주 때문일세."
"하기야 서대시전에 나만한 인물도 없었지. 저기 또 오지 않냐. 어이
쿠 요번엔 여자네. 저 물결치는 가슴 좀 봐라. 나랑 잔 여자들 중 한
명 일거다. 죽으로 가는 것도 아닌데 왜들 저리도 난린지."
"시주는 뭔가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 거라네. 연작이 다시는 돌아오
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먹을거리를 안기는 거야. 그것 먹고 뒈지라
고. 아마 어디선가는 소금도 뿌리고 있을 걸세. 그리고 저기 오는 여자
는 연작시주 배웅하러 오는 게 아니고 젖퉁일세."
"정말이네. 큰 색시도 같이 가는 거야?"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인은 야혼을 물 먹인 화소미였다. 그녀 또
한 이번 여행의 동반자로 따라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동생. 나도 같이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이게 다 뭐죠?"
요염한 미소를 던진 화소미가 일행이 타고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문
주인 강웅삼에게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정말 사슴을 싣고 갈 줄을 생각
지 못했다.
"정력제지 뭐."
우리에 갇혀있는 3마리의 사슴을 야혼이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요구한 대로 인삼을 달여 먹인 사슴을 강웅삼이 구해주어 그것들을 싣
고 떠나는 길이었다.
"작은 색시 너는 아까부터 누굴 기다리는 거냐."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여호치를 향해 야혼이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개봉성문을 나오면서부터 누군가를 찾는 듯한 그녀의 행동 때
문이었다.
"나를 찾는 거다 이 개차반 녀석아."
"이런, 씨발탱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또 나타났네?"
컬컬한 음성이 들려오자마자 야혼이 날도 없는 도를 뽑아 무턱대고
등 너머로 휘둘렀다. 보나마나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 개차반이 아직도 식칼을 휘둘러대네 그랴."
상당히 날카로운 기세를 머금고 달려드는 도를 피하며 장대손이 소
리를 질렀다. 그 사이 개과천선할 리는 없다지만 불문곡직하고 무기를
휘둘러대는 야혼의 행사가 괘씸했던 까닭이다.
"이 씨발탱아 휘두를만하니까 휘두르는 거지."
"그만 둬 새끼야."
다시 한번 장대손을 향해 도를 휘두르려고 할 때 한줄기 날카로운
소성이 가로막았다. 말없이 마차를 몰고 있던 여호치가 야혼을 제지하
고 나선 것이었다.
"저 자식이 왜 우리랑 같이 가는 건지 설명을 해줘. 그럼 잡소리 안
할테니까."
"네놈들을 믿지 못하겠어서 내가 같이 가자고 했다. 됐냐?"
"야! 썅……."
"연장아 네가 참아라, 개뿔도 없는 놈이 어디서 눈을 치켜 뜨냐. 편
하게 가려면 사슴피나 뽑아 처먹으면서 조용히 가라. 그런데 사슴피는
어떻게 뽑아 먹어야 되냐."
"이런 개자식들. 너희들 그년들이랑 잤지!"
"아미타불! 당연히 잤으니까 이러지. 연작시주 네 말이 맞나 틀리나
확인해보려 자봤는데 전부 거짓말이더구나. 앞으로 난향이와 월향이 거
시기 들먹이며 장사하면 그때는 이 철탁 맛이 얼마나 구수한지 알게
될 거다."
"치사한 년들, 추접스럽게 미인계를 써서 친구를 뺏어가냐? 내가 한
번 달랄 때는 죽어도 안 된다더니, 제 부하들이라고 개 같은 새끼들한
텐 공짜로 주라고 해? 대장이란 년이 잘하는 짓이다."
야혼이 한껏 이죽거리자 여호치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죽고싶지 않으면 주둥이 닥쳐라."
차가운 한기를 머금은 여호치의 음성이 야혼의 귓전을 강타했다. 실
은 야혼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궁주로서 그녀들을 이용해야하는 자
신의 처지가 견디기 힘들었는데 야혼이 아픈 상처를 까발렸던 것이었
다.
"알겠습니다. 소생은 주둥아리 닥치고 내일이나 하렵니다. 그러니 모
든 일은 대장이 알아서 하시지요."
여호치를 향해 능글맞게 웃어 보인 야혼이 연마석을 꺼내 도를 갈기
시작했다.
"개차반 뭐 하는 거냐?"
"보면 몰라? 칼 갈잖아."
"칼 가는 걸 몰라서 묻겠느냐. 개차반 네가 들고 있는 그 쇳덩어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는 것이지."
"이봐 씨발탱이 당신은 당신 일이나 봐. 남 사는데 신경 끄고."
"그놈의 날을 세우려면 모르긴 해도 5년을 걸릴 것 같아서 하는 말
이다. 이놈아."
"10년도 갈아봤어. 걱정 붙들어매. 한가지만 말해줄까? 이 날을 세우
면 가장 먼저 씨발탱이 네 모가지부터 잘라버릴 테니까 각오하라고."
이내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야혼은 고개를 숙이고 칼 가는 데에
만 열중했다. 어차피 하루 이틀에 갈아질 재질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쇠가 하도 단단해 보여 대장간에 들고 갔더니, 인세에 보기 힘든 묵
령한철(墨靈寒鐵)이라 하였다. 희대의 보물인 만년한철보다 더 단단한
철이라며 이것을 갈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 줄은 그들도 모른다고
하였다.
"연장아 내가 도와줄까?"
여호치와 야혼 사이에 살기 어린 말이 오가자 태웅이 어색해진 분위
기를 바꿔보려 잽싸게 말을 걸었으나 야혼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
다.
"아미타불! 태웅아 저 자식이 저 짓하고 있을 때는 건들어 봐야 아
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경험하고도 그러냐. 아서라, 유일하게 집
중하는 일인데. 우리는 사슴피 마시는 방법이나 연구하자. 개자식 피
뽑는 방법이나 알려주고 일을 하던지 할 일이지."
"호호호! 동생들 그건 이 누님이 가르쳐 주지. 야혼 동생이 준비하라
했던 침이 있을 거야. 그것을 가지고 저놈들의 코를 찔러서 피를 받으
면 돼. 매일 한잔씩."
녹혈을 섭취하는 방법이었다. 더도 말고 하루에 한잔씩만 받아서 술
과 함께 마시면 최고의 정력제가 된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이다.
"흐흐흐! 고맙소 누님. 우리 시식 한번 해볼래?"
화소미에게 방법을 얻어들은 태웅이 추기영을 향해 음흉한 눈빛을
던졌다. 야혼이 칼을 갈고 있는 통에 좀이 쑤셨던 차였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아미타불! 오랜만에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구나. 곰탱이 시
주가."
추기영 역시 눈을 빛내며 사슴이 갇혀있는 우리 쪽으로 다가갔다.
"아이고 이 정력제들아! 오래 기다렸지 이제야 방법을 찾았구나."
마치 몇 년만에 만나는 반가운 친구를 대하듯 살가운 얼굴로 사슴에
게 다가갔다.
그러나 사슴이란 놈이 피를 달란다해서 아나 먹어라 하고 줄 짐승은
절대 아니었다. 녹용을 잘라내는 작업 또한 숙련된 전문가가 아니면 결
코 시도할 수 없는 고도의 기술인 것이다. 혹여 잘못되면 우리에 머리
를 박고 자결해버리는 짐승이 바로 사슴이다.
결과적으로 추기영과 태웅은 최악의 수를 두고 만 것이다. 야혼을 기
다리지 않고 미리 피를 먹고자 했던 욕심 때문에.
꾸에액!
우직!
삼릉침을 코에 찔러 넣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사슴 두 마리가 동
시에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우리를 향해 그대로 돌진해버렸다.
그렇게 원하던 정력제인 녹혈은 한 방울도 맛보지 못하고 사슴 두
마리의 목뼈가 부러져 버린 것이었다.
"이런 씨발타불이 있나."
태웅과 추기영의 표정이 참혹하게 구겨졌다. 늘상 야혼의 약을 훔쳐
먹곤 했던 두 사람이 드디어 자신들만의 정력제를 처음 접하는 순간이
었는데 그것들이 자결을 감행해버린 거였다.
십만대산까지 가는 길에 두고두고 먹기 위해 마차까지 준비해서 싣
고 왔던 정력제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고기 생겼구나. 이따 저녁때 구워먹자."
"니미지랄타불! 꿈도 꾸지 마시오 거지양반. 연작이 그랬는데 사슴고
기도 훌륭한 정력제라 했소. 이놈을 전부 말려서 갈 것이오. 아예 얻어
먹을 생각일랑 하지 마쇼. 잘못하면 나까지 연작처럼 돌아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장대손을 향해 눈을 희번뜩 치뜬 추기영이 너부러진 사슴을 가로막
았다. 혹여 손이라도 댈라치면 바로 철탁을 날려버리겠듯이.
기가 막힌 사람은 당연 장대손이었다.
한 놈만 개차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세 놈 모두 같은 족속들이
었다. 더구나 민 대머리인 중놈까지 정력제 타령을 할 줄이야.
개방에 보고된 것보다는 훨씬 더 골통들이 바로 개봉사괴였다.
더 환장할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아미타불! 이곳에서 좀 쉬었다 가야겠소 호치시주."
"그놈들 전부 말려서 가려고?"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았더니 금방 알아듣는구려, 감사하오이다. 칼
좀 주시겠소."
여호치로부터 조그마한 소도를 받아간 추기영과 태웅이 사슴 가죽을
사정없이 벗겨 내렸다. 아무도 없는 계곡이어서 망정이지 가령 북적거
리는 도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몰매를 맞아도 할말이 없는 노릇
이었다.
머리를 깍은 중이 사슴 가죽을 벗기는 것도 모자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쓸개며 간을 생으로 잘라먹고 있는 것이었다.
혹여 장대손이 빼앗아 먹을까봐 잔뜩 경계를 하며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워 버린다.
"뭐하냐?"
거의 한 시진 이상 칼을 갈고 있던 야혼이 그제야 두 사람의 작태를
알아차렸는지 눈을 끔벅거리며 말을 건넸다.
지금껏 칼 가는데 모든 정신을 쏟고 있다보니 추기영과 태웅에게서
일어난 일을 모르고 있었다.
태을건곤심법을 운용하면서부터 새로이 생긴 변화였다. 딱히 그럴 마
음이 없는데도 한번 몰두를 하게 되면 다른 곳으로는 전혀 신경이 미
치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고 오직 마음속에는 검은
도만 있었던 거였다.
"그거 간거 맞냐?"
야혼이 들고 있는 검은 도를 가리키며 태웅이 물었다. 1시진 이상을
온갖 정성을 쏟아 칼을 가는 듯 했는데 거의 변화가 없기에 묻는 말이
었다.
"원래 시작은 이래."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은 도를 허리에 건 채로 두 사람의 하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볼 뿐이었다. 대충이나마 이미 앞 뒤 상황이 짐작이 갔던
터였다.
"내 한마디만 할게. 누가 되었던지 저 사슴에 눈독들이면 그날로 나
와 사생결단을 내야 할거다. 알았냐? 그리고 절반씩 준다면 말리는 방
법 가르쳐 줄 의향도 있고."
"너?"
"싫음 말고."
"치사한 새끼."
"알았어 새끼야. 빨리 와서 작업이나 해줘."
"조옿지."
마차에서 풀쩍 뛰어내린 야혼이 능숙한 솜씨로 사슴을 해체하고 뼈
를 발라낸다. 도축장에서 10여 년 갈고 닦은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
다. 그의 손이 거쳐간 곳은 살점하나 남지 않고 깔끔히 발라졌다. 이윽
고 채 1각도 되기 전에 작업은 끝이 났다. 육포를 만들 재료를 따로 분
리해 낸 야혼이 불을 피워 고기 구울 채비를 서둘렀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힘줄과 기름기를 깨끗이 제거해야돼.
그것들이 남아있으면 변질이 빨리 된다고. 뭐해? 빨리 널지 않고."
"연작시주, 우리 십만대산에 다녀와서 정육점 차릴까?"
야혼의 칼질을 감탄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던 추기영이 장난처럼 말
했다. 추기영뿐 아니라 무공의 고수인 장대손조차도 탄복할 만한 손놀
림이었던 거였다.
조그마한 소도가 사슴고기를 스치고 갈 때마다 종잇장처럼 얇게 포
가 떠졌다.
"임마, 고기 사달라고 손 비비는 그런 짓을 왜하냐? 네 녀석이 바람
만 잘 잡으면 우린 금방 떼부자가 된다니까 그러네. 큰 색시 작은 색시
뭐해, 고기 안 먹어?"
"고맙다 개차반 마침 배가 고팠던 참인데."
꽝!
손을 비비며 다가들던 장대손 앞에 검은 도가 깊숙이 박혔다.
"시발탱이 너는 절대로 안돼. 정 먹고 싶으면 저기 있는 내장이나 처
먹어."
"이런 우라질 놈 새끼. 내가 나이가 몇인데 계속 반말이냐 이 개자식
아!"
두 번째로 장대손의 울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먹는 것으로 사람 괄시하면 절대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
는 빌어먹고 사는 거지가 아닌가.
"시발탱이 너도 장가 안 갔다며. 옛날에 내가 알던 여자가 그랬는데
장가 안간 새끼들은 전부 똑같다고 했어. 억울하면 가서 애새끼 하나
까 와. 그럼 바로 어른대접 해 줄 테니."
"화소저 내가 이런 대접을 받고 따라가야 하는 거요?"
"그 여자 나랑 잤으니까 꼬리치지마."
"너 개차반 이 새끼 오늘 나랑 한번 죽어 보자."
"씨팔 그럼 누가 겁낼 줄 알고? 그래 나도 기다리고 있었어. 저번에
하다 만 것 아예 끝장을 보자고."
"조용히 해라. 누군가 온다."
도를 뽑아들고 달려들 채비를 한 야혼을 잔뜩 긴장된 여호치의 음성
이 가로막았다.
"씨발탱이 운 좋은 줄 알라고."
"개차반 네가 운이 좋은 거다, 이놈아."
씩씩거리며 고개를 튼 순간 20여명의 인물들이 사방을 포위하며 다
가들었다.
"아이고 저 병신들. 털어먹을 사람이 없어서 우리를 노리냐. 하여간
지지리 복도 없는 놈들일세. 아미타불!"
다가온 자들의 정체를 알아본 추기영이 나지막이 불호를 흘렸다. 지
나가는 행인을 털어먹고 사는 노출산(魯出山) 산적들이었다.
"안녕들 하신가. 저는 이곳 노출산에 터전을 일구고 사는 출산파(出
山派) 두목 신출귀영(新出貴英) 노구심(盧九心)이라 합니다. 죄송한 부
탁을 드려야겠습니다."
자신을 노구심이라 소개한 험상궂게 생긴 인물이 수중에 있는 대감
도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짐짓 정중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서 속셈 뻔한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눈깔 안 돌려 새끼야. 어딜 남의 색시들을 넘봐, 시발탱아."
목이 마른 듯 입술을 축이는 노구심을 향해 야혼의 일갈이 터졌다.
그러잖아도 장대손 때문에 잔뜩 혈압이 올라있는 판에 잘됐다 싶었던
야혼은 20여명이나 되는 산적들도 아랑곳없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시발탱이라고 쏘아붙였다. 노구심을 장대손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런 쥐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감히 이 노구심에게……."
야혼의 도발에 얼굴이 시뻘개진 노구심이 들고 있던 대감도를 사정
없이 내리쳤다.
처음엔 야혼 일행을 향해 겁을 줄 목적으로 인상을 쓰고 있었으나
실은 주체할 수 없는 희열에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중까지 섞인 일행에게서 나올 노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기한 눈으
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두 명의 여인 때문이었다.
수수하게 생긴 젊은 여자는 별 볼일 없어 보였지만 중년의 여인에게
서는 폭발적인 염기가 흘러나왔다. 산적질을 하면서 겪었던 여인들 중
지금처럼 극상품의 여인은 결단코 처음이었다.
휘익!
"오라! 잔재주를 가지고 있다 이거냐?"
가볍게 대감도를 피해버리는 야혼의 몸놀림에 흠칫 놀란 노구심이
신중하게 몸을 놀리며 비아냥댔다. 그 또한 약간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
기에 야혼의 몸놀림이 무공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너 노구심이라 했지? 지금부터 시발탱이가 되는 거다. 알았냐 시발
탱아."
"저런 개차반 놈이……. 너희들은 전부 개차반이다 알았냐?"
야혼과 노구심을 지켜보던 장대손이 나머지 산적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지금부터 내 말을 따라하지 않은 놈들은 팔 다리가 부러질 줄 알아
라."
야혼과 장대손의 사소한 말다툼의 여파를 산적들이 전부 뒤집어쓰고
말았다. 야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무공의 고수인 장대손마저 산적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손을 썼다.
'나는 개차반이다' 하고 외치지 않은 자들은 전부 팔이나 다리 하나
씩은 부러지는 수모를 당했고 나머지 인물들은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
해 주구장창 개차반이라는 말을 외치고 있어야 했다.
어쨌든 장대손은 쉽게 산적들을 제압한 반면 야혼은 결코 한가롭지
를 못했다.
산적의 두목답게 노구심의 대감도는 제법 날카로웠다. 온몸의 힘을
동원해 휘두르는 대감도가 야혼의 전신으로 핍박해 들었다.
그 또한 야혼과 비슷한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터였다.
"너는 외치게 될 거야. 시발탱이라고."
무서운 속도로 사방에서 몰아치는 대감도를 슬쩍 피한 야혼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금부터 들어간다. 준비해라."
어느새 집어들었는지 노구심을 향해 다가가는 야혼의 손에는 살을
발라낸 사슴 뼈 하나가 들려있었다.
돌진.
아무런 격식도 보법도 없이 노구심을 향해 야혼의 신형이 막무가내
로 돌진해 들었다.
"이놈이……."
노구심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자신을 향해 뛰어들어오는 녀석의
몸놀림도 빨랐지만 더욱 가관인 것은 전혀 방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었다. 팔 쪽으로 대감도가 날아들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는 듯 새하얀
미소를 머금고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팔이 잘려나가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늦었어 새끼야. 기회를 줬을 때 잘라야지."
"크윽!"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주춤, 물러나는 노구심의 오른쪽 어깨에
사슴 뼈 하나가 깊숙이 박혀들었다.
그냥 도를 진행시켰으면 승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자신의 몸
에 상처날 것을 걱정하여 잠시 움찔하는 사이에 녀석의 공격을 허용하
고 말았다.
철썩! 철썩!
뒤이어 야혼의 검은 도가 노구심의 얼굴로 사정없이 떨어졌다. 날 부
분으로 치는 게 아닌 도면을 이용해서, 마치 뺨을 때리듯 정신없이 두
드려댔다.
"따라해라. 나는 씨발탱이다."
"나는 씨.발.탱이당."
"틀렸잖아 개자식아. 다시 해! 나는 시발탱이 거지새끼다."
"나는 씨.발.탱이 거지새끼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노구심이 주절거렸다.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뿐이
었다. 저들이 사슴만 싣고 오지 않았더라도 공격하지 않았을 터였다.
허름한 마차에 사슴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일반 양민으로 확신했기에
저지른 일이었다.
"밤새도록 외치고 있어라. 알았냐!"
"졌다 졌어. 이 똥 같은 놈아."
야혼의 행태를 지켜보던 장대손이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무공이라
도 강한 놈이 저런 행동을 보이면 따끔하게 징계라도 내리련만 아무것
도 없는 놈이 강짜를 부리고 있으니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계속
해서 싸움을 해봐야 자신만 더 우습게 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장대손이 포기함으로 해서 두 사람의 신경전은 일단락 되었다. 야혼
역시나 웬일인지 칼을 가는 데만 열중할 뿐 더 이상 장대손을 향해 시
비를 걸지 않았다. 까닭에 일행의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8)- 한번 준다면야!
야혼 일행이 십만대산 어귀 흠주현(欽州縣)에 도착한 때는 해를
지나 이듬해 4월, 개봉을 출발한 지 정확히 6개월 만이었다.
"야혼, 너는 나를 따라오고 너희들은 각자 산에 오를 채비를 해라."
여호치가 일행을 향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여태 느긋한 마음으로
오긴 했지만 실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 어떤 위
험이 닥칠지 알 수 없는 곳이기에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색시야 식량만 준비하면 되는 거 아냐?"
굼뜬 걸음으로 여호치 뒤를 따르던 야혼이 연신 뒤를 살피며 물었다.
객잔에 맡겨두었던 사슴 때문이었다.  야혼만은 꿋꿋하게 사슴을 끌고
왔던 터였다.
"내가 읽어보라고 준 책은 다 봤냐?"
"물론 다 봤지. 그런데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는데?"
일행이 개봉을 떠나오기 전 강웅삼이 건네준 책자였다. 십만대산에
자생하는 독초를 비롯한 독물들과 산 속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에 관한
자료집이었다.
"동생 머릿속에는 춘서에 관한 내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래."
이곳까지 오면서 야혼이 즐겨 보았던 책이 바로 방중서였다. 어디서
그 많은 분량을 구했는지 보자기 하나 가득 책을 담아와서는 칼을 가
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그것만 쳐다보며 왔던 것이었다.
"기다리라고 큰 색시. 내가 그 방중비서를 전부 익혀서 다시 한번 도
전을 할 테니까."
"호호! 나야 뭐 언제든지 환영이지. 그때는 뭘로 내기를 하려나."
다시 도전한다는 야혼의 말에, 설핏 얼굴을 붉힌 화소미가 짐짓 흔연
스레 맞받아쳤다. 문득 야혼과 겨루던 그날 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의 10년만의 경험 탓이었을까.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쉬이 지
워지지 않았다.
"호치야 나 잠깐 다녀올게."
"너 또 춘약(春藥) 사러 가는 거지?
대로변에 나앉은 의원을 가리키는 야혼을 향해 여호치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야혼이 의원을 찾는 경우는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 정력제
를 살 때와 여자를 후릴 때 사용하는 춘약이 떨어졌을 경우.
"동생 산으로 들어가면서 춘약은 뭣하러."
"왜 쓸데가 없어. 여자가 둘이나 있는데. 그리고 부족들도 꽤 있다
며."
"설마 우리에게 사용하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 때 보니까 잘버티드만 뭘 새삼스럽게."
화소미를 향해 눈을 찡긋한 야혼이 서둘러 의원을 향해 뛰어갔다. 여
호치가 막는다해서 사지 않을 것은 아니지만 공연히 실랑이하기 싫어
서였다.
"그때 저 자식이 춘약 썼어?"
"많은 양은 아니었습니다. 약간 기분이 들뜰 정도만……."
여호치의 물음에 발긋 얼굴이 달아오른 화소미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좋았어?"
"여자의 입장에서 묻는 것이라면 좋았습니다. 자칫했으면 제가 질 뻔
했으니까요."
개봉부주의 부인까지 희롱하고도 백주대로를 활보하고 다닐 수 있는
비결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희롱했다하여 절대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만큼은 성심을 다하여 사랑해주는 남자였다.
물론 춘약이라는 저급한 수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건 단지 분위기
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조그마한 장치일 따름이었다.
"그래도 잊어. 저 자식은 우리와 어울리는 놈이 아냐."
"궁주님도, 제가 뭐 어린앤가요?"
여호치의 말에 화소미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룻밤 즐기
는 상대일 뿐 더 이상의 관계는 그녀도 원하지 않는 터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 자신들이 아닌가.
"저 녀석은 볼수록 모르겠단 말야."
여호치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야혼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실이
거의 없다. 아니 자신뿐 아니라 서대시전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야혼에
대해서 알고 있다. 10년을 서대시전에서 굴러먹고 있는데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인 게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과연 야혼을 알고 있는지 스스로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다. 속내는 물론 하는 행동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냥 여자를 밝히는 남자로만……."
두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실을 알리 없는 야
혼은 의원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건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 양반이 왜 이러나. 후하게 쳐준다니까. 저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것 좀 꺼내보시오."
마치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야혼이 채근했다. 처음
들른 곳에서 춘약을 구하고자 할 때 수시로 겪었던 일이었다. 유통자체
가 금지된 약품이기에 함부로 내놓고 팔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였다.
"안 되는……."
다시 거절하려던 의원이 말끝을 흐렸다. 반짝이는 은전을 그러쥐고
있는 야혼의 손을 보아버렸기 때문이다.
"이곳에 처음이고 하니까 원래 값보다 조금 더 얹어주겠소. 그리고
광양분(狂痒粉)도 좀 주시오."
"광양분까지 말씀입니까."
의원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광양분까지 알고 있으면 완전 선
수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면 속일 수도 없을뿐더러 없다고 거짓말을
하면 오히려 화가 미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광양분을 쓰실 때는 조심해야한다는 사실은 아실 테니 따로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따로 포장하여 다섯 봉지로 담았습니다."
"고맙소 돈 많이 버시오."
다섯 봉지에 나눠 담겨진 광양분을 받아든 야혼의 입가에 환한 미소
가 번졌다. 가장 구하고 싶었던 약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분말이었다.
실은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개봉에서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광양분
을 이곳에서 구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돌아갈 때까지 무사히 보전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식량을 제외한, 산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만 해도 상당히 많은 양이었
다. 발바닥이 닳도록 여호치 뒤를 쫓으면서 내내 마차를 끌고 오는 건
데, 하고 후회했다. 이윽고 양손 가득 짐 꾸러미를 들고 객잔으로 들어
서자 먼저 돌아온 추기영 일행과 함께 뜻밖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
다.
"나는 남천악이오. 이 분은 주려화 소접니다. 화산과 무당에서 왔습
니다."
20대 중반의 호리호리한 청년이 일행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자기 소
개를 했다.
"신주일룡(神州一龍) 소협과  천봉(天鳳)소저가 웬일로……."
화소미가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
던 거물들이 일행을 찾아왔던 것이었다.
신주일룡(神州一龍) 남천악(南天岳).
화산파의 대제자로 강호 상에 쟁쟁하게 이름을 날리는 자로 정파의
기둥이라고까지 불리는 자였다. 아울러 천봉(天鳳) 주려화(朱呂花)는 무
당 제일화라 불리는 여인으로, 그녀 역시 남천악의 신분 못지 않게 강
호 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 지도를 만들기 위해 떠나는 일행에게
왔다함은 더불어 가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도련에서 오신 분은 어디 있습니까?"
남천악과 주려화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여호치가 객잔 안을 둘러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호오! 하오밀문에도 인물이 있었나 보군."
여호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객잔 문을 밀치고 두 명의 남녀가
들어섰다.
"오랜만이오이다, 유소협. 냉소저도 오셨습니까."
객잔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을 확인한 남천악이 정중하게 포권을 했
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두 사람이 달갑지만은 않은지 잔뜩 굳어졌다.
상대의 신분 때문이었다.
지금 막 들어온 자는 마도련의 제일공자인 패천마룡(覇天魔龍) 유
마혼(劉魔魂) 이었고 그의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여인은 마도
련 소속의 사황문 소공녀인 무면미봉(無面美鳳) 냉소소(冷素素)였던 탓
이었다.
정파 무림의 제일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마도련 인물들, 더구나 자신
들과 쌍벽을 이룬다고 알려진 최고 인물이 그들이었다.
"여소저라 하셨습니까? 말이 잘못되어서 정정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
린 마도련에서 나온 게 아니고 개인자격으로 왔습니다. 아마 저들도 마
찬가지 일 겝니다."
"그럼 비공식적으로 나오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어이 색시! 우리 저들하고 같이 가는 건가?"
"당연하지 연작시주. 서로를 감시하러 왔는데 기필코 같이 가야하지
않겠나. 우리도 감시를 해야하고."
"같이 가면 나야 좋지 뭐."
야혼이 의뭉스런 미소를 흘렸다. 미인들, 새로이 일행으로 추가된 두
명의 여인들의 자태에 눈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다.
아직 옷 속을 확인하지 못해서 기준에 부합하는지, 함량미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얼굴만큼은 지금껏 거쳐갔던 여인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확인을 해봐? 아니다 그냥 어디 사는 곳만 물어보자.'
"저……. 주소저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혹시 집이 북경 아닌가 해서요. 언제 뵌 것 같기도 하고……."
"북경은 맞습니다만. 저는 처음 뵙는 것 같군요. 근데 성함이……."
"아참 소개를 잊었군요. 야혼이라 합니다. 하오밀문의 속가제자지요."
'이년도 사기꾼인가? 어째 진짜 같은데…….'
"연장아 어디 가서 하오밀문의 속가제자란 말은 절대 하지 말아라."
"왜 임마! 일이 끝날 때까지는 하오밀문의 속가제자인걸."
"저들의 표정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재미있는 모양이지 뭐."
네 사람의 표정을 살펴보던 야혼이 이죽거리듯 말했다. 다들 터져나
오려는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속가제자라니, 강호 대 문파도 아니고 누구하나 문파라고 인정하지
않는 곳이 하오밀문이데, 그곳의 속가제자라고 자랑스레 떠벌리는 야혼
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까짓 잘났다고 떠들어 봐야 십만대산 일을 우리에게 맡겼지 않냐,
임마. 다 그놈이 그놈이야. 안 그래 큰 색시?"
"호오! 우리가 그놈이 되는 건가?"
남천악의 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무공도 없는 천둥벌거숭
이 같은 자가 정파와 마도련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말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댁들은 왜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셨오? 개인 자격으로 왔다
면 십만대산을 향해 떠나든지 할 일이지. 설마 우리 같은 하찮은 잡것
들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일순 네 사람이 할말을 잃었다. 이곳에 도착하여 한달 여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들이었다. 굳이 하오밀문의 일행을 따라서 산행할 필요가 없
었는데 상대방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공식적이라 하였지만 정파나 마도련 어느 한곳이 하오밀문을 따라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성모봉을 찾지 못 하리라고
믿으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에 참여했던 것이었다.
"우린 여기서 쉬었다 갈 테니까 먼저 떠나든지 하십시오."
"저는 야소협 일행과 같이 가고 싶습니다."
"엥? 얼음소저는 우리와 같이 가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쿡!"
얼음소저라는 야혼의 말에 여호치를 비롯한 일행이 코웃음을 터트렸
다. 감히 무면미봉 냉소소를 향해 대놓고 얼음소저라 칭한 자는 강호상
에 유래가 없을 터였다.
그녀를 모욕한 자 치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음으로.
"그럼 이분은 같이 가는 걸로 하고 나머지 분들은 각자 가시는 것으
로 알고 있겠습니다."
"우리도 끼워주겠나?"
"오잉! 세 분도 같이 가신다고요? 사기꾼, 아니 주소저도요?"
야혼의 물음에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입니다. 여기서 1마장 정도 걸어가면 시전이 있습니다. 그곳
에 가서 양식을 사 가지고 오십시오. 6개월 치를 준비하셔야 할겁니다.
우린 그렇게 준비했으니까요."
"허!"
남천악과 유마혼 두 사람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토했다. 분명 자
신들을 농락하는 행위임에도 뭐라 할말이 없었던 탓이었다.
자칫 잘못하여 저들이 십만대산 행을 포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책임
은 전부 자신들의 몫이 된다. 비공식적으로 나왔다고 했으니 정파인들
의 비난은 전부 사문에서 지게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 앞에서 시건방을 떨고 있는 자가 색시라 부르던 두 여
인과 늙은이 한 명은 그들이 보기에도 상당한 고수였다. 자신들이라 하
여 함부로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하오밀문에 그런 고수들이 있는 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결코 함부로 대할 자들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뭐하쇼?"
"나는 준비해왔는데 끼워주실 건가요?"
네 사람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커다란 보퉁이를 든 여인이 일행에
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당소저……."
남천악과 유마혼이 기겁한 얼굴로 두어 발짝 비켜섰다. 터질 듯한 몸
매에 붉은 경장을 입고 있는 여인,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인 당가려였기
때문이었다.
냉혈독접(冷血毒蝶)) 당가려(唐可麗).
독과 암기에 있어서는 강호 일절이라 불리는 사천당가의 문제아이자
강호무림인들의 공포라 불리는 여인이다.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옷을 입고 다니는 통에 그녀를 알지 못하
는 무림인들이 헤픈 여자로 착각하고 접근했다가 봉변을 당하기 일쑤
였다. 살인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자신이 개발한 독을 실험한다
는 명목으로, 치근대는 무림인들을 이용했기에 그녀를 알고 있는 대부
분의 남자들은 붉은 마녀를 보기만 하면 도망을 친다.
남천악과 유마혼이 놀란 토끼 마냥 물러난 이유였다. 그런 그녀마저
도 야혼 일행을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흐미! 저년은 완전 물건이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소문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야혼은 벌렁대는 가슴
을 어쩌지 못하고 연신 입맛을 다셨다. 숨을 고를 때마다 위아래로 물
결치는 거대한 육봉이라니.
'저년은 화소미보다 더 크겠다.'
"뭘 봐 짜샤!"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야혼을 향
해 눈을 치뜬 당가려가 팩 소리를 치며 들고 있던 자루를 턱하니 내려
놓았다.
"너 같으면 이런 경우에 왜 보겠냐?"
'허걱! 저런 미친놈이 뒈지려고 무덤을 파는 구나 무덤을 파.'
당가려를 모르지 않는 장대손이 야혼의 행동을 보고 혀를 찼다. 냉혈
독접을 앞에 만났던 네 사람과 같은 부류로 취급하고 있는 야혼의 행
동에 기가 찼던 터였다.
'이거 봐라? 무공도 없는 녀석이……. 또 물건 하나 건졌네?'
당가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얼굴은 번지르하게 생긴 녀석이 음흉
한 미소를 흘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얼굴을 쳐다보
는 게 아니라 가슴을 뚫어질 듯 쳐다보면서 말이다.
"왜 봤냐고 묻잖아, 임마."
'어라! 저것이 약 먹었나? 왜 저렇게 얌전해…….'
당가려의 말에 더욱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장대손이었다. 야혼이 했
던 짓거리로 보자면 최소한 손이 올라온다든지 아니면 중독을 시켜 고
생을 시켜야하건만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
었다.
"꼭 알고 싶어?"
"그렇다니까, 자꾸 말시킬래?"
"가슴이 커서 그랬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가 가슴 큰 여
자거든."
'개차반 너는 이제 죽었다 자식아. 그놈의 주둥아리 놀리다가 곤욕을
치를 줄 알았다. 한번 죽어봐라.'
야혼의 천연덕스런 대답에 장대손과 화소미의 얼굴이 뜨악하게 변했
다. 수많은 무림인들이 당가려에게 치근덕거리다 혼쭐났지만 야혼처럼
대놓고 가슴이 크다고 한 자는 누구도 없었다. 단지 음흉한 눈길로 쳐
다보기만 해도 중독을 시켜 무공을 패하곤 했던 그녀가 아닌가.
"보고싶은 모양이지?"
"내시도 고자도 아닌데 두 말하면 잔소리지."
"그럼 부탁하나 들어줘."
"부탁? 나 같은 놈에게 부탁할 게 있을까?"
"너 같은 놈만 할 수 있는 거야."
"나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 그 말이야?"
야혼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
만 자신이 있어야 되는 일이라는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맞아. 네가 꼭 필요해."
당가려 또한 야혼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기
대한다는 듯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야혼의 물음에 대꾸를 하는 것이었
다.
"내가 죽거나 하는 건 아니지?"
"당연하지. 이 당가려, 아직 선한 놈은 죽인 적이 없거든."
"그래……? 그럼 한번 주면 그 부탁 들어준다."
'저런 미친놈 새끼. 아무리 숨쉬기가 싫다해도 그렇지 냉혈독접에게
그런 소리를 하냐?'
장대손이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에 성모봉에 도착했을 때."
그러나 장대손의 우려와는 달리 당가려의 입에서는 수락의 말이 흘
러나왔다.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무림인들에 대해
아는 게 없다지만 처녀보고 한번 달라니. 관을 짜들고 다니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야혼은 한 술 더 떴다.
"계약금은 먼저 받아야 돼. 소는 믿어도 사람새끼는 절대 안 믿어.
특히 무림인들이랑 씨발탱이 거지새끼들은 절대로."
"안 그럼 죽어."
"죽여!"
"이거 완전 골통이네?"
"남들도 다 그래. 특히 저기 있는 씨발탱이는 더하고."
야혼이 턱짓으로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는 장대손을 가리켰다. 그야말
로 표정이 가관이었다.
'장 백부 이 자식 도대체 뭐요.'
두 사람의 눈싸움을 지켜보던 장대손이 커지다 못해 핏발까지 선 눈
을 끔벅였다.
야혼을 대하는 당가려의 태도도 그를 놀라게 했지만 당가려를 상대
로 제 할말 다하는 야혼의 배짱이 더 놀라웠다.
'낸들 아냐. 무공도 개뿔도 없는 놈이 배짱은 너보다 더하다. 실로 역
병 같은 놈이니라.'
'큭큭! 십만대산 행이 심심하지는 않겠군.'
그제야 당가려의 의도를 눈치챈 장대손이 야혼을 쳐다보며 슬쩍 미
소를 지었다.
'또 새로운 독(毒)을 만들어 낸 게냐?'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요. 5가지 정도예요.'
'근데 왜 저놈이냐? 저놈 성질 잘못 건들면 미친개보다 더 발광하는
데.'
'그래서 선택한 거예요. 저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 같아서.'
몇 마디 나눈 야혼과의 대화에서 당가려가 느낀 점이었다. 자신 외에
는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골통기질이 다분히 느껴졌던 터였다.
'그래서 저놈을 검독인으로 쓰겠다고?'
'목숨에는 지장 없는데요 뭘. 어차피 무공도 없는 것 같고.'
검독인(檢毒人).
일명 독을 실험하는 실험체를 말한다. 사천당문을 비롯하여 독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무림문파에서는 새로운 독을 만들어내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한다. 그 연구 결과 만들어진 독은 실험을 해봐야 하는데 동물
에는 한계가 있었다. 해서 등장한 자들이 검독인이다.
요컨대 독에 저항력을 가진 신체를 만들어 그에게 독을 주입하고 상
태를 관찰하고 해독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검독인들은 자파 내에 있는 인물들이 자원해서 구성되는데
당가려는 늘 외부에서 구해왔었고 이번에는 야혼이 걸려들었던 것이다.
"야! 너는 십만대산에 놀러가냐. 이게 다 뭐냐?"
그런 사정을 알리 없는 야혼은 어느새 당가려가 내려놓은 짐을 풀어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6개월 정도의 식량과 갈아입을 옷가지 정도만 준비하면 될 터인데
그녀가 준비물은 마치 어디 유람 떠나는 여인의 행색이었다.
대부분이 옷가지였고, 나머지는 전병과 꼼꼼히 봉인된 병들이었다.
"너같이 개뿔도 없는 놈이 놀러 가는데 나는 가면 안 돼냐?"
"누가 그래? 내가 놀러간다고. 저 씨발탱이 거지새끼가 그랬어?"
"정력제를 가지고 가는 놈이 놀러 가는 거지 그럼 일하러 가는 거
냐?"
"오잉! 야 네가 정력제를 어떻게 아냐? 설마……."
"좀 전에 점소이에게 그랬잖아 임마. 건들지 말라고."
시전으로 가기 전, 야혼이 점소이에게 하는 말을 듣고 터져나오는 웃
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그런 곳에 가는 녀석이 정력제라며 사슴 한
마리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게 아닌가. 참으로 별종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좋아 말해봐라. 널 먹으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별 것 아냐. 앞으로 내가 주는 약만 착실하게 받아먹으면 돼."
"약? 그게 다야?"
"그래, 그게 다야. 쉽지?"
"봉 잡았네 씨팔!"
야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약이라 하였다. 먹어주기만 하면 한
번 준다는 말인 게다. 쉽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죽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9)- 처음이라 그런 거야.
쮸우우! 쮸읍!
"캬아! 환상이다. 바로 이 맛이야."
"아마타불! 연작시주 나도 한 모금만 하자. 만날 처먹어도 피는 도로
생긴다는데 조금만 나눠주시게."
"맞다, 연장. 같이 살아온 정리를 봐서라도 한 모금만 하자."
"어제가 마지막이랬잖아 새끼들아!"
입가에 묻은 피마저 아까운 듯 혓바닥으로 핥아먹으며 눈을 부라렸
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야혼이 하는 일과 중의
하나였다.
처음엔 기절할 듯 놀란 얼굴로 쳐다보던 일행도 이젠 면역이 되어버
렸는지 무심한 눈으로 세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다만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야혼을 조르는 사람은 태웅과 추기영
뿐이었다. 그들의 집착 또한 눈물겨울 정도였다. 극구 안 된다는 야혼
을 쫓아다니며 사슴피를 구걸했다. 대사조차 바뀌지 않았다. 같이 살아
온 정리, 오직 인정에 호소하며 야혼을 들볶는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야혼이 먼저 손을 들고 삼릉침을 주면 걸신들린 놈들처
럼 피를 빨아먹는다. 마치 흡혈귀처럼.
"아이고 죽겠다. 뭔 놈의 산이 하늘도 안보이냐."
정력제를 먹은 후 활기찬 걸음으로 당가려를 쫓아가는 야혼에게서
불만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흠주현을 출발한지 10여일, 지난 100년
간 인적이 끊긴 십만대산은 말 그대로 원시림이었다.
수십 장 높이의 활엽수들과 그 아래 진을 치듯 뿌리내린 무성한 1년
생 초목들. 남만 열대지역을 경험해보지 못한 일행에게는 피할 수 없는
커다란 장애였다.
"아미타불! 하늘은 못 봐도 좋으니 덥지만 안 했으면 좋겠네, 연작시
주."
사슴피를 얻어먹어서 기분이 좋아진 추기영이 환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넌 대가리에 털은 없잖냐."
그랬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3인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밤낮으로
몰려드는 모기가 아니라 찌는 듯한 더위였다.
짐꾼에겐 복병이 따로 없었다. 십만대산에 있다는 성모봉까지 가는
길에 야혼, 추기영, 태웅이 맡은 임무였다. 먹을거리를 비롯하여 꼭 필
요한 물건만 준비했다고 하지만 11명의 인원이다 보니 그 양이 만만치
않았다.
처음 산을 오를 때만 해도 남천악 일행의 짐까지 들어줄 생각은 추
호도 없었다. 그러나 울창한 밀림에 직면해 길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
면서부터 모든 짐은 세 사람에게 떠넘겨졌다.
무공이 거의 없는 세 사람을 길 만드는 작업에서 제외시켜주는 조건
으로 짐을 들고 가게 하였던 것이다.
"말만해라 연작시주, 니 대갈통도 시원하게 하고 싶으면."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추기영이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야혼 곁
으로 가까이 다가가 얘기하면 될 터인데도 추기영이나 태웅은 한사코
거리를 좁히지를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듯했다.
"골통! 증상을 말해봐."
"머리가 어지럽고 속에서 열이 난다 이 썅……."
당가려를 향해 인상을 쓰며 욕설을 뱉어내려던 야혼이 황망히 입을
닫았다. 그녀의 얼굴에 슬쩍 스치는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씨팔 아무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지만 어쩌다 저런 년에게
…….'
야혼이 맥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냐 싶었다.
죽는 것도 아니고 몸만 조금 고생하면 마음은 편하게 가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더구나 덤으로 그녀의 몸까지. 설령 거짓이라 하더라도 계집의
약점을 잡는다는 생각도 있었다.
해서 주는 약을 덥석 덥석 받아먹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
다. 온몸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과 함께 가려움증이 밀려왔다.
피부가 가려운 것이 아니라 몸 내부에서 이는 가려움이었다. 피가 나
도록 몸을 긁어댔지만 그 가려움증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도 당가려는 계속 약을 주었고 지금은 온몸이 검은 반
점 투성이었다.
추기영이 다가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독에 의한 중독
현상이었기에 혹여 자신도 그런 경우를 당하게 될까봐 전염병 환자 보
듯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거 먹는다고 고자가 되는 그런 일은 없겠지?"
"야! 지겹지도 않냐. 어째 시간만 나면 고자 타령이냐. 이거 한가지는
분명하게 말해줄 수 있다. 먹다가 그만 두면 그 때부터는 진짜 고자가
되는 거야."
당가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당가려가 준
약을 먹고 몸에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자고 일어났을 때 소식이 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제 나이 21살. 아침마다 부러질 정도로 기승을 부리던 그놈이 아니
었던가. 더구나 지금 일행 중에는 쳐다만 보아도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미녀들이 두 명이나 있다. 화사한 장미 같은 주려화와 뇌쇄적인
백치미를 풍기는 냉소소.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미녀가 둘이나 있음에
도 쓰러진 거시기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몸 상태에 질겁한 야혼이 갈다 만 도를 꺼내들고 길길이 날
뛰었으나 상대는 무림인. 복날 개처럼 두들겨 맞고 약을 다 먹으면 괜
찮다는 말만 들었던 거였다.
"믿을 수가 없잖아. 네 엉덩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소식이 안 오
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쿡!"
"훗!"
앞서가던 일행들에게서 억눌린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특히 장
대손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저것들은 완전 천적이야, 천적.'
지금껏 10여일 간의 산행에서 그가 느낀 점이었다. 당가려에게 대들
면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발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 야
혼이나, 그런 야혼에 대해 몇 차례 폭력을 휘두른 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손을 쓰지 않는 당가려의 태도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말 칭찬이지?"
바로 이런 점이었다. 분명 그녀를 희롱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한순간 발끈 하다가도 야혼이 엉덩짝을 들먹이면 이내 수더분해진다.
다른 여자들과 견줄 필요도 없이, 지금 이곳에 있는 여자들 중에 가장
엉덩이가 예쁘다는 칭찬의 말이었던 것이었다.
주려화, 냉소소, 당가려. 서로가 내색은 않고 있지만 은연중에 경쟁을
하고 있었다. 당가려는 제쳐두더라도 주려화와 냉소소의 행동만 보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길을 만들기 위해 무공을 사용할 때보면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가려 또한 그녀들과 다를 바 없었다. 간혹 그녀들을 향해 질시 어
린 표정을 짓곤 했던 거였다.
그런 당가려를 향해 셋 중에 가장 낫다고 했으니 겉으로야 인상을
써대지만 내심으론 흐뭇할 터였다.
"여기서 노숙해요."
여인들의 질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여호치가 조그마한 호수를 발
견하고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거의 이틀 동안 울창한 밀림을 헤치고 온 일행 앞에 20여장 폭의 호
수가 펼쳐졌다.
"내가 먼저 씻으련다."
짐을 내던지듯 내려둔 야혼이 가장 먼저 호수를 향해 내달렸다. 숲 속
옹달샘을 발견한 듯 반가웠다. 일단 물 속에 몸부터 담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껏 겨우 버텨내고 있었지만 몸 속에서 치미는 열기를 견디기 힘들었
던 것이었다.
"당가려 요년, 너도 한번 고생해봐라. 가려움증이 어떤 것인지 한번
느껴보란 말이다. 어디가 좋으려나."
물 속 깊이 자맥질 치고 있던 야혼이 눈을 빛내며 호숫가를 살폈다.
"저기는 풀이 너무 우거져 있고, 저쪽은 확 트인 곳이라 안되고. 저
곳이닷!"
호숫가 근처, 우거진 나무 틈에 가려진 커다란 바위를 발견한 야혼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발목께밖에 올라오지 않은 초지. 딱 알
맞은 장소였다.
살금살금 그곳으로 다가간 야혼은 옷 속에서 조그마한 봉지 하나를
꺼내 초지 위에 조심스레 가루약을 뿌렸다.
광양분.
흠주현 의원에서 춘약과 같이 샀던 바로 그 약이었다.
"사기꾼 소저나 얼음 소저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소. 당하기
싫으면 서서 싸시오."
앉기 적당한 장소를 골라내 바위를 둘러치듯 광양분을 듬뿍 뿌린 야
혼은 다시 물 속에 들어가 몸을 씻은 다음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
다.
"가자 야혼."
숨고르기 무섭게 여호치가 채근했다.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하루 일과가 끝날 즈음이면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올라 이동
경로를 그려나갔다.
"아참! 당가려 씻을 때 조심해라. 풀숲에 뱀 있는 것 같더라."
의뭉스런 미소를 지은 야혼이 서둘러 여호치의 뒤를 따랐다.
"호치야 이 지도 꼭 그릴 필요가 있냐?"
"우리 일이 뭔지 잊었냐?"
"잊지 않았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네가 길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
어서 말이야."
추측이 아니라 사실일 터였다. 지도를 그린다는 명목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올라왔지만 그녀의 행동은 결코 지도를 그리고자 하는 사람
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가야할 곳을 확인하는 듯하였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굳이 자신만을 데리고 올라오는 것 또한 불가해한 일이었다. 물론 일행
중 그림 솜씨가 가장 낫다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과 동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제대로 그리기나 해 임마."
야혼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지른 여호치가 지형을 설명하기 시작했
다.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끝없이 이어지
는 봉우리와 같은 지형 특성상 지명 자체는 의미가 없었다.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주변에서 가장 특징적인 곳을 찾아내어 표시를 하는 것
뿐이었다. 그나마 지금처럼 호수가 있는 곳이면 일은 훨씬 편했다.
"다 그렸으면 내려가자."
종이를 흘낏 내려다본 여호치가 내려갈 채비를 했다.
그러나 야혼은 내려갈 생각이 없다는 듯 여호치를 빤히 쳐다보며 주
절대었다.
"이상하게 너와 화소미에게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우린 신경 쓰지 말고 그자들이나 조심하시지. 돌아가지 못하는 수도
있어 임마."
"그거야 너 하기 달렸지. 내가 무슨 힘이 있겠냐. 성모봉 근처에 가
면 적당히 따돌려버려라."
"호호! 당가려 엉덩짝만 쳐다보는지 알았더니 분위기 파악도 하고
있었나 보네?"
"당연하지. 제놈들이 무공이 강하다해도 이 야혼의 눈은 못 벗어나
지. 개인자격? 웃기지 말라고 해. 그리고 당가려를 따라다니는 건 다
생각이 있어서다."
"그 짓 말고 다른 생각이 있단 말이야?"
여호치가 놀랍다는 눈으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지금 야혼의 말을 들
어보면 막연히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당가려와 하룻밤 자
겠다는 말은 그냥 하는 소리였고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우리처럼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놈들이 위험에 처하면 가장 먼저 해
야할 일이 뭔지 아냐? 살아남는 방법을 찾는 거다. 누구 옆에 빌붙어야
무사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하는 것 말이다."
"그럼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너를 살려줄 사람이 당가려라 이 말
이냐?"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만, 적어도 너는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태웅과 추기영을 구해야 할 테니."
"너?"
여호치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결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여
전히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은 태웅과 추기영일 뿐 야혼은 아니었다. 그
의 말대로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미련 없이 야혼을 버릴 터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그런 자신의 속내를 야혼이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세상은 그런 거니까. 나 또한 선택의 순간
이 온다면 다른 사람 살리겠다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내려
가자, 약시간 되었다."
잠시 짬이 나면 어김없이 독을 먹어야한다. 야혼은 자신이 실험도구
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로지 그 독들을 받아먹는 길만이 십만대산에서 또는 남천악이나
유마혼의 마수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오늘은 무슨 보약이냐? 그리고 댁들은 갈 때까지 만이라도 동료로
가면 안되오?"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한 야혼이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모두
따로따로 흩어져 앉아 있었다. 정파인들, 마도련, 잠개와 당가려, 그리
고 자신들 일행, 전부 넷으로 나눠진 채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봐 속가제자. 사람에게 머리가 왜 있는 줄 아나?"
남천악의 입에서 살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껏 10여일 동
안 함께 오면서 단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고 말조차 붙이지 않았건만
야혼의 비웃는 듯한 어투에 그동안 참아왔던 노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야 생각하라고 있는 거 아니겠소."
"잘 아는군 그래. 그런데 자네는 멋으로 달고 다니는 것 같단 말야.
또 무거워 보이는 것도 같고. 십만대산 곳곳에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더 이상 간섭하면 죽이겠다는 엄포였다. 사실 남천악을 비롯한 네 사
람은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최고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자와 마
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바로 곁에 있었기에 길을 만드는 작업을 할 때
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보다 얼마나 쉽고 편한 길을 만드는 가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 와중에 야혼이 툭툭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극도로 짜증이 치밀
어 오르게 하였다.  더구나 묘한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음담패설까지.
비록 당가려에게 하는 말 같았지만 자신들 옆에 있는 여인들까지 그
범주에 포함시켰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말 마쇼. 머리가 무겁다뇨. 아직 채워야 할게 얼마나 많은데.
단지 내가 하고싶은 말은 갈 때까지만 동료로 가자는 것뿐이오. 그깟
길 멋있게 만들면 뭐할 거요. 비 한번 오고 나면 금방 없어질 텐데."
"쿡! 지금 나에게 충고하는 건가. 속가제자."
"크윽!"
순식간에 야혼 앞으로 다가온 남천악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내심
을 들켜버린 것에 대해 화가 났음이다. 그것도 삼류건달보다 못한 그런
자에게. 문파 취급도 해주지 않는 하오밀문의 제자 나부랭이가 화산파
의 대제자를 비웃고 있었다.
"날 죽이고 싶은 모양이군. 그럼 맘대로 해. 그런 게 네가 말하는 대
문파의 자존심이라면."
"이 자식이! 진정 죽고 싶은 게로구나."
남천악의 몸에서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잘못했다고 빌어도 시원
찮을 판에 오히려 웃고 있다니.
그러나 죽일 듯 살기만 피워댈 뿐 더 이상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
다. 모든 일행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얼굴에는 흥
미롭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과연 화산파의 대제자라는 자가 이 일을 어
떻게 처리하나 보자는 듯한 얼굴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는 게다.
퍼억!
"커억!"
"속가제자! 무인이 되길 바란다."
결국 야혼의 가슴을 향해 가볍게 일장을 날린 남천악이 사람들을 외
면한 채 자리에 가 앉았다. 쏘는 듯한 시선들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
다. 특히 유마혼의 비웃는 듯한 얼굴은. 무공도 없는 그런 자를 향해
손을 쓰느냐는 조소였다.
"우웩!"
1장 정도를 뒤로 날아가 처박힌 야혼이 한 움큼의 피를 쏟아내며 일
어섰다. 남천악의 장(掌)에 약간의 내공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남천악
이야 큰 힘을 쓰지 않았다지만 당하는 야혼은 그게 아니었다. 독을 먹
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야혼의 표정은 남천악의 장을 받기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
다. 웃는 듯, 모호한 얼굴로 당가려를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약 줘!"
"무슨……."
야혼이 불쑥 손을 내밀자 당가려가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 너무 급
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말릴 겨를이 없었다.
또한 남천악이 살수를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
다 말겠거니 했었다. 내력을 동원해 장을 날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다.
그런데 그런 남천악의 행동보다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사실은 지금
야혼의 모습이었다. 야혼이 말하는 건 내상약이 결코 아니었다.
"다쳤으니까 약 먹어야 될 것 아냐?"
"지금 상태로 복용하면 안돼!"
야혼이 말한 약의 의미를 알아차린 당가려가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
를 질렀다. 지금껏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조금씩 투여했지만 그
양은 상당했다.
마구잡이로 복용시킨 게 아니라 이독제독의 원리에 따라 독끼리 서
로 견제하도록 하여 몸에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해 두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내상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독을 복용하게 되면 여
태껏 복용했던 독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급격하게 중독현상을 보일 터
였다. 자칫하면 죽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건 내 일이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잖아. 앞으로도 시험을 계속
하고 싶으면 줘!"
"알았어. 이걸 먼저 먹고 마셔라."
서슬 퍼런 야혼의 모습에 당가려가 별수 없다는 얼굴로 환약 하나와
물약을 내밀었다. 내상약과 독약을 같이 준 거였다.
장대손에게서 들었던 것도 있었지만 이곳까지 오는 지난 10여일 정
도의 생활에서 야혼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
잘못하면 지금껏 해왔던 시험이 전부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당가려에게 약을 받아든 야혼이 남천악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
렸다.
"댁 덕분에 머리 쓰임새를 한가지 더 알게 되었소. 오늘 일을 기억하
는 것 말이오. 지금은 소를 잡지만 언젠가는 사람을 잡을 때가 있겠
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야혼이 호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를 갈기
위해서였다. 유일하게 빠지지 않고 하는 게 있다면 뭉툭한 도의 날을
세우는 작업이었다. 물이 없는 곳에서조차 마실 물을 아껴가며 칼을 가
는데 집착을 보였다. 마치 할 일이 그것밖에 없다는 듯.
"한마디만 하겠어요."
망연히 멀어져 가는 야혼의 등을 쳐다보던 당가려가 남천악과 유마
혼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야혼은 우리 사천당문의 검독인입니다. 더 이상 눈살 찌푸리는 일이
없었으면 싶군요."
당가려의 말에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변했다. 단순한 검독인
이 아니라 사천당문의 검독인이라는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자신의 일이 끝날 때까지는 야혼은 사천당문의 소유라는 말이었다.
즉 야혼을 해치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당문에 도전하는 걸로 간주하겠
다는 엄포인 것이다.
'네 녀석이 살아남는 방법이란 게 이것이었구나.'
여호치의 시선이 호수 어디쯤으로 향했다. 조금 전 지도를 그리고 내
려올 때 야혼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남천악이나 유마혼의 사문이 대단한 곳이기는 하지만 가만히 있는
자를 해친 책임까지 면하게 해 줄 정도는 결코 아니다.
더구나 상대가 사천당문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대부분의 무림문파들이 가장 꺼려하는 곳이 사천당문이 아닌가. 잘못
을 저지른 제자를 징계하고 사과를 했으면 했지 당문과 전쟁을 선택할
문파는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개차반 괜찮냐?"
호숫가에 퍼더버리고 앉아 도를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야혼을 향해
장대손이 다가오며 물었다.
"당신에게 맞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정말이지 살다 살다 너 같은 녀석은 처음 본다."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어넘기는 야혼을 쳐다보던 장대손이 고개를
저었다. 두 번의 싸움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말 무모한 놈이라
는 생각뿐이었다. 당가려가 먹이고 있는 독들은 보통 독이 아니었다.
말이 쉬워 검독인이라 불리고 있을 뿐 그 과정은 결코 수월치 않다. 사
천당문에서조차 검독인을 만들 때는 사지를 결박하고 독을 복용한다고
하였다.
그만큼 독이 주는 고통이 엄청나다는 의미였다. 독을 다루고 있는 집
안이고 면역체계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당문 인물조차 그럴진대 하
물며 독이 처음인 야혼이야 말할 나위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녀석은 고통스럽다는 내색 한번 없이 견디고 있다. 가히 초인
적인 인내심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몸을 막 굴리는 게냐?"
"무슨 소리야. 내가 불쌍하게 보인 모양이지? 씨발탱이 당신이나 잘
해. 어린 새끼들에게 씹히지 않으려면. 내가 이러는 것은 전부 작업이
야 작업. 금방 봤잖아. 젖퉁이 아니 당가려가 화내는 거. 혹시라도 이
야혼이 다칠까봐 어쩔 줄 몰라하잖아."
"에라! 이 개차반 녀석아. 그건 검독인이 아까워서 그런 거지 네 몸
이 걱정돼서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시발탱이 당신은 아직 혼자야. 검독인은 곧 나야. 이 야혼
이 검독인이라고. 그년은 반드시 주게 될 거야. 다른 건 몰라도 빚 받
는 것 하나는 확실하거든."
"그래 그렇게 살아라. 네놈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업은 사기도박 밖에
없다 이놈아."
야혼의 대꾸에 어이없어진 장대손이 휭하니 돌아섰다. 추기영과 태웅
이 말릴 때 그대로 있을 걸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측은한 마음에 위로라도 해주고자 했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놈이었다.
여전히 주제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제 말마따나 서대시전에서 평
생 굴러먹는 게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방해하지 마쇼!"
장대손의 등뒤에 대고 소리를 지른 야혼이 자세를 잡고 도를 갈기
시작했다.
장대손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
다. 소에게도 받쳐보고, 싸우는 와중에도 어지간히 당해보았지만 지금
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내공심법을 생각하며 도를 갈고 있기에 참아낼 수 있었지 다
른 때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처음이라서 그래. 몇 번하고 나면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이를 악물고 도를 벼리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이야 고통스러웠지만
그나마 야혼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지금 같은 때였다. 온 힘을 다해
도를 벼리고 있으면 어느 순간 고통은 사라진다. 아니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야 옳다. 거의 망중한(忙中閑)의 경지에 들어버리는 것이었
다.
그러나 야혼은 자신의 상태를 결코 알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편해지
는 게 좋아 시작한 내공심법 운용이 그의 내공을 증진시켜줌은 물론이
고 사천당문의 독마저 중화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여태껏 내공심법에 의해 깊은 삼매경까지는 들지 못하고 있지만 언
젠가 진정으로 내공심법을 운기하게 되면 커다란 효과를 볼 것임에 틀
림없었다.
또 한가지, 야혼에게 생긴 새로운 변화는 도를 벼리는 시간이 길어졌
다는 것이다. 처음 출발했을 때는 1시진 정도가 한계였는데 지금은 2시
진 이상을 버티고도 여전히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만큼 태을건곤심법의 경지가 깊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0)-우리 내기할래?(1)
우리 내기할래?
사방이 환하게 밝아올 즈음 야혼의 작업도 끝이 났다. 내공심법 때문
인지 요즘 들어 잠자는 시간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틀에
한번 꼴로 수면을 취해도 활동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고 아직도 세월이네."
밤새도록 갈았던 도를 들여다보던 야혼이 일순 자그마한 나뭇조각을
허공에 띄움과 동시에 가볍게 도를 휘둘렀다.
"10? 니미럴!"
염왕도법의 1초인 지옥수라참(地獄修羅斬)이었다. 주천상이 펼쳤을
때는 40개의 도흔(刀痕)이 생겨났었는데 야혼은 10개를 만들어 냈다.
이곳까지 오는 지난 반년동안 야혼이 익힌 경지였다. 나름대로 노력은
다하고있지만 그 성취도는 더뎠다. 거의 터득했다고 여겼었는데 실제로
는 펼칠 수가 없었다.
"정력이 부족해서 일거야."
도 끝을 이용해 점찍듯 새긴 흔적을 주시하던 야혼이 이내 나뭇조각
을 호수 쪽으로 던져버렸다.
정력제라 여기는, 내공 부족 탓으로 결론지었다. 조금이나마 힘을 뽑
아낼라치면 단전 쪽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아직 미약한 통증이 남아있는 단전을 주무르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야혼의 눈앞에 기묘한 광경이 나타났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여자들인데 눈앞 여자들의 얼굴 표정
이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물론 10여일 간의 노숙으로 뽀송뽀송했던 피부가 푸석하니 변했다고
하지만 오늘은 유독 그 상태가 심한 듯했다.
'왜 아침부터 눈을 부라리고 지랄이야 저년들이. 아! 맞다 광양분!'
자신이 오자마자 죽일 듯이 노려보며 호수 쪽으로 달려가는 여호치
와 화소미를 쳐다보던 야혼이 내심 탄성을 질렀다.
어제 호숫가에서 몸을 씻을 때 뿌려두었던 광양분을 잊고 있었다.
광양분. 몸에 특별히 해를 끼치는 일은 없으나 가려움증을 유발시키
는 분말이다. 그 효과는 하루정도 지속되는데 광양분이 몸에 묻게 되면
물로 씻기 전에는 항우장사라 하여도 견딜 재간이 없다.
피가 나도록 긁어대도 가려움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였다.
실상 광양분은 여인네 후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놈들에게는 필수
품이라 할 수 있었다.
적당한 사냥감을 골라 광양분을 살포하고 사냥감이 씻을 만한 장소
에 미리 가서 몸을 담그고 있으면 의외로 쉽게 일이 풀리는 경우가 허
다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춘약과 더불어 사용하면 그 효과에 대해서
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어이! 당가려 무슨 일 있었냐? 왜 똥 마려운 강아지 꼴이냐."
푸석푸석한 얼굴로 온갖 인상을 써대고 있는 당가려에게 쾌활한 음
성으로 인사를 건넨 야혼이 그녀의 손가락을 살폈다.
'저런! 엄청스레 긁은 모양이네?'
그녀의 손톱 끝에 묻어난 붉은 혈흔을 확인한 야혼이 고소하다는 듯
이 히죽 웃었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야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당가려가 그의 귀를 틀어쥔 채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갔다. 독을 다루는 사천당문의 여식인데 간밤 내내 자신의
그곳을 가렵게 했던 그놈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문제는 잠을 자면서 밤새도록 긁어댔다는 데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긁었던 탓에 아랫도리에 피가 배어날 만치 깊은 상처를 입은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새벽녘, 잠에서 깨어나서야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곳은
이미 엉망으로 변해 있었고 양 무릎이 스칠 때마다 씀벅씀벅 아리기까
지 하였다.
"네가 그랬지 이 나쁜 새끼야."
"뭐얼? 잠 잘 자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어디 아프냐?"
"광양분을 뿌린 게 너잖아."
"너 약 먹었냐? 난 광양분이 뭔지도 모를뿐더러 설사 알고 있다해도
무슨 수로 그 짓을 하냐."
"그게……."
야혼의 반박에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은밀한 그
곳의 가려움증인데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하여도 불가능한 일이다. 더
구나 야혼은 무공조차 별로 없는 놈이 아닌가.
"간밤에 모기가 극성이드만 모기에 물린 거 야냐? 아니면 향토병이
든지. 왜에, 물이 바뀌면 그럴 수도 있잖아. 덧날라 빨리 가서 씻어라.
웬 만큼 긁지 예쁜 손톱이 그게 뭐냐,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짐이나 줘 새끼야."
"상처가 심할 것 같은데 외상약이라도 바르던지, 아주 듬뿍 발라야
할거다."
빼앗듯 짐을 채가는 당가려의 뒤통수에 활기찬 야혼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호치년이 오기 전에 빨리 숨겨야한다."
아직 품속에 남아있는 광양분을 꺼내 잽싸게 주변 풀숲에 숨겼다. 흠
주현에서 약을 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여호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호수에서 몸을 씻은 여호치가 죽일 듯한 얼굴로 다가
와 야혼을 점혈한 다음 몸수색을 했다.
그러나 이미 숨겨버린 약이 나올 리도 없었고, 당가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뇌까리는 야혼을 보고있자니 말문이 막혀왔다.
"골통!"
"어? 벌써 왔어. 무쟈게 빠르다. 역시 여자는 가꿔야 한다니까."
"너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짓을 한 거냐? 냉소소나 주려화가
화나면 나라도 어쩔 수 없다는 거 몰라?"
"너 참 이상하다. 왜 나만 붙잡고 그래. 여기 남자가 나밖에 없냐?"
"됐어 임마! 빨리 가기나 하자."
벌써 일행과 상당히 떨어졌는지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자 당가려
가 황망히 앞서 걸었다. 그러면서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야혼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설사 야혼의 짓이라 해도 방법이 없다.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면 어쩔 것인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무공도
없는 자에게 자신들이 당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혹여 그것이 광양분이 아니고 실제 살상용 독이었다면 자신들은 이
미 저승사자와 대면하고 있을 터였다.
"창피하기도 했겠지만 당했다는 사실이 더 자존심 상하겠지."
전방에 솟구치는 검기를 쳐다보며 당가려가 혼잣말을 했다. 주려화와
냉소소 또한 알고 있으리라. 광양분까지는 모르더라도 최소한 자신들의
실수는 절감하고 있을 터였다.
"당가려, 저년들 너무 날뛰는 거 아냐?"
"너는 새끼야 말 좀 가려서 해, 저년들이 뭐냐?"
"너도 마찬가지잖아 임마. 옆에 없는데 뭔 소릴 못할까. 나는 말이다
사람을 대할 때 전부 평등하게 대한다고. 그게 내 인생철학이야."
"하여간 대가리하고는……. 이건 진심으로 하는 충고인데 절대 무림
인은 되지 말아라. 그냥 죽을 때까지 소나 잡아."
"그건 씨발탱이에게도 들었다. 지금 여기도 오고싶어서 온 것도 아니
다."
"그럼?"
당가려의 얼굴에 호기심이 잔뜩 어렸다. 지금껏 야혼의 행동으로 보
자면 결코 남을 위해 일할 놈이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하오밀문의 속가제자일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사정
으로 무공도 없는 놈들이 이곳까지 왔는지 궁금했는데 그 사연을 알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내기에서 졌어."
"내기……?"
"그런 게 있어. 애들은 몰라도 돼."
"야 임마. 내가 애처럼 보이냐? 나 같은 애 봤어? 봤냐고."
"그럼 네가 애지 어른이냐? 젖퉁이만 크면 다 어른인줄 알아."
"어라? 이 새끼 좀 봐."
무시하는 듯한 야혼의 말에 얼굴이 붉어진 당가려가 게거품을 물며
방방 뛰었다.
"남자랑 자봤냐?"
"그. 그게 당연하지 임마, 나이가 몇 인데."
"쿡! 그럼 말해줘도 되겠구나."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한 당가려의 얼굴을 쳐다보던 야혼이 나지막이
실소를 흘렸다. 겉으로는 대담한 척 하고는 있지만 목까지 붉게 변한
당가려의 모습은 스스로 애송이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이내 표정을 추스른 야혼이 화소미와의 내기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
어놓았다. 심지어 체위까지 시범을 보여주면서 그 때의 상황을 고스란
히 재현했다.
"이제 궁금증이 풀렸냐? 그게 바로 어른들의 놀이라는 거다. 걱정하
지 마라. 성모봉에 도착하면 몸소 체험하게 될 테니까."
'에라! 요년아, 뭐 잠을 자봐? 이 야혼을 뭘로 보고.'
"헛소리하지 말고 증상이나 말해 임마."
내심을 감추려는 듯 당가려가 야혼을 향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실은 가슴이 콩닥콩닥 요동쳤다. 저도 모르게 야혼이 말한 낯뜨거운
광경을 떠올리고 있었던 거였다. 설마 그런 내기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
다. 잠을 자는 내기로 목숨을 걸어버린 무모한 자가 바로 앞에 있는 야
혼이란 놈이었다. 아울러 괜한 약속을 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밀려왔다.
"약해! 좀더 강한 약으로 줘."
"그게 약하다고?"
독을 주는 당가려나 받아먹는 야혼 역시 태을건곤심법을 알지 못했
다. 야혼이야 내공심법이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인지 처음부터 몰랐고 ,
당가려 또한 야혼이 태을건곤심법이라는 엄청난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
는 줄은 알지 못했다.
결국 야혼이 말한 증상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나타나자 당가려는
새로운 실험을 준비하게 된다.
그럼 지금부터 속도를 좀 빨리 하자.
노닥거리던 두 사람이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전히 정(正), 마(魔)의 두 기둥은 경쟁적으로 길을 만들었고 야혼
의 뱃속으로는 독이 스며들었다. 당가려가 몰고 오던 야혼의 정력제는
호수를 떠난 지 5일 후에 일행의 뱃속으로 사라짐으로써 맡은 역할을
다했다.
야혼의 짐작이 맞았던 것일까. 여호치의 주도로 십만대산을 횡단하는
일행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무림인들이 실패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탄한 길이었다.
"저게 뭐죠?"
십만대산의 등정을 시작한 이래 처음 대하는 낯선 풍경에 일행의 얼
굴이 굳어졌다.
굳이 주려화의 물음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묘한 장소
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습지였는데 고인 물이 썩었는지 온통
검은 색이었다. 그러나 그뿐이라면 일행 전체가 놀라지 않을 터였다.
드문드문 솟구친 거목은 차지하고라도 줄기를 타고 내려뜨려진 덩굴들
마저도 검은 색 일색이었다.
그리고.
습지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은 보기에도 으스스한 검은 안개였
다.
"짜증나는 곳이네?"
저 멀리 보이는 습지를 쳐다보던 야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검은 지대. 문득 섬뜩함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비
단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일행의 표정 또한 심상치 않았다.
수많은 무림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십만대산의 실체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였다.
"혹시……. 여호치……."
"장독( 毒)이예요."
여호치를 향해 무엇인가 물으려는 순간 당가려의 음성이 가로막았다.
장독. 일반적으로 통풍이 되지 않는 계곡이나 습지에서 간혹 보여지는
독의 일종이다. 나뭇잎이나 동물의 시체 등이 썩어가면서 내뿜는 유해
성분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고 한곳에 정체함으로써 생기는
현상으로, 거의 수천 년의 세월을 필요로 한다.
지금 일행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습지대를 가득 메운 검은
안개가 치명적인 독이라는 말이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1)-우리 내기할래?(2)
"남공자님 다른 길은……."
"없소이다. 이곳 습지의 폭만 해도 십리가 넘더군요."
결국 이곳을 통과해야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혹시 해독단 준비해 오셨습니까?"
"저는 무공을 익힌 무인입니다. 그런 거에 의존할 정도로 약하지 않
습니다. 혹시 유소협은 필요할지 모르겠군요."
남천악의 몸에서 오연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내심 지금과 같은 순간
이 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길 만드는 일 외
에 자신이 한 일이 없었다.
하오밀문의 인물들에게 정도(正道) 십문(十門)의 위대함이 무엇인지
알려 줄 기회가 없어 내심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기
회가 왔다.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가.
"저도 마찬가집니다. 해독단은 약한 자들이나 쓰는 거지요."
유마혼이 정중하게 말을 받았다. 남천악이 먹지 않는다고 했으니 자
신 또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혹시 남는 것 있으면 하나 주실래요. 저는 준비를 못해서……."
그러나 냉소소만은 일행과 생각이 달랐는지 여호치에게 해독단을 부
탁했다.
"댁들도 먹지 그래요? 만일에 대비해서. 세상에는 무공만으로 안 되
는 일도 많다고 하던데."
"그건 너 같은 허풍쟁이들이나 하는 말이야. 가진 것도 없이 입만 살
아있는 놈들 말이다."
야혼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남천악이 윽박지르며 다가섰다.
"그러다 사람 치겠네. 우리 내기할래?"
"쿡! 웃기는 놈이군. 그래 무슨 내기를 하고 싶냐."
일순 어이없다는 듯 비릿한 웃음을 토해낸 남천악이 가볍게 응수했
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내기를 하자는 것인지 그게 더 궁금한 얼굴
이었다.
"별 것 아냐. 이 습지를 건너기 전에 네가 정신을 잃는다는 것에 걸
지."
"프! 하하하!"
가소롭다는 듯한 얼굴로 남천악이 온몸을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온 사방에 장독이 있다지만 자신 정도의 무공을 가진 사람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의 반 시진 이상 호흡을 멈출 수 있는 무림인에
게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시 삼류문파의 제자다운 발상이다. 하오밀문의 하찮은 무공과 십대
문파의 수준차이조차 모르는 한심한 녀석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좋다 수락한다! 그런데 뭘 걸 건가. 아니 걸 거
라도 있나?"
"그거야 네가 말해야지. 그건 상식인데 그런 것도 못 배웠나?"
느물느물 맞받아치는 야혼의 말에 남천악의 몸에서 미약한 살기가
풍겨 나왔다. 분명 사문에 대한 모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야혼의 얼굴을 직시했다. 먼저 화를 내면
자신만 우습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겪어 보았기에 이번에는 신중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더구나 확실하게 징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 않
은가.
"좋다. 내가 이기면 네놈의 오른 팔을 가지고 가겠다."
"아이고 큰일났네. 앞으로 밥 벌어먹기 힘들게 생겼네. 야바위 도박
꾼인 나에겐 오른 손이 밥줄인데."
"뭘 원하나."
"나는 말이다. 너처럼 간 큰 놈이 못되거든? 이거 한방이면 돼. 단
내공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남천악이 잘라간다는 오른손을 불끈 쥐어 보였다. 단 한방으로 승자
의 기쁨을 만끽하겠다는 말이었다.
"나중에 오리발 내밀지 말라고. 자자 일하러 갑시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일행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여호치의 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당가려가 있는 곳으로 뛰어
갔다.
"건방진 놈 이 남천악을 우롱했다 이거지."
또다시 당했다고 느낀 남천악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1초지적도 안
되는 놈과 내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
다.
더하여 자신은 오른 팔을 잘라가겠다고 하였는데 놈은 단 한방을 원
했다. 내기의 결과를 떠나서 어쨌든 완패였다.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
았던 그런 놈에게.
"팔이 잘릴 때 네놈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두고 보겠다."
"자자 그만하고 뗏목을 만들어야 합니다. 만들 때는 반드시……."
야혼과 남천악의 내기를 지켜보던 여호치가 일행을 향해 지시를 내
렸다. 그나마 어둠이 내리기 전에 습지를 건너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
다.
"저놈은 속을 모르겠어. 무슨 마음으로 사는지."
"아미타불! 죽고 싶으면 부처님 불알이 대순가. 내버려두시게. 사는
목적이 없는 놈인데 뭘 바라나."
금방 남천악과 오른 팔을 두고 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했는
지 당가려 곁에 앉아 열심히 나불대는 야혼의 모습을 쳐다보던 일행이
고개를 돌렸다. 몇 년을 동고동락했지만 야혼이란 인간에 대해서는 정
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당가려 네 말은 저기 있는 장독은 물론 독물이나 독충에
물려도 뒈지는 일이 없다 이거냐?"
"그거야 이 당가려와 뛰어난 내공심법이 있을 때만 해당되는 말이
지."
"그럼 내공심법만 있으면 독기운도 정력제, 아니 내공으로 만들 수
있다 이 말 아냐?"
요즘 들어 생겨난 몸의 변화 때문이었다. 당가려가 주는 독을 날름
받아먹어도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전 어림이 더욱
충만해진 듯한 느낌만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가려의 말을 듣고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태을건곤심법이
모든 독기운을 내공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직은 미약해서 외부로까지 드러나지 않지만 조금씩 내공이 증가하
고 있는 게다.
"흠……. 좋아. 이거 입어라."
잔뜩 찌푸린 얼굴로 뭔가를 궁리하던 야혼이 여호치의 짐에서 꺼내
왔던 물건을 당가려에게 내밀었다.
"뭐냐 이게? ……수어피?"
야혼이 내민 검은 천을 받아든 당가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끈
거리는 표면에 신축성이 있는 걸로 보아 수공을 익힌 자들이 물 속에
서 착용하는 수어피가 분명했다.
"수어피보다 훨씬 두껍다. 벌레 방지용이니까 입어라."
"그건 알겠는데 이걸 왜 입냐고."
"너도 머리를 멋으로 달고 다니는 모양이구나. 너 거머리하고 친하
냐?"
"그러니까 골통 네 말은 저 습지 속에……. 네가 그걸 어찌 아는데."
"그게 하오밀문의 힘이다. 우리가 성모봉에 도착할 수 있는 원동력이
고."
"그래도……."
"햐아! 너 정말 머리 안 돈다. 네가 저기 있는 두 년에 비해 나은 게
뭐가 있냐. 얼굴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돼, 무공도 약간 밀리지. 그나마
나아 보이는 거라곤 몸매랑 요 뽀숑한 피부밖에 더 있냐? 그거라도 잘
보존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지금 네 몸은 나와 계약되어 있다고. 다
른 놈이 먼저 시식하는 꼴은 절대 못 봐준다 이거야. 그러니 헛소리
하지 말고 입어. ……시발탱이, 넌 뭐해. 나무 베야지."
넋을 잃은 얼굴로 자신과 당가려를 쳐다보는 장대손을 향해 야혼이
꽥 소리를 질렀다.
"저런 눈치하고는 여자가 옷 갈아입는데서 작업하고 싶을까?"
"알았다 이 개차반 놈아."
"뭐해 시간 없는데."
인상을 잔뜩 구기며 멀어지는 장대손을 쳐다보던 야혼을 당가려가
채근했다.
"네가 가야할 것 아냐, 새끼야."
"얘가 무슨 소릴. 내 물건 지키는 거야 임마. 네 머릿속은 몰라도 몸
은 내 거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갈아입어."
"도착하기도 전에 죽고 잡냐?"
당가려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채찍을 풀어내며 짓씹듯 말을 내뱉었
다.
"그것 엄청난 물건인가 보다. 붉은 옷 속에 숨기고 다니는 걸 보면."
야혼은 자리를 옮길 생각이 없다는 듯이 여유작작한 얼굴로 당가려
가 들고있는 채찍을 가리켰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흠칫 놀랐다. 그녀의
손에 들린 붉은 채찍은 쳐다보기만 해도 몸이 떨릴 정도의 살기가 풍
겨 나왔던 거였다.
혈린만독편(血鱗滿毒鞭). 야혼은 모르고 있었지만 당가려의 허리에
감춰져 있던 1장 길이의 편(鞭)은 300년 전 겁천십웅의 일인이었던 편
후(鞭后) 당보영(唐寶英)의 독문병기였다.
쉬이익!
여전히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야혼의 얼굴로 붉은 채찍이
눈 깜짝할 새 날아들었다.
"알았어 간다고 가. 혹시 뱀 나타났다고 소리나 지르지 마라. 이제부
터는 국물도 없다. 진짜 간다."
'요년아 네가 그 옷을 입지 않고 빠져나갈 줄 알았냐. 기다려 봐라
그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반드시 보고 말 테니까.'
"흥! 주려화, 냉소소? 그년들은 10초지적도 안돼 임마."
야혼이 잘못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혈린만독편이 들리면 남천악
이나 유마혼마저도 우습게 볼 수 있는 고수가 바로 그녀였다.
자신의 허리춤에 혈린만독편이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붉은 옷을
입고 다녔고 고의적으로 몸매를 훤히 드러내며 다녔던 것이었다.
3척의 뗏목이 나란히 습지대를 가르고 있었다.
가장 왼편에는 남천악과 유마혼 일행이, 가운데는 여호치 일행 그리
고 오른편에는 야혼과 당가려 장대손이 한 조가 되어 장독이 넘실대는
습지 안으로 들어섰다.
"당가려. 그 덩굴 뗏목에 묶어라. 나머지는 어디인줄 알지."
"그런 것까지 해야하냐, 이건 또 뭐냐?"
야혼의 지시에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죽거렸다. 혹시라도 습지에 빠질
까봐 넝쿨을 묶는 것이라고 여겼다. 파도치는 바다도 아니고 바람 한
점 없는 습지에서 의미 없는 짓일 텐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무공? 그거 너무 믿지 마라. 호치 저년이 무공이 약해서 저러고 있
는 줄 아냐?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싫으면 내 몸이나 묶어 줘. 그
리고 이건 볼일 보는 구멍이다. 급할 때 써. 씨발탱이?"
"그래 알았다 묶는다 묶어."
여전히 자신을 향해 반말을 찍찍 해대는 야혼에 대해 더 이상 응대
하기도 마뜩찮아 냉큼 허리에 넝쿨을 묶었다.
이미 해독단마저 복용했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랴 싶었다. 공연히 이
놈 저놈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는 사실은 무수히 경험했던 터였다.
"개자식들 많이도 던져두었네."
장대를 이용하여 열심히 습지바닥을 밀던 야혼이 몹시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혼잣말처럼 투덜댔다.
1다경 즈음 지나왔을 때부터는 장대 끝에 걸려드는 게 유독 많아졌
기 때문이었다.
"뭔데 그러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야혼을 쳐다보며 장대손이 물었다. 그 또
한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검은 물 속에 멍울 져 떠다니는 수
많은 덩어리와 숨막히는 듯한 악취 때문이었다.
처음엔 장독 때문이겠거니 했는데 그 정도가 심했다. 장독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야혼의 말까지.
"직접 확인해 봐!"
"허억!"
장대 끝에 박혀있는 물체를 확인한 장대손과 당가려가 질겁한 표정
으로 비명을 질렀다.
시체였다. 상당부분 부패가 진행되어 남아있는 살점이 거의 없었으나
분명 인간의 유골이었다.
"그럼 여기는?"
"맞아 공동묘지야. 이곳에 살고 있는 이족들의 묘지. 지금 우리는 이
족의 조상이 묻힌 신성한 묘지를 훼손하고 있는 거라고."
하오밀문에서 준비한 책자에 적혀있는 내용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나
와있지 않았지만 수장(水葬)의 풍속이 있는 호전적인 종족이 있는데 그
들을 이족이라 하였다.
"그럼 저 검은 덩어리들이 전부 시체라고?"
"맞다 당가려. 진정한 십만대산의 여정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뭐해
빨리 안 밀고."
당가려에게 설명을 하던 야혼이 으르듯 소리를 질렀다. 지금부터는
최대한 은밀하게 행동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이 있는 이곳이 묘
지라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족 부락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늦었어 골통! 기다리고 있어."
쿠! 쿠쿠쿠! 키요!
시야가 가려진 검은 안개를 헤치고 기괴한 소성이 울려퍼졌다. 앞쪽
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들려왔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포위 당해 있었다.
"니미럴. 하여간 두 사람이 알아서 해. 나는 뭣 빠지게 밀어 볼 테니
까. 간다!"
얼마 되지도 않은 내공을 전부 끌어올린 야혼이 거칠게 장대질을 했
다. 무공의 고수들이 있다지만 일행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
다. 도무지 이족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눈앞에 있는 적도 아니고
바닥 또한 습지대였기에 경공을 사용하지도 못한다.
무공의 의미가 무색해진 상황이었다.
키요!
슉! 슉슉슉! 슉! 슉!
방금 들려온 고함소리가 공격신호인 듯 미약한 음향과 함께 진득한
살기가 일행을 향해 밀려들었다.
"하얍!"
3척의 뗏목에서 동시에 우렁찬 고함소리가 터져나오며 일행의 주변
으로 색색의 막이 형성되었다.
각자가 익히고 있는 최고의 방어무공을 펼쳤던 것이다.
이족들이 쏘아 올린 무기는 뒤쪽에 깃털이 달린 큰바늘 모양의 독침
이었다. 내공을 실어 던진 것이 아니었기에 큰 위력은 없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침들. 마치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독침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
뗏목에 박힌 독침을 주워 반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보이지 않는 적에
게 얼마나 타격을 주는지 그마저도 알 수가 없었다.
일행에게 닥쳐온 첫 위기였다. 검은 장독들이 넘실대는 허공. 뗏목
아래로 흐르는 물은 시체들로 가득한 독수. 그리고 사방에서 빗발치는
독침들.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2)- 이왕 줄 거면 몽땅 벗고 줘야지.
17장 이왕 줄 거면 몽땅 벗고 줘야지.
"야혼 물 속으로 들어가라."
뗏목 위에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여호치가 야혼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당가려 들었어?"
당가려를 쳐다보던 야혼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두 사람의 방어막을 뚫고 날아든 두 대의 독침이 어깻죽지에 박혀들었던
것이었다.
"먼저 간다."
독침을 뽑아낸 야혼이 습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재빨리 잠수를 한
야혼이 볼일 보는 용도로 만들었다 하였던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구멍 3개의 용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당가려 목욕이나 하게 들어와라.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저거 안보이냐? 호치 년이 타고 있는 뗏목은 공격을
안 받잖아."
습지 속으로 들어와 한결 여유가 생긴 야혼이 당가려를 향해 이죽거렸다. 야혼의 말대로 이미 습지 속으로 뛰어들어 뗏목 구멍
속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4명에게는 전혀 독침이 날아들지 않았다.
양끝에 있는 2척의 뗏목으로만 모든 공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당가려와 장대손이 습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옷 아까워서 어쩌나 다 버리겠네? 수어피까지 입었으면서."
"너……. 일부러 가장 작은 것으로 줬지?"
숲 속에서 수어피를 입을 때의 당혹스러움이 되살아났다. 신축성 있는 재질로 만들어진 옷이었지만 나름대로 한계가 있었다.
일반 수어피보다는 두껍다지만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여느 여인네들보다 큰 체구였던 탓에 오히려 속옷보다 더 몸에 끼었던 것이다.
"그걸 왜 내 탓을 하는데. 남보다 빵빵한 몸을 탓해야지. 그나저나 저놈들 오래 버틴다."
이죽거림이 아니라 감탄이었다. 여전히 뗏목 위에서 이족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남천악 일행은 정(正),사(邪)의 기둥이란
말이 실감나게 하였다. 각각의 방위를 맞춰 날아오는 독침을 쳐내고 간간이 공격까지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렇게 해도 중독되는 건 마찬가지야."
"독침을 손으로 잡아서?"
"그렇지. 입과 손으로 전부 독이 퍼지고 있는데 견딜 재간이 있겠냐. 겉모습은 그럴듯해 보여도 아마 죽을 맛일 거다."
4명의 위기가 내심 고소한 듯 당가려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어렸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하지만 독에 대해선 분명 한계가
있다. 호흡을 멈춘다 하더라도 피부로 스며들어 중독되기도 하는 게 독일진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 정말 사악하다. 같은 동료 맞냐?"
"너도 마찬가지잖아 임마. 저들이 물 속으로 빠지길 바라고 있잖냐. 네 녀석 목에 두른 독질에 물리길 바라면서."
"이게 독질이란 놈이야? 그래서 이족들이 공격을 멈췄구먼."
독질(毒蛭).
바로 이곳과 같은 습지에 살고 있는 거머리의 일종이었다. 거의 손가락 길이의 토실토실한 놈이 목덜미에 붙어서 피를 빨고
있었다. 목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쓰라림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떼거지로 달려들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아이고 급하다."
돌연 몽롱해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란 야혼이 재빨리 태을건곤심법을 운기했다. 독기운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왕 하는 김에 확실하게 먹여주마."
"뭐 하는 짓이야?"
갑작스런 야혼의 행동에 당혹스러운 듯한 당가려의 음성이 울렸다. 잠시 물 속으로 사라졌던 녀석이 뗏목 위로 옷가지를
던져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거였다.
더구나 마지막 속곳까지 전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물 속에 잠겨있는 몸은 알몸임에 틀림없을 터였다.
"이왕 줄 건데 확실하게 벗고 줘야지. 그리고 이곳에서는 벗는 게 더 낫다."
과연 그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소 질척하다는 정도의 습지였는데 지금 뗏목이 흘러가고 있는 곳은 거의 늪지대라고 해도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허리께밖에 차지 않는 곳임에도 나아가는데 상당한 힘을 필요로 했다.
"어이 씨발탱이 괜찮아?"
그러나 장대손에게는 반응이 없었다. 아니 대답을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있었다. 그 또한 야혼의 상태와 다름없이 온몸이
독질에 덮여있었고 침투하는 독을 막아내는데 온 힘을 쏟느라 여유가 없었다.
"맛이 갔네? 그런데 저놈들은……."
고분분투. 남천악 일행 4명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독침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소협. 물 속으로 들어가요. 더 이상은 안되겠어요."
가장 먼저 손을 든 주려화가 먼저 습지 속으로 뛰어들었고 한쪽이 무너지자 나머지 인물들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족의 공격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더하여 반 시진이 훌쩍 지났다는 사실도.
"당가려 시작해보자."
남천악 일행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야혼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는 이쪽에서 공격해야 할 차례가 온
것이었다.
"너……. 살인해 봤어?"
"살인이 별건가. 하독만 하면 바로 죽는데."
조금 불안한 얼굴로 당가려가 야혼을 향해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런 것 말고 이런 칼로 베어보았냐고."
"아니?"
야혼이 보여주는 박도를 쳐다보던 당가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실은 아직 살인 경험이 없었다. 2년 동안의 강호 경험 속에
크고 작은 사건을 겪긴 했지만 살인을 저지를 만큼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녀가 내린 최고의 징계는 무공전폐가
전부였던 것이다.
"완전히 애 아냐 이거. 해본 게 뭐 있는데? 살인 경험도 없는 너를 데리고 어떻게 이 험한 곳을 여행 하냐?"
당가려를 놀리는 듯한 말투였지만 내심으론 곤혹스러웠다. 강한 무공이 있다지만 살인 경험이 없는 당가려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모든 일을 자신이 해야하는데 몸 또한 점점 나빠지고 있는 듯하였다.
"내공을 뽑아내면 좀 나아지겠지. 가자!"
질척한 늪이라 하지만 내공을 이용하여 무풍무영술(無風無影術)을 펼치자 그 속도는 놀라웠다. 조금 전 장대를 이용해서
나아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빠른 속도로 나아가던 야혼의 시야에 검은 인영들이 잡혔다. 지금껏 독침으로 공격을 가해왔던 이족이었다. 자그마한 소선에
3명씩 나눠 타고 있는 이족들의 손에는 길다란 막대가 들려있었다. 독침을 쏘는 무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더 빨리!"
장대손을 뗏목에 묶은 채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키요! 쿠우!
야혼 일행을 발견한 이족들이 괴성을 질러대며 다시 독침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툭! 틱! 틱틱틱!
"이제는 안돼 새끼들아."
비처럼 쏟아지는 독침을 쳐다보던 야혼이 고함을 내지르며 뗏목위로 올라섰다.
"하악!"
야혼의 모습을 보고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옆에 있던 당가려였다.
온몸이 검었다. 습지 속에 있던 독질들이 야혼의 몸에 시커멓게 달라붙어 마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더욱 경악스러운 사실은 야혼이 알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당가려의 놀라움을 뒤로하고 야혼의 신형이 허공으로 비상했다.
'어맛! 봐버렸어. 거기에도 독질이 있었어.'
당가려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야혼의 가랑이 사이에 있던 그것이 눈 안 가득 들어왔던 것이었다. 남성의
상징인 그곳마저 온통 독질이 붙어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이족과 싸움 중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으아악! 커억!"
오로지 이족이 질러대던 괴성 밖에 없던 습지에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단숨에 소선 있는 곳까지 다가간 야혼이 풀을
벨 때 사용하던 박도를 휘둘러 이족들의 몸을 난자해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3명의 목이 잘려나가며 붉은 핏방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료들의 죽음에 질겁한 이족들이 야혼이 탄 배를 향해 막대를 겨눴고 동시에 통나무배가 뒤집혀지며 야혼의 신형이 사라졌다.
"으아악!"
늪지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야혼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박도를 이용한 공공십팔수를 펼쳤다. 야혼의 모습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피던 이족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수십 조각으로 잘려나간 살점들이 쏟아져 내렸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기에
결코 야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통나무배로 접근만 하면 바로 끝나버렸다.
"카악!"
짐승의 포효 같은 고함을 내지르던 야혼의 신형이 이웃 배를 향해 날았다. 거의 1장 간격으로 서 있는 소선들은 야혼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이미 발가벗고 있는 상태였기에 질척한 진흙탕도 별 장애가 되지 못했다. 한순간 늪 속으로 몸을 던졌다가 튀어나오는 순간
어김없이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의 몸이 한번씩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비릿한 혈향이 퍼져나갔다.
광기(狂氣).
미친 듯, 이족을 쫓아다니는 야혼의 행동은 완전해진 야차혈마지체의 광기라는 건, 야혼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잔인해지고 빨라졌다. 이제는 날아오는 독침마저도 피하지 않았다. 오직 눈만을 방어하며 다른 배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여호치와 화소미까지 합세하자 싸움의 양상은 일방적인 도살로 변했고 이족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들어찼다.
"키우!"
퇴각신호인 듯 이족들의 배가 우르르 물러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항할 수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습지 속에 있는
독질도 통하지 않고 자신들의 최고 무기인 독침마저 무용지물이 된 그런 괴물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듯이.
"저놈은 도대체……."
당가려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렀다. 적이 아님에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족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도를 휘둘러대는 야혼의 모습은 지옥에서 막 뛰쳐나온 야차(夜叉)의 모습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선혈을 보면서도 웃고 있는 듯한 얼굴이라니.
쿵!
"허억!"
검은 물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당가려의 입에서 숨이 멎는 듯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바로 눈앞에 큰 대자로 뻗어버린 야혼 때문이었다. 괴물, 여전히 온몸에 독질을 달고 다니는 건 같았지만 이번에는 그
독질위로 선혈이 가득했다. 한마디로 핏덩어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호 밥을 2년이나 먹은 그녀가 그 정도를 가지고
기절할 듯 놀라지는 않을 터였다.
큰 대자로 뻗어버린 야혼의 가랑이 사이의 그놈 때문이었다. 다리를 자신의 얼굴 쪽으로 하고 있기에 가랑이 사이에 있는
그것이 확연히 박혀들었다.
조금 전 스치듯 언뜻 보았던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독질이 잔뜩 달라붙어 있는 사이사이로 붉은 피가 뭉쳐있는 살점이
드러났다.
"처음 본 것도 아닐텐데 웬 호들갑이냐. 관찰은 나중에 하고 거머리나 좀 떼 줘."
야혼이 띄엄띄엄 말을 흘렸다.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 때문에 옴짝달싹하기도 힘들었다. 태을건곤심법을 죽어라 운용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한계를 넘어선 듯했다.
"다 떼고 나면 진정한 남자가 어떤 것인지 알게……. 야!"
"개차반……. 당가려가 사라졌다."
"이런 씨팔……."
어렴풋이 들려오는 장대손의 목소리에 야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늪지대가 아니라 진짜 늪이었다. 가슴팍 정도의 깊이였던
늪지대가 순식간에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러게 줄을 묶고 있으라 했잖아. 옷도 벗고. 병신 같은 년이 말을 안 들어……."
서둘러 넝쿨을 허리에 묶은 야혼이 늪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상황은 야혼의 뗏목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가장 왼쪽에 있던 남천악 일행에게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호치의 말을 착실하게 들었던 냉소소만 간신히 뗏목에 매달려 있었을 뿐 3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 태웅과 추기영이 늪 속으로 자맥질 해 들어간 것은 냉소소가 넝쿨을 잡고 뗏목위로 올라온
다음이었다.
수어피를 입고 있는 두 사람의 행동은 재빨랐다.
잠시 후. 한 명을 붙잡고 올라온 태웅이 재빨리 흙을 닦아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다시 늪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왜 이 새끼가 먼저야."
남천악이었던 탓이었다. 단 한번 숨을 뱉어낸 남천악이 다시 늪 속으로 사라졌고 여호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인 태웅이 다시
그를 따라 들어갔다.
한편.
당가려를 찾기 위해 늪 안으로 내려온 야혼은 사방으로 손을 휘저으며 이리저리 움직여 다녔다.
어차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공 또한 일천했기에 감각을 이용해서 찾는 다는 건 불가능했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팔다리를 열심히 놀려 그녀가 걸려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거 줄지 안 줄지도 모르는 년을 위해 이 짓까지 해야하는 거야?"
턱!
'잡았다 요년!'
다리에 걸려드는 물컹한 촉감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가려 또한 의식을 잃지 않았는지 순식간에 야혼의 다리를 붙들고
눈앞으로 다가왔다.
"크억!"
야혼의 온몸에 독질이 있다는 것도 자신의 손이 그의 몸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선은 살고 봐야 할
일이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무공으로 어찌해볼 수도 있었을 터였지만 이족의 공격을 피하느라 몸을 너무 혹사시켰고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야혼의 물건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잡고 있던 뗏목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우지직!
'요년아 계약금은 받아야겠다.'
당가려의 몸을 확인한 야혼이 그녀의 겉옷을 사정없이 찢어냈다. 옷 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진흙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었다.
순식간에 당가려의 옷을 전부 찢어낸 야혼이 혈린만독편을 허리에 감은 후 그녀의 가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수어피를 입고 있다고는 하지만 속곳에 더 가까운 것이었기에 두 손 가득 선명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이런 개자식이…….'
갑자기 가슴에 느껴지는 통증에 당가려는 내심 이를 갈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생명 줄을 쥐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야혼이었던 탓이었다. 더구나 엉덩이에 느껴지는 이물감이라니.
'이런 씨팔! 이 좋은 순간에 왜 정신이……. 정신 차려라 야혼 정신 차리란 말이다 이 병…….'
'근데 이 자식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야혼의 허리에 감긴 넝쿨을 끌어당겨 위로 올라가던 당가려가 가만 가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열심히
주물럭거리던 손길이 갑자기 잠잠해지자 덜컥 겁이 났다.
내심 불안한 마음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녀만 넝쿨을 당기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재빨리 장대손이 있는 뗏목으로 다가온 여호치 역시 넝쿨을 당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후하! 백부, 골통 좀 봐줘요."
"알았어요."
"여 소저?"
"네."
여호치가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야혼을 끌어올렸다. 거의 벗은 몸이나 다름없는 당가려의 가슴을 굳세게 틀어쥐고 있는 알몸의
야혼. 늪 속에서 무슨 짓을 하다가 올라온 것처럼 보였던 터였다.
"너는 아무리 봐도 괴물이다. 괴물. 그나저나 피나 남아있을라나 모르겠다."
야혼의 몸에 붙어있는 독질과 독침을 제거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많은 독질을 달고도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것 또한
불가사의였다.
"아래쪽은 당 소저가 떼세요. 나는 싫으니까."
"여 소저!"
"살려준 값은 해야지요. 조심하세요. 그게 이놈의 밥줄이니까."
웃는 얼굴의 여호치가 야혼의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쁜 새끼. 볼 것도 없는 놈이 옷은 벗고 지랄이야."
얼굴 가득 홍조를 띤 당가려가 야혼의 발부터 시작해서 독질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히 몸에 붙어있는 거머리일
뿐인데도 쉽지가 않았다.
독질의 물컹거리는 느낌 때문이 아니었다. 야혼의 가랑이 사이에 있는 그놈이 자꾸 눈에 밟혔다.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손이
떨리며 독질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미끄러워 상당히 고심해야 떼어내지는 독질이 아니던가.
"휴우!"
하체 쪽에 있던 대부분의 독질을 제거한 당가려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남은 곳은 단 한곳. 다른 곳이야 한 손으로
제거해도 되었지만 그곳만큼은 두 손을 전부 사용해야 한다. 한 손으로는 꽉 틀어쥐고 다른 손으로 거머리를 떼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만일 당 소저가 수어피를 입지 않았더라면 야혼의 입은 찢어지고 있을 거예요."
"개자식!"
거친 욕설을 뱉어낸 당가려가 야혼의 물건을 틀어쥐며 거머리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여호치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들은 무공의 고수인 남천악 일행이나 장대손이 아닌 하오밀문의 사람들이다.
수어피를 입지 않고 해독단을 복용하지 않았더라면 자신 또한 같은 처지가 아니었겠는가.
소름이 오싹 끼쳤다. 거머리를 떼어낸다며 자신의 옷을 벗기며 웃고 있는 야혼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드디어 건너 왔네요. 일단 저곳으로 옮기도록 하지요."
일행의 앞을 가로막고 선 절벽을 가리키며 여호치가 말했다.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 거대한 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 아직 안 깨어나지요?"
속곳 하나만 달랑 걸친 채 죽은 듯이 누워있는 야혼을 쳐다보던 여호치가 입을 열었다.
치료를 시작한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가려의 짐 속에 있던 절독들이 다시 야혼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지금 그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혹시 골통 이 녀석 내공심법 익힌 것 있어요?"
야혼의 상태를 살피던 당가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껏 야혼이 복용한 독만 해도 20여 종이 넘었다. 그 속에는 사천당문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그런 절독까지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더구나 습지에서 마신 장독과 독질까지. 한마디로 야혼의 몸은 독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야혼의 몸 속은 너무
고요했다. 수십 종의 독성분이 소용돌이치며 서로 싸우고 있어야 마땅할 터인데 마치 어떤 거대한 기운이 그 독기운을 전부
삼켜버린 듯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그런 현상을 가져오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 독공을 연마했다거나 아니면 천고의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야혼의 상태로 보았을 때 독공연마는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해서 내린 결론이 절세의
내공심법을 익히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습지를 건너기 전에 내공에 대하여 언급했던 야혼의 말 때문에 더욱 확신이 갔다.
"글쎄요. 익히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많은 독을 중화시킬 정도는 아니 텐데……."
야혼이 다음대의 도백회주로 내정되어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도백회에도 무공은 있을 터이고 그것들 중 한두 개는 익혔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난 무공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야혼이 도살장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고 하였는데 아직 삼류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만 보아도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예인의 경지에 다다라 있다지만 내공이 거의 없기에 무림인과 비교한다는 자체가 무리였다.
'동료들에게도 말을 안 했나? 비밀이 많은 놈이군.'
야혼이 입을 열지 않았다고 지레짐작한 당가려가 더 이상 언급을 피했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말하지 않았을 터인데 자신이
나서서 들쑤실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독이 균형을 이루었나 봐요. 조금 있으면 깨어날 거예요."
"이독제독 현상이란 말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아까운 독만 낭비했네.'
당가려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헛고생하고 말았다. 검독인을 만들어 자신이 만들었던 독을 시험하고자 하였는데 주입한
독을 전부 내공화 시켜버렸고 증상이 나오질 않으니 시험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더 강한 독을 달라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내공이 거의 없었다는 생각에 무시했던 게 잘못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는 당가려의 귓전에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벌써? 너는 도대체……."
목소리의 주인공이 야혼임을 알아차린 당가려가 일순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두어 시진은 있어야 깨어나리라
생각했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 자식은?"
"훗! 아직 누워있다."
"좋아 그럼 빚 받을 준비만 하면 되나?"
싱긋 미소를 띤 야혼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더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저 자식 깨어나면 말해라."
적당한 장소를 발견한 야혼이 억양 없이 말하며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엉망으로 망가져 있는 몸을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한 그의 선택은 도(刀)를 가는 것이었다.
"연장아 괜찮냐?"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로 태웅이 야혼을 불렀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야혼이 못내 불안했던 터였다.
"당연히 괜찮지."
잠시 후. 야혼이 있는 곳으로부터 칼가는 소리와 함께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죠?"
야혼이 있는 곳을 한참동안 주시하던 냉소소가 여호치를 향해 다가오며 물었다. 그녀의 일행 중에 여호치의 말을 따랐던
그녀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어피를 착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깨끗했다. 독질의 공격을 전혀 받지 않았던 것이었다.
바로 그녀가 익힌 무공 때문이었다. 한령신공(寒靈神功)이라는 빙공(氷功)을 익히고 있던 그녀는 습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주위를 차갑게 하는 방법으로 독질을 차단시켰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는 것 같았지만
누구보다도 주위 깊게 여호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동굴을 통과해 가야합니다."
"그래요……? 쉽진 않겠군요……."
여호치를 가만히 주시하던 냉소소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녀의 행동 또한 이상했다. 완전한 암흑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별반 의심스러워하지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안 물어보세요?"
"훗! 궁금하면 그때 물어볼게요."
여호치의 물음에 가볍게 응수한 냉소소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묘하게 생긴 동굴이었다. 어찌 보면 천연동굴 같기도, 또
어찌 보면 인공의 흔적이 느껴지는 듯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순한 동굴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습지를 들어서기 전과 다를 바 없는 느낌이 들었다.
'묘한 사람이군.'
한 쪽 구석에서 도를 갈고 있는 야혼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도를 벼리는 데에만 모든 정신을
쏟고 있는 것 같았다.
'저런 식으로 운공을 하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땀을 흘릴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끊임없이 도를 갈고 있는 것이 마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뇌하는 구도자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야혼의 몸에서 보았던 무수한 상처들, 당가려가 치료할 때 언뜻 보았지만 야혼의 몸통은 인간의 그것이라
하기에는 너무 험했다. 마치 한여름 가뭄에 갈라진 논을 연상시킬 정도로 수두룩한 흉터들.
'공연한 관심을…….'
"혹시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문득 정신을 추스른 냉소소가 다시 여호치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글쎄요. 20리 정도 되는 것으로 아는데 확인해 본적은 없어요."
'궁주님!'
여호치의 대꾸에 깜짝 놀란 화소미가 전음을 보냈다. 여호치의 말은 성모봉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시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냉소소도 이미 알고 있어요. 속인다고 해서 속을 사람도 아니고요.'
"운기행공이나 하세요. 이제부터는 정말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3)- 벗는 게 취미다 어쩔래!(1)
칠흑 같은 어둠 속. 횃불 두 개 에 의존한 채 야혼일행의 동굴 탐험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여호치와 화소미가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었고 맨 끝으로 야혼과 당가려가 그 뒤를 따랐다.
40리 길이라는 여호치의 말대로 희미한 한줄기 빛조차 비쳐들지 않았다. 단지 일행 모두가 알고 있는 사항은 경사길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당가려!"
장대손의 뒤를 열심히 쫓아가던 야혼이 심심하다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당가려를 불렀다.
"만져보았으면 감상을 말해줘야지. 나는 좋았다."
"무슨…… 소리?"
야혼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지만 너무 어이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 일순 더듬거렸다. 짐짓 태연한 척 하고는 있지만
야혼의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화끈거렸다. 독질을 떼어낼 때 손끝에 느껴지던 그 이물감이 지금껏 그대로 남아있는 듯했다.
가문인 당문에는 많은 의서들이 있고 그 중에는 남자의 신체에 대해 기술해둔 책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림으로는 이미
통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물을 본 건 야혼이 처음이었다.
그림으로 보는 것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독질을 떼어내기 위해서였지만 남자의 물건을 주물럭거리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다.
"아쉽다. 그때 왜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한 마디만 더 하면 혓바닥을 잘라버린다.'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아쉬운 얼굴을 있는 야혼을 향해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두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일행이
앞에 있음에도 그들을 의식하지 않는 야혼의 행동에 질겁하고 말았다.
"아직 수어피 입고 있냐?"
"하여간 골통 너는 말로는 안 되는 놈이야."
야혼을 향해 험악한 표정을 짓던 당가려가 결국 그의 아혈을 찍어버렸다. 차라리 말을 못하게 해 놓는 게 더 편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좀 살겠네. 남자는 말이야 진중한 맛이 있어야해."
그러나 만족스러움도 잠시, 이번에는 조금전보다 더한 곤욕에 시달려야 했다.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때부터는 손가락으로
허리를 쿡쿡 찔러대며 찝쩍거리는 것이었다.
"손가락도 잘라주리?"
'이년이 날인가. 오늘은 왜 이래 이거.'
평소와는 다른 야멸찬 당가려의 태도에 더는 안되겠다 싶어 이내 떨어져 나와 장대손을 따라붙었다.
'자식 눈치하고는……. 그런데 이곳은 또 어디야.'
거머리를 떼어낸 듯한 얼굴로 미소를 짓던 당가려가 갑자기 확 트인 동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서가던 일행이 멈춰선 곳은 반경 5장 정도의 아담한 광장이었다.
"이곳에 있는 동굴은 전부 확인해야 합니다."
전면 벽에 뚫려 있는 동굴을 가리킨 여호치가 남천악 일행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 중에 나가는 통로가 있다는 말이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당신들 정체가 뭐지?"
고개를 끄덕이던 남천악이 여호치를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여호치 당신은 길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만의 착각인가?"
그동안 의심스러웠던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줄곧 눈여겨보았지만 여호치는 결코 초행길을 가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서툰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습지를 건너면서부터 품었던 의문이 이곳에 와서야
확실해졌다. 눈앞에 있는 동굴은 통틀어 15개. 저들 중 통로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전부 막혀있는 동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호치는 전혀 머뭇거림 없이 통로가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게 중요한가요."
"물론 중요하지. 지난 100년간 누구도 가지 못했던 그런 장소를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게 더 중요하다고."
"당신네 십파에서 가질 못했다고 하여 다른 이들마저 무시하면 안되지요.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에요."
"쿡! 이 남천악을 바보로 알고 있나보군. 내가 알기로는 성모봉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부류밖에 없다.
100년 전 십만대산에서 죽어간 마교의 후예 말이다. 그것도 고위층의 후예가 되겠지."
"그럼 남 공자는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 이 말입니까?"
"나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갈 수 없다."
마교(魔敎).
여전히 강호무림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자 없애야할 적이었다. 정사(正邪)를 연합하게 만들었던 최초의 단체, 비록
10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대부분의 무림세력들이 가장 경계하는 곳이고, 마교도의 척살은 정사를 떠나 무림인들의 의무처럼
여겨졌다.
"이상하네? 당가려 아니 시발탱이, 명교라는 곳이 그렇게 나쁜 곳이었어? 내가 알기로는 크게 나쁜 짓 한 것도 없드만. 왜
이 나라를 세웠던 주원장인가 하는 자도 명교도였다며."
갑자기 돌변한 상황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당가려가 제압했던 아혈을 풀어주자 기다렸다는 듯 야혼이 말문을 열었다.
"호오! 마교도라 시인을 하는 게냐?"
남천악의 몸에서 더욱 강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야혼 일행을 마교도라 확신하는 듯했다.
"이봐! 명교도가 왜 나쁜 놈들인지 그 이유를 말해 달라니까 쓸데없는 소릴 하고 그래."
"이유? 너희 하오밀문 같은 삼류 떨거지는 알 리가 없겠지. 이곳 십만대산에서 죽어간 정사 무림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무려
5천명이 넘는다. 그 많은 무림인의 무덤이 바로 이곳 십만대산이란 말이다."
"그래? 많이 뒈지기는 했구먼. 그런데 말이다, 그 놈들은 이곳에 왜 왔는데. 집구석에 가만히 처박혀 있었으면 그렇게
뒈졌을 리가 없잖아. 공연히 객사하고 싶어서 이곳으로 온 놈들인데 그걸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는 거야. 다 지들 잘못이지.
그리고 나는 밥 먹고살기도 버거운 놈이야. 마교니 명교니 하는 그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고."
"이제 와서 발뺌한다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더냐?"
챙!
급기야 남천악이 검을 뽑아 들었다. 성모봉으로 가는 길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일단 제압해서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성모봉으로 가는 목적부터 시작해서 여호치가 가지고 있는 지도까지 고스란히 자신의 것이 될 터였다. 그 다음이
성모봉인 것이다.
"저 새끼 진짜 답답한 놈이네. 우리가 너희들을 적이라 생각했다면 늪에서 뒈지게 나두지 왜 구했겠냐? 그때 너희들 중
정상적인 사람이 있었냐? 명예를 얻고 싶은 네 마음을 이해하겠다만 제발 상황파악 좀 하면서 나서라. 애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냐?"
"그 이유야 너희들이 알겠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헛소리하지 말고 지도나 내놓아라. 죽기 싫다면."
"그러니까 지금껏 생명의 은인에게 칼을 뽑은 이유가 지도 때문이었나 보네? 성모봉의 보물을 혼자 처먹으려고. 감탄했소이다
시주, 니미씨발타불!"
"그럼 이곳에서 찢어져야겠다. 아쉽네, 그동안 재미있었는데."
"쿡! 내가 말했을 텐데 너희들이 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도 남 대협과 같은 생각이오. 더 이상 당신들을 믿을 수 없소이다. 그의 말대로 지도를 내 놓으면 목숨은 살려
주겠소."
한참 동안을 생각에 잠겨있던 유마혼이 남천악 옆으로 다가섰다. 그 또한 야혼 일행을 마교인이라 여기는 듯했다. 마교도보다는
과거의 동지였던 정파인을 더 믿겠다는 의미였다.
유마혼의 뒤를 따라 주려화 역시나 남천악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고 남은 사람은 당가려와 냉소소 그리고 장대손이었다.
그들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갑작스럽게 전개된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럼 얼음소저만 남았네? 당가려야 나에게 줄게 있으니 같이 가야할 테고, 씨발탱이는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이쪽에 있어야
하니까……. 얼음소저는 어떻게 할래?"
"따라 가면 저도 수어피 한 벌 주실 건가요?"
"냉 소저!"
냉소소의 말에 유마혼의 표정이 흠칫 변했다. 지금 그녀의 말은 여호치 일행과 같이 가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실은 냉소소는 생각에도 넣지 않고 있었다. 단지 당가려와 장대손의 향방에 모든 촉각을 세우고 있었을 뿐인데 의외의 일이
터졌다.
"그들이 마교도라는 걸 알면서도 같이 가겠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저는 유공자와 생각이 다르군요. 이분들이 마교도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지요.
야소협도 말했지만 우리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자 이제 결정이 났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곳에서 한바탕 일전을 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각자의 길을 갈까요."
지금껏 지켜보고 있던 여호치가 남천악 일행을 직시하며 나섰다.
"허억!"
비웃는 듯한 얼굴로 여호치를 주시하던 남천악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단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을 뿐인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에서 발산되던 모든 살기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러한 현상은 남천악뿐만이 아니었다. 동굴 속에 있던 대부분이 놀란 얼굴이었다. 처음 선보인 여호치의 무위가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5대3이네? 남천악 객기 부리지 말고 그냥 가라."
"흐음! 오늘 일 반드시 기억해 두겠다."
붉어진 얼굴로 일행을 노려보던 남천악과 유마혼이 결국 몸을 날려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무공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여호치 일행을 쳐야할 명분이 없었다. 더군다나 당가려와 냉소소까지 여호치 일행과 같이 간다고 하였으니 더 이상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빚진 것이나 똑바로 기억해라. 한방 말이다. 작은 색시야 방향 잡아라."
떠나는 남천악을 향해 고함을 지른 야혼이 상큼한 미소를 여호치를 향해 날렸다.
"그나저나 연장 너 이제 오입질은 다했다. 정사의 대들보 두 놈에게 찍혔으니 숨이라도 쉬고 살겠냐?"
태웅이 낮게 키들댔다.
"임마, 냉소소가 우리 쪽에 붙은 이유가 뭔지 아냐? 물론 내 얼굴이 큰 영향을 미치기는 했다지만 그게 다가 아냐."
"당연하지 임마, 요즘 세상에 얼굴보고 따라 붙는 여자들이 어디 있냐. 더구나 네가 개차반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데, 우리와
같이 있으면 성모봉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야."
"틀렸어 임마!"
태웅의 장황한 설명을 듣던 야혼이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럼 너는 뭐라 생각 하냐?"
"수어피 때문이다. 그걸 한번 입어보고 싶어서. 맞지 냉소소?"
'저런 미친 놈. 또 반말이다 또 반말. 하여간 저놈의 머리는…….'
"그런데 야소협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항상 반말을 해요?"
드디어 장대손이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얼굴 표정이 없다하여 무면미봉이라 불리던 냉소소가 불쾌하다는 듯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우리가 처음이라니. 벌써 두 달간이나 같이 먹고 자고 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
그리고 내가 반말하는 게 억울하면 너도 해. 세상 너무 어렵게 살지 말라고. 호치 뭐하냐 안가고."
별걸 다 신경 쓴다는 듯 냉소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야혼이 이내 여호치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골통, 그래도 겁은 나는 모양이지? 잊어버리세요, 냉소저 말로해서 될 놈이 아닌 걸요."
"아니에요. 저도 그냥 해본 소리였어요. 하여간 재미있는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네요."
'그리고 비상한 사람이고요.'
자연스럽게 일원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의도를 야혼이 알아차리자 머쓱해져서 쏘아붙이듯이 말이 내뱉고 말았다. 천방지축 날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상대방의 내심을 가장 잘 꿰뚫어보는 사람이 야혼이었다.
'댁의 미래가 궁금해지네요.'
냉소소의 입가에 살풋 미소가 걸렸다. 결코 도살장에서 소나 잡는 일로 일생을 보낼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인간을 파악하고 관찰해 보는 것 또한 꽤나 흥미로운 일일 터였다.
"냉소소 뭐해! 빨리 안 따라오고."
"응? 알았어……!"
냉소소가 얼렁뚱땅 반말로 대꾸했다. 혼자만 손해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골통, 너는 보면 볼수록 신기한 놈이다."
당가려가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야혼을 대하는 냉소소의 태도 때문이었다. 지금껏 2달 이상을 같이 왔지만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곤 단 한번의 대화가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억울하면 반말을 하라고 했다하여 정말 반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울컥한 마음에 그랬을지라도 무면미봉의
얼굴을 변화시킨 최초의 인물이 야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려야. 남녀가 빠른 시간에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아냐?"
"그런 것도 있냐?"
"당연하지. 가만히 있으면 친해질 리가 없지 않겠냐. 내가 5년간 한량 생활과 수백 명의 처자와 두루 사랑을…… 흠흠,
이건 아니고. 하여간 남녀가 친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같이 잠을 자는 거다."
"수백 명이나 되는 여자들과 잠을 잤어? 그러고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더 신기하다."
당가려가 질겁한 눈으로 야혼을 빤히 쳐다보았다. 곁에 있던 냉소소 또한 동그랗게 눈을 치떴다.
"그런데 반말하고 잠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요?"
냉소소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거야 같이 잠을 자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서지. 아! 이건 중요한 건데. 반말을 할 때는 주변환경이 더 중요해.
아무렇게나 반말을 찍찍해대면 치한으로 오인 받기 딱 좋거든."
"지금 같은 경우에는 괜찮다 이거지…… 요."
"새삼스럽게 요자는. 바로 그거야 지금 상황에서 소소 네가 나를 칠 수가 있겠냐 아니면 욕을 하겠냐. 그냥 넘어가야지.
아니면 지금처럼 막나가든가."
"그렇게 상황 봐가면서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놈이 왜 나한테는 계속 반말이냐 이 개차반 자식아."
"씨발탱이, 당신은 상황이 다르잖아. 우리 관계는 원수에 가깝지. 당신 같으면 원수 놈에게 공대할 수 있겠어?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당신은 남자라는 거야. 딸랑이 달고 다니는 남자. 알아  들어?"
"내 분명히 장담하건대 개차반 네놈은 그놈의 주둥이 때문에 크게 당할 날이 반드시 있을 거다. 목을 걸어도 좋다."
"나는 거지새끼하고는 절대 내기 안 해. 왜냐면……."
"연장아 그만해라. 앞에 적이다."
장대손을 행해 사설을 푸려는 순간 잔뜩 긴장한 태웅의 목소리가 말을 막았다.
"적?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헤엑!"
휘리릭!  파락 파락 파락!
전방을 향해 고개를 돌린 야혼이 다급한 비명을 내지르며 재빨리 냉소소 등뒤로 숨었다. 동굴 안이 온통 새의 날갯짓소리로
가득했다.
아직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이런 소리가 난다함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4)- 벗는 게 취미다 어쩔래!(2)
"왔다! 타핫!"
검은 구름이 몰려들 듯 떼지어 나타난 뭔가를 향해 여호치의 연검과 화소미의 채대가 백색 광채를 쏟아냈다.
끼익! 끽!
후두둑!
"이게……. 박쥐 아냐?"
바닥에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박쥐였다. 그러나 평범한 박쥐가 아니었다. 우선 그 크기부터가 엄청났다. 온통 시뻘건 핏빛에
거의 1자 크기의 동체를 가진 놈이었다.
"난리 났군. 흡혈편복(吸血  )이다. 이놈들 또한 극독을 가졌어."
몹시 난감하다는 듯 당가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흡혈편복. 오직 남만에서만 발견된다는 박쥐의 일종으로 치명적인 극독을
함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갈증이 날 때 대부분의 박쥐는 물을 먹게 되는데 이놈들은 피를 마신다 하여 흡혈편복이라 불리고
있다.
"독?"
"독이 무서운 게 아니라, 저놈 열 마리 정도면 네 몸의 피를 전부 빨아버린다는 게 문제다."
독이란 말에 관심을 보이는 야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당가려의 말마따나 흡혈편복의 무서움은 독이 아니었다. 독이야
해독제를 복용하게 되면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하지만 물렸을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꼭 대롱처럼 생긴 혀끝을 생명체의 동맥에
찔러 넣고 피를 빨아먹기 때문에 그 속도가 엄청나다. 독에 당해 죽는 것보다 출혈과다로 죽는 경우가 허다한 독물이 바로
흡혈편복이었다.
그런 박쥐가 동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럼 뭐해 빨리 없애야지."
설명을 듣던 야혼이 전방을 향해 당가려의 등을 떼밀며 고함을 질렀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나가서 박쥐나 잡으라는
말이었다.
"야 임마! 남자인 네가 힘을 써야지 연약한 여자들을 전장에 보내는 놈이 어디 있냐. 그러고도 남자냐?"
"열심히 응원해 줄게. 어차피 난 짐꾼이잖아. 짐 들고 가는 게 내 임무란 말이다. 소소 너는 안가냐?"
"조금 있다가 교대해야지. 한꺼번에 달려들다 지치면 그땐 어쩔래?"
"그래? 당가려! 지금은 쉬어야 한단다. 그나저나 여호치 저년은 정말 엄청나네. 소소야 저 정도 무공이면 얼마나 강한
거냐?"
처음 보는 여호치의 무공은 진정 가공했다. 능청거리며 휘어지는 연검에 서려있는 새하얀 기운이 흡혈편복에 스칠 때마다 반으로
잘려 떨어져 내렸다. 힘으로 자르는 동작이 아닌 가볍게 긋는 듯한데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 보이는 백색의 기운을 검강(劒 )이라 부른다. 적어도 십대문파 문주 정도 되어야 펼칠 수 있다."
'도대체 여 소저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야혼 뿐만 아니라 당가려와 냉소소 또한 넋을 잃은 얼굴이었다.
두 여인이 가장 궁금해하는 바였다. 기세만으로 남천악을 눌러버렸던 고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검강을 구사하는 고수일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나름대로 무공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호치의 무위를 보는 순간 그것들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이었는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더구나 무공 초식자체도 파악할 수 없었다. 보면 볼수록 여호치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서대시전의 소매치기 일 뿐이야. 더 이상 알려고 하지마. 그게 서로에게 좋은 거야."
"그럴지도……. 저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건 무슨 사연이 있다는 말이겠지. 너처럼 말이야."
"내가 뭘? 무공이 있길 하냐, 가진 게 있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무공 말고 네 몸을 도배하고 있는 그림들……."
독질을 떼어낼 때 보았던 흉터가 새삼 떠올랐다. 몸 곳곳이 온통 흉터 투성이었다. 검에 베인 흉터를 비롯하여 채찍에 당한
흉터까지, 얼굴만 빼고 온몸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들 중에는 어떻게 살아났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치명적인 흉터도 여럿 보였다. 절로 야혼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도살장에 있으면 이런저런 부상을 많이 당하게 된다. 태웅아 소도 두 개만 빌려줄래?"
"왜 너도 한바탕 하려고?"
"저것들은 무림인도 아닌데 나도 거들 수 있지 않겠냐."
"골통, 옷은 또 왜 벗어!"
갑작스런 야혼의 행동에 질겁한 당가려가 고함을 질렀다. 습지에서도 이미 경험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자신과
냉소소가 바로 옆에 있는데 태연스레 옷을 벗고 있었다.
상의뿐만 아니라 하의까지 훌렁 벗어내 한쪽으로 치운 후 태웅이 건네준 소도를 쥐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볼 것 다 봐놓고 새삼스럽게. 저놈들 피도 전부 독이라며."
'차가워졌다.'
냉소소의 눈에 언뜻 이채가 서렸다. 비록 장난스레 말을 뱉고는 있지만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또한 벗은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저 미묘한 기운은, 어찌 보면 살기 같기도, 또 어찌 보면 한스러움 같기도 한, 꼭
집어 표현하기 힘든 그런 기운이 야혼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듯했다.
"박쥐 피는 무슨 맛일까 궁금해지는군."
'그래 흉터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그랬어.'
야혼의 뒤를 따르던 냉소소가 내심 중얼거렸다. 야혼의 모습이 돌연 딴 사람처럼 바뀐 시점이 바로 그때부터였다.
자기 몸의 흉터를 내려다보던 그 순간부터.
파라락! 휘리릭!
철벅! 철벅!
"많군……."
바로 옆에서 검강이 번쩍이며 흡혈편복들이 잘려나가고 있음에도 태연한 얼굴로 전방을 노려본다. 신발마저 벗어 던진 맨발에
질척한 피를 밟고 서 있음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지 고개를 돌려 여호치의 검끝을 주시했다.
직선으로 나아가다 다시 사선으로 떨어지고 허공을 반으로 갈라내는 모든 동작을 머릿속에 새기기라도 하려는 듯 망연히 좇았다.
끼이익! 턱!
"위험……."
당가려가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여호치의 검을 쳐다보며 못박힌 듯 서있는 야혼의 어깨 쪽으로 흡혈편복 한 마리가
빛살처럼 날아들었던 것이었다.
우두둑!
"그만 들어가 쉬어라. 쓸데없는 짓 했다. 강한 것은 저절로 표가 나기 마련이다.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여호치가 일부러 검강을 시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가려와 냉소소 그리고 장대손 때문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이 딴 마음
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미리 무공을 선보인 것이었다.
어깨에 주둥이를 박고 있는 흡혈편복을 거칠게 뜯어내 짓이기면서도 여전히 그의 시선은 여호치를 향해있었다.
한 웅큼의 살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아예 속곳까지 벗고 오지 그랬냐."
하얀 속곳 하나만 달랑 걸치고 나타난 야혼의 모습을 대하는 여호치의 행동 또한 태연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고 싶었는데 당가려와 냉소소가 정신 못 차릴 까봐. 왜 있잖냐 내……."
"됐다 새끼야. 밥값 하러 왔으면 일이나 해라."
혼잣말처럼 투덜대며 여호치가 뒤로 몸을 뺐다. 실은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다. 야혼의 말대로 장대손 등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무리하게 검강을 시전했기에 내공소모가 심했다.
"호치야 상대에 맞추어 하는 것도 기술이다. 가루로 만들어서 죽이나 이렇게 잘라서 죽이나 같은 거라고."
10여 마리의 흡혈편복이 가슴 근처까지 다가온 순간, 야혼의 양손이 쾌속하게 움직였다. 순시간에 그의 전면으로 무수한 손
그림자가 생겨나고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진 흡혈편복의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손놀림이었다.
공공십팔수. 십전수 구약종의 무공 중의 하나인 공공십팔수가 태을건곤심법을 바탕으로 펼쳐지자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강한 힘을
발휘했다. 무풍무영술을 운용한 야혼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그곳에서 또 한번의 손짓과 함께 사방을 향해 발질이
터졌다.
무변무적퇴, 맨발의 적족(赤足)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흡혈편복들의 몸뚱이가 터져나갔다.
움직이는 공간은 전후 1장. 좌우 1장 폭을 옮겨다니며 무서운 속도로 양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허공을 가득 메운 흡혈편복의 조각들로부터 쏟아지는 붉은 피를 고스란히 받으며 끊임없이 손을 휘둘러댔다.
'야혼 이놈아. 소를 생각하지 말고 도에 집중하란 말이다. 도 속에 네 몸을 집어넣으란 말이다. 언제나 도를 벼릴 때의
마음을 잊지 말아라.'
'그래 지금 나는 도를 벼리고 있을 뿐이다. 저 앞에 있는 것들은 생명체가 아니다. 허공을 떠다니는 숫돌일 뿐이다.
정지되어 있는 숫돌이 아니라 다가드는 숫돌일 뿐이다. 무엇이 먼저인지 그게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도를 벼리는 과정일
뿐.'
오른손이 가볍게 허공을 쓸었다. 일 수에 아홉 번의 변화를 주어야 한다. 오른손의 뒤를 왼손이 따르고 그 또한 아홉 번의
변화를 만들어 냈다.
두 손으로 펼쳐내는 공공십팔수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세인들이 알고 있는 공공십팔수가 아니었다. 십전수 구약종만이 펼칠 수
있었던 진정한 공공십팔수가 300년만에 다시 부활한 것이었다.
화선지처럼 펼쳐진 허공 위에 수십 개의 점을 찍듯, 조그마한 소도 끝에 맺힌 핏빛 먹물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단 한 마리의 흡혈편복도 공공십팔수를 통과하지 못했다. 팔 길이 안으로만 들어오면 전부 소도에 의해 잘려나갔다.
"한옥백마수(寒玉白魔手)!"
움직이는 사람은 야혼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 옆에서 차가운 음성이 터져나왔다. 냉소소의 독문무공인 한옥백마수였다. 저
대륙 끝, 북해의 심해 속 천년빙정보다 더 차갑다는 한령신공. 한때 제일 세력이었던 북해빙궁의 최고 무공인 한령신공을
냉소소가 익히고 있었다.
그녀의 무공 또한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강했다. 백색 투명한 손바닥이 몸통을 스치면 어김없이 얼음 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부드럽게 휘어지고 내뻗는 섬섬옥수는 백색의 공포였다.
"이야합! 혈운조양(血雲朝陽)!"
1장 길이의 붉은 혈편이 사방을 유영하고 있었다. 감겼다 풀리고 회전하며 나아가는 붉은 영사였다. 뱀의 머리처럼 끄트머리를
치켜세운 혈린은 300년 전 겁천십웅(劫天十雄)의 위용을 고스란히 재현해냈다.
혈린만독편이 스쳐간 흡혈편복은 지면에 떨어지기도 전에 녹아내렸다. 당가려 전방 1장안은 그 무엇도 침투할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혈린만독편으로 펼치는 1초식이 이럴진대 나머지 두 초식을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혈린만독편이 가려에게 이어졌던가……."
내기를 다스리고 있던 장대손이 당가려의 손에 들린 붉은 편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난 300년간 오성 이상을 연성하지 못해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혈린만독편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네가 타고난 천품이라는 것은 당가의 복이겠지만 나는 걱정이 앞서는구나."
지난 세월동안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겁천십웅이 세상에 나타났다 함은 나머지 무공 또한 현세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난세의 주역은 인간이었지만 그 시기는 하늘이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니었던가. 결국 난세의 시기는 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장대손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은 야혼이라는 야바위 도박꾼이었다.
"공공십팔수가 분명한 것 같은데……."
야혼이 두 손으로 시전하는 무공은 분명 공공십팔수였으나 그가 알고 있는 그 무공이 아니었다. 하오밀문에 있던 공공십팔수는
절대 저런 위력이 나오지 않을 터였다.
더구나 야혼의 실력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공공십팔수라는 무공으로 보나 야혼의 실력으로 보나 지금의 상황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분명 잘못되었다는 느끼는 그런 기분과는 달리 눈앞에 펼쳐지는 저 무공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세 사람 중에 가장 하수인 야혼이 가장 효율적으로 싸워내고 있었다.
거의 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흡혈편복의 피를 뒤집어 쓴 그의 신형이 횃불에 번쩍일 때마다 20여 마리의 박쥐가
죽어나갔다. 마치 붉은 덩어리가 춤을 추는 듯했다.
"뭔가 다른 게 있나?"
장대손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야혼이 펼치고 있는 무공은 단순한 공공십팔수가 아니었다. 2가지 무공이 더
섞여 있었던 거였다.
도살장에 10년 동안 소를 잡을 때 썼던 찌르기와 염왕도법 1초인 염왕수라참이 녹아들어 있었다.
의식적으로 섞으려해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3가지가 합쳐져 펼쳐진 것이었다.
냉소소와 당가려가 교대하고 기식을 조절하고 있었으나 야혼의 움직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놔둬라!"
야혼을 멈추게 하려는 당가려의 행동을 장대손이 저지했다. 야혼의 상태 때문이었다.
무념무아의 경지. 무공을 익히는 무인이면 누구라도 얻기를 원하는 그런 경지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운기행공 중에 얻는 무념무아의 경지와는 수준자체를 논하기가 힘든 대단한 경지가 지금 야혼의 상태였다.
심상이 눈뜨고 있는 중이었다. 오감마저도 완전하게 닫힌 상태에서 몸 스스로가 위험을 감지하는 상태. 마음으로 사물을
인식한다는 의미였다.
"나도 다음부터는 칼이나 갈아야 할까보다."
부러움이었다. 야혼이 보여주고 있는 심상의 경지는 내공이 높다하여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가지 무공에 끊임없이
정진하다 보면 어느 순간 찾아오는 손님인 것이다.
원한다하여 오는 손님이 아닌 불현듯 찾아오는 대오각성(大悟覺醒)의 깨달음.
이윽고 1시진이 지난 뒤, 야혼의 신형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두 번째 기절이었다. 전번과 똑같이 옷은 벗고 있었지만 그
상황은 전혀 달랐다. 첫 번째 기절은 독 때문이었지만 지금의 경우는 심력을 너무 허비해서 쓰러진 것이다.
어쨌든 기절해 버렸기에 가장 편한 사람은 야혼이었다.
흡혈편복과의 사투는 처음일 뿐이었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독충들의 공격을 받았다.
다행이 독에 대해서는 무서울 게 없는 당가려와 여호치가 미리 준비해둔 해독단 때문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2시진에 걸친
사투를 끝으로 밖으로 나온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 지금보다 더 험한 길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여호치를 제외한 누구도 알지 못했다. 진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하다 했던 추기영의 무음항마혈탁은 아직 써보지도 못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5)- 식인혈목(食人血木)(1)
쏴아아!
먹구름이 몰려오나 싶었는데 어느새 장대비가 사정없이 대지를 후려쳤다. 갑자기 차가워진 대지 위로 피어오른 희부연 안개가
일행의 시야를 가렸다. 비를 피할 겨를도 없이, 일행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갑작스런 비로 인하여 모두들 잔뜩 짜증스런 얼굴이지만 유독 한 사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이가 있었다.
“으이그! 비야 팍팍 좀 쏟아져라. 그래가지고 저 천들이 찢어지겠냐?”
커다란 자루를 매고 가면서도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자 시시덕거리는 놈, 또 다시 짐꾼이 된 야혼이었다.
“야, 꼴통! 눈 안 돌릴래!”
앞서 걸으며 길을 트던 당가려가 야혼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무엇인가에 잔뜩 곤두선 목소리였다. 비단 그녀 뿐만은
아니었다. 다른 여인들 역시나 무엇이 불편한지 신경질적으로 수중의 박도를 휘둘렀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비 때문이었다.
내리꽂는 빗줄기에 옷은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나마 색깔 있는 옷을 입고 있는 여인들은 살갗까지 비치는 위험은
없다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찰싹 달라붙은 옷 때문에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들 중 가장 곤란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유일하게 백색 옷을 입은 냉소소였다.
십만대산이 있는 이곳은 남만이라 두꺼운 옷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게 크나큰 불찰이었다. 등 너머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작업을 하고 있으나 불편한 마음은 어쩌지 못했다.
마침내 보고 있자니 왠지 멋쩍어진 장대손이 추기영과 태웅을 이끌고 앞으로 나섰으나 야혼만은 결코 따르지 않았다. 갖가지
핑계를 만들어 일행의 뒤에 서기를 고집했고 결국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가지고는 모른다니까?”
지금 야혼의 시선을 붙들고 있는 여인은 무면미봉 냉소소였다. 몸에 찰싹 달라붙은 흰옷 밖으로 살갗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몸이 결코 당가려에 뒤지지 않다는 것이었다.
눈이 그녀의 둔부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지금껏 당가려의 몸매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비를 맞아 굴곡이 드러나자
확연하게 비교가 되었다.
야혼의 기준에 의하면 둘 다, 만점이었다. 다만 냉소소에게 점수를 조금 후하게 준 이유는 살갗이 비쳐 보인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가려! 똑바로 하지 못하냐? 훌륭한 몸매를 만들려면 일할 때도 항상 신경을 써야하는 거야.”
따가운 시선이 껄끄러운 듯 비스듬히 몸을 돌린 채 칼질을 하는 당가려를 향해 야혼이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에라 이 나쁜 새끼야!”
“으-악! 내 눈.”
결국 참다 못한 당가려가 야혼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나무에서 떨어진 주먹만한 열매였다.
상당한 힘을 실어 던졌는지 야혼의 오른쪽 눈이 순식간에 부어 올랐다. 고통스런 비명을 지른 야혼이 눈을 감싸고 주저앉자
전면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어렸다.
“아미타불! 연작시주 괜찮은가.”
“야! 연장 괜찮아?”
빨랐다. 무공도 없는 추기영과 태웅이 거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야혼을 향해 다가왔다. 얼굴 가득 걱정스런
표정을 지은 채로.
“야! 개자식들아, 왼쪽이 아니고 오른쪽 눈이란 말이다.”
“당 시주, 걱정 마시고 그냥 가십시오. 이 빌어먹을 시주의 시선은 제가 차단하겠습니다.”
“그럼 네 눈은 어쩌고?”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당 시주. 소승은 불자입니다. 불자의 눈에 비친 육체는 그냥 껍데기 일 뿐입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미타……!”
“이 돌중 새끼야. 근데 왜 불호는 외다 말고 침을 삼키냐?”
“침을 삼키는 거야 갈증이 나서지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아미타불!”
“이 시원한 날에 갈증 날 이유가 없잖아!”
“이런 시발타불 같은 중생 봤나. 그럼 저 몸을 보고 갈증이 안 나면 그게 어디 남자……. 아미타불!”
“너희 두 새끼들 주둥아리 안 닥쳐!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되잖아 이 개자식들아.”
기회를 잡았다는 듯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향해 태웅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눈 또한 앞서가는 여인들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나저나 저 새끼는 뭘 처먹었간데 이렇게 오줌발이 세냐?”
고개를 돌린 야혼이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거야 자연의 섭리이니까 그런 것 아니겠냐. 왜 무공도 보면 자연도(自然道)에 도달한 새끼들이 가장 강하다고 하잖아.”
“아미타불! 그렇다고 저 하늘 끝에서 싼 오줌이 이정도 굵기로 떨어지겠는가! 그리고 저 패인 땅 좀 보게나. 바로 앞에서
갈기는 우리보다 더 강하지 않은가.”
“저런 개자식들…….”
앞서가던 여인들의 입에서 동시에 욕설이 튀어나왔다. 세 놈씩이나 되는 사내놈들이 여자들에게 길 뚫는 일을 맡겨두고 하릴없이
음담패설을 주워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오줌줄기와 견주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 더 이상 안 해 전부 저 새끼 시킬 거야.”
급기야 당가려가 길 만드는 작업을 포기하고 씩씩거리며 야혼 앞으로 다가섰다. 한시라도 빨리 가기 위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섰지만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야 골통! 짐 이리 줘!”
“이거 무거운데? 그냥 몸매나 보여……. 아니 길이나 만드는 게 더 나을 건데…….”
“대부분 옷인데 무겁기는 뭐가 무거워! 임마.”
“내 짐도 있거든. 그래서 그렇지 뭐.”
“니 짐? 옷도 한 벌 밖에 없는 놈이 짐은 무슨 짐?”
“그러지 마라. 이 야혼이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 속에 책이 50권이나 있다고.”
“네가 책을 본다고? 지나가던 똥개가 웃겠다 자식아.”
“얘가 완전 사람 무시하네? 야, 사는 게 비록 이렇다고 꿈도 없는지 아냐? 네가 있는 집 자식인 줄은 안다만 그러는 게
아니다.”
“정말 책이 있다고?”
제 말이 좀 심했다 싶었는지 당가려의 얼굴이 스륵 누그러졌다. 아무리 막돼먹은 사람이라도 해서는 안될 말이 있는데 그 선을
넘어버린 듯해서였다.
“일단 들어보면 알겠지 뭐.”
당가려에게 짐을 건넨 야혼이 그녀의 손에서 박도를 빼앗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정말이네?”
짐을 들어본 당가려가 깜짝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 짐보다 몇 배 무거웠다. 실은 이런 무거운 짐을 들고 아무런 내색도
없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배우고자 하는 욕망은 잘사는 놈이나 못사는 놈이나 다 같은 거야. 능력이 안 돼서, 돈이 없어서 못 배운 것뿐이라고.
부모님께 감사하고 살아.”
“허-!”
“시발탱이 한마디만 더 하면 이곳에서 사생 결단 내고 만다.”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장대손을 향해 잔뜩 살기 어린 음성을 흘렸다.
‘개차반 너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건 내일이야. 그러니까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
‘오리발은 말이다, 뽀록날 때까지 내미는 게 이 야혼의 신조야. 저년 봐라 벌써 표정이 달라졌잖아.’
감탄했다는 듯이 어벙한 얼굴이 된 당가려를 쳐다보다가 씨익, 웃었다.
“그래 관두자 관둬! 일이나 해라. 이 사기꾼 녀석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그 또한 꽤 피곤했기에 대꾸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씨팔! 시원하게 갈긴다. 퉷!”
하늘을 쳐다보며 한바탕 욕설을 갈긴 야혼이 손바닥 가득 침을 뱉어 내더니 박도를 불끈 틀어쥐었다.
“이야합!”
거친 고함을 지르며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쳐냈다. 박도가 움직일 때마다 나뭇가지들이 잘려나갔다.
“저 녀석은 다른 건 몰라도 칼만 잡으면 사람이 변한다니까.”
야혼의 모습을 지켜보던 장대손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일상적인 생활은 개차반의 모습이지만 칼을 쥘 때 모습은 전혀 달랐다.
마치 도(刀)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듯 진지한 모습.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야혼의 모습 중의 하나였다.
“저 사람이 믿는 유일한 것이라 그런 게 아닐까요?”
장대손의 말에 반응을 보인 사람은 뜻밖에도 가장 최근에 대화를 나눈 냉소소였다.
“무슨 말인가, 냉소저?”
“그냥 저 사람 몸에 있는 흉터를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혹시라도 저 녀석 앞에서 동정 어린 얼굴 보이지 마시오.”
안쓰럽다는 듯이 야혼을 쳐다보는 두 여인을 향해 여호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함이었는데, 정작
동조한 꼴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힘든 과거를 산 사람일수록 남의 동정을 못 견뎌 하니까.”
냉소소와 당가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흔히들, 없는 사람이
자주 화를 내면 꼬였다고 몰아붙이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소유라 여기는 것이 자존심인데 그걸
꺾으려 하기에 반발하는 것이다.
요컨대 자신이 인간임을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자존심이란 말이다.
“그래요, 차라리 모른 체 하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그게 아닌…….”
야혼에 대해 말을 해줄까 하다가 입을 닫고 말았다. 어차피 십만대산 일이 끝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인데 굳이
나쁜 인상을 심어줄 필요는 없을 터였다. 지금만 해도 개차반 골통이 야혼이 아니던가.
“그렇게 하세요. 그래야 달라는 소리를 안 합니다.”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다. 인연이 아닌 이상 이들과도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그 범주에는 자신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 하더라도 무사하긴 힘들잖아요.”
“남천악 때문에 그러세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그래도 저 녀석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되니까요.”
냉소소의 말에 여호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개봉에서만 산다면 크게 위험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화산파의 후광을 얻고 있다지만 도백회의 회주를 상대로 무모한 짓을 벌이지는 못할 터였다.
“그래도 정파인을 무시하면 안돼요. 직접적으로 손을 쓰지 않아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가려야!”
“백부님도……. 사실이잖아요, 우리 당문에 와서 은밀하게 독을 얻어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걸 다 어디에
쓰겠어요. 안 봐도 빤하지.”
뜻밖에도 정파인의 행실을 욕하는 이는 당가려였다. 비록 강호인들이 꺼리는 독을 사용하는 당문이었지만 그들의 성향은 거의
정파 쪽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니.
“남공자는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던데…….”
“글쎄요, 그건 두고봐야지요. 인간의 속내까지 알지는 못하니까. 하지만 남천악은 결코 사파와 결탁할 자가 아닙니다. 그같은
자들이 사파와 손을 잡는 경우는 한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마교의 후예로 본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마교는 정사 공동의 적이니까요.”
*   *   *
두 여인의 대화속 주인공인 남천악은 여호치 일행이 지나왔던 동굴을 통과하여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들 또한 동굴에서 숱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래서일까. 여호치 일행보다 더 험한 몰골이다.
“그동안 무인들이 통과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마혼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지금껏 수월하게 왔던 이유는 모두 하오문 일행 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장독지대에서 벌써 죽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하여 방금 지나쳐온 동굴이라니. 정사의 후기지수 중
최고 실력이라는 세 사람이 전력을 다해 간신히 빠져 나왔다.
동굴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그곳에서 뼈를 묻었으리라.
“하지만 저희들은 통과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거고요.”
유마혼과는 달리 남천악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무려 100년간, 어느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던 길이다. 자신들만의
힘으로 통과한다면 그 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무림 고수와 비무를 하지 않아도 절로 명성이 얻어진다. 지난 100년간 이곳에 왔던 무인들 중 약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부가 각 문파에서 한가락한다는 자들이었으나,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자신뿐만 아니라 사문인 화산파에도
엄청난 영광이 될 터였다.
다만 한 놈만 제외하면.
“놈!”
닦아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길을 쳐다보던 남천악이 미약한 살기를 흘렸다. 하오밀문의 속가제자라 하였다. 무인도 아닌,
시전에서 사기도박 하는 천박한 놈에게 우롱을 당했다.
냉소소를 빼앗긴 유마혼이야 같은 입장이었기에 그나마 덜했지만 주려화 앞에서 당한 모욕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기다려라 마교 놈! 이 남천악을 우습게 본 모양인데. 반드시 껍질을 벗겨주마.’
“남소협, 그들과 얼마나 떨어졌을까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하루거리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잘라낸 풀들이 아직 그대로 있잖습니까.”
이곳은 남만이라는 특성 때문에 우기가 시작되면 하루가 다르게 풀이 자라난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풀들은 잘라낸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결국 그들과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소저. 길만 따라가면 성모봉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 자들은 마교가 분명합니다. 마교는 때려
잡아야할 적이고요. 마교도를 잡는데는 정사의 구분이 없습니다.”
당가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남천악이 유마혼과 손을 잡은 결정적인 이유는 여호치 일행을 마교도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마교도가 아니라면 결코 유마혼과 같이 동행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무공도 만만치 않습니다.”
“해서 뒤따르는 것 아닙니까. 놈들이 흩어질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지요.”
이미 자신들의 무공으로는 앞서가는 네 사람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금껏 일행을 이끌었던 여호치는 자신들보다
훨씬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고, 하오밀문의 당주인 화소미 또한 낮다고 할 수 없었다. 더하여 당가려와 장대손이란 사람,
그들의 무공도 만만치 않았다.
까닭에 3명밖에 없는 자신들로선 그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먼저 운기행공을 하고 이동합시다.”
주변을 둘러본 남천악이 무성한 나무 아래로 일행을 이끌었다. 동굴을 통과하면서 떨어진 기력을 보충하고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언제 어느 순간에 만나게 될지 모르는 적이기에.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6)-식인혈목(2)
붉은 숲.
성인 두 세 명을 합쳐놓은 듯한 거목들이 듬성듬성 뿌리내린 숲은 지금껏 지나왔던 곳과는 확연히 달랐다.
가장 먼저 일행의 시선을 붙든 광경은 붉은 맨살을 드러낸 바닥이었다. 키 작은 초목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넝쿨처럼 길게 늘어진 가지에는 나뭇잎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붉은 빛깔의 나무들은 생기를 간직한 채였다.
“뭐야 이거?”
야혼의 입에서 낮은 투덜거림이 흘렀다. 묘한 느낌이었다. 워낙 겁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터라 두려움은 없었지만 왠지
음습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아미타불! 지옥의 문턱이네 연작시주. 여자를 많이 울린 자네는 조심해야 할걸세.”
야혼을 향해 불호를 외는 척 했지만 실상 추기영은 숲이 주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태웅 또한 거구에
걸맞지 않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히려 담담한 눈으로 숲을 바라보는 이들은 여인들이었다. 각자의 무공에 대한 자신감인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침착한
얼굴로 붉은 숲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곳은 어디죠?”
고개를 돌린 냉소소가 여호치를 향해 물었다. 지금껏 그래왔듯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여호치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혈림(血林)이라는 것밖에…….”
그녀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하오밀문에서 만들어준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기괴한 기운이 흐르는 곳, 어떤 위험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가야할 것 아냐?”
곤혹스러운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여호치를 향해 야혼이 다가서며 말했다.
“야! 무슨 위험이 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일단 확인을 해봐야지.”
“얘는, 또 어린애 같은 소리한다. 자보기 전에 처녀인지 시궁창인지 어떻게 알아? 일단 가자!”
당가려를 향해 고함을 지른 야혼이 기세등등 숲 속으로 앞서 걸었다.
얼마쯤 걸어 들어갔을까. 문득 서늘함이 끼쳐왔다.
으레 비온 뒤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아니었다. 숲 속이 아니라 얼음 동굴 안에 있는 듯하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을 털어내려는 듯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더욱 걸음을 서둘렀다.
야혼의 뒤를 따라 나머지 일행도 조심스레 숲 안으로 들어섰다. 야혼의 말대로 일단 겪어봐야 할 터였다.
스스슥!
쏴아!
“니미씨부럴타불!”
잔뜩 기분이 상했을 때 습관적으로 내뱉는 추기영의 불호가 흘러나왔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어디선가 휘이익! 을씨년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더하여 낙엽 쓸리는 듯한 으스스한 소리라니.  한껏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산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마치 태고의 전설을 간직한 숲처럼 적요하기만 했다.
“야 괜히 뻥친 거야 아무것도 없잖아!”
혈림 안으로 들어온 지 2각이 지났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야혼이 일행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순간.
쉬이익!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야혼을 덮쳤다.
“크억!”
“허억!”
일행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순식간에 몰아친 넝쿨들이 야혼을 휘감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타핫!”
기겁한 당가려가 혈린만독편을 뽑아 야혼을 끌어올리는 나뭇가지를 향해 휘둘렀다.
취익!
“저럴 수가……. 그럼 이 나무들이 전부 식인혈목(食人血木)?”
혈린만독편에 의해 잘린 나뭇가지에서 붉은 수액이 쏟아지자 장대손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식인혈목(食人血木). 오직 전설로만 회자되는 나무였다. 몸체를 키우는 양분을 대지에서 얻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체로부터
얻는다는 괴물. 넝쿨처럼 늘어진 무수한 가지가 전부 살아있다고 하였다.
찌이익!
“이런 썅놈의 나무들이…….”
혈린만독편에 잘린 나뭇가지를 쳐다보던 야혼이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었다. 여전히 살아 있었다. 혈린만독편의 독기에 의해 녹아
사라질 때까지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이었다. 더하여 몸 이곳저곳에 나 있는 붉은 혈흔이라니.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마른
장작처럼 변했을 터였다.
쉬이익! 슈아악!
“혈운조양(血雲朝陽)!”
“한옥백마수(寒玉白魔手)!”
당가려와 냉소소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흘러나왔다. 순간 붉은 혈운과 백색의 한기가 사방을 향해 몰아쳤다.
“서둘러요!”
사태의 심각함을 절감한 여호치가 일행을 향해 외쳤다. 숲이 온통 식인혈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무 사이의 간격은 거의
1장 정도로 넓었지만 넝쿨처럼 뒤엉켜있는 가지들로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더하여 어찌된 영문인지 모든 나뭇가지들이 사방으로
요동치며 전방을 막아선 채였다.
쉬이익! 슈욱!
“취선타구(醉仙打狗)!”
“월중선녀(月中僊女)!”
“미륵현세(彌勒現世)!”
당가려와 냉소소의 뒤를 이어 장대손, 화소미 그리고 여호치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터졌다.
사방으로 자욱한 혈향과 함께 핏빛 무지개가 확 퍼졌다. 그러나, 일행이 잘라낸 것은 나뭇가지일 뿐 나무 본체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니 잠시 잠깐 막아내는 것 이상의 효과는 없었다.
“괴물들이구먼!”
정신없이 내달리던 야혼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갈수록 나뭇가지들이 기승을 부렸다. 잘려나간 다른 나뭇가지에 다시 들러붙어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계집년들이 강하니까 편하긴 하다.”
자신들을 포위한 듯 감싼 채 사방을 향해 무공을 뿌리는 여인들을 쳐다보던 야혼이 빙긋 미소지었다.
그의 말대로 4인의 무공은 강했다. 개방의 장로인 장대손이 가장 약해 보였다.
“야! 골통 너도 힘 좀 써라! 남자새끼가 부끄럽지도 않냐?”
당가려의 입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흘러나왔다. 딴엔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한가한 얼굴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야혼이 얄밉기까지
했다.
“말할 힘있으면 하나라도 더 잘라라.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서냐? 오른쪽! 또 온다!”
“나쁜 새끼. 혈운사파(血雲死波)!”
야혼을 향해 눈을 흘긴 당가려가 오른쪽을 향해 혈린만독편을 휘둘렀다. 혈운사파, 혈린만독편으로 펼치는 두 번째 초식이었다.
순간 그녀의 편(鞭)에서 나온 붉은 기운이 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밀려갔다.
초식명대로 마치 물결치듯 나아가는 혈운은 죽음의 파도였다. 또한 그 가공함이라니. 붉은 기운에 휩싸인 나뭇가지들이 삽시간에
녹아 내렸다.
과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식인혈목 한 그루가 산산이 부서지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으이그 더러!”
그 모습을 쳐다보던 야혼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당가려를 쳐다보았다. 식인혈목은 혈린만독편의 독에 거의 녹아버렸지만 허공에
날리는 파편은 전부 붉은 피였다.
하늘에서 붉은 비가 내리는 듯했다.
“야 당가려 똑바로 해라. 소소가 전부 피를 뒤집어썼지 않냐, 이 와중에도 질투 하냐?”
“이 자식아! 그게 어디 내 잘못이냐? 앞으로 가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당가려의 입에서 또다시 욕설이 터졌다. 그러잖아도 미안해하고 있는참에 야혼이 염장질을 한 것이다.
“한옥빙마수(寒玉氷魔手)!”
그러나 온몸에 피를 뒤집어썼다 하여 인상을 찌푸릴 여유가 없었다. 일행이 쳐내는 나뭇가지보다 달려드는 놈들이 더 많았다.
이제는 거의 암기수준이었다. 냉소소의 입에서 터진 뾰족한 외침과 함께 백색의 한기가 전방을 뒤덮었다.
툭! 투투둑!
한령신공 또한 혈린만독편만큼 강했다. 그녀의 장이 스치는 곳마다 식인혈목이 얼어붙었다.
“어어? 내가 왜 이러지?”
갑자기 몸이 무거워짐을 느낀 냉소소가 당혹스런 얼굴로 비틀거렸다. 결코 내상을 당한 증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떼기가 힘들었다. 아니 내상을 당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식인혈목의 공격이 거세기는 했지만 무기력하게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피곤함이 느껴졌을 뿐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몸 아니었던가.
“그럼 저 피가?”
“야! 냉소소 왜 그래?”
조금씩 뒤쳐지는 냉소소를 발견한 야혼이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흐미 좋은거! 이년은 냄새도 죽이네.’
냉소소의 체취를 음미하듯 깊게 숨을 들이킨 야혼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야! 꼴통 무슨 일이냐?”
“몰라! 이년……. 아니 냉소소가 갑자기 움직이질 못해.”
“뭐야? 혹시 네가 무슨 짓 한 것 아냐?”
“저 수액이 문제인 것 같아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녀의 말대로 나무에서 흘러나온 붉은 수액이 문제였다. 특별한 독은 아니었지만 신경을 마비시키는 마취성분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고정된 상태에서 살아있는 생물을 잡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태웅 뭐해 새끼야! 짐 안 받고.”
“짐은 네가 들고 냉소저를 일로 넘겨라 임마.”
“이크! 차앗!”
두 사람을 향해 무섭게 밀려오는 나뭇가지를 향해 수중에 박도를 빛살처럼 휘둘렀다. 허공 가득 칼 그림자가 생기며 10여
개의 나뭇가지들이 잘려나갔다.
“한옥백마수(寒玉白魔手)!”
야혼이 잘라버린 나뭇가지를 향해 냉소소의 일갈이 터졌다.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운신이 가능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태웅 빨리 짐 안 받으면 아래쪽에 있는 대가리 잘라버린다. 개자식!”
“곰 시주 빨리 가서 짐 받아라. 넘겨달랄걸 달래야지. 연작시주한테 여자를 넘겨달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여기서
죽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짐이나 쳐 받아. 그러다 우리까지 죽으면 니가 책임 질거냐, 이 개불알타불아?”
재빨리 야혼에게 다가온 추기영이 짐을 받아 태웅에게 던졌다.
“연작시주 너무 무거운 것 같은데 불경은 버리는 게 어떤가!”
“꿈 깨라 새끼야. 정 버리고 싶으면 당가려 저년 옷을 버려. 내 책은 죽어도 안돼. 맞다, 옷!”
야혼이 자신의 머리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난관을 해결할 비책이 떠올랐다는 듯이.
“내 옷 버리려면 버려.”
“아니 네 옷이 문제가 아니고 수어피를 입으면 될 것 아냐?”
“그래 맞다. 수어피는 피가 스며들지 못하니까…….”
“야, 빨리 수어피 꺼내!”
‘이거 또 횡재했군.’
야혼의 눈이 묘한 기대감으로 빛났다. 수어피는 옷 위로 절대 입지 못한다. 더구나 이곳은 몸을 피하고 입을 장소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 아닌가. 결국 인간 장벽을 치고 그 안에서 수어피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빨리 안 입고 뭐해? 큰 색시 네가 제일 나이가 많으니까 알아서 해야 할 것 아냐. 꼭 시켜야 하냐?”
머뭇거리는 여인들을 향해 야혼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그녀들 또한 수어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무림인이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지만 남정네가 넷이나 있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으라니, 내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 골통 그런데 네 놈의 목소리가 왜 바르르 떨리냐?”
“그럴 리가 있냐? 내 목소리가 어때서. 저 두 놈은 믿을 수 없으니까 점혈하는 게 좋을 거야.”
“니미지랄타불! 연작 이 개자식아! 우리 중에서 가장 문제가 너지 어찌 우리를 들먹이냐? 점혈당했을 때 저 나뭇가지라도
공격해오면 네가 책임질래? 책임질 거냐고 이 개새끼야.”
점혈을 해 두라는 야혼의 말에 추기영과 태웅이 게거품을 물었다. 마치 옆에 있었다면 목이라도 조를 듯 야혼을 노려보며
살기를 흘려댔다. 절호의 기회, 각각의 무공보다 더 절정의 미모를 가진 여인들의 알몸을 견식할 기회가 생겼는데 야혼이
방해를 한 것이었다.
까놓고 보자는 것도 아니다. 보일 듯 말듯 슬쩍 훔쳐보아야 최고의 흥분을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그 기회를 야혼이
날려버렸다.
“병신새끼. 나는 저년들, 아니 여기 있는 여자들 알몸을 봐도 상관없단 말이다, 돌대가리야.”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꼴통!”
당가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끔벅였다.
“그 머리 가지고 어떻게 무공을 익혔는지 모르겠다. 내가 말하는 것 못 들었냐? 큰 색시 작은 색시, 그리고 네 몸은 내
거잖아. 또 냉소소는 몸이 말을 안 들으니까 내가 입혀 줘야하고.”
“에라 이 개자식아.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하겠다.”
어이없다는 듯 야혼을 쳐다보던 당가려가 지풍을 날려 야혼의 마혈을 눌러버렸다. 그와 동시에 태웅과 추기영도 점혈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해버렸다.
“냉소소! 나 등 좀 긁어 주라. 가려워 죽겠다.”
“혈도는 절대 못 풀어준다. 가만히 있어라.”
“정말 등이 가려워서 그렇다니까? 제발 좀 긁어 줘, 옷 속으로 손을 넣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하여간 너란 녀석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냉소소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선 야혼의 등뒤로 팔을 내뻗었다.
“응! 거기 됐어 바로 그거야. 어! 시원하다.”
그러나, 건성으로 대꾸한 야혼은 홀린 듯 냉소소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저만치에서 옷을 갈아입는 모습들이 냉소소의 큰
눈망울에 비쳐들었다.
‘흐미! 저년 진짜 물건이다. 야 이왕 갈아입으려면 위에 있는 천도 날려버려라.’
이미 화소미는 옷을 갈아입었고, 지금은 당가려가 수어피를 입는 중이었다. 비록 늑대들에게 혈도를 점해, 조치를 취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지 연신 주위를 흘끔거리며 수어피를 걸쳤다.
“너, 뭐 하는 거냐?”
“뭐하긴, 내가 뭘 할 수나 있는 입장이냐? 시원해서 그러지. 야! 씨발탱이 어디로 눈 돌리는 거야? 일이나 해라 응!”
“저런 개자식!”
장대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나뭇가지의 공격은 오히려 더 그악스러워지는데 방어하는 사람은 세 사람밖에 없어 죽을
맛이었다.
모든 내공을 전부 짜내어 식인혈목을 향해 장을 퍼붓고 있으나 잠시 지연시킬 뿐이었다. 갑자기 다가드는 나뭇가지를 피하기
위해 몸을 돌린 것을 가지고 당가려의 몸을 훔쳐본다고 하고 있으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취선타복(醉仙打腹)!”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7)-식인혈목(3)
잔뜩 혈압이 오른 장대손이 취선몽환신공(醉仙夢幻神功)의 마지막 초식인 취선타복을 펼쳤다. 순간 사방 가득 백색 강기가
요동치며 나뭇가지들을 잘라버렸다. 전력을 다한 그의 무공은 가공했다. 지금껏 가장 약하다고 여겼던 그의 모습이 전부는
아니었다.
“냉소소! 저 시발탱이가 조카의 알몸을 보더니 흥분했나 보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엄청난 무공이 나오는 것 좀 봐. 저
자식 완전 변태다 변태. 눈 좀 크게 떠, 잘 안보이잖아!”
“그럼 개방의 장로인데 우리보다 약하리라 생각했냐? 너?”
장대손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던 냉소소가 큰 눈을 한껏 치떴다. 그제야 야혼의 의도를 눈치챘다. 자신의 눈동자를 통해
여자들의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무리 여자를 밝힌다지만 설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까지 그러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걱정 마라! 네 몸은 보고 싶어도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도 수어피 주겠다 했던 약속은 지켰다.”
‘정작 보고 싶은 건 너였다. 나머지는 훔쳐보기도 또 만져본 적도 자보기까지 했는데 너만은 쩝……. 기회는 또 있겠지
뭐.’
야혼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까지는 그녀의 눈이 동경이 되었었는데 지금부터는 방법이 없었다.
여호치가 냉소소를 데려가 수어피를 갈아 입히자 일행의 행보는 조금 편해졌다. 무공을 익힌 사람은 전부 수어피를 입어서
아까보다 운신이 훨씬 편해졌기 때문이었다.
두 시진. 혈림에 들어와 나무들과 싸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혈림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다섯 사람은 점점 지쳐갔다.
“얼마 안 남았다 힘내라. 이제 반 시진 정도만 가면 될 것 같아!”
“야! 개자식아 반 시진이라 그런 게 언젠데 아직도 반 시진이냐?”
당가려가 단내를 풍기며 따지듯 물었다. 반 시진이란 말을 들은 게 벌써 3번째였다.
“야! 저년들 무공 익힌 게 맞아? 벌써 지쳤잖아.”
야혼이 추기영을 쳐다보며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무공을 익힌 값을 못한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야혼의 기준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지만 벌써 두 시진 째인데 몸이 견딜 리가 없었다.
“아미타불! 이제부터는 우리가 불알에 땀나게 일해야지.”
“씨팔! 몸 축나면 안 되는데.”
“너는 임마, 튼실하기나 하지 나는 이게 뭐냐? 순 뼈밖에 없는데.”
“니미지랄타불! 산이 깊어 정력제라도 좀 있을 줄 알았더니 순 피 빨아먹는 것들밖에 없으니.”
“골통 빨리 교대 안 해줘?”
이 와중에도 서로 맞장구를 치며 몸 걱정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을 향해 당가려가 빽 고함을 질렀다. 정말 개자식들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덩치나 작은놈들이면, 나이나 어리면 말도 안 한다.
기껏 한다는 짓이 여자들의 무공에 기대 가는 놈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전히 정력타령이니.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년 되게 말많네, 조금만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해줄까 꼭 보채요 보채.”
자신의 옷을 쫘악 찢어낸 야혼이 오른손에 박도를 묶었다. 수어피를 입지 않았기에 몸이 마비될 일은 분명한 일이고 도만은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손도 묶어.”
“두  손을 다 쓰려고?”
“그럼 남는 손 어디에 쓰게. 힘있을 때 열심히 써먹어야지. 자 가자!”
양손에 박도를 묶은 야혼이 냉소소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냉소소! 좀 비켜줄래?”
“휴우, 빨리도 온다.”
지친 표정의 냉소소가 야혼을 쳐다보았다. 무려 두 시진 동안 전력을 다해 내공을 뽑아내다 보니 거의 탈진 지경이었다.
“역시 열심히 일한 모습은 보기가 좋아.”
냉소소를 향해 싱긋 미소를 던진 야혼이 전방을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자리를 바꿨을 뿐인데 수십 개의 나뭇가지들이 무서운
속도로 밀려들었다. 마치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창을 보는 듯했다.
쉬이익! 슈욱!
“자 골라봐! 이놈을 찾는 거요. 한밤중에 마누라 그곳 찾는 것 보다 훨씬 쉽습니다. 봉사도 찾을 수 있습니다. 자 골라,
골라!”
서대시전에서 호객할 때 읊던 요란한 음담패설과 함께 야혼의 양손에서 공공십팔수(空空十八手)가 터졌다.
사방으로 수십 개의 칼 그림자가 생겨남과 동시에 전면에서 밀려오던 나뭇가지들이 우수수 잘려나갔다.
“흰색도 아니고 청빈루 월향(月香)이의 그곳같이 새카만 이놈을 찾아내면 걸었던 돈의 세 배를 드립니다.”
그동안 당가려가 먹였던 독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는지 그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거의 힘을 쓰지 않는 듯 가볍게 휘두르는
박도에 제법 매서운 기운이 맺혀들었다.
“자! 골라 골라. 이번에는 난향이 거시기와 같은 것을 고르면 돼! 여기 있는 새하얀 놈을 골라봐! 그럼 세 배를 벌 수
있어.”
또다시 한바탕 음담을 뱉어낸 야혼의 신형이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마치 식인혈목의 피에 마비된 듯한 움직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많이 달랐다. 그가 시발탱이라 부르는 장대손의 취선보를 모방하여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두 팔은 멈추지
않았다.
“난향이의 거시기는 털이…….”
“야, 이 니미랄타불아!  주둥아리 안 닥치냐?”
야혼의 말을 막은 사람은 뜻밖에도 추기영과 태웅이었다. 얼마 전 월향과 난향의 이름을 가지고 장사하면 철탁을 먹여준다
했었는데, 그 때의 말을 상기시켜 주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지금 장사하는 것으로 보이냐 개자식들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여기도 여자들은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녀들이냐 나쁜 새끼야. 한번만 더 월향이와 난향이 이름이 나오면 아랫도리를 작살내
버릴 줄 알아.”
“이크! 야, 새끼야! 그년들은 내가 이러는 것 모르잖아. 여기서 저년들, 아니 저것들 가지고 장사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그건 니 사정이고 새끼야. 하여간 알아서 해!”
열심히 씨부렁대면서도 세 사람의 손은 빛살처럼 움직였다. 그런데, 그들의 움직임을 보면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가 같은
초식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야혼의 손놀림이 둘에 비해 확연하게 나아 보였지만, 분명 추기영과 태웅도 공공십팔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골통! 일각 만 버텨라! 그럼 숲을 나갈 수 있다.”
“야 이년아, 그건 벌써 세 번째잖아.”
“그 자식 비틀거리면서도 잘 버텨내는데?”
“비틀거리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저건 잠개 선배님의 무공 같은데…….”
당가려와는 다른 생각이라는 듯이 냉소소가 잠개를 쳐다보았다.
“알고 있었나?”
장대손이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정파 인물이었던 남천악이나 주려화조차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냉소소가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명석한 머리를 가졌다는 소문이 틀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판이 박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간단하지요. 개방의 인물인데 모르는 사람이다. 그럼 결론은 뻔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는가?”
“백부 저 자식에게 취선보 가르쳐 주셨어요?”
“미쳤냐 내가 저 개차반에게 무공을 가르치게?”
“그럼 저건 뭐예요?”
당가려가 가리키는 그 순간 야혼의 몸은 연신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나뭇가지들을 쳐내고 있었다.
“허허! 기절하겠군.”
비단 당가려뿐만 아니었다. 취선보의 주인인 장대손조차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서대시전에서부터 조금씩 따라했지만 지금처럼은
아니었다.
“지금 익히고 있는 거예요.”
“설마!”
“맞아요. 취선보를 익히기에는 지금 같은 경우가 최적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아닌가요 잠개 선배님?”
“맞아, 지금처럼 정신없이 찔러오는 저런 상황에서 익혀야만 완성되는 게 취선보야.”
냉소소의 물음에 장대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취선보를 익히는 가장 중요한 요체는 무(無) 규칙성이다. 어느 곳에서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적의 공격을 피하는 최상의 보법인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하게 익힐 순 없잖아요. 어차피 내기의 방법을 모르는데.”
“그건 맞다. 저건 겉모습을 모방하는 것에 불과해. 결코 완성할 수 없지.”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신공이 아닌 보법처럼 움직임을 주로 하는 무공은 저런 식으로 익히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지요.’
냉소소가 가볍게 고개를 저였다. 신공이야 몸 속에 내공을 뽑아내서 사용하는 것이기에 운기의 방법을 모르면 완전하게 익힐 수
없지만, 보법은 아닌 것이다. 보법이란 자체가 상대를 피하기 위해 발전된 무공이기에 실전보다 더 확실한 연공방법은 없다.
어쩌면 원래 취선보보다 더 강한 보법이 탄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근데 꼴통 녀석, 오래 버티네? 지금쯤 움직이기도 힘들 텐데…….”
당가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몸이 식인혈목의 수액으로 붉게 젖은 상태에서도 끈질기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입이 굳었다는 소린데 여전히 몸은 움직이고 있는 게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야혼 다왔다, 힘내라.”
냉소소가 돌연 쾌활해진 목소리로 야혼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정말 징그러운 곳이다.”
밖으로 나온 일행이 혈림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혈림의 끝이 보였다. 붉은 땅이 사라지고 점점 파릇한 풀들이 시야 앞에 펼쳐졌다.
그 많은 고수들이 십만대산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 또한 수어피가 없었더라면 결코 통과하지 못했을 터였다.
휙! 휙! 휙휙!
일행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주저앉은 동안에도 여전히 두 자루의 박도를 휘두르는 인물,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야혼이었다.
“아이고! 저 자식은 끝가지 말썽이네. 야 골통, 정신 차려!”
그러나 당가려의 부름도 소용없었다. 저벅저벅 걸어나가며 박도를 휘둘러댈 뿐이었다.
“저 놈은 도대체…….”
더 이상 말을 하지도, 웃을 수도 없었다. 야혼의 손에서 떨어지는 붉은 액체는 수액만이 아니었다. 피도 함께 섞여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녀석이었고, 마치 유랑이라도 떠난 듯 하던 그였는데.
퍽!
보다못한 여호치가 다가가 야혼의 뒷머리를 후려쳤다.
“하여간 네 놈은 자제를 몰라. 자제하는 것부터 좀 배워! 됐으니 저쪽에 가서 좀 씻어.”
일행을 향해 싱긋 미소를 보낸 여호치가 야혼을 안고 개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얼굴이 별로 편치 않은 듯했다.
“어? 내가 또 맛이 갔나보네? 야 뭘 그렇게 넋을 잃고 쳐다보냐. 한번씩 줄 거 아니면 가서 일봐.”
일행이 전부 주시하는 가운데 정신을 차린 야혼이 처음으로 흘린 말이었다.
“하여간 꼴통 너는…….”
어이없는 야혼의 말에 당가려가 인상을 쓰며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야혼을 지켜볼 필요가 없었다. 입에서 음담패설이
흘러나오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짐은 주고 가야지!”
“네 손을 봐라. 그래가지고 잘도 들겠다.”
“미친년! 별걱정 다하네. 너 아니라도 걱정해줄 사람 많으니까 짐이나 줘! 할 줄 아는 유일한 것인데 그거라도 잘해야지.
그리고 이따위 생채기는 침만 발라주면 돼.”
“임마, 이곳은 남만이야. 잘못해서 덧나면 썩는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잘라내도 괜찮냐?”
“걱정 마라, 너와 잘 때까지는 두 손 고이 보존할 테니까.”
“에라! 이 개자식아. 그래 손을 자르던 말던 좋을 대로 해라.”
야혼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른 당가려가 들고 있던 짐을 확 팽개쳤다. 도와주고 싶다가도 진저리가 쳐지는 놈이 야혼이었다.
타인과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녀석. 때문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태웅과 추기영이었다.
“저 새끼들은 나와 같은 놈들이라서 그래. 신기한 듯 쳐다보지 마라.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니까.”
“연장아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즐거울 따름이다. 드디어 미인들이 이 태웅의 진가를 알아준다는 것 아니겠냐.”
“아미타불! 그걸 어찌 곰시주 때문이라 하는가. 당소저가 남자보는 눈을 뜬 거지.”
“헛소리 그만하고 가자! 이 괴물들아.”
결국 보다못한 여호치가 소리를 질렀다. 도무지 일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 세 놈이 전부 같았다. 세 놈을 보고 있으면 방금
전까지 사선을 뚫고 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쩔 땐 정말 놀러온 것 같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으니.
각자의 짐을 둘러맨 일행이 다시 길을 만들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야혼!”
“왜?”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걸어가는 야혼을 냉소소가 불렀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무림인도 아니고,
그렇다해서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도 않았다.
십만대산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야혼을 비롯한 세 사람이었다.
“아니 네가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해서…….”
“너도 그게 궁금하냐?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놀러왔다. 저 두 놈은 팔려왔고. 나머지는 저년에게 물어봐라. 자세하게 가르쳐
줄 거다.”
“놀러와? 십만대산엘……?”
야혼의 황당한 말에 냉소소의 얼굴이 뜨악하게 변했다. 죽음의 관문이 첩첩인 이곳에 놀러오다니, 기절할 노릇이었다.
“빨리 가자. 당가려 저년 질투할지 모른다. 내가 딴 년하고 놀아났다고.”
“너……?”
말문이 막혔다. 당가려는 저년이고 자신은 딴 년이었다. 더하여 놀아나다니. 누구하나 저에게 관심 두는 사람이 없는데,
놀러왔다는 말보다 더 기가 막혔다.
“저렇게 막나가다가 어느 순간 정중하게 나올 때가 있어요. 그때만 조심하면 되요. 냉소저.”
멍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는 냉소소에게 화소미가 다가오며 실긋, 미소지었다.
“네?”
“저 녀석의 상투적인 수법이에요. 여자를 꼬실 때 쓰는 방법.”
“훗!”
화소미의 말뜻을 알아차린 냉소소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투명한 미소였다. 얼굴 표정이 거의 없어 무면미봉(無面美鳳)으로
불리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저 녀석 또 한 건 한 거 아냐?’
황홀한 듯한 냉소소의 얼굴을 주시하던 화소미가 내심 중얼거렸다. 요즘 들어 냉소소의 얼굴에 부쩍 생기가 넘치는 듯했다.
과거에는 본적이 없어 그녀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무면미봉이란 별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설마! 무면미봉이라는 이름이 있지 어찌 저런 놈을…….’
이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언제나 정중한 무림인들만 상대하다가 뒷골목 건달 같은 야혼일행을 보자 호기심이 동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자들에 대한 호기심. 마치 신기한 생물을 처음 보았을 때 갖는 그런 기분 말이다.
자신을 쳐다보는 두 쌍의 눈을 알지 못한 야혼은 여전히 당가려의 엉덩이만 쳐다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8)- 광혼마림(狂魂魔林)(1)
혈림을 떠난 지 3일 째,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일행의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일행의 앞길을 방해했던 우거진 수림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것이었다. 지금껏 하늘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눈 안으로 파고들었다.
살랑살랑 허리께를 스치는 초목들.
“우리가 높은 곳에 있어서 그래.”
연신 궁금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는 야혼을 향해 여호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랬다. 집 근방이라든지, 흔히 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산에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지금처럼 가파른 산을 오르다 보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높이에 따라 제각각 다른 초목군이 밀집되어 자생한다.
지면과 가까운 산등성은 우후죽순으로 자라나는 수풀들이 대다수이지만, 거의 7백 장에서 8백 장 높이에서부터는 키 큰
나무들이 사라지고 대부분이 땅에 면한 잡풀들뿐이다. 지금 일행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고산 지대가 시작되는
기점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여호치의 표정만은 밝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들 때문이었다. 갈수록 높아지는 5개
봉우리 가득 검은 기운이 들어차 있었다. 마지막 목적지였다.
“여기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충분히 쉬어 두세요. 성모봉(聖母峰)에 도착하기 전까지 쉴 틈이 없을 지도 몰라요.”
“그럼?”
당가려를 비롯한 3인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충분히 쉬라는 여호치의 말은 드디어 고대하던 성모봉에 도착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성모봉(聖母峰), 지난 100년간을 정사에서 찾고자 했던 보고(寶庫). 누구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곳을 자신들이 찾은
것이다.
“너무 표내지 말고 운기나 해라. 호치 저년 얼굴 안 보이냐?”
“위험한가요?”
잔뜩 굳어있는 여호치의 얼굴에, 냉소소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껏 숱한 고생을 했지만 여호치의 얼굴이 지금처럼 굳어있던
적은 없었다.
“혈림처럼 이곳 또한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해요. 더구나 봉우리가 5개나 되는데.”
여호치가 가장 우려하는 점이었다. 검은 기운이 서려있는 5개의 봉우리 중 가장 마지막 봉우리가 성모봉이란 사실은 알지만
그곳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광혼마림(狂魂魔林)이라 명명되는 다섯 봉우리는 5일 이상이나 걸리는 먼 길이었다.
“야혼 나 좀 보자.”
운기행공(運氣行功)에 임하는 일행을 확인한 여호치가 야혼을 불렀다.
“심각한 일인 모양이다.”
야혼이 어설픈 미소를 머금고 입을 뗐다. 그러자 태웅과 추기영이 야혼의 뒤를 따라왔다.
“이제 이별을 논할 시기가 온 건가?”
“이곳에서는 아니다. 마지막 봉우리에 도착했을 때 헤어져야 한다.”
“그럼 지도는 누가 가져다 줄 건가.”
“그것까지 알고 있었냐?”
“알고 자시고 할게 뭐 있냐? 이제 하오문에 들어왔던 목적달성도 했으니 떠나는 거야 당연한 거겠지. 신경 쓰지 마라.
그동안 같이 살아온 정이 있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내가 저것들을 데리고 가야할 곳만 말해주면 된다.”
야혼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성모봉을 끝으로 더 이상 볼일이 없을 터였다. 여호치와 화소미, 추기영과 태웅은
자신들의 길을 찾아 떠날 것이다.
“너희 둘……. 후회 없는 선택이길 바란다.”
“걱정 마라, 임마. 최선의 선택이다 지금까지는……. 무림인이 될 거냐?”
태웅이 나직한 목소리로 야혼에게 물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야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알고 있던
야혼은 껍질에 불과할 뿐이었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고 그의 능력 또한 파악이 불가능했다.
“왜, 내가 무림인이 되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냐?”
“아니 안 된다기보다는 네 녀석이 적으로 나타난다면 이길 자신이 없거든.”
“너 같은 놈을 보고 뭐라 부르는지 아냐? 칠푼이라 부른다. 지금 처지를 봐라, 무림인이 되겠는가. 나는 말이다 한가지
꿈밖에 없다. 그 꿈만 이루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뭔데?”
갑작스런 야혼의 꿈 이야기에 화들짝 놀란 시선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야혼의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야혼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하루 세끼 밥 굶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 해결되면 전혀 불평을 하지 않았던 놈이 바로
그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가 처음으로 꿈을 들먹였다. 그것도 심각한 어조로.
“씨팔, 뭐냐면. ……마르지 않는 정력. 써도 써도 줄지 않는 정력 말이다.”
퍽! 퍼억!
“에라 이 개자식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순식간에 야혼의 머리통으로 일행의 주먹이 떨어졌다.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하기에 무슨 대단한 말이라도 나오려나, 잔뜩
기대했는데  여전히 그 소리였다.
“야! 개자식들아 어디다 손찌검이야. 너희들은 뭐 얼마나 대단한 인생을 산다고 지랄이냐.”
“그만하고 가자. 이런 이별을 준비한 내가 미친년이다.”
여호치가 손을 털며 일어섰다. 공연한 감상에 젖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봉사괴라 불리며 같이 생활을 했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건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떠나면 그걸로 그만인 사이였다.
남들과 전혀 다름없는 사이. 야혼의 말이 바로 그런 의미였다.
“나는 죽을 때까지 개봉에 살 거다. 그러니까 세상 하직하고 싶다면 찾아와라. 밥 한끼 정도는 사줄 수 있다.”
“거기에 나도 해당 되냐?”
“아니 호치 너는 안돼. 너는 밥 한끼 사줄 때마다 한번씩 줘야해.”
“영원히 가지 말아야겠구나.”
“맞아, 오지마. 오면 화낼지도 모르니까.”
“꼭 성공하란 소리로 받아들이마.”
“좋을 대로.”
여호치를 쳐다보던 야혼이 이내 몸을 돌렸다. 이별, 쓸데없는 짓이다. 길가다 만난 이들처럼 잠시 어울렸다 떠나면 그걸로
끝이다.
전혀 모르는 타인처럼 그렇게 살아가다 어느 하늘 아래서 다시 만난다면 그때 술 한잔이라도 같이 마실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야 한다.
키우-! 캬우!
첫 번째 검은 봉우리 입구에 도착한 일행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야생동물의 울음소리였다.
그런데 울음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에 잔뜩 억눌린 듯한 거북살스런, 영 듣기 싫은 소리였다.
“마기(魔氣)인가요?”
검은 운무를 쳐다보던 냉소소가 여호치를 향해 물었다. 기묘한 현상이었다. 수림 전체에 검은 안개가 뭉클거렸다. 더욱 놀라운
일은 검은 운무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풍이 불고 있음에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일행을 노려보는 듯했다.
“그래요. 저 검은 덩어리는 전부 마기(魔氣)입니다. 노출되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추소협이 필요한 이유가 그 때문이군요.”
“맞아요. 이곳을 통과하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신기라고까지 불릴 정도의 항마법기(降魔法器)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 명교(明敎)에도 신기가 있지 않았나요?”
“그랬다고 하더군요. 성화정(聖火鼎)이라 불리는 물건이었는데 100년 전에 사라졌어요.”
성화정(聖火鼎), 명교 최대 보물을 말한다. 표면에 불꽃무늬가 양각된 보통크기의 솥으로 그곳에서 절로 성수(聖水)가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 성수를 마시면 마(魔)에 현혹되지 않는다 이 말이군요.”
“그럼 보현보살이 가진 철탁이 그 신기를 대신할 수 있다는 거냐?”
여호치와 냉소소의 이야기를 듣던 야혼이 불쑥 끼어들었다. 좀 전에 냉소소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맞아. 육승이 가지고 있는 철탁이 무음항마혈탁(無音降魔血鐸)이라는 보물이다.”
“뭐? 저 볼품없는 철탁이 보물이라고?”
야혼이 놀랍다는 얼굴로 추기영의 손에 들린 철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야혼이 아무리 놀랐다한들 장대손이나 당가려에게
비할까.
여호치와 추기영을 번갈아 쳐다보는 두 사람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무음항마혈탁이라니. 어쩌면 정파무림 최고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 서대시전의 사기꾼 손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호치가 주저 없이 데려왔다고 한 말은 더 이상 무음(無音)이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어느 누구도 철탁을 울리지
못했다 하였는데.
“근데! 보현보살 너 그게 보물인지 알았냐?”
“이런 미친 시주 보았나? 이게 그런 보물인지 알았으면 진작에 팔아서 떵떵거리고 살았지 미쳤다고 들고다녔겠냐?”
상국사를 떠나올 때 유일하게 들고 나온 것이었다. 추기영이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얼굴로 철탁을 쳐다보았다.
“이상하네. 왜 이런 보물을 훔쳐갔는데도 사부님은 아무 말 안 했지?”
가만히 철탁을 매만지던 추기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물론 훔쳐오기는 했지만 귀신같은 사부가 모를 리 없었다. 분명 사부는
도망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국사를 도망 나올 때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사부를 보았던 것이었다.
“보물은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이지요.”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냉소소 니 생각에는 이 놈이 부처님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전혀 아니지. 밀교(密敎)라면 모를까.”
“거봐, 저놈은 나와 같은 놈이라고. 머리만 깎았지 절대 중이 될 수 없는 놈이야. 가장 좋아하는 건 개고기, 더구나
개고기보다 더 밝히는 건 오입이라고. 계집하고 들러붙는 것 말이다.”
“철탁이 울었다며.”
“그거야 그랬지. 날마다 저 놈의 철탁으로 밥을 먹고살았으니까.”
“그걸로 된 거지 뭘 바래.”
“이리 줘봐!”
빙긋 웃는 냉소소의 말에 야혼이 추기영의 손에서 철탁을 낚아챘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이런 썅!”
야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추기영이 두드릴 때는 별별 소리를 다 내던 철탁이었건만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기절할 노릇이었다. 손을 동여맨 천 밖으로 피가 배어 날만치 두드렸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에라, 씨팔!”
포기한다는 듯이 야혼이 무음항마혈탁을 내팽개쳤다.
그러자 어벙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던 당가려가 재빨리 철탁을 주워들었다. “나도!” 자신 또한 확인해보고 싶다는 듯이.
그러나 그녀 역시 야혼과 마찬가지였다.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철탁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보물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말이 나왔을까. 차례로 돌아가면서 철탁을 두드려보았으나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결국 천고의 보물이라는 무음항마혈탁은 나머지 사람들한테는 그냥 쇳덩어리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가자! 저놈도 필요한 곳이 있나보지 뭐.”
“아미타불! 연작시주 내가 중노릇하면 어울릴까?”
“어디 비구니만 득실거리는 곳에 가서 주지 노릇해라. 평생 인신공양이나 하면서 말이다.”
“거 좋은 생각이다. 앞으로 그런 절 있으면 한번 찾아봐야겠다.”
야혼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남긴 추기영이 먼저 길을 잡았다.
“손을 절대 놓으면 안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꽉 붙잡고 계셔야 합니다.”
검은 마기가 뭉클거리는 광혼마림에 들어서면서 여호치가 한 말이었다. 서로서로 어깨를 바짝 붙인 채로 손을 맞잡고 천천히
전진해 나갔다.
“여호치! 몸이 왜 이러냐? 거북해.”
거의 반 시진 정도 나아갔을 때 야혼이 볼멘소리를 했다. 몸 상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이 메슥거리는 느낌과 함께,
무엇인가가 몸을 쿡쿡 쑤셔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한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막연히 선 채로 땀을 흘리고 있는 기분과
흡사했다.
“마기 때문에 생긴 변화다. 마음을 편히 가져라. 다른 것에 집중해도 괜찮고.”
“다른 것?”
“야, 임마! 왜 손은 쓰다듬고 지랄이야. 죽고 싶어?”
“야소협, 손 좀 가만히 있어 주실래요?”
“에궁! 이년들이 갑자기 왜 이래 이거.”
다른 쪽에 관심을 쏟아 보라는 여호치의 말에 당가려와 냉소소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야혼이 흠칫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차갑다고 느껴졌다.
“이러다가 이거 마기(魔氣)보다 이년들에게 먼저 죽는 것 아냐?”
“너 지금 뭐라 했어?”
“우리보고 이년이라 했나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년이란 부르는 것은 정스런 표현이라고. 아주 마음에 드는 년, 아니 여자들에게만 쓰는
말이야.”
양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화들짝 놀란 야혼이 재빨리 둘러대었다. 점점 분위기가 살벌해지는 듯하였다.
“야 호치 어떻게 좀 해봐라! 이년, 아니 이 애들 이상해졌다. 날 죽이려 든다고.”
“너야 여자들에게 죽는 게 소원이었잖아 잘됐지 뭐.”
“야 이년아! 그거야 배 위에서 죽고 싶다했지 이렇게 찢겨죽고 싶다고 했냐?”
점점 강해지는 두 여인의 힘을 느낀 야혼이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근데 말이다. 무공도 나보다 강하고, 정신력도 더 강한 년, 애들인데 왜 이 모양이냐?”
실은 야혼이 궁금한 점이었다. 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란 걸 알지만 냉소소와 당가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월등한데도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고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심적인 부담 때문이다. 너나 태웅은 여자 한가지 빼고는 욕심부릴 게 없잖아.”
“그러니까 우린 저기 있는 시발탱이와 비슷한 상황이라 이거지? 일명 거지새끼.”
“개차반 이놈아 그건 거지새끼라 하는 게 아니고 무소유의 삶이라는 거다.”
냉소소나 당가려보다는 덜 했지만 장대손도 상황은 비슷했다. 치미는 짜증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말로만 무소유 외치지 말고 정말 그렇게 살아야지. 헤진 옷 입고, 굶기를 밥먹듯 한다고
그게 무소유냐? 마음이 비워져야 할 것 아냐, 마음을. 시발탱이 너 여기 왜 따라왔는데, 한 건 올리고 싶었던 것 아냐?”
야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버렸다지만 장대손이 버리지 못한 한가지는 바로 명예였다. 무림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과,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 그를 힘들게 하는 이유였다.
“야 새끼야, 우리와 이야기하는 중이었잖아.”
“우웃! 야 이년들아 정신 차렷!”
갑작스레 물밀 듯 밀려드는 내력에 기겁한 야혼이 고함을 빽 질렀다. 당가려의 공력은 그런 대로 견딜 만 했는데 냉소소의
손에서 흘러나온 한기는 참기 힘들었다.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에 머리가 어찔했다.
“조금만 더 참아라. 무음항마혈탁도 마음대로 두드리는 게 아니다.”
여호치가 가장 우려하는 점은 추기영에게는 무음항마혈탁을 두드릴 만한 내공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올 준비를 하면서
기본적인 심법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건 타인의 내공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내공을 받아들인 추기영의 몸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달려있다. 함부로 무음항마혈탁을 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좋다 이년들아,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한순간 야혼의 뇌리를 스친 생각은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는 태을건곤심법이었다.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다시 내 보낼 수도 있을 터.”
천천히 심법을 운용하며 왼손을 타고 들어오는 냉소소의 내기를 오른쪽으로 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씨팔! 이것도 처음이라 그런가? 왜 이리 아픈 거야?”
전신의 혈도를 휘감아 도는 냉기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이를 악물며 한기를 오른쪽으로 보내는 작업을 시도했다.
수 차례 시도 끝에 드디어 차가운 기운이 오른손을 통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됐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이번에는 당가려의 내기를 왼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냉소소의 한기와는 달리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정신을 집중하자 그녀의 내기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어! 기분 조옿다.”
묘한 기분이었다. 두 여인의 내공이 내부를 휘젓고 다니자 몸 구석구석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맨 처음 운기행공을
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혹시 내 몸 속에 있는 쓰레기를 이년들이 전부 가져가는 것 아냐?”
몸이 가벼워진 느낌에 야혼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단순히 통로 역할만 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우웃! 이년들 골났구나.”
지금과는 달리 한결 강해진 내기를 느낀 야혼이 내심 비명을 지르며 두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짐작대로였다. 눈을 한껏 치뜬 당가려와 냉소소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자신들의 몸 속에 들어온 상대의 내기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아. 네 년들은 나의 배출구밖에 안 돼.”
이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냉소소와 당가려의 내기가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몸 안에 있던 탁한 기운까지 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광혼마림에 의해 기연 아닌 기연을 얻고 있었다.
뎅!
“헉!”
한참을 희희낙락하던 야혼의 귓전에 은은한 소리가 흘러들었다. 철탁이 냈다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마치 범종이 울리듯
장엄한 소리가 일행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었다.
야혼에게는 산통을 깨는 소리였지만 냉소소나 당가려에게는 천상의 소리였다.
“야! 호치, 결정적인 순간에 철탁을 치면 어떡하냐?”
“내가……?”
화들짝 정신이 든 냉소소와 당가려가 자신들의 몸을 살폈다. 거의 비몽사몽간이라 어렴풋한 기억뿐이지만 몸 내부에 미약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더하여 내공을 겨룬 것 같이 피곤한 몸이라니.
“야혼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말하면 실망할텐데, 그래도 말해 줘?”
“꼴통 말해라 응?”
당가려 역시 냉소소와 같은 생각이었다. 정신을 차린 순간 내기를 운용하여 몸 상태를 점검했는데 내공이 정순하지 못했다.
마치 다른 이물질이 들어와 있는 듯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몇 번의 운기행공이면 전부 사라질 터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생긴 변화라 걱정스러웠다. 더구나 이곳은 마기가 가득한 곳이
아닌가.
“너희 두 년이 서로 내 밑에 깔리겠다고 싸웠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임마. 내가 아무리 남자 걸신에 들려도 그렇지 어찌 너 같은 놈을 원하랴. 차라리 저기 오는
늑대를 상대하는 게 더 낫겠다.”
“그건 당소저의 말이 맞다.”
“이년들아 느그들이 나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상황판단은 제대로 해라. 저 앞에 오는 게 그냥 늑대로 보이냐?”
야혼이 샐쭉 입매를 비틀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맞아요. 일반 늑대가 아니에요.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정한 광혼마림의 시작인지도 모르겠어요.”
여호치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앞에서 나타난 수십 마리의 늑대는  보통 늑대가 아니었다. 광혼마림에서 마기에 의해
길들여진 야수들이었던 것이다.
보통 늑대나 야수들은 상대를 경계하거나 겁을 집어먹었을 때 그르렁거리는데 지금 오는 놈들은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다.
허연 이를 드러낸 채 일행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먹잇감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야 곰새끼! 저기 가장 앞에 있는 놈 거시기는 내 거다. 쓸개는 너 줄께.”
“꿈도 야무지다 임마. 저 정력제를 네놈 혼자서 꿀꺽하겠다고? 무조건 먼저 잡는 놈이 임자야.”
“니미럴타불! 내 몫은 없는 건가?”
철탁을 한 번 두드리고는 잠시 혼미한 상태에 빠져있던 추기영이 정신을 차렸는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여소저 어떻게 해야하죠?”
냉소소가 여호치를 향해 물었다. 지금 당장은 늑대를 없애는 것보다 주변에 깔린 마기가 더 문제였다. 늑대와 싸우다 보면
또다시 심마의 상태에 들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일 터이고, 그 이후가 걱정되었다.
“일단 이렇게 하지요. 태웅과 장선배는 이곳에서 추기영을 지키고, 늑대를 잡는 건 나머지 세 사람이 하셔야겠어요.
지금부터는 빨리 움직이도록 하지요. 가요!”
당가려와 냉소소, 그리고 태웅에게 짐을 떠안긴 야혼이 전방에 일렬로 선 채 일행은 바삐 움직였다.
캬-우! 크앙!
뾰족한 송곳니와 날카롭게 번뜩이는 발톱을 한껏 치켜세운 늑대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29)- 광혼마림(2)
“혈운조양(血雲朝陽)!”
늑대들을 향해 가장 먼저 공격을 가한 사람은 괄괄한 당가려였다. 그녀의 혈린만독편이 붉은 운무를 뿌리며 3마리의 늑대를
향해 살기를 뿌렸다.
“한옥백마수(寒玉白魔手)!”
당가려의 뒤를 이어 냉소소의 양손에서 백색의 한기가 쏟아지고, 주변에 냉기가 가득 들어찼다.
캥! 캬악!
“별 것 아닌데요?”
뒤쪽으로 날아가는 늑대들을 바라보며 당가려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이었다.
“그게 아닌 것 같다, 당가려.”
뒤이어 들려오는 야혼의 말에 당가려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의 혈린만독편과 냉소소의 한령신공에 격중되어 나가떨어진 늑대들이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독이 통하지 않는 괴물들이 눈앞의 야수들이란 말이었다.
“이것들이!”
당가려의 입꼬리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무공을 익힌 인간도 아니고, 한낱 미물에 불과한 늑대가 자신의
공격을 받아냈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혈운사파(血雲死波)!”
신경질적으로 혈린만독편을 털어 내자 눈앞으로 붉은 파도가 생겨났다. 검붉은 빛을 번쩍번쩍 토해내는 혈린만독편은 광혼마림의
마기만큼이나 섬뜩했다.
“한옥빙마수(寒玉氷魔手)!”
당가려의 왼쪽에 있던 냉소소의 입에서도 날카로운 고함이 터졌다. 그녀 또한 심기가 불편한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저년들 또 시작했다. 또 시작했어.”
두 여인의 모습을 쳐다보던 야혼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냉소소와 당가려의 행동으로 보건대 또 다시 마기에 영향을 받는
듯했다.
서로를 슬쩍 쳐다보는 모양새가 조금 전 자신의 팔을 잡고 겨룰 때와 흡사했다.
“저 늑대들이 바로 죽어주면 그나마 나을텐데…….”
그러나 그건 야혼의 바람일 뿐이었다. 영악하게도, 늑대들은 두 여인의 공격을 잘도 피해내고 있었다. 전부 5마리가
달려들었는데 혈린만독편과 한령신공에 격중된 늑대는 2마리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한옥혈마수(寒玉血魔手)!”
낮은 욕설을 토해낸 냉소소가 전방으로 3장 정도를 날아가며 거친 고함을 내질렀다. 순간, 그녀의 앞으로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죽음의 붉은 한기였다. 허공 가득 붉은 서리가 이는 듯 하더니 전방의 늑대들을 향해 무섭게 몰아쳤다.
“네년이 하면 나도 한다. 혈운폭풍(血雲暴風)!”
“기절하겠군…….”
냉소소의 공격으로 터진 늑대들을 향해 몰아쳐 가는 붉은 폭풍을 지켜보던 야혼이 고개를 돌려 여호치를 쳐다보았다.
이미 냉소소의 한옥혈마수에 의해 얼어버린 늑대들이었기에 굳이 당가려까지 가세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뒤쪽에 대기하고 있는
20여 마리의 늑대를 공격해야 마땅하다.
‘야혼 되도록 그녀들을 자극하지 말아라. 일단 그대로 두고 보자.’
그러나 여호치 또한 별다른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그녀들을 자극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들에게 화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러다 저년들이 지치면 그때는 어쩔 건데.”
야혼이 걱정하는 바였다. 이제 시작이라 하였는데 공연한 경쟁심으로 냉소소와 당가려가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하고 있다.
물론 장대손과 화소미가 남아있지만 그들 또한 얼마나 버틸지 알 수가 없었다.
“니미럴, 씨팔!”
‘정신차렷!’
야혼의 입에서 상스런 욕이 튀어나오자 여호치가 전음을 이용하여 고함을 질렀다. 야혼 또한 마기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당가려와 냉소소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려. 다른 생각을 하란 말이다. 네 녀석이 좋아하는 거 있잖아.’
“씨팔! 내가 개냐? 이 상황에서도 그 짓을 생각하게. 근데 그 철탁은 얼마정도면 다시 칠 수 있냐?”
“일 다경은 지나야 한다.”
“그럼 차 한잔 마실 동안에는 저년들의 미친 짓을 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네?”
미친 듯이 자신들의 절기를 쏟아내는 두 여인을 쳐다보며 야혼이 중얼거렸다. 냉소소와 당가려의 무공은 엄청났다. 서로를
의식한 듯 늑대들을 향해 난사하는 그녀들의 공격은 마기를 먹고 자랐다는 늑대들조차 견뎌내질 못했다.
혈린만독편의 마지막 초식인 혈운폭풍(血雲暴風)으로 늑대가 녹아 없어지고, 냉소소의 한옥광마수(寒玉狂魔手)에 의해
얼음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씨발탱…… 아니 거지 양반. 저년들의 무공이 왜 저리 강한 거요?”
장대손의 표정 또한 이상하다고 느낀 야혼이 재빨리 말을 바꾸며 물었다.
“으음! 겁천십웅의 무공인데 당연하지 않겠느냐? 지금 보이는 것도 8성 정도 경지밖에 안 된다.”
장대손도 편치 못했다. 냉소소와 당가려의 무공을 보고 자꾸만 호승심이 일었다. 그녀들 옆에서 같이 싸우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겨우 참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거지 양반 무공보다 더 약해 보이는데 뭘! 거지 양반이 나서면 금방 끝날 것 같은데?”
“그래?”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갑시다.”
장대손의 목소리가 다소 안정을 되찾는 듯 보이자 야혼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비단 장대손뿐만 아니었다. 300년 전
강호10대 고수의 무공이란 말에 야혼도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었다.
익히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들만큼 강한 무공이 자신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편하게 하였다.
불안한 가운데 일행의 광혼마림 통과는 계속되었다. 결정적인 순간이면 무음항마혈탁이 울어 일행의 정신을 일깨웠다.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결코 마지막 선은 넘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큰일났군…….’
여호치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마지막 하나의 봉우리를 남겨둔 시점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추기영의 몸이 견뎌내질
못했다.
자신의 내공을 받아들여 철탁을 두드리기만 하는데도 심각한 내상을 입고 말았다. 지금 상태로 계속해서 철탁을 두드리게 되면
성모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혈운폭풍(血雲暴風)! 우웩!”
“한옥광마수(寒玉狂魔手)! 하악!”
“저년들도 문제다, 여호치. 시발탱이 저 새끼도 그렇고.”
인상을 찌푸린 야혼이 여호치를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거의 4일 밤낮의 강행군으로 냉소소와 당가려는 한계에 달한 듯 입으로
피를 넘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은 쉬지 않았다.
오히려 핏발선 눈으로 서로를 응시하며 자신들의 마지막 절기를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내공 소모가 가장 심하다는
최후 절초를. 마치 위태한 곡예를 보는 듯 불안했다.
“그거 아냐? 저년들 어제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 다 왔다. 저 봉우리만 넘으면 끝난다. 조금만 견뎌봐라.”
여호치도 물론 그녀들의 상태를 알고 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사실 당가려와 냉소소가 있었기에 다른 이들은 편하게 왔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장선배와 화당주가 힘을 쓰셔야 합니다.”
여호치의 시선이 장대손과 화소미를 향했다. 그들의 심리상태 또한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더 이상 냉소소와 당가려에게는
기댈 수 없게 되었다.
“자네……. 광애성모지체(廣愛聖母之體)를 타고났나?”
장대손이 여호치를 쏘아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줄곧 그가 의문을 품었던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전부 마기에 영향을 받고
있는데 유독 여호치만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가 알기엔 마기에 영향을 받지 않은 체질은 단 한가지밖에 없다. 바로 수천구신체의 하나이고 과거 명교(明敎)의 정신적
지주인 성모(聖母)가 타고난다는 광애성모지체인 것이다.
“글쎄요.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여호치가 어색한 낯빛으로 말을 받았다. 아무 일 없이 그냥 넘어가기를 바랐으나 결국 장대손이 알아차리고 말았다.
“씨발탱이 그게 중요한 건가?”
“중요하지. 광애성모지체를 타고났다면 그녀가 바로 성모니까. 마교(魔敎)의 부활이란 말이다.”
장대손의 몸에서 미약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여호치의 정체가 마교와 관련이 있을 줄은 알고 있었으나 설마하니 그녀가 성모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마교는 정사를 막론하고, 강호인이라면 무조건 없애야 하는 적인 것이다.
“우습군. 왜 너희들은 명교(明敎)를 그렇게 미워하지? 가만히 있는 명교도를 먼저 친 것도 너희들이었잖아. 방어만 한
명교를 살인자로 몰아간 것도 너희들이었고. 도대체 명교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게 뭐냐. 그거나 알아듣게 설명해 봐.”
“어느 세상이나 그곳에는 규율이라는 게 있다. 그 행위의 정당성을 떠나서 모든 사람들이 꺼리는 일들 말이다. 무림에서는
그런 행위를 보통 마(魔)라고 규정짓는다. 명교가 마교로 된 이유다.”
“그러니까 일단 마교로 선포했고 모든 사람이 믿고 있으니까 다시 나타나면 안 된다 이 말인가? 너의 기득권층이라는 것들이
마교로 선포했으니까 영원히 마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나? 그게 힘의 논리라는 거냐?”
장대손을 대하는 야혼의 몸에서도 미약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힘이 있는 놈들은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전부 용서가 된다는 이 말인가! 마교의 후예라고 겁탈해도 되고, 한곳에 모아놓고
재미 삼아 죽여도 된다 이 말인가! 그게 너희들이 말하는 정의고 힘이냐? 말해봐라 시발탱이. 너도 그런 놈들과 같은
생각이냐?”
장대손을 노려보는 야혼의 두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더하여 미약하게 풍기던 살기(殺氣)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마교(魔敎)라 칭하는 그곳의 성모는 말이다 마기(魔氣)와 상극인 신체를 지녔다. 그럼에도 너희들은 그녀를 사악한
마녀로 만들었다. 뭐가 정의(正義)인가. 뭐가 정도(正道)인가!”
“이놈이!”
장대손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야혼의 모습이 아니었다. 더하여 야혼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
마교의 후예를 한곳에 모아두고 겁탈하고, 재미 삼아 죽였다는 그 말의 의미는 결코 심상히 넘길 일이 아니었다.
분명 강호 상에는 그런 곳이 존재했다. 무려 100년 전부터 금역으로 지정된 장소로 10대 문파의 지존만이 알고 있는
곳이.
“누구냐?”
“나? 개봉에서 오입질하는 야혼일 뿐이야. 이제는 태생까지 문제 삼기로 했나? 그렇군. 네 놈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피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어. 마두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도 죄가 되었지. 하지만 말이다. 누구도 마두의 자식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어.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건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그만해라, 야혼!”
두 사람의 언쟁을 여호치가 말렸다. 야혼의 상태가 불안했다. 저번의 서대시전에서처럼 또다시 폭발해버리면 이곳에서는 말릴
사람이 없다. 주변에 널려있는 마기와 그의 살기가 합쳐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구나. 야혼 네가 야차혈마지체(夜叉血魔之體)였어. 바보같이 그걸 알아보지 못했다니. 도백회주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야혼을 도백회의 후계자로 점찍었으면서도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야차혈마지체를 타고난 신체는
무공을 익히면 익힐수록 살기가 강해지고 결국에는 세인들의 눈에 드러나게 된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이정이 야혼에게
예인(藝人)의 경지를 먼저 터득하게 했던 것이다.
옥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도살장에서 소를 잡는 것으로 하여 그의 살기를 풀어준다 하더라도
간간이 드러나는 야차혈마지체의 특성은 완벽하게 막을 수가 없다.
해서 선택한 장소가 바로 옥이었으리라. 결국 그 모든 일이 도백회주 이정의 머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장선배도 그만하십시오. 제가 성모라는 사실보다 이곳에서 살아나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니까요.”
“휴-우!”
장대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상 야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명교를 마교라 칭하고 도륙한 자들은 현재 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정파와 마도련이다. 무릇 그들이 지금껏 강호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마교 척살이라는 절대
명제 때문이었다.
“문제는 말일세. 자네들이 힘을 얻는다 하더라도 10파나 마도련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세. 공연한 희생만 늘어난다는
거지.”
“저희가 아니더라도 그동안 강호는 너무 평안했습니다. 100년입니다. 이제는 뭔가 일어날 때도 되었지요.”
“내 말이 그 말이네. 자칫 잘못하면 자네들은 과거와 같이 희생양이 될 걸세. 두 세력의 힘의 배출구로 말일세.”
“그건 두고봐야지. 호치 저것들도 그냥 놀지는 않을 테지 뭐. 그래도 싸움 나면 좋잖아. 시발탱이 당신은 명예를 얻을
기회도 생기고 말이야. 아마 전쟁을 바라는 놈들이 더 많을 거야. 안 그래?”
“그만 하자, 개차반. 우리가 여기서 떠들어봐야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역사는 제 알아서 흘러가겠지.”
“맞아! 당신은 열심히 구걸이나 하면 되는 거고 나는 열심히 오입질이나 하면 되는 거야. 개방에서 쫓겨나면 서대시전으로
오라고, 밥은 먹여줄 테니까. 그나저나 저년들은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누가 서방이 될는지 몰라도 걱정이다 걱정. 너
너무 심한 것 아냐?”
냉소소와 당가려를 쳐다보던 야혼이 여호치를 향해 말했다.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비록 마기 탓으로 원래 가진 힘
이상을 뽑아내는 상태라지만, 지난 4일 동안 거의 그녀들에 의해 이곳까지 왔던 것이다. 화소미와 장대손이 조금씩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녀들의 몸이 괜찮아진다 싶으면 바로 투입하곤 했던 것이다.
결국은 그녀들의 상태 또한 여호치가 유도했다는 말이 된다.
‘야혼! 저 봉우리 꼭대기에 올라가면 3갈래의 길이 나온다. 너는 당가려와 냉소소를 데리고 가장 왼쪽 길로 내려가라. 탑이
나오는 곳에서 멈춰서면 된다.’
“부셔주면 된다 이 말이냐?”
‘그래! 그것만 해주면 된다. 냉소소와 당가려가 힘을 합치면 될 거야.’
“장소도 정말 잘 골랐다.”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언젠가는 뿔뿔이 흩어질 것이지만 마기 가득한 이 산중에서 이별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미안하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때 술 한잔하자.”
“술로는 안 된다니까?”
“그래 살아서 만나면 그땐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여호치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지금껏 보아왔던 당당한 얼굴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로 겨워하는, 한갓
가녀린 여인의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년, 캬악! 너 그거 아냐?”
“뭘?”
“너는 말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과 많이 닮았다. 아주 많이……. 그래, 이제야 알았어. 그동안 네가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이 손……. 저주받을 손이었다. 잘라버리고 싶은 정도로. 어찌되었던 잘 살아라.”
“왜 그 손으로 그 여자를 죽이기라도 했냐?”
“킬킬킬!”
자신의 왼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묘한 웃음을 흘리던 야혼이 냉소소와 당가려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전방을
향해 서로 질세라 무공을 난사하고 있었다.
“그만해 이년아.”
“뭐야 새끼야!”
퍼억! 퍽! 파앙!
“아악!”
냉소소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돌리는 순간, 야혼의 손과 발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그의 발이 하체에 박혔고, 오른 손은 명치에 그리고 마지막은 그녀의 국부를 찼던 발이 머리를 찍어버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실신한 냉소소를 쳐다보던 야혼이 이번에는 등을 보이고 있는 당가려를 향해 걸었다.
“저런 무식한 새끼…….”
야혼의 행동을 쳐다보던 화소미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지라도 여인과 싸울 때는 노리지 않는 곳이
회음혈이다. 그런데 야혼은 정확하게 그곳을 노리고 발을 내질러 버렸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회음혈을 맞으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지난 4일 동안 혈전으로 기력이 빠진 냉소소야 말할 것도 없었다.
“설마…….”
해쓱한 얼굴의 화소미가 야혼을 주시했다. 당가려의 등뒤로 다가간 야혼이 잠시 심호흡을 하는 듯하더니 그녀의 엉덩이를 향해
발을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당가려에 대한 처리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벌리고 있는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발을 꽂아 넣었다.
“공평해야지.”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당가려의 뒤통수에 다시 한번 발길질을 해버리고 만다.
“가자! 큰 색시 앞장서라.”
멍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일행을 향해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인 야혼이 당가려와 냉소소를 한꺼번에 짐 위에 올려 묶었다.
마지막.
이 봉우리만 넘으면 마지막이란 생각에서인지 더 이상 마기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장대손과 화소미에 의해 일사천리로 길이
뚫렸고 일행의 전진은 순조로웠다.
거의 반나절 정도 전진했을 때 마지막 봉우리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여전히 검은 안개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여호치와 화소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그런데 성모궁인가 하는 곳에 가는 이유를 물어도 되냐?”
앞으로 가야할 길을 쳐다보던 야혼이 여호치를 향해 말했다. 굳이 그녀의 무공 정도면 성모궁에 간다해서 별로 얻을 게 없어
보였다.
개방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로 보이는 장대손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 무공을 지닌 그녀가 아닌가.
“글쎄, 가르쳐 줘도 넌 모른다. 모르는 게 더 낫고. 기억해라. 해 뜸과 동시에 탑을 파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야! 태웅 추기영, 그동안 재미있었다. 잘 살아라. 큰 색시도.”
“그래요 동생! 동생도 잘 살고. 다음에 만나면…….”
“걱정 마라. 그때는 내가 안질 테니까. 다음에 보자!”
일행을 한번씩 쳐다본 야혼이 이내 몸을 날렸다. 이별의 시간은 빠를수록 좋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다음에 봤으면 좋겠구나.”
야혼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여호치도 이내 태웅과 추기영을 대동하고 몸을 날렸다.
세 갈랫길, 맨 오른쪽 길은 화소미와 장대손이, 가운데는 여호치 일행이, 그리고 맨 왼쪽은 야혼이 두 여인을 걸머지고 길을
떠났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0)- 자는데 좀 만지면 어때.(1)
자는데 좀 만지면 어때.
여호치 일행이 성모봉을 향해 떠난, 반 시진 후에 남천악 일행 또한  갈림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들의 행색은 여호치 일행과는 달리 비교적 깨끗했다. 마기로 가득 들어차 있던 광혼마림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통과했다는 의미였다.
“다 온 것 같소이다. 유형!”
감격스런 얼굴의 남천악이 유마혼을 쳐다보았다. 눈 앞 세 갈래 길마다 발자국이 찍혀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함께 움직이던 여호치 일행이 각각 흩어졌다는 말이 된다.
“쿡쿡! 프! 하하하!”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짓던 두 사람이 이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 누구도 찾지 못했던 성모궁을
찾아냈다는 자부심 가득한 웃음이었다.
여호치 일행을 따라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찌되었던 성모궁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강호무림에 자신들의 능력을 입증했다는 사실이.
“그런데 주소저께서 가지고 계신 신기가 무엇이기에 마기가 접근하지 못했습니까.”
유마혼뿐만 아니라 남천악 또한 알고 싶은 사항이었다.
“이것 때문입니다. 성화정(聖火鼎)의 일부분이라 하더군요.”
주려화가 목에 걸고있던 손바닥만한 석기의 파편을 내보였다.
“정말이십니까?”
남천악과 유마혼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성화정의 파편이라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버님께서 우연찮게 구한 물건입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들고 왔는데 이곳에서 쓰일 줄 몰랐습니다.”
주려화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흘렀다. 명교의 성물인 성화정은 우연히 구할 수 있는 물건이 결코 아니다. 지난 100년 간
누구도 찾지 못했던 성모궁에 있었다는 물건 아닌가.
“그랬군요. 어찌되었던 그 물건 덕분에 무사히 왔으니 그걸로 된 거지요.”
유마혼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말하지 않는데 굳이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완전한 성화정도 아니고, 부서진
파편의 한 조각임에야 딱히 쓸 일도,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 큰 일도 아닌 것이다.
“어디로 가시겠소.”
주려화에게서 시선을 거둔 유마혼이 남천악을 쳐다보며 물었다. 같이 갈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헤어질 것인가를 묻는
말이었다.
“유형 생각은 어떻습니까?”
남천악 또한 간단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껏 겪어온 길이 순탄치 않았기에, 저 아래쪽은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지 알
수가 없었다.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유마혼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운무 속에 성모궁이 존재한다면, 수많은 보물이 있을 터인데 같이 있으면 서로가 껄끄러운 존재가 될
것임에 분명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일단 성모궁이 보이는 곳까지 가서 헤어지기로 하지요.”
망설이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주려화가 제안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어느 길로…….”
“왼쪽으로 가지요.”
무슨 마음에서인지 주려화가 왼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놈이 간 곳이면 좋겠군…….”
끝없이 이어진 길을 쳐다보며 남천악이 중얼거렸다.
“고년들 참!”
남천악이 말하는 그놈인 야혼은 눈앞에 놓인 떡을 두고 어떻게 처리할까, 몹시 고민 중이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냉소소와 당가려를 부려놓고 물끄러미 앉아 눈앞 철탑을 쳐다보았다.
거의 3장 높이의 9층 철탑이 막아선 안쪽으로 기이한 운무가 흐르고 있었다. 어떤 진(陣)에 의한 현상임을 알아차렸고
자신의 능력 밖이라는 사실도 이내 깨달았다. 그 늙은 사기꾼 놈이 깨부숴 달라했던 곳도 역시 눈앞의 철탑이란 생각이
들었다.
망연히 백무를 쳐다보던 야혼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당가려의 입에서 흘러나온 가는 신음소리 때문이었다.
큰 대자로 뻗어있는 두 미녀를 쳐다보던 야혼이 갑자기 머리를 쳤다. 최고의 미녀라 할 수 있는 두 여인이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거였다.
“야! 야, 이년아!”
먼저 신음을 질렀던 당가려의 볼을 쿡쿡 찔러보았다. 하지만 맞은 충격이 컸던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좋아, 결정했다! 냉소소 너부터다.”
야혼은 우두커니 뭔가에 골몰하다가 혼잣말을 했다. 실은 두 미녀에게 손을 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했던 게 아니라 누구를
먼저 맛볼 것인가를 놓고 목하 고민 중이었다.
후르릅!
입꼬리를 타고 흐르는 침을 재빨리 훔친 야혼이 손을 비비며 냉소소의 상의를 슬쩍 들쳤다. 순간 드러나는 뽀얀 속살, 새하얀
박꽃 같은 피부가 눈 안 가득 들어찼다.
“흐흐흐!”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그곳을 향해 천천히 손을 밀어 넣었다.
“허억! 정말 너무 한다. 이래도 되는 거야?”
손안 가득 잡혀드는 육질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질렀다. 수많은 여인을 접해보았지만 냉소소만큼 탄력 있는 가슴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 크기라니. 한 손으로 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옷 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냉소소의 가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조심해라 조심! 살살!”
절로 급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이번에는 왼손을 밀어 넣었다. 연신 헤벌쭉거리며 양손으로 냉소소의 가슴을 정신없이 주물렀다.
가슴을 주무르던 손이 앵두 같은 유실을 거침없이 비틀고, 다시 더듬기를 수 차례. 야혼의 시선이 냉소소의 아래쪽을 향했다.
“이왕 한 것 확실하게 하자. 한번 벗겨봐? 좋다 검문 실시!”
마음의 결정을 보자마자 민첩하게 행동했다. 냉소소의 바지를 시작으로 재빨리 옷을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여자 옷 벗기는 거야
야혼이 가장 잘하는 것 중의 하나였으니, 냉소소와 당가려는 순식간에 알몸이 되고 말았다.
“어디 보자! 가슴은 당가려가 좀 크고, 아래쪽 역시 당가려가 더 무성하네? 쯧! 당가려 이년은 좀 밝히게 생겼구먼.”
양쪽에 두 미녀를 두고 위에서부터 하나씩 비교를 해가며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손으로는 부지런히 주물럭거리며.
“으음!”
서늘한 기분을 느낀 걸까. 아니면 본능적인 반응일까. 냉소소의 입에서 여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라? 민감하기는 이년이 더하네?”
그러나 야혼의 행동은 태연했다. 아래쪽을 노골적으로 매만지던 손을 멈추고 일어서더니 가만 냉소소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처음엔 좀 아플 거야.”
퍽!
야혼의 오른 주먹이 냉소소의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박혔다. 그가 태연한 이유였다. 다시 기절시켜버린 것이었다.
“공평해야지.”
퍽!
당가려를 향해 다시 한번 주먹을 날린 야혼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손맛은 다 봤고 이제 입맛이 남았다. 아무래도 냉소소가 더 미녀인 모양이야. 꼭 이년에게 먼저 손이 간단 말이야. 야!
협조 좀 해라. 그렇게 목석처럼 있으면 되겠어?”
냉소소의 팔을 들어 자신의 목에 두른 야혼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냉소소의 입술에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입맞춤은 시작일 뿐이었다. 꽉 닫힌 그녀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정신없이 빨아대다가 서서히 둔덕으로
입술을 내렸다.
“으음!”
냉소소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슴으로 아픔이 느껴지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잔뜩 흥분한 야혼이 저도
모르게 냉소소의 유실을 깨물어 버렸던 것이었다. 신음소리에 흠칫 놀란 야혼의 행동이 조심스럽게 변했다.
냉소소의 온몸에 침으로 도배를 해버린 야혼이 이번에는 당가려를 향했다. 얼굴은 딸렸지만 몸만은 폭발적이었다. 터질 듯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거봉. 그 끝에 앙증맞게 달라붙은 유실이 갑작스런 한기 때문인지, 마치 유혹을 하는 듯 고개를 발딱
치켜올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조금만 기다려라.”
당가려의 유실을 가볍게 튕긴 야혼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냉소소에게 했던 작업을 반복했다.
으스러질 듯 가슴을 애무하고 혀끝으로 유실을 농락했다.
“씨팔! 결국 내 손해잖아.”
이윽고 바지를 뚫어버릴 듯 튀어나온 아랫도리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빨아대었지만 결국 그림에
떡이었다.
더 이상은 어찌 해볼 수 있는 여자들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짓도 들통이 나면 바로 목이 날아갈 엄청난 일인 것이다. 사천당문의 금지옥엽인 당가려와 사황문의 문주 딸인
냉소소를 데리고 장난을 쳤으니 목이 열 개라도 살아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너희들은 죽어도 알지 못할 테니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한번 당가려와 냉소소의 몸을 조몰락거린 야혼이 옷을 입혀나가기 시작했다.
두 여인을 처음 상태 그대로 해 놓은 뒤에야 그녀들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야! 소소! 가려!”
그러나 제 손으로 기절시켜버린 그녀들이 쉽사리 깨어날리 만무했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나서야 간신히 냉소소가 먼저
깨어났고 얼마잖아 당가려도 정신을 차렸다.
“이게…….”
비몽사몽간에 주변을 살피던 두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야혼을 쳐다보았다. 자신들과 야혼을 제외하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설명해봐라, 야혼!”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던 냉소소 몸에서 서릿발같은 기운을 흘렸다. 자신들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에
틀림없었다.
더구나 무공의 고수인 자신들이 기절을 하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얼굴과 하체에서 밀려드는 고통이라니.
특히 아래쪽 회음혈 부근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극심했다.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의심까지 들었다.
“설명은 무슨, 저 앞에 보이는 철탑을 없애야 한다고 해서 헤어졌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야혼이 전면의 철탑을 가리켰다. 그러나, 냉소소가 묻는 건 그게 아니었다. 이미 정신이 들자마자
철탑의 존재를 확인했고, 진(陣)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다만 자신이 왜 기절해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러니까 왜 이곳에 와있냐 그걸 묻는 거냐?”
“그래! 설명 잘해야 할거다.
“기억 안 나냐?”
“무슨…….”
느닷없는 야혼의 물음에 냉소소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이상하게도 전혀 기억이 없었다. 마지막 봉우리에서 정신없이 싸웠던
것까지는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온통 먹통이었다.
“그곳에서 너희 둘이 싸웠다. 거의 내공을 다 소진해버린 상태라 맨손으로 싸우는데 정말 가관이더라. 거시기에 털나고
너희처럼 싸우는 년들은 처음 봤다. 무슨 여자들이 급소도 안 가리고 무조건 차대냐. 너희들 거시기는 안 아프냐? 나 같으면
그 정도로 차였으면 바로 기절했을 텐데.”
“설마…….”
당가려가 눈을 치뜨며 야혼을 쳐다보았다. 실상 내공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지만 냉소소와 싸웠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가 아니다. 너 얼굴 좀 봐라. 이쪽에 멍들었지? 저기 냉소소는 또 어떻고. 너희 둘 다 얼굴이 엉망이잖아.”
야혼이 당가려의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당기려가 시선을 돌려 냉소소를 쳐다보았다. 냉소소의 얼굴
또한 퉁퉁 부어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심하게 싸웠나?”
냉소소가 얼굴을 찌푸렸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들을 볼 때 야혼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더구나 깨어났을 때 느꼈던
고통까지. 그때는 느끼진 못했지만 가슴한쪽에서도 쓰라림이 전해졌다.
“너……. 우리 기절해 있을 때 아무 짓 안 했겠지?”
여전히 야혼의 말이 못미더운 듯 당가려가 야혼을 노려보았다. 지금껏 야혼을 겪어본 바로는 결코 그냥 넘어갈 놈이 아니었다.
그런 의심이 강하게 든 까닭은 자신의 몸 때문이었다. 몸이 평상시와는 다른 듯했다. 땀을 많이 흘렸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더구나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기분은 마치 야릇한 꿈을 꾸고 났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소리 마라 당가려. 이 야혼은 말이다. 적어도 죽은 고기는 안 먹는다. 원하지 않는 여자도 안 먹고. 더구나
너희들은 독을 품은 꽃 아니냐. 나는 오래 살고 싶다. 괜한 생각하지 말고 빨리 운공이나 해라. 해가 뜨는 순간 깨트려야
한다더라. 그렇지 못하면 성모궁과는 영영 이별이다.”
“근데 야혼, 너 손가락에 그건 뭐냐?”
야혼을 예리하게 살피던 냉소소가 그의 중지를 가리켰다.
“이거? 오다가 벌집이 있기에……. 그거 정력제잖아.”
가볍게 말을 받은 야혼이 양 손가락을 쪽, 소리나게 빨았다.
“맛있다. 너도 좀 먹어볼래?”
야혼은 쪽쪽 빨아댄 손가락을 냉소소의 입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정말 맛있다는 얼굴로.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1)- 자는데 좀 만지면 어때.(2)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진 냉소소가 고개를 돌리며 가만히 가부좌를 했다. 그러나, 철탑을 노려보는 냉소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이 25, 야혼의 손가락에서 나는 냄새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꿈이라 생각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야혼!”
“왜!”
“절대 무림인이 되지 마라.”
“너도 그런 소리 하냐? 걱정 말아라. 나는 도살장에서 소 잡는 게 가장 어울리는 놈이다. 그나저나 운공 빨리 해라. 점점
밝아지고 있다.”
찔끔한 얼굴로 동쪽하늘을 쳐다보았다. 해가 뜨려는지 주위가 점점 밝아오는 듯했다.
“쿡! 무림이라…….”
철탑을 향해 다가간 야혼이 수중의 박도를 힘차게 휘둘렀다. 그러나, 전력을 다한 그의 박도는 철탑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거의 두 치 정도의 간격을 두고 퉁겨버린 것이었다.
놀랍게도 철탑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마치 무림인들이 호신강기를 두르듯 진의 보호 아래 있었다.
여호치가 냉소소와 당가려를 같이 보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철탑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두 여인이 격체전공을 이용해야
할 것 같았다.
“맞아 네놈의 한계는 그 정도야!”
놀라운 눈으로 철탑을 쳐다보는 야혼의 귓전에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천악 일행이었다.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마교 놈!”
“나는 마교가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한참 운공에 몰두하는 두 여인을 흘낏 쳐다본 야혼이 남천악을 향해 중얼거렸다.
“힘이 많이 줄었는데 그래. 왜 저번처럼 큰소리 한번 쳐보지 그래 마교 놈!”
“그럴 수야 없지 않겠소. 나를 구해줄 사람도 없는데.”
“그때는 여호치 년을 믿고 그런 짓을 했다 이 말이냐?”
“당연하지 않겠소. 똥개도 제 집에서는 더 크게 짖는데.”
“그럼 네 놈은 개란 말이구나. 좋다, 개처럼 짖으며 내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라, 그럼 살려주마.”
“그랬다가 마음이 변하면 나만 손해 아니오.”
“이 남천악을 너와 같은 놈으로 보았단 말이냐? 걱정하지 말아라. 여기 있는 주소저와 유형이 보장한다. 하겠느냐?”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하지 않겠소.”
“맞다 네 놈의 목숨이 걸렸다. 그러니 필히 해야 할거다.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는다.”
남천악의 얼굴에 진득한 살기가 어렸다. 하오밀문의 속가제자라는 벌레 같은 놈에게 당했던 모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일수에 죽여버리기에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이 당했던 모욕, 그 이상을 돌려주고 자근자근 씹어버릴 작정이었다.
“네놈이 들었던 짐도 같이 들어라. 짐꾼개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해야 할 것 아닌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 야혼을 향해 유마혼이 덧붙였다. 그 역시 남천악과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놈들을 따라나선 냉소소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어이쿠! 불알이 떨려서인지 짐도 제대로 안 들어지네.”
당가려와 제 책이 든 짐을 들던 야혼이 비틀거리며 낮게 투덜댔다.
“저건? 프! 하하하! 하하하!”
바닥에 떨어진 10여 권의 책을 확인한 남천악과 유마혼이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 있던 주려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곳까지 악착같이 들고 온 책들이 전부 춘서였던 까닭이었다.
정말 하오밀문의 제자에게 어울린다는 생각뿐이었다. 얼굴 가득 비웃을 머금은 남천악이 더욱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짖어라! 꼬리를 흔들며 짖으란 말이다.”
“컹! 컹! 컹컹컹!”
“더 크게 짖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가지고 주인이 들을 수 있겠나?”
입으로는 개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고 나아가는 야혼의 등에 대고 통쾌한 듯 외쳤다.
“컹! 컹! 컹컹!”
“웃어라! 똥개! 너처럼 해서 어디 밥이나 얻어먹겠냐? 환하게 웃으란 말이다.”
보다못한 주려화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처음엔 재미 삼아 쳐다보았는데 이게 아니다 싶었다. 개 짖는 소리를 내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기어가는 자.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번처럼 당당하지 못하나, 마교 놈! 나에게 큰소리 치던 배포는 다 어디 갔나.”
묵묵히 기어가는 야혼을 지켜보는 남천악의 눈이 번들거렸다. 은근히 반항해주기를 바랐다. 이 정도의 모욕이면 잔뜩 독기를
품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놈은 달랐다.
“일어서라, 똥개!”
여전히 엎드려 있는 야혼의 엉덩이를 툭툭 찼다.
“나에게 빚을 받을 게 있다고 했나? 능력 있으면 이거랑 같이 받아라.”
퍽!
“크윽!”
야혼의 눈앞에 주먹을 흔들어 보인 남천악이 사정없이 일권을 뻗어냈다. 내공을 싣지는 않았지만 무공으로 단련된 그의 근육에서
뿜어져 나온 힘은 가공했다. 야혼의 체구도 왜소하지는 않은데 그가 일 장 정도를 날아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씨팔! 존나 아프네!”
“저런 개자식이?”
야혼의 입에서 흘러나온 상소리에 남천악의 입가에 차가운 살소가 맺혔다. 아예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그의 양손에 자색
기운이 서렸다. 화산파 제일무공인 자하신공(紫霞神功)을 운기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만하세요, 남공자. 보기 좋지 않군요.”
야혼을 향해 장을 뿌리려던 남천악의 귓전에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들었다. 운기행공을 마친 냉소소가 차가운 얼굴로 남천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 옆에 있던 당가려 역시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벌레 같은 놈이 큰소리 친 이유가 있었구먼. 벌써 정분이라도 생겼나?”
“남천악!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따위 자하신공을 믿고 까부는 것이냐?”
냉소소의 눈에 새파란 살광이 어렸다. 아울러 그녀의 몸에서 차가운 한풍(寒風)이 샘솟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참아라. 소소! 어린애 놓고 뭘 그렇게 흥분하고 난리냐. 네가 그러면 정말로 정분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무라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지 싶었다. 야혼의 말은 두 사내의 가슴에 염장을
지르고 말았다. 냉소소에게 자연스레 반말을 하는 야혼의 모습은 유마혼의 살심을 자극했고, 어린애라는 말은 남천악의 호흡을
더욱 거칠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건방진……. 너의 마도련에서는 네가 대단한 존재일지 모르나 강호에서는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군.”
“그 말, 책임질 수 있느냐 남천악!”
냉소소의 어투가 더욱 차가워지고 머리칼이 하늘로 치솟았다. 진정으로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냉소소의 몸에서 흘러나온 한기가
사방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더하여 백발로 변해 가는 그녀의 모습이라니. 겁천십웅의 무공이라 했던 한령신공을 극도로
끌어올린 그녀의 모습은 얼음 마녀처럼 섬뜩했다.
“저럴 수가……. 한령신공이었단 말인가!”
남천악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냉소소의 무공을 알아본 것이었다. 10성 경지의 한령신공이었다. 그나마 12성까지
완성하지 못해 다행이라 할 수 있었지만 지금 정도만 해도 남천악이 상대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냉소소, 그만해! 지금 싸울 때가 아니고 철탑을 없애야 할 때라고!”
냉소소 곁에서 일장 가량을 물러나며 야혼이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냉소소가 공력을 풀었다.
‘나쁜 놈!’
자신이 내공을 끌어올린 이유는 단순히 남천악 때문이 아니었다. 야혼의 손에 몸이 유린 된 것을 알아차린 후, 혼란스런
상황에서 남천악이 자극하자 폭발하고 말았다.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냉소소가 남천악을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오늘을 기억해라 남천악! 반드시…….”
“쯧! 한번 뻐겨보려다가 완전 좆됐네.”
“이런 마교 놈 새끼가!”
야혼의 이죽거림에 노화가 폭발한 남천악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들며, 잔뜩 운기하고 있던 자하신공을 뿌렸다.
“허억! 이런 니미럴! 이놈의 주둥아…….”
눈앞 가득 밀려오는 자색의 기운에 야혼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냉소소와 당가려만 믿고 너무 설쳤던 게 화근이었다.
그 정도 했으면 남천악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판단을 잘못했던 것이다.
과앙!
“으아악!”
허공 가득 핏줄기를 남기며 야혼의 신형이 운무 속으로 날아갔다. 너무나 어이가 없다는 듯이 냉소소와 당가려는 멍한 눈으로
야혼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 남천악을 단죄하겠소? 마교도 놈을 없앴다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냉소소와 당가려를 노려보았다. 그녀들은 결코 나설 수 없음을 알고 한 행동이었다.
하오밀문의 속가제자라 하였던 놈은 두 여인과 어울리는 놈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까지 동행했다는 인연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복수한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한 일인 것이다. 남천악의 예상은 적중했다. 무심한 눈으로 야혼의 마지막을 쳐다보던
냉소소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다.
“남공자는 기회를 잘 잡는군요.”
“맞아요 언니, 비겁하기도 하고.”
“꼭 성공하시길 바래요.”
냉소소와 당가려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녀들 또한 야혼이 죽는다하여 크게 상심하거나 아쉬워할 입장이 아니었다.
묘한 인물을 보았고, 근성도 있어 보였지만 결코 자신들과 어울리는 인간은 아니었다. 이곳 성모봉을 끝으로 다시는 얼굴 볼
일이 없는 사람이 야혼이다.
“마교도를 잡는데 정사의 구분이 없소이다. 상대의 무공 또한 마찬가지고.”
“글쎄요. 저는 모르겠군요. 그는 마교도라 시인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이곳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교도가 되어야
한다면 정사 무림 전체가 마교도라 해도 할 말이 없겠군요. 당신 또한 성모봉을 알고 있었으니까.”
“언니, 해가 뜨려고 해요.”
당가려는 영악했다. 이곳에 더 이상 자기 편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바로 냉소소를 향해 언니라 불렀다.
“정도의 제일 기재인 댁들이 이 철탑을 없애는 건 어때요.”
당가려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은 냉소소가 남천악과 주려화를 향해 말했다. 조금 전 마도련을 들먹인 남천악에 대한
대응이었다.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 모험을 하지?”
“기재라고 하던데……. 성모궁에 겁천십웅을 능가하는 무공이 있으리라 보세요? 그리고 가려 소저에게 있는 무기는
혈린만독편이에요.”
‘빌어먹을…….’
남천악과 유마혼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졌다. 지금껏 자신들보다 하수라 여겼던 두 여인이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힌 초
강자였다.
냉소소의 말대로 자신들은 성모궁에 있는 무공을 노리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무공 기서가 있다하더라도 300년
전 겁천십웅을 능가하는 무공이 있을 리는 없을 터였다.
결국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자신들이 나설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저기 보이는 산중에 해가 반쯤 걸릴 때 해야 합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성모궁은 사라지게 되죠.”
냉소소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고개를 삐죽 내민 해를 확인한 세 사람이 다급한 얼굴로 철탑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 다음 일렬로 맞춰선 상태에서 서로의 명문혈에 장심을 밀착시켰다. 그들 역시 혼자 힘으로 철탑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공력이 남천악의 몸으로 밀려들고 그의 몸에서 자색의 기운이 폭발할 듯 쏟아져 나왔다.
자신의 애검인 자하검(紫霞劒)을 들어올린 남천악이 가만 내기를 골랐다. 하늘을 향해 들어올린 검에서 자색 광망이 솟구치는
순간 광폭한 일갈이 터졌다.
“자하광성우(紫霞光星雨)!”
화산 제일 무공이라는 자하신공의 마지막 절초인 자하광성우는 엄청났다. 1장 길이의 자색 검강을 머금은 자하검이 남천악의
수중을 떠나자마자 무수히 많은 빛덩어리가 철탑을 향해 밀려갔다.
남천악이 가진 원래의 경지로는 절대 불가능한 경지였지만 두 사람의 힘을 받아들인 결과,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검술이라는
절대 경지를 발현해냈다. 내공으로 검을 조정한다는 어검술. 검의 절대 경지라 알려진 어검술은 대단했다.
콰앙! 과앙!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3장 높이의 철탑이 파편조각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커억! 으윽! 악!”
정신없이 뒷걸음질치던 3인이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힘을 합쳤지만 그들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철탑을 부술 때 생긴
반발력으로 내상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남천악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혼자 힘으로 한 일은 아니었지만 화산파의 무공이, 자신의 손에서
흘러나온 무공이 100년의 전설을 깨트린 것이었다.
남천악의 얼굴을 가만 주시하던 냉소소와 당가려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철탑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2)- 보약이다, 보약!(1)
보약이다, 보약!
아래쪽에서부터 서서히 걷히는 희부연 백무를 보고 있자니 절로 탄성이 흘렀다. 절경이 따로 없었다.
이윽고 조금씩 시야가 열리자 일행의 목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침 넘어가는 소리였다.
“오! 저곳이……!”
말을 잇지 못했다.
백색의 궁.
지금 있는 곳에서 30여장 아래쪽, 수만 평 분지 위에 세워진 둥근 지붕의 건물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나
많은 건물이 있는지 헤아리기조차 불가능했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건축물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펼쳐진 이곳이 모든 무림인들이 찾고자 하였던 성모궁이었다.
“아름답군요.”
당가려의 입에서도 감탄의 소성이 흘러나왔다. 말로만 들었던 성모궁의 실체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부챗살처럼 퍼지는 햇살이 건물 지붕을 발갛게 물들어나갔다. 언뜻언뜻 영롱한 무지개 빛을 뿌리는가하면 또 어떤 때는 황홀한
금색 광채를 쏟아냈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완벽한 신의 조형물이었다. 아니 신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겉모습이겠지요. 저 안에는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을지…….”
100년 전 성모척살대는 분명 이곳에 왔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들의 시체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결국 그들은 성모궁에 들어왔고, 이곳에서 전부 죽어갔을 터였다.
더하여, 저 많은 건물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족히 수천 명이 성모를 찬양하며 살았을 것이리라.
탈출하지 못했다면 그들마저도 전부 이곳에서 죽었다는 말이 아닌가. 신이 선사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공동묘지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데 꼴통의 시체는……?”
아래로 몸을 날리는 남천악 일행을 쳐다보던 당가려가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남천악의 자하신공은 정통으로 격중했고 이곳 어디로 떨어졌으면 시체라도 발견되어야 하건만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예요.”
냉소소 또한 야혼의 생사가 궁금했는지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한곳을 가리켰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직동굴 근처에 떨어진
핏자국을 발견한 것이었다.
주변에 있는 돌덩어리 하나를 주워든 냉소소가 아래쪽으로 던졌다.
“50장은 되겠어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운이 좋아 남천악의 자하신공에서 살아났다 하더라도 수직동굴에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말이었다.
무공이라도 강했다면 기대라도 해볼 터이지만 야혼의 일천한 실력으로 50장 높이에서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야만
가능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쉽게 죽을 놈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운이 없었던 거죠. 지금까지는 당소저 이용해서 잘 버텨왔었는데…….”
“언니도 알고 있었어요? 꼴통이 나를 바람막이로 선택했다는 것을? 그리고 말 놓으세요. 자꾸 그러니까 부담가요.”
“그럴까? 그러지 뭐. 야혼으로선 그게 최선이었을 거야. 같은 일행이었던 여소저 마저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지.”
“불쌍하게 되었네요. 마지막에 와서…….”
“글쎄 아직은 알 수가 없지. 잡초 같은 생명력을 지닌 사람이라서.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살아난다면 남천악은 엄청난 적을
만들게 되는 거지.”
“에이 언니도. 꼴통이 독하기는 하지만 무슨 수로 남천악을 이겨요?”
당가려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냉소소를 쳐다보았다. 야혼이 이상한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의
무공수위는 삼류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무공을 배운 남천악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하다.
천고의 기연이라도 얻으면 모를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웃으면서 개 흉낼 낼 수 있는 사람이면 가능하지.”
야혼이 남천악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갈 즈음, 마침 운기행공을 마친 냉소소는 야혼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웃고 있었다. 남천악이 시켜서 하는 억지 웃음이 아닌 정말로 웃고 있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히 젖은
느낌이었다.
모욕을 참아낼 수 있는 인간. 모욕이 아닌 시련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리 해야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이곳 성모봉은 기연의 대지. 살아 있다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서 꼴통의 운명은 결정되었어요, 죽음으로. 가요 언니. 이왕 이곳까지 왔는데 뭐라도 한가지 얻어가야지요.”
“살아있기를 빌겠어요. 내 몸을 더듬은 대가는 치러야지요.”
야혼이 빠진 수직 동굴을 힐끗 쳐다본 냉소소가 당가려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아이고 씨팔! 아까워서 어쩌냐 이거.”
잡초, 냉소소가 말했던 잡초는 팔팔한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미약하긴 했지만 남천악의 자하신공이 격중한 흔적인 듯 붉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가 목숨을 구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악착같이 들고 왔던 춘서였다. 유마혼이 짐을 들어라 했을 때 그곳을 쏟아내며 몇
권을 품속으로 찔러 넣었던 것이었다.
주려화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남천악과 유마혼은 파안대소를 터트렸기에 품속에 책을 넣는 것을 보지 못했다.
더하여 당가려의 옷과 책이 들어있던 짐은 동굴 속에서 그의 몸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했다.
결국 이곳까지 악착같이 가져왔던 짐이 그의 목숨을 구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아랫도리 쪽으로 옮겨놓았기에 망정이지 큰일날 뻔했네.”
아래 속곳 속에 고이 모셔져 있던 춘약을 확인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쓸 일이 있던 없던, 가장 중요한 물건 중의 하나가
바로 춘약이었다.
혈림을 겪은 후 가장 먼저 취했던 행동이 가슴속에 있던 춘약과 광양분을 아래쪽으로 위치를 바꾸었던 것이다. 엉망으로 찢긴
춘서 부스러기를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씨발! 완전히 걸레가 되었구먼.”
일순 몸의 균형을 잃은 야혼이 나직한 신음을 토해냈다. 단순히 가슴을 얻어맞았을 뿐인데 기력이 죄다 빠져버린 듯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게 상당한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빠져나갈 구멍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다시 짐을 둘러맨 야혼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닥은 상당히 넓었다. 족히 10여 장은
되어 보였다.
낑낑거리며 안쪽을 살피던 야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한쪽 구석에 조그마한 암도(暗道)가 보였던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여자가 있다는 말씀!”
잠시동안 암도를 노려보던 야혼이 이내 걸음을 옮겼다. 눈이 어둠에 적응이 되자 주변 사물이 조금씩 들어왔다.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계속해서 전진해 나가던 야혼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암도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꺾여져 있는 곳이었다.
“어이그 놀라라. 뒈지려면 장소를 잘 골라야지. 이런 곳에서 죽고 싶냐?.”
발치에 걸린 물체를 확인한 야혼이 낮게 투덜거렸다. 뼈만 남은 유골이었다.
“어라?”
가볍게 발로 치우며 지나가려던 야혼이 화들짝 허리를 구부렸다. 뼈다귀 말고 걸리는 게 또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비급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지금 있는 곳은 성모궁이고 저런 자세로 죽어갈 인물은 성모궁
사람이거나 아니면 100년 전 이곳에 왔던 성모척살대가 분명할 터였다.
“어디 보자. 투견공(鬪犬功)? 잘 죽었다. 이따위로 이름을 짓는 자라면 안 봐도 뻔하다.”
희미하게 보이는 책제목을 확인한 야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견공, 말 그대로 개싸움이다. 자신이 심사숙고해서 만든 무공에
개싸움이란 이름을 붙였다면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낀 자가 분명하리라.
등에 지고 있던 짐 속으로 비급을 던져 넣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죽어있는 자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10여 구의 유골과 맞닥뜨렸는데 한결같이 책자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한번 제목을 확인했던 야혼은 그
다음부터는 아예 보지도 않고 짐 속에 무공비급을 던져 넣었다.
“킁! 킁! 응?”
한참을 걷던 야혼이 코를 킁킁거렸다. 시체들의 행렬이 끝날 즈음 어디선가 미약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이었다. 약 냄새인
듯했다.
약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야혼인지라 그 냄새가 약 냄새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것 봐라. 몸 다쳤다고 약까지 주려하네?”
냄새를 쫓아 천천히 움직이던 야혼 앞에 커다란 석문이 나타났다. 일 장 정도 되어 보이는 높이의 석문이 가로막고 있는
그곳이 냄새의 근원지였던 것이다.
“나보고 이걸 어쩌라고.”
찬찬히 석문을 살피던 야혼이 이내 물러나며 볼멘소리를 했다. 석문을 열 방법이 없었다. 문을 여는 장치는 안쪽에만 있는
듯했다.
혹여 하는 마음에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꺼내 석문을 때려보았으나 울림조차 없었다. 그만큼 석문이 두껍다는 의미였다.
“여호치 그년이 있었으면 쉽게 열었을 텐데.”
여호치의 무공이 간절했다. 검강이라 하였던 그 무공만 있으면 이정도 석문은 쉽게 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몰랐다 네가 성모였을 줄은. 입으로만 만민평등을 외치지 말고 실천하는 성모가 되어라. 그러지 못하면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명교의 후예라는 굴레만으로 평생을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쿡! 미친놈! 제 식구 하나 건사하지 못했던
놈이 남은……. 아서라 병신아. 이미 잊기로 했지 않았더냐. 재미있게 살기로 말이다.”
나지막하니 툴툴거린 야혼이 물끄러미 왼손을 쳐다보았다. 1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피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장대손과 싸울
때 잘라버리려 했던 손. 그런데도 녀석은 여전히 굳건히 붙어 있다. 여호치 때문에 아직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 손으로 품속을 뒤져 검은 알약을 꺼냈다. 증폭단이라 하였던 그 약이었다.
“그 사기꾼 자식이 준 약을 먹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미련 없이 알약을 입안으로 던져 넣은 야혼이 천천히 씹어먹기 시작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   *   *
야혼이 주화입마를 앞당긴다는 증폭단을 복용하고 있던 그 순간 여호치 일행 또한 지하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은
야혼이 있는 곳과는 제법 떨어진, 성모봉에 있는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인 성모궁 지하 연옥이었다.
“궁주님!”
화소미가 공손한 어조로 여호치를 불렀다. 그런데 그녀와 같이 갔던 장대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성모궁으로 들어오면서
어디쯤 떼어버린 것이었다. 이곳까지 들어온 사람은 여호치와 화소미 그리고 태웅과 추기영 네 사람이었다.
“아직 더 내려가야 합니다. 이 연옥의 가장 아래층에 그들이 있을 겁니다. 아직 살아있다면…….”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추기영이 놀라는 얼굴로 여호치를 쳐다보았다. 100년 전에 멸망한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더구나 지금 자신들이 있는
이곳은 지하 감옥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불의 사제라 불리었다. 전부 9명으로 성모궁에서 유일하게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정마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에 전부 이곳으로 투옥되었다.”
“그럼 밖에 있는 유골들은 전부 무공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태웅과 추기영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본 무수한 유골들, 도무지 셀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일반 양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 강호 최 절정 무인 100명이 나섰다니.
“정확한 사실은 나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을 먹고 자결했다는 것밖에…….”
여호치의 얼굴에 미약한 살기가 어렸다. 비록 신을 위한 죽음이었지만 그들의 죽음은 불공평했다. 자살이라는 극약처방을 선택할
정도로 다급했다는 의미이리라.
“그럼 이곳에 진을 설치하고 독을 살포해서 100인의 성모척살대와 같이 동귀어진 했다는 말이네?”
“다 왔다.”
엄청난 크기의 불꽃 문양이 음각 된 석문 앞에 선 여호치가 추기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하늘을 향해 치솟을 듯 정교하게 새겨진 불꽃을 쳐다보던 여호치가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백색의 광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전신을 감쌌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무공으로 만든 기운이 분명할진대 내재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없이 성스러운 기운만이 가득했다.
무극대라미륵신공(無極大羅彌勒神功), 성모궁의 제일신공으로 오직 성모만이 익히는 무공이었다.
파괴의 무공이 아닌 화합과 평화를 목적으로 창안된 무공.
백색 광휘에 휩싸인 여호치의 손이 가볍게 휘둘러지고 손에 나온 백색의 광채가 불꽃 무늬의 석문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크그긍!
미약한 소성과 함께 연옥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앞을 가로막던 문이 사라지고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첫 광경은 천장에서 빛을 발하는 야명주였다.
“이런 곳이 감옥이라면 나라도 살겠다.”
안쪽을 휘 둘러본 추기영이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철창으로 막힌 옥을 연상했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무릉도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호사스러웠다. 여호치 또한 추기영과 같은 심정이었는지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대로 이곳은 감옥이 아니었다. 어느 한 곳 나무랄 데가 없었다. 오히려 일반 집들보다 더욱 화려한 곳이었던 것이다.
단지 외부와 격리되었다는 것과 햇빛이 들지 않는 것을 빼고는.
“이곳이 불의 사원이었어.”
안쪽을 둘러보던 여호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불의 사원. 신성한 장소 중 하나였다. 성모궁이 외부로 드러난 명교의 성전이라면 불의 사원은 내부에 존재하는 성전이었다.
오직 성모만이 알고 있다 하였던 불의 사원이 성모궁 연옥, 가장 깊은 지하에 있었던 것이다.
“오셨습니까, 성모(聖母)시여!”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3)- 보약이다, 보약(2)
“허억!”
태웅과 추기영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신들, 전부 9명의 백색인간이 허공에서 떨어진 듯 나타난 것이었다.
“아직 살아 계셨군요.”
“허허! 많은 세월이 흘러나 봅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은 시간이 정지된 곳입니다.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가 없지요. 저는
제일 사제, 좌정인(左丁仁)입니다.”
백의인 중 수좌로 보이는 자가 여호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불의 사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무극대라미륵신공만이 유일한 방법이고 그 무공을 익힌 사람은 성모인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사람은 변해도 무극대라미륵신공이 주는 의미는 언제나 같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기에 과거 성모에 대한 일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전대 성모님은…….”
“이미 명교는 사라졌습니다. 빛의 궁전이었던 이곳은 교도들의 시신으로 공동묘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100년 전이지요.”
여호치의 말을 듣던 9인의 사제들이 무릎을 꿇었다. 자신들이 불의 사원으로 추방될 때부터 이미 예견한 일이었지만 벌써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니.
“주원장이었습니까?”
9인의 몸에서 죽음의 기운이 파랑처럼 흘러나왔다. 그들 모두가 주원장의 야망을 알고 있었다. 해서 그를 내치자 하였었는데
교주와 성모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나라를 세우면 명교는 더욱 번창하리라 하였다. 지하에서의 포교활동이 아닌 국교로서 대우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주와 성모의 결정이 결국 명교의 멸망을 불러오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그는 명나라라는 대 제국을 세웠지요. 우리 명교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말입니다. 그래도 명교는 잊지 않은
모양입니다. 나라 이름을 명(明)이라 한 것을 보면…….”
“명교(明敎)를 친 자들은 누구입니까. 주원장의 성격으로 보건대 그자는 결코 나서지 않았을 터인데.”
“무림인들입니다. 중원의 무인들, 우리 명교를 마교(魔敎)라 하더군요. 정사를 막론하고 없애야할 사악한 마인들.”
“큭! 하하하! 프! 하하하!”
9인의 인물이 고개를 쳐들며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분노를 가득 담은 웃음. 명교가 멸망했다 하였을 때도 아무 표정 없던
그들이 무림인들이 그 주범이라 하자 폭발적인 분노를 드러낸 것이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한 순간 웃음을 멈춘 좌정인이 여호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타는 듯한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얼굴 전체가
차갑게 굳어버렸다.
“불의 사원을 중원에 지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치가 이곳에 온 목적이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곳에 불의 사원이 있는 줄 알지 못했다. 단지 명교의 3대 성물
중 2가지를 찾으러 왔을 뿐이었다. 아베스타와 성화(聖火)가 그것이었다.
아베스타는 명교 경전이었고 성화는 인세에 존재하는 16가지 불을 이용하여 만든 명교의 성물이었다.
그 2가지 성물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왔는데 불의 사원일 줄은 여호치도 몰랐던 사실이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성모님. 그런데 저 아이들은…….”
“좌사와 우사재목입니다. 사제들께서 지도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오! 대단한 기재를 거두셨군요. 대력패왕지체와 전륜마왕지체가 아닙니까?”
놀라운 말이었다. 태웅이야 수천구신체를 타고났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추기영조차 전륜마왕지체를 타고났다는 말이었다.
결국 개봉사괴라 불리던 4명은 전부 수천구신체를 타고났다는 것이 아닌가.
“그랬군요. 그래서 무음항마혈탁이 울었군요.”
여호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고의 신기인 무음항마혈탁에 소리를 낼 수 있는 추기영의 능력이 의아했는데 이제야 그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이곳 성모궁에 저희들 말고 4명이 더 있습니다. 정파와 마도련에서 나온 사람들이지요.”
“알겠습니다, 성모님!”
불의 사제 9인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살기였다. 명교를 멸망시킨 자들의 후예가 이곳에 있다고 한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해한 자들의 후예가.
딱! 딱딱딱딱!
여호치의 말을 들은 추기영이 거칠게 철탁을 두드렸다. 으레 기분이 상했을 때 그가 버릇처럼 치는 목탁소리였다.
“아미타불! 호치시주, 그들 중에 연작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우리가 이곳에서 나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려지면 안돼.”
사실 그동안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을 데려왔던 이유는 화소미와 자신 둘 만으로는 성모봉까지 올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데려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더구나 냉소소와 당가려는
300년 전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 어쩌면 최고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친구를 죽이겠다 이 말인가? 사람을 잘못 봤군.”
“어디 가냐?”
몸을 돌려 나가는 추기영을 향해 여호치가 소리를 질렀다. 추기영뿐 아니라 태웅마저 그를 따라나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와 태웅은 말이다. 부모님들이 명교도여서 너에게 협조하겠다고 했다. 그분들 같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헌데 네 지금 태도는 뭐냐? 이제 저 늙다리들이 생겼으니 친구도 필요 없다 이 말이냐?”
“갈! 닥치지 못할까 이놈!”
좌정인의 몸에서 자욱한 살기가 흘렀다. 광명우사와 좌사의 재목이 수천구신체를 타고났다 하여 내심 흐뭇했는데 말본새는 그게
아니었다. 명교신자가 아니었다. 명교 신자라면 성모에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이나 닥쳐 늙다리! 친구마저도 죽이는 게 당신네들의 교리라면 누가 따르겠나. 여호치 잘 생각해라.”
“지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쿡! 미친년. 한마디만 해줄까? 야혼과 너를 두고 선택하라면 무조건 야혼이야. 너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고.”
여호치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석문 밖으로 나왔다. 자신들의 행동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들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할
수 있다면 여호치를 도와주고 싶었다. 서대시전에서 사기 치며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건설적인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잘못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설마 지금 죽이지는 않겠지?”
“내가 마음을 바꾸어도 안되겠냐?”
“늦었소이다 호치시주.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데 우리의 욕심이 너무 과했소이다.”
여호치를 향해 합장한 추기영이 몸을 돌렸다.
“좋다! 죽이진 않으마. 하지만 최대한 도망가야 할거다. 비록 너의 부모들이 명교도였지만, 나 또한 수천구신체를 타고난
자를 봐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기회는 주라! 그동안의 정리가 있는데.”
여호치를 향해 씁쓸한 웃음을 남긴 두 사람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궁주님!”
두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화소미가 안타까운 얼굴로 여호치를 불렀다. 벌써부터 궁주의 역할이 시작된 것이다.
사사로운 정을 멀리하고 오직 명교의 번영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인생이.
“화당주 저 참 나쁜 년이죠? 아직 교리도 제대로 알지 못한 년이 궁주 행세를 하는 걸 보면 말이에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주원장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영입했지만 그에 의해서 명교는 멸망하고 말았다.
완전한 신자가 아니면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명교를 위해서라면 친구마저도 벨 수 있는 그런 자들로 명교를 만들
것이다.
누구도 배신하지 않는 그런 교를.
“하루의 시간을 주마. 그 안에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
“니미씨팔타불! 우리 주제를 알았어야 했는데. 연작 새끼를 만나면 뭐라 하냐 이거.”
정신없이 몸을 날리며 추기영이 투덜거렸다. 올바른 선택을 했다며 큰소리쳤는데, 20대의 꿈이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이쪽으로 가자 대머리.”
지상을 향해 달려가던 태웅이 갑자기 길을 틀었다. 그가 가려는 곳은 감옥에서 다른 곳으로 뚫린 통로였다.
“이래가지고 연작시주를 찾을 수나 있으려나 몰라. 어디쯤 있을까?”
“아마 약이 있는 곳에 있을 거다. 그놈이 이곳에 온 목적은 정력제밖에 더 있냐?”
“그러니까 약고가 어디 있냐고?”
“잔소리 말고 발르기나 해 자식아. 지가 가봐야 이곳 성모궁 안이지. 우선은 그 늙다리들에게서 도망가는 게 급선무야.”
“에라! 씨펄타불이다.”
여호치가 있는 아래쪽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 추기영이 태웅을 따라 정신없이 다리를 놀렸다.
*   *   *
“굉장하구먼 이거!”
전신에서 폭발할 듯 용솟음치는 힘을 느낀 야혼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증폭단을 복용하고 잠시 후에 나타난 현상은
엄청났다.
전신 혈도를 타고 무서운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래쪽의 단전이 활짝 열려버린 듯 그 곳으로부터 엄청난 힘이 온몸으로
치달렸다.
허리춤에서 도를 뽑아든 야혼이 석문을 향해 쳐들며 호흡을 골랐다. 일 도에 해결하지 못하면 이곳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석문이 있는 곳이 아니면 나갈 곳이 전혀 없고 먹을 것 또한 없다.
결국 유일한 살길은 석문 안쪽이었다.
“이야합! 염왕수라참(閻王修羅斬)!”
온몸의 힘이 극한에 달했다고 느끼는 순간 석문을 향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염왕도법(閻王刀法) 일 초를 펼쳤다.
순간, 야혼의 도(刀)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거리며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의 몸에서 쏟아지는 광채는
분명 백색인데 반해 도에서는 검은 색 기운이 흘러나왔다.
잔뜩 솟구친 검은 기운이 번쩍인다 싶더니 이내 전면 석문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과앙! 과과광!
300년 전 겁천십웅의 염왕도법은 과연 대단했다. 거의 반 장 두께의 석문이 종잇장 찢기듯 터져나갔다.
“우웩!”
시뻘건 피를 토해낸 야혼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증폭단의 효력은 바로 나타났다. 일도를 전개하자마자 온몸에 힘이 빠지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씨팔! 이정도 가지고.”
엉금엉금 기어서 안으로 들어간 야혼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본 야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이곳은 성모궁의 약고였던 것이다. 사방을 빙 둘러치듯 곳곳에 약재들이 산재해 있었다. 물론
100년이란 세월동안 대부분이 썩어버렸을 터이지만 냄새는 여전했다.
“약은 말이야 오래 묶을수록 효과가 좋은 거라고.”
힘겹게 발을 뗀 야혼이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선은 별도로 보관된 약을 먼저 찾아야 했다.
희미한 눈으로 정신없이 뒤지던 야혼이 이내 환성을 질렀다. 마개로 막힌 조그마한 병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뚜껑을 열자 향긋한 냄새가 가득 풍겨 났다. 한 순간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재빨리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제 좀 살 것 같군.”
약 기운이 도는 조금 전보다 훨씬 정신이 맑아졌다. 조금 여유가 생긴 야혼이 조그마한 약병을 들어냈던 곳을 살펴보았다.
“허걱! 이놈은?”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상자를 열어본 야혼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전설로 회자되는 만년설련(萬年雪蓮)이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존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상자 속에는 인세에 보기
드문 많은 약재가 담겨있었다. 정력제를 찾느라 약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던 터라 야혼이 알고 있던 약제만도 상당수였다.
100년 짜리 하수오가 아닌 실제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뿐만 아니라 구지자엽초라는 신비한 약재도 있었다.
그 모두가 무림인이라면 꿈에도 그리는 신비의 영약이었다. 무림 고수를 키워낸다면 수십 명도 가능할 것 같은 그런 약재들이
야혼의 입안으로 꿀꺽 꿀꺽 넘어갔다.
“꺼억! 배부르다.”
거의 이 각에 걸쳐 약고 안에 있던 모든 약을 전부 털어 넣은 야혼이 트림을 하며 배를 두드렸다.
“아마 정력제로 배 채운 놈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다. 이게 끝인가? 어라 이건 또 뭐야?”
나른한 포만감에 젖은 야혼이 아직 남은 약이 있나 싶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벽면에 써진 글을 발견하고는 이채를 발했다.
-이곳에 있는 약재는 수십만 명교도를 위한 약이다. 항상 교도들을 생각하며 조금도 사심 없이 대해야 한다. 과욕은 금물이란
사실을 명심하라.
금강지력으로 써진 글귀였다.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약재는 전부 치료용이었다 이 말이네? 사기꾼 같은 놈들.”
그랬다. 약고에 있던 약들은 무공을 익히는 무인들에게 주는 영약이 아니라 교도들을 끌어들일 때 쓰이는 약이었다.
우선은 기(氣)치료를 해보고 그마저도 안 되는 중환자들에게 조금씩 복용시켜 신통력을 발휘할 때 쓰인 것들이었다.
이른바 기적을 일으키는 기구들이었던 것이다.
“과욕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배터지게 처먹었는데도 아무이상……  없는 게 아니네?”
갑자기 뱃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치오르며 온몸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와락 겁이 난 야혼은 재빨리 가부좌를 하며
태을건곤심법을 끌어올렸다. 영약을 먹고 나서 운기행공을 해야한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가 먹었던 약이 어디 보통 영약인가.
조금씩 복용하며 꾸준히 운기행공을 해야 완전한 내공으로 소화시킬 수 있을 터인데 단순한 정력제 정도로 생각하고 마구
처먹었으니 부작용이 난 것은 당연했다.
태을건곤심법을 운기하며 약 기운을 다스려 보려했으나 소용없었다. 더구나 그가 처음 먹었던 소량의 물약은 한 방울만 먹어도
무적고수가 된다는 공청석유(空淸石乳)였으니, 지금의 결과는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으아악! 아아악!”
결국 약 기운을 다스리지 못한 야혼이 사방을 뒹굴며 고함을 내질렀다. 전신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참을 길이 없었다. 한번은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라 온몸을 태을 듯하다가, 잠시 편해졌다 싶으면 다시 차가운 기운이 전신을 강타했다.
웬만한 고통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야혼이 죽을 듯이 비명을 지르며 뒹굴고 다녔으니.
야혼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완벽한 폐허로 변했다.
“끄응! 아직 살아있네?”
거의 반 시진 동안을 뒹굴고 다니던 야혼이 정신을 차린 곳은 처음 들어왔던 약고가 아니었다.
“허미, 기절하겠군. 내가 저랬단 말이야?”
뒤쪽을 쳐다보던 야혼이 깜짝 놀란 얼굴로 자신의 몸을 쳐다보았다. 몇 개의 석실을 지나쳐 온 것 같은데 모든 벽들이 부서져
있었다. 처음 염왕도법으로 깨트렸던 석문만큼은 아니었지만 각각의 벽들은 한 자 두께는 되어 보였다. 그것들을 전부 자신의
몸으로 깨트리며 왔다는 말이었다.
“근데 이곳은 도대체 어디야?”
어디 다친 곳이 없나 싶어 몸을 살피던 야혼이 이내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100년의 세월 동안 방치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늑한 침실이었다.
“무덤을 이런 식으로 꾸며두었나? 이것들이 돈이 썩어 났구먼.”
침실과 별반 다름없이 꾸며진 방의 안쪽에는 관이 있었다. 그런데 관 또한 이상했다. 완전하게 밀봉된 상태가 아니었다.
사람의 머리가 있는 부분이 활짝 열어있었다. 여인이었다. 더하여 그 속에는 이상한 액체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요컨대
관속에 있는 여인은 얼굴만 내놓은 채 나머지 부분은 전부 액체 속에 잠겨 있는 것이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4)- 이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
“이년은 왜 이렇게 이쁜 거야 이거!”
관속을 쳐다보던 야혼이 일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가히 충격적인 얼굴이었다. 이미 싸늘히 식은 시체일진대 마력적인 여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더하여 아래쪽에서 맹렬히 솟구치는 기운이라니. 바로 덮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밀려왔다.
여인의 얼굴을 향해 손을 가져가던 야혼이 흠칫 정신을 차렸다.
“내가 여자 배 밑에 깔려 죽는 게 소원이지만 그래도 죽은 시체는 아니다.”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심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겪지 못했던 일이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여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정력제가 너무 강해서 그런가? 아니면 드디어 변태의 경지에 들어선 건가.”
“놀랍군요. 광애성모지체의 여인을 보고도 참아내는 사내가 있다니.”
“허억!”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낮은 비명을 지른 야혼이 재빨리 들어왔던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앙!
“어이쿠! 이런 씨팔!”
평소 몸 상태이거니 하고 무풍무영술을 펼쳤던 야혼이 고함을 내지르며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벽면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정력제라고 먹었던 영약이 일부분 내공으로 화해 있었던 걸
모르고 있었다. 더하여 입고 있는 옷이 팽팽히 부풀어올랐다는 사실도.
“영악하군요. 상대를 확인하는 것보다 먼저 도망치는 걸 택하다니.”
“어?”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야혼이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돌렸다. 말을 걸어 온 사람은 시체라 생각했던
여인이었다.
“그곳에서 못나오는 거요?”
“나갈 수는 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럼 다음에…….”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만…….”
“그곳에서 나올 수 있다면서요.”
“지금은 못나간다고 했잖아요.”
“나오면 죽기라도 하는 게요?”
여인이 위험스러워 보이지는 않자 야혼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100년 전에 멸망한 성모궁 지하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인, 그 누구도 올 수 없다하였던 곳이고 100년 만에 찾은 손님이
자신들이라 생각했었는데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니. 호기심이 잔뜩 일었다.
“혹시 명교가 어찌 되었는지 아세요?”
“엥? 이건 또 뭔 소리여?”
명교의 근황을 묻는 여인의 말에 야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명교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여인은.
“혹시 이곳에서 100년을 살았던 게요?”
“벌써 100년이 흐른 모양이군요……”
여인의 얼굴이 아득하게 변했다. 100년, 꽤 오랜 세월이 지났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강산이 10번이나 바뀔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지는 생각도 못했다.
“내가 더 놀랐소이다. 어쩌면 그런 피부를 유지할 수 있는 거요?”
개봉에서 만났던 주천상이란 사기꾼보다 더했다. 100살이 넘은 할망구가 이제 갓 40대로 보였다. 더구나 얼굴에서 풍기는
폭발적인 염기라니.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참 명교에 대해 물으셨오. 다 죽었소이다. 지상은 보지 못해서 그곳의 상황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미 이곳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죽었을 거요.”
“그랬겠지요. 그 독을 피할 사람은 결코 없었을 테니까. 이 천애설은 만고의 죄인이 되고 말았구나…….”
여인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그런데 천애설이라 하였다. 100년 성모궁의 궁주였던, 광애성모지체를 타고 났다하였던 성모
천애설이 바로 그녀였다. 모든 교도들이 죽었는데 그녀만은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100년 전 성모였던 그 여자란 이 말이오? 기절하겠군. 교도들은 전부 죽여놓고 자신만 버젓이
살아있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말이 안되겠지요. 왜 이런 상태로 살아있는지 나도 모르니까. 관 밖으로 나가서 일 다경 이상만 버티고 있으면 녹아 사라질
텐데……. 여전히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았군요.”
“그렇게 하면 당신의 죄가 사해질줄 알았소이까. 당신을 따르다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오. 명교의 후예라는
명목으로 지금까지 사육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오. 당신은 혼자지만 수만 명의 사람이 지난 100년 동안
고통받았소. 단지, 부모가 또는 할아버지가 명교였다는 사실만으로 말이오. 그들은 짐승이었소. 소 돼지 보다 못한 존재로
낙인찍혀 놈들의 노리개가 되었소. 소를 죽이면 죄가 되지만 명교도는 죄가 되지 않소. 오히려 상금을 받는단 말이오.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이오.”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세상을 너무 몰랐어요. 돌아가려 했을 때는 모든 게 끝나있었어요. 단
한번도 내 의사를 밝히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지요. 17살짜리 어린애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이었으니까.”
“빌어먹을…… 개새끼들!”
야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명교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성모라는 여인도 결국 이용당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녀와
영약을 앞세워 무지한 양민들을 선동하여 사리사욕을 취한 놈들이 있었다.
그놈들 중의 한 명이 명나라를 세웠던 주원장이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나는 성모가 그런 것인 줄 몰랐어요. 모든 교도들이 보는 앞에서 독약만 먹으면 되는지 알았지요.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어쩌다 성모가 된 내가 명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거든요. 당신은 어쩔 건가요. 명교를 멸할 건가요?”
“쿡! 무슨 수로 내가 명교를 없앤단 말이오. 주원장도 못한 일인데…….”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듯 낮게 웃었다. 과거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명교뿐만 아니라 명교를 그렇게 만든
무림인들까지도 전부 없애버리는 꿈도 꾸었었다. 그러나, 그냥 꿈이었을 뿐이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은 계집을
탐하며 사기 도박하는 것이고, 가장 어울리는 장소는 역시 서대시전이다. 때문에 명교 어쩌고 하는 천애설의 말이 우습게
들렸다.
“글쎄요 세상일은 어찌 될지 알 수 없지요. 나 또한 성모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신이 잉그라 마이니우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잉그라 마이니우?”
“명교의 교리는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을 동시에 수용합니다. 즉 선신인 아우라 마즈다와 악신은 잉그라 마이니우는 서로
쌍둥이라 인정하는 거지요. 태초부터 선악은 같이 공존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악신인 잉그라 마이니우의 힘이 강해지면
당연히 선신인 아우라 마즈다는 약해지지 않겠어요?”
천애설도 야혼이 야차혈마지체를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광애성모지체를 타고난 자신의 몸을 보고도 달려들지 않은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다고 하였다. 선신의 운명을 타고난 자와 악신의 운명을 타고난 자. 명교에 내려온 전설을 보면 악신인
잉그라 마이니우가 되는 조건 중의 하나가 야차혈마지체였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악신이니 뭐니 하는 건 되지도 않을 것이며 되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 이제 어쩔
거요?”
“이제는 내 갈 길을 가야지요. 명교의 후예가 성모궁에 왔으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까.”
“알고 있었소?”
“이곳은 성모궁의 후예가 아니면 결코 들어올 수가 없는 곳입니다.”
“허억!”
싱긋 미소짓는 천애설을 쳐다보던 야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도저히 인간의 미소로 볼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그만 가보세요.”
“그럼!”
천애설을 향해 어정쩡히 고개를 숙여 보인 야혼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불쌍한 여인이지만 딱히 해줄 일도 없다. 옆에서
죽음을 지켜보는 것도 못할 짓이고 보니 서둘러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가만! 그냥 갈게 아니잖아.”
자신이 박살낸 문을 통해 걸어나가던 야혼이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멈춰 섰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씩씩한 걸음걸이로 침대까지 다가간 야혼은 한순간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관속에서 나와 옷가지를 주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었다. 새하얀 조각상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이죠?”
“그게 그러니까……. 성모는 결혼하면 안 되는 거요?”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결혼이라니, 방금 만난 여인이고 100살이 넘은 여인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하고 만
것이었다.
“훗! 지금 저에게 결혼신청하는 거예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말에 천애설이 멍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다가 실소를 흘렸다. 물론 명교의 교리에 보면 성모의 육체를
보고도 육욕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부군이 된다는 항목이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교리일 뿐 지금껏 혼례를 올린 성모는
없었다.
오직 교도들의 영원한 우상으로 살아가는 운명일 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들이닥친 청년이 혼례 운운하며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유가 뭐죠? 제가 불쌍해선가요?”
“이유는 무슨. 너무 예뻐서 그렇지. 그냥 달라면 안 줄 거 아뇨.”
순순히 응해주는 천애설의 행동에 여유를 찾은 야혼이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날렸다.
“제가 100살이 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런 말을 하나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어. 몸이 받아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지. 잔말 말고 지금 할 수 있어 없어.”
“미안하지만 안되겠네요. 다음 대 성모가 나타날 때까지는 청결한 몸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거든요.”
“그럼 됐군. 자 시작하자고. 시간 없으니까 특별히 혼례식 같은 건 생략하고 바로 초야에 들어가자고. 근데 나 좀 씻어야
되는데 물 없어? 아 저곳이면 되겠네.”
대뜸 안면을 바꿔 반말을 지껄인 야혼이 이내 옷을 벗더니 그녀가 나왔던 관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
거침없는 야혼의 하는 양을 쳐다보던 천애설이 할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사고기능이 정지돼버린 듯했다. 그저
멍한 얼굴로 쳐다볼 뿐 옷을 입지도 그렇다고 큰소리로 쫓아내지도 못했다.
“뭐해? 몸 닦을 것 줘야지. 그리고 당신 후예는 탄생했으니까 안 된다는 말은 하지마. 그년 따라 이곳까지 왔으니까.”
여전히 망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천애설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야혼이 관에서 빠져나와 벗어놓은 옷에서 상비약을
꺼냈다.
“에, 이건 춘약이니까. 많이 흡입하면 안된고. 아주 조금만 줄게. 근데 내 몸이 왜 이리 불었지?”
허리 둘레를 이리저리 재보던 야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을 많이 먹어 배가 불러서인 줄 알았었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온몸이 눈에 띄게 불어 있었다.
“춘약 말고 더 좋은 게 있어요. 하오마 즙이라고.”
“하오마?”
“명교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환각제예요. 마지막에 쓰려고 남겨둔 게 있거든요.”
‘내가 왜…….’
무심결에 뱉어낸 말에 깜짝 놀란 천애설이 침대 머리맡으로 나아가던 손을 멈췄다.
“원래 나하고 있으면 다 그렇게 정신이 없어.  워낙 잘나서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뭐해, 그 하오마 즙인가
하는 놈 구경 좀 하자니까.”
“아! 네.”
쓰인 듯 서랍을 열어 조그마한 약병을 꺼내 야혼에게 내밀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얼마나 먹어야 하는 거지?”
“술에 타서 먹으면 돼요.”
“그거 좋은 방법이네? 혹시 하오마 즙인가 하는 거 더 있어?”
춘약 대용으로 최고다 싶어 물었으나 천애설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최후를 위해 남겨둔 하오마 즙 전부를 내 놓은
모양이다.
“됐어. 그냥 춘약 쓰지 뭐. 정말 없어?”
“없다니까요?”
“알았다고, 큰소리는…….”
천애설의 얼굴이 어지간히 풀리자 재빨리 술병에 하오마 즙을 부은 야혼이 한잔 가득 따랐다.
“자 마셔. 이건 합환주.”
“이상하게 생겼군요.”
하오마 즙이 든 술을 받아 마신 천애설이 불끈 솟은 야혼의 상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이건 이상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잘생겼다고 하는 거야. 이리와 봐! 이왕 보려면 확실하게 봐야지.”
“싫어욧.”
수줍다는 듯 천애설이 고개를 틀었다.
“안보면 후회할텐데?”
“아흑!”
천애설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야혼이 와락 허리를 껴안아 버린 것이었다.
“당신은 하오마 즙 안 먹어요?”
“참, 나는 야혼이야 야혼. 그리고 나에겐 당신이 하오마 즙이라고.”
천애설의 눈을 빤히 쳐다보던 야혼이 핥듯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17살 때부터 세상과 격리되었다고 하였다. 오직 성모로만
추앙 받느라 이성이 뭔지 남자가 뭔지 알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야혼만의 착각이었다.
그녀가 술에 타 마셨던 하오마 즙의 효과는 야혼이 즐겨 사용한 춘약 이상이었다. 경험이 없을 천애설을 생각해 가벼운
입맞춤부터 시작할 작정이었는데 그녀가 더 적극적으로 응해온 것이다.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로 끊임없이 야혼을 탐했다.
“허! 이 여자가, 급하게 하면 다 되는 줄 아나?”
허겁지겁 달려드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던 야혼이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인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그녀의 행동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기다려라! 기다려.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리라.”
천애설의 손을 싸잡아 침대에 눕힌 야혼이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낮은 비음을 토해내는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으며 천천히
혀를 밀어 넣었다.
움찔, 천애설이 음미하듯 혀를 휘감아오자 흡족한 얼굴이 된 야혼이 손을 천천히 움직여 나갔다.
봉긋 솟은 아담한 둔덕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유실이 발딱 고개를 치켜세웠다. 피식 웃은 야혼이 손끝으로 부드럽게 유실을
애무했다.
“허엇! 으음!”
가슴에서 밀려오는 기이한 느낌에 천애설의 입에서 탁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하오마 즙으로 인하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머릿속에 덩그렇게 한가지만 떠올랐다. 방금 전 보았던 야혼의 벗은 몸과 잔뜩 발기한 상징.
가슴에서 느껴지는 모호한 열류에, 달뜬 신음을 발하던 천애설이 야혼의 상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녀의 아랫배를 더듬던 야혼의 손이 미끄러지듯 점점 깊은 곳으로 향해갔다.
“헉! 없다.”
소담스런 숲을 연상하고 손바닥을 가져다 대단 야혼이 내심 헛바람을 들이켰다. 성모 천애설 또한 여호치처럼 그곳에 터럭 한
올 없었다.
그랬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 명교의 통과의식 중에 음모를 미는 의식이 있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런 의식이
사라졌지만 오직 성모만이 지켜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쁘니까 용서해준다. 허억! 17살밖에 안됐다면서 뭐 이래.”
명주고름 같은 부드러운 손길이 뜨겁게 달아오른 상징을 꽉 틀어쥐자 야혼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뜩한 쾌감을 느끼면서도 천애설의 행동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수줍음 없는 노골적인 반응, 처녀라고 믿기 힘든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건 하오마 즙에 대해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춘약이 오직 성적인 욕망만을 자극하는 데 반해, 환각 작용을 하는
하오마 즙은 무의식적으로 환상을 만들어내는 작용을 한다.
즉 잠재되어 있던 환상을 극대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해서 하오마 즙은 다방면으로 사용이 가능했다. 그
중에서도 광적인 신도를 만들 때 가장 유용하게 사용되어지곤 하였다.
“아이고 목마른 내가 우물을 파야지. 그리 붙잡고만 있으면 뭐가 이루어 지냐?”
터질 듯한 상징을 가만 붙잡고만 있는 천애설을 흘낏 내려다본 야혼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천천히 움직였다.
“이렇게 하는 거야. 알았어?”
열락의 도가니. 거의 6개월 만에 여인의 몸을 접한 야혼과 하오마 즙이 주는 환락에 빠진 천애설과의 관계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침상이 부서질 듯 격렬하게 서로를 탐했다. 야혼의 몸놀림을 능숙하게 따라하는 천애설의 행동은 첫 경험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다소 난잡하다 싶은 체위를 취해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아니 조금 시간이 흐르자 더욱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야혼의 입에서도 말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오직 갈망의 정점을 향해 줄달음치는 밭은 숨소리만이 서로의 빈
곳을 메워나갔다.
침대 위에서 시작된 관계는 이윽고 이상한 액체로 가득 찬 관속에서 끝이 났다.
“고마워요.”
“뭐가?”
“내가 더 이상 성모가 아닌, 여자라는 걸 알게 해주어서.”
사람을 두루 상대해보지 않았지만, 야혼의 속내는 알고 있었다. 명교의 성모라는 우상(偶像)이 아닌 인간이란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일부러 그랬던 것이다.
“그들이 준 독을 먹고 제 방으로 왔어요. 하오마 즙을 한 병 보관하고 있었거든요.”
고통을 잊기 위해서였다. 중독이 되어 비몽사몽 하오마 즙을 찾기 위해 방을 뒤지던 중, 어떤 비밀 장치를 만졌는지 우연히
이곳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온몸에서 열이 나더군요. 저도 모르게 찾아든 곳이 바로 이 관속이었어요. 그런데 살아났더군요.”
관 안에 들어 있는 액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관속에 들어가 있으면 독의 활동이 멈췄다. 아울러
관속에 들어가면 이내 졸음이 몰려왔다. 대부분 잠을 자며 세월을 보냈다. 잠을 자는 시간에는 신체 기능이 멈춰버린 듯했다.
별반 무공도 익히지 않았음에도 지금껏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였다.
“저…….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선 죄책감 가질 것 없어. 그들은 전부 노래의 집에 가있을 테니까.”
“부모님이 명교도였나요?”
천애설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야혼이 말한 노래의 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오직 명교 신자만이 알고 있는
말이었다. 명교도들이 죽어서 가는 곳. 선한 사람은 노래의 집으로 가고 악한 사람은 거짓말의 집으로 간다고 되어 있었다.
“앞으로 어떡할 텐가.”
그러나 야혼은 묻는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그들의 소식을 알았으니 이제 정리를 해야죠. 지켜보는 사람도 있으니까, 무섭지도 않을 것 같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바닥에 뒹굴고 있는 도를 가리키며 말끝을 흐렸다.
“죽여달라……. 이 말이군.”
야혼의 묻는 말에 천애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삶에 대한 미련 때문에 지금껏 살아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알지를 못했고, 지상의 상황이 궁금했기에 지금껏 견디며 살았을 뿐이었다.
이제는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더하여 다음대의 성모도 현세 했으니 살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싫어! 그런 짓은 두 번 했으면 됐어. 더 이상은 하지 않기로 했어. 죽고 싶거든 혼자 죽어. 살고 싶으면 말해 내가
방법은 일러줄 수 있으니까.”
무심한 듯, 야혼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어 왼손을 들어올려 가만히 쳐다보았다. 10번의 살인 경험 중,
2번은 왼손을 사용했었다. 그녀들의 심장에서 솟구친 피로 왼손을 적셨다. 그때의 모습은 화인처럼 머릿속에 박혀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기억으로.
벌레라도 털어 내듯 왼손을 흔든 야혼이 이내 관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나지막이 말했다.
“태을건곤심법이라고 내공심법이야. 시험해 봤는데 독을 중화시키는데는 괜찮아. 나에게 한번 준 대가라 생각하면 돼.”
천애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태을건곤심법을 읊었다. 그녀의 인생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죽음이나 삶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주고 싶은 뿐이었다. 태을건곤심법을 익힌다면 살아날 것이고, 아니면 지금처럼 관속에서 살든지 스스로
자결하게 될 터였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에 살죠?”
“나? 한번 줬다고 권리 주장을 할 모양인데 꿈도 꾸지마.”
관속에서 벌떡 일어난 야혼이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한 번 주면 권리 주장을 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 대가를 받으면 권리 주장을 못해. 그래서 태을건곤심법을 알려 준거고. 어디로 가야 되는 거지?”
낑낑대며 바지를 껴입은 야혼이 천애설을 쳐다보며 물었다. 성모봉에 왔던 목적은 대충 달성했으니 이제는 다시 개봉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나가서 왼쪽으로 틀면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와요.”
“그럼 잘 있어. 참! 혹시 이곳에 색공 같은 거 있나? 참! 나도 바보가 다 됐군.”
천애설에게 무공에 대해 묻다니. 한심하다는 듯 야혼이 자기 머리를 퉁퉁 쥐어박았다. 무공도 전혀 익히지 않은 그녀가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천애설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북쪽 침묵의 탑 쪽에 가면 비고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성모궁을 지키는 무인들이 그곳에서 무공을 익혔다 하더군요. 이제
어디 사는지 가르쳐 주세요.”
“이것 봐 아가씨. 대가는 한번 줬을 때만 바라는 거야. 아니면 말을 하지 않고 대가부터 받던지. 그리고 지금은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옷을 걸친 야혼이 천애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는 그녀의 콧등을 튕기며 사악한 미소를 날렸다.
“혹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살아난다면 한가지만 조심하면 돼. 나처럼 생기고, 친절하게 잘해주는 놈을 만나면 무조건
피해. 아무리 엄청난 대가를 받더라도 함부로 주지 말고. 알았어? 이건 인생 선배로서 충고야.”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야혼이 처음 들어왔던 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10권의 무경과 춘서가 들어있는 짐을 챙겨들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아무리 이곳에서 혼자 살았다지만 그 정도를 모를까. 성모가 되기 전에는 나도 고아였어요. 다만
죽어야 할지 살아야 할지 결정을 못해서 물었던 것뿐이에요. 당신이 사는 곳을 가르쳐 주면 살라는 계시로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떠나는 야혼의 등에 대고 천애설이 나지막하니 중얼거렸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 자신이 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었다.
그들과 같이 죽지 못했던 것도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이거늘. 쓸쓸한 미소를 머금은 천애설이 관 밖으로 걸어나왔다.
이제는 정리할 시간이 된 것이다. 만인의 추앙을 받던 성모보다 고아로 살았던 시절이 훨씬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시고 남은 술을 한잔 가득 따랐다. 하오마 즙을 마시고 잠이 들면 모든 게 끝나 있을 터였다. 종착지는 지옥인 거짓말의
집일 테지만 두렵지 않았다.
첫잔을 마시고 두 번째 술잔을 따르려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고함소리에 손을 멈췄다.
“내가 사는 곳은 개봉의 서대시전이다. 하고 싶은 때만 와라. 올 때 하오마 즙 한 병씩 가져오는 것 잊지 말고. 그게
대가다.”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았으나 야혼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훗! 그럼 시도는 해 볼게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베어 문 천애설이 침대 모서리에 달린 기관장치를 누르더니 관속으로 들어갔다.
기이잉!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몸을 뉘인 관이 지하 깊숙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천애설 본인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할 터였다.
성모궁. 수 백년 전에 세워진 이곳은 여전히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5)- 반쪽의 염왕도(1)
“룰루루-! 캬! 개운하다.”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야혼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상쾌함, 천애설과의 관계로 찌뿌드드하기만 했던 몸이 날아갈듯 가볍게
느껴졌다. 온몸에 새로운 힘이 용솟음치는 듯했다.
몇 번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횟수를 세어가며 관계를 가졌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헤아리는 것조차 포기했다.
뱀처럼 착착 감겨드는 천애설의 육체에 이성을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삶의 목적인 정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확인했다.
인명록의 가장 앞장에 쓰일 여자는 당연 천애설이었다. 첫 관계임에도 그 정도였으니, 조금만 더 경험을 쌓는다면 뼈가
녹아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무공을 이용해서 자신을 이겼던 화소미와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더하여 기쁨을 주는 또 한가지. 이곳에 왔던 두 번째 목적인
색공의 존재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북쪽, 성모궁 북편에 가면 무공이 있다고 하였다. 그곳을 먼저 뒤지고 다음에 염왕도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실상 염왕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게다. 도살장 이 노인 때문에 찾아보기는 하겠지만 굳이 발품 팔아가면서 찾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곳인가?”
한참을 걷던 야혼이 눈앞을 가로막는 검은 건물을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일반 성모궁의 건물과는 달리 이 건물만은
검은 색이었다. 검은 숲에 묻힌 탓에 멀리서 본다면 건물로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엥? 그러고 보니 이곳은 묘지잖아.”
주변을 휘익 둘러보던 야혼이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유골들 때문이었다.
명교에서는 예로부터 조장(鳥葬), 풍장(風葬)의 풍습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유골들이 그의 흔적이었다.
시체를 방치하여 새가 뜯어먹도록 하는 장례를 조장(鳥葬)이라 부르고, 풍장(風葬)은 말 그대로 벌판에 방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장례를 치르는 장소를 침묵의 탑이라 부르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전부 9층으로 되어있는 검은 색 탑은 백색의 궁이라는 성모궁과는 달리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끼이익!
100년만의 첫 방문자. 1층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명교가 멸망한 이래 최초의 방문자가 침묵의 탑에 들어섰다.
야혼이 들어선 1층은 장례식장이었는지 가운데로 난 길다란 단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2층 역시 1층과 마찬가지였다.
“씨팔! 뭣하려고 9층씩이나 만들어. 집어넣을 것도 없으면서.”
연신 투덜거리며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5층에 오르고서야 비로소 원하던 무공비급이 나타났다.
“낄낄낄!” 한 쪽 벽면을 장식한 비급을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양으로만 따지자면 하오비동보다는 못했지만,
대부분의 비급들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것이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머금던 야혼이 갑자기 떨떠름한 표정으로 책장을 걷어 차버렸다. 그토록 원하는 색공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러다 또 헛물켜는 거 아냐?”
조급한 마음에 6층으로 뛰어올라간 야혼이 재빨리 한 쪽 서가를 살폈다.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색으로 시작하는 무공비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즐거웠던 기분도 잠시, 잔뜩 굳어진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음 하하하! 쿠! 하하하!”
7층에서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20여 권의 비급이 있는 곳에 색이란 말이 들어간 무공이 무려
3권이나 있었다.
서둘러 서가 앞으로 다가간 야혼이 재빨리 그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들과 나란히 꼽혀진 다른 비급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오직 색(色)자가 들어간 책을 들고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어이그, 어디 보자. 도대체 무슨 내용이냐.”
헤벌쭉, 입을 벌린 채 처음 뽑았던 비급의 표지를 살폈다.
색색만화공(色色滿花功)이란 이름이 적힌 책자였다. 흥미로운 얼굴로 책장을 넘겨보던 야혼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치켜
올랐다.
대충 내용을 훑어본 결과 지금껏 오매불방 찾던 책이었다. 여자를 후릴 때 사용하는 춘약은 가장 하책으로, 생긴 것 없고
능력 없는 자들이 나 쓰는 수법이라 쓰여 있었다.
진정한 고수는 얼굴표정과 손짓만으로 여자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한다.
단지 그것뿐일까.
색색만화공이란 비급은 무림에서는 금서로 치부하는 책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야혼은 모르고 있었다. 200년 전
무면색마(無面色魔)란 별호를 가진 운몽(雲夢)이란 자가 창안한 비급으로, 한때 강호무림을 광란의 도가니 속으로 끌어들였던
비급이었다.
강호인들 대다수가 집밖으로 나서질 못했다. 자신의 부인이 또는 딸자식이 무면색마(無面色魔)에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하고 살아야 했다. 무면색마 운몽은 신분여하를 가리지 않았다.
황실 대관의 부인들은 물론이고 이름 쟁쟁한 무림 고수들의 부인들까지 몽땅 자신의 제물로 삼아버렸던 것이다.
결국 강호 공적으로 선포되어 강호 무림인들의 추격을 받기 시작했는데 무려 10년 동안을 도망쳐 다녔다는 것이다.
결코 그의 무공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마수에 걸린 여인들이 합심하여 도피를 도와주는 바람에 그렇게 늦춰졌던 것이었다.
그가 남긴 비급의 이름이 바로 색색만화공이었다.
“다음에 자세히 보기로 하고 근데 이건 또 어떤 색공이냐.”
“놀랍구나. 그것보다 훌륭한 비급이 널리고 널렸는데…….”
두 번째 비급을 살펴보려는 순간 통로 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불의 사제의 수좌인 좌정인이었다. 다른 동료들에게는 성모궁에 들어와 있는 무림인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는
무공비급을 챙기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성모 여호치가 말했던 무림인 중의 한 명을 발견했다. 등짐을 매고 있는 모양새가 수상쩍어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참으로 황당한 놈이었다.
바로 옆에 많은 무공 비급이 널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꺼낸 것은 단지 3권의 색공이 전부였다. 얼굴 표정 또한
가관이었다.
별 것 아닌 색공을 보고 천하를 얻은 듯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정말 무림인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런……. 이 늙탱이는 또 뭐야?”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야혼이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자신을 포함하여 11명이 전부였는데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라니. 더구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누구슈? 색공이 필요할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볼일 보쇼. 나는 다른 건 필요 없소.”
“오직 색공만 있으면 된다 이 말이냐?”
“그렇소. 설마 주인이라고 이것까지 달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이곳에 있던 자들 중 한 명이 분명했다. 먼저 햇빛을 보지 못해 백짓장처럼 하얀 얼굴하며, 자연스럽게 이곳을 찾은 행동으로
볼 때, 영문은 알 길 없지만 성모궁을 잘 아는 자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성모였던 천애설도 살아있는데 저 사람이라고 살아있지 말라는 법은 없을 터였다.
‘여호치 년이 이들을 데리러 온 건가? 그럼……. 좋지 않군.’
가만 앞뒤 상황을 재던 야혼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늙은이의 얼굴 표정을 볼 때 단순히 비급만 챙겨서 떠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이런 고수들이 남아있다는 소문이 강호 상에 나게 된다면.
“여호치가 전부 죽이라고는 하지 않았을 텐데. 성모와의 첫 만남에서 명령을 어길 셈이오.”
야혼의 말에 좌정인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지금껏 어떤 기운도 풍기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녀석은
자신이 살수를 쓸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추측으로 때려잡았을 것이다.
“머리가 좋구나. 그렇다. 성모님은 너희들의 무공만 없애라고 하셨다. 하지만 우린 그럴 수 없다. 아직은 명교의 존재가
비밀이어야 하거든.”
“그러니까 너희 늙다리들의 생각은 성모인 호치년을 이용해 먹기만 하겠다 이 말이구나. 교를 위해 필요하다면 그녀에게도 독을
먹일 텐가. 천애설처럼.”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더냐. 명교를 위해 죽는다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니니라. 무한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 너희들은 왜 아직 살아 있지? 명교가 멸망할 때 같이 죽었어야 하지 않은가. 한 살이라도 더 처먹은 니네들이
죽었어야 마땅하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말이 되냐고.”
“살아 있기에 명교를 다시 재건할 수 있는 게다. 우리마저 죽었다면 누가 명교를 재건하겠느냐. 무지몽매한 교도들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늙탱이 너는 선택된 놈이라 이거지? 저기 성모궁에서 죽어간 것들은 전부 병신들이고.”
“놈! 함부로 말하지 말라. 너희 같은 우매한 자들이 우리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느냐. 내 너에게 기회를 주마. 다시
명교에 들겠느냐?”
좌정인이 지금껏 야혼의 말을 받아준 이유였다. 명교에 대해 그만큼 알고 있는 사람은 명교도의 후예밖에 없고, 무공 또한
상당해 보이니 교에 가입시키면 그런 대로 써먹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이곳의 9층에 올라가면 명교 최고의 무공이 있다. 그 무공을 너에게 전수해주마. 네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명교에
들어오너라.”
“개새끼들! 나는 천애설이 아냐 병신아. 그년처럼 너희 개새끼들 말에 혹하는 멍청이가 아니라고. 명교? 만민평등? 그런 건
개나 줘버려 이 쌍놈 새끼야. 만민이 평등하다면 너 같은 새끼들부터 뒈져야 할 것 아냐, 이 자리에서 네가 뒈지면 명교에
들어가마.”
“이런 죽일 놈이!”
야혼의 말을 듣던 좌정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몰아쳤다. 태어난 이래 가장 많은 욕을 들어먹은 것 같았다. 불의 사제가
된 이래 누구에게도 험한 말을 들어보지 않았고 심지어는 교주마저도 자신에게는 공대를 했다.
그런데, 하급 교도의 자제로 보이는 자가 자신에게 막말을 하고 있는 게다. 그런데도 너무 어이가 없어 손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막연히 살기만 뿌리고 있을 뿐이었다.
“왜 말을 못하냐?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라 할말이 없는 모양이지. 너희 같은 새끼들 때문에 명교가 망하는 거야 이 좆같은
새끼야.”
“이- 놈!”
급기야 분노를 삭이지 못한 좌정인이 야혼을 향해 거칠게 일 수를 뿌렸다.
좌정인의 양손에서 뻗어 나온 화염의 기운이 순식간에 야혼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수에 재로 만들어 버리려는 듯 그의 공력은
가공했다.
그러나, 야혼 또한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성모궁 약고에서 먹은 영약들이 과하다 못해 부작용까지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공공십팔수(空空十八手)!”
왼쪽으로 몸을 날린 야혼의 입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터졌다.
겁천십웅의 일인이었던 십전수 구약종의 무공이 그의 손을 빌어 제 위력을 발휘하며 나타났다.
희뿌연 백광이 어린 그의 쌍수가 허공 가득 수를 놓았다. 동시에 18개의 손바닥이 좌정인이 쏟아낸 화염을 향해 날았다.
콰앙! 과앙!
동시에 두 곳에서 굉음이 터졌다. 야혼이 서 있던 뒤쪽의 서가가 터져 나가며 한 쪽 벽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울러
불까지.
“흐읍! 무변무적퇴(無變無敵腿)!”
울컥 넘어오는 피를 삼킨 야혼이 무풍무영술로 좌정인을 향해 다가들며 일 초의 퇴법을 펼쳤다. 퇴법 또한 대단했다. 뿌연
백무를 머금은 그의 오른 다리가 무서운 기세로 좌정인의 앞면을 향해 날았다.
“이놈이?”
좌정인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설마하니 자신의 일장을 가볍게 받아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더구나 놈이 구사하는 무공은
겁천십웅의 일인이라 하였던 구약종의 독문무공이었다.
하오밀문의 평범한 제자들이 사용하는 무공이 아닌, 강력한 내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정식무공이었던 것이다.
“병신, 내가 무변무적퇴를 똑같이 펼치리라 생각했냐?”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다리를 피하는 좌정인을 향해 비릿한 조소를 날린 야혼이 무풍무영술로 몸을 회전시키며 왼발의
회선각을 펼쳤다.
쉬익!
“으헉! 화염뢰(火焰雷)!”
눈앞을 스쳐 가는 발에 내심 경호성을 발한 좌정인이 야혼의 몸통을 향해 거칠게 쌍장을 뿌렸다.
그의 독문무공인 화염신장(火焰神掌)의 일 초였다. 그러나 야혼의 신형은 빨랐다. 이미 좌정인의 대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나며 바닥에 내려두었던 춘서를 챙겨들었다.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냐?”
“멍청한 것! 저 위에 올라가서 무공기서 챙겨야 할 것 아냐? 나는 3권이나 챙겼는데 빈손으로 갈 거냐?”
“이런…….”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좌정인이 흠칫,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펼친 두 번의 장으로 인하여 탑 안이 온통 불바다였다.
더구나 조금만 충격을 가하면 무너지게 생겼던 것이다.
야혼과 8층 쪽을 번갈아 쳐다보던 좌정인이 마음을 굳힌 듯, 제자리에서 호흡을 골랐다.
무공기서보다는 십전수 구약종의 후예를 없애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제기랄……. 또 계산이 잘못 됐잖아. 이번엔 주둥이 탓이 아니라고. 저 새끼가 너무 똑똑해서 그렇지.”
처음부터 좌정인을 도발했던 이유가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는데 먹히지 않았다. 더 강한 염왕도법을 두고 공공십팔수를 펼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였는데, 이미 경지에 오른 좌정인의 시야를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씨팔! 천상 갈다만 도를 써야겠네.”
왼쪽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꺼낸 야혼이 온몸의 내공을 전부 끌어올렸다. 순간 단전에서 기이한 격류가 형성되는 듯하더니
그의 주변에서 백색 운무가 소용돌이쳤다.
“선공이다, 새끼야. 공공씹팔수!”
“기다렸다 놈! 화염풍(火焰風)!”
야혼의 검은 묵도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마자 좌정인의 입에서 광폭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그의 장(掌)에서 쏟아진 기운은 불 바람이었다. 거의 백색에 가까운 불꽃이 야혼이 만든 18개의
도기를 무력화시키며 거칠게 밀려들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0년간 무공을 익힌 좌정인과 비록 예인의 경지에 달했다지만 내공과 완전하게 일치시키지 못한
야혼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쉬이익!
“씨팔, 책!”
한껏 몸을 옆으로 틀며 자신의 가슴에 검은 도를 가져다 댔다. 야혼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수단이었다.
그러나.
콰앙!
“으아악!”
좌정인의 장력에 정통으로 가격 당한 야혼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건물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서둘러야 한다.”
아직 여운이 남은 듯 앞으로 손을 내밀고 있던 좌정인이 재빨리 위쪽으로 몸을 날렸다. 십전수 구약종의 후예를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에 있는 무공 또한 쉽게 포기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장차 명교의 재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들이 바로 무공이었다.
아울러 약고에 있는 영약까지.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6)- 반쪽의 염왕도(2)
“수석 사제님!”
8층의 물건을 챙기고 9층을 향해 몸을 날리려는 순간 아래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아래 서열
사제인 염화수라(炎火修羅) 광운소(廣雲笑)였다.
“무슨 일인가 광 사제.”
“약고가 텅 비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어찌 약고가 빈단 말인가. 그곳에 접근하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거늘.”
“아마 금굴(禁)窟)을 타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
야혼이 빠졌던 구멍을 말하는 것이었다. 약고의 중요성을 인식한 성모궁 요인들은 처음 설계 당시 성모궁 안에서는 약고에
접근할 수 없게 하였다. 외부로만 통로가 난 사실은 극소수의 인원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 외부인이 들어왔던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성모궁에 들어왔다는 7명 중의 한 명일 겁니다.”
“빌어먹을…….”
짓씹듯 욕설을 뱉어낸 좌정인이 조금 전 자신과 일정을 결했던 놈이 떨어진 곳을 쳐다보았다.
“저놈이?”
좌정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전력을 다해 내쳤던 일장을 맞은 놈이 부러진 도를 쥐고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절할 노릇이었다. 놈의 몸을 때릴 때 다소 반탄력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자신의 장이 어떤 장이던가. 무쇠라 할지라도 일거에
박살내버릴 정도의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는데.
“자네는 이곳에 있는 물건을 챙겨 나오게. 나는…….”
광운소를 향해 고함을 지른 좌정인이 벽면을 박살내며 몸을 날렸다.
“이런 씨팔! 저 개자식이 또 쫓아오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서던 야혼이 기겁을 하며 몸을 날렸다. 마지막 당했던 일장(一掌)의 충격은 컸다. 최대한 몸을
틀면서 묵령한철로 만들었다는 쇳덩어리를 이용하여 막아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놈의 장에 내상을 당했고, 뒤로 튕긴 도로 인해 가슴 쪽에 외상을 입고 말았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싸쥐고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얼마잖아 멈춰 설 수박에 없었다. 절벽이었다. 건너편까지 수십 장도 넘어 보이는 절벽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이제 어디로 도망칠 거냐.”
좌정인의 얼굴에 비릿한 살소가 어렸다. 지금 놈이 서 있는 곳은 예전에도 불귀동(不歸洞)라 불렸던 곳이다. 지난 날 자신이
활동하고 있을 때도 몇몇 인물이 빠졌지만 단 한 명도 살아 나오지 못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불귀동은 성모궁 지하 연옥대신 사용되곤 하였던 곳이었다.
“아! 씨팔! 정말 되는 일이 없네. 아무래도 성모궁과는 상극인 모양이다.”
좌정인을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절벽의 깊이를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뛰어들 입장도 아니었다. 하지만 살길은 그것밖에 없고,
지고 있는 자루 또한 상당부분이 타서 몹시 헐거워진 상태였다.
책이 들어있는 자루를 아래쪽으로 옮긴다 하더라도 몸이 견뎌줄지 그게 걱정이었다. 그런 야혼의 심정을 알아차린 듯 짐짓
여유있는 얼굴로 변한 좌정인이 떠보듯 물었다.
“한가지만 물어보자. 혹시 네놈이 약고에 있는 영약을 먹었더냐?”
아무래도 약고에 있는 약을 먹은 자는 앞에 있는 놈이 분명한 듯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야혼이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제 옷이 분명할 터인데 허리춤이 너무 끼어 보였다.
즉 무엇인가를 잘못 먹어 그 부작용 때문에 몸이 불고 있다는 의미였다.
“늙어 죽을 때가 되긴 했나보군. 귀신처럼 맞추는 것을 보면.”
“정말 네놈이 먹었단 말이더냐? 그 많은 것을…….”
“그래 임마. 오랜만에 배터지게 포식했다.”
“세상에…….”
좌정인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약이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놈의 몸이 더 경이로웠다. 그곳에 있던
약이면 적어도 강호 일류고수 10명 정도를 단시간에 키워낼 수가 있다.
그 영약을 전부 다 먹었으면 이미 몸이 터져 나갔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놈은 여전히 움직였고, 자신을 향해 무공을 펼쳤다.
기사 중의 기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사 이유 없이 일어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영약을 먹기 전에 복용했던 증폭단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야혼은 결코 알 수 없으리라.
원래 과다한 영약을 먹고 폭주하는 경우는 본인이 가진 잠력을 끌어내어 사용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온몸을 휘감고 치달리는
힘을 몸이 견디지 못하여 결국에는 산산이 터지고 만다.
그러나, 야혼의 상태는 달랐다. 증폭단에 의해 모든 잠력을 끌어내 써버렸고, 그의 몸은 텅 빈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영약기운이 몸 안으로 물밀 듯이 유입되었으나 어떤 힘에 가로막혀 외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기운끼리 뭉쳐버린 것이었다.
마치 내단처럼 몸 안에 갇혀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것들 또한 완전한 내단이 아니었기에 조금씩 외부로 힘을 발휘하게
되면서 비만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약오르지. 네 녀석들이 사기 칠 약이 전부 없어져서. 그 약만 있었으면 순식간에 수많은 교도들을 다시 모을 수 있을
텐데, 안 됐다. 영약가지고 치료했으면서 성모의 성력을 빌어 치유되었다고 속였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영약을 많이 먹으면 뭐하겠느냐. 너는 이 자리에서 죽을 텐데.”
고개를 끄덕인 좌정인이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더 이상 말 섞어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처리하여 말을 못하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어이 늙탱이! 이 도(刀)가 뭔지 아나?”
야혼이 손에 들린 반도를 흔들며 좌정인을 불렀다. 침묵의 탑에서 떨어진 자리의 시체 옆에 있던 도였다.
도살장 이정이 찾아보라고 하였던 염왕도(閻王刀)를 우연히 습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명교에 너 같은 놈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도와주겠다고 이곳까지 왔던 어떤 분의 도(刀)다.”
좌정인을 쳐다보던 야혼이 하늘을 향해 염왕도를 치켜들었다. 염왕도법(閻王刀法)의 일 초인 염왕수라참의 정식 기수식이었다.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야혼의 몸에서 백색의 운무가 뭉클뭉클 솟아올랐고, 하늘을 향해 들어올린 염왕도는 검은 색의
광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태을건곤심법과 염왕도법이 합쳐져서 나타난 결과였다.
“그게 무슨 무공이던 상관없다. 너는 분명 이 자리에서 죽는다. 놈! 잘 가거라!”
“내가 먼저야 자식아. 염왕수라참(閻王修羅斬)!”
좌정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야혼의 입에서 거친 고함이 터졌다. 선수를 빼앗기면 무조건 당한다는 생각에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300년 전 겁천십웅의 최강자였던 염왕마존의 무공은 가공했다. 내상을 당한 상태로 펼친 염왕수라참이었지만 엄청난 살기를
머금고 좌정인을 향해 밀려갔다. 거의 50여 개에 달하는 도기(刀氣)가 허공을 가득 수놓았다.
“갈수록 놀라게 하는구나. 이번에는 염왕도법이라니. 하지만 절반도 안 되는 염왕도법으로는 너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화염폭(火焰爆)!”
야혼이 펼치는 도법이 염왕도법인 것을 알아본 좌정인이 흠칫하다가 이내 얼굴을 풀었다.
초식 자체도 염왕도법의 1초였고 완전하지도 못했다. 그 정도의 무공으로는 결코 자신의 장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자신감이었다.
빙긋 미소를 머금은 좌정인의 양손에서 엄청난 기세를 머금은 백광이 솟구치고 야혼이 만든 도기를 향해 폭풍처럼 다가갔다.
과과광!
“으아악!”
선연한 피를 토해내며 야혼의 신형이 불귀동을 향해 날아갔다.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많은 영약을 복용했다하나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지도 못했고, 염왕도법과 태을건곤심법 또한 하나로 합치지 못했다.
야혼의 패배는 당연한 일이었다.
“네 놈이 복용한 약이 수를 부린 모양이다만 설사 살아난다 해도 그곳에서는 나오지 못한다. 혹시 날아다니는 새가 되면
모를까.”
마지막 순간에 염왕도법의 공세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을 깨달았다.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다. 바로 뒤쪽이 불귀동이기
때문이었다.
“다 챙겼습니다. 수석사제님.”
“다른 사제들은 어찌 되었나 모르겠군. 일단 가세.”
“별 문제 없을 겁니다. 모두가 절정에 달한 고수들입니다.”
“그렇지 공연한 기우는 몸만 상하게 만들지. 오랜만에 불귀동이 포식했군.”
빙긋 미소를 머금은 좌정인이 불귀동을 흘긋 넘겨다보고는 몸을 날렸다.
야혼의 몸을 삼켜버린 불귀동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다만 훈훈한 기운과 함께 기이한 소성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은 배가 차지 않았음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좌정인과 광운소가 떠난 한참 뒤 두 사람의 인영이 불귀동에 나타났다.
놀랍게도 당가려와 불의사제 한 명이었다.
그런데 당가려의 몰골이 엉망이었다. 옷이 군데군데 새까맣게 타버려 뽀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특히 가장 심한 곳은 가슴이었는데 일부러 오려낸 듯 동그란 구멍이 나 있었다. 차라리 벗어던지는 게 더 나을 듯하였다.
그러나, 당가려의 상태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였다.
“젠장할…….”
당가려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처음 냉소소와 같이 성모궁에 왔을 때만해도 기분은 최고였다. 무수한 정사 고수들이
도전했다 실패한 곳을 자신이 정복했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자랑할 꿈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시체들이 널려있었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시대에 일어났던 일이기에 간단한 묵념으로 그들을 명복을 빌어주고 본격적인 탐사작업에
나섰다.
거의 하루 정도를 헤맨 뒤에야 최고의 보물을 발견하고는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암기술에 있어서는 사천당문이 생긴 이래
최고의 수법이라는 수라만겁천화류(修羅萬劫千花流)와 당참 증조부의 유골을 수습한 것이었다. 더하여 증조부와 같이 있던 숨져
있던 사람은 천왕구룡편법(天王九龍鞭法)을 창안하여 강호 100대 고수에 오른 구천겁편왕(九天劫鞭王) 기천세(其千勢)였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무공을 두 가지나 습득한 당가려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환희에 겨워했다.
한데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가온 행운에 감격하고 있을 때 나타난 자가 바로 저자였다.
백색 장포를 입고 나타난 자들은 엄청났다.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살수를 펼쳐왔는데,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히고 혈린만독편을
가진 자신이 밀리기 시작했다.
냉소소와 언제 헤어진지도 알지 못했다. 끊임없이 그와 싸우다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누구냐? 누군데 우리를 공격했느냐?”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려 100년간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성모궁에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고수가
나타나다니, 기절할 노릇이었다. 더구나 놈들의 무공은 화공, 자신의 혈린만독편과는 거의 상극인 무공이었으니. 어쩌면 밀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니!”
앞에 있던 백의인을 노려보던 당가려가 환희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냉소소였다. 그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연신 밀리며
이곳으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빙공을 익힌 그녀의 무공조차도 백의인의 상대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여기에 있었구나.”
냉소소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도대체 누구예요?”
“글쎄. 진정한 마교도들 아닐까? 호치 소저가 찾아온 자들.”
뒤쪽에 보이는 절벽을 흘낏 쳐다본 냉소소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 안으로 떨어지면 나올 수 없나보지요?”
“글쎄 일단 들어가 보려무나. 그럼 알게 되겠지.”
백의인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죽이려 했으나 그녀들 또한 무공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들을 완전하게
없애기 위해서는 적어도 며칠은 걸린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제들보다 뒤늦게 처리한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불귀동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 하였던 곳.
‘언니 어쩌죠?’
‘저들 말이 맞을 거야. 저 속에 빠지면 못나올지도 몰라. 일단 전력을 다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서로 전음을 나눈 두 여인이 남아 있는 모든 내공을 전부 끌어올렸다. 절벽으로 떨어지나 이곳에서 당하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였다.
“한옥광마수(寒玉狂魔手)!”
“혈운폭풍(血雲暴風)!”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두 여인이 백의인을 향해 자신들의 절기를 뿌렸다.
붉은 색과 백색의 광휘가 사방에 요동쳤다. 하나 하나의 기운에 맺혀있는 진득한 살기는 주변의 모든 것을 없애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그러나.
겁천십웅 두 사람의 무공이 밀려오는 상황에서도 불의 사제 두 사람의 얼굴은 태연했다.
“우리는 둘이 될 수도 있고 하나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거다.”
뒤쪽에 있던 자가 앞에 있던 사제의 등에 재빨리 장심을 밀착시키고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랬다. 두 사람이 태연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격체전공. 일대일 대결이라면 상당한 시간을 끌어야하겠지만
두 사람의 공력을 합쳐버린다면 승부는 간단해진다.
더구나 적을 죽이는 게 아니고 절벽 안으로 밀어 넣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니.
“열화수라폭(熱火修羅爆)!”
앞에 있던 사제의 입에서 광폭한 고함이 터지고 그의 손을 떠난 극강한 열기가 냉소소와 당가려의 전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밀려갔다.
“아-!”
냉소소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상대가 저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들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반면
상대는 하나로 합쳐져 있다. 무조건 필패였다.
“가려 정신 바짝 차려!”
콰콰광!
“아악! 악!”
뾰족한 고함을 남기며 서로의 손을 잡을 두 여인 또한 야혼이 떨어진 절벽 아래로 추락해 내렸다.
“으음!”
사라지는 두 여인을 쳐다보던 불의 사제 두 사람이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대단한 여인들이란 생각뿐이었다.
100년간을 무공에 치중했던 자신들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의 가공할 무공을 지닌 여인들이었다.
전설로만 내려오던 겁천십웅의 실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가세! 성모님이 기다리시네.”
막연한 눈으로 절벽을 쳐다보던 두 사람이 몸을 날렸다.
“어찌 되었습니까?”
성모전, 가장 큰 건물의 대전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명교의 성모가 된 여호치였다.
“셋은 불귀동으로 보냈고, 네 명은 연옥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찾지를 못했습니다.”
“운이 좋구나. 그래 잘 살아라. 절대 무인은 되지 말고.”
그들이 살아난 것 또한 운명이라 생각했다. 추기영과 태웅이 무인이 되지 않고 지금처럼 개봉에서 산다면 얼굴 마주칠 일이
없을 터였다.
야혼 또한…….
“이곳의 기관을 작동시켜야겠습니다.”
“성모궁에 기관도 있었습니까? 그럼 왜?”
100년 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당시 성모궁에 있던 인원을 대피시키고 기관을 작동하여 파괴시켰더라면 100인의
성모척살대라 하여도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한데 그때는 하지 않고 지금 와서 기관을 작동시키려 하다니. 단지 9명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때는 이곳을 파괴시키지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그 기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저희들이었는데 전부 불의 사원에 감금되어
있었으니.”
“그럼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벌어진 살육은 저희들의 의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여호치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성모궁의 혈겁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벌써 10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이상했다.
“누가 되었던지 나타나겠지.”
어차피 강호 무림에서 모든 게 밝혀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무엇인가를 얻을 요량으로 지금껏 성모궁을 방치했다면
반드시 나타나게 될 터였다.
“알았습니다. 그럼 기관을 작동하도록 하세요.”
쿠르릉! 쿠르릉! 쾅! 쾅!
수백 채의 건물이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가운데 있던 성모궁을 시발점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100년 전설의 마지막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울러 수천의 명교도들의 묘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행운을 빈다.”
지면이 꺼지듯 무너지는 성모궁을 쳐다보던 여호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야혼, 추기영, 태웅. 자신이 성모의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더라면 계속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들 중 한 명과 살림을 차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친년! 성모의 운명이 아니었다면 그들을 만날 일도 없었겠지.”
그랬다. 개봉은 의도적으로 들어간 곳이었다. 그들과의 인연은 성모가 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너희들은 운이 따르는 녀석들이니까.”
완전하게 폐허로 변해버린 성모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호치가 몸을 돌렸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발걸음이었다.
명교의 성모로서.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7)- 못 나가면 어때 여자만 있으면 되지(1)
못 나가면 어때 여자만 있으면 되지.
“야 임마! 빨리 좀 가자 뒤쪽이 다 무너지고 있잖아.”
어두운 암도 속, 두 명의 인영이 무릎걸음으로 무섭게 치달리고 있었다. 연옥을 나가기 전, 암도를 택했던 추기영과
태웅이었다.
처음에는 널따란 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좁아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무릎걸음으로 기어야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되고
말았다. 뒤돌아 나가고자 하였으나 엄청난 진동이 생기면서 암도(暗道)가 무너지는 바람에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대머리 넌 소원풀이 했잖냐?”
앞서가던 태웅이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이죽거렸다.
“니미럴타불! 하다가 무릎까지는 게 소원이라 했지 누가 이런걸 바랐냐?”
추기영의 말마따나 그의 무릎은 엉망이었다. 무릎걸음으로 얼마나 기었으면 바지가 너덜너덜 닳은데다 살갗까지 깎여나가
피범벅이었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뒤쪽에서 무너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닥을 여자라 생각해라. 그래야 덜 아플 거다. 나처럼 철피공 하나 정도 익혀뒀으면 이럴 때 요긴하게 써먹잖아. 가르쳐
준다고 할 때 배우지.”
무릎걸음으로 나아가던 태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릎께 천은 떨어져 나갔지만 그의 무릎은 붉은 기운만 비쳤을 뿐 비교적
멀쩡했다.
아직은 피부가 견디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 썩을 보살아, 그건 그 거지같은 철피공 때문이 아니라, 네 놈 몸뚱이가 단단해서야. 대력패왕지체를 타고났으면 당연한
일이라 했단 말이다, 이 개자식아. 그러니까 개코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안 그래도 아파 죽겠구먼 염장
지르지 말고.”
“좋다 더 빨리 간다. 지금부터 비구니들이 발가벗고 줄서서 기다린다 생각해라.”
추기영의 뒤쪽을 흘낏 쳐다본 태웅이 무서운 속도로 무릎을 놀렸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디를, 얼마쯤 왔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미로 속에 갇힌 꼴이었다. 끊임없이 돌고 돌아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했다.
“씨팔! 이제 죽었다 우린.”
앞서가던 태웅이 거친 욕설을 뱉어내며 전면을 노려보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더 이상 암도가 무너질 기미는 없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나갈 길도 없다는 말이 된다.
결론은, 얼마나 깊은지조차 알 수 없는 지하에 갇혀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우린 벌받은 거다. 연작시주 버렸다고.”
“우리가 언제 연장을 버렸냐. 호치 그년이 버렸지.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언제까지 서대시전에 처박혀 살수는 없잖아.
너도 동의했잖아 임마. 출세한번 해보자고. 그래서 원하는 계집년들 마음껏 안아보자고. 너나 나나 연장새끼 반만 생겼어도
그런 마음먹었겠냐?”
“니미시펄타불! 나도 추기영의 여인들이란 책자 한번 만들고 싶었는데…….”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대력패왕지체와 전륜마왕지체라는 수천구신체를 타고난 두 사람의 외도는 위대한 뜻을 품거나 큰 사람이
되어 보자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직 여자와 야혼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자 때문이었다. 야혼처럼 얼굴로 안 되다보니
출세하여 야혼만큼 여자를 안아보겠다는 그런 생각.
“기영아, 우리 심각하게 생각해보자.”
“뭘?”
“다른 게 아니고. 왜 수천구신체는 하늘에서 점지했다고 하지 않았냐. 그럼 우리 같은 놈들이 나오면 안되잖아. 천하제일의
영웅은 되지 못할망정 여자만 밝힌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아미타불! 세상이 불공평해 보여도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릴세, 곰 시주. 수천구신체를 뭐라 생각하냐?”
“그거야 하늘이 내린 최고의 신체라 하지 않았냐.”
“그래. 한마디로 뛰어난 놈이라 이말 아니겠냐. 헌데 그런 놈들이 얼굴 잘생기고, 성격 좋고, 멋있고,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다면 어떻게 되겠냐?”
“그럼……! 씨팔 세상의 년들은 전부 그놈 차지겠지.”
“바로 그거다. 해서 세상은 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일세. 아미타불!”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우리 같은 놈들이 수천구신체를 타고나지 않았다면 벌써 뒈졌어야 했다 그런 말이지?”
“역시 수천구신체야. 바로 이해하는 걸 보면.”
“쿡! 킥킥킥! 클클클!”
태웅과 추기영이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새삼 돌이켜보니 맞는 말이었다. 여호치가 자신들을 선택한 이유가 수천구신체를
타고났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또한 도와주지 않는다 하였을 때 죽이려 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만일 자신들이 그런 체질을
타고나지 않았더라면 같이 어울리지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미칠 듯이 웃음이 터졌다.
“대머리 근데 우리 너무 오래 살아있는 거 아냐?”
태웅이 지나왔던 길을 가리키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니미럴! 수천구신체는 죽을 때는 좀 달라야지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죽으면 그게 어디 수천구신체냐?”
“그게 아니잖아 임마.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봐라.”
“하긴 그렇기는 하네. 갇혀 있는 시간이 꽤 된 것 같은데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보면…….”
추기영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나왔던 암도는 완전하게 무너져 공기가 들어올 곳이 전혀 없었다. 공기가 희박해 질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숨을 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어디선가 신선한 공기가 유입되지 않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딘가 바람이 들어오는 구멍이 있다는 소리네?”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이 잽싸게 자리를 이동했다.
“여기다 니미럴타불!”
문득 추기영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엉덩이를 들추자 그 틈으로 미약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곰 시주 깰 수 있겠는가!”
“괜히 대력패왕지체겠냐?”
콰앙!
추기영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인 태웅이 어깨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한번 두 번, 어깨가 탈골될 정도로 찍어대자 금이
가기 시작하는지 스며들어오는 빛의 양이 많아졌다.
“씨팔! 나도 한다. 미리 무릎단련 시켜둔다 생각하고 찍는다.”
살아날 희망을 발견한 두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해 바닥을 찍어눌렀다.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추기영의 무릎이 그곳을
찍어누르면 태웅의 주먹이 뒤따라 떨어졌다.
와르르!
한 순간, 아래쪽이 풀썩 내려앉으며 두 사람의 동체가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니미씨펄타불! ……아니 아미타불!”
고통에 겨운 듯 욕설을 뱉어내려던 추기영이 갑자기 잔뜩 희열에 들뜬 불호를 읊조렸다. 문득 마주선 벽면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머리부터 떨어진 태웅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인지 연신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씨팔! 이곳은 또 어디야.”
“욕하지 말게나 곰 시주. 우린 드디어 기연을 얻었네. 역시 무릎이 까질 정도로 열심히 하니까 보답을 받는구먼. 저기를
보게나.”
몸을 일으킨 추기영이 좀 전에 발견했던 벽면을 가리켰다. 단순한 석실이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 야명주가 박혀있었고 그
아래로 두 구의 유골이 있었다. 말로만 듣던 무림인의 마지막 장소가 분명했다.
“패천마영권(覇天魔影拳)? 이거 무공일세. 우린 봉 잡았네 곰 시주.”
벽면에 깨알같이 새겨진 문구를 쳐다본 추기영이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랬다. 야명주 불빛이 비쳐드는 벽면에 두 개의
무공구결이 나란히 적혀있었던 것이었다.
패천마영권(覇天魔影拳)이란 권공(拳功)과 저주파멸음(咀呪破滅音)이라는 음공(音功)이었다.
“이자들이 주인인가 본데?”
바닥에 너부러진 두 구의 유골을 태웅이 가리켰다. 꽤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벽면에 기대앉은 자세로 죽었음직한 유골은 뼈만
앙상했다.
“근데 병신들이네 그려.”
의아하게도 두 구의 유골은 불구였다. 다소 체구가 커 보이는 유골은 아예 양팔이 없었고, 나머지 한 구의 유골은 오른 팔이
없었다.
“원래 불구가 아니라, 잘렸다.”
유골을 자세히 살펴보던 태웅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두 구의 팔뼈는 예리한 무기에 잘린 듯 단면이 깨끗했다.
“이들이 누구길래 이런 곳에서 죽었지?”
두 사람의 정체가 궁금했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은 명교 연옥과 연결된 암도를 따라 다다른 곳이다. 석실 또한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는데,  게다가 유골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적어두었구먼. 어디 보자……. 권마(拳魔) 두악(杜嶽)과 음마(音魔) 구장(具杖)이라 적혀있는데 혹시 아는
사람이냐?”
유골을 한쪽으로 치워낸 추기영이 태웅을 쳐다보며 물었다. 위쪽에 있는 글씨체와 다른 글이 아래쪽에 새겨져 있었다.
“미친놈! 계속 읽어보면 될 것 아냐?”
“그건 맞다. 곰 시주가 이 새끼들을 알 리가 없지.”
제 대머리를 쓰다듬던 추기영이 엉성하게 쓰여진 글을 읽어나갔다.
-우린 강호무림에서 마권마음(魔拳魔音)이라 불렸다.
마권마음(魔拳魔音), 150년 전 강호 상에 이름을 떨쳤던 두 사람의 마두를 일컫는 명호였다.
패천마영권(覇天魔影拳)권이란 장공(掌功)과 저주파멸음(咀呪破滅音)이라는 음공을 익힌 이들은 강호상의 골칫거리였다.
개개인의 무공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두 사람의 합공이 문제였다. 즉 음공과 흔적을 남기지 않는 패천마영권이 합쳐지면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일상적으로 음공을 익힌 무인과 싸우기 위해서는 정좌한 자세로 내공을 끌어올려 대항을 해야 하는데, 그 순간을 틈타 두악의
마영권이 다가들었다. 어찌된 일인지 두악은 구장의 음공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원래 우리 둘은 명교에 들기 전에 도둑이었다. 명교에 입교했던 이유도 거창한 게 없었다. 단지 무공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도둑이었던 탓에 성모궁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고 결국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언제 누가 남긴
무공인지는 모른다. 다만 이곳에 있던 무공을 익혀 강호를 종횡무진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내공이 일천한 우리는 고수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패천마영권이나 저주파멸음의  5할의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옛날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바보 같은 놈들. 털 곳이 없어 소림사를 노리냐? 죽지 않고 이곳까지 온 것 만해도 기적이다.”
두악과 구장의 선택은 도둑질이었다.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강호 무림 최대 영약이라는 대환단을 훔치기 위해 소림의 담을
넘었고 원하는 바를 성취했다.
그러나,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소림의 승려들만 추격해 왔었는데, 대환단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던지 전
무림인들이 쫓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무림인들의 끝없는 추격 속에 훔친 대환단은 복용해보지도 못하고 두악은 두 팔이, 구장은 오른 팔이 잘린 채 십만대산으로
도망을 쳤던 것이다.
결국 무공을 익혔던 곳을 찾아오기는 했으나 대환단을 복용하지 못했다.
-대환단을 복용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두악이 죽어 가는데 나 혼자 강호에 나가서 무얼 할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되었든지 이곳을 발견한 자가 있다면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기 바란다. 패천마영권과 저주파멸음을 익혀
강호를 한바탕 휘저어 다오. 단지 그것뿐이다.
“낄낄낄! 진짜 봉 잡았다, 씨팔!”
태웅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자 추기영이 노류장화의 장단처럼 목탁을 두드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구장 옆에 조그마한 철함이 하나 놓여있었다. 소림사의 최고 신단인 대환단(大還丹)이었다.
“아미타불! 영약은 인연이 있어야 한다 했는데 우리가 그 인연의 주인공인가 보오. 두 분 시주 정말 수고하셨소. 아무 걱정
마시오.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여 우리가 서대시전을 떠나게 되면 강호 무림을 뒤집어 드리겠소이다. 곰 시주, 혹시 무공을
익혔다고 서대시전을 떠나자고는 하지 말게.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절대 서대시전을 떠나지 않을 걸세.”
“나도 서대시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대환단도 보약으로 먹는 거지 결코 무공 때문에 먹는 게 절대
아니다.”
“곰 시주. 주둥이에 침이나 발라라. 그나저나 이 보약을 우리만 먹어서 어쩌냐? 연작시주가 있으면…….”
“왜 연장에게까지 나눠주고 싶어서?”
“아까 다친 머리가 아직 안 나았는가 곰 시주? 이런 보약을 어떻게 나눠먹나. 단지 자랑하고 싶어서지. 생각해봐라.
연작시주가 얼마나 부러워하겠나. 그 얼굴을 보고 싶어 죽겠구먼.”
“그나저나 연장 그놈은 살아 있으려나 모르겠다. 험한 꼴 안 당했으면 좋은 텐데…….”
“걱정 말게 곰 시주. 다른 놈은 다 죽어도 그놈만큼은 절대 안 죽어. 이 세상에 계집이 남아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날
놈이야. 어쩌면 지금도 원숭이 암컷을 데리고 희롱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추기영 또한 자신의 말대로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 고년들 참! 운 좋은 놈은 엎어져도 계집년 젖퉁이 위라더니.”
환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연신 두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해죽거렸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살아있었다. 아니 살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좌정인의 장에 의해 이곳으로 떨어졌다기보다는 스스로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단해진 몸과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믿고 벌인 모험이었다. 결국 떨어진 곳은 썩어가던 넝쿨
위였고 오른 쪽 다리가 부러진 부상 외에는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하지만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당가려의 옷을 비롯하여 생명처럼 지니고 왔던 춘서 절반이 타버렸던 것이다.
춘서를 잃었다는 아쉬움도 잠시 야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하늘에서 떨어진 물건 때문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냉소소와
당가려가 손을 맞잡고 자신을 따라왔던 것이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비몽사몽 헤매는 그녀들을 구타하여 바로 기절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옷을 벗길 필요도 없었다. 당가려의 앞가슴은 이미 훤히 드러나 있었고 냉소소의 옷도 엉망이었다.
몇 번의 손놀림만으로 냉소소와 당가려는 반라가 되어버렸다.
“으음!”
“흐미, 왜 이리 빨라. 다시 기절을 시……. 아니지, 이번에는 그냥 둬야지.”
정신을 차리는 두 여인을 그대로 두고 재빨리 자리를 옮긴 야혼이 뒤로 벌러덩 누웠다. 이번에는 자신이 기절할 차례였던
것이다.
“여기는……. 어맛!”
먼저 정신을 차린 냉소소가 사방을 둘러보다가 소스라치듯 비명을 질렀다. 앞섶이 헤쳐져 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는 옷매무새
때문이었다.
“언니……. 우리가 살아있나 봐요.”
뒤이어 정신을 차린 당가려가 냉소소를 쳐다보며 말했다. 관자놀이에 느껴지는 통증과 가슴이 드러난 것 말고는 큰 상처는 없는
듯했다.
“살아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갈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저만치 떨어졌던 곳을 쳐다보던 냉소소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00여장 가까이 되어 보이는 높이도 문제였지만 정작 문제는 동굴의 생김새였다. 마치 항아리처럼 생긴 곳이었다. 아직
둘러보기 전이라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저 높은 곳까지 단번에 올라가는 재주가 없다면 평생을 이곳에서 썩는 수밖에
없을 듯 싶었다.
“일단 한번 둘러보자.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옷 꼴이 이래서 그렇지 별로 아픈 곳은 없네요.”
꼴사나워진 차림새를 내려다보던 당가려가 픽 웃었다. 쇄골부터 시작하여 배꼽께까지는 정체 모를 자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전부
타버렸다. 남은 거라곤 간신히 등만 가리고 있는 헤진 천 조각뿐이었다.
“잘 어울리는데 뭘.”
냉소소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지신 또한 당가려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았다. 남아 있는 천으로
이리저리 가리면 가슴정도는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헉!”
뒤쪽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냉소소와 당가려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자신들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려온 것이 아닌가. 그것도 남자 목소리가.
재빨리 손으로 가슴을 가린 두 여인이 몸을 숨기며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갔다. 물론 진기를 가득 끌어올린 것은 잊지
않았다.
‘혹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인물을 쳐다보던 냉소소와 당가려가 마주보며 의문의 눈짓을 주고받았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8)- 못 나가면 어때 여자만 있으면 되지(2)
“세상에…….”
둘은 동시에 허탈한 얼굴로 사내의 얼굴을 주시했다. 야혼이었다. 헤어졌을 때보다 살이 많이 쪘지만 분명 야혼이었다.
“너…… 야혼?”
거듭 확인이라도 하듯 냉소소가 물었다.
“어? 너희들이 이곳에 웬일이냐? 반갑다, 야.”
짐짓 깜짝 놀랐다는 얼굴로 눈을 끔벅이던 야혼이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근데 너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몸도 이상해졌고.”
여전히 고개만 내민 당가려가 추궁하듯 물었다. 그의 몸이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늪지대와 동굴에서 그의 벗을
몸을 보았을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거의 배 이상 살이 붙은 것 같았다.
“야, 얼굴만 내밀고 있지 말고 이리 와서 나 좀 부축해 주라. 다리가 부러졌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겠다.”
“그거 내 짐 맞지?”
야혼의 밑에 깔려있는 보퉁이를 발견한 당가려가 환희에 찬 고함을 질렀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옷이었는데,
야혼에게 맡긴 짐이 지금까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기쁜 마음도 잠시, 이내 한숨이 비집고 흘렀다.
앉은걸음으로 자리를 옮긴 야혼이 들어올린 포대 속에는 검게 타버린 천 조각만 가득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그나마 가장
나았다.
“야, 나 좀 어떻게 안 해 줄 거야?”
고개만 내밀고 자신을 쳐다보는 두 여인을 향해 야혼이 고함을 빽 질렀다.
“지금 나갈 형편이 아니니까 그러지 임마.”
당가려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쩔 수 없겠다. 일단 바지라도 찢어서 대충 가리고 녀석을 치료해주자.’
겨우 허벅지를 가릴 만큼만 남겨두고 바지를 뜯어낸 냉소소가 그 천 조각으로 둘둘 가슴을 동여맸다. 몸을 가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잠시 후, 어색한 얼굴을 한 두 여인이 쭈뼛쭈뼛 야혼의 곁으로 다가갔다.
‘역시 살짝 가리는 게 제 맛이라니깐.’
춘서에서나 나올법한, 서역의 무희 같은 복장으로 나오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야혼이 내심 키들거렸다.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고
꽉 묶었는지 누구랄 것 없이 가슴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그 또한 눈요기로는 최고였다.
“이게 다 뭐냐?”
“내가 그랬잖아 나도 책 본다고.”
“그러니까. 혈림에 들어가기 전에 말했던 그 책이 바로 이거냐?”
기가 막힌다는 듯 당가려가 야혼을 쳐다보았다. 그때는 너무 심하게 대했다는 생각에 얼마나 미안하게 여겼던가. 그런데 그
책들이 전부 춘서였다니…….
“에라! 이 나쁜 새끼야.”
“아악! 야! 살살 좀 해라. 누구 잡을 일 있냐?”
“너는 좀 당해도 싸. 그렇다고 춘서를 가지고 사람을 놀리는 녀석이 어디 있냐?”
냉소소 역시 당가려와 같은 생각이라는 듯 야혼을 무섭게 흘겼다. 그러나 크게 악의는 없었다.
사실 그녀나 당가려는 야혼의 존재 때문에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무공의 고수라지만 지금 이곳은 빠져나갈 수 없는 옥과 같은
곳이다. 겉으로야 태연한 척 하고 있으나 내심은 달랐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던 차에 야혼의 등장은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었던 것이다.
“말해봐라. 네 몸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몰라 나도. 어떤 석실에서 약을 한 병 주어먹었는데 그때부터 팅팅 붓는데, 나도 죽겠다.”
“어떻게 생긴 약인데.”
“여기서 나온 것처럼 생긴 물약.”
야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닿을 듯 두 여인의 젖가슴 바로 앞이다.
“뭐?”
냉소소와 당가려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야혼의 손가락이 자신들의 가슴을 가리켰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젖처럼 뿌연 유백색을 띠면서 몸을 바꿔버릴 정도의 약은 이 세상에 한가지밖에 없다.
“얼마나 마셨는데?”
이번에도 역시 동시에 소리쳤다.
“한 모금정도.”
“세상에…….”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방울만 마셔도 절세 고수가 된다는 공청석유(空淸石乳)를 한
모금이나 마셨다는 말이었다.
“그럼 주화입마(走火入魔)?”
야혼의 손목을 잡고 진기를 밀어 넣던 당가려가 깜짝 놀라며 부르짖었다. 영약을 먹고 몸이 불어나는 현상을 설명할 길은 그것
한가지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야?”
당가려의 주화입마라는 말에 냉소소가 물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주화입마를 겪으면 바로 폐인이 된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데 야혼의 증상은 전혀 아니었다.
“주화입마도 여러 가지 증상이 있어요, 언니. 지금 꼴통이 겪는 증상도 주화입마의 하나예요.”
몸이 일반적인 진기의 폭주상태인 주화입마와는 조금 달랐지만 야혼의 몸 속의 진기는 분명 외부로 조금씩 팽창하고 있었다.
공청석유라는 절세적인 영약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일반적인 영약은 보통 뜨겁다거나, 차갑다거나 하는 한가지 성분을 지니고
있는 반면 공청석유는 모든 기운을 죄다 가지고 있다고 봐야한다.
요컨대 가장 안정적인 상태의 영약이 바로 공청석유라는 것이다. 무인이 복용하게 되면 내공으로 만들기에 가장 좋은 약이
공청석유인데 그 양이 문제였다.
한 방울 정도씩 마시며 꾸준히 운기행공을 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야 하는데 야혼은 너무 과했다.
한 모금이라는 엄청난 양 때문에 몸에서 전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부로 발산하고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냐?”
다급한 얼굴이 된 야혼이 당가려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미 움푹 들어갔던 허리선을
사라져버렸고 튀어나온 아랫배 때문에 앉아있는 것조차 버거워진지 오래였다.
살만 찐다면 문제가 아닐 터인데, 몸이 견디지 못하면 폭발한다는 말이 아닌가.
“몰라! 너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서. 한시바삐 내공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어.”
당가려 또한 딱히 해 줄말이 없었다. 영약을 과하게 먹어 약 기운이 넘치는 증상을 무슨 수로 해결한단 말인가.
죽어라 내공을 연마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제기랄! 보약은 과용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꽃 같은 미녀를 둘이나 두고……. ”
야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당가려에게 말한 것은 공청석유 한가지밖에 없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질 않는가. 이름도 알지
못한 영약들을 밥먹듯이 집어먹었는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가려 네 말은 진기가 몸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주면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말이지.”
“니 몸이 철이냐? 밖으로 솟구치는 진기를 막아내게?”
“씨팔! 알았어. 가서 일봐.”
“무슨 수가 있는 거냐?”
손을 휘휘 내젓는 야혼의 행동에 냉소소가 의문 어린 얼굴로 물었다. 무공에 대해선 거의 무지한 야혼이 방법을 찾은 듯했기
때문이었다.
“껍질을 단단하게 만들면 된다며?”
“그러니까 무슨 방법이 있냐고.”
“이거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빙그레 미소를 지은 야혼이 냉소소의 얼굴 앞으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암도에서 주웠던 투견공(鬪犬功)이란 비급이었다.
잠깐 훑어보았는데 투견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강철처럼 단단한 몸이었다. 아직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분명 피부를 단단하게 만드는 무공이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건?”
“왜 이래 이거. 너희들도 한두 권씩 챙겼을 거면서. 내 거 보고싶으면 전부 보여줄 테니 너무 놀라지 마라. 물론 대가는
치러야겠지만.”
“뭔데 구경 좀 하자.”
잔뜩 궁금한 얼굴로 냉소소가 야혼의 책 더미를 쳐다보았다. 아래쪽에 깔려있는지 눈에 들어오는 책들은 전부가 춘서들이었다.
“좋다 일단 배꼽을 보여주었으니까…….”
주섬주섬 책을 들어낸 야혼이 암도에서 주었던 무공비급을 하나씩 던졌다.
“세상에…….”
차례차례 들어올려지는 책을 본 냉소소와 당가려가 입을 떡 벌렸다.
환영마도법(幻影魔刀法), 복마청운검법(伏魔靑雲劒法), 광혈무영각(狂血無影脚)등이 마구 쏟아졌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복마청운검법과 광혈무영각은 무당과 소림의 절기였다. 청운검법과 무영각이었던 무공의 이름이 바뀌었다 함은 이곳에서 더욱
발전되었단 말이 아닌가.
그런 무공들이 전부 10권이나 되었다.
“너 이걸 다 익힐 거냐?”
탐욕스런 눈으로 무공비급을 쳐다보며 당가려가 말했다. 익히지는 않더라도 가문으로 가져간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터였다.
한두 권도 아니고 무려 10권이 아닌가. 그것도 강호 100대 고수라 일컫던 자들의 무공이.
“미쳤냐? 이것들을 왜 익혀! 필요한 건 이것뿐인데. 그러니까 대가만 지불하면 빌려준다니까?”
“대가가 뭔데?”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발 다가선 당가려가 물었다.
“얘는 뻔할 걸 물어. 이 야혼이 가장 좋아하는 게 뭐냐?”
“그럼 너?”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 일단 너희들은 이 안이나 한번 둘러봐라. 이 비급보다 더 중요한 게 이곳에서
살아나가는 것 아니냐.”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손을 들어올리는 당가려를 제지한 야혼이 투견공이라는 비급을 펼쳤다. 우선 가장 필요한 것은 껍질을
튼튼하게 하여 정력제의 방출을 막아야 했다.
‘이년들아 이게 전부인 줄 아냐? 풀 속에 보면 진짜가 있다. 이 야혼의 꿈을 이루게 해줄 진짜가.’
색공비급 3권은 그녀들이 오기 전에 미리 풀숲 한켠으로 숨겨두었던 것이었다.
-10년 세월, 우리 모두는 전부 미쳐가고 있다. 처음 십만대산에 들어왔을 때만해도 마교(魔敎)를 섬멸하는 게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무인이 된 목적이 바로 이 일이라 여겼다. 허나, 수많은 싸움과 살인 속에 과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옳은가 하는 회의가 생겼다. 없애야할 적으로 여겼던 마교도는 무공이 없는 일반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 무공을
익히도록 강요한 사람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다. 우리들의 검과 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공을 모르던 자들이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고, 강호 상에 숨어살던 자들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언제부터인가 살인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렸다.
우리편이 아닌 자들을 보면 무작정 살수를 펼쳤다. 붉은 피를 보고 희열을 느꼈다. 이곳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해서 마지막 임무를 자원했다. 나뿐 아니라 성모척살대를 지원했던 대부분의 무인들이 같은 심정이었다. 누구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성모를 죽임과 동시에 같이 죽을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급을 남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겠지.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래서 얻은 게 뭐요. 명교를 마교로
만들어서 당신들이 얻은 게 뭐냔 말이오. 강호 평화요? 아니면 정의 수호요. 없소. 오직 더 강한 적을 만들어 낸
것뿐이오. 더 많은 피와…….”
여호치 그리고 백색 옷을 입은 자들. 그들은 복수를 시작할 것이다. 100년 전에 죽어간 명교인을 대신해서 강호에 칼을
뽑을 것이고, 결국 남는 것은 전쟁밖에 없다. 과거야 전쟁터가 이곳 십만대산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100년 전 십만대산으로 쳐들어왔던 그들의 집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더 많은 죽음과 피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쩝! 별 걱정을…….”
내심 고소를 지으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투귀 오자양의 신세한탄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보호할 방법을 찾기
위해 보는 책일 뿐이었다.
-내가 무공 이름을 투견공이라 지은 이유는 싸움에는 정도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무인의 도를 논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전쟁을 보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바로 옆에서 피 흘리는 동료를 본적이 있다면
결코 도(道)란 말을 하지 못한다.
싸움에는 두 가지밖에 없다. 삶과 죽음. 둘 중 한가지를 택하라면 누구나 삶을 원할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도(道)가
필요 없다. 적보다 빨리, 적보다 앞서 검을 찔러 넣는 사람이 생존하는 것이다.
“이건 마음에 드는 군.”
야혼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걸렸다. 생존의 법칙이었다. 무를 이용해 도를 행한다는 말은 전부 거짓인 게다. 검이나 도가
만들어진, 혹은 무공이 만들어진 목적이 바로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맞소. 무공을 익혀 천하제일인이 되었다는 놈은 있었어도 아직 신선이 되었다는 놈은 없었소.”
-투견공은 말 그대로 개싸움이다. 상대에게 최대한 밀착하여 단 한방에 끝을 낸다. 작은 것 10대를 맞더라도 한 대만
제대로 팰 수 있다면 그걸로 끝이다. 어중간한 죽음은 자신만 피곤하게 만들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강철보다
단단한 몸이다.
“금강철피공(金剛鐵皮功)이라…….”
야혼이 원하는 무공이었다. 거의 외공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수련 방법자체도 무지막지했다.
“씨팔! 존나 아프겠네.”
“찾았냐?”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야혼의 귓전에 냉소소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미 주변을 한바퀴 둘러보고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이곳은?”
“좋은 소식부터 듣고 싶냐 나쁜 소식부터 듣고 싶냐.”
“좋은 것부터 듣자.”
“좋다. 일단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저기 가운데 연못도 있고, 절벽아래쪽에는 버섯도 상당히 있더라.”
위쪽에 비해 아래쪽은 꽤 넓었다. 분지를 가로지르는 직선거리가 거의 100장은 되었다. 더구나 가운데는 커다란 연못도
있고, 절벽 가장자리에는 석균을 비롯한 많은 식용버섯이 자생하고 있었다.
“나쁜 소식은 나갈 수 없다는 말이구나.”
야혼의 말에 냉소소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00장 정도의 높이였지만 안쪽으로 경사진 절벽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습기로 인해 절벽은 항상 축축한 물기가 흐르고 있어 잡을 곳은 물론이고 발 디딜만한 장소도 없었다.
절벽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금보다 두 배 이상 강해져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야 상관없어. 나가던 못나가던. 너희들만 있으면 돼. 공청석윤가 하는 놈 엄청 영약은 영약인가 보다. 벌써 뼈가
붙었어.”
다리에 통증이 사라지자 자리에서 일어난 야혼이 냉소소와 당가려를 향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참! 숙소는 어떻게 할래. 이왕이면 한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꿈도 크다 야혼. 네 녀석을 어떻게 믿고 같이 사냐.”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내가 있는 게 싫지는 않지?”
“그건 맞는 말이야. 네가 있어서 안심되긴 해. 하지만…….”
야혼을 쳐다보며 상큼한 미소를 짓던 냉소소가 불쑥 팔을 내뻗었다.
근처에 접근하면 바로 얼려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여기 있는 혈린만독편도 잊지 말아라.”
“근데 얼렸다가 다시 풀어줄 거지?”
“잔소리 말고 일단 숙소부터 정하자. ……나는 저기 보이는 동굴, 그리고 가려는 바로 옆. 야혼 너는 우리와 정 반대편에
있는 동굴.”
“야 좀 가까운 곳으로 해 주라. 너무 멀잖아. 밤에 늑대라도 습격해오면 어쩌라고.”
“걱정 안 해도 된다. 맹수는 너밖에 없으니까. 아참, 쥐도 많더라.”
엄살을 부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야혼에게 매몰차게 말한 냉소소가 몸을 돌렸다. 실은 당가려와 같은 동굴을 쓰고 싶었지만
빙공을 익히고 있었기에 방법이 없었다.
앞으로 운기행공을 많이 해야하는데 그때마다 당가려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동굴을 따로 잡았던 것이다.
“씨팔! 드디어 부자(富者) 걸음이 됐네.”
냉소소와 당가려의 엉덩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헤벌쭉 대던 야혼이 후다닥 짐을 챙겨 걷다가 문득 어색한 걸음걸이에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불어난 살로 인하여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마치 허벅지 사이에 무언가를 끼워놓은 듯, 돈 많은 부자들이 걷는 걸음처럼
다리가 역 팔자로 벌어졌던 것이다.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숨겨두었던 색공까지 찾아든 야혼이 냉소소가 일러준 동굴로 향했다.
그의 허리에는 두 자루의 도(刀)가 걸려있었다. 도살장 이정에게서 받아온 도와 100년 전 사라졌던 반쪽짜리 염왕도.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39)- 살과의 전쟁(1)
살과의 전쟁.
과앙! 광!
“이야-합!”
쾅! 쾅!
“어이그, 저 미친놈 밤만 되면 발광을 해요. 발광을…….”
멀리서 들려오는 쿵쿵거리는 소리에 당가려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벌써 며칠째 괴롭히는 소음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데라곤 위쪽에 난 작은 구멍이 전부인 이곳은 유독 어둠이 빨리 밀려온다.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할 수
있는 시기는 불과 두 시진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 어두컴컴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한순간 칠흑 같은 공간으로 변해버린다.
처음에는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10여일 정도 지나자 점차 환경에 적응이 되었는지 무덤덤해지기까지 하였다.
바로 저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려도 저 소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 모양이구나?”
오도마니 쪼그려 앉아 야혼이 있는 곳을 주시하고 있던 당가려 곁으로 냉소소가 다가오며 픽 웃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을 피워봐야 연기만 가득할 뿐 별 도움될 일도 없기에 어두운 밤이면 운기행공을 하거나 잠을 자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언니 맵시가 근사해졌네?”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린 당가려가 냉소소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너는 뭐 별수 있냐? 이곳에서 빨리 나가야 할텐데…….”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차림새였다. 가슴을 가릴 젖가리개를 만들기 위해 한쪽에 남아있던 바지마저 자른 것이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천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우선은 무공을 익혀야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옷이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인데 옷이라도 헤지는
날이면 정말 곤란해지는 것이다.
“여차하면 불만 그 녀석 눈을 멀게 해버리지 뭐.”
불만, 야혼의 몸을 보고 당가려가 새로 지은 별명으로 불어터진 만두의 줄임말이었다. 사실 야혼의 몸은 나날이 그 평수를
늘려갔다.
옆에서 보기가 겁날 정도로 살이 찌는 것이었다. 과거 윤곽 또렷한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동그란 구(球)만 둥둥
떠다녔다.
“그래도 야혼이 있으니까 마음은 한결 편하잖아.”
그랬다. 언제나 탐욕스런 눈길을 보내긴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눈길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 눈길이 사라지면
불안해졌다.
“그게 어디 좋아서 그런 건가? 그 징그러운 눈빛이 이곳에 고립되었다는 생각을 잊게 해주니까 그러는 거지.”
야혼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여자 둘만 있는 곳이 아닌,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타인이 있다는 사실.
“그런데 요즘은 숨어서 지켜보지도 않는 것 같던데?”
처음 3일간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야혼의 눈길 때문에 하루종일 볼일도 보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녀석의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었다. 결국 빙공을 한방 먹이고서야 참았던 볼일을 볼 수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야혼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좋기만 하드만, 언니는 싫은가 보네?”
“그게 아니고. 야혼에게 무슨 일 생길까봐 그러지.”
“그럼 어차피 잠자기도 글렀는데 한번 가볼까, 언니?”
“그럴까? 대신 아는 체 하지 말고 슬쩍 보고 오자.”
마주 보고 찡끗 눈짓을 교환한 두 여인이 야혼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얼굴이었다.
콰앙! 콰앙!
엄청난 체구의 인간이 절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고 있었다. 경공을 이용해 나아가는 게 분명할진대 눈에 보이는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하나의 커다란 공이 굴러가는 듯했다.
“세상에, 언니 더 불었…….”
저 멀리 굴러가는 야혼의 모습을 쳐다보던 당가려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이틀 전과는 또 달랐다. 그 때만해도 지금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가슴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는 구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저건 완전히 곰이다 곰. 비만 곰. 헤엑! 저 자식 또 벗었다.”
절벽에 부딪치고 돌아오는 야혼을 쳐다보던 당가려가 입을 틀어막았다. 뿔뚝 튀어나온 아랫배 아래쪽을 가려야할 천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저 몸에 걸칠 천이나 있겠냐? 바지를 다 뜯어낸다 해도 허벅지 한쪽밖에 못 가리겠구먼.”
냉소소 역시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뒤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달랐다. 불쑥 고개를 내민 아랫배는 만삭의 여인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더하여 겹겹으로 겹친 뱃살에 가려 아래쪽에 있던 물건이 보이지도 않았다.
“언니 우리 저 자식 좀 놀려줄까?”
“싫다. 그래봐야 우리만 바보 될텐데.”
“언니도. 누가 저 녀석 벗은 것 가지고 놀리자고 했나? 살, 저놈의 약점은 살이라고요. 따라와요.”
일부러 기척을 흘리며 야혼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쌰아앙!”
슈웅!
콰앙!
거친 욕설을 뱉어내며 절벽을 향해 돌진하는 야혼의 모습은 말 그대로 성난 곰을 연상시켰다.
“기절하겠군.”
야혼이 있던 곳으로 다가온 당가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돌진해 들었던 벽은 엉망이었다. 바위벽에 인간이 부딪쳐
가는데 상처 입는 대상은 부드러운 인간의 살이 아니라 바위였다.
절벽 아래쪽이 온통 벽에서 떨어진 바윗돌 투성이었다. 또한 방금 야혼이 부딪쳐간 곳은 인간 형상으로 두 치 정도
패어있었다.
“왔냐?”
그제야 둘을 발견한 야혼이 태연한 얼굴로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붉게 물든 그의 몸은 목욕이라도 한 듯 온통 땀범벅이었다.
“야 몸 좀 가리고 오면 안되냐? 아무리 그렇다고 숙녀들 앞에서 무슨 짓이냐?”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야혼을 발견한 냉소소가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뿔뚝 튀어나온 뱃살로 많이 가려졌다고는
하지만, 바로 눈앞인데 아래쪽에서 덜렁거리는 물건이 안보일 리가 없었다.
“처녀인 니네들이 이런 것 언제 구경이나 했냐? 기회 있을 때 자세히 봐놔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됐지 해 될 일은
없을 테니. 아이고 힘들어라. 돼지새끼처럼 변하니까 앉기도 힘드네. 됐으니까 자세 풀어.”
힘들게 바닥에 앉은 야혼이 근처에 벗어두었던 바지로 앞을 가리며 소리쳤다. 살이 찐다는 게 이런 것인 줄은 정말 몰랐다.
엉덩이를 대고 앉아도 결코 편하지 않았다. 무릎조차 구부러지지 않으니 가부좌도 취할 수 없었다.
“그게 가린 거냐?”
덜렁대는 그곳만 겨우 바지로 가린 야혼을 가리키며 당가려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지금 입고 있는 게 옷이냐? 속곳보다 더하구먼. 피차 마찬가지니까 격식 따지지 말자. 피곤하다.”
야혼의 말대로 당가려의 복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뜯어낸 바지로 젖가리개를 만들어 간신히 가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차라리 벗고 있는 것보다 더 야한 차림이 지금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 바지로 속곳이나 하나 만들어 줄까?”
“아서라. 지금도 계속해서 불어나는데…….”
냉소소의 말에 야혼이 손사래를 쳤다. 여전히 불어나는 몸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전력을 다해 절벽에 몸을
부딪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불안했다. 언제 몸이 터져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곳도 단련해야지. 다른 곳은 전부 단단해졌는데 이곳만 그대로면 폭주하던 진기가 전부 그곳으로 몰릴 것 아냐.”
“그러니까 그곳까지 단련시키기 위해 발가벗고 한다 이 말이냐?”
“오잉? 그러고 보니 소소 너도 반라가 되었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냉소소를 쳐다보던 야혼의 눈에 탐욕의 빛이 어렸다.
“이건 내가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천벌을 받은 건지 알 수 가 없네.”
“너? 자꾸 헛생각 할래? 자꾸 그러면 잘라버린다.”
냉소소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지금껏 얌전히 있던 야혼의 앞쪽이 자신의 몸을 쳐다보는 순간 불뚝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창피하고 당혹스러웠다.
“야! 이건 20대 사나이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내가 어찌 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내 거시기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너희들이 엄청 미인이란 소리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아라. 솔직히 말해서 기분 나쁜 건 나다. 날이면 날마다
너희들 때문에 이 놈이 힘들어 하잖냐. 어찌 해줄 수도 없는데.”
“자꾸 쓸데없는 소리하면 우리 그냥 간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신경 끄라는 말이다. 가려 너는 이미 주물럭거리기까지 해놓고 새삼스럽게 호들갑은.”
“근데 그 짓 언제까지 할거냐?”
“글쎄 나도 몰라. 살이 더 이상 불지 않을 때까지 해야겠지. 그건 그렇고, 너희들 그 젖가리개 다 떨어지면 어쩔 거냐?”
야혼이 짓궂게 웃었다.
“그땐 네 눈알을 뽑아버려야지. 흑!”
‘어 내가 왜 이러지?’
야혼의 눈을 쳐다보며 이죽거리던 당가려가 문득 치미는 욕정에 저도 모르게 몸을 꼬았다. 야혼의 시선을 따라 가볍게 움직이는
손을 보았을 뿐인데 몸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는 듯했다. 더하여 일순간이었지만 야혼의 모습이 달라 보였던 것이다.
매끈하게 빠진 예전모습으로 되돌아 왔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니 한결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다 놀았으면 그만 가라. 나는 살기위한 발버둥을 시작해야겠다.”
“그래 수고해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몸의 반응에 당황한 당가려가 서둘러 일어섰다. 얼굴이 화끈거려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다.
늪지대에서 보았던 야혼의 상징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때의 감촉까지.
“이제 시작일 뿐이야. 자! 간다.”
당가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뜻 모를 웃음을 남긴 야혼이 절벽을 향해 몸을 돌진해 나갔다.
밤새도록 울려대던 쿵쿵거리는 소리는 희부윰 사위가 밝아짐과 동시에 끝이 났다.
“내가 생각해도 내 몸이 무섭군.”
공터 중앙에 있는 연못에 몸을 담근 야혼이 급속하게 아물어 가는 상처를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치 괴물의 실체를 보는
듯했다. 실상 절벽을 향해 돌진해 가는 행위는 많은 상처를 남긴다. 편평한 면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곳일진대 몸이 견딜 리가
없었다. 더하여 절벽의 바위가 주는 두려움 때문에 낮에는 결코 시도할 수가 없었다.
성모궁에서 무의식적으로 석벽을 박살냈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가 밤에만 금강철피공을 익히는 이유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간밤에 생겼던 상처가 아침이면 거의 아물어 간다는 데 있었다. 이곳저곳 찢긴 곳이 급속히 아물어
가며 새살이 돋는데 야혼 스스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이그, 살아, 살아! 이래가지고 계집년들이 쳐다나 보겠냐? 아니 쳐다는 보겠지. 푸줏간 돼지를 보는 심정으로.”
야혼이 아랫배를 퉁퉁 두드리며 탄식을 했다. 언제나 위풍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던 그놈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배꼽을 보기
위해서도 고개를 한참이나 숙여야 하는 실정이었다.
“내가 아침 준비하는 날이군.”
그들의 일상은 쳇바퀴 돌듯 변함이 없었다. 갇혀있는 삶이라 딱히 할 일도 없는 데다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래도 식사준비는
순서대로 돌아가며 하고 있었다.
식사라 해봐야, 버섯과 석균이 다였지만 그나마 먹을 게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어라? 쟤가 여기 웬일이래?”
버섯을 따러 오던 야혼이 재빨리 바지로 아래쪽을 가렸다. 커다란 엉덩이를 자신 쪽으로 돌린 채 버섯 따는 데 여념 없는
사람은 다름 아닌 냉소소였다.
“허이그! 저런 물건을 두고 봐야만 하다니. 아서라, 정상적인 상태였을 때도 안 준 년인데 이 상태로는…….”
입안 가득 고인 침을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부터는 내가 가져다 줄 테니까 바로 가라.”
“이제는 아예 눈요기도 하지 말라 이 말이냐?”
“불쌍해서 그런다. 밤새도록 시달리는 녀석을 부려먹기가.”
벌거벗은 야혼의 몸을 쳐다보던 냉소소가 싱긋 미소를 흘렸다.
“소소야 제발 부탁이다. 웃지 말아라. 옛날처럼 그냥 무표정하게 해주면 안되겠냐? 네 미소는 고문이다, 고문. 진기가
폭주해서 죽는 게 아니라 아랫도리가 터져 먼저 죽겠다.”
야혼이 죽을상을 하며 애원했다. 차라리 무면미봉이었을 때가 더 나았다. 왜 반말을 먼저 시작했는지 후회막급이었다. 그냥
모른 체 하고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았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갈 방법도 없고, 나갈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 상태임에도 냉소소의 얼굴은 그지없이 밝았다. 아니 이슬 머금은 화초처럼
갈수록 화사해져갔다.
“어떡하냐. 이렇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 넌데, 네가 감수하고 살아야지. 이렇게 하면 아예 죽겠네.”
혀를 날름 내민 냉소소가 가슴에 두른 천을 슬쩍 들추는 시늉을 했다.
“나 간다. 둘이서 밥을 먹던지 알아서 해라.”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야혼이 바지를 휙 걷어내며 제 동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니 어때, 내 말이 맞지?”
야혼이 사라지기 무섭게 한쪽 풀숲에서 당가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그의 음흉한 눈길을 막는 방법은 숨기려고 할 게 아니라 아예 더 도발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원래 남자란 족속은 여자가 더 대담하게 나오면 찌그러지게 되어있어.”
제 생각이 먹히자 의기양양해진 당가려가 야혼이 사라진 동굴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자신들의 그런 행위자체가 야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임은 알지 못했다.
“요년들아. 머리를 제법 썼다만, 너희들은 아직 애송이야. 몇 달만 더 기다려라.”
동굴로 돌아온 야혼이 책을 뽑아들며 중얼거렸다. 아담한 동굴이었다. 마치 상국사 뒤편에 만들었던 동굴을 연상시킬 정도로
포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쪽 구석에 바윗돌을 쌓아 만든 조그마한 서가에 가져왔던 춘서를 잔뜩 꼽아두었다.
지금 야혼이 뽑아든 춘서는 성모궁에서 얻었던 색색만화공(色色滿花功)이라는 책이었다.
색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한 책이었다. 어젯밤 당가려가 몸을 부르르 떨었던 이유가 바로 이 책에 있던
동작 때문이었다. 색색만화공을 운기하며 살짝 펼친 손동작과 눈빛에 사로잡혀 당가려가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여기 있는 무공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뭔지 아냐? 그건 색공이 아니다. 여면환공(悆面幻功)이라는 무공이다 요년들아.”
무면색마(無面色魔)라는 별호가 생기게 한 이유가 여면환공(悆面幻功) 때문이었다.
무면색마가 우연히 얻었던 살수비기에서 발견한 무공으로, 상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비공이었다.
즉 그와 상대했던 여자들은 무면색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야혼이 가장 원했던 무공이었다. 서대시전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 위해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병을 가진
환자처럼 행동하곤 했는데 여면환공을 익히게 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을 터였다.
“근데 마지막에 적힌 이건 뭔 말인지 모르겠네? 역골공(逆骨功)종류의 무공과는 절대 같이 익히지 말라고?”
부작용이라 쓰여진 마지막 글에 야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골공을 모르진 않았다. 하오비동에서 찾았던
천면만환공(千面滿幻功)이 바로 역골공의 하나였다. 체형까지는 아니지만 진기를 이용하여 얼굴형태를 딴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이었다.
얼굴에 워낙 자신이 있었기에 익히지 않았는데 그런류의 무공과 여면환공을 같이 익히게 되면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이다.
“설마 내가 내 얼굴을 못 알아본다는 말이야 뭐야?”
코웃음을 치며 책을 덮었다. 설마하니 그런 일이 생길 리야 있겠느냐 하는 마음에 이내 지워버렸다.
“저년들이 또 왜 오는 거야?”
멀리서 들려오는 기척에 보던 책을 숨긴 야혼이 재빨리 일반 춘서를 꺼내들었다.
“이것들이 무슨 모의를 하려고.”
한참을 기다려도 들어오질 않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냉소소와 당가려가 들어왔다.
“아침 가져왔다. 여기는 언제 봐도 아늑하단 말이야.”
야혼의 동굴을 둘러보는 척하며 당가려가 슬쩍 방안을 살폈다.
“아무거나 가져가라. 눈치보지 말고. 단 춘서에 한한다. 무공 비급을 가져가려면 한번씩…….”
“치사해서 안 본다 자식아. 그깟 소림이나 무당의 무공이 뭐가 대단하다고 보냐? 너나 많이 익혀라.”
입이 삐죽 튀어나온 당가려가 야혼을 흘겨보았다. 사실 그녀가 이곳에 자주 들리는 것은 야혼이 가지고 있는 10권의 무공비급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그것을 암기해야 할텐데 야혼이 내줄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매번 하는 말이 한번씩 줄 때마다
1권이라고 한다.
“자 가져가서 보든지 말던지. 나는 한숨 잘란다.”
냉소소와 당가려에게 춘서 한 권씩을 던져준 야혼이 이내 몸을 눕혔다.
“치사한 놈! 안 본다 안 봐! 혼자 잘먹고 잘살아라 나쁜 새끼야.”
야혼을 향해 버섯 몇 개를 던진 당가려가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특이하게 야혼의 거처는 지면에서 2장 정도 높이에
있었다.
주변에 있는 동굴의 수는 대 여섯 개 남짓 되었지만 야혼이 선택한 곳은 가장 높은 곳이었다.
“나중엔 전부 보게 될 거다. 무공을 익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뭘 하면서 긴긴 하루를 보낼 건데?”
멀어지는 두 여인을 쳐다보며 야혼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야 뭐 절대 심심할 일이 없지 않겠어?“
할 일이 태산이었다. 우선은 몸을 만들어야 하고, 그 다음은 도(刀)를 갈아야 한다. 그 두 가지만 하는데도 하루가
부족한데 색공까지 익혀야한다. 하루가 13시진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나씩 하는 거야. 못 나가면 어때, 저년들 데리고 살면 그만이지. 잠들면 안 되는데, 그럼 또 살찔텐데…….”
잠들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던 야혼이 이내 고른 숨을 내쉬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0)- 살과의 전쟁(2)
세월은 참으로 빨리 흘렀다. 세 사람이 살림을 시작한지 벌써 6개월이 흘렀지만 거의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야혼은 절벽에 몸을 박았고, 도를 갈며 태을건곤심법을 익혔다.
“근데 이놈의 피부는 언제쯤 하얘지려나.”
자신의 몸을 쳐다보며 툴툴거리는 인물. 온몸이 먹물처럼 검게 변한 야혼이었다. 금강철피공을 익히면서 나타난 증상이었다.
금강철피공을 익히게 되면 전부 3번의 탈피를 겪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증상은 온몸이 붉어지는 것이었다. 이미 2개월 전에
그 상태는 겪었고, 지금은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흑피(黑皮)의 단계였다.
외공으로 보자면 이미 도검이 침투하지 못하는 상태로 변해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면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면서 금강철피공이 완성되는 것이다.
“씨발! 이놈의 몸은 왜 변함이 없냐고.”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벽으로 다가가던 야혼이 잔뜩 불만 어린 욕설을 뱉어냈다. 금강철피공이 완성되고,
태을건곤심법도 상당한 진전이 있는데 몸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불어서 인간의 모습을 벗어나 있었다. 쉽게 말해 볼일을 보고 뒤를 닦지 못할 정도가 지금 상태였다. 손끝이
항문에 닿지 않았던 거였다.
처음에야 길길이 날뛰며 절벽에 몸을 박아 넣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포기하고 말았다. 어찌되었던 몸 속에 있는 모든 약
기운을 내공으로 만드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태을건곤심법에 모든 희망을 걸고 도를 가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살이 빠졌는가를 확인하는 방법은 별 게 아니었다. 똑바로
서서 벽을 향해 다가가는 발걸음 수를 세는 것이었다. 세 걸음, 배가 벽에 닿는 거리였다. 그보다 빨리 닿으면 살이 빠진
것으로 간주하기로 했는데 지금껏 세 걸음 보다 빨리 배가 닿은 적은 없었다. 그나마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해하는 형편이었다.
“비가 오려나.”
아랫배를 툭툭 친 야혼이 밖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하늘이 우중충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먹장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어버렸다.
번-언쩍! 쿠르릉! 쏴아!
급기야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의 앞을 분간할 수도 없을 정도의 엄청난 비가 사정없이 쏟아졌다.
“캬! 시원하게 싼다. 저 자식은 일 년이 지났는데 오줌줄기 하나 변하지 않는군.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던 야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굴 밖을 향해 몸을 날렸다.
빨랐다. 허벅지 살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야혼이었지만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졌다. 희뿌연 백무만 남는 완전한
무풍무영술이었다. 단순하게 금강철피공만 익히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절벽에 몸을 날리면서 그가 썼던 경공은 하오비동에서
보았던 무풍무영술이었던 것이다.
빗줄기를 퉁겨내며 야혼이 도착한 곳은 그들이 주식으로 먹는 버섯 밭이었다.
재빨리 한쪽 구석으로 다가간 야혼이 대충 위치를 가늠하고는 버섯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건 비료를 줘서 키운 소중한 버섯이야 없어지면 큰일난다고.”
야혼이 준 비료는 다른 게 아니었다. 언제나 상비약으로 들고 다니던 춘약을 버섯 아래쪽에 묻어놓았던 것이었다.
숱한 고민 끝에 찾아낸 방법이었다. 무공이 일취월장한 당가려와 냉소소를 향해 춘약을 뿌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버섯이 춘약성분을 가지고 나오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해? 빨리 안 나르고.”
당가려와 냉소소의 기척을 느낀 야혼이 소리를 질렀다.
“일단 소소 네 동굴로 가져가.”
“알았어.”
‘이 냉소소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야혼의 벗은 몸을 가만 쳐다보던 냉소소가 내심 중얼거렸다. 참으로 인간이 간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야혼의
벗은 모습이 거북하지 않았다. 아래쪽에 달려 있는 그것조차 친숙하게 느껴졌으니,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의 벗은 상체만 보아도 고개를 돌렸던 자신이 아닌가. 더더욱 기가 막힐 노릇은 자신의 그런 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옷을 입고 있는 야혼의 모습이 더 어색할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은 당가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리는 비로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고 야혼의 앞에서 버섯을
주워담았다.
“야! 그래가지고 언제 나르냐. 젖가리개라도 풀어서 담아!”
담을 곳이 없어 머뭇거리는 냉소소와 당가려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사방이 막힌 탓인지 안쪽으로 물이 급속하게 차 들어오는
듯했다.
“뭐?”
깜짝 놀란 얼굴로 당가려가 야혼의 얼굴과 자신의 가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가슴을 감싸고는 있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한지 오래 되었다. 더구나  얇은 여름옷으로 막아내기에는 빗줄기가 너무 거셌다.
“무슨 의미가 있냐고. 다 보이잖아. 저 물 안보여?”
“아, 알았어.”
눈을 치뜨며 채근하는 야혼의 서슬에 놀란 당가려가 가슴에 두른 천을 풀어냈다. 순간 커다란 가슴이 출렁하며 그 모습을
드러냈으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재빨리 천을 펴 버섯들을 주워 담았다.
당가려가 그렇게 나오자 냉소소 또한 달리 방법이 없는 듯 덩달아 천을 풀어 버섯을 담았다.
기경이었다.
나체로 버섯을 뽑는 사내와 가슴을 훤히 드러낸 두 여인이 정신없이 그것들을 쓸어 담아 동굴로 날랐다.
“이것도 괜찮네?”
시원하게 때리는 빗줄기를 맞으며 냉소소가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에는 차마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는데 갈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다.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세속의 때가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 듯했다. 얼굴에 표정이 돌아오면서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꼈다.
당가려 또한 냉소소와 같은 심정인지 움츠렸던 어깨를 펴며 씩씩하게 걸었다. 야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거북살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야혼을 향해 빙긋 미소를 날릴 정도였다.
“저것들이 미쳤나? 아니면 득도를 했나. 이걸 보고도 웃어?”
야혼이 보이지도 않는 제 아랫도리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당가려와 냉소소가 옷을 벗는 순간부터 힘을 받기 시작한 그곳이
빗줄기를 퉁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대수롭잖게 쳐다본 당가려가 빙긋 미소까지 짓다니. 갑자기 싸늘히 피가 식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 몸 속에 사리가 생겼나보다. 그러지 않고는 벌써 죽을 리가 없잖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자신의 물건을 쥐어본 야혼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늙은이의
그것처럼 힘없이 늘어져버린 것이었다.
“야혼, 그것 만진 손으로 버섯 뽑으면 죽어! 손 씻고 저쪽에 가서 석균이나 채취해.”
“허!”
“임마, 뭐해! 저기 물올라오는 거 안보여?”
멍한 눈으로 당가려를 쳐다보는 야혼을 향해 이번에는 냉소소가 뾰족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저년들 변태였어. 아니면 이럴 수가 없다고. 어째 남자를 앞에 두고 저런 행동을 보인다냐.”
멍한 얼굴로 석균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여자들을 섭렵했고 그녀들을 통해 여인의 속내를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 자식 말이 맞았어.”
무면색마가 마지막에 써 두었던 글이 떠올랐다. 아무리 많은 여자를 접하고 만나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라 하였다.
색을 안다고 자신하지 말라고 하였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며.
“하지만 나는 야혼이다. 밤의 혼. 내 몸 속에 있는 사리를 전부 녹이고 만다. 기다려라, 냉소소 당가려.”
불끈 두 주먹을 틀어쥔 야혼이 빠르게 석균을 뜯었다. 며칠 분을 장만해야 할지 모르지만 최대한 많은 양을 뜯어두어야 했다.
이곳이 물에 잠기면 먹고 살 것이 전혀 없는 게 현실이다.
거의 한 시진에 걸쳐 모든 작업을 끝낸 세 사람은 냉소소 동굴 앞에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는 여전히 멈출 생각이 없는지 줄기차게 내리꽂고 있었다.
“소소야 이곳도 위험한 것 아냐?”
걱정스런 얼굴로 야혼이 냉소소를 쳐다보았다.
“글쎄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해. 이러다 우리 바로 나가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정말이네? 그랬으면 좋겠다.”
옆에 있던 당가려가 냉소소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차라리 하염없이 내리는 비로 불귀동이 둥실 넘쳐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은 많이 변했겠지?”
“그랬겠지, 우리가 남만에 온지 벌써 1년이 되었는데. 가족들은 얼마나 걱정할까.”
야혼이 혼잣말처럼 말하자 당가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동안 거의 잊고 살았다. 무공을 익히기 전에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미리부터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차오르는 물을 보자 문득 집 생각이 간절했다.
“걱정 많이 하겠지. 얼마나 너희들이 보고싶겠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들인데. 나 같으면 반 미쳐버렸을 거다.
어쩌면 너희들을 찾겠다고 십만대산을 헤매고 다닐지도 모르지. 그게 사랑 아니겠냐. 휴-우! 어쩌다가 이리 되었는지
모르겠다.”
“너?”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는 야혼의 모습에 당가려와 냉소소가 감동 받았다는 듯이 동시에 입을 뗐다. 단 한번도 자신들에 대해
걱정의 말을 하지 않았던 야혼이었다. 언제나 몸을 훔쳐보기에 급급했는데……. 문득 야혼이란 인간이 다르게 보였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두 여인을 향해 야혼이 음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치 자신이 능력이 없어 이것밖에 안
된다는 듯이.
“걱정하지 마라. 우린 나가게 될 거다. 너희들이 못하면 나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줄게.”
야혼이 토닥토닥 당가려와 냉소소의 등을 두드리며 제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우앙!”
울음을 터트린 쪽은 나이가 어린 당가려가 먼저였다. 야혼의 품에 기대어 펑펑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녀를 시작으로
냉소소까지 울음을 터트렸고, 급기야는 세 사람 모두 얼싸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곳에서 살아온 6개월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제대로 된 옷을 입기를 했나, 따뜻한 음식을
먹어보기를 했나, 섧디설운 눈물이 속수무책으로 흘렀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일은 야혼의 행동이었다. 두 여인이야 사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울음을 터트렸지만 야혼이 울어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부모가 있기를 하나 집이 있기를 하나. 가진 거라 해봐야 서대시전에 있는 주사위 돌리는 널빤지가
전부인 놈이 아닌가.
그런 놈이 두 여인을 품에 안고 대성통곡을 하다니.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기회는 오는 게 아니라 잡는 거야.’
양손을 정신없이 움직이며 내심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비에 젖은 두 여인의 몸은 그로서는 처음 겪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살짝 대고만 있어도 스르르 미끄러지는 게 묘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굳이 어디를 만지겠다고 손을 옮길 필요가 없었다.
저절로 그녀들의 가슴까지 손이 미끄러지듯 옮아갔다.
겨드랑이 쪽으로 손을 밀어 넣은 야혼이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 좋은 찰나에.’
“야! 그만 울고 우선 버섯이랑 석균을 내 동굴로 옮기자.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되겠다. 비가 많이 와서 이곳을 나갈 때
나가더라도 준비는 해야지.”
아래쪽으로 불끈 힘이 쏠리자 야혼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녀들에게 들키기 전에 서둘러
수습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안 해도 돼. 어차피 무공을 완전하게 익히면 되니까.”
“나는 그냥…….”
“됐어, 빨리 하자.”
일이 묘하게 흘렀다. 야혼은 자신의 몸 때문에 일을 하자고 했던 것인데 냉소소와 당가려는 달리 받아들인 모양이다. 일을
시켜 슬픔을 잊게 해주려는 듯한 행동으로 보였던 것이다.
‘엥? 이럼 색색만화공에 완전하게 걸려들겠네?’
둘의 행동을 지켜본 야혼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색색만화공의 가장 기본은 상대에 대한 호감과 믿음이었다.
무슨 방법이든 상대에게 조그마한 호감이라도 있어 관심을 갖게되면 그때부터 색공의 위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일단은 더 익어야하겠지. 아직은 딸 때가 아니다. 고맙다 비야.”
하늘을 쳐다보며 실쭉 미소를 지은 야혼이 이내 냉소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섯을 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평상시 앞을
가렸던 자신의 바지마저 가져와 버섯을 담았다.
이윽고 한 시진에 걸쳐 일을 마친 일행이 야혼의 동굴에 앉아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물은 일장 높이까지 차올라 왔지만 여전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수영할래?”
막연한 눈으로 물을 쳐다보던 야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서대시전에 있을 때는 한여름이면
황하에 들어가 수영도 많이 했었는데 이곳에 온 이후로는 단 한번도 하지 못했다. 물론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연못에서 몸이야
씻는다지만 황하 강변에서 물장구 칠 때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너 미쳤니?”
뜬끔없는 야혼의 말에 당가려가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물이 차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운데 그 속에서 놀자니.
더구나 깨끗한 물이면 달리 생각도 해보겠지만 온통 누런 흙탕물이 아닌가.
“싫음 말고. 나는 오랜만에 저속에서 좀 놀란다. 끼요!”
풍덩!
기이한 괴성을 지르며 야혼의 거구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신기한 사람이지?”
“언니가 그랬잖아. 잡초 같은 놈이라고.”
“그래 잡초 같지. 어느 곳에 두어도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 저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져.”
“언니! 혹시……?”
“아니 좋아한다는 그런 감정이 아니고, 그냥 자유롭다고 할까. 전혀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사람 있잖아.”
그랬다. 야혼은 창공을 휘젓는 새 같았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 예의와
격식이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살아가는 자신과는 또 다른 삶이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이 살기를 원하는 그런 삶을 야혼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책임하잖아요.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최고의 삶이잖아. 여기서만큼은. 나도 수영하고 싶다. 너는 안 할래?”
유쾌한 미소를 머금은 냉소소가 입고 있던 바지마저 벗어 던지고 완전한 나체로 동굴 앞에 섰다. 잠시 동안이나마 야혼처럼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어차피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곳이고, 도덕이란 굴레로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는 곳이다.
내부에서 끓어오른 욕망을 그대로 방출해도 문제될 것이 없어 보였다.
“야, 야혼, 내가 간다. 기다려.”
그 자리에서 야혼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린 냉소소가 물로 첨벙 뛰어들었다.
“참! 누가 무면미봉이라 했는지…….”
열심히 물살을 가르며 야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냉소소를 쳐다보던 당가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흠주현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냉소소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구보다 쾌활하고 활기찬 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 이곳 십만대산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나 봐. 아니면 저 꼴통이 사람을 변하게 만들든지. 나만 바보 되기 전에 빨리
들어가야지.”
서로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던 당가려가 쫓기듯  바지를 벗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잖아?”
몸에 달라붙는 물의 촉감도, 떨어지는 빗방울도 그지없이 상쾌했다.
“야호!”
당가려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뭔지 모를 기분이 북받치며 가슴속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냉소소가 말했던
자유로움이 바로 이런 것이지 싶었다.
“야! 가려 뭣하러 왔냐? 그냥 우리 노는 것 구경이나 하지.”
“무슨 소리 둘만 재미있게 노는 꼴 나는 못 본다. 이얍!”
야혼과 냉소소가 있는 곳으로 헤엄쳐간 당가려가 두 사람을 향해 물을 쳐 올렸다.
“너? 감히 이 야혼을 물 먹인다 이거지. 으헝!”
순식간에 물 속으로 잠수한 야혼이 당가려의 허리를 붙잡고 솟아올랐다.
“야! 너 이건 반칙이다, 반칙.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냐?”
야혼의 머리를 손으로 잡아 비스듬히 꺾으며 고함을 질렀다.
“언니, 뭐해? 이 녀석 다리 붙잡아!”
“알았어!”
당가려의 볼멘소리에 냉소소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 야혼의 두 다리를 붙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곳은 흙탕물 속, 제대로
잡힐 리가 없었다. 뿌연 흙탕물 속에서 세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시작했다.
상대의 손이 젖가슴을 틀어쥐어도, 제 가랑이 사이로 팔을 끼워 번쩍 들어올려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으로 상대를
밀어내며 두 다리로 상대의 허리를 조였다.
야혼 또한 냉소소나 당가려와 마찬가지였다. 처음 물 속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지금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비와 흙탕물. 어지간히 분위기가 갖추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들어와서 그녀들과 어울리다 보니 어느새 처음 목적은
잊어버렸다. 정말 마음을 풀어놓고 노는 데만 몰두했다.
아주 어린 시절,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그때로 돌아간 듯 했다. 누이와 멱을 감던 그 시절로. 아무런 걱정 없이 마냥
즐거웠던 시절로.
“이얍! 이번에는 내 차례다. 각오해라 당가려, 냉소소!”
두 여인에게서 멀어진 야혼이 물을 박차며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얼마든지 와라! 꼴통! 우리는 둘이닷!”
“이야앗!”
환한 미소를 머금은 당가려의 얼굴로 물을 끼얹으며 야혼이 깔깔거렸다.
“언니! 뒤쪽 조심해.”
득달같이 들이닥치는 야혼을 피하며 몸을 돌렸으나 이미 야혼의 몸놀림에 등을 허용하고 말았다. 당가려의 뒤쪽으로 돌아간
야혼이 냉소소의 가슴을 감싸듯 끌어안아 수면 위로 들어올렸다.
당가려의 가슴이 잔뜩 일그러졌으나 두 사람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야혼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다리를 버둥버둥
들어올려 그의 허리를 힘껏 감았다.
그 순간을 이용해 냉소소가 야혼의 가랑이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뒤쪽으로 들어올렸다.
“아악! 이건 반칙이다. 거긴 급소란 말이야.”
“못 견디겠으면 빨리 가슴을 놔. 그럼 되잖아!”
“일단 항복!”
급기야 야혼이 먼저 항복을 외치며 당가려의 가슴을 놓았다.
“거봐 상대도 안 되면서.”
“너?”
냉소소를 향해 눈을 흘긴 야혼이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가려야 꼴통 어디 갔어. 어디야, 어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야혼의 모습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기다려 봐 언니 잠시후면 나올 거야. 지가 어디로 가겠어.”
“크앙!”
“아앗!”
기이한 괴성을 지른 야혼이 냉소소의 아래쪽을 잡아채며 물 속에서 솟구쳐 나왔다.
“기다려 언니!”
재빨리 야혼과 냉소소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 당가려가 등뒤에서 야혼의 목을 틀어쥐며 공격했다.
“녀석 거길 잡아. 거길 잡아서 당기면 바로 항복한다고.”
“헹! 이번에도 당할 줄 알고. 내가 먼저다.”
냉소소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뒤쪽으로 손을 뻗어 당가려의 아래쪽을 덥석 거머쥐었다.
“너?”
“어디 한번 해봐라!”
“이 나쁜 놈! 이래도 안 놓을 건가 보자.”
얼굴이 살짝 붉어진 당가려가 야혼의 어깨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가려야 저기 쥐다. 쥐!”
“뭐? 쥐라고. 꺄악!”
쥐라는 야혼의 말에 질겁한 당가려가 재빨리 그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뿐만 아니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야혼에게 등을 보인 채 가슴이 잡혀있던 냉소소마저 재빨리 몸을 틀어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뭐해? 빨리 안나가고.”
“알았어. 무공이 아깝다. 그렇다고 저런 쥐를 무서워 하냐?”
“무공하고 쥐가 무슨 상관이야? 빨리 가!”
씩씩거리며 동굴 속으로 돌아온 세 사람이 철버덕 몸을 뉘었다. 놀 때는 몰랐는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 순간 누구도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순수한 힘으로만 지금껏 놀았던 것이다.
“자자!”
“살이 있으니까 푹신해서 좋다.”
야혼의 팔을 하나씩 차지한 두 여인이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빌어먹을……. 이게 아닌데.”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잠이 든 냉소소와 당가려를 쳐다보던 야혼이 눈을 아래로 박은 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야, 임마!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여자구경 못한 네 사정도 알지만 어쩌냐. 너무 화내지 마라. 나도 기분
더럽다.”
“으음!”
구시렁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냉소소가 제 다리를 야혼의 허벅지 사이로 끼워 넣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나쁜 년들……. 너도 잘한 것 없어 임마. 아까 냉소소가 너를 잡았을 때 가만히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럼 되겠어?
잔소리 말고 잠이나 퍼자. 나도 졸리니까.”
냉소소의 무릎에 잔뜩 짓눌린 아랫도리를 쳐다보며 툴툴대던 야혼이 이내 흐드러지게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마지막
한마디하는 건 잊지 않았다.
“제기랄! 날 잡아 잡수하고 주는 건데…….”
그러나 야혼이 깜박 잊은 게 하나 있었다. 끼니를 위해 양껏 준비한 버섯 속에 춘약을 비료 삼아 자라난 것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1)- 용봉환락무(龍鳳歡樂舞)(1)
“으응?”
정신 없이 곯아떨어진 3인 중 가장 먼저 눈을 뜬 이는 냉소소였다. 하지만 깨어나고 싶어 깬 것은 아니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괴음에 저도 모르게 눈이 떠진 것이었다.
손과 다리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감촉에 냉소소가 살며시 눈을 미끄러뜨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팅팅 불어터진
살덩이들이었다. 귀를 간질이던 소리의 근원지였다.
시선을 돌려 아래쪽을 쳐다보던 냉소소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애써 삼켰다. 살덩이를 쓰다듬듯 엄청난 허벅지 위에 올려진
자신의 오른 손과 사내의 가랑이 속에 턱하니 걸쳐놓은 무릎이 눈에 박혀들었다. 다른 곳도 아닌 사내의 상징을 비비는
형상으로 말이다.
더구나 알몸이라니. 자신뿐만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당가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모두 알몸으로 엉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황망히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냉소소가 이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야혼이 움켜쥐고 있는 가슴을 제외하고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랬었지…….”
얼마나 잤을까. 잠들기 전의 상황이 오래 전 일처럼 어렴풋이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야혼의 행동에 동조하여 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서로 물장난을 쳤다. 그러다 마지막에 쥐를 발견하곤 이곳으로 와서 바로 잠들었던 것이다.
“그렇다해도 이런 상황까지 오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면 결코 할 수 없는 그런 행동을 아무 거리낌없이 저질러
버렸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온 몸이 화끈거리고 천둥치듯 심장이 요동을 쳤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냉소소가 가슴을 틀어쥐고 있는 야혼의 손을 조심스레
치워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구석에 처박힌 바지를 걸치고 가슴에 천을 두른 후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려야!”
살금살금 당가려 곁으로 다가간 냉소소가 야혼이 깰세라 기어드는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곤히 잠들었는지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연거푸 어깨를 흔들자 그제야 당가려가 눈을 떴다.
“쉿!”
재빨리 입을 틀어막은 뒤 옷을 건네주자 당가려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우리가 미쳤지 뭐.”
넋없이 옷을 걸치고 있는 당가려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자신이 먼저 일을 벌였다. 당가려는 어쩔 수
없이 물로 들어왔다가 같이 어울리게 된 것이었다.
“이 녀석도 대단하네. 그렇게 밝히더니 마지막 순간에 가만있었나 보지?”
야혼을 쳐다보며 당가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야혼이 자신들을 덮쳤더라면 반항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를 탐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절묘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냥 잤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섭섭하냐?”
“미쳤어, 언니! 이 살덩이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는 냉소소를 향해 눈을 흘겼다. 혼인에 대해 생각한 적은 없지만, 결단코 야혼은 아니었다.
적어도 신랑감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야 하고, 중원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야 했다.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신랑감의 최소 조건이었다. 야혼은 어쩌다 같이 오게 되었고, 그의 반항적일 기질이 마음에 들어 검독인으로
선택했을 뿐 결코 남성적인 매력이나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그인 것이다.
저잣거리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래도 야혼이 싫진 않잖아.”
“그렇게 좋으면 언니나 가져. 난 관심 없으니까. 나쁜 놈!”
짓씹듯 욕설을 뱉어낸 당가려가 한쪽에 너부러진 야혼의 바지를 끌어당겨 그의 하체를 덮었다. 혈기 왕성한 나이답게 그것이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곳이 아닌 중원이었다면 저 사람은 만날 일도 없겠지. 얼굴을
볼일도…….’
사왕문과 사천당문의 소공녀들, 하오밀문의 제자가 아니라 문주라 할지라도 감히 쳐다보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하물며 그는
서대시전에서 사기도박을 하는 처지. 신분상으로만 놓고 보아도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이 야혼이었다. 그런 그와 알몸으로
장난을 치고 같이 뒹굴었으니.
‘지금 당장은 환경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겠지.’
“언니 이것 좀 봐!”
그 때 당가려가 야혼의 서가에서 꺼낸 책을 내밀었다. 대단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달뜬 목소리다.
“이건?”
냉소소가 동그랗게 눈을 치켜 떴다.
쓰여진 글귀 때문이었다. 용봉환락무(龍鳳歡樂舞)라 적혀있었다.
침묵의 탑에서 야혼이 구했던 3권의 책 중, 완전히 익힌 2권은 이미 불쏘시개로 써버렸고 남아 있던 1권이었다.
“이 비급을 야혼이 얻었단 말이야?”
용봉환락무(龍鳳歡樂舞).
단순히 색공이라 부르기에는 그 가치가 너무 컸다. 용봉환락무를 창시한 용화대제(龍和大帝)는 300년 전 겁천십웅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자였다. 겁천십웅에 비해 한 수 밀린다는 세인의 평가를 받았지만 그가 월등히 뛰어났던 것이 한가지 있었다.
바로 내공이었다. 내공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라 하였다. 그 엄청난 내공을 얻게 만들었던 무공이 바로
용봉환락무였다. 그런데 내공을 증진시키는 방법이 좀 기이해서 춘서로 취급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용봉환락무를 이용해 내공을 키우는 기본은 바로 남녀의 방사에 있었다. 관계를 갖는 도중에 용봉환락무를 펼치면 남과 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음양이기가 서로 어우러지며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먼저 보고 나 줘! 나는 다른 책이나 좀 볼래.”
이왕 야혼의 동굴에 들어온 김에 그동안 원했던 비급을 외울 참이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꺼내든 비급은 과거 100인 고수
중 상위 10위안에 들었던 적퇴(赤腿) 광자(廣子)의 광혈무영각(狂血無影脚)이었다.
광자는 원래 소림 승려였다. 원래는 무영퇴(無影腿)라는 별호로 불렸었는데 이곳 십만대산에서 적퇴(赤腿)로 바뀌었다. 그의
발에 피가 마를 날이 없다하여 붙여진 별호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비급을 펼치던 당가려가 냉소소를 힐끗 쳐다보았다.
“내용이 야한 모양이네?”
잔뜩 붉어진 얼굴로 비급을 넘기는 냉소소의 얼굴 때문이었다.
“응? 내용은 아닌데 그림이…….”
냉소소가 펼쳐들고 있던 책장을 당가려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어멋!”
눈을 내리뜬 당가려가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건장한 남자 위에 여자가 포개 앉아 있는 그림이었다. 단지 그뿐이면 얼굴을
붉히지는 않았을 터인데, 너무 노골적인 묘사 때문이었다. 잔뜩 발기해 있는 남자의 성기부터 여인의 음부까지 세밀한 붓
놀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고 있는 야혼을 살폈다.
“거봐!”
당가려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은 냉소소가 이내 책에 집중했다. 위에 있는 그림은 야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아래쪽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심오한 내공구결이었다. 아니 지금껏 그녀가 알고 있는 상식을 뒤엎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영약이나 내공전이가 아닌 오직 인간의 힘으로만 내공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남녀간의
방사였다.
단순한 방사가 아닌 관계 도중 끊임없이 서로간의 내기를 주고받아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휴-우!”
정신없이 비급을 읽어가던 냉소소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직 빙(氷)의 기운으로만 형성된 자신의 내공은 반쪽이었다.
아무리 운기행공을 많이 한다해도 결코 극에 도달할 수 없는 무공.
10성을 끝으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한령신공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령신공을 대성하기 위해선 빙기(氷氣)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극양의 영약을 복용하거나 아니면 용봉환락무를 익히거나 해야하는데 두 가지 다 불가능했다.
“그 좋은 걸 보면서 웬 한숨이냐?”
“어, 깨어났네? 너는 그런 눈으로 보면 마음이 편하냐?”
누운 상태로 말을 걸어온 야혼을 향해 냉소소가 눈을 흘겼다. 그의 시선이 가있는 곳 때문이었다. 말을 하면서도 절대 얼굴은
쳐다보지 않는다. 오직 가슴과 아래쪽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
“그게 정상적인 남자의 반응이다. 새삼스럽게 웬 시비? 무공의 진전이 없는 거냐? 야! 다리 좀 빌려 주라.”
냉소소의 몸을 끌어당겨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놓은 야혼이 싱겁게 웃었다. 입이 빼쭉 튀어나온 걸 보니 알만했다. 그녀가 보고
있는 비급 때문이었다. 용봉환락무를 보게되면 본인의 단점이 무엇인지 금방 파악하게 될 터였다.
“너도 이 비급 봤냐?”
“너희들 보여주려고 남겨둔 거다. 나중에 기회 생기면 써먹으라고. 내공도 강해지고 좋잖냐.”
“네가 써먹으려고 보여주는 건 아니고?”
“써먹으려면 기회가 있었을 때 써먹었겠지. 이제는 포기했다. 너희들은 솔잎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거든. 나는 송충인데…….
나는 내려가서 벽이나 부셔야겠다.”
“야혼, 그거 내가 해 줄까?”
물이 거의 빠진 못을 확인한 야혼이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 순간 당가려가 불렀다.
“무슨 방법이 있는 거냐?”
“채찍 있잖아. 아마 효과는 더 좋을 걸?”
“너……?”
“야! 다른 의도는 없어. 그냥 불쌍해서 도와주려는 거지.”
야혼이 밤에만 벽에 돌진하는 이유를 그녀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몸이 단단하다해도 바위를 보며 달려드는 짓은 정말이지
못할 짓이다. 한 두 번도 아니고 2시진 정도를 끊임없이 해야하는 일이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질릴 지경인데 본인이야 오죽 하겠는가 싶어, 좋은 의도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야혼의 생각은
달랐는지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혹시 변태 아냐? 남자 패면서 쾌감을 느끼는 그런……. 처녀 맞아?”
“싫으면 관두고.”
야혼의 모습에 토라진 당가려가 휑하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딴엔 책을 본 대가를 지불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가는 야혼 때문에 지레 포기해버렸다.
“그거 괜찮겠다. 비급을 본 대가라 생각하고 해주면 되겠네.”
냉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피곤하기는 하겠지만 밤마다 쿵쿵거리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내공을 자꾸 쓰다보면 정체된 무공에 어떤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냉철하던 냉소소도 한가지
놓친 게 있었다. 용봉환락무가 단순한 내공심법이었다면 결코 색공이라 불리지 않았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여하튼 다음날부터 불귀동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자신들의 두 배나 되는 거대한 인간을 벽에 밀착시켜 놓고 당가려와 냉소소가 번갈아 가며 혈린만독편을 휘둘렀다.
휘리릭! 촤악!
“으악!”
“살이 많아서인지 착착 감기는 맛이 좋다.”
당가려의 얼굴에 살풋 미소가 걸렸다. 처음엔 미안한 마음에 세게 치질 못했는데 이내 이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대충 휘두른 채찍으로는 야혼의 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점점 내공의 강도를 높였고 지금에 와서는 거의 8성
정도까지 내공을 끌어올려 휘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야! 왜 자꾸 위로 올라가는 건데?”
벽에 밀착되어 있던 야혼의 몸이 점점 위로 올라가자 당가려가 소리를 질렀다. 야혼을 몸을 주어패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야했다. 종전에 하던 것보다 두 배 이상의 힘이 들었던 탓이었다.
“아프니까 그렇지. 너 같으면 이 고통을 견디며 살겠냐?”
“우이씨!”
상큼 눈을 치켜올린 당가려가 야혼의 등을 겨냥하여 혈린만독편을 힘차게 휘둘렀다. 경공까지 펼치면서 채찍을 휘둘러야 했기에
거의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가려야 교대해줄까?”
한쪽에서 비급을 지켜보던 냉소소가 떠보듯 물었다.
“무슨 소릴, 아직 멀었다고. 이야합!”
촤악!
“으아악!”
“참으로 대단한 몸뚱이다.”
냉소소가 경이로운 눈으로 야혼의 등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혈린만독편법을 완성하지 못했다지만 당가려의 무공은 일류를
상회한다. 그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겁천십웅의 무공을 10성 경지까지 완성했다. 그런 당가려의 힘이 실린 채찍을 맨
몸으로 받는 야혼의 동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채찍이 지나간 자리는 붉은 흔적만 남을 뿐 거의 상처가 나지 않았다. 자신들이 괴물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당가려 채찍 휘두르는 실력이 그것밖에 안 돼? 머리도 때려야 할 것 아냐. 좀 골고루 어루만져 주라고.”
“훗! 내일은 어떻게 나오나 보자.”
“그만 하자! 어떻게 내가 먼저 지치냐.”
거의 2시진 동안 쉬지 않고 야혼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던 당가려가 제풀에 지쳐 주저앉았다. 거의 단전이 바닥나버린 듯했다.
이제는 하루동안 오직 운기행공에 몰두해야 할 터였다.
“수고했다. 와서 이것 좀 먹어라.”
냉소소가 이미 준비해 두었던 물과 먹을 것을 꺼내놓았다. 저녁이라 해봐야 버섯과 석균이 전부였지만 없어서는 안된 귀중한
식량이었다.
“먼저 씻고 올께!”
돌 위에 차려진 식사를 보던 당가려가 재빨리 못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평생을 혈린만독편과 같이 했지만 요즘처럼
혈린만독편이 무거워보기는 처음이었다.
“이것 참 잘 만들었네? 소소 네 솜씨냐?”
제 아랫도리를 가린 요상한 형태의 속곳을 가리키며 야혼이 물었다.
“아 그거. 저 멀리 섬나라 가면 왜인들이 그런 복장을 한다더라. 몸이 불어 제대로 된 옷을 입지 못하니까 별수 없지 뭐.
그걸로 만족해야지.”
“이왕 만들어 주려면 이것도 좀 가리게 해주지.”
비어져 나온 터럭을 가리키며 야혼이 배식 웃었다.
“네가 털이 많아 그런걸 누굴 탓해. 그리고 네 몸을 생각해봐라. 그게 어디 사람 몸이냐? 혹시 뒤 닦을 때 손이
돌아가기나 하냐?”
“왜 안 돌아가면 네가 닦아주려고?”
“밥 먹는데 무슨 헛소리야. 조용히 해.”
“이제 아예 볼짱 다봤다 이거냐? 좀 조신하게 하고 다녀라. 응!”
당가려의 모습을 본 야혼이 낮게 이죽거렸다. 그녀의 복장 또한 가관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가슴살이 훤히 다 비쳤던
것이다.
옷을 입은 채로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는 의미였다.
“임마. 조신은 남자 앞에서 하는 거야. 남자도 없는데 이러면 좀 어때.”
“나는, 나는 남자 아니냐?”
“너? 너는 그냥 살찐 곰이나 돼지 정도? 제 손으로 뒤 정도는 닦아야 인간 아냐? 에이씨 이건 왜 이리 물이 안 빠지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가슴을 흔들어대던 당가려가 아무렇잖게 젖가리개를 풀어내 물을 짰다. 바로 앞에 야혼이 있는데도 말이다.
“허허! 내가 미쳐, 여자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구나. 나는 말이다. 너희같이 예쁜 년들은 똥도 안 싸는 줄 알았지
뭐냐.”
“미친놈! 세상에 오줌 똥 안 싸는 사람이 어딨냐, 헛소리하지 말고 이거나 좀 묶어. 그리고 편식하지마 임마.”
계속해서 석균만 집어먹는 야혼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고함을 빽 질렀다. 한껏 땀을 흘려서인지 기분이 상쾌했다.
“나 먼저 간다. 지금부터는 묵령(墨領)이나 갈러 가야겠다.”
“그 몽둥이 이름이 묵령이냐?”
“응 소소가 지어줬다. 이름 괜찮지.”
두 사람을 향해 빙긋 미소를 날린 야혼이 휘적휘적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2)- 용봉환락무(2)
“언니가 지어줬다고?”
“아니 지어준 게 아니고, 재질이 묵령한철(墨靈寒鐵)이거든 그래서 그냥 묵령으로 하라고 했던 거야.”
“정말?”
묵령한철이란 냉소소의 말에 당가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단순한 철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만년한철보다 더
단단하다는 묵령한철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갈기가 힘들뿐이지 검(劒)이나 도(刀) 따위의 무기를 만든다면 천고의 신기가 될 수 있다하였던 철이 바로 묵령한철이었다.
“불만 그 녀석 보물을 많이 가지고 있네?”
“많으면 뭐하냐. 익히지도 않는데.”
“무슨 소리야?”
“그 비급들 있잖아. 불만 그 녀석은 쳐다보지도 않아. 단지 투견공(鬪犬功) 한가지만 익힐 뿐이지.”
“그 개싸움?”
“그렇다니까.”
“훗! 그게 가장 어울리네 뭐.”
버섯을 입안으로 가져가던 당가려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곰같이 생긴 녀석이 무지막지하게 달려드는 모습이 그려졌다.
무수히 두드려 맞다 딱 한방에 끝내고 두 손을 들어올리며 포효하는 모습은 천상 곰이었다.
“킥킥킥! 낄낄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있는 불만의 아랫도리가 생각나서.”
“너……? 훗! 호호호! 하하하!”
당가려의 황당한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냉소소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언니, 나 있잖아 여자가 맞기는 맞나봐. 석균보다 이 버섯이 훨씬 맛있어. 언니도 그치 엉?”
“간지러 얘!. 그래 네 말이 맞아. 버섯이 훨씬 맛있어.”
버섯 끝으로 가슴을 간질이는 당가려의 손을 피하며 냉소소는 활짝 웃었다.
이곳에 같이 들어오게 되었던 게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만일 혼자였다면 결코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터였다. 당가려와
야혼이 있었기에 7개월이란 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이리라.
“책 다 봤으면 줘! 나 들어가서 쉴래. 아 맞다. 불만에게 먹을 것 좀 가져다주고 가야지.”
버섯 몇 개와 용봉환락무를 챙겨든 당가려가 연못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 또한 냉소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있기에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혼자 있었다면…… 차마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게 다 네 녀석 덕분이다. 내가 이런 원시적인 생활을 하리라고 언제 생각해 봤겠냐. ……으응?”
멀리 야혼의 뒷모습을 발견한 당가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완전하게 가부좌를 한 것도 아니고, 커다란 바위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있는 어색한 모습이었음에도 이상한 기운이 흐르는 듯했다.
그의 몸 주변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뿌연 백무가 솟구치는 것이었다.
“제게 본 모습인가…….”
“그래 저 모습이 야혼의 본래 모습이야.”
어느새 뒤따라 온 냉소소가 말을 받았다. 그녀는 야혼이 도를 갈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아니 이곳에 오기 전 동굴 속에서부터 보았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단순히 도를 가는 게 아니었다.
도(刀)를 가는 행위는 그만의 운기행공(運氣行功)이었다.
“지금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조만간 우리를 앞지를 거야.”
“설마…….”
당가려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모았다. 야혼이 자신의 실력을 따라오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걸릴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운이 따라줬을 때 한하여. 그런데 냉소소의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글쎄, 이곳에 오기 전의 야혼과 비교해봐라. 버섯 이리 줘봐.”
당가려에게 버섯을 받아든 냉소소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10성에 달한 한령신공을 잔뜩 운기한 그녀의 손을 떠난 버섯은 여느 암기보다 강력한 무기였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야혼의 목을 향해 쏘아져갔다.
“저럴 수가…….”
벌어진 당가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목 근처까지 다가온 버섯을 잡아채는 야혼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얼굴보다 도가
먼저였다. 뒤쪽을 향해 도가 먼저 움직였고 뒤이어 눈이 따라왔다. 그 다음이 더 가관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그것이
암기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야혼이 순식간에 도를 세워 버섯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받아내는 동작 또한 단순하지 않았다. 강한 힘으로 쳐내는 것이 아니라 도와 몸을 동시에 뒤로 물리며 버섯은 흠집 하나 없이
보존하였던 것이다. 마치 환상을 보는 듯했다.
“놀랬잖아!”
두 사람을 쳐다보며 야혼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실상 지금의 움직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자신은 단지 버섯이란 사실에 도를 거둬들이는 동작만 취했을 뿐이었다.
“도(刀)는 많이 갈았냐? 에게, 이게 뭐야.”
야혼의 손에서 도를 뺐어간 당가려가 그것을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여전히 몽둥이 수준이었다. 제법 도(刀)모양을 갖춰가기는
했지만 날이 서려면 아직 멀었다. 이제 절반 가까이 갈아졌던 것이었다.
“그래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근데 이 도(刀) 뭣하려고 가는 거냐?”
당가려의 물음에 냉소소 또한 호기심 어린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궁금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야혼이 가장
공을 들인 것 중 하나가 바로 도를 가는 것이었다. 물론 나머지는 자신들을 훔쳐보는 것이었지만.
종종 보면 도를 가는데 목숨을 걸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글쎄 나도 몰라.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지 뭐. 도살장에서 일 배우면서 10년 동안 했던 일이 도 가는
일이었고, 하루라도 건너뛰면 괜히 찜찜하거든. 왜 있잖아, 볼일보고 뒤 안 닦았을 때 드는 그런 기분 말이다.”
“그렇다고 묵령한철은 너무하잖아. 그걸 어느 세월에 날을 세우냐?”
뭔가 그럴싸한 대답을 기대했던 당가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온 심력을 바쳐 도를 가는 이유가 아무것도 없단다. 단지 할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할 줄 아는 유일한 것이라서 도를 갈고 있다니.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천천히 세워질수록 더 좋아. 그 때까지는 할 일이 있으니까. 이거 잘먹으마.”
“너…….”
“그럼 수고해, 우리 갈게.”
야혼을 향해 무엇인가 말하려는 당가려를 냉소소가 잡아끌었다. 지금껏 야혼이 했던 행동이 조금씩 이해가 갔다. 늪지대에서
짐승처럼 살행을 저질렀던 일과,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박도를 휘두르던 모습. 더하여 항상 궁금하게 여기던 온몸의 흉터까지.
그 모습들이 그의 과거였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과거. 그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지워버린 척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목적 없이, 오직 도를 갈고 여자를 유혹하는 일에서만 생의 의미를 찾는 그런 사람이 야혼이었다.
“불만, 그 도(刀) 이름 비천묵령도(飛天墨領刀)다. 비천묵령도.”
냉소소에게 끌려가던 당가려가 야혼을 향해 소리쳤다. 사실은 그 말을 하려고 야혼이 있는 곳까지 왔던 것이다.
알게된 기념으로 무엇인가 한가지는 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미친년! 달라는 건 안주고 이상한 이름만, 비천묵령도? 거 괜찮네. 이놈아 지금부터 네놈의 이름은
비천묵령도(飛天墨領刀)다. 소 잡는 덴 좀 아까운 이름이긴하다만 다 타고난 팔자니 어쩌겠냐.”
검은 도를 들어 빙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이내 작업을 시작했다.
실상 자신 또한 알지 못했다. 왜 도를 갈고 있는지. 그녀들에게 했던 말처럼 할 짓이 이것밖에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 갈아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련다. 일단 날부터 세워놓고.”
연못에 어린 달빛을 막연한 눈으로 쳐다보던 야혼이 이내 태을건곤심법을 운용했다. 그의 주변으로 뿌연 백무가 들어찼다. 점점
내공이 강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하루였지만 당가려의 채찍 효과는 놀라웠다. 혼자 며칠 동안 절벽에 부딪친 효과가 단
2시진으로 나타난 것이다.
온몸에서 솟아나는 힘을 단전으로 보내기 위해서 더욱 도를 가는데 집중했다.
사방이 훤하게 밝아올 무렵 야혼의 작업이 끝이 났다. 요즘 들어 잠자는 시간이 훨씬 줄어들었다. 아니 거의 잠을 자지
않는다고 봐야했다. 끊임없이 몸 속에서 요동치는 약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잠시라도 게을리 하면
바로 몸이 불어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개싸움을 좀 배워볼까?”
한쪽 바위에 도를 꼽아둔 야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세를 잡았다. 투견공에 나와있는 개싸움의 기본자세였다.
대단한 자세는 결코 아니었다. 엎드린 자세에서 오른손을 내뻗어 땅을 짚고, 왼다리는 자연스럽게 뒤로 뺏다. 전방을 노려보는
눈에선 붉은 기운이 이글거렸다. 잔뜩 웅크린 그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기운이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바로 옆에 있는 연못에 파랑이 생길 정도로 강력한 살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도(刀)를 가는 행위와 태을건곤심법이라는
내공심법으로 인하여 몸 안으로 갈무리되었던 야차혈마지체의 살기가 외부로 표출되며 그 잔인함을 드러냈다.
벌거벗은 나체의 몸이 검은빛을 발하자 야혼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견공의 시작은 물러설 줄 모르는 불굴의 투지다. 진정한 싸움꾼은 물러서지 말아야한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며 상대를 칠
뿐이다. 옆을 쳐다보지 말아라. 앞에 있는 적이 전부 사라졌을 때만 주변을 살펴라. 인간의 몸 중에 치지 말아야할 곳은
없다.
모든 곳이 전부 공격 목표에 들어있다. 남들이 꺼리는 장소는 더욱 효과적인 공격지점이다. 죽고 사는 싸움에서 예의를
차린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한번 싸움을 시작했으면 무조건 이겨야한다.
적이 항복할 때까지 물고 늘어져라. 팔꿈치도 좋고 무릎도 좋고, 튼튼한 이도 좋다. 온몸을 이용하여 적을 부셔라. 10대를
맞아도 좋으니 한번의 기회를 잡아라. 그리고, 끝내라.
“마음에 들었소! 마음에 꼭 들었단 말이오!”
싱긋 살소를 머금은 야혼이 거대한 몸을 날리며 바닥을 향해 팔꿈치와 무릎을 동시에 찍었다.
빠직!
가공할 파괴력이었다. 팔꿈치와 무릎이 절반정도 땅속에 박히며 가로막던 돌마저 전부 부셔버렸다.
바닥에서 일어서는 법은 거의 없었다. 대지에 상체를 잔뜩 밀착시키며 정신없이 움직여 다녔다. 그의 손과 발이, 그리고
머리가 움직이는 곳에는 커다란 구덩이들이 생겨났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쇳덩어리가 움직여 다니는 듯했다. 검게 빛나는 동체가 사방으로 움직여 다니며 절구질을 했다. 쇠
절구질을.
황폐하게 변한 주변을 정리한 야혼이 연못 속에 뛰어들어 몸을 씻고는 동굴로 향했다.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오후의 일과를 시작해야 할 터였다.
“허이그! 늦바람이 더 무섭다더니.”
동굴 속으로 들어온 야혼이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무공비급과 춘서들이 이곳저곳에 널려있었다.
밤새도록 책을 보다 잠들었는지 당가려와 냉소소의 눈 밑에 거무스름 그림자가 져 있었다.
“너희들 이제 큰일 났다. 그 책은 말이다, 맹자왈 공자왈 하는 책들과 달라서 중독성이 강하거든. 한번 맛붙이면 절대 못
끊는다. 이 몸이 바로 산 증인이잖냐. 누가 잠자는 미녀라 했는지 그 자식 만나면 눈알을 확 뽑아버린다.”
입을 헤 벌리고 침까지 흘리며 잠들어 있는 두 여인을 쳐다보던 야혼이 낮게 씨근덕거렸다. 그저 놀랍다는 생각뿐이었다.
십만대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요조숙녀처럼 행동하던 그녀들이 아니었던가. 당가려야 워낙 왈가닥이니 그러려니 한다지만
냉소소의 변신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나도 잠좀 자자 요년들아.”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야혼이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비대한 몸에 맞도록 바닥을 정리해둔 곳이 자신의 자리였던
것이다.
“아이고 꼴값을 떨어요. 좋아서 달라붙는다면 얼마나 좋냐.”
자리에 눕자마자 양쪽에서 달려드는 당가려와 냉소소의 행동을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한
여름, 사방은 푹푹 찌는데 이곳은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시원한 물에 담금질한 몸은 더위를 식혀주는 덴 그만일
터였다.
“너희들 알아서 해라. 찜을 쪄먹던지, 아니면 날로 먹던지. 이제 머리만 깎으면 완전한 중이 되겠다.”
두 여인들에게 팔을 내준 야혼이 이내 잠을 청했다.
“아악! 좀 살살 해라. 웬 여자가 그리 세냐.”
백색의 광채를 머금은 채찍이 야혼의 몸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냉소소였다. 한령신공을 가득 끌어올린 냉소소의 힘은 대단했다.
한번씩 몸을 할퀴고 지나갈 때마다 섬뜩한 한기에 온몸을 떨어야했다. 며칠째 겪어보지만 그녀의 무공은 강했다. 혈린만독편의
주인인 당가려보다 더 날카로웠다. 거의 한시진 정도 맞고 나면 허연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한옥빙마수(寒玉氷魔手)!”
냉소소의 입에서 더욱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순간 그녀가 들고 있던 혈린만독편에 허연 기운이 어린 듯하더니 빳빳하게
굳어진 혈린만독편이 야혼의 몸을 강타했다.
급소, 국부 할 것 없이 아무데나 공격했다. 마치 눈을 감고 치는 듯 온몸에 박혀들었다.
“저것이 사람을 잡으려고 하나.”
갑작스럽게 변한 냉소소의 기세에 기겁한 야혼이 재빨리 투견공을 끌어올렸다. 점점 강해지는 혈린만독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크윽!”
검은 색으로 변한 야혼의 몸에 한기를 가득 머금은 혈린만독편이 박혀들었다. 사지를 마비시킬 듯 심장을 향해 몰려드는 한기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저년 혹시 그걸 먹었나?”
다소 붉어진 냉소소의 얼굴을 확인한 야혼이 내심 침음성을 발했다. 문득 춘약으로 키웠던 버섯이 생각났다. 이틀 전에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간 두 여인의 태도가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아마 그 때문이지 싶었다.
춘약으로 키운 버섯은 안쪽에 있었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것까지 먹게 된 것 같았다.
야혼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잔뜩 붉어진 냉소소는 내부에서 치미는 욕정 때문에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하악! 나쁜 놈! 왜 네 녀석 얼굴이 자꾸 떠오르냐고!”
전력을 다해 채찍을 날리는 이유였다. 언제부터인지 조금씩 욕정이 치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야혼이 무슨 야료를 부렸나 싶어 세심하게 관찰해 보았으나 결코 그의 짓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곰곰이 생각하다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용봉환락무(龍鳳歡樂舞) 때문이었다. 야혼을 도와주고 단전이 텅 빈 상태에서 용봉환락무를 운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욕정이 치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용봉환락무가 춘서로 분류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번 운기를 하게되면 반드시 남자와 관계를 가져야했다. 책에 서술된
내용은 없었지만 몸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욕정에 몸부림칠 때마다 떠오른 얼굴이 바로 야혼이라는데 있었다.
“한옥혈마수(寒玉血魔手)! 한옥광마수(寒玉狂魔手)!”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3)- 용봉환락무(3)
“언니!”
백색으로 변한 냉소소의 모습에 당가려가 질겁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한령신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려버린 것이었다.
아무리 야혼의 몸뚱이가 단단하다고 하지만 지금의 공격을 받아낼 수는 없을 터였다.
“커억!”
당가려의 예상대로 처절한 비명을 지른 야혼이 피를 벌컥벌컥 토해냈다. 순식간에 온몸을 스친 채찍에 내상을 당한 것이었다.
“내가……?”
야혼의 턱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가 정신을 차리게 했는지 혈린만독편을 떨어뜨린 냉소소가 야혼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너 감정 있으면 말로 하지 그렇다고 이 지경을…….”
냉소소를 쳐다보며 맥없이 말한 야혼이 이내 고개를 떨구며 정신을 잃었다.
“아니야, 본의가 아니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울 듯한 얼굴로 냉소소가 재빨리 야혼을 들쳐업고 그의 동굴로 향했다.
동굴에 도착하여 바닥에 야혼을 내려놓자 당가려가 내기를 불어넣었다. 그녀의 얼굴에 땀이 맺힐 즈음에야 야혼이 정신을
차렸다.
“야! 사람 죽었냐? 쌍판이 왜 그래! 나 죽는 것 바라지 않았으면 웃어.”
냉소소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던 야혼이 빽 고함을 질렀다.
“괜찮아?”
“그럼 괜찮지 이 야혼이 먹었던 약이 공정석유라며. 그런 영약을 한 방울도 아니고 한 모금이나 처먹었는데 이 정도 가지고
끄떡이나 하겠어? 그러니까 인상 좀 펴라.”
냉소소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몸 속은 엉망이었다. 아무리 공청석유를 바가지 채 마셨다하더라도
겁천십웅의 무공인 한령신공을 정통으로 맞았는데 편할 리가 없었다.
워낙 고통에 익숙한 몸이라 별 것 아니게 느껴질 뿐이었다.
“안 그래도 더웠는데 시원해서 좋다야. 몸은 이상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하룻밤 자고 나면 말짱해져. 옛날에도
그랬다.”
“정말?”
“그렇다니까! 왜 질질 짜고 난리야. 자꾸 그러면 확 덮쳐버린다. 나 도(刀) 좀 갈아야겠다.”
울먹이는 냉소소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지른 야혼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못가로 다가간 야혼이 바위 속에 박아 두었던 도를 잡아가다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씨팔! 뭐해 이거나 좀 뽑아 줘.”
“알았어.”
걱정스런 얼굴로 야혼을 뒤따라왔던 냉소소가 후다닥 도를 뽑아 내밀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도를 갈던 야혼의 표정이 이내
엄숙하게 변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냉소소가 자리를 떴다.
그 날부터 며칠 간 채찍질은 없었다. 여전히 도만 갈 뿐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아!”
교교한 달빛이 내려 비추는 연못 어딘가에서 억눌린 듯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냉소소였다. 갈수록 몸이 뜨거워져 이제는 아예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결국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지금처럼 물 속으로 들어와 몸을 식혀보려 했지만 한번 뜨거워진 몸이
쉬이 식혀질 리가 없었다.
“하악! 나쁜 놈!”
야혼이 미워서 욕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남자가 그밖에 없었기에 화풀이 대상은 당연 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연신 야혼의 동굴을 쳐다보던 냉소소가 급기야 몸을 일으켰다.
참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상태가 계속 지속되면 주화입마로 진행될 가능성이 컸다.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야혼이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휴-우!”
곤히 자고있는 야혼을 발견하고는 무심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소야! 어쩌면 좋으냐. 어쩌면…….”
벌써 수 개월을 보았던 야혼의 알몸이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오늘밤은 달랐다. 아니 용봉환락무를 운용한 다음부터 달리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피해 다녔었는데.
잠시 망설이던 냉소소가 기척을 죽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야혼은 활짝 팔을 벌인 채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가슴의 천을 풀고 바지를 벗어냈다. 야혼의 동굴에 있던 대부분의 춘서를 보았기에 특별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더구나 야혼은 옷을 벗겨낼 수고조차 덜어주었다. 혼자 지내면서부터는 만들어준 속곳도 걸치지 않고 그냥 지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풀숲에 누워있는 야혼의 상징을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하악!”
손 안 가득 느껴지는 맥동에 낮은 비음을 발한 냉소소가 용봉환락무를 잔뜩 끌어올렸다. 순간 뿌연 백무가 들어차며 그녀의
동체를 에워쌌다. 주변에 들어찬 백무를 쳐다본 냉소소의 행동이 더욱 대담해졌다. 손에 쥐고 있던 그곳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허억!”
순간 야혼이 마른 신음을 토하며 눈을 떴다. 아래쪽에서 격렬한 쾌감이 느껴졌다. 처음엔 으레 하던 몽정인줄 알고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느낌이 달랐다. 따스한 느낌과 함께 줄기차게 쾌감이 밀려왔다.
“설마……!”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래쪽을 쳐다보던 야혼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뿌연 백무 너머로 정신없이 고개를 움직이는 여인이
있었다. 냉소소였다.
“용봉환락무(龍鳳歡樂舞)……?”
소스라치게 놀란 야혼이 튀어나오려는 말을 얼른 삼켰다. 이제야 그동안 냉소소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행동이 변했다 했더니 그게 용봉환락무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운용해본 적이 없기에 춘서로 분류된 이유는 알지 못했는데 지금 냉소소의 행동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결국 꿈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겠네.”
내심 고소를 지은 야혼이 용봉환락무의 구결을 중얼거리며 내기를 끌어올렸다.
‘허억!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갑자기 전신을 치닫는 욕정에 화들짝 놀란 야혼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지금껏 냉소소가 힘들어했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변하게 만들었던 원인은 바로 욕정이었다. 한 번 운기한 자신조차 이런 욕정을 느낄진대 며칠 전부터 시달린 냉소소는
오죽하겠냐 싶었다.
얼굴에 와 닿는 시선에 흠칫 놀란 야혼이 재빨리 자는 시늉을 했다. 미약했지만 그의 몸에서도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야야! 그래가지고 되냐? 좀더 엉덩이를 들어야지.’
교합을 시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냉소소의 행위에 조급증이 난 야혼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여전히 꿈인 것처럼.
“아윽!”
야혼의 상징을 붙잡고 한참동안을 씨름하던 냉소소가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래쪽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펴며 상큼 미소를 머금었다.
드디어 원하는 바를 성취했다는 만족감이었다. 가만 숨을 죽이고 야혼의 얼굴을 살폈으나 아직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악!”
천천히 허리를 돌리며 용봉환락무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더욱 진한 백무가 흘러나오고 한순간 동굴 전체가 안개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 속에서 끊임없는 비음이 흘러나왔다.
‘이거 처녀 맞는 거야?’
용봉환락무의 강도를 높이던 야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색공 때문이라지만 이 뇌살적인 몸놀림이라니. 눈 씻고
보아도 서툰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숱한 경험을 한 유부녀와 정사를 벌이는 것 같았다.
멍해져 있는 야혼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밭은 신음을 토해내며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어댔다. 얼마나 흘렀을까. 가슴골을 타고
또르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왕 할거면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해주마.’
빙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천천히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러나 이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제 몸이 변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었다. 과거에 비해 두 배나 비대해진 몸으로 엉덩이를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제기랄…….”
나직이 욕설을 토해내며 운무 속에서 움직이는 냉소소의 모습을 훔쳐보고만 있었다. 정말로 잠에 빠진 사람처럼.
점점 행위가 절정으로 치달아가자 백무와 적무가 서로 섞이며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냉소소의 몸 속에 있던 내기가 야혼의
몸 속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었고, 이어 야혼의 몸 속에서 노닐던 내기가 그녀의 몸 속으로 유입되었다.
쿠르릉!
몸 속에서 울리는 나직한 소리에 야혼이 눈을 끔벅거렸다. 실은 지금껏 냉소소에게서 받은 내상이 치유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와 용봉환락무를 펼치자 무서운 속도로 치유되어갔다.
“하악!”
냉소소 또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나직한 비음을 토해내며 더욱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불만 이 나쁜 놈!”
냉소소의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동굴을 쳐다보며 나직한 욕설을 뱉어내는 여인은 당가려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며칠 전 냉소소가 보였던 그런 표정으로 동굴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당가려를 변화시킨 원흉도 역시 용봉환락무였다. 정말이지 춘서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책이었다. 단 한번의 운기했을 뿐인데
색의 마수에 걸려버린 것이다.
붉어진 얼굴로 동굴을 주시하던 당가려가 이내 몸을 돌려 연못으로 향했다.
한 여인의 달뜬 신음소리와 다른 여인의 한숨소리가 뒤엉키며  날은 점차 밝아왔다. 매일 맞는 아침이었지만 오늘은 여느 날과
달랐다. 새벽녘에 슬쩍 돌아간 냉소소는 여태 동굴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야혼은 정말 오랜만에 뿌듯한 얼굴로 아침을
맞았다.
“휴-우! 정말 엄청난 밤이었다.”
간밤을 떠올리던 야혼이 빙그레 미소를 물었다. 냉소소의 힘은 상상이상이었다. 정력제를 양껏 복용하여 천하에 적수가 없다
여겼었는데 냉소소에게 밀린 것이다.
“그건 내가 움직이지 못해서 그런 거야. 하루빨리 살을 빼야할텐데. 그나저나 냉소소 그년을 달래서 데리고 와야지 그냥
놔두면 안되겠지?”
속곳을 걸친 야혼이 이내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간밤에 치렀던 용봉환락무로 인하여 내상이 말끔히 치료되었다.
색공만 아니라면 정말 엄청난 무공 비급이 아닐 수 없었다.
“야! 소소, 뭐하냐.”
냉소소의 동굴 앞에 도착한 야혼이 커다란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무척이나 쾌활한 목소리였다.
찰싹!
“어이구, 해가 중천에 떴구먼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한쪽 구석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냉소소를 향해 다가간 야혼이 그녀의 허벅지에 손자국을 남기며 이죽거렸다.
“나 지금 혼자 있고 싶거든. 그러니까 좀 가줄래?”
야혼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꿈을 꾼 듯했다. 어떻게 제 발로 야혼을 찾아갈 생각을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야혼의 동굴을 나와 밤새도록 울었다. 그에게 당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걸어 들어갔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자위하면서도 끝내 욕정을 이기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혼자는 무슨,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나는 그런 꼴 못 보니까 잔소리 말고 나가자. 근데
혹시 어젯밤 내 동굴에 왔었냐?”
“으응? 그러…….”
“그렇겠지. 네가 한 밤중에 내 동굴을 찾을 리가 없겠지. 여자를 안아본지가 오래돼서인지 뻑 하면 꿈에 계집이
나온다니까.”
‘설마…….’
잔뜩 붉어진 얼굴로 야혼의 말을 듣던 냉소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밤의 상황을 전혀 모른다는 듯한 어투가 아닌가.
가만히 등을 돌려 야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웬 청승을 떨고 있냐는 듯 조금
짜증이 밴 얼굴로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이 너 달거리 하는 날인 줄은 안다만 그동안 햇빛을 너무 못 봤잖아, 그러니까 나가자.”
“너……?”
“내가 말했잖아. 이 야혼의 한량 생활이 5년이라고. 그 정도도 모르면 야혼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지.”
숫제 불덩이처럼 변한 냉소소의 볼을 틀어쥐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허락 한 것으로 알고 안고 간다. 서서 걷기가 좀 불편할거야.”
“야-! 어디로 가는데?”
“좀 씻어야지 얼굴이 퉁퉁 부었다. 찬물에 담그고 있으면 부기가 빠질 거다.”
얼굴에 온통 눈물자국이었다. 밤새도록 울었다는 의미이리라.
‘원래 다 그런 거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잊혀진다. 그런 건 상처도 아니다. 다만 추억일 뿐이니라.’
연못가에 냉소소를 내려준 야혼이 당가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매맞는 일을 시작해야 할 터였다. 검게
변해있던 피부색이 조금씩 제 색을 되찾고 있었다.
앞으로 한두 달만 계속하면 금강철피공이 완성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와라. 다시 시작하게, 몸에 힘이 넘치는 모양이지?”
‘이년은 또 왜이래, 아직 달거리 하려면 이 삼일 남았는데?’
차갑게 변한 당가려의 목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녀 또한 평소와 사뭇 달랐다. 뭔가에 잔뜩 짜증이 나 있는 듯
노려보는 눈매가 심상치 않았다.
그랬다. 당가려 또한 용봉환락무 때문에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더구나 간밤, 야혼과 냉소소의 관계까지 보게 되자
뇌리를 잠식한 욕정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냉소소의 신음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촤악!
거친 호흡을 토해낸 당가려가 혈린만독편을 거칠게 휘둘렀다. 야혼의 몸을 단련시켜 준다는 생각보다 몸 속에서 요동치는 욕정을
쏟아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온몸이 흥건히 땀에 젖도록 운동을 하다보면 욕정이 사라질까 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거칠게
채찍질을 했다.
“아이고! 저년도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다. 나야 좋기는 하다만 이 고통은 어쩌라고.”
저번에 냉소소가 보여주었던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당가려의 모습에 내심 고소를 지었다. 그녀 또한 용봉환락무 때문에
변화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나쁜 년들, 그렇다고 나에게 화풀이하는 건 또 뭐냐?”
몸 이곳 저곳에 생기는 시뻘건 자국을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용봉환락무를 보라고 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들을 보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못박지 않았던가. 그런데 책을 훔쳐보고선 오히려 화를 내고 있다. 뼈꼴 빠지게 봉사해주고 뺨맞는
꼴이었다.
‘미치겠군!’
야혼의 짐작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당가려가 그의 동굴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3일 뒤였다.
물론 이번에도 잠든 척 하고 있었던 것은 불문가지. 당가려의 몸을 만지고 싶어 몇 번이고 손을 움찔거렸으나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처음 알았다. 아무 짓도 안하고 참는 게 더 힘들다는 사실을.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4)- 아무 일도 없었다?(1)
아무 일도 없었다?
불귀동 안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하지만 세 사람을 에워싼 기묘한 분위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당가려에게도 역시 잠을 잤던 것처럼 속여 달래기는 했지만 그녀들 또한 바보가 아니었다.
야혼과의 관계를 굳이 들먹이고 싶지 않아 모른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대놓고 이야기할 성질의 것도 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세 사람의 행동 또한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단지 일상적인 이야기만 오갈
뿐이었다.
오직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슈우욱! 촤악!
마치 야혼에게 한(恨)이라도 맺힌 듯 거칠게 채찍을 휘둘러 댔다. 용봉환락무로 인해 약간 높아진 무공을 야혼의 몸을 통해
시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욱! 이년아 한 번 먹어서 효과 보는 보약이 어디 있냐.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꾸준히 장복해야 효과가 나타난다 말이다.
너희들도 알고 있지? 그래서 이렇게 심통을 부리는 거 다 안다.”
짐짓 비명을 지르면서도 내심으론 쾌재를 질렀다. 자신 또한 용봉환락무를 운용하며 그녀들과 관계를 가졌기에 그 효과에 대해선
알고 있다.
내상을 치유하는 것과는 달리 내력의 증가는 더디었다. 이미 몸 속에 존재하는 영약기운을 내공화 시키는 것도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새롭게 내공을 만들어야하는 두 여인이야 오죽할까.
방법은 알고 있지만 시도할 수 가 없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오늘은 좀 쉬자. 피곤해서 더 이상 안되겠다.”
정신없이 야혼을 몰아치던 당가려가 이내 손을 거둬들이며 물러났다. 힘이 없다기보다는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래? 그럼 밥이나 먹자.”
당가려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 야혼이 재빨리 자신의 동굴로 가 버섯을 한 움큼 들고 왔다.
그러나, 당가려와 냉소소는 망연한 눈으로 버섯만 쳐다볼 뿐이었다.
“휴-우!”
“하-아!”
그러다 이내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력증, 두 여인이 동시에 겪고 있는 증상이었다.
“야! 이년들아,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어디서 한숨이야. 누가 죽었냐, 죽었어?”
“좀 조용히 못해!”
“주둥이 닥쳐!”
“나 미치겠네 이거.”
오히려 야혼이 멍한 얼굴로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 한숨에 이어 이제는 짜증까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오직 동굴 안에
가만히 누워있었을 뿐인데.
‘씨팔, 이럴 땐 극약처방이다.’
평소 물 떠먹던 그릇을 가져온 야혼이 그릇 가장자리에 대고 제 손목을 힘차게 그었다.
“이건, 왜 안 잘리는 거야 이거.”
다시 한번 손톱을 세운 야혼이 그곳에 내공을 집중하여 사정없이 그어버렸다. 일순 손목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가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무슨 짓이야!”
“너 미쳤냐??
갑작스런 야혼의 행동에 질겁한 두 여인이 재빨리 그의 손목을 지혈했다.
“저곳을 날아가려면 내공이 필요하잖아. 내 몸 속에 넘쳐 나는 게 내공인데 줄 방법이 없잖아. 그러니까 내 피라도 먹어.
하루에 한 대접씩 받아줄 테니까 먹고 운기해 그럼 되잖아.”
다시 손목을 향해 손을 휘두른 야혼이 피를 받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라. 우리가 잘못했다.”
“그럼 먹어!”
“싫어! 어떻게 피를 먹냐?”
당가려가 도리질을 치며 한 걸음 물러앉았다. 설령 정말로 야혼의 피가 영약이라 할지라도 그런 짓까지 하면서 내공을
증진시키고 싶지 않았다. 차마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
“누가 피 먹으래? 버섯 먹으란 말이야.”
버섯 하나를 당가려의 입 앞으로 들이밀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일단 두 여인의 기분을 바꾼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아야할 터였다. 물론 자신을 이용한다면 얼마든지 영약이 돼줄 의향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여인의
선택일 뿐, 자신의 몫이 아닌 것이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가지는 자연스런 분위기 조성이었다.
“이건 궁금해서 묻는 건데, 지금 너희들 실력으로 어느 정도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냐?”
“20장 정도, 그건 왜?”
“그럼 힘들겠구나…….”
냉소소의 말에 야혼이 아쉽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방법이 있긴 한데 안 되겠다는 듯이.
“무슨 방법이 있는 거야?”
버섯을 먹다말고 야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껏 이곳 불귀동에서  생활하던 중, 절벽에 관한 소리를 처음으로 흘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야혼의 성격상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는 터라 당연히 두 여인의 눈이 빛날
수밖에 없었다.
“아냐. 먹기나 해. 혼자 해본 소리야.”
“그러니까 더욱 궁금하잖아!”
“야 파편 튀어. 식사예절 좀 지켜. 무슨 여자가.”
“너? 이 불어터진 만두 같은 놈이.”
“야! 내가 불어터진 만두면, 너는 새끼 밴 암소다.”
“그만해! 애들도 아니고 무슨 짓이냐.”
냉소소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짝가슴 너는 나서지 말아, 이건 가려 저년과 내 일이라고.”
“뭐 짝가슴? 이 배불뚝이 돼지가.”
두 여인이 동시에 야혼을 향해 먹고 있던 버섯을 던지며 달려들었다.
“비겁하게 둘이서 한꺼번에 덤비냐?”
“너는 2인분도 넘잖아. 둘이 아니라 셋이서 덤벼도 된다.”
야혼을 바닥에 깔아 눕힌 당가려가 그의 얼굴을 향해 정통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래쪽으로 자리를 옮긴
냉소소는 그의 두 다리를 꺾어 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온통 살과 근육으로 채워진 야혼의 몸뚱이가 제대로 접힐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엎치락뒤치락 개싸움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당가려의 가슴을 가렸던 천이 떨어져 나가고 그 다음에는 야혼의 요상스런
속곳이, 그리고 잠시 후에는 세 사람이 전부 알몸으로 나뒹굴며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주로 맞는 사람은 야혼이었지만 그 또한 완력으로 냉소소와 당가려의 주먹을 막아내며 대항했다.
“하아! 호호호! 하하하!”
한참을 뒹굴던 세 사람이 큰 대자로 바닥에 누운 채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말해봐.”
야혼의 한쪽 팔을 들어 제 머리 밑으로 가져가던 냉소소가 물었다.
“일단 연못에 가서 몸부터 씻고 이야기하자. 끙차!”
냉소소와 당가려를 양쪽 겨드랑이에 낀 야혼이 연못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의 기분을
풀기 위해 했던 장난이었는데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야! 세게 좀 밀어라. 그래가지고 떼가 밀리겠냐?”
“누가 금강철피공을 익히래. 이게 돌이지 어디 사람 피부냐?”
“걱정 마라. 금강철피공을 완성하면 여기 소소 등보다 더 보드라운 피부로 변한다. 이거 완전히 비단결이구먼.”
“아프단 말야, 네 몸이라고 착각하지 마. 살살해, 너 잘하잖아. 여자를 다룰 때처럼 살살 하라고. 참 아까 하려다 만
이야기가 무슨 말이야.”
“으응 다른 게 아니고, 나한테 도 두 자루 있잖냐. 그걸 사다리로 쓰면 어떨까 하고 말이야. 지금 저기 있는
비천묵령도처럼 절벽에 박아서.”
비스듬히 몸을 기댄 야혼이 당가려가 비천묵령도(飛天墨領刀)라 이름 지어준 도를 가리켰다.
“대충 절벽 높이를 보니까 120장 정도 되겠더라고. 40장까지만 오를 능력이 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너희들 지금
익히고 있는 무공을 완성하면 40장은 안되냐?”
“쉽지는 않지. 직선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고 사선으로 올라야 하는데.”
야혼의 한쪽 팔을 어깨 위로 걸쳐놓은 냉소소가 절벽을 쳐다보았다. 안쪽으로 기울어진 절벽이었기에 직선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들다. 그런 곳에 도를 꼽는다 하여 가능할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시도는 해볼 수 있잖아, 언니.”
당가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야혼이 제시한 방법이 먹힐는지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매끈한 절벽에 지지대가
생긴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일단 무공을 완벽하게 익혀야겠지.”
“그건 맞아. 무공을 익히지 못하면 방법이 있어도 소용없지.”
낮게 한숨을 쉬던 두 여인이 곁눈질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결국 방법은 한가지로 귀결되었다. 야혼의 내공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무공을 완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단 열심히 해봐라. 혹시 아냐. 내가 이 몸 속에 넘쳐나는 정력제를 전부 내공으로 만들면 가능할지. 그나저나 오랜만에
같이 목욕하니까 좋다. 더 커진 것 같애.”
“너?”
가슴을 틀어쥐는 야혼의 행동에 질겁한 두 여인이 동시에 연못 밖으로 몸을 날렸다.
“오늘 저녁은 굶어 나쁜 놈아!”
저만치에서 주먹을 틀어쥔 당가려가 씨근댔다.
“투견공으로 가능할까?”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중얼거렸다. 투견공을 완전하게 익히면 굳이 경공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 새끼가 나무를 타는 것 같겠군.”
비대한 검은 곰 한 마리가 낑낑대며 절벽을 오르는 광경이 연상되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금강철피공을 익히고
있는 곰이니 떨어져도 별다른 상처를 입지도 않을 터이다.
오르다 힘들면 그대로 떨어져 좀 쉬었다 다시 오르고, 그러다 떨어지면 또다시 오르는 곰.
“그것도 재미있겠네. 몸이나 깨끗이 씻자.”
연못을 온통 휘젓고 다니며 몸을 씻던 야혼이 밖으로 나와 도를 갈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불귀동에 희미한 달빛이 비춰들었다. 잠시 잠깐 볼 수 있는 달이었지만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벌써 가을로 접어들었는지 작은 풀벌레들이 요란하게 울음을 토해냈다. 그 사이를 은밀하게 걸어가는 인물이 있었다.
불안한 듯 냉소소가 있는 동굴을 쳐다보는 이 여인은 당가려였다.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결국 결론을 내렸다.
야혼에게 의존하여 용봉환락무를 완성하기로 했다.
“처음도 아니잖아. 그냥 불만의 내공을 이용할 뿐이라고.”
몇 번이고 마음을 다독이며 야혼의 동굴이 있는 곳까지 왔다. 그러나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내공을 귀에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동굴안쪽에서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다행이네.”
안도의 숨을 내쉰 당가려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후 재빨리 동굴로 솟구쳐 올랐다. 동굴 입구에 발을 딛자마자 용봉환락무를
운용해버렸다. 혹여 마음이 변할까 하는 생각과 자신의 몸을 가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쁜 놈! 또 춘서 보다가 잠들었군.”
야혼의 거구 옆에 펼쳐진 춘서를 발견한 당가려가 나직한 실소를 흘렸다. 전에 두어 번 보았던 책이다. 야혼이 가지고 있던
비급을 죄다 외우자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무공이나 진전이 있다면 거기에 매달려 볼 터인데 10성을 끝으로 더 이상 발전이 없자 결국 남은 건 춘서밖에 없었다.
“저 책은 주로 여성 상위에 대해서 나온 책인데.”
책 내용을 되짚어보던 당가려가 얼굴은 붉혔다. 2번이나 보았지만 책 내용을 생각하면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용봉환락무를 펼치고 있는 상태였기에 반응은 바로 왔다. 저도 모르게 낮은 비음을 발하며 야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야혼의 상태는 나체였다. 제 몸에 들어맞게 바닥을 파놓은 그곳에 똑바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가볍게 바지를 끌어내린 당가려가 야혼 아래쪽을 응시했다.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문득 자신의 행동에 실소가 나왔다. 단 한번도 실물을 보지 못했던 남자 상징을 물리도록 본 것도 부족해서 만져보지를 않나,
이제는 먼저 까발리기까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게다.
가만히 야혼의 상징을 들어올렸다. 이미 춘서를 탐독했기에 어떻게 하면 남성이 금방 일어서는지 꿰뚫고 있다.
손과 혀를 번갈아 가며 놀렸더니 금방 팽팽해졌다. 순간 야혼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쁜 놈, 자는 체 하는 줄 알고 있어 임마. 자는 놈이 어떻게 용봉환락무를 펼치냐.’
야혼을 쳐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용봉환락무는 결코 혼자 익힐 수 없는 무공이다. 반드시 상대도 같이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른 척 하고 있는 게 사실은 더 편했다.
“하악!”
뜨거운 비음을 흘리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불기둥이 아래쪽을 가득 메우며 속살을 자극하자 짜릿한 쾌감이 밀려왔다. 눈앞이
아득히 지워져갔다.
당가려의 몸에서 흘러나온 백무가 점점 진해지고 덩달아 아래쪽에 생성된 적무 또한 점점 농밀해졌다.
처음과는 달리 이번에는 적무가 한결 강해 보였다. 당가려의 내공을 높여주기 위해 야혼이 적극적으로 용봉환락무를 운용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야혼과 당가려의 내부에서 연신 천둥치는 소리가 울리고, 내기들이 정신없이 휘돌아 다녔다.
“하-악!”
온몸을 휘젓고 다니는 내기에 저도 모르게 거친 비음을 내질렀다. 몸 속의 기운이 커지면 커질수록 쾌감도 덩달아 커졌다.
끊임없이 단전부위를 자극하는 내기는 또 다른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이럴 수가…….”
저번의 경험과는 차원이 달랐다. 온몸을 줄달음치는 쾌감도 대단했지만 내기 또한 상상을 불허했다. 자꾸만
생사현관(生死玄關)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인물들이 가장 원하는 경지인 생사현관 타동. 극의 경지로 올라서기 위해선 반드시 생사현관이 타동되어야 한다.
그런데 야혼과 자신의 내기가 그곳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돼!”
마지막 정점으로 치닫는 자신의 몸을 향해 안타까운 고함을 질렀다. 조금만 더 하면 가능할 것 같은데 몸이 따르질 못하는
것이었다.
전신을 관통하는 쾌감을 느끼며 몽롱한 얼굴로 야혼의 가슴위로 쓰러졌다.
“으음!”
“헉!”
나직한 야혼의 신음소리에 깜짝 놀란 당가려가 재빨리 몸을 수습하여 동굴을 나섰다. 어슴푸레 밝아진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몸을 날렸다. 이제는 바로 운기를 해야한다. 야혼에 의해 주입된 내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부터 불귀동에 춘풍이 불기 시작했다. 당가려가 들렀다간 며칠 뒤 냉소소가 야혼의 동굴을 찾았고 어김없이 여인의 비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새벽녘이 되면 누구랄 것 없이 도둑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제집으로 찾아들었다.
이제는 전처럼 어색해하지도 않았다. 말로 표현만 안 했을 뿐 서로가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더하여 야혼은 오직 영약이상
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다. 인간 영약.
“당가려! 요즘 춘서에 너무 몰두하는 거 아냐? 그러다 정말 색녀(色女) 된다 너?”
춘서를 가져가려고 동굴을 방문한 당가려를 향해 야혼이 이죽거렸다. 요즘 들어 부쩍 춘서를 탐했다. 아니 정확히는
용봉환락무를 펼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부터였다.
“이거 아니면 볼게 없잖아. 비급도 다 외웠고.”
살풋 얼굴을 붉힌 당가려가 배시시 웃었다. 사실 그녀가 춘서를 찾게 된 것은 생사현관 때문이었다.
생사현관을 뚫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마지막에서 실패했다. 의지와 따로 노는 몸 때문이었다. 생사현관보다
늘 절정이 먼저 오는 바람에 용봉환락무를 이어주지 못한데 있었다.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한다네.”
“무슨 소리야?”
“너는 또 왜?”
동굴로 뛰어올라온 냉소소를 발견한 야혼이 인상을 구겼다. 그녀 역시 춘서를 바꾸어 가려고 왔을 터였다.
“나도 책 바꾸러 왔지. 근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그냥 하는 소리야. 근데 너희들 그렇게 예뻐도 되는 거냐?”
빈 말이 아니었다. 당가려와 냉소소의 얼굴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보기 좋게 그을린 몸에서 건강미와 함께 생기가
넘쳐나는 듯했다.
“정말 그래?”
책을 고르던 당가려가 고개를 돌려 야혼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예쁘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나는 거짓말 못한다는 것 알잖아. 정말 예뻐. 너희들을 보고 있으면 살고 싶다는 의욕이 마구마구 솟구쳐.”
“너 우리 만나고 예쁘단 말 처음이란 것 아냐?”
“내가? 아냐 한번 더 했어. 소소 네가 기억을 못해서 그렇지.”
“언제? 그런 말을 했으면 분명 기억했을 텐데…….”
냉소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알 리가 없었다. 처음 성모궁에 들어오기 전에 발가벗겨 놓고 했던 말이었으니.
“됐어. 그러지 말고 내 몸 좀 봐 주라.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한데 도무지 감이 안 잡혀.”
“뭐 그런걸 가지고 고민해. 좋은 방법 있잖아. 엉덩이 쪽으로 손만 뻗어보면 될텐데.”
야혼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당가려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참으로 묘한 신체였다. 경공을 펼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 몸은 전혀 변함이 없는 듯했다.
“그게 옛날보다는 많이 다가갔는데 살이 물러 터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살이 빠져서 그런 건지 감이 안 잡혀.”
그러고 보니 야혼의 피부가 거의 제 색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더하여 단단하던 피부가 물렁하게 변하면서 살집이 접혀들었던
것이었다.
“고기 먹고싶다.”
“불피워주리?”
“응! 여기 있는 거 한쪽만 떼 주라. 이런 환경에서 인육 좀 먹는다고 죄가 되지 않겠지, 뭐.”
야혼의 가슴살을 꼬집으며 당가려가 입맛을 다셨다.
“너 모르는구나. 금강철피공을 완성하면 입으로 씹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정말?”
눈이 휘둥그래진 당가려가 야혼의 살을 뜯어보듯 쳐다보았다. 강철같았던 얼마전이라면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지금은 결코
아니었다.
보통 인간의 살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어디!”
싱긋 미소를 지은 당가려가 야혼의 젓 가슴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아앗!”
“아니네, 뭐!”
“통증은 있지, 통증도 없다면 그게 사람이냐? 강시(殭屍)지. 단지 병기가 침투를 못한다 뿐이라고. 봐라 이빨자국이 나지
않았잖아.”
과연 그랬다. 당가려가 꽤 힘을 주어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야혼의 몸에는 전혀 표시가 나지 않았다.
“금강철피공의 진정한 위력은 이 상태가 아니라 내공을 끌어 올렸을 때야.”
두 사람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은 냉소소가 야혼의 뱃살을 툭툭 치며 말했다. 평소에는 지금과 같지만 일단 내기를 끌어올리면
온몸이 검은빛으로 변하면 어떤 무기도 침투하지 못하는 철골의 신체가 금강철피공이다.
익히기가 힘들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대단한 무공임에 틀림없었다.
“이제는 불만을 침대로 써도 되겠다. 웃차!”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당가려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야혼의 거구가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대단하구나.”
냉소소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거의 250근에 달하는 야혼의 몸을 잡지도 않고 들어올리는 당가려의 무공 때문이었다.
용봉환락무를 펼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경지였다.
당가려 자신도 놀랐는지 야혼을 들어올린 채 멍한 얼굴이다.
“되네?”
당가려가 제 눈을 의심하기라도 하듯 눈을 끔벅였다. 용봉환락무의 대단함에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5)- 아무일도 없었다(2)
“살살, 살살 하라고.”
“무슨 소릴. 불만 네 몸은 이미 괴물 수준이야. 인간의 몸이 아니라고.”
순식간에 힘을 풀어버리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야혼이 제 거구를 사뿐히 뉘여
버린 것이다.
“침대 똑바로 해! 간다.”
허공으로 몸을 날린 당가려가 야혼의 몸 위로 거칠게 떨어졌다.
출렁!
정말 인간 침대가 따로 없었다. 그녀의 몸이 가볍게 출렁이더니 적당한 깊이로 파묻혔다.
“참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보네. 좋긴 하다. 언니도 한번 누워 볼래?”
“아냐? 다음에 눕지 뭐.”
“그럼 그렇게 해! 나 이곳에서 자야지. 언닌 오른 팔이나 빌려서 자.”
“여기서 자게?”
“우리가 집이 따로 있나? 등 붙이는 곳이 잠자리지. 안 무겁지?”
“아니 무거워. 너는 엉덩이하고 가슴만 줄이면 지금보다 두 배는 가벼워질 거다.”
“임마! 그게 내 유일한 매력인데 작아지면 되냐? 지금보다 더 커지면 몰라도. 너도 그랬잖아, 나한테 볼 건 가슴하고
엉덩이밖에 없다고.”
“그래 더 키워라. 아예 나처럼 키워서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라. 너도 영약 좀 주리?”
“아! 영약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묻는 말인데, 그게 전부가 아니지?”
“무슨 소리야?”
“바른 대로 대 임마. 내가 방법을 찾을 지도 모르니까.”
“나도 궁금해, 지금까지 상황으로 봐선 약 기운이 전부 흡수되어야 하는데 아직 많이 남아있잖아.”
용봉환락무 때문이었다. 벌써 야혼과 같이 용봉환락무를 펼친 지 3개월에 접어들었고 자신들의 무공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앞으로 한 두 번의 관계만 가지면 생사현관이 타동될 터였다. 그런데 야혼은 아니었다. 여전히 과거의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에 걸쳐 야혼의 몸을 관찰하고 내린 결론은 공청석유가 다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귀신들이네. 그게 어찌 된 거냐 하면…….”
실상 궁금하던 차였기에, 야혼은 증폭단이란 약을 복용하고 영약들을 먹었던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증폭단에 의해 온몸의 기력이 다 빠진 상태에서 영약을 복용했다 이 밀이냐? 그것도 배터지게.”
“사실 배도 고팠으니까.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가 그때 며칠 굶었잖아. 그러니 눈에 보이는 건 족족 뱃속으로 들어갔지.”
“그러니까 배터지게 먹었단 말이지. 밥도 아니고, 염병할 영약을……”
“내가 영약이라 생각하고 먹었겠냐. 전부가 정력제로 보였지.”
“배터지게…….”
“배터지게…….”
“그래 이년들아 배터지게 먹었다. 배가 불러 죽을 뻔했다고!”
넋을 잃은 듯 배터지게, 를 연발하는 당가려와 냉소소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이 미친놈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어떻게 다른 것도 아니고 영약을 배터지게 먹냐. 그게 넘어가디, 뱃속으로
잘 넘어 가더냐고.”
“들어봐 이년아. 우선 목이 말라 물약을 먹었지.”
“그래 그건 공청석유(空淸石乳).”
“그리고 비쩍 마른 게 있더라고. 씹어먹으니까 한쪽에서 뜨뜻한 물이 나오더라. 대가리 달린 해구신하고 똑같이 생겼잖아.”
“머리가 달린 놈이니까 동자삼(童子蔘)인데, 속에 물이 찼으면 최소한 만 년 짜리. 또?”
“달걀처럼 생긴 것이 있더라. 꼭 사슴 거시기처럼 생겼어. 원래 사슴 거시기는 정력제중에 최고거든, 옛날 황제 놈들이
아침저녁으로 빠지지 않고 복용했던 게 바로 사슴 불알이거든.”
“그거 먹으니까 열났지?”
“어떻게 알았냐?”
“만년화리(萬年火鯉) 내단(內丹). 또?”
“그래? 어쩐지 화끈거리더라니. 일단 더우니까 시원한걸 찾았지, 이건 내가 원해서 찾은 게 아니고 본능이 시킨거야. 시원한
그릇에 보관되어 있던 놈을 씹어먹었지.”
“그놈도 삼(蔘)처럼 생겼지? 안에 물도 있고. 설삼(雪蔘), 그것도 만년 짜리. 또?”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는 나도 아니까 바로 먹었고.”
“그렇다치고 또?”
“그리고 밤톨만한 것들이 두 개 있데? 붉은색과 백색. 만져보니까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그건 음양쌍두사(陰陽雙頭蛇) 내단이다. 정력제로는 최고로 치는 놈이고. 또?”
“그놈은 제대로 먹었구먼. 그놈 옆에 금빛 나는 알이 하나 있더라…….”
“혹시 거북이 껍질로 된 상자든?”
“너 정말 귀신이다. 어찌 보지도 않고 다 아냐?”
“만년금구(萬年金龜) 내단이다. 또 없냐?”
“기억나는 건 다 말했다.”
“그러니까 기억나는 거라 이거지? 전부가 아니고?”
“나중엔 정신 없었으니까. 볼일 좀 보고 다시 짐 찾으러 가보니까 약고 안에 아무것도 없더라.”
“혹시 빠진 것 있나하고 열심히 찾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바닥까지 파 보았는데 텅 비었더라. 한 순간 욕 나올 뻔했다. 이제 말해봐, 다 토해냈으니까.”
“없어.”
“무슨 소리야? 방법을 일러준다 했잖아. 나보고 평생 이 몸을 하고 살란 말이냐? 옛날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야
정력제를 복용한 효과를 확인하지. 이 꼴로 여자들이 접근해오기나 하겠냐?”
“이 꼴통아 정도껏 처먹었어야 방법을 생각해보지!”
그 말을 끝으로 당가려가 입을 닫았다.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더 신기했다. 죽어도 벌써 골백번은
죽었어야 할 녀석이 야혼이었다.
“소소 너도 방법 없냐? 그래도 우리 일행 중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 너였잖아. 정 안되면 약 기운을 뽑아내는
방법이라도…….”
“그 정력제를 아까워서 어떻게 뽑아낼래?”
“조금만 뽑지 뭐. 몸이 정상으로 돌아올 정도만.”
“훗! 그래도 다 뽑는다는 말은 절대로 안 하는구나? 사실 나도 방법을 모르겠다. 전부 네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뭐. 그 편이 더 빠르지 않을까 싶다.”
냉소소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예견했던 대로 기연을 얻었는데 너무 과한 기연이었다. 적당한 기연이었더라면 단시간에
천하제일도 노려볼 수 있는 그런 기연들이 오히려 화가 되고 만 것이다.
“씨팔! 그럼 안 되는데. 최소한 인간 구실은 해야 할 것 아냐. 제 손으로 뒤도 못 닦는 놈을 어디에 써먹어.”
“헛소리 말고 잠이나 퍼자. 한 두 개만 꼬불쳐 왔으면 우린 진작 나갔겠다. 이 나쁜 놈아.”
공연히 짜증이 치민다는 듯 당가려가 야혼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많은 것들 중에 아니, 기억이 안
나는 것들 중에 한가지만이라도 품에 넣고 왔더라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야혼의 증상에 대한 해답을 구하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동안 당가려와 냉소소는 번갈아 야혼의 동굴을
들락거렸고, 그녀들의 무공은 점점 수위를 높여갔다.
더하여 갈수록 그녀들의 솜씨도 늘어 야혼과 관계를 갖는 목적을 잃어버린 채 쾌락에 빠져 날뛴 적도 없지 않았다.
어느새 용봉환락무에 의해서가 아닌 몸으로 느끼는 쾌감을 채득해버린 것이었다.
“눈 떠!”
가쁜 숨을 몰아쉬던 냉소소가 야혼을 불렀다. 희미한 백무 속, 알몸의 냉소소는 환상 그 자체였다.
“괜찮아?”
슬며시 눈을 뜬 야혼이 냉소소를 쳐다보았다. 얼굴 가득 비지땀을 흘리며 느리게 몸을 움직여댔다.
“다 익혔구나?”
“응.”
야혼의 물음에 몸을 멈춘 냉소소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어쩔 수 없이 맺게된 관계였지만 오늘밤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찾아올 일이 없다.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알 수 없었다.
야혼을 사랑한다거나 하는 마음은 결단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그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불귀동을 빠져나가는 순간
머릿속에서 잊어버려할 사람이 바로 그였다.
“고마워!”
“고맙긴. 우리에게 뭔 일 있었나. 아무 일 없었잖아.”
빙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손을 올려 냉소소의 가슴을 틀어쥐었다. 그동안 거의 4개월 동안의 관계에서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하악! 그래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야혼 넌 그냥 영약이었을 뿐이야. 우리를 최고로 만들어준 영약.”
서로의 존재를 잊어야하는 아쉬움 때문인지 냉소소의 몸짓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새벽빛이 스미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야혼을 탐했다. 다시 규범과 예절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안타까운 몸부림은 길게 이어졌다.
냉소소와 마지막 밤을 보낸 다음날 당가려의 방문이 있었고 그녀 또한 밤새도록 야혼을 괴롭히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떠날 채비를 해나갔다. 냉소소와 당가려가 올라갈 수 있는 높이는 30장이었다.
우선 처음 30장 높이에 비천묵령도를 박아 넣고 그곳에서 다시 30장 높이에 염왕도를 찔러 넣었다. 다행이 염왕도가 있는
부분은 거의 직선에 가까워 20여장 정도는 바로 올라갈 수 있을 듯 싶었다.
“일단 내가 먼저 올라가서 저곳에 받침대를 만들어 볼께.”
“할 수 있겠냐?”
“혼자는 못해. 너희들이 올려줘야지.”
“좋아 일단 몸을 가볍게 해라. 우리 둘이라도 너 정도의 거구는 옮기기 힘드니까. 자 간다!”
야혼의 팔을 하나씩 붙잡은 두 여인이 지면을 박차자 무서운 속도로 세 사람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비스듬히 오르던 두
여인이 비천묵령도를 발판 삼아 재차 허공으로 솟구쳤고, 염왕도(閻王刀)쪽으로 야혼을 던진 다음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이야합!”
거대한 고함소리와 함께 야혼의 몸통이 검게 변하고 철수로 변한 손과 다리가 절벽 속으로 박혀들었다.
거미가 올라가듯 절벽에 구멍을 내며 올라가던 야혼이 20여 장을 전진한 다음 아래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가져와!”
야혼의 신호에 따라 그녀들이 들고 올라가는 것은 널따란 바위덩어리였다.
“읏차!”
바위를 받아든 야혼이 그것을 절벽 깊숙이 박아 넣었다.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거의 1년에 걸친 감금생활이 끝나고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냉소소와 당가려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벌써부터 마음은 각자의 집으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십만대산에서 겪었던 일이며, 많은 무공 비급들. 물론 머릿속에 들어있는 그것들을 풀어놓을 생각만 해도 절로 신이 났다.
“자 이거.”
두 사람 앞으로 야혼이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뭔데?”
“나가는 길 모르잖아. 이곳에 올 때 만들었던 지도다.”
그랬다. 일행이 힘을 합쳐 만들며 온 길이라만 그 때 만들었던 길은 이미 초목으로 뒤덮인 숲으로 변해 버렸을 터이고,
기억에 의존하여 나가기는 오는 동안 걸렸던 6개월이란 시간이 짧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응! 고마워.”
지도를 받아든 냉소소와 당가려가 다시 절벽 쪽을 쳐다보았다.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어지질 않는다는 눈으로.
“뭐해? 빨리 안 올라가고.”
“무슨 소리야?”
느닷없는 야혼의 외침에 당가려와 냉소소가 깜짝 놀라며 등을 돌렸다. 야혼의 음성이 상당히 먼 곳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별은 빠를수록 좋은 거다.”
“너……? 안 간다는 말이야?”
“안가는 게 아니고 못 간다. 이래가지고 어딜 가냐. 여기 있다가 살 좀 더 빼고 나갈란다. 무공을 익히기엔 이곳만큼 좋은
곳도 없잖냐.”
“야혼…….”
일순 멍해진 두 여인이 야혼을 주시했다. 결코 장난말이 아니었다. 함께 떠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얼굴은 완강했다.
“그러지 말고 나가자. 나가서 살 빼면 되잖아.”
냉소소가 애원하듯 말했다. 야혼을 특별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또한 헤어진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십만대산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동행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로 헤어지자는 말이 아닌가.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지금 상태로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얼마 걸리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라. 좀 쉬고 싶다. 혹시 나중에 강호에서 만나면 홀대하지나 말아라.”
두 여인을 가만히 쳐다보던 야혼이 이내 몸을 돌렸다. 자신이 빨리 사라지는 게 그녀들을 도와주는 일이지 싶었다.
‘젠장 저년들에게 정이라도 들었나? 영 거시기하네.’
서둘러 동굴로 돌아온 야혼이 벌러덩 자리에 누웠다. 잠이라도 한숨 자야할 것 같았다.
“왜 안가고 다시 따라온 거야! 너희들…….”
밖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고함을 지르던 야혼이 깜짝 놀라 더듬거렸다. 냉소소와 당가려가 다시 돌아온 것은 분명한데 분위기가
달랐다. 용봉환락무, 그 색공을 동시에 펼치며 동굴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얘들이 미쳤나? 후회할 짓을 안 하는 게 좋다.”
“그게 아냐. 그동안 우리가 도움을 받았으니까 이번에는 너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 뿐이야.”
“필요…… 으읍!”
손을 흔들며 뭐라 말하려는 순간 입이 막혀버렸다. 어느새 다가온 냉소소가 그의 입술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온통 동굴 안이 백색과 적색으로 가득 들어찼다. 두 여인의 내공을 동시에 받아들인 야혼의 몸 속에서 엄청난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영약의 기운을 내공으로 만들어갔다.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달랐다. 당가려와 냉소소가 동시에 야혼의 내공을 빨아들이자 그의 단전이 한순간 텅 비어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을 틈타 영약기운이 급속도로 내공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녀들의 마지막 결심이 야혼에게는 기연으로 이어졌다.
서로 경쟁하듯 야혼을 탐했고, 밤이 지나 아침이 되었건만 백무와 적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야혼도 이성을 잃었다. 처음으로 용봉환락무에 몸을 맡겨버렸다.
“갔나?”
얼마나 잤을까. 문득 옆자리가 허전하다 싶어 눈을 뜬 야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갔군.”
재빨리 동굴을 나온 야혼이 도를 박아두었던 곳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보았으나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간다고 말이나 하고 갈 일이지. 배웅도 못해줬잖아. ……응?”
나지막이 투덜거리며 몸을 돌리려던 참에 바닥에 떨어진 양피지를 발견한 야혼이 이채를 발했다.
“이별의 글이라도 써두었나?”
아무 생각 없이 끌어당겨 양피지를 펼쳤다.
“젠장! 염왕도법? 이런걸 어디에 쓰게.”
고개를 들어 염왕도를 박아 넣었던 곳을 쳐다보았다. 어렴풋이 잡힌 염왕도는 손잡이 끝을 둘러싼 둥근 부분이 부서져 있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도축장 이정이 염왕도를 찾아 보라 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심심하지는 안겠구먼.”
전부 네 초식의 구결이 적혀있는 염왕도법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 바닥을 힘차게 굴렀다.
“타핫!”
거의 비천묵령도가 있는 곳까지 솟구친 야혼이 절벽을 향해 두 손을 사정없이 찍었다.
일순 손목까지 박혀들자 빙긋 미소를 머금고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5장 정도 더 올라간 뒤 비천묵령도를 뽑아들고 아래쪽으로
몸을 던졌다.
“검은 곰 새끼 떨어진다!”
쿠웅!
땅바닥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야혼이 휘파람을 휘휘 불며 연못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는 태을건곤심법과
염왕도법에 치중할 참이었다. 살 빼기, 앞으로 성취해야할 가장 큰 과제였다.
“엄청나구먼?”
양피지를 꺼내 읽어가던 야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겁천십웅의 무공을 3가지를 알고 있고 그 중 십전수의 무공은
익히고 있다. 하지만 위력 면에서 보자면 염왕도법이 단연 위였다.
일 초 일 초가 오직 살인무(殺人武)였다. 한번 펼쳐지면 반원 5장을 완전하게 초토화시킬 수 있는 가공할 무공이 바로
염왕도법이었다.
언뜻 듣기에 겁천십웅 중 최고의 무공이 바로 염왕도법이라 하였는데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불귀동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검은 도광이 번쩍이며 솟구쳐 올랐다. 백색의 운무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광채는
죽음의 빛이었다. 사방 벽에 무수한 구멍을 만들었고 이내 바윗돌들이 가루로 흩어져 내렸다.
원래는 염왕도법을 펼치게 되면 시전자 자체도 검은 운무를 뿜어내게 되는데 태을건곤심법을 포기하지 않는 야혼의 고집 때문에
백색 운무 속에서 검은 살기가 흘러나오는 이상한 도법으로 변형되어 버렸다.
강해지기 위해 무공을 익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염왕도법상의 운기법을 고집하지 않았다.
야혼이 원하는 것은, 오직 불은 살을 빼는 것뿐이었다.
두 여인과 헤어진 마지막날 행했던 용봉환락무 덕택인지 야혼의 몸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벽에 다가가면 여전히 배가 먼저
닿는 불상사가 생겼지만 볼일보고 혼자 닦을 정도는 되었다.
더하여 갈수록 조금씩 사람의 형상을 회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나도 떠나볼까?”
냉소소와 당가려가 떠난 지 1년만에 야혼도 떠날 채비를 했다. 단출하게 떠난 그녀들과는 달리 야혼은 준비물이 넘쳐났다.
무공비급을 가져가기 위해 속곳으로 걸치고 있던 천마저 풀었다.
거의 9할 정도 갈아진 비천묵령도와 연마석, 그리고 책을 뭉뚱그려 묶어 절벽 아래쪽으로 던져둔 야혼이 2년 남짓 살았던
불귀동을 둘러보았다.
“독하네 그년들. 몸바쳐 봉사까지 했으면 한마디 정도는 남길 일이지.”
그녀들이 쓰던 동굴을 둘러본 야혼이 쓴입맛을 다시며 절벽 아래쪽으로 몸을 틀었다.
“검은 곰 새끼가 올라간다!”
기우뚱 기울어진 절벽을 향해 오른 손을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아느냐 세상 여인들아! 이 야혼이 최고의 정력을 뿐만 아니라 강철같은 거시기까지 얻었다. 웃! 하하하!”
검게 변한 야혼의 몸이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오르던 그의 신형이 이내 거미처럼 번했고, 무서운 속도로 위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손과 다리가 찍혔던 흔적만 남는 게 아니었다. 4개의 흔적이 난 중간에 또 하나의 흔적이 나
있었다.
둥근 막대로 파버린 듯한 흔적.
십만대산에서 야혼이 얻은 것이었다. 강철같은 살갗과 물건.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6)- 색색만화공(色色滿花功)
색색만화공(色色滿花功)
“아이고 죽갔네. 이건 하는 것보다 더 힘드네.”
절벽 끝까지 기어서 올라온 야혼이 꼬꾸라지듯 쓰러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무려 120장을 기어올라온 것이었다.
금강철피공을 대성했다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나 나올 수 있는 그런 곳이라면 불귀동이란 이름도 붙지 않았을
터였다.
“엥? 이년들이 이곳에 이별의 말을 남겼네?”
몸을 일으키려던 야혼이 눈앞에 쓰여진 글을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냉소소와 당가려의 흔적이라 그런지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뭐라고 적어두었나.”
-불만, 마지막으로 부르는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만나면 그때는 야공자 또는 야소협이라 불러야 되겠지. 이곳에서의
생활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한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 후회하지 않는다고. 또 다시 이런 경우가 생긴다하더라도 너와
같이 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가려.
“당연하지, 이 야혼 같은 사내가 어디 흔한지 아냐? 지금껏 수많은 여인들이 거쳐갔지만 아직 나 싫다하는 여자는 없었다.
그건 믿어도 좋다.”
-뻐기지 마라 야혼. 가려 글을 보고 목에 힘 줄 너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나도 가려와 마찬가지야. 십만대산에서 1년
6개월의 세월은 아마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야. 나는 한가지만 부탁할게. 너무 자학하지 말고 살기를 바래. 스스로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소소.
“하여간 넌 머리 하난 기차단 말야. 너무 머리 좋은 여잔 남자를 피곤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 나는 가장 편한
삶을 살고 있는 거다. 자학이 됐던, 자책이 됐던. 그냥 지금 상태가 편해.”
냉소소와 당가려가 남긴 글을 읽은 야혼이 몸을 돌려 불귀동을 쳐다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곳이지 싶었다. 마치 어린
시절처럼. 하지만 이제는 이곳 또한 기억 속에 묻어야 한다.
누이가 그랬다. 즐거웠던 추억은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해 기억 속에 묻는 것이라고. 빼내면 도망가니까 혹시라도 빼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잊고 지내라 하였다. 없는 듯 잊고 지니면 더 오래오래 품을 수 있다며.
“이야합! ……엥?”
불귀동을 쳐다보며 고함을 내지르려던 야혼이 뒤쪽에서 들썩거리는 뭔가에 휙 고개를 돌렸다.
결정적인 순간을 방해한 건 괘씸한 바윗돌이었다. 손으로 부셔버리려는 순간 그곳에 쓰여진 글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에 보았던 냉소소와 당가려의 글이었다.
-약오르지. 이 속에 너에게 줄 선물 있다. 아쉬운 대로 사용해라. 아마 살아 생전에 받은 최고의 선물이 될 거다. 소소,
가려.
“그래 약오른다, 이년들아. 호연지기를 가득 담아 일생일대의 고함을 내지르려는 순간 너희가 방해했다.”
입을 빼쭉 내민 야혼이 사각으로 잘린 바위를 들어올렸다. 옷이었다. 먼저 바위를 사각으로 잘라 구멍을 판 다음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경사지게 홈을 만들어 그곳에 옷을 넣어두었던 것이다. 더하여 그녀들에게 건넸던 십만대산의 지도까지.
“새 옷이네?”
옷을 들춰본 야혼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검은 색의 평범한 옷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결코 만들지 못한다. 십만대산을 내려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엉성한 바느질 솜씨로 보아 둘 중 누군가가 손수 만든 것임에 분명했다.
“하기야 이 몸에 맞추려면 시키기도 뭐했겠다. 더구나 이곳에 와서 지었을 테니까. 잘 입으마.”
도갑까지 만들어진 옷을 보자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서둘러 옷을 걸치고 도갑에 비천묵령도를 집어넣자 자신이 보아도
그럴싸했다. 한가지만 제외하곤.
“씨팔! 살만 안 쪘어도.”
여전히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에 문득 신경질이 나 전방을 향해 몸을 날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서대시전의 계집들아 기다려라. 이 개차반 야혼이 납신다.”
산산이 부서진 성모궁을 발견하곤 잠시 멈추었던 야혼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갔다.
갈 때는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이었고, 10명이 넘는 많은 인원이었지만 올 때는 오직 혼자였다.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
무작정 개봉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래서 무공을 익히는 거야, 썅!”
슥슥 뒤로 물러나는 풍경을 쳐다보며 기분 좋은 고함을 내질렀다. 스스로 생각해도 엄청난 기술이었다. 뒤로 지나간 것들을
살피기도 전에 새로운 풍경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그런 광경은 인가가 들어선 마을을 지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반 무인들은 인가가 있는 곳에 들어서면 되도록 무공을 줄여
평민처럼 행동하지만 야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하듯 더 강한 경공을 펼치며 양민들을 놀라게 하였다. 무서운 속도로 나아가다, 그가 가던 길을 멈추는 경우는 단
한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치마를 두른, 여인인 듯 싶은 형상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뿐이었다.
이번에도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자금 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설핏 눈앞을 스치고 간 곱상한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췄던 것이다.
“어라! 저년은 분명 젖퉁인데?”
주변을 둘러보며 한가로이 걷는 두 사람 중 뒤쪽에 있는 인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남장을 하고 있었으나 야혼의 시선을
속이지는 못했다.
“몸매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졌구먼. 이크! 들었나? 설마…….”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여인의 눈빛에 깜짝 놀란 야혼이 몸을 움츠렸다. 거의 3장 정도 떨어진 거리였기에 대수롭잖게 여겼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인물을 보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물건은 검이었다. 무림인이었던
것이다.
“어디서 왔나?”
“대화를 청하려면 먼저 신분을 밝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만.”
야혼의 입에서 평소와는 전혀 다른 묵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몸은 변했을지언정 목소리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가 작업
들어갔을 때 상투적으로 써먹는 바로 그 목소리.
“이자가?”
남장여인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던 탓이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풀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고명지(高明知)라 하네. 사는 곳은 북경일세. 이제 됐나?”
‘이상하네. 왜 나에게 말 걸어온 년놈은 전부 북경출신이지?’
자신을 고명지라 소개한 여인을 가만히 쳐다보던 야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경, 여인을 후릴 때 가장 많이 써먹었던
곳이었는데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소이까? 저는 야혼이라 합니다. 제가 왔던 곳은 십만대산이고 행선지는 하남성(河南省)이외다.”
“십만대산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이다. 주천상이란 분의 밀명을 받았습니다.”
주천상은 의도적으로 꺼낸 말이었다. 일단 수작을 부리기 위해선 뭔가 그럴싸한 핑계가 있어야 하는데 이번에 그 대상으로
주천상을 써먹기로 했던 것이었다. 한방에 먹힐 거란 생각 없이 무심결에 내뱉었던 말이었는데.
“허억!”
고명지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주천상이란 말 때문이었다. 주천상이라는 이름보다는 명 황실의 3공중의 한 명인
야공(野公)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자가 바로 그였다.
“잘 아시는 분인 모양입니다, 그려. 그럼 일이 바빠서.”
고명지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야혼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총총 걸음을 옮겼다.
“잠깐 멈추시게. 할 말이 있네.”
‘그럼 그렇지. 네까짓 게 별수 있냐? 이제야 밥 좀 먹겠네.’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회심의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속도만 조금 늦췄다. 한 건 했다는 강한 느낌이
왔다. 단순히 밥이 문제가 아니라는 그런 느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잠깐 들어가도록 하지.”
야혼의 어깨를 붙잡은 고명지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좀 바쁜데…….”
“내 충분히 보상하겠네. 저기가 좋겠구먼.”
양 갈래 길 오른 쪽 끝에 보이는 커다란 객잔을 가리켰다.
“한 시진만 시간을 내주게. 더 이상은 붙잡지 않겠네.”
“허허! 참 난감 하외다. 주천상이란 사람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하외다. 다만 부탁을 받았을 뿐이오. 한가지 일을…….”
짐짓 말끝을 흐렸다. 고명지의 표정으로 볼 때 주천상이란 사기꾼 놈과 별로 좋은 관계로 보이지 않았기에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어라 저것도 년이네? 차가워서 그랬나.’
못이긴 척 고명지를 따랐다. 그러다 그녀를 앞서 길을 잡은 인물의 뒷모습을 무심코 쳐다보았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처음엔
냉막한 인상의 남자라 여겼었는데 뒤쪽에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좌우로 흔들대며 묘한 율동을 보이는 그것은 분명 여인의
엉덩짝이었다.
“그년 돈도 무지하게 많은가 보네.”
청화루(靑花樓)란 객잔 별채를 통째로 빌려버린 고명지의 재력에 혀를 내둘렀다. 한 시진 정도 시간을 내달라 하면서 빌린
곳치곤 너무 엄청났다.
‘가만 혹시 저년도 관리 아냐? 그럼 복잡해지는데. ’
서대시전에서 얻어들은 풍월에 의하면 황실 직속으로 있는 동창이나 금의위는 이런 비밀 안가를 가지고 있다 하였고, 그런 곳에
한번 끌려 들어가면 결코 나올 수 없다 하였다.
무공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가장 싫어하는 자들이 바로 관리들 아닌가.
“자! 이제 말해봐라!”
“남장을 하려거든 손목에 있는 팔찌를 뽑아야 되는 거 아뇨.”
손목에 찬 고명지의 금환(金丸)을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미약한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영 거슬렸다.
“딴 소리 하면 죽는다. 이곳에서는 내가 바로 법이란 말이다.”
“이런 제기랄. 불길한 추측은 꼭 맞아떨어진다니까? ”
픽, 헛웃음을 토해낸 야혼이 혼잣말처럼 이죽거렸다. 여자 후리는 건 이미 물 건너간 듯싶었다.
“입 조심해요! 이분이 누구인줄 알고 감히 망발이에요.”
“그년 참! 그걸 협박이라고 하냐?”
번쩍!
“죽고싶어…… 요?”
말은 어눌했지만 동작은 빨랐다. 순식간에 뽑힌 검이 야혼의 목에 와 닿았다.
“양지(梁知)야!”
고명지의 입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첩형 언니!”
“호! 고소저의 관직이 첩형이었나 보오이다. 젊은 나이에 엄청 출세했구먼?”
첩형이란 양지의 말을 들은 야혼이 일순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다른 관직은 잘 모르지만 금의위와 동창의 관직은 대충 알고
있다. 첩형이란 관직은 동창의 10권 안에 드는 엄청난 지위였던 것이다.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이곳은 동창의 안가(安家)다. 빠져나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 사실대로만 이야기하면 바로
풀어주겠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합시다.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어서 말이오.”
겁먹은 듯 손짓을 섞어가며 말했다.
“그 몸에 안 먹어도 될 것 같은데?”
“맞다. 내 몸뚱이가 돼지새끼처럼 변했지. 내가 어쩌다, 휴-! 제기랄.”
자신의 배를 쳐다보던 야혼이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마치 정말로 울음을
터뜨릴 듯, 절망적인 얼굴로 배를 천천히 쓰다듬는 것이었다.
“양지야, 가서 음식 좀 들이라 하거라.”
“알겠습니다…….”
고명지를 향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던 양지가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자신도 모르게 야혼이란 청년을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양지가 야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가 무슨 수작을 부렸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양지소저 저 배고파 죽겠습니다.”
“아-! 네.”
양양한 기세로 쳐다보던 양지가 언제 그랬냐싶게 수더분한 몸짓으로 야혼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놀랍군. 양지가 아무리 무르지만 저렇게 변화시킬 수 있다니. 저것도 무공인가?”
“주천상이 내게 부탁한 것은 바로…….”
느닷없이 주천상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의심스런 눈으로 야혼을 바라보던 고명지의 표정이 이내 심각하게 변했다.
“그래서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 말인가요? 기껏 하수오 4뿌리에?”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그자가 무슨 야료를 부렸는지 힘을 쓸 수가 없었거든요. 아, 식사 왔네.”
방문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한 야혼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다양한 색을 지닌 놈이군. 하기야 천민들이니까 그렇겠지.”
시시각각 변하는 야혼의 표정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야혼만큼 다양한 얼굴 표정을 보인
이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더욱 묘한 일은 그의 얼굴 표정과 손짓이 참으로 어울려 보인다는 것이었다.
슬픈 표정을 지을 때는 덩달아 손끝이 맥없이 쳐지고, 기쁜 표정을 지을 때는 손끝에 힘이 솟는 듯했다. 더하여 제 몸 또한
야혼의 표정과 손짓에 따라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흠주현에…….”
“잠깐만요, 야공자. 양지야 너는 그만 물러가 있거라.”
“첩형 언니!”
“그렇게 하세요. 양 소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좀 그래서.”
“알겠습니다. 공자.”
야혼이 점잖게 말을 건네자 뭣에 홀린 듯 양지가 종종 뒤로 물러났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군요. 참 멋진 밤이지요!”
“그렇군요. 하던 이야기 계속하시죠.”
“아! 그렇군요. 우리 일행이 흠주현에 도착했을 때, ……이것 좀 들어보겠어요? 이런 맛 정말 처음이네요. 자요, 아!”
“제가 알아서…….”
야혼의 손을 뿌리치려던 고명지가 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벌렸다. 손과 손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기이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만 것이다.
“내가 왜……?”
“그러니까 그때 정파의 인물과 마도의 인물이 끼어들었죠. 남천악, 유마혼, 냉소소, 당가려, 그리고 주려화까지 그런데
주려화 그년…….”
“말조심하세요. 그년이라뇨!”
‘오잉? 이러면 안 되는데? 주려화 그년도 북경출신인가?.’
대뜸 차가워진 고명지의 목소리에 야혼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재빨리 고명지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날 선 목소리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는 듯이.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7)- 색색만화공(2)
‘후-우! 큰일 날 뻔했네.’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 고명지의 얼굴을 확인한 야혼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왜 이리 목이 마르지?”
낮게 헛기침을 하며 야혼은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제가 따르지요. 아-!”
손등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에 절로 신음이 터졌다. 단순히 서로 손이 맞닿았을 뿐인데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이쪽에 앉아서 이야기하면 안될까요? 소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 눈이 부셔서…….”
“제가 그렇게……. 알았사옵니다, 공자님.”
얼굴이 잔뜩 붉어진 고명지가 술병을 든 채 야혼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한잔하시겠소.”
환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고명지 앞으로 제 술잔을 내밀었다.
“그러지…… 요. 그런데 그 다음은…….”
‘햐! 이년 되게 강하네. 처녀도 아닌 것이 이 정도로 버티다니. 하여간 대단한 정신력이다. 하지만 너는 끝났어 요년아.’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다시 십만대산 이야기를 시작했다. 흠주현을 오를 때부터 시작하여 중간 중간 있었던
사건까지,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바삐 움직였다.
음식을 집어 고명지의 입안에 넣어 주며 입술을 만지고, 때로는 어깨를 쓰다듬는 듯, 사소한 핑계를 만들어 그녀의 몸을
끊임없이 더듬었다.
어느 순간부터 고명지의 입에서 가는 비음이 흘러나왔다. 단순한 비음이 아니었다. 욕정, 바로 쾌락에 겨워 지르는 신음이었던
것이다.
고명지의 얼굴을 확인한 야혼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렸다. 이번에 공략해야 할 곳은 그녀의
허벅지였다.
“그곳은 혈림(血林)이란 곳이었소. 얼마나 무섭던지. 그녀들이 없었다면 결코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오.”
“하악…….”
스멀거리며 파고드는 손길에 고명지가 참지 못하고 뜨거운 비음을 토해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었음에도 야혼의 손길은 쉬지 않았다. 고명지의 양쪽 허벅지를 끊임없이 자극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고문이었다.
이미 눈동자가 풀려버린 고명지는 야혼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연신 몸을 파르르 떨며 그 이상의 행위를 갈구하듯 몸을
밀착시켰다.
“그곳이 성모궁이었소.”
와락!
마지막 말을 마친 야혼이 고명지의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공자 제발, 제발.”
“고소저 말하시오. 제가 어떻게 해드릴까요.”
“저기 침대로…….”
“알았소이다. 이건 고소저가 원해서 이루어진 일이오. 절대, 절대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오. 약속해 줄 수 있겠소?”
“그럼요, 약속할게요. 약속해요.”
“그럼 증거를 남겨주시오. 저기 있는 종이에 간단하게 써주시면 됩니다. 인장도 찍어주시고요.”
이미 앞섶을 헤친 손을 유혹적으로 놀리며 고명지의 귓전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알았어요. 지금 바로 쓸게요.”
“고맙소, 고소저.”
‘양지 이년, 잘 들어라. 절대 이 야혼이 원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오늘밤 너는 고생 좀 할거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뭔지 아냐. 남 하는 거 구경하는 거다. 처녀면 몰라도 너 같이 경험 있는 년들은  결코 견디기 힘든
유혹이지.’
옆방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린 야혼이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 대가는 전부 지불했고, 본격적으로 몸이나 풀어볼까? 근데 아직 시집도 안 간 년인데 언놈이 벌써 침을 발랐나?
하기야 이 정도로 출세하려면 실력만으로 안 되겠지.’
고명지를 침대로 이끈 야혼이 거칠게 옷을 벗겨나갔다. 색색만화공(色色滿花功), 성모궁에서 얻었던 색공 중 가장 열심히
익혔던 그 무공이 첫선을 보인 것이다.
“고명지 넌,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거야. 길거리에서부터 벌써 색색만화공을 끌어올리고 있었거든.”
발가벗은 채 애걸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고명지는 아랑곳없이, 혼잣말을 하며 씩 웃은 야혼이 느리게 허리춤을 풀어냈다.
습관, 2년 가까이 십만대산에서 나체로 살았지만 과거의 습관은 여전했다.
원시림을 탈출한 야혼이 문명사회에 발을 들이며 한 첫 일은 동창 첩형인 고명지를 접수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청화루 별채에서 째지는 듯한 고함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 없이 머리를 풀어헤친 고명지가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살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없었다. 주천상과 십만대산의 정보를 캐기 위해 데려왔던 돼지 같은 놈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보다 더 기절할 노릇은 그놈과 간밤 격렬한 정사를 나눴다는 사실이었다.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통증은 물론이고
흐트러진 차림새가 그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이놈! 감히 이 고명지를 희롱하다니……. 네 놈을 잡아서…….”
두 손을 움켜쥐고 살기를 뿌려대던 고명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놈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떠오를 듯했는데 막상 생각해내려니 그려지지가 않았다.
기절할 노릇이었다. 분명 자신의 입으로 돼지새끼라 하였는데,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색색만화공(色色滿花功)!”
문득 떠오른 사실에 울부짖듯 소리를 질렀다. 관계를 갖고 나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무공은 색색만화공이란 색공밖에 없었다.
무공을 익히면서 서책에서만 보았던 내용인데 설마하니 사실일 줄이야.
실제 경험을 하고 났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간밤에 놈과 나눴던 대화는 대부분 기억이 나는데 얼굴만은 오리무중이었다.
“밖에 있지 말고 들어와라.”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화풀이라도 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놈 얼굴 기억하느냐?”
인사도 받지 않고 대뜸 양지를 향해 소리쳤다. 확인 차 묻는 말이었다. 그러나 양지 또한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당혹스럽다는 듯이.
“애써 떠올리려 하지 마라.”
굳은 얼굴을 푼 고명지는 끝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천하의 동창 제일 첩형이 처음 보는 야인에게
당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네놈은 실수했다. 주머니를 가져가지 말았어야지.”
놈과 함께 사라진 돈주머니를 떠올린 고명지가 희미한 살소를 머금었다. 하남성과 야혼이란 단서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자신의 돈주머니를 가져간 것이었다.
“양지, 쫓아라.”
“죽일까요?”
“네 실력으로?”
고명지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녀가 파악한 야혼의 실력은 상당했다. 양지의 실력으로 그를 추적할 수 있을는지 그것도
의문일 판이데.
“따라가서 살림이나 안 차리면 다행이다. 주천상과 연루된 자이니 감시만 해라. 10일에 한번씩 보고하는 것 잊지 말고.”
“걱정마세요 첩형언니. 추적은 제 전문이잖아요.”
싱긋 웃은 양지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이것도 가져가라. 그건 함부로 굴리면 안 되는 물건이니 각별히 조심해서 사용해라. 보고서 보낼 때만 써야한다.”
밖으로 나가는 양지를 향해 고명지가 제 신분을 증명하는 명패를 던졌다.
“알았어요 첩형 언니.”
“대담한 놈! 이 고명지의 신분을 알고도 그런 짓을 하다니……. 하지만 실물의 느낌은 최고였다. 내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간밤의 영상에 얼굴을 붉혔다. 놈의 몸에 광적으로 매달리며 짐승처럼 울부짖기까지 했으니.
“명심해라 놈! 내 비록 처녀는 아니지만 남자의 몸을 받아들인 건 네 놈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을……. 죽일지 살릴지는
잡아놓고 결정하겠다. 나쁜 놈! ……무슨 일이냐?”
밖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인기척에 고명지가 소리를 질렀다.
“접니다, 첩형!”
화사한 복장의 중년 여인이 미소를 머금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 안가의 책임자인 수운부인이었다.
“왜 얼굴이 그 모양이야?”
“아닙니다, 첩형. 따로 미행을 붙일까하고요.”
재빨리 정색을 한 수운부인이 조심스레 고명지의 의향을 떠보았다. 그녀 또한 간밤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불편한 점이 없나
여쭙기 위해 고명지의 방으로 왔다가, 안에서 들려온 소리에 질겁을 하고 자리를 피했다.
동창의 지시로 화류계에 몸담은 지 20년이 되었지만 그런 광적인 소리는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내심 고명지가 부럽기까지 했다.
“그럴 필요 없어. 감시하는덴 차라리 양지 같은 애가 더 나아. 들켜도 뒤탈이 없잖아.”
“알겠습니다.”
“수운!”
“네, 첩형!”
“알지?”
“저도 여잡니다, 첩형.”
“고마워! 먹을 것 좀 줘. 배고파 죽겠다.”
안도의 미소를 짓던 고명지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아랫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음식을 찾는 경우는
처음이지 싶었다.
간밤의 격렬한 정사가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없을 터였다. 야혼의 비대한 몸뚱이가 떠오르자 왈칵 짜증이 밀려왔다.
“나쁜 놈!”
고명지가 분에 겨워 짓씹듯 이를 갈았다.
“나쁜년! 그렇다고 그 중요한 순간에 딴 놈을 불러?”
기분 나쁜 건 고명지만이 아니었다. 야혼 또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해치웠을 때 보이던 야혼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똥밟은 얼굴로 연신 투덜거렸다.
간밤에 나눴던 고명지와의 정사 때문이었다. 바지만 까내린 채 한참 몰두할 때는 좋았는데 절정의 순간에 고명지가 다른 사내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잘못 들었나 싶어 또 한번 지극정성으로 달궈보았지만 다시 들려온 절정의 음성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열 받아서 한번 더
했다. 그런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아무말 안하고 신음이나 크게 질렀더라면 기분이 이렇게 더럽진 않을 터였다.
“들인 공이 얼만데……. 뭐 위금충(偉金忠)이라고? 이년아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밤일의 가장 기본도 못 지키는 년이.
가만 위금충(偉金忠)? 어디서 들어본 놈씨 같은데…….”
위금충이란 소리를 구시렁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은 아닌 듯했다. 연거푸 위금충을 되뇌던 야혼이 포기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정계에 있는 놈들 중 한 명이 분명할 터였다.
고명지를 출세시켜준 장본인.
“고맙게 잘 쓰마. 봉사한 대가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솔직히 나보다는 네가 훨씬 좋아했으니까, 대가 지불은 당연한
거다.”
노란 색 주머니를 꺼내 코에 대고 킁킁거리며 야혼이 분에 겨워 소리쳤다.
“아이고 도망치느라 볼일도 못 봤네.”
이윽고 한적한 숲을 발견한 야혼이 속도를 줄이며 장소를 살폈다. 이내 마땅한 장소를 발견하고는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씨팔! 이제는 손이 남네, 남아.”
냉소소와 당가려가 동시에 행해준 용봉환락무 때문에 가장 덕을 본 게 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 전 만해도 물에 대고 엉덩이를 흔들던지 아니면 넝쿨을 걸쳐놓고 뒤를 닦아야 했다. 그도 안 되면 마를 때까지 기다렸던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한데 지금은 가능했다. 냉소소와 당가려가 용봉환락무를 시전해 준 다음부터 급속히 살이 빠지며 적어도 인간 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항문까지 손이 닿았음은 물론이고 지금은 한 뺨 정도가 남았다.
“기분 좋아지니까 자꾸만 싸고 싶잖아.”
자신이 만들어놓은 작품을 대견하다는 듯 쳐다본 야혼이 이내 몸을 날려 사라졌다.
인간으로 돌아온 몸이 대견하기 이를 데 없다는 양, 야혼은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 흔적을 이용해 자신을
추격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야혼이 처음 흔적을 남겼던 곳에 양지가 도착한 때는 그가 떠난 지 하루가 지난 오후 참이었다.
“킁킁!”
땅속 깊이 박힌 발자국을 확인한 양지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나 야혼이 머물다 간 흔적은 볼일 본
곳밖에 없으니 그 향기 말고는 다른 냄새가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양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딱 걸렸어.”
한참을 킁킁거리던 양지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바로 야혼이 가져갔던 주머니에서 풍겨나는 냄새였다. 고명지가 그곳에
천리추향(千里追香)을 뿌려두었던 것이다.
천리추향의 냄새를 확인했음에도 양지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른 찾는 것이라도 있는 양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고
다녔다.
“몸에 비해선 별로 굵지는 않네? 어디 보자.”
야혼이 버리고 간 물건을 자세히 살피던 양지가 이번에는 소변이 떨어졌을 법한 부근의 흙을 한 움큼 집어들어 코로 가져갔다.
“아무리 추적술에 필요하다지만 이 짓은 정말 싫어.”
냄새를 맡던 흙을 조금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거의 한 줌이나 되는 흙을
입안으로 몽땅 털어 넣었다.
“퉷퉤!”
한참 동안 입을 오물거리던 양지가 침과 함께 흙을 토해냈다.
“나쁜 새끼!”
비위가 뒤틀린다는 듯 욕설을 뱉어낸 양지가 몸을 날렸다.
그 뒤로도 몇 차례 욕설이 흘러나왔고 그녀의 신형은 하남성 개봉으로 향했다.
[윗글]  [아랫글]   [목록보기]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8)- 그러게 생긴 대로 살 일이지 무공은 무슨(1)
그러게 생긴 대로 살 일이지 무공은 무슨.
“소문이 정말이었던 모양이네?”
양지가 배설물을 찾아가며 열심히 야혼의 뒤를 쫓고 있던 그 시간, 개봉에 도착한 야혼은 서대시전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뭔가 고민이 있는 듯 줄기차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오문이 멸망하다니……. 참으로 묘한 일일세. 그 거지 발싸개 같은 것들을, 줘도 안 가지겠구먼.”
그랬다. 하남성에 들어와 간단한 요기를 위해 우연히 들렀던 객잔에서 들은 내용이었다. 1년 전에 하오문이 멸망했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도,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하오문을 가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하오비동까지 들어가 보지
않았던가.
하오문을 없애고 얻을 이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 때문에 문파를 개설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이름만 달고
있는 곳이 하오문인데.
“에라, 썅! 고민은 무슨. 그 새끼들 없으면 나야 더 좋지. 괜히 비급만 뭐 빠지게 들고 왔네.”
등에 맨 조그마한 보자기를 힐끔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강웅삼에게서 느낀 인간적인 면 때문에 들고 온 비급인데 하오밀문이
멸문했다니 허탈했다.
“그들이 안 도와주고 그냥 발랐나? 아니면……? 한번 가보기나 하자.”
하오비동에서 만났던 5명 을 두고 한 말이었다. 여호치의 말을 빌자면 상당한 무공고수라 하였으니 그들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대시전으로 가려던 마음을 바꿔 하오밀문이 있던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쿡! 잘했다. 이곳은 없어졌어야 했어. 누군지 정말 잘했다. 황하(黃河)도 내려다보이고 좋네.”
아무것도 없었다. 초라한 건물이었지만 하오밀문이란 편액이 걸려있던 대문을 비롯하여 모든 건물이 전소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불탄 흔적만이 이곳에 하오밀문의 총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씨팔! 그래도 영 거시기하네.”
멀리 아래쪽 황하를 쳐다보던 야혼이 이내 몸을 돌렸다. 진지한 얼굴로 속가제자를 하라던 강웅삼의 얼굴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된다며 펄펄뛰던 마석흠. 같잖아서 내심 비웃었는데,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터덜거리며 서대시전에 도착했으나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시전 가운데서 철탁을 두드리던 추기영도 없고 한쪽 구석에서
차력술을 하던 태웅도 없었다.
떠나기 전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음에도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에구! 일단 집구석에 가서 좀 쉬자. 이번에는 좌판도 좀 그럴싸하게 만들어야겠다.”
주변을 휘익 둘러본 야혼이 2년 동안 비워두었던 집을 향했다.
그곳 역시 마찬가지일터이지만 그래도 유일한 쉴 곳은 집 밖에 없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으나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2년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몸이 불었으니 알아본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하지만 과거의 모습이 조금은 남아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일단 청소부터…….”
문 쪽을 향해 잠시 시선을 주던 야혼이 본격적으로 집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혼자 생활하기에는 넓은 감이 없진 않지만 그냥
쓰기로 했다.
“요홉!”
방문을 활짝 열어둔 채 안쪽을 향해 두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순간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방에 깔려있던 먼지들이
한꺼번에 뭉치더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가랏!”
공을 굴리듯 둥그렇게 모양을 만든 야혼이 그 덩어리를 문 너머로 쾌속하게 쏘아보냈다.
“아앗!”
뾰족한 음성과 함께 왜소한 인영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야혼의 뒤를 밟아온 양지였다.
그러나 야혼의 공격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조그마한 먼지덩어리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무섭게 쏘아졌다.
“이야…….”
등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아내려던 양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쿵!
온통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쓴 양지의 신형이 맥없이 떨어졌다.
“나는 누구에게 죄지은 적도 없는데……. 양지, 신분을 밝혀라!”
원망의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양지를 향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뒤를 쫓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하남성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몇 번에 걸쳐 확인한 끝에 고명지와 같이 있었던 양지임을 알아채고는 짐짓 모른 체 이곳으로 끌고 왔던 것이다.
“말을 못하겠다, 이거지?”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양지(梁知) 앞으로 다가앉았다.
바짝 다가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양지는 암팡진 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나는 말이야 고문의 도사야. 너는 전부 말하게 되어있다고.”
“흥! 아무리 해봐라. 내 입에서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는지.”
이미 미행을 들켰다는 것을 알아차린 양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고문이라면 신물나도록 겪은 몸이었다. 남자를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조금이나마 편하게 훈련을 받기 위해 몸을 상납하곤 했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덕에 동창
첩형의 심복이 되는 기회를 얻었으니까.
“오잉! 그래? 그럼 시작해 볼까.”
“뭐 하는 짓이냐?”
불쑥 앞섶을 헤치는 야혼의 행동에 기겁한 양지가 해쓱해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우선은 너를 발가벗겨 서대시전에 내다 돌리려고. 서대시전이 어디냐면 아까 오다가 봤지. 내가 잠시 멈춰 섰던 곳 말야.
별로 알고 싶은 건 없어. 나이, 이름, 가족관계, 그리고 왜 날 따라왔는지 그 정도만 대.”
재빨리 양지의 옷고름을 풀어낸 야혼이 활짝 펼쳐냈다.
“에게, 발육부진이네? 엉덩이를 봤을 땐 아니더니…….”
앙증스런 가슴을 손끝으로 툭 튕기며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그것만 말하면 되요?”
“그럼. 네가 아는 게 있기나 하냐? 고명지가 심심해서 데리고 다니는 애일 뿐인데.”
고명지를 향해 첩형 언니 할 때부터 이미 알아보았다. 훌륭한 집안에서 많은 교육을 받은 애라면 결코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빨리 말햇! 말 안 하면 아래쪽도 벗긴다.”
“18살, 양지, 엄마와 동생 6명. 첩형언니가 감시하라 해서.”
“그러니까 네 한 몸 바쳐 가족을 먹여 살린다 이 말이지?”
“네…….”
“그럼 나를 감시해야하니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겠네?”
“대신 보고를 해야해요.”
“그럼 그렇게 해. 이거 가지고 나가서 살림이나 좀 사와. 2년 동안 비워둔 곳이니까. 전부 새로 바꿔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검이 필요 없으니까 풀러놓고.”
“저 도망가면 어쩌려고요?”
“도망?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니 더 좋잖아. 알아서 해. 고명지에게 주리를 틀리던, 가족을 굶기던지. 나 같으면 이곳에서
감시하겠다. 나갈 때 세수는 하고 가라.”
양지의 혈도를 풀어준 야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비워둔 집이라 이곳저곳 손 볼 데가 많았다. 서둘러야만 저녁나절에나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뭐해! 빨리 안 다녀오고. 이불도 사야할 거다. 요리할 줄 알면 음식재료도 좀 사오고.”
“네? 네!”
멍하니 서 있던 양지가 대문 밖으로 나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망가라고 풀어주는 건지 아니면 다른 수작을 부린
건지.
“바로 첩형 언니에게 가버릴까? 아니, 또 가면 뭐해.”
야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고명지야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이라 주리를 틀지는 않겠지만 딱히 가서 할 일이 없었다.
어쩌면 다시 감시하라고 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감시하라 했으니까 감시나 하자.”
손에 들린 주머니를 쳐다보며 빙긋 미소를 짓던 양지가 서대시전쪽으로 몸을 날렸다.
쿵! 딱딱! 딱! 쿵!
“아저씨, 이것 좀 받아줘요.”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뽑고 집 안 구석구석을 손보고 있을 참에 양지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도망갈 줄 알았더니 안 갔네? 그런데 이게 다 뭐냐?”
“뭐긴요. 전부 살림이지. 근데 뭐가 그리 비싸요. 그건 그렇고 여기서 감시하기로 했어요. 가봐야 다시 올 것 같아서.”
양지가 사온 물건은 엄청났다. 이부자리만 4채에, 집안 살림까지 거의 한 수레 분량을 몽땅 사들고 왔던 것이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임마! 가져다 달라하지 그걸 혼자 들고 오냐?”
“에이, 내 물건을 어떻게 남에게 맡겨요. 무겁더라도 직접 들고 와 야죠.”
“야 이년아. 근데 왜 이불은 4채야. 우리 두 사람 사는데.”
“그게…….”
야혼의 호통에 양지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무심결에 4채를 주문하고 만 것이다. 나중에 다시 가보았지만 이불집 주인이
환전해 주지 않자 그냥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너 이번이 처음이지. 고명지 따라나온 게.”
“네…….”
“어이그! 내가 미쳐. 너에게 이불 판 놈 집이 어디야. 혹시 눈 작고 돼지 같은 놈 아냐?”
“맞아요. 아저씨하고 닮은 것 같아서 들어갔더니만…….”
“거기서 내가 왜 나와. 그놈이 나하고 비교가 되냐? 어쨌든 여기 2 채는 엄마와 동생생각이 나서 샀다 이거지?”
양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전해 달라고 고집을 부렸더라면 분명 바꿀 수 있었을 터이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주인이 난색을 표하자 실랑이도 하지 않고 그냥 나와버렸던 것이다.
“설마 나머지도 식구들 것까지 준비하진 않았지?”
“나머진 우리 둘 것만 준비했어요.”
“좋아. 일단 안으로 넣어라. 이왕 사온 것 써야지 별수 있냐.”
“알았어요, 아저씨. 우선 방부터 닦을 테니까 걸레나 좀 짜주세요.”
“야! 내가 어찌 아저씨냐! 앙? 이 얼굴이 아저씨로 보이냐?”
“……!”
당연한 걸 뭣하러 묻냐, 는 얼굴로 양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니미럴!”
야혼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졌다. 양지의 눈에 아저씨로 비쳤다면 다른 사람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결국 앞으로 여자
후리는 작업은 물 건너갔다는 의미였다. 물론 색공을 이용하면 되겠지만, 그건 체질에 맞지 않았다. 모름지기 작업이란 끌고
당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색공에서는 전혀 그런 묘미가 없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거의 밤을 세워 집안 대 청소를 마친 야혼은 다음날 저녁 무렵, 양지를 대동하고 서대시전으로 나갔다.
“이곳이 옛날에 내가 일했던 곳이고, 앞으론 너와 내가 일할 곳이다.”
“근데 아저씬 무슨 일을 하는데요?”
“오늘은 처음이니까 구경이나 해! 가만히 쳐다보면 네가 할 일이 뭔지 알게 되니까.”
여전히 아저씨라 부르는 양지에게 눈을 부라린 야혼이 2년 전 자신의 자리였던 곳에 좌판을 설치했다.
“아저씨,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어요. 모두들 아저씨 눈치를 보는 것 같아요.”
그랬다. 시끌벅적하던 서대시전에 느닷없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야혼이 좌판을 설치하면서부터 찾아온 고요는 그가 좌판을 전부
설치하고 사방을 둘러볼 때까지 이어졌다. 대부분의 상인들이 이쪽을 주시하며 서로 수군대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씨익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자 보세요. 이놈을 찾는 겁니다. 흰색도 아니고 청빈루의 월향(月香)이의 그곳같이 새카만 이놈을 찾아내면 걸었던 돈의 세
배를 드립니다. 자 골라보세요.”
야혼의 고함소리가 터지자마자 잠시 멍한 얼굴로 야혼을 뚫어지게 살피던 상인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바로 그
외침소리였던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한번도 들려오지 않았던 그 대사가 서대시전에 울려 퍼졌다.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사람이 달라졌다하여 무려 5년 간 들었던 그 목소리를 잊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떠나버리고 없는 월향이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 놈이 분명했다.
서대시전의 개차반인 쌍면연작 야혼.
“자네……. 야혼 맞는가?”
“어이! 사 영감 오랜만이네? 안 보던 사이에 더 젊어졌구먼. 젊은 계집년이라도 구한 게요?”
눈을 가늘게 모은 채 다가온 노인은 그의 좌판 건너편에서 고깃집을 하는 이였다. 야혼이 도살장에 다녔기에 그나마 친분이
돈독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정말이구먼, 정말 자네가 돌아왔어. 그동안 고생 많았지. 정말 잘 왔네.”
“영감! 인사는 나중에 하고 돼지머리 있으면 하나 가져오쇼.”
“돼지머리는 왜?”
“2년만에 재 개업인데 고사는 지내야 할 것 아뇨.”
“개업?”
“이 영감이 왜 이러나. 이따 일 끝나고 계산하면 될 거 아뇨!”
“그럼세. 내 얼른 다녀옴세.”
의아한 얼굴로 야혼의 얼굴을 쳐다보던 사 영감이 이내 발길을 돌렸다. 이미 야혼이 하려는 일을 짐작했던 터였다.
“자 골라, 골라. 월향이 년 그곳과 같은 놈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야혼이 장담합니다. 무조건 세 배를 드립니다. 이
야-혼이 장담한다니까!”
야혼이란 이름을 힘주어 말하며 더욱 크게 고함을 질렀다. 마치 서대시전 모든 장사치들 들으란 듯이.
사 영감이 돼지머리 하나를 가져다 놓자 야혼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아예 내공까지 실어 사방에 대고 고함을 내질렀다.
“어이! 이불 집 쥐눈, 우리애가 오늘 그곳에서 이불 4채를 샀다던데. 싸게 줘서 고마워. 그리고 정씨 그 집에서도
가재도구 샀다고 하대?  정말 고마워.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집으로 들어 온 양지 년이 바로 졸도했어.”
서대시전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야혼의 좌판 옆에 돼지머리가 자리하자마자 이곳저곳에서 상인들이 몰려와,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곤 잊지 않는 말이 있었다.
“야혼 정말 잘 돌아왔네. 그동안 정말 보고싶었네.”
이 말이었다. 야혼의 손을 흔들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야혼이 호명했던 이불 집 쥐눈과 가재도구를 팔았던 정씨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아저씨, 완전히 나쁜 놈이었네.”
죽을상을 하며 돼지머리 앞에 돈을 내려놓는 상인들을 발견한 양지가 야혼을 노려보며 말했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자신은
일초지적도 안 되는 엄청난 무공을 소유한 사람이 야바위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보고를 한단 말인가.
“이년아! 세상은 이런 거야. 서로 돕고 살아가는 거지. 저들 얼굴 좀 봐라. 얼마나 좋아하냐. 나에게 돈을 보태주고
즐거워하는 얼굴이 안 뵈냐?”
“저게 어디…….”
“뚝! 이년이 어디서 말대꾸야. 돈이나 잘 봐. 제일 적게 내는 놈은 꼭 기억해둬 알았어?”
그날 밤 야혼은 장사를 하지 않았다. 오직 상인들이 내놓는 전의 개수와 그 사람의 얼굴만 번갈아 볼뿐이었다.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고 말이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49)- 2권 마지막입니다. 그러게 생긴대로 살일이지 무공은 무슨(2)
‘개차반 야혼이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서대시전에 급속하게 퍼져나간 소문이었다.
아울러 그가 떠난 후 제 자리에 소금 뿌렸던 놈들에게 복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삽시간에 돌았다.
1년 전에 하오대문이 멸망당한 이래 가장 큰 소문은 야혼의 귀환이었다.
“아저씨, 목욕물 데워났어요.”
“나는 양이 좀 많아야 하는데?”
“걱정 마세요. 돼지 한 마리는 충분히 삶을 정도로 끓였으니까.”
“커억! 너?”
강적이었다. 양지의 입 또한 야혼만큼이나 걸었다. 단지 고명지와 같이 다니면서 본성이 잠시 숨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글구 촌스럽게 야혼이 뭐예요. 어떻게 그 몸을 해 가지고 밤의 혼이라고 한대요? 야돈(夜豚)이라면 모를까?”
한번 터진 양지의 입은 멈출 줄 몰랐다. 상전인 고명지를 꿀꺽했으니 그의 색에 대해선 인정해야 했지만 여전히 그날 밤의
사건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 또한 상당수의 남자를 겪어 보았다. 하지만 결단코 야혼은 여자들이 좋아할 외모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고명지가 질렀던 괴성은…….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양지가 네 본명이 아니잖아. 지(知)라는 이름 고명지가 지어줬지?”
“헤엑!”
야혼의 옷을 벗겨내던 양지가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름 맞춰보리? 너 첫째라 했지.”
“양지가 네 이름 맞다…….”
“양일녀(梁一女)!”
“넵!”
갑작스런 호명 소리에 깜짝 놀란 양지가 부동자세를 취하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동창에서 훈련받을 때 무수히 많이 들었던 그
이름. 첫딸이고 계집이라 하여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양지라는 이름은 야혼의 말대로 고명지가 이름이 촌스럽다며 자신의 끝자를 따서 지어준 것이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앞으로 일녀라 부를까?”
“몸이나 똑바로 해요. 옷도 혼자 못 벗으면서.”
분에 겨운 듯 툴툴거린 양지가 사납게 야혼의 옷을 잡아챘다. 지금이야 누구도 자신을 일녀라 부르지 못하지만 불과 반 년 전
만해도 동창 훈련교두 대부분이 양일녀를 부르며 희롱했었다.
일녀, 가족이 불러줄 때는,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 정겨웠지만 동창 교두들이 부를 땐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 때문에 가장
싫어하는 말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근데 이게 사람 몸뚱이 맞아요? 온몸에 무슨 칼자국이 이렇게 많담.”
“도살장에서 탈출한 돼지가 오죽하겠냐. 이 정도는 약과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바지 벗게 몸이나 돌려요.”
괜한걸 물었다 싶어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 또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무수한
흉터들은 결코 평탄하지 못했던 야혼의 과거를 보는 듯했다.
“니가 마누라냐? 왜 내 바지를 벗겨?”
“아이고. 혼자서 잘도 벗겠다. 일상생활이 무공이랑 같은 줄 아세요? 혹시 여기 있는 요대 보이기나 해요?”
“알았다 이년아. 그냥 해주면 되지 뭔 말이 그리 많냐. 그러니까 수염이 안 나지.”
“할말 없으니까…….”
양지의 말대로 야혼은 할말이 없었다. 허리가 어디인지 구분이 안가는 몸이고 보니 요대가 제대로 걸려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남들은 허리에 걸려있는 요대가 엉덩이에 걸려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양지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어이구 더러워. 언제 목욕을 했기에 때가 바가지로 나오냐. 까마귀가 울고 가겠네. 또 등판은 왜 이리 넓어?”
찰싹!
“뭐해요. 팔 들어올려야죠.”
“그게 신호냐?”
“어렸을 때 엄마가 목욕한번도 안 시켜 줬어요?”
“아직 그런걸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럼 다시 기억을 떠올려 봐요.”
“그래……. 기억이 있다면 떠오르겠지. 이렇게 때까지 밀어주는데 기억이 안 난다면 사람머리가 아니지.”
하지만, 누이에 대한 추억은 있어도 어머니는 지워지고 없다. 누이와 만난 처음 만난 건 6살 때였다. 어머니와 같이
끌려갔던 곳에서 13살이던 누이를 만났다. 그녀와 같이 딱 한번 멱을 감았었다. 가족이라는 존재와 맨살을 부딪쳐본 유일한
기억. 하지만 잊었다. 아니 지워버렸다. 영원히, 다시는 떠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그렇게 약속했다.
“일어서요.”
양지의 말이 떨어지자 굼뜨게 물통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섰다. 꼭두각시처럼.
문득 야혼의 행동이 이상하다 여긴 양지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때만 밀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눈칫밥을
얻어먹은 덕택에 말을 잘못 꺼냈다는 사실을 이내 알아차렸다.
“물건은 대단하네.”
“응? 뭐라고 했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야혼이 양지를 쳐다보았다. 마치 갓난아이를 씻기는 엄마처럼 사타구니 주변을 뽀독뽀독 문질러대고
있었다.
“다 했어요. 이쪽보고 똑바로 서요.”
촤-아-악!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야혼이 순순히 돌아서자 한쪽에 준비해 놓은 물을 사정없이 끼얹었다. 목욕의 마지막 마무리였다.
몸을 닦고 방으로 돌아온 야혼은 또 한번 놀랐다. 침대 위에 얌전히 개켜진 자리옷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감시병이 별 짓을 다하는구먼.”
어이없는 듯 미소를 지은 야혼이 자리옷을 걸쳤다. 양지 또한 고명지에게 배운 것일 뿐 자리옷은 구경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어떤 천을 선택해야할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게 분명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 입장이었으리라. 이런 옷을 사러갔다면 당연히
고민했을 것이다.
“역시 집이 최고야.”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지자 창문 틈으로 희미한 달빛이 비춰들었다. 양지 때문에 생각하지 말아야 할 영상들이 떠올라 기분이
착잡했다.
드르륵!
“왜?”
“감시병이 따로 자는 것 봤어요? 돼지와 같이 자는 게 좀 더럽기는 하지만 일이 일이니 만큼 참아야죠.”
“핑계 달지 말고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 이 야혼은 말이다. 여자는 절대 혼자 안 재우는 사람이거든. 그러고 보니 너도 한
인물 하는구나.”
양지도 목욕을 하고 나왔는지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상큼한 미소까지. 짧게 자른 머리와 검게 그을린 피부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 그녀 또한 밉상은 아니었다.
“괜히 아부하지 마세요. 국물도 없으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임무수행이라고요. 임무수행.”
“근데, 어째 자리옷 색깔이 똑 같은 것 같다.”
“그거야 귀찮아서 그런 거라고요.”
야혼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양지가 재빨리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자리옷이라는 걸 보기는 했지만 사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종류가 많을지는 생각도 못했다.
이것저것 만져보다 가장 부드러운 느낌이 나는 천이 잡히자 셈을 치러버렸다.
“아저씨!”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다른 게 아니고. 이 몸을 가지고 이제는 여자 후리는 짓도 못할 것 아네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소개비 받으러 갔을 때 언니들이 그러더만.”
“그래서 한번 주려고?”
“까짓 뭐 어때요. 원래 우리를 키운 목적이 그건데. 적하고 몸을 섞는 건 가장 쉬운 일에 속하는 걸요, 뭘. 심지어는
고관의 첩으로 들어가서 기약 없이 사는 애들도 있어요.”
“그래서 무공이 그리 약했던 게냐?.”
“우린 무공보다 추적술을 더 열심히 배워요. 또 방중술하고.”
“너는 가슴이 작아서 별로 인기가 없었겠다.”
“아저씨도 가슴 작은 여자 안 좋아해요?”
“가슴 작은 여자 좋아하는 남자는 별로 없다.”
“우이씨. 지들도 물건은 쥐알만한 것들이. 밝히기는…….”
“자자! 내일 또 일나가야지.”
“팔!”
“으응?”
팔이라는 양지의 말에 문득 냉소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난히 오른 팔을 탐했던 그녀. 잘살면 좋을 텐데.
“잘 살겠지. 그 얼굴에 그 정도 무공이면…….”
“2년만에 돌아와서 생소하긴 하겠지만 그만 자요, 뚱보 아저씨.”
“그래 자자! 자야지.”
이내 두 사람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과거와 다를 바 없이 평이한 일상이 지속되었다. 바람잡이 일을 시킨 야혼에 대해 처음엔 불평불만을 쏟아내던 양지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제법 손발이 맞았다.
양지의 일은 간단했다. 야혼이 패를 돌릴 때 돈을 걸어 한번씩 따주면 그걸로 그녀의 소임은 끝난다. 혹가다 소개비를 받아올
때 또한 그녀가 나서서 일을 하곤 했다. 과거 태웅의 일을 지금은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이었다.
“뚱띵이 아저씨. 이건 어떻게 해야되죠?”
잔뜩 흐린 하늘 탓인지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한가한 저녁 무렵, 양지가 대뜸 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 손에 책자가 한 권 들려있었다. 성모궁에서 야혼이 얻었던 비급중의 하나였다. 대라수미혜검이라는 아미파
검법을 더욱 강하게 변형시킨 대마수미혜검(大魔須彌慧劒)이란 비급이었다.
야혼이 보기에도 좀 섬뜩한 면이 있었으나 여자인 양지가 익히기에는 가장 어울릴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내주었다.
“그거? 어디 보자. 이건 손목을 이용해서 해야하는 거다. 팔 전체를 움직이면 속도가 나오지 않아 변식이 생기지 않지. 비
오겠는데 그만 들어갈까?”
“뚱띵이 아저씨! 돈 좀 벌었다고 벌써부터 일하기 싫어졌어요? 사람은 말이에요, 있을 때 더 열심히 벌어야 해요. 그러니
군말 말고 자리 지켜요. 뭐해요! 월향이와 난향이를 불러야지.”
“흥이 안 나서 그래. 옛날이 좋았지. 저기에는 보현보살이 있었고, 또 저기에는 곰 새끼가 있었거든. 그놈들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났었는데…….”
딱!
“그래서 도살장에도 안온 게냐, 이놈아!”
“어? 영감이 왔네? 언제 오나 했지. 이곳에 도착한지가 언젠데 이제야 나타나요!”
“이놈아! 놀러갔다 온 네 녀석이 찾아와야지, 노인네가 먼저 찾아오기를 기다려?”
야혼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나무라는 이정의 얼굴에 반가움이 잔뜩 묻어 났다. 소식이 없어 무슨 일을 당했나 싶었는데 요상스런
몰골이 되었지만 돌아오긴 한 것이다. 야혼의 소식을 듣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자 결국 자신이 먼저 나온
것이었다.
“어차피 이곳에 있으면 볼 거 아뇨. 도살장에 박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자리잡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고요.”
“따라와라. 네놈이 만날 사람이 있다.”
“만날 사람? 도살장에 영감 말고 누가 있다고…….”
야혼이 의아한 얼굴로 이정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제 할말만 하고 가버리는 이정이니 자세히 묻지도 못한다.
서둘러 좌판을 치우고 따라나섰다.
“뚱띵이 아저씨, 누구예요?”
“응! 날 돌봐주던 영감. 도축장에 있어.”
“근데 왜 이제가요?”
“귀찮잖아. 이렇게 있으면 찾으러 오는데.”
“훗! 하여간 뚱띵이 아저씨도 알아줘야 해.”
“참! 영감, 이애는 양지인데 원래 이름은 양일녀요.”
“아저씨!”
“임마, 어른한테는 이름 속이는 거 아냐.”
“그래도, 씨이!”
입을 삐죽 내민 양지가 빠른 걸음으로 야혼의 뒤를 따랐다.
“아! 이곳도 정말 오랜만이네.”
검은 동체의 도살장을 바라보던 야혼이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살이 불어 식단에서 고기를 빼 버린 탓에 도축장에 들릴 일은
없었지만 그에게는 고향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맡은 도살장 냄새에 좋았던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정의 방 지하에 은밀하게 만들어진 밀실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하오밀문의 문주인 강웅삼이었다.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없었다. 두 다리와 한 팔, 그리고 오른 쪽 눈이 없었다.
“다녀왔느냐? 나는 네놈이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쿡! 그 지경을 하고도 살고 싶으셨소?”
“이놈아, 문주을 뵈었으면 절을 해야지,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팔다리도 없는데 문주는 무슨……. 임무 완수 했수다. 지도도 그렸고, 원하던 무공비급도 10권이나 가져왔소. 어떤 년의
말을 빌리면 겁천십웅인가 하는 놈들의 무공을 제외하곤 가장 강하다고 합디다. 근데 누굴 줄 거요?”
“나쁜 놈! 아예 못을 박아라. 네 놈이 가진 그 도백철준가 하는 것으로 대못을 박아라 이놈아. ……그 아이들이 떠나면서
구결을 일러주고 갔다. 우리 하오밀문에서 300년간 찾던 그 구결을.”
“결국 그 때문에 화를 당한 거요? 하오밀문을 창건했다는 조사의 무공 때문에?”
“그랬다. 그 아이들이 조사님의 무공을 주면서 파문을 요구하더구나. 어쩔 수 없었다. 고맙게 받을 수밖에…….”
강웅삼의 노안에 눈물이 흘렀다. 한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라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다. 더구나 구약종 조사님의 무공까지 익힌
아이들인데도 하오밀문이 제자니 떠날 수 없는 일이라며 막지도 못했다.
다만 조사님의 무공을 돌려준 그들의 행동을 고맙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제자로 머물러 주면 다행이고 아니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게 하오밀문의 현 주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무공이 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소문이 났는지 하오밀문에서 십전수 구약종의 무공비급을 습득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어느 날 갑자기 복면인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총단에 있던 제자들은 물론이고, 개봉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제자들이 그날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다 죽은 건 아닐 거 아뇨?”
“물론 다 죽지는 않았지. 하지만 머리가 전부 사라졌는데 조직이 유지될 리가 없지 않느냐.”
하오밀문의 강점이자 취약점이었다. 즉 어떤 주루의 주인은 하오밀문의 문도이지만 그가 데리고 있는 아랫사람들은 자신들이
하오밀문의 문도인 줄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서 주인만 제거하게 되면 하오밀문과의 관계는 바로 단절되어 버린다.
적의 공격을 받더라도 완전하게 멸문 당하지 않는다는 강점이 있는 반면에, 지금처럼 머리만 사라지면 제기불능상태 또한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하오밀문이었다.
여전히 많은 문도들이 남아있지만 그들 스스로 하오밀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하오밀문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생겨난 군소 조직들과 싸움을 거쳐 개봉을 비롯한 하남성 유흥가의 주도권을 잡아야만 하다는 것이다.
한 팔만 남은 강웅삼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받아라! 네 녀석이 익힌 것 빼고 나머지 3가지다. 초영완인가 하는 애는 사려가 깊더구나. 너 덕분에 태을건곤심법과
천면만환공을 익혔다고 하더라.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와서 다시 알려주겠다고. 아마 그 무공이 있으면 화를 당할 것을
예견했던 게야.”
“지금 나보고 하오밀문을 이어달라 이 말이오?”
“그럼 어쩌겠냐. 제자가 한 놈밖에 없는데. 싫더라도 맡겨야지.”
“이 영감이 사람 완전 물로 보네. 그 싸가지 없는 새끼들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보내주고, 개뿔도 없는 하오밀문을 나보고
일으켜 달라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당연히 말이 안되지. 하지만 20만냥이면 흥정은 해볼만하지 않겠느냐.”
“20만냥? 그게 청부금액이었소?”
야혼의 말에 강웅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20만냥 그 정도면 하오밀문을 부흥시키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앞두고 있었는데…….
“이 영감 완전 사기꾼이네. 아니? 청부금으로 20만냥이나 받아놓고 우리에겐 딸랑 500냥 준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요?”
“그래서 네 놈 다 준다하잖아 인석아. 지나간 일은 왜 들먹여!”
“그러니까 영감 말은 20만냥은 이 야혼이 가지고, 적당한 놈 하나 골라 하오밀문을 맡겨달라, 이 말이지 지금.”
“네놈이 문주를 해도 괜찮고. 어차피 태을건곤심법을 익혔으니 그만한 조건도 없지. 그리고 이건 돈 받기로 한 계약서다.
각각 만 냥씩은 선불로 받았으니까 9만냥씩만 받으면 된다.”
“에이, 씨팔! 내가 바보요? 부하 한 명도 없는데 대장을 하게?”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0)- 한대에 두 냥씩 계산해(1)
한 대에 두 냥씩 계산해.
“어떻게 된 거냐?”
강웅삼을 만나고, 위로 올라온 야혼을 향해 이정이 물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의 3년만에 나타난 녀석이
돼지가 되어 있었다. 소문을 듣고 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알아보지도 못할 뻔했다.
“그놈의 정력제 때문이지 뭐.”
“정력제?”
“그게 어떻게 된거냐면…….”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는 이정을 향해 영약을 먹게 되었던 배경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몸이 전부 약 때문이라 이거지? 하나만 먹어도 불로장생한다는 그런 약 전부를 네 놈 혼자 꿀꺽해서?”
어이가 없었다. 아니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야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약들은 이름만 들었을 뿐 구경한번 하지
못했다.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그런 엄청난 영약들을 배터지게 처먹은 결과가 지금의 몸이라 한다.
“그때는 영감생각을 못했지. 나 알잖소. 약만 보면 눈이 뒤집혀버린는 거.”
“그래 잘했다. 오래 오래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아라.”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게 자신의 불찰인데 누굴 탓하랴. 예인의 도를 가르칠 때 영약에 대한 상식을 조금이라도
가르쳤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무공이나 혈도에 대해선 내색도 하지 않고 오직 도에 집중하는 방법만을 가르쳤을 뿐이었으니. 약을 복용할 때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엄청난 경지에 도달했을 터인데, 그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 염왕도(閻王刀)는 찾아보았느냐?”
“반쪽밖에 없습디다. 그래서 던져버렸소.”
“무공 구결은 못 찾고?”
“내가 무공을 익혀서 어디에 쓰게, 지금 있는 것만 해도 귀찮아 죽겠구먼. 참! 황동지 그 자식은 어디로 갔소? 안 보이는
것 같던데.”
떠나기 전 주천상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자신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하오문을 없애버리겠다고 했었다.
“그는 네가 떠난 뒤 2개월 뒤에 떠났다. 근데 정말 못 찾았냐?”
“그럼 그 자식은 아니란 말이네? 앗따, 영감도, 단전이 아작나서 무공은 익히지도 못한다며! 그걸 찾아왔다 해도 뭐
할거요. 괜히 마음만 아프지.”
“알았다, 이놈아 도(刀)나 내놔봐!”
야혼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이정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녀석이 염왕도법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흡족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제자라 할 수 있는 녀석에게 가문의 무공이 전해진 것이다.
“앞으로 한 두 달만 더 갈면 되겠구나. 내일부터 다시 이곳에 오너라.”
“이 몸에 무슨 고기가 필요하다고. 싫소.”
“이놈아 너는 안 먹어도 이 아이는 먹여야 할 것 아냐. 몸이 이래가지고 어디 무공이나 익히겠냐?”
대뜸 양지를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실상 야혼의 성취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영약의 부작용으로 인하여 몸이
저렇게 변할 정도면 내공으로 화한 영약 또한 상당할 터였다.
이미 성취한 예인의 경지에 내공이 더해졌다면 무공 또한 엄청난 경지로 변했을 건 자명한 일이었다. 더하여 야혼이 얻어야할
마지막 경지가 남아있었다.
“주천상 그놈에게는 안 된다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그 놈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덤을 파는 게 더 빠르다니까 그러네.”
야혼 또한 이정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천상의 무공을 이미 경험해 보아서 알고 있다. 당가려나 냉소소 두
사람을 합쳐야 간신히 상대가 될 정도로 강한 자였다.
“그래도 와! 도(刀)를 전부 갈 때까지는……. 그리고 강대협의 제안은 수락할 거냐?”
“글쎄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소. 20만냥이 탐이 나기는 하지만……. 가자 일녀!”
“아저씨!”
한쪽에서 졸고 있는 양지의 머리를 쥐어박은 야혼이 밖으로 나섰다.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볼 일이었다.
“양지야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
“뭘요?”
“그 하오밀문이란 곳 있잖아. 죽어 가는 영감이 나보고 문주를 하라고 했거든? 근데 부하가 하나도 없어.”
“그래도 돈은 20만 냥이 있다면서요.”
“받아야 내 돈이지, 수중에 있는 게 아니잖아.”
“아저씨 몸을 정상으로 돌리면 가능하겠구먼 뭐.”
“자는 척하면서 들을 건 다 들었구나.”
“보고서 써야 하는데 쓸 게 없잖아요.”
“보고서?”
“10일마다 한번씩 써내야 하는데…….”
요즈음 직면한 고민거리였다. 뭔가 그럴싸한 것이 있어야 보고서를 쓸 터인데 야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바위 도박꾼이고, 이곳에서는 개차반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어떻게 적는단 말인가.  별 볼일 없는 자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고명지의 화만 돋우게 될 게 분명했다. 그런 보고서라면 차라리 안 쓰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그럼 네 보고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도 하오밀문의 문주가 되어야 하겠구나?”
“그래주면 나는 좋지요. 보고서도 뽀대나고.”
“그래도 싫어. 너야 뽀대나고 좋겠지만 나는 뭐냐? 부하가 한 명도 없는데.”
“그것도 그렇겠다. 문주라면 거들먹거리는 맛도 있어야 하는데……. 맞다. 좋은 방법이 있었네!”
한참을 고민하던 양지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싱긋 웃었다.
“뭔데?”
“다른 게 아니고 내가 하오밀문의 문도가 되는 거지 뭐. 그런걸 두고 일거양득이라 하는 거 맞지요.”
“그러니까 넌 보고서에 쓸 말이 있어서 좋고 난 부하가 생겼으니 거들먹거릴 수 있다 이 말이냐?”
“거들먹거리기만 하나? 한번 달라해도 주지. 나 같은 부하가 어디 있어요.”
“임마! 네가 하오밀문의 문도가 되면 고명지와의 관계를 끊어야 하는데 그렇게는 못하잖아.”
“그럴 때 쓰는 말이 있어요. 일명 양다리라고.”
“지금은 안 돼. 일단 생각 좀 해보고.”
“그럼 두 번째 보고 때까지는 결정사항을 말해줘요. 그날은 보고서 보내야 한단 말이에요.”
“내가 하오문의 문주가 된다면 순전히 너 때문이란 것만 알아두어라.”
“근데 아저씨 고기를 많이 먹으면 정말 가슴이 커질까?”
“뭔소리여?”
느닷없는 양지의 말에 야혼이 두 눈을 끔벅였다.
“아까 도살장 할아버지가 그랬잖아요. 나 때문에 소를 잡아야 한다고.”
“그래 많이 먹으면 커지겠지. 그곳이라 해서 살이 안 찌겠냐?”
장단이라도 맞추듯 고개를 끄덕이던 야혼이 이내 한숨을 내쉬며 설래 고개를 내저었다. 도무지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 원인이
바로 자신이란 사실 때문에 더욱 서글퍼졌다.
매끈하게 빠진 과거의 몸이었다면 양지가 저렇게 나올 리가 없을 터였다. 오히려 말을 할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양지야! 한가지만 대답해줄래? 심각한 질문이니까 고민 좀 하고 대답해주라.”
“물어보세요. 뭐든지.”
“만일 말이다. 얼굴만 쳐다봐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미남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도 가슴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겠냐?”
“당연히 못하죠. 그런 남자에게 천박한 여자로 보이면 안 되잖아요.”
“그래 그렇겠지…….”
“얼레? 그러고 보니 뚱띵이 아저씨……. 하-아!”
“너는 또 웬 한숨이냐?”
“문득 아저씨와 나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가슴 때문에?”
“물론이죠. 여자에게 가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저씨는 모를 거예요. 언제나 맨 마지막이라고요. 훈련할 때도 언제나
일녀, 빨래도 일녀, 전부 일녀만 시켰다고요. 그러면서도 할 때는 맨 마지막.”
“그래 서로 노력해보자. 나도 방법을 찾아보마.”
정 반대의 경우였다. 야혼은 부풀은 살을 빼야할 입장이었고 양지는 빈약한 가슴을 부풀려야하는 병.
짝!
“힘내요.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겠지요. 빨리 와요.”
야혼의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친 양지가 경공을 펼치며 몸을 날렸다. 어찌 되었던 야혼이란 사내를 감시하는 일은 재미있었다.
예의 같은 것도 따지지 않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모양이 양지가 아닌 어린 시절 양일녀의 삶과 같았다. 그래서 더 편했다.
그날 밤부터 다시 야혼의 도(刀)를 가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무엇을 하던지 간에 일단 도를 먼저 갈아야 할 것 같았다.
같이 잠을 안 잔다며 투덜거리는 양지의 불평을 접어둔 채 도를 가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양지야 나 도살장 다녀 올께. 일나갈 준비하고 있어라!”
“밥도 안 먹고요!”
잠이 묻은 목소리로 웅얼대는 양지를 뒤로하고 도살장을 향해 달음질을 쳤다. 경공을 이용하면 금방일 터이지만 아직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비대한 몸을 이끌고 도살장에 도착한 야혼이 서둘러 오전 일을 준비했다. 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일의 순서는 같았다.
바닥 청소를 마친 뒤 비천묵령도를 들고 도살장 가운데 섰다.
“오늘은 한 마리만 하자.”
“무슨 소리요 영감. 날 아직 3년 전으로 생각하는 거요?”
한 마리만 작업하자는 이정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때에 비하면 몇십 배 강해진 몸이 아니던가. 우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정의 말이 결코 장난이 아니었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들어오는 소는 2년 전의 소가
아니었다.
바로 달려들면 없앨 수 있었음에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의 느낌 때문이었다. 일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런 빌어먹을……. 이 야혼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 얼굴을 굳힌 야혼이 도를 불끈 말아 쥐었다. 하지만 마음뿐이었다. 비천묵룡도의 무게가 갈수록
무거워지더니 이내 온몸을 압박해왔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걸 붙잡고 있기에도 힘에 부쳤다. 급기야는 왼손마저 동원하여
비천묵룡도를 붙들어야 했다.
온몸에서 비오듯 땀이 흘렀다. 이마에서 흐르기 시작한 땀이 볼을 타고 흘렀고, 이내 등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강해진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게 바로 힘에 대한 책임이다.”
‘견뎌라. 이 단계를 견디지 못하면 영원히 초예(超藝)를 얻을 수 없다. 너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니라.’
지금 야혼이 겪는 혼란은 무공이 강하다해서 오는 벽이 아니었다. 높아진 수준 때문에 일찍 눈을 떠버린 심마였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무한함에서 오는 심리적 박탈감이 소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잊어라. 너도 잊고 소도 잊어라. 오직 도(刀)에 모든 마음을 집중해라.”
이정이 혼잣말처럼 말을 흘렸다. 그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가르침이었다. 야혼은 모르고 있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무형의
기운 때문에 소 또한 움직이질 못하고 있다.
소가 느끼는 두려움이 커질수록 야혼이 받는 심리적 벽은 더욱 커진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상승의 단계로 들어갈 수가
없다.
“잊는다. 마음속에서 도를 갈아라 야혼. 도의 날을 세우란 말이다.”
계속해서 되뇌며 도를 들어올리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한번 무거워진 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왼손을 떼버리면 바로 바닥으로 박혀들 것만 같았다.
도살장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광경에 모든 일꾼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들 또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정 다음으로 소를 잘 잡는 야혼이 한 마리를 앞에 두고 땀을 흘리다니.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땀이 바닥을 적시고 있건만
그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오로지 오른 손에 쥐어진 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모든 힘을 쓰는 듯했다.
연약한 소 한 마리와 야혼의 대치는 점심때를 지나 해가 져도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아침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며 서로의
눈을 주시할 뿐이었다.
“너무 일렀나…….”
야혼과 소의 대치를 주시하던 이정이 나직한 탄식을 내뱉었다. 야혼의 상태로 보아 너무 이르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태을건곤심법을 믿었었다.
지금 상태만 극복하면 예인의 경지를 완성하게 되는데 마지막에서 막힌 것이다.
야혼보다 소가 견디질 못해서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꼼짝없이 서 있던 소가 조금씩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가 쓰러지면 대치상태도 끝날 터이고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가 없다.
“천상 끝내야겠구나. 가만 저놈이…….”
앞으로 나서려던 이정이 화들짝 놀라며 야혼을 주시했다. 야혼의 기세가 조금씩 변했다. 몸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운이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랬다. 그때 야혼의 내부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었다.
지금껏 도를 들어올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던 그가 왼손을 떼어냈다.
소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지금껏 죽음을 걱정하며 두려워 떨던 놈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제발 죽여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소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야혼이 비천묵령도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알았다.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마.”
야혼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린 듯 싶더니 그의 신형이 공간을 단축했다.
아무런 소음도 없었다. 검은 묵광이 잠깐 어린다 싶었는데 지금껏 서 있던 소가 천천히 몸을 뉘였다.
“빌어먹을 소 한 마리 잡는 게 이리 힘들어서야……. 장사 나가야 하는데.”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야혼이 소의 몸통 위로 처박히듯 쓰러졌다.
“됐다 이놈아. 이제 된 거야.”
쓰러진 야혼을 쳐다보며 이정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최상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만족스러웠다. 예의 극에 한번 발을 담갔으니
몸을 적시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어르신 이 녀석을 옮길까요?”
“아니다. 이곳에서 그냥 재우거라. 제 놈이 처음 잡은 소인데 같이 자는 것도 괜찮을 거야.”
“네?”
“그런 게 있다.”
처음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쳐다보는 일꾼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렁!
“참 그놈! 소 한 마리 잡아놓고 뭐가 피곤하다고 코를 고누?”
들어가는 이정을 향해 고개를 숙인 일꾼이 연신 코를 골아대는 야혼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야혼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1)- 한 대에 두 냥씩 계산해(2)
“얘가 문을 열어놨나 왜 이리 춥냐.”
문득 서늘한 느낌에 몸을 웅크리던 야혼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어? 아! 맞다 소 한 마리 잡고 퍼졌지?”
잠들기 전의 일을 생각하고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소 한 마리를 잡지 못해 전전긍긍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근데 이 영감이 나를 여기에 두었단……. 얘는 또 뭐야?”
자신의 품안에 안겨 잠이든 양지를 확인한 야혼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장사 나왔다가 기다려도 오지 않자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이불을 덮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정 노인이 안에서 자라고 했을 터인데도 고집을 부렸음에 틀림없었다.
“양지야, 양지야!”
“음냐, 그냥 자요 뚱띵이 아저씨. 아직 일어나려면 멀었다고요.”
“임마, 집에 가야지. 여긴 우리 집이 아니라고.”
“아 맞다. 여긴 소 위였지?”
눈을 비벼 뜬 양지가 휙 주위를 둘러보더니 가볍게 머리를 쥐어박았다.
“근데 넌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방에 들어가서 자지.”
“아저씨 도망가면 안되잖아. 항상 지켜야지. 으으! 냄새.”
옆에서 풍겨오는 지독한 땀 냄새에 코를 감싸쥔 양지가 화들짝 떨어져나갔다. 새벽이 되었는지 주변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참 물 데워야 하는데?”
“무슨 물?”
“당장 씻고 가야지, 냄새나서 되겠어요? 서둘러요. 이정 할아버지가 매일 하던 일 하라고 하셨어요.”
덮던 이불을 정리한 양지가 호들갑을 떨었다.
“끙!”
인상을 찌푸린 야혼이 물통을 들고 근처 강가로 발을 옮겼다. 아침일 때문이 아니었다. 소를 대할 때의 느낌 때문이었다.
결국은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 때문에 소가 두려움을 느꼈다는 말이었다.
“그 놈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해야한다 이 말이지?”
이정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소가 자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라는 주문이었다.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스스로 도(刀)가 되어버리면 해결된다. 사물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생명체는 없음으로.
더하여 병기자체에서 풍기는 살기마저도 감싸안아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쉽진 않겠군. 하지만 잘됐지 뭐.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산등성 너머 비죽 고개를 내미는 해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직 정확한 실체는 잡을 수
없지만 무(武)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날부터 야혼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도를 쥐고 씨름했다. 한 마리였던 소가 두 마리로 늘어났고, 두 마리였던
소가 네 마리로 늘어났다. 처음 소를 잡았던 때의 마음으로 모든 작업을 했다.
야혼과 양지 두 사람이 도살장을 나선 건 처음 소를 잡은 날로부터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근데 뚱띵이 아저씨, 서대시전은 아저씨 구역 아니었어요?”
집에 도착하여 청소를 하던 도중에 양지가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그건 왜?”
“다른 게 아니고, 상인들에게 돈 걷으러 다니는 놈들이 있어서.”
“그래?”
야혼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어렸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서대시전 상인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그들의 행동이 가식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가 심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도 꽤 있었던 거였다.
“얼마나 걷어가던데?”
“글쎄요? 물어보지는 못했는데 거의 1할 정도 되는 것 같았어요.”
“하루 일당의 1할이라 이거지? 양지야 우린 그 절반만 받을까?”
“아저씨! 그게 얼마나 치사한 짓인지 알기나 해요. 사람이 일을 해서 먹고살 생각을 해야지, 사지 멀쩡한 놈들이 남
등쳐먹고 사는 게 말이 되냐고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양지가 무섭게 쏘아붙였다.
“얘가 왜 흥분하고 난리야. 그놈들이 받는 거 반만 받겠다는 게 왜 치사한 짓이야. 오히려 도와주는 거지. 내가 없으면
꼬박꼬박 1할씩 내야할 거 아냐?”
“잔말 말고 도(刀)나 갈아요.”
“참! 너는 그 책 다 익혔냐?”
“그 용봉환락문가 하는 거? 그거 뗀지가 언젠데…….”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야혼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20여일 전에 양지에게 던져준 책은 아미파 비급과 용봉환락무 두
권이었다.
그런데 그 책들을 벌써 다 보았다는 말이었다. 아미파 무공에 대해 물었을 때 진전이 빠르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벌써 두 권을
익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두고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 파악된 양지의 재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참! 용봉환락무는 언제 시전해 줄 거예요?”
“글쎄 시간 봐서. 하고싶을 때 하지 뭐.”
“아냐, 내가 하고싶을 때 할래요.”
“너?”
“뚱띵이 아저씨, 여자도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남자만 그런 게 아니라고요.”
“임마! 이건 사정이 다르잖아.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나야, 내공 때문이지만 아저씨는 그냥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날은 내가 정한다고요. 됐어요?”
“그래 알았다. 동창 새끼들 사람 완전히 버려놓았어. 그나저나 쟤를 보고 흥분이나 되려나 모르겠다.”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이건 당최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제멋대로 용봉환락무를 시전해 달라지 않나, 날까지
알아서 잡는다니.
“아저씬 도(刀) 날이나 세워, 아저씨 물건 세우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헤엑! 그것도 들었냐?”
“당연하지요. 무공이 갈수록 늘어가는데……. 뭐해요, 칼 갈아야지. 오늘은 일나가야하니까 빨리 끝내세요.”
혀를 쑥 내민 양지가 도망치듯 방안으로 들어갔다.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야혼이 집을 정리하다 발견한 춘서들이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치사한 새끼들, 이런 책을 먼저 보여줬으면 방중술 배울 때 훨씬 편했을 거 아냐?”
춘서를 읽어가면서 느낀 점이었다. 동창에서 방중술을 가르치던 놈들이 사기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에 나와있는 이론을
몸으로 가르쳤던 것이었다.
“오잉? 시간이 이렇게 됐나?”
정원에서 도를 갈고 있는 야혼을 힐긋 쳐다본 양지가 다른 책을 꺼내들었다. 야혼이 성모궁에서 가져온 열 권의 비급중의 한
권이었다.
굳이 익히고자 하는 목적보다는 무공에 대해 두루 알아두면 도움이 될까 싶어 보고 있는 것들이었다.
“양지, 가자. 오늘은 일나가야지.”
“잠깐만 기다려요. 일단 먹을 것 좀 준비하고.”
좌판과 음식 보따리를 들고 서대시전으로 나온 야혼과 양지는 평상시처럼 개시준비를 서둘렀다.
“뚱띵이 아저씨. 뭐해요? 빨리 안 받고.”
양지가 바람잡이로 오면서 새롭게 생긴 변화는 바로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한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할
호사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야혼이었다.
“야! 또 전부 소고기냐?”
“돈이 전부 떨어졌어요.”
“벌써? 고사지낼 때 받은 돈이 얼마나 많은데…….”
“그 돈은 못써요. 이제부터는 하루 번 돈으로 먹고 살아야해요. 그것도 1할만. 그러니까 맛있는 반찬 먹고 싶으면 열심히
일하라구요.”
“허! 너 먹는 양을 보고 말해라. 돼지를 키우는 게 낫지 어떻게 감당 하냐?”
서로의 먹는 양을 비교하던 야혼이 기막힌다는 얼굴로 양지를 쳐다보았다. 밤참까지 같이 싸온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거의 4인분을 한번에 작살내고 있었다.
“그러다 가슴은 안 커지고 엉덩이 쪽으로만 몰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걱정 마시고 밥이나 드세요. 운동은 열심히 하니까. 또 살이 엉덩이로 몰리면 어때, 봐줄 만한 곳은 그곳밖에 없는데…….
그건 아저씨도 인정했잖아요.”
“그래도…….”
“여어! 보기 좋구먼. 언제 나타나나 했는데 드디어 나왔네?”
티격태격하며 밥을 먹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잔뜩 조소 어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엥? 안 죽었나보네?”
놀란 얼굴로 야혼이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인물을 쳐다보았다.
2년 전에 바로 이 자리에서 박살냈던 육덕칠과 거양 일행이었다.
“오랜만이다. 살아 있었네?”
“운 좋게 살아남았지. 네 놈에게는 불행이겠지만.”
육덕칠의 얼굴에 여유작작한 미소가 흘렀다. 야혼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이미 열흘 전에 들었다. 하지만 과거에 당한 것도 있고
해서 함부로 나타날 수 없었다. 혹여 과거보다 더 강해졌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열흘이 지났지만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도살장에서 소를 잡고 그곳에서 고기를 얻어 생활하는, 십만대산까지 다녀왔지만 과거와 달라진 점이 전혀 없었다.
아니 달라진 점은 분명히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비대해졌고, 그의 동료라 할 수 있는 추기영과 태웅, 그리고
여호치가 없다는 사실.
“아냐 난 행복해. 이렇게 밥해주는 여자도 생겼는데, 너보다야 훨씬 낫지. 안 그래?”
“오라! 그동안 살림도 차렸나 보네? 여자 후리는 기술이 장난 아니라하더만, 고르는 기술은 형편없었나 보구나? 하기야 네
놈에게 가장 어울리기는 하다만…….”
“형님! 빨리 조지고 갑시다. 오늘 당주님 오시는 날 아니오.”
“거양 너도 살아있었구나. 요즘은 오줌 안 지리냐?”
“이 돼지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그때 나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새끼야.”
거양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야혼이 잔인함에 놀라 오줌을 지리고 말았던 그날의 기억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이었다.
“죽여버린다!”
씩씩거리던 거양이 야혼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콰앙!
그날과 똑 같은 상황이었다. 그때도 좌판을 부순 사람이 거양이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좌판을 향해 날아가는 거양의 주먹에 상당한 힘이 실려 있었다. 아직은 어설펐지만 무공을 익힌 손놀림이 분명했다.
“거양!”
좌판을 박살내고 야혼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육덕칠이 거양을 말렸다.
“무공을 익힌 모양이네?”
야혼의 입매가 히죽, 말려 올랐다.
“이제야 알아본 모양이군. 우린 너 같은 삼류 건달이 아니다. 그동안 무공을 배웠고 지금도 익히고 있다. 몇 년 안에 강호
고수가 되는 거지.”
육덕칠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하오밀문이 공격받을 때 목숨을 구한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건 1년 전이었다.
청오방(靑烏幫)이라는 방파가 생겨나면서 개봉을 급속하게 잠식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과거의 하오밀문과 달랐다.
무공을 배울 수 있었다. 하오밀문에 있을 땐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상승의 무공들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었다.
육덕칠의 패거리들이 청오방에 가입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청오방에서 무공을 배우며 맡았던 곳이 이곳 서대시전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네가 들어간 청오방은 상인들을 등쳐먹는 게 주업이라 이거지?”
“등쳐먹는 게 아니고 그들을 보호해주고 보호비를 받는 거다.”
“누구로부터?”
“바로 너 같은 놈들로부터지……. 오자마자 이곳 상인들에게 돈을 뜯었다는 것 알고 왔다. 좋게 따라 갈 테냐 아니면 바닥
청소를 하며 갈 테냐.”
“오라! 청오방이란 곳이 규율이 상당한가본데? 함부로 하지 않는 걸 보면.”
“하오밀문하고는 격이 다르지. 저 계집을 나에게 상납하면 이곳에서 장사를 하게 해 줄 수도 있다. 물론 5할을 바치는
조건이지만.”
“쿡! 육덕칠 너 많이 컸다. 이 야혼을 상대로 그따위 망발을 하다니. 뒈지고 싶으면 사자 불알을 못 만질까.”
육덕칠을 향해 씨익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껏 그의 말을 들어준 이유는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전부 들었으니까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내 좌판 값은 알고 있지? 2년 전에 30냥이었으니까 지금은 더 올랐다.”
와작!
“아저씨 탁자는 왜 부셔요?”
밥을 먹었던 탁자마저 부셔버리는 느닷없는 행동에 양지가 고함을 질렀다.
“이것도 돈이거든. 내가 부순 게 아니고 저 자식이, 저놈들이 부셨단 말이야. 이건 좌판보다 더 비싸잖아? 자, 육덕칠
어떤 놈부터 올래.”
“낄낄낄! 나도 네 놈이 그렇게 나와주길 바랐다. 혹시 머리 숙이고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단 말이다. 오늘 네놈의 몸뚱이로
바닥 청소 좀 해야겠다. 죽지 않을 정도만!”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육덕칠이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양지야 오늘 우리 돈 좀 벌어보자.”
퍽! 퍼억! 퍽! 퍽퍽퍽!
고개를 돌린 야혼의 얼굴로 무수한 주먹이 쏟아졌다. 일행 중 가장 등치가 큰 거양이 양지의 머리통 만한 주먹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얼굴과 몸에 무수한 매를 맞으면서도 야혼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저벅저벅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아이고 죽겠다. 아이고, 씨팔. 벌써 100대다.”
“이런 개자식이…….”
거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했지만 권각법으로 단련된 그의 주먹과 발은 웬만한 통나무 하나는 부셔버릴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야혼이란 놈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연신 입으로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한치 머뭇거림도 없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누가 이기나 보자.”
이를 악다문 거양이 한 걸음씩 물러나며 더욱 빠르게 주먹을 내뻗었다. 또 다시 수많은 주먹이 쏘아져 나갔다. 거리도
좋았다. 너무 가까우면 주먹에 힘을 싣지 못하고, 너무 멀면 때리질 못하는데 놈은 언제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가장
충격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거리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헉! 헉! 좀 쓰러져라, 이 개자식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함을 질렀다. 기절할 노릇이었다. 지금껏 한 대도 맞지 않고 오직 때리기만 했는데 먼저 지쳐버렸다.
손을 들어올릴 힘조차 없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손과 다리. 더 이상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다음!”
더 이상 거양에게서 주먹이 날아오지 않자 다른 이들을 쳐다보며 고함을 질렸다.
“이런 개자식!”
주변에서 지켜보던 자들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지고 야혼을 향해 주먹들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거양의 주먹에도 꼼짝하지
않았던 야혼이 그보다 더 약한 무리의 주먹에 충격 받을 리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야혼을 공격하던 다른 패거리들조차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장장 한 시진을 두들겨 팬 결과 누구랄 것 없이
먼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네 놈들은 됐고. 이제 덕칠이 너만 남았네? 자 때려! 빨리 때려 씹탱아.”
육덕칠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육덕칠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때린 자들이 먼저 쓰러질 수 있단 말인가. 지금껏
놈은 한번의 손짓도 하지 않았는데 부하들만 쓰러져 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안 때릴 거야? 양지야 지금까지 몇 대였지?”
“음-! 내가 기억하는 건 천대 정도까지예요. 그 이상은 셀 수가 없었어요.”
“그럼 대 당 2냥씩 하면 얼마지? 3천 냥 정도 되겠구나. 그 정도면 반찬값은 되겠네? 안됐다 덕칠아. 더 이상의 돈은
필요없댄다.”
육덕칠을 향해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오른 손을 빙빙 돌리더니 육덕칠의 면상을 향해 사정없이 박아 넣었다.
내공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지만 200근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가공했다.
“커억!”
붉은 피를 내뿜은 육덕칠의 몸이 2장 가량을 날아 무섭게 떨어졌다.
“짜식,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이……. 양지야 저기 보이는 대장간에 가서 물건 좀 찾아와라. 내가 부탁한 게
있거든?”
“이 시간에 문 열었을까요?”
“밖에서 이 난리가 났는데 잔다면 그게 사람이냐? 깨워서라도 달라고 해.”
양지를 보낸 뒤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야혼이 저만치로 가 뭔가를 주섬주섬 끌어 모았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손에는
널따란 널빤지 5장이 들려 있었다.
“기다리면 좀더 높은 놈이 오겠지 뭐.”
육덕칠을 비롯한 일행의 얼굴을 툭툭 걷어차던 야혼이 그들을 하나씩 널빤지에 묶기 시작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2)- 한 대에 두 냥씩 계산해(3)
“이 자식들은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청오방 서대분타, 과거 하오밀문에서 쓰던 건물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물이 인상을 찌푸리며 밖을 흘끔거렸다.
오늘 부임한 당주 연자춘(燕慈春)이었다.
“빌어먹을 이 연자춘을 이런 곳으로 보내다니.”
사실 연자춘은 청해성에서 꽤나 알아주는 무인이었다. 청해성에서는 귀검(鬼劒)이라 하면 누구나 인정해 주었다. 청해성이
좁다하며 돌아다니다 우연히 술취한 무인과 싸움이 붙고 말았다. 물론 처음엔 술에 절어있던 놈이 마도련 소속인지 알지
못했다.
단순히 술 먹고 행패부리는 취객정도로만 생각하고 아주 멋지게 끝장을 내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바로 도망쳐야 했다. 놈이 마도련의 철마문(鐵魔門)소속이었던 것이다.
혹시 추격해올까 마음을 졸이며 동쪽으로 몸을 날려 도착한 곳이 바로 개봉이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청오방이란 방파에
가입했다.
일단은 먹고살아야 했고, 아직은 몸을 숨겨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청오방에서의 대우가 문제였다. 물론
돈이야 필요한 만큼 받지만 제5당주라니, 방주를 제외하고도 위로도 4명이 더 있었다.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제 실력이면 적어도 부 방주 정도는 되리라 여겼었는데.
“왜 한 놈도 안 보이는 거야!”
결국 참다 못한 연자춘이 밖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이곳에 온지 벌써 한 시진이 지났건만 누구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막 폭발하려는 순간 밖에서 허겁지겁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새로 오신 당주님이십니까?”
“그럼 여기 새로 올 당주말고 다른 사람이라도 있는 줄 알았느냐?”
눈앞에 나타난 부하의 귀싸대기를 사정없이 후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미리 나와서 영접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코빼기도
안보이다니. 단단히 버릇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손을 휘두르려는 순간 부하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고 당주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이곳 서대분타원들이 전부 사로잡혀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그게…….”
“그러니까. 야혼이란 놈의 버릇을 고쳐주려 갔다가 오히려 전부 당했다 이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당주님.”
“이런 병신새끼들, 앞장서라!”
장팔이라는 분타원을 앞세우고 서대시전에 도착한 연자춘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의 20명에 달하는 분타원 전원이 벽에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아니 뒤쪽의 널빤지에 묶여 사색이 된 얼굴로 앞에 있는
놈을 향해 애걸하고 있었다.
기절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약하다지만 그래도 1년 동안 기본적인 무공은 배운 자들이라 하였다.
그런 놈들이 한 놈에게 당하다니. 더구나 부하들을 잡은 놈의 행동은 더욱 황당했다.
부하들을 향해 수중에 있는 비도를 던져내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나있는 비도 자국과 주변을 진동하는 지린내로 짐작컨대 많은
시간이 흐른 듯 싶었다.
“멈춰라!”
또 다시 손을 들어올리는 야혼을 향해 고함을 지른 연자춘이 경공을 펼치며 다가갔다. 은연중에 자신의 무공을 과시하여 상대의
기를 꺾고자 하는 의도에서 펼친 경공이었는데.
“왔어? 근데 왜 혼자야? 방주라는 새끼는 아직 안 온 모양이네. 혼자면 재미없으니까 가서 그 놈까지 데리고 와라.”
‘엥? 저 자식의 무공 경지가 느껴지다니 별일일세?’
새로 나타난 자의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음이 느껴지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지에게서 이미 느낀 바였지만 무공이 강해지자
생긴 또 하나의 능력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들어 상대를 향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없던 능력이 생겨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뭐해 빨리 안가고.”
어이없다는 듯, 멍한 얼굴로 눈으로 쳐다보는 연자춘에게 소리친 야혼이 몸을 돌려 비도를 집어들었다.
사실 그가 지금 펼치는 무공은 십전수 구약종의 무공 중, 혈향비도류(血香飛刀流)라는 비도술이었다.
강웅삼에게 구결을 전해 받았으나 특별히 연습할 시간이 없어 암기만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연습삼아 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걱정 말아, 지금은 하나씩만 던질 거야.”
혈향비도류는 전부 16개의 비도를 사용하는 비도술로 꽤나 잔인한 무공 중의 하나였다. 동시에 16개의 비도가 날아가면
비릿한 피 냄새만 남는다하여 혈향비도류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제발…….”
육덕칠의 입에서 우는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 오줌을 지렸는지 알지 못했다. 어느 순간 흥건해진 아래를 느끼고서야 오줌을
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창피하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을 가득 채우고 날아오는 비도는 죽음밖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하였다.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으면 바로 귀 옆에 꼽히던지 아니면 다른 녀석의 널빤지에 박히곤 하는 것이었다.
몇 번을 기절했다 깨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놈은 웃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멈추라 했다, 놈!”
“조용히 해 개자식아! 그러다 실수하여 저 새끼들 죽이면 네가 책임질래?”
“이런 죽일 놈이!”
눈동자가 홱 돌아간 연자춘이 검을 뽑음과 동시에 야혼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한 쪽에 쭈그려 앉아 있던 왜소한 여자를 생각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턱!
다리에 뭔가 걸렸다고 느낀 순간 눈앞에서 별이 번쩍, 하더니 정신이 아뜩해졌다.
“아저씨 그렇게 세게 차면 어떡해요.”
연자춘의 발을 걸어 야혼의 발 앞으로 그의 얼굴을 향하게 만들어준 양지가 소리를 질렀다.
중심을 잃은 연자춘의 면상을 향해 야혼이 사정없이 발을 날려버렸던 것이었다.
“저놈은 쪼까 무공을 익힌 놈이라서 대충 차면 안되거든. 잔소리말고 끌어와. 저놈도 묶어야 하니까.”
검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기절한 연자춘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혼의 말대로 청오방 인물들 중 가장 험하게 당한 사람이 바로
연자춘이었다. 그가 날아간 자리에는 십여 개의 이가 줄줄이 도열해 있었다.
“근데 아저씨, 이러다 관에서 나오면 그땐 어쩌려고 그래요? 이런 짓 하는 놈들은 대부분 관부와 같은 패거린데.”
연자춘의 다리를 질질 끌고 오던 양지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강한 무공이 있으니 청오방 전체가 몰려온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닐 터이지만 관부에서 나오면 일이 심각해진다.
백주 대낮부터 상인들의 주머니를 털어 가는 자들인데 관부의 묵인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양지, 너 있잖아!”
“내가 뭘?”
의아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무려 21명을 아작 내놓고도 믿는 건 자신이라니. 야혼의 말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너의 신분이 뭐냐?”
“그야 아저씨 정부로 위장한 동창의……. 아하! 생긴 것과는 달리 머리 하나는 기차게 도네?”
양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신에게 고명지가 준 명패가 있었다. 보고서를 보낼 때 사용하라고 준 것이었지만, 그 정도만
내밀어도 지방 관리들에게는 사신처럼 보일 것이다.
결국 지금 야혼이 하는 일은 동창 비밀 업무중의 하나로 치부되어 묵인될 것이고 오히려 돕지 못해 안달하게 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같이 왔던 관부의 인물들은 양지가 내민 조그마한 명패를 보고 사색이 되어 돌아갔다.
그로부터 한 시진쯤 지났을까. 야혼과 양지가 있는 곳에 은밀한 행렬이 다가왔다.
“어느 분이 동창에서 나오셨습니까?”
50대의 인물이 야혼과 양지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어왔다. 개봉부의 최고 관리인 지부대인 정승구(鄭承久)였다.
설마 야혼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서인지 그의 시선은 줄곳 양지를 향해 있었다. 기껏해야 야혼은 동창인물의 하수인쯤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귓전에 들려온 전음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나요, 지부대인. 지금 비밀 업무 수행 중이니까 소문내지 마시오.’
“세상에. 그럼 지난 3년간…….”
‘그렇소. 그 기간 동안 모처에서 무공을 익혔던 거요.’
“알겠습니다. 야대인. 혹시 필요한 건…….”
‘뭐 필요한 게 있겠소. 녹봉이 짠 것 빼고는 불편한 것 없소이다. 저 계집애 보수도 주고 해야하는데……. 청오방 놈들이
내는 돈의 반에 반도 안되니 원.’
“허억!”
야혼의 말에 정승구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청오방에서 들어오는 상납금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이곳 출신이 아니라면 오리발을 내밀어 발뺌이라도 해 볼 터인데 수시로 옥을 들락거린 그가 아닌가.
관과 조그마한 방파의 거래에 대해선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야혼이었다.
‘그리고 청오방주라는 자에게 전하시오. 서둘러 오지 않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거라고.’
“알겠습니다. 야대인.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그만 가보시오. 명심하시오. 오늘 지부대인은 이곳에 오지 않았소이다. 그동안의 정리 때문이라 생각하시오.’
“감사합니다.”
정승구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청오방과의 관계를 눈감아 주겠다는 언질이었다.
‘참 우리 집에 사람 보낼 때는 아무도 모르게 하시오.’
“알겠습니다.”
황망히 떠나가는 정승구를 쳐다보며 가장 놀란 사람들은 바로 서대시전의 상인들이었다. 그들 또한 야혼과 청오방과의 싸움
때문에 누구도 떠나지 않고 밤새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개봉부 지부대인이란 자가 와서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쩔쩔 매다가 감격한 표정으로 떠나가지 않는가.
야혼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까무러칠 듯 놀라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개차반 야혼이, 옥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던
야혼을 향해 지부대인이 고개를 숙이다니. 죽어서 저승문 앞에 서있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발빠른 상인들이 재빨리 음식을 장만하여 야혼과 양지 앞으로 내밀었다.
“그 청오방준가 하는 놈 지금쯤 사색이 되었겠다.”
상인들이 준비해준 음식을 먹던 양지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 써보는 고명지의 명패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지부대인이 고개를 숙이고 가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자식에게도 부탁했으니까, 전(錢) 조금 준비해 올 거야.”
“정말 지부대인에게 돈을 부탁했단 말이야?”
“그런걸 꼭 말로 해야하냐? 눈치로 때려잡는 거지. 그나저나 오늘 일당은 개업이래 최고가 되겠다.”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칠 즈음하여 일단의 무리가 무서운 속도로 야혼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청오방주인 돈마(豚魔) 가단량(加端良)과  4명의 당주였다.
“당신이 청오방주요?”
“네, 그렇습니다. 대인.”
“나에 대해선 이미 들었으리라 보오. 긴말하지 않겠소. 두 냥씩만 내시오.”
“두 냥이라면…….”
가단량의 얼굴이 뜨악하게 변했다. 두 냥이라니. 도무지 무슨 말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지부대인 정승구를 만났을 때만해도
기겁할 듯 놀랐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선 보고조차 받지 못했는데 서대시전의 모든 분타원들이 동창인물에게 불경죄를
저질러 잡혀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관에서 사갈마녀(蛇蝎魔女)라는 악명 높은 고명지(高明知)의 심복이라 하였다. 정승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
결과 비밀임무 수행을 방해한 것 때문이란 말을 들었다. 아울러 돈을 준비하라는 말도.
“내가 이곳에서 저기 있는 5명에게 맞은 매가 2천대요. 이곳에 있는 놈들이 전부 21명이니까 알아서 계산하시오. 아니면
옥에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안나오는 것도 방법이오. 우리 집은 알고 있을 거요. 그럼. 양지야 가자.”
가단량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은 야혼이 비대한 몸을 돌렸다. 모든 일과의 마무리였다.
“참! 이곳 서대시전은 내 구역이요.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이곳에 발을 붙이는 청오방 무리가 있으면 그땐…….”
“알겠습니다. 이곳은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청오방주 가단량 역시 떠나는 야혼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야혼이란 자가 원하는 금액을 대충 계산해도 만 냥이다. 만냥이면 대 문파를 무려 2달을 꾸려나갈 엄청난 금액인 것이다.
하지만 만 냥 가지고는 턱도 없을 터였다. 최소한 그가 원하는 값의 두 배는 주어야 해결될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지 않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부대인 정승구가 인정한 사람이다.
“빌어먹을, 숨겨놓은 돈까지 전부 거덜나게 생겼군……. 일단은 준다. 하지만 확인해 보겠다. 네 놈이 정말 동창의 개인지,
아닌지.”
‘우양(雨洋)!’
‘네, 방주님.’
‘본산에 전해라. 놈의 인상착의를 알리고 조사해달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가단량의 지시를 받은 우양이란 자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본산이란 곳은 어디를 말하는지.
한가지는 분명했다. 하오밀문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청오방(靑烏幫)은 결코 단순한 삼류조직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3)- 다 세웠으니 찔러 넣기만 하면 되나?(1)
다 세웠으니 찔러 넣기만 하면 되나?
그날 밤, 야혼과 양지는 일을 나가지 않았다. 지부대인과 청오방에서 가져온 궤짝 속의 은자를 세느라 일나갈 시간이 없었다.
“1211, 1212, 1213…….”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야혼은 당장이라도 말할 수 있다. 궤짝 안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돈을
세는 일이라고.
연신 헤벌쭉 거리며 돈을 세던 야혼은 제 손이 검게 변해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오직 상자 속에 남은 은자의 양을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양지야!”
“왜요?”
양지 또한 야혼과 다를 바 없었다. 머리에 털 나고 지금처럼 많은 돈은 처음이었다. 번쩍이는 은자를 황홀하게 쳐다보며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밥 안 먹냐?”
“아저씨, 이 돈을 보고도 밥 생각이 나요? 나는 쳐다보고만 있어도 배부르구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점점 은자가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무튼 힘이 있어야 셀 것 아냐!”
생글거리는 양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듣는 신청도 하지 않고 여전히 돈을 세고 있는 양지의 행동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향에 연락해서 돈 좀 부쳐준다고 해라. 이거 절반은 네 몫이니까.”
“정말요? 정말 이 돈의 절반을 날 준다고? 설마…….”
“얘가 속고만 살았나? 어쨌든 이건 너 때문에 번거잖어. 그러니까 자격이 있지.”
“그래도 너무 많은데. 쓸 정도만 있으면 돼요.”
“너무 많아서 싫다고?”
“송충이에게는 솔잎만 많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갈잎까지 많아지면 배 터져 죽는다고요.”
“너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냐?”
“우리 할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에요. 분수껏 살아라 했지요.”
옛날 생각이 나는 듯 양지가 아련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난, 평생을 쫓아다닌 업보였다. 제 집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집들은 자식을 팔아 연명하는 집도 있었다.
특히 여자아이는 사내아이보다 배 이상의 값을 받는다. 해서 양민들은 아들보다는 딸을 더 선호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풀뿌리로 연명하면서도 딸내미만은 팔지 않았다. 상인들이 찾아와 몇 번이나 팔아라 했지만 같이 죽었으면
죽었지 팔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 덕에 빈약한 가슴이 되었지만 오히려 작은 젖가슴이 자랑스러웠다. 그건 어머니의
사랑이었기에.
“그래 네 말이 맞다. 제 분수를 알아야지, 멋모르고 달려들면 나처럼 변한다. 하루아침에 병신이 된다고.”
“맞아요. 많다고 과용하면 절대 안 되지요. 뚱띵이 아저씨는 계속 돈이나 세라구요. 난 집에 서찰 쓸 테니.”
“밥은?”
“은자 씹어 먹어욧.”
야혼에게 혀를 날름 내보인 양지가 이내 지필묵을 준비해 서찰을 쓰기 시작했다.
“후-우!”
처음에는 일사천리로 써 나가던 양지가 턱을 괴며 느닷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또? 돈도 생겼겠다. 이제 어머니와 동생들 걱정도 덜었는데.”
혓바닥까지 새까매진 야혼이 양지를 향해 말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걱정 안 해요. 첩형언니에게 쓸 보고서 때문에 그러지.”
“아! 맞다. 내일은 보고서 보내야 한다고 했지?”
도살장에서 양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울러 그녀가 요구했던 사항도.
“일단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써라. 위에 인사말은 네가 알아서 하고 내용만 불러주마.”
빙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보고서에 적힐 내용을 천천히 불러주었다.
“안되겠다. 이리 줘봐.”
한참을 불러주다 성에 차지 않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야혼이 양지의 손에서 붓을 빼앗아 들었다. 직접 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전부 암호로 써야하는데?”
“내가 적어주면 그걸 다시 옮기면 되잖아. 이거 쓰고 있을 테니까 나가서 상이나 차려와.”
“좋아요.”
고민했던 일이 사라지자 양지가 배시시 웃으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녀 또한 배가 고팠던 참이었는지라 주방에 들어가자마자 손을 바삐 놀렸다.
툭탁거리는 도마질 소리를 가만히 듣던 야혼이 이내 붓을 움직여 글을 써 내려갔다. 쓰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던 야혼이 잠시 후
싱긋 미소를 지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뭐 한번 같이 잔 사인데 굳이 나쁜 놈으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
“우와! 뚱띵이 아저씨 글씨 무쟈게 잘 쓰네?”
상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온 양지가 탁자 위의 글을 쳐다보더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많은 글을 보지는 못했지만 야혼이 쓴 글만큼 깔끔한 글체는 처음이었다. 천하의 명필이 따로 없었다.
“이 글을 왕희지체(王羲之體)라 하는데 소싯적에 배운 글이다.”
자신이 써 놓고도 자랑스러운 듯 야혼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듣기론 글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스며있다 하던데 아저씬 무슨 마음을 먹고 썼어요?”
고명지 곁에 있으면서 얻어들은 풍월이었다. 같잖지도 않은 글을 두고 대단하다는 둥, 대쪽같은 성정이 보인다는 둥 하는 미친
작자들의 말을 많이 들었던 터였다.
“양지야, 그건 다 밥 처먹고 할 일 없는 새끼들이, 소화시킬 건수 만들려고 하는 말이다. 모름지기 글이란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야. 상대방이 쉽게 알아보면 됐지 무슨 기세(氣勢)는 무슨. 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실은 야혼이 글씨체를 배우게 된 배경은 단순했다. 여자를 후리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연서였다.
특히 좀 한다하는 집안의 계집들을 꼬실 때 써먹었던 이름이 북경의 주전상이다보니 괴발개발 글을 쓸 수는 없었다.
어떤 글을 배울까 고민하던 그에게 해결법을 제시한 사람은 서점 주인이었다. 춘서를 사러 자주 들르는 서점 주인의 말이
왕희지체는 엄청난 고가로 팔리고, 글이 아닌 예술품으로 인정한다는 말을 듣고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완전한 주전상으로 거듭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왕희지체였다. 왕희지체로 한바탕 갈겨놓고 나 북경 사는
주전상이오, 하면 안 넘어오는 년이 없었다.
그러나, 왕희지체를 완벽하게 모방할 줄 알지만 이름을 제외하고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아하! 바로 그거였군. 야바위 도박꾼이 무슨 글인가 했더니 여자 후리려고 뭐 빠지게 배웠구나?”
“밥 먹자. 빨리 먹고 돈 세야지.”
멋쩍은 듯 야혼이 상을 끌어당겼다.
“아저씨 나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야혼을 쳐다보는 양지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어렸다.
“네가 그런 얼굴로 쳐다볼 때마다 난 무섭다.”
“아냐 이번에는 간단한 거야. 음! 아저씨가 여자를 판단하는 기준이랄까 하는 것 좀 말해달라고.”
“돈 때문에 맛이 갔나 얘가 왜이래?”
양지의 느닷없는 말에 야혼이 황당한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많은 돈을 보더니 드디어 미쳤나 싶은 눈빛으로.
“우리 같은 것들은 이런 게 소화시킬 건수잖아요.”
“좋다. 음 우선은 이 야혼이 여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호칭에서 결정 난다.”
“호칭? 낭자, 소저 이런 거?”
“그렇지. 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여자를 부를 땐 낭자, 잘 가능성이 보이는 여자는 소저, 자고 싶은 여자는 년, 자주
자는 여자는 꿀물, 한번 잤지만 다시 안자는 여자도 년.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그럼 지금까지 아저씨 입에서 낭자라 부른 여자가 있었어요?”
“당연히 없었지.”
“그럼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이년 저년 했던 건 자고 싶었다는 뜻?”
“처음엔 그랬는데 일단 보류했다. 너무 빈약해서.”
“우씨! 밥 이리 줘요.”
야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밥그릇을 낚아채 간 양지가 입안으로 마구 쑤셔 넣기 시작했다. 또 가슴타령이었다. 서대시전에
색골이라 소문난 야혼이 날이면 날마다 같이 자는 자신을 가만 두기에 이상하다 생각했더니 그게 바로 빈약한 가슴 때문이란다.
“천천히 먹어라. 그런다고 작은 가슴이 하루아침에 커지기야 한다더냐?”
“가슴은 몰라도 살은 많이 쪘다고요.”
양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과거에 살이 찌지 않았던 건 순전히 고명지 탓이었다. 몸매 관리를 위해 그녀가 많이 먹지 않자
덩달아 먹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야혼과 같이 있으면서 늘어난 식사량 때문인지 무서운 속도로 살이 붙어 가는 중이었다.
“내일부터는 바쁘니까 일찍 자라.”
“또 칼 갈러 가는 거예요?”
“그래 임마, 얼마 안 남았는데 부지런히 해치워버려야지.”
“그런데 운기행공(運氣行功)을 그런 식으로 해도 되요?”
야혼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예전 동창에서 무공을 배울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내용이 운기행공을
할 땐 잡념을 없애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혼은 아니었다. 연신 도를 갈아대면서 삼매경에 빠져버리는 듯했다. 아니 운기행공이 확실했다. 운기행공이 아니라면
3시진 동안 도를 갈지 못할 터였다.
“글쎄 습관이 돼서 그런지 이게 더 편하거든. 집중도 잘되고. 아니면 훌륭한 내공심법이라서 그런지도.”
야혼 또한 양지와 같은 생각으로 고민한 적이 있었다. 도를 갈지 않은 상태로 운기행공을 하면 효과가 더 클 것 같아 시도해
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오히려 자꾸만 밀려드는 잡생각 때문에 머릿속만 더 혼란스러웠던 거였다.
“여하튼 다 갈고 나면 다른 방법이 생기겠지. 너도 놀지 말고 부지런히 익혀.”
“쳇! 내공만 있으면 해결되네요. 제 걱정은 마시고 일이나 보세요. 한번 볼래요?”
야혼을 향해 눈을 흘긴 양지가 한쪽 구석에 두었던 검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이 대마수미혜검(大魔須彌慧劒)은 신행미종보(神行迷踵步)를 바탕으로 하여 펼치는 거예요.”
마치 야혼에게 무공을 가르치듯 검 끝으로 바닥에 반 장 크기의 원을 그린 양지가 그 안에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가볍게 앞으로 나간다 싶더니 이내 뒤로 물러서고, 연신 좌우로 보법을 밟았다.
연녹색의 자리옷 소매가 허공을 휘감아 치며 궤적을 남기는 순간 양지의 입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라수미파(魔羅須彌破)!”
한순간 검을 쥔 손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자 대여섯 개의 푸른 광채가 사방에서 빛을 뿌렸다. 위쪽을 찔러가던 검이 천지를
양단하듯 공간을 잘랐다. 지면을 스쳐가던 양지의 검이 다시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왼쪽과 오른쪽에 광채를 남겼고 뒤이어 조금
커진 그녀의 일갈이 터졌다.
“마라수미참(魔羅須彌斬)!”
밤하늘에 울려 퍼진 양지의 고함소리만큼이나 마라수미참의 살기는 강했다. 십여 개의 검이 사방에서 요동쳤다. 거센 바람이 불
듯 흘러나온 살기가 그녀의 주변을 친친 에워쌌다.
“얘가……?”
양지가 보여준 검무에 일순 할말을 잃었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혼자 힘으로 대마수미혜검을 익혀버린 양지의 능력에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비록 동창에서 기초를 닦았다고 하지만, 대마수미혜검은 10대 문파의 한곳인 아미파의 대표적인 검법이다.
그런 검법을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동안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다니.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물론 세세한 변화까지는
아직 무리겠지만 비급에 기록된 초식은 똑같이 재현해 내고 있었다.
야혼의 놀람에도 아랑곳없이 양지의 몸놀림은 더욱 거세졌다. 더하여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살기 또한 살이 엘 정도로 차갑게
변했다.
대마수미혜검의 마지막 초식인 마라수미황(魔羅須彌荒)을 펼치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헉! 이런!”
해쓱하게 변한 양지의 얼굴을 확인한 야혼이 몸을 날려 그녀를 제지했다. 내공이 일천한 상태에서 더 이상 방치하면 내공의
폭주상태인 주화입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2초까지는 가능했으나 더 이상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었다. 처음 야혼에게 당했을 때보다 3배 이상
강해져 있었다.
“아저씨, 나 연검(軟劒)하나 구해주세요.”
“연검? 그 허리에 감고 다닌다는 검을 말하는 거냐.”
연검(軟劒)이란 허리에 찰 수 있는 요대형식으로 만들어진 검을 말한다. 강함보다는 유연함을 위주로 만들어진 검으로 다루기가
상당히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다.
“네. 원래 이 대마수미혜검법은 연검으로 펼쳐야 하는 거예요.”
“그랬구나……?”
조금 전 양지가 펼쳤던 검법이 조금 어색하다 싶었는데 연검을 사용하는 검법이라 그랬던 것이다.
“지금보다 두 배는 강해지겠구나?”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 연검으로 펼쳐야만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다고 나와 있었어요.”
“그래 알았다. 내일 어차피 대장간에 가야하니까 그때 하나 만들어 달라지 뭐. 그만 들어가 자라.”
“알았어요. 조금만 하고 들어와요. 혼자 자려니까 잠이 안 오잖아요.”
다음날 집을 나선 야혼과 양지는 서대시전 안 어느 대장간에 들어섰다.
깡! 까앙!
“어서 오게. 가짜 동창 대인.”
당 노야라 불리는 60대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헤엑! 할아버지 귀신이네? 뚱띵이 아저씨가 사기 쳤다는 걸 어찌 아셨어요?”
“험! 저 녀석이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봐왔는데 모를 리가 있겠느냐. 서대시전에 있는 장사치를 전부 잡고 물어보아라. 저
놈은 죽었으면 죽었지 남 밑에 있을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게다.”
“아닌데, 대부분 다 믿었는데? 아저씨, 대장간 할아버지 정체가 뭐죠?”
“나도 궁금하다. 네가 동창을 동원해서 좀 알아봐라.”
양지가 귓속말로 묻자 야혼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야혼 역시 당 노야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정 노인에게 받은 도를 들고 갔을 때도 단박에 묵령한철을 알아보는 건 물론이고,
그 도의 날을 세우려면 족히 몇 년은 걸린다했었다.
대장장이라 철(鐵)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 상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터였다. 더구나 무공을 익히고
다시 본 당 노야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연유로 서대시전에서 대장간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또한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정말 동창 사람이 맞느냐?”
“속고만 살았소? 얘는 정말 동창 사람이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부탁했던 것 다 됐소?”
“다됐다. 100냥이다.”
“헤액! 뭐가 그리 비싸. 접때 말하기는 50냥이면 된다고 했잖소.”
“싫으면 말고. 너 아니라도 팔 곳은 많다. 묵령한철만 못하지만 마안혈정(魔眼血晶)으로 만든 암기라면 최소한 500냥은
받는다.”
“마안혈정? 그게 뭐요?”
“그런 게 있다. 웬만한 철보다 강하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바쁘니까 살 거 아니면 가거라.”
“알았소, 주면 될 것 아뇨. 또 다른 주문이 있소.”
팩 소리를 친 야혼이 품에서 은자를 내밀었다. 애초에 깎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수중에 있는 비천묵룡도를 만든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물건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최상품일터였다.
“진작 그러지. 난 또……. 우선 이것부터 확인해라. 혈신월(血新月)이라 이름지었다.”
싱긋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온 당 노야가 눈앞으로 팔목에 차는 비호(臂護)를 내밀었다. 전에 부탁했던 물건인
모양이었다.
“네 녀석의 말대로 전부 36개다. 모양은 내가 조금 손을 봤다.”
단순히 팔목을 보호하는 비호가 아니었다. 가죽으로 되어있는 비호에, 물건을 넣을 수 있도록 가장자리를 빙 둘러 자그마한
주머니를 촘촘히 덧대어 놓은 것이다.
“이놈이다.”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자 붉은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우와! 이래서 마안혈정이라 했구나?”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붉은 물체를 바라본 양지가 감탄사를 발했다. 미묘한 색이었다. 붉은 색 속에 섞여있는 검은 기운은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붉은 초승달이라… 이름 좋은데요?”
혈신월이라 이름지었다는 암기를 가만히 살피던 야혼이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초승달 모양의 암기에서 미묘한 살기가
요동치는 듯했다.
“이름만 좋은 게 아니다. 보겠느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당 노야가 혈신월을 들어 전방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끼이익!
순간 붉은 광채를 뿌리며 날아가는 혈신월에서 날카로운 소성이 흘러나왔다. 더욱 놀라운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붉은 궤적을
남기고 날던 혈신월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척!
혈신월을 향해 비호를 들어올리자 마치 제 집을 찾아드는 새처럼 홀연히 주머니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지금처럼 소리가 나는 혈신월이 절반, 무음으로 움직이는 혈신월이 절반이다.”
“마물을 만들어 버렸군요.”
비호 속으로 들어간 혈신월을 쳐다보던 야혼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가 원했던 암기는 혈신월처럼 대단한 무기가
아니었다.
구약종의 무공 중 사사만화류(死死滿花流)위해 펼치는 방법을 대충 설명하고 암기를 부탁했었다. 헌데 당 노야는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도 상당한 살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암기를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날카로운 소성을 내는 암기와 소리 없이 날아다니는 암기가 서로 섞여다가온다면 자신이라도 피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비호를 양손에 차며 다른 주문을 늘어놓았다.
“일단 이놈은 됐고, 다른 주문이오. 책을 200권 정도 넣을 수 있는 철궤 하나를 만들어주시오. 물론 뚜껑은 나 혼자만
열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연검 한 자루.”
“그걸 어디에 쓰려고.”
당 노야가 잔뜩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200권의 책을 넣는 철궤라니. 보는 책이라 해봐야 춘서가 전부인 녀석이 아닌가.
더하여 연검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연검은 얘가 쓸 거요.”
“네가 연검을 익힌 모양이구나. 잘됐구나. 마침 하나 들어온 게 있는데 그냥 그걸로 할 테냐?”
“상태는 괜찮소?”
“물론, 품질은 내가 보증하지.”
“그래요? 일단 한번 봅시다.”
“이것도 100냥이다. 철궤도 100냥이고.”
한 쪽 벽에 걸려있던 요대를 야혼에게 내밀었다.
별반 특별할 것도 없는 단순한 요대처럼 보였던 그것이 연검인 모양이었다.
“연검도 상당하네?”
손잡이를 잡고 검을 뽑아낸 야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내공을 주입하자 축 늘어져 있던 검이 일직선으로 서며 은은한
청광이 흘러나왔다.
“이건 청사(靑蛇)라 하자. 푸른 뱀.”
“저도 마음에 들어요.”
검을 빼앗듯 낚아챈 양지가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까지 가져본 검 중에서 최고였다.
“조심해라. 전에 들고 있던 검과 같다고 생각하면 큰일난다.”
“걱정마세요 뚱띵이 아저씨. 벌써 새끼줄로 연습을 했네요.”
혀를 날름 내민 양지가 가볍게 청사를 휘두르자 그녀 주변으로 푸른 광채가 가득 생겨났다.
“손목이 너무 굳었잖아!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갔다고. 내가 전에 붉은 편을 쓰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편의 생명은 곧 손목이라고. 손목을 얼마나 유연하게 쓰느냐에 따라 위력이 천양지차로 바뀐다고 말이다.”
당가려에게 들은 말이었다. 거의 1장 길이에 달하는 혈린만독편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신기에 놀라 물었을 때 편(鞭)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던 것이다.
“호오! 그래 그 붉은 편을 쓴다는 아이는 실력이 괜찮더냐?”
“당연하지. 편으로 익히는 무공을 완성했는데. 어? 그러고 보니…….”
당 노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야혼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삼 생각해보니 당가려와 당 노야는 같은
성씨였다.
더구나 암기와 독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사천당가라 하였다. 그가 만든 암기가 바로 혈신월이었으니.
‘뭐 남의 사연까지는 신경 쓸 필요 없지. 하지만 노야가 당가의 인물이라면…….’
짐짓 태연한 척 하고는 있으나 당 노야는 몹시 동요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당가려나 아니면 사천당문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
분명할 터였다. 당 노야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야혼이 이내 표정을 풀었다.
“영감! 일 한가지 해주쇼.”
“이미 일은 해 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퍼뜩 정신을 차린 당 노야가 야혼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 말고 집을 지어야 하오.”
“집? 집을 짓는데 대장장이가 왜 필요해.”
“그게……. 천기마해(天機魔解)라는 책을 바탕으로 지어야하거든.”
“뭐라고! 지금 천기마해라 하였느냐?”
천기마해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당 노야가 고함을 내질렀다. 도대체 천기마해란 책이 무엇이기에 대장장이가 이렇게
놀라는지.
“왜 그리 놀라시오. 죽었던 딸이라도 돌아왔소?”
“너? 천기마해가 무슨 책인지 알고서 하는 말이냐?”
경악스런 얼굴을 한 당 노야가 믿기 어렵다는 듯이 되물었다. 100년 전 성모봉으로 떠난 성모척살대 중 제갈세가의
인물이었던 천기자(天機子) 제갈후(諸葛厚)가 남긴 책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상 그 책의 원 주인은 500년 전 기관의 대가였던 귀수(鬼手) 도양중(道陽中)이었다. 기관에 있어서는 그 이상 뛰어난
인물이 없다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 바로 그였다.
우연히 그의 유전이 제갈세가로 흘러 들어갔고, 그것을 해석한 책이 바로 천기마해였다. 당 노야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언놈이 썼는지 그게 그리 중요하오. 유용하게 써먹으면 그걸로 된 거지. 그럼 그 책을 보여주는 조건이면 공짜로도
일해주겠네?”
“정말 너에게 천기마해가 있느냐?”
묻는 말에는 대꾸도 없이 당 노야는 천기마해에 대해서만 물고 늘어졌다. 암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꿈의 서책이 바로
천기마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혼의 입에선 더 이상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가볍게 미소짓는 얼굴로 당 노야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런 우라질 놈! 알았어 이놈아. 한다 해.”
“좋소. 내일 양지 편에 책을 보내겠소.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보시오. 암기는 잘 쓰겠소.”
수중에서 은자 200냥을 꺼내 탁자 위에 놓고 밖으로 나오던 야혼이 문 앞에서 당 노야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예쁘게 컸습디다. 맑고, 밝고, 그리고 곧게……. 나 같은 놈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멀어지는 야혼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당 노야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방금 전까지 천기마해를 탐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회한과 고통이 가득한 얼굴로 우두커니 앞을 노려볼 뿐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본인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직은.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4)- 다 세웠으니 찔러 넣기만 하면 되나?(2)
“아저씨!”
“왜?”
“대장간 할아버지 말이에요. 평범한 사람은 아니죠?”
선물로 받은 청사를 열심히 휘두르던 양지가 잔뜩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너, 대단하다. 그런 걸 다 파악해내고.”
사실 양지의 능력에 야혼도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물론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면
당 노야의 정체를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양지가 의문을 제기한 건 처음 당 노야를 만났을 때였다.
어수룩한 듯하면서 사물을 보는 눈은 의외로 예리했다.
“에이 아저씨도. 그런 건 동창에서 전부 가르쳐 준다고요.”
“물론 그랬겠지. 하지만 그걸 자기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양지의 능력을 뛰어나다고 보는 점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람을 판단하는 눈은 배운다해서 익혀지는 게 결코 아니다.
많은 경험을 가졌던지 아니면 주변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양지는 후자였다. 단순히 몇
가지 환경을 조합하여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을 보였다. 더하여 무공을 익히는 능력 역시나 상당한 것을 보면 그녀는 흙 속에
묻혀있던 보석임에 분명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우리 어딜 가는 거죠?”
“도살장!”
“고기 얻으러?”
“그래 고기 얻으러 간다. 이 먹보야.”
사실은 고기보다는 혈신월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살장에 도착한 야혼은 혈신월을 이용해서 사사만화류를 펼쳐보지 못했다.
오자마자 이정에게 잡혀, 전에 와본 적도 없는 골방에 틀어박혀 셀 수도 없이 많은 서류뭉치를 읽어야 했다.
“제기랄, 소 잡는 놈들이 왜 강호 정세에 이리 관심이 많은 거야? 소만 열심히 잡으면 만고 땡인 팔자들이.”
강세웅이 기거하는 옆방에 들어선 야혼 앞에는 엄청난 사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오밀문에서나 있어야할 강호무림의 정보들이
이곳에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 있던 정육점 등지에서 수합된 소문들이 하나의 정보가 되어 이정이 있는 이곳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면 될 것 아뇨.”
“그게 쉽겠느냐. 우리가 쓰는 도구가 살상을 위한 칼인데.”
도백들이 무공을 익힌 건 의도했던 게 아니라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소에게 더 편안한 죽음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방법을 연구하다보니 자연 무공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실력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상당수의 도백들이 무공을 가지게 되다보니 무림세력에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을 도와주면 아무소리 없다가 혹여 거부라도 하게되면 가차없이 철퇴를 내렸다. 과거에 숱한 경험을 했고, 언제 또 그런
경우를 당할지 알 수가 없어 강호무림의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했던 일이 세월이 지나자 도백회의 일처럼 되어버렸고, 각 정육점에서는 어김없이 정보를 보내왔다. 힘
또한 과거에 비해 비할 수 없이 강해졌다.
이제는 스스로를 지킬 수준은 되었던 것이다.
“근데 여기 있는 이것들이 전부 마도련인가 하는 놈들의 하수인 거  맞소? 수양표국(首陽鏢局), 공운산장(空運山莊),
화영루(火英樓), 마웅채(魔雄寨)……. 종류도 다양하네?”
마도련에 대한 자료를 보던 야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들이 운영하는 표국(鏢局)이나 무도관등이 20여 곳이나 되었다.
“그들도 인간인데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냐.”
“그럼 청오방인가 하는 놈들도 같은 족속들인가? 그 놈들에 대한 정보는 없소?”
“아직 없다. 무림 세력도 아닌 우리가 서둘러 밝힐 필요는 없지. 그냥 기다리다보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텐데.”
일반 무림 방파와 도백회와의 차이점이었다. 도백회는 강호방파가 아니었기에 새로운 세력의 출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 방파는 다르다. 그들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이 바로 신진세력의 출현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고 알았소. 그건 다른 쪽에 일임했으니 알아서 하겠지 뭐. 근데 이 새끼들에 대한 건 더 없소?”
“마옥성(魔獄城) 말이냐? 거기 적힌 사람들 말고는 별로 특별한 게 없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곳이니까.
그런데 웬 관심이냐?”
야혼의 몸에서 미묘한 기운이 흐르는 걸 감지한 이정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하루 동안 서류뭉치는 보이던 야혼이 처음 관심을
보인 단체가 마옥성이었던 탓이었다.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10대 문파라는 곳이 있는데 이런 놈들이 어떻게 자리를 틀었나 싶어서 말이오. 하여튼
알았소.”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이제는 가능성이 더 커졌고.’
마옥성이라 쓰여진 책자를 가만히 노려보던 야혼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하지만 쉽게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너?”
화들짝 놀라는 이정. 야혼의 손에 들려있던 책자가 가루가 되어버렸다.
“이 책이 많이 낡았나보네?”
바닥으로 떨어진 재를 발로 비비며 야혼이 어설프게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올린 모양이었다.
“하오밀문을 맡기로 결정했느냐?”
야혼의 모습을 가만 쳐다보던 이정이 말머리를 돌렸다. 야혼의 어린 시절과 관련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밝히려했으면 벌써 10년 전에 얘기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뭐가 있어야 맡던지 하지. 아무것도 없는데.”
야혼 또한 무덤덤한 얼굴로 가볍게 응수했다.
“하오문을 다시 짓기로 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당 노야를 시켜서. 어떻게 그 고집센 노인을 설득했냐?”
“강 노인은 다리가 없지 않소.”
대장간 당 노야에게 천기마해를 주고 시킨 일이 바로 타버린 하오밀문 자리에 새롭게 건물을 세우는 작업이었다. 이번에는
과거처럼 그런 건물을 짓지 않을 참이었다. 누구도 들어가지 못할 철옹성을 만들어버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가져가라. 이제는 네 물건이다.”
“아, 망치! 근데 말이오, 정말 이 망치……. 못박는 것 말고 쓸 수 있을까요?”
이정이 내민 도백철추(屠白鐵鎚)를 받아든 야혼이 의심스런 눈으로 물었다. 전에도 이정에게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말로만
장문영부라 했지 지금껏 이곳에 도백회원들이 모인 꼴을 한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 다른 용도로 써먹고 싶냐?”
“이왕 손에 들어왔는데 한번은 써먹어 하지 않겠소? 강호 무림을 사그리 없애버리라고 할까?”
“도백회의 힘으로? 꿈도 크다 이 녀석아.”
“에이, 힘으로 그들을 어떻게 없앱니까? 그놈들이 먹는 고기에 독을 풀면 몰라도. 한 1년간을 지속적으로 먹이는 거지.
거의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만성독약으로. 아니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춘약을…….씨발 거 무식하니 좋은 방법이네. 아예 전부
복상사 시켜버리면 되겠다.”
“에라 이 나쁜 놈아.”
야혼의 말을 듣던 이정이 황당하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야혼의 성격으로 보건대 정말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왜 그러쇼? 좋잖아. 정력이 좋아지는 고기. 매상은 몇 배로 오르겠구먼.”
자신이 생각해도 대견한 듯 이정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밖으로 나왔다. 반드시 써먹고 말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근데 이 얘가 어디 갔지? 아직 심부름 가서 안 왔나?”
“저쪽 강가로 가더구나.”
사방을 둘러보며 양지를 찾는 야혼을 향해 일꾼 한 사람이 황하 쪽을 가리켰다.
한편 황하 강변에 있던 양지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야혼이 적어준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이미 며칠 전에 암호로 작성한 보고서는 고명지에게 보냈고, 지금은 야혼을 기다리면서 심심풀이로 다시 한번 읽어보는
중이었다.
“훗! 그날 밤을 잊지 못하고 명지 언니의 말을 자주 한다고?”
야혼이 적어준 보고서는 가관이었다. 오직 본인에 대한 칭찬일색의 글이었다. 서대시전 상인들이 환영식을 해줬다는 말부터
시작하여, 지부대인이 찾아와 금일봉을 주고 갔다는 거짓말까지, 실제 보고내용이었던 청오방에 대한 내용은 단 한 줄에
불과했다.
-야혼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청오방과 접촉했다. 조사요망.
그리고는 전부가 자기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헹! 뚱띵이 아저씨는 절대 모를 거다. 얼마 안 있어 직접 청해성으로 갈 거라는 내용을 추가했다는 걸. 어디서 날
속이려고.”
양지 또한 야혼의 내심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하오밀문의 문주까지는 몰라도 9만 냥의 빚을 받기 위해 청해성을 찾을 거란
사실은 익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첩형 언니 배꼽 잡고 있을거야.”
그랬다. 양지가 읽고 있던 보고서를 고명지 또한 청화루(靑花樓)에서 읽고 있었다.
양지의 짐작대로였다. 보고서를 읽던 고명지는 급기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포복절도(抱腹絶倒)하고 말았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자기가 엄청난 미남이었다고 한 대목 때문이었다. 얼굴은 정확하게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숨쉬기조차
힘들어했던 야혼의 몸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 자가 개봉 최고의 한량이었다니.
“뭐? 녀석이 지나가면 주변에 여자들이 신음을 지르며 주저앉았다고?”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야혼의 절륜한 밤 기술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개봉에서 가장 한량이 그였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하여 마지막에 쓰여진 글이라니.
양지가 정부로 들어앉았는데 지금껏 한번도 안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게 다 자신 때문이라 하였다. 청월루에서 함께 한 하룻밤을 잊지 못해 차마 다른 여자를 안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훗! 미친 놈! 내 피부가 비단결보다 더 부드럽다고? 양지가 내 부하인줄 알고 별소릴 다했구나. 하긴 내 피부가
부드럽기는 하지. 날이면 날마다 장미꽃으로 목욕을 하는데…….”
슬쩍 미소를 머금은 고명지가 손끝으로 몸의 굴곡을 따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신의 몸에서 가장 큰 매력을 찾으라면 단연
피부다. 만지면 튕겨나갈 듯한 탄력 있는 피부에 부드러움까지, 어디에다 내놓아도 결코 빠진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나에게 한번 빠진 자는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은 위금충이 증명했다. 야혼 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어디서 나
같은 피부를 가진 여인을 만나보았겠느냐. ……수운 목욕물 준비되었느냐?”
“네 첩형!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개봉에 보면 청오방이란 삼류 방파가 있다. 그들의 모든 것을 낱낱이 밝혀 보고하라고 해라. 특히 배후에 신경
쓰도록.”
“알겠습니다.”
“룰루루! 루루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명지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선 욕실 안은 온통 꽃향기로 가득했다. 향기의 진원지는 바로
욕조였다. 그 안에 붉은 장미 꽃잎이 가득 들어차 있다. 과거 당나라, 양귀비가 가장 즐겨 사용했다는 목욕재료가 바로
장미였다.
“훗! 다른 여자하고는 잠을 자지 못한다고?”
장미 꽃잎으로 몸을 닦아내던 고명지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계를 가졌던 남자가
자신을 잊지 못한다는 말은 묘한 설렘을 가져다주었다.
*   *   *
“하악! 아저씨 그동안 굶었다고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이러다 양지 죽어요.”
백무(白霧)와 적무(赤霧)가 요동치는 실내에서 벌거벗은 두 남녀가 거친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위에서 연신 방아질을 하고
있는 여인은 양지였고, 아래쪽에서 허리를 퉁기는 인간은 야혼이었다.
도살장에서 돌아온 그날 양지가 드디어 영약 복용할 날을 잡았던 것이었다.
연신 신음을 지르면서도 양지는 결코 쉬지 않았다. 자신의 단전에 있던 미약한 내기를 야혼의 몸 속으로 끊임없이 밀어
넣었다.
용봉환락무의 가장 훌륭한 기능은 바로 이점이었다. 서로 다른 내기를 하나로 만들어준다는 점이었다.
내공을 타인에게 건네주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천양지차였다. 보통 타인에게 내공을 건네 받게 되면 자신의 내공으로 만들기 위해
상당한 기간동안 운기행공을 해야한다. 하지만 용봉환락무는 그 상당한 기간을 아예 없어버리는 엄청난 심법이었던 것이다.
즉 양지의 내기를 받아들인 야혼이 그것을 자신의 내공과 합쳐 다시 보내주기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의 내공이 되어버린다.
어떻게 보면 내공 전이에 있어서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용봉환락무였다.
벌써 4번째였다. 처음 시작이야 양지가 했지만 바로 야혼에게 주도권이 넘어갔고 양지가 하는 일이라곤 연신 비음을 질러대는
것밖에 없었다.
“잔소리 그만하고 집중해라. 지금이 가장 중요하단 말이다.”
양지의 몸 속에서 일고 있는 거센 기운을 느낀 야혼이 더욱 박차를 가해 내공을 주입했다. 내부에 이는 욕정이 강해질수록
용봉환락무의 효과는 배가된다. 때문에 자신보다는 양지가 더욱 관계에 집중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아저씨 몸을 봐요 집중이 되겠는가. 아무리 눈을 감아도 출렁거리는 살이 떠오르는걸 어떡해요. 하악!”
“너어?”
양지의 말에 잔뜩 인상을 찌푸린 야혼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그리곤 사정없이 방아를 찍어버렸다.
내공마저 사용하고 있는 듯 그의 양손이 검게 물들었다. 온몸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금강철피공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양지의 엉덩이가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고 덩달아 그녀의 몸에서 한결 농밀한 백무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왔다.
“아-아-아-아-!”
양지의 입에서 밭은 비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아래쪽에 와 닿는 쾌감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동창에서 훈련을 받을
때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고 바로 떨어져 나간 교관들에게서는 지금과 같은 쾌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몸이 스스로 반응을 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흰 백태를 드러내더니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야혼의 가슴을 틀어쥐며 끝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야혼도 양지와 다를 바 없었다. 거의 한 달만에 갖는 관계 때문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명지와 달리 양지는
방중술의 달인이었다. 동창에서 배운 게 방중술과 추적술밖에 없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내공을 이용하는 자신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녀가 야혼보다 먼저 기절한 이유는 야혼이 강해서라기보다는 오직 내공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성공했다. 썅! 방중술을 정통으로 배운 년을 보냈잖아. 이제 시작일 뿐이야. 이 뚱뗑이 몸만 정상으로 만들면 너는
한 주먹거리도 안 돼.”
가슴 위에 널브러진 양지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며 미소를 머금었다.
“어라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잠들면 안 돼. 양지 얘는 아직 내공도 별로 안 된다고…….”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올리려 안간힘을 쓰던 야혼이 그대로 잠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그날 밤의 관계는 시작에 불과했다. 늦바람이 더 무섭다고, 양지는 집요했다.
눈을 뜨자마자 운기행공을 하더니 다시 야혼을 덮쳤다. 물론 핑계는 있었다. 야혼의 살을 빼준다는 것과 자신의 내공을
높인다는 명목.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쾌감까지, 무려 일거사득이란 표현을 쓰면서 야혼을 탐했다.
영약 섭취를 어느 정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지의 두 눈에서 신광이 쏟아져 나오고 아무런 사전동작 없이 10장 이상을
움직여 가는 것을 끝으로 그녀의 마수에서 풀려났다.
“수많은 여자를 접했지만 여자가 싫어보기는 네가 처음이다.”
“나하곤 반대네? 수많은 정도는 아니고 많은 남자를 접해보았지만 남자가 좋아보기는 아저씨가 처음인데. 남자가 아니고
거시긴가? 거시기도 아저씨의 일부니까 그게 좋으면 다 좋은 거지 뭐.”
“너는 좋겠다.”
“그래도 아저씬 이 양지에게 고마워해야 해. 이런 뚱띵이을 누가 받아주겠어. 나나 되니까 참고 받아줬지.”
“너?”
“너무 기죽지 말고. 이젠 아저씨 몸도 좋아지기 시작했으니까. 참! 언제 떠나요?”
“다 세웠으니까 이젠 찔러 넣어야지.”
“또 세웠어? 난 힘든데…….”
배시시 웃으며 양지가 바짝 다가오자 야혼이 화들짝 떨어져나갔다.
“너 말고 이년아. 비천묵룡도의 날을 전부 세웠다고.”
“고마워요, 야랑.”
“너 랑이란 말이 어디에 쓰는 말인 줄 알고 하는 말이냐?”
“물론이지요. 저도 아저씨처럼 호칭으로 상대를 분류하기로 했어요. 처음 만난 사람 중에 한번도 자지 않은 남자는 공자,
한번 잔 남자는 상공, 생각날 때 같이 자는 남자는 랑, 자주자는 남자는 꿀물, 이젠 안자는 과거의 남자는 그 자식, 놈,
개. 어때요, 괜찮지요?”
야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내린 야혼의 등급은 랑(郞)이었다. 생각날 때 같이 자고 싶은
남자.
“그래 자자. 한숨 푹 자고 그때 바로 출발하자.”
포기한 듯 야혼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18살이란 양지의 나이가 믿어지질 않았다. 물론 자신 또한 22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양지가 한 수 위처럼 느껴졌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5)- 또 소금 뿌리면 죽어!(1)
또 소금뿌리면 죽어
뜨거운 열기가 확확 피어오르는 어느 여름날, 개봉의 서대시전은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밤 장사를
시작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건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가만 살펴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물건을 들고 가는 상인들의 발걸음이 전부 한곳으로 통했다.
서문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사두마차가 그들의 최종 목적지였다.
마차의 모습 또한 특이했다. 철갑을 두른 듯 검은빛이 일렁대는 외벽, 마차 지붕에서 사방으로 길게 내려뜨린 주렴이 바람결에
찰랑였다. 더하여 안 쪽에 자리한 푹신한 침대까지. 장거리 여행을 준비하는 마차임에 틀림없었다.
“이봐, 건초는 필요 없으니까 귀리만 실어!”
시전의 장사치가 가져온 건초를 퇴짜 놓고 야혼은 마차 이곳 저곳을 점검했다. 마도련을 향해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양지야, 이 미친년 고쟁이 같은 건 다 뭐냐?”
마차 사방에 주렁주렁 매달린 주렴을 가리키며 양지를 불렀다. 제 딴에는 멋있게 꾸미려고 했던 건 같은데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꼭, 말을 해도……. 다른 사람은 전부 예쁘다 그러더만.”
칭칭 엉킨 주렴을 풀어내던 양지가 사납게 눈을 흘겼다. 사실 주렴은 돈주고 산 건 아니었다. 행운을 빌어준다는 의미로 시전
사람들이 선물한 것들을 대충 매달아 놓다보니 이런 꼴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마침 마차 창문을 가리기에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에 걸어둔 건데, 미친년 고쟁이라니.
“주방기구는 챙겼냐?”
“당연하지요. 집에서 쓰던 것 가져왔어요.”
한쪽 구석 조그마한 상자 속엔 솥부터 시작하여 갖가지 주방기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디 보자. 넓이는 충분하고…….”
바깥쪽 점검을 마친 야혼이 이번에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생각보다 넓었다.
마차 왼 벽을 따라 두 사람이 누울 정도의 침대가,  반대편으로는 침대 너비와 맞먹는 길다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당 노야에게 주문했던 무쇠로 된 상자 일부분이 침대 발치 밖으로 조금 삐쳐 나와 있었다. 미리 상자를 숨길 수
있도록 마차 아래쪽으로 빈 공간을 만들어두었다. 누구에게 들킬세라 서둘러 발판을 이용하여 철궤를 가린 야혼이 그 위로
주방기구가 담긴 상자를 올려놓고는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앞쪽 또한 침대 높이에 맞춰 창문을 만들어 안 쪽으로부터 마부석까지 바로 움직일 수 있게 해
두었다.
노숙을 한다거나 할 때는 창문만 닫으면 바로 아늑한 방으로 바뀌도록 설계된 마차였다.
“가만……. 쥐눈!”
한참 동안 마차 안을 살피던 야혼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왜 그러나?”
야혼에게 쥐눈이라 불리는 이불집 주인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이불이 없잖아. 이불이.”
“알았네. 내 하나 가져다줌세. 그런데 오래 걸리는 일인가?”
“어라? 이 양반이. 왜 내가 떠난다니까 아쉽소? 좋아할 줄 알았는데.”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캐묻는 쥐눈의 행동에 야혼이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전에 떠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서대시전 상인들이 아쉬워하는 얼굴로 쳐다보곤 했던 것이었다.
물건을 실어주는 것도 그랬다. 그 중엔 꽤나 정성을 들여 만들었음직한 음식들만도 상당했다.
“청오방 놈들이 다시 올까봐 그렇지, 뚱띵이가 좋아서간? 둘 다 똑같은 놈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뚱띵이는 돈은 갈취하진
않았으니까 그나마 좀 나은 거지.”
영문 몰라 하던 야혼의 얼굴을 무참하게 만든 양지가 쥐눈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걱정마세요 이불 아저씨. 단단히 혼내 놨으니까 아마 오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지부대인에게 다시 한번 일러두었어요.”
“고맙네. 양지소저.”
“이봐 쥐눈, 청오방 놈들을 몰아낸 사람은 난데 왜 양지 이년에게 고맙다고 하는 거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던 야혼이 대뜸 씩씩대며 쥐눈을 노려보았다.
“당 할아버지 말 못 들었어요? 뚱띵이 아저씨가 가짜 동창대인이란 사실을 전부 알고 있다고 했잖아요. 잔말 말고 타기나
해요. 민폐 그만 끼치고, 가요.”
“잠시만 기다려! 아직 할 말 남았으니까.”
양지에게 눈을 부라린 야혼이 마차 지붕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사방을 둘러보며 귀청 떨어져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지금 이 야혼 길을 떠난다! 만일 다음에 돌아왔을 때 이 야혼 자리에 소금 뿌려져 있으면 죽어, 알았어!”
삿대질을 하며 상인들을 향해 일장 연설을 날린 야혼이 마차 안으로 들어와서는 당 노야가 만들어준 상자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양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출발!”
“이럇!”
야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지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재미있을 거야, 아마 100배는 더 재미있을 거라고. 그건 내가 장담한다.”
멀어지는 개봉을 쳐다보며 혼잣말로 주절댔다. 그런데 그의 양손이 검게 변해있었다. 검게 변할 이유는 한가지밖에 없다. 그의
독문 무공으로 변해버린 금강철피공을 잔뜩 끌어올렸을 때 보이는 현상이다. 마음속에 커다란 격랑이 일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격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봉을 떠난 야혼과 양지의 일정은 순조로웠다.
관도(官道)를 따라 이동하는 검은 마차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태평성대(太平聖代), 속내까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일단 외적으로 드러난 상황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말 그대로 평화의 시대였다.
“양지야, 우리가 가야할 길을 한번 읊어 보거라.”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열기가 몹시 거슬렸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야혼은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공연히 철판을 댔다 싶었다.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철판을 댔는데 그 때문에 마차 안이 더욱 찜통이
되어갔다.
달궈진 철판에서 발생하는 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뜨거웠다. 더구나 몸까지 비대하다보니, 앉아만 있는데도 비 오듯 땀이
흘렀다.
“계속 서쪽으로만 가면 되요. 정주, 낙양, 서안, 난주까지. 겨울에나 도착할 수 있겠네요. 근데 정말 교대 안 해줄
거예요?”
“야 길 가던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부하를 두고 문주가 직접 마차를 몰고 가는 문파가 어디 있는지. 제대로 된
문파를 만들기 위해선 가장 선행되어야 할 일이 바로 위계질서다. 즉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일을 해야 한단 이 말이다.”
그랬다. 개봉을 떠나 10여일 정도를 왔지만 지금까지 야혼이 마차를 몰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니 마차 안에서 거의
움직이질 않았다.
식사도, 설거지도 궂은 일은 양지가 전부 도맡아했다. 한 낮의 불볕 더위를 이겨내며 마차를 모는 사람도 물론 양지였다.
야혼이 하는 일이라고는 오직 먹고 싸는 게 전부였다. 아니 한가지 하는 일이 있긴 있었다. 상자 속에 담아왔던 춘서를
읽으며 키득거리는 것.
“하여간 살찔 일만 골라가면서 해요. 아마 얼마 안 있으면 아저씬 마차 안에서 나오지도 못할 거예요. 그건 내가
장담하네요. 근데 아저씨, 그 무공비급들 왜 그렇게 많이 모사했어요?”
당 노야에게 부탁했던 철 상자 안에는 야혼의 애독서인 춘서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성모궁에서 주워왔던 비급을 모사하여
전부 60여 권으로 늘어나 있었다.
투견공, 용봉환락무, 그리고 천기마해를 제외한 나머지 무공 전부를 모사했던 것이었다. 짐작컨대 야혼이 기관 장치가 달린 철
상자를 주문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지 싶었다.
“몰라도 된다. 그건 그렇고 우리 소림산가 하는 곳 구경가자.”
“소림사? 거긴 왜요?”
마차를 몰던 양지가 의아한 얼굴로 야혼을 돌아보았다.
“그곳이 정도 무림의 본산이라며. 그래서 한번 가보려는 거지 뭐. 넌 보고싶지 않냐?”
“물론 나두 한번 가고야 싶지요. 하지만 청해성에 가는 길이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뭐가 걱정이냐, 남는 건 시간밖에 없는데.”
“첩형 언니가 기다릴텐데…….”
“그년이 왜 날 기다려. 왜 한 번 더 하고 싶대?”
“꿈도 야무지시네. 이번에 만나면 아저씨 물건을 잘라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니 조심해야 할걸요?”
“어째 내 물건 잘리는데 나보다 네가 더 걱정하는 것 같다? 잔소리하지 말고 소림사에 대해 아는 것 있으면 말해봐.”
“제가 뭐 아는 게 있나요? 동창에서 배운 게 전분데. 생긴지 천 년 정도 되었다는 것과, 무공이 넘쳐나게 많다는 것
정도지요.”
“거 10대 문파간 하는 놈들과 비교하면 어떠냐?”
“글쎄요. 전부가 장단점이 있지만 동창에서 파악한 정보로 보면 단연 소림사를 최고로 치지요. 300년 전 겁천십웅의 일
인을 배출했던 곳도 소림사고.”
“겁천십웅(劫天十雄)?”
겁천십웅이란 양지의 말에 야혼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십전수 구약종의 무공을 익힌 다음부터 부쩍 자주 듣는
이름이었다.
우선은 자신이 익힌 두 가지 무공이 겁천십웅의 무공이라 하였고, 당가려와 냉소소가 익힌 무공 또한 겁천십웅의 무공이라
하였다.
“광불(狂佛)이란 중이 있었는데 그가 소림사 출신이었다네요.”
“그럼 소림에도 그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힌 자가 있을까?”
“강호 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림에도 있어요. 별호가 파불(破佛)이라 하더군요.”
동창의 정보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일반 무인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문파의 비밀을 그들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
동창에서는 비밀 축에도 끼지 못하는 정보였다.
“그래? 파불(破佛)이라… 재미있겠군. 무조건 소림사로 간다.”
대뜸 양지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야혼이 고삐를 낚아채 힘차게 휘둘렀다.
뎅-!
불볕 더위를 싹 가시게 하는 시원한 타종소리가 산새들의 잠을 깨웠을까. 이곳 저곳을 가르는 날갯짓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산사는 다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둠 속, 20여 채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잠들어 있는 이곳은 불교 제일 전당이라는 소림사.
소실봉 북쪽 숲에 있다하여 소림사라는 이름이 지어졌지만, 부처님을 모시는 불사(佛寺)답지 않게 불리는 명칭 또한 다양하다.
정도 제일 문, 무림의 태산북두 등, 갖가지 명칭으로 불리는 소림사는, 사찰임에도 불구하고 속세 무림문파보다 강호 무림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기도 하다.
강호 무림의 대소사에 소림이 참가한다 하면 일의 경중을 떠나 명분을 획득했다 할 정도였으니, 강호 무림에서 소림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만한 대목이었다.
휘익-!
3경이 훨씬 지난 야심한 밤, 소림사 뒤편 소실봉 정상을 향하는 야행인(夜行人)이 있었다.
한 번에 10여장씩 쭉쭉 나아가는 모습으로 보건대 상당한 무공을 지닌 고수임이 분명했다.
빠른 동작으로 산을 오르던 야행인이 이윽고 한 동굴 앞에 멈췄다.
달마동(達邙).
놀랍게도 야행인이 도착한 곳은 소림 이비(二秘)중의 한 곳인 달마동이었다.
소림에는 일반 제자들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는 장소가 두 곳 있다. 소림의 역사라 할 수 있는 불경과 무경을 모아둔
장경각(藏經閣)과 선대 고승의 유품을 모아둔 장소인 달마동이었다.
특히 달마동은 오늘의 소림을 있게 한 고승들이 영면하는 장소였기에 반드시 방장(方丈)의 허락을 얻어야만 들어설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야행인은.
“오서 오시게 방장!”
그랬다. 방금 달마동 안으로 들어선 인물은 현 소림 방장인 보장(普杖)대사였다.
“아미타불! 수고가 많으십니다 사백님!”
소림 최고 수뇌인 보장대사를 향해 반 공대를 할 수 있는 인물은 소림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바로 현역에서 은퇴한
고승들이 기거하는 양심당(養心堂) 소속의 원로들만이 그 극소수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다.
법천(法天), 법지(法地) 법인(法人), 법상(法相). 전부 법(法)자 돌림을 사용하는 이들은 소림사법불(少林四法佛)이라
불리며 배분 또한 가장 높았다. 보장대사를 맞이한 4인이었다.
“소 사숙님은?”
“잠시 후면 보게될 걸세.”
“그럼?”
“그렇다네. 지난 300년간 아무도 익히지 못했던 대승범천신공을 10성까지 익혔네.”
“아미타불! 소림의 홍복이옵니다.”
보장대사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어렸다. 소림의 무공을 겁천십웅의 1인에 당당히 끼게 하였던 무공이 바로 대승범천신공이었다.
역대 소림무공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엄청난 무공이었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10성 경지까지 익히지 못하면 평범한 무공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하여 대승범천신공을 익히는 시간 또한 엄청나게
길었다.
불경을 바탕으로 창안된 소림무공의 대부분은 긴 시간을 두고 익혀야 하지만 대승범천신공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그런데 300년만에 다시 대승범천신공을 익힌 인물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걱정일세.”
소림사법불의 최 연장자인 법천이 우려 섞인 얼굴로 일행을 쳐다보았다. 대승범천신공을 익힌 자가 나왔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광불(狂佛) 사조님의 예언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렇다네.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대승범천신공이 현세하면 나머지 겁천십웅의 무공 또한 같이 나올 거라 하였네. 그 말인
즉…….”
말을 하던 법천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세(亂世), 혼돈과 혼란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이 걸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흐르는 강물을 우리가 막을 순 없을 테지만, 지난 100년간의 평화가 깨질까 그게 더 걱정이네. 성모궁을 찾으러
보내는 게 아니었어. 아미타불!”
“우리 소림을 빼고 나머지 9파에서 추진한 일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보장대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원래 십만대산의 지도에 대한 청부를 놓자 했을 때 소림은 반대했다.
설령 그곳에서 선대의 유전을 찾는다 하더라도 강호 상에 혼란만 가중시킬 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나머지 9파의 의견은 달랐다. 마지막 한번만 더 시도해보고 안되면 그만두자고 했던 거였다.
“그나마 법현 사숙께서 대승범천신공을 익히셨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휴-우! 그야 물론 우리 소림으로선 좋은 일이지. 하지만 강호 생활이 무공만 가지고 된다던가? 공연히 천기가 어지럽다하여
너무 서둘렀어.”
“별 수 없지 않습니까.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순 없는 거니까. 아예 강호로 데리고 나가서 경험을 좀 시키도록 하지요.”
둘째인 법지가 법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소림 원로들의 고민이었다. 법현을 소림에 받아들였던 건 그의 나이 5살 되는
해였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무려 25년간을 무공일로(武功一路)에만 정진시키다 보니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다.
물론 서책과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교육을 시켰다지만 어디 실제 경험만 할까. 소림 최고 기재라 할 수 있는 법현은
반쪽짜리였다.
소림사법불 4인이 걱정하는 바였다.
“사질, 오셨습니까!”
걱정스런 얼굴로 안쪽을 쳐다보는 일행의 시야 속으로 한 인물이 들어왔다. 산발한 머리에 여기저기 기워 입은 장삼은 그가
소림 방장보다 더 높은 배분이란 사실을 의심케 하였다. 아니 중이라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외모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한 점 티끌도 없는 고결함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대승범천신공을 익힌 자에게서 풍기는 기운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흠은 있었다.
달마동 생황이 그리 풍족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의 몸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비대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질인지 거의 야혼의 몸에 비견할 정도로 엄청났던 것이다.
“아미타불! 그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소사숙님!”
법현의 모습에 눈이 부신 듯 보장이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승범천신공이 저절로 발휘되고 있었다.
과거 300년 전 광불 사조님의 신위와 버금가는 경지를 30이란 나이에 터득해버린 것이었다.
“불자로서 당연한 일인데 고생이라니요. 오히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이놈의 살은 아무리 노력해도 빠지지 않더군요.”
투실투실한 살을 흔들며 법현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화식과 육식을 멀리하는 불자가 살이 찐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몸은 갈수록 비대해졌다. 거의 먹는 것도 없는데 말이다. 해서 살을 빼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심마에 빠지기 딱 좋다는 사형들의 말에 포기하고 말았던 거였다. 그냥 생긴 대로 살자. 살 빼기를
포기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근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십만대산이라니요.”
자신의 살을 먼지 털듯 털던 법현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안 쪽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을 때 방장을 비롯한 사형들의
말을 들었던 것이었다.
“아, 네……. 실은 그곳에 무당파와 화산파에서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성모궁을 찾아가기 위해서였지요.”
“그럼 하오문인가 하는 곳에 지도를 그려달라 했던 청부 말고 직접 따라갔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화산파와 무당파 제일 기재라 일컫는 남천악과 주려화가 동행했다 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요.”
“만일 그들이 나타난다면 시끄러워지겠군요.”
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들이 살아오고 또 빈손이 아니라면, 아니 무공만 강해져서 온다 하더라도, 성모봉은 기연의
장소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될 터였다. 강호무림의 모든 무인들이 성모봉을 찾는다며 길을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10대 문파나 마도련에서 막아선다지만 과거와는 또 다를 것이다. 성모봉은 더 이상 전설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곳이
되기에.
“그래도 살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강호 무림의 동량이 될 사람들인데 헛되이 희생되면 더 큰 손실이 아니겠습니까.”
“아미타불!”
법현의 조리 있는 말에 보장이 고개를 숙이며 합장했다. 사백들이 우려했던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사물을 보는 눈도 예리했고, 상황 판단 또한 빨랐다. 지금 상태에서 약간의 경험만 더해진다면 대승범천신공의
완성도 기대해 볼만하였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직 살아 있을지……. 벌써 3년이 넘었는데…….”
보장대사 뿐만 아니라 십만대산에 제자를 파견했던 화산파와 무당파조차도 이미 포기했다. 여태 살아있다면 돌아오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무공이 약한 이들도 아니었고, 두 문파의 후기지수 중 최고인 그들이 아니었던가.
죽지 않았다면 벌써 돌아왔어야 했다는 게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화산파를 비롯한 십만대산에 제자를 보냈던 자들은 인간의 잠재력을 너무 무시했다.
처음 인간은 자연계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였다. 그랬던 인간이 자신들보다 강한 존재들을 물리치고 만물의 영장으로 등장했다
함은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무엇이 있다는 의미일진대.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6)- 또 소금 뿌리면 죽어!(2)
십만대산 입구인 흠주현.
감격스런 얼굴로 인가(人家)를 쳐다보는 4인이 있었다. 백짓장처럼 하얀 얼굴에, 입고 있는 옷은 개방의 비렁뱅이조차 고개를
저을 정도로 헤어졌지만, 그들의 몸에선 천하를 오시할 듯한 패기(覇氣)가 넘쳐흘렀다.
“드디어 지옥에서 나왔는가!”
감격에 겨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인물, 한쪽 눈을 잃은 신주일룡(神州一龍) 남천악(南天岳)이었다.
그랬다. 불의사제들에게 감금당했던 4인이 성모궁 연옥을 탈출하여 중원 땅에 도착한 것이었다.
남천악은 오른 눈을 잃었고, 유마혼은 왼팔을 잃었다. 장대손과 주려와는 정상이었지만 그들은 과거에 비해 몰라볼 정도로 여윈
모습이었다.
“하지만 십만대산에 들어갈 때보다 2배 이상 강해졌다. 팔을 잃은 보상은 분명히 받았다.”
유마혼의 입에서 비장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행을 향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십만대산에서 불구가 된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백색 옷을 입은 자들의 공격에 왼팔을 부상당했고 결국에는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왼팔이 없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무공을 익혔고, 결국 극복하고 말았다.
이곳에 서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떡할 텐가?”
오른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있던 유마혼이 남천악을 향해 물었다. 3년 가깝게 동지생활을 해왔는데 이젠 청산할 때였다.
‘우리 약속 잊지 말길 바라네.’
‘물론이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남천악의 전음에 유마혼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성모궁 지하에 갇혀있던 시간은 무공만 증진시켜 준 게 아니었다.
무공이 강해짐에 따라 야망이 생겼고, 그 야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계획을 가져다주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이곳 흠주현인
것이다.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다시 보세.”
세 사람을 향해 포권을 취한 유마혼이 먼저 몸을 날렸다. 지면을 스치듯 쭉쭉 나아가는 그의 경공은 풀잎을 밟고 나아간다는,
전설의 초상비(草上飛)에 근접할 정도였다.
“잠개(潛丐) 선배는 개방으로 바로 가실 겁니까?”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제부터는 잠개가 아닐세.”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장대손이 말했다. 정체가 밝혀진 잠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총단으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잠개의 지위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는 일인 게다.
새로운 잠개를 선발하여 그에게 임무를 맡기고 자신은 다른 이들처럼 개방의 장로가 될 터였다.
“그럼 저희들도 먼저 가겠습니다.”
두 사람 역시 지면을 스치듯 경공을 펼치며 장대손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허허! 저들의 무공이 강해진 게 무림의 복이 될지 화가 될지…….”
그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두 사람의 변화를 지켜본 장대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무공이 강해짐과 함께 그들의
눈에 떠오른 감정이 절로 읽혀졌다.
그것은 야망이었다. 자신들 위에 다른 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 힘이 강해짐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변화였다.
더하여 성모궁의 발견이 강호무림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성모궁에 다녀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찾아가라면 찾아갈 자신은 없지만 분명 다녀왔고, 각자의 품속에는 성모궁에서 얻은 비급이 한 권씩 있었다. 더하여
여호치의 정체, 그녀는 분명 명교(明敎)의 성모였다.
수천 명의 명교도들이 죽어있던 성모궁. 그들을 죽인 자들이 바로 성모척살대였을 터였다.
“도대체 100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품속에 있는 비급을 가만히 만져보며 장대손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얻은 비급은 100년 전 의성(醫聖)이라 불렸던
신도영(辛道嶺)의 의서(醫書)였다.
그 의서의 마지막부분에 이상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처음 그 내용을 보았을 땐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음모였다.
신도영이 죽기 전에 마지막 남긴 한마디였다.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성모궁 사건과 관련이 있는 건 분명했다. 더하여 앞으로 자신이 밝혀야할 일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개차반 녀석은 무사하게 나왔나 모르겠군……. 타고난 운명이 있으니까 싶게 죽지는 않겠지.”
야차혈마지체(夜叉血魔之體), 수천구신체의 전설을 믿는 건 아니지만,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니 만큼 뭔가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아니 전설을 믿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싸우면서 정이라도 들었는지 자꾸만 녀석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네 녀석은 모를 거다. 남천악이나 유마혼의 능력이상을 끌어내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너란 사실을 말이다.”
지하 연옥에서 두 사람을 보고 느낀 점이었다. 무공의 성취가 더뎌 지거나 절망할 때면 언제나 두 사람이 떠올리는 대상은
야혼이었다.
남천악의 입장에서는 하오밀문이라는 하찮은 곳의 제자에게 모욕당했다는 수치심이 힘의 원동력이었고 유마혼은 냉소소 때문이었다.
그 두 가지 사건이 그들을 더욱 분발하게 만들어 탈출하는 시간이 짧아졌던 것이다.
“살아 있다면 만나게 되겠지.”
십만대산을 쪽을 망연히 쳐다보던 장대손이 이내 지면을 박찼다. 그 또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는지 절정의 초상비 경공을
펼쳤다.
나아가는 속도 또한 남천악이나 유마혼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3년의 시간은 성모궁을 향했던 모든 사람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
일류에서 초일류로…….
*   *   *
“으리으리하네, 절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 거냐?”
그 시각 사두마차에 몸을 실은 야혼과 양지는 소림사 일주문을 통과하여 경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양지 옆에서 말고삐를 쥐고 있던 야혼이 연신 두리번거리며 감탄사를 발했다. 개봉에 있는 상국사가 최고의 절인 줄 알았는데
소림사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웬 놈의 절에 금박을 저리도 많이 입혔는지, 태양 빛을 받아 사방이 번쩍번쩍 빛났다.
“아미타불! 어서 오십시오. 보령(普靈)이라 하오이다.”
손님이 머무는 지객당(知客堂)을 담당하는 보령스님이 합장을 하며 야혼과 양지를 맞이했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못한 듯 숙인
고개 아래로 두 눈은 연신 방문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원래 소림사의 규율에는 말이나 마차는 일절 반입이 불가능했다. 방문자들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할지라도 미리 통보하여 후문을 이용하던지 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앞에 있는 자들은 아니었다.
커다란 사두마차를 끌고 정문으로 다가와서는 무턱대고 통과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처음에야 그럴 순 없다며 거부의 뜻을 내비쳤지만 그들이 내민 명패를 보고 아연실색 할 수밖에 없었다.
동창인물임을 나타내는 신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까? 저는 동창 제일 첩형 휘하의 야혼이라 합니다. 딱히 볼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고, 임무수행 차 가던 길에
잠시 들렀소이다. 마땅히 잠잘 곳도 없고 해서…….”
“아미타불! 그럼 이곳에 잠을 자러 오셨단 말씀이십니까?”
보령대사는 가느스름 눈을 모았다. 소림이 있는 소실봉 아래쪽에는 무수히 많은 객잔이 있다. 그 객잔을 버려 두고 일부러
소림사까지 온 까닭이 잠을 자기 위해서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객잔은 너무 시끄럽지 않소이까. 내자가 힘들어하는 것도 같고……. 안 되면 바로 내려가겠소이다.”
“아-아닙니다, 대인. 소승을 따라 오십시오.”
‘뚱띵이 아저씨, 이렇게 첩형언니의 명패를 막 써먹어도 되요?’
‘써먹으라고 준거잖아. 그래서 쓰는 건데 뭘 걱정 하냐?’
‘이런데 쓰라고 준 게 아니잖아요.’
‘좋잖아 임마. 그거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대접을 받겠냐. 아마 문밖에서 바로 쫓겨났을 거다.’
“이곳입니다, 대인.”
두 사람이 열심히 전음을 나누고 있는 사이 지객당에 도착했는지 보령대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본존 건물들과는 상당히 떨어진 3층 건물의 지객당은 방문자가 없는지 비교적 한산했다.
“우리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향화객들이 있는 철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다행이군요. 폐를 끼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폐라는 야혼의 말에 보령대사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야혼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단순히 하룻밤
묵어가려는지 알았는데 지금 하는 말을 듣고 보니 일부러 소림사를 방문한 것처럼 느껴졌던 거였다.
“아니외다. 그런데…… 방장선사는 만날 수 있겠는지요.”
“이곳에 오기 전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조금 쉬고 계십시오, 바로 연락이 올 겁니다.”
두 사람을 향해 합장한 보령대사가 총총 방을 나섰다.
“씨팔! 중들이 사는 곳이 이리 좋아도 되는 거야?”
방안을 휘이 둘러본 야혼이 낮게 욕설을 토했다. 자신이 살던 서대시전 집은 이곳에 비하면 돼지우리였다. 나름대로 수리도
했고, 다른 집에 비해 손색이 없다 여겼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없이 사는 놈들 중에서 그나마 나았을 뿐 절간보다 못한 집이었다.
“명나라에서 가장 좋은 절인데 그럼 오죽하겠어요.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그리고 이곳은 부처님의 집이잖아요. 근데 소림
방장은 왜 만나려는 거예요?”
양지가 의심스런 눈으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벌써 한 달 이상을 야혼과 같이 살았고 그의 성격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여겼는데 하는 일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오늘 소림사 방문만 해도 그랬다.
처음 개봉을 출발할 때는 곧바로 청해성까지 갈 것처럼 하더니 중간에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었다.
꿍꿍이속이 분명 있는데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가 있겠냐? 다 너를 위해서지.”
“보고서 내용?”
“그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는 양지에게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너에게 약 좀 주려고 그런다. 됐냐?”
“여기서? 지금 제 정신이에요?”
약을 준다는 야혼의 말에 양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신성한 불사에서 용봉환락무를 시전하자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객당이 다른 건물들과 많이 떨어져 한적한 곳에 있다지만 절 안임에 분명했다.
소림사 경내에 있는 모든 중들이 육욕을 억제하며 살아가는데, 그들을 향해 열락의 소리를 들려주겠다니.
“왜 싫어? 요즘 짜증이 좀 늘어난 것을 보니까 욕구불만이 쌓인 것 같더만.”
“싫은 게 아니고, 여기가 절이라서 그렇지 뭐.”
배시시 미소를 문 양지가 얼굴을 붉혔다. 사실은 며칠 전부터 약 먹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해서 노숙할 때 야혼을 몇 번
유혹했었는데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그가 피했던 거였다.
“그래서 대장을 만나겠다는 거다. 양해를 구하려고. 어이구 오나보다. 일단 소림사 대장을 만나고 올 테니까 어디 가서
몸이나 정갈하게 씻고 와라.”
짓궂게 눈을 찡긋한 야혼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야랑, 잠깐만!”
나서는 야혼을 양지가 불러 세웠다. 그런데 뭔가가 불만인 듯 양지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왜?”
“아니에요. 됐어요.”
“싱겁긴…….”
“저 아저씨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야혼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천장을 쳐다보던 양지가 이내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마 소림사 산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시전하고 있었던 듯 싶었다. 그 때부터 야혼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야혼을 불렀던 것은 그 사실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 야혼이 도착한 곳은 팔대호원(八代護院)이란 편액이 걸린 건물 앞이었다.
“방장(方丈)실을 보호하기 위한 곳입니다. 소림 최고 무승들이라 할 수 있는 호법승들이 기거하는 곳이지요.”
야혼이 궁금해하는 얼굴로 두리번거리자 앞서가던 소사미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팔대호원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굳이 소사미의
말이 아니더라도 회랑을 따라 걷다보니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꽤나 날카로웠다. 일부러 기운을 흘린 듯 모든 기운이 자신에게만 집중되고 있었다.
“이곳은 공기가 왜 이렇습니까? 동창 도독을 만나러 가는 곳보다 더 힘이 드오이다.”
즉효였다. 몸을 따갑게 하던 기운들이 동창이란 한마디에 스르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주변을 쳐다보며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소사미가 열어주는 조그마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대인. 소승은 보장(普杖)이라 하오이다.”
다반을 앞에 둔 보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야혼을 향해 가볍게 예를 차렸다. 하지만 얼굴만은 조금 굳어 있었다.
종종 황실 인물이 불공을 들이기 위해 소림사를 방문하곤 하지만 동창 무인이 직접 찾아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이고 대사께서 그런 불편한 얼굴을 하시면 제가 너무 송구스럽습니다. 임무수행 때문에 방문 한 게 아닙니다. 긴히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이라면…… 일단 앉으시지요.”
임무수행 때문이 아니라는 야혼의 말에 얼굴이 풀어진 보장대사가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얼굴로 야혼을 살피듯
쳐다보았다. 비대한 몸이었지만 선명한 이목구비로 보건대 상당한 미남이었다. 더하여 무공 또한 대단한 듯했다.
‘놀랍군. 동창에 저런 인물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사찰이라고 하지만 소림은 엄연히 무림 구성원의 한 곳이다. 황실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무림에 영향을
끼칠만한 인물에 대해서는 대강 조사를 해 두는 편인데, 야혼이란 자에 대해선 자료가 전혀 없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상당한 무공을 가졌는데도 말이다.
“대사께서는 강호 무림을 어찌 보십니까? 저희 동창에서 파악하기로는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으로 보았습니다만…….”
“아미타불! 그런 면은 없잖아 있지만 아직 뚜렷한 징후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 일 없기를 바랄 뿐이지요.”
“허허! 무림 태산북두라는 소림사가 이렇게 귀가 어두워서야. 성모궁이 열린 건 징후가 아니란 말씀이시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모궁이 열리다니오.”
찻잔을 들어올리던 보장대사가 경악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그 또한 성모궁으로 떠났던 정파인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동창인물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라니…….
“벌써 1년 전에 돌아온 이들이 있었소이다. 사천당문의 여식인 당가려와 마도련 소속인 냉소소가 그들입니다. 그녀들 무공은
성모궁으로 떠날 때와 비교해서 천양지차로 바뀌었습니다. 성모궁에 들지 못했다면 그렇게 강해질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동창에서 주시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미타불……!”
말문이 막혔다. 이미 1년 전에 성모궁이 열렸고 그곳을 다녀온 사람이 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수많은 무림세력이 성모궁을 주시하고 있었을 터인데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데, 무림 단체도 아닌 동창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니. 동창의 힘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대사께서 알아서 하시면 될 터이고. 제가 이곳에 들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조금 어색한 얼굴로 야혼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대사님!”
“아-네! 대인. 말씀하십시오.”
“실은 저와 내자는 혼례를 올린 지 3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직…….”
말끝을 흐린 야혼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커다란 걱정거리라도 있는 듯한 그런 얼굴로 말이다.
“혹시…… 자녀가…….”
“그렇습니다, 대사님. 몸에 좋다는 건 전부 먹어 보았는데, 자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곳 저곳에 수소문 해본 결과
소림사의 지객당에서 관계를 가지면 영험이 있다고 해서…….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침 오늘은 다른 손님도 없는 것 같고.”
“으음!”
보장대사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20년간 소림의 방장 자리에 있었지만 지객당에서 관계를 가지겠다고 부탁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설령 자식을 원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삼신당(三神堂)에 기원을 드리는 행동으로 대신하는데.
그렇다고 자식을 원하는 사람의 부탁인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반 양민도 아니고 동창의 인물이 아니던가.
“사실 조금 전 말씀드린 사항도 동창의 특급 비밀이었습니다.”
야혼이 내미는 마지막 결정타였다. 동창의 비밀을 알려주었으니까 너도 편의를 좀 봐달라는 그런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인!”
“감사합니다, 대사님. 근데 삼신당은 어디로 가야할지…….”
“안내해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아미타불!”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7)- 또 소금뿌리면 죽어(3)
만족스런 얼굴로 방장실을 나온 야혼은 양지가 기다리는 지객당으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알기나 하자고요.”
야혼이 방안으로 발을 들이밀기 무섭게 양지가 다그치듯 물었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무공까지 시전하면서 소림
방장을 만나고 다니는 의도가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야혼은 아무런 대꾸 없이 양지의 머리칼에 코를 가져다댔다.
“킁! 킁! 깨끗하게 씻기는 했구나. 우물이 어디 있더냐?”
“우씨! 묻는 말에 대답은 안하고, 나도 말 안 할래요.”
“그럼 그냥 한다.”
“멈춰욧. 어디 그 더러운 몸을……. 오른 쪽으로 가면 있어요.”
와락 덤벼드는 야혼을 보고 질겁한 양지가 재빨리 물러나며 소리쳤다.
얼마만의 관계인데, 냄새 때문에 기분을 망칠 수는 없었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용봉환락무나 운기하고 있어라.”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마저 뚝 끊긴 4경. 실구름만이 어둔 밤하늘을 지르고 있을 뿐, 모두들 잠든 깊은 정적 속이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소성이 소림사를 뒤흔들었다.
어찌 들으면 여인의 앓는 소리 같기도 하지만 조금만 귀기울여 듣는다면 이내 아니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으리라.
고통에 겨운 환자의 신음소리라면 저토록 기복이 심할 리가 없을 터였다.
때로는 흐느끼듯 때로는 쥐어짜듯, 듣는 사람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소음은 이 세상에 한가지밖에 없다.
바로 남녀가 관계를 가질 때 들려오는 천상의 화음이었던 것이다.
그 소성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지객당의 한 방이었다.
백색과 붉은 색의 운무가 요동치는 곳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양지가 요란하게 몸을 뒤흔들며 자지러지듯 신음을 토해냈다.
오랜만에 갖는 관계이기도 했지만 다른 날보다 유독 흥분되는 것 같았다.
처음 시작이야 야혼의 꿍꿍이가 궁금해서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곳이 소림사 지객당이란 사실도 잊었다.
오직 용봉환락무의 운기에 몰두하며 온몸을 불태웠다.
“하-아! 아-아-아!”
자신이 지르는 열락의 비음이 지객당 담을 넘어간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양지는 연신 야혼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을
흔들어댔다.
엄청난 쾌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쾌감이 밀려오는지, 갈수록 강도는 더해갔다. 점점 성(性)에 눈이 떠지고 있었다.
동창 교관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했을 때는 별반 느낌을 갖지 못하다가 야혼과 관계를 가지면서 새롭게 터득한 쾌감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비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그녀의 비음이 커질수록 더욱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소림의 방장인 보장대사였다.
“허허! 이런 일이…….”
보장대사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설마하니 이 정도까지 요란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불사이긴 하지만 더러는 야혼과
같은 경우를 가지고 찾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자식을 원하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기에 알고도 넘어간 적이 상당히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관계를 갖는다 하더라도 거의 표가 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했던 탓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보이는 행동이라니. 소림의 모든 중들이 깨어날 정도로 엄청난 비음을 질러대고 있었다.
“팔대호법(八大護法)은 듣거라!”
“네, 방장님!”
“저들이 있는 지객당 근처를 막아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방장님.”
민망하고 낯뜨거운 일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소림 최 고수를 동원하여 두 사람의 관계하는 모습을 막아야만 했다.
아니 소리를 차단해야 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고 제 집무실로 가버린 보장대사야 마음이 편하겠지만 남아있는 팔대호법들은 죽을 맛이었다.
여인을 접해 보았다 하더라도 불가에 귀의하기 전이었고, 벌써 수십 년 간 여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승려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귓전으로 생생하게 들려오는 끈적끈적한 교성이라니.
연신 불호를 외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성욕은 곧 본능. 마음대로 조정되는 게 아니었다.
물건을 잘라버린 내시들마저도 색을 탐하는데 하물며 수년 간 금욕생활을 해온 스님들이야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였다.
불연(佛緣), 팔대호법의 수좌로, 방장인 보장대사 바로 아래 배분인 그가 당혹스런 얼굴로 연신 불호를 읊어댔다.
어떠한 싸움보다 힘들었다. 내공을 일으켜 강기막을 펼치는 것보다 귓전을 파고드는 교성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아미타불! 지금 나는 색공(色功)과 싸우고 있는 거다. 이까짓 색공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어찌 불제자라 하겠는가,
아미타불! 아미타불!”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줄기차게 불호를 뇌까렸다. 하지만, 색공과 현실이 어디 같겠는가. 실제 관계와 유사한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게 색공일진대. 더구나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차단시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니.
자신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솟구쳐 오른다는 사실도 잊은 채 수중의 염주를 움켜쥐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나무관세음보살!”
알고 있는 불경을 총동원하여 마음을 다스리던 불연대사의 얼굴이 일순 환해졌다.
끊임없이 들려오던 교성이 문득 멈췄던 것이었다.
“아미타불! 힘든 시험이 끝났군.”
비지땀을 흘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육욕을 이겨낸 승리의 미소였다.
그러나.
“하-악! 야-랑!”
“이럴 수가…… 아미타불!”
다시 들려오는 교성소리에 얼굴이 해쓱하게 변한 불연대사가 황급히 가부좌를 하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끝난 게 아니었다.
한번의 관계를 마치고 잠시 휴식기간을 가졌을 뿐이었다.
“어이하여 이런 고행을…….”
비단 그 뿐만 아니었다. 다른 곳에 있던 스님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이곳 저곳에서 나직한 불호가 흘러나왔다.
시작이었다. 팔대호법의 그런 행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안에서 교성소리가 끝났다 싶어 자리를 뜨려고 하면, 또 다시 야릇한
비음이 일행의 발을 묶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주변이 부옇게 밝아지자 지객당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잠잠해졌다.
“드디어 끝났는가!”
긴 한숨을 몰아쉬고 지객당을 주시했다. 하지만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미 몇 번을 겪었기에 언제 다시 비음이 들려올지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숨죽인 채 밤새도록 진을 빼게 했던 악의 근원지를 주시했다.
덜컹!
팔대호법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문이 벌컥 열리며 악의 화신 중 한 명이 나타났다.
“참으로 대단하도다. 밤새 그 짓을 하고도 아직도 힘이 남았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볍게 몸을 푸는 야혼을 쳐다보고 있자니 절로 탄성이 터졌다. 지금껏 자리를 뜨려고 등을 돌린 게
5번도 넘는다. 그런데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나온 사내의 얼굴은 팔팔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전날보다 더 활기찬 얼굴로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저자의 몸놀림이 꽤 눈에 익은데. 만난 적이 있던가…….”
야혼의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던 불연대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을 풀고 들어가 다시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침 공기를 가르는 사내의 발놀림이 무척이나 눈에 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설마…… 저 무공은?”
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눈에 익었던 게 아니었다. 알고 있는 무공이었다.
야혼이란 자가 펼치고 있는 무공이 바로 소림의 무공이었던 것이다.
무영각(無影脚). 몇 안 되는 소림 각법 중 최고의 위치에 있는 무영각이 동창무인의 몸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저건 지금 소림에 있는 무공이 아니다. 소림의 무영각은 저 정도의 살기를 풍길 수 없다. 아미타불!”
100년 전에 사라진 무공임에 분명했다. 100인의 성모척살대의 일인으로 떠났던 적퇴(赤腿) 광자(廣子) 사조의 무공.
성모궁에서 실종되었던 무공이 소림 안마당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알려야 한다. 이런 엄청난 일이…….”
등줄기가 흥건히 젖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서둘러 방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궁, 힘들어라. 자식 빨리 좀 알아볼 일이지…….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나?”
주변에서 기척이 사라졌음을 느낀 야혼이 그제야 몸을 바로 하며 투덜거렸다.
“준비됐어요, 야랑!”
“이제 랑(郞)이라 하지 않아도 된다. 전부 갔다.”
“전에 말했잖아요. 나한테 아저씬 랑이라고. 가요!”
딱히 준비할 물건은 없었다. 산발이 되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간단히 세수만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대인, 벌써 가시렵니까? 아침 공양이라도 하시고…….”
잔뜩 다급한 얼굴로 달려오던 보장대사가 지객당을 나서는 야혼을 막아섰다. 반드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새벽에 불연이 들고 온 소식은 잠을 번쩍 깨우는 엄청난 일이었다. 소림의 무영각이 돌아왔다니.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해서 만사를 제쳐두고 지객당으로 왔는데 벌써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간밤에 전서구가 왔더군요.”
“헤엑! 아미타불!”
곁에 있던 불연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불호를 외었다. 밤새도록 지켰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는 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전서구라니.
그렇다 하여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자칫 말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동창 대인의 잠자리를 밤새도록 엿보았다는 사실이
들통나버릴 테니까.
“저에게 뭐 묻고 싶은 말이라도…….”
“아미타불! 아니외다, 대인. 급한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요.”
동창에 소속된 관인에게 무턱대고 무영퇴를 얻은 곳의 출처를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혹여 물었는데 무슨 소리하느냐고 오리발이라도 내밀게 되면 입장만 난처하게 될 뿐이다. 더하여 남의 무공수련을 훔쳐본
파렴치한으로 몰릴 소지가 다분했다.
“잘 쉬었다 갑니다. 이번 일이 영험이 있어 자식을 보게 되면 다시 오겠습니다. 그럼.”
보장대사와 불연스님을 향해 포권을 취한 야혼이 지객당 밖 기둥에 묶어두었던 마차에 올랐다.
“허허! 소림에 오신 손님을 아침도 대접하지 못하고 보내게 되다니. 정말 서운하외다, 대인.”
야혼을 잡아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이미 그가 탄 마차는 천천히 굴러가고 있었다.
“아미타불! 그럼 다음에 들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사님. 반드시 들르겠습니다.”
마차 옆으로 고개를 내민 야혼이 손을 흔들며 일행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즉시 달마동에 가서 사백님들을 모셔오게.”
“알겠습니다, 방장님.”
“흠흠.”
집무실로 돌아온 보장대사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창의 인물 방문부터 시작하여 께름칙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천당가의 여식이 성모궁에 다녀왔다는 소식은 물론이고 본인이 그 당시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니.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건 분명한데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침부터 웬일로 우릴 찾았는가?”
“오서 오십시오, 사백님.”
방장실로 들어오는 5인을 향해 고개를 숙인 보장이 자리에 앉자마자 하루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자가 소림의 무공인 무영각을 시전했다는 보고를 받았…… 허억!”
이야기를 해 나가던 보장대사가 사색이 된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인가 장문인?”
깜짝 놀란 법천대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평소와 달리 덤벙대는 보장대사의 행동 때문이었다.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꼼짝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 보장이었는데 오늘 아침은 달랐다. 더구나 사색이 된 얼굴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행동이라니.
“세상에 여면환공(悆面幻功)이 실재했을 줄이야…….”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침에 얼굴을 마주칠 때까지만 해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던 야혼의 얼굴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았다.
비대한 몸이었다는 특징을 제외하고는 야혼에 대해 기억나는 게 없었다. 여면환공이라 불리는 특이한 무공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재로 존재하는 무공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여면환공이라면……? 그럼 불연(佛緣) 너도 생각나지 않느냐?”
“그렇사옵니다.”
불연 또한 놀랐던지 황당한 얼굴로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다른 것은 전부 기억이 나는데 얼굴은 그려지질 않았다.
처음부터 얼굴 없는 귀신을 쳐다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미타불! 동창 인물에 여면환공, 그리고 광자(廣子) 사숙님의 무공이라……. 일단 우리가 따라가 보겠네.”
“사백님들께서요?”
야혼을 따라나선다는 소림사법불의 말에 보장대사가 펄쩍 뛰었다. 수많은 제자들을 두고 소림 최고 원로 분들이 나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동창 관리보다는 이 녀석 때문에 나가려는 걸세. 세상 구경 좀 시켜주려고.”
“그래도…….”
“말리지 말게. 우리도 바깥나들이 좀 해야할 것 아닌가. 다른 아이들은 필요 없고 우리 다섯만 나가면 되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사백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성의 대승범천신공을 완성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경험이다.
사람 사는 것을 보며 그들의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만 12성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경지를 성취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간다는데 말릴 재간이 없는 게다.
“가자 법현아!”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래야 그자를 따라 잡을 것 아닌가.”
보장대사를 향해 싱긋 미소를 남긴 다섯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림의 하산.
그것도 소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소림사법불과 그들의 사제인 법현의 하산이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8)- 좋은 비급 하나 있는데……(1)
한낮의 폭염만큼이나 뜨거운 소문이 강호 전역을 휩쓸었다.
성모궁(聖母宮).
100년간 전설이었던 성모궁이 드디어 열렸다는 소문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정도 10문의 두 곳과 마도련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말이었기에 결코 소문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강호 무림에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신주일룡(神州一龍) 남천악(南天岳), 천봉(天鳳) 주려화(朱呂花), 그리고 패천마룡(覇天魔龍) 유마혼(劉魔魂)이 비슷한
수준으로 취급하던 자들을 제치고 강호 제일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아울러 그들 3인을 향해 삼천룡(三天龍)이라는 영광스런 호칭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소문에 성모궁의 꿈을 꾸었던 무림인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곳은 지옥(地獄)이었다. 다시 찾아갈 수도 없거니와, 간다 하더라도 결코 살아 올 수가 없다. 남천악은 한 쪽 눈을
잃었고, 유마혼은 왼 팔을 잃었다.
죽고 싶은 자는 십만대산으로 떠나라.
오직 자기들만 십만대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일부러 퍼트린 소문이라 치부하던 강호인들은 실제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말들이
들려오자 이내 침묵하고 말았다.
그림의 떡이었다. 설령 그곳에 기연이 있다하더라도 쉽사리 찾아갈 수가 없었다. 화산파와 철마문 최고 후기지수들이 불구가
되어 돌아왔지 않은가.
더하여 정도 10문과 마도련의 이름으로 선포된 금역은 여전히 유효했으니. 떠나고 싶어도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전히 강호 제일세력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눈치만 살피는 것은 아니었다. 의심스런 눈으로 정도 10파와 마도련을 쳐다보는 자들도 있었고 그들을 향해
욕을 해대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야혼 또한 후자 중 한 명이었다.
“씨벌놈들! 나는 벌써 2달 전에 왔고, 그년들은 1년 전에 왔다 개새끼들아. 삼천룡(三天龍)? 까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개자식들.”
연신 씨부렁거리며 분에 겨워 침대 위를 뒹굴었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자기들 힘으로 간 것도 아니고 여호치 옆에 꼽사리
끼어 간 놈들이 강호 제일의 영웅이란다. 그것도 흰 옷 입은 놈들에게 당해서 간신히 살아온 놈들에게 말이다.
“뚱띵이 아저씨, 세상이 원래 그런걸 이제 알았어요? 같은 일을 해도 윗자리에 있는 놈들이 더 빛나게 되어 있다고요.
그래서 나온 말이 있잖아요. 억울하면?”
“출세해라.”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참으로 단순한 말 같지만 실제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말의 중요성을 결코
알지 못한다. 똑같은 일을 해도 윗선에 있는 자들이 하면 그 결과는 엄청난 빛을 발한다.
지금과 같은 경우가 그랬다. 성모봉을 찾는데 유마혼과 남천악이 한일이라곤 길을 만들었던 것밖에 없었다.
죽을 뻔하던 놈들을 일행들이 나서서 구해주기까지 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한데 돌아와서는 강호 영웅이 되었다.
그곳까지 데려다 주었던 하오밀문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이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가려와 냉소소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 3인의 노력으로 성모궁까지 갔고, 살아 돌아온 것이라니
“하지만 성모궁에서 살아오면 뭐하냐 명교(明敎)가 있는데……. 아마 지금쯤 똥줄이 타서 연일 모이고 난리가 아닐 거다.”
“무슨 말예요? 명교(明敎)라니?”
야혼의 말을 듣고만 있던 양지가 명교라는 말이 나오자 바로 관심을 보였다.
“왜? 또 고명지에게 보고하려고?”
“당연하지요. 내가 뚱띵이 아저씨 정부가 된 게 그 때문인데.”
“그래도 너에게는 말 안 해준다. 그 중요한 정보를 함부로 발설하면 되나. 고명지를 만나 직접 흥정하면 몰라도. 볼일이나
보셔.”
“아저씨 정말 그럴 거예요?”
“야! 양다리, 지금 네가 할 일은 마차를 모는 거야. 보고서는 내가 써주는데 뭐가 걱정이냐? 근데 고명지는 그곳에는 왜
갔냐? 십만대산 때문은 아닌 것 같던데.”
“아저씬 우리가 만난 곳이 어디인줄이나 아세요?”
“당연히 모르지, 거시기 털나고 그렇게 멀리 가본 것은 처음인데.”
“내 그럴 줄 알았지. 호남(湖南)이었어요. 그곳에서 복건성으로 가려 했지요.”
“바닷가?”
“그래요. 왜구만 출몰하면 괜찮은데 그놈들과 짜고 약탈하는 관리들이 있거든요.”
“그럼 그곳 일이 끝나면 고명지도 청해성으로 오냐?”
“글쎄요. 그거야 첩형 언니가 알아서 하겠지요. 왜, 또 하고 싶어서?”
“얘가? 나는 맨날 하고만 사는 줄 아냐? 흥정을 하려면 일단 상대를 알아야지. 나보다 네가 더 하고 싶은 모양이다?”
“쬐금 약이 땡기기는 해요. 소림사 떠난 지 한 달이 지났잖아요.”
엄지 끝으로 검지 첫 마디를 짚으며 양지가 야릇한 미소를 물었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한번 성의 즐거움을 알고 나자 조금씩
뻔뻔해지기 시작했다.
“!”
“나 이러다 색녀 되는 거 아닌가 몰라.”
“그래도 시집갈 때는 오리발 싹 내밀고 갈 거지?”
“그걸 말이라고? 완전 생짜처럼 조신하게 하고 가야지. 참한 숫총각 하나 고르면 알게 뭐야.”
“하지만 오늘밤은 바쁘네요, 양일녀. 어디 큰 객잔 있나 찾아봐라.”
두 사람은 어느새 하남성을 지나 섬서성의 상주(商州)라는 곳에 들어와 있었다. 양지 옆으로 나온 야혼이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을 잘 기억해라.”
“여기?”
야혼이 가리키는 곳을 둘러본 양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와 있는 곳은 양옆이 낮은 산으로 둘러쳐진 사잇길이었다.
상주를 빠져나가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꾸미는 일이 뭐예요?”
양지가 다그치듯 물었다. 상주(商州)에 들어서면서부터 야혼의 행동이 이상하게 변했던 탓이었다. 사방을 탐색하듯 살피는
모양새가 마치 도망자처럼 보였다. 소림사에서처럼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데 알 수가 없었다.
“별 것 아냐 이곳에서 돈 좀 벌어보려고. 가잣!”
말고삐를 낚아챈 야혼이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
다시 처음 들어섰던 저잣거리로 돌아온 야혼이 수양루(首陽樓)란 간판이 내 걸린 객잔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아마 저잣거리에서 가장 큰 객잔이지 싶었다.
“먼저 들어가서 음식이나 시키고 있어라.”
양지를 내려준 다음 마구간으로 마차를 몰아갔다.
“음! 세 권이면 되려나?”
뭔가를 곰곰 생각하던 야혼이 주방기구가 들어있는 상자를 한쪽으로 치우고 철궤를 들어올렸다.
“참 잘 만들었단 말이야. 이런 것 만드는 기술이나 좀 가르쳐 달랄까?”
철궤 전면을 쳐다보며 야혼이 빙긋이 웃었다. 튀어나온 부분이 9곳 있었는데 그것들이 철궤를 여는 열쇠였다.
“…18, 28.”
딸깍!
튀어나온 부분의 네 곳을 동시에 누르자 상자에서 미약한 소리가 흘렀다.
이윽고 상자 뚜껑을 열어제치자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책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서대시전을 떠나오면서 새롭게 장만한
춘서들이었다.
춘서 한가운데 있던 손잡이를 잡고 위로 들어올리자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당 노야가 만들어준 철궤는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야혼이 탐독하는 춘서는 위칸에, 비급과 돈을 감춰둘 요량으로 만든 아래
칸에는 전에 모사했던 60여권의 비급을 넣어 두었다.
“어디 보자.”
이리 저리 비급을 뒤적거리던 야혼이 3권의 비급과 돈을 꺼내 품속에 넣고 철궤를 원래 상태로 둔 다음 마차 밖으로 나왔다.
“알지?”
밖에서 기다리던 점소이에게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객잔 안은 상당히 붐볐다.
“여기예요, 아저씨.”
“자리는 제대로 잡았군.”
맨 안쪽에서 들려오는 양지의 목소리에 야혼이 걸음을 옮기며 픽 웃었다. 자리가 없었는지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계산대 바로
앞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협. 다른 자리가 나면 바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수양루의 주인인 장기웅(張起熊)이 친근한 얼굴로 야혼을 반겼다.
“반갑소. 쥔장도 한 몸 하는군요.”
“헤헤!”
반갑다는 듯이 장기웅이 실없이 웃었다. 비슷한 류였기 때문이었다. 장기웅의 몸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두꺼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탄력을 잃은 살덩이가 출렁거린다는 것이었다.
“술로 하겠습니까 아니면…….”
“술은 됐고, 차가 좋겠소. 운무차(雲霧茶)로 가져다주시오.”
“역시 식성도 저와 같습니다, 그려. 마침 노산(盧山)에서 들어온 최상품이 있습니다.”
“아저씨, 차도 직업 때문에 별도로 공부했죠?”
운무차를 바로 주문하는 야혼을 보고 양지가 이죽거렸다.
그녀도 운무차를 잘 알고 있었다. 말이 좋아 운무차지 그냥 일반적인 녹차를 말한다. 아직 차의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인지
그녀가 느끼기에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전부 같았다.
굳이 노산(盧山)에서 나는 녹차라 하여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하지 임마. 이따위 차를 돈주고 처먹는 놈들 보면 이해가 안 간다. 그냥 물을 처먹지, 뭣 잡는다고 차를 시키는
놈들만 보면…….”
“그런데 왜 시켰어요?”
“왜긴 임마, 저 돼지에게 볼일이 있어서 그랬지.”
양지의 콧등을 살짝 튕긴 야혼이 고개를 돌려 실내를 둘러보았다. 들어오면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손님들 대부분이
무림인들이었다.
“주인장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대협.”
“원래 이렇게 손님이 많은 거요?”
“웬걸요. 요즈음 십만대산인가 하는 곳 때문에 이 난리죠. 저야 좋지만 세상이 뒤숭숭해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표국도 잘 안되겠죠?”
“당연하지요. 과거보다 주문량이 줄었다고 하더군요. 또 손님이 오는군요.”
다시 출입문이 열리자 얼굴이 환해진 장기웅이 비대한 몸을 뒤뚱거리며 문 앞으로 가더니 안으로 들어서는 방갓인 5명을 향해
허리를 굽실거렸다.
“저 자식 좋은 자리 있으면 바꿔준다 해놓곤…….”
창가에 생긴 빈자리로 안내하는 것을 쳐다보던 야혼이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양지야 우리 내기할래?”
“무슨 내기? 아니 뭘로 내기 할 건데요?”
“글쎄? 나야 내기 할건 많은데 넌 아무것도 없네?”
“이럼 되겠다. 아저씨가 지면 내가 한번 주고, 내가 지면 아저씨가 한번 주는 걸로.”
“내기에 상관없이 무조건 하는 거잖아?”
“아니 뭐. 이왕 할거 내기를 빙자해서 하면 더 재밌잖아.”
“얘가 갈수록 더 밝히네? 젊은 년이 웬만큼 밝혀 뼈 삭는다 이것아.”
“아저씬 아직 안 삭았잖아요. 걱정할 걸 걱정해라. 내기가 뭐예요?”
야혼을 향해 혀를 쏘옥 내민 양지가 몹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야혼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방금 들어온 다섯 놈 있잖아. 음식 먹을 때 방갓을 벗을까 안 벗을까?”
“당연히 안 벗지. 그런걸 내기라고 해요?”
야혼의 머리를 가볍게 쳐낸 양지가 이내 흥미를 잃은 얼굴로 젓가락을 들어올렸다.
“이제는 중들 다섯 명보다 내가 어찌 알았는지 더 궁금하죠?”
“헉!”
야혼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양지의 말대로 그들은 소림사에서 뒤따라온 중들이었다. 자신조차 그들을 유심히 보고
나서야 알아차렸는데.
“저들이 소림사 중이란 걸 가르쳐준 사람은 아저씨라고요. 이곳까지 오면서 아저씨가 들른 곳은 소림사밖에 없고, 그곳에서
무영각을 시전한 이유가 저들 때문이잖아요.”
“허……! 양지야 그것도 고명지에게 썼냐?”
“우리가 했다는 건 비밀로 하기로 했어요.”
“존경스럽다.”
“뭘요, 그 정돈 기본이죠.”
“너 말고 동창 말이다.”
나직한 신음을 발하던 야혼이 이내 음식을 입안 가득 집어넣고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아저씨 자꾸……!”
“이 자식이! 너 따위가 감히 나에게 덤벼보겠단 말이냐?”
양지가 뭐라 입을 떼려는 순간 한쪽 구석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이고 또 시작했다. 어째 조용하다 했다.”
고개를 들어 힐끗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던 야혼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을 주시했다.
한 쪽은 창을 들고 있었고, 한 쪽은 검을 차고 있었는데 바로 이자가 문제였다.
“오잉? 저것들이 이곳엔 웬일이래?”
하오비동에서 만났던 육만우였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나머지 4명도 익히 아는 놈들이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응! 니 사형들.”
“사형?”
야혼의 말에 양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오밀문의 수뇌들은 전부가 죽고 남은 사람은 강웅삼이 유일하다고 했는데 느닷없이
사형들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되니까 기다려봐. 근데 어떤 놈이 이길 것 같냐?”
“음! 저기 창 들고 있는 사람이 조금 유리할 것 같은데요. 벌써 제압했잖아요.”
양지의 무공이 많이 늘었다는 게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무공이 높아지자 두 사람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을 읽어내고
강한 자를 판단해 내는 능력이 생긴 것이었다.
“너랑 싸운다면?”
“아무래도 내가 지겠지요. 저들은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익힌 사람들일 텐데. 근데 안 도와줘도 되요?”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야 가슴 속 깊이 남을 것 아냐. 그리고 저기 창을 들고 있는 놈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긴 있을
텐데…….”
초영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머지 4명은 태을건곤심법을 얻지 못해 숨겨진 무공을 찾았다 하더라도 큰 진전을 얻지 못했을
터이지만 초영완만은 달랐다. 태을건곤심법을 완전하게 익혔을 터이고 무공 또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을 터였다.
“그런데 저년은 나설 맘이 없는가보다야.”
“저년?”
저년이란 야혼의 말에 양지가 상큼 눈을 치켜 뜨고 초영완을 쳐다보았다. 야혼이 년이라 부르는 여자는 전부 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였던 탓이었다.
“하지만 저들이 뚱띵이 아저씨를 알아볼까 볼라? 옴마야, 저 사람은?”
“왜 너도 아는 사람 있냐?”
“네, 저기 백색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 있잖아요.”
“어디?”
“아이, 저기 창 들고 있는 놈 뒤쪽에서 차 마시는 사람 말이에요.”
“나보다는 못하지만 잘생겼네.”
“저자가 첩형 언니 강력한 경쟁자예요.”
사마웅풍(司馬雄風)이란 자로, 동창과 같이 정계를 움켜쥔 금의위 도독의 장자가 바로 그였다.
천성적으로 무골(武骨)을 타고났는지 정계 쪽보다는 무림에 더 관심이 많아 강호 무림인들이 그를 군자검(君子劒)이라 칭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59)- 좋은 비급 하나 있는데…… (2)
“그래? 잠깐 두고보지 뭐. 근데 저기 창 들고 있는 놈은 누군지 아냐?”
‘그자는 산동악가의 장자인 벽력창(霹靂槍) 악운보(岳雲步)일세. 악가의 최고 기대주지.’
양지를 쳐다보는 야혼의 귓전에 느닷없이 전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전음을 보낸 인물을 쳐다보았다. 50즈음 되어
보이는, 도(刀)를 찬 인물이 이편을 쳐다보며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계속해 보시오.”
‘원래 저기 있는 사마웅풍이나 악운보는 남천악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되던 자들이었네.’
“그러니까 남천악 그 새끼가 영웅이 된 게 배가 아프다 이 말인가? 단지 그 때문에 개뿔도 없는 것들 붙잡고 시비를 거는
거고?”
‘그러다 다른 사람 듣겠네!’
전음을 보내던 자가 찔끔한 얼굴로 야혼에게 주의를 주었다. 비록 흥미로운 얼굴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무림인들이다.
즉 귀는 열어놓고 있다는 의미였다.
몇몇 무인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야혼을 쳐다보는 걸로 보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시선들 속에는 섭선(摺扇)을 부치고 있던
사마웅풍도 포함되어 있었다.
“맞는 말인 모양이네 뭐. 저 새끼도 아무소리 안 하잖아.”
“아저씨!”
악운보를 향해 야혼이 손가락질을 하자 질겁한 양지가 재빨리 야혼의 팔을 끌어내렸다. 그러나 실내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부 들었는데 악운보라해서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누구냐?”
대뜸 반말로 지껄이는 걸로 보아 몹시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더하여 몸에서 풍기는 기세를 더욱 강화시켰는지 육만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하지만 악운보를 대하는 야혼은 태연했다.
“나?”
야혼이 내렸던 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래 네놈 말이다.”
“남의 이름을 알고 싶으면 먼저 밝혀야지. 그리고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임마.”
“오매, 이 아저씨가 밥숟갈 놓고 싶은가 보네, 뭐 잘못 먹었어요? 아저씨가 여기서 이긴다 해도 저 사람은 뒤에 엄청난
배경이 있다고요.”
악운보를 알아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악운보 바로 뒤쪽에 있는 사마웅풍을 두고 하는 말이었는데. 양지의 말을 들은 악운보는
더욱 얼굴이 붉어지며 두 사람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산동악가 배경을 믿고 그렇게 까부는 게 아니냐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치욕스런 말을 들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산동악가의 장자라 하면 다음대의 가주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그에게는 한 수 접어주었고, 그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한번 더 묻겠다. 누구냐?”
“나? 하오대문의 문주야!”
“하오대문?”
한순간 수양루 안이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오대문, 수많은 무림문파가 있는 강호였지만 아직 하오대문이란 명칭을 가진
곳은 없다.
“아! 아직 모를 거야. 하지만 이건 들어봤겠지. 하오밀문이라고. 하오대문의 과거 이름이지.”
“그러니까 하오문의 문주라 이 말이지? 얼마 전에 멸문당했던…….”
어이없다는 얼굴로 야혼을 빤히 쳐다보던 악운보가 이내 어깨를 들썩였다. 비단 그 뿐만 아니었다. 사뭇 긴장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던 무인들 전부가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쿡! 큭큭큭! 프! 하하하! 하하하!”
얼마나 웃어댔는지 허리를 숙이며 격렬한 기침을 토하는 자도 있었다. 하오밀문이라니, 문파로 인정해주지도 않는 그런 문파가
하오문이었다.
그런 문파의 문주라며 뻐기는 야혼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는 얼굴들이다. 아니 불쌍한 눈으로 보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전부 배꼽을 붙잡고 웃고 있었지만 단 한 부류, 웃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육만우를 비롯한 다섯 명이었다.
‘형님 누굴까요?’
‘글쎄 낸들 알겠나. 위기에서 구해준 건 고맙기는 한데…….’
구칠우의 전음에 육만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주는 통에 체면을 차리기는 했지만, 그보다 상대의 정체가
더욱 궁금했다. 자신들을 알아보고 일부러 나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일행과는 달리 야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가 있었다. 야혼과 같이 태을건곤심법을 익혔던 초영완이었다.
살이 쪄, 이목구비가 다소 몰려 보이긴 했지만 본 생김새가 변했을 리는 만무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초영완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설마…… 야사제!”
“이젠 사제가 아니고 문주다. 뭐 하냐, 이쪽으로 와서 신임 문주님께 인사 안하고!”
초영완을 향해 눈을 찡긋한 야혼이 근엄한 얼굴로 육만우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아-! 네!”
“초 동생!”
홀린 듯 벌떡 일어나 야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초영완을 육만우와 구칠우가 불렀다. 둘의 얼굴이 잔뜩 붉혀 올랐다.
방금 전 비대한 인물의 등장으로 욕을 먹지 않았다고 좋아했었는데 차라리 악운보에게 욕먹은 게 더 나을 뻔했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초영완은 이미 야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몸은 왜 이렇게 변했고.”
“아이고 그래도 날 반겨주는 사람은 초 사형밖에 없다. 네가 안 왔으면 쪽팔릴 뻔했다야.”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초영완을 덥석 안으며 야혼이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많이 컸구나?”
“네?”
“그런 게 있다. 일단 앉아 있거라. 너희들은 나중에 보자.”
육만우 일행을 향해 눈을 흘긴 야혼이 비릿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악운보 앞으로 걸어갔다.
“감동적이구나, 하오문이라니……. 밥값은 내 줄 테니까 그냥 가라.”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야혼을 향해 이죽거린 악운보가 사마웅풍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전에도 너처럼 말한 놈이 있었지. 하지만 결국엔 그 놈 목숨은 내가 구해주었다. 지금 그놈이 뭐라 불리는 줄 아나?”
“호오! 어떤 병신 같은 작자가 너 같은 놈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겠구나. 차라리 자살해 죽는 게 더 나았을 텐데.”
“미안하지만 그놈들은 자살하지 않았다. 지금 삼천룡(三天龍)으로 불리고 있다지? 강호 무림의 영웅으로 말이다.”
“뭐라고?”
술잔을 잡아가던 악운보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냥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그 역시 십만대산 행에 하오밀문의 인물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내색하지는 않지만 남천악이나 유마혼 그리고 주려화 그들의 힘으로만
성모봉을 찾았을 거라 여기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과거에도 그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떠났다가 실패한 곳이 십만대산이었는데, 그들 3인의 힘으로 다녀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게다.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묻지 못하고 있는데 자칭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자가 그곳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이제 상대를 해 줄 맘이 생겼나?”
“아니? 성모궁이 아니라 무릉도원에서 천도복숭아를 따먹고 왔다해도 하오문은 하오문일 뿐이다. 개나 소과에 해당하는 천박한
놈들.”
“그 말은 나를 눕히고 해야지. 네 애비한테 그렇게 배웠냐? 겁나면 말로만 싸우라고?”
“이런 개자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악운보가 다가서는 야혼을 향해 사정없이 일 장을 날렸다.
와장창!
쿠웅!
200근에 달하는 거구가 날아서 떨어지는 소리는 요란했다. 3개의 탁자가 산산조각 부서져 흩어졌다.
“이제 네 놈의 처지를 알았나? 일 초 상대도 안 되는 하찮은 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끄응! 씨팔, 좆나게 아프네.”
“으응?”
몸을 툴툴 털고 일어나는 야혼의 모습에 악운보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홧김에 뻗어낸 장이었다고는 하지만 거의 8성에
달하는 공력이 담긴 힘이었다. 웬만한 통나무 정도는 산산조각 내버릴 정도의 엄청난 공격이었는데, 녀석은 인상만 찌푸렸을 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얼굴이었다.
“성모궁에서 얻은 게 있었더냐?
자존심이 상했는지 붉어진 얼굴의 악운보가 내기를 잔뜩 끌어올렸다. 그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오른 손에 붉은 기운이
어리며 뇌기가 번쩍거렸다.
“뇌음장(雷音掌)!”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악운보의 장법을 알아본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뇌음장(雷音掌). 창을 주무기로 하는 산동악가의 또 다른 비기 중 하나였다. 즉 창을 뻗어내지 못할 정도로 상대가 접근했을
때 사용하는 무공으로 창안되었지만 그 세기는 강호의 어떤 무공에 뒤지지 않는다 하였다.
그 뇌음장을 운기했을 때의 형상이 지금 악운보의 모습이었다.
“자! 쳐봐라. 악가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자.”
붉은 살기를 발하는 악운보의 손을 쳐다보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래 죽여주마. 뇌음인(雷音印)!”
온몸을 부르르 떨던 악운보가 광폭한 고함을 내지르며 야혼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검붉은 뇌기를 동반한 손바닥
문양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콰앙!
이번에도 역시 굉음을 내며 야혼의 몸이 거칠게 처박혔다. 객잔 이곳저곳에서 나지막이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손을 써보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기만 하는, 자칭 하오문 문주라는 청년에 대한 동정이었다.
한번은 어찌 살아났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불가능하리라 여겼다. 그들의 눈에도 악운보의 뇌음인(雷音印)은 대단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저럴 수가…….”
중인들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완전히 숨이 끊어졌을 거라 여겼던 야혼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상에 하나도 안 다쳤어, 그런데 저건……. ”
안타까운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던 객잔 주인 장기웅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자신과 동류라는 인식 때문이었는지 기물이
파손되는 것보다 야혼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다. 해서 야혼이 하는 양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는데.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야혼의 가슴팍 밖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고 있는 두 권의 책자를 보았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성모궁과 십만대산이 뇌리를 스쳤다. 조금 전 악운보와 이야기를 나눌 때 분명 성모궁에 다녀왔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환영마도법(幻影魔刀法)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부르짖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을 일으키는 야혼의 등뒤로 떨어진 책 한 권을 발견한 것이다.
책장 맨 앞에 쓰여있는 환영마도법이란 글귀, 100년 전 성모척살대의 일 인이었던 환영마도(幻影魔刀) 길상(吉相)의
독문도법이었다. 순식간에 객잔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오밀문의 문주라 했던 비대한 인물이 했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성모궁에 다녀온 것이 아니라면 100년 전에 사라진
환영마도법이 세상에 나올 리가 없을 터였다.
여기저기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하여 탐욕스런 눈빛까지.
“아저씨, 뒤에 책 떨어졌어요.”
“이런…… 성모궁에서 유일하게 얻은 것인데……. 젠장!”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야혼이 환영마도법의 비급을 집어들며 사방을 살폈다. 마치 깊숙이 감추어야할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이곳 저곳을 쳐다보던 야혼이 이내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새끼하고 싸울 동안 잠시만 맡아주시오.”
대답도 듣지 않고 탁자 위에 책을 던져놓은 야혼이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악운보를 향해 다가갔다.
‘주인장 도망갈 곳은 없소?’
“헉!”
갑자기 들려온 전음에 장기웅이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토했다. 설마 환영마도법을 버리고 도망치려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품속에 있는 거라도 지켜야 할 것 아뇨. 그게 한몫잡을 밑천인데.’
또 다시 전음이 들려오자 마음을 진정시킨 장기웅이 사방을 예리하게 살폈다. 모든 무인들의 시선이 창가에 있는 자들로 향해
있었다.
문제는 환하게 밝혀진 불이었다.
실내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등만 꺼트릴 수 있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번이 마지막이오.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단 말이외다.’
‘알았네. 악운보의 마지막 공격과 동시에 내가 불을 끄겠네. 공격을 받음과 동시에 계산대 쪽으로 오시게. 꼭 이쪽으로
와야하네.’
‘알았소이다.’
장기웅을 향해 슬쩍 미소를 던진 야혼이 이번에는 양지와 일행에게 전음을 보냈다.
양지가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한 야혼이 악운보를 향해 이죽거렸다.
“아직 나를 눕히지 못했다. 힘을 좀 내라. 그래 가지고 어디 산동악가의 체면이 서겠나?”
“안됐구나. 천고의 보물을 익히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으니. 잘 가라, 천둥벌거숭이 하오문주여. 뇌음파(雷音破)!”
우르릉!
팟!
전력을 다했는지 악운보의 양손에서 미약한 우레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천장에 매달려 있던 등(燈)불이 꺼졌다.
“죽어라!”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며 비급을 주시하던 무인들이 몸을 날렸다.
삽시간에 수양루 안이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시장통으로 변했다.
어둠 속 이곳 저곳에서 병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창문이 터져나갔다.
그 순간 야혼의 몸 또한 무서운 속도로 튀어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자신의 의도대로 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놀라운 경험을 했던 것이었다.
악운보의 장(掌)을 맞는 순간 반탄력이 생기는 것 같더니 단전으로 급속하게 내공이 유입되었다. 몸을 비대하게 한 원인인 약
기운을 내공으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던 거였다.
“변태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맞는다, 이 새끼야. 내가 익힌 무공이 뭔지 아냐? 10대를 맞고 한 대를 돌려주는
무공이다.”
가슴 쪽으로 치오르는 강한 충격을 느끼며 오른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거 한방이다 개자식아!”
경악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악운보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야혼이 오른 손을 힘차게 박아 넣었다.
“커억!”
그런데 묘하게도 두 사람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악운보의 몸이 뒤쪽에 있던 사마웅풍 쪽으로 날며 그의 시야를 차단했고 야혼의
동체는 계산대 쪽으로 힘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일부 무공이 강한 자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와작!
“이쪽일세!”
계산대를 부수며 떨어지는 야혼을 향해 장기웅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크윽! 좀 부축해 주쇼.”
재빨리 안쪽으로 들어간 야혼이 고통스런 얼굴로 장기웅에게 기댔다.
“괜찮은가?”
“당연히 괜찮지. 아직 한 놈 죽일 힘은 남아있소이다.”
빤히 쳐다보는 장기웅을 향해 야혼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몸에서 미약한 살기가 느껴졌던 터였다.
“다행이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
여전히 야혼을 쳐다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내심으론 꽤나 갈등하고 있었다.
조금 전 놈의 가슴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던 두 권의 책자를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 두 권의 책자만 수중에
넣는다면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다.
하지만 상대의 정확한 실력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비록 악운보에게 공격한번 하지 못했지만, 그의 장을 3번이나 맞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놈이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60)- 좋은 비급 하나 있는데......(3)
“기회를 잃은 것 같소이다.”
“무슨…… 누…….”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장기웅이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쉿! 밖에 있는 놈들에게 이곳의 위치를 알리고 싶소?”
검은 동체 하나가 슬금슬금 기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야혼이 낮게 소리쳤다.
“대단한 자군.”
두 사람을 향해 빙긋 미소짓는 인물은 다름 아닌 창가에 있던 소림 승려였다.
“일행은 어찌하고 혼자 오셨소?”
“이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왔소이다. 그분들을 어찌할 무림인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법현이오.”
야혼과 비슷한 덩치를 가진 법현이었다. 무림인들이 달려드는 그 순간에도 법현은 야혼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도 하오문주의 무공이 분명 악운보를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맞아주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악운보를 향해 마지막 일 권을 날리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말로만 듣던 사기꾼이란 사실을. 해서 사형들이 몸을 날려 떠나는 것을 보고도 따라가지 않았던 것이다.
“여하튼 고맙소. 댁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 같소이다. 몇 살이오.”
“올해로 서른입니다.”
“그런가? 나하고 동갑이구먼, 우리 말 까자.”
“말을 까자는 건…….”
‘이것 봐라. 순 맹물이네? 좆나게 무공만 익혔구먼.’
법현의 모습을 가만히 살피던 야혼이 싱겁게 웃었다.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힌 법현을 따라 4명이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양지에게 듣기론 소림에서 법(法)자 돌림은 가장 배분이 높다 하였다.
결국 법현이 그분들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림의 최 고수들이란 말인 게다.
“아!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막말을 하는 거지 뭐. 즉 친구끼리 하는 말 있잖아.”
“그런가? 나야 좋지 뭐.”
법현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머리 깍은 중 말고는 외부인으로는 야혼이 처음이었는데 시원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근데 너 살 좀 빼야겠다. 중이 되가지고 이게 뭐냐? 혹시 돼지가 말까자고 하지 않던?”
“나도 빼고 싶다. 별로 먹지도 않은데 살이 찌는 걸 어쪄냐. 그런 너도 만만치 않은데, 뭘.”
“혹시 너도 약을 많이 먹어서 그렇게 된 거냐?”
“약 때문인 건 맞다. 어렸을 적 벌모세수(伐毛洗髓)하다가 잘못돼서 이렇게 변했다고 하더라.”
“벌모세수?”
“무인이라며?”
법현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공은 상당한 친구가 벌모세수란 말을 전혀 모른 듯 했기 때문이었다.
벌모세수(伐毛洗髓)란, 무공을 익히는 최상의 신체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대법을 말한다. 주로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는
태아에게 주로 펼치게 되는데, 무수한 영약과 3갑자 이상의 무공 고수 4명이 있어야만 시전할 수 있는 고도의 대법이다.
소림사 정도의 거대문파가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대법이 바로 벌모세수였다.
하지만, 정력제 종류라면 모를까 벌모세수 같은 어려운 용어를 야혼이 알 리가 없었다.
“씨발! 세수는 개울물에 하면 되는 거지, 꼭 영약을 처먹으면서 해야하냐? 그런 것 있으면 나나 좀 주지.”
눈을 부라리며 투덜대던 야혼이 그의 몸을 쿡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돼지새끼 같은 몸이 약 때문이라 이거지? 그럼 나하고 같은 증상이네, 뭐.”
“무슨 말이냐? 너하고 같다니? 너도 약 때문에 이렇게 불었단 말이냐?”
“1년 전 만해도 뒤도 못 닦았다, 손이 안 닿아서.”
“비결이 뭐냐?”
법현이 잔뜩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사형들에게 벌모세수의 실패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언급을
자제했지만 살은 그의 최대 과제였다.
현 상황에서 그가 바라는 게 있다면 무공의 완성과 고뇌하는 중처럼 되는 것이었다.
“많이 하면 돼. 하면 할수록 빠지는 게 살이다.”
“많이 하라고? 뭘 많이 해야하는데.”
“뭐긴, 임마. 오입이지.”
집게와 중지 사이에 엄지손가락을 쑤셔 박으며 야혼이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달마동에 틀어박혀 살던 법현이 그 말의
의미를 알 리가 만무했다.
“오입? 그건 또 뭐냐?”
“이런 순둥이 같은 놈, 오입도 모른 놈이 서른이나 처먹었냐? 오입이란 바로…….”
말을 하다만 야혼이 법현의 사타구니로 불쑥 손을 밀어 넣어 그의 물건을 힘껏 틀어쥐었다.
“허억!”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법현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이제야 야혼이 말한 오입이란 의미를 알아차렸던 거였다. 불가의 제자로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오입이다. 짜식, 물건은 겁나 튼실하구먼.”
“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장기웅이 어이없는 얼굴로 실소를 머금었다. 살빼기, 자신 또한 지상명제로 삼는 것 중의
하나였기에 야혼이란 자의 말을 관심 있게 들었다.
그런데, 오입이 그 방법이라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는 스님 아닌가.
참으로 엉뚱한 자란 생각이 들었다.
“물건 살 사람이 없는 거요? 팔 곳이 없다면 그냥 가고. 나는 구전 좀 주려고 했는데…….”
멍한 얼굴로 쳐다보는 장기웅을 향해 야혼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닐세. 따라오게.”
화들짝 놀란 장기웅이 서둘러 길을 잡았다. 비밀통로를 통해 수양루를 나온 일행은 빠른 속도로 몸을 움직였다.
거의 일 각 정도를 달렸을까. 한 눈에 보아도 엄청나게 보이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정문 위쪽에 걸린 현판을 쳐다보며 빙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내심 중얼거렸다. 수양표국(首陽鏢局), 섬서성 남부에서 가장 큰
표국이 바로 이곳이었다. 더하여 도살장 지하에서 보았던 이름. 마도련 소속 단체 중의 하나였다.
“그래 무슨 일인가?”
수양표국의 국주인 혈장(血漿) 권무옥(權茂鈺)이 들뜬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장기웅으로부터 수양루에서 일어났던 말을 들었을 땐 참으로 정신나간 놈이라고 여겼다. 남들은 비급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데, 그것들을 팔겠다니. 하지만 이어지는 장기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멸망한 하오밀문의 문주라 하였다. 십만대산에 다녀오느라 하오밀문에서 십전수 구약종의 무공이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 문주가 되었다고 하였다.
문을 재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무공이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은 문파를 경영해본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저에게 좋은 물건 있는데 사시려는지요.”
“물건을 봐야 할 것 아닌가.”
“두 권입니다. 성모궁에서 3권을 가져왔는데 한 권은 포기했습니다. 가만있어라… 어 맞다. 무적군림마보(無敵君臨魔步)와
혼세광마장(混世狂魔掌)이라 쓰여있네요.”
혼자만 본 게 아니었다. 비급의 제목을 본다며 탁자 위에 올려놓았으니 권무옥 또한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정말인가?”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다시 한번 되물었다. 두 권의 비급이 주는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혈장(血掌), 권무옥(權茂鈺)의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장법(掌法)을 주특기로 삼는 무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보법자체가 공격기술인 무적군림마보와, 강호 5대 장법의 한가지인 혼세광마장은 그 어떤 무공비급보다 엄청난
기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이유였다.
“한데…….”
“무슨 일인가?”
말끝을 흐리는 야혼을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비급을 꼭 얻어야 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게 좀 비쌉니다. 아시다시피 십만대산은 다시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이 비급 또한 또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단 한 권씩밖에 없지요. 권당 두 장씩 주십시오.”
“두 장이라면……. 200냥은 아닐 테고, 2천냥을 말하는 건가?”
“좀 더 쓰셔야겠습니다. 섬서성에서 최고라는 수양표국 아닙니까. 일 년 동안 벌어들이는 돈만 해도 만 냥이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권무옥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수양표국의 수입은 철저하게 비밀로 봉해졌다. 심지어는 본련인 마도련조차 알지 못하는 극비
사항이었는데.
“제가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사실을 망각하신 모양이군요.”
사실은 수양표국에 대한 정보를 얻은 곳은 하오밀문이 아니라 도살장에 있는 도백회 지하에서였다. 그곳에 쌓인 정보는 실로
방대했다.
일부러 모으려 해서 모아진 정보가 아닌, 고기를 팔면서 주워들었던 정보들이 모여서 그런 엄청난 자료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수양표국의 수입과 같은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럼?”
“권당 2만입니다. 그 이하는 절대 안됩니다. 이곳이 아니라도 팔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간만 좀 있다면 이런 헐값에
넘기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곳에 4만냥이 있다고 생각하나?”
야혼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 마도련에서 하오밀문에 청부를 넣었던 금액이 10만 냥이었지만 그건 단지 지도를 그려달라는
조건이었다.
그 지도를 이용해서 찾고자 하는 것들이 바로 눈앞의 비급일진대. 하지만 임의로 쓰기에는 4만 냥이란 돈은 너무 거금이었다.
망설이는 권무옥의 귓전에 쐐기를 박는 야혼의 말이 들려왔다.
“이곳에 오래 머물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곳 상주에 있는 무림인들은 저를 찾아다닐 것입니다. 거래를 하실 의향이
있다면 한시라도 서두르는 게 서로를 위해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하지만 자네가 익히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글쎄요. 그거야 국주님이 판단하실 일이라 생각되는군요. 제가 익히지 않았다고 해도 국주님이 믿지 않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두 가지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물었던 말이었다. 아울러 수양루를 맡고 있는 장기웅으로부터 야혼의 무공에
대해서 들었다.
외가기공을 익힌 것은 확실했으나 장법이나 보법을 익힌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아울러 무공이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까지.
“좋네, 구입하기로 하지.”
탐색하듯 야혼을 쳐다보던 권무옥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련에 보낼 2만냥까지 전부 동원해서 일단 비급을 구입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거래가 성사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표국의 국주답게 권무옥은 현금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거운 현금보다는 보석으로 바꾸어 비밀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2만 냥은 보석으로 나머지 2만냥은 전표와 현금으로 준비했네.”
거의 일 각 동안 보이지 않던 권무옥이 두 개의 상자를 야혼 앞에 내려놓았다.
“좋습니다. 국주님을 믿고 세어보지는 않겠습니다. 여기…….”
두 개의 상자를 바짝 끌어당긴 야혼이 품속에서 비급을 꺼내 내밀었다.
“오……!”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비급을 받아든 권무옥이 낮게 감탄사를 발했다. 100년의 전설이 현실로 다가왔다.
지금 있는 무공에 전설이 더해진다면 그 뒤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니 지금 익히고 있는 무공을 버리고 혼세광마장만 익혀도
천하 100대 고수반열에 오른다.
골머리 싸맬 표국일을 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본련에 들어가 지시하는 위치에 올라설 것임에 분명했다.
“확인하셨으면 저는 떠나겠습니다. 한가지 분명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지 않겠나. 자네는 이곳에 온 적도 없고 나를 보지도 못했네.”
하고 싶었던 말을 오히려 야혼이 대신하자 흐뭇하다는 듯이 권무옥이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장기웅이 뒷문을 안내해 줄 걸세. 부디 하오밀문을 다시 세우길 바라겠네.”
“고맙소이다, 국주.”
가볍게 고개를 숙인 야혼이 두 개의 상자를 들고 법현과 장기웅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왔다.
“들어라!”
무거운 상자를 법현에게 던지듯 떠 안긴 야혼이 장기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을 안내해달라는 듯이.
“뭐냐, 이게?”
“일단 들고 따라와라. 나중에 보여주마.”
말없이 앞서나가는 장기웅을 뒤따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야혼의 목소리가 몹시 흥분한 듯 떨려나왔다.
개봉부의 지부대인을 협박하여 돈을 우려낼 때와는 또 달랐다. 그때는 태연한 얼굴로 돈을 가져오라고 요구했었는데, 지금은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서둘러 나가는데 모든 정신을 쏟아야만 했다.
“저쪽으로 빙 돌아서 떠나도록 하시게.”
“고맙소이다, 장대인. 구전은 이미 지불했으니까 상자는 열지 않겠소.”
장기웅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쯧! 우선은 즐거워하거라. 그 정도 배려는 해주마.”
공치사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야혼이 남긴 마지막 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구전은 이미 지불했다는 말의 의미를.
이미 정체를 알고 접근했다는 말이었는데.
“갔느냐?”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막연한 눈으로 쳐다보던 장기웅 등뒤로 국주인 권무옥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본련에 보낼 돈인데 찾아와야지. 그리고 비급에 대한 건은 자네와 나 둘만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국주님!”
장기웅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두 사람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국주의 말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자신 또한 비급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이번에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30명을 데리고 가게. 한적한 곳이어야 하네. 복면하는 것 잊지 말고.”
순순히 4만냥을 지불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전설의 비급을 얻었으면 살인멸구(殺人滅口)는 당연한 일이었다.
강호를 살아가는 철칙중의 하나가 보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말이었으니.
야혼과 법현이 떠난 직후 수양표국에서 30명의 복면인들이 몸을 날렸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61)- 투견공(鬪犬功)(1)
투견공(鬪犬功).
“이거 봐! 더 빨리 도망가야하는 것 아냐?”
보석 상자를 들고 달리던 법현이 야혼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수양표국을 나올 때만해도 물건 훔친 도둑처럼 정신 없이 달리던
그가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연신 뒤를 돌아보며 속도를 늦추는 것 같아 하는 말이었다.
영문은 잘 모르겠지만 결코 잘하는 일은 아니라는 건만은 확실했다.
번거로운 일을 피하기 위해서도 빨리 사라져야 한다는 게 법현의 생각이었다.
“무슨 소리야 임마. 지금부터 시작인데. 어이쿠, 온다.”
저 멀리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검은 인영들을 바라본 야혼이 엄살을 떨며 쾌속하게 쏘아져 나갔다.
반 시진 정도를 달린 야혼과 법현이 멈춘 곳은 양지에게 기억하라고 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여기요, 여기.”
다가오는 사람이 야혼임을 확인한 양지가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산자락 오른 편 으슥한 곳에 마차를 대기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부 기다리고 있었네? 일단 이것부터 받고. 너희들은 나중에 계산하자. 뭐해 출발해!”
육만우를 비롯한 다섯 명을 향해 눈을 부라린 야혼이 양지를 향해 소리쳤다.
“아예 소문을 내라, 소문을 내.”
야혼의 목소리가 너무 컸음인지 양지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도망가는 입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 요란한 출발을
하는 듯했다.
“시킨 일은 잘 했냐?”
“물론, 객잔 몇 군데 들러 은밀하게 소문을 냈지.”
“저기 문주님!”
양지 옆에서 마차를 모는 야혼을 향해 초영완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물으려는 참이었다.
초영완뿐만 아니라 육만우 일행 전부가 야혼이 꾸미는 일을 궁금해했으나 감히 묻지를 못하고 초영완에게 미뤘다.
그나마 야혼과 가장 친했던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양지 언니랑 다니면서 소문을 내긴 했는데 도통 무슨 일인지…….”
“양지 언니?”
야혼이 황당한 얼굴로 양지를 쳐다보았다. 나름의 계산으로는 적어도 초영완이 두 살 더 많았다. 그런데 양지를 향해 언니라
부르고 있었다.
‘양지야 동생이 그렇게 많으면서 또 언니 노릇을 하고 싶냐? 나 같으면 절대 언니 안 한다. 동생하지.’
‘나도 그러고 싶었지. 뚱띵이 아저씨가 완영이에게 년이란 소리만 안 했으면 말야. 내가 떠날 때까지는 영약을 다른 년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거든.’
야혼을 향해 눈을 찡긋한 양지가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초 사형 아직은 알려 하지 말아라. 조금만 더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워! 워어!”
가볍게 웃어넘긴 야혼이 한편으로 마차를 세웠다. 널따란 벌판에 가려진 계곡으로, 마차와 말을 숨기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뚱띵이 아저씨 지금은 발라야 할 때 아니에요? 돈 찾으러 쫓아오는 것 같은데.”
야혼의 행동이 의아한 듯 양지가 물었다. 그녀 또한 법현(法玄)의 생각과 같았다. 무공비급을 팔았으면 서둘러 빠져나가야 할
터인데 야혼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듯하여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양지의 물음에는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야혼은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옴마! 저 누더기를 어디 자랑할 게 있다고. 아예 바지까지 벗지 그래요.”
“세상에…….”
태연하게 야혼의 옷을 받아드는 양지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양지의 표현이 정확했다.
야혼의 상체는 흉터 투성이었다. 성한 곳 하나 없이, 수많은 흉터가 전신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특히 일행의 대형 격이라 할 수 있는 육만우의 놀라움은 누구보다 컸다. 물론 몸에 많은 흉터를 지닌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야혼처럼 전신에 거미줄처럼 얽힌 흉터를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더하여 그 흉터들이 단순하지 않았으니. 대부분이
검과, 도 그리고 창이 할퀴고 간 흉터였다.
그저 서대시전의 야바위 도박꾼으로만 생각했을 뿐인데 지금 야혼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양지의 말마따나 바지까지 벗어든 야혼이 전방을 노려보며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양 팔목에 찬 비호(臂護)와 속곳 하나. 그가 걸친 전부였다.
“양지야 이곳이 어디인줄 아느냐? 앞으로 이 야혼이 만들어갈 하오대문(下午大門)의 시작점이다. 강호 무림을 씹어버리고 오직
하오대문만 남게 된다. 그 시작점이 바로 이곳이란 말이다.”
여전히 전방을 노려보던 야혼이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쿠웅!
바닥에 선명한 족적을 남긴 일보(一步)에 야혼의 하체가 검게 물들었다.
파악!
힘차게 내뻗는 이보(二步)에 상체가 검게 물들며 기이한 광채가 일렁였다. 마치 온몸에 철갑을 두른 듯 검게 변한 야혼의
몸뚱이가 무서운 속도로 전방을 향해 달려나갔다.
쿵! 쿵쿵쿵!
“금강철피공(金剛鐵皮功)을 완성하다니, 대단한 친구군.”
야혼의 모습을 쳐다보던 법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금강철피공에 대해선 사형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내공으로 완성하는 무공이 아니었다. 온몸에 극심한 타격을 끊임없이 주어야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 바로 금강철피공이었다.
많은 강호인들이 알고 있는 무공이지만 역대 어느 누구도 완성한 사람이 없었다. 외공을 등한시하는 무림인들의 속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익히기가 까다롭다는 의미였다.
“법현 아저씨, 곰같이 변하는 저 무공이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네? 아…… 네!”
아저씨라는 양지의 말에 화들짝 놀란 법현이 얼굴을 붉혔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여인이었다.
“놀라긴. 저는 양지라고 해요. 정식으로 인사 안 했죠?”
법현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양지가 픽 웃으며 혀를 쑥 내밀었다.
“네, 양지소저. 대단하기보다는 익히기가 까다롭다는 거지요. 저 친구가 익힌 금강철피공은 외공입니다. 즉 외피를 단단하게
만드는 무공이지요. 금강철피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듯 잠시 말을 끊은 법현이 가볍게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빨리듯 잡혀들었다.
“이 돌을 이용해서 피부를 내려찍는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철갑처럼 단단해 질 때까지.”
“그럼 온몸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선?”
“절벽 같은 곳을 향해 눈감고 돌진해야지요. 그래서 대단하다고 한 겁니다. 아무리 강한 내공이 있다 치더라도 바위를 향해
달려드는 건 쉽지가 않거든요. 거기다 더 중요한 건 무공을 완성했다는 겁니다. 하찮은 무공이라 할지라도 그 무공을 완성했다
함은 엄청난 의미를 지닙니다. 어설프게 신공을 익힌 무인보다 삼류무공을 완성한 사람이 더 강하다고 하더군요.”
사형들의 가르침이었다. 아직 강호 경험이 없어 그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야혼이란 친구를 보면서 깨달아지는 바는
있었다.
하지만 법현도 야혼에 대해 완전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의 금강철피공은 절벽에 부딪진 행동만으로 얻어진 게 아니었다.
겁천십웅 두 사람의 무공을 온몸으로 받아서 완성한 금강철피공이었다.
껍질뿐만 아니라 내부까지도 금강철피공으로 도배를 했다고 봐야했다.
“또 사형들이 이런 말씀도 하더군요. 어떤 무공이 되었건 완성이란 이름을 달게되면 새로운 경지가 보인다고요.”
법현의 말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그에게 물었던 양지가 아니었다. 육만우를 비롯한 다섯 명은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나 신공을 찾아 헤맸던 자신들, 가문에 있던 무공조차 완성하지 못한 채 새로운 무공을 찾아 다녔다.
강한 무공만이 강한 무인을 만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그런데 소림의 승려라는 법현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잡식으로 수십 가지의 무공을 익힌 자보다는 약하지만 한가지를 완성한
무인이 더 강하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저자가 우리보다 더 강해졌나?”
야혼이 있는 곳을 쳐다보며 육만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거의 3년만에 만난 야혼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자신들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하오밀문에 들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분위기에 휩쓸린 듯 따라온
이유가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야혼이란 파락호가 강해진 방법을 듣고 싶어서.
“하오대문(下午大門)이라, 당신의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군…….”
“안됐군. 하오밀문의 문주. 차라리 숨어서 가져온 비급이나 익혔으면 죽지 않아도 될 터인데.”
검은 광채를 일렁이며 바짝 앞으로 다가온 야혼을 향해 장기웅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하오밀문이 강호인들에게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가온 기회를 잡지 못하는
바보들.
“이게 전부 단가?”
그러나 야혼의 얼굴은 태연했다. 아니 검게 변한 얼굴엔 표정 하나 없었다. 장기웅이 데려온 무사들을 향해 나지막이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쿡!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군.”
장기웅이 나직한 웃음을 토했다. 자신이 데려온 30명은 수양표국 3할의 전력이었다. 5명의 표두(鏢頭)에 표사(鏢師)가
10명이었다. 나머지는 일반 무사지만 지금 데리고 온 전력이면 잡지 못할 무인이 없다고 자신했다.
“잘 알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곳이 바로 세상의 이치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힘차게 앞발을 굴렸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자세를 낮췄다.
투견공의 기본자세였다.
“쳐라!”
야혼의 발이 발목까지 깊숙이 빠져드는 순간 장기웅이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많은 훈련을 거친 듯 장기웅의 고함소리가 울리자마자 30명의 무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야혼을 포위했다.
후-욱!
“이야합!”
여전히 땅속에 자세를 낮추고 있는 야혼을 향해 한 복면인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찔러 넣었다. 별다른 초식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곰같이 커다란 동체는 온통 허점 투성이었다. 그냥 찔러 넣기만 하면 바로 끝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복면인의 그런 생각은 오판이었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났다.
챙!
눈앞으로 다가오는 검을 오른손으로 휘둘러 쳐낸 야혼의 동체가 땅속에 박힌 오른 발을 축으로 순식간에 한바퀴 회전했다.
퍼억!
회전과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왼팔을 쭉 폈다. 왼 손등에 상대의 목이 걸려들고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부러진 검을 망연한
눈으로 쳐다보던 복면인의 고개가 직각으로 꺾이며 지면을 향해 처박혔다.
단 일수에 목뼈를 부러뜨려버린 것이었다.
후-욱!
거친 숨을 내쉰 야혼이 왼쪽에서 다가오는 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순 그의 눈에서 번쩍 광채가 솟구쳤다.
여전히 오른발은 땅속에 박아 넣은 채 자세를 낮추며 또 다시 회전했다. 이번에는 팔이 아닌 왼쪽 다리였다.
다리가 부러지며 지면으로 무너지는 자를 향해 200근의 거구가 몸을 날렸다. 온몸을 던지며 지면을 향해 팔꿈치를 내리
찍었다.
쿠웅!
와작!
잘 익은 수박 깨지는 소리가 이럴까. 허연 뇌수가 사방으로 튀기는가 싶더니 한순간 야혼의 거구에 깔린 복면인의 형체가
사라졌다. 부서진 부분과 함께 땅속으로 묻혀버린 것이었다.
두 다리를 들어올린 채 빙그르르 회전하며 일어난 야혼의 동체가 뒤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퉁겨졌다. 몸통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옆구리 사이로 흘리며 상대의 허리를 잡아 거꾸로 들어올렸다.
전면에서 다가오는 검을 상대의 몸통으로 막아내며 땅속을 향해 힘차게 박아 넣었다.
챙!
가슴팍에서 푸른 불똥이 일었다. 처음으로 야혼의 몸에 흔적을 남겼지만 살갗을 뚫지는 못했다.
가슴 쪽을 쳐다보며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상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우두둑!
“으아악!”
한방에 허리를 으스러뜨렸다.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자의 시체를 들어올려 몸을 뒤로 젖히며 박아 넣었다.
활처럼 구부러진 몸 위로 또 다른 검이 달려들었다. 일 검에 허리를 잘라 버리려는 듯 새파란 검광을 발했다.
그러나 야혼의 동작도 빨랐다. 200근이 넘는 거구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하늘을 향해 활처럼 구부렸던 허리를 바닥으로
내리며 두 다리를 힘차게 차올렸다.
반원을 그리며 검을 피해낸 야혼의 동체는 어느새 상대의 머리 위 에 올라 와 있었다.
“으아악!”
야혼을 공격했던 인물이 상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공포에 절은 비명만 토해냈다. 그리고 위에서 떨어지는 검은 동체와
함께 땅속 깊숙이 묻혀버렸다.
“죽어랏!”
땅속 깊숙이 박힌 야혼의 등을 향해 다른 한 명이 무자비하게 검을 찔러갔다.
5명의 표두중 한 명이었는지 그의 검에는 잔뜩 검기가 서려있었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것을 보면 상당한 내공의 소유자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후-욱!
깊은숨을 내뱉은 야혼의 몸이 빙그르르 돌아 구덩이 속에서 나오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상대 또한 상당한 무공을 익힌 자.
찔러가던 검의 방향을 틀어 허리를 노리며 휘둘렀다.
순간 검게 변한 두 손이 파리를 잡듯 합쳐졌다. 손목을 꺾어 검을 부러뜨림과 동시에 상대의 이마를 향해 찔러 넣으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뒤쪽에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숙여진 머리 위로 검기 가득한 검이 지나갔다. 엉덩이 바로 뒤에 있는 상대를 감지한 야혼이 힘차게 허리를 튕기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퍽!
머리와 머리가 부딪쳤지만 깨지는 소리는 복면 안에서만 들려왔다.
순식간에 붉게 변한 복면이 함몰되었다.
쿠웅! 쿠웅! 쿵쿵쿵!
주춤거리며 상대가 다가오지 않자 이번에는 야혼의 거구가 바닥에 깊숙한 족적을 남겼다. 마치 미친 소가 돌진하듯 복면인들
사이로 뛰어든 야혼이 사방으로 주먹과 발을 날렸다.
투견공(鬪犬功). 일명 개싸움이라 하였던 무공이 사방에서 터졌다.
특별한 격식이랄 것도 없었다. 손을 휘두르다 걸리는 게 있으면 찢어발겼다. 몸을 움직이다 막아서는 게 있으면 몸 채
찍어눌렀다.
손과 발 팔꿈치, 무릎, 그리고 머리까지. 관절이 있는 모든 곳을 비롯하여 불쑥 튀어나온 배까지 무기로 이용되었다.
후-욱!
가끔가다 한번씩 흘러나온 거친 호흡소리는 죽음을 고하는 숨소리였다. 검은 동체에서 번들거리며 흘러내리는 핏물은 공포 그
자체였다.
더하여 조금씩 강해지는 살기라니. 완성된 야차혈마지체(夜叉血魔之體)의 몸체에서 검은 동체보다 더 지독한 살기(殺氣)가
흘렀다.
수양표국 무인들의 몸을 묶어버린 가공할 살기가.
“이럴 수가……. 진정 저자가 하오밀문의 문주였단 말인가!”
장기웅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눈앞에 드러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수양표국의 무사 30명이 피떡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단순한 표국 무사들이라면 이렇듯 놀라진 않을 터였다. 마도련 소속의 무인들로 구성한 곳이 바로 수양표국이었다.
그런 그들이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
악마의 숨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5명이 죽어나갔다. 온전한 시체는 하나도 없었다. 마치 야수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듯
온몸이 처참하게 부서져 버렸다.
하오밀문의 문주라 하여 대수롭잖게 생각했었다. 악운보와 싸움 때도 일방적으로 당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럼 그 때는……. 일부러 당해주었던 거야. 지금 상황을 만들기 위해.”
허탈한 표정의 장기웅이 중얼거렸다. 무림에서 상대를 잘못 판단한 대가는 바로 죽음이다. 지금 상황이 무림 철칙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62)-투견공(鬪犬功)(2)
“연극이었어…….”
장기웅과 같은 말을 흘리는 사람은 또 있었다. 멀리서 야혼의 싸움을 지켜보던 육만우 일행이었다.
그들의 얼굴 또한 해쓱하게 변해 있었다. 한달 이상을 야혼과 같이 생활했고,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여겼던 양지마저
공포에 절어 있었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검은빛이 일렁이는 야혼의 모습은 지옥에서 막 뛰쳐나온 마신(魔神)을 보는 듯했다. 단 한번의 헛손질조차 없었다. 상대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일단 한 번은 허용한 다음 공격을 한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가서.
헛손질이 나올 리가 없었다. 더구나 상대를 격살하는 무공이라니. 무공을 전혀 모르는 일반 양민들이 주먹다짐할 때 보이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하지만 당하는 상대는 달랐다. 일반인들의 싸움에서는 코피가 나거나, 심하면 이가 부러지지만, 야혼의 주먹에 걸린 자들은
가격 당한 곳 자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목을 맞으면 목뼈가 부러지고, 머리를 맞으면 두개골이 함몰되었다.
허리를 껴안으면 허리가 직각으로 부러지고, 검은 동체에 부딪치면 땅속에 묻혀버렸다.
25명을 저승으로 보내는 동안에 단 한번도 몸을 멈추지 않았다. 사소한 동작만으로도 적이 죽어나갔다.
몰살! 대부분 무사들이 몰살을 당한 것이다.
“전신(戰神)이었어. 아니 마신(魔神)……. 정말 하오대문이 만들어지겠어.”
구칠우의 중얼거림이 아니더라도 일행 모두가 느끼는 바였다. 더 이상 과거의 하오밀문이 아니었다. 하오대문을 만들겠다 하였던
야혼의 말.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준비가 되었고 지금 상황 또한 그 준비의 일환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퇴각하라!”
견디다 못한 장기웅이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자신을 포함해서 5명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거친
호흡을 흘리며 다가들었다. 단 한 명에게, 수양표국, 아니 마도련 무인이 당한 것이다. 놈의 몸에는 상처하나 입히지 못하고
오직 자신들의 피로 도배를 해주면서.
기다렸다는 듯 4명의 수양표국 무인들이 장기웅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이제는 살았다는 듯 두 눈엔 안도의 빛이
가득했다.
그러나.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도망치는 무사들을 향해 오른손을 횡으로 휘둘렀다.
끼이익! 끼이익! 꺄아악!
순식간에 그의 전면으로 붉은 광채가 가득 들어차더니 도망치는 5명의 뒤를 무섭게 따랐다.
“사사만화류(死死滿花流)!”
핏빛 잔상을 남기고 날아가는 물체를 쳐다보던 구칠우가 저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바로 그 무공이었다. 하오비동에서 자신이 찾아낸, 하오밀문을 떠나는 조건으로 강웅삼에게 주었던 무공.
태을건곤심법을 익히지 못해 절반의 위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자신과는 천양지차였다. 20여장 이상 떨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름과 딱 어울리는 무공이구먼…….”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5인을 쳐다보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침묵, 야혼의 무위를 목격한 일행이 선택한 찬사는 침묵이었다.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30명의 무인들을 도륙해버린 그의
무공에 대해 어떤 말을 할 것인가.
그저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를 밖에.
“수고…….”
다가오는 야혼을 향해 말을 건네려던 양지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굳어있는 야혼의 모습은 말을 붙일 상황이 아니었다.
“뚱띵이……?”
양지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온 몸에 덕지덕지 피를 묻힌 채로 다가온 야혼이 육만우 일행을 쳐다보며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야혼을 알고 있는 그녀로선 기절할 노릇이었다. 아니 서대시전에 있는 모든 상인들이 보면 꿈이라 여길 터였다.
서대시전의 개차반 야혼이 무릎을 꿇다니. 하늘이 두 쪽 나기 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였다.
기절할 듯 눈을 치뜬 양지의 귓전에 더욱 놀라운 말이 흘러들었다.
“하오밀문을 떠나겠다고 했던 말을 철회해 주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약 덩어리 아저씨가…….’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야혼의 행동은 장난이 아니었다. 육만우 일행에게 진심으로 무릎을 꿇었고, 건네는 말에도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다시 하오밀문으로 돌아오라며.
“이러시면…….”
양지가 아무리 놀랐다 하더라도 당사자들인 육만우 일행만 할까.
갑작스런 야혼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온 몸에 피를 바르고 온 인간이 느닷없이 무릎을 꿇질 않나, 정중하게 하오밀문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할 줄이야.
전혀 예기치도 못한 경우를 당해서인지, 일행은 눈만 끔뻑거리며 야혼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할 말이 없었던 게다. 30명의 적을 혼자서 주살하는 엄청난 광경을 직접 보여주고, 바로 다가와서는 하는 말이, 하오밀문을
하오대문으로 만드는데 도와달라 하는 것이다.
가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처음 하오밀문에 입단할 때도 십전수 구약종의 무공 때문이었을 뿐 그곳의 제자가 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여 운이 좋아 구약종의 무공을 익힌다면 자신이 속한 가문에서 또는 문파에서 최고가 될 거라는 계산으로 하오밀문에 들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완전히 당했군.”
씁쓸한 미소를 지은 육만우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하오밀문의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였다.
“강소성 소천문(蘇天門)의 둘째 육만우, 문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시작이었다. 일행 중 가장 대형 격인 육만우가 무릎을 꿇고 충성서약을 하자 멍하니 그를 쳐다보던 나머지 일행 또한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복건성 해룡문(海龍門)의 셋째 구칠우, 문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강서성 사해표국의 둘째 서영상이 문주님께…….”
“절강성 화화방(花花幫)의 대공녀 매난설이…….”
“무산(巫山) 신녀곡(神女谷)의 제일제자 완초령이…….”
“고맙소! 강웅삼 전 문주님으로부터 하오밀문을 물려받은 야혼이오. 보시다시피 야혼은 지금 이 상태가 전부요. 지금부터
하오대문을 만들어 가겠소. 강호 무림에 오직 하오대문만 남도록 하겠소. 많이 도와주시오.”
여전히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발가벗은 동체의 한 명과 나머지 5명이 서로를 향해 절을 했다.
“자 이제 서로 수인사는 끝났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야혼이 육만우 일행을 향해 삼엄한 기세를 풍겼다.
“전부 대가리 박아!”
“네……?”
“신임문주로서 첫 명령이다. 그 자리에서 전부 대가리를 땅에 심어라! 빨리 못하나!”
야혼의 입에서 거친 고함이 터지자 육만우를 비롯한 5명이 무슨 영문인지 알지도 못하고 재빨리 머리를 박았다.
황당한 얼굴들, 머리를 박고 있으면서 뜨악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엉덩이와 두 손을 들어 올려라. 그 상태로 잘 생각해 보아라. 왜 신임문주가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그걸 알아내는 놈을
먼저 풀어주겠다.”
“양지야!”
“네! 뚱띵이, 아니 문주님. 저도 할까요?”
야혼의 서슬에 깜짝 놀란 양지가 재빨리 육만우 옆으로 가며 머리 박을 준비를 했다.
“아니 옷가지고 따라오라고. 씻어야겠다.”
‘법현! 식기도구 들어있는 상자를 치우면 철궤가 나온다. 뚜껑을 열고 가운데 있는 손잡이를 들어올리면 비급이 있다.
육만우는 검법(劒法)이면 될 테고, 구칠우는 도법(刀法)이다. 그리고 서영상은 각법(脚法)을 매난설에게는 대마수미혜검을
주면 된다. 그들의 머리맡에 하나씩 던져 놔라.’
“저 친구가……?”
들려오는 야혼의 전음에 법현 또한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소림사에서 무영각을 시전하여 자신들을 끌어들인 장본인이 지금에
와서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겠다는 심산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감시할 목적으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판단이 안 서는군……? 하지만 중요한 것 하난 배웠네.”
육만우 일행을 하오밀문으로 끌어들인 야혼을 보고 크게 깨달은 점이 있었다. 상대를 원할 때는 먼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육만우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육만우 일행은 결코 야혼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랬던 자들이 한순간에 충성스런 부하로 변했다. 결코 야혼이 뛰어난 인격을 가졌다해서가 아니었다. 진심,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진심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거였다.
“그럼 나도……? 설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야혼이 말했던 상자를 끌어올렸다.
“십팔, 이십 팔이라고 했지? 허걱!”
뚜껑을 열어제치고 책을 꺼내들던 법현이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황망히 삼켰다. 거의 100권 이상 되어 보이는 책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비급은 아래쪽에 있다고 했으니까 전부 춘서임에 분명했다.
“아미타불!”
나직한 불호를 외며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올렸다. 그러나 마음을 진정하기도 전에 또다시 불호를 외고 말았다.
경악하다 못해 기절할 노릇이었다. 수십 권의 책들이 전부 무공비급이었다.
소림의 광혈무상각이 있었고, 무당의 복마청운검법이 있었다. 아미의 대마수미혜검이 있었고, 남궁세가의 검법이 있었다.
그것도 몇 권씩 모사된 채로.
“내가 괴물을 친구로 사귀는 것 아닌가 모르겠군…….”
상자 안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 법현이 이내 이것저것을 들춰내며 비급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육만우라는 친구에겐 남궁세가의 제왕무적혈검(帝王無敵血劒)이 어울리겠고, 구칠우는 환영마도법(幻影魔刀法),
나쁜 놈, 이걸 우리에게 던져?”
환영마도법을 들어올린 법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여섯 권을 모사해놓고 한 권뿐인 비급을 믿고 맡긴다는 듯 떠안긴 야혼의
행동이 괘씸했다.
“서영상이란 친구는 광혈무영각(狂血無影脚)과, 빌어먹을 놈. 무적군림마보(無敵君臨魔步)를 그리고 대마수미혜검,
그런데…….”
전부 5권의 비급을 골라낸 법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혼이 완초령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무슨 까닭이 있겠지. 그나저나 사형들이 알면 날 잡아 죽이려 하겠군.”
육만우 일행의 머리맡에 가지고 나온 비급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고소를 지었다. 소림을 무공을 찾겠다고 나온 강호행인데 오히려
무공을 나눠주고 있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물어나 봐야겠군.”
“뚱띵이 아저씨. 법현스님을 끌고 다니는 이유가 뭐예요?”
개울가에서 야혼의 몸을 씻겨주던 양지가 잔뜩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지가 따라왔지 내가 끌고 왔냐? 그만 갔으면 좋겠구만, 자식이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는 걸 어쩌냐?”
“거짓말, 앞으로도 끌고 다닐 참이잖아요. 똑바로 서요. 좀 적당히 하지 온 몸이 피잖아. 앞으론 속곳도 아예 벗고 해요.
입으나마나 한 속곳은 왜 걸쳐요.”
덜렁거리는 야혼의 상징을 이리저리 치우며 양지가 쫑알거렸다.
“아이고 한 번 하잘 때는 신청도 안 하더니 자알 한다.”
‘한번 당해 봐라 뚱띵이 아저씨.’
손안에서 반응을 보이는 그것을 움켜쥐고 눈을 흘기던 양지가 이내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으음! 양지야 하지 마라. 지금은 시기도 안 좋고 때도 아니다.”
아래쪽에서 밀려오는 묵지근한 쾌감에 야혼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들어찬 많은 생각 때문에 그동안 딴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한가지를 마치고 나자 긴장이 풀어지는지 양지의 조그마한 손놀림에도 급격한 반응을 보였다.
“안 되겠다. 아저씨 오늘을 용봉환락무 없이 그냥 하자. 빨리 하면 되잖아.”
“너……?”
“잔말 마. 나도 하고 싶은 땐 해야할 것 아냐.”
터질 듯 솟구친 야혼의 그곳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지금 막 받아들인 하오밀문의 문도들이 머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양지와 야혼이 뜨겁게 얽혔다.
야릇한 비음소리와 뜨거운 신음소리가 한참동안 울려대더니 어느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천천히 와요. 먼저 갈 테니까. 식구가 많으니까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냐.”
옷매무새를 단정히 추스른 양지가 혼자 투덜거리며 일행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조게 갈수록 여우가 되가네? 어째 요즘은 내가 먹힌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먹히는 건 먹히는 거고 일단 이
새끼들부터 잡아 족치고.”
당가려와 냉소소가 만들어준 옷을 차려입은 야혼이 손을 비비며 육만우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고 머리를 박고 있는지 힘들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 묻겠다. 내가 왜 너희들에게 이런 벌을 내렸는지 아는 사람.”
양지가 내려준 식기 상자 위에 걸터앉은 야혼이 일행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묵묵부답(黙黙不答). 다섯 명 누구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럼 다른 걸 묻겠다. 왜 지금껏 같이 다니고 있었나? 육만우 너부터 대답해 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답을 못했다. 야혼의 말대로 하오비동을 떠났으면 헤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5명은 누구도 떠나지 않고
무려 2년 간을 같이 행동하고 다녔다.
그렇게 하자고 했던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럼 구칠우 너는? 대답을 못하겠지. 너희들은 말이다. 서로에게 구약종 영감의 무공이 있다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다.”
야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머리를 박고 있던 그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야혼이 말을 이었다.
“누군가 한 명만 나서서 머릿속에 들어있던 무공을 나누자고 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거다. 전부가 겁천십웅의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을 테지. 하지만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절기는 숨겨두고 남이 주기만을 바랐지.”
“맞습니다, 문주님. 그랬습니다. 우리에게 구약종 그분의 완전한 비기가 있다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습니다.”
육만우의 입에서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혼의 말은 한치 틀림도 없었다. 자신이 가진 무공은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주기만을 기다렸다. 언젠가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헤어지지 못했다. 그랬던 세월이 2년이었다.
“좋다, 일어서라.”
자리에서 일어난 일행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바로 눈앞에 놓인 무공비급이었다.
“지금부터 구약종 영감의 무공은 잊어라. 단 한가지 내공심법인 태을건곤심법만 기억해라. 그 내공심법을 바탕으로 앞에 있는
비급을 전부 자신의 무공으로 만들어라. 1년의 시간을 준다. 너희들이 속한 가문은 필요 없다. 무조건 무공을 수습하고
개봉의 하오대문을 찾아라. 그때까지 악운보보다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 육만우 너에 대한 모욕은 10 개의 이로
대신했다. 나머지 이는 네가 직접 뽑아야 한다. ”
“문주님!”
육만우 일행이 무릎을 꿇었다. 특히 매난설은 울 듯한 얼굴이었다. 하오비동에서 여호치가 했던 말이 생각났던 거였다.
자신들을 위해 십만대산으로 간다 하였다. 자신들이 익힐 무공 비급을 구하기 위해 하오밀문에서 청부를 수락했다 하였다.
그런데, 정말로 무공 비급을 가져온 것이다.
천하 100대 고수들의 비급을.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63)- 투견공(鬪犬功)(3)
“양지야, 가자!”
“저대로 두고?”
느닷없는 야혼의 말에 양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럼 네가 저들 밥까지 전부 해 먹일래? 중놈 하나 꼽사리 낀 것도 못마땅해하면서.”
“아미타불! 양지 시주 그냥 갑시다. 지금 분위기론 그게 가장 어울립니다.”
“스님 아저씨는 달마동에서 나오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세요?”
“허억! 양지시주, 제가 달마동에서 처박혀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법현은 기절할 듯 놀랐다. 자신이 달마동에서 무공을 익힌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본산인 소림사 내에서도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런데, 하오밀문의 문도로 보이는 양지가 그것마저도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아미타불! 그게 그러니까. 소승이 보기에는 저들이 감동하고 있을 때 서둘러 떠나면 그 감동이 배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또 실제로 그런 것 같고요.”
“뚱띵이 아저씨, 스님 아저씨 말이 맞아요?”
“이런 썩을…….”
“아항! 맞구나. 어쩔 때 보면 아저씬 참 순진해. 저들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앤가? 분위기에 휩쓸리게. 다 아저씨가 먼저
발가벗었으니까 저들 또한 그렇게 한 거라고. 내 말이 맞죠.”
“그래도 조금은 감동 먹었는데.”
완초령이 야혼을 쳐다보며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양지의 말이 틀리지 않았지만 마지막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될 뻔했는데
그녀 때문에 틀어진 것이었다.
“저…….문주님!”
“왜, 초 사형!”
이미 분위기 깨졌다고 판단한 야혼이 짐짓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다른 게 아니고. 사형들에게는 전부 비급을 주면서…….”
“몰랐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 있잖아. 초 사형은 구약종 영감의 무공을 전부 익혀, 그게 가장 어울리니까.
구결은 저 인간들이 줄 거야.”
“네!”
“그럼 1년 뒤에 하오대문을 찾아. 그곳에 가면 두 다리와 한 팔이 없는 병신 영감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럇!”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강웅삼에 대한 마지막 말은 일행의 귓전에 말뚝처럼 박혀들었다.
두 다리와 한 팔이 없는 노인. 자신들이 주었던 구약종의 무공 때문에 하오밀문이 멸망했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너희들만
있었어도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얽혔군.”
“잘 됐지요, 뭐. 평생 죄의식 속에 사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빚을 갚을 수 있으니……. 오히려 저 친구가 고맙군요. 기회를
줘서.”
육만우의 말을 받은 구칠우가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혼의 말마따나 서로에게 무공을 얻어보겠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오밀문의 멸망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뭉쳐 다녔던 것이었다. 누군가 먼저 하오밀문으로 돌아가는 말을 해주길
기다리며.
“이젠 저 친구가 아니다. 문주님이다.”
“그렇군요. 문주님이죠.”
“모르긴 몰라도 문주님 뒤통수를 깐 사람은 나밖에 없겠군.”
하오비동에서 일이 생각났는지 서영상이 자랑스런 얼굴로 일행을 쳐다보았다.
“오라버닌 자랑할 걸 자랑하세요. 그 때문에 우리가 머릴 박았다는 사실을 몰라요?”
완초령이 머리를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가만히 생각하면 머리 박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단지 야혼에게 놀아나 머리를
혹사시켰던 것이었다.
“한번 더 차고 머리 박으라면 나는 또 하겠다. 근데 초령 너 정말 신녀곡 출신이냐?”
갑작스레 들먹인 완초령의 신분에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당사자들이었다.
모두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신녀곡의 인물까지 끼어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자신들이 속한 문파야 별반 알아주지도 않지만 신녀곡은 결코 아니었다. 정도 10파라는 9파1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곳이
바로 신녀곡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제일 제자가 바로 완초령이었다.
다음대의 신녀곡주.
“잊어버리세요, 과거의 일이니까. 저도 모르게 얼결에 나온 말일뿐이에요. 오라버니들도 마찬가지잖아요.”
“맞다. 가문이나 문파에서 우린 패배자였으니까. 그건 배경이 아니지……. 가자!”
고개를 끄덕인 육만우가 먼저 길을 잡았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혀 명예를 탐하고자 했던 그런 목표가
아닌 무인으로서, 사나이로서 이루고 싶은 일이 생긴 것이다.
“뭐하냐? 빨리 안 따라오고.”
“알았어요. 곧 따라 갈게요.”
마지막까지 남아서 야혼이 떠난 곳을 쳐다보던 완초령이 소리를 질렀다.
“흥! 조금 컸다고? 그래도 양지보다는 훨씬 크다.”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투덜거린 완초령이 이내 몸을 날렸다. 떠나는 몸놀림이 사뭇 가볍게 느껴졌다.
신녀곡주. 더 이상 그녀의 꿈이 될 수 없었다.
미래, 하오대문(下午大門)을 만들고자 하는 야혼의 첫발은 30여 구의 시신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봐, 야혼. 자네에게 할 말 있어.”
“왜.”
“무공을 찾아왔으면 왜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는 거지?”
“주인? 비급의 주인이 이 야혼 말고 또 있었냐?”
주인이란 법현의 말에 야혼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웬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자 안에 있는 비급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다. 예컨대 광혈무상각은 소림의 물건이다 이 말이지?”
“나는 그게 순리라 생각하는데?”
“아냐, 그건 법현 너만의 잘못된 생각이라고. 100일도 아니고 무려 100년이다. 이 비급을 만들었던 종자는 십만대산에
묻혔고. 이게 소림사 비급이라고 증명해줄 놈은 어디에도 없다 이거야. 설사 너네 소림사 물건이라 해도 그래. 100년 동안
내버려두었으면 소유권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목숨걸고 가져오니까 이제 와서 내 거요 하면, 그야말로 도둑놈이지. 안
그래?”
“아미타불!”
나지막이 불호를 읊고 말았다. 야혼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이제 와서 소림의 물건이라 소유권을 내세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갈 수 없는 곳도 아니었고, 무공이 없던 자마저 다녀왔던 그런 곳을 방치한 책임은 소림사에 있었다.
비급을 가져온 자가 소림에 돌려주면 감사히 생각해야 할 터이고, 혹여 돌려주지 않는다 하여도 할말이 없는 게다.
“이 비급이 악인에게 들어가면 어쩌고 하는 말을 하지 마라. 이 세상에 나쁜 놈은 있어도 악인은 없으니까. 그리고 나쁜
놈은 정파에 더 많다. 뭐 한 권 정도 달라면 주지. 너에겐 특별히 싸게 준다. 은자 두 냥. 완전 원가에 주는 거다.”
법현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은자 두 냥, 비급을 모사할 때 들어가는 비용이었다. 법현에게는 원가에 넘기겠다는
의미였다. 더하여 더 이상 비급에 대한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쐐기를 밖아 버렸다.
그날, 섬서성 상주에서 있었던 사건은 알파 만파로 강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강호 무림인들을 가장 놀라게 했던 일은
삼천룡(三天龍)으로 추앙 받는 그들이 세상을 속였다는 사실이었다.
십만대산 성모봉에는 그들 자력으로 간 게 아니었다. 강호 무림인들이 문파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지금은 멸망해서 존재마저
사라진 하오밀문의 인물들이 안내를 해서 도착했다 하였다.
하오밀문의 문주 야혼, 누구도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과 비대한 몸은 잊을 수 없다.
더하여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환영마도법(幻影魔刀法)은 그가 성모궁에 다녀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시켜주었다.
많은 무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산파와 무당파 쪽을 쳐다보았다. 자칭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자의 말이 사실인지 밝혀달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개자식! 살아났단 말이더냐?”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인물이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일약 무림 영웅으로 등장한 신주일룡(神州一龍)
남천악(南天岳)이었다.
남천악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불편했다. 느닷없이 들려온 야혼이란 놈의 소문은 십만대산을 나와 강호 상에서
얻었던 모든 영광을 한꺼번에 갉아먹어 버렸다.
“빌어먹을…….”
문득 며칠 전에 있었던 사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호된 질책을 받았었다. 하오밀문의 인물들과 같이 갔다가 자신들만 돌아온
것 같다고만 했던들 지금처럼 비난을 받지 않았을 거란 말과 함께, 정파의 사절단이 마도련에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진화시켜라
하였다.
하지만, 남천악 또한 할말이 많았다. 자신은 성모궁에 다녀왔다고 만 했을 뿐 다른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건 정파 원로들이었다. 어떻게 갔으며 어떤 고생을 했는지 그 정황은 전혀 묻지도 않았다.
오직 한가지, 성모궁에 다녀왔다는 사실과 그들 문파의 비전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들떴던 자들이 이제 와서는 모든
비난을 자신에게 돌렸다.
결국 견디다 못해 찾아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살인루(殺人樓).
중원 최고의 청부업체였다. 평화의 시절로 접어들어 청부단체가 대부분 사라졌지만 살인루만큼은 여전히 지하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루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막연한 생각에 잠겨있던 남천악의 귓전에 묵직한 저음이 흘러들었다. 검은 경장의 복면인이 어느 사이 눈앞에 와 있었다.
“가공한 은신술이군.”
복면인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은 남천악이 잰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몇 개의 문과 긴 회랑을 지나 도착한 곳은 사방이 완전하게 밀폐된 공간이었다.
단지 전면만 뚫려 있었는데 그곳조차 주렴이 쳐져 안쪽의 인물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남대협!”
“회음전성(回音轉聲)?”
사방에서 울리는 괄괄한 목소리에 남천악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루주(樓主)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대의 무공이
상당했다.
자신의 위치와 신분을 숨길 때 주로 사용하는 회음전성은 상당한 고수가 아니면 결코 시전할 수 없는 무공이었다.
적어도 자신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있는 자였다.
“상대의 신분을 말해 주십시오.”
“좋소. 실력이 있으면 더 믿을 만하니까. 상대는 야혼이란 놈이오. 자칭 하오밀문의 문주라 하더군. 십만대산 성모궁에
다녀왔다고 떠버리는 놈이니까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보오이다. 대금은 얼마를 드리면 되겠소.”
“2만냥입니다.”
‘헉!’
터져 나오는 비명을 급히 삼켰다. 너무 엄청난 금액이었던 탓이었다. 자신이 속한 화산파를 10달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돈이 바로 2만냥이다.
야혼이란 비천한 놈을 잡기 위해 그런 거금을 달라니.
“상대를 잘못 판단한 것 같소이다. 살인루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니 실망입니다 그려.”
“아닙니다. 살인루에서 판단한 야혼이란 자의 가치는 2만냥입니다.”
남천악의 비꼬는 말에도 흥정을 벌이는 자의 목소리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그러지요. 원래 각 문의 문주를 제거하는 청부는 5천냥부터 시작합니다. 아무리 하급문파라 할지라도 최소한 그 금액을
받는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번 건은 야혼이란 자는 물론이고 삼천룡이란 분들이 같이 걸려 있습니다. 즉 세 분의 명예를 지켜주는 대가가 각각
5천냥이라는 겁니다.”
“그럼 이 남천악이 청부를 안하고 다른 자가 했더라면 5천 냥으로 가능했다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저희 살인루에서는 청부자의 신분 또한 가격으로 환산합니다.”
“으음!”
남천악이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설마 살인루에서 청부자의 신분에 따라 금액을 달리 받을 줄을 생각지 못했다.
또한 신분을 밝히고 살인루까지 방문했는데 그냥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명예는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평생을 따라다니니까요.”
살인루 인물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돈에 연연하여 큰 걸 놓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가 말하는 큰 것이란 바로
야망이었다.
“좋소! 지불하겠소. 최대한 빨리 제거해주시오.”
“계약금은 절반입니다. 그 금액이 입금되는 순간 바로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렴이 있던 곳이 천천히 닫히며 청부를 받았던 인물의 모습이 사라졌다.
“따라 오십시오, 남대협.”
들어갈 때와 같이 비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온 남천악이 주려화가 기다리고 있는 객잔으로 향했다.
남천악과는 달리 비교적 태연한 얼굴로 있는 그녀에게 살인루의 청부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들려주었다.
유마혼과 자신 그리고 주려화까지 전부 세 사람이 2만냥이란 거금을 만들어야 했다.
“좋아요. 이번 청부금액은 제가 전액 지불하지요.”
“그럴 순 없습니다.”
남천악이 펄쩍 뛰었다.
“아니면 돈을 만들 자신은 있나요? 그냥 저에게 맡겨두세요. 이럴 땐 있는 사람이 써야지요.”
주려화의 말에 남천악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비록 신분이 화산파의 대제자지만 7천냥이나 되는
거금을 선뜻 내줄 리가 만무했다. 그런 돈이 있을 리가 없지만 설령 있다 하더라도 쓸 수가 없다. 다른 일도 아니고 사적인
일이 아닌가.
그런걸 알면서도 청부를 수락한 이유는 은근히 주려화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입장이 바뀌었다면 남 공자도 그렇게 했을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하지만…….”
“제가 걱정하는 건 그깟 2만냥이 아닙니다. 성모궁에서 살아온 자는 야혼 그자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을 그곳까지 이끌었던 여호치와 그리고 성모궁에서 만났던 백색 옷을 입은 무인들.
거의 3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 못내 걸렸다.
사실 그들에 비하면 야혼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남천악과 유마혼의 명예를 제외하고는 강호무림에 전혀
영향을 미칠 사람이 아니었기에.
오직 그녀의 관심사는 여호치와 함께 사라진 명교(明敎)였다. 일명 마교(魔敎)라 불리는 자들.
‘나는 그들이 빨리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소이다. 그래야 강호 질서가 재편될 테니까요.’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남천악이 내심 중얼거렸다.
물론 성모궁에 다녀온 일로 인하여 강호무림의 영웅이 되었지만 그가 원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평화의 시대가 지속되면
성공한다고 해봐야 화산파의 문주일 터였다.
별반 노력 없이도 올라서는 그런 자리에는 이미 흥미를 잃었다.
그보다 더 높은 곳을 원했다. 만인이 우러러보는 그런 자리를.
성모궁에서 보낸 2년이 더 큰 꿈을 꾸도록 만들어 버렸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64)- 3년 만인데 죽어도 해야지(1)
3년 만인데 죽어도 해야지.
주려화가 우려하고, 남천악이 기다리는 여호치 일행 중 두 사람은 이미 강호 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젊은 날의 치기였는지도 몰랐다. 뱁새에서 황새로 거듭나고자 하였던 첫 번째 시도를 보기 좋게 실패한 추기영과 태웅 두
사람은 십만대산에서 내려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로는 순탄치 않았다. 하산한 장소 때문이었다. 그들이 내려온 곳은 처음 십만대산을 오르기 위해 들렀던
흠주현이 아니었다.
그곳과는 정 반대 쪽인 운남(雲南)으로 하산하게 된 것이었다.
철이 든 후로는 개봉을 떠나보지 않았던 두 사람인데 길을 알 리가 없었다. 스치는 사람을 붙잡고 대충 길을 물은 다음
무작정 북쪽으로 달렸다. 처음엔 개봉을 찾아가려는 목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 처음 목적을 잃고 말았다.
무공을 익히기 전에는 몰랐던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자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우연히 찾게된 시전에서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걸레 같은 옷을 버리고 옷을 훔쳐 입는 일이었다.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집의 담을 넘어 몸에 맞는 옷을 골라 입은 다음 다시 길을 떠났다.
거의 3년만에 맛보는 자유 때문인지 공연히 신바람이 났다. 해서 모든 내공을 동원하여 정신없이 내달렸다.
두 사람 중 누구의 무공이 더 강한가 시합도 해보고, 도대체 어느 정도 내공을 사용하면 힘이 빠지는가를 시험하느라 어디를
얼마나 달렸는지 알지 못했다.
모든 기력이 탈진한 두 사람이 동시에 멈춰선 곳은 귀주(貴州)를 지나 사천의 민산(岷山) 근처였다.
으슥한 동굴을 잡아 운기행공(運氣行功)을 마치자 불현듯 허기가 느껴졌다. 그동안 먹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참기가 힘들었다.
“좀 쉬었다 가세나, 거패 시주.”
3년 세월도 추기영을 변화시키지 못했는지 그의 말투는 여전히 서대시전 시절과 변함이 없었다. 다만 무인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호칭만은 곰 시주에서 거패로 변해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봐라.”
가만히 귀를 기울여 천리지청술(千里之聽術)을 펼쳤다. 천리지청술이란 자신의 내공 대부분을 귀로 집중하여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의 소리를 듣는 무공이었다. 딱히 익히는 무공이 아니라 내공이 높아지면 저절로 시전할 수 있는 무공이기도 했다.
“찾았다. 불피우고 있게, 육승!.”
추기영을 향해 슬쩍 미소를 머금은 태웅이 은밀히 몸을 움직였다.
대환단, 소림의 영약이라는 대환단을 전부 내공화 시킨 태웅의 무공은 대단했다. 7척에 달하는 거구가 움직이는데 어떤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곳은 또 어딘가. 니미럴타불!”
주변의 나뭇가지를 끌어모으던 추기영이 하늘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지난 3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거의 밀폐되다시피 한 지하 석실에서 혀를 깨물고 무공을 익혔다.
처음 대환단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지하에 박혀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충 안쪽에 있던 무공과 대환단을 챙기고 밖으로
나오고자 하였다. 하지만 얼마잖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에 들어왔던 통로는 이미 허물어져 버렸고, 어디에도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공기가 들어온다는 생각에 석실 안쪽을 살핀 끝에 찾아낸 곳은 주먹정도 크기의 틈이었다.
통로가 무너지면서 생긴 조그마한 공간으로 공기가 스며들고 있었던 거였다.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란 사실은 알지
못한 채 그곳만 뚫으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또한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얼마나 단단하던지 태웅의 주먹질에도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선택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벽면에 적힌 무공을 완전하게 익히고 완력으로 뚫고 나오는 길. 그마저도 될지 안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에서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석실 안쪽에서 발견한 벽곡단으로 끼니를 때우며 무작정 무공을 연마했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자신들의 성취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오직 통로를 만들 정도의 무공을 원했을 뿐이었다.
“뭔 생각을 그리 하시나? 그러고 있으니까 정말 중 같다. 그나저나 너 머리부터 잘라야 할텐데…….”
그러고 보니 태웅이나 추기영의 머리는 엉망이었다. 지난 3년간 길렀던 머리칼이 어깨를 덮었다.
“그냥 길러라. 이젠 중도 아닌데.”
“무슨 소린가 거패 시주. 먹고살 밑천인데. 서대시전에 도착하기 전에 전부 자르고 가야할 것 아닌가. 머리 안 잘랐다고
부처님이 진노하셨을 거야. 아미타불!”
기름기로 떡 진 머리를 매만지며 죄송스러운 듯 불호를 뇌까렸다.
“나도 제대로 된 망치 하나 장만해야 할텐데……. 이번에는 끝이 뾰족한 놈으로 할까?”
“아닐세 거패 시주. 망치보다는 칼을 준비하시게. 커다란 대감도로 준비하여 연작시주가 하는 방법을 쓰는 거야.”
“무슨 말이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칼을 가는 거지. 옆에 시험용 통나무 하날 놔두고.”
“그러니까 돌 중 네 말은 칼을 갈다가 손님이 모이면 통나무를 잘라라 이거지? 그리고 나서 날 베라고 하면? 거 괜찮은
방법이다. 썅! 아예 떼돈을 벌겠다.”
태웅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무공이 강해지면서 덩달아 강해진 피부는 아예 강철처럼 변했다. 웬만한 무기는 몸에 흠집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무공, 그리고 고수. 서대시전에서 살아갈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강해진 무공을 바탕으로 돈을 더 많이 벌 생각만 할 뿐, 다른 마음은 일절 먹지 않았다. 아니 여호치를 믿고 따랐다가
실패하자 아예 포기를 했는지도 몰랐다.
“우리 저곳에서 좀 쉬었다 가자. 넘치는 게 시간인데 밤새워 갈 필요 없잖아.”
노루 한 마리를 뚝딱 해치운 두 사람이 굼뜨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는 무공 시험하는 것도 시들해진데다 굳이 빨리
가고자 하는 생각도 없었다.
“응? 먼저 온 손님이 있었네? 잘됐다. 여기가 어딘지도 좀 물어보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좀 듣자.”
동굴 안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기운을 감지한 태웅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기이한 광경이 나타났다.
나란히 입구 쪽을 쳐다보며 가부좌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댔다.
운기행공(運氣行功), 고기를 먹기 전 자신들이 했던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무인들이었던 것이다.
“이것들 무림인인가보다야.”
두 사람 바로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태웅이 말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강한 무인들인 듯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짜식, 생긴 건 꼭 곰 같네. ……어이구 떤다 떨어.”
곰 같다는 소리에 파르르 떠는 상대를 본 태웅이 재미있다는 듯 이죽거렸다.
“아미타불! 근데 저 새낀 꼭 거패시주처럼 생겼구먼. 혹시 집나간 애비 아닌가 몰라.”
추기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웅 옆에 자리를 틀고 앉아 두 사람을 열심히 관찰했다.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상대를 건들면
바로 주화입마(走火入魔)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태웅이나 추기영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기초부터 무공을 배우지 않았던 탓에 주화입마라는 말 자체를 몰랐다. 다만
한가지, 운기행공을 하게되면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미 몸소 수 차례 경험했던 일이기에.
“육승, 이놈들에게 돈 좀 있을까?”
“아미타불! 이쪽에 있는 놈은 정말 중인 것 같은데 나쁜 짓을 해도 되려나 몰라. 아니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건
불자(佛子)의 가장 기본적인 일이었지. 씨팔, 지하에 오래 갇혀있었더니 다 잊어먹었나 보이. 아미타불! 한번 찾아보세.”
“커억!”
추기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입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단순한 피가 아니었다. 내공을 수련한 무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내공의 폭주상태인 주화입마 증상이었다.
“네…… 놈들은 누군데 우리를 사칭하느냐? 마웅채에서 나온 게 아니었더냐?”
오른 쪽에 있던 거구의 인물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분노의 눈길을 쏘았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 폭주하는
진기는 조그마한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희들을 사칭해? 단지 돈이나 조금 얻어가려는 것뿐인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태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이겠다고 살기를 풍긴 것도 아니고, 단지 품속에서 돈만 조금 꺼내가겠다는
의사를 비쳤을 뿐이다. 그런데 제풀에 피를 토하고 죽일 듯이 노려보다니.
“우리가 거령패왕(巨靈覇王)과 주육마승(酒肉魔僧) 사실을 몰랐다고 하고 싶은 게냐?”
이미 죽음의 마수에 장악 당한 두 사람은 마도련 소속으로, 거령패왕(巨靈覇王) 막궁(莫穹)과 주육마승(酒肉魔僧)
엽비천(葉飛川)이었다.
그들 또한 이곳 민산(岷山)은 처음이었다. 무공을 익힌다는 명목으로 지난 2년간 은거를 했고, 나오자마자 발령을 받은 곳이
바로 민산에 있는 마웅채(魔雄寨)였다.
마도(魔道)의 이름 있는 무인으로 산채(山寨)를 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십만대산이 열린 시점에서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산적 소굴로 위장한 마도련의 전초기지가 바로 마웅채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봉우리만 넘으며 마웅채가 있기에 이곳에서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처음 만난 부하들에게 총채주의 신위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물론 거령패왕과 주육마승을 무시할 부하들은 없을 터이지만 지난 2년간의 공백이 조금은 불안했다.
처음 두 명이 들어왔을 때만 해도 마웅채 인물이 마중 나온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질겁을 하고 말았다. 다짜고짜 놈이라 칭하며 바로 앞에 앉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조금씩 진기의 운행을 조절하여 서둘러 운기행공을 마쳤다면 가벼운 내상은 당할지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상태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자신들을 주화입마에 들게 해버린 말은 바로 거패와 육승 그리고 아미타불이었다.
평소에 자신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오직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별호가 바로 거패와 육승이었는데.
그것마저 알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이미 자신들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죽이기 위해 왔다는 의미로 들렸다. 더구나 운기행공은
절정에 이르러 있는 상태. 주화입마는 당연한 결과였다.
“거령패왕? 주육마승? 이런 씨팔놈들, 감히 누구 별호를 가지고 장난치는 거여, 개새끼야!”
뭣 낀 놈이 더 화낸다고, 잔뜩 얼굴을 붉힌 태웅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육승, 이 새끼들 하는 짓거리 좀 봐라. 아무리 세상 인심이 박해도 그렇지 돈을 다 가져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절반
정도만 달라는데 그게 싫어서 게 거품을 문다.”
“아미타불! 정말 치사한 중생들일세…….”
“그럼 정말 별호가 거패(巨覇)와 육승(肉僧)이었단……. 빌어먹을 마도련의 거령패왕이 너희 같은 떨거지들에게…….”
한번 더 울컥 피를 토해낸 막궁(莫穹)이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절명.  2년의 은거 끝에 세상에 나왔는데 그동안 익혔던
무공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저승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아미타불! 마도련 소속이라네. 이젠 우린 좆됐네, 거패시주. 이 새끼도 같이 보내서 증거를 묻어버리고 빨리 뜨도록
하세나.”
빠악!
아직 숨을 헐떡이는 주육마승을 향해 철탁을 날려버린 추기영이 그들의 품속을 뒤졌다.
“이런, 개자식들 돈도 별로 없잖아!”
“혹시 산채에 가면 돈이 좀 있지 않을까?”
조금 전 거령패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웅채란 말이 빌미가 되었다.
“그러니까 곰 시주 말은 이놈들로 위장해서 산채를 털자 이건가?”
“생긴 것도 비슷하고. 더구나 너도 저놈처럼 가짜중 아니냐. 3년만에 찾아가는 서대시전인데…….”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하자 이 말이구먼. 아미타불! 뭐하나? 다 챙겼으니까 마웅챈가 하는 곳으로 가야지.”
밖으로 나온 태웅이 동굴을 향해 패천마영권을 한방 먹여 두 사람의 무덤을 만든 다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서대시전까지 갈 노자돈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금의환향으로까지 이어지고, 결국은 산채를 털자는 형국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막궁의 미첨도(眉尖刀)와 몇 푼 안 되는 돈을 챙긴 두 사람이 마웅채 무리를 만난 곳은 봉우리 정상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총채주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양대산(梁大山)입니다. 이곳에선 탈수표(脫手鏢)라 불리고 있습니다”
40대, 둥근 얼굴을 가진 중년인이 태웅과 추기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거패시주, 이놈들 우릴 진짜로 아는가 본데?’
추기영이 태웅에게 전음을 보냈다. 얼굴을 알고 있으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을 했었는데 누구도 의심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모두들 거령패왕과 주육마승으로 인정하는지 공손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냐. 아까 그놈들 무공으로 보았을 때 산채 두목으로 올 놈들이 아니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어서 급히 파견된 자들일
거야. 일단은 알아보지 뭐.’
거령패왕과 주육마승이 운기행공을 하는 것을 보고 느낀 점이었다.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던 무인들이 산적 두목을 하겠다고 나설
리가 없을 터였다. 태웅이 산채를 털 결심을 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너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직책이 뭔가. 아니 나를 어떻게 알아보았나?”
“부채주가 말해 주었습니다. 미첨도(眉尖刀)와 목탁(木鐸)이 두 분의 무기라면서. 그리고 2년만에 나오신 분들이니까 대접에
만전을 기하라고 했습니다.”
양대산이 태웅의 미첨도를 가리켰다. 미첨도는 멀리서 보기에도 확인할 수 있는 장병기(長兵器)다. 본래 창이라 불러야 마땅할
병기인데 끝에 3척 길이나 되는 눈썹모양의 도(刀)가 달려 있어 미첨도라 불린다.
“그러니까 얼굴은 모르는데 이 미첨도를 보고 날 알아봤다 이 말이지? 그런데 부채주는 어디 갔나?”
태웅의 입에서 추상같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굴을 알고 있는 놈들이 없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나,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감히 신임 총채주를 영접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았냐는 호된 질책의 목소리였다.
“실은 두 분이 오시기 전에 본련(本聯)에서 전서가 왔습니다.”
“총채주를 영접하지 못할 정도로 급한 일이더냐?”
확실하게 거령패왕으로 행세하기로 했는지 양대산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총채주님……!”
태웅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에 질겁한 양대산이 해쓱해진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기세가 몰아쳐 왔던 거였다.
“말하라!”
여전히 양대산을 향한 기세를 풀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2갑자, 대환단을 전부 내공으로 만들면 이룰 수 있는 수준이라
하였다.
무려 120년을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그런 공력을 양대산 한 명에게 전부 집중시켰으니 그가 견딜 재간이 없었다.
태웅의 계산 속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초반에 강력한 무공을 보여주지 않으면 의심할 소지도 없지 않아 아예 무공으로
찍어눌러버린 것이었다.
“예……. 상주에 있던 수양표국(首陽鏢局)이 멸문 당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아! 죄송합니다. 섬서성 상주에서 손가락 안에 든 수양표국이 저희 련에서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헌데 얼마 전 무림인들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표국 인물들이 살해당했다고…….”
“흉수는 누구라고 하더냐?”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습니다만 은밀하게 도는 소문에 의하면 정파인이라고 합니다.”
“감히 정파 놈들이 우리 마도련을 공격했다고?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
태웅과 추기영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바로 눈앞에 정파인이 있다면 바로 찢어 죽일 기세였다.
“아직 확인되지…….”
“갈! 멍청한 놈! 우리 마도련을 공격할 자들이 정파 말고 또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냐? 그럼! 부채주는 언제
돌아온다더냐?”
“글쎄요 떠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서…….”
“그래? 그럼 시간이 좀 있다는 말이구나.”
“네?”
“아니다. 앞장서라. 산채에 가서 이야기하자.”
“알겠습니다.”
온몸을 옥죄던 기운이 풀리자 다소 긴장이 풀린 얼굴로 양대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마도련 주요인물로
부상한 거령패왕의 신위는 소문 이상이었다. 자신도 무공 익히는 걸 게을리 한 적이 없는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웅채(魔雄寨)의 본거지는 민산 제일 봉인 촛대봉 아래 과운곡(瓜雲谷)이라는 계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천험의 요새군.”
마웅채를 오르던 태웅이 감탄사를 흘렸다. 과운곡을 오르는 길은 한 곳밖에 없었는데 그 또한 50여장이나 되는 절벽
길이었다.
즉 절벽만 막고 있으면 마웅채로 들어갈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총채주님!”
저만치 질서정연하게 서 있던 모든 대원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두 사람을 맞았다.
‘이것들 봐라. 마도련에서 지원도 별로 없을 터인데…….’
마웅채 대원들을 쳐다보던 태웅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마웅채가 마도련 소속이라 하지만 청해성에 비하면 한직임에 틀림없다.
한직에 있는 자들이면 뭔가 쪼들린 듯한 느낌이 풍겨야하는데 이들에게는 그런 면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그래 수고들 한다.”
이내 표정을 바꾼 태웅이 미소를 지으며 마웅채 대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전부 몇 명 정도 있나?”
대충 훑어보기에도 꽤 많은 인원이었다. 더구나 개개인의 무공 또한 상당한 경지에 달한 듯 제법 날카로운 기세를 풍겼다.
“전부 105명입니다. 그런데 본련에서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습니까?”
“응?”
‘이 자식이?’
갑작스런 질문에 태웅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그러고 보니 마웅채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거령패왕이 죽어가면서 했던
마도련 소속이란 사실 한가지만 알고 일을 벌인 것이다.
‘내 얼굴이 너무 젊었나? 하지만 물어볼 거야 어쩔 거야, 내가 거령패왕이라는 데 믿어야지.’
이내 빙긋 미소를 머금은 태웅이 양대산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 같으면 그 상황에서 말이 들어오겠냐?”
“하긴 다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곳을 산채로만 알고있으니까…….”
이해한다는 듯 양대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련에서 마웅채로 발령이 난 이들의 첫 반응은 대부분 같았다. 양대산 또한 그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엔 마웅채로 발령이 난 것을 알고 나서 굴욕감에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같이 있던 동료들이 송별식을 해 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허둥지둥 길을 떠났다.
어떻게든 상부에 선을 넣어 다시 본련으로 돌아갈 거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얼마 후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천국이었다. 풍족한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무공을 익히고자 한다면 한 곳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누구하나 간섭조차 하지 않았다.
“근데 전부 알 달린 놈들밖에 없냐?”
“네?”
“전부 남자밖에 없냔 말이다.”
“네, 그렇습니다.”
“제기랄!”
태웅과 추기영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3년, 금욕의 시간이었다. 가진 돈이 없어 십만대산을 내려와서도 여전히 풀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 사는 곳에 여자가 없단다.
기절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부하들과 대충 인사를 끝내고 밥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선 태웅과 추기영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개밥.
총재주의 식사라고 차려진 음식이 이 모양이라니. 기다란 탁자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산채 나물 몇 가지에 산에서 갓 잡은
짐승인 듯, 투박하게 구워진 고기 몇 점이 전부였다.
“죄송합니다, 총채주님. 본련에서 지원해 주는 게…….”
“그래? 본련에서 거의 지원이 없어서 먹을 게 없다 이 말이구나. 그런데 네 놈의 얼굴엔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 건 어찌된
일이냐?”
태웅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어렸다. 조금 전 보았던 부하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바로 식탁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정도로 식사를 하고 살았다면 자신과 추기영처럼 변해야 한다. 온 몸에서 고기냄새를 풍기는 놈들이 이와
같은 음식을 먹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게 저…….”
“이 산에 짐승은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겠구나. 일단 앉아라. 우선 그동안의 강호 이야기나 들어보자.”
쩔쩔매며 말을 못하는 양대산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태웅이 자리에 앉았다.
“뭐해 앉지 않고.”
“네…… 예!”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 앉은 양대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강호 정세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가만 지금 뭐라고 했나? 하오밀문이 멸망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1년이 더 지났습니다. 십전수 구약종의 무공이 발견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총채주 두 사람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여서인지 양대산이 조금씩 긴장을 풀며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름이 …… 아! 야혼이라 했습니다.”
“커억! 헤엑!”
태웅과 추기영이 동시에 씹던 음식을 뿜어냈다. 하오밀문의 신임문주가 야혼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65)- 3년만인데 죽어도 해야지(2)
“좀 더 자세히 말해봐라. 그 야혼이란 친구에 대해서.”
“그 자가 상주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러니까 악운본가 하는 놈에게 좆나게, 아니 당했다 이 말이냐?”
“예!”
“그러다 비급을 흘렸고? 그런 다음 사라졌겠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채주님이 그걸 어떻게…….”
“아미타불! 그럼 악운본가 하는 놈에게 깨졌는데 바로 발라야지 그냥 있으면 되겠는가.”
“발라요?”
추기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양대산의 얼굴이 뜨악하게 변했다. 결코 주육마승이라 불리는 고수에게 나올법한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두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젊어 처음엔 이상하다고 여겼으나 무공을 접하고는 더 이상 의심을 버렸다. 거령패왕이나 주육마승 정도가 아니라면
단지 기세만으로 자신을 묶을 사람이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됐다! 이제 나가서 제대로 된 음식을 가져와라.”
“무슨…….”
“본련에서 나온 돈으로는 이정도 밖에 먹지 못한다는 걸 나도 알았으니까 이젠 너희들이 벌어서 장만한 음식을 가져오란
말이다.”
“총채주님! 죽을죄를 졌습니다.”
얼굴이 검게 변한 양대산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설마하니 첫날 바로 들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두 사람을 설득하면 될 거라 믿고 부채주와도 그렇게 입을 맞췄는데.
마웅채에 들어온 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게 들통나고 말았다.
“임마! 배고프니까 음식 가져오란 말이야. 어디서 질질 짜고 지랄이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이런 바보 같은 놈 봤나. 산적이 산적질한다는데 누가 말리냐. 잔말 말고 가서 술상이나 봐와, 새꺄!”
“알겠습니다, 총재주님!”
얼굴이 환해진 양대산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런 얼굴로 말이다.
“아미타불! 자리는 제대로 잡은 것 같군.”
도망치듯 나가는 양대산을 쳐다보던 추기영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마웅채는 겉모습만 마도련 소속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본
직업은 마도련 무사가 아니라 산적이었다. 지나가는 상인들이나 행인을 털어 배불리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이곳이 마구 마구 좋아지려 그런다. 그나저나…… 돌 중, 말 좀 해봐라. 연장 그놈이 하오밀문을 맡은 저의가
뭘까?”
추기영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은 태웅이 야혼얘기를 꺼냈다.
“아미타불! 그 염병할 종자가 거지새끼도 안 돌아볼 하오밀문을 맡을 이유가 없…… 맞다, 청부금!”
“얼마나 될까?”
태웅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야혼은 아무런 이익이 없는데 하오밀문을 맡을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서대시전에서 하오밀문이 없어지면 가장 좋아할 사람이 그였다.
그런 인간이 하오밀문의 문주가 되었고, 상주에 나타났다고 하였다.
“아냐? 그것 말고 뭔가가 더 있어. 단순히 돈 받으러 오는 놈이 악운보에게 시비를 왜 걸어.”
“그건 거패 시주 말이 맞네. 아마 악운본가 하는 종자에게 맞아준 것도 연극일 거야. 하여간 심심하지 않게 되었네 그랴.
가만 이곳에 죽치고 있으면 연작시주가 올 것 아닌가. 행선지로 보건대 마도련을 먼저 지나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계획을 변경해야겠구먼?”
“당연하지, 거패 시주. 우리 얼굴을 안다고 했던 그 부채준가 하는 새끼는 거령패왕 옆에 같이 묻어버리면 될 터이고.
문제는 여자와 마도련인데……. 아미타불!”
“쯧쯧! 육승 너는 머리를 밀어야 할게 아니라 아예 잘라버려라.”
“니미지랄타불! 지금 거패 시주는 방법이 있단 말인가?”
“나랑 같은 수천구신체의 한 명이라는 사실이 정말 부끄럽다. 임마, 저 밖에 있는 새끼들의 본업이 뭐냐?”
“본업? 산적이지 않나. 지금껏 그래왔고……. 아미타불! 공연한 걱정을 했군.”
추기영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완전한 산적으로 만들어 버리면 될 터였다. 지금처럼 숨어서 가끔가다 한 건 하는 게
아닌, 아예 본격적으로 산적 질을 시켜버리면 될 것을 공연히 머리를 굴렸던 거였다.
“아예 소문나게 일을 저질러 버려야해. 마도련에서 버림받도록.”
“당연히 그래야지. 같은 소속이라는 사실을 창피해하도록, 완전한 산적을 만들어버려야지. 아미타불!”
뎅! 딱! 딱딱딱! 뎅!
수중의 철탁을 가만히 두드리자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 그가 만들어내는 운율은 기분이 좋았을 때의 노류장화의
운율이었는데 들리는 소리는 과거와 달랐다.
수만 가지 감정이 녹아들어 있는 듯한데, 그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 할 수 없었다.
저주파멸음이 완성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야! 양대산 각 조장들 전부 들어오라고 해!”
다음날.
늘어지게 잠을 자고 난 태웅과 추기영 앞에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20여 명의 무리가 마웅채의 관할을 통과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그러니까 놈들이 정파 소속이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총채주님!”
민산(岷山)에 마웅채를 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청해의 마도련으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마웅채 같은 산채를 만들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거였다.
“전에는 어떻게 처리했나?”
“본련에 전서를 보내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그래? 지금부터는 바꾼다. 통행료가 먼저고 그 다음이 전서다. 알았나?”
“알겠습니다. 총채주님!”
양대산의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총채주마저 인정한 산적질이니 거리낄게 없었다.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거령패왕과
주육마승이라는 건실한 바람막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하는 마음도 있었다.
“혹시 여자도 있더냐?”
“있습니다. 총채주님! 무려 두 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척척 손발이 맞아 가는 총채주들의 모습에 절로 신이 난 양대산이 손가락까지 치켜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좋다. 내려가 보자, 안내해라.”
기다리던 부하들을 휘이 둘러본 태웅과 추기영이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마웅채, 이제부터 이곳은 마도련이 아닌 것이다.
“여기가 어디쯤인가?”
태웅과 추기영이 먹잇감으로 점찍어버린 일행 속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회색 도복을 입은 도사였다. 강호 상엔 많은 도관이 있지만 회색 도복을 입고 검을 찬 무인은 한 부류밖에
없다.
무당파(武當派).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 중 북두라 칭해지는 무림 문파의 복장이었다.
만검진인(滿劒眞人) 청해자(靑解子), 무당파 장문인인 태극검선의 사제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민산(岷山)입니다. 만검진인!”
곁에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말을 받았다. 그 또한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청성파에서 상위권에 드는
상엽도인(霜葉道人) 정환극(鄭換克)이었다.
그리고 정환극 곁에 있는 자는 화산파의 장로인 화산일검(華山一劒) 송인후(宋仁侯)와 아미파의 아미파파(峨嵋婆婆)
육난설(陸蘭雪)이었다.
무당, 화산, 아미, 청성. 무려 4곳의 문파 인물 20여 명이 민산을 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도련 영역에 들어왔군요. 별일이 없어야 할텐데……. 무량수불!”
“저희들은 사절입니다.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마도련 또한 그리 경우 없진 않으리라 봅니다.”
그랬다. 민산을 넘어가는 이들은 구파일방에서 파견한 사절단이었다.  사절단에 인원을 보내지 못한 문파에서는 동의 의사를
피력했고, 마도련과 협의사항은 사절단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였다.
10파의 수뇌들이 전부 모일 시간도 없이 급작스럽게 사절단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남천악 일행의 급거 귀환이었다.
3년이란 세월, 거의가 잊어 가는 상황에서 남천악과 유마혼 그리고 주려화의 귀환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십만대산 행은 더 이상 죽음의 길로 인식되지 않았고, 아울러 100년 전 잃어버린 유전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더더욱 놀라운 일은 남천악 일행이 그곳에서 보았다는 무인들에 관한 소식이었다. 마교(魔敎), 100년 전 뿌리를 뽑았다
여겼던 마교의 잔당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들에 의해 남천악과 유마혼이 부상을 당했다 하였으니.
일의 심각성을 느낀 정파인들은 서둘러 사절단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걱정입니다. 수양표국의 멸문은 보통 일이 아니외다.”
만검진인의 얼굴이 잔뜩 흐려졌다. 일반 무인들이야 수양표국을 단순한 표국 정도로 알고 있지만, 각 문파의 수뇌급들은 그곳이
마도련 산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곳이 하루아침에 멸망당했다 하였다. 허투루 넘길 일이 절대 아니었다.
“정파에서 공격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 이 길을 계속 가야할지…….”
벌써 민산을 지나 청해성에 들어섰어야 했는데 서두르지 못했던 이유였다. 정파의 수뇌부에서 올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게 하루바삐 정파도 맹을 결성해야 합니다. 이 다급한 시기에 연락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게 되다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정환극이 잔뜩 불만스런 얼굴로 만검진인을 쳐다보았다. 마도련과 달리 10파가 가지는 가장 큰 약점이었다. 일을 추진하고자
할 때마다 10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만일 지휘계통이 통일되었다면 벌써 연락을 받았을 터였다.
수양표국의 멸망 소식을 들은 게 5일 전인데 정파에서는 어떤 소식도 오지 않았다. 가져온 전서구를 날렸지만 그마저도 답이
없었다.
“그게 어디 저의 무당 때문입니까. 서로간의 의견 조율이 안 되는 걸 탓해야지요.”
만검진인이 곤혹스런 얼굴로 말했다. 정파 수뇌들 또한 맹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5년 전부터 회동을 가졌다. 처음 시작은
순조로웠다. 맹을 결성하자는 합의도 보았고 맹의 명칭을 천의맹(天意盟)이라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단계를 진행시키지
못했다.
맹주, 정도10파를 총괄하는 지휘자를 선출하는데서 패가 갈린 것이다. 무당파 장문인인 태극검선(太極劒仙)을 지지하는 파와
화산파 문주인 오악사검(五嶽死劒) 감연청(甘然靑)을 지지하는 파벌로 나뉘어 상대방이 양보하기만을 기다렸던 거였다.
그런 세월이 5년이었고, 보다못한 소림사가 천의맹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떨어져 나간 사태까지 이르렀으나, 여전히 천의맹
창설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건 위에서 결정할 일이고 저희들은 지금 상황에 치중해야지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송도우.”
이내 표정을 바꾼 만검진인이 화산파의 장로 송인후(宋仁侯)의 의향을 물었다. 이번 사절단 일행을 인솔하는 실질적인 책임자는
자신과 송인후였다.
“일단은 계속 가는 걸로 하지요. 설마하니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신분과 뒤에 있는 배경을 믿고 하는 말이었다. 지금 이곳에 사절단으로 와있는 일행은 9파 중 네 곳이다. 또한
다른 문파들의 동의까지 얻어 왔으니 9파 전체의 대표라고 봐야 한다.
사절단을 공격하는 행위는 9파에 대한 선전포고이고 바로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마도련에서 함부로 대하지 못 할거라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도련보다 더 무서운 적이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대시전의 모든 상인들이 더러워서 피했던 꼴통들이 침을 잔뜩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쏴라!”
슈욱! 쉬익!
“으악! 아악!”
“웬 놈들이냐?”
만검진인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느닷없이 날아든 화살로 무인들 대여섯이 가슴을 틀어쥐고 쓰러졌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기습이었기에 방어할 틈도 없었다.
“방어대형으로!”
검을 뽑아든 화산일검 송인후가 우왕좌왕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무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정파인들은 들어라. 이곳은 마도련 소속의 마웅채 관할이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그럼 목숨만을 살려주겠다.”
“설마 마도련에서 선제 공격을 해온단 말인가…….”
숲 속 어디선가 들려온 외침소리에 만검진인은 할말을 잃었다. 마도련이라 하였다. 지난 100년간 단 한번의 다툼도 없었던
마도련에서 자신들을 향해 활을 날린 것이다.
더하여 마웅채라니. 그곳에 대해선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민산 어딘가에 있다는 마도련의 전초기지라 하였는데 그들이 공격을
해올 줄이야. 그러나 이내 정신을 추스르고 전방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소생은 무당파의 만검진인이외다. 지금 그대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소이까?”
시간을 끌기 위해 꺼낸 말일뿐이었다. 이미 상당수의 정파인이 죽었고 사건은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지금 당장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상대의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여 정파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시작은 너희 정파에서 먼저 하지 않았던가. 수양표국의 멸망에 정파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허!”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만검진인이 할말을 잃었다. 수양표국의 멸망에 정파가 관련되었다면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사절단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인 것이다.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송도우!’
재빨리 송인후에게 전음을 보냈다. 마웅채라면 100여명 이상의 마도련 무인들이 있는 곳이고, 자신들은 결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곳은 그들의 터전인 민산. 빠져나갈 곳이 전혀 없는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글쎄요. 적어도 50명 이상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화산일검 송인후의 얼굴 또한 잔뜩 굳어졌다. 어떤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수양표국 무인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마도련에서 복수하고자 한다면 우리 또한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럼?’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가서 이 일을 알려야지요.’
“각자 살길을 찾아라!”
수하들을 향해 고함을 지른 만검진인이 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뿐만 아니었다. 곁에 있던 화산일검과  상엽도인 그리고
아미파파가 그의 뒤를 따랐다. 무공이 약한 수하들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
“쏴라!”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오고 사방에서 비오듯 화살이 쏟아졌다. 적은 전방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사방은 포위되어 있었다. 뒤쪽으로 몸을 날리던 정파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상대가 보여야 검을 휘둘러보든지
할 터인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정신 없이 날아드는 화살뿐이었다.
화살 또한 단순하지 않았다. 강력한 내공을 머금은 듯, 어른 허리 둘레 만한 소나무를 관통해 버렸다.
한 두 대의 화살이라면 쳐낼 수 있을 터이지만 십여 대의 화살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하나의 화살을 쳐내고
주춤하는 사이에 또 다른 화살이 몸에 박혀들었다.
싸움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마웅채 무사들의 활에 정파무인들의 동체가 우수수 쓰러졌다.
수뇌들 4명을 제외한 나머지 무인들이 쓰러진 시간은 채 일각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두 명이 더 남아있었다.
아미파파(峨嵋婆婆)의 제자인 비연(琵蓮)과 비화(琵花)였다. 잔뜩 공포에 질린 두 여인에게는 화살이 전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돌멩이로 인해 마혈을 제압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디 있느냐? 비겁하게 숨어 있지 말고 나서라!”
분개한 만검진인이 사방으로 검을 뿌렸다. 무당파의 장로답게 그의 무공은 강했다. 수십 대의 화살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으나
그가 만든 검막을 뚫지 못했다.
“양대산!”
“네, 총채주님!”
“저기 있는 여자는 내가 잡는다. 나머지 세 놈은……. 알지?”
목을 일자로 쓰윽 긋는 시늉을 하며 태웅이 싱긋 살소를 머금었다.
“마승이 목탁을 두드리는 순간을 노려야한다, 알았나?”
“알겠습니다, 궁수들은 준비하라!”
바로 뒤쪽에서 시위를 먹이고 있는 10명의 궁수들을 향해 짧게 수신호를 보낸 양대산이 들고있던 물건으로 양쪽 귀를 막았다.
음공에 대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돌중, 준비됐냐?”
“아미타불!”
추기영 또한 잔뜩 흥분한 상태인지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려 나왔다. 무공을 익힌 이래 무인을 상대로 처음 써먹는
저주파멸음이었다. 어떤 효과가 나올지, 자신의 실력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추기영이 정신을 집중하는 모습을 쳐다보던 태웅이 전방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쪽이다 정파의 떨거지들!”
“이놈!”
태웅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비처럼 쏟아지던 화살 공격이 뚝 그쳤다. 동시에 4인의 신형이 소리가 들려왔던 곳으로 빗살처럼
날았다.
분노, 4인이 동시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 없었다. 이미 뒤쪽에 있던 수하들은 전부 당했다. 상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전부 당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수양표국이 멸망당했다고 했을 때 철수했어야 했는데 섣부른 결정으로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는 자책에 이성을 잃었다.
10여 장을 날아갔을 때 그제야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편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놈들 우리를 수하들과 같은 수준으로 여겼더냐?”
이를 악문 만검진인이 모든 내공을 끌어올리며 속도를 배가시켰다. 1초의 공격을 끝으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몸에서 백색의 운무가 뭉클거리며 피어올랐다.
순간
데-엥!
“커억!”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온 몸 가득 끌어올렸던 내공이 산산이 흩어지며 가슴 쪽으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런 증상은 만검진인만 겪는 게 아니었다.
허공을 날던 4인이 동시에 주춤거리며 비명을 토했고, 그 순간을 노려 화살이 파고들었다.
만검진인의 몸에 박힌 화실은 4대, 나머지 두 사람은 각각 3대씩의 화살이 박힌 채 지면으로 추락했다.
저주파멸음. 150년 전, 마권마음(魔拳魔音)으로 불렸던 음마(音魔) 구장(具杖)의 한이 그를 추격했던 정파 무인들의
후예를 향해 펼쳐졌다. 음마의 무공만이 아니었다. 마권으로 불렸던 두악(杜嶽)의 패천마영권도 아미파파(峨嵋婆婆)의
가슴속으로 소리없이 파고들었다.
“그건 저주파멸음(咀呪破滅音)!”
“패천마영권도 있어 임마! 마라환영참(魔羅幻影斬)!”
서네 대의 화살이 박혔는데도 여전히 검을 놓지 않고 있는 3인을 향해 태웅의 양손이 비쾌하게 휘둘러졌다.
“커억!”
나직한 비명을 끝으로 3인의 신형이 천천히 무너졌다.
“양대산, 여기 있는 사내놈들은 전부 치워라. 되도록 산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져다 버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시행하라!”
양대산의 명령을 받은 마웅채 수하들이 시체를 옮기고 바닥에 있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태웅과 추기영이 아미파 두 여인이 쓰러진 곳으로 다가갔다.
“일단 말을 할 수 없을 테니까.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여라.”
원독에 찬 눈으로 노려보는 여인 앞에 앉은 태웅이 나지막이 말했다.
“다른 놈들은 전부 죽었는데 너희들과 비슷하게, 즉 대가리에 털이 없는 할망구는 아직 살아있다. 너의 둘 선택여하에 따라
산짐승의 먹이가 될 수도, 아니면 나의 보호 하에 살아날 수도 있다. 어떻게 할래, 할망구를 살려 줄까?”
태웅의 말에 두 여인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그건 됐고. 나와 이놈은 무려…… 3년을 굶었거든? 해서 무조건 해야겠는데. 쉽게 말하자면 니네들 협조가
필요하다 이거지. 가능할까? 뭐 싫다해도 크게 상관없어. 난 여자가 필요할 뿐이야. 그 여자가 처녀건 아니건 그건 문제가
안되거든?”
이번에도 역시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놈의 시선이 사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심이 가득한
얼굴로.
“허락한다고? 좋은 생각이야. 우린 결코 나쁜 놈들이 아냐. 앞으로 보면 알겠지만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할거야.
그리고 자결 같은 건 절대 하면 안 돼. 우선은 자결하는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터이고, 그럼 저기 할머니가 더
힘들어지니까. 어때, 좋지?”
비연과 비화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둘러 한 말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사부를 감금하고 겁탈하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우린 궁합이 맞을 것 같아. 얼굴도 이 정도면 됐고, 첩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겠다. 일단 우리 집으로 먼저
가자.”
싱긋 미소를 머금은 태웅이 두 여인을 양쪽 옆구리에 한 명씩 끼웠다.
‘돌 중, 저 여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알지?’
‘알았네, 거패시주. 뒈진 놈들 옆에 슬쩍 두고 오지 뭐. 아미타불! 이제 정말 지옥으로 들어섰군.’
“이게 다 연작시주 너 때문이다 이 개자식아. 거지발싸개 같은 하오밀문은 왜 맡아 가지고……. 그나저나 할망구 당신은
제자를 잘 키운 덕분에 목숨 건진 줄 아시오. 같은 불제자끼리 이래야 하는 내 심정도 조금은 이해해주시구랴. 댁도 3년
쫄쫄 굶고 살아보면 우리 기분을 알 거요. 니미럴타불!”
아미파파(峨嵋婆婆)를 들쳐 맨 추기영이 산 아래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추기영과 태웅이 마도련 전초기지인 마웅채를 날로 먹기 위한 시도는 정파 사절단을 몰살시킨 것으로 그 막이 올랐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66)- 죽은 놈(?)을 살려내는 약이 필요하오(1)
죽은 놈(?)을 살려내는 약이 필요하오.
강호 무림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3권의 비급, 이번 바람을 일으킨 물건이다.
환영마도법(幻影魔刀法), 무적군림마보(無敵君臨魔步), 혼세광마장(混世狂魔掌). 3권의 비급이 주는 의미는 컸다. 인간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무림인들은 순위나 서열에 민감하다. 누가 누구보다 낫고, 또한 남보다 강함을 명예라고 여기는
자들이 바로 무림이기 때문이다. 해서 생겨난 것이 서열이었다.
물론 천하제일인이 누구라며 딱 꼬집어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시대를 풍미하는 가장 강한 자들을 통틀어 무슨 무슨
고수라 칭하는 말은 존재했다.
그러한 예는 300년 전에도 있었다. 강호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라는 열 명의 고수를 겁천십웅이라 칭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뉜 서열이 바로 100대 고수였다. 100년 전, 마교를 정벌 때, 성모척살대로 떠난 무인들이었다.
무림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그들을 추모하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만, 실상 그들의 무공이 가장 강했다는 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런데 그 100인 고수들의 무공 중 3가지가 강호 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였다. 그 사실에 흥분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겁천십웅의 한 사람인 염왕마존 이래 가장 강한 도법으로 인정받는 환영마도법(幻影魔刀法)은 소림사법불(少林四法佛)이 습득하여
무인들에게 쫓기는 실정이었고, 마도련 소속인 수양표국에서 흘러나온 무적군림마보(無敵君臨魔步)와 혼세광마장(混世狂魔掌)은
주인 없이 강호를 떠돌고 있다 하였다.
3권의 비급이 몰고온 혼란이 점점 그 도를 더해가고 있을 때 또 다른 소문이 파란을 예고했다.
정파에서 파견했던 사절단의 피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십만대산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마도련으로 떠났던 사절단이 사천성 민산에서 피습 당했고, 아미파파만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마도련 소속의 마웅채 무인들이 수양표국의 일로 복수를 하였다고 했지만, 누가 보아도 마도련의 잘못이었다. 아직은 수양표국의
일은 조사중에 있었고, 정확한 흉수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더욱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절단을 구성했던 인물의 신분이었다.
수양표국의 진상이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네 문파를 대표하는 무인들이 동시에 살해당했으니, 결코 쉽게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은밀하게 들리는 소문으로는 7파 장문인들이 서둘러 회동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곳에서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 그것까지는
알려지진 않았지만 마도련과 마웅채에 대해 일련의 조치가 있으리란 추측은 할 수 있었다.
강호.
힘의 율법이 지배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아직은 그 명확한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있었다. 100년의 평화를 시기하는 암운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작금의 사태를 몰고 온 당사자는 개봉에서 출발한 한 뚱띵이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몇몇쯤은 상주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말에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으리라.
하오밀문의 인물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무림인은 없었을 터임으로.
사건이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야혼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 때문에 강호무림이 술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직
눈앞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두 사람, 울창한 산림을 헤치고 나아가는 야혼과 양지였다.
“뚱띵이 아저씨. 왜 스님아저씨한테 7권이나 되는 비급을 줘 보냈어요?”
하염없이 이어지는 수풀에 질렸는지 양지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들이 법현과 헤어진 장소는 10여 일 전 종남산 근처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 들렀던 객잔에서 소림사법불의 소식을 들은 법현이 바로 떠난다 하였던 것이다. 노자나 좀 주려고 돈 상자를
뒤적거리던 야혼에게 법현은 뜻밖의 부탁을 했다. 그가 원하는 건 비급이었다.
야혼이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상자를 열어 환영마도법을 제외한 나머지 비급을 꺼내 기꺼이 줘버렸다.
“종이 값까지 포함해서, 14냥밖에 안 되는데 뭐.”
“아냐, 뭔가 있어. 그 순진한 스님이 비급을 꽁꽁 숨기지도 않을 터이고 공부한답시고 펼쳐보곤 할텐데……. 어이구! 또
한바탕 난리가 나겠구먼.”
의심스런 눈으로 야혼을 쳐다보던 양지가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비급을 버리듯 줘버린 야혼의 의도를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양지야. 법현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냐?”
“글쎄요. 뚱띵이 아저씨라면 금방 말하겠는데, 스님 아저씬…….”
“그놈에겐 실전이 필요해. 목숨걸고 싸우는 그런 실전 말이다.”
우연히 오간 대화에서 법현의 하산 이유를 듣게 되었다. 그가 사형들을 따라 하산한 이유는 익히고 있는 무공의 완성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가장 필요한 게 실전이라 하였다.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물론 다는 아니지.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야지 공평하지 않겠냐. 나처럼 말이다. 전륜한 정력을 얻었지만
과거의 미모를 잃지 않았냐. 법현 그놈도 그래야 해. 소림사 방장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졌지, 거기에다 무공까지 거저
얻는다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겠냐.”
양지의 말이 전혀 틀리다고 할 순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7권의 비급은 법현에게 준 게 아니고 세상에 풀어버렸다고 해야
옳다.
많은 비급을 지니고 있으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들킬 터이고, 그 후 사정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또 한바탕 혈풍이 몰아칠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혈풍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법현일 터였다.
야혼이 생각하는 공평한 세상이란 그런 거였다.
“하여간 강호를 말아먹던 삶아먹던 그건 아저씨 일이고, 지금 우린 어딜 가는 건데요?”
“마두산(馬頭山), 귀곡(鬼谷).”
야혼이 짤막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벌써 섬서성의 서쪽에 있는 주지현까지 와 있었다.
“귀곡은 왜?”
“그곳에 돌팔이 귀의(鬼醫)가 살거든.”
“꼽추 귀의?”
“어라! 네가 꼽추를 어떻게 아냐? 그것도 동창에서 알려 주던?”
양지의 입에서 바로 꼽추란 말이 튀어나오자 야혼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귀의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동창에서 주시할 정도의
중요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귀의 때문이 아니고 그곳에 태극검선 아들이 살거든.”
“뭐야? 태극검선이면 무당파 장문인이잖아. 어떻게 도사가……?”
더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무당파 장문인인 태극검선(太極劒仙) 청운자(靑雲子)는 9파1방 실질적인 우두머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산파 문주인 오악사검(五嶽死劒) 감연청(甘然靑)과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지만 지명도 면에선 그가 조금 앞선다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이었다. 부인이 있을 수 없는 도사의 신분임에도 말이다.
“원래부터 아저씨처럼 색을 밝혔던 건 아니고, 춘약에 중독된 여인을 구하려다 그렇게 되었다고 하드만. 한마디로 재수 옴
붙은 거지 뭐.”
태극검선(太極劒仙)이 아들을 얻게된 경위는 양지가 언급했던 것처럼 결코 여인을 탐해서가 아니었다. 일이 있어 외부에
나갔다가 우연히 음양쌍두사에 중독된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음양쌍두사(陰陽雙頭蛇).
머리가 둘 달린 뱀으로 정력제로는 최고로 치는 뱀이었다. 독(毒)보다는 춘약성분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음양쌍두사 피를
받아 장복하게 되면 결코 지치지 않는 정력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물리면 상황이 달라진다. 최음성분을 지닌 놈에게 물리면 그 해약은 음양교합밖에 없다. 청운자가 발견한 환자가
음양쌍두사에 물린 여인이었다.
결국 몸으로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발휘하였는데, 원하지 않았던 자식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그의 나이 마흔 되던 해로 무당 장문인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최고의 시절이 도래한 순간에 발목이 잡혀버린 청운자는 자식의
존재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 음양쌍두사가 나타났던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냐?”
“또 정력제 타령.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청운자의 아들이 태양신맥(太陽身脈)이란 희귀한 체질을 타고났다는 거예요.”
지금도 주체못할 정력을 가졌으면서도 음양쌍두사란 말에 눈을 빛내는 야혼을 향해 양지가 눈을 흘겼다.
“누가 지금 먹는대? 나중에 몸이 부실해지면 그때 잡으려 가려는 거지. 그건 그렇고 태양신맥은 또 뭐냐?”
머쓱해진 야혼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수천구신체라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태양신맥이란 건 처음 듣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양기(陽氣)가 강해서 오래 살지 못하는 병이래요.”
태양신맥이란 주로 남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질병인데 몸 안에 음기가 전혀 없는 체질을 말한다. 온몸에 넘치는 양기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증가하게 되고 15세가 되면 극에 달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그럼 치료제는 전혀 없는 거냐?”
“왜 없겠어요. 극음의 성분을 지닌 천년빙련(千年氷蓮) 같은 영약을 복용하면 전화위복, 그야말로 엄청난 능력을 얻게 된다고
해요.”
“그래서 하늘은 공평한 거지. 그런데 네가 어찌 그런 사실을…….”
물론 동창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바였지만, 그것들은 오직 수뇌들의 전유물일뿐 양지 정도의 하급들이
알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해서 하는 말이었는데.
“교관들과 친했잖아요. 무당파 대장 아들이라는 든든한 배경에 돈은 썩어나게 많을 테니까, 치료만 된다면 최고의
신랑감이잖아요.”
양지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동창에서 훈련받을 때 동료들의 입을 통해 알게된 사실이었다. 잠자리 시중을 들게 되면 알게
모르게 교관들의 입에서 무림에 관한 말들이 흘러나온다. 그 말들을 종합하면 지금처럼 하나의 정보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훈련받을 때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 말이냐?”
“당연하지요. 그런 놈 하나 잡으면 팔자 피는데 동창 교관들보단 훨씬 낫잖아요.”
“그런데 말이다. 청운잔가 하는 영감이 마흔 살 때라면 지금쯤 스무 살은 넘었을 거 아냐.”
야혼이 알고 있는 청운자의 나이는 예순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은 올해로 스무 살이다. 치료제를 구하지 못했다면 벌써
5년 전에 죽었을 거란 생각에 묻는 말이었다.
“1년 전만 해도 아직 살아 있었어요. 처녀를 사서 양기를 억제한다고 했던가……. 아마 그랬을 거예요.”
완치를 못한다 뿐이지 태양신맥의 양기를 억제하는 방법은 존재했다. 그 중에 가장 유용한 방법이 바로 처녀의 음기였다.
남자 관계가 전혀 없는 처녀를 골라 그녀의 음기를 흡수하면 태양신맥의 양기가 일정부분 억제된다는 것이었다.
“그 자식 엄청 좋은 병에 걸렸구먼. 애비가 무당파 장문인 것만 해도 복이구만. 뭐? 팔딱거리는 처녀들이 약이라고? 그런
병이면 나도 한번 걸려보고 싶다 썅! 그리고 이건 불공평해. 15살까지만 살아라 했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이건
역천(逆天) 행위라고.”
“훗! 뚱띵이 아저씨, 부러워할 걸 부러워해요.”
양지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토해냈다. 능력 있는 부모를 만나 지금껏 살아 있는 사람을 보고 하늘을 거역했다며 방방
뛰는 야혼이 더 우스웠다. 가진 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임에도 말이다.
“부럽기보다는 기분 뭣같다 이거지. 약 먹으라며 넙죽넙죽 가져다 준 것들이 전부 처녀 아니냐. 하루에 3번씩이면
도대체……. 약 먹다가 뒈지겠다, 씨팔!”
“호호호! 아저씨 제발 그만 좀 하세요. 하루에 3번씩 어떻게 먹어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한 달에 한 번 정도면
모를까?”
야혼이 씨근덕대는 이유를 알아차린 양지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오직 약으로 쓰인다는 처녀들
때문에 배가 아파서 저러고 있는 거였다.
“아! 맞다. 인간을 약으로 먹는 사람은 또 있었네? 가만, 그러고 보니 약 먹은 지 한참 됐잖아? 소림사에서 먹고 안
먹었으니……. 도대체 얼마나 못 먹은 거야. 어째 요즘 몸이 좀 찌뿌둥하다 했네.”
문득 생각난 듯 양지가 야혼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야! 상주에서 했잖아!”
“그건 중간에 먹는 간식이잖아요!”
물론 상주에서 한번 하기는 했지만 용봉환락무를 펼치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를 가졌기에 약에서 제외시켰다.
“아저씨 지금 바로 안 들어갈 거지?”
주변을 휘둘러보던 양지가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는 야혼을 향해 색기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마침 뿌연 운무 너머로 조그마한
동굴이 보였던 것이었다.
“뭐해요, 아저씨!”
멍하니 눈만 맞추고 있는 야혼이 답답하다는 듯 양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너는 물리지도 않냐? 틈만 나면 약 타령이야.”
“아저씨, 싫증이라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거예요. 우리처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냥 애인처럼 지내는 사인
절대 물릴 리가 없어요.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약은 장복해야 효과가 있다고. 쓸데  없는 소리 말고 빨리 와욧!”
“쩝! 나야 좋기는 하다만……. 어째 요즘은 내가 당하는 것 같아 손해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다.”
혼자 구시렁거리던 야혼이 못이긴 척 따라나섰다. 어차피 밤까지 할 일도 없는데 잘됐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저년은 갈수록 엉덩짝이 방탱이가 되가네.”
벌써부터 용봉환락무를 끌어올렸는지 백색운무를 뿌리는 양지의 모습에 야혼은 마른침을 삼켰다. 더하여 유혹하듯 좌우로 살랑대는
엉덩짝을 보고 있자니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잠시 후, 커다란 바위 옆 동굴 속에서 앓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둘 뿐인 상황이 마음을 놓이게 했는지 양지의 비음은
점점 높아져갔다.
양지만의 착각이었을까. 방사의 신음소리는 귀곡입구에서만 나는 게 아니었다. 계곡의 가장 안쪽에 있는 석실에서도 거친 호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상황은 입구 쪽과는 전혀 달랐다. 입구 쪽에서는 여인의 비음이 더 크게 울렸고, 간간이 숨 넘어가는 소리까지 섞여
있었으나, 이곳 석실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더 컸다.
더군다나, 붉어진 눈으로 거칠게 여인을 탐하는 인물의 행동은 결코 은밀한 방사 행위로 볼 수가 없었다.
능욕, 아래쪽에 깔린 여인이 반항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겁탈에 가까운 행위였다.
선운청(宣雲靑), 태양신맥이라는 지병을 안고 태어난 태극검선 청운자의 아들이 바로 그였다.
붉게 달아오른 몸과 그르렁거리며 여인을 찍어누르는 선운청은 한 마리 야수를 보는 듯 섬뜩했다.
“휴-우!”
선운청의 행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는 인물이 있었다. 고풍스런 검 두 자루를 양쪽어깨에 엇갈려 맨 인물은 호북
검선보(劒仙堡)의 보주인 쌍극검(雙極劒) 선철영(宣鐵英)이었다.
“귀의(鬼醫), 정녕 저 방법말고는 없는 게요.”
“그렇소이다. 선 보주. 이미 말했다시피 태양신맥의 양기를 억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조카입니다.”
오 척 단신의 꼽추노인이 선철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건…….”
선철영이 나직한 침음성을 발했다. 벌써 5년의 세월이었다. 처음엔 1년에 3명 정도의 여자만 있으면 되었다. 더하여
선운청과 관계를 맺어도 크게 상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 달 정도 정양하면 정상을 회복할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선운청이 18살이 되던 해부터는 상황이 돌변했다.
매달 여인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녀들 또한 처참한 상태로 변했다.
극에 달한 선운청의 양기를 견디질 못하고 목내이처럼 변해버린 것이었다. 죽음, 은자 몇 냥에 처녀를 팔겠다고 나선 여인들은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부터 선철영이 직접 나서서 처녀를 사왔다. 선운청과 자신의 신분은 강호 상에 비밀이었지만, 혹여 소문이라도 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무당파 장문으로 있는 형님까지 강호공적으로 몰리게 될 엄청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가
없었다.
옳은 일은 아니었지만 무당파 장문인인 형님의 유일한 핏줄이었기 때문이었다.
“선 보주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피붙이를 살리는 일입니다. 감내 해야지요. 그리고 저 아이가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이십니까?”
귀의의 말에 선철영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6개월 전, 귀의가 태양신맥의 치료제를 찾았다는 말을 했었다.
천년빙련(千年氷蓮). 극음의 정화라는 천년빙련을 보유한 사람과 인연이 닿았다는 것이다. 그자가 마도련 소속인
만수문(萬獸門) 인물이란 사실조차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려 20년간 가슴속 응어리로 자리했던 조카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데 소속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귀의의 말을 듣자마자 형님인 청운자에게 연락을 했다. 청운자 또한 자신과 같은 심정이었다. 조건에 상관없이 무조건
천년빙련을 얻으라고 하였다. 청운자는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결국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선운청의 아버지라 하였다. 아울러 무당파와의 관계도 넌지시 언급했다.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었는데 그게 상대를 더 기고만장하게 하고 말았다.
“양심신공(兩心神功)은 가져오셨습니까?”
그랬다. 천년빙련을 가진 상대는 무당의 비급인 양심신공의 사본을 원했다.
무당에서 가장 귀중한 비급이 뭐냐고 물으면 백이면 백 태청보록과 양심신공을 말할 것이다. 역대 장문인의 깨달음이 들어있는
태청보록은 물론이고 양심신공 또한 단순한 비급이 아니었다.
양심신공(兩心神功),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을 둘로 나누는 무공이었다. 마음을 둘로 나눈다, 말이야 쉽지만 실제 어디
그렇겠는가. 오직 한가지 마음으로 운기행공에 몰두해야하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양심신공을 익히면
가능해진다. 즉 운기행공을 하는 와중에도 적의 암습에 대비할 수 있고, 또한 동시에 두 가지 무공을 익힐 수도 있다.
평생을 걸쳐 한가지 무공에 몰두하는 무인들에게는 꿈의 무공이 바로 양심신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천년빙련을 가진 상대가 그 비급을 원한 것이었다.
“가져 왔소이다.”
선철영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강호무림의 절대 거성이라 알려진 태극검선과 그의 그늘아래 있는 자신이 약자의 입장에 처한
것이다. 원하는 걸 전부 줄 터이니 제발 천년빙련을 달라고 부탁해야하는 약자.
무당파의 반도가 될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면서 말이다.
‘하지만 유출시킬 수는 없소이다. 양심신공을 본 대가는 바로 죽음입니다.’
형님인 태극검선과 의논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천년빙련을 얻기 위해 사본까지 만들어 왔지만 결코 내줄 생각은 없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상대의 신분에 상관없이 입을 봉해버리려는 것이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와야합니다.”
“구지수 본인이 직접오라 하였습니다. 지금쯤 주지현에 와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랬다. 사왕(蛇王) 구지수(具知首), 만수문의 이 인자인 그가 천년빙련의 주인이었다.
귀의(鬼醫)의 짐작대로 구지수는 귀곡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가질 못했다. 양심신공이라는 엄청난 비급을 눈앞에 있는데, 새로운 관심거리에 발목을 잡혀버리고 말았다.
“으헉!”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67)- 죽은놈(?)을 살려내는 약이 필요하오.(2)
"아-아! 하악!"
바로 이 소리 때문이었다. 눈앞을 가리는 안개에 취해 잠시 발을 멈춘 순간, 그의 귓전에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분명 남녀가
방사를 치를 때 나는 소리였다.
비록 50이 넘었지만 아직도 간간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물건을 지닌 사내였다. 주책이란 생각도 없진 않았으나 한적한 계곡,
동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너무 자극적이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하며 아래쪽으로 급격히 피가 쏠렸다.
"허허! 이 구지수(具知首)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구지수가 비음이 흘러나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때 같았으면 결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첩첩 산 중,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용기를 내게 했는지도 몰랐다.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다음 동굴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허억! 저런 맹랑한……."
고개를 살짝 내밀어 동굴 안을 쳐다보던 구지수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급하게 삼켰다. 두 남녀가 한참 방사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 자세가 맹랑했다. 투실투실 살이 찐 남정네는 아래쪽에 누워있었고, 앙증맞은 가슴을 가진 여인은 위에 있었는데,
어쩌면 저리도 환상적인 율동을 보일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절륜했다.
마치 춤이라도 추는 듯 엉덩이를 쳐 올리는 사내의 행동과, 그에 맞춰 나직한 비음을 지르며 요분질을 해대는 여인의 모습에
절로 숨이 막혔다.
더구나 한줌도 안 돼 보이는 가슴과 앳된 얼굴의 계집은 기껏해야 스물 안팎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욱 경악할 노릇은 이제 막 끝낸 년놈이 결합한 상태 그대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50을 넘긴 몸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해 빙긋 미소까지 짓고 있다. 마치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듯.
이번에는 자세까지 바꿨다. 사내 녀석이 무릎을 꿇고 앉자, 그놈의 목을 껴안은 계집이 그 위로 엉덩이를 걸치는 것이었다.
학이 서로 교접하는 모양을 나타낸 학교경(鶴交頸)이란 체위였다. 기절할 노릇이었다. 나이도 얼마 먹지 않는 것들이 하는
짓이라니.
파삭!
두 사람의 행위를 보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던지 쥐고 있던 돌이 부서져 내렸다.
질겁한 구지수가 재빨리 숨을 들이키며 몸을 숨겼다.
"아무도 없어. 여기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이번엔 학교경부터 거꾸로 가는 거다."
"후-우!"
나직한 한숨을 몰아쉬며 구지수가 다시 안쪽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몸만 뚱뚱했지, 목소리로 보건대 사내 또한 젊은 듯했다.
그런데 하는 짓은 웬만한 선수는 이름도 못 내밀 듯했다. 수십 년 동안 그 짓을 하고 살았던 자신보다 훨씬 능수능란했다.
일순 질시의 감정이 와락 밀려왔다.
젊음, 그건 사내의 영원한 꿈이다. 물건이 서지 않아 방사를 치르지 못하면 이미 남자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봐야한다. 해서
이번에 귀의를 만난 김에 춘약도 좀 얻어가려 했건만, 그보다 전에 인간 춘약을 만난 것이다.
"가만 저 현상은……. 어디서, 저럴 수가, 용봉……."
안쪽을 주시하던 구지수가 격정에 겨운 얼굴로 몸을 떨었다. 방사를 시작하면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백무(白霧)와 적무(赤霧)
때문이었다.
처음엔 두 사람의 방사에 정신이 팔려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다시 관계를 갖기 시작하자, 전보다 선명한 백무와 적무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방사 중에 그런 현상을 보이는 무공은 세상에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용봉환락무(龍鳳歡樂舞). 내공면에서는 겁천십웅보다 더 앞섰다는 용화대제가 창안한 무공이었다.
"이건 횡재다. 저것들을 제압해서 용봉환락무만 얻어낼 수 있다면……."
귀곡에서 기다리는 양심신공보다 더 엄청난 무공이 바로 앞에 있었다. 양심신공이야 죽어라 익혀야 하는 무공이지만 눈앞에 있는
용봉환락무는 방사를 하면 할수록 내공이 늘어난다.
그야말로 즐기면서 내공을 올릴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이었다.
이제는 두 년놈의 환상적인 행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둘러 제압하여 무공을 얻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만 멈추지 못할까! 어디 대낮부터 젊은것들이……."
성교9법 중 후배위에 해당하는 호보(虎步)의 자세를 취한 두 사람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두 사람은 신청도 하지 않았다.
"이봐 영감! 구경 다했으면, 그냥 가! 우린 바쁘단 말이야."
오히려 양지의 엉덩이를 붙잡고 더욱 빠르게 진퇴를 거듭하며 소리를 질렀다. 다시 시작할 때부터 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살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제 놈만 손해라는 생각에 무시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안으로까지 들어와 방해를 하는 것이다. 야혼의
눈동자가 백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더하여 용봉환락무마저 풀었는지 솟구치던 백무와 적무가 동시에 사라졌다.
"이런 썩을……."
구지수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자신들만의 은밀한 방사를 들켰으면 서둘러 옷을 입는다든지 아니며 얼굴을 붉히며 그만 둬야
정상이거늘, 앞에 있는 두 년놈은 전혀 그럴 기색이 없는 듯했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하던 일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사내의 진퇴운동은 더욱 빨라지고 여인의 요분질 또한 속도를
더했다. 황당한 경우를 당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말로만 들었지 실제 경험하기는 처음이지 싶었다.
"갈!"
"이런 씨발노무새끼가. 하는덴 개도 안 건드리는 법이거늘."
구지수의 고함에 기분이 확 상한 야혼이 양지의 뒤쪽에서 몸을 빼내며 앞으로 나섰다.
"마-말이닷!"
한 걸음 물러난 구지수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몸을 빼낸 놈의 물건이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한데 그 크기가 위압적이었다. 거구의 몸 때문에 아니라 잔뜩 성을 낸 그놈 때문에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자신의 추태가 못마땅했던지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구지수가 살기를 머금고 앞으로 나섰다. 만수문 서열 2위인 자신이 무공도
아니고 한갓 성기를 보고 물러났다는 사실에 열불이 터졌다.
하나 구지수의 그런 심정을 알리 없는 야혼은 더욱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도 남자니까 알 것 아냐. 하고 있는데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 와서 건들이면 기분 좋아? 기분 좋냐고 이
개새끼야."
씩씩대는 모양새가 선불 맞은 호랑이 같다.
하지만 어이없는 사람은 구지수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무작정 큰소리를 치는 놈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옷도
입지 않은 채 말이다.
"닥치거라 이놈!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용봉환락무의 구결을 말하거라."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어 내공을 가득 실어 고함을 내질렀다. 동시에 돼지 같은 녀석을 향해 살기를 집중시켰다.
그 정도면 입을 멈추게 하기엔 충분하다 여겼다.
그러나,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곰 같은 체구를 가진 놈은 살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가슴을 더욱 내밀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관을 봐야 정신을 차린다, 이 말이렸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구지수가 내공을 운기한 오른 손을 가볍게 뻗어냈다. 죽일 의사가 없었기에 운기한 내공은 5성
정도였다. 그것도 손을 뻗어내다가 조금 더 줄였으니 마지막 녀석의 가슴에 닿았을 땐 3성 정도였다. 그 정도의 내공이면
녀석을 겁주기에 충분하다 여겼었는데.
퍽!
크억!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뒤쪽으로 나가떨어진 사람은 구지수였다.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는지 구지수가 멍한 눈으로
제 주먹을 쳐다보았다.
분명 손에 느껴진 감촉은 타격감이었다. 3성의 내공이 실린 주먹이 곰 같은 녀석의 가슴에 격중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비명을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더하여 입 주위에선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빨리 내기를 일주천시킨 구지수가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내부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어디서 외공 나부랭이를 좀 익힌 모양이구나. 하지만 내공이 있는 무인에게는 무용지물이란 사실을 몰랐더냐."
다시 한번 내공을 끌어올린 구지수가 야혼을 향해 돌진했다. 처음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그의 손끝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러나 두 번째 시도 또한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의 10성의 공력으로 녀석의 어깨를
내려쳤건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발 더 앞으로 다가서며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치 간지럽다는 표정으로.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구지수의 두 주먹이 야혼의 온몸으로 빛살처럼 떨어졌다. 거구라 좋은 점은 있었다.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헛손질이 나올 리가 없었다. 더구나 놈 또한 전혀 피할 생각이 없는 듯 무턱대고 사정거리 안으로 다가들었다.
퍽! 퍼억! 퍽퍽퍽!
"아이고 아파라, 씨팔!"
일 각, 이 각, 반 시진, 한 시진.
"죽어라! 이 놈! 죽으란 말이다!"
끊임없이 주먹을 휘두르던 구지수가 바락바락 고함을 질렀다. 무공을 익힌 지 30년이 흘렀지만 지금처럼 개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전 내공을 실어 주먹을 날렸지만 물러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온몸을 난타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다가들었다.
좀더 정확하게 타격하기 위해 물러서다가, 급기야는 자신이 먼저 지쳐버렸다. 무려 한 시진 동안 전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으니.
"개자식,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새끼가 하는 걸 방해해?"
힘없이 들어오는 주먹을 흘리며 오른 손을 구지수의 단전에 박아 넣었다.
"커억!"
허공 가득 핏줄기를 뿜어내며 구지수의 신형이 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아직 멀었어 임마. 그건 시작에 불과해."
"이 구지수가……."
"구지수(具知首)?"
다시 한번 주먹을 박아 넣어 마무리를 지으려던 야혼이 동작을 멈췄다. 알고 있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만수문 서열 2위."
고개를 갸웃거리는 야혼의 귓전에 양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수문이라면 마도련을 구성하는 다섯 곳의 문파중의 한 곳이었다.
"일단은 좀 쉬고 있어라."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구지수의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커억!"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구지수가 정신을 잃었다.
"끝냈으면 빨리 와요, 뚱띵이 아저씨. 하던 일은 마무리해야지."
구지수의 품속을 뒤지기 위해 몸을 숙이는 야혼을 보고는 양지가 다그치듯 말했다.
하던 일, 구지수가 나타나기 전에 하던 일이라고 해봐야 용봉환락무를 열심히 펼친 것밖에는 없는데.
그랬다. 밖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양지는 여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야혼이 해결하고
들어오기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그래 하던 일은 마무릴 지어야겠지. 하다가 안 하면 아니 한만 못한 거지."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동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바닥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가공스런 경지의 신법을 오직 빨리
하기 위해 시전했다.
잠시 후, 동굴 속에서는 예의 비음이 또 다시 흘러나왔다. 그들의 신음소리는 태양이 서편으로 넘어가 어둠이 밀려올 때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그 신음소리는 구지수를 다시 흔들어 깨웠다.
"으음!"
기절해 있던 구지수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이게……."
좀 전에 일어났던 꿈만 같았던 사건이 떠오르자 황급히 주변 동정을 살폈다. 비몽사몽간에도 줄기차게 들었던 신음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떠났나?'
"허억!"
괴물 같은 놈이 떠난 것으로 간주하고 가만히 내기를 끌어올리던 구지수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없었다. 단전으로부터
힘차게 솟구쳐 올라야할 내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대신 힘을 썼다는 표식인지 극심한 통증만 밀려왔다.
'이럴 수가……. 어찌 이럴 수가…….'
망연자실, 넋을 잃고 말았다. 복수를 하고자하는 원수를 만난 것도 아니고, 명예를 위한 비무도 아니었다. 단지 실력 좋은
년놈들의 방사를 구경한 대가가 내공상실이라니. 도저히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다. 아직 실망할 때는 아니다.'
최악의 상태에서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품속에 있는 천년빙련 때문이었다. 그 놈만 있으면 잃었던 내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음의 기물이기에 차마 복용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양심신공보다 더 중요한 목숨을 건져야했다.
다시 한번 주변 상황을 살폈다.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손을 가슴으로 가져가며 살며시 눈을 떴다.
"허걱!"
동작 그만, 상태로 구지수가 비명을 삼켰다. 두 쌍의 눈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무심한
눈과 호기심 잔뜩 어린 눈이 들어왔다 . 눈동자 4개의 행선지는 다름 아닌 가슴을 덮고 있는 자신의 손이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68)- 죽은 놈(?)을 살려내는 약이 필요하오(3)
“어디 보자. 가슴속에 뭘 숨겨두었기에…….”
“내가 잘못했네. 제발 부탁이네.”
만수문의 2인자라는 신분도 잊고 무작정 빌었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선 방법이 없었다. 전혀 방어를 하지 않아 녀석을
경시했는데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자신의 무공이 먹히지 않은 엄청난 놈이었다.
이제와 땅을 치고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없지만, 곁에 여자가 있기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남자라는 동물은 곁에 여자가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인정이 후해지는 속성이 있는데, 놈 또한 그러리라 믿었다. 그런 구지수의
바람이 통했는지 야혼이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누가 죽인다 그랬나? 품속에 숨겨둔 것 좀 보자는 말이지. 어라? 이건 또 뭐야?”
바닥에 내려앉은 야혼이 구지수의 앞섶을 헤쳤다. 품속에서 나온 물건은 조그마한 상자와 사슴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였다. 야혼이
관심을 가진 것은 녹피 주머니가 아닌 조그마한 상자였다. 소중한 물건이라도 들어있는 듯 제법 정교하게 만들어진 상자였는데
그 틈으로 시원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녹피 주머니를 먼저 열어라 제발!’
내심 빌고 또 빌었다. 놈을 정신없이 두들기다 비밀 무기인 녹피 주머니를 잊었다. 비홍사(飛紅蛇), 물리기만 하면 일 각
안에 목숨이 끊어진다는 뱀이 들어있었는데.
딸깍!
뚜껑이 열리는 소리에 구지수가 눈을 감았다. 체념, 내공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사라지고 말았다.
“천년빙련(千年氷蓮)이네요?”
백색의 연꽃모양의 꽃을 쳐다본 양지가 놀란 듯 소리쳤다. 말로만 들었던 천년빙련이었다. 연꽃을 수십 배 축소시켜놓은 듯
반투명한 꽃에선 영롱한 빛이 흘러나왔다. 아울러 차가운 기운까지.
“놀라운 일이네? 마도련 인물이 무당파 장문 아들을 구하기 위해 천년빙련을 가져오다니. 정말 개가 웃을 일이군.”
“아저씨도, 대가가 있으니까 천년빙련을 가져왔겠지. 공연히 이 먼 곳까지 왔겠어요?”
“그런가? 근데 이 새끼는 왜 말을 안 하지?”
“말하겠네. 전부 말하겠네.”
야혼의 눈에서 일렁이는 살기를 읽은 구지수가 재빨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귀의(鬼醫)가 천년빙련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이 먼저 접근하여 흥정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부터, 저간의 모든 이야기를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 천년빙련을 가져가면 무당파 최고 비급 중의 하나인 양심신공을 준다했다 이거냐?”
“그렇다네. 이미 선철영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그러니…….”
번쩍!
일순 야혼의 주변에 백색 광채가 어렸다. 양지의 허리에서 청사(靑蛇)를 뽑아든 야혼이 구지수의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즉사, 만수문의 2인자, 사왕(蛇王)으로 불리던 구지수가 자신의 주무기인 뱀 한 마리 사용하지 못하고 저승문턱을
넘어버렸다.
“다시 태어나면 남들 하는 건 절대 보지 마라. 너도 남자니까 내 맘 이해할거다. 어떠냐 양지야 이놈하고 비슷하냐?”
“옴마!”
고개를 홱 돌린 야혼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둥그랬지만 그래도 미남이었던 야혼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방금 목이 잘린 구지수가 서 있었다.
천면만환공(千面滿幻功)을 이용해서 구지수로 변신한 것이었다.
“사람 좀 웬만큼 놀래켜요. 하지만 그럼 뭐해요? 몸은 그대론데?”
이내 마음을 진정시킨 양지가 야혼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천면만환공을 시전하면 얼굴만 바뀐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엄청난 기술이라 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 체형을 가진 사람들에 한한다.
야혼처럼 뚱뚱한 사람은 오히려 의심을 살 게 분명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혼은 얼굴을 바꾸고 있다. 무슨 꿍꿍이
속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구지수라는데 지들이 어쩔 거야. 더구나 천년빙련도 있고 여기 비홍사도 있는데.”
야혼이 품속으로 집어넣은 녹피 주머니를 툭 쳤다. 처음엔 대단한 게 들었나하고 주머니를 열었다 혼비백산했다. 한 뼘 정도
되는 붉은 뱀이 튀어나와 손목을 물었던 것이었다. 금강철피공 덕분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양지에게라도 달려들었다면
큰일 치를 뻔했다.
“기다리겠다. 빨리 가자.”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양지의 허리를 덥석 안으며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야혼의 짐작대로 선철영과 귀의는 초조한 얼굴로 귀곡 입구 쪽을 연신 흘끔거렸다.
해가 떨어지고 상당시간이 지났는데 온다던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오늘 안 오는 게 아닐까요?”
선철영이 걱정스런 얼굴로 귀의를 쳐다보았다. 양심신공이 탐이 난다 하지만 본인이 싫다고 거절하면 그로선 방법이 없었다.
천년빙련을 구하겠다고 마도련의 담을 넘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 하여 선운청의 정체를 밝힐 수도 없다.
태양신맥을 타고난 인물이 치료가 된다면 엄청난 능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아는 일, 그 인물이 적이라면 제거해야
마땅한 일이다. 마도련 역시 마찬가지인 게다.
조카인 선운청의 목숨은 오직 구지수에게 달려 있었다. 그와 은밀히 접촉해야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선 보주. 그자는 분명 옵니다. 저기…….”
멀리서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한 귀의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부를 가져다줄 인물이 드디어 당도한 것이다.
선운청의 목숨을 구해주는 대가로 선철영이 약속했던 금액은 무려 10만 냥이었다. 지금껏 받았던 돈 만해도 10만냥이
넘어가는데 그 정도의 돈을 또 약속했다.
물론 죽을 때가지 선운청에 대한 비밀을 가져가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살인멸구에 대한 대비도 해 두었다. 자신이 죽으면 선운청에 대한 정보가 저절로 개방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사실은 선철영도
알고 무당파의 장문인인 청운자도 알고 있다. 해서 안심하고 일을 추진했다.
“어서 오시…….”
구지수를 맞이하던 귀의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그가 알고 있던 구지수가 아니었다. 그를 만난 지 불과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구지수의 모습이라니. 얼굴은 분명 구지수가 맞는데 몸은 전혀 달랐다.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육중한
몸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시오. 약을 잘못 먹어서 이렇게 된 거니까. 확인하고 싶으면 확인하시오.”
의심스런 얼굴로 쳐다보는 귀의를 향해 야혼이 얼굴을 디밀었다.
“죄송하외다. 중요한 일이라서…….”
얼굴을 가볍게 만진 귀의가 깜짝 놀라며 다시 한번 야혼의 몸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분명 면구가 아닌 살갗이었다.
얼굴을 바꾸는 무공은 300년 전에 사라진 십전수의 무공밖에 없는데 앞에 있는 자가 익혔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 물건은 가져오셨습니까?”
“물론이외다. 천년빙련(千年氷蓮)은 얼마든지 내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소이다.”
“볼 수 있겠습니까?”
대뜸 선철영이 물었다. 우선은 구지수 본인여부 확인보다는 천년빙련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했다.
“아! 제가 선철영입니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야혼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예리하게 살폈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 등으로 무공
정도를 파악하려는 심산이었다.
‘이상하네? 나와 비슷한 경지라 알고 있었는데…….’
자신보다 훨씬 약해 보이는 무공에 내심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만수문의 2인자이면 자신보다 더 높거나 아니면 최소한
비슷하기라도 해야한다. 그런데 앞에 있는 자는 아니었다. 부쩍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약을 잘못 먹었을 뿐만 아니라, 주화입마에서 간신히 살아났소.”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선철영을 향해 야혼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곳에 오는 도중 야혼은 이미 상당부분의 내공을
풀어 전신에 퍼트려 버린 상태였다.
“자, 확인하십시오.”
선철영을 주시하던 야혼이 등을 돌리며 슬쩍 귀의에게 천년빙련을 보여주었다.
“맞군요.”
‘자중하시오. 선 보주. 지금 이자는 손에 모든 내공을 집중하고 있소이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노려보는 선철영을 향해 귀의가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지금까지의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그쪽도 보여주시오.”
품속으로 상자를 집어넣은 야혼이 선철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걸 주기 전에 한가지 약속해 주셔야겠소. 양심신공을 볼 수 있는 장소는 오로지 귀곡 안이오.”
“약속이 틀리지 않소. 서로 교환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소?”
“이건 양심신공이오. 이 일에 나는 목숨을 걸었소이다. 더 이상 핍박하지 마시오.”
선철영의 몸에서 자욱한 살기가 흘렀다. 여차하면 같이 죽겠다는 의미였다.
“쩝!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군. 하지만 나도 지금은 줄 수 없소. 양심신공을 전부 암기한 순간 넘기도록
하겠소.”
“무슨 소린가. 구지수 당신이 이 비급을 다 암기할 때까지 기다리란 말인가? 그러다 내 아들을 구하지 못하면 그때는 어쩔
텐가?”
“그건 나도 마찬가지외다. 천년빙련만 넘기고 목숨을 잃게되면 당신이 책임 질거요?”
“아아! 두 분 그러지 마시고. 이렇게 합시다. 선 보주의 아들이 다시 발작하려면 한 달이 남았소이다. ”
결국 보다 못한 귀의가 중재안을 내놓았다. 한 달 후에 모든 걸 해결하자는 말이었다.
“제기랄. 이곳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좋소이다. 귀의의 의견에 동의하겠소.”
야혼과 선철영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한가지 조건이 더 있소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야혼이 갑자기 생각난 듯 귀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시오. 하지만 귀의가 들어줘야 이 거래는 성사되오. 나 또한 목숨을 걸었으니까 너무 핍박하지
마시오. 갑시다, 귀의.”
선철영을 쳐다보며 미소를 남긴 야혼이 귀의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이곳에 오고자했던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건방진…….”
잔뜩 얼굴이 붉어진 선철영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수문 서열 2위라 하지만 자신에 비하면 한참 아래였다. 약만
아니었다면 벌써 검을 날렸을 것이다. 천년빙련이 손에 들어올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지가 않았다.
“지금은 기다려준다. 지금은…….”
입술을 깨물며 살의를 불태우는 선철영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혼은 자신의 조건을 말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니까, 죽은 자를 살려내는 약을 만들어 달라는 말이오?”
야혼의 요구조건을 들은 귀의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평생을 의원으로 지냈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약을 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런 약이 있다면 과거 진시왕이 불로초를 왜 구하려 했을 것이며, 자신 또한 선운청을 왜
돌보았겠는가.
그 약을 팔아 돈을 벌면 될 일을.
“말을 똑바로 들으시오. 죽은 자가 아니고 죽은 놈이란 말이오. 귀의도 나이를 먹었으니까 느끼실 것 아니오. 내 저년을
데리고 다니고 있지만…….죽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외다.”
“설마…….”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귀의가 양지와 야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구지수의 나이는 쉰. 그런데 데리고 다니는
계집은 많아야 스무 살 정도였다. 그가 원하는 건 다름 아닌 춘약이었던 것이다.
“맞소이다. 지금은 이런 정도의 약은 간에 기별도 오지 않소. 더 강한 놈으로 만들어주시오. 이 약보다 백 배정도 농축한
효과가 나오도록.”
“그렇게 하면 몸이 견디질…….”
눈앞에 디밀어진 춘약을 쳐다보던 귀의가 입을 닫았다. 몸이 견디지 못한다는 말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충 그의 말로
파악하건대 보약을 잘못 먹어 지금처럼 되었다는 뜻인데 그 약 기운이 전부 가라앉으려면 수백 명의 여자를 안아도 상관없을 듯
싶었다.
“어느 정도나 필요하시오.”
“여기 포대를 준비했소. 바람 한 점 안 들어가게 만들었으니까 새나갈 걱정은 말고 반 포대만 만들어 주시오. 재료를 사는데
돈이 필요하다면 드리리다.”
“구 대협. 반 포대가 얼마나 많은 양인지 아시고 하는 말이오? 만두 빚을 일 있습니까?”
귀의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제 덩치만한 자루를 가져와서는 반을 만들어 달라니, 춘약으로 요리를 해먹을 요량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오. 하지만 귀의께서는 이번 일을 끝으로 은거할 터이고, 혹여 춘약이 필요하면 그 때는
방법이 없질 않습니까. 그렇다고 사람을 풀어 귀의를 찾을 수도 없는 일이고……. 한 포대를 전부 만들어 주었으면 바랄 나위
없겠지만 그건 힘들 것 같아 반포대로 만족하기로 했소이다.”
“끄응!”
나직한 신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춘약으로 만두를 빚어먹든 전병을 만들어 먹던, 제조해 주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듯했다.
그의 말대로 사람을 풀어 자신을 찾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구지수가 무서워가 아니었다. 무당파, 자신에게 돈을
지불할 무당파의 추적 때문에라도 춘약을 만들어 주고 거래를 끊어야 했다.
“알겠소이다. 한 달 안에 최대한 만들어 보겠소이다.”
“고맙소이다. 정말 생각 잘하셨소. 그런데 우린 어디에 기거해야 하는 거요?”
“내 집에서 기거하시오. 손님을 동굴로 내쫓을 수는 없잖소.”
“양지야 가자!”
일이 제대로 풀렸다는 듯 환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양지를 데리고 귀의의 집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지수 때문에 일이 쉽게
풀려 내심 흐뭇했다.
“뚱띵이 아저씨, 도대체 속셈이 뭐예요?”
집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양지가 속삭이듯 물었다. 돈 4만 냥과 무공 비급이 들어있는 마차를 객잔에 맡기기에 대단히 중요한
일이 있는 줄 알았었다. 한데 기껏 찾아온 귀곡에서 그가 원한 물건은 춘약이었다.
일반 춘약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있었지만 그래봐야 여자 후릴 때 사용하는 춘약일 뿐 다른 용도로 쓰일 일이
없다.
“두고두고 먹으려 그런다, 왜?”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하루 종일 해도 끄떡도 없는 사람이. 여자 잡을 일 있어요?”
“양지야 약이란 말이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라도 과용하면 독이 되는 거다. 춘약도 마찬가지란다. 조금만 사용하면 밤을
행복하게 해주는 묘약 아니냐. 밤이 행복하면 가정의 평화가 지켜지고, 가정의 평화가 지켜지면 나라가 평안해진단다. 그야말로
나라를 태평성대로 만드는 약이 바로 춘약이다. 이런 약은 많이 있을수록 좋은 거야.”
“그래도 그건 좀 심했어요. 잠깐 그 춘약 좀 줘봐요.”
야혼의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약 봉지를 빼낸 양지가 냉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너?”
“확인해 보려고요. 가정의 평화가 지켜지는지 아닌지. 빨리 따라 들어와욧!”
약 기운이 도는지 살풋 얼굴이 붉어진 양지가 야혼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허! 그러니까 구지수가 귀의에게 내건 조건이란 춘약이라 이 말입니까?”
기가 막힌 듯, 입을 쩍 벌린 선철영이 말을 잇지 못했다. 대단한 요구사항이라도 있는 것처럼 귀의를 데려가더니 기껏 춘약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했다니.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선철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마도련의 한 축인 만수문의 2인자라 알려진 자다.
간혹가다 날카로운 면을 보이기는 하지만 하는 행동은 경박스럽기 그지없었다. 많은 수하를 거느려본 자의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알 수가 없는 게 아니고 놈은 구지수가 아닙니다.”
귀의가 확신하듯 말했다. 비록 한번에 불과했지만 구지수를 만났었다. 얼굴은 과거와 같았다. 하지만 말투나 행동은 결코
아니었다. 완전한 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럼?”
선철영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이곳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살아있어서는 결코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무당파 장문인의  약점이 아닌가.
구지수에게 무당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양심신공을 미끼로 던졌다는 사실은, 무당파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게 뻔하다.
“일단은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지요. 그리고 선 보주는 은밀하게 구지수의 행방을 알아보십시오. 아마 십중팔구 죽었을
겁니다.”
구지수와 거래를 틀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이 본인 이외는 누구도 관련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필요도 없는
천년빙련과 무당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양심신공을 바꾸는 일인데 그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에 틀림없었다.
“알겠소이다. 내일부터 알아보지요.”
귓속을 파고드는 비음소리를 견디다 못한 두 사람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삼 면이 절벽으로 둘러쳐진 귀곡의 울타리 안에서 두 계약자가 서로를 감시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감시라는 말은 오직 선철영에게만 해당하는 듯했다.
귀곡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에 거처를 정한 선철영은 언제나 긴장된 얼굴로 야혼과 양지가 들어있는 집을 주시했다.
양심신공은 이미 주었지만 천년빙련은 아직 건네 받지 못했다.
춘약을 만들던 귀의가 잠시 쉬러 나온 틈을 타 잠시잠깐씩 행하는 운기행공만으로 버텨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벌써 10여 일이
지났지만 잠 한숨 자지 못했다.
“놈! 앞으로 20일 남았다. 마지막날 네놈은 반드시 죽는다. 반드시…….”
야혼과 양지가 들어있는 집을 쳐다보며 선철영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 구지수의 죽음을 확인했다. 양심신공을 넘겨준 다음날
바로 곡 밖으로 나가 확인을 했다. 무슨 심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목을 잘라 죽였으면 구지수의 시신을 치우던지, 아니면
그로 변장을 하지 말았어야 하건만, 모든 증거를 그대로 남겨 둔 채였다. 무공도 그리 강해 보이지 않은 자가 대담한 건지
아니면 어리석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스무날까지도 필요 없다. 기회만 생기면 네놈을 바로 없애주겠다.”
하지만 놈은 틈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다녔다. 조금만 위협이 가해지면 바로 천년빙련을
없애버리겠다는 무언의 위협이었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이라면 같이 있던 계집은 등한시한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자 선철영이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10여 일간 잠을 자지 못한 증상은 금방 나타났다. 아무리
무공의 고수라지만 잠을 자지 않고 견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듯했다.
“조금만 더 참자. 20년을 견뎌오지 않았더냐.”
내기를 골라 마음을 안정시키며 중얼거렸다. 이제 20일만 지나면 지난 세월의 고생은 종지부를 찍는다. 형님은 무당파
장문인으로, 선운청은 일대 기협(奇俠)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터이다. 선철영 자신의 아들로.
선씨 가문의 최대 영광이 도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천년빙련을 얻고 구지수로 변장한 놈을 죽여야 한다. 반드시.
“가만…….”
집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전 내공을 귀로 집중했다. 지금 상태에서 천리지청술(千里之聽術)을 펼치는 행위 또한
몸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집안에 있는 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선 방법이 없었다.
내공을 잔뜩 끌어올린 그의 귓전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제기랄…… 빌어먹을 년놈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욕설을 뱉어냈다. 지치지도 않는지 또다시 방사하는 소리였다. 서로가 갖은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질퍽하니 몸을 섞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이내 천리지청술을 풀고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귀의의 모옥 안에서는 선철영이 상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손바닥을 맞대고 기이한 소리를 내며 야혼과 양지 두 사람이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뚱띵이 아저씨. 이제는 말 좀 해봐요. 지금 꾸미는 일이 도대체 뭔지.“
간간이 야릇한 신음을 질러대며 양지가 물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고자 할 때만 해도 야혼의 목적은 분명 춘약이었다.
그런데 선운청에 대해 알고 나서부터는 다른 생각을 가진 듯해서 묻는 말이었는데.
“양지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된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내가 하는 일은 중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사실만
알아두거라. 근데 양심신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냐?”
“이제 3일짼데 뭐가 나오겠어요? 적어도 몇 년은 들이파야지. 아저씬 어땠어요?”
양지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양심신공에 대해 묻자 어색했던 거였다.
외려 7일 동안 읽은 야혼의 생각이 더 궁금했다.
“글쎄다. 한가지만 생각해도 머리 아픈 세상인데 굳이 두 가지씩이나 들고 골머리를 싸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결론은
도사들이…….”
“밥 먹고 소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냈다 이 말이죠?”
“아니? 한 쪽으로는 원시천존을 찾고 나머지 한 쪽으로는 선철영과 같은 더러운 짓을 하기 위해 만들어낸 무공이라
결론지었다.”
“반쪽이라도 착한 일을 할 마음이 있다는 것도 대단한 거라고요. 이 세상엔 속까지 섞은 도사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읽어보지요 뭐.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배시시 웃은 양지가 이내 양심신공에 집중했다. 새로운 읽을 거리, 무당 최고의 기서중의 하나라는 양심신공은 심심풀이밖에
되지 않았다. 야혼이나 양지에게는…….
산중의 나날은 바람처럼 지나갔다. 어느새 약속한 한 달의 기간 중, 하루를 남겨두고 있었다. 귀곡 안쪽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귀의에게 부탁했던 춘약은 이미 완성되어 야혼에게 전달되었다. 결국 야혼이 원했던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이었다. 오직 한가지
선철영이 받을 천년빙련만이 남아있었다.
“어떻게 되었소, 귀의.”
“제대로 되었습니다. 놈의 자루에 수면가루를 뿌려두었으니까 지금쯤 세상모르고 잠들었을 겁니다.”
“좋습니다. 갑시다.”
대화를 나누던 선철영이 검을 뽑아들고 모옥을 향했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동안 독을 사용하여 놈을 제압하고 싶었으나
돼지 같은 놈이 워낙 주도면밀하여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
해서 생각해낸 방법이 춘약을 담는 자루였다. 그건 놈이 가져온 자루였고, 독이 아니기에 들킬 염려가 없으리라 확신했다.
드디어 춘약을 완성했고 놈에게 자루를 쥐어주는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구지수로 변장하고 있는 놈은 물론이고 정부로
있는 계집년까지 자루를 만졌던 것이었다.
선철영과 귀의,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모옥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상태를 가만히 살피던 귀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깨어날 염려가 없다는 의미였다.
“말해도 됩니다. 적어도 사나흘은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빨리 찾아봅시다.”
머리맡에 올려져 있던 양심신공을 재로 만들어버린 선철영이 야혼을 노려보며 살기를 토해냈다. 천년빙련을 찾는 순간 바로 목을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없소이다. 선 보주. 이놈은 천년빙련을 수중에 지니고 있지 않소이다.”
“무슨 소리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이놈을 감시했소이다. 결코 다른 곳에 두 지 않았소. 분명 이 안에 있소이다.”
잔뜩 핏발선 눈으로 선철영이 소리쳤다. 무려 한 달간 잠을 자지 않고 놈을 감시했다. 결코 밖에다 숨길 여유를 주지
않았다.
“크아악!”
“빌어먹을.”
선철영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양기가 솟구친 선운청이 고통에 겨워 지르는 비명소리였다. 이미 발작을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찾았소이다. 선 보주!”
야혼과 양지가 누워있는 침대 밑을 뒤지던 귀의가 희열에 찬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네모난 구멍을 파서 그 속에 집어넣고
다시 나무판으로 덮어두었던 것이었다.
“봅시다.”
귀의의 손에서 상자를 빼앗듯 낚아챈 선철영이 아무 생각 없이 뚜껑을 열었다.
“허억!”
한 순간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안쪽에서 붉은 광채가 번뜩하는 듯하더니 목으로부터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건…….”
자신의 목에 주둥일 박고 있는 붉은 물체를 확인한 선철영이 절망적인 얼굴로 울부짖었다.
비홍사(飛紅蛇), 자신의 목에 깊숙이 박혀있는 그놈은 사왕 구지수의 애완동물이었다.
“방심했어. 아니 저놈이 그렇게 만들었어.”
허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놈을 쳐다보았다. 순간적인 실수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결코 지금처럼 뚜껑을 열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맞아 네 놈은 방심했어.”
우두둑!
“잠든 게 아니었단 말이냐…….”
귀의의 목이 돌아가는 소리였다. 침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선철영이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 나에게 천년빙련을 보여주지 않았을 때부터 이상하다 여겼었는데.”
그랬다. 처음 천년빙련을 보여주지 않았던 이유는 지금의 상황을 유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잠을 재우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수면부족으로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선운청의 비명은 스스로를 다급하게 만들었고, 천년빙련이 들어있다는 상자를
보자마자 아무런 의심 없이 뚜껑을 열게 한 것이다.
“왜……?”
궁금했다.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임에 분명했다. 구지수를 죽이고 왔으니 마도련 인물이라 볼 수도 없다. 전혀
은원관계가 없는 자가 죽이려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글쎄, 그건 저승 가서 기다리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하지만 한가지는 말해줄 수 있다. 마옥성(魔獄城)과 친하지
말았어야 했다. 청운자(靑雲子) 그놈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외롭지는 않을 거야.”
무심한 눈으로 선철영을 쳐다보던 야혼의 몸에서 미약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형님 이일을 어쩌란 말이오. 이 일을…….”
점점 흐려지는 눈앞. 털썩 주저앉은 선철영이 부르짖었다. 자신을 노린 자가 아니었다. 청운자, 선(宣)씨 가문의 장자이자
무당파 장문인인 형을 노리는 자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조카인 선운청마저 죽는다면 형님은 결코 참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목을 뚫고 들어온 뱀은 비홍사(飛紅蛇), 이 모든 책임을 만수문이 지게 될 것이다.
전쟁, 아들과 동생을 동시에 잃은 형님이 선택할 유일한 대안일 것이다.
“운청아…….”
나지막이 중얼거린 선철영이 더 이상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듯 쓰러졌다.
“이 놈 엄청 세네?“
선철영의 목에서 비홍사를 꺼내서는 녀석의 주둥이를 사정없이 틀어쥐었다. 날카롭게 드러난 두 개의 송곳니를 가만히 쳐다보던
야혼이 주변에 있던 조그마한 약병 한 곳을 슬쩍 눌렀다.
그러자 비홍사의 입이 닫는 부분에서 반투명한 액체가 주르르 흘러 내렸다. 선철영을 단시간에 절명시켰던 절독이었다.
“그건 또 어디에 쓰려고 독을 받는 거예요?”
“글쎄, 놔두면 쓸데가 있겠지. 근데 아쉽다. 이놈처럼 독이 강한 놈은 정력엔 왔단데.”
입맛을 다시던 야혼은 들고 있던 비홍사 머리를 선철영의 목으로 슬쩍 가져다 댔다. 처음 비홍사가 파고들었던 그 자리였다.
“먹을 게 많으니까 좀 오래있겠지?”
“비홍사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가 짐승의 심장이래요.”
비홍사가 들어간 그곳을 가만히 쳐다보던 양지가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치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말해달라는
표정으로.
그러나 야혼은 싱긋 미소만 지을 뿐 말없이 모옥을 나섰다.
잠시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선운청이 머무는 석실이었다.
고통을 참고 있는 듯, 잔뜩 핏발선 눈동자의 선운청이 느닷없는 방문자를 쳐다보았다. 이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죽여줄 수 있소?”
살기, 미약했지만 그의 몸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죽음의 기운이 풍겨 나왔기에 하는 말이었다. 좋은 일로 방문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죽기를 바라나?”
“자결할 정도로 모질지 못해서 지금껏 살았소. 어쩌면 형장 같은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렸는지도…….”
3년 전만 해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세상에 나서고 싶었다. 병 때문에 누리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 둘씩 여인들이 죽어나가자 생각이 달라졌다.
병 때문이라 자신을 합리화 시켰지만 가진 자의 변명일 뿐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과 살고 싶다는 욕망이 괴롭혀대는 시간을 지금껏 견뎌온 것이다.
“이젠 그만 끝내고 싶소이다.”
“한가지만 알고 가도록 하시오. 이 왼손은 말이오.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천벌을 받을 짓을 할 때만 사용했소. 지금껏 딱
두 번 사용했고.”
순식간에 염왕도를 뽑아든 야혼이 선운청을 향해 휘둘렀다.
“가자!”
막연한 눈으로 쳐다보는 양지의 정신을 깨우듯 차갑게 입을 뗀 야혼이 먼저 길을 잡았다.
“시시덕거리는 웃음 속에 숨겨진 본래의 모습이 저건가?”
야혼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양지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서로 죽이 맞는 이유가 있었다. 몸을 도배한 흉터만큼이나 사연이
많은 사람일 테다. 더하여 냉정한 사람이기도 했다.
선운청의 운명을 가엾이 여기면서도 일도(一刀)에 목을 잘라버렸다. 그를 살릴 수 있는 약을 가졌음에도 말이다.
“양지, 빨리 안 따라오고 뭐해? 마차가 걱정돼 죽겠구만.”
“이건 뚱띵이 아저씨가 들어야 되잖아요?”
야혼의 뒤통수에 대고 끙끙, 자루를 끌던 양지가 구시렁댔다.
“이년아 나는 하오대문의 문주야. 전에도 말했지만 문주가 짐을 들고 가는 그런 싸가지 없는 문파는 아직 강호에 없다. 너도
가끔가다 약 값 정도는 해야할 것 아냐.”
“헤고 자기가 더 좋아하면서.”
야혼이 평소처럼 무안을 주듯 말을 내뱉자 양지가 활달한 목소리로 대꾸하곤 재빨리 옆으로 다가서며 팔짱을 끼었다.
“뚱띵이 아저씨 빨리 가요. 아저씨 말마따나 마차를 너무 오래 비워둔 거 같아요.”
구지수의 시체를 동굴 속에 넣고 묻어버린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귀곡에서 멀어졌다.
4인의 죽음.
이른 봄, 어느 한 날 마두산(馬頭山) 귀곡(鬼谷)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69) - 나도 공무집행 중이야 임마(1)
나도 공무집행 중이야 임마.
화산(華山).
중원 대륙에서 가장 빼어난 5곳의 산을 가리켜 중원오악이라 칭하는데 그중 서악(西嶽)으로 불리는 산이다.
봄 한가운데로 들어선 화산은 절로 탄성이 흐를 정도로 아름다웠다.  울창한 숲을 이룬 수목과 기암괴석들이 아니더라도 함초롱
피어난 야생화 무리만으로도 오악의 하나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국에 소문난 명산이기에 특히 봄가을은 찾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명산 대첩을 찾아 호연지기를 기르고자 하는 무사들은
물론이고,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인묵객들마저 끊이지 않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오르는 화산이건만 오늘만큼은 뭔가가 달랐다.
화산을 오를 때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북편 옥천원(玉泉院)부터 시작하여 각 봉우리로 올라가는 모든 길목마다 형형한 눈빛의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한 사정은 서봉(西峯)인 연화봉(蓮花峯)까지 이어졌다. 자색도복을 입은 무인들, 오악사검(五嶽死劒) 감연청(甘然靑)을
필두로 개파이래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는 화산파 무인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평소 연화봉 주위만 경계하던 화산파 무인들이 온 산을 뒤덮었는지, 세인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분명
있는 것이다.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라.”
“대단하군……. 과연 속가 제일문파라 이건가?.”
탐스러운 수염의 노 도인이 창 밖을 쳐다보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밖에는 적어도 백 여명 이상의 화산파 제자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제자들을 독려하는 자의 목소리만 화산파 전역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결국 나 청운자가 오악사검에게 지고 말았어. 아니 무당파가…….”
놀라운 말이었다. 나직한 한숨을 토해내는 도사는 무당파 장문인인 태극검선 청운자였다. 매년 열리는 정파십문의 연례 회동에
참석하기 위해 화산파에 머물고 있었다.
10일간의 일정 중 9일이 지났고, 많은 현안을 처리했지만 가장 중요한 맹주에 대해선 아직 합의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신이 포기하는 쪽으로.
“세상에 밝힐 수 없는 자식이었지만 누구보다 그 아이를 사랑했다.”
청운자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가 맹주직을 포기하려는 이유는 바로 아들인 선운청 때문이었다. 동생인
선철영이 마두산으로 떠나며 말했다.
다시 올 때는 운청과 같이 와서 인사를 드리겠노라고. 그랬었는데……. 두 사람 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친아들과 동생이.
“만수문 놈들!”
선철영은 비홍사에 물려 죽었고, 아들인 선운청은 목이 잘렸다. 천륜을 거부하면서까지 살리려했던 아들이 죽었다.
무당의 무공을 유출하는 대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살리고자 하였던 아들이었는데. 20년, 아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세월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만수문의 부문주인 사왕(蛇王) 구지수(具知首) 짓이었다. 놈이 비홍사를 이용하여 동생을 죽이고 아들을
죽였다.
청운자의 선택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평생동안 햇빛 한번 보지 못한 아들과 그 아들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은 복수였다.
“문주님! 감 대협 오셨습니다.”
“그래, 안으로 모셔라.”
재빨리 얼굴 표정을 수습한 청운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시진만 있으면 볼 터인데…….”
자색 도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인물이 예를 취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날카로운 인상과 좌우로 치솟은 눈썹이 인상적인 이자가
화산파 문주인 오악사검 감연청이었다.
“모두 10장 밖으로 물러나거라!”
“응?”
감연청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잔뜩 굳어있는 청운자의 얼굴 때문이었다. 단순히 차나 한잔하려 나누려는 사람의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청운자 본인이 원해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청운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감연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철영이 죽었소이다. 아니 살해당했소이다.”
“선철영이라면…… 검선보의 보주 쌍극검(雙極劒)을 말하는겝니까?”
선철영을 되뇌던 감연청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선철영의 죽음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제 동생의 죽음을 장난으로
말하는 사람은 결코 없을 터이니. 사실임에 분명했다.
“세상에 어쩌다가.”
검선보라면 익히 잘 아는 곳이다. 아니 무림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검선보가 강해서라기보다는 검선보주의 신분 때문이었다. 무당파 현 장문인의 동생이 바로 선철영이었다. 더구나 검선보는
무당파의 안방이라 할 수 있는 호북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데 누가 그를 해쳤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사 호북이 아닌 다른 장소에 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감히 선철영에게 검을 들이댈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선철영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흉수는 찾으셨습니까?”
감연청이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청운자의 입에선 더욱 경악할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생뿐만 아니라, 태양신맥(太陽身脈)을 타고난 조카마저도 살해당했소이다. 이제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오.”
“세상에…….”
감연청의 입이 떡 벌어졌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선철영에게 스무살 된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처음이거니와, 그 아들이
태양신맥이란 절맥을 타고났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추스르고 청운자를 주시했다. 그가 따로 부른 이유를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저에게 원하는 게 있습니까?”
“복수를 해 주시오. 천의맹 맹주의 이름으로.”
“정말이십니까?”
전혀 예기치 못했던 청운자의 말에 부지불식간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복수를 위해 맹주직을 양보해 달라고 할 줄 알았었다.
그런데 청운자는 복수를 부탁하면서 천의맹 맹주의 이름으로 해달라니. 이건 맹주직을 넘기겠다는 말인 게다. 지난 5년간
양보하지 않았던 영광의 자리를.
“약속을 해 주시면, 오늘밤 감 대협은 천의맹 초대 맹주가 되실 겁니다.”
“좋소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흔쾌히 대답했다. 평생 한번 올까말까한 최고의 행운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약간의 부담이야 있겠지만 5년간 영광의
세월이 보장되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되지 않겠는가.
“흉수의 정체는 밝혀졌습니까?”
“만수문(萬獸門)이오. 구지수의 비홍사(飛紅蛇)를 확보했소이다.”
“으음!”
만수문이란 말에 감연청이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결정적인 증거를 가졌다지만 만수문는 마도련의 중심 축 중의 한곳이다.
함부로 무인들을 동원해서 없앨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 장문인께서 무슨 요구를 하셨는지 아십니까? 저의 집권이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소이다. 전쟁이 일어날 터이고, 함부로 맹주를 바꿀 수도 없겠지요. 하지만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구지수는
만수문의 부문주입니다. 그런 자가 무당인물을 살해했소이다.”
청운자의 몸에서 또 살기가 요동쳤다. 마도련 산하가 아니고, 홀로 떨어진 문파였다면 벌써 쳐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당파가 강하기는 하지만 마도련과 싸울 순 없는 일이었다.
청운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감연청이 나지막이 물었다.
“시신은 확보했습니까?”
“물론입니다. 썩지 않도록 보존해두었소이다.”
“알겠소이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요. 우선은 민산 마웅채를 칠 병력을 파견하겠습니다. 그 동안 일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연청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을 치르기에는 다소 이른 감이 없진 않지만 맹주직이 걸려 있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 밤 회의에서 청운자가 이 사실을 밝힌다면 오히려 자신이 불리해질 건 뻔했다.
차라리 그의 요구를 수용하고 맹주가 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고맙소이다. 우리 무당은 최선을 다해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운자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할 수만 있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제가 부탁을 드려야지요. 가십시다.”
고개를 숙인 청운자를 쳐다보던 감연청이 황급히 그를 말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흡족함이 가득했다. 청운자의 사정이
어찌되었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맹주, 100년만에 창설될 천의맹 초대 맹주직을 자신이 차지한 것이다.
다음날.
소림을 제외한 8파 1방의 합의에 의해 선출된 천의맹 맹주의 감연청의 첫 일성이 터졌다.
“친선의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절단을 해친 행위는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습니다. 진작에 천의맹이 창설되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늦었지만 우린 합의를 보았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엄벌로
다스리겠습니다. 천의맹 첫 업무는 마웅채 토벌입니다. 맹주 취임식은 1년 뒤 천의맹 개파대전과 함께 거행하겠습니다.”
각파 장문인을 향해 명령을 내리는 감연청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각파 장문인 대부분이 맹주취임식은 먼저 하는 게
낫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수많은 강호동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하게 취임식을 치러야 할 터였다.
“각 문파에서는 정예고수 30명씩을 민산으로 집합시켜 주시오. 마웅채를 토벌할 시기는 앞으로 한 달 뒤입니다.”
“마도련에는 통보하지 않을 겁니까?”
개방의 방주 홍면개(紅面丐) 철조양(鐵鳥陽)이 물었다.
“천의맹 고수들이 민산에 도착한 후에 통보할 겁니다. 협상은 없습니다. 천의맹 인물을 해친 대가는 목숨으로 보상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 천의맹 제일 율법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맹주님!”
9명의 인물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천의맹. 정파연합체인 그들의 행보는 무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단 한가지는 분명했다. 태웅과
추기영이 주인인 마웅채는 정파인들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파인들의 공격은 나중 일일뿐, 마웅채의 현실은 아니었다. 그들의 현실은 천의맹이 아니라 원 소속인 마도련이었다.
마웅채 총채주 집무실.
길다란 탁자 주위로 10명의 인물이 잔뜩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태웅과 추기영이 새로 개편한 마웅채 조직의
십부장들이었다.
“어디 초상이라도 났나! 왜 얼굴이 그 모양이야? 인상들 펴, 아직 죽지 않았잖아.”
십부장들의 얼굴을 면면히 살피던 태웅이 빽 고함을 질렀다. 산적 질을 할 때는 누구보다 신나 하던 놈들이 사건이 커지자
겁을 먹었는지 잔뜩 움츠려들었다.
“니미럴타불! 한번 죽지 두 번 죽는가, 지금껏 잘먹고 잘살았으면 됐지, 뭘 더 바랐나. 정 안 되면 각자 보따리 싸서
뜨자고. 안 그런가 낙선재 조장.”
추기영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건너편 턱수염에게 말했다. 사풍도 낙선재란 인물로 이곳 마웅채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은연중에
마웅채 무인들의 대표가 되곤 했다.
“채주 그렇게 되면 전부 쫓기다 죽습니다.”
낙선재가  곤혹스런 얼굴로 추기영을 향해 말했다. 처음 정파 사절단을 해칠 때만해도 수양표국의 복수 차원이었다. 또한
상인을 털었던 행동이야 원래부터 해오던 일이었기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사정이 바뀌어버렸다. 정파 사절단을 해쳤던 일에 대해선 책임 추궁을 당하는 실정이었고, 관(官)에선 산적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피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럼 무슨 방법이 있는가? 얼마 안 있으면 정파에서 우릴 잡겠다고 나설 터인데. 그전에 발라야 할 것 아닌가. 우리 죽는
거야 상관없지만 같이 사는 여자들을 생각해야지.”
태웅과 추기영이 총재주가 되면서 마웅채 독립을 위해 두 번째로 추진한 일이 바로 여자였다. 상인들을 털었던 돈으로 읍내에
나가 여자들을 사오기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절반 정도가 짝을 이뤄 생활하고 있었다.
“저기 총재주님.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답답하다는 듯 고함을 지르는 태웅을 향해 양대산이 말을 건넸다.
“말해보게 부채주. 무슨 방법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 추격을 못하게 하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살아날 방법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양대산의 말에 십부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지금 처한 상황은 완전한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마도련, 정파, 그리고 관(官)까지 사방이 전부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숨고자 하여도 숨을 곳이
없었다.
“무슨 수로 그들의 추격을 막는단 말인가? 이미 정파까지 출병했을 터인데.”
“다른 게 아니고 정파와 마도련을 같이 없애 버리는 겁니다.”
“멍청한 소릴. 우린 100명밖에 안 된다는 걸 잊었나? 정파나 마도련은 적어도 200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할 텐데.
차라리 절벽으로 가서 몸을 던지는 게 더 낫지, 이럴 시간 있으면 하루빨리 도망치는 게 나아! 우린 외통수에 걸린
거라고.”
“아닙니다 총채주님!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 민산에서는 가능합니다.”
양대산의 말에 동의를 표하고 나선 사람은 낙선재였다.
“설명해 보시오. 낙 조장.”
태웅이 시큰둥한 얼굴로 낙선재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도망가는 쪽에 무게를 둔 얼굴이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만일 이곳에서 정파와 마도련이 한 판 한다면 전쟁으로 이어질 공산이 큽니다.”
“오호! 그러니까 낙 조장의 말은 놈들이 전쟁한다고 지랄떨 때 우린 발라버리자 이거지, 그런 다음 몇 년 동안 잠수
타고?”
“그렇습니다. 언젠가 총채주님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장소가 있다고. 정파와 마도련이 싸울 때
그곳으로 몸을 피하면 어떨까 싶어서 말입니다.”
“아미타불! 물론 숨을 장소는 있기는 하네. 하지만 비밀이 새어나가면…….”
개봉에 있는 과거 하오문 자리에 관한 말이었다. 그리 큰 곳은 아니지만 적당히 개조만 한다면 백여 명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처음엔 이들을 개봉으로 끌고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당히 해먹고 이곳을 뜰 생각이었는데, 마웅채 인물들을 겪어보니 의외로 쓸만한 자들이 많았다.
같은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상당한 전력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계획을 변경했던 거였다. 또한 지금껏 했던 모든 일들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저질렀다고 보아야 옳았다.
물론 양대산은 정파 사절단을 공격한 시점부터 이미 태웅과 추기영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자들은 이곳에서 전부 정리하겠습니다. 부탁입니다 총채주님.”
필사적이었다. 자신들의 살길이 오직 태웅과 추기영에게 달려 있는 듯, 결사적으로 두 사람에게 매달렸다.
“지금 산 아래쪽에는 전 부채주 녀석과 마도련 인물들 20명이 와있다. 우리의 무공을 폐하고 마도련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조금 전 받은 전서구가 바로 그 내용이었소. 협조하면 우리 둘의 목숨과 무공은 보장한다고 했더군. 하지만 당신들을
믿겠소.”
“알겠습니다 총채주님! 당장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낙선재를 비롯한 십부장 모두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태웅과 추기영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정리하고자 마음이 바빴기
때문이다. 이미 죽느냐 사느냐 하는 도박은 시작되었고, 승자가 되어야 했다.
“아미타불! 겨우 해결했구먼.”
추기영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몇 달간에 걸친 노력의 대가가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작은 좋은데 몇 놈이나 개봉으로 갈지 그것도 의문이군.”
태웅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웅채 인물들에게 민산은 안방보다 더 편한 곳이긴 하지만, 정파나 마도련 무인들 또한 바보들이
아닌 이상 쉽게 속아넘어갈지 그것도 문제였다.
“너무 걱정 말게나 곰 시주. 우린 그저 꾸미기만 하면 되는 거야, 실패해도 손해날 것도 없고. 처음부터 거지였는데 뭐가
걱정인가. 계집 하나씩 건졌으면 그걸로 된 거지.”
“맞다. 씨팔! 무공에 계집까지 생겼으면 성공한 거니까. 그나저나 연장 그 새끼는 잘 있는지 모르겠다.”
추기영의 말에 이내 우려의 표정을 털어 버렸다. 어차피 없어도 그만인 인생이다. 실패한다 하더라도 본전인 인생들인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미타불! 잘 처먹고 잘 살고 있을 거네. 여전히 그 짓도 열심히 하고 있을 터이고. 아무 걱정 말게나. 성모봉에서
처먹은 정력제도 꽤 많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을라고. 그런데 비화는 말 좀 듣던가!”
“당연하지. 사부를 겁탈해버린다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게 짐승이지 어디 사람이냐? 인간이라면 절대 이 태웅을 거절해선 안
되지. 조금씩 여자가 되어 가는 중이다. 앞으로 한 두 달만 있으면 완전한 여자가 될 거다. 아직은 공부를 더 해야
할까봐. 연장 새끼 같으면 벌써 여자로 만들었을 텐데.”
태웅이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돈을 주고 여자를 샀을 때는 공부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는데 일반 여염집 여자도 아니고
머리 깍은 중을 여인으로 만드는 작업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미타불! 소승도 동감일세. 빨리 왔으면 좋겠네. 색경(色經)보고 공부 좀 하게.”
*   *   *
“아이고 귀야, 어떤 새끼들이 씹어대는 거야? 날도 더워죽겠구먼 웬 귀가 이리 가려워 .”
새끼손가락으로 연신 귀를 후벼파며 야혼이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주지현을 떠난 야혼과 양지는 사천 쪽으로 길을 잡았다.
고명지 때문이었다. 야혼이야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양지가 하도 사정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가는 길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마차가 지나가고 있는 진령(秦嶺)고개는 몹시 산세가 험했다. 더구나 습도가 높은 기후는 비대한 야혼을 더욱 짜증나게
하였다.
“원래 지은 죄가 많은 놈들은 귀가 가려운 거라고요. 밖에 시원한 바람 부는데 나오지 그래요.”
마차를 모는 양지 역시나 짜증스럽다는 듯 구시렁거렸다. 끝간데 없이 이어진 고개 때문이었다. 말에 채찍질을 해가며 한 고개
넘고 나면 또 한 고개가 기다렸고, 그곳을 넘고 나면 또 따른 고개가 앞을 막았다.
주변을 덮은 울창한 산림 탓에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수 없어 더욱 답답했다.
“그래 같이 가자. 자는 것도 지겹다.”
앞쪽에 달린 창문을 열어제친 야혼이 양지의 오른 편으로 몸을 날려 앉으며 고삐를 잡았다.
“어라? 어째 바람에 피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다? 너 벌써 달거리 하냐?”
양지의 하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야혼이 코를 킁킁거렸다.
“벌써 몇 달째 같이 다니는데 그것도 몰라요? 아직 멀었다고요. 피 냄샌 다른 데서 나잖아요.”
야혼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어올린 양지가 눈을 흘겼다. 정말이지 예의라고는 약에 쓰려해도 없는 사내였다. 달거리 때
서답으로 쓰라며 광목천을 사주지 않나, 다리 속곳이 있으면 새지 않는다며 그것까지 챙겨 주었다. 도대체 여자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그래? 이곳 진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네?”
언제 그랬냐는 듯 야혼이 예리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고삐 좀 잡아라.”
고삐를 넘긴 야혼이 자세를 바로 하더니 눈을 감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펼치는
천리지청술이었다.
“이곳에서 한바탕 벌어졌구먼?”
은은하게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 때 버렸던 비급이 이곳 진령산맥까지 온 것임에
분명했다.
“좋아, 더욱 미치게 만들어주마.”
자세를 푼 야혼이 재빨리 마차 안쪽으로 들어가 10여 권의 비급을 꺼내 품안에 집어넣었다.
“양지야 계속해서 달리고 있어라. 일 좀 보고 올게.”
“뚱띵이 아저씨! 혼자가면 어떡해, 같이 가요.”
“돈과 잠자리는 지켜야 될 것 아냐?”
“나쁜 놈들이라도 들이닥치면 어떡해요.”
“얘가? 임마 넌 무공의 고수야. 그동안 먹은 약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릴 하냐? 네 한 몸 정도는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고. 덤비는 놈이 있으면 눈감고 청사를 휘둘러 버려. 그리고 네 칼에 죽은 놈에게 미안하면 가슴속에 비급 한 권씩 넣어
줘. 팔아서 저승 갈 노자로 쓰라고”
“알았어요. 피 보는 건 싫은데…….”
투덜거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땐 이미 야혼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야혼의 말대로 마차는 지켜야했다. 안에 있는 돈도
돈이지만 두 사람의 유일한 잠자리인 마차를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 나타나겠지 뭐. 설마 길로 나오겠어? 이럇!”
야혼을 앞질러 가려고 서둘러 채찍을 휘둘렀다. 먼저 가서 기다리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70 )- 나도 공무집행 중이야 임마(2)
한편.
숲 속으로 들어선 야혼은 사방을 살피며 빠른 속도로 질주해나갔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격전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일 도에
잘린 듯한 노송들이며, 부서진 바위들, 그리고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빠른 경공으로 1각 정도를 나아갔을 때 싸우는 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산 속에 들어오니까 좀 시원해지네.”
편평한 바위를 발견한 야혼이 그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곤 콧구멍을 후벼파며 뒤쪽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안 그렇소 영감!”
“빌어먹을…….”
한 인물이 나직한 욕설을 뱉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모꼴 얼굴의 이 자(者)는 강호무림에서 경공술의 대가로 알려진
만리객(萬里客) 기세득(其世得)이란 인물이었다.
기세득이 원했던 비급은 다름 아닌 무적군림마보였다. 정사지간의 인물로 경공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지만 다른
무공은 일천했다.
그렇다하여 나이가 벌써 60인데 새로운 무공을 얻어 익힐 형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무적군림마보는 달랐다. 무적군림마보가
보법이란 데 그 이유가 있었다. 보법과 경공술은 거의 같은 원류를 가진 무공이라 별 어려움 없이 익힐 수 있다. 더구나
비급은 주인 없이 떠돌고 있다 하였다. 소문을 접하자마자 바로 비급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비급을 만져보지 못한 모양이외다. 근데 이름이 뭐요?”
노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야혼이 안 됐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곳 저곳에 많은
부상을 입었지만 특히 복부에 나있는 상처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해 보였다.
“잡아보기는 했네. 2각에 불과했지만. ”
기세득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만해도 참으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진령산맥에 도착하자마자 시체 한 구에서
비급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비급은 자신이 원하던 무공이 아니었다.
무적군림마보와 같이 떠돌고 있다하였던 혼세광마장이었던 것이다. 그 정도에 만족하고 떠났더라면…….
무적군림마보는 구경도 하지 못하고 무림인들에게 추격을 당했다. 자신의 경공을 믿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기세득이라하네. 남들은 나를 만리객이라 부르지. 왜 무덤이라도 만들어 주려는가?”
“그게 아니고…… 아직도 비급을 갖고 싶소?”
“무슨 말인가, 비급이라니…….”
기세득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덤이라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에 지금껏 사정 이야기를 했었는데 젊은 청년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나에게 비급이 몇 권 있거든. 어차피 죽을 거 아뇨. 댁을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지.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소만.”
“허억!”
죽음이 임박한 환자라는 사실도 잊고 기세득이 기절할 듯 비명을 질렀다.
젊은 청년이 품속에서 꺼내든 비급은 전부 5권이었다. 더하여 비급의 이름이라니. 이곳 진령산맥에 떠도는 비급이 아니었다.
무당파의 일대 검법인 듯한 복마청운검법(伏魔靑雲劒法), 아미파의 대마수미혜검(大魔須彌慧劒), 산동악가의
혈운마령창법(血雲魔靈槍法), 남궁세가의 제왕혈세검(帝王血世劒)이었다.
“너무 놀라지 마시오, 건강에 해롭소이다. 어이쿠, 또 피나온다. 이건 소림사의 무영각의 변신이
광혈무영각(狂血無影脚)이오.”
다시 피가 흘러내리는 기세득의 상처를 놀라듯 쳐다본 야혼이 지혈을 시켰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그 비급을 뿌려달라 이 말인가?”
“뭐, 싫음말고. 죽어 가는 놈들은 널렸을 텐데. 난 단지 당신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고 싶은 뿐이라고. 어차피 죽을 건데
남아 있는 놈들 신경 쓸 필요가 없잖소. 댁이 없어도 다 잘먹고 잘살 건데. 하지만 이 비급을 천하에 뿌려버리면…….”
“나를 기억할거라 이 말인가. 비급의 출처를 궁금해하면서?”
“당연하지 않겠소. 이 다섯 권의 비급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리게 될 테지. 만리객 기세득의 손에서 나온 비급이다 하면서
말이요.”
“이해할 수가 없군.”
야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섯 권의 비급, 무공을 익히는 무인들이라면 꿈에라도 갖기 원하는 보물들이다. 그런
비급을 강호 상에 풀어버리려 하고 있다. 본인이 전부 익혔을 리도 없을 터였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오. 나도 댁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까짓 종이쪼가리가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하실 테요?”
“쿡! 목숨을 걸고 왔지만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 다만 운이 좋아 얻어가길 바랐을 뿐.”
기세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령산맥에 들어와 있는 모든 무인들은 자신과 다를 바 없다.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곳에
온 무인은 아무도 없다. 단지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운이란 말엔 나도 동감이오. 소림사나 무당이 이 비급을 자신들 거라며 소유권 주장을 하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소. 운 좋은
놈이 익혀야지. 그 와중에 일어난 싸움은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나저나 어쩔 거요. 시간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이리 주게. 이것밖에 없는가?”
“일단은 그 정도면 되오. 다른 곳에도 풀어야 하니까.”
“클! 하하하! 프! 하하하!”
어깨를 으쓱대는 야혼을 쳐다보던 기세득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복수를 위해서인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5권의 비급으로 무림인들을 한껏 희롱하며 사라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녀석의 말대로 누가 비급을 차지하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가던, 자신의 몫이 아닌 것이다. 살아있는, 꿈을 꿀 수 있는
자들의 몫일 뿐이다.
“이름이 뭔가?”
“야혼이오. 야혼.”
“야혼, 좋구먼.”
야혼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기세득이 수풀 속으로 사라지며 고함을 질렀다.
“나 기세득에게 비급이 있다! 비급을 원하는 자는 나를 찾아라!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비급이…….”
“곧 뒈질 인간이 목소리는 우렁차군……. 자 움직여 볼…… 엥?”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던 야혼이 귀를 쫑긋했다.
“잘못 들었나?”
그러다 이내 고개를 흔들며 느긋하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야혼은 잘못 들었던 게 아니었다. 그와 10여장 떨어진 곳에서 숨죽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기다려라 5호!’
복면인들이었다. 검은 복면인 5명이 야혼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장! 저자는 하오밀문의 문주일 뿐입니다.”
“닥쳐라! 살행의 기본을 잊었나?”
수뇌로 보이는 자가 낮게 소리쳤다. 그랬다. 야혼을 뒤따르는 다섯 인물은 살인루에서 나온 살객(殺客)들이었다. 청부를
받자마자 바로 출발하여 주지현에 도착했으나 표적은 없었다.
무려 한 달 동안 마차를 감시하다 며칠 전에야 목표물을 발견했다. 상대의 무공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지금껏 뒤따랐으나
아직까지 특이할 만한 상황은 나오지 않았다.
“잊지 마라. 아무리 하찮은 인물이라 할지라도 방심하면 우리가 죽는다. 원칙을 지키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
“알겠소이다, 조장!”
“좋다, 가자! 내일이면 돌아갈 수 있다.”
스스슥!
야혼이 사라졌던 방향을 향해 복면인 5명이 쾌속하게 움직였다.
그 순간, 숲 속 깊숙이 들어와 있던 야혼은 이상한 상황에 휩쓸려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이봐! 이건 비급이 아니라니까? 어떤 새끼가 나에게 버리고 간 것이란 말이야.”
연신 몸을 피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야혼의 손엔 책이 한 권 들려 있으니 아무리 변명의 소리를 질러보아도 믿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 무인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비급을 내 놔라 이놈!”
창을 쥔 한 인물이 고함을 지르며 야혼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아이! 씨팔. 이건 방중비서란 말이야, 새끼들아.”
그랬다. 무림인 한 명이 도망가면서 던진 책은 춘서(春書)였다. 이미 봤던 책이었다면 미련 없이 던져버렸을 터이고 지금처럼
공격을 당하진 않았을 터였다. 문제는 얼떨결에 받아든 책이 처음 접하는 춘서였던 것이다.
품속에 있는 무공비급을 주었으면 주었지 춘서만큼은 줄 수가 없었다.
“멈춰!”
일행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야혼이 춘서를 들어올렸다. 더 접근하면 비급을 없애버리겠다는 엄포였다. 협박이 먹혔는지
결사적으로 접근해오던 무인들이 일순 멈춰 섰다. 하지만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무기들은 전부 야혼을 향한 채다.
“이놈 대신 이것들을 줄 테니까, 나 건들지 말라고.”
재빨리 품속에서 책을 꺼낸 야혼이 무인들을 향해 제목이 적힌 앞면을 내보이고는 5장 밖으로 던졌다. 전부가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비급의 제목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무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광혈무영각(狂血無影脚)이란 적힌 제목 때문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무공비급의 제목에는 결코 광혈무영각이 없었다. 당연이 조작된 비급이라 생각할 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자들에게 선수를 빼앗길까봐 더욱 살기를 흘리며 다가들었다.
“정말 미치겠네. 누구라도 좋으니까 가서 확인이나 해보란 말이다, 이 개자식들아.”
“감히 누굴 속이려고, 잔말말고 비급을 내놓아라!”
창을 가진 인물이 공격함과 동시에 다른 자들 또한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며 다가섰다.
찌익!
허리를 뒤로 젖혀 창을 피하는 순간 한 자루의 검이 야혼의 가슴팍을 스쳤고 춘서 몇 장이 찢겨나갔다.
“이런, 씨팔놈들! 이 피 같은 책을 찢어?”
표지를 비롯하여 3장 정도가 떨어져 나간 책을 내려다보던 야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내가 말했지. 건들지 말라고.”
몇 장이 떨어져 나간 책을 흔들어 보이던 야혼의 몸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금강철피공을 잔뜩 운기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후-욱!
거친 숨소리와 함께 야혼이 자세를 낮췄다. 오른 손을 앞으로 짚으며 고개를 바짝 세워 전방을 노려보는 그의 모습은 한 마리
검은 투견(鬪犬)을 연상시켰다.
“이런 개 같은 놈이!”
야혼의 모습에 낮은 실소를 흘린 사내가 창을 쭉 찔러 넣으며 빛살처럼 다가들었다.
“그래 나는 개다, 이 개자식아!”
짚고 있던 오른 손을 축으로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야혼이 힘차게 뒷발질을 했다.
퍼억!
“으아악!”
순식간에 턱이 날아가 버린 장한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졌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물구나무 선 상태에서 손을 튕긴
야혼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어 아래쪽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젖히며 200근의 체중을 실은 동체를 아래쪽을
향해 날렸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가슴부근까지, 한 순간에 절반으로 줄어버린 인물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러나 야혼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듯 몸을 둥글게 말더니 왼쪽을 향해 굴렸다.
야혼의 몸이 멈춘 곳은 처음 제지당했던 3인 앞이었다.
“놈! 비급…….”
후-욱!
또 한번의 거친 숨을 뱉어낸 야혼이 퉁기듯 몸을 펴며 머리를 쳐 올렸다. 그와 동시에 양손을 양쪽으로 내려 뻗었다.
빠직!
정면에 있던 자의 머리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양손 가득 잡혀있던 그것들을 힘차게 뽑아 올렸다.
“으아악, 아아악!”
순식간에 아랫도리 쪽이 벌겋게 변한 두 명의 장한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하의가
뚫리며 남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이 몽땅 뜯겨져 나간 것이었다.
“죽어랏!”
한 무더기 살점을 털어 내고 있는 야혼의 등을 향해 장한 한 명이 검과 함께 나아가며 힘차게 찔러 넣었다.
“잡았…….”
그러나 검을 찔러가던 무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비스듬히 몸을 돌린 야혼의 오른손이 뒤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손등에 가격 당한 장한의 얼굴이 뜯기듯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잠시 멈칫하던 야혼이 다시 무인들을 향해 돌진했다.
“저럴 수가…….”
미친 듯이 살수를 펼치는 야혼의 모습에 무인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광인(狂人)이었다. 분명 검으로 내려쳤건만 흔적이
없었다. 아니 있기는 있었다. 단지 입고 있는 두툼한 옷만 잘렸을 뿐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공격 방향이라도 예측할 수 있다면 피하기라도 할 터인데, 놈은 몸을 사리는 법이 없었다.
처음부터 피할 생각이 없는 듯 정면으로 다가서며 양손과 발을, 그리고 몸통을 사용했다.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야수처럼
새파란 광채를 발하는 눈으로 상대방을 찾아 다녔다.
“으아악!”
“그러게 저쪽에 있는 무공비급을 가져가라 했잖아. 노릴 걸 노려야지.”
마지막 한 놈을 몸통으로 찍어누른 야혼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씨팔! 옷만 찢어졌잖아? 이거 아까워서 어…….”
쉬이익!
등 쪽의 찢어진 곳을 확인하기 위해 한껏 고개를 돌리는 순간 위쪽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다가들었다.
살인루의 살객 중 한 명인 5호였다.
“생각보다 강하긴 하지만 이젠 끝이다 놈!”
지금껏 하오밀문의 문주란 자가 싸우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았다. 조장의 말을 듣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결정적인
순간의 암습이 아니라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였다.
하지만 지금의 한 수는 결코 실패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검이 나아가는 부분은 인간의 신체 중 가장 치명적인 사혈이라 할
수 있는 정수리, 즉 백회혈(百會穴)이다. 내공을 익힌 무인이 약간의 충격만 주어도 바로 죽음에 이른다. 그런 곳을 향해
12성, 전력을 다해 검을 찔러 넣고 있다. 5호가 자신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챙!
절반 정도 깊숙이 파고들거라 예상했던 검은 나아가지 않았다. 날카로운 쇳소리만 내며 활처럼 구부러졌을 뿐이다.
“쳐라!”
5호의 공격이 실패하였다고 느낀 조장이 일행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들이 노리는 곳 또한 치명적인 사혈이었다. 심지어는
야혼의 낭심을 향해 검을 찔러 가는 살수도 있었다.
후-욱!
“씨팔! 머리칼이…….”
낮게 소리를 지르며 두 팔을 들어올려 복면인의 머리를 틀어쥐었다.
“잘렸잖아 개새끼야!”
그리고 엇갈려 잡았던 양손을 획 돌리며 전방을 향해 사정없이 패대기쳤다.
“커억!”
패대기쳐진 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그자는 이미 아래쪽을 내려쳐질 때 목이 돌아가 숨을 거뒀고, 지금의
비명소리는 앞쪽에서 낭심을 노리고 달려들던 자가 동료의 발에 강타 당해 머리가 부서지며 지르는 비명이었다.
“이런……!”
1호인 조장이 당혹스런 신음을 질렀다. 바로 눈앞에 있던 자의 등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커억!”
허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정신이 아뜩해져 내지른 소리였다. 5호의 몸을 패대기친 반동을 이용하여 몸을 띄운 야혼이
재주를 넘듯 뒤쪽으로 돌아 내리며 두 다리로 1호의 허리를 감아버린 것이었다.
그 다음 동작은 더욱 신속했다. 두 팔을 땅으로 짚으며 활처럼 구부린 상태에서 1호의 허리를 감고있던 다리를 앞쪽으로
당겼다.
퍼억!
비릿한 혈향과 함께 1호의 머리가 땅속으로 박혔다. 거구의 몸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야혼의 몸은 유연했다. 1호의 몸을
거꾸로 박아버린 야혼의 신형은 그 반동으로 다시 솟구쳐 올랐다.
간발의 차로 두 자루의 검을 흘려보내며 이번엔 전과 반대로 재주를 넘었다.
퍼억! 파악!
목표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린 두 복면의 면상에 두 개의 곰 발바닥이 파고들었다.
“씨팔! 괜히 힘썼잖아?”
주변을 휘이 둘러본 야혼이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애초에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리객에게 했던 것처럼 적당히 죽어 가는
자에게 비급을 맡기려는 의도였는데 공연한 시비에 휘말려들었다.
“그래도 일은 하고 가야지. 여기에 비급이 있다, 잡아라!”
내공을 가득 실어 외친 야혼이 버렸던 비급들을 가져와 죽어있는 자들 주변으로 던지며 몸을 빼냈다.
“근데 복면인들은 뭐지?”
관도(官道)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리던 야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의 행동으로 보건대 결코 비급을 노린 자들이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살수였던 것이다.
“하기야 지은 죄가 많으니……. 한 놈만 살릴걸 그랬나? 또 오겠지 뭐.”
이내 살수들의 흔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청부를 받아 자신을 없애려 왔다면 또 다시 오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얘가 먼저 갔나, 왜 이리 안보여?”
아무리 둘러보아도 마차가 눈에 들어오지 않자 더욱 속도를 높이며 전방을 주시했다.
“이건 제 마차가 아니라니까요?”
1각 정도 몸을 날렸을 때 양지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주변으로 서너 명의 인물이 서 있었는데 그들을 향해
내지르는 소리였다.
“어이구, 저놈은?”
마차를 포위하듯 서 있는 자들의 얼굴을 확인한 야혼이 인상을 찌푸렸다. 상주 객잔에서 만났던 악운보 일행이었다.
“뭐야! 얘들은…… 아는 사람이냐?”
“아! 아저씨!”
야혼을 발견한 양지가 살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와는 반대로 나머지 인물들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너느, 하오무의 무주…….”
야혼을 알아본 악운보가 온몸에 살기를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빠져나간 10개의 이 때문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바람 새는 소리만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멈추게 내가 말하겠네.”
악운보를 가로막은 사마웅풍이 야혼을 향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마차를 사고 싶다. 값은 원하는 대로 주겠다.”
“원하는 대로?”
“그래 원하는 대로 불러봐라.”
“현금으로 100만냥. 한푼도 못 깎아 준다.”
네 사람을 흘낏 쳐다본 야혼이 단숨에 말을 토해냈다. 두 사람의 부상자가 있었다. 남자의 부상은 심각해 보이진 않았지만
여자 하나는 몹시 심각한 상태였다. 걷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허!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게냐?”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은 사마웅풍이 고함을 내질렀다.
“똑똑한지 알았는데 아니구먼. 가자 양지야.”
피식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사마웅풍의 어깨를 밀치며 마차로 향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짓이냐?”
“몰라, 임마! 그리고 내가 100만냥을 불렀다는 말은 안 판다는 의미야. 그러니까 여기서 시간 죽이지 말고 딴데가서
알아봐.”
“죽고 싶은 모양이군. 감히 금의위(錦衣衛) 진무사(鎭撫使)를 우롱하다니. 지금 네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아느냐?”
사마웅풍의 몸에서 미약한 살기가 흘렀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군자검(君子劒) 사마웅풍(司馬雄風)하면 강호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정계 권력의 최 정점에 있는 금의위 도독의 장자이고 관직 또한 도독 바로 아래인 진무사였다.
대개의 무림인들은 신분을 밝히기도 전에 알은체를 하며 도울 일을 찾는데 앞에 있는 이 자는 전혀 아니었다.
마차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팔아라 하는데도 신청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반말까지.
“죄?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 마차를 팔아라 해서 나는 못 팔겠다고 했다. 그게 무슨 죄냔 말이야?”
“공무집행 방해죄지. 진무사는 말이다, 공무상 필요할 때면 얼마든지 백성의 소유물을 징발할 수 있다. 방해하면, 즉결처분도
가능하고.”
챙!
사마웅풍이 살기를 흘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거야 일반 백성들에게나 해당하는 일이지. 나는 일반 백성이 아니거든. 양지야!”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나지막이 양지를 불렀다.
“여기요.”
“으음!”
사마웅풍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양지가 내민 둥근 패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금의위와 숙적관계라 할 수 있는
동창의 명패. 그것도 가장 호적수인 첩형 고명지임을 나타내는 신표였다.
“우리도 공무수행 중이야. 됐나?”
“쿡! 고명지의 개였더냐? 하지만 내가 너보다 상관이란 걸 알아야지.”
“쯧! 공부를 덜했구나. 아무리 상관이라 하더라도 공무수행 중일 때는 간섭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모르나? 오히려 도와야
한다고 되어있을 텐데……. 네가 동창의 일을 방해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질까.”
“금의위 도독.”
금의위 도독이란 양지의 말이 결정타였다. 두 사람을 향해 살기를 뿌리던 사마웅풍이 얼굴을 흠칫 굳혔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동창 수반인 위금충에 약점 잡히는 일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모든 면에서 밀리고 있는
부친이 아닌가. 분하지만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대협! 영호세가의 장자 영호풍이 부탁드립니다. 동생을 구해주십시오.”
사마웅풍에겐 더 이상 기댈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여인을 부축하고 있던 사내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영호풍이라
하였다. 풍운선(風雲扇) 영호풍(令狐風), 악운보 일행인 남매는 섬서 영호세가의 여식이었던 것이다.
“푸제!”
영호풍의 돌연한 행동에 깜짝 놀란 악운보가 말이 새어나가는 것도 아랑곳없이 그를 불렀다. 하오문의 문주라는 자를 향해
무릎을 꿇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형님! 자존심보다 화연이 생명이 더 중합니다.”
“그거 나도 마차가지네, 자네보다 내가 더하며 더해지…… 하지만.”
“호오! 저 여인을 사랑하나 보군.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기 위해 마차가 필요했나? 좋다 그럼 기회를 주마. 나에게 빚을
갚으면 저 여인을 마차에 태워주겠다.”
“시키는 대로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영호풍이 더욱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동생인 영호화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정과 치료였다. 경공을 이용해 빨리 갈 수도
있지만 몸에 충격을 줄 것 같아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마차에 침대만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시비가 일지도 않았을
터였다.
“당신 말고 저놈 말이야. 수양객잔에서 내가 3대 맞았거든. 그 빚을 지금 갚으라고 해. 그럼 당신 동생이 살아날지도
모르지.”
일순 악운보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이미 맞아보았기에 놈의 주먹맛을 알고 있었다. 단 한방으로 이 10개를 가져간 놈이
아니던가.
“형님!”
영호풍이 간절한 눈빛으로 악운보를 불렀다.
‘빌어먹을…….’
내심 욕설을 뱉어낸 악운보가 기식이 엄연한 영호화연을 쳐다보았다. 사랑하는 여인, 그녀만이 자신의 짝이 될 거라 믿었던
여인이 그녀였다. 그런데, 왜 망설여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정 사랑했다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나서야 하건만.
“정략결혼이구먼? 두 사람은 타시오.”
“멈춰라! 내가, 내가 업고 가겠다.”
“미친놈, 네가 하늘을 나는 재주라도 있냐?”
악운보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야혼이 마차에 발을 올렸다.
“이럇!”
영호화연을 침대에 눕힌 것을 확인한 야혼이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뿌연 먼지를 남기며 멀어지는 마차를 쳐다보는 두 패배자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넘실댔다.
비천한 하오문의 문주라는 자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차라리, 무공을 겨루어 패했다면 이렇게 분하진 않을 터였다.
본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상아로 만들어진 명패하나였다. 고명지의 이름과 동창 제일 첩형이라 적힌 손바닥만한 신분증명서.
“두고봐라 고명지, 반드시 이 치욕은 갚아주마. 네 년을 비롯하여 저 곰 같은 놈을 능지처참하고 말 것이다. 이 사마웅풍의
목을 걸고 약속한다.”
“으아아! 죽이고 만다. 죽이고 만단 말이다.”
불끈 주먹을 쥐고 살기를 흘리는 사마웅풍과는 달리, 속절없이 정혼녀를 보내버린 악운보는 풀숲을 향해 광폭한 고함을 지르며
벽력창을 휘둘렀다.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표출이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71)- 이제 공평해졌다, 한 가지만 빼고(1)
“뚱띵이 아저씨.”
“왜, 임마.”
“저기 저 동생 있잖아요? 버티기 힘들겠는데?”
“그게 다 팔자소관인데 별수 있냐? 죽어야 한다면 그럴밖에.”
마차 안을 힐끗 쳐다본 야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자잖아요.”
“여자? 그게 목숨하고 무슨 상관 있냐? 저승사자가 남자니까 한 번 주면 안 데리고 갈까봐? 너 몰랐구나. 저승사자 놈들은
전부 고자야. 고자가 아니라면 미인박명이란 말이 왜 생겼겠냐.”
“화연아! 화연아! 정신차려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아저씨!”
“그만 좀 불러 임마. 너 같으면 살 맘이 나겠냐? 지금껏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새끼는 배신 때렸지. 나 같이 거지같은
새끼에게 빌다시피 해서 마차를 얻어 탔으니. 내가 저년, 아니 저 낭자 입장이라도 죽고 싶겠다. 신경 꺼, 우리랑은 다른
사람이니까.”
“이거 하나만 쓸게요.”
“임마, 그건 네 엄마 거잖아.”
“이파리 하난데 뭐. 엄마도 하나만 있으면 되요.”
날름 혀를 내민 양지가 품속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어머니 보약에 쓰라며 야혼이 주었던 천년빙련이었다.
투명한 이파리 하나를 뜯어낸 양지가 재빨리 안쪽으로 들어가 영호화연의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추궁과혈(推宮過穴)!”
양지의 모습을 가만히 살피던 영호풍이 경악한 얼굴로 부르짖었다. 추궁과혈, 진기(眞氣)로 환자의 혈도에 충격을 주어 부상을
치료하는 일명 기치료라 부르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시전자 자체도 내공소모가 상당히 심해, 가족 친지가 아니면 결코 펼치지
않는 치료법의 하나였다. 그런 추궁과혈을 시전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영호풍을 더욱 놀라게 했던 사실은 추궁과혈을 시전하는 양지의 손이 동생의 몸에 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허공을 격하여 몸에 충격을 주고 있다는 말이었다. 기절할 노릇이었다. 자신은 감히 상당도 하지 못한 무공을 자연스럽게
펼치고 있었다.
“허억!”
더욱 놀라운 광경에 영호풍이 나직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동생의 몸이 허공으로 불쑥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이번엔 허공섭물(虛空攝物)의 무공이었다. 조그마한 돌멩이를 가져오는 것 정도는 자신 또한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지가 들어올린 대상은 인간이다. 80근에 달하는 동생을 들어올린 것도 모자라 그 상태에서 추궁과혈을 시전하다니.
양지의 엄청난 내공에 기가 막혔다. 절세의 고수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은 상대도 되지 않는 그런
고수를.
“휴-우!”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 닦아내며 양지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한 숨 자고 나면 일어날 거예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호풍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거의 죽음직전에서 동생이 살아났다. 악운보가 하찮은 자들이라 무시하던 그들에 의해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뚱띵이 아저씨 말대로 이것도 팔자라면 팔자겠지요. 몸조리나 잘 시키세요.”
영호풍을 향해 싱긋 미소지은 양지가 다시 마부 석으로 건너갔다. 남을 돕는다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즐거웠던 양지의 기분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소성이 야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만 냥이니까 개봉 하오대문으로 보내주시오.”
“아저씨!”
“이년아! 남을 돕는다는 것도 쉽게 생각하면 안돼.”
“무슨 소리예요?”
“빚이 되거든. 특히 우리 같은 천한 것들이 주는 도움은 말이다. 평생 잊혀지지 않고 짐이 되는 거야. 마음의 짐이.”
“그러니까 아저씨 말은 돈을 지불하면 그런 마음이 덜어진다 이 말이에요?”
“의원에게 치료받고 돈 지불하는 것과 같은 거지.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그 당시에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영원히 기억하지는
않는다.”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당연하지. 만일 네가 돈을 받지 않으면 평생 니 못생긴 쌍판 떠올려야 할 것 아냐. 저들에게 그런 괴로움을 줄 필요가
없지.”
“우씨! 이 얼굴이 어때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양지가 야혼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었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가장 무거운 짐은 마음의 빚이라는 야혼의 말은 수궁이 갔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호풍 아저씨,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 동생의 공력이 10년 정도 올라갔으니까 손해는 없을 거예요.”
“아닙니다. 양지 소저. 꼭 보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말했던 그 마음의 짐,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서 깨닫는 점이 많았다. 지금껏 전혀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경험도,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질 정도로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과거를 떠올리면 그렇게 살았던 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야혼이란 사람의 말처럼 돈으로
대가를 지불했다. 그리곤 잊어버렸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향해 영호풍이 고개를 숙였다.
“이랏!”
갑자기 야혼이 고삐를 휘두르며 급하게 마차를 몰았다.
저 멀리 먼지를 날리며 달려가는 마차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써있냐?”
“구룡표국(九龍鏢局)요.”
몸을 날려 마차를 확인하고 온 양지가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구룡표국? 잘됐네. 마침 보낼게 있었는데……. 그럼 이 길로 가면 한성(漢城)에 도착하는 모양이구나? ”
구룡표국이란 양지의 말에 야혼이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잔잔한 미소, 살소인지 아니면 그냥 웃는 것인지, 모호한
웃음이었다.
“혹시 한성에 공운산장(空運山莊)이란 곳도 있소?”
“아, 예! 한성에서 가장 큰 세력을 꼽으라면 단연 구룡표국과 공운산장입니다. 구룡표국은 종남파(終南派)에서 운영하는
표국입니다.”
난데없는 야혼의 물음에 흠칫 놀란 영호풍이 구룡표국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했다. 종남파에서 운영한다는 말을 굳이 했던 이유는
표물의 안전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실패하면 몇 배로 보상해 주는 거요?”
“네?”
영호풍이 화들짝 놀라며 야혼을 쳐다보았다. 역사가 30년 된 구룡표국이지만 지금껏 표물(鏢物) 운송에 실패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야혼은 그런 상황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3배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3배라? 그만큼 안전하다는 말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야 문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런데 무슨…….”
“아 별 것 아닙니다. 동창으로 들어가는 뇌물정도로만 알고 계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영호풍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단순한 표물이 아니고 뇌물이라는데 더 이상 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뚱띵이 아저씨. 첩형 언니가 기다린단 말이에요. 뭉그적거릴 시간 없어요.’
“걱정 마라. 물건만 보내고 바로 사천으로 가자. 물론 네가 수고 좀 해야겠지만.”
양지를 향해 싱긋 미소를 던졌다.
다음날 저녁 무렵.
주렁주렁 촌스런 주렴을 매단 사두마차가 한성으로 들어섰다.
“고마웠습니다, 야 문주! 이 돈은 반드시 개봉에 전해주도록 하겠습니다.”
“공연한 수고를 끼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포권을 취하는 남매를 향해 야혼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 편에 상자 안에 들어있던 돈을 개봉으로 보내려는 것이었다.
만 냥의 돈을 합하면 전부 5만냥이 될 터이고, 하오대문의 건물을 짓는데 쓰이게 될 터였다.
“그럼!”
“고마워요. 양지언니!”
야혼과 양지를 향해 감사의 눈빛을 보내던 두 사람이 마차에 올랐다. 한성 역시 섬서성의 한 곳이었기에 영호세가의 지부가
있었다.
그곳을 통해 장안 본가로 갈 예정인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일을 해야지. 3일 후에 보자.”
“한가지 약속하면 갈게요.”
“또 뭘!”
“사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하루에 한 번씩!”
“너?”
“첩형 언니 만나면 더 이상 못하잖아요.”
“일이나 해 임마! 어린것이 벌써부터 그러면 뼈 삭는다.”
“아저씬 15살 때부터 했다며. 나는 한참 늦었구먼.”
“빨리 안가?”
“약속했다.”
야혼을 향해 혀를 내민 양지가 공운산장(空運山莊)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3일 후.
주렁주렁 촌스런 주렴을 매단 마차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성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 달라진
점이 있었다. 굴러가는 마차자국이 과거에 비해 다소 희미하게 찍힌다는 것이었다.
물론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마차가 가벼워졌다는 건만은 사실이었다.
“아저씨! 비급 값 전부 얼마 쳐주기로 했어요?”
한 바탕 진탕하게 일을 치른 뒤, 잔뜩 땀에 절은 양지가 야혼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10만 냥.”
“그럼 30만 냥 벌었네?”
“그거야 네가 얼마나 잘 해주었느냐에 달렸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공운산장 장주라는 놈을 확실하게 녹여버렸으니까요.”
“몸으로?”
“아니, 아직은 그럴 맘 없어요. 꿀물이 놈이나 개로 바뀌면 몰라도. 가져간 비급 있잖아요. 그걸 그놈에게 줘버렸지 뭐.”
그랬다. 한성(漢城)에서 야혼과 양지는 상자 안에 있는 모든 비급을 강호 상에 풀어버릴 일을 꾸몄던 것이다.
성공여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일단 종남파에서 운영한다는 구룡표국에 비급을 맡기고 공운산장을 비롯하여 주변에 은밀하게
소문을 흘리는 선에서 마무리짓는다는 계획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무림인들이 알아서 할 터였다. 표물을 훔치고자 한다면 복면을
쓰고 달려들 테고, 종남파가 무서우면 무사히 동창으로 운송될 것이다.
물론 고명지의 비밀 가옥으로 말이다. 만일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동창을 통해 다시 강호 상에 풀면 그만인 것이다.
“아저씨! 왜 이리 가슴은 안 크지?”
손으로 양 가슴을 싸쥐며 양지가 투덜댔다.
“왜 또 갑자기 가슴? 열심히 먹고 있잖아.”
“하긴 열심히 먹는 수밖에. 참, 아저씨 고기 사왔죠? 어차피 고기 먹을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텐데……. 고기 말하니까
배고프네? 우리 이곳에서 밥이나 먹고 가요. 고기도 구워먹고. 하룻밤 묵어가기는 최고라고요.”
양지가 밖을 쳐다보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녀 말대로 마차가 멈춘 곳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울창한 산림 사이에 조그마한
호수가 있어 몸을 씻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더구나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까지. 유람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최고의 날이 될법한 아름다운 밤이었다.
“나 씻을 동안에 아저씬 고기 구울 준비나 하세요.”
“자주 사 먹일걸 그랬네.”
발가벗은 채 호수로 뛰어가는 양지를 쳐다보며 야혼이 빙긋이 웃었다. 고기, 물론 자신이야 도살장에서 일을 했기에 원하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지만 양지처럼 살아온 애들은 고기라면 눈부터 빛낼 것이다.
1년 가야 한 두 번 구경할까 말까한 음식이 바로 고기였다. 그것도 돼지고기라면 모를까 쇠고기는 생각도 못한다.
아니 쇠고기를 조금 얻어 국이라도 끓일라치면 처음 맡아보는 노린내 때문에 비위가 뒤틀려 쉬이 손이 가지 않는다. 그게 바로
양지처럼 커온 아이들의 현실이었다.
이제는 먹고싶을 때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여전히 비싼 음식, 함부로 먹지 못한 음식으로 인식되어 있기에 객잔에서도 쉽게
주문하지 못한 음식이 소고기였다.
사실 쇠고기를 사러갔던 이유도 양지 때문은 아니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정육점에 들러 강호에 나온 뒤 처음으로
도백철추(屠白鐵鎚)를 사용했는데 놀라운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소림을 제외한 8파1방이 천의맹이란 단체를 결성했고, 화산파 문주가
초대맹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아울러 천의맹 첫 업무는 민산의 마웅채 정벌로 결정되었으며 각 문파 무인들이 민산근처로 모여들고 있다는 정보였다. 그
외에도 많은 정보를 얻었다.
“민산(岷山) 마웅채(魔雄寨)라. 그곳도 재미있겠군…….”
마웅채에 대한 정보를 듣고는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마도련과 천의맹에서 동시에 공격을 당할 입장에 처해 있었던 것이었다.
마도련은 사절단을 해친 책임을 물어 그들을 잡으려하고, 천의맹은 복수라는 미명하에 맹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그들을 없애려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사면초가에 몰린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령패왕과 주육마승이라 했던가? 미련하기는 곰 새끼와 보현보살하고 똑같아.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 건 말이야. 아니
그들보다는 나은  건가?”
“뚱띵이 아저씨 뭐해요. 들어와 몸부터 씻어요. 빨래하게, 요도도 가져오고.”
“저것은 지치지도 않나. 그렇게 해대고도…….”
몸을 일으켜 마차를 나선 야혼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휘영청 달이 걸린 반대쪽, 멀리 민산이 있는 서쪽하늘을.
*   *   *
야혼이 쳐다보는 민산(岷山)은 전례 없이 괴괴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웅채라는 도적들이 횡행하기 시작하면서 민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지금은 단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마웅채를 토벌하기 위해 각 문파로부터 출발한 무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 민산 제일 봉인 촛대봉이 올려다 보이는 주변으로 10여 개의 천막이 세워졌다.
사천에 적을 두고 있는 아미파(峨嵋派), 점창파(點蒼派), 청성파(靑城派) 무인들이었다.
새로이 창설된 천의맹으로부터 마웅채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지 상당시간이 지났지만 원활하지 못한 지위체계 때문인지 일의
진행은 더디었다.
우선은 천의맹에서 근무할 제자들을 뽑아야 했고, 그들 중에서 토벌대를 구성해야 했기에 빠른 진행이 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청해나 감숙성에서 출발한 곤륜파(崑崙派)와 공동파(崆峒派)는 15일 정도를 더 기다려야 할 참이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천막 어디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점창파 무인들이 기거하는 맨 오른쪽 천막이었다.
청성파 무인인 분광검(分光劒) 좌비영(左飛英)과 아미파파(峨嵋婆婆) 육난설(陸蘭雪)을 맞이하는 이 사람은 점창파의
점창일수(點蒼一手) 석천(石千)이었다. 아울러 이곳 대자평(大字坪)에 가장 먼저 천막을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아직 화산파에선 나오지 않았습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육난설이 차갑게 말했다. 사천과 감숙성의 경계지점에 있는 민산은 섬서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고 맹주령과
함께 출발했다면 화산파도 벌써 도착했어야 했다.
“토벌대 대주가 화산파의 연화검(蓮花劒) 송인상(宋仁相) 대협 아닙니까. 첫 출정인데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요.
파파(婆婆)가 이해하십시오.”
석천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내심 섭섭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신을 세우기 위함이라 하지만 각 문파가 합심하여
처음 하는 일인데 대주가 먼저 와 기다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더구나 자신들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아닌가. 한데
화산파에서는 조직 구성이 늦어진다는 전서구만 날아왔을 뿐이었다.
“쯧쯧!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거늘. 그래 마도련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지막이 혀를 찬 좌비영이 마도련 근황을 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도련 측에서 이번 정파의 공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도 200정도가 출발했다는 전갈입니다. 먼저 거령패왕과 주육마승을 설득하러 갔던 인물들이 전부 살해당했다는군요.”
“스스로 처리하겠다 이 말이군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마도련의 명령 없이 이루어진 일이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우리보다 먼저
그들을 잡아야 하니까요.”
“그럴 순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놈들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배후를 캐고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마도련에.”
육난설의 몸에서 살기가 끓어 넘쳤다. 제자 둘을 동시에 잃고 자신만 살아남았다. 그 아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도
거령패왕과 주육마승의 목을 따야만 했다.
“그럼 마도련 인물들의 도착 일정도 곤륜파와 비슷하겠습니다 그려.”
“그렇습니다. 좌 대협! 실은 그 점이 가장 걱정입니다.”
“대주가 알아서 잘 처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면 될 터이고요.”
‘아직은 아닌가?’
육난설과 좌비영의 모습을 쳐다보던 석천이 내심 중얼거렸다. 이제 갓 출범한 천의맹은 아직 넘어야할 산이 많았다. 지휘체계에
대한 불만이 은연중에 붉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최고라 생각하며 살았던 100년의 세월은 무인들의 성격을
편협하게 만들어 버렸다.
자파 존장들 외에 타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만 우리가 희생양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석천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또 있었다.
*   *   *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72)- 이제 공평해졌다, 한 가지만 빼고(2)
“멍청한 놈! 그들은 희생양일 뿐이야.”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쪽에 8개씩, 전부 16개의 금환(金環)을 차고 있는 여인,
사천에서 합류한 고명지였다.
그녀의 판단 역시 석천(石千)과 같았다. 천의맹 맹주로 추대된 감연청에게 가장 필요한 사항은 맹의 결집력이다.
“감연청이 할 수 있는 수단은 한가지밖에 없다. 마웅채를 치러보낸 그들이 죽어주는 거지.”
“그러니까 네 말은 그 놈들이 씨몰살을 당하면 9파 새끼들이 겁을 집어먹고 감연청인가 하는 놈에게 찰싹 달라붙는다 이
말이지?”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놈! 감히 동창 제일 첩형에게 너라니.”
고명지의 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벼르고 별렀던 놈인데 막상 만나고 나니 생각보다 살심(殺心)이 생기지 않았다. 해서
잔뜩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중인데 반말을 하면서 더욱 자극하고 있다.
“나에게 존댓말 듣고 싶으면 네 년도 말 올려. 그럼 나도 한다. 난 말이다. 사내새끼나 계집년이나 전부 같다고 보거든?
너처럼 신분 높은 것들이 똥을 안 싼다거나, 이슬만 처먹고 산다면 말을 올려주마.”
챙!
“한마디만 더 지껄여봐라!”
순식간에 검을 뽑아 야혼의 목 앞에 들이민 고명지가 진한 살기를 쏟아냈다.
그러나.
“너는 살수 있을까?”
목에 차가운 검이 닿아있음에도 야혼은 태연했다. 외려 오른 손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고명지를 향해 느끼한 눈빛을 보냈다.
“호! 이 검이 네 놈의 비계덩어리를 뚫지 못할 거라 보는 게냐?”
“아니? 목을 뚫고 나올 수도 있겠지. 그놈은 보검이니까. 하지만 네 년의 얼굴도 벌집이 된다. 같이 죽는다는 거지.”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내뻗고 있던 오른손의 팔 소매를 슬쩍 걷어올렸다. 혈신월(血新月), 마안혈정으로 만들었다는 죽음의
암기가 붉은 광채를 뿌리며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첩형 언니! 그 무공 사사만화류라는 십전수 무공이래요.”
“으음!”
밖에서 들려온 양지의 목소리에 고명지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십전수, 겁천십웅의 일 인이었던 그의 무공을 야혼이 익혔다는
말이었다.
“금환신공(金環神功)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금환신공정도를 가지고 잘난체 하지 마라. 강호 상에 굴러다니는
게 겁천십웅 무공이니까.”
금환신공(金環神功), 겁천십웅의 일인이었던 금환신존(金環神尊)의 무공이었다. 18개의 금빛 광채가 날면 태양이
스러진다하였던 그 금환이 고명지의 팔목에 장신구처럼 끼워져 있었다.
“그중 가장 약한 게 바로 너야. 이 장난감 치워!”
“훗! 기고만장한 이유가 뭔가 했더니, 구약종의 무공 때문이었군.”
“첩형 언니! 뚱띵이 아저씬 염왕도(閻王刀)도 가지고 있어요.”
“조용히 못해! 도대체 넌 누구편이야?”
염왕도란 말에 급기야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겁천십웅의 무공을 두 가지씩이나 익혔다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극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의 무공을 익힌 것만 못하지 않은가.
문제는 태을건곤심법과 염왕도법이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내공심법에서는 겁천십웅 누구도 따르지 못했다 하였던
태을건곤심법과 가장 강력한 무공인 염왕도법이 합쳐졌다면 과거보다 더 강한 무공으로 태어날 터였다. 그 때문이었다. 질투,
하잘 것 없는 개봉의 파락호가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혔다는 데에 대한 질시였다.
“그녀들을 만나봤나?”
그러나 이내 표정을 다잡은 고명지가 야혼을 향해 물었다. 그녀 또한 강호 상에 출현한 겁천십웅의 무공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극성으로 익혔다. 법현 그놈은 10성 수준이라 했고.”
“넌?”
“나? 몰라, 원해서 익힌 것도 아니고……. 아! 강해지긴 강해졌다. 아직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던 야혼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공이 얼마나 강해졌느냐에 대해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관심을
갖는 건.
“한번 할 때마다 서너 번씩 하면서 만족스럽지 않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저씨.”
양지의 말대로 정력뿐이었다. 언제나 관심을 두고 관찰하는 몸의 변화는 무공의 증가가 아닌 얼마나 오래 견디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대상은 양지였지만.
“니 년한테도 밀리잖아!”
“그거야 나도 내공으로 밀어붙이니까 그렇지요.”
“허!”
어이없다는 듯 고명지가 입을 떡 벌렸다. 처음 양지를 만났을 때 그녀의 내공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보다 더 놀라웠다.
무공 경지 정도를 정력의 세기로 판단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더하여 관계를 가질 때 내공을 이용한다는 말이 아닌가.
괴물 같다는 생각에 야혼과 양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쓸데없는데 신경 끄고, 이제 말해봐라. 한번 줄 것도 아니면서 날 따라온 이유가 뭔지.”
심각한 얼굴을 한 야혼이 고명지를 향해 물었다. 고명지가 이곳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명교 때문이라 하기엔
이유가 너무 빈약했다.
“너에게 일을 좀 시키려고 한다.”
“일을 시켜? 그러니까 부탁이 아니고 명령을 하겠단 말이냐? 이 비천한 놈에게?”
“말 잘했다. 동창 제일 첩형이 너 같은 비천한 놈에게 부탁을 할 수 있겠느냐? 명령을 해야지.”
“네가 아직 상황파악을 못했구나. 비천하단 말은 내가 쓸 때만 어울리는 말이야, 남들이 사용하면 큰일나. 더구나 날 두고
그런 말을 했다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아주 무서운 말이다. 모르고 했으니까 이번만은 용서해준다. 그건 그렇고 무슨
부탁인데.”
“상황파악은 네가 못하는 거 같구나. 지금 네가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냐. 특히 동창 대인을 사칭한 죄는
중죄야 중죄.”
야혼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고명지가 으르듯 말했다. 그동안 양지의 보고서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가는 곳마다 자신의
이름인 고명지를 들먹이며 사기를 치고 다녔다.
물론 명패를 내준 자신의 잘못이 컸지만, 일반 양민으로선 감히 생각지도 못할 그런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다닌 놈이
야혼이었다.
“나를 잡아야 죄를 묻던지 하지. 나를 잡겠다고 동창무인을 풀려고? 밥값도 안나오는 그런 짓을 왜하냐? 뭐 굳이 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으마. 나야 밥줄은 확실하게 있으니까.”
“뚱띵이 아저씨! 뭘 그렇게 뜸을 드려요. 일 치고 나선 한동안 잠수 탄다고 했잖아요. 그동안 첩형 언니나 도와주면
되겠구먼.”
보다못한 양지가 고함을 빽 질렀다. 얻어낼 것도 없으면서 공연히 고명지를 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용해 이년아! 넌 도대체 누구편이냐?”
“저번에 말했잖아요. 양지는 양다리라고. 이럇!”
야혼의 고함소리에 혀를 쑤욱 내민 양지가 재빨리 채찍을 휘둘렀다.
“좋다.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이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주겠다.”
고명지가 얼굴을 슬쩍 붉혔다. 그가 내건 조건이라면 듣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무공을 익히기 전이나 지금이나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건 여자였다. 조건이라 해봐야 ‘한번 줘!’ 가 분명할 터였다.
위금충에게 돌아가기 전까지 정상적인 관계를 즐기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 침대에서 내려와. 그곳은 전에도 내 자리였고, 앞으로도 내 자리야.”
“……?”
“못 알아들었어? 그 침대에서 나오는 게 조건이라고.”
“아-알았다.”
‘나쁜 새끼!’
얼굴이 잔뜩 붉어진 고명지가 황급히 일어났다. ‘한번 줘!’가 아닌 내 침대라니,  저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킥! 하여간 뚱띵이 아저씬……. 이제 하루만 더 가면 민산(岷山)이네요.”
양지가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야혼의 말은 양지에게 있어서도 의외였다. 그녀 또한 고명지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근데 비가 올 것 같아요.”
미소를 짓던 양지가 하늘을 쳐다보며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침대에서 내려와! 야혼이 했던 말을 속으로 되뇌며.
*   *   *
쏴아악!
야혼 일행이 있는 곳은 하늘만 잔뜩 찌푸렸지만 민산은 비가 내렸다. 앞을 가릴 정도의 장대비가 무섭게 퍼부었다.
“씨팔! 저 새끼 정력은 3년이 지나도 그대로네.”
“니미럴타불! 그대로가 아니라 더 세졌네.”
태웅과 추기영이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3년 전 십만대산, 그때처럼 엄청난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숫제 하늘에
구멍이 난 듯했다.
“총채주님! 정파 놈들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온몸에 위장용 나뭇가지를 꼽은 양대산이 다가오며 고개를 숙였다.
“낙 조장은?”
“50명을 데리고 건너편 영마봉(靈魔峯)에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태웅의 작전은 간단했다. 지금 머무는 촛대봉과 바로 전면 건너편에 있는 영마봉에 산채(山寨)를 만들어 정파인들과 마도련을
동시에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알았다. 먼저 가서 기다려라. 곧 따라가마.”
“알겠습니다.”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인 양대산이 서둘러 몸을 날렸다.
“육승 잘해라.”
양대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태웅이 입을 뗐다.
“걱정 마시게 거패시주. 저 아래 보이는 협곡으로 밀어 넣으면 끝나는 일 아닌가.”
추기영이 촛대봉과 영마봉사이에 있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검은 협곡을 가리켰다. 10여장 폭을 가진 바닥은 온통 날카로운
바윗돌들로 뒤덮여 있었다. 더하여 양쪽은 절벽으로 가로막혀 한번 들어가면 적어도 이틀은 걸려야 빠져 나올 수 있다.
지옥같이 험한 곳이라 하여 명부협(冥府峽)이라 불리는 그곳이 태웅과 추기영이 선택한 적의 마지막을 장식할 장소였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임마!”
“물론 그것도 잘 알고 있다네. 질 것 같으면 바로 비연과 비화만 데리고 발라버리자 이말 아닌가. 걱정 마시게 그동안 제일
열심히 연마했던 무공이 경공술이니까. 그럼 수고하시게, 아미타불!”
태웅을 향해 합장을 한 추기영이 영마봉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틀 후까지 결판이 나지 않으면 미련 없이 이곳을 뜨기로
하였던 것이었다.
“무림인들과 싸움은 어떨지 모르겠네.”
부웅!
허공을 향해 미첨도를 휘둘러본 태웅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쏴아아!
쏟아지는 장대비를 해치며 일단의 무리가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마웅채를 토벌하기 위해 나선 정파인들이었다.
원래 문파 소속 그대로 9개의 조로 나뉜 정파인들은 점창파 무인을 선두로 하여 각 조별로 20장의 간격을 두고 뒤따르고
있었다.
“파파 얼마나 가야합니까?”
점창일수 석천이 시야를 가리는 비를 훔치며 앞서가는 아미파파를 불렀다. 마웅채가 인물들이 출몰했던 지역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아미파파가 일행을 이끌고 있었던 거였다.
“하룻길입니다. 저녁나절이나 되어야 도착할 겝니다.”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굳이 공격을 감행할 필요가 있는지.”
떠나기 전에 가졌던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 가장 늦게 나타난 연화검 송인상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발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명분은 그럴싸했다. 천의맹이 결성된 후 첫 임무인데, 비 때문에 미루게 된다면 세인들의 비웃음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송인상의 말이 틀리진 않았지만,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겠습니까. 마도련 인물들이 도착했다는데 서둘러야 할밖에 방법이 없질 않습니까. 이게 다 송 대협 때문입니다. 가까운
화산파에서 곤륜파보다 더 늦게 오다니 말이 됩니까?”
육난설의 입에서 불평불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주라고…….”
“정지!”
육난설의 말을 끊은 석천이 손을 들어올렸다. 흐릿했지만 전방 수풀들이 흔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가 있습니까?”
석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육난설이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외다. 바람에 흔들렸나 봅니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한순간 흔들렸던 나뭇가지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석천이 보았던 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태웅을 비롯한 마웅채 인물들이 은신해 있었다.
‘양대산 목표는 가장 앞에 있는 두 년놈이다. 한 대씩만 날리고 무조건 몸을 뺀다.’
온통 나뭇가지로 위장한 태웅이 양대산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존명!’
태웅의 전음을 받은 양대산이 주변의 부하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이곳에 있는 마웅채 인물들은 전부 10명이었다.
‘준비하라!’
양대산에게 전음을 보낸 태웅이 강궁의 시위를 힘차게 당겼다. 오늘을 위해 활쏘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제법 능란하게 궁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이다!”
“와와!”
거친 고함을 지르며 마웅채 무인들이 벌떡 일어나 시위를 당겼다.
“매복이닷! 방어대형으로!”
해쓱하게 변한 육난설과 석천이 수중의 검을 뽑아들며 고함을 질렀다.
“이야합!”
두 사람의 검이 빗살처럼 움직였다. 전방에서 날아오는 10여 대의 화살이 전부 육난설과 석천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생각보다……’
순간의 기습이라 하였지만 자신들은 십대문파 한곳에서 수위권에 드는 무인들, 별로 위력적이라 할 것도 없는 화살은 크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허억!”
다소 풀어진 마음으로 화살을 쳐내는 순간 귀전을 강타하는 강렬한 소리에 헛바람을 삼켰다.
화살이었다. 엄청난 힘을 가진 화살이 어느새 가슴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검으로는 다른 화살을 쳐내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더하여 내공마저 이미 끌어올린 상태인지라 몸을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커억!”
두 사람의 비명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석천과 육난설의 심장에 깃털만 남긴 화살이 꼽혔던 것이다.
육난설과 석천이 속한 선두만 당한 게 아니었다. 기습을 당한 다섯 조에서 두 사람씩의 사망자가 생겨났던 거였다.
하지만, 기습은 이제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마웅채 인물들의 기습에 질겁한 정파 군웅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몸을 날렸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비 때문이었다.
손가락 굵기의 장대비 소리 때문에 화살 날아오는 소리가 묻혀버렸다. 빗방울을 뚫고 날아온 몇 대의 화살을 막아내면 마지막
한 대가 심장에 박혀들었다. 더욱 환장할 노릇은 적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 번의 공격을 끝내면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웅채가 있다는 촛대봉으로 다가갈수록 정파인들의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촛대봉 아래쪽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천막을 세우고 일행을 잠시 쉬게 하였으나 송인상의 얼굴은 어두웠다.
서두르기는 했지만 순간을 틈탄 공격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단한 놈들이군. 한낮에 기습을 가하다니.”
송인상이 나직한 침음성을 발했다. 사실 이번 기습 공격은 자신들이 허를 찔린 꼴이었다. 첫 기습공격에서 15명이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철저히 경계를 하며 왔기에 5명에 그쳤지만 상대의 대담함에 놀라고 말았다. 더구나 큰 손실은 이곳의 지리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육난설이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9파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라지만 너무 희생이…….”
“으악! 적이닷!”
“빌어먹을…….”
흠칫 굳어진 송인상이 검을 챙겨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수십 명의 검은 인형들이 무차별하게 정파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야심한 밤이 아닌 이제 막 어두워졌을 뿐인데 공격을 가해온 것이었다.
“아아악! 으악!”
“저자가 거령패왕?”
미첨도를 휘두르는 거대한 체구의 인물을 발견한 송인상이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침입해온 적 중 단연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공격 방법도 특이했다. 왼손을 슬쩍 내미는 듯 하더니 이어 미첨도를 휘두르는데 정파 무인들이 맥없이 쓰러져갔다.
“멈춰랏!”
“퇴각하라!”
송인상의 고함소리와 동시에 태웅의 입에서도 후퇴명령이 터져 나왔다. 마웅채 인물들의 행동은 신속했다. 정파 무인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던 자는 뽑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마치 썰물이 빠지듯 일순간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뭣들 하고 있는가 쫓아라!”
가장 선구로 나선 송인상이 무인들을 독려하며 몸을 날렸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몇 명이 살아 남았는지 자신들이 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한 채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마웅채 무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정지!”
결국 견디다 못한 송인상이 먼저 멈췄다. 더 이상 따를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적은 민산의 지리를 훤하게 꿰뚫고
있는데 자신들은 초행이란 게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낮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사방을 둘러본 송인상이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확 트인 평원, 장대비는 쏟아지는데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숲으로 간다.”
몸을 돌려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이동했으나 평원보다는 조금 나아졌을 뿐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오늘밤만 견뎌라. 내일은 총 공격을 감행해서 끝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날아 밝았을 때 주변을 확인한 송인상은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마웅채가 있다는 촛대봉이 아스라이
보였다. 간밤에 적을 쫓아 이동한 거리가 생각보다 엄청났던 것이다.
촛대봉까지 가는 데만 해도 반나절은 족히 걸릴 듯 싶었다.
‘오늘은 무조건 끝낸다.’
생각보다 많은 희생에 당혹스러웠다. 화산파에서 세워온 애초의 계획은 절반 정도를 이곳에서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화산파
문주인 천의맹 맹주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어 선택한 방법이었다. 해서 마도련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인데.
마도련 인물은 만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60여명의 부하들을 잃고 말았다. 상당수 적을 없애기는 했지만 정파 군웅들이 당한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어쩔수…….”
쉬익! 슈우욱!
“적이닷!”
“쫓아라!”
다시 이어지는 화살 공격에 정파 군웅들이 몸을 날렸다. 하루동안 겪었던 기습공격에, 이제는 어지간히 익숙해졌는지 대응하는
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적 또한 어제와 달랐다. 전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화살 공격을 가하며 몸을 빼곤 했던 것이다. 다시 전날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적을 쫓아 달리는 정파 군웅들과 도망치는 마웅채 인물들.
끊임없이 화살 공격을 퍼부으며 정파 군웅들을 피해 다녔다. 또 다시 20여명의 무인들이 당했고 죽어나간 적은 5명에
불과했다.
“얼마 안 남았다.!”
멀리 보이는 적의 뒷모습을 보며 송인상이 고함을 질렀다.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졌지만 이번에는 놓칠 수 없었다. 적 또한
지쳤는지 어제처럼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힘을 내라, 저곳으로 몰아넣으면 끝난다.”
좁은 계곡을 발견한 송인상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양쪽이 절벽으로 막혀 있는 곳이기에 도망칠 곳은 한 방향밖에
없다.
더하여 지금껏 자신들을 괴롭혔던 매복도 있을 수 없는 지형이었다. 이틀간 벌인 추격전의 끝이 바로 코앞에 와 있었다.
“송 도우!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달려가던 무당파의 영풍진인이 송인상을 돌아보며 말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꼭 유인 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었다.
“저는 오히려 이곳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매복할 장소가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승부를 결하지 못하면 어제와 오늘 같은
일이 반복될 터이고 우린 전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쫓아라!”
확고한 얼굴로 말한 송인상이 무서운 속도로 전방을 향해 치고 나갔다.
“무량수불! 아무래도 저 절벽이…….”
깎아지르는 듯한 거대한 절벽을 쳐다보며 영풍진인이 나직한 도호를 읊조렸다.
“준비들 하세요.”
영풍진인이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던 절벽 위에서 뾰족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밤송이처럼 뾰족뾰족한 머리 모양을 한 여인, 아미파파의 제자였다가 태웅의 첩이 된 비화(琵花)였다. 재빠른 동작으로
움직이며 여인들을 독려했다. 이번 마웅채 일은 여인이라 하여 숨어있을 수가 없었다.
50명에 달하는 모든 여인들이 비를 맞으며 남편들을 맞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비연(琵蓮)언니 준비 됐어요.”
“알았어! 전부 줄을 내리세요.”
비연의 명령에 따라 전부 100여 개의 밧줄이 일제히 내려뜨려졌다. 명부협(冥府峽)안으로 들어올 마웅채 무인들을 끌어올리기
위한 밧줄이었다.
“사부님 용서하세요.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저기 있는 여인들 때문입니다.”
밧줄을 내리던 비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시 절로 돌아가는 걸 포기한지 오래였다. 결코 자신을 유리한 남자를 용서한 게 아니었다. 그녀를 속세로 돌아서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팔려온 50명의 여인들이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여인들, 그녀들이 자신과 비화를 향해
주모(主母)라 부르며 따랐던 것이었다.
차마 불쌍한 여인들을 버릴 수 없었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랴하였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저 경전 속의 말로만
알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야할 사람이 자신들이었다.
“아미타불! 수고했네, 비연(琵蓮)!”
“오셨습니까!”
밧줄을 타고 올라온 추기영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수없이 싸움을 했는지 그의 몸에서 피 냄새가 진동했다.
“미안하네, 희생이 많았네.”
우울한 목소리로 추기영이 말했다. 그가 맡았던 50명 대부분은 이런저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마도련 산하에 있던
마웅채이다보니 민산의 지리를 알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뿌리치기 위해 죽어간 부하들은 제법 많았다. 25명,
마도련을 유인하기 위해 떠났던 50명 중 살아 돌아온 수였다.
이윽고 태웅 일행까지 올라오자 밧줄이 올려졌다.
“저들을 보살펴야겠습니다.”
울음을 터트리는 여인들을 발견한 비연이 서둘러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밧줄을 타고 올라오는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여인들이었다.
“아미타불! 너무 희생이 컸네.”
“복수를 해야지!”
치열하게 얽혀있는 두 세력을 쳐다보던 태웅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내렸다. 일이 잘못되면 그냥 도망치겠다고 하였던
애초의 결심은 어디로 버렸는지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양대산!”
“네! 총재주님!”
“지금 당장 떠나라. 행선지는 개봉 하오대문이다. 그곳에 가서 태웅과 추기영이 보냈다고 하면 될 거다.”
“총채주님!”
“아미타불! 그렇게 하시게. 복수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네.”
뎅! 뎅뎅뎅!
추기영의 철탁에서 은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주파멸음이 아닌 순순한 추기영의 마음으로 치는 목탁소리였다.
“같이 안 가실 건가요?”
“저놈들은 나와 같이 갈 겁니다. 제수씨!”
“연장?”
태웅과 추기영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 놈의 목소리였다. 3년 전 헤어졌던 야혼이 바로 뒤에 와
있었다.
“너?”
야혼의 모습을 발견한 태웅과 추기영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없었다. 표범처럼 탄탄한 근육의 몸을 가진 야혼은 없고
비대한 돼지 한 마리가 이편을 보고 웃고 있는 것이었다.
“3년 만인가. 안 죽고 살아있으니까 만나는구나. 반갑다, 새끼들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여호치를 따라 꿈을 찾아갔던 그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왜 마웅채의 두목이 되어 마도련이나 정파와
싸우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죽지 않고 다시 만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일행들과 간단하게 수인사를 나눈 야혼이 아래쪽을 노려보았다.
이어 양지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양지야 너도 저들을 따라 가거라. 가서 무공을 가르치거라. 네 머릿속에 있는 것 전부.”
“?”
“걱정 마라 임마! 한 1년 정도 잠수 탔다 돌아갈 테니까.”
“그럼 뚱띵이 아저씨 옷을 누가 꿰매요. 날이면 날마다 찢어져서 돌아올텐데…….”
“앞으론 조심해야지, 뭐. 아니 아예 옷 벗어 놓고 싸울게.”
양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이내 옷을 벗어 한쪽으로 내려두더니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곰 떨어진다-!”
“저런, 미친 놈!”
야혼의 모습을 쳐다보던 태웅과 추기영이 고함을 지르며 밧줄을 내렸다. 아직 아래쪽에는 1무인들 100여명이 뒤섞여 싸우고
있는데 그 속으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더구나 절벽 높이는 무려 40장이나 되는 곳이었으니.
“하여간 저 인간 옷 벗는데는 선수야 선수.”
야혼의 모습을 쳐다보던 양지가 한쪽에 내팽개쳐진 옷을 개키며 중얼거렸다.
“비화, 비연소자라 했죠. 저 양지라고 해요. 앞으로 언니라 부르세요. 이미 조는 짜두었을 테고, 그만 떠나요. 이곳에
있어봐야 못 볼 것만 보게 될 테니. 첩형 언니, 저 가요.”
고명지를 향해 생긋 미소를 날린 양지가 일행을 이끌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간단한 이별이었다.
모두들 떠나고 고명지 그녀만 아래쪽에서 일어나는 살육의 목격자가 되었다. 미친 짐승 세 마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동체가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었고, 붉은 광채가 빛날 때마다 비명이 따랐다.
한번의 철탁이 울리면 비명이 흘렀고, 두 번의 철탁이 울리면 머리가 터져나갔다. 무음의 패천마영권이 사방에 작렬했다. 소리
없는 죽음이 연이어 터졌다.
3인의 모습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양지가 서둘러 자리를 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 사람 중
가장 잔인한 사람이 바로 야혼이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제대로 몸을 보존한 시체는 없었다.
그렇게 날이 지고 새벽이 왔다. 명부협, 이름 그대로 지옥의 골짜기로 변한 협곡에는 오직 3인만 아침을 맞았다. 야혼,
태웅, 추기영, 수천구신체를 타고났다는 세 사람만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씨팔! 생긴 것은 공평하게 변했는데, 연장은 더 실해졌다, 새끼야.”싸우다 속곳마저 찢겨 나가버렸는지 덜렁거리는 물건을
내놓고 있는 야혼을 향해 태웅이 소리를 질렀다.
“그럼 새끼야, 살이 찌면 몸만 찌겠냐? 그곳도 찌지. 고명지! 옷이나 던져라!”
그로부터 며칠 후.
청해성 청장고원 입구를 가로막고 세워진 거대한 도시에 4인의 방문자가 있었다.
마도련(魔道聯).
철마문(鐵魔門), 사황문(邪皇門), 만수문(萬獸門), 요화문(妖花門), 만독문(萬毒門). 중원 마도(魔道)에서 가장
강하다는 5곳의 문파가 연합하여 창설한 단체, 마도인들이 꿈의 성지라며 찬양하는, 천하 마도의 종주인 마도련이 바로
이곳이었다.
“어떻게 오셨소.”
3장에 높이에 달하는 정문을 질린다는 듯 쳐다보는 사인을 향해 정문 경비무사가 다가서며 물었다.
“나? 빚 받으러 왔다. 3년 전의 빚.”
조그마한 자루를 둘러맨 비대한 체구의 인형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미친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
퍼억!
뎅! 딱! 딱딱딱! 뎅!
“까는 소리하지 말고 느그 대장한테 전해, 새끼야. 빚 받으러 오셨다고.”
*     *     *
여기까지가 3권 분량입니다. 7월 1일부터 시작한 연참을 이번 회를 끝으로 마치겠습니다. 귀면탈 마감과 하오대문 1,2권
수정 등 산재한 일로 인하여 당분간 작업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연재 또한 다시 하게될지조차 확정적으로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연재를 하도록 노력은 하겠습니다.
그동안 하오대문에 많은 관심을 쏟아주고 격려해주신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 올립니다.
나한 드림.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81) - 색즉시색(色卽是色)(1)
연재에 대해.
아직은 4권을 시작할 시기가 아닌데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1,2권의 반응을 보고 스토리를 진행해야 하는데..
귀면탈과 하오대문을 두고 새로운 글을 시작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끝까지 간다는 장담은 못하지만 일단 시작하겠습니다.
색즉시색(色卽是色).
오직 칼로 말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무림(武林). 100년전, 성모척살대로 떠났던 무인들의 비급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근원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비급이 연일 주인을 바꾸었고, 주인이 바뀔 때마다 차가운 시신들이 남았다.
여전히 강호에선 비급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민산 마웅채에서 벌어진 두 세력간의 충돌은, 강호 무림을 새로운
정국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새롭게 창설된 천의맹과 마도련 소속 무인의 충돌과 그리고 양패구상.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애초에 두 세력의
출병이 서로를 겨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림정세를 읽을 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본인들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일어난 이번 일을 두 세력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마치 무엇인가 터지기를 기다리듯.
그러나, 세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천의맹과 마도련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외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그러한 모습은 마도련 정문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야혼 일행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미친 놈! 여기가 서대시전인 줄 아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경비무사를 노려보고 있는 야혼의 귓전에 고명지의 이죽거림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빚 받으러 왔어도 절차를 지켜라 이 말인데. 그 따위로 해서 빚을 받을 수 있겠냐? 모름지기 채권자란 말이다,
초장부터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그건 연작시주 말이 맞소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돈 빌려서 안 갚으면 구천지옥에 떨어진다 하셨오.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돈을 받아내야 하오이다. 불을 확 싸질러서라도 반드시 구제해야만 합니다. 아미타불!”
경비무사를 쳐다보며 싱긋 미소를 머금은 추기영이 가볍게 철탁을 두드렸다.
따-악!
“크으윽!”
경비무사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단지 목탁을 한번 두드렸을 뿐인데 머릿속이 멍해지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만둬, 임마!”
어이없다는 듯, 세 사람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발끈 고함을 질렀다. 중원 마도 제1세력인 마도련 정문에서 련주를 만나겠다고
생떼를 쓰다니. 이건 무식한 건지 상식이 없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여긴 출입하는 사람 신분 정도만 확인하는 곳이다. 안쪽에 보고도 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랬다. 마도련 성문은 두 개로 나뉘어진다. 일명 외성이라 불리는 곳의 성문은, 내성에 볼일이 있는 장사치나, 내성에
들기를 원하는 무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단순한 통로였다.
“그래? 진작 좀 말해주지.”
고개를 끄덕인 야혼이 아직 쓰러져 있는 경비무사를 향해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새끼야, 나는 좆도 아니라고 말해야지, 목에 힘을 잔뜩 주니까 대단한 놈인 줄 착각했잖아. 이건 순전히 너하고 말을
안 해준 저년 때문이니까 너무 억울해 하지 마라. 내가 니 마음까지 읽을 순 없잖아?”
경비무사의 볼을 툭툭 친 야혼이 정문을 통과하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 너……?”
황당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는 고명지의 귓전에 더욱 기막힌 말이 들려왔다.
“이런 건물 첨 봤냐? 시골서 상경한 촌년처럼 행동하지 말고 빨리 가자!”
“아미타불! 그러기도 하겠다. 저 것 좀 보게, 서대시전에 비하면 이곳은 완전히 천국이구먼, 그랴!”
눈앞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건물들을 쳐다보며 추기영이 맞장구를 쳤다. 그 뿐만 아니었다. 태웅 또한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량한 마을이거니 했던 마도련은 서대시전보다 더 화려했다. 서대시전에선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2, 3층 높이의 고급
건물들이 길을 따라 빼곡이 늘어서 있었다.
“촌놈들, 이따위를 보고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뭐가 어째?”
잔뜩 얼굴이 붉어진 고명지가 3인을 쳐다보며 씩씩거렸다.
“근데 삐까번쩍한 외양에 비해 사람은 없네. 마두(魔頭)들이 사는 곳이라 그런가?”
촌놈처럼 주변을 두리번대던 야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루나 주루가 주로 밤 영업을 하는 곳이라지만 너무 한산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보행자를 빼고는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허! 너 정말 몰라서 그런 거냐?”
“그럼 이곳에 개미새끼 하나 없는 게 연작시주 때문이란 말입니까? 첩형 시주?”
“그럼 강호에 무공비급 60권을 풀어놓았는데 이곳에 올 사람이 있겠냐?”
그랬다. 사실 마도련 초입에 만들어진 마을은 청해성 최고의 소비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파와는 달리 마도련의 각
문파는 신분여하를 가리지 않고, 무인들을 영입하곤 하였다.
즉 그들에게 실력만 인정받으면 마도련 무사가 되곤 했던 거였다. 정파에 가입하지 못한 많은 무인들이 이곳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무인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무인들의 발걸음이 끊긴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었다. 마도련에 가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 전쟁은 물 건너갔네?”
고명지의 말을 듣던 야혼이 발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60권의 비급이면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해주리라 여겼었다.
더구나 마웅채 사건까지 있었으면 전쟁준비에 광분해야 할 터인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도련은 조용하기만 했다.
“연장아, 전쟁은 우리 셋이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것처럼 간단하게 아니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고 그것들을 전부
해결해야만, 비로소 전쟁이 시작되는 거다. 더구나 천의맹은 9문파의 연합체이고 이곳 마도련은 5문파의 연합체 아니냐.”
“그 정도는 나도 알지. 하지만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 몇이냐. 수양표국, 구룡표국, 마웅채 그리고 비급까지, 그 정도면
혀를 깨물고 한판 해야하는 거 아냐?”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시작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
“시기라니? 날도 따시겠다, 전쟁을 하기엔 왔다 아니냐.”
“이래가지고 하오대문을 잘도 만들겠다. 한가지만 대답해 봐라! 개봉에 하오대문 건물은 왜 세우는 거냐?”
한심 한다는 듯 혀를 차던 고명지가 따지듯 물었다.
“이 년이 날 뭘로 보고. 천의맹 새끼들이 늦장 부리는 건 나도 안다고. 100년 만에 처음 맹주가 되었는데 뽀대나는
집에서 취임식을 하고 싶겠지. 또 한꺼번에 모아놓고 명령도 내리고 싶을 테고. 내가 궁금해하는 건 여기, 바로 이곳에 살고
있는 마두새끼들이란 말이다.”
“너 이 자식……. 그만두자 그만 둬.”
년이란 야혼의 말에 표독스럽게 변했던 고명지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 딴에는 최고의 찬사의 말이 년이라는데
욕을 할 수도 없었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할 놈도 아니고 차라리 무시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이 곳 역시 천의맹과 마찬가지다. 마도련의 가장 중요한 행사가 시작되고 있다. 들어가자 일단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오자 갑자기 시장기가 도는 듯했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선유객잔(仙遊客棧)이란 간판이 내걸린 객잔으로
들어갔다.
길거리와 마찬가지로 객잔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손님이라 해봐야 네 사람이 전부였다.
주인에게 간단한 식사를 주문한 고명지가 일행을 향해 나직하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도련(魔道聯)의 기원은 300년 겁천십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겁천십웅의 일 인이었던 철혈마존(鐵血魔尊)
모군상(某窘相)과 독마존(毒魔尊) 서음래(徐陰來)이 손잡고 창시한 문파가 마도련이었다.
그들 두 사람이 이곳에 마도 단체를 만들자 그 당시 겁천십웅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던 사황문과 만수문 그리고 요화문이
가세하여 명실공히 마도 최대단체로 거듭난 것이었다.
“원래 철혈마존의 검법은 철혈무적검법이라 불리었다. 하지만 겁천십웅간의 비무에서 패했지. 그때부터 철혈검법(鐵血劒法)이라
이름을 바꾸게 된다. 실제 그가 이 마도련을 창설한 이유도 바로 한번의 패배 때문이었다.”
무림사에 내려오길 그때의 비무를 패천십비(覇天十比)라 하였다. 겁천십웅의 비무에 참석한 자(者)는 본인들을 제외한 단 한
명이었다.
잠사옹(潛邪翁)이란 인물로 훗날 겁천십웅의 비무 결과를 강호에 퍼뜨린 장본인이었다.
ᅳ겁천십웅의 1위는 지옥마제다. 하지만 그 또한 다른 9웅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실력은 아니다. 겁천십웅 전원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승부는 반 초 차이로 갈렸다. 다시 한번 비무를 한다면 얼마든지 순위가 바뀔 수 있다.
그 당시 잠사옹이 남긴 말이었다.
“가만 그럼 그 잠사옹인가 하는 놈은 겁천십웅의 무공을 전부 알고 있겠네?”
“겁천십웅의 무공이 애들 장난이냐? 한번 본다고 기억하게? 그리고 익혔다면 진작 나타났겠지, 벌써 300년이 지나지
않았냐.”
그녀 또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300년 동안 나타나지 않은 자가 아닌가. 야혼을 향해 눈을 흘긴
고명지가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잠사옹의 말이 어느 정도까지 신빙성이 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중원으로 돌아온 겁천십웅은 누구도 잠사옹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기야 오입도 아닌데 한 번 더하자고 말하기도 쪽팔렸겠다.”
“너 자꾸 헛소리하면 그만 한다.”
“얘가 또 변죽 부린다. 야 하다가 그만하면 얼마나 찜찜한데, 잘 알고 있는 얘가 왜이래 이거. 입 꽉 닫고 있을 테니까
계속해라. 근데 좀 전에 들어온 여자 아냐?”
고명지가 이야기하는 동안 면사를 들어온 면사여인 때문이었다. 간단하게 차를 주문한 여인의 시선이 자꾸만 이편을 향하는 것
같았다.
“왜 또, 색공 펼치고 싶은 모양이지?”
“색공 맛은 네가 더 보고싶은 거 아냐?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라.”
“아미타불! 연작시주 색공(色功)까지 익혔단 말인가? 재수 좋은 년은 언덕에서 떨어져도 가지밭이라더니, 이따가 우리 좀
따로 보세나.”
하지만 또 다른 방해자로 인하여 고명지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색공이란 말을 듣던 추기영과 태웅이 눈을 빛내며 야혼을
쳐다보았던 거였다.
“아냐 따로 볼게 아니라…… 이보게 주인장, 여기 지필묵 좀 가져다 주게.”
태웅이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주방에 있는 주인을 불러내었다. 지금 당장 색공을 토해내라는 의미였다.
“허! 도대체 너희들은…….”
“신경 쓰지 마라. 괜히 친구겠냐? 취미생활이 같으니까 친하게 된 거지. 아니 친구가 돼서 취미생활이 같아졌나? 좌우간
내버려둬. 그게 건강하게 사는 지름길이니까.”
황당한 얼굴의 고명지를 향해 손을 휘휘 저은 야혼이 다음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듯 재촉했다.
“철혈마존과 독마존은 이곳에 마도련을 세우고 천비동(天秘洞)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들의 무공을 남겼다고 한다.”
마도련에 끊임없이 무인들이 찾아드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천비동의 무공은 단순히 두 사람의 겁천십웅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지옥마제에게 패한 두 사람이 같이 고민하여 새로운 무공을 만들었을 거란 사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름마저 하늘의 비밀을 간직한 동굴이라는 천비동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천비동이 만들어진지 300년이 지났지만
겁천십웅 두 사람의 무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 그 천비동인가 하는 곳을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흥미가 동한 듯 태웅이 물었다.
“아미타불! 곰 시주, 그 염병할 인간들도 춘서(春書)를 좋아했을 까봐 그러는가?”
“임마 보물은 주인이 따로 있다고 했잖아. 너희 두 놈은 기연을 얻었으니까 이젠 내 차례 아니겠냐?”
태웅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명지를 쳐다보았다. 셋 중에 유일하게 기연을 얻지 못한 사람은 혼자뿐이었다. 추기영에게는
무음항마혈탁이 있고, 야혼은 정력제를 무지하게 처먹어, 몸이 불어난 만큼 정력도 늘었다. 하늘이 공평하다면 남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엔.
“그곳에 들기 위해서는 일백마(一百魔)가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만 유일하게 개방되는 곳이 바로 천비동이다. 그것도
10일간만.”
“그래서 이곳에 일백마란 인간들이 있는 거구먼.”
도축장 지하에서 보았던 내용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마도련을 이끄는 실질적인 힘은 일백마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일백마 중
1위에서 5위까지를 1황 4공이라 부르는데 그들이 현 5문파의 문주들이었다.
“맞다. 그 일백마는 10년마다 새롭게 선출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 시기다. 일명 마도대전(魔道大戰)이라 부르는 마도련
최고의 축제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마도대전은 마도련을 구성하는 5문파의 서열을 정하는 비무대회이기도 하였다. 일백마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문파가 향후 10년 간 마도련의 주인이 되기에 강호일보다 더 중요한 행사가 바로 마도대전이었다.
“그럼 지금껏 삽질했네?”
야혼이 낮게 투덜거렸다. 그런 상황도 모르고 무작정 서대시전을 떠나왔는데 헛물 켰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꿀꿀했다.
하지만 고명지는 달리 생각하는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네 녀석이 저지른 일은 앞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파장으로 나타날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내 일이나 좀 도와주면서 기다리면 된다.”
‘얼라리? 저년 좀 보게, 이제는 눈웃음까지?’
하지만 야혼은 다른 데 넋을 빼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면사여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을 뿐, 고명지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여인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간간이 마주치는 눈빛에 무수한 감정이 스쳐갔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쳐다보는가 하면, 때로는 환희에 찬 눈빛을, 때로는 야릇한 눈빛을 쏘아보냈다. 그가 알기엔 그러한 눈빛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바로 성모궁에서 얻었던 색공중의 하나인 요화색마무(妖花色魔舞)가 그랬다. 눈빛과 춤으로 나타내는 색공으로 여인이 시전하면
그 효과가 배가된다 하였던 무공. 면사로 인하여 눈빛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요화색마무와 비슷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82) - 색즉시색(2)
“내가 아무리 멋있게 생겨도……아니지? 양지의 말을 빌리면 전혀 아니라 하였는데.”
“듣고 있는 거냐?”
“무슨 말을 했지?”
입을 헤하니 벌리고 있던 야혼이 깜짝 놀라며 고명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곁눈질로 면사여인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하-아!’
귓전을 자극하는 한 숨소리에 야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음을 이용해 들려온 소리였지만 한숨이기보다는 비음에 더
가까웠다.
“나 일 좀 도와 달라고 했다. 이 나라에 충성할 기회를 주겠다고.”
“맨입으로?”
“침대 비켜줬잖아 임마!”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오리발을 내밀자 고명지가 고함을 빽 질렀다.
하지만 침대라는 말에 더욱 놀란 사람은 태웅과 추기영이었다. 그도 야혼에게 들어 고명지가 동창 첩형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침대를 비켜줬다니, 벌써 배꼽을 맞췄다는 말로 들렸던 거였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야혼이 과거처럼
잘생긴 것도 아니고 연장 좋은 거야 벗겨놓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보니, 그가 고명지를 꿀꺽 한 방법은 한가지로 귀일
된다.
“여기 지필묵 안 가져오고 뭐해 새꺄!”
색공 때문이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의 내심과는 달리 야혼과 고명지는 서로를 노려보며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침대는 원래부터 내 물건이었다. 그건 조건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라고.”
“너?”
고명지의 얼굴이 잔뜩 불어졌다. 바로 눈앞에서 슬쩍 흔들어대는 손짓에 갑작스럽게 몸에서 스멀거리며 무엇인가가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날밤 당했던 그 색공이 분명했다.
“일단 이곳의 일이 끝나면 그 때 다시 이야기하자. 벌써부터 흥분하며 싸울 필요가 없잖아.”
싱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린 야혼이 은근한 눈으로 고명지를 쳐다보았다. 색색만화공(色色滿花功)의 가장 큰 장점은 한번
걸려든 여자는 다음엔 더욱 쉽다는 데 있다. 고명지가 꼼짝없이 걸려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적어라! 연장.”
“그럼 이걸로 하오대문 좌우호법은 결정된 거다.”
“이런 날강도 같은 새끼! 주려면 청해(靑海)분타주나 아니면 천의(天意)분타주를 줘야지 기껏 좌우호법이냐?”
“그건 이미 정해 놓은 주인이 있단 말이다. 남은 자리 중 가장 높은 건 그것밖에 없다.”
“니미럴타불! 그럼 개봉총단은 누구에게 맡길 건가? 연장 시주.”
“몇 달만 빨리 나오지, 너무 늦게 나왔어. 그곳도 이미 임자가 있다. 계속 쓸까 말까.”
‘이것들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명지가 뜨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집도 절도, 없는 놈들이 강호를 장악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더구나 태웅의 입에서 나온 청해분타나 천의분타란 말은 마도련과 천의맹을 지칭하는 말이 분명했다.
더욱 경악할 노릇은 마도련이나 회천맹이 색공하나와 동일하게 취급된다는 것이었다.
고명지의 그런 내심을 알기나 하는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태웅과 추기영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빨리 써 새끼야.”
하오대문의 두 호법이 새롭게 영입되는 순간이었다. 엄청난 무공이나 돈이 아닌 색색만화공이란 색공을 미끼로.
“고명지, 방 잡아라!”
“끄응!”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고명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 놈 곁에 있으면 자신마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별채를 얻어 자리를
뜨고 말았다.
“우리도 들어가서 쉬자!”
일필휘지로 한바탕 글을 써내려 간 야혼이 두 사람에게 던지듯 줘버리고 고명지의 뒤를 따랐다.
몸을 씻고 느긋하게 한숨 때린 야혼은 밖으로 나온 시각은 온사방이 깜깜한 한 밤중이었다. 태웅과 추기영은 그가 적어준
색색만화공을 익히느라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신청도 하지 않았다. 고명지 또한 자는 것 같아 하는 수없이 어슬렁거리며
객잔으로 들어선 야혼은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낮에 보았던 면사여인이 구석진 자리에 자리하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넓은 객잔을 혼자 차지한 채.
‘왔구나, 하오문주. 지금껏 이 사접(死蝶)을 피했던 자는 없었다.’
술을 따르려는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인 면사여인이 내심 중얼거렸다. 사접(死蝶), 무림인들에게는 결코 낯선 별호가
아니었다.
귀살(鬼殺), 독살(毒殺), 음살(音殺), 환살(幻殺), 색살(色殺). 남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을 결코 만나서는 안될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살인루에서 최고 자객으로 그들이 내린 죽음을 각각, 망혼사(亡魂死), 탈혼사(奪魂死), 일보사(一步死), 무형사(無形死),
환락사(歡樂死)라 부르는데 마지막 환락사의 주인공이 바로 색살(色殺) 사접(死蝶)이었다.
‘생각보다 강하긴 했지만 네놈은 오늘 죽는다.’
술잔에 비친 사접의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하오문주를 암살하러 보냈던 다섯 살객의 죽음은 의외였다. 그들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던 예상을 깨고 역으로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5사객(死客)의 막내인 그녀가 나선 이유였다.
‘이 사접의 요화색마무에 걸려든 이상 반드시 죽는단 말이다.’
놀라운 말이었다. 색살이라고 알려진 사접 또한 요화색마무를 익히고 있었다.
“좀 앉아도 되겠소?”
마음에 드는 여자만 보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묵직한 저음.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은 그녀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그녀 손에 들려있던 술잔을 빼앗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이닷!’
내심 낮게 소리친 사접이 요화색마무를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최초에 보이는 상대의 허점, 색공의 시작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한다. 걸려들기만 하면 내공을 제압할 수 있다.
‘억! 이런 당했군.’
여인의 몸에서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오자 재빨리 내공을 끌어올리던 야혼이 내심 신음을 흘렸다. 급격하게 몸이 뜨거워지며
단전을 빠져 나오던 내공이 마음대로 요동치는 것이었다.
“무례하군요.”
끌어올리던 내공을 갈아 앉히는 야혼의 귓전에 묘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차가움과 따스함을 동시에 간직한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였다. 야혼의 상태가 그랬다.
사접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체로 피가 몰리며 맹렬하게 가슴이 뛰었다.
“원래 외로운 여인을 홀로 두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말입니다. 손이 참 곱군요.”
술을 따라 건네주며 사접의 손가락을 슬쩍 쓰다듬었다.
‘색공엔 색공으로.’
뜨거운 느낌이 손가락 끝을 타고 오르자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그녀를 향해 시전했던 색색만화공이 효과를 발휘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그런 색색만화공을 알리 없는 사접은 색공에 바로 걸려든 듯한 행동을 보이는 야혼의 모습에 내심 흡족했다.
요화색마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색음(色音)단계에서부터 효과가 나오고 있었다.
먼저간 살객들이 당하자 가장 먼저 조사한 사항이 하오문주에 대한 정보였다. 성모궁에 다녀왔다는 사실도 알아냈으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암살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건 바로 상대의 약점이다. 한데 하오문주의 약점은 바로 여자였다.
“그 쪽은 몸에 열이 많은가 보군요.”
“평소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났을 때만 몸에서 열이 나는 체질이지요.”
“하지만 댁은 내 얼굴도 모르지 않습니까?”
“야혼이라 부르시오. 이 야혼은 여자를 볼 때 얼굴은 보지 않습니다. 몸매를 먼저보지요. 가슴이 아래쪽으로 쳐져서도
안되고, 양편으로 퍼져서도 안됩니다. 작은 가슴은 더더욱 싫어하지요, 그 다음은 엉덩이를 보는데…….”
실제 몸을 만지는 듯한 행동을 보이는 야혼의 양손은 연신 위아래로 움직였다. 때로는 원을 그리듯 가볍게 쓰다듬기도 하도,
때론 와락 움켜쥐며 거친 호흡을 뱉어냈다.
“그런데 낭자는 피부가 너무 곱습니다. 마치 십대 소녀 피부처럼 부드럽군요. 피부 또한 여인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 입니다.”
허공을 쓰다듬던 야혼의 손이 사접의 팔 소매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전분가루처럼 미끈한 그녀의 팔목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천천히 빠져나와 가슴을 움켜쥘 듯하더니 면사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더하여 얼굴까지 예쁘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지요.”
팔랑!
사접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가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허억!”
“이 얼굴은 어떤가요? 마음에 드시는지…….”
귓전을 자극하는 신음에 얼굴이 살풋 붉어진 사접이 요화색마무를 더욱 끌어올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상대의 손놀림을
가만히 보고 있지나 마치 자신의 몸을 쓰다듬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가슴을 쥐는 형상으로 허공을 부드럽게 말아 쥐자
야릇한 쾌감이 밀려왔고, 허리 곡선을 따라 손이 움직이자 아랫배로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싫지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슴 설렘. 더구나 10대 피부를 가졌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참으로 아름답군요. 많은 여인을 접해 보았지만 지금처럼 목말라 본적은 없었습니다.”
꿈꾸듯 사접의 얼굴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실제로 그녀의 얼굴은 대단했다. 특히 갸름한 턱선 위에 슬쩍 걸쳐진 두툼한
아랫입술은 놀라울 정도의 색감을 풍겼다. 재빨리 사접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 마시면서 촉촉한 입술을 직시했다. 아예 다른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야혼의 상태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여인이 익혔을 때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요화색마무는 가공했다. 알고 당한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지, 그녀가 색공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속절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색색만화공을 끌어올려 대항하고 있지만, 색색만화공의 요체가 자연스러움에 있기에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껏 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지금처럼 마음에 드는 경우는 처음이에요.”
당혹스럽기는 사접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대한 몸을 이끌고 나타났던 상대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황홀할
정도의 미소년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언제나 안고 싶어했던 사람, 15년 전 첫사랑의 남자였다.
‘그랬군, 저자 또한 색공을 펼치고 있었어.’
사접의 입가에 화려한 미소가 걸렸다. 내심으로 경악할 정도로 놀랐지만 내색할 수가 없다. 색공대결에서 가장 피해야 할
상황이 바로 상대에게 경계심을 심어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완전하게 걸려들 때까지는 색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편의 조그마한 변화는 상대를 깨어나게 할 것이고, 바로 반격으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곳은 덥군요.”
원했던 장소가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승부를 걸기로 하였다. 야혼의 시선을 똑바로 주시하며 슬쩍 옷매무시를
흩트렸다.
순간, 목 아래쪽의 옷이 좌우로 벌어지며 희멀건 가슴 계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허억!”
야혼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흘러내리던 옷이 그녀의 가슴 중간에 걸려 멈춰선 것이었다. 불쑥 솟은 가슴 때문에
더 이상 진행을 하지 못한 듯했다. 얇은 비단 옷과 함께 불쑥 고개를 내민 유실은 그 어떤 유혹보다 강렬했다.
공연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살수를 쓰기에도 늦었다. 몇 번에 걸쳐 살심을 끌어올려 보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성모궁에 다녀온 다음 처음 소를 잡았을 때의 기분 상태였다. 입이 아니라 그녀는 몸으로 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죽이지
말고 껴안아 달라고. 살기만 끌어올리면 보호 본능을 자극하던 느낌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다시 살기를 풀면 그런 느낌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욕정만 치밀었다.
우습게 생각했던 색공의 위력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단지 여인을 탐하다가 허점을 보여 색공에 당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심령을 마비시키는 무공이 바로 색공이었다. 넘쳐나는 내공을 가졌고,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혔지만 방법이 없었다.
색공에 대항하는 방법은 유혹을 이겨내는 심력(心力)을 가지고 있던지, 아니면 상대보다 뛰어난 색공을 익히고 있어야 했다.
‘결국 세 가지를 전부 동원하는 수밖에 없나?’
평생동안 색공을 익힌 여인을 상대로 자신이 이긴다는 건 무리였다.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나직하니 말했다.
“우리 장소를 옮기는 게 어떻소. 이곳은…….”
사접의 표정을 살피며 눈앞에 있던 술을 병째 입안으로 쓸어 넣었다.
얼굴을 보지 않으면 승산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장소를 옮기게 되면 그녀의 뒷모습을 보게 될 터이고, 그 순간을 노려
제압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그녀의 뒤에 서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은은한 달빛 속에 춤을 추듯 살랑거리며 걷는 그녀의 모습은 더욱 폭발적이었다. 더구나, 치마 뒤쪽은 엉덩이 선까지 반으로
갈라져 있었고 그 속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투명한 옥주(玉柱)와 확 퍼진 엉덩이의 움직임은 걸음조차 걷기 힘들었다.
슬쩍 허리를 숙이면 검은 음영이 가득한 그곳이 눈 안 가득 잡혀 들었다.
손을 뻗고 싶다는 유혹을 물리치고 허리를 더듬었다.
귀의가 만들어주었던 춘약을 꺼내 머금고 있던 술과 섞었다. 그런 다음 허리춤에 손을 넣어 잔뜩 발기해 있는 그곳으로부터
가슴부위까지 골고루 펴 발랐다.
“하아! 하악!”
나직한 신음을 발하며 나아가던 사접이 한적한 골목의 건물로 들어섰다. 하오문주를 없애기 위해 미리 구해두었던 집이었다.
뒷모습만 보이던 사접의 춤은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더욱 결렬해졌다. 걸치고 있던 옷은 허리춤에만 간신히 걸려 곧 떨어져
내릴 듯 위태로웠다.
“허억!”
그녀의 비음이 높아감에 따라 야혼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의 양은 많아졌다. 나직한 신음을 발하며 최고로 흥분된 표정으로
사접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녀를 간절히 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실제 몸을 만져야 더욱 강한 효과를
발휘하는 게 색색만화공일진대 지금 상황에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상의를 벗어 던지며 천천히 하의 요대를 풀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83) - 색즉시색(3)
“하-악!”
사접의 입에서 뜨거운 비음이 흘러나왔다. 불쑥 솟구친 남성에 걸려있던 바지가 찢기듯 아래로 떨어지자 하늘을 향해 폭발할 듯
솟구친 그것이 눈을 찔러왔던 것이었다.
급격히 피가 끌어 오름을 느낀 사접이 사뿐한 걸음걸이로 다가섰다. 지금부터는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승부를 내야할 시기.
색색만화공(色色滿花功), 그리고 요화색마무(妖花色魔舞). 색공으로는 최고라하였던 두 무공의 대결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한번 정(精)을 토하면 본인의 의사로는 멈출 수 없는, 정혈(精血)이 고갈될 때까지 사정을 하다가 상대의 배 위에서
죽게되는 마지막 대결이 시작되었다.
‘기다렸다. 어서 와라!’
불끈 솟은 상징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는 사접의 행위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뿐, 실상 아래쪽의 폭발적인 느낌을 음미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의 머리를 붙들어 천천히 끌어올렸다.
‘이건……. 춘약?’
온갖 기교를 이용하여 머리를 흔들던 사접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단순히 술이라고 여겼던 그 맛 속에 향긋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녀 또한 춘약을 애용하는 사람이고 보니 모를 리가 없었다. 이내 표정을 바꾼 사접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야혼의 손길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아랫배부터 시작하여 가슴까지 온통 춘약이 발라져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당신 또한 같이 먹는 거다. 서로 춘약을 먹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거야.’
가슴에 발라진 춘약까지 전부 흡인한 사접이 거칠게 입을 맞췄다. 자신이 먹은 춘약의 양이 훨씬 많겠지만, 춘약기운을 해소할
상대는 바로 앞에 있다. 오래 버티는 자가 살아남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야혼의 상징에서 다량으로 흡입한 춘약은, 그가 농약(濃藥)이라 명명한 고농축
춘약이었다는 사실을.
“하-악!”
거칠게 야혼의 입술을 탐닉하던 사접의 입에서 주체할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온몸에 타는 듯한 갈증과 함께 거부할
수없이 욕정이 끓어올랐다.
“누가 시켰는가?”
애써 욕정을 참아내며 물었다. 자신 또한 소량이지만 춘약을 먹었고, 한번 관계를 갖게 되면 끝날 때까지는 물어볼 시간이
없기에 하는 말이었다.
“살수의 기본은 청부자를……. 하-악!”
“으음!”
나직한 신음을 발하며 혀끝을 깨물었다. 입장이야 야혼이 훨씬 유리하지만 그 또한 요화색마무에 걸려 있는 상태. 선기를
잡았을 뿐 아직 승리한 건 아니었다. 완전한 관계를 가져야 끝이 날 터였다.
“어차피 죽을 건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살수는 내 인생이니까? 인생을 후회하고 싶진 않거든.”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사접이 야혼을 밀치며 올라탔다.
“끝났다. 내가 익힌 색공은 색색만화공이 전부가 아니다. 용봉환락무까지 있다는 사실을 너는 몰랐을 거다. 너는 하나고 나는
세 개란 말이다.”
사접의 엉덩이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용봉환락무를 끌어올렸다. 순간, 야혼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뭉클거리고 솟아나오며 사접의
내부를 급격하게 강타했다. 그의 내공이 밀려간 곳은 다름 아닌 사접의 단전이었다.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했지만 합일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공격 가능한 무공이 바로 용봉환락무였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면 한쪽이 죽어야 하는 무공.
“아아아아-!”
단전이 무너졌음에도 사접의 입에서 흘러나온 비음은 끊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무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춘약에 의해 불덩어리로 변한 몸을 식혀주는 남성이 반가울 뿐이었다. 오직 그 곳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몸을 움직였다.
고농축 농약과 요화색마무, 그리고 색색만화공. 3가지를 하나로 합친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한번 엉겨붙은 두 사람은
주변이 뿌옇게 밝아왔음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직 거친 신음을 내지르며 서로를 탐닉했다. 땀으로 범벅된 동체를 비비며
시간을 잊었다.
“씨팔,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지금 마음 같아서 지긋지긋한데 왜 뒤돌아서면 또 하고 싶냐고.”
쌍코피를 쏟아낸 야혼이 나직한 욕설을 토하여 굴러 떨어졌다. 꼬박 하루동안 관계를 가졌던 거였다. 일어나고자 하여도 힘이
없었다. 온몸의 기가 빠져나간 듯 흐느적거렸다.
“일단 몸부터 정상으로 돌려놓자.”
도를 갈면서 내공심법을 연마한 덕에 편리한 점은 있었다. 굳이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어떤 자세로든 운기가 가능했다.
구결을 따라 태을건곤심법을 운용하던 야혼은 깜짝 놀랐다. 내부에서 급격한 내공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던 것이었다.
과거 불귀동에서 냉소소와 당가려가 마지막에 시행해 주었던 용봉환락무보다 더 강한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그의 몸에서 백색의 농밀한 기운이 무럭무럭 솟아 나와 실내를 가득 채웠다. 기연이라고까지 할 바는 못되었지만 사접과의
혈투에서 커다란 수확을 얻은 건 분명했다.
쉬임 없이 운기행공을 하던 야혼이 눈을 뜬 건 다음날 아침 무렵이었다. 무려 반나절 동안이나 운기행공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초예(超藝)의 단계를 극복했나?”
야혼이 얻은 건 단순히 내공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한 단계 더 성숙하여 예(藝)의 극을 터득한 것이었다.
“한번 볼까?”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금강철피공을 끌어올렸다. 일순 그의 몸이 검게 변하며 번쩍거리는 광채를 토해냈다. 마치
묵령한철로 만들어진 비천묵령도를 보는 듯했다.
“이놈을 야차금강무적강(夜叉金剛無敵罡)이라 부르겠다.”
몸 주변을 한 꺼풀 감싼 검은색의 강기를 쳐다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금강철피공의 마지막 단계를 넘어 새로운 강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다만 자신의 내공으로 소화하지 못한 여인의 내공 일부가 영 거슬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새로운 내공이
좋을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아니었다. 서둘러 배출하지 않으면 그나마 안정되어 있는 내공을 폭주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당신도 후회는 없을 거요. 하다가 죽었으니까.”
내공을 전부 빼앗긴 상태였지만,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듯 사접은 여전히 황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희열에 몸부림치다 숨이 끊어진 것이리라.
“앞으론 당신보다 강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르겠소. 장례는 치러주라고 하리다.”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고명지를 비롯한 3사람이 야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우리 문주가 반쪽이 되어 나왔구먼. 무릎은 괜찮은가 몰라.”
득달같이 다가선 추기영이 야혼의 무릎을 툭툭 차며 이죽거렸다.
“송장 치르는 줄 알았다, 새끼야.”
태웅 또한 환해진 얼굴로 말했다. 실은 그들이 이곳에 도착한 때는 야혼과 사접이 한참 관계를 가질 때였다. 사접을 없애려
하였던 태웅을 말린 사람은 다름 아닌 고명지였다.
야혼이 색공에 제압 당한 상태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아보았던 거였다. 서로가 서로를 제압한 상태에서 상대방이 죽는다면 남은
사람 또한 그 충격을 견뎌내기 힘들 터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설령 사접을 죽이고 야혼을 떼어낸다 하더라도 그의 욕정을 풀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은 자신밖에 없다. 그래서
그대로 두라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내지르는 비음은 차마 들을 게 못되었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슴이 벌렁거렸다.
“야, 고명……. 이런 씨팔.”
사접에 대해 물으려던 야혼이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욕설을 뱉어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바싹 마른 목으로 하루
종일 신음을 질러댔으니, 목소리가 정상으로 나오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아미타불! 부럽다 정말 부러워. 어떻게 하면 목이 쉴 정도로 해댈 수 있는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목숨도 걸겠다.”
“너는 자식아. 성모궁에서 무릎이 까지도록 했잖냐. 나만, 이 태웅만 아직 저런 경험을 못해봤다, 썅! 기연도 없고, 오직
나만 개밥신세란 말이다.”
“이 앰병할 보살아 그거야 무릎걸음으로 도망치다 까진 거지 어디 하다가 그런 거냐? 그럼 너도 이 벽에서 대고 하면 될 것
아냐, 여기 좋은 구녁 널렸네. 골라잡아서 마음껏 즐겨라 이 썩을 종자야.”
빡빡 밀어버린 머리에 주름을 팍팍 잡은 추기영이 돌담의 틈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무릎이
시렸다. 뼈가 보일 지경으로 까진 무릎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대환단 쪼가리 조금만 떼서 바르면 그냥 나을 상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까워서, 보약을 함부로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내공심법을 익히며 버텼다.
살이 거의 썩어갈 무렵에나 돼서야 내공심법을 운기하며 대환단을 복용할 수 있었다.
추기영이 게거품을 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만 좀 해 이 빌어먹을 놈들아. 입들이 완전히 시궁창이야.”
보다못한 고명지가 두 사람을 향해 고함을 빽 질렀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두 놈 또한
보지 않았던가. 야혼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그런 광경을 보고도 부럽다니. 이해가 안가는
인간들이었다.
“그건 첩형소저와 우리가 사는 목적이 틀려서 그런 거니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첩형소저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첩형소저를 이해하지 못하오이다. 아미타불!”
권력에 집착하는 그녀의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쩌면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여인이 그녀였다. 물론
비밀시위 몇 정도는 따르고 있겠지만 임무수행을 위해 홀로 나선 여인.
충성심보다는 오직 출세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변방으로 나서려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됐어, 지금 야혼 너는 청부자?”
태웅과 추기영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이내 손을 내 저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추구하는 목적이 다를진대 상대를 이해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서로를 인정하는 정도로 끝내야 한다. 좀 전에 야혼이 하다만 이야기를 꺼내며 화제를 돌렸다.
“그냥 궁금해서…….”
고명지의 묻는 말에 야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놈들이 있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미타불! 내가 알기론 여자들만 해도 500은 넘을 테고, 지금 삼천룡이라 불리는 세 년놈들, 그 정도구먼.”
“임마 여자들은 까무러쳐 죽고싶어했지 이 야혼을 죽이고 싶어하는 년들은 없다.”
딱!
“제발 좀 그만해라, 도대체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 생각하는 거냐?”
야혼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갈긴 고명지가 고함을 빽 질렀다. 3명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느끼는 점이지만 도무지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일반 양민들은 관복 입은 관리만 보아도 사지를 벌벌 떨거늘, 하물며 자신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동창의
첩형이다.
첩형 자리에 오른 이후 지금처럼 무시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건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 그만 하자. 첩형언니 화낸다.”
붉으락푸르락 하는 고명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야혼이 양지 말투를 흉내내며 길을 잡았다. 원래는 전날 마도련 안으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공연한 일에 휘말려 하루가 늦어졌던 거였다.
“청부자는 안 궁금해?”
뜨악한 사람은 고명지였다. 실컷 청부자가 누굴까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녀석들이 동시에 마도련 내성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마치 이제는 궁금하지 않다는 듯.
“글쎄! 지금 청부자를 알아낸다 하여 찾아갈 것도 아닌데 냅두지 뭐. 이제 한 년이 죽었으니까 또 오겠지.”
“5사객 중 가장 약한 인물이 사접이다. 아직도 네 녀석을 노리는 자들은 4명이나 남았다고.”
“그 넷 중에도 여자 있냐? …없음말고.”
고명지의 눈이 상큼 위로 올라가는 모습에 재빨리 입을 닫은 야혼이 서둘러 마도련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4명은 마도련 내성 정문에 도착했다. 그곳 역시 외성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경비가 서 있었지만 외성과는 달리 일행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형형한 안광을 발하며 전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제 입성(入城) 신청을 했소이다.”
두 사람에게 다가간 태웅이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내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절차를 거친다. 먼저 외성에 하루정도를
머물며 입성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면 그 다음날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저쪽에 있는 방명록에 성명하고 방문목적을 기재하시오.”
네 사람을 흘낏 쳐다본 경비무사가 왼쪽 끝에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한산한 와중에도 방문자가 있는지 그곳에 지필묵이
준비되어 있었다.
경비무사가 가리킨 곳으로 다가간 야혼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붓을 들어 순식간에 써 내려갔다.
“여기 있네.”
“응?”
선명하게 쓰여진 글을 보던 경비무사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난생 처음 보는 명필이었던 탓이었다. 물 흐르듯 유려한
글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내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하오대문 문주 : 야혼
우호법 : 거패 태웅.
좌호법 : 육승 추기영.
방문목적 : 수금(收金).
증인 : 고명지.
“그런데 하오대문은 신흥방파인가 봅니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역시 하오대문이란 말을 들었다. 수양표국이 있는 상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선 마도련 인물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곳 이야기만 나오면 언제나 등장하는 인물이 자칭 하오대문의 문주라 하였던 야혼이란 자였다.
엄청난 기연을 얻었으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바보. 환영마도법이란 절세의 비급을 강호에 흘린 최고의 멍청이로 기록된
자가 앞에 있었다.
“자네 강호 신출인가 보군. 300년 역사를 지닌 하오대문을 모르다니……. 쯧쯧! 그러니까 경비나 서고 있지.”
“아미타불! 문주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십니다. 인간은 자기개발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공부 안한 새끼들은
이따위 거지같은 경비나 설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고 우리 좌호법이 오랜만에 사람 같은 소리를 하는구먼. 나도 동감이야. 공부 안 하고 사람도 못 알아본 놈들은
평생가도 이따위 거지같은 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지.”
“이런 죽일 놈들이……. 감히 이 하대중(河大衆)을 뭘로 보고.”
일검살(一劒殺) 하대중(河大衆), 철마문 소속으로 마도련의 신진 중에서는 꽤나 이름이 나있는 자였다. 마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열리는 백마총회 기간중이라 자신이 나와 있는 것이었는데.
세 놈이 돌아가면서 모욕을 하고 있다. 무인 축에 끼어주지도 않는 하오밀문의 인물들이.
그러나, 세 사람의 얼굴은 태연했다. 오히려 빙긋 미소를 머금고 하대중의 표정을 즐기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건 뭘로 보이는가, 시주.”
잔뜩 붉어진 얼굴로 살기마저 풍기는 하대중 턱밑에 추기영의 무음항마혈탁이 다가들었다.
“이런 개자…….”
데-엥!
‘크윽! 컥!’
몸을 비틀거리던 하대중이 튀어나오는 비명을 삼켰다. 머릿속과 가슴에서 형언하기 힘든 고통이 밀려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바로 곁에 부하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내기를 진정시키는 하대중의 귓전에 추기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탁일세. 오늘은 손님으로 왔으니까 그냥 가르쳐 주는 거라네. 그쪽이 안내 좀 해주시겠습니까?”
“아-! 네. 이쪽으로 따라가면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84) - 마천루(摩天樓)(1)
마천루(摩天樓)
"어이! 연장문주, 분타가 이렇게 커도 되는 건가?"
천마문(天魔門)이라 불리는 거대한 대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선  네
사람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조금씩 높아지는 비스듬한 경사지에  셀 수 없이
많은 건들의 지붕이 보였다. 그중  가장 높이 솟아 있는 6채의  건물은
마치 불탑을 세워 놓은 듯 대단했다.
고명지 또한 나머지 세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동창에서 상당부분
정보를 접했고, 건물 배치도까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
었다. 고원지대인 이곳에 저러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였다.
"이곳 마도련은 하늘의 별모양을 본떠서 만들어진 곳이다. 저기 가운
데 보이는 건물이 300년 전에 만들어진 마천루(摩天樓)라 부른다."
고명지가 알고 있는 바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마도련을 이룬 다섯 문
파는 중앙의 마천루를 기준으로 다섯 방위에 포진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시작하여  환희루(歡喜樓), 암흑루(暗黑樓),   무적루(無敵
樓), 독존루(獨尊樓), 사자루(獅子樓)라  칭해지는 건물들이  별 모양을
이루며 각 방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거의 50만평 정도 되다고 하더라. 안쪽에 호수도  두 개나 있고. 더
욱 놀라운 사실은 이 50만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모든 건물들이 하나
의 진식을 구축하고 있다는 거다. 성라무연대진(星羅無緣大陣)이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분
타치곤 너무 크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별 모양을 그리며  각각문파를 표시하는 야혼
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하오대문의 규모가 커진다 하더라도 이
곳의 한 문파보다 작다. 한마디로 야혼은 꿈을 꾸고 있는 게다.
그것도 아주 허황한 꿈을.
"고명지, 네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는 내가 하는 일이 더 쉬울  것 같
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네가 내 일을 어떻게 알고?"
느닷없는 묵직한 저음에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을 할거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던 야혼이 처음으로 일에 대하여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네 일이 무엇인지 모르지, 하지만 너는 일이 끝나고  살아남아야 하
고, 지금보다는 더 높은 지위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
"그러나 우리는 불알 빼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지새끼들이란
말이지요, 첩형시주. 여기 있는 이것들과 같이  죽어도 아쉬울 게 전혀
없는 개 같은 인생들이랍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아미타불!"
푸-욱!
나직한 불호와 함께 추기영의  철탁이 별 모양 그림  위로 사정없이
파고 들었다. 땅속 깊숙이 파묻힌 철탁은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에라 썩을 놈들아! 불알 한쪽이 전부인 놈들이  뭐? 꿈도 야무지다.
첩형소저 야혼 이놈을 가장 조심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저 자
식이 목소리 깔 때는 이미 작업 들어갔다는 말이거든요."
"작업?"
"왜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알랑방귀 뀌는 것 말입니다. 다른 말
로는 꼬랑지를 흔들어 댄다고도 하지요."
"훗!"
고명지가 낮게 웃었다. 하지만 내심까지 웃고  있는 건 아니었다. 땅
속 깊숙이 박혀들었던 철탁, 자신들까지 같이 묻혀도  상관없다는 의미
였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단 3명,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뭔
가를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들었다.
그러나.
"이런 곰새끼, 너 때문에 산통 다 깨졌잖아  개자식아. 조금만 더 있었
으면 저년이 넘어올 수 있었는데."
날카로운 욕설이 고명지의 상념을 깨우고 말았다. 벌떡 일어선  야혼
이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조용히 해라 씨부럴타불들아! 일단 신고식을 해야할 것 아냐!"
허공섭물을 이용해 철탁을 뽑아든 추기영이 두  사람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신고식? 맞다. 첫 방문인데 신고식은 해야지. 내공 좀 보태주랴?"
신고식이란 한 마디에 잠잠해진 두 사람이  추기영 뒤쪽으로 다가섰
다. 말만하면 바로 내공을 주입할 태세로.
"됐네 빌어먹을 보살들아. 서대시전의 추기영이 아니란 말이네."
가볍게 심호흡을 한 추기영이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짜식, 조금 있으면 금부처가 되겠네."
팽팽히 부풀어 오른  장삼사이로 미미하게 새어나오는  금빛 광채를
발견한 야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주파멸음에서  풍기는 기세와는
완전히 상반된 기운이었다. 태웅이 말한 기연은 바로 이것이었다. 저주
파멸음이 아닌, 무음항마혈탁이 조금씩 그 비밀을 벗고 있었던 거였다.
"아미타-불!"
데-엥!
심신을 맑게 해주는 거대한 범종 소리가 마도련 전역을 타고 울렸다.
광혼마림에서 마기(魔氣)를 억제할 때 났던 그 소리보다 훨씬 투명하고
맑았다.
"놀랍군! 극락성음(極樂聖音)을 익혔단 말인가?"
고명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극락성음,  무음항마혈탁의 첫 주
인이었던 가람존자(伽藍尊子)가 시전한 음공의 이름이었다.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아니 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항마혈탁이  처음
제 소리를 낸 것이다. 무려 5백년 만에.
마도련 방문을 알리는 추기영의 목탁소리는 고명지만  놀라게 한 건
아니었다.
마천루(摩天樓)의 마존전(魔尊殿)에서 총회에 참석하고  있던 상당수
의 무인들 또한 귓전을 자극하는 범종소리를 들었다.
그들 중에는 기이한 기운을 간직한 범종소리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자들도 몇몇 있었다.
막 백마총회의 폐회를 선언하려던, 철마문의 지존이자 마도련  1황인
철마황(鐵魔皇) 유혁세(劉赫世)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비롯한 철마문에 속
한 백마의 주장은, 철마문이 마도련  지존으로 있는 현 상황을  그대로
이끌고 가는 것이었다.
강호 정세가 불안하다는 것과 천의맹과 전쟁을 그 이유로  들었으나,
300년 간 이어온 전통을  깰 수 없다는 나머지  문파들의 주장에 결국
마도대전은 예정대로 개최하기로 하였던 거였다.
다만 과거보다 일정을 앞당겨 2달 안에 마도대전을 마치기로 합의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럼 앞으로 10일 후에 마도대전을 개최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로 마도련주의 직위를  원로원(元老院)으로 넘기겠습니다. 그동
안 수고하셨습니다."
천마의 형상이 새겨진 둥그런 패를 위쪽의  제단위로 공손하게 올렸
다. 10일 뒤라 하였지만 지금부터가 마도대전의 시작이었다.
마도대전이 열리는 60일 간은 백마들뿐만 아니라  마도련 소속의 전
무인들이 동일한 지위를 가진다.
다른 점이라면 백마들은 서열을  가리는 기준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백마 중 한 명에게 도전하여 승리하는 순간 두 사람의 지위는 바뀐다.
오직 힘에 의해 신분을 결정하는 비무가 바로 마도대전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련주!"
유혁세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대전을 빠져나가는  백마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유혁세의 품을 떠난 일명 천마령(天魔令)이라  불리는 련주 신물 때
문이었다. 그가 다시 재집권할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
한 사실은 있었다.
무려 100년 만에 마도련 전 인물의 생사여탈 권을 움켜쥔 련주가 탄
생한다는 것이다. 정파(正派)와 마교(魔敎), 그  두 세력과 전쟁을 수행
하기 위해선 모든 권력이 련주에게 집중됨은 당연한 일이다. 아울러 이
번에 선출될 31대 련주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가지 특전이 더 주어진
다.
무림사(武林史)의 한 장을 장식하여 후대까지 이름을 날리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껏 수많은 무인들이  명멸해 갔고, 마도련  또한 30명이나
되는 련주를 배출했지만 마도련 역사가 아닌, 무림사에  기록된 련주는
초대련주와 백년 전 마교와의 전쟁 때의 딱 두 사람이었다.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번 마도대전이었
다. 300년 전 겁천십웅이나, 100년 전 100인의 성모척살대처럼.
"양 총관 방금 들려온 소리는 뭔가?"
회의장에 있던 백마들이 전부 나가고 난 후 유혁세가 실내를 정리하
는 인물을 향해 물었다.
삼뇌(三腦) 양홍기(梁洪基), 마도련을 구축하고 있는 5문파에  소속된
자가 아니었다. 바로 이곳 마천루에서 기거하는 원로원  소속 고수들의
수발을 드는 자로 그를 가리켜 총관이라 부르고 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종마(鐘魔) 어르신이 친 건  아닌 것
같은데……."
양홍기가 말끝을 흐렸다. 그 정도로 엄청난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은 원로원 소속의 종마밖에  없을 터이지만 그가 치는  종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가……."
내심 종마(鐘魔)일 거라 넘겨짚고 물었던 말이었는데 아니라고  부정을
해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다른 걸 한번 물어보세.  이번 마도대전의 승자는 누가 될  것
같은가? 아니 원로원 그분들은 어디를 가장 유력하게 보고 있는가?"
놀라운 말이었다. 마도련의 지존인 유혁세가 그분들이라 칭하는 존재
들이라니.
"그분들이 어디 복잡한 일에 신경이나 쓰시는 분들입니까. 오직 순간
적인 재미에만 집착하고 계시는데요."
양홍기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어렸다. 마천루에 기거하는 기인들  때
문이었다. 마도련의 시작과 함께 생긴 원로원은 50년 간 무적불패의 신
화를 간직한 자들의 모임.
원로원에 드는 조건은 의외로 간단했다. 일백마의 지위를 5번을 누려
야 하고 서열에서도 결코 밀리면 안 되는 두 가지 조건이 다였다.
그러나, 그 두 가지에 불과한 조건을 만족시킨 이들은 손가락으로 꼽
는다. 지하 5층 지상 10층인  마천루 건물에 십여 명 안팎의  원로들만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원로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도련의 최강자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다만 사황문과 만수문이 손을 잡는다면 그들  또한 무시 못할 변수
가 될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으음!"
유혁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가장 우려하던  일
이었다. 마도련 서열 3위와 4위의 결합은 큰 위협임에 틀림없었다.
더구나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 것도 아니고  혈족으로 맺어지려고 하
고 있다.
'하지만 쉽진 않을 걸다. 우리 또한 장님이 아니니까. 마도련은  녹녹
한 곳이 아니다. 냉운형…….'
유혁세의 몸에서 미약한 살기가 요동쳤다.  묵사혈제(墨邪血帝) 냉운
형(冷雲亨)이 문주로 있는 사황문, 일백마에  14명밖에 끼지 못해 마도
련 서열 4위에 머물러 있지만 냉운형의  개인적인 무공은 자신과 필적
했다.
은연중에 상대를 인정하고 비무를 하지 않았을 뿐 누가 이길지는 아
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  뿐만 아니라 1위부터 10위까지의  무인들이
대부분 그랬다. 도전도 받지 않고 도전하지도 않았던 세월이 벌써 20년
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 기록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소소야! 너만 허락하면 우리 사황문은 마도련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무려 3백 년 동안 기다렸던 순간이다. 누구의 힘을  빌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기회가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가."
온통 검은색 투성인 건물, 사황문의 지존각인 암흑루(暗黑樓)의 지하
에서 열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략결혼을 이용하여 마도련주가 되고자 하는  묵사혈제 냉운형이었
다.
"네가 성모궁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무공비급을  가져오지만
않았더라도 이 애비는 꿈을 꾸지 않았을 거다."
그랬다. 냉운형에게 꿈을 꾸게 하였던 것은 냉소소가 머릿속에  담아
왔던 11권의 비급이었다. 더하여 냉소소가  완성한 한령신공까지. 하지
만 1년이란 시간은 마도련주에 도전하기엔 부족했다. 적어도 사오 년만
시간이 있었어도 정략결혼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지금껏 냉소소의 귀환을 숨기고 고수를 키웠다. 하지만 30명에  달하
는 백마를 보유한 철마문에 비해선 여전히 부족했다.
내심 정력결혼 상대를 물색하고 있던 차에  만수문에서 먼저 제의를
해왔다. 냉소소(冷素素)를 며느리로 달라는 것이었다.
냉운형의 입장에서는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만수문의 장자인
마음십수(魔音十手) 자룡(仔龍)은 다른 이들에 비해  부족한 점이 없었
다. 오히려 마도련 후기지수 중 최고 반열에 올라 있을  정도로 뛰어난
오성을 가졌던 거였다.
아니 만수문이 마도련 서열 3위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
쪽이 별로 밀리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었다.
"아버님! 만수문이 노리는 건, 사황문과 제  머릿속에 있는 무공비급
입니다. 그럴 모르십니까?"
면사로 얼굴을 가린 냉소소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자신의 존재를 비
밀로 한다고 했지만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건 자명한 일
이다. 다만 이쪽에서 말을 하지 않기에 모른척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정략결혼을 강요하는 부친이 야속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운소보다 너를 믿기에 추진하는 것이다. 나는 네
어미와 약속했다. 너를 가장 훌륭한 신랑감과 짝지어 주겠다고."
"아버님!"
냉소소의 길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언제나 그랬다. 설득을 하
다가 안되면 돌아가신 어머니를  들먹였다. 3년 전  성모궁에 갈 때도,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부탁이었다. 성모궁의 비급이 필
요한 아버지는 간절히 가기를 원했다. 어쩌면 유마혼과  맺어지기를 바
라는 마음에 보냈는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었는데, 이번엔 정략결혼이란다.
"일단 마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정혼 발표를 할 예정이다.  그렇게
알고 있거라."
마지막으로 쐐기를 밖은 냉운형이 서둘러 나갔다.
"어머니! 어쩌면 좋아요. 이제 저는 어쩌면……."
와락 서러움이 밀려왔다. 비록 첩의 자식이긴 하지만 딸임에는  분명
한데 아버지는 딸을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필요할 때  써먹기
위해 키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오직 아들인
냉운소만 있을 뿐이었다. 당신과 아들을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하
려는 것이다.
"차리리 그곳에서 살걸……."
사황문에 비급만 가져다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요구를 거절 못하고 있다. 당당하게 더 이상은 못하겠노라고
말하지 못했다.
문득 불귀동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예절도 규범도 없는, 오직 원하
는 대로 살았던 그곳. 너희들만 있으면 나갈 수 없어도  상관없다 하였
던 야혼, 그리고 불만이라 부르며 야혼을 놀렸던 당가려가 못내 보고싶
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85) - 마천루(2)
"일단은 아버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나를 거느릴 수
없습니다. 강제로 취하려 한다면……."
냉소소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극한의 기운이  마치 갑옷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얼마 전 야혼의 몸에서 일어난 현상과 같았다.
지저극음마강(地底極陰魔 ), 빙공(氷功)의 최고봉인 한령신공을 극성
으로 익혔을 때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호신강기였다.
"죽일 겁니다. 나보다 강하지 못하면."
면사를 걷어낸 냉소소의 얼굴에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혼례까지는
아버지의 말을 듣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부부간의 일. 더 이상 간섭받을
일이 없었다.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네 녀석보다는 더 나은 입장인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일
도, 할 일도 없다 하였던 너보다는……."
공같이 동글동글했던 야혼의 몸을 생각하는지 냉소소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어렸다. 유일하게 웃음 짓게 하는 얼굴이 바로 그였다.
야혼의 둥근 얼굴을 보고 웃는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웃음의 의미는 달랐다.
접객실에서 4인을 맞이하고 있는 종마는 마치 신기한 물건을 처음대
하는 냥, 호기심이 가득한 미소로 곰 같은 녀석을 응시했다.
"이게 뭔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란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인지. 련주  대
행 첫날, 그것도 첫 일이 돈 이야기였다.
10명의 원로들 중 그가 이곳에 나오게 된  건 순전한 호기심 때문이
었다. 귓전에 들려온 범종소리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내포되어 있음을
느끼고, 음공을 다루는 무인으로서 궁금증이 앞섰다.
그래서 나왔던 것인데.
곰 같이 생긴 녀석이 이상한 종이 두  장를 턱하니 올려놓는 것이었
다. 한 장은 하오밀문에 청부했던 계약서였고,  나머지 한 장은 십만대
산 성모궁까지 찾아가는 지도였다.
양홍기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3년 전이었고,  이미 기억 속
에서 지워진 일이었다. 더구나 하오밀문은 멸망했다 하였다.
"엥? 마도련의 련주가 아니셨습니까?"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두 장의 종이를 끌어당기며 되물었다.
"련주 대행일세."
"그럼 이야기가 되겠구먼. 이 일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까 아
주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어찌된 일이냐
면 우리 하오대문에 시궁창 세 년이 찾아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간단하게를 강조하며 시작했던 야혼의 성모궁  탐험기는 1시진이 지
나고 2시진이 지나도 끝날 줄 몰랐다.
특히 장독지대를 지날 때 유마혼과 남천악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이
야기는 수시로 꺼내며 강조하곤 하였다.
종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흥미로웠다. 지난 100년 간 누구도 찾지 못했
던 성모궁을 찾아가는 이야기였으니,  흥미 반, 기대  반으로 집중하여
들었다.
그러나, 수시로 꺼내는 장독지대와, 목숨을 구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놈들이 배신했다며 욕을 해대는  이야기는 더 이상 듣기가
거북했다.
'또 시작하겠지? 그놈들이 꼬르륵…….'
"장독지대를 노인장이 봤어야 했소. 온통 검은 안개로 휩싸인 그곳에
서 세 연놈이 꼬르륵 하고 늪 속으로 사라지는데, 그 잘난 무공이 아무
짝에 필요 없다 이거 아니요. 여기, 이 녀석들이 없었으면,  삼천룡? 지
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 않소."
"아미타불! 소승이 말입니다. 넝쿨로 몸을 묶고 늪 속으로 잠수해 들
어가지 않았겠습니까. 노인장도 생각해 보십시오. 내공도 없는 놈이 아
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말 깜깜한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 말입니다."
"그땐 얼마나 무섭든지.  불알이 잔뜩 오그라들어서는…….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곤 합니다. 정말 쪽팔린 일입니다.
이 태웅이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다니요."
벌써 차를 몇 잔이나 마셨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세 놈이 돌아가면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다시 할 때마다 그 크기를 부풀리는 모험기는 드
디어 3시진 째 접어들었다.
결국 먼저 손을 든 사람은 종마였다.
"그래서, 나더러 돈을 내놔라 이 말인가? 9만냥을."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는군요."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야혼의 얼굴에  방긋 미소가 어
렸다. 지금의 말을 듣기 위해 장작 3시진 동안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우리 원로원은 마도대전만 주관할  뿐 예산 집행권
은 없다네."
그건 사실이었다. 마도대전이 열리는 기간동안에 지출되는 돈에 대해
서만 원로원에서 사용할 뿐, 그 외 집행예산에 대해선 일절  권한이 없
다. 돈을 받아가려면 마도대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자
했던 종마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뭐 처음엔 다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한 두 번 겪어 본 것도 아니고,
빚 진 놈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란 건 나도 알고 있소이다. 야, 시작해!"
"캬! 이 짓도 정말 오랜만이다."
"아미타불! 그동안 몸이 좀 불었나 몰라."
"이런 미친……."
세 사람과 같이 앉아있던 고명지가  얼굴을 잔뜩 붉혔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천하 제일 단체인  마도련에서, 다른 곳도 아닌 3
백 년 전통을 가진 마천루에서 옷을 벗고 있다.
서로 나누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지금껏 10번 이상을 들어 거의
외다시피 한 꼬르륵, 그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있다.
"고명지, 밥은 네가 가서 배달해 와라. 밥값은  이곳 련주 앞으로 달
아 놔.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90만냥도 아니고 9만냥이다, 9만냥.
일시킬 때는 제발 좀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더니 이렇게 변해도 되는 거
냐고! 대 마도련이라면서 말이야!"
"이런 죽일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야!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옆에서 보고있던 양홍기가 흥분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방명록에는
턱하니 하오대문의 문주라 해놓고 하는 짓은 영락없는 삼류파락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도련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원로 앞에
서 옷을 훌러덩 벗어제치다니, 종마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손을 썼
을 터였다.
"이것 보쇼. 돈만 주면 돼. 나도 이런 짓 하고싶지 않다고. 돈만 받으
면 바로 꺼져줄 테니까 돈 가져오라고. 돈."
"클! 프! 하하하! 으! 하하하!"
어이없다는 듯 삼 인을 쳐다보던 종마가 느닷없이 통쾌한 웃음을 토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문득  세 사람에게서 사람 사
는 냄새가 가득 풍겨나는 것  같았다. 더하여 참으로 황당한  청년들의
행동이 놀랍기도 하였다.
"그런데 뭘 믿고 그렇게 날뛰는 건가? 내가 이 계약서를 없애버리고
돈을 못 주겠다면 어떻게 하려고."
"쿡! 어떻게 저렇게도 똑 같냐? 육승 그렇지 않냐?"
"맞네 연작문주. 돈주길 싫어하는 놈들이 항상 그랬지. 처음엔 돈 없
다고 오리발 내밀다가 나중엔……."
"계약서 찢어버린다고 그랬지. 칼도 하나 준비해서 말이야. 마도련이
라 해서 좀 다를 줄  알았더니 시전의 거지새끼랑 다를  게 하나도 없
네!"
또 다시 삼박자였다. 맨 먼저 야혼이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면 추기영
과 태웅이 순차적으로 말을 받으며 종마와 양홍기의 염장을 질렀다.
이젠 숫제 마도련을 시전통의 거지와 동급으로 취급하며 씹고  있다.
급기야 종마의 얼굴이 점차 굳어지기 시작했고 그의 몸에서 차가운 기
운이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아, 씨팔! 영감. 당신들이 오리발 내밀 줄 알고 저렇게 관리까지  데
리고 왔어. 혹시 알는지 모르겠네. 부처님 불알도 오그라들게 만든다는
동창 말이요. 그 동창 중에서도  제독 다음서열인 제일 첩형을  모시고
왔으니까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고."
"헉!"
양홍기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다고 생각했
던 고명지란 이름이 이제야 확연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갈마녀 고명지, 무상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동창제독 위금충의
애첩으로 관리들에게는 사신(死神)으로 군림하는 여인이 그녀였다.
그런 동창 여인이 바로 앞에 있다니. 옷을 벗어제치는 개차반 세  놈
의 행동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당혹스럽기는 고명지도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돈을 받기 위해 동창
첩형의 지위를 팔아먹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종마 앞에서도 뻔뻔스럽게 큰소리친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하여간 잔머리는…….'
소림사와 구룡표국에서 사기를 쳤다 했을 때  알아보았지만 주변 환
경을 기막히게 잘 이용하는 놈이었다. 상대방의 신분이나  의중은 생각
지도 않고 오직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간다.
잡초, 야혼을 쳐다보고 있으면  문득 문득 야산의  들풀이 생각났다.
아울러 자신의 어린 시절도.
'나쁜 놈 새끼, 네 녀석의 장단에 같이 놀아주마.'
눈을 깜빡이며 이편을 쳐다보는 야혼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
지만 그녀가 짓는 미소를 오해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앞에서 망연한 얼굴로 고명지를 주시하던 양홍기였다.
눈웃음을 교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가  보기엔 사기꾼들의 전형
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대할 입장은 아니었다. 설사 거짓이라 할지라도  상대
의 신분이 밝혀질 때까지는 신중을  기해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창 첩형이 아닌가.
"저기 신분증명서를 보여줄 수 있습니까?"
고명지의 표정을 살피며 딴에는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하지만  자
신보다 상전의 신분을 묻는 건 엄청난 실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
다. 더구나 상대는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을  행사하는 동창 제일 첩
형.
"신분증명서라……. 나에게 묻지  말고 네가 가서  직접 알아보거라.
가까운 관아에 가면 동창 제일 첩형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것
이다. 알량한 무공 좀  한다고, 패거리를 모으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나직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실내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권력
의 정점에 있는, 명령을 내려본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위엄이 사방에
몰아쳤다.
'저건 진짜다!'
양홍기보다 더 당황한 사람은 종마였다. 무공을 익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무림인이 많이 있었지만 아직 관을 건드렸다는 사람은 없다.
황실에 대항함은 곧 반역이고 멸문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수십만  황
군과 대항하여 살아날 무인은 결코  없다고 봐야한다. 아니 한  종류의
사람은 가능하다. 사고무친 혼자이거나, 중원을 떠나 변방에서 살 자신
이 있는 사람.
그 외는 전부 황실에 복종해야 하고 권력을 지닌 자들과 충돌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알아본 종마의 대응은 신속했다.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대인.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아닙니다, 련주대행. 이곳은 잠시 들러가는 곳이라……. 당사자가 아
니라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서로 타협을 보는 게 나을 듯 싶습니다."
"협상? 그것도 괜찮네. 능력도 없는 양반에게  달라할 수도 없고. 그
럼 이렇게 합시다."
누워있던 야혼이 벌떡 일어나며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하고 싶은가."
후회막급이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맡길걸 공연한 호기심에  나섰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능글능글 웃고 있는 얼굴이라니.
"이자로 2만냥을 주시고, 이곳에 쉴 곳을 내 주시오. 물론 그동안 식
대는 마도련에서 지급하고요."
'저런 쳐죽일 놈!'
양홍기와 종마, 두 사람의 호흡이  급격히 빨라졌다. 하지만 어쩌라!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동창 첩형이 쳐다보고 있으니. 마치  그깟 2만냥
을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는 그런 얼굴로 말이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수
락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이곳에 숙소를 정해 주도록
하겠네. 나머진 총관이 알아서 할거네, 그럼."
일행을 향해 포권을 취한 종마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마 90평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과 같이 개 같은 경우는 처음이지 싶었다.
"살펴 가십시오, 련주님!"
벌떡 일어난 세 놈이 동시에 직각으로 고개를 숙이며 고함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 돈 내놓으라고  소리치던 모습은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그건 또 무슨 행동이냐?"
나직하니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입는 3인을 향해 고명지가 물었다.
"돈을 준다고 하잖아."
"그럼?"
"당연하지. 돈을 꺼내놓는 순간 바로 고객으로 바뀌는 게 바로 이 직
업이다. 가만 여긴 다음에 이용할 곳이 아닌가?"
"맞네 연작문주. 앞으론 마도련 사람들은 우리하곤 절대 거래  안 할
걸세."
"그렇구나? 안 가쇼!"
고개를 끄덕인 야혼이 양홍기를 돌아보며 인상을 팍 썼다.
"아! 알았네, 따라 오시게."
"오늘 양총관은 나 때문에 목숨 건질 줄 아쇼. 내가 동창제일 첩형과
친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큰일날 뻔했소이다. 마도련 인물들과는 인연
이 많은가보오이다. 내가 얘기했던가? 왜 성모봉 갈 때 말입니다. 그곳
이 장독 지대였소이다. 그놈들이 꼬르륵 하고 빠질 땐 어찌나 놀랐던지
만일 그때 우리가 없었더라면……."
"야문주, 이곳과 저곳을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층은 되도록 안
가는 게 좋습니다. 아니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꼭 한번씩 가보라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빌어먹을 놈! 눈치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곳에 계시는 분들이  성미가 괴팍해서…….
때로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공격을 가하는 분들이 계십니
다. 이곳에 있는 5대 문파 인물들도 당한 무인이 많습니다."
"오라! 그러니까 개뿔도  없는 하오밀문의  문주니까 꼼짝하지 마라
이거요? 알았소이다. 여기 말고 다른 문파는 방문해도 상관없지요."
"그렇습니다. 저에게 말씀하시면 연락을 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잠깐! 양총관."
"다른 하실 말씀이라도."
"다른 문파에 전부 연락해두시오. 하오대문의 문주 야혼이  찾아간다
고."
"가실 때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그걸 알 수가 없으니 말이오. 당신 같이 비쩍 마른 사람은 똥을  규
칙적으로 쌀지 몰라도 나같이 뚱뚱한  놈은 아무 때나 뒷간에  가거든.
그게 싫으면 아침마다 문 앞에서 대기하던지. 그럼."
광!
부르르!
큰 소리를 내며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뒷간, 하찮은 하오문의 문주 나부랭이가 마도련을 표현한 말이었다.
"죽일 놈!"
진득한 살기를 뿌리던 양홍기가 이내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86) - 마천루(3)
잠시 후.
마천루 1층과 8층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고함소리가 동시에 터
져 나왔다. 분을 삭이지 못한 양홍기와 종마의 포효소리였다.
"뭔가 저놈!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놈이 어른도 몰라봐!"
8층 중앙에 있는 방문을 사정없이 열어제친 종마가  안쪽을 향해 고
함을 질렀다. 그의 시선이 가 있는 안쪽엔 두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거칠게 들어온 종마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오른 쪽
의 노인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쯧! 쯧! 나이를 헛 먹었어. 90이나 먹은 사람이 하는 짓이라곤."
"자네가 그 앰병할 놈을 봤어야 해, 그 놈이 어쨌는지 아나? 내 살다
살다 그런 개차반들은 처음이라니까."
게거품을 물며 조금 전 상황을 두 사람에게 주절거렸다.
"도마(刀魔) 네놈의 후예만 아니었던들 바로 쳐죽였을 거라고."
"말을 바로 하게. 그 놈 때문이 아니고 동창 첩형 때문이 아닌가. 잔
뜩 쫄아가지고 말도 못했겠지?"
"너! 이 개자식……."
"허허! 말하는 것하고는, 자네가 언제 말할 기회나  줬나? 그 종소리
를 낸 물건이 뭔가 보러 간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간 사람이  누군데.
그런데 무음항마혈탁은 구경했나?"
"너! 너?"
"쯧! 쯧! 그럼 그 보물도 보지 못했구먼? 그럼  3시진 동안이나 뭐했
나? 애들하고 장난치고 놀 나이도 아닌데."
"그게 무음항마혈탁이었단 말이냐? 그걸 왜 이제…."
"아 그것도 말해주려 했는데……."
"내가 먼저 나갔다 이 말이지? 이 나쁜 놈 새끼."
짝!
분을 견디다 못한 종마가 양손을 사정없이 손뼉을 쳤다.
"이런 미친놈!"
장기판에 집중하고 있던 두 사람의 몸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나
아 종마의 음파를 소멸시켜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응이 한발
늦었는지 탁자 위의 장기 알들이 순식간에 가루로 흩어져 내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두 사람이 두고 있던 장기알은 단순한 나무가 아니
었다. 철을 통째로 잘라 그곳에 글을 새겼던 거였다.
그 장기 알들이 단순한 박수소리 한 번에 가루가 되다니. 종마의  무
공경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나는 건졌네. 다  죽고 포(包)만  남았구먼? 천방지축 날뛰는  포
라……."
"나는 그런 꼴 못 본다.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린 그냥 구경만 하기로 하지 않았나? 마도련이 망하던 아니면 지
금보다 더 커지던 상관하지 않기로 했던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도마(刀魔)의 몸에서 무섭도록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았다. 결코 조금
전 종마의 신위에 못지 않은 대단한 기세였다.
"나는 마도련과 약속을 지켰다. 더구나 그 아이는 내가  불러들인 것
도 아니고 도백회주 자격으로 오지도  않았다. 제놈 말대로 돈  때문에
왔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 그것도 알 수 없다.  다만 흘러가는
대로 두고볼 뿐이다. 자네들도 그렇게 해주리라 믿네."
도마가 기세를 풀자 온 방안에 휘몰아치던 살기가 스르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알았다, 염병할 인간아. 하지만 그  놈이 마도대전에 참석한다면 말
리지 않을 거다. 아니 오히려 참석하라고 부추길란다."
"그건 자네 알아서 하게. 나도 그것까지는 참견하고 싶지 않네. 장기
알을 다시 꺼내와야겠군. 검마(劒魔) 한판 더할 텐가?"
"좋지, 좀 전에 장기 알 놓았던 거 다 기억하고 있지?"
"나이가 몇인데 그런걸 기억하나. 새로 시작하세."
"외통수에 걸려 있던걸 잊다니. 말이 되는 소릴 하게나. 이리 내놓게
내가 그대로 놓은 테니까."
"염병할 인간들. 그나저나 무음항마혈탁이라…….이봐 도마(刀魔)."
"철탁이야기라면 꺼내지 말게. 나중에 어련히 보게 될 터인데  뭘 그
리 조급하게 구나. 이곳에 2달이나 머물기로 했다면서?"
"그놈 도(刀)를 지니고 있더만, 그런데 말이네 생긴 게 꼭 지옥도(地
獄刀)같았어. 검은 마신(魔神) 말이네."
"자네 바보 아닌가? 소를 잡는 사람이 가진 도는 전부  같아. 지옥도
또한 처음엔 소를 잡았던 도였다네."
"하여간 말이 안 통해, 그 중놈을 불러다 항마혈탁 좀 보여주면 어디
덧나냐?"
찬바람이 휭 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난 종마가 밖으로 향했다. 결국 기
다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개차반 놈들에게 다시 찾아가서 무음항마혈탁을 보여달라고 하기
엔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부탁을 해서는 안 되는 놈들이란  사실을 직
감적으로 깨달았다. 어떤 요구를 해올지 그걸 알 수 없기에.
"사황문이 좋겠어. 한번 당해봐라 요놈들아. 총관!"
"네, 어르신."
"그놈들 지금 어디 있나?"
"돼지 같은 놈은 요화문으로 향했고, 나머지 둘은 방에서  무공을 익
히고 있습니다."
"그래? 요화문에 연락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양홍기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 전부터 그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
질근질 했었다. 동창 첩형이 마음에 걸려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련주대
행이 먼저 연락을 하라고 아니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받았던 수모를 한꺼번에 갚아줄 수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자리를 옮기려는 찰라.
"죽이진 말라고 해라."
"당연한 말씀을, 절반만 주물러 달라고  하겠습니다. 많이도 말고 절
반만."
삼뇌(三腦) 양홍기(梁洪基), 남들은 하나밖에  없다는 뇌를 3개가 가
진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3개의 뇌가 꼬이기 시작하면 풀
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이 그를 통해서 증명되고 있는 듯.
"이거 완전히 기루(妓樓)구먼! 아-! 이 향긋한 냄새."
입을 헤벌쭉 벌리며 연신 코를 킁킁거리는 인물, 한 벌밖에 없는  옷
을 최대한 단정하게 차려입은 야혼이었다.
몸 속에 들끓고 있는  사접의 내공을 버리기 위해  태웅과 추기영을
꼬드겼으나, 색색만화공에 빠져있는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
려 철탁을 던질 채비를 하며 노려보았다. 혼자 올 수밖에 없었다.
"씨팔! 술집에 혼자 가면 쪽팔릴텐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양쪽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위쪽으로 자
연스럽게 쓸어 올린다.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은 듯 침을  척하니 발라
머리칼을 고정시킨 후, 요화문 건물을 휘  둘러보았다. 이어 나직한 감
탄사가 흘러나왔다.
"대단하네!"
석양을 받아 길게 그늘진 요화문의 건물은  명장의 손길이 스며있는
듯 아름다웠다. 처마 밑에 늘어진 등들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자 마치
서대시전의 홍등가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물론 그곳보다는 훨
씬 아름다웠지만.
"도대체 건물이 몇 채나 되는 거야? 이-야합!"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옆에 있는 오장 높이의 나무를 타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10여장 높이까지 오르자 요화문의  전 건물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고명지의 말짝시나 별  모양이 맞는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건물들의
수가 줄어들더니 맨 끝에는 단 한 채 만이 서 있었다.
"허미! 저년들은……? 안-돼!"
가장 높이 솟아있는 건물을 쳐다보던 야혼이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정신 없이 내 저였다. 아래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쿠웅!
"이런 씨팔! 그 좋은 순간을."
지면이 푹 꺼질 정도로 흔적을 남긴 야혼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조금 전 타고 올랐던 나무를 노려보았다.
"네까짓 게 나를 거부해?"
잔뜩 핏대를 세운 야혼의 신형이 다시 한번 나무를 향해 돌진하였다.
"캬아! 보인다 보여. 저년 빵빵한 것 좀 보게."
그랬다.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건물을 쳐다보던 그의 눈에 놀라운 광
경이 목격되었다. 이곳 저곳 열린 창문 사이로 한창 옷을  갈아입는 여
인들의 모습이 투영되었던 것이엇다.
"어이! 여기야 여기. 어어어!"
안타까운 고함을 지르며 추락한 야혼이 재차 나무를 향해  달려들었
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왔다는 사실도 잊었다. 오직 조금 전 보았
던 여인네들의 알몸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저잔가?"
연신 나무를 타고 허공으로 솟구치는 야혼의 모습을 쳐다보는  여인.
양홍기로부터 부탁을 받은 요화문의 현 문주  천미염마(天美艶魔) 나령
(羅玲)이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50대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녀의 몸
에서 폭발적인 염기(艶氣)가 흘러나왔다. 오직 색공만 연마한 여인에게
서나 타나날 수 있는 그런 염기였다.
물론 공짜로 해주는 건 결코 아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는 양홍기에게 부탁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에 해 주는 일이었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허공으로 솟구
치는 야혼의 모습에 내심 실소를 흘렸다.
더구나 눈이 마주치자 손까지 흔들고 있다. 개차반 같은 놈이라 하였
던 양홍기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실로 괴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꺄아! 또 올라왔다."
여기저기서 여인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처음엔 다급하게 창문을 닫고
옷을 걸치던 여인들이 어느 순간부터 환성을 지르며 야혼의 모습을 즐
기고 있었던 거였다.
"여어! 가슴 가린 옷 좀 치워봐! 안 보이잖……. 으다다다!"
쿠웅!
"아이고 이 짓도 못하겠다. 벌써 몇 번째나 이거. 그래도 한 번만."
한 번만 했던 게 벌써 수십 회가 넘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구덩이 속
에서 벌떡 일어난 야혼이 뒤쪽으로 한참 물러났다.
이번에는 좀더 오랫동안 허공에 머물기 위해서였다. 양손에 침을  잔
뜩 바르고 앞으로 뛰어나가려는 순간.
"이제 그만하시죠."
"누구야! 한창 재미보는……. 응?"
달려가던 몸을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외치던 야혼의  얼굴에 환한 미
소가 어렸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건 한가지밖에
없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나  분명 여자였다. 그것도  30대의 농염한
미녀.
"하오대문의 문주라 하던데……."
"하하하! 맞소이다. 지금이야 별 볼일 없지만  앞으로 강호를 질타할
하오대문의 문주 야혼이외다. 그런데 방명이?"
"수려홍(隨麗紅)이라 해요. 제가 보기엔 강호를  질타할 문파를 만들
긴 쉽지가 않을 것 같군요."
"세상에? 나찰녀(羅刹女)라 하기에 썩은 호박, 아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추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인일 줄이야. 제가 지금
껏 적잖은 여인을 섭렵했습니다만, 이 같은  미인은 처음입니다. 이 뽀
얀 피부와 백치미를 풍기는 얼굴, 그리고 백태를 살짝 보이는 눈동자까
지, 입상여인(入相女人)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소이다."
"항상 사람을 눈앞에 두고 칭찬하는 모양이지요?"
나찰녀(羅刹女) 수려홍(隨麗紅), 그녀의 신분은 단순하지  않았다. 일
백마 서열 12위 여인으로 요화문의 부문주를 맡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독문 수공인 나찰백마수(羅刹白魔手)는  마도련 10대 무공의
한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한번 펼치면 반드시 피를 봐
야 하고 상대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잔혹한 무공이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전에는 결코 펼치지 않는다.
그녀가 서열 12위에 머물러 있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언제나 얼음장같이 차가워  나찰녀라 불리는 그녀의  얼굴에 훈기가
돌았다. 인간의 심리가 참으로 묘한 게, 분명  입에 발린 소린 줄 알면
서도 칭찬을 해주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던 거였다.
"야문주께서는 이곳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곳은 술을 마실 수 있다고 하던데 제가 잘못 알았습니까?"
그랬다. 같은 마도련 소속에 있지만 5문파는 각각 별개였다. 각 문파
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공동체가 된 곳이 바로 마도련이었다.
요화문 또한 다르지 않았다.  요화문의 주업은 기루  운영이다. 중원
각처에 있는 지부는 물론이고  이곳 마도련 내에서도 20여  개의 주루
(酒樓)를 운영하여 그 수입금으로 요화문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서책이 좀 필요해서 왔습니다."
"서책이라고요?"
수려홍의 얼굴이 뜨악하게 변했다. 기루가 즐비한 요화문에 와서  서
책이라니, 더구나 조금 전까지 무공을 이용해서 기녀들의  방을 엿보던
사람이 아닌가.
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그일진대.
하지만 이어지는 야혼의 말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원래 서책 속에 인생이 있지 않습니까. 간접 경험을 하는 덴 서책보
다 좋은 건 없지요. 건강을 해칠 필요도  없고. 그전에 일단 술이나 한
잔하시지요. 비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 장뇌삼인가 야옹
인가 하난 작자가 전부 대기로 하였습니다. 혹시 문주급에 해당하는 자
들이 따로 가는 그런 곳도 있습니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언제나 그랬듯 야혼의 시선은 불쑥 솟구친 수
려홍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다.
"따라오시지요."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시선을  의식한 수려홍이 교태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기루로 데려 가야할 판이었는데, 본인이 가자고 한다.
양홍기의 부탁을 자연스럽게 들어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훗! 오랜만에 색공을 써먹게 생겼네.'
앞서나가던 수려홍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어렸다. 발정난 남정네를
요리하는 건 일도 아니다. 몇 번의 눈웃음과 간단한 색공, 그리고 기녀
한 둘이면 한 달간은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이 길은 어째 으스스합니다, 그려."
수려홍의 엉덩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따라가던 야혼이 주변이 이상
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마치 비밀통로를 따라 걷는 것처럼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맞습니다, 야문주. 이 길은 진(陣)에 의해 밖에선 안쪽이 보
이지 않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곳 또한 외부엔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요."
"오라! 간부들이 즐기는 곳이라서 부하들에게 들키면 안 된다, 이 말
이군. 암! 하다가 들키면 그것처럼 쪽팔린 건 없거든."
잠시 후, 두 사람의 신형이 평범한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87) - 죽어도(?) 좋아(1)
죽어도(?) 좋아.
"니미럴타불! 돈 안들이고 날로 먹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먼."
깨알같이 쓰여진 글을 쳐다보던 추기영의 이마에 세 줄의 골이 파였
다. 힐끗 밖을 쳐다보는 품새가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한  빛이 역력
하다.
"이래가지고 언제 요화문 시주들을 해탈시켜주나."
추기영이 다급한 표정을 짓는 이유였다. 마음은 바쁜데 머리가  따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수천구신체를 타고난 그인데 결코 머리가 나빠서
가 아닐 터였다. 색색만화공을 연마한지 이제  하루, 이제야 간신히 색
공에 대해 조금씩 감을 잡아가고 있는 형편이었으니,  색공으로 여자를
후린다는 생각은 애초에 무리였다.
"그러게 연장과 같이 가자고 했잖아, 임마."
솥뚜껑 만한 주먹을 들어올린 태웅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야
혼과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추기영의  한마디 때문에
따라나설 수 없었다. 옆에서 놈을 빛나게 해주는 역할은 하고  싶지 않
다는 그 한마디.
"잊었는가? 우리가 기루를 전전하고 다닌 게, 그 앰병할 연작 때문이
란 사실을."
그랬다. 처음 야혼을 만났을 땐 녀석을 따라다니다 보면 한두 명  정
도는 자신들의 몫이 있을 줄 알았다.
한번에 서너 명을 전부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제 놈이 데리고간 여
자의 친구들 정도는 소개를 시켜주어야 하건만, 야혼은 그러지 않았다.
제 말로는 작업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하였지만, 추기영이나 태
웅이 느끼기에는 나중에 처먹기 위해 저축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
다. 숨겨둔 정력제를 혼자만 먹는 것처럼.
참혹한 배신감과 함께 그때부터 기루를 이용하게 되었다.
"나는 이 색공을 완벽하게 익힐 걸세. 그리고, 보란듯이 연작 앞에서
펼치고 말 거네, 아미타불!"
불호를 외는 추기영의 얼굴은 참으로 공손했다. 마치 소원을 비는 불
자처럼 경건한 자세로 철탁을 두드렸다.
"나도 백 번 그러고 싶지, 하지만 이 색색만화공이 하루 이틀에 익혀
지는 게 아니지 않냐."
잔뜩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색공이라 하여 처음엔 우습게 생각
했다. 하오비동에 있던 염라환희소를 보았고, 그 정도에서 얼마나 벗어
나랴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난해했다. 내공을 이용하여 펼치는 무공이  아니
었다. 아니 무공보다는 술법(術法)에 더 가깝다고 봐야했다.  상대의 정
신을 지배해야하는 무공이 바로 색공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얼마나 익혔는지  알 수도 없고….  이거 한번 봐줄
래?"
태웅이 추기영의 면상에 대고 표정과 손짓  연기를 하며 색색만화공
을 끌어올렸다.
"헤-!"
"어때 효과가 있는 것 같냐?"
따-악!
"이 빌어먹을 종자야, 색공은 같은 성(性)엔 먹이지 않는다는 기본적
인 사실도 모르냐?"
커다란 머리통을 향해 철탁을 날려버린 추기영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한심했다.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쓰다듬는 태웅의  모습은 마치
유랑극단에서 데리고 다니는 곰 같았다.
"이런 개자식,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수천구신체가 되었는지, 정말 불
가사의다 이 멍청한 놈아!"
머리에서 강한 소리가 흘러나왔으나 태웅의 표정은 태연했다. 오히려
철탁으로 맞은 것보다 추기영의 말이 더 답답한 듯 고함을 질렀다.
"생각해봐라! 내가 색색만화공을 펼쳤는데 돌  중 네 녀석이 반응했
단 말이다. 그럼 여자들은 어떻겠냐?"
"…오잉? 아미타불! 뭐하고 있는가, 곰 시주. 공부해야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추기영이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더 이상 색공의
성취에 대해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태웅의 말대로 시험 대상은  바로
앞에 있었다. 서로에게 시험을 해보고 조금이라도 효과가 나면 바로 요
화문으로 달려갈 참이었다.
그러나, 색색만화공에는 상상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
은 알지 못했다.
별다른 설명 없이 구결만 적어주었던 야혼의 잘못이긴 했지만, 그 속
엔 얼굴을 바꾸는 희대의 여면환공이 있었고, 여면환공과  색공이 만나
면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인물로 바꾸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태웅과 추기영은  서로를 향해 색색만화공을
펼쳐가며 무공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수려홍을 따라 평범한 건물 안으로 들어온  야혼은 이어지는 환대에
눈이 팽팽 돌았다.
겉보기는 다른 건물과 전혀 차이가 없는 듯 하였다. 하지만 그건  외
견 보이는 모습에 불과했다. 실내에 들어오자  딴 세상으로 변했다. 주
변의 물건 하나 하나가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엄청난 것들이었다. 금박
으로 태를 두른 술잔부터 시작하여 은으로 된 술병까지.
더하여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춤을 추는 반라의 여인들. 진정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지 싶었다. 분에  넘치는 환대에, 내심 의아
하기도 했지만 돈의 위력이라 치부하고 분위기를 즐겼다.
따라주는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 없이  받아
먹었다.
"수소저도 한잔하시지요. 술은 원래 주고받아야 맛이 아니겠습니까."
"술을 조금만 마시면 바로 취하는 체질이라서……."
술잔을 받아든 수려홍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원래
계획은 야혼 곁에서 술을 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을 이곳에 앉히고 자신은 음악을 연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야혼을 대동하고 실내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는 순간부터 상
황이 돌변했다. 갑자기 그의 곁은 떠나기 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
다. 주안상을 마련하고 지금의 방으로 왔을  땐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인냥 야혼의 곁에 앉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아니
야혼 곁을 떠나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잠식해 들었다.
"도대체 이게……."
"소저의 입술을 보고 있으면 절로 침이 돈다는 걸 아십니까?"
언제나 써먹는 상투적인 수법. 곤혹스런 얼굴로 술잔을 받아든  수려
홍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파르르 떠는 그녀의 모습에 싱긋 미
소를 머금은 야혼이 손등에 머물러 있던 손가락을 천천히 위쪽으로 미
끄러뜨렸다.
"하-아!
수려홍의 입에서 비음도 아니고 한숨도 아닌 애매 모호한 소리가 흘
러나왔다. 잔뜩 억눌린 어떤 감정을 표출하고 싶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에겐 술 안 주실 겁니까?"
"아, 네…? 네!"
화들짝 놀란 수려홍이 기이한 감정의 여운을 털듯 재빨리 술병을 잡
았다. 그러나 묘한 기분에 의한 떨림을 감추지 못한 듯 술을 따르는 손
이 급격히 떨렸다.
"어머! 죄송합니다, 문주님."
술을 따르던 수려홍이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술병에 너무 힘을
주었는지, 야혼의 손에 있던 술잔이 그의 사타구니 위로 떨어진 것이었
다. 혼미한 상태인지라 정신이 없었다. 술이  쏟아진 부위가 남자의 상징
이 있는 사타구니라는 것도 잊은 채 정신 없이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툭!
"하-악!"
급기야 수려홍의 입에서 뜨거운 비음이 흘러나왔다. 황망히 뻗어내던
손아귀에 막대 같은 건실한 물건이 잡혀 들었던 거였다.
10여 년의 기녀생활, 그리고 30대 후반.  뜨거운 기운을 발산하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왜 모르랴. 한 순간, 지금껏 깨닫지 못했던 감정의 실
체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욕정.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게  하였던 감정의 실체
는 바로 사내에 대한 갈구였다. 온 몸에 불개미가 숨어 있는 듯, 몸 이
곳저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손아귀 가득  들어온 그것을
놓지 못했다. 놓아버리면, 바로 절벽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강렬하게 밀려왔다. 더구나, 그녀를 더욱 달아오르게 한 광경은 하오밀
문 문주의 행동이었다.
한껏 붉어진 얼굴로 춤추는 무희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
다. 마치 지금과 같은 경험이 처음이라는 듯.
하오밀문의 문주에 대해 약간의 조사가 있었고, 그가 여자를  밝히는
인물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은 전혀 꾸밈
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소저. 정말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이게……."
더듬거리며 상징을 붙잡고 있는 수려홍의 손을 감싸듯 틀어쥐었다.
'안 돼! 내가 왜….'
안타까운 얼굴로 내심 고함을 지르던 그녀의 귓불이 불이라도 난 것
처럼 붉게 변했다. 쥐고 있던 상징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던 거였
다. 떨칠 수 없는 유혹, 오직 그곳에  모든 촉각을 세우고 있는 순간에
남자의 손이 그 위로 감싸는 게 보였다.
마치 떼어내려는 듯.
그러나.
"하-악!"
터져 나오는 비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사내의 투박한 손이 자신의  손
을 떼어내는 게 아니라 더욱 굳세게 틀어쥐며 위아래로 부드럽게 움직이
는 것이었다.
"소저, 단둘만 있으면… 안되겠지요."
"아닙니다, 상공. 저 애들을 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말하지요. 전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왼손은 여전히 수려홍의 손을 감싼 상태에서 춤을 추고 있던 무희들
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마술이라도 걸린 듯, 일제히 고개를 숙인 무희들이 다소곳한  얼굴로
물러났다.
기절할 노릇이었다. 지금 실내에서 춤을 추던 무희들은 요화문의  최
정예 중의 정예였다. 이른바 8색요(八色妖)라 불리는 여인들.
스물에서 서른까지의 여인들로 색공에 있어서는 그녀들이 최고라 하
였다. 그런 8색요들이 신지를 제압 당한 듯, 강시처럼 행동하고 있다.
"소저 전부 나갔습니다."
"하-악! 아직… 문 앞에…."
말을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녀의 얼굴은 아니었다. 쥐고 있던 손아귀
에 더욱 힘을 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헐! 예상 대로군."
야혼의 얼굴에 나직한 미소가 흘렀다. 색색만화공, 수려홍을 따라 건
물 내에 들어서면서부터 펼치기  시작하였다. 색색만화공의 첫  단계는
우선 여인의 호감을 얻는데부터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녀의 성적 취향
을 알아 낼 수 있다면 끝났다고 보면 된다.
수려홍 또한 마찬가지였다. 야혼이  그녀를 끌어들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촌스러움이었다. 그녀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캐물으면서 수려
홍의 심리상태를 편안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사라진
순간 색공을 펼쳤다.
더하여 수려홍은 약간의 노출증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보통  기루
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대부분은 타인이 훔쳐보는 걸 즐기는 경향이 있
다. 손님을 유혹해야하는 그녀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해서 무희들을 문밖에 대기시켜두며 그녀를 자극했는데 완전하게 걸
려들고 만 것이다.
"요대를 풀러 주시겠소."
"알겠습니다, 상공."
색색만화공의 위력, 한번 절정을 경험한 수려홍은 여전히 색공의  마
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온몸이 달궈지며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
로 야혼의 요대를 풀었다.
머리를 숙이고 요대를 푸는  그녀의 양편 가슴이 야혼의  손에 의해
잔뜩 일그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뜨거운 비음이 흘러나오고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찰녀라는 별호가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행동은 적극적이었다. 온
건물이 떠나갈 정도로 괴성을 지르며 야혼을 받아들였다.
곰 같이 뚱뚱했던 사내의 모습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표범처
럼 탄탄한 몸매를 가진, 송옥 같은 미남자가 있었다.
더하여, 나이 어린 소년이.
"죽어도 좋아! 죽어도…."
첫 번째 실신하며 수려홍이 남긴 말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이고  죽어
도란 말이 흘러나왔고, 어느 순간  나찰녀 수려홍은 더 이상  죽어도란
말을 하지 못했다. 완전하게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야혼의 행위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수려홍이 남긴  죽어도
좋아란 말을 연신 뇌까리며, 대기하고 있던 8색요들을 차례로  불러 들
였다.
그녀들 또한 수려홍과 다르지 않았다. 이미 색색만화공이라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 신세였다.
사내가 몸으로 해결해주지 않으면 홀로 정을 뽑아내다, 환하게  웃으
며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녀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는  연신 건물을 넘어  요화문 곳곳으로
퍼져갔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부분의 요화문 여인들은 하오문주가 방문을 알고 있었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자신들의 알몸을 엿봤던 특이한 행동 때문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그가 반쪽 얼굴로 실려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예상은 무참하게 깨졌고, 경악한 표정으로 변한  시
각은, 야혼이 요화문에 들어온 지 사 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 대신 부문주인 수려홍이 들것에 실려 환희루(歡喜樓)로  옮겨지는
장면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요화문주, 천미염마(天美艶魔) 나령(羅玲)이 기절할  듯 놀란 얼굴로
물었다. 마천루의 양홍기의 연락을  받은 다음, 모든  일을 수려홍에게
일임하고 하오문주에 대해선 신경을 끊었다. 문도도 없는  하찮은 인물
을 주시하기엔 목전에 다가온 마도대전은 너무나 큰 행사였다.
마도대전에 참여할 고수를 선발하느라 문밖 출입조차 못하고 있었는
데, 부문주인 나찰녀 수려홍이 빈사상태가 되어 돌아왔다.
마치 며칠 동안 굶은 유랑민을  보는 듯, 팽팽하던 피부는 푸석푸석
변했고, 산발한 머리와 움푹 들어간 눈자위는 차마 보기가 힘들었다.
"말을 하라 하지 않았더냐?"
수려홍을 데려온 여인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그게……."
백마 서열 14위인  혈관음(血觀音) 여옥상(呂玉霜)이 우물쭈물  말을
더듬다 결국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았다.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에 나령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무려
사 일 동안 그 짓을 하고 있고 아직도 진행중이라 하였다.
투입한 열 명중 한두 명만 있으면 하오밀문의 문주를 반병신으로 만
들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랬었는데…….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놈이 어디 말(馬)인가? 열 명을 상대하고
도 아직 힘이 남아있게."
"말(馬)입니다, …문주님! 말(魔)이 인두겁을 쓰고 색공(色功)을 익혔
습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88) - 죽어도(2) 좋아(2)
뒤쪽 침대에서 힘없는 수려홍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있지요? 그분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너?"
나령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수려홍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잠
시 제 색을 찾아가던 눈동자가 다시 혼탁한 빛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움직일 기력도 없는 그녀가 하오밀문의 문주를 찾다니.
"갈!"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강하게 소리쳤다. 나령의 고함소리에 퍼뜩  정
신을 차린 수려홍의 눈동자가 본연의 빛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네 입으로 말해봐라."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요화문에 가장 많은 무공이 색공이
고 수려홍 또한 고수 중의 고수였다. 그런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든 것
은 물론이고, 4일이 지난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처음엔 색공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다섯 번을 기절하고  깨어났을
때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8색요를 비롯하여  악기를
다루던 아이까지 전부 색공에 당했다는 사실을."
수려홍의 입에서 띄엄띄엄 그때의 상황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일
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온몸이 불꽃에 휩싸여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불
을 끄기에 급급했다. 그의 아래에서 온갖 신음과 괴성을 질러댔다.
그가 원하는 모든 체위를 반복하며 기절하기를 수 회, 다섯 번째라는
사실도 그가 말해줘서 알았다. 아울러 색공에 당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신(神)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탐했습니다. 그리고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하-아! 돌아가겠습니
다. 그분에게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급격하게 달아오른  수려홍이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허허!"
수려홍의 수혈을 집어 잠을 재운 나령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관계
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욕정을 떨치지 못하는 그런 색공이 있
을 줄이야.
"300년 전에 사라진 줄 알았더…, 설마?"
홀로 중얼거리던 나령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그녀가 알기로는
그런 엄청난 색공이  분명 존재했다. 요화문  사조(師祖)였던 무면색마
(無面色魔) 운몽(雲夢), 그의 무공인 색색만화공만이 지금과  같은 효과
를 발휘한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된 이유였다.
"앞장서라!"
가서 확인해야 할 터였다.  진정 사조의 무공이  돌아왔는지, 아니면
그와 비슷한 무공인지를.
그러나, 숨겨진 집으로 통하는 잠가(潛家)에 도착한 나령은 하오문주
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악! 나 죽어요, 제발…."
바로 저 소리 때문이었다. 문밖에는 8색요 중 네 명이 수려홍과 비슷
한 상태로 널브러져 있고, 안쪽에서는 여전히 원색적인  비음이 흘러나
왔다.
"저 사람이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자신 또한  난잡한 젊은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고, 지금 또한 남자와 관계를 갖곤 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어찌 인간의 몸으로 4일 밤낮 관계를 갖는단 말인가.
"기다리고 있다가 끝나면 연락하거라!"
"문주님?"
여옥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로 볼 때 사
내는 끝내려면 아직 멀었지 싶었다. 오히려 움직이는 속도는 점점 빨라
지는 듯 간드러진 교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런 사내를 지키다  끝나면
연락하라니.
성(性)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30대 후반의 자신에게는 너
무 가혹한 처사였다.
하지만, 문주님의 지엄한 명령, 나 몰라라 하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아!"
여옥상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백마에  들면서부터는
거의 남자와 동침을 하지 못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수려홍은  자의든
타의든 그곳이 헐어버릴 정도로 원 없는 관계를 가졌다.
내심 기절한 그녀가 부럽기 짝이 없었다.
"이년들아! 그래도 행복한 줄 알아. 평생을 살면서, 동침하다가  기절
하기가 쉬운 일 인줄 아냐? 택도 없다 이년들아."
"허억!"
"저런 나쁜 놈! …아-!"
남자의 숨넘어가는 소리에 여옥상이 무심결에 제 가슴을 틀어쥐었다.
한 여인의 한숨 속에 어둠은 점점 정점을 향해 치달아갔다.
문 앞에서 신음을 지르며 탄식하던  여옥상이 색공을 익힌 말(馬)이
라 하였던 야혼을 만난 것 그로부터 하루 뒤였다.
다음날 어둠과 함께 방문이 열리며 환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밖으
로 나왔다.
"아-! 개운하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구먼."
색살의 내공을 전부 배출하고 나자 이제야  내부가 진정되어는 듯하
였다. 힘있게 기지개를 펴던 야혼이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
리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잔뜩 흐트러진 여옥상의  옷매무새를
보곤 대중 짐작했다.
"나 더 이상 힘없으니까 보채지 마."
"네?"
느닷없는 말에 여옥상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옷차림이 엉망
이었던 탓이었다. 더구나 더 이상 힘이 없다는 말은 이미  문밖에서 일
어난 일을 전부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얼
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안내해야지 뭐하고 있어? 문주가 찾았잖아."
"그 말도 들었습니까?"
창피함도 잠시 여옥상이 놀라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거 왜이러시나, 소저도 선수 출신이면서.  아무리 하는 걸 좋아해
도 정신을 놓아서는 안되지, 그게 우리 선수들의 기본이잖아."
"훗!"
낮게 웃음을 흘린 여옥상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일어섰다. 선수, 참
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한창 기루에서 일할 땐 동료끼리 수
시로 쓰곤 했던 말. 그리고 소저란다.  40줄에 접어든 나이에 들어보는
소저란 말은 생경스럽기까지 하였다.
"웃지마! 그러니까 또 하고 싶잖아! 아이고 쌍코피 난다, 씨팔!"
뜨뜻한 기운이 양쪽 콧구멍에서 느껴지자 재빨리 고개를 젖혔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또 하고 싶어요?"
"남자는 말이야 같은 여자하곤 열 번은 못해도, 열  명의 여자들하고
는 한다고. 아마 여자들도 마찬가질 걸? 그런 경험 없어?"
"미안하지만 그런 경험은 없네요, 젊은 문주님. 따라  오세요, 문주님
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근데 한가지만 물어봐도 되나?"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선 전부 말해드릴게요."
"다른 게 아니고, 요화문주가 왜 나를 찾았는지 궁금해서."
"그건 직접 들으셔야 겠네요."
"그래? 한번 하자고 하면 곤란한데…."
"호호호!"
여옥상의 입에서 시원스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엉뚱한  사람이
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런 야혼의 행사가 밉지 않았다. 사문의 무공을 익
히고 있어도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밑바닥 인생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마음을
편하게 있는지도 몰랐다.
잠시 후.
환희루에 도착한 야혼은 요화문주 나령으로부터 놀라운 말을 들었다.
색색만화공을 창안했던 무면색마 운몽이 요화문의 시조란 말이었다.
"사실 그 당시 무림인들을 피해 다닐 수 있었던 건 색색만화공의 위
력도 있었지만 그분이 세웠던 요화문 제자들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사부님이 이곳을 만드셨단 말입니까?"
운몽이 요화문을 만들었단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부라 외치며 감
격스런 표정을 짓는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찌 이런 인연이.  아마 사부님께서 나를 이곳
으로 인도한 모양입니다, 문주님."
호들갑을 떨며 나령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위아래
로 흔들리는 나령의 가슴을 가만히 쳐다보는 야혼의 얼굴에 회심의 미
소가 어렸다. 의외의 장소에서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요화문에서 저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게 저…."
여전히 야혼의 손아귀 속에 손을 잡힌 나령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
다. 돈이라도 쥐어주며 무공을 찾아볼까 하는 마음에  불렀는데 요화문
에서 위치라니.
300년 전의 인연을 빌미로 요화문을 거저먹으려는 속셈이 빤히 보였
다. 물론 전통을 중시하는 문파에서야 선대의 인연자가  나타나면 무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동안 피땀 흘려 키운 문파를 사조의 후예라 하
여 떠넘기는 곳은 더더욱 없다.
다만 그가 익힌 사조의 무공이 필요하여 적당한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 또한 명문정파에서나 써먹는 수법일  뿐, 힘의 논리가 지배
하는 마도(魔道)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고 봐야했다.
하지만 야혼은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사부님께서 마지막에 남기시길, 당신이 세운 문파가  있는데 혹시라
도 만나게 되면 도움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문파가 요화문이
라는 거대문파일 줄이야. 아미 저승에서도 기뻐하실 거라 믿습니다."
여전히 나령의 손을 잡은 채,  문파를 잘 키워줘서 고맙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야문주, 그분은…."
"그렇겠지요. 이제 와서 제가  사부님의 유품을 찾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요. 설사 이곳을 저에게 주신다 하더라도 제가  다스릴 주
제나 되겠습니까. 그저 고맙고 감사해서 그렇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 하더니. 이제는 아예 유품이라 말하는 것도  부족하
여 벌떡 일어나 나령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있다. 물건을  맡겨둔 사람
이 찾아갈 때 짓는 그런 감사의 표정을 얼굴 가득 담고서.
"저기…."
'여옥상 방법을 좀 찾아봐라. 이 거머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맞절을 하던 나령이 여옥상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도무지 대책이 서
질 않았다.
'문주님, 그분에게 한자리 만들어 주면 어떻습니까. 대외적으론  공표
하지 말고 명예직 정도로 주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이 거머리를 우리 사람으로 받았다가는 문도들이  남아
남기나 하겠냐? 혹시 너도 기절하고 싶어서 그런 것 아냐?.'
'언니! 제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을 하세요!'
'이년아, 그게 나이하고 무슨 상관  있어. 네가 입버릇처럼 그랬잖아.
하다가 기절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라고.'
'지금 옛날 이야기가 왜 나와요. 빨리 대답이나 해요. 저분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잖아요.'
야혼의 처리를 놓고 고심하던 두 여인의 전음이 이상한 방향으로 전
개되고 있었다.
'나쁜 년, 죽어도 저분이래. 알았어 요년아.'
여옥상을 향해 살짝 눈을 흘긴 나령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조사님의 제자가 찾아왔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어 죄송합니다.  알다
시피 우리 요화문은 금남의 문파입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명예직으로 자리를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화왕(花王))이라고."
"화왕(花王)이라면 그 지위는…."
"요화문 소유물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을 힘주어 강조했다. 문파를  다스리는
경영엔 관여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었는데, 받아들이는 야혼은  그게 아
니었는지, 입을 헤벌쭉 벌렸다.
"자유롭게 말입니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혹시 그 소유물
에 문주도 포함되는 겁니까?"
"무슨…."
"물론입니다, 화왕. 요화문에 소속된 건 전부, 먼지 한 톨이라 할지라
도 전부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문주님은 물론이고 이 여옥상까지."
의아한 얼굴로 묻는 나령 대신 여옥상이 재빨리 끼어들며 말했다.
'이년아 무슨 짓이야?'
'언니도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저런 젊은 피를 수혈 받아요. 잔말
말고 저에게 맡겨요. 비밀로 하면 될 것 아냐.'
나령을 향해 전음을 보낸 여옥상이 짐짓 걱정스런 얼굴로 야혼을 쳐
다보았다.
"다만 대외적으로 이 일이 밝혀지면 화왕(花王)님 하시는 일에  누가
될까 그게 더 걱정입니다."
"그럼 비밀로 하지요 뭐. 그런데  요화문은 이곳에서 꼴찌라던데, 천
의맹과 전쟁에서 선봉으로 동원될까 그게 더 걱정입니다."
"그게 다 무공이 약해서 인데 누굴 탓하겠습니까. 사조님의 색색만화
공만 있었어도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어라, 요년 봐라? 인사말  한번 한 걸로 색색만화공을  날로 먹으려
드네?'
뜨끔한 얼굴로 내심 중얼거렸다. 무면색마의 후예라지만 아무런 대가
도 없이 무공을 넘겨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엇인가 얻어내면서 감질나게 주고자 하였는데, 아무런 권력도 없는
화왕이란 직위하나 주고는 색색만화공을 내 놓으라는 것이다.
'그럴순 없지, 나는 말이다 잠을 잔 년도 잘 믿지 않는다 요년들아.'
내심 마음을 다지며 입을 열려는 순간 여옥상에게서 더욱 황당한 말
이 흘러나왔다.
"저 화왕께서 직접 색색만화공을 배우고 싶습니다."
여옥상이 잔뜩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같이 자고 싶다는 간접
적인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다.
'이거 내가 당하는 것 아냐?'
화들짝 놀란 야혼이 여옥상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요화문의 문주와 수뇌들이  자신에게 몸을
헌납하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과거 환락삼화에게 당했던 기억이 머리를
치며 문득 불안감이 밀려왔다.
밝히는 남자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바로 밝히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
고 있었기 때문에.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다그치듯 물었다.
"정말 직접 지도해 주길 바랍니까?"
"네 오늘밤부터 당장 배우고 싶습니다."
'이런, 씨팔!'
"안됩니다, 오늘은. 몸 생각도 해야지요. 다음에 하지요, 다음에."
내심 욕설을 뱉어내며 서둘러  진화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들에게
마저 당하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철칙중의 하나가 완전하
지 못한 몸 상태에서는 절대 정력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럼 빠른 시일에 날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제기랄!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겁니까?"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계속하여 그녀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지
금 당장 색색만화공을 시작하자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글쎄요. 별 뾰쪽한 수가 없으니…."
나령이 말끝을 흐렸다. 색색만화공을 전해준다지만 마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요화문의 입장에서는 별다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입장
이 아니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89) - 죽어도(?) 좋아(3)
나령이 말끝을 흐렸다. 색색만화공을 전해준다지만 마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요화문의 입장에서는 별다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입장
이 아니었다.
"그럼 이렇게 한번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에 우리  힘으로 철마
문을 련주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건. 표나게  할 필요는 없고, 요화문
이 나서면 련주가 바뀐다는 사실만 보여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중요한 위치로 떠오르면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함부로  선봉에 세우지
못하겠지요. 마도대전은 계속해서 있을 테니까요."
"혹시 밀고 싶은 문파라도 있습니까?"
한 문파의 수장은 강함만으로는 결코 되는 게 아니었다. 예리한 눈빛
으로 변한 나령이 야혼의 의도를 물었다. 몇 번의 대화를  통해 단순한
빚 이상의 무엇인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해낸 것이다.
"사황문이요. 그곳을 이번 마도대전의 승자로 만들고 싶습니다."
냉소소 때문이었다. 그녀를 이곳 마도련 련주로 만드는 게 그의 목적
이었다. 내심 고심하고 있었는데  요화문이라는 뜻밖의 동조자가  생겨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조짐이 보였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황문이 4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라면 요화문을 결코 무시
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건 저하고 생각이 같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밑그
림과 야혼이 말한 사항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나머진 문주님이 알아서 하시고, 환락삼화를  만나고 싶습니다."
"무슨?"
"사람을 찾으려고요. 중놈을 찾아야 하는데 그녀들이 적격이거든요."
야혼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법현, 그가 환락삼화를 시켜 찾으려는
인물이었다.
"알겠습니다.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의아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던 나령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들에게 말하면 금방 찾을 수 있는데, 굳이 환락삼화를 찾는 건 다른 일
이 있다는 의미인 게다. 요화문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니면 그 정도는 들
어줘도 괜찮다 싶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힘들어서…."
"벌써 가시렵니까? 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아쉬운 듯 여옥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야혼의 제지로  이내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외부의 눈이 있는데 그냥 시비나 한 명 붙여주시지요."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야혼이 밖으로 나왔다. 의외의  일
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피로가  엄습했다. 가서 한숨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근데 저 사람 믿을 수 있을까?"
야혼이 멀어짐을 확인한  나령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여옥상에게
물었다. 어수룩해 보이긴 해도 순간 순간 드러나는 날카로움 때문일까.
결코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가슴속에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
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색색만화공을 전수해 달라고 했던 거예요 언니. 아무래
도 몸으로 맺어지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
"에라 나쁜 년아! 좀 솔직해 져라.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잖아?"
나령이 피식 웃었다. 조금 전 얼굴을 붉히며 오늘밤에  색색만화공을
배우고 싶다 하였던 여옥상이 아닌가. 그랬던 년이 이제와서는 마치 문
파를 위해 몸을 희생한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럼 언니는 빼달라고 할까. 배우고  싶다는 애들은 널렸다고. 아마
그 말(馬), 아니 화왕께  색색만화공을 배울 사람 나와라  하면 요화문
전체가 나설 거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저런 팔팔한 청춘을 무
슨 수로 안아봐.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일거양득(一擧兩得)이지. 나는 천
천히 배울라오. 마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야금야금."
백마 서열 14위인 혈관음(血觀音)  여옥상(呂玉霜), 공포의 대명사라
알려진 그녀가 색기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말(馬)의 실체를 알
게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년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요화문의  문주인 내가 가장 먼저 색
색만화공을 배워야지. 부하들이 먼저 배우는 그런 몰상식한  문파가 어
디 있냐. 너는 무조건 내 다음이야."
나령이 고함을 빽 질렀다.
'나도 하고 싶어, 죽어도 좋아란 말을 하고 싶다고.'
두 여인의 동시에  내심 주절댄 소리였다.  수려홍처럼 되고 싶다는
것.
한편.
여우 두 마리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야혼은 책이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자루를 걸머진 채 헉헉대며 마천루에 도착했다.
서둘러 계단을 올라 숙소로 들어가려던 야혼은  안에서 들려오는 소
리에 이내 멈춰서고 말았다.
끈적끈적한 비음이 가던 걸음을 붙들어 세웠다.
"벌써 색공을 다 익혔나?"
일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남자의  목
소리였다. 그것도 막 관계를 갖기  전에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말하는
사랑의 밀어.
"나보고 수천구신체라 하였던 건 거짓말 아냐?"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색색만
화공에만 매달리고 있다지만, 태웅이나  추기영은 익히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벌써 색색만화공을 이용하여 여자를  구해오다니, 과거 불귀동
에서 그것을 익힐 때와는 천양지차의 속도를 보이는 것이다.
언젯적 야차혈마지체라 하였던 이정의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좋은 일 하는데 방해할 수도 없고, 고명지나 보러가야겠다."
문을 열려다 말고 이내 건너편 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금만 더  신
경 써서, 아니 내공만 잠깐 끌어올려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더
라면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짐작했으련만.
야혼이 고명지의 방문을 두드리는 그 순간, 태웅과 추기영이 있는 방
안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연(琵蓮) 너무 아름답소, 이  짧은 머리가 더욱  색감을 자극하는
구려!"
지그시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 쓰다듬는  추기영의 입에서 격정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화(琵花) 당신이 이렇게 내 품에 안겨 있다니 정말 꿈만 같소. 다
시는 그대를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거요."
열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 상대의 옷을 하나씩 벗기는 태웅의 목소리
가 은은하게 떨려 나왔다.
바로 눈앞에 비화가 있었다. 언제나 냉랭하게,  관계를 가질 때도 반
응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손을 붙잡아 둥그런 가슴을 만지도록 유도하는  가하면 슬쩍 쓰다듬
기만 했는데도 자지러지는 비음을 질러댔다.
열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비화를 쳐다보았다.  비
화와는 달리 완전한  민 대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웅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랬다. 비연과 비화를 부르며  서로를 쳐다보며 비스듬히 누워있는
두 사람은 태웅과 추기영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인식하지 못한 듯, 뜨거운 신음을 발하며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색색만화공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색공이 동성(同性)에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속설을  깨
고, 태웅과 추기영이 동시에 색색만화공의 마수에 걸려든 것이었다.
그들이 지금처럼 된 이유는  간단했다. 요화문에 간다하였던 야혼이
며칠째 돌아오지 않자, 초조해진 두 사람은 더욱 색색만화공 연마에 박
차를 가했다. 그들 또한 야혼처럼 지금껏 꼬박 밤을 세우고 있었다.
야혼의 말대로 수천구신체의 능력은 가공했다. 4일째 되던 날부터 색
색만화공이 조금씩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고무된  두 사람
은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색색만화공을 펼쳤다.
그러다 서로가 색색만화공에 걸려든 시각은 야혼이 요화문 서고에서
춘서를 챙기고 있을 즈음이었다.
먼저 색색만화공에 걸려든 사람은 야혼이나 추기영에 비해 상대적으
로 빈약한 태웅이었다.
덩치는 세 사람 중 가장 큰 태웅이 남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
곳은 가장 보잘것없었던 거였다. 해서 물건 이야기만 나오면 언제나 한
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야하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랬던 그에게 색색만화공은 그야말로 하늘의 축복이었다. 당당한 자
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사이에  추기영이 펼치는 색색만화공에 걸
려 든 것이었다.
한 사람이 색색만화공의 마수에 걸리자  그 다음은 더 빨랐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태웅을 향해 뭔가  말하려는 순간 그의 얼굴이 비연(琵
蓮)으로 변하며 추기영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던 거였다.
자신이 원하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색색만화공의 묘용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와서 둘을 떼어놓아야 할 터인데  문 앞
까지 왔던 야혼마저 다른 방으로 가버렸으니.
별수 없이 서로를 향해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집중할 뿐이었다.
"비화(琵花) 정말 아름답소. 정말…."
조금씩 드러나는 비화의 알몸에 태웅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크
지도 작지도 않은 희디흰 가슴이 눈앞을  덮었다. 언제나 어두운 밤에,
그것도 협박까지 하면서 강제로 취했을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소담스런 가슴을 내보이고 있음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다니. 팽팽하게  솟아있는 가슴을 달걀을  감싸듯
부드럽게 쥐었다.
"허억! 아미…. 잘못했소 비연(琵蓮) 다시는  당신 앞에서 불호를 외
지 않겠소."
비연의 손길이 가슴을 쓰다듬자 추기영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실을 간질거리는 비연의  손길이 이다지도 황홀할  줄이
야. 단 한번도 자신을 만져주지 않았던  그녀, 막대기처럼 일자로 누워
두 눈을 꼭 감고 위에서 내려가기만을 기다렸던 그녀였다. 그랬던 그녀
가 가슴을 쓰다듬고 있다. 아니 유두를 꼬집듯 꽉 틀어쥐고 있다.
"더 세게 만져주시오 비화. 더 세게…. 너무 좋소, 이젠  죽어도 여한
이 없소. 죽어도 좋단 말이오."
뜨거운 신음을 뱉어내며 비연의 얼굴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손
으로 만져주었으니 입으로도  애무해 줄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희망을
품고.
"오 비연(琵蓮)!"
앓는 듯한 비음을 질렀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토록
냉랭하던 비연이 이끄는 대로 끌려오고 있었다.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내려가던 그녀가 고개를 가슴에 묻고 있었다.
흥분한 사람은 비단 추기영뿐만 아니었다. 태웅 역시 환희에 찬 표정
으로 고개를 숙였다. 엄습하는 흥분에 온 몸이 산산이 터져버릴  것 같
았다. 세상에…. 그녀가, 그 차갑던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당겨 가슴에
묻다니, 이럴 순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생각지
도 못했다. 비연의 가슴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은 태웅이 곧이어 그녀
의 유두를 부드럽게 깨물었다.
격렬하게 몸을 떠는 그녀의 행동에 더욱 고무된 태웅이 이번에 서서
히 위로 올라가며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그녀의 옷을 천천히  벗겨 내
렸다.
"비화 당신이… 오 부처님 정말 감사합니다."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른 추기영이 부처님을 찾았다. 이 모든 게  그분
이 보살핀 덕분이라 여겼다. 비화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있다니.
"당신의 옷도 내가 벗겨 주겠소."
거친 호흡을 흘리던 추기영이 비화의 옷을 걷어내기 시작하였다.  떨
리는 손길로.
색색만화공, 동성마저도 색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엄청난 무공이
틀림없었다.
"왜 이방으로 와, 잘 처먹었으면 들어가 쉴 일이지."
자루를 걸머지고 방안으로 들어선 야혼을 향해  고명지가 뾰쪽한 음
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지난 5일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녀석이 해쓱
해진 얼굴로 걸어 들어오는 꼴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날이냐? 왜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어. 자리 좀 넓혀봐."
"어딜 누우려고, 저리 못가!"
"덮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매셔. 워낙 배부르게 포식을  해서
진수성찬을 가져와도 고개 돌릴 판이니까."
고명지를 한편으로 밀어버린 야혼이 자루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
고 그녀 옆으로 털썩 드러누웠다.
"나쁜 새끼, 그러고도 네가 남자냐? 하여간 예의라곤 약에 쓰려도 없
어."
"심심했던 모양이구나. 네가 이해해라. 사접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
다."
"사접이 왜!"
"그녀를 먹으면서… 아니 그년  때문에 생긴 내공을  버리지 않으면
큰일나거든. 난 특이한 체질이라 다른 사람의 내공이 몸 속에 들어오면
바로 버려야해, 그것도 여자를 통해서. 처음엔  너에게 줄까 생각도 했
었는데, 넌 받을 생각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갔지 뭐. 30년이나 되는 정력제를 버리려니까  좀 아깝기는 했지만, 목
숨을 구하는 일인데 어쩔 수 없잖아."
"뭐 반갑자의 공력을  버리고 왔다고?  얼굴한번 보지 못한  년들에
게?"
야혼에게 화를 냈다는 사실도 잊은 듯  고명지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30년의 공력이라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정도만 있다면 10성에 달한 금환신공(金環神功)을 11성까지  끌어
올릴 수 있는 엄청난 양일진대.
"잘- 한다, 그 시궁창 같은 년들에게 내공을…."
"내공을 어째."
"아니, 그렇다는 거지. 뭘 쳐다봐 임마."
"근데 5사객이라는 것들 말이야, 여자는 더 없냐?"
"있지, 사접 바로 위인 무형사를 환접(幻蝶)이라 불러, 그녀는 내공이
1갑자 정도… 제길!"
빤히 쳐다보는 야혼의 시선에 무안해진 고명지가 얼굴을 붉혔다.  야
혼이 묻는 이유를 이제야 알아차렸던 거였다.
환접을 만나면 그녀의 내공을 갈취하겠다는 의미였다.
"사실은 용봉환락무에 그런 기능이 있는 줄 나도 몰랐어.  다만 서로
의 음양이기만 교환하면 내공이 높아지는 걸로 알았거든."
야혼 또한 용봉환락무의 새로운 묘용을 사접과  관계에서 처음 알았
다. 서로가 용봉환락무를 운용하고 있을 때만 효과가 있다 하였던 말을
무시하고 사접의 내공을 빨아 들였다. 빨리 끝내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
로 시도했던 그 방법이 먹혔고, 결국 이길 수 있었다.
"용봉환락무(龍鳳歡樂舞)?"
"양지가 말 안한 모양이네? 그년의 내공이 높아진 이유가 바로 용봉
환락무 때문이다."
"그럼…?"
고명지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양지가 야혼 몰래 불러주었던 구결
이 용봉환락무였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만  색공이니까 함부
로 운용하지 말라 했었고, 야혼이  덮칠 때만 시전하라고 하였던  것이
다. 그때는 미친년이라며 피식 웃고 말았는데.
"내공을 쌓는 방법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지, 서로가  이해만 한다
면 그처럼 훌륭한 내공심법도 없지. 아마 1갑자 정도는 몇 달만 관계를
가지면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을 걸?"
"그래서 양지의 내공이 그렇게 강해졌구나…."
'아이고 또 한 건 예약이다. 이 투철한 직업 정신.'
고개를 끄덕이는 고명지를 쳐다보며 야혼이 흐뭇한 얼굴로 중얼거렸
다. 내공 증진을 위한 관계로  합리화시키기만 한다면 더 이상  거칠게
없다.
참으로 용화대제(龍和大帝)란 사람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떻게 관계를 가지면서 내공을  증진시키는 무공을 만들었는지.  눈앞에
있다면 정말 사부라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색색만화공과 같이 얻은 거냐?"
"색색만화공?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나에게 써먹었… 나쁜 새끼."
얼굴이 붉어진 고명지가 눈을 흘겼다. 색색만화공에 걸려 밤새  괴성
을 질러댄 기억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 일 때문에  야혼과 인
연이 되었고 그를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 놈들에게 적어준 무공이 색색만화공인데 이 무공 또한 물건이야.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도록 현혹시키는 기능이  있거든? 그때 넌 못
느꼈냐? 이 돼지 같은 몸이 아니었지? 그런데 저놈들도 대단해, 이제 5
일밖에 안된 놈들이 그새 여자를 꼬셔 오냐?"
"그게 무슨 말이냐, 저 녀석들은 방에서 나온 적이 없는 것 같던데?"
"아냐 너 모르게 나갔다 왔을 거야. 그러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는 소
리가 나오냐? 얼레? 환상!"
"환상!"
두 사람이 동시에 고함을 질렀다.
"급하다."
보던 책을 내팽개치며 벌떡 일어난 야혼과 고명지가 문을 박차고 밖
으로 나왔다.
끈적거리는 비음이 흘러나오는 방을 향해 다가간  야혼이 거칠게 문
을 열어 제쳤다.
"비연(琵蓮), 나 죽어도 좋아."
"아! 비화(琵花), 죽어도 좋아!"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0)- 마도련주로 만들어 준다니까(1)
마도련주(魔道聯主)로 만들어 준다니까.
방문을 열고 들어선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널따란 실내에 발가벗은 남자 두 명이 뱀처럼 엉켜있었다.
"어맛!"
뜨거운 애무를 나누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에  고명지가 짤막한 비
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큭큭큭! 프! 하하하! 예술이다 예술."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옷을 벗고 둘이 엉켜있기는 한데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아니 발기한 물건을 수습할 길이  없으니 진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서로가 비연 비화를 부르며 헐떡거리는 게 다였다.
"야, 어떻게 좀 해봐. 저러다 정말 큰일나겠다."
"재미있잖아. 남자 둘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는데 잘됐네."
"너 정말 그럴래? 조금만 더 있으면 주화입마 걸린다고."
고명지가 뾰쪽한 고함을 질렀다. 더 이상  두고볼 수가 없었다. 이미
색색만화공에 중독된 두 사람은 기척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온통 붉어
진 몸 상태로 보건대 주화입마로 이어질게 분명했다.
"그래? 그럼 안되지 하오대문의 좌우호법인데."
그제야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야혼이 욕실로 달려가 찬물  한 통을
들고 나왔다.
"원래 개가 교미할 때 떼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뜨거운 물이
거든, 하지만 지금은 뜨거운 물이 없는 관계로."
촤-아악!
"허억! 너?"
"허억! 곰 시주?"
동시에 두 마디의 비명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찬 물을 온통  뒤
지어 쓴 두 사람이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야, 새끼들아! 아무리…."
"비연!"
"비화!"
"세상에…."
고명지와 야혼의 입이 턱하니 벌어졌다. 분명 서로를 쳐다보며  질겁
할 듯 놀랐던 두 사람이 이내 엉겨붙어버린 것이었다. 손을  들어 서로
를 가리켰던 동작 또한 색색만화공이었던 거였다.
"안되겠다."
서둘러 두 사람을 점혈한 야혼이 아랫도리만 대충 가릴 정도로 옷을
입혔다. 그리고 태웅과 추기영을 각각 허리에 낀 채 요화문을  향해 몸
을 날렸다.
"자냐?"
두 사람을 요화문에 버리듯 던져주고 온 야혼이 고명지의 방문을 열
어제쳤다.
"일은 잘 됐냐?"
"당연히 잘됐지. 아마 지금쯤 광란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거다."
"왜 드러눕는데, 임마. 이젠 네 방으로 가야지."
또 다시 옆으로 털썩 드러눕는 야혼을 밀어내며 고명지가  소리쳤다.
조금 전 보았던 색색만화공 때문이었다. 둘만 있는  상황에서 색색만화
공을 펼친다면, 그를 거절할 자신이 없었기에 내심 불안했다.
그와 관계를 가져도 괜찮다는 생각을 때때로 하곤 했지만 아직은 마
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야혼은 나갈 생각이 없는지 자루 속에서  몇 권의 책을 꺼내
능청스럽게 머리맡에 쌓았다.
"주역(周易)? 그런걸 책이라 보고 있냐? 성숙한 어른이라면 이런  책
을 봐야지."
고명지가 들고 있던 책 제목을 슬쩍 쳐다본  야혼이 이내 주역을 빼
앗아 한편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가지고 들어온 춘서 한 권을 그녀
가슴위로 얹어놓았다.
"너도 이런 책보냐?"
화집도감(畵集圖鑑)이라 쓰여진 두툼한 책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싱
긋 미소를 지었다. 겉 표지의 그림은 동진(東晋) 시대의 걸출한 화가였
던 고개지의 여사잠도였다. 모사된 그림이었지만 상당한 실력자가 그린
그림임에 분명했다.
대견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이내 첫 장을 넘겼다.
"헤엑!"
그녀의 입에서 낮은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난생처음 보는 생생한
장면들, 남녀가 뜨겁게 얽혀 있는 그림이 양편 가득 그려져 있었다.
수묵으로 그려진 그림이 아니었다. 원래의 색을 최대한 살린 화집(畵
集)이었다. 더구나 안쪽에 그려진 남녀의 표정이라니.
"굳어진 머리를 식히는데는 그것이상  좋은 게 없거든, 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림으로 즐겨. 인물의 표정 묘사나 그런 것들 말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야혼은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내 책… 내놔!"
"알았어…. 생각해서 주니까."
'아이고 이러다 쫓겨날라.'
싸늘한 고명지의 목소리에  찔끔한 야혼이 낮게  투덜거리며 재빨리
주역을 건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오직 책 넘기는 소리만 사라락거리며
들려올 뿐이었다.
"너 말이야…. 무슨 수로 강호를 말아먹겠다는 거냐?"
성격 때문이지 나쁜 의도로 춘서를 준건 결코 아니었는데 좀 심했다
싶었던 고명지가 슬며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대답 대신 낮게 코 고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녀석…. 피곤하겠지. 개뿔도 없는 것들은 몸으로 때워야  하니까. 나
도 그랬다.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안 해본 짓이 없다. 물건
도 안 달린 놈들 소변까지 받아먹었다. 아주 맛있다는 얼굴로, 더 먹고
싶다는 얼굴을 하면서 말이다. 네 녀석이 주었던 그 책은 바로 내 인생
이었다. 그동안 내가 걸어올 길."
환관들, 사내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그들은 백이면 백 변태들이었다.
상대를 때려 쾌감을 얻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온몸에 나무로 만든 성기를 꼽아둔 채 그  위로 배설을 해대며 흥분
하는 자들, 그런 짐승 같은 자들 속에서 지금껏 살아남았던 거였다.
해야할 일이 있기에, 원하는 위치에 올라서야 그 일을 할 수  있기에
참고 또 참았다. 지금의 일 또한 그  위치로 올라가기 위한 과정일 뿐,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다.
"네 녀석을 보면 내 과거를 보는 것 같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는 채찍으로 맞을 때였다.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끼곤 했다. 쾌락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네 녀
석과는 반대되는 상황이었지."
고명지가 쓰게 웃으며 옷깃사이로 조금 드러난  야혼의 흉터를 쳐다
보았다. 양지에게 처음 들었을 때만해도 설마 했었는데, 민산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녀석은 그 흉터를 치료하기 위해  일을 벌이고 있다. 애초에 성공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 아닌 게다. 능력이 생겼기에 일단을  저질러 보
는 게다. 그러다 성공하면 좋은 거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달라질 게 없
다. 다만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또 다른 방법 중의 하나였
다. 물끄러미 야혼을 쳐다보던 고명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한 침대에서 늑대 같은 녀석과 같이 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잠을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오후 참이 돼서야 잠에서 깨어난 야혼은  고명지를 대동하고 사황문
으로 길을 잡았다.
사황문은 마천루 정문에서 보면 오른쪽, 즉 요화문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천루를 나와 사황문이 있는 곳으로 길을 잡은 두  사람의 시야
에 엄청난 규모의 비무대가 보였다.
마도대전을 치르기 위한 장소였다.  마천루 총관인 양홍기의 주도로
진행된 일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듯했다.
각 문파를 뒤로하는 장소에 다섯 개의 천막이 세워지고, 천막과 천막
사이에는 계단식의 관람석이 만들어져 있다.
규모로 보았을 때 마도련 소속 전 무인들이 마도대전을 관람하게 되
어 있는 듯하였다.
"사황문에 볼일이라도 있는 거냐?"
"볼일? 사황문이 화장실이냐 볼일을 보러  가게? 요화문 구경했으니
까 사황문도 한번 보자는 거지."
"그런 녀석이 내공은 왜 분산시키는데?"
"난 말이야, 가끔가다 고명지 네가 동창 제일 첩형이란  사실이 믿어
지지 않을 때가 있어. 돈 많은 부자 놈이 거지새끼처럼  행동하는 이유
가 뭐겠냐?"
"그들을 속이려 한다는 건 나도  알지, 내가 궁금한 건 왜  속이느냐
이거야. 네가 가진 게 있기를 하냐, 강호에 유명인사이길 하냐. 네가 겁
천십웅의 무공 두 가지를 익혔다고 해도, 펼치지 않는 이상  믿어줄 사
람이 없잖아."
한심하다는 얼굴로 고명지가 소리쳤다.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목적을 위해 실력을 숨기는 경우라면 이해하겠지만,  누구도 야
혼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웬만한 세력들은 상주에서  일어났던 일에
하오밀문의 문주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터이고, 마도련 또
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도련 다섯 문파  중 어떤
문파도 야혼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마도대전에 대비하여 마도 거물들을 영입하려고 갖은 노력을 하면서
도 말이다. 한마디로 야혼은 과거와 같이 하오밀문의 문주일 뿐  그 이
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오밀문을 강호에 알리기 위해선  강한 무공을
선보이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남들을 속이기 위해 실력을 감추다니. 웃음밖에  나오
지 않았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하지만 그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 내 취향은
말이다."
"야비하게 뒤통수 까는 것."
"맞아. 멍청하게 넋 놓고 있을 때 사정없이 뒷머리를 까버리는 거지.
잔말말고 빨리 가기나 하자. 양홍긴가 그 자식에게 마차나 하나 장만해
달랄걸 그랬나?"
아스라이 보이는 사황문 건물을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마도련 자체가
워낙 크다보니 한 문파를 방문하고자 하면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주변 경관은 그런 대로 볼만하여 딱히 지겹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지런히  움직인 두 사람은  그로부터 한 시진
후, 사황문 최  심처인 암흑루(暗黑樓)에서 묵사혈제(墨邪血帝)  냉운형
(冷雲亨)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인즉,  사황문을 도와 마도대전의  승자로 만들어
주겠다, 이 말인가? 그것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
황당한 듯, 냉운형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마천루 총관인
양홍기로부터 묘한 녀석이 방문할거란 소식을 들었다. 아니  듣고 나서
바로 잊어버렸다.
그랬던 자가 찾아와서는 사황문을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도와주겠다
는 이유 또한 걸작이었다. 성모궁을 찾아갈 당시 딸인 냉소소가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는데,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고 한다.
"차라리 잔금을 삭감해주는 건 어떤가."
"그건 안되겠습니다. 무공이야 써도 줄지 않지만 돈은 써버리면 없어
지는 게 아닙니까. 부하들도 들어오고  할 터인데 그 녀석들을  입히고
먹이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마도련주가 되셨을 때 추
가로 돈을 더 주시면 저는 좋구요."
"그래 마도대전에 참석하게되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리라 기대
하나?"
자칭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뚱뚱한 청년이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던진 말이다. 그가 판단했을 땐 눈앞의 청년은  일백마에 필
적할 수준은 아니었다.
"일단은 100위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그곳에 있다가 철마문  놈들을
전부 때려잡겠습니다."
"크, 하하하! 이것 보게 젊은이, 철마문 무인들은 서열 100위에겐  도
전하지도 않아. 자네를 건너뛰어 더 높은 자리를 노리고 도전할거란 말
이네."
냉운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도대전의 규칙조차  모르고, 어떻게든
하오밀문을 알려보려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법 선택은 잘했지만 죽으면 아무 소용없지 않은가."
"엥? 상대를 죽여도 되는 비무였습니까? 소생은 다가오는 전쟁 때문
에 상대를 죽이면 안 되는 걸로 알았지 뭡니까?"
"이곳 마도련은 힘이 지배하는 곳이네. 일백마는 힘을 바탕으로 쟁취
하는 자리지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고 얻는 자리가 아니네. 그러니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구경이나 하다가 돌아가게. 관전만 해도 많은 도움
이 될 걸세, 자네 같은 하수들에게는…. 그만 물러가게."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비무를 한번 시켜주시는 건 말입니다.  일백
마에 도전하려고 뽑아둔 사황문 문도 누구라도 좋습니다."
"건방진…!"
냉운형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솟구쳤다. 하오밀문, 문파 축에도 끼
지 못한 그런 곳의 문주가 비무를 신청하고 있다. 그것도  일반 제자들
이 아닌 일백마가 후보를 상대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찮은 이 하오밀문의 문주에게 세상
넓은걸 가르쳐주신다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요."
사뭇 도전적인 눈으로 냉운형을 쳐다보았다. 사실 냉운형이란 인물에
대해 궁금증이 많았다. 당가려와는 달리 냉소소는 본인의  의지로 성모
궁을 찾아 나선 게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였다. 딸을 죽
음의 길로 내몬 비정한 아비가 바로 냉운형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은가?"
"그 말…. 허락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비무 상대를 죽여도 된
다는 말로 받아들이지요. 비무 장소는 어디입니까?"
"밖으로 나가면 소 연무장이 있네. 그곳에 가서 기다리게."
"빨리 보내주십시오. 누굴 기다리는 건 질색이라서 말입니다."
싱긋 미소를 던진 야혼은 밖으로 나왔다. 태양은 이미 서쪽으로 자취
를 감추고 조금씩 어둠이 밀려왔다. 이미 소식이 전해졌는지 연무장 주
변으로 하나둘씩 횃불이 켜지고, 사황문 수뇌들이 하나같이  느긋한 얼
굴로 밖으로 나왔다.
"왜 하필 사황문이냐?"
"그랬잖아, 냉소소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그녀 일행을 구해준 사람은 너희들이라 했던 것 같은데? 너 혹시….
꿈도 야무지다 이 녀석아. 넘볼 상대를  넘봐야지. 그녀는 이번 마도대
전이 끝나면 혼례를 올리게 되어 있어."
"혼례? 젠장! 그럼 하오대문 청해지부는 물 건너갔네? 이 잘생긴 얼
굴로 그년이나 꼬셔보려 했는데. 상대는 누구래?"
"마음십수(魔音十手) 자룡(仔龍), 만수문의 차기 후계자."
"걔도 겁천십웅의 무공 익혔냐?"
"익힐 수가 없지. 그  자가 익히려면 천비동의  기연을 얻어야 하는
데."
"그럼…, 남자 녀석이 좀 기우네?"
"그래도 하오밀문의 문주인 너보다는 백 배 천 배 낫지."
"이년아 조건 가지고 결혼했다가 파탄 난 집이 얼마나 많은 줄 알기
나 하냐? 암컷과 수컷이 같이 살려만 말이다, 속궁합이 맞아야해. 잠자
리에 문제가 없는 가정은 웃음이 끊이질 않는 거야."
"그건 너처럼 없이 사는 것들 이야기고. 저들처럼 사는  작자들은 잠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게 조건이다. 이제 어쩔래?"
야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껏 추진했던 일의  정점엔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혔던 냉소소가 있었음에 분명했다. 그런데  그 당
사자가 다른 남자의 부인으로 내정되어 있으니.
"상관없어. 결혼 선물로 마도련이나 안겨주지 뭐. 혹시  아냐, 고맙다
고 한번 줄지. 어이구 저기 나온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1) - 마도련주로 만들어 준다니까(2)
연무장 가운데로 나오는 인물이 두  사람의 시야에 잡혔다. 그 또한
허리에 도를 차고 있었다. 아마 야혼이 도를 가진 것을 보고 그와 맞추
어 내보낸 무인인 모양이었다.
"군철(窘哲)이라 하오이다. 거치도(鋸齒刀)이라 불리고 있소."
30대의 건장한 체격의 장한이 야혼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톱날처럼
생긴 칼날이 있는 도를  사용한다 하여 거치도(鋸齒刀)란 별호를  얻은
자였다. 그의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중병인 거치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힘과 톱날에 의한 살상력이다. 톱날처럼 생긴  부분으로 무기를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상대의 몸을 찢어버리는 잔인한 무공의 소유자가
바로 그였다.
"하오대문의 문주 야혼이외다. 별호는 없소."
"하오대문? 쿡! 이제는 개나 소나 전부 대(大)자를 붙이는구먼."
군철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그동안 익힌 무공도 시험해 볼
겸 비무(比武)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심  놀랐다. 3일 남은 마도대전
을 앞두고 비무라니.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오직 운기행공과
명상에만 몰두하고 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상대를 물었다. 그런데 상대가 하오밀문의  문
주란다.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100위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고 하였나? 내가 노리는 자리는 일백마
서열 70위다. 너 같은 놈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다."
"이런 씨팔새끼들! 이  동네 새끼들은 전부가  반말이야. 야 새끼야!
네 놈의 눈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난 하오대문의 문주야! 너희  사황
문에선 그런 것도 안 가르치데? 도대체  부하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냉운형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야혼이 커다랗게 고함을 내질
렀다.
"저런 쳐죽일 놈!"
냉운형 곁에 있던 비쩍 마른  인물이 나직한 고함을 질렀다. 혈환사
(血幻邪) 엄시우(儼試于), 일백마 서열 11위인 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
가 흘렀다.
그 뿐만 아니었다. 냉운형 역시 잔뜩 찌푸린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
었다. 군철과 같이 도매금으로 넘어가며 이 동네 새끼들에 포함되어 버
린 것이다.
'팔 하나만 잘라 징계하라!'
망연한 얼굴로 이편을 쳐다보는 군철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말로는
죽을 수도 있다 하였지만 사실 하오문주를 해할 마음은 없었다.
단지,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만 알려주려 했었는데. 생각해 줄
필요가 전혀 없는 녀석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냉운형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몸을 떨고 있는 여인이 있었
다.
백색 면사로 얼굴을 가린 냉소소였다. 처음 그녀가 비무에 관한 내용
을 들었을 때는 야혼의 이름은 듣지 못했다. 단지 하오밀문  문주가 찾
아와서 비무를 한다고 하였고, 환영마도법을 익힌 군철의  경지를 확인
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늦게 나왔다.
그런데.
"네가 왜 이곳에…."
야혼의 모습을 발견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불귀동의  생
활을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서는 안 되는 인물.  오직 아득한 기억 속에
서만 존재해야할 사람이 야혼이었는데. 그가  마도련을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신분으로. 더구나  마도대전까지 참석하려
고 하다니. 도무지 야혼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소소야, 얼마나 걸리겠느냐?"
"네? 아, 무슨…."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냐. 벌써 두  번이나 물었다. 걱정하지 말
거라, 네가 목숨을 구해준 녀석인데 죽이기야 하겠느냐. 적당히 징계를
내리라고 하였다."
당혹스런 눈으로 야혼을 쳐다보는 냉소소의 모습을 동정의 눈빛으로
넘겨짚은 냉운형이 어깨를 두드렸다.
"군철이 저 녀석의 팔을 잘라내는데 몇 초나 걸릴지 그걸 물었다."
지난 1년 동안 마도대전에 참석할 후기지수의 무공을 지도한 사람이
냉소소였기에 묻는 말이었다.
"5초 정도 걸릴 겁니다. 어쩌면 10초 정도 걸릴지도 모르겠군요."
"허허! 10초라, 너는 벌써 군철의 마음을 읽은 모양이구나. 이 애비의
생각도 같다. 하늘이 높다는  걸 알려준 다음에  징계를 내릴 것  같구
나."
'아닙니다 아버님! 제가 말한 건  군철이 패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
말씀처럼 하늘 높을 줄 알려주며 징계를 내릴 겁니다. 아니  군철을 죽
일 지도 모릅니다. 야혼은 그런 녀석입니다.'
야혼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내심 말했다. 과거 불귀동에  있을
때의 그가 아니었다. 자신과 당가려가 만들어준 옷이  헐렁해질 정도로
살이 빠져있다.
야혼에게 있어 살이 빠졌다 함은, 곧  내공의 증가로 이어진다. 걱정
해야 할 사람은 야혼이 아니라 오히려 군철일진대.
'나도 모르겠다. 왜 군철보다 네 녀석이 더 밟히는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해야할 대상은  분명 부하인 군철인데,
그보다는 오히려 야혼에게 더 쏠렸다.
평온하던 마음에 파문이 생긴 듯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밟아주겠다, 놈!"
군철의 입에서 묵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잔뜩 살기 어린  목소리는
그의 심경을 대변하였다. 씨팔놈! 놈이 질렀던  그 소리가 귓가에 쟁쟁
했다. 더구나 사황문에선 그런 것도 안 가르쳐주더냐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사황문 전체를 싸잡아 욕을 해댄 것이다.
하찮은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놈이.
"기대해라! 앞으론 오른손으로 밥 먹을 일은 없을 거다."
"킥! 군철이라 했나. 세상은  말이야, 참으로 좆같에.  실력을 쥐뿔도
없는 새끼들이 문파의 후광을 업고  큰소리 치는걸 보면 말이다.  오른
팔이라 했나? 좋다, 힘이  있으면 잘라가라. 대신  오른 팔을 잘라내지
못하면…."
쿠-웅!
씨익,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앞발을 힘차게 내딛었다. 동시에 왼손으
로는 비천묵령도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공격을 목적으로 뽑은  도가 아
닌 듯, 역수로 비천묵령도를 쥐고 있었다.
"간다!"
돌진, 야혼의 움직임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었다. 무공을 익힌 무
인들이면 누구나 알고, 시전하는 일정한 규칙을 가진 보법이 아니었다.
마치 성난 황소가 달려들 듯 군철을 향해 무작정 돌진해 들었다.
뒤쪽으로 뿌연 먼지가 일었다.
"돼지 새끼!"
도를 역수로 쥔 채  달려오는 야혼의 모습에 군철의  입매가 슬며시
비틀렸다. 기초도 되어있지 않은 놈과 도를 섞어야 한다는 사실이 창피
하기까지 하였다.
"1초에 끝내진 않을 거다. 실컷 희롱하다 끝내주겠다 놈!"
스르릉!
그의 허리에서 미약한 소음과 함께 군철의  무기인 거치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타오르는 불빛에 거치도의 톱날
이 섬뜩한 살기를 뿌린다.
가슴 앞으로 거치도를 세운 군철의 신형이 좌우로 천천히  움직였다.
환영보(幻影步), 환영마도법 상에 있는 보법이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군철의 신형이  조금씩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그의 신형이 어느 순간부터 실체와 환영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급기야 사방에 허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너 같은 놈에겐 초식도 아까워."
어떤 변화도 없이 직선으로 달려드는 야혼의  전면으로 몸을 날리며
수중의 거치도를 힘차게 내리쳤다. 그런데 그의 거치도가  나아가는 방
향이 이상했다. 비대한 야혼의 몸통을 노리는 게 아니라, 그가 쥐고 있
는 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먼저 수중의 도를 떨구겠다는 의도로 펼친 1초였다.
차앙!
푸른 불꽃과 함께 비천묵령도와 거치도가 십(十)자로 교차했다.
"어떠냐 놈! 거치도의 묘용은 바로 이거다."
거치도의 톱날에 꽉 낀 상대의 도를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무 간단했다. 단 일초만에 상대의 도를 봉쇄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슬쩍 손목을 돌려 천천히 끌어당기며 말했다. 당황한 놈의 표정을 즐
기고 싶었다. 스산한 미소를 머금고 상대를 쳐다보던 군철이 흠칫 표정
을 굳혔다.
놈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였다.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놈도 웃고 있었
다. 흰 이를 드러내며 일자형의 직도(直刀)를 천천히 당기는 것이었다.
끼이익!
쇠끼리 밀리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도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야혼의 검은 도가 군철의 다리를 노리고 횡으로 움직였다.
"헛!"
낮은 비명을 토해낸 군철이 재빨리 보법을 펼쳐 몸을 뺐다. 일순  무
릎 쪽이 시원해짐을 느낀 그가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양 무릎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두 다리를
잘릴 뻔한 공격이었다.
"아깝네, 병신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런 죽일 놈이!"
얼굴이 붉어진 군철이 거친 고함을 지르며 극성의 환영보를  펼쳤다.
문주님을 비롯한 사황문 수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바지를 잘렸
다는 사실이 못내 치욕스러웠다.
5성에 달한 환영보였지만 대단했다. 환영과 실체를 번갈아 만들며 움
직이는 그의 신형은, 상당한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지점을  찾기 힘
들 정도로 빨랐다.
사방으로 빠르게 움직이던 군철의 눈에 실체를  찾기 위해 머뭇거리
는 야혼의 모습이 들어왔다.
차가운 살소를 머금은 군철의 신형이 눈동자를  굴리는 야혼의 전면
으로 공간을 단축하며 날았다. 하늘로 번쩍 지켜든 거치도가 불빛에 번
쩍 빛을 발한다 싶더니 야혼의 머리를 향해  무서운 기세를 머금고 떨
어졌다. 도의 무게와 내공을 이용한 일도양단의 공격법이었다.
차앙!
야혼의 동작 또한 빨랐다. 순식간에 무릎을 구부리며 자세를 낮춰 비
천묵령도를 들어올렸다. 또 다시 십자로 교차한 두 개의 도.
위에서 누르는 군철과 아래쪽에서 방어하는 야혼  두 사람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팽팽하게 대치했다.
"이야합!"
더 이상 도가 나아가지 않자, 나직한 고함을 지른 군철이 더욱  내공
을 배가 시켰다. 일순 거치도에  푸른 광채가 솟구치는 듯하더니  빠른
속도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거의 머리맡까지 다가간 도를  확인한 군
철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곧이어 피를 보게 될 터였다. 머리까지 접
근한 도(刀)를 앞으로 당겨내기만 하면 날카롭게 솟은 톱날은  놈의 살
점을 물고올 것이다.
"놈 끝났…. 헉!"
거치도를 끌어당기기 위해 힘을 가하려던 군철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래쪽에서 있어야할 놈의 신형이 어느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거치도
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곰 새끼!"
"개자식!"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군철이 한 걸음 다가들며 거치도를  휘둘렀다.
또 다시 십자로 부딪친 두 개의 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분명 군철은  일
백마에 도전할 실력을 갖춘 고수다.  그런데 야혼을 향한 그의  공격은
무공 고수가 펼치는 초식위주의 도법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밑동을 가진 나무에 도끼질을 하듯 물러서는 야혼을 따
라붙으며 도를 휘둘렀다. 그때마다 상대의 검은 도와 십자로 만나는 건
불문가지.
채-엥! 차앙! 챙! 창창! 챙!
끊임없이 불똥을 만들며 두 사람의 도가 맞부딪쳤다. 다가서는  군철
과 물러서는 야혼. 30장의 폭을 가진 연무장 전체를 사용하며  치고 막
는다. 막 싸움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했다.
"저게 뭐하는 짓이냐?"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냉운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냉소소를
쳐다보았다. 전혀 상식밖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식을 사용하지 않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또한 괜찮다고 생각했
다. 초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이긴다면 그 또한 상대에겐 더 큰 모욕
이라 생각했기에.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일방적으로 군철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속이 없다. 하오밀문의 문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러서
면서도 군철의 도를 전부 받아내고 있다.
힘겨워하는 듯 하면서도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글쎄요, 군철이 무슨 생각이 있는 게 아닐까요?"
'내가?'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냉소소가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 벌어진  상
황은 분명 야혼이 유도하고 있다. 군철의 입장에서는  지금처럼 위에서
내리치는 공격 외에는 다른  공격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위로 들어올리는 동작만 허락해줄 뿐인 게다.
초식을 펼친다거나, 다른 공격을 하기 위해선 내공을 일주천 시켜 새
로운 힘을 축적해야 하는데 그러한 틈을 주지 않는 사람이 야혼이었다.
거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군철을  조정하고 있다는 의미
였다.
냉소소의 예상은 적중했다.
온 힘을 다해 거치도를 내려치고 있는 군철은 황당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도무지 여유가 없었다. 도를 내리찍은 다음, 다른  동작을 할라
치면 살을 애는 살기가 전신을 옥죄였다. 위쪽으로  들어올리는 동작말
고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지체하면 바로 목이 날아가 버릴 듯한  공포가 온몸 가득 밀
려왔다. 그가 끊임없이 도를 들어올려야 하는 이유였다.
"지금부터는 내 차례야, 곰 새끼."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힘차게 일어서며 도끼질하듯 비천묵령도
를 내려쳤다. 조금 전과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앞으로 나아가며 도를 휘두른 사람은 야혼이었고, 엉거주춤 물러나며
검은 직도를 막아내는 사람은 군철이었다.
상황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도를 내리치는  야혼이나, 그 도를 막는
군철은 어떠한 초식도 쓰지 않았다. 단  한가지, 오직 일도양단의 도끼
질이 다였다.
연무장 중앙과 한쪽 끝을 기점으로 하여 두  사람의 신형이 쉬지 않
고 움직여 다녔다. 어느 순간부터 시작되었는지 군철과  야혼의 몸에서
비 오듯 흘러내린 땀이 바닥에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은 누구의 땀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대부분 사황문 무인들은 약하다고 생각하였던 하오밀문 문주의 몸에서
떨어진 땀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냉소소와 고명지 두 사람을 제외하곤.
아니 냉소소의 눈에는 야혼과 군철 두 사람의 몸에서 비처럼 떨어지는
땀방울이 선명하게 보였다.
냉운형이나 냉소소가 10초면 끝나리라 하였던  비무는 1시진을 훌쩍
넘겨 2시진 째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의 공격은 지루할 정도로 같았다.
"이봐! 이 짓도 지겨운데  그만 끝내자. 네  놈은 나의 왼팔을, 나는
네 놈의 오른팔. 어때 괜찮지?"
"좋다 놈! 누가 빠른지, 이번에 끝내자."
'네 놈은 실수한 거다. 나에게 기회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2) - 마도련주로 만들어 준다니까(3)
'네 놈은 실수한 거다. 나에게 기회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
일순간의 여유, 한숨 돌릴 시간이 아니라 내기를 끌어올릴  천금같은
기회였다. 거치도를 들어올림과 동시에 전 내공을 뽑아 올렸다.
15개의 톱날 중 3개밖에 남지 않았지만 놈의  왼팔을 잘라내기엔 문
제가 없을 터였다.
오른손에 거치도를 들고 있는 군철과 왼손에  비천묵령도를 들고 있
는 야혼은 서로가 같은 방향이었다. 차이점이라면 군철은  하늘에서 내
려치는 형국이고, 야혼은 지면에서 들어 올려야 한다는 상황이 다를 뿐
이었다.
"이야합!"
"타핫!"
두 사람의 입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터지고 거치도와 비천묵령도가
동시에 본래의 자리를 떠났다.
"저런 무모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비명을 삼키며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
과는 달리 아버지인 냉운형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앞에 드러난 광경으로는 분명 군철의 도가 빠르게 보였다.  번쩍거
리는 도광(刀光)과 함께 대지를  가르는 거치도는 야혼의 팔을  충분히
자를 정도로 광폭했다.
"아-아악!"
"허억!"
팔이 떨어질 장면을 상상하던 냉운형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한발 앞
으로 나섰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거치도가 머리 위 1척 위치까지 내려왔을 때, 비로소 야혼의 손이 움
직였다. 역수로 쥐고 있던 도의  방향을 바꾸며 그대로 위로  찔러버린
것이었다.
설마, 2시진(4시간) 가까이 베기를 고집하던 그가  찌르기 공격을 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오른쪽 어깨를 관통 당한 군철뿐 아니라 관전하고 있던 무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사 군철의 위치에 자신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만일, 검은 도가 노린 부분이 목이었더라면…….
"크윽! 지금껏 이 한 수를 노리고…."
너무 어이없이 당하고 말았다. 마도대전을 위해 무려 10년 간 노력했
고, 5성에 불과했지만 환영마도법도 익혔다. 그랬었는데, 그동안 익혔던
무공은 맨 처음 환영보를 제외하곤 한 가지도 펼치지 못했다.
미친놈처럼 힘만 쓰다가 오른 팔이 불구가 되었다. 겨드랑이에서  위
쪽으로 관통한 도가 위쪽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운 좋은 줄 알게 친구. 내가 아는 어떤 사람 때문에 자넨 목숨을 구
했네, 도의 방향을 3치만 틀었더라면 어깨가 아닌 목이 뚫렸을 거야."
'자르지 마!'
'소소?'
귓전을 자극하는 여인의 전음에 어깨를 잘라버리려던 야혼이 동작을
멈췄다. 이어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속도로 도를 뽑았다.
"이젠 오른 팔도 구했군."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은 도에 묻은 피를  털어 도갑에 밀어 넣었
다.
정적.
10여 명 모여있던 사황문 수뇌들 중 누구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혈환사(血幻邪) 엄시우(儼試于) 또한 목전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망연한 얼굴로 야혼과 군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목숨만 보존해도 다행이라  여겼던 하오밀문의 문주가  군철을 이긴
것도 부족하여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마치 인심을 쓰듯이.
"허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군."
"아니외다, 이건 목숨을 건 노력의 대가일 뿐이오. 자신을 알고 최선
을 다하는 노력 말이오. 저 친구가 팔 하나 정도를 희생할 각오로 덤볐
더라면 지금쯤 나는 차디찬 시체가 되었을 거외다."
"뭘 위해 그런 모험을 하는가?"
지금껏 야혼을 무시하던 생각을 싹 버렸다. 싸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
는 자였다. 모든 일에 목숨을 걸고 덤비는 자, 대부분의 사람은 무모하
다고 비웃지만,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하오대문(下午大門)!"
"하오밀문이 아니라 하오대문이라…. 살아남기만 한다면 가능하겠군.
좋네, 자네 말대로 사황문  이름으로 마도대전에 참석하게  해 주겠네.
저 녀석 역할 이상을 하리라 믿어도 되겠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철마문 놈들은 나를 죽이고 싶어 발
광하게 되어있으니까?"
"그런데 이름을 올리려면 별호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흑돈(黑豚)! 일명 똥 돼지."
"너? 야, 이년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똥 돼지가 뭐냐 똥 돼지가.
난 하오대문의 문주야!"
느닷없는 고명지의 목소리에 야혼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번  싸움
뿐만 아니라, 민산에서도 싸움을 본 년이 별호라고 지어주는 게  똥 돼
지라니.
"그 별호 어울리네요, 야 문주."
'소소, 너까지? 웃지마 이년아.'
고명지의 말에 동의하는 냉소소를 향해 급하게 전음을 보냈다.
'이 바보야, 속이려면 별호까지 그럴싸하게 만들어야지. 투견공을  쓸
거면서 흑돈(黑豚)이상 가는 별호가 어딨냐? 그럼 아예  흑말이라고 할
까?.'
'커억! 애라 이 나쁜 년들아. 일생에 도움이 안 돼.'
'이따가 나 좀 보자. 사황문 오른편에  보면 타릉호라는 호수가 있어
그곳으로 와.'
'씻고 갈까?'
'또 쓸데없는 소릴. 3경에 보자. 흑돈 야혼, 아주 멋지다.'
"우리 사황문을 도와주실 분은 두 분이 전부인가요?"
"아닙니다, 지금 요화문에 처박혀 회포를 풀고 있는 두 놈이 더 있습
니다. 육승과 거패라 합니다."
"그럼 전부 네 분이네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버님 이분들
차라도 대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응? 그래, 야 문주 안으로 들어갑시다."
"차는 됐고 밥이나 좀 주십시오."
"밥이 되었던, 차가 되었던 일단 들어가세."
경직된 분위기가 풀리며 연무장에 있던 일행이  암흑루 안으로 걸음
을 옮겼다.
"문주님!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저 친구 믿을 수 있겠습니까?"
"글쎄. 굳이 믿어야할 필요가 있는가. 본인 말대로 100위선만 지켜준
다면 우리로선 손해날 건 없는데. 특히 저 여인은 군철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고수네."
냉운형이 야혼을 받아들인 이유 중의 한가지는 바로 고명지였다.  양
홍기가 말을 해주지 않아 정확한 신분은 알 길이 없지만,  그녀의 무공
은 대단했다. 딸인 냉소소가 말하기 전까진 야혼과 같은 부류로 취급했
을 뿐이었다.
그런데 딸의 말을 듣고 자세히 살피자 실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야혼이 싸울 때 슬쩍 슬쩍 내비치는 기운은 자신에 필적할 정도였다.
나머지 3인은 접어두더라도 그녀만으로도 사황문은 전력상승을 가져
올 게 분명했다.
연회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간단한 주연이 베풀어졌다. 군철의 부
상 또한 몇 개월 치료하면 나을 거라  하였기에 경직된 분위기는 많이
풀어졌고, 약간의 웃음소리마저 흘러나왔다.
3경.
간단한 술자리를 파하고 고명지를 마천루까지 데려다  준 야혼은 냉
소소를 만나기로 하였던 타릉호에 도착했다.
작은 호수 정도로 생각했던 타릉호는 상상외로 컸다. 50장 폭을 가진
커다란 호수엔 무수한 별들이 잠겨있었다.
'이쪽이야!'
"벌써 와 있었네?"
싱긋 미소를 머금고 냉소소의 전음이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잠
시 후, 야혼이 도착한 호숫가에 면한 낮은 절벽아래 동굴이었다.
"바보 같은 년."
냉소소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야혼이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  같
지 않은 그녀의 얼굴 때문이었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과거 불귀동에
서 보았던 생기가 없었다.
"변한 게 없구나?"
보자마자 욕설을 뱉어내는 야혼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변함 없는 사람, 엄청난 무공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의  행동은
흠주현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같다. 1년 반만의 만남이란  사실이 믿어
지지 않는다.
"그런 너는 왜 이리 변했냐? 이 얼굴 좀 봐라. 불귀동에 처박혀 나랑
살지."
냉소소의 볼을 붙잡고 길게 늘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글쎄, 가끔가다…."
볼을 잡고 흔들어대는 야혼의 손길을 그대로  방치한채 어색한 표정
을 지었다. 어쩌면 야혼의 말처럼 그 곳에 눌러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
을 많이 하게 되었다. 무공을 완성하고,  천하에 다시없는 강자가 되었
지만, 여전히 후실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냉소소."
"응? 응."
"한 가지만 대답해 봐. 그 치 사랑하냐? 아니 그 자와 결혼하면 행복
하게 살 자신 있어?"
"알고 있었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야혼의 눈을 주시했다. 자신과 자룡과의  정혼은
사황문 내에서도 비밀에 해당한다. 아버지와 측근 몇몇을  제외하곤 누
구도 알지 못한 사실을 야혼이 알고 있다니.
"네 옆에 있던 그 여자?"
"쓸데없는 소리말고 묻는 말이나 대답해."
알만 하다는 듯 기이한  미소를 머금은 냉소소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랑은 무슨, 얼굴 한번 제대로 본적이 없구먼."
"잘 한다! 미친년, 겁천십웅인가 하는 무공이 울겠다."
"뭐-하는 짓이야?"
"목욕하려고 그런다 왜. 어째 힘을  쓰는 것보다 숨기는 게 더  어렵
냐?"
바로 냉소소 앞에서 옷을 훌훌 벗어 던진 야혼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또 한 명의 죽음이 결정되었다.  마옥성(魔獄城)을 운영하는 자의 아들
의 죽음이.
"어이그, 이 때 좀 봐! 누가 똥 돼지 아니랄까봐  검은 때가 숭숭 밀
리네. 이럴 땐 말이야 팔이 좀 길었으면  좋겠어. 혹시 사황문 무공 중
에 팔을 늘이는 그런 무공은 없냐?"
하지만 냉소소의 시선은 야혼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 끝자
락을 붙잡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가 벗어 던진 검은 옷이었다.
온통 너덜너덜해진 옷, 마치 야혼 전신에 있는 흉터처럼 그의 옷  또
한 상처투성이었다. 온통 꿰맨 자국이  가득한 옷을 1년 반 동안  입고
다닌 것이다.
"야! 팔 늘어나는 무공은…. 너? 왜이래 이거."
냉소소를 쳐다보며 말하던 야혼이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녀가
느닷없이 옷을 벗고 있는 것이었다.
"씻고 싶을 뿐이야. 나 받아야 한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냉소소가 야혼이 있는 곳을  향해 두 팔과 다리
를 활짝 벌리며 몸을 던졌다.
뭉클!
두 사람의 동체가 한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후회…. 흡!"
후회할 행동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
다. 부드러운 입술과 혀가 그의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동체가 물 속으로 천천히 잠겼다.
'준다 이거지. 주는 건 절대 거절 안 한다. 아니 못한다.'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간 야혼의 손이 탐스런  냉소소의 가슴을 틀어
쥐었다. 고무처럼 탄탄한 가슴이 이지러지고 나직한 비음을  토하던 냉
소소의 입안으로 물이 들어갔다.
재빨리 야혼의 몸을 끌어올린 냉소소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거칠게 부
딪쳤다. 야혼의 등을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이 빠르게  아래쪽으로 이동
했다. 왜 이렇게 급격히 달아오르는지, 마음보다 몸이 그를 원했다.
허벅지를 간질이던 그것을 힘껏 틀어쥐며 나직한 신음을 쏟아냈다.
"너 때문이야, 나쁜 놈! 춘서 때문에, 용봉환락무 때문에 이렇게 변했
다고."
야혼의 어깨를 깨물며 웅얼거렸다.  25살의 나이에 알아버린 성(性),
그 성 때문에 잠자는 게 두려웠다.  꿈을 꿀 때면 언제나 야혼의  꿈을
꾸었다. 그와 같이 용봉환락무를 시전하던 꿈을.
무공에 열중하고,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몸을 혹사시켰지만,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 있었다.
그런데, 야혼의 알몸을 보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꿈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그를 원했다.
"하-아!"
엉덩이가 번쩍 들어올려지자, 왠지 모를 기대감에 절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하악!"
"허억!"
두 사람의 입에서 격렬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야혼보다는 냉소소가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 춘서를  통해 수많은 기술을  익혔고, 야혼을
통해 시험했다. 불귀동에서 파악한 야혼의 약점은 여전히 유효했다.
"좋-아!"
냉소소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가만히 몸을 움직이며  야
혼의 표정을 살피는 여유까지. 냉소소, 그녀는  더 이상 조신한 처녀가
아니었다. 이미 선수가 되어있었다.  천천히 빨리, 두 마디를  반복하여
속삭이며 야혼의 움직임을 조절했다.
"허-억!"
야혼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오고, 냉소소 또한 격렬하게  몸
을 떨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체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야."
"이게…. 너 그동안 정력제 먹었냐?"
냉소소의 엉덩이를 틀어쥔 야혼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  순간
에 주도권이 그녀에게 넘어가 버렸다. 그녀의 지시대로  열심히 움직이
다 절정을 맞아버린 것이다. 결코 일어나서도,  있어서도 안 되는 상황
이었다.
"쉿! 지금은 몸으로 말하는 때라고 내가 그랬잖아."
손가락을 들어 야혼의 입술을 막아버린 냉소소가 아래쪽으로 지그시
힘을 집중했다.
"동굴로 가!"
"응? 빌어먹을 년."
동굴로 가자는 그녀의 말에 이제야 눈치챘다. 냉소소는 사황문에  있
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십만대산 불귀동으로 돌아가 있었다.
동굴에서 다시 열풍이 불었다. 적무와 백무가 뱀처럼 얽히며  서로를
탐닉했다.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던 백무와 적무가 두 사람의  몸 속으로
스며들고 동굴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정말 푹신하네?"
야혼의 위에 엎드려 있던 냉소소가 낮게 말했다. 불귀동에서  당가려
가 누워보라고 했었는데, 지금에서야 그의 몸이 참으로  편안하다는 걸
알았다. 그 때보다는 훨씬 말랐지만 아직은 침대로 쓰기엔 부족함이 없
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뭘?"
"이 가슴속에서 불어 나오는 찬바람…. 잠재울 수 없겠니? 이제는 힘
도 생겼고, 갚아 줄 능력도 생겼잖아…. 그만 잊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거 아냐? 힘이 생기니까 말이냐, 저기 보이는 저 봉우리를 올라가
고 싶어졌다. 구름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저 두  봉우리 정상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마도련 남쪽을 가로지르는 파안객납산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누워
있는 동굴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두 개의 봉우리 끝에서 희끄무레
한 구름이 걸려있다. 가파른 산, 올라가더라도 숨을 쉴 수 있을지, 그마
저도 불투명한 곳이다. 어쩌면 올라가지도 못하고 중간에 숨이 멈출 수
도 있다.
"그래서 저 산을 깎아  내리려하는 거냐? 낮아지면 오르기  쉬울 것
같아서? 올라가면 가슴속에 칼바람이 멈출 것 같아서?"
"아, 참! 내가 말했던가? 소소 네 가슴이 더 커졌다는 말. 여기 엉덩
이도 그렇고. 더 커지고 더 예뻐졌다. 25살이 넘어가면 더 이상 성장이
힘들다고 했는데 너는 특이체질인가 봐. 나야 좋지만."
"너…?"
냉소소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어렸다. 아직은 야혼의 가슴엔  타인
을 채울 공간이 없었다. 산을 깎아내겠다는 한 가지 목적  외에는 관심
도 두지 않는다.
"좋다고? 근데 정말 내 가슴이 그때보다 더 커졌냐?"
이내 표정을 바꾸며 환하게 웃었다. 지금 순간만 생각하기로 하였다.
당장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몸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야혼의 귓전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다시 뜨거운 열기와 함께 두 사람의 입에서  앓는 듯한 비음이 새어
나왔다.
서늘한 바람, 찰랑이는 호수, 그리고 그 속에 떨어진 무수한  별빛들.
타릉호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갔군…."
설핏 잠이 들었다 깨어난 야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치  불귀동
동굴에서 겪었던 상황과 비슷했다. 잠시 잠이 들었을  뿐인데 냉소소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아직 온기가 남아있
다는 사실뿐.
"쿡! 정상이 되었구먼. 하여간 냉소소 너는."
내기를 끌어올리던 야혼이 낮은 웃음을 토했다. 요화문에서 몸을  혹
사한 후, 지금껏 운기행공을 하지 못했는데 그녀와의  관계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가 굳이 필요도 없는 용봉환락무를 펼친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
이란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냉소소가 남긴 체취를 한껏 들어 마신
야혼이 밖으로 나왔다.
"저 두 봉우리 사이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봉우리가  있지. 그것마저
도 평지로 만드는 게 나의 목표다. 여호치가 있을 터이지만…."
명교(明敎), 어머니의 고향이었고, 자신에겐 지옥이었던 그곳.
"가능하다면 전부…."
주먹을 불끈 틀어쥔 야혼이 마천루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길을 택하지 않고 으슥한 수림(樹林)을 통해 몸을 날리던 야혼의 신
형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기이한 느낌에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그가 지나온 길은 사황문과 요
화문 사이의 완충지역인 울창한 숲길이었다. 서로간의 담을  맞댄 상황
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조성한 수림이다.
수림의 끝에는 조그마한 공터가 있는데 원로들이 사용하는 연무장이
다. 지금 야혼이 도착한 곳이 바로 그 연무장 초입이었다.
"환접(幻蝶)인가? 또 하게 되면 나는  물개의 경지로 들어서게 되는
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가슴은 폭발할 듯 요동쳤다. 결코 환접  정
도의 살수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아니었다. 모든 기운이  자신의 몸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처음 겪는 엄청난 고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인 게
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3) - 개(犬)가 되면 또 어떠랴(1)
개(犬)가 되면 또 어떠랴.
후-흡!
몇 차례 심호흡으로 마음을 추스른 뒤에야 야혼은 공터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바로 물러
나야 했다.
"도(刀)?"
공터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는 찰나 안쪽에서  살갗을 후벼파는 듯
한 기운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모든 기운이 전부
살기를 머금은 도라는 것이었다.
"씨팔! 이 소 잡는 백정 앞에서 감히 도를 들이밀어?"
입매를 슬쩍 비튼 야혼은 비천묵령도를 뽑아듦과 동시에 금강철피공
을 끌어올렸다. 온몸이 비천묵령도와 같은 색으로 변한  야혼의 동체가
공터 안으로 힘차게 파고들었다.
쿠-웅!
깊게 파인 족적의 흔적과 함께 검은 색의 비천묵령도가 반원을 그렸
다.
슈카강!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놀라운  광
경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비천묵령도가  자른 곳은 허공일진대, 쇠끼
리 맞부딪칠 때 발생하는 불꽃이라니.
"제길!"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부지불식간에 몸이 공터 밖으로
밀려나가 있었다. 상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밀
리고 말았던 것이다.
"튀엣! 좋다고."
야혼은 비천묵령도의 손잡이에 걸쭉한 침을 뱉어내고는 혼신의 내공
을 끌어올렸다. 일순 검은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옷 주위에서
검은 광채가 일렁였다. 더하여  그의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번쩍였다.
야차금강무적강(夜叉金剛無敵 )과 번쩍이는 눈, 비천묵령도, 그리고 전
율적인 살기. 전설에 나오는 야차(夜叉)의 강림이 저러할까,  그의 주변
은 온통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들어찼다.
"저건 또 뭔가?"
야혼이 있는 맞은 편 숲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도축장에
서 쓰이는 직도를 가만히 내밀고 있는 이자는 마천루의 도마였다.
도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기천세로부터 야혼에 대해 듣고  도
대체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녔는지 시험해볼 요량으로 밖으로 나왔다.
녀석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바로 초식을 펼쳤다.
도(刀)나 검(劒)을 쥐고 펼치는 마지막 초식인 이기어도술이었다.  이
기어도술을 넘어서면 더 이상 무기가 필요 없는 경지가 된다.  즉 마음
만으로 상대를 살상할 수 있는 심검의 단계가 바로 그것이다.
아직 심검의 경지는 요원했지만 이기어도술은 막바지에 달했고, 강호
상에서 받아낼 자가 없다고 자신했다.
굳이 상대를 꼽으라면 마천루의 다른 원로들 외에는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곰같이 뚱뚱한 녀석이 이기어도술로 만들어진 강기의 벽으로 뛰어든
것이다.
온몸을 검게 물들인 무공도 기이하였지만 그 몸을 감싼 광채는 더욱
놀라웠다. 더하여 하늘을 향해 치켜올린 도(刀)까지.
"저럴 수가…."
도마의 입에서 비명 같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더욱 놀라운 광경이 목
격되었던 것이다. 야혼의 몸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검은색 일색인 그의 몸에서 백색 운무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이었
다.
"이거 잘못 하다간 낭패를 당하게 될지도…."
긴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강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도마가 재빨리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기어도술의 기운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씨부럴! 더 강해졌다 이 말인데. 좋다 이거야. 힘에는 힘이다. 타핫!"
힘차게 들어올린 비천묵령도를 도끼질하듯 내려찍으며  공터 안으로
몸을 날렸다.
쿠아앙!
도강기(刀 氣)로 가득 차있던  공간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찢겼다.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찢긴 공간 사이로 검은 광채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으헛!"
울창한 수풀 속에서 다급한 경호성과 함께 한 인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3척 길이의 직도가 허공에 무수한 점을 남겼다.
"허공에 찍는 점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다고."
비천묵령도를 휘감아 돌린 야혼이 전면에서 밀려드는  도를 향해 지
옥도법의 1초를 펼쳤다. 검은 광채를 쏟아내던 비천묵령도가 허공에 무
수한 점을 찍었고, 두 개의  도에서 흘러나온 강대한 기운이  중앙에서
맞부딪쳤다.
칙! 칙! 칙! 칙칙칙!
쇠로 된 도(刀) 끝이 부딪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도
에서 솟구친 실낱같은 강기들이 끊임없이  얽히며 무수한 흔적을 남겼
다. 하지만, 소리가 작다하여 위력마저 약한 건 아니었다.
강기들이 서로 소멸되어 사라질 때마다 허공에  출렁이는 파동이 생
겨났다. 중첩되어 나타난 파동은 주변으로  퍼져나갔고, 공터를 둘러싼
나무를 가루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상황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서로간의 거
리는 1장으로 좁혀졌고, 상대의 얼굴마저 확실하게 보이는 상황.
들어올린 도에서 진득한 살기가 사방으로 요동쳤다. 그 살기 또한 단
순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의형심강이라 부르는 엄청난 경지였다.
후-흡!
"씨팔! 하지도 못하는 노인네가?"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임을 알아차린 야혼이 거칠게 욕설을 뱉어냈다.
스스로 최고라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나이 먹은 노인에게까지 밀린다
고 생각하니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깊게 숨을 들이키고 난 야혼은 지옥도법 2초를 펼칠 준비를 했다.  2
초인 지옥수라참은 점을 찍는 게  아니라 선을 긋는 작업이다.  동시에
그어지는 50개의 선은 허공을 완전하게 없애버린다.
한번 베어낼 때마다 도탄강기(刀彈 氣)가 허공에 남게 되고  결국에
는 한 공간이 전부 죽음의 강기로 들어차게 된다.
모든 게 잘린다. 50여 개의  도탄강기 속은 오직 죽음만이 존재하는
어둠의 공간으로 변한다.
"그만!"
야혼이 풀어내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도마의 입에서 다급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단순한 비무 차원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기
운에서는 목숨을 걸어버린 자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동귀어진(同歸於
盡)의 의지가 읽혀졌다. 죽이지  못하면 본인이 죽고  말겠다는 의지를
도에 담아 버린 것이다.
하지만.
도마(刀魔)의 외침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야혼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직하니 말했다.
"좆까!"
마치 초식명처럼, 짧게 고함을  지른 야혼이 비천묵령도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단 한번의 내리침 같았지만 그  속에서
무수한 변화가 생겨났다. 겹겹이  쌓여가던 도탄강기는 하나의  거대한
벽을 형성했고, 뒤이어 도마의 전면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갔다.
"이런 미친 놈!"
도마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자신의 말을  들을 거라 여겼다. 비
무차원이란 사실을 눈치챘을 녀석이 죽음을 담보로 공격하다니.
더욱 환장할 노릇은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받아치자니 서로간에 엄청난 내상을 당할 건 분명하고, 그대로  두자
니 자신이 당하게 생겼다. 피할 곳은 단 한  곳, 1장 아래의 지면이 유
일한 여유공간이었다.
"에라, 개자식아!"
종마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음을 실감하며 전 내공을  뽑아 땅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과앙!
간발의 차였다. 거의 머리칼 하나  차이로 지옥수라파(地獄修羅破)를
피한 도마가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야, 이 무식한 놈아, 어른에게 그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거냐?"
한순간 2장 깊이까지 파고든 도마가 감히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여전히 위쪽에선 살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
자마자 공격을 당할 건 뻔한 일이었다.
"씨팔! 도망을 쳤다 이거지? 끄응!"
주변을 휘 둘러보던 야혼이 커다란 나무  곁으로 다가가 나무둥치를
움켜잡고 힘을 가했다.
우두둑, 나무가 뿌리 째 뽑혔다. 야혼은 그 나무를 들고 도마의 흔적
이 남은 구멍으로 다가갔다.
"잘됐다, 아예 무덤으로 삼아라."
나지막하니 이죽거리더니 나무를 들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쿠웅!
3장 높이의 나무가 구덩이를 속으로 깊숙이 박혔다. 그 다음은 더 가
관이었다. 위쪽만 조금 남은 나무를 지면과 같은 높이로 잘라낸  뒤 커
다란 바위 하나를 들고 다시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이었다.
"이건 혈향비도류의 응용이다, 씹탱아!"
10여장 높이까지 올라간 야혼이 나무를 박아 넣었던 자리를 향해 거
대한 바위를 사정없이 던져버렸다. 그냥 던진 것도  아니고 겁천십웅의
일인인 구약종의 혈향비도류를 운용하면서.
"이런 야비한 새끼!"
위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에 도마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땅
속에서 그가 펼치는 무공은 땅파는 기술이라 알려진 지둔공이었다.
주로 무덤을 도굴하는 자들이나 쓰는 그런  무공을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10여 장 정도를 파고든 도마가 그제야 운용하던 지둔공을 풀었다. 문
득 자신의 몰골을 살피던 도마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땅속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뭐가 무서워서, 자신이  더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땅속에 들어와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왈칵 화가
치민 도마가 콧김을 씩씩 내품었다.
"나쁜 놈! 나도 더 이상 못 참겠다."
바락바락 고함을 지른 도마가 위쪽을 향해  이기어도술을 펼치며 몸
을 날렸다.
파앙!
마치 파던 샘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듯  나무와 바위덩어리가 동
시에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뒤이어 산발한 머리의 도마가 고함을 지
르며 솟아올랐다.
"그래 이 자식아 한번 해보자. 내가 이정 그놈을 봐서 참으려 했는데
도저히 안되겠다. 어른 알기를 발가락 때처럼…. 으-아악!"
제 자리에서 한바퀴 빙그르르 돌던 도마가 갑자기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없었다. 구멍 속으로 나무를 박아 넣고, 바위까지  던져 넣었던
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비웃듯 서늘한 바람만이  살랑살랑 불어왔
다.
"사부님!"
콧김을 내뿜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
리는가 싶더니 한 인영이 다가왔다.
백마 서열 7위인 도왕(刀王) 기천세(其千勢)였다.
"이게?"
엉망으로 변한 도마의 몰골에 할말을 잃었다. 온통 흙투성이에  머리
는 산발이다. 마치 엄청난 격전을  치르고 난 사람처럼 추레한  모습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까지 갈고 있다니. 난생 처음 보는 사부의 모습이었
다.
"그건 뭐냐?"
기천세의 손에 들려 있는 게  무엇인지 왜 모를까. 느닷없이 술병을
들고 온 기천세의 저의가 의심스러워 묻는 말이었는데.
"이 이거요. 그 친구가 가져가라고 하더군요. 사부님이 찾았다며."
"나쁜 놈! 다오."
낚아채듯 술병을 빼앗아 거칠게 입안으로 쏟아 넣었다. 단숨에  술을
비워버린 도마가 거칠게 술병을 던지며 물었다.
"도대체 그 놈의 경지는 어느 정도냐?"
"사부님!"
"나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묻는 거다. 믿을 수가 없어서."
"이사질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향후 10년이면 무림엔 그 녀석
보다 강한 자는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10년? 웃기지 말라해라 이놈아. 5년이면 된다.  아니 5년도 길게 잡
은 거야."
"녀석이 그렇게 강했습니까?"
"내 꼴을 보면 모르냐? 무공도 무공이지만  상대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승부에 이용할 줄 안는 놈이야. 싸움이 뭔지 안다고."
야혼과의 비무에서 느낀 점이었다. 분명 무공은 자신이 한 수 위였는
데 결과적으론 패배했다. 같이 죽지 못한다는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자
마자 놈은 동귀어진의 수를 사용했다.
살아남을 거란 생각으로 싸움에 임하는 자와 죽을 각오로 덤비는 자
의 승부는 이미 정해져있다고 봐야한다.
실력이 한참 딸리는 자라 할지라도 승리를  거머쥐기도 하는데 하물
며 야혼은 크게 밀리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패한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옥도법을 완벽하게 익혔는지도 모르겠다."
"설마요, 지옥마제조차 마지막 초식을 익히지 못했다고 하였는데."
기천세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300년 전 잠사옹으로부터  알려
진 사실이었다. 비록 상고시대의 비급을 바탕으로 창안한  무공이 지옥
도법이라지만 본인조차 마지막 초식은 익히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랬었는데, 그 무공을 야혼이 완전하게 익혔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
었다.
"확실한 건 아니고, 그저 추측일 뿐이다. 지옥도법과 야차혈마지체는
가장 환상적인 궁합이라 할 수 있으니까."
살기를 극대화시켜서 펼치는 지옥도법과 전율적인  살기를 뿜어내는
야차혈마지체는 그가 보기엔 최상의 궁합이었다.
지옥도법을 완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유일한 사람이 바로 야혼이
었다.
"그만 들어가자. 제기랄!"
주변 정리를 위해 손을 들어올린 도마가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조
금 전 당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던 탓이었다.
똑!똑!똑!
"뭘 두드려, 그냥 들어오지."
"그래도 숙녀 방인데. 혹시 옷을 입고 있다면 벗을 시간을 줘야지."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고명지 방으로 들어섰다.
"하여간…. 그 두 짐승은 어떻게 하고 있데."
"응, 두 짐승에게 당하는 년들이 좋아 죽겠다고 난리야. 오랜만에 건
실한 물건 들어왔다고."
"그놈들이 요화문에 들어간지 3일째라는 거 아냐?"
"알아서 해주겠지. 설마 마도대전에 참석할 사람을 병신이야  만들어
보내겠냐? 그리고 그 놈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다가 죽는 게 소원
인 놈들이니까."
"너는 안 그렇고?"
"옛날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냐."
"다른 욕심이 생겼다는 말처럼 들린다."
"바보! 지금은 배 위에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잖아. 그러니 다
른 꿈을 꿀밖에."
"훗! 그냥 자라. 이 악물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자라."
"내가 이 악물고 자데? 그래서 자고 나면 아귀가 그렇게 아팠나? 꼭
한방 맞은 기분이 들곤 했는데."
이리저리 턱을 만지작거리던 야혼이 이불 한  자락을 입안으로 틀어
넣더니 잠을 청했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건데 도리가 없잖아. 살아온 세월이  지랄같아서
인걸. 다행이 금강철피공을 익혔으니 이가 부러지는 일은 없겠다. 근육
이야 여전히 땅기겠지만."
이내 잠 속으로 빠져드는 야혼의 모습을 쳐다보며 고명지가 낮게 중
얼거렸다.
"나도 팔 한번 빌리자."
야혼의 한쪽 팔을 편 고명지가 그  위로 고개를 올렸다. 두 번째 팔
을 베고 자는 남자가 야혼이 되었다. 아버지 다음으로.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4) - 개가 되면 또 어떠랴(2)
이틀 후.
마도대전을 치르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고, 마천루 옆  대연무장에
는 마도련 소속 전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뿌연 새벽 물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련주대행인  종마가 비무대 중앙
에 마련된 단상위로 올라갔다.
데-엥!
그의 손에 들린 핏빛 혈종(血種)이 울자, 일순 대연무장에 정적이 흘
렀다. 뒤이어 종마의 단호한 목소리가 중인들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어떤 동도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천의맹과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
는데 마도대전을 개최할 여력이  어디 있느냐? 그들과  전쟁준비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
다. 우리 마도련의 존재 이유가 뭐냐고."
종마의 첫마디는 철마문 무인들로부터 퍼져나가는 전쟁 준비론에 대
한 반박이었다. 마도대전을 개최하기로 하였지만,  마도련 분위기는 두
패로 갈라져 있었다. 마도대전을 중지하고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자는
철마문 입장과, 300년 전통을 지켜나가자는 다른 문파의 입장.
그러한 마도련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마천루에서 먼저 마도대전
의 당위성을 들고 나온 것이다.
"우리 마도련은 5개 문파의 연합체입니다. 지난 300년  동안 5문파를
묶어주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마도대전이었습니다.  마도대전이 있었
기에 마도련은 발전하였고, 마도의 종주로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전통이기에 지켜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의 규칙이  깨지면 다
른 규칙 또한 쉽게 깨질 터이고, 전통과 규율이 사라진 단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합니다. 마도대전을 개최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저 영감 말 엄청 잘하네?  맛있다. 거패 이것 좀  먹어봐라! 황구
거시긴 모양인데 쫄깃쫄깃하니 죽인다야."
반쪽의 인간들, 피골이 상접한 두 명이 정신 없이 손을 놀리고  있었
다. 태웅과 추기영이 있는 곳은 사황문  천막 뒤쪽, 관전자들에게 차나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급조된 주방이었다.
두 사람이 요화문을 나온 시각은 3시진 전이었다. 요화문에서 준  내
상약을 복용하고 운기행공을 하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래? 목도 축이면서 천천히 먹어 체할라."
"개고기는 웬만해선 안 체한다네. 걱정말고  마음껏 먹어.
싸움도 일단 배가 불러야 잘할 수 있는 거니까."
"허미, 이것들이 한번 하더니  깨가 쏟아지네 쏟아져. 여기  기름 좀
봐라! 그냥 질질 흐른다."
느닷없이 들려온 야혼의 목소리에 개고기를 열심히  주워먹던 두 사
람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졌다.
"니미씨발타불! 이 개불알 시주가!"
"연장, 너 이 개자식."
두 사람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렀다. 요화문을 나서면서부터  듣
기 시작한 말. 처음 정신이 들었을 때만해도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도
대체 얼마나 많은 요화들과 관계를 가졌는지, 드디어 소원 풀이를 했다
고 실내가 떠나갈 듯 웃었다.
그랬던 기분도 잠시, 뭔가 머리를 번쩍 스치는 광경에 서로를 쳐다보
았다. 그러던 차에 방안으로 들어온 야혼에게서 들려온 말이라니. 말뿐
만 아니라 마천루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행동으로 재현해  보였다. 참으
로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둥, 속궁합이 찰떡이라는 둥, 하면서.
설마 설마 하며 야혼의 말을 듣던 태웅과 추기영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한 건 불문가지. 다른 건 몰라도 비연과 비화를 만나  관계를 가졌다
는 사실은 분명하게 떠올랐다. 자신들 둘밖에 없었던 방에서 말이다.
어느 선까지 갔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서로간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말조심을 하면서 음식에 집
중하고자 하였는데 사사건건 야혼이 나타나, 환기시켜주고 있다.
지금처럼.
"내가 마도련에서 잔금 받으면 집 하나 장만해 줄게. 너희 둘이 살만
한 집으로."
"쌰-앙!"
"씨팔노무 시주!"
거친 욕설을 뱉어낸 두  사람이 야혼의 면상을 향해  철탁과 주먹을
동시에 날렸다. 상당한 내공을 실었는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선명하
게 들렸다.
뎅-!
"커억!"
개시를 알리는 종마의 종소리와  야혼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거대한 동체가 허공을 날아 천막 밖으로 거칠게 처박혔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
며 일어나는 야혼에게 무수한 주먹을 뻗어냈다.
"아이고, 씨팔! 이 따위 주먹으로  서열 100윈가 하는 놈을  잡을 수
있겠냐? 아이고 아파라."
"씨팔놈의 문주야. 그깟 도끼질이나 하는 나무꾼 정도에게  당할까봐
걱정이냐? 너 나 잘해라 이 개자식아."
순식간에 사황문 천막 뒤쪽이 어수선하게 변했다. 연신 주먹과  발을
날리는 두 사람과, 맞으면서도 도망치는 야혼,  세 사람의 행동에 사황
문 무인들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몇몇 수뇌들을 제외하곤 야혼 일행을 알리 없는 그들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세 사람의 행동을 쳐다볼 뿐이었다.
3인의 만들어낸 소란에 놀란 사람은 사황문 무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저놈들은…."
사황문과 천막과 마주하는 곳에서 짤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패천마
룡(覇天魔龍) 유마혼(劉魔魂), 삼천룡(三天龍)의 한 명으로 최고의 유명
세를 타고 있는 그가 3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는 자들이냐?"
유혁세 또한 유마혼과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일백마 서열
100위인 쌍부(雙斧) 윤창(尹昌)을 두고 나무꾼이라 하면서, 희롱하는 자
들의 정체가 내심 궁금했다.
"네, 저와 같이 성모궁에 갔던 자들입니다. 하오밀문의 떨거지들."
유마혼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성모궁에 도착했을 춘서를 흘리며
개처럼 짖던 놈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황문도 다 됐군, 저런 놈들을 영입하다니."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냉소소의 얼굴을 흘낏 쳐다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소소 또한 귀환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동안 얼굴 한번 보
지 못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하오밀문의 개종자."
"야! 이 개종자들아! 한 대만 더 패면 이곳에 전부 소문을 내버릴 테
니까, 알아서 해."
우뚝!
정신 없이 야혼을 두드려 패던 두 사람의 동작이 동시에 멈췄다.
"아이고! 연작 문주님, 우리가 잠시 정신이 돌았나 보오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연장 문주님.  그런데 침대도 아닌데 왜  땅바닥에
누워 있습니까. 이 흙 좀 봐라. 육승, 뭐하냐 임마 빨리 안 털고."
"그곳이 더 어울리는 자리 같은데…. 그냥 계속 누워있지 그러나."
"어떤 개 후레자식이 이 야혼에게…. 어?  너는 유마혼? 프! 헷헷헷!
삼천룡께서 어쩐 일이신가. 근데 날개가 없어 날아오를 수 있으려나 모
르겠네."
유마혼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성모궁에서 잃은 팔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무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  팔이 없다는 사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결코 아니다.
결혼 상대를 구할 때부터 바로 문제가 된다. 성모궁으로 출발할 때보
다 두 배 이상  강해졌지만 냉소소에게 청혼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풀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여인에 연연하지 않기로  하였다. 보다 높은 정상을 오르기
위해 모든 것을 접기로 하였다.
"나는 아직도 두 눈에 선해. 성모궁 앞에서 개처럼 짖으며 남천악 가
랑이 사이로 기던 자네의 모습이. 하오대문의 문주자리에  참으로 어울
리는 행동이라 생각하지 않나?"
"아미타불! 연작문주. 늪에 빠졌다가 우리가 살려준  저 염병할 종자
의 말이 맞는가. 정말로 조금 전에 먹었던 그 개처럼  혓바닥을 내밀고
기었단 말인가."
"그 아름다운 광경을 놓치다니, 우리 연장문주가 기어가는 모습은 후
대에 길이 남길 장면이었는데.  어이 유씨 그  장면 좀 자세하게  말해
줘. 그때 우리 문주가 지었던 표정하고, 움직임 말이야.  혓바닥을 얼마
나 내밀었던가. 나중에 하오대문을 방문하는 모든 강호인들이  전부 볼
수 있도록 해야겠어.
"보여줄까 그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유마혼을 쳐다보며 말하는 태웅의 귓전으로 야혼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단지 태웅에게만 들리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직했지만 내공을
실은 야혼의 말은 대부분의 사황문 무인들의 귓전에까지 들렸다.
"보고 싶어! 우리 문주가 어떻게 개새끼 짓을 했는지, 하오대문의 문
주로서 자격이 있었는지 보고싶어."
태웅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황문도 뿐만 아니라 전 마도련  인물들에
게까지 들리도록 바락바락 고함을 질렀다.
"어떻소! 문주 자격이 있는지 구경하고 싶지 않소이까? 그가 문주로
서 자격이 없다면 이 자리에서 내치고 말 것이오. 아니 이 태웅이 하오
대문을 떠나겠단 말이오."
"보자! 우리도 보고싶다. 개로 변한 하오문주의 모습을 보고싶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철마문 진영의 무인들은 거의
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나도 보고 싶네. 그 광경을  본다면 자네들은 결코 저 자를  문주로
모시고 싶은 생각이 없을 걸세. 그건 내가 장담하지."
유마혼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5천 마도련 무인들이 보는 앞에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 도움이 아닌 삼천룡의 힘으로 성
모궁에 다녀왔음을 증명하기엔 그보다 나은 광경이 없을 듯하였다.
"전부가 보고싶어 하오이다, 문주님. 그 당시 어떻게 했는지 보고 싶
어 하오다."
"그러니까 그때…."
"아니오 문주. 여기가 아니외다. 저 무대는 어디에 쓸 거요.  저 위에
서 합시다. 육승과 둘이 남천악과 유마혼  역할을 하겠소. 그리고 냉소
저와 고 소저가 나머지  두 여인의 역할을  하면 되겠군요.  도와주시겠
소."
"태 공자!"
냉소소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때의  상황, 야혼에게 아무런 감
정이 없던 자신마저 분노했었다. 그런 상황을 다시 재현하자니.
"부탁합니다."
"알았습니다."
야혼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별다른 표정이 없다.
다섯 사람이 동시에 비무대 위로 오르자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와 함께 박
수소리가 들려왔다. 태웅의 손이 번쩍  올라가고, 왁자지껄하던 비무장
주변이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오밀문 문주가 개로 행세했던 광경은 차지하고  성모궁에 처음 들어가
는 역사적인 장면이 재현되어질 기대감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고 있었소, 문주."
"냉소저와 당소저 그리고 나는 남천악 일행보다 먼저 성모궁에 도착
했소. 모종의 일로 유마혼 일행과는 해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곳
은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소. 거대한 9층 철탑으로  진을
설치해 두었던 것이지요. 수중에 들고 있던 박도로 철탑을 한번 때려보
았소. 하지만 진으로 보호되고 있던 철탑은 무공이 전혀 없는  내 박
도에 영향을 받을 리가 없었소. 냉소소와 당가려는 철탑을 없앨 내공을
비축하기 위해 운기행공에 들었는데 그 때 나타난 자들이 저들이었소."
야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냉소소와 고명지가  한쪽에 자리하며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자 태웅의 입에서 살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마교놈!"
"나는 마교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성모궁 초입에서 있었던 그 당시의 사건이  다
섯 사람의 몸을 통해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야혼이 전하는 전음의 내용을 뱉어내고 있지만, 태웅의 말은 바로 옆
에서 본 사람처럼 적나라했다.
추기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겉옷을 둘둘 말아 야혼의 등으로  던지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와아! 와! 하하하! 어울린다, 어울려! 역시  하오밀문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다."
태웅과 추기영 1장 앞에 엎드린 야혼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
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혀까지 내밀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개꼴이었다.
"짖어라! 개는 짖어야 한다! 맞다 짖어라, 세게 짖어야지."
태웅이 해야할 말을 관중석에 있는 무인들이 대신하였다. 그들의  목
소리가 들리자마자 야혼의 입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흘러나왔
다.
"컹! 컹컹! 컹! 컹컹컹!"
"꼬리는 왜 안 흔드나 꼬리를  흔들고 혀를 내밀어야 할 것  아니냐.
와! 하하하! 프! 하하하!"
"와아! 멋지다. 정말 개하고 똑같아, 우리 집 똥개가 바로 저렇게  짖
거든."
"그 개 언제 잡을 건가! 잡을 땐 꼭 나를 불러야하네."
"암, 그 개도 살이 엄청 쪘어. 삶아놓으면 다섯 사람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양이 될 거라고."
"저자 정도는 되는…."
야혼을 가리키며 말하던 자가 말끝을 흐렸다. 엉덩이를 좌우로  연신
흔들며, 혓바닥마저 길게 내밀고 기어가는 자.
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웃음이 아니었다. 웃음과  울음이 함께
버무려진 얼굴. 가장 밑바닥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자의
얼굴이었다.
끊이지 않던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 즈음하여  태웅의 목소리가 일
행의 귓전을 강타했다.
"웃어라, 개처럼 웃으란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 놈은 여기서 죽는
다. 꼬리를 흔들란 말이다."
퍼억!
"커억! 컹! 컹컹! 컹컹컹!"
태웅의 발길질에 저만큼 떨어졌던 야혼이 재빨리  몸을 일으켜 엎드
리며 개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태웅의 가랑이 사이로
기었다.
마도련 인물들 사이에선 더 이상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정
말 개 같다고 소리치며 좋아하던 모든 이들이  굳은 얼굴로 입을 닫았
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마도련 무인들 또한 일부 극소수를 제외하곤 무명시절을 거쳤다.  힘
이 없어 도망쳤던 시기가 있었고,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경험이  있었
다. 그랬던 자신의 모습이 바로 저 모습이었다.
강자 앞에서 개처럼 짖어야했던 무기력한 모습.
"멈추게 해야해, 더 이상 놔두면 안 돼."
무인들의 분위기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마도대전 개막을 선
언했던 종마였다.
처음엔 그 역시 다른 무인들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열 받게 하였던
놈들을 치욕스럽게 하는 일이라며 좋아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붉은
피(血)가 그려지며, 죽음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마도(魔道)라는 이름으로 뭉친 곳이 마도련이지만 이곳 또한  인간이
사는 곳이고, 가장 싫어하는 게 힘으로 타인을 핍박하는 행위이다.
더구나 개처럼 짖고 있는 야혼은 그 당시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
한 양민에 불과했다. 무공조차 없는  자를 유마혼과 남천악은 개(犬)로
만들었다.
전후 사정에 상관없이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재미있구먼 좀더 두고보세."
"무슨 말인가? 마도대전을 피로 장식하고 싶은 겐가?"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5) - 생(生)과 사(死)가 있을뿐
손을 잡는 도마에게 낮게 소리쳤다. 비록 말로는 비무 중 어떤  비열
한 수단을 써도 상관없다  하였지만 실제 그렇게 해서  일백마에 오른
자는 없었다. 불의의 사고를 제외하곤 비무자가 죽는 경우도 드물었다.
"어젯밤 각파 문주들에게 말하지 않았나. 되도록 승패를 결정하는 선
에서 비무를 해 달라고."
"그렇긴 하지만…."
"끝났구먼 뭐. 하여간 재미있는 놈들이야."
커다란 비명소리와 함께 야혼의 신형이 비무대  밖으로 떨어지는 광
경이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도 이건…."
"소생, 사황문 소속 거패  태웅이라 하오이다. 일백마  서열 100위인
쌍부(雙斧) 윤창(尹昌)께 도전하겠소!"
황망한 얼굴로 비무대를  쳐다보는 종마의 귓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누구도 하오밀문 인물
들을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철마문 소속인 윤창(尹昌)에게  도전장을
내민 태웅의 행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마도련 무인들이 일제히 종마를  주시했다. 아직 식전행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처리할거냐를 묻는 얼굴들이었다.
"빌어먹을 내 이럴 줄 알았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비무대를 노려보았다. 연극을 하던 나머지  인물
들은 전부 내려가고 태웅만이 남아있었다. 도전장을 던진  그는 사황문
바로 앞쪽 비무대 가장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아직은 행사가 다 끝나지 않았네.  한 시진만 기다려 줄 수  있겠는
가?"
"좋습니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으음!"
나직한 심음을 뱉어냈다. 사황문 천막으로 가서 기다렸으면 싶은데
도전자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  각 문파의 문주들의 축사까지  아직
상당시간이 남은 상황에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어쩔 수 없지, 서둘러 처리하는 수밖에."
각 문파 문주들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할 말이 있으면 요점만  간단
하게 말하라는 요지의 전음이었다.
철마문의 문주인 유혁세부터 시작하여 마도대전을  축하하는 내용의
축사를 읊었으나 누구하나 제대로 듣는 이가 없었다.
유혁세의 축사가 끝나고  단상위로 올라선 사람은  만수문의 문주인
만수존자(萬獸尊子) 자능한(仔能漢)이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31번째 마도대전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
지만 중요한 사실을 공표하기 위해섭니다."
한 순간 주위의 이목을 자신에게 돌린 자능한이 주변을 휘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만수문의 차기 후계자인 소생의 아들 자룡(仔龍)과 사황문의 금지옥
엽 냉소소(冷素素)와의 정혼을 발표하는 바입니다."
마도련 소속 무인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누가 보아도 분명 정략
결혼이었다. 인위적인 혈연관계를 만들어 마도련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
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별개의 세력이 합친 연합체보다는 혈연으로 맺어진  단체가 더욱 강
한 조직력을 갖게 되고  위기대처 능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인물 중에는 철마문  소속 유마혼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굳은 얼굴로 내심 중얼거렸다. 두 세력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철마문
의 전력을 넘어설 것이 분명했다. 지난 10년 간 새로운 무인들을 양성하였
다지만 만수문과 사황문의 연합세력이 어떤 힘을 발휘할지 알 수가 없
다.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
"걱정 마라, 저들의 연합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느니라. 너는 10위안
에만 들거라 그럼 된다. 다만 한가지, 저 놈들…."
유혁세가 가리킨 사람은 비무대 가장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있는 태
웅이었다. 5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상황임에도  전혀 위축되
지 않고 있다.
"아버님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3년 전 만해도 저 놈들은 무공이 없
었습니다. 문제될 소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랬더냐? 그런 자가 어떻게…."
아들의 말에 내심 안도하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보기
엔 거패 태웅의 자세는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 3년의 수련으로 나올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윤창에게 지시를 해 두었습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없애버리라고
요."
단순히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일백마에 도전하기 위해 무공을 익힌 다
른 무인들마저도 하오밀문의 잔당들을 밟고 올라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운이 좋아 일백마에 들어도  마찬가지다, 네 놈들은 우리  철마문의
표적이 되었다. 개종자."
유마혼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렀다. 비무대 위에서 펼쳐졌던  연
극. 그 연극이 끝나면 하오밀문의 문주인 야혼은 더 이상  마도련에 있
지 못할 거라 여겼다. 5천  마도련 인물들의 비웃음 속에 견디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말았다. 무공도  없는 자를 개처럼 짖게 하여
얻은 지위가 삼천룡(三天龍)이 되어버렸다.
정면으로 나서 욕하는 이는 없지만 동정 어린 표정으로 태웅을 쳐다
보는 마도련 무인들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놈들의 피를 보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마도대전 첫  비무를 시작하겠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비무엔 규칙이 따로 없습니다. 실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패배
를 선언하시오. 그럼 더 이상의 비무는 없을 겁니다."
데-엥!
"와! 와-아아!"
생(生)과 사(死)가 있을 뿐.
"일백마 서열 100위  쌍부(雙斧) 윤창(尹昌)은  도전을 받아들이겠는
가?"
내공이 가득 실린 종마의 목소리가 비무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마
도대전의 비무 방식이었다. 먼저 도전자가 비무대에 올라  상대를 지목
하면, 지목 당한 당사자의 수락여부에 따라 비무가 결정된다.
비무를 거절하거나 기권하게 되면, 상위권으로 도전할 기회는 박탈되
고 더 이상 마도대전에 참석할 수가 없다.
현 지위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싸워 이겨야만 하는 것이다.
"받아들이겠소이다."
철마문 진영에서 한 인물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
에 천마행공(天馬行功)의 경공을 이용하여 비무대 위로 내려섰다.
각각 20근에 달하는 두 자루의 도끼를 엇갈려  맨 이자가 바로 쌍부
(雙斧) 윤창(尹昌)이었다.
"대단하군, 10년 전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진 것 같아."
비무대에 사뿐히 내려서는 윤창의 모습에 어디선가 감탄사가 흘러나
왔다. 10년 전, 윤창은 30살의 나이로  마도대전에 처음 참여하여 당당
히 100위에 진입한 자였다.
"하오밀문의 저자가 왠지 불쌍해지는군."
군웅들 여기저기서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압감이 들 정도로  막
강한 기세를 풍기는 윤창에 비해 자리에서 일어난 태웅의 몸에선 아무
런 기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을 동정하면서도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백마 서열
100위로 가장 말단에 해당하는 윤창이지만 그는 약자가  아니다. 5천명
마도련 무인 중 서열 100위가 바로 그인 것이다.
그런 자에게 도전장을 낸 자가 하오밀문의 인물이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애송이. 마도대전은 너희  같은 떨거지들이
참석하는 곳이 아니다."
반 장 거리까지 다가선 태웅을  향해 진득한 살기를 풍겼다. 극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실력을 겨루는 비무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
이고, 도전을 수락했던 자가 패할 수도 있다.
그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요건이 도전자의 지위나 무공이다.  즉
대단한 상대에게 패했다면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고, 다시 다른 서열
에 도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림인  축에도 끼워주지 않는 하오밀문
문도, 이겨도 본전일 뿐, 전력엔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가 기분 나빠하는 이유였다.
"혹시 개가 된 기분을 알고 있나? 개처럼  짖어본 기분이 어떤 건지
아냐고?"
"그건 네 놈의 문주에게 물어봐라, 그 놈은  제법 하더구나. 아니 물
어볼 기회가 없겠구나. 여기서, 죽을 테니까."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윤창이 두 자루의 도끼를 풀었다.
부웅!
2척 길이의 그다지 큰 도끼는  아니었지만 무쇠로 만들어진 철부(鐵
斧)였다. 휘휘 돌아가는 철부로부터 검은빛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
다.
진득한 살기와 함께.
"물어봤다. 그때 기분을 물었더니 뭐라 했는지 아냐? 웃음이  나왔다
고 하더구나. 미친놈처럼  킬킬거렸다고 하더구나.  미친개가 되었다고
하더라."
나지막이 고함을 지른 태웅이 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일정한 형이
있는 보법이 아니었다. 무작정 두 주먹을 앞세우며  달려나가는 것이었
다. 마치 건달처럼.
"어린 놈!"
장난감처럼 철부를 돌리던 윤창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철
부를 향해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자는 처음이었다. 특
별히 권각술을 익힌 것 같지도 않았다. 대도시의 뒷골에 가면  흔히 보
이는 삼류 건달들의  움직임을 가지고 마도대전에  참석했다니 어이가
없었다.
"단숨에 없애주마!"
붕붕 공기를 가르며 돌아가던 철부가, 전면으로 다가온 태웅의  머리
를 노리고 무서운 속도로 공간을 갈랐다.
일부단(一斧斷), 장작을 팰 때의 동작을 무공에 접목시킨 기술로,  쌍
부술의 1초였다. 하지만 일반 도끼질과는 차원이 달랐다.
푸른 광채를 발하는 도끼는 스치는 것만으로  맨살을 찢어내는 대단
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빠르게 달려들던 태웅의 신형이 오른쪽으로 할  걸음 이동하며 왼발
을 이용한 돌려차기를 펼쳤다.  삼류 건달 수준과 비슷한 발놀림이었지
만 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양손에 도끼를 쥐고 있는  윤창의 유일
한 허점인 복부를 노리고 빠르게 나아갔다.
피식! 윤창의 얼굴에 슬몃 미소가 걸렸다. 자신  또한 그곳이 약점인
줄 알고 있다.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복부는
약점이 아닌 함정으로 변했다. 지금 상황은 그가 바라던 바였다.
커다란 발이 복부에 격중하려는 순간, 왼손의 철부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포위, 안쪽으로 들어온 발목은 왼손의 철부가 노리고 허벅지는  오른
쪽 철부가 노린다. 왼손이 실패하더라도 오른손 철부에 의해 신체의 일
부를 잘라낼 수 있을 터였다.
"병신 여기가 마도대전이란 사실을 잊은 모양이군."
낮게 소리친 태웅이 나아가던 발을 멈추는가 싶더니, 윤창의 오른 어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허엇!"
나직한 비명을 토해낸 윤창이 재빨리 몸을 물리며 철부를 회수했다.
"이 놈이?"
놀라운 얼굴로 발이 스쳤던 어깨와 상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명
몸에서 3치 정도 떨어진 상태로 스쳐 지나갔고, 어떤 타격도 받지 않았
다. 그런데 일순 어깨가 마비된 듯한 통증은 무엇이란 말인가.
더구나 놈은 발차기를 허초로 사용했다. 복부를 노리는 것처럼  하면
서 오른손을 쓰지 못하게 만들려는 심산이었던 거였다.  겉모습은 삼류
였지만 실력까지는 삼류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쿡! 100위라고. 마도련엔 무인들이 없나보군."
"이런 죽일 놈이!"
얼굴이 잔뜩 붉어진 윤창이 두 자루의 쌍부를 동시에 치켜들며 태웅
을 향해 돌진했다. 두 자루의 도끼로 펼치는 쌍부법이 1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둘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이 되는  쌍부법, 나무를 자르
고 장작을 패는, 무수한 동작이 쌍부법에서 녹아 나왔다.
쉬이익! 쉬익!
묘한 소리와 함께 검은 광채가 더욱 진해지고 윤창의 쌍부가 허공을
잘랐다. 한발 앞으로 나설 때마다 비무대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윤창의 움직임은 춤을 연상시켰다. 도끼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도끼
의 움직임을 몸이 쫓았다. 오른손이  돌아가면 몸이 따라 돌며  왼손을
휘두르고, 왼쪽 도끼가 빗나가면,  원래 위치로 돌아온  오른편 도끼가
태웅의 하체를 노렸다.
쌍부법의 최대 장점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이었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줄기차게 이어지다 상대의 허점이  보이면 바로 초식으로 연결
된다. 지금처럼.
"이부참(二斧斬)!"
아래쪽으로 다가오는 도끼를 피하려다 자세가 흐트러진 태웅이 일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와 동시에 윤창의 입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터졌다. 이부참, 두 자루의 도끼를 동시에 던져내는 초식을 말한다.
수천 수만 번의 연습 끝에 터득한 초식, 강력한 회전력을 동반한  도
끼는 상대를 자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시 본인에게 돌아온다.
위기.
이미 중심을 잃은 태웅은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몸을 움직
이기 위해선 오른다리에 있는 중심을 왼발로 옮겨야  하건만, 날아오는
도끼가 더 빨랐다. 횡으로 회전하는 철부의 목표 지점은 다리와 가슴이
었다.
"씨팔!"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태웅의 허리가 순식간에 뒤로 젖혀졌다.  더욱
놀라운 광경은 다음이었다. 마치 구부린 활이  펴지듯, 두 다리가 퉁겨
지고, 허공에 횡으로 누워버린 것이었다.
임기응변의 극을 보는 듯하였다. 그 짧은 순간에 유일한 공간인 철부
와 철부 사이로 몸을 피하다니, 보법을 펼치지 못한 상황에서는 최고의
수였다.
쿠웅!
허공에 머물던 태웅의 동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나
한번의 공격을 피했다 하여 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뒤쪽으로 날
아갔던 두 자루의 철부가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마치 줄이라도 달린 것처럼.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몸을 굴렸다.
"그런 초식을 나려타곤(懶驢打滾)이라 한다. 무림인이면 결코 사용하
지 않는 저급한 수."
날아오는 철부를 받아들며 뇌까린 윤창이 반쯤  몸을 일으키는 태웅
을 향해 재차 던져댔다. 아울러 그의 신형 또한 철부와 함께 태웅이 있
는 곳으로 다가갔다.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태웅의 동체가 바닥을 굴렀다. 오른 쪽으로 구르
는가 하면 다시 왼쪽으로 구르고, 땅바닥에 등을 댄 상태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아니 윤창의 철부에 의해 일어설 기회를 잡지 못했다.
쳐다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맨 처음 왼발공격 한번을 끝으로  일
방적인 비무였다. 단 한번도 공격다운 공격을 하지 못함은 물론  제 자
리에 서지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던  군웅들이 놓친 게  있었다. 연신
땅을 구르면서도 태웅의 양손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울러 윤창의 철부 또한 날아가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사
실을 말이다. 단지 윤창이 하오밀문의 문도를 우롱하기 위해 일부러 힘
을 죽였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두 사람의 거리는 반 장으로 좁혀졌고, 태웅  뒤쪽으로
날아갔던 철부가 검은 살기를 머금고 되돌아오고 있었다.
비무를 관전하던 대부분 무인들은 윤창의 마지막 공격만이 남았다고
생각하였다. 바닥에 누워있는 태웅의 입장에서는 날아오는 철부를 피한
다 하더라도 이어지는 윤창의 공격엔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여겼다.
동정 어린 얼굴로 비무대를 주시하던 무인들의 눈이 일순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껏 개처럼 누워있던 태웅이 회수되는 도끼를 따라 몸을 날
린 것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마치 먹이를 덮치는 맹수처럼
오른 무릎을 구부린 상태로 윤창의 얼굴을 향해 날았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6) - 생과 사가 있을 뿐(2)
"허억!"
철마문 진영에서 나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승리를 예견했던 무인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아니다, 놈보다 철부가 더 빠르다."
하지만 유마혼만은 달랐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태웅의 몸이  빠
른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 철부가 한 박자 빨랐다.
윤창의 손에 철부가 잡히기만 한다면 아무리  거리가 가까워도 상대
를 잘라낼 수 있다. 그가 알고 있는 윤창은 그만큼 실력자였다.
윤창 또한 유마혼과 마찬가지였는지 무릎을 구부리며 다가오는 태웅
의 눈을 직시하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보다 양팔에 힘이 없기는 했지만 아직 철부를 휘두를 정도는 되
었다. 순식간에 내공을 일주천 시켜 힘을 비축한 윤창이 회전하며 다가
오는 철부의 손잡이를 굳건히 틀어쥐었다. 그리곤 바로  눈앞까지 다가
온 놈의 허벅지를 향해 힘차게 휘둘렀다.
"끝났다…. 크윽!"
회심의 미소를 짓던 윤창이 낮은 비명소리와 함께 눈을 치떴다. 꼼짝
도 하지 않았다. 분명 머리는 양손을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렸건만, 어
떤 힘에 사로잡혀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퍼억!
"크-억!"
붉은 피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윤창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렸다. 허공을 날던 태웅의 무릎이 윤창의 턱에 박혀버린 것이었
다. 하지만 윤창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혀를 깨물어 정신을 다독인 다음 재빨리 몸을 틀어 지면으로 내려섰
다. 무릎에 받친 충격으로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아직은 견딜만했다.
주춤 주춤 물러나며 상대를 찾았다.
"컥!"
윤창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목을 감싸안은 팔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도 양 주먹을 틀어쥐었다. 놈의 공격에  어이없
이 당하면서도 도끼만을 결코 놓지 않았다.
단 한번의 기회, 놈을 없애고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있
다. 가만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양쪽 손아귀에 힘이 실리는 듯했다.
놈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겼다.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 뒤쪽으로 도
끼를 휘두를 참이었다. 큰 동작도 필요 없다. 손목만 꺾으면, 놈의 허리
에 도끼가 박혀들 테니까.
그 순간, 윤창 등뒤에서 목을 감싸안은 태웅은 철마문 진영 바로  앞
에 와 있었다.
마치 윤창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이리 저리 밀리다 온 것처럼 보였
다. 또한 두 사람의 비무를 보고있던 대부분의 무인들도 그렇게 생각하
였다. 윤창의 얼굴을 강타한 무릎 공격이 생각보다 강하게 보이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는 윤창의 눈동자를 보았고 그가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개(犬)가 화를 내면 이렇게 된다."
"지금이다!"
목을 죄던 힘이 느슨해짐과 동시에 윤창의 도끼가 서로 엇갈리며 등
뒤로 날았다.
"크아악!"
그러나, 마천루 건물을 타고 오르는 처절한 비명은 태웅이 아닌 윤창
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윤창의 마지막 수를 기다리며 비교적 느긋한  얼굴로 앉아있던 유마
혼이 벌떡 일어섰다. 두 자루의 도끼가 파고든 곳은 태웅의  등이 아닌
윤창 본인의 몸이었다. 틀어쥔 목을 지지대 삼아 몸을 띄워  도끼를 피
해버린 것이었다.
"어라! 그냥 졌다고 말하면 될걸 자결을 해 버렸네? 안 아프게 해줄
게."
우두둑!
양쪽 허리 뒤편으로 깊숙이 박힌 도끼를 쳐다보며 차갑게 말한 태웅
이 붙잡고 있던 목을 사정없이 돌려버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에 비무장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단
한번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자가 승리하다니.
분명 윤창과 비무를 하여 얻은 승리이건만 서로 별개의 사건처럼 느
껴졌다. 윤창이 자결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결코 일
어날 수 없는 일.
뭔가 다른 수를 썼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궁웅들이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쓰러진 윤창의 몸을 뒤집은 태웅이 그의 어깨부
근에서 두 자루의 비수를 뽑아내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암습, 태웅이 윤창을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가운데 손가락
크기의 비수였던 것이다.
무인들이 가장 꺼리는 두 가지, 나려타곤(懶驢打滾)과 비겁한 암습에
의한 승리임이 확실해졌다.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하였던 종마의  선언이 있었지만 실
제 비열한 수법에 의한 승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백마에 든다 함은 곧 명
예를 의미할진대, 그 명예를 팽개치고 승리를 거머쥔 자가 태웅이었다.
"사황문 소속 거패 태웅을  일백마 서열 100위에 임명한다.  100위에
대한 도전은 정확하게 6시진 이후에 할 수 있다."
6시진, 비무를 마친 승자에게 주어지는 휴식  시간이었다. 내상의 경
중에 관계없이 무조건 6시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의 도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캬오오!"
종마의 선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몰을 날린 태웅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기쁨에 찬 함성을 질렀다.
"저런 미친. 역시 근본은 어쩔 수 없는 게야."
태웅의 모습을 지켜보던 무인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두 손을 쳐든 태
웅이 움직인 자리 때문이었다. 그가 속해  있는 사황문이 아니라, 요화
문 진영을 달려가며 고함을 지른 것이었다.
"까야! 옵빠 잘했어. 너무 힘을 많이 쓴 것 같은데! 괜찮겠어?"
"우! 헷헷헷! 걱정하지 마라. 아직은 팔팔하다."
윤창의 죽음으로 약간  숙연해져 있던 마도대전의  분위기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돌출행동이었다.
처음 일백마의 일원이 된  자가 마도련 무인들을 향해  인사를 하지
않고 요화들에게 먼저 가다니. 마도대전 역사상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
다. 하지만, 무인들의 그런 심정을 알리 없는 태웅은, 그와 상대했던 몇
몇 여인들만 박수를 치는 게 못마땅했는지 더욱  큰 소리로 고함을 질
렀다.
"박수 좀 쳐봐! 승자에 대한 예우가 그것밖에 안 돼?"
"아미타불! 맞소이다, 여시주들. 승자에게 환호를 보내야하지  않겠습
니까. 아니면 한 번 준다고 약속을 하던지."
어느새 뛰어나왔는지 추기영마저 태웅의 곁에 서서 요화문 여인들을
향해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호호호! 좋아요 옵빠! 잘했어요."
순식간에 시장통처럼 변한 요화문  진영에선 난리가 났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하오밀문 세 사람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무려 5일 동안 해댔던 전륜한 정력을 가진 괴물들, 그들의 방에 들어
갔던 여자들은 전부 기절하여 들것에 실려 나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들과 잠을 자는 건 제쳐두고라도 얼굴이나 한번 보고자 하였던 여
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 새끼야, 너는 왜 나왔어."
여인들에게서 쏟아지는 인기를 만끽하던 태웅이 추기영을 향해 잔뜩
인상을 썼다.
"염병할 시주야, 자그마치 천명이다. 늙은이들은 연장에게 전부 넘긴
다 하더라도 9백 명은 남는다 이 말이다. 걱정할 걸 걱정해라  이 개보
살아. 그리고 싸움하러 가는데 음기(陰氣)를 얻어가야 할 것 아닌가."
정말 음기라도 빨아들이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한 추기영이 몸을 돌
렸다.
"이제 그만…."
"아미타불! 소생 사황문의 육승 추기영, 서열 99위인  절독수(切毒手)
광만기(廣萬基)에게 도전하겠소이다."
종마(鐘魔)의 말을 끊으며 추기영이 비무 신청을 해버렸다.
"도전권은 각 문파가 돌아가면서 쓰게 되어있네."
"기녀를 안기 위해 기방에 갔는데 못하고 나오면 병신이라 하였습니
다. 부디 하게 해주십시오. 아미타불!"
"허!"
종마를 비롯한 마도련 무인들이 나직한 실소를 터트렸다. 참으로  맹
랑한 말이었다. 불호를 외지  말든지, 아니면 여자를 들먹이질  말던지.
겉모습은 완전한 스님인 자가 기녀를 운운하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내 만독문 진영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생 도전을 받아들이겠소."
검붉은 피부의 장한이 벌떡 일어나 비무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절독
수 광만기, 별호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장기는 수공(手功)이다.
하지만 일반 수공과는 차원이 달랐다.  독수마공(毒手魔功)이란 특이
한 독공을 연성하여 그의 양손은 완전한 독덩어리였다.
양손에 스치는 것은 물론이고, 손바람만 흡입하여도 중독된다는 독공
의 달인이 바로 그였다.
두 번째 대결, 이번엔 어느 누구도  처음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다만 조용한 얼굴로 비무대를 주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단 한곳, 야혼이 있는 자리는 시끌벅적한 소리로  요란했
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야혼이었다. 추기영이 비무대에 올라
갔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성모궁을 찾아갔던 이야기
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친 놈! 개처럼 짖었던 이야기나 한번 더해라. 아주 감동적이더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태웅이 야혼을 향해 이죽거렸다.
"임마, 나만 기었던 게 아니잖아. 너희들도 뭐 빠지게 기었다며 새끼
야, 보현보살은 뼈가 보일 정도로 무릎이 까졌다고 했잖아."
"그거야 우린 도망치다 그랬지 자식아."
"같은 거야 임마, 도망치는 너희들도 살기 위해 그랬던 거고, 개처럼
짖었던 나도 살기 위해 그랬던 거야. 너희들이나 나나 그때  기었기 때
문에 이 자리에 있는 거고. 안 그렇습니까, 문주님."
"자네가 나에게 한 말이 바로 이건가."
냉운형이 당혹스런 얼굴로 물었다. 마도련주 자리를 준다 하였을 때,
그저 우스갯소리로 들었는데 상황은 단순하지 않았다.
본인의 도끼에 의해 윤창이 죽었지만 그렇게  만든 사람은 태웅이었
다. 그것도 정당한 대결이 아닌 암습이란 치사한 짓을 이용하여.
철마문 무인들의 공분을 사게 될 것임은 당연한 일이 터이고, 어쩌면
이들에게 모든 도전이 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자신이라면, 제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하오밀문 세  사
람을 없애라고 지시를 내릴 것이다.
"승부만 가리자고 약속이라도 하셨소이까."
빙그레 미소를 짓던 야혼이 냉운형을 향해 물었다.
"공개적으로 죽이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마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열렸던 회의가 떠올랐다. 종마 주재로  열
린 5파 수뇌회의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뤘던 사안이 비무였다. 종마는
가능하면 부상을 줄이는 선에서 비무를 치러달라 하였고, 각 문파 문주
들도 동의했다.
"그럼 종마 영감의 말은 입에 발린 소리였군."
승리하기 위해선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던 말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외부에 알리는 요식 행위에  불과할 뿐 실제 비무
까지 그런 건 아닐세. 비무에서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박빙의
승부가 예견되는 상황이 아니면 생사(生死) 비무는 별로 없었지."
한데 마도대전 첫 비무에서, 승부만 가리자고 하였던 그 약속이 깨지
고 말았다.
"저 친구도 암습을 펼칠 건가?"
비무대에 올라있는 추기영을 가리켰다. 그까지 비겁한 수단으로  승
리를 얻게 된다면 사황문은  두 문파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저놈은 불제자라서 사람을 속이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습
니다. 숨긴 암기도 없고요. 실력으로 정당하게 이길 겁니다."
그 순간 추기영은 눈앞까지 다가온 광만기를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
었다.
"아이고 시주! 제가 비록 개고기는  먹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 예로 언제나 이 놈을  들고 다니
질 않습니까? 그런데 혹시 이게 뭔지 아십니까?"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광만기 앞에 철탁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광
만기는 서문시전의 육덕칠이 아니었다.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나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암습에 대비하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아미타불! 의외로 소심하신가 봅니다. 아무리 막돼먹은 놈이라도 법
기(法器)에 암기를 설치할 정도는 아닙니다."
"중놈이 개고기 먹는 걸 자랑하다니,  말세구나 말세야. 목탁만 들고
다니면 전부 중이 된다고 하더냐?"
"허허! 시주는 눈이 잘못되었나 보오이다. 자세히 보시오, 이게  정말
목탁으로 보이십니까?"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다시 광만기의 턱밑
으로 들어가는 철탁. 칙칙한 검은 빛을 뿌리는 철탁에서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방어자세를 풀지 않은 광만기가 눈앞의  철탁을 자세히 살폈
다. 철로 만들어진 목탁은 별다른 특징이  없다. 다만 앞쪽으로 갈라진
틈이 없고 양쪽 눈만 뚫려 있을 뿐이었다.
즉 추기영이 내밀고 있는 목탁의 앞쪽에는 암기를 발사할 어떠한 장
치도 없었다. 아울러 왼손에 들고 있는 목탁채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 목탁을 만들 때 물고기 모양을 본떴다고 합니다. 즉 여기 있는
두 개의 구멍은 물고기 눈을 형상화 한 겁니다. 그리고 이 두  눈을 이
어주는 입이 있어야 하는데 이 법기에는 그게 없습니다. 하지만 소리는
여느 목탁보다 아름답게 난답니다."
"미친 놈! 그 따위  목탁소리를 들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그만 죽을 준비나 하거라."
낮은 욕설을 뱉어낸 광만기가  독수마공을 끌어올렸다. 순간 비릿한
냄새가 풍기며 그의 두 손이 검게 물들었다. 지금껏 그가  시간을 끌었
던 이유는 윤창이 당한 모습 때문이었다.
탐색전 없이 무작정 덤벼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결국 놈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
을 내렸다.
검게 물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독기운을 주변으로 조금씩 퍼뜨렸
다.
그가 좋아하는 공격방식의 하나였다. 빠르게 공격을 해오는 자들에겐
수공을 펼쳐 대항하고, 지금처럼 말이 많은 놈들에겐 손바람을 날려 중
독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곤 하였다.
거의 내공소모가 없는 편이니 후자를 더 선호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 사정을 알리 없는 추기영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연신 목탁을 흔
들었다.
"니미씨발타불! 이놈은 목탁이  아니라니까 자꾸 헛소리를  하네.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는 광만기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좋을 대로하거라, 대신 제대로 쳐야  할거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
니까."
상대의 호흡이 약간  거칠어졌다고 느낀 광만기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독에 중독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기  때문이었
다. 목탁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놈에게 독수마공을 먹일 참이었다.
"아미타불!"
따악-!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7) - 생과 사가 있을 뿐(3)
"크윽!"
나직한 비명을 내지르던 광만기가 코피를 쏟아내며 비틀거렸다.
"음공(音功)?"
"씨팔노무시주야, 이건 음공(音功)이 아니고 철탁이란 말이다, 철탁!"
광만기 앞으로 다가선 추기영이 수중의 철탁을 힘껏 휘둘렀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광만기의 왼쪽 얼굴이  완전하게 함몰되어 버렸
다. 이번엔 비명소리조차 없었다.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툭 튀어나온 두 눈에서 붉은 눈물이 흘렀다.
"이런 개보살 봤나. 가르쳐 줘도 못 믿는 눈치네. 불제자가 철탁이라
면 믿어야지, 어딜 눈을 치떠."
기우뚱 쓰러지는 광만기의 면상을 향해 다시  한번 철탁을 날려버린
다. 철탁에 강타 당한 머리에서  피가 튀고 있음에도 추기영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엔 제 손으로 광만기의 부서진 머리를  흔들더니 만족스런 얼굴
로 일어섰다.
"부디 극락왕생 하시구랴. 그래도 아프진 않았을 거요. 첫 방에 죽었
으니…. 나중에 때린 것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소이다. 소승의 본의
는 절대 아니었소. 아미타불!"
나직하니 불호를 왼 추기영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검게 변한  얼굴
은 그 또한 독에 중독된 듯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황문  진영으로 곧장
가지 않았다.
조금 전 태웅이 한바탕 난리를 쳤던 그 자리에 가서 철탁을 높이 치
켜들었다.
"나도 박수를 쳐 달란…."
쿠웅!
"어머! 옵빠!"
손을 치켜들던 추기영이 비무대 아래쪽으로 거칠게 처박히자 안타까
운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저런 괴물 같은 놈…."
추기영이 쓰러지자마자 사황문 진중에서 한 인물이 튀어나오며 욕설
을 뱉어냈다. 사황문 서열 2위인 혈환사 엄시우였다.
그 또한 이렇게 나서게된 건 야혼 때문이었다. 조금 있으면 추기영이
쓰러질 테니 데려다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의아한 얼굴로 태웅을 쳐다보자 그  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두 놈은 추기영이 중독되어 쓰러질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가만히 두다니. 이해하기 힘든 놈들임에 분명했다.
"사황문 소속 육승 추기영, 일백마 99위로  임명한다. 다음 비무는 6
시진…."
그때서야 비로소 종마의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그만큼 놀랐기  때문
이었다. 빚을 받겠다고 옷을 벗어 젖히던 삼류 파락호가 분명할진대.
동창 첩형인 고명지 때문에 녀석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지만 결
코 일백마를 이길 정도라 여기지 않았다.
무음항마혈탁 또한 제 소리를 내지  못했다. 광만기가 당한 건 음공
때문이 아니라 철탁의 타격에 의해서였다.
"일백마가 이렇게 약한 줄은 처음 알았군."
"일백마가 약한 게 아니라 저놈들이 강한 걸세."
종마의 말을 받은 사람은 강인한 인상의 권마(拳魔)였다.
"무슨 말인가. 내가 저놈들을 직접  보았지만, 저렇듯 쉽게 일백마를
물리칠 수준은 아니었네."
"물론 무공으로 보면 그렇지. 하지만 비무가 아닌 싸움은 말일세, 무
공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투지(鬪志)네. 적을 죽이고 말겠다는  마음.
저 놈들은 싸움꾼일세. 나는 그들을  무림인이라 하지 않고 투인(鬪人)
이라 부르네."
권마(拳魔), 처음 시작이  삼류 건달이었던 그만이  태웅과 추기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가 무림인을 분류하는 기준은 두 가지였다.
무공을 익히고 싸움을 배운 무인(武人)과 싸움을 익힌 상태에서 무공을
배운 투인(鬪人). 비슷한 내공을 지녔다면  투인이 우세할 수밖에 없다
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실전의 달인이 내공을 얻는다면  단숨에 강자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질세."
"자네 말은 저놈들이 투인이란 말인가?"
"그건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삼류 파락호라고."
종마의 물음에 권마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의외의 복병으로  등장한
두 사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흥미로웠다.
"그럼 저 놈들의 실력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말인데…."
"의외로 예리한 구석이 있구먼. 내 생각도 같네.  저 놈들의 본 실력
은 아직 나오지 않았어. 어쩌면 이번 비무는 피가 난무하는 살육장으로
변할지도 모르네."
“자넨 후예가 없다고 막말을 하는구먼.”
종마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랬다, 십천마(十天魔)라 불리는 열 명의
원로 중, 도마(刀魔), 권마(拳魔), 창마(槍魔), 궁마(弓魔), 철마(鐵魔),
5명은 마도련 소속 문파 출신이 아니었다.
철혈검법을 얻기 위해 마도련에 들어왔다가 전설의 주인공이 된 자들로 무
공(武功)외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설사 마도련이 멸망한다 하여도 마천루만 무사하다면 관심을 두지 않을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을 포함한 십천마(十天魔)가 이번 마도대전의 판정관이었다.
"막말이 아니라 철마문과 만독문을 보았기에 하는 말이네. 아마 당장
이라도 두 녀석을 찢어 죽일 것 같지 않은가. 어쩌면  이번 마도대전엔
판정관이 필요 없을 지도. 승패를 결정짓는 건 죽음일 테니까."
나직한 권마의 중얼거림, 그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철마문 진
영엔 차가운 살기가 감돌았다. 특히 유마혼의 몸에선  시리도록 차가운
살기가 요동쳤다.
윤창이 죽어가던 마지막 순간에 태웅의 눈빛을 보았다. 단순히  윤창
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도끼가 윤창의 허리에  박히는
순간 그의 목뼈를 박살내 버린 것이었다. 그랬던 놈이 다시  한번 윤창
의 목을 돌려버렸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웃었다. 야혼이란 놈을 개처럼 짖게 만들었던 복
수라고 말하는 듯하였다.
사황문 진영을 차갑게 노려보던 유마혼이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자
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도대양(道大洋)!'
'네, 소문주!'
길다란 도끼를 들고 있던 인물이 유마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북천
혈부(北天血斧) 도대양(道大洋), 이번 마도대전을 위해 공을  들인 신진
중의 한 명이었다.
'이번엔 네가 나가라! 상대는 사황문의 가염(加念)이다.'
'소문주님! 제 상대는….'
도대양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일백마 서열 95위인 가염(加念)은
자신의 상대로 지목된 자가 아니었다. 그가 상대로 지목된 자들은 적어
도 서열 50위권 안쪽의 무인들이었고, 비무 시기도 중반이후였다.
그런데 유마혼은 지금 당장 출정을 명하고 있다.
고개를 들어 슬쩍 유혁세를 쳐다보았다. 편치 않은 얼굴로 사황문 진
영을 노려볼 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각조각 분리해라. 그렇지 못할 경우엔 네가 죽는다.'
"알겠습니다, 소문주님!"
낮게 소리친 도대양이 거대한 혈부(血斧)를 움켜쥐며 일어섰다.
"철마문의 북천혈부(北天血斧) 도대양(道大洋), 일백마 서열 95위  귀
사(鬼邪) 가염(加念)께 도전이오."
"아래부터 하나씩 없애며 올라간다. 하나씩…. 다시는 도전할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해주겠다."
씹어뱉는 유마혼이 중얼거렸다. 윤창의  죽음이 가르쳐준 교훈은 컸
다. 다섯 문파를 하나로 묶는 건 이념이나 이상이 아닌  바로 힘이라는
사실이었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무한한 힘만이 그들을 다스릴 수 있다. 그  힘
을 보여주는 자리가 바로 마도대전인 것이다.
"의외로 빨리 알아차렸구나. 이 아비는 40이 돼서야 깨달았는데."
대견하다는 듯 유마혼을 쳐다보며 유혁세가 말했다. 그 또한  평화로
운 마도대전은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사비무(生死比武)를 원했다.
피를 바탕으로 치러진 마도대전은 강력한 지도자를 탄생시킬 터이고,
그의 지시 하에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우리는 사황문을 정리한다."
만수문과 사황문의 공조를 깨기  위해 유혁세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사황문은 철마문에서 정리하기로 하였고, 만수문은 만독문이 맡아 처리
하기로 했다. 진정한 마도대전은 그  다음부터였다. 철마문과 만독문의
승부.
"유혁세! 우리를 첫 목표로 정했단 말이더냐?"
철마문 진영을 노려보는 냉운형의 몸에서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가 판단한 북천혈부(北天血斧) 도대양(道大洋)의 실력은 적어도 60위
권이었다. 그런 그가 95위인 가염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아예 사황문의
씨를 말리겠다는 수작인 게다.
"저기…, 문주님 상대가 안될 것  같은데 포기하라 그러지요. 꼬락서
니를 보니까 한 방에 뒈지게 생겼구먼."
"놈!"
'야혼! 뭐하는 짓이냐? 모르면 잠자코 있어!'
냉운형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자 냉소소가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태웅과 추기영이 이겨 일백마에 들었다지만 그들은 엄연히  외부인, 철
마문과의 실질적인 싸움은 바로 이번 판이라 할 수 있었다.
첫 비무부터 패배를 선언할 수도 없을뿐더러, 가염의 명예도  생각해
야 한다.
'이게 정혼자 생겼다고 벌써부터 목에 힘주고 지랄이야. 잔말말고 너
나 잘해. 네 아버지처럼 멍청이 같이 행동하지 말고. 패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야. 한번도 안 지고 사는 놈 있는 줄 아냐?'
'너?'
야혼의 전음을 듣던 냉소소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 때문이었다.
'이따 밤에 나 좀 봐! 저번 그 자리에서.'
'설마 정혼 발표까지 하고 또 하고….'
'자꾸 그럴 거야?'
'알았어,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될 걸 큰소리는.'
입을 삐죽 내민 야혼이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추기영이 누워있는 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으-아악!"
"내 그럴 줄 알았다. 개처럼 짖는 것과 죽음, 둘 중의 하날 선택하라
면 나는 무조건 짖는다. 산다는 건 말이다 그만큼 중요하거든."
딱히 누구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공연한 자존심 때문에 네
등분으로 잘린 가염이 불상해서 하는 말이었다.
"이 염병할 종자야 얼른 와서 나 좀 봐 주라. 부처님이 자꾸 날 부르
는 것 같단 말이다."
"그냥 따라가지 그러냐. 극락에 가도 여자들은 넘쳐날 텐디. 근데 너
는 왜 그러고 자빠졌냐? 마누라 안 챙기고."
태웅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아픈 환자를 돌보러 들어온  녀석
이 옆에 있지 않고 반 장 정도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곰 시주 저 자식은 내가 중독되었다고 그러는 거라네."
억울한 듯 추기영이 투덜거렸다. 운공을 할 수 있도록 장소만 좀  옮
겨달라 했음에도 태웅은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하여 일정거리 이상 떨어져 있으면서 걱정스러운  듯 표정만 짓
고 있다.
그리고.
"육승, 괜찮냐? 이상 있으면 바로 말해라. 내가 냉 소저에게 말할 테
니까."
추기영의 상태를 물어보는 게 태웅이 하는 간병의 전부였다.
"하여간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정력제가 아깝다  새끼
야."
추기영을 번쩍 안아든 야혼이 자신들의 처소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세
사람이 떠나자 고명지 역시 그곳에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서
둘러 자리를 떴다.
"어떻게 할거냐?"
마천루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고명지가 야혼에게 물었다. 일백마에 속
해있는 무인의 수는 철마문 30명, 만독문 24명, 만수문 20명, 사황문 14
명 요화문 12명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간다면 며칠 지나지 않아 사황문 소속 일백마는 전부
당하고 말게 분명했다. 야혼의 생각대로 마도련을 차지하기  위해선 최
소한 철마문 수준으로  일백마를 보유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아냐, 철마문은 28명이야, 거령패왕과 주육마승이 이 녀석들에게 죽
었거든. 그리고, 우린 전부 4명이니까 1인당 6번만 싸우면 되겠네. 나머
진 냉운형과 그 아들놈이 해결해야지."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 미소를 짓는다.  황당한 사람은 오히려 고명
지였다. 야혼이 말한 건 절반이었다. 즉  네 명이 도전해야할 회수만을
말한 것이고, 표적이 되어 도전 받을 건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너는 그렇다 하더라도 저들은…."
추기영을 가리키던 고명지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그의 몸에서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온통 황금빛 천지였다. 놀랍게도  황금빛 광채의 근원지는 추기영이
들고 다니던 철탁이었다. 황금빛으로  변한 철탁에서 흘러나온  광채가
추기영의 몸을 어루만지듯 감싸더니, 조금씩 그의 몸  속으로 유입되고
있다.
"세상에…."
고명지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무음항마혈탁의 주인이 추기영이라 하
였을 때만 해도 기절할 듯 놀랐건만 지금 보이는 광경은.
천고의 비밀이라 하였던 무음항마혈탁(無音降魔血鐸)이 또 다른  변
화를 보이고 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긴 저놈에게 저런 보물이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지. 하지
만 어쩌냐, 저걸로 밥 벌어 먹고사는데."
"그게 아니고…."
"뭐가 또 궁금한데, 무음항마혈탁이 왜  울었냐고, 그거야 저놈이 수
천구신체 중 전륜마왕지체(轉輪魔王之體)를 타고나서 그런다고 하드라.
그것 또한 어울리지 않지만."
"이런 나쁜 놈! 돌 중만 띄우지 말고 내 말도 좀 해줘. 대력패왕지체
(大力覇王之體)를 타고난 태웅이라고 말이다."
"켁!"
사래 걸린 듯 기침을 하고 말았다. 수천구신체를 타고난 두 명과  무
음항마혈탁, 그리고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힌 야혼까지.
세 놈이 전부 인간 보물들이었다. 하는 짓만 빼면 말이다.
"휴-우!"
나직한 숨소리와 함께 추기영이 눈을 번쩍 떴다.
"캬아! 시원하다. 이건 하면 할수록 강해지는 것 같네 그랴. 역시 이
추기영은 부처님이 돌봐주는 게 틀림없어. 사람은 역시  음덕을 쌓아야
해. 아미타불! 곰 시주 뭐하고 있는가,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는지  확인
하러 가야지."
"근데 요화문에 소저들이 남아 있을까?"
"이런 염병할 종자 봤나. 마실을 가더라도 집 지키는  개는 남겨두고
가는 법이라네. 잔말말고 따라오기나 하게나."
"개는 싫으니까 너 해라. 나는 인간 아니면 절대 안 한다."
야혼과 고명지를 향해 싱긋 미소를 남긴 태웅이 서둘러 추기영을 따
라나섰다.
"우리도 자자!"
"훗! 하여간 너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또 야혼이 따라  들어왔
으나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
는 듯했다.
"근데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거냐?"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며 고명지에게 물었다. 사실 그녀의 실력을  정
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동창  첩형이란 사실과
겁천십웅의 일인인 금환신존의 무공을 10성까지 익혔다는 게 전부였다.
"글쎄 객관적으론 서열 10위까지고 목숨을 걸면 1황 4공중 한 놈 정
도는 저승으로 데려갈 수는 있겠지. 왜, 걱정 되냐?"
"그럼 걱정되지, 나 하나  믿고 있는데. 정 뭐하면  용봉환락무를 몇
번 시술 받지? 대 여섯 번만 시술 받으면…. 알았다 그냥 잘게."
상큼 치 올라가는 고명지의 눈길을 접한 야혼이 재빨리 눈을 감았다.
공연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용봉환락무였다.
그녀의 몸 속에는 황실에서 복용한  영약기운인지 내공으로 만들지 못
한 잠력이 남아있었다. 그  잠력과 용봉환락무가 합쳐진다면  냉소소나
당가려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금환신공을 12성 완성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녀가 허락해야겠지만.
"어쩔 때보면 추기영보다 내가 더 불자 같아. 왜 남에게 내공을 주지
못해 환장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근데 말이야 더욱 이해
가 안가는 건, 내공을 준다해도 싫다는 년들이야. 내가 돈을 달라고 했
나, 아니면 애를 낳아달라 했나. 그냥 주는 거잖아. 아무런 대가도 바라
지 않고."
"그냥 잠이나 자라! 응?"
야혼의 어이없는 말에 내심 실소를 흘린 고명지가 오른 손을 쳐들었
다.
"너도 잠이나 자라. 여기 오른 팔!"
고명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야혼이 오른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치워 임마!"
"말 씹지 말고 그냥 누워 이년아.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면 표정관리
를 잘해야한다는 것 몰라. 그래가지고 잘도 동창을 거머쥐겠다."
벌떡 일어난 야혼이 고명지의 팔을 사정없이 끌어당겨 옆에 눕혔다.
"너?"
야혼의 품속에서 앙탈부리던 그녀가 이내 잠잠해졌다. 실내에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야혼의 품속에서 꼼짝하지 않는 고명지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안고 있는 야혼, 두 사람이 전부 허공에 묻혀버린 듯했다.
"혼자라는 건 말이다. 무섭고… 또 살을 저밀 정도로 외롭지만,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잃을 게 없기 때문이지. 물러설 곳도 없고."
"그래 맞아. 잃을 게 없는 사람처럼 강한 사람은 없지. 다 잃는다 해
도 본전이니까."
"그럼 분위기도 잡혔는데, 한번…커억!"
아랫도리에 느껴지는 충격에 나직한  비명을 토했다. 음흉한 미소와
함께 손을 뻗어내던 야혼의 상징을 향해 고명지의 발이 떨어진 것이었
다.
"이따 냉소소 만나러 가기로 했잖아 임마. 잠이나 퍼자."
"하여간 년들은, 아닌 것처럼  하면서 호박씨는 다 까고  있어. 그건
또 언제 봤냐?"
"그럼 둘이 은밀한 눈빛을 나누는데 그것도 눈치 못 챘을까."
"은밀 좋아하네. 전음을 나눌 때 냉소소 얼굴은 보지도  않았다 이년
아. 관심 있다면 있다고 할 일이지, 하고  싶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표
현하고 싶냐, 그러다 고장나면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사실을 왜 몰라."
낮게 투덜거린 야혼이 이내 눈을 감았다.
"하여간 네 녀석은 정이 안가."
이불로 입을 틀어막고 잠을 청하는 야혼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8) - 흑돈(黑豚)(1)
흑돈(黑豚)
더 이상 축제는 없다. 죽음과 함께 시작된 마도대전은 두 번째  날을
맞이하였고, 각파 진영의 수뇌부들은  새로운 전략을 짜느라  골머리를
싸맸다.
지금과 같은 국면으로 나가다 보면 마도대전이 끝나는 두 달 후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단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목숨을 잃은 자가  6명에 무공 상실이 4명
이었다. 유래 없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 희생이 많았나 봅니다."
마천루를 나와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야혼이 냉운형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간밤에 냉소소에게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사황문의 분위
기는 생각보다 저조했다.
6명의 사망자 중에 3명이 사황문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닐세. 철마문 놈들 또한 사망  2명에 무
공상실 1명이었으니까."
그랬다. 태웅과 추기영의 비무 이후에  사황문은 3번의 비무를 치렀
고, 세 명 전부가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태웅과 추기영의 승리가 있었
기에 간신히 체면유지를 한 날이라 할 수 있었다.
"근데 냉소저는…."
고개를 끄덕인 야혼이 주변을 둘러보며 냉소소를 찾았다. 그녀의  모
습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시아버지 될 사람을 보러 갔네. 저기 오는구먼."
오른 편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냉소소가 자색 무복을 입은 청년과 같
이 오고 있었다. 그가 바로  냉소소와 정혼한 마음십수(魔音十手) 자룡
(仔龍)이었다.
"나보단 못하지만 잘생겼군."
같은 남자로서도 호감이 갈 정도로 상당한 미남이었다. 특히  길다란
손가락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장인어른."
"쯧쯧 말하고는, 부하가 세  명이나 뒈졌는데 당신 같으면  평안하겠
소."
"누구신지…."
야혼의 얼굴을 쳐다보던 자룡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전날
그 난리를 쳤는데 하오밀문의 문주임을  왜 모르랴. 다만 그의  물음은
네 같은 녀석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의미로 했던 말이었는데.
"어라? 어제 그 지랄을 떨었는데 못 보셨단 말이오? 그 명 장면을….
그럼 또 다시 시작해야겠군. 그러니까 말이오, 나와 소소,  아니 냉소저
와 당가려 그년이 그곳에 도착을 때 말이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소이다. 아주 호쾌한  장면이더군요. 그리고
일파의 문주쯤 되면 말을 뱉어낼 때는 신경을 많이 쓰셔야  합니다. 그
래야 다른 사람들이 깔보지 않습니다."
야혼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소소란 말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야혼의 말투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하하하! 괜찮소이다. 문파라고 해봐야 다 뒈지고 세 명밖에 남지 않
았는데, 남들이 깔보면 어떻습니까. 쥐새끼처럼  숨어서 기회를 노리지
않아도 되니까 더 좋은 거지요."
"암만 그렇지, 힘이 없으면 우리처럼 그냥 찌그러져 있으면  되는 거
야. 적어도 여자 배도 아니고 등에 올라타서 묻어갈 생각은 안 하니까.
나는 우리 문주의 그런 면이 가장 마음에 들어, 아미타불!"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눈자위가 검게  변한 추기영이 나타나
며 야혼의 말을 받았다.
"태웅은?"
"새벽 …, 아미타불! 새벽 운동이 길어져서 시간이 걸릴 것 같네.  당
최 요화들이 놔줘야지. 이왕 익힌 색공인데 끝장을 본다면서 개기고 있
다네."
"모르고 계신 모양이군요,  냉소저는 마도련 젊은이들의  꿈이었습니
다. 다행이 운이 좋아 저에게 기회가 온 것이고요."
자룡의 얼굴에 언뜻 불쾌한 감정이 떠올랐다. 비록 정략에 의해 정혼
을 했지만 자신은 떳떳하다. 두 사람에게 말한 것처럼 냉소소는 마도련
청년들의 이상이었다. 서로 경쟁적으로 얻기를 원했고 결국  자신이 승
자가 되었다. 정략결혼 또한 그의 주장으로 인하여 추진한 일이었다.
유마혼과 경쟁에서 이겼다고 내심 흐뭇해하는 상황이었는데,  하오밀
문의 개종자들 때문에 기분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기분이 상했다고 하지만 장래의 장인어른과  부인이 곁에 있
는데 화를 낼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항상 그런 식으로 말을 하십니까?"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아직 뭘 모르시는군요. 우리  문주와 내가 하
는 이런 짓을  가리켜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이라  하지 않습니까.
진실한 모습을 숨기고 가짜만 보여주는 거지요. 제대로 성공한 것 같소
이다. 시주께서 우리를 개종자라 생각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헉!"
"훗!"
냉소소와 자룡의 입에서 동시에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룡은
놀라서 지르는 비명소리였고, 냉소소는 야혼과 추기영이 하는  짓이 어
이가 없어 흘리는 실소였다.
"그만하게나, 자네는 이쪽으로 오게, 아침 준비되었네."
결국 보다못한 냉운형이 자룡을 불렀다. 말로 해서는 야혼과  추기영
을 당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아침부터 웬 만두를…. 제가 간밤에 중노동 한걸 어떻게 아
시고. 문주님이 훌륭한 사위를  얻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려. 그런데
사위 되실 분이 만두를 무척 좋아하나 봅니다. 새벽 댓바람부터 기름진
걸 먹는걸 보면 말입니다."
"그렇다네, 이 친구가 가장 즐겨먹는 음식이 바로 만두라네. 저기 주
방에 가면 자네들 몫이 따로 있네."
그만 자리를 비켜주라는 축객령이었다.
"만두라…. 새벽부터 기름진 걸 먹는  습관은 정력에 치명적인데. 아
침엔 신선한 야채가 최곤데, 안 그런가 연작문주."
"그거야 안 했을 때 이야기지 임마. 너처럼 밤새도록 하고 나온 놈은
반드시 고기를 처먹어야 해. 그래야 체력이 보충되거든."
'저런 개자식들이….'
멀어지는 두 사람의 말에 자룡이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야혼이란 녀
석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 그가 만두를 먹는 습관이 생긴 건 순전
히 여자 때문이었다. 간밤에 격렬한 관계를 갖고 난 다음  체력 보강을
위해 먹기 시작한 음식이 만두였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
"신경 쓰지 말게, 숨길 것도 없는 친구들이니까."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영입하셨습니까?"
비단 자룡뿐만 아니었다. 마도련에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은 야혼  일
행이 사황문에 들게된 이유를 궁금해하였다. 마도대전에 참석하는 무인
들 중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그들이다.
"십만대산에서 소소에게 구함을 받았다고 하더구먼, 그건  핑계고 사
실은 이름을 날리고 싶어서 온 친구들일세. 다시 하오밀문을 세울 욕심
으로."
"그럼 성공했군요. 이곳에 있는 무인들치곤 저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
으니까. 아마 앞으론 소문이  더 나겠지요. 마도련  일백마에 들었다고
말입니다."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예상 대로였다. 이번에는 좀 예외였지만 마도대
전이 열리면 많은 무명(無名)들이 찾아오곤  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언
제나 같았다. 마도대전에 참석하여 이름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다.
야혼 일행 또한 같은 부류였다. 쥐꼬리만한 명성을 위해  마도대전에
도전한 자들.
"그럴 겁니다. 이미 목적 달성을 했으니 목숨이 위태로우면 언제든지
일백마 지위를 포기하고 떠날 거예요."
자룡의 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냉소소가 말을 받았다.
"그래도 최대한 이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냉소저. 철마문 놈들을 한
명이라도 줄여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될 겁니다. 마지막까지 우리 사황문을 돕기로 하였으니까요.
그런데, 만수문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냉소저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아마 오늘밤이면 철마문  수
뇌들은 발칵 뒤집어 질 겁니다."
마도대전의 승리를 위한 그녀의 작전은 별게 아니었다. 만독문의  공
격을 무시하고 오직 철마문 무인들만 처리하자는 것이었다.
"이번 마도대전의 승리의  관건은 철마문과 만독문의  균형임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힘이 쏠리면, 우린 이길 수 없습니다."
간밤에 야혼과 나누었던 이야기였다. 앞으로 한 달 동안 가장 중점적
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사황문의 첫 비무자는 누굽니까?"
"흑돈(黑豚)이에요. 하오대문의 문주."
"하오대문?"
"본인이 그렇게 불러달라고 하더군요."
"쿡! 분에 넘치는 꿈을 가진 놈이군요."
'글쎄요. 분에 넘치는 꿈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3년 전엔 나
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사황문 도전자는 나서시오!"
냉소소가 내심 중얼거린 순간 종마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번  마도대
전 진행 방식은 과거완 달랐다. 2개월이란 짧은 기간 때문에 각 문파에
도전권을 분할하여 치르기로 하였다. 각각의 문파는 하루에 5번을 도전
할 수 있고, 두 달 동안 총 3백 회의 도전권을 가진다.
일백마 지위를 획득한 자가 지위를 반납하고  상위 서열에 도전하지
않는 이상, 3백 명의 무인이 동원되어 한다는 말이다.
보통 천 명 안팎의 무인을 보유한 문파들로 볼  때 거의 3할의 전력
을 투입해야만 마도대전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진을 투입하지 않고 기존의 자리를 지키는 방법도 있다. 하지
만 그 또한 유리한 방법은 아니었다. 한번의 비무를 마친  자에게 주어
지는 6시진의 휴식 때문이었다. 그 시간 동안 몸을 정상으로 만들지 못
하면 도전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바로 패배로 이어진다.
결국 마도대전의 승자로 남기 위해선 문파의  모든 힘을 투입해야한
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두 명의 강자가 아닌, 문파 전체의 힘을 겨루는
곳이 마도대전이었다.
"사황문은 도전자가 없는가…."
"갑니다, 가요. 거 먹을 땐 개도 건들이지 않는 건데."
먹다만 만두를 손에 든 야혼이 비무대를 향해 달음질 쳤다.
"사황문 소속…꺼-억! 흑돈(黑豚) 야혼(夜魂), 일백마 서열 96위 연환
마장(連環魔掌) 육반성(陸班星)에게 도전이오."
"흑돈(黑豚)? 거 별호 하나는 기막히게 지었구먼. 안 그런가?"
야혼의 별호를 듣던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
대한 체구와 참으로 어울리는 별호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었다.
"왜 그래 자네들? 내 말이 틀렸나. 저 놈의 손을 보라고 아직 만두가
들려 있잖아."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동료들의 모습에  당혹스런 얼굴로
소리쳤다.
"네 녀석은 저 친구가 도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냐?"
"알지, 육반성(陸班星)대협은 벌써 40년 간…헤엑!"
말을 하던 인물이 재빨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검은 돼지라 하였
던 별호 때문에, 그가 도전한  인물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
다.
"저 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연환마장(連環魔掌) 육반성(陸班星), 비록 일백마  서열 96위 기록되
어 있지만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벌써 40년 동안 일백마 자리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마도대
전에서 96위 지켜내기만 한다면 10년 후엔 마천루에 기거하게 될 인물
이 바로 그였다.
그런 자에게 도전을 하다니,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지  의심스러웠
다.
그러한 생각은 지목 당한 육반성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야혼을 쳐다
보는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혹시 나에 대해 들었는가?"
외부에서 영입된 자라 하였으니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도전을 했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었는데.
"물론 들었지요. 지는 게 무서워 상위 서열로 도전하지  못하는 안전
주의자라 합디다. 근데 말이오. 마천루에서 밥을 먹어봤는데 이 만두보
다 더 맛이 없습니다. 왜 그 밥을 먹고 싶어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단 말
이오. 하나 먹어보겠소?"
"그 말…. 자신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
눈앞에 다가온 만두를 쳐다보는 육반성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은
연중에 돌고 있는 소문이지만 녀석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각 문파의 문주들마저도 함부로 못하는 마천루원로였다. 마천루
원로가 되기 위해 상위 서열로 도전하지 않았다.
40년 전 일백마 서열 96위가  되었을 때엔 무던히도 싸웠다. 하루에
두 번씩 5일 연속 싸운 경험도 있었다. 운이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실력
이 월등해서였는지는 몰라도 한번도 패하지 않고 96위를 지켰다.
그때부터 꿈을 꾸었다. 96위만 유지하고 있으면 마도련 원로가  된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고 살았는데.
"생각이 없나보군. 혹시 아침을 많이 드셔서 싫으신 게요?"
"놈! 네 놈은 입으로 싸우기로 하였느냐?"
"아니외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이 좋다는 말을 들어서 말이오. 왜
보지 못했소. 귀신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분을 쳐발라 놓은 것처럼 하얗
지 않소, 그게 다 죽기 전에 못  먹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생각이 없나
보군. 잠시만 기다리시오."
고개를 갸웃거린 야혼이 사황문 진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하는 짓이야 저놈!"
"포기한 모양이네, 재미없게 되었구먼."
한 참 동안 말을 주고받던 야혼이 느닷없이 사황문 쪽으로 가버리자
육반성의 장법을 고대하던 군웅들이 실망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얼렐레…."
그러나 실망한 표정도 잠시,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포
기선언을 할 줄 알았던 도전자가 의외의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머! 어머머! 몰라! 저 우람한 뱃살 좀 봐."
"나는 저 아래가 더 보고 싶어! 요대도 풀어라! 아예 홀라당 벗고 해
라!"
요화문 여인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무대 가장자리까지
다가온 야혼이 옷을 벗고 있었던 거였다.
요란한 환호성에 싱긋 미소를 짓던 야혼이, 차곡차곡 개키던  웃옷을
조심스럽게 놓더니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크아앙!"
비무장이 떠나갈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아울러 천천히 변하는  그의
동체. 번쩍 들어올린 손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검은 빛을 띠기 시작하였
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99) - 흑돈(2)
"꺄아아! 곰(熊)이다. 숫곰!"
생사비무의 도전자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요화문도들은  광란의 고함
을 질렀다. 마치 먹물을 머금은 종이처럼 천천히 검게 물들어  가는 야
혼의 몸이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거였다.
"저 무공은?"
관중석 곳곳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외침이었다. 칼밥을 먹을 만큼  먹
은 무인들은 온몸이 검게 변하는 무공을 알고 있다.
금강철피공(金剛鐵皮功), 외공(外功)에선 그보다 강한 무공이  없다하
였던 그 무공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금강철피공이 나타났다 하여 이렇
듯 놀라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투견공(鬪犬功)? 진정 성모척살대의 무공이란 말인가?"
한 팔을 앞으로 내밀고 엎드리는 특이한 자세를 취하는 야혼의 모습
에 유혁세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100년 전 성모궁으로 떠났던 개방의 장로인  투개(鬪 ) 오자양(午慈
陽)의 무공이 바로  투견공이었다. 겁천십웅이  이래로 가장  강하다는
100인 중 한 명의 무공이 마도대전에 나타난 것이다.
"아버님! 저 무공이 그렇게 강합니까?"
유마혼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100인의 성모척살대에 대한 말은 많
이 들었고, 자신 또한 한 권의 비급을 들고 왔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었다. 강호를 위해  희생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예의상,  성모척살대를 겁천십웅 아래로  두었다고
생각하였다.
"아니다, 투견공은 하위권에 속한 무공이었다. 외공이란 사실 때문에
그렇게 분류했다."
"그런데 왜?"
유마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외공이라면 크게 문제삼을 필요가
없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고수라면 바위 표면은 그대로  둔 상태
에서 내부만 가루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허공을 격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격공장이 바로 그것일진대.
하수들에게만 통하는 무공이 바로 금강철피공 같은 외공이었다.
"두고 보면 안다."
그 말을 끝으로 유혁세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편치 않은 듯, 비무대
를 주시하는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유혁세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는 또 있었다.
"저 놈은 갈수록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먼."
마도대전의 주관자인 종마였다. 그 또한 심각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
보고 있었다.
"왜 그러나? 물 끓이겠다고 하였던 사람이."
도마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처음  야혼이 옷을 벗었을 때만 하여도
돼지라며 잡아먹겠다고 했던 그였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  와서는 잔뜩
굳은 얼굴로 육반성이 이기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도 아주 쉽게.
"몰라서 묻나? 혹여 저놈이 육반성을  이기게 되었을 때, 그  파장을
생각해 보았나?"
"강호 상에 떠도는 비급 때문인가?"
"당연하지, 하위권에 속했던  투견공으로 육반성을 이겼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종마가 걱정하는 일이었다. 성모척살대  100인을 겁천십웅의 아래로
두기는 했지만, 그들의 무공은 지난 100년 간 강호 상에 나타나지 않았
다. 오직 전설로만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투견공으로 인하여 전설
의 진실 여부가 가려지게 되었다.
"그것도 괜찮겠구먼, 전쟁할 구실은 만들지 않아도 되니까."
"자네?"
"이것 보게, 전쟁은 개인의 힘으론 막지  못해. 100년 주원장이 일부
무장들과 강호 무인들을 십만대산에 왜 보냈겠나."
"강호 무림의 힘이 너무 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겐가?"
"그렇지, 어린애에 불과했던 명나라 황실에 비해 무림은 성인이었어.
힘이 넘쳐나는 실정이었지. 그자는 명나라에 위협이 될 소지가 있는 세
힘을 동시에 없애버렸네. 명교, 무림, 그리고 강력한 힘을  지닌 공신들
까지. 그리고 100년일세. 무림은  또 다시 그때와  비슷한 힘을 지니게
되었지. 힘이 생기면 쓰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거고."
"왜 하필 지금이냐고, 내가 죽고 나서 전쟁을 해도 되잖아."
"아직 자네도 할 일이 남았다는 의미겠지. 아니면 전쟁 나기 전에 그
냥 죽던지."
"에라, 이 나쁜 인간아, 악담을 해라 악담을. 하지만 나는  똥 돼지가
이기는 꼴은 못 봐."
"저 녀석이 이기지 못하면 10년 뒤엔 육반성을 아침저녁으로 보게될
걸."
"제기랄! 마천루 원로가 되는 조건을 바꿔야해,  일백마 서열 20위안
에서 50년 동안 패하지 않은 자로."
종마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
의 전형이 바로 육반성 같은 자였다.
"둘 다 뒈져 버려라."
"클클클! 하지만 자네가 원하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걸세.
저놈 또한 투인이거든. 세 놈 중 가장 강한 투인."
도마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편 종마를 흥분하게 하였던 야혼은 육반성  앞에서 특유의 호흡을
뱉어내고 있었다.
"후-욱!"
그의 아랫배가 불룩해지는 순간 검은 동체가 바닥에 깊은 족적(足迹)
을 남겼다.
빠른 속도로 다가드는 야혼의 모습에 육반성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
다. 삼류 파락호처럼 행동하던 놈이 투견공이라는 무공을  익히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진정한 무공은 내공이다. 껍질만 단단하게 만드는 외공은 삼
류들에게나 통하는 무공이란 말이다. 회선천류장(回線川流掌)!"
육반성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이어 가슴  앞
에 있던 그의 양손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자 그곳으로부터 반투명한
기운이 쏘아졌다.
연환마장의 1초인 회선천류장은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장법이 아니었
다. 양손에서 쏟아져 나온 장풍은 맹렬할 회전력을 동반하고 있었다.
마치 두 자루의 창이 회전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후-욱!"
다시 한번 공기를 채운 야혼이 불끈 틀어쥔 주먹을 힘차게 뻗어냈다.
파앙!
쿵! 쿵! 쿵!
공기가 터지듯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검은 동체가 세 발짝쯤 뒤쪽으
로 밀렸다.
"어떠냐 놈! 두 손이 으스러지지 않았느냐? 저 놈이?"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던 육반성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야혼
의 얼굴에 어린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1초였지만 전력을 다한 공격이 어떠한 충격도  주지 못했던 것
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뒤로 밀린 녀석은  거의 충격을 받지 않은 듯
조금 전과 똑 같이 달려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죽일 놈! 회선흑류장(回線黑流掌)!"
입술을 깨문 육반성이 더 크게 고함을 내지르며  연환마장 2초를 펼
쳤다. 검은 창(槍), 장풍으로 만들어진 검은색의 공기로  만들어진 창이
무서운 기세를 머금고 돌진하였다.
파앙!
"나선혈류장(螺線血流掌)! 나선광풍장(螺線狂風掌)"
회선흑류장마저 막히자 연환마장의 3초와 4초를 연거푸 펼쳤다. 일순
두 사람은 붉은 살기로 에워싸였다.
두 개의 핏빛 창과 살기 진득한 바람이  야혼의 전신을 향해 몰아치
기 시작하였다. 붉은 색을 띠고 있는 장(掌)은 물론이고 광풍처럼 몰아
치는 바람도 전부 살기를 머금었다.
"후-욱!"
파앙! 파앙! 파앙!
붉은 기운에 휩싸인 공간에서 야수의 호흡소리 함께 공기 터지는 소
리가 흘러나왔다. 전방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야혼의 손
만이 아니었다. 양손으로는 공공십팔수를 펼치고,  두 다리로는 무변무
적퇴를 펼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 세 걸음 물러났던 그의 신형이 다음에는 두 걸음, 그리고  육반
성이 마지막 초식을 펼쳤을 땐 한 걸음밖에 물러나지 않았다.
"저런 곰 같은 놈이!"
급기야 육반성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두 손과 다리를 정신 없이
휘둘러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다지만  전부를 막아내는 건 아니었
다. 일부 공격은 놈의 상체와 하체 곳곳에 작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다가들다니,  마치 괴물을 보는 듯하였
다. 결국은 놈의 사정권 안에서 멀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물러나야 했
다.
"좋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
10년 전, 마도대전 이후로는 도전자가 별로 없었기에 전력을  다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이미 알려진 정도만  조금씩 선보여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도 이긴
다고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이 된 것이다.
단전에 숨겨두었던 모든  내공을 끌어올리자 육반성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였다. 육반성은 연환마장을 1초부터 4초까지 끊임없이  펼쳐
냈고, 그것들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야혼은 전진했다.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군웅들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줄기차게 공격하는 사람은 분명 연환마장 육반성이었고, 실수도 없었
다. 매초마다 전력을 다한 공격은  분명 검은 동체의 야혼에게  작렬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는 사람은 육반성이었다.
기이한 광경, 아니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순한
공격도 아니고, 바위마저 바스러트리는 엄청난 장력이 아니던가.
그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는 자가 있다니.
그때 그들의 귓전에 들려온 소리가 바로 투견공이었다. 하오밀문  문
주의 무공은 성모척살대 무공이란 말이 은밀하게 퍼져  나갔다. 여기저
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성모척살대의 전설은 거짓이 아님이 밝혀지
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내부의 충격은 외공으로  방어할 수
없단 말이네."
"아니야, 저자를 봐. 더 이상 밀리지 않고 있단 말이지.  점점 다가서
고 있다고."
야혼의 투견공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내부를 보호하지 못하는  외
공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패들과, 육반성의 실력으로는 투견공을 깨트리
지 못한다는 패들로 의견이 나뉘었다.
물론 공격을 가하는 육반성은 전자였다.
얼마나 공격을 퍼부었는지 알지 못했다. 끊임없이 물러나다 보니  점
점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내공의 바닥과 함께 체력도 한계에 부
딪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젠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나 봐. 정력이 딸리는 놈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냐? 얼마 못한다는 거야. 마음은 굴뚝같은데 물건이  서지도 않
을뿐더러, 설사 섯다 하더라도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거지. 지금 네 놈
처럼 말이다."
검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미소를 지은 야혼이 다시금  오른 손을
내밀고 자세를 낮췄다.
"네 놈 또한 편하진 않을 터, 이젠 서서 결정을 짓는다."
진득한 살기를 쏟아낸 육반성이 단전 바닥이  보이도록 내공을 짜냈
다. 놈의 말대로 더 이상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차라리 한방에 해결하
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더하여 놈 또한 내부는 엉망으로 변했을 거라
확신했다. 그가 준비한 초식은 최근에  창안한 연환마장 5초였다. 아직
작명조차 하지 못했고 미완성 상태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육반성의 몸에서 붉은 혈기가 요동침과 동시에 야혼의 두 다리가 바
닥을 찼다.
"차앗!"
육반성이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회전시키던 양손을  앞으로 쭉
밀어냈다. 손바닥 위로 손가락 두께의 붉은 기운이 똬리를 뜨는  것 같
더니 그의 손바닥 전체를 감쌌다.
장공(掌功)이 극에 달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혈옥수(血玉手)와 비슷
했다. 일반적으로 장공의 극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두 가지  용어를 사
용한다.
남자가 익히는 장공의 극을 혈옥수(血玉手)라 칭하고 여자가  익히는
장공의 극을 백옥수(白玉手) 칭한다.
극양(極陽)과 극음(極陰)의 장공, 외부에 영향을 주는 장법이  아니라
내부를 완전하게 파괴하는 무공으로 알려져 있다.
특별한 초식으로 익히는 무공이 아니었다. 검을 쥔 자들이 어검술(御
劒術)의 수준이라 불리는 경지를 장법에서 표현하는 말이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육반성은 혈옥수의 초입에 들어있었던 거였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무공이라 할지라도 상대가 없으면 무용지물일 뿐이다.
붉은 색으로 변한 육반성의 장이 야혼의 몸에 격중하려는 순간 놀라
운 일이 발생하였다. 비스듬히 나아가던 야혼의 신형이  공중제비를 돌
며 육반성의 손바닥을 피해버린 것이었다.
과앙!
공중제비 하던 야혼의 두 종아리가 육반성의 어깨를 강타했다.
"커억!"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육반성이 재빨리 몸을 돌려 상대를 찾고자 하
였다. 그러나, 고개를 따라 움직여야할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땅속에 종아리까지 박혀있는 것이었다. 중심이
동이 제대로 되지 않은 육반성의 동체가 무너짐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넘어지는 육반성 몸통위로 검은 곰 한 마리가 풀썩 떨어져 내렸다.
과-아악!
"으-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육반성의 몸뚱이가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
졌다.
"저럴 수가…."
비무대 바닥에 반쯤 묻혀버린 야혼의 동체를  확인한 중인들은 벌어
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몸이 파고든 비무대 바닥에서  핏물이 스
며 나오고 있었다. 압사(壓死), 무려 40년 간, 일백마 자리를 지켰던 육
반성의 사인(死因)이었다.
"놀랍군요, 하오밀문 문주의 무공이 저 정도였다니. 하지만 저 자 또
한 편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움푹 파인 구덩이에서 몸을 일으키는 야혼을  쳐다보던 자룡이 나지
막이 속삭였다.
"자룡공자는 투견공을 깨트릴 자신이 있나 보군요."
"하하하! 저 정도 외공을 깨트리지  못하고서야 무인이라 불릴 자격
이 없지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비롯한  유마혼, 그리고 만독문의
광독자 갈음석 세 사람은 육반성을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최하 20위권 안이 자신들의 수준이라 여겼고, 이번 마도대전에서  실
력을 증명해 보일 참이었다.
"아미타불! 그럼 저 위쪽에 앉아서  구경하는 새끼들은 전부 양민들
인가 보오이다, 그려."
"그러게 말이다. 우리 하오대문에 넘겨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무인
도 아닌 놈들이 갈만한 곳은 하오대문이 왔다지, 암만."
"아이고, 우리 곰 시주는 언제 왔는가. 저기 주방에 보면  만두 있네,
밤새도록 한 새끼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연작문주가 그러더만."
"아냐 임마. 지금 도전하러 갈 거야."
"이런 미친 시주 봤나. 오늘 두 놈이 자네에게 도전했다는 사실을 잊
었는가."
"그러니까 더더욱 나가야지, 새끼야. 저 년들이 안 뵈냐. 쌈도 못하는
늙은이 하나 잡았다고 오줌을 싸고 난리잖아."
그랬다. 서열 96위로 임명된  야혼은 태웅이나 추기영과 마찬가지로
사황문 진영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요화문도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서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것이었다. 아니 제 손으로 닦는 게 아니
라 여인들이 닦아주고 있다. 서로 닦아주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이 추기
영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니미씨발타불! 뭐하나? 빨리 도전신청하지 않고."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0) - 흑돈(3)
딱! 딱딱딱! 딱딱!
잔뜩 인상을 찌푸린 추기영이  철탁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그리고는
냉운형을 향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문주님, 곰 시주 다음엔 바로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지금 한번하고
이따가 오후에 한번 더 하게 해주십시오."
"자네, 미쳤는가. 그렇게 하면 하루에  네 번을 하게…. 아니  싸우게
되는 걸세."
냉운형뿐만이 아니었다. 그 주변에  있던 대부분의 무인들이 황당한
얼굴로 추기영을 쳐다보았다. 마도대전에 참석하는 무인들은 하루에 최
소한 두 번의 비무를 가진다. 그것만해도  엄청난 부담이거늘, 그 배를
하겠다니. 그러나 이어지는 추기영의 말에 급기야 할말을 잃었다.
"문주님은 저 염병할 종자가 보이지도 않는단 말입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소승을 보고 열광하던 여시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건 걱정
하지 마십시오. 정력밖…. 아니 체력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문주님은
만두나 두둑하니 준비해주십시오. 아미타불!"
"추소협이라 하셨소. 마도대전이 무어라 생각하는 게요."
결국 보다 못한 자룡이 나섰다. 마도련 소속 무인으로서 자존심이 극
도로 상했다. 놈들은 이곳을 놀이터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기껏 100위와 99위에 들었다하여  일백마 전체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조금 전부터 계속하여 언급하는  만두. 그 말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였다.
"아미타불! 제가 알고 있는 마도대전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위선적
인 정파인들의 등쌀에 고통받는 힘없는  무인들과 그들의 가족을 보호
한다는 기치아래, 이 청해성에 똬리를 틀고 지난 3백 년간 마도의 기둥
역할을 해온 마도련의 최대의 축제로써…. 이 마도대전을  통해 배출된
무인들은 전 마도인의 존경과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장차 마도를 이끌어
갈 사람으로 책임과 의무를 가지게 됨은 물론이고…. "
찬사 일변도의 말이 추기영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앞뒤  문
맥도 맞지 않고, 횡설수설하는 듯하였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있었다.
"결론은 마도대전은 아주 좋은 행사라는 겁니다.  아미타불! 그럼 다
음 도전권은 저에게 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으아악!"
그 순간 비무대 위에선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태웅의  상대였
던 일백마 서열 98위 수리도 모장이 머리가 부서지며 지르는 비명소리
였다.
"사황문 소속 거패 태웅을 일백마 서열 98위 임명한다."
"아버님! 이상하지 않습니까?"
유마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놈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비
무를 자세히 살피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모장은 손을 쓰지 못했다. 마치 점혈 당한 사람처럼
행동했던 거였다. 비단 모장뿐만 아니라 태웅의 전 상대였던 쌍부 윤창
도 당하기 전엔 움직이지 못했었다.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무슨 무공을 사용했는지 알  순 없지
만 권각술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웅창이  너는 알아보겠
느냐?"
왼편에 앉아 있는 중년인을 향해 물었다. 검왕(劒王) 유웅창(劉雄蒼),
일백마 서열 6위로 유혁세의 사촌동생이었다.
"아마 무형권(無形拳)의 일종인 듯 싶습니다.  무형권으로 가장 유명
한 무공은 150년 전 패천마영권(覇天魔影拳)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마교의 무공이 아니냐? 150년 전에 사라졌고."
"그럼 저놈이 익힌 무공이 패천마영권이라는 말입니까?"
"아직은 단언할 수 없지만 아마 확실할 것 같다."
"그래요? 그거 잘됐군요."
유마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놈들을 마교도로 몰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혼이란 놈이 마교도란 사실이 증명만 된다면 무공도 없는 자를 개
처럼 짖게 하였다는 비난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놈이  마교도였기에 핍
박하였다고 하고 싶었지만 증거가 없었다.
그런데 가장 확실한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마교의 무공을 익히고 있
는 자가 마교도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선은 즐겨라 개 잡종들. 마지막 순간에  네 놈들의 가면을 벗겨주
마. 이 유마혼을 우롱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주마.'
하나밖에 없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마도대전의 시작과 함께  받
았던 모멸감, 장차 마도련주 자리를 노리는 그에겐 치명적이었다.
놈들을 마교도라고 증명할 수만 있다면,  다시 명예를 회복할 수 있
다. 비난보다는 오히려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삼천룡의 일원으로.
회심의 미소를 짖는 유마혼과는 달리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 인물이
있었다.
"아미타불! 저런 빌어먹을 종자 봤나. 싸움 다했으면  빨리 쳐 안 내
려오고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왜 저번처럼 또 뛰어 나가지 그러냐?"
"아이고 고 소저도, 빈대도 낯짝이 있지, 어찌 또 나가겠습니까."
"빈대에겐 낯짝이 있지만 너희들에겐 없는 걸로 아는데, 아니었냐?"
"아미타불! 그건 맞는 말이긴…. 정말 또 나가도 욕먹지 않겠습니까?
아니지, 부처님이 허락하셨으니까 다녀와야지."
딱 소리를 내며 목탁을 두드린 추기영이 재빨리 태웅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전 내공을 동원하였는지  그가 지나가고 난 자리엔  뿌연
흙먼지가 날렸다.
"허!"
"킥!"
추기영을 지켜보던 인물들의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야혼 일행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일백마의 한 명이란 사
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마치 시장통에 와있는 느낌이 들곤 하였던 것이
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은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하오밀문의 삼 인을 제
외한 나머지 사황문 인물들은 전부 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현상은 그 날 하루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백마에
포함된 사황문도의 수는 줄어갔고, 마도대전을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났
을 땐 5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도 야혼과 태웅 추기영을 포함한  숫자였다. 즉 하오밀문 3인을
빼면 순수한 사황문도는 냉운형과 혈환사 엄시우 두 사람이 다였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어떻게 사황문의 정예가…."
암흑루 6층, 당혹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딸을 미끼로 정략결혼까
지 추진하며 마도련주 자리를 노렸던 냉운형이었다.
지난 한 달은 그에게 삶의 의욕을 빼앗아 버렸다. 지금껏 수많은  마
도대전을 거쳤지만 지금처럼 최악의 성적을 낸 경우는 없었다.
오직 마도대전을 목표로 지난 10년 간 비밀 연공관에서 가르쳤던 신
진들이 한 단 명의 승자도 없이 대거 탈락한 것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적어도 그들 중 5명은 일백마에 들어갈 줄 알
았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가장 강한 순위부터  내보내기 시작하였는
데 줄줄이 패하고 말았다. 비록 사망자는 없었지만 남아 있는 인원으로
마도대전을 끌어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철마문 35명, 만독문 35명, 만수문 15명 사황문 5명, 요화문 10명, 마
도대전 한 달을 치르고 난 결과였다.
확실하게 일백마에 들거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냉소소와 고명지
그리고 아들인 냉운소 세 사람밖에 없었다. 그들을  포함하면 사황문에
서 배출할 일백마는 전부 8명, 마도련 최하위를 기록할게 분명했다.
"어차피 더 이상 볼 것도 없는데 아예 나오질 마십시오. 냉 소저에게
맡기는 게 어떻습니까?"
"자넨 나에게 마도련주 자리를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얼레레! 문주님 지금까지 우리 세 사람이  없앤 적이 몇 명인지 세
어보셨습니까? 자그마치 60명입니다. 철마문 40명에 만독문 20명이라고
요. 사황문 무사들이 우리 반만 해줬어도 만독문 자리에 사황문이 있을
겁니다."
눈을 크게 치뜬 야혼이 볼멘소리를 했다. 이번 마도대전의 판도를 바
꾼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 야혼 일행이었다.
세 사람이 공히 서열 50위권까지 올라오면서  없앤 일백마들로 인하
여 신인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던 거였다. 물론 철마문과 만독문 출신
들이 차지하긴 하였지만.
"끄응!"
냉운형이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야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던 그들은 능력이상으로 해  준 반면에 사황문 문도들
은 연일 패하기만 하였다.
그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알았네, 그만 물러가서 쉬게."
"힘내십시오, 나 같은 놈도 살아 있는데 사황문의 문주 아닙니까. 그
럼 편히 쉬십시오."
놀리는 건지, 위로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야혼은  밖으로
나왔다.
"너, 우리 아버지께 너무 심한 것 아냐?"
암흑루를 완전히 벗어나는 곳까지 따라나온 냉소소가 나무라듯 말했
다. 궁지에 몰린 아버지를 야혼이 너무 몰아치는 것 같아 하는 말이었다.
"글쎄, 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나는 말이다, 부모란  자식에게 모
든 걸 주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
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데 아닌 사람도 있더구나."
"그건 네가 잘못 알고있는  거야. 우리 아버진 나도  사랑하셔. 다만
표현방법이 서툴 뿐이지. 아얏! 왜 그래?"
갑자기 손가락을 물어뜯는 야혼의 행동에 냉소소가 나직하니 비명을
질렀다.
"전부 아파?"
"가운데 손가락을 가장 세게 물었잖아!"
"아냐, 임마. 다 똑같이 물었어. 참!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냐?"
"호-! 아파라! 이제 아예 변태의  경지에 들어서고 말았구나. 그들에
게 한번 가볼래?"
"의심하면 어쩌려고."
"헹! 의심하라지 뭐."
주변을 슬쩍 둘러본 냉소소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야혼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젠 야혼 너를 무시할 사람은 이 마도련엔 없다.  아마 한
수 배우기 위해 난리가 아닐 거다."
그랬다. 야혼을 비롯한 삼 인은 어느새 죽음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었
다. 지난 한 달간 벌인  비무에서 전승을 거두었음은 물론이고  상대는
전부 죽었다.
처음 마도대전을 시작할 땐 땅을 기는 개였지만 지금은 백수의 제왕
이라는 흑호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현 상태로  마도대전이 끝났다면,
사황문의 패배완 상관없이 마도대전의 영웅으로 부상할 게 분명했다.
다시 면사를 걸친 냉소소와 야혼이 사황문 건물 가장 중앙의 연공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소공녀님!"
지하비밀 연공실에서 연무에 열중하던 50여 명의  무인들이 두 사람
을 발견하곤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패배자들, 지난 한 달간의 마도대전에서 가장 먼저 패했던 자들이 전
부 이곳에 있었다.
"진전은 있나요?"
"네, 소공녀님, 적의 허점은 거의 파악되었습니다."
일행의 가장 수좌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유성마검
(流星魔劒) 화악숭(華樂崇)으로 냉소소가  가져왔던 환영마도법(幻影魔
刀法)을 7성까지 익히고 있는 자였다.
"이분은 다 아실 테고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백사(白蛇) 윤보성(尹輔星)입니다. 지금껏 20번의 비무를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무를 할 때 두려움 같은 건 없습니까?"
"마음가짐을 묻는 거요?"
"그렇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적을 상대하십니까?"
"단 한가지요. 살아남기 위한 마음으로 적을 상대하오. 한 번의 기회
를 잡기 위해 팔을 버려야 한다면 버리오. 놈의 목을 치기 위해 다리를
잘라야 한다면 자르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겐 살아남는 것  이상
중요한 게 없기 때문이오."
"무인의 명예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야혼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듯 화악숭이 느닷없이 물었다.
"좋소이다, 그럼 한가지만 묻겠소.  당신의 상대가 여자였소.  생사의
결전 와중에 당신의 손이 뻗어나가는  곳이 여인의 가슴이었다면 어찌
하겠소."
"그건…."
일순 말문이 막혔는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비무 중 여인의 급소를
노리지 않는 다는 건 거의 불문율에 속했다. 즉 불명예라  여기는 행위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비무가 아니고 야혼의 말처럼 생
사를 건 싸움일 땐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칼은 명예를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목숨을 지키는  도구요. 기회
가 있을 때 적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소. 죽음을 명예라 생각하는 사
람은 그렇게 살면 되는 거요.  하지만 명예보다는 삶을 택하고  싶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기회를 잡으시오. 그리고 놓치지 마시오."
'소소, 빨리 가자!'
냉소소에게 전음을 보내며 재빨리 돌아섰다.
'왜 저들에게 한마디하고 싶은데.'
'이년아 지금 감동 먹은 표정을 보이잖아. 여기서 헛소리하면 약발이
떨어진단 말이야.'
'너 자꾸 이년 저년 할래?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거냐?'
야혼에게 힐난의 말을 던진 냉소소가 재빨리 건물을 나섰다.  딴에는
야혼의 말이 맞겠다 싶었다.
"자랑할걸 자랑해라. 어디 자랑할게 없어서 나이 먹은 걸 자랑 하냐?
28 노처녀는 땅속에 파묻어도 할말이 없다는 것 알아?"
밖으로 나와 사람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은 야혼이
혀를 날름거리며 소리쳤다.
"너, 그러다 내가 자룡에게 시집 가버리면 어쩔래?"
"냉소소가 시집가면? 그럼 가려에게 가서 비벼야지. 사천당문을 무너
뜨리려면 힘이야 좀 들겠지만 설마 마도련만 하려고."
"그래도 가려 생각은 하나보네? 그  아이도 불쌍한 애야. 어렸을  때
아버지와 헤어졌거든. 아니 아버지가  가문에서 축출 당했다고  해야하
나?"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거냐?"
문득 개봉에 있는 당 노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가려 이야기를 했을
때 울 듯한 표정을 지었던 노인.
"응! 3년 넘게 아버지를 찾아 다녔는데 아직 찾지 못했나봐."
"이상하네? 당 노야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말이야?"
"아니 내가 살던 서문시전에 당 노야란 영감이 있거든, 비천묵령도와
이걸 만들어 준 사람."
비호 속에 들어 있던 혈신월(血新月)  하나를 꺼내 냉소소에게 내밀
었다.
"와-아! 마안혈정으로 만든 거네?"
별빛을 받아 붉은 빛을 은은하게 뿌려대는  혈신월을 받아든 냉소소
가 감탄사를 발했다.
"그 사악한 무기를 보고 아름답다고  한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거다.
시험을 해본 적은 없는데 금강불괴(金剛不壞)마저도 뚫어버리는 괴물이
다."
"시험 한번 해볼까?"
혈신월을 든 냉소소가 야혼의 손목을 슬쩍 말아 쥐었다. 굳이 금강불
괴 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금강철피공으로 단련된 야혼의 피부를 잘
라내는 거만 확인하면 될 터였다.
"시험해 봤다. 내 피부도 잘라 내더라."
"그러니까 이걸 그분이 만들어 줬다 이거지? 당 노야란 분이."
"지금도 내일을 해주고 있어. 그곳에서 하오대문 건물을 짓고 있거든
천기마해(天機魔解)를 바탕으로."
"하나 더 빼봐."
"그거 들고 다니면 위험해. 나도 이 속에만 넣고 다닐 뿐 손으로  만
지지 못한다고."
손목을 덥석 쥐어 혈신월을 뽑아내는 냉소소의  행동에 질겁하며 말
했다. 그러나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혈신월을 잡아
뺐다. 그녀의 오른손을 새하얗게 감싼 강기는 지저극음마강(地底極陰魔
 )이었다.
"소소 너도 괴물수준에 올라섰구나."
"그렇지? 자룡이란 녀석에게 가기엔 좀 아깝기는 하지."
"누가 널 그놈에게 맡긴데? 꿈도 크다."
"그렇다고 네가 날 데려갈 것도 아니잖아."
"그건 나중 일이고 넌 내일부터 과부가 된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라.
이제는 조건상으로 따지면 순수한 총각인 나보다 처진다는 거지."
"뭐? 내가 과부라고. 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냐? 그러다 들키면
하오대문이고 뭐고 없다는 사실 몰라? 너  그것 때문에 나보고 비무에
나가지 말라고 한 거야?"
냉소소가 경악스런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자룡에 대한
한번도 언급하지 않아 내심 이상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더구
나 별도의 말이 있을 때까지는 절대 비무에 참석하지 말라고까지 하였
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뭔가를 꾸미고 있었던 거였다.
"소소 너는 있잖아 머리는 나보다 좋은데, 사람 다루는  기술은 아직
멀었어. 잔머리 하면 이 야혼이니까 걱정 말아라. 내일은 가서 동굴 청
소나 깨끗하게 해 놔. 그 자식이 한번 써먹었다고 또  써먹으려고 하면
안되니까."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기다리며 구경이나 하셔. 내일부터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
그만 가자. 들킬라."
냉소소의 면사를 들어 얼굴을 가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1) - 과부는 똥값(?)(1)
과부는 똥값(?)
"저럴 수가…. 냉소소가 저런 년이었단 말인가!"
야혼과 냉소소가 헤어져 서로의 숙소로 돌아가는 그 시간 다른 장소
에서 냉소소를 부르며 분노에 떨고 있는 자가 있었다.
자룡(仔龍)이 살기를 펄펄 날리며 쳐다보는 곳은 얼마 전 야혼과 냉
소소가 관계를 가졌던 그 동굴이었다.
내공을 잔뜩 끌어올린 자룡의 시야에 알몸으로 뒤엉켜 있는 두 사람
의 모습이 보였다. 연신 교성을 지르며 머리를 흔들어대는 여인은 분명
면사를 쓰고 있는 냉소소였다. 더구나 아래쪽에 있는  녀석은 야혼이란
놈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반말을 했더냐.  그래서 쳐다보는  눈빛이 그렇게 은밀했더
냐."
한 두 번 보았던 게 아니었다.  식을 올리기 전에 서로 많이 알았으
면 하는 생각 때문에 수시로 사황문 진영에 들락거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야혼이란 놈과 냉소소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야혼이란 놈이 순간 순간 반말을 하
곤 하였던 것이다. 성격이 그래서거니 하고  넘긴 적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냉소소의 행동도 이상했다.
자신을 향해 반말을 하는데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던 그녀였다.
그랬던 그녀의 행동이 바로 저 때문이었다.
"아니다 확실하게 확인을 해야한다."
내심 중얼거리며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그런 그의
귀에 두 사람의 비음과 함께 대화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야랑! 자룡과 결혼하고 이렇게 만나면 안될까? 설사 알아차린다 하
더라도 나를 어떻게 할거야, 사황문의  금지옥엽인데. 다음 마도대전을
위해서는 내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내치진 못할 거야."
"저런 죽일 년이. 감히 이 자룡을 어떻게 보고?"
하지만 냉소소의 이야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말은 더욱 기가 막
혔다.
"지금 뱃속의 아이를 제대로 된 곳에서 키우려면 어쩔 수 없잖아. 하
오밀문의 문도로 키우긴 싫어."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뱃속의 아이, 냉소소가 순순히
결혼을 수락한 이유가 바로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 때문에, 사황문이 마도련 5세력 중에 최하위로 전락했음에도 불
구하고 비무에 참석하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그가 냉소소의 부정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연히 뒷간에
서 시비들이 속닥거리는 소릴 듣게 되었다. 처음엔 그녀들의 말이 냉소
소에 관한 이야기인줄 알지 못했다. 요화문도 중 누군가의 말인  줄 알
았다. 그런데 계속하여 듣고 있자니 냉소소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이었
다. 요화문에서 일하는 시비와 친하다는 그 아이를 족쳐 알아낸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죽일 년, 정숙한 척했던 그 행동이 전부 내숭이었단 말이더냐."
분노보다 비참함이 앞섰다.  유마혼과의 승부에서  이겼다고,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느라 마도대전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이 자룡을 우롱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주겠다."
차가운 살기를 풀풀 날리던 자룡이 몸을 돌렸다. 이곳에 계속해서 서
있다간 냉소소 면전으로 뛰어들 것만 같았다. 그러한 행동은 자신을 더
욱 초라하게 만들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최대한 은밀하게 처리할 작정이었다.
"누님! 갔어요. 이제…."
"무슨 소리야 태웅 동생, 이제 난 시작이라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태웅을 쳐다보는 여인, 요화문의 혈관음  여옥상
이었다.
"누님! 남자는 휴식기간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왜이래요."
태웅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공연히 색색만화공을  가르쳐준다
고 나섰다가 된통 걸린 기분이었다. 색색만화공을 배우겠다는  말은 핑
계일 뿐, 즐기기 위해 나선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맞아, 내가 너무 내 욕심만  차렸어. 하지만 태웅이 이해해  줘야해.
1년도 아니고 10년이잖아. 다른  년들과는 달리 수뇌가 되면  이리저리
눈치가 보여서 할 수가 없어."
"그래도 그렇지, 벌써 몇 번짼데."
"참! 자룡 그놈에게 먹힐까?"
곤란한 얼굴로 말하는 태웅의 모습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자연스
럽게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태웅의 기분을 북돋우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잔득 찌푸리고 있던 태웅의 얼굴에 싱긋 미
소가 어렸다.
"당연히 먹히죠. 아마 내일이면…. 한마디로 만수문은 종쳤다는 거지
요."
두 사람이 이곳까지 나와 관계를 갖은 건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 만
은 아니었다. 자룡의 분노를 거름  삼아 새로운 일을 추진하는  중이었
다. 지금 여옥상과 태웅의 관계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럼 이곳에 계속 있으면  안되겠네. 우리 자리 옮기자.  내가 봐둔
곳이 있거든?"
"누님 내일도 비무가 있는데…."
"걱정마, 내상약은 준비해 두었으니까. 나 안아주지 않을 거야?"
"알았습니다, 누님."
'씨팔! 이러다 마도련에서 총각귀신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할머
니는 내 취향이 아닌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옥상의 모습을 흘낏 흘낏  쳐다보며 옷을
걸쳤다.
'너는 내 취향이다 욘석아. 앞으로 남은 기간동안, 다른 년들에겐  절
대 넘기지 않을 거다.'
"동생 아예 내일부터 내 처소로 거처를 옮기는 게 어때. 그래야 색색
만화공의 진도가 빨리 나갈 것 같아서 말이야."
"안됩니다, 누님. 아직 문주녀석에게 배울 게 많습니다."
"나에게 숨겨둔 정력제가 무지 많은데. 그것들만 전부 복용하면 아마
셋 중 최고가 될걸?"
"정력제라고요? 정말…."
"그렇다니까. 정력제도 아무렇게나 복용하면 안 되는 건 알지?  야문
주를 보면 알잖아. 무턱대고 먹는다고 전부  효과를 보는 게 아니라고.
정성을 다해 달이고, 제  때에 복용해야 하는 게  정력제야. 아마 나랑
같이 한 달만 견디면 정력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없을 걸."
"그래도 안됩니다. 건강에 가장  해로운 건 바로  편식입니다. 3일에
하루 정도라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나쁜 놈! 뭐 편식? 에라 이 도동놈아.'
"알았어 동생, 목마른 내가 우물을 파야지 뭐."
내심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놈 하나 끼고 살아
보나 했는데 결국 첩 신세였다.
"근데 누님! 지금 자룡 그놈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글쎄, 지금과 같은 경우를 당하면 남자는 보통 두 가지 중의 하나를
하곤 하거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술을 마신다거나,  아니면 다른
계집을 학대하곤 하지. 내가 알기론 그  녀석은 후자야. 시비하나를 붙
잡고 면사를 씌워 학대하고 있을 거야."
여옥상의 예상은 정확했다. 자룡의 방에선 두려움에 질린 여인의  비
명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냉소소 이 년, 감히 이 자룡을 우롱해? 죽일 년."
자룡의 눈동자는 잔뜩 광기로  번들거렸다. 바닥에 깔려 발버둥치는
여인은 냉소소였다.
조금 전 시비를 불러 면사를 씌웠다는 사실도 그녀가 가져왔던 술을
마신 후, 마치 춘약에 중독된 것처럼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변했다는 사
실도 깨닫지 못했다. 오직 동굴 속에서 희열에 찬 교성을  질러댔던 냉
소소가 있을 뿐이었다.
밤새도록 시비를 괴롭히던 자룡이 잠든 시각은  동쪽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녘이었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마도대전을  관전하기 위해
나가는 시각에 그는 잠이 든 것이다.
"아직이더냐?"
"네 문주님, 새벽녘에 잠이 드셨습니다."
"쯧쯧, 녀석! 정혼을 했으면 이제는 여색을 멀리할 때도 되었건만. 천
천히 나와도 된다고 하여라."
자룡이 잠든 방을 쳐다보며 혀를  차는 인물, 두툼한 살집의 이자가
자룡의 아버지인 만수존자(萬獸尊子) 자능한(仔能漢)이었다.
그 또한 사황문주 냉운형과 마찬가지로 이번 마도대전은 포기상태였
다. 마도대전을 시작하기 전엔 20명의 일백마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지
금은 15명밖에 남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철마문 무인들을 없애고 있
지만 역부족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철마문은 그만큼 강했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사황문과 사돈이 되었다
는 점이다. 결국 10년 뒤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해서 지금은 마도대전
보다는 철마문의 약점을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알겠습니다, 문주님. 뭐해! 빨리 만두 찔 준비해야지."
자능한을 향해 고개를 숙인 시비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언제나  그
랬듯 자룡은 격렬한 잠자리를 가진 다음날, 물과 만두를 찾는다.
일어나는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지 않으면 경을 치곤 하였던 것이다.
한 명의 시비는 초조한 얼굴로 자룡이 깨어나길 기다렸고, 나머진 주방
에서 불지필 준비를 하였다.
자룡이 깨어난 시각은 점심때를 훨씬 지난 해거름 녘이었다.
"소문주님 식사 준비됐습니다."
"그래 들어오너라."
유난히 배가 고팠는지 밖에서 풍겨오는 만두  냄새가 그렇게 향기로
울 수가 없었다.
"이것밖에 가져오지 않았느냐? 더 가져와라."
"네, 더 말씀입니까?"
만두를 가져왔던 시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에 평소보다 많이 준비했다.
"알겠습니다."
자룡의 인상이 구겨짐을 확인한 시비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나쁜 년!"
거친 욕설을 뱉어내며 거칠게 만두를 씹었다. 마치 냉소소의  환영을
지우려는 듯.
"나쁜 년!"
나쁜 년이란 욕 한마디에 2개의 만두가 그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쌓
인 울분을 먹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는 거였다.
부지런히 먹고는 있으나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자꾸만
줄어가는 만두의 양이 거슬린 뿐이었다.
어느 순간 접시 위의 만두가 제 모습을 감췄다.
"이 년들이…. 윽! 커억!"
밖을 향해 고함을 지르려던 자룡이 가슴을 움켜쥐고 굴러  떨어졌다.
이어 그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독(毒)?"
온몸을 부르르 떨며 조금 전 먹었던 만두를 꾸역꾸역 넘기던 자룡이
이내 축 늘어졌다. 마음십수(魔音十手) 자룡(仔龍)이 남긴 마지막  말은
독이었다.
"아-아악!"
만두를 가져왔던 시비의 비명소리가 자룡의 죽음을 사방에 알렸다.
바로 그 시간, 독이 든 만두는 아니었지만 만두를 먹는 자들은 또 있
었다.
"아미타불! 만두는 역시 고기를 넣어야해. 고기 속을 안 넣고 만두를
만드는 놈들은 전부 열반시켜버려야 한다는 말일세. 근데 연작문주, 이
만두 말이네. 속을 채울 때 개고기를 넣으면 안될까? 개만두라 해서 팔
면 떼돈을 벌 것 같은데. 나 같은 스님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게."
"돌 중, 너는 안심하고 먹잖냐.  눈치를 보길 하냐, 아니면  죄의식을
갖길 하냐. 걱정할걸 걱정해라 임마."
"이런 곰 시주 봤나? 누가 나 때문에 그러는 건가.  산에서 수도하는
병약한 스님들 때문에 그렇지. 모름지기 불제자는 말이네  나보다는 타
인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거란 말이네."
"보현보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소림산가 하는 곳에 가봤는데 그곳
에 있는 중놈들 개기름이 좔좔 흐르더라. 더욱 황당한 일은 뭔지 아냐?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혔다는 법현이란 녀석은 나처럼 생겼어.  그 놈은
털 없는 돼지야, 일명 백돈(白豚), 삶을 필요도 없이 그냥  육회로 먹기
만 하면 되겠더라."
"그를 만난 적이 있나?"
더 이상 승부에 연연하지 않기로 하였는지 전날에 비해 냉운형의 얼
굴은 비교적 평온했다. 오히려 겁천십웅이란 야혼의 말에 더 관심을 보
였다.
"상주에서 만났습니다. 왜 내가 악운보에게 깨지고 나서 비급을 맡긴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바로 소림승려들이었소이다. 소림사법불
이라 했던가? 좌우간 그  치사한 새끼들이 무공비급을  들고 발라버린
것 아뇨."
"맞네, 그 이유 좀 들어보세. 성모궁에서 힘들게 얻은 무공비급을 강
호로 들고 나온 이유가 뭔가?"
비단 냉운형뿐만 아니었다. 마도련에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궁금해
하는 점이었다. 보통 무인들은 선대의 비급을 얻으면  심산유곡에 틀어
박혀 무공을 익힌다. 다는 아니더라도 10성의 경지까지  익히고 강호에
나오곤 하든데 야혼은 비급을 그냥 들고 나왔다.
그 때문에 바보라 소문이 나기는 하였지만 실제  그 이유를 알고 싶
었다.
"이유는 무슨…. 거지 소굴로 변한 하오대문을 일으키기 위해선 무공
이 아니라 돈이 필요해서지."
"그럼 그 비급을 팔려 했단 말인가?"
"당연하지 않소. 환영마도법은 마도인 무공이니까 마도련에 팔면  최
고의 값을 받을 것 아뇨. 무공이야  투견공이 있으니…. 근데 만수문에
급한 일이 있나 보오이다. 자능한인가  하는 자가 좆나게 뛰어가는  걸
보면."
"아미타불! 아닐세 연작문주, 저 양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렸
어. 피바람이 불 징조란 말이네."
"무슨 일이 있나?"
냉운형 역시 궁금한 얼굴로  만수문 쪽을 쳐다보았다. 자능한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수뇌들이 서둘러 뒤따르고 있었다.
"한번 가보시지요. 사돈집인데…."
"그래야 할 것 같구먼."
고개를 끄덕인 냉운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뗄 수 없는 관
계가 되어버린 곳이 만수문이다. 그들의  일은 곧 사황문의 일이  된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시작인가?"
냉소소를 향해 눈을 찡긋한 야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전을  하기
위해서였다.
"거패! 죽이고 질까 아니면 그냥 져버릴까?"
"농촌으로 돌려보내기로 했지 않았나. 요즘 시골엔 손이  부족하다고
하데."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뭐."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어슬렁거리며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사황문 흑돈 야혼, 일백마 서열 17위 철권(鐵拳) 묵자성(墨自星)에게
도전이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2) - 과부는 똥값(2)
비무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열 50위를 차지하
고 난 후 거의 도전을 하지 않았던  하오밀문의 문주가 새롭게 도전장
을 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상대는 철권이라  불리는 묵자성이다.
무려 33계단을 건너뛰어 도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당히 기대되는 대결이기도 하였다.  투견공(鬪犬功)과 철마
권(鐵馬拳), 두 무공의 성향이 비슷했던 탓이었다.
오직 전진 일변도의 공격무공.
사황문 진영에 있는 이들 또한 다른 무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궁금해하는 건 따로 있었다. 진다고 하였던 말과 농부를 만들어
버린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일행의 의문을 대변하듯 고명지가
태웅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냐?"
"두고 보시면 압니다. 다만 한가지 오늘부터 우리 셋은  전부 진다는
겁니다. 4번씩 도전할거고 3번을 내리 질  겁니다. 아니 4번을 다 져야
하나? 어이 육승 4번은 해야겠지?"
"아미타불! 남자가 한번 하기 시작했으면 4번은  해야지, 3번은 보통
사람도 하는걸 모르는가. 쉬지 않고 4번만 하도록 하세."
"들키지 않을까?"
"상관없네. 철마문에 도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만독문은 만수문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할 터이고, 요화문은 연작문주와 곰 시주가 밤일을
열심히 하면 잠재울 수 있을 터이니 그야말로 철마문 천지  아닌가. 알
아도 모른 척 할걸세."
"무슨 말이죠?"
급기야 냉소소마저 태웅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분명  셋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 그동안 야혼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
그러나 두 사람으로부터 그녀가 들은 말은.
"냉시주, 사내는 말입니다. 조개처럼 입이 무거워야 합니다. 주둥이가
싼 놈은 절대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조개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먹고싶어지네. 곰 시주 어디 조개 잘하는 집 없을 까? 이곳  청해는 호
수가 많아 조개도 많다고 하던데."
"글쎄, 이곳에 살아봤어야 알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볼까? 화주 한
병에 조개가 있으면 캬! 최곤데. 잔금 받으면 연장문주더러 조개 좀 사
달라고 하자. 큰 조개, 작은 조개, 모시조개, 대합. 씨팔! 군침 돌잖아."
"정말 욕 나온다, 욕 나와. 그냥 조개처럼  살아라 이 빌어먹을 놈들
아."
두 사람의 모양새를 지켜보던 고명지가 빽 고함을 질렀다. 냉소소 또
한 마찬가지였다.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다 고개를 흔들고 말
았다.
"너희들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가 비무대를 쳐다보았다. 답을 쥐
고 있는 녀석은 야혼이었다. 물론  세 사람이 모의해서 추진하는  일일
터이지만 잔머리의 대가인 야혼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임이 틀림없었
다.
그 순간, 비무대 위의 야혼은 묵자성과 일장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
었다.
서열 17위라는 지위 때문인지 묵자성의 얼굴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
다. 빙긋 미소를 지으며 웃옷을 벗어제친 야혼의 상체를 쳐다보았다.
"놀랍군, 그 몸으로 어떻게 투견공을 익힐 생각을 했나. 가르침을 내
릴만한 선사가 없어서인가?"
근육은 탄탄하게 보였지만 비대한 몸통 때문에 묻는 말이었다.  빠른
움직임을 위주로 하는 권각술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자가 야혼이었
다. 저런 몸으로 권각술의 일종인 투견공을 익히다니, 일반 문파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묵자성은 그 이유를 이끌어줄 선사가 없다는 점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래도 50위까지는 오르지 않았소이까. 마도련 서열 50위면 결코 약
한 자리는 아니라고 보오만."
"그럼 그 자리에 가만있을 일이지, 공연한 짓을 했어."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묵자성이 두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렸다.  순간
그의 몸으로부터 싸늘한 살기가 흘러나오며  두 손이 검은색으로 물들
었다. 철마권(鐵馬拳), 말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어 창안되었다는 무공
으로 권각술에서는 마도련 최고 무공이었다.
"쿡! 좆도 아닌 새끼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냐?  바로 똥폼이야. 멋있
지도 않은데 멋있게 보이려고 애쓰는 모양새 말이야."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야혼이 금강철피공을 끌어올리며 엎드렸다. 언
제나 그랬듯, 오른 손은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는 치켜올린다.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는 자가 되길 바란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설핏 얼굴이 붉어진 묵자성이 오른 발을  앞으로
내밀며 몸을 날렸다. 야혼 또한 마찬가지였다.  묵자성이 오른 발을 들
어올림과 동시에 전방으로 튀어나갔다.
"와아아! 와아!"
군웅들의  환성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부딪쳤다.
파앙!
묵자성의 철권과 야혼의 오른손이 거칠게 맞부딪치고,  그곳으로부터
붉은 불똥이 튀었다.
"타핫!"
묵자성의 입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터지고, 제 자리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회전하는 몸을 따라 쭉 펴진 왼팔이 자세를  낮추고 있던
야혼의 면상을 향해 날았다.
"후-욱!"
고개를 뒤로 젖힘과 동시에 허공으로 떠오른 야혼의 두 다리가 허리
의 탄력을 이용하여 묵자성의 단전을 노리고 날았다.
묵자성의 대응 또한 신속했다. 그 역시 야혼과 마찬가지로 몸을 누이
며 두 다리를 차 올렸다.
빠악!
기이한 소성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뒤쪽으로 공중제비를
넘었다. 여전히 야혼은 바닥에 오른  손을 댄 상태로 엎드렸고,
묵자성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자리를 잡았다.
"차앗!"
선공, 이번 공격은 야혼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지면을  받치던 두
다리를 힘차게 차며 묵자성의 전면으로 뛰어 들었다.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두  사람의 사지가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다.
물러서지 못하는 특성 때문인지 두  사람의 신형은 반장거리를 유지했
다. 손을 뻗어내면 닿을 거리에서 검은 사지가 오갔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고, 팔과 팔이 엇갈렸다. 다리와 다리가 불똥을
만들고, 어깨와 어깨가 굉음을 남겼다.
"투견공(鬪犬功)이 밀린다."
비무를 시작한지 1시진 정도 흘렀을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쳐다
보던 누군가가 낮게 소리쳤다. 그의 말  대로였다. 어느 순간부터 검은
동체의 야혼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미세하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자칫 놓칠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야혼
이 뒷걸음질치는 건 분명했다.
"철마권이 투견공을 이기고 있어."
투견공이 지고 있다는 사실은 야혼의 동체만 보아도 확실했다.  언제
나 바닥에 엎드린 자세였던 검은 동체가 조금씩 일어서는 것이었다.
하오문주가 물러서는 것보다 다가서는 묵자성이 더 빠르다는 의미였
다.
"크윽! 커억!"
급기야는 야혼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마도련 무인들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모처럼 만에  하오밀문 인물을
물리친 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하오밀문
인물들에게 마도대전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누구나 했다.
일백마 중 누군가가 나서서 그들을 물리쳐  주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철권 묵자성이 그 역할을 해주고 있다.
서열 17위이고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실제 이기는 모습을 보
니 가슴속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철권! 철권! 철권!"
어느 사이 철권 묵자성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였다. 묵자성 또한 그
들과 다르지 않았다.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야혼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조금만 더
몰아치면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0년 전의 전설을 이기고 있다는 생각에 온몸에서  힘이 솟구쳐 올
랐다. 그의 시야에 똑바로 서있는 야혼의 모습이 잡혔다.
"드디어 다리가 묶였더냐."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더욱 상체의 공격에 집중했다. 그가 지금껏 공
격을 가했던 곳은 야혼의  다리였다. 움직임을 봉쇄하기위한  조치였고
지금에서야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제  남은 곳은 한곳, 묵자성의
길다란 두 팔이 야혼의 얼굴 앞에서 검은 살기를 토했다.
야혼의 동체가 점점 뒤로 넘어갔고, 철권 묵자성은 마지막 공격을 준
비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렸다.
철마권의 마지막 초식은  철마낙권(鐵馬落拳)이었다. 별다른  초식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상대의 다리를 봉쇄한 후,  몸을 던져 공격하는 초
식이었다. 두 손과 다리를 이용하는 공격.
"간다!"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넘어간 야혼의 동체를 향해  묵자성이 몸을
띄었다. 높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상대의 몸을 덮칠 정도, 즉 5척 정도
의 높이였다.
"끝났다, 놈!"
몸으로 덮쳐가던 묵자성이 낮게 소리쳤다. 거의 바닥까지 누운  놈을
향해 두 팔과 다리를 동시에 찔러 넣으면 끝날 터였다.
상대의 호흡이 느껴지는 순간 두 주먹과 다리를 힘차게 찍어눌렀다.
"커-어억!"
"으-윽! 이겼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소리에  내심 외쳤다. 외상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놈은 기절했다.
"네 놈이 했던 짓과 똑같이 해 주겠다."
지금껏 놈이 했던 대로  죽음을 내리기 위해 오른  손을 들어올리던
묵자성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내공을 쏟아내던 단전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더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는 공력이라니.
"이럴 수가…. 그럼 놈이 동귀어진을."
투견공을 잡았다는 생각에 단전 어림에 작렬했던  놈의 공격을 무시
했었다. 그런데 그 영향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침착해라 묵자성.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더구나 …."
당황한 가운데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내공이 사라진 것인지  일시
적인 증상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서열 17위 이놈을 제외하면 더 이상 도전할 자는 없다. 도전을 받지
않으면 일백마 자리를 유지한 채 무공을 회복하면 된다.'
결국 묵자성은 일시적인  내공이 사라진 것을  일시적인 증상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마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 사실을 숨기기로 결
정을 내렸다. 당분간 도전자가 없을 게  분명했다. 다음 도전자가 있을
때까지 내공이 회복되지 않으면 그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웅성거리는 군웅들을 의식한 묵자성이 재빨리 일어섰다. 그리고는 양
손을 번쩍 치켜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마도대전의 전설이  될 뻔하였던
하오밀문 문주의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와-아! 와-아!"
"일백마 서열 17위에 철권 묵자성을 임명한다."
군웅들의 함성소리와 함께 도전자를 물리쳤다는 종마의 선언이 들려
왔다.
사황문 진영에서 튀어나온 태웅과 추기영은 재빨리 야혼을 부축하여
비무대를 내려갔다.
"왜 죽이지 않았소."
유혁세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가득했다. 지금껏 놈에게 죽어간 철마
문 제자들이 무려 20명이었다. 그들의 복수를 해줄 절호의 기회를 잡았
음에도 불구하고 묵자성은 그를 죽이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이미 기절해버렸습니다. 종마 어르신이 보고 있었고. 우리 철마문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승자의 아량을 베풀잔 말인가?"
"이제부턴 그렇게 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건방졌다면  죄송합니
다."
"아닐세. 자네 말이 맞네. 굳이 나쁜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없지."
묵자성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상황
이라면 모를까 기절한 상대를 죽여선 안 되는 일이다.
"들어가서 좀 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수고했네."
힘없는 얼굴로 멀어지는 묵자성에게 만족스런 미소를 보냈다.
"아버님! 묵 대협이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습니까?"
승리자의 모습치곤 너무 힘없어 보이는 게  이상했던지 유마혼이 물
었다.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생각보다 미약했기에 묻는 말일진대.
"전설이라는 투견공을 깨트렸지 않느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혼 다음으로 올라온 태웅과 추기영 또한 뇌철도(雷鐵刀) 창일수(倉
日水)와 마곤(魔棍) 차평(車平)을  상대로 같은 결과가  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오밀문 출신들에겐 일백마 10위권은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하
였을 뿐, 도전자를 물리친 세 사람이 바로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간 이
유에 대해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말았다.
"이제 만독문만 정리하면 이번 마도대전의 승자는 우리가 된다. 이제
다른 문파는 잊어버려야 한다. 오직 만독문에 모든 전력을 집중해야 할
게야."
"알겠습니다 아버님."
고개를 끄덕인 유마혼이 사황문 진영을 바라보았다. 야혼 일행을  죽
이지 못한 사실 아쉽기는 했지만, 나중에  처리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마도대전의 승리이고, 모든 일은 그 다음으로 미
뤄야 한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았느냐?"
만족스런 미소를 짓던 유혁세가 조용히 다가온 부하를 향해  물었다.
만수문에 대한 일을 두고 묻는 말이었다. 해쓱해진 얼굴로 자리를 이탈
할 것으로 보아 뭔가 큰 일이 벌어진 것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은밀히
알아보라고 하였는데.
"만수문의 모든 출입문은  닫혔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문주
님."
"그래? 하여간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말고 지켜보도록 하여라."
"존명!"
하오밀문 3인의 패배로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 비무장과는 달리 파
악객납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만수문에서는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고
함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룡아! 눈을 뜨란 말이다. 어찌 네 녀석이, 어찌하여."
싸늘하게 식은 자룡의 시신을 붙잡고 자능한이 오열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녀석이 시신이 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찌 이런 일이…."
냉운형 또한 자능한과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망연자실
할말을 잃었다. 사위, 정식 결혼은 올리지  않았지만 정혼까지 한 그가
아닌가. 만수문과 사황문을 하나로 엮어줄 매개체가 사라진 것이다.
'빌어먹을 …. 아니다 어쩌면 더 잘됐는지도.'
문득 자룡이 외아들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수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숨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사돈어른 이럴 때가 아닙니다. 룡아의 사인을 조사하고 대책을 세워
야 합니다."
짐짓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일반인도 아니고 고수 소
리를 듣는 자룡이다. 그런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
다.
"앙 대협만 남고 전부 나가 계시게. 그리고 이곳은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부하들을 물린 냉운형이 자능한을 앉히고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싸
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만수문의 최 심처인 이곳에  적이
침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혹시 저 만두가? 앙 대협 룡아의 옷을 벗겨 보십시오."
"네."
무공을 일으키면  몸이 황금빛으로  변하여 금모마원(金毛魔猿)이라
불리는 앙림이 자룡의 옷을 벗겨냈다.
"저건…."
자룡의 몸을 쳐다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의 심장 부위에
깨알같은 반점이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언뜻 보면 점처럼 보였지만 무
공을 익힌 그들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앙 대협. 무슨 독처럼 보입니까?"
"으음!"
앙림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독은 분명 있었다. 그것도 이곳 마도련에.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비홍사에 물리면 저런 증상을 보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랬다. 사왕 구지수가 기르는 비홍사의 독에 중독된 증상과 같았다.
그가 신음을 흘린 이유였다. 구지수는  다른 문파도 아닌 이곳  만수문
출신이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3) - 과부는 똥값(?)(3)
그랬다. 사왕 구지수가 기르는 비홍사의 독에 중독된 증상과 같았다.
그가 신음을 흘린 이유였다. 구지수는  다른 문파도 아닌 이곳  만수문
출신이다.
"그는 실종된 지 꽤 되지 않았는가. 더구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만수문 출신 인물이 가진  독으로
자룡이 살해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지수가 비홍사를 처음 얻은 곳이 만독문이었습니다."
"그게 정말이란 말인가?"
놀란 얼굴로 앙림을 쳐다보았다. 앙림의 말대로라면 비홍사 독을  보
유하고 있을만한 곳은 만독문과 만수문 두 곳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가지로 귀결된다.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빤한 수가 아닌가?"
냉운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 또한 한 문파를 다스리고 있기
에 잘 알고 있다. 자룡을 암살하는데 비홍사 독을 사용하다니. 바로 들
통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갈융(葛隆)은 백 번 그러고도 남을 놈이오. 철마문 소행으로 보이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한 게 분명하오. 우리 만수문이 철마문에 도전하기를
바라고 저지른 짓이란 말입니다. 갈융 이놈!"
멍한 얼굴로 앉아 있던 자능한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아들
을 해쳐서 이득을 볼 세력은 철마문과 만독문 두 곳밖에 없다.
"사돈!"
냉운형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자능한을 불렀다. 분명 상황은 자능한의
말과 같다. 일백마 중 35명씩을 보유한 그들로선  서로간의 싸움보다는
만수문과 요화문의 도전을 피하는 게 더 중요한 사항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운형은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빤히
보이는, 너무 단순한 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한  발짝 떨어져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는
냉운형에 한했다.
죽은 아들을 쳐다보는 자능한은 이미 흉수를 만독문으로 단정지었다.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는 금모마원  양림에게 내리는 명령만 보
아도 알 수 있다.
"만독문 놈들을 죽여! 죽이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놈은 내 손에 죽
는다고 알려라."
만독문을 겨냥한 자능한의 명령은 마도대전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아
가는 일성이었다.
아주 치졸한 암살이 가져온 결과.
"연작문주 그 치사한 계획이 먹힐까?"
마도대전에서  떨어진 세 사람은 더 이상 도전 받을 일도 없고 하여
마천루에 와서 쉬는 중이었다. 세 사람  모두 심각한 얼굴로, 관심사는
자룡이었다.
"벌써 먹혔다. 지금 비무장은 난리가 아니다."
고명지가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야혼  일행이 떠나고 난 후 얼마
있지 않아, 비무장으로 돌아온 만수문 무인들에 의해 사건은 벌어졌다.
지금껏 철마문 소속 일백마를 향해 도전장을  던졌던 그들이 만독문
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거였다.
비무 자체도 단순하지 않았다. 하오밀문 삼 인이 떠난 자리를 메우려
는 듯 동귀어진(同歸於盡)을 불사하고 죽음의 살수를 펼쳤다.
도전한 3인이 전부 목숨을 잃었고,  그들을 상대했던 만독문 무인들
또한 같은 처지가 되었다. 피가 난무하는 비무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잡것들은 왜 싸우고 지랄이래?"
"몰라서 묻는 거냐?"
고명지가 뜨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조금 전 냉운형을 통해 놀라운 사
실을 알게 되었다. 만수문 후계자이자 냉소소의 정혼자인  자룡의 독살
이 그것이었다. 냉운형의 입에서 비홍사란 말이 흘러나오자마자 곧바로
야혼이 떠올랐다.
비홍사의 주인이었던 사왕 구지수에 대한 내용을  양지가 보낸 보고
서에서 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야혼의 얼굴은 태연했다.
"내가 놈을 없앤 목적은 순전히 여자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
었다고. 짐승도 제 짝은 스스로 선택하는데  인간이 그럼 안되잖아. 그
리고…"
"그리고 뭐…?"
잔뜩 궁금하다는 얼굴로 고명지가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나.
"별 것 아냐. 과부는 내 밥이거든."
"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고명지가 소리를 빽 치고 말았다. 세 놈이 뭔가를  꾸
미는 건 분명한데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단 한번도  승리하지 못한
사황문 도전자와 마지막에 들어서 일부러 패하는 녀석들.
게다가 이번엔 만수문 후계자인 자룡마저 독살해 버렸다. 그녀가  보
기에도 자룡을 없애버린 야혼의  계략은 시의적절(時宜適切)했다. 서로
가 질시의 눈으로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룡의 죽음은, 자능한의 이
성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범인을 찾겠다는 마음보다는 분풀이 대상이 필요한 자능한에게는 비
홍사 독은 분출구라 할 수 있다.
그 상황을 앞에 세 놈이 만든 것이다. 삼류 파락호 짓을 하면서.
"아미타불! 그럼 여기 살고 있는 늙다리들은 어떻게 할건가? 해탈을
시키기엔 목이 너무 질긴 것 같은데…."
"글쎄 지금 고민하고 있다.  농약하고 비홍사 독이면 가능하기는  한
데. 그렇게 되면 이쪽이 너무 기울 것 같아서 말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여기 있는 늙은이들이 있어야 천의분타와 균형이
맞는다."
"그렇겠지? 천의분타는 깍아낼 시간이 없겠지?"
"이런 나쁜 새끼들, 나도 좀 알자. 계속  이렇게 나오면 일이고 뭐고
없어."
급기야 고명지가 게거품을 물고 날뛰었다. 10여 년 이상을  황실에서
굴러먹은 관록이 유명무실해 지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마도련에 국한하
여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아직 건물도 들어서지  않은 천의
맹까지 염두에 두고 이곳에서 사건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첩형언니가 화났나 보다.  앞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럼
안되지. 별 것 아냐. 천의맹도 우리한테 9만냥을 빚졌다는 거지."
"그러니까, 마도련에선 일백마에 들어놓고,  나중엔 천의맹으로 들어
가겠다 이거냐?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백마에 들지 않았으면 모르되 사황
문 소속으로 수십 건의 비무를 치른 녀석들이 천의맹으로 들어갈 생각
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야혼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1년 정도 있다가 갈 건데, 잊어먹지 않을까?"
"그만 하자 이 꼴통아."
"첩형시주! 이곳에서 우리 셋이서 몇 놈을 죽였는지 아십니까? 지금
까지 숨통을 끊어버린 마두의 수가 60명입니다. 사악한 마두 60명을 죽
인 사람을 강호에선 뭐라고 부른다  했더라. 더구나 요기 요  철탁까지
있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고명지가 이어지는 추기영의  말에 털썩 주
저앉고 말았다.
쿠웅!
머리 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마두 60명을  없앤 자들. 강호인들은 그
들을, 협객이라 부른다. 더구나 정도(正道)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무음
항마혈탁을 지닌 자가 추기영 아니던가.
"뭐 하오밀문 삼류떨거지에게 좋은 자리야 주진  않겠지만, 끼워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미타불!"
"안 넣어주면 말고. 설마 우리 셋 들어갈  자리 없을까. 뭐하면 고명
지한테 가서 비비지 뭐."
고명지 무릎 위로 벌렁 드러누운 야혼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
만, 야혼이 무릎을 베고 있는 사실도 알지 못한 듯 고명지는 망연한 얼
굴로 혼잣생각에 빠져 있을 뿐이다.
문득 세 놈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계획을 세워 추진하는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을 자신들에게 맞춰  이용하고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을 누가 알 것인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자
신마저 모르고 있는데.
"너무 놀라지 마라. 괜히 수천구신체(授天九神體)겠냐? 아-함!"
하품을 하는 척 야혼은 팔을 치켜올려 고명지의 가슴을 더듬었다.
딱!
"아얏! 젠장! 손때도 되게 맵네."
"한번만 더 그러면…."
"알았어 이년아,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낮게 투덜거리며 벌떡 일어난 야혼이 침대로 몸을 날렸다.
"아미타불! 연작문주 한잔 꺾으러 안 갈 텐가."
"사이좋게 둘이 다녀오시게. 내외 간의 외출인데 방해하고 싶지 않다
네."
"니미씨발타불! 그럼 여기서 혼자 손장난이나 하고 있게나."
살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 추기영과 태웅이 방을 나갔다.
그 날부터 야혼 일행은 주구장창 도전에 실패했다. 서열을  낮춰가며
도전을 계속하였지만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사지를  잘린다거나 하
는 부상은 없었다. 하지만,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당하기  일쑤였다. 이
제는 누구도 야혼 일행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만독문과 만수문의 비무가  너무 치열했기 때문이었
다. 연일 비무대 바닥이 그들의 피로 물들었고, 잘린 사지와 목이 나뒹
굴었다.
그렇게 마도대전 45일이 지났다.
철마문 50명, 만독문 20명, 만수문  10명, 사황문 10명, 요화문  10명,
종료 15일을 남겨둔 시점에서 일백마에 포함된 무인들의 분포도였다.
만두와 사황문.
"하하하! 문주님,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10여 명의 인물들이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리기  바쁘다.
온통 축제분위기로 왁자한  이곳은 다름 아닌  무적루(無敵樓), 철마문
문주거처다.
철마문 무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희색이 만면한  얼굴들이다. 50명,
마도대전이 열린 지난 300년이래 한 문파에서 일백마에 50명이 들어간
예는 없었다.
이변이 아니라 하늘이 두 쪽 나는 상황이  온다 하여도 철마문의 승
리는 따놓은 단상이었다.
유혁세가 조촐하게나마 주연을 베푸는 이유였다.
"형님! 만수문이 큰 일을 해주었습니다."
꽤나 마셨는지 미소짓는 유웅창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철
마문이 생긴 이래 지난 10일간은 약진의 나날이었다.
강력한 경쟁자로 여겼던 만독문이 만수문에 의해  발목이 잡히는 바
람에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얻은 자리가 많았다. 물론 사황문 무인들이
끊임없이 도전을 해왔지만 한 명의 패배도 없었다.
"우리에게 운이 따르는 거지 뭐겠습니까? 이젠  천의맹을 없애고 강
호를 정복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일백마 서열 8위인  염융(廉融)으로, 2척
크기의 철탑을 주무기로 사용하여 탁탑마왕(拓塔魔王)이란 별호로 불리
는 자였다.
염융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 마
도대전에서는 서열 10위권 안의 무인은 비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마도대전 마지막 5일은 1위에서 10위까지를 위한  비무 날로 지정되
어 있지만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면 도전해봐야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마도대전은 10일만 지나면 끝난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아직 마음놓기엔  이릅니다. 우리에겐  예비가 없지 않습니
까."
사상 유래 없이 50명이 일백마에  들었지만,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
다. 10여 일을 남겨둔 시점에서  새로운 무인들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걸렸다. 일백마에 들어있는 50명만으로 나머지 기간을 버텨야할 입장에
처한 것이다.
"그건 우리뿐만이 아니질 않습니까?"
유웅창의 말마따나 다른 문파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만독문과  만
수문은 연일 죽음을 주고받는  실정이고, 사황문은 전부가  패배자들이
다. 한번 패배한 무인들이 다시 도전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그 또한 불명예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선례를 깬 유일한 인물
이 하오밀문 떨거지들이었으나, 원래 태생이 그런 자들이라며  웃어 넘
기고 말았다.
"지금부터는 지키는 비무만 하면 됩니다. 참 마혼, 넌 누구에게 도전
할 거냐? 천비동에 들어가 보려면 이번엔 일백마에 들어야 한다."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은 유웅창이 유마혼에게 물었다.
"섭혼마(攝魂魔) 길상(吉上)으로 정했습니다. 일백마 서열 16위지요."
별다른 의미를 두고 선택한 상대가 아니었다. 다만 야혼이 17위인 묵
자성에게 도전했다 패하였기에 16위인 길상(吉上)을 선택하였다.
"놈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줄 겁니다. 삼천룡이란 이름이 거저 얻
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줄 겁니다."
"그래야지, 철마문의 차기 문주가 모욕을 참아선 안 되지."
대견하다는 듯 유혁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야혼에게 도전하겠
다고 하였던 아들을 말렸다. 놈을  직접 죽이면 성모궁에서 녀석을  개
취급하였던 아들은 영원히 명예회복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사실을 덮기 위해 놈을 죽였다는 비난만 듣게 될 것이고,  장차 마도련
을 이끌어갈 입장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할 소지가 높다.
묵자성이 죽여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지만 종마의 방해로 죽이지
못했던 게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더 이상 놈에게 연연할 필요가 없다.
마도련주에 오르게 되면 놈들을 추방할 것이고 그때 제거하면 될 일
이다. 아들인 유마혼을 직접 보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될 것이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4) - 만두와 사황문(1)
"그런데, 묵자성이 통 보이지 않는 것 같던데, 몸이 안 좋은 겐가."
"아닙니다, 야혼이란 놈의 투견공을 견식(見識)한  후에 깨달음이 있
었던 모양입니다. 하루종일 명상에 잠겨  있다고 하더군요. 마도대전만
아니라면 폐관하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허허! 많은 걸 얻은 모양이군. 10일만 참고 기다리라고 하게. 특별한
일이 없으면 부르지도 말고."
유혁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마도대전의 진정한 목적이
묵자성 같은 인물을 키우기 위함이다. 생사비무를 통해 목숨을 잃는 자
도 있지만 묵자성처럼 한 단계 발전하는 무인들이 더 많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게 하는 행사가 마도대전인 것이다.
그러나.
유혁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였던  당사자는 그렇지를 못
했다.
"휴-우!"
가부좌를 푼 묵자성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난 10여 일간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철마문의 약진에 동참 할 수가 없었다.
내공의 파훼,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니 받다
들이길 거부했다. 그동안 내공을 되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운공을 하였
고, 내상약을 복용했다.
그러나 한번 사라진 내공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단전
이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했다.
"말을 해야하나… 아니면 이대로 끌고 가야하나."
그를 심마(心魔)에 들게 하는 또 한가지였다.  처음부터 문주를 속이
려는 의도는 없었다. 이삼일 정도 두고보다가 내공이  돌아오지 않으면
말하려 했었다. 아니 말하려고 처소를 나섰다. 그러나 철마문 진영으로
가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철마문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굳이 알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한순간만 참고 견디면 10년의 세월을 벌  수 있
다는 생각. 10년이면 내공을 되찾기엔 충분한 시간인 것이다.
하오밀문의 떨거지에게 졌다는 모욕보다 10여 일  간의 불안을 택했
다. 그러나 하루 하루 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여 도전이라도
들어오면 어쩌나, 다른 무인들이 알아차리면  어쩌나, 그야말로 살얼음
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힘내라, 묵자성. 할 수 있다. 지난 30년  간을 생각해라. 할 수 있다
묵자성."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마도대전이 끝나면 승리를  자
축하는 큰 행사가 있을 터인데 그 때는 피할 수가 없다.
단 몇 년의 내공이라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제발…. 제발 진기야 모여다오. 된다! 모인다!"
간절한 마음으로 운기행공에  몰두하던 묵자성이 희열에  찬 소리를
질렀다. 차갑게 식어있던 단전의 기해혈(氣海穴)에서 따스한 기운이 흐
르기 시작했던 거였다.
"됐다.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하면 된다. 10년 남았는데 그 정도
를 이루지 못할까."
묵자성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운기행공만 가능하다면  빠져나갈
핑계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주화입마로 인하여 내공을 잃었다고 하면
될 터였다. 물론 마도대전이 끝날 즈음에, 승리에 들떠 있을 때 말해야
하겠지만, 10년의 세월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희망이 생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묵자성이 운기행공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무인들이 꽤 있다는 사실과, 내공이  사
라진 건 우발적인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철권(鐵券) 묵자성(墨自星)의 희망 속에 새날은 밝았다.
이날 또한 여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만독문 무인과 만수문 무인간
의 혈전으로 시작되었다.
"두 문주에게 말했는가?"
비무대를 쳐다보던 검마(劒魔)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만독문
과 만수문의 혈전은 나날이 그 도를 더해갔다.
방금 전에도 만수문의 승리로  끝났지만 승리한 자조차  오른팔이 잘리는
폐인이 되었다.
"쯧! 어젯밤 불러서 그렇게 말했건만…."
혀를 끌끌 차며 말끝을 흐렸다. 아들을 잃은 자능한의 분노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마도련의 미래를 위해선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마도대전이 끝나면 다시 하나가 되어야할 그들이 아닌가.
"자네들은  도대체 뭐했는가?  좀 말려보지 않고."
종마의 시선이 뒤쪽의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수마(獸魔)와 독
마(毒魔), 원로원에 들기 전 그들의  신분은 만수문과 만독문 소속이었
기에 하는 말이었다.
"클! 저들이 우리말을 듣는 사람들인가."
수마와 독마의 두 사람의  입에서 나직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신분,
힘을 숭상하는 마도련이라 하여 계급이 없는 게 아니었다.
문주와 같은 성씨를 가진 자들이나, 어린 시절부터 제자로 거둬 키워
진 무인들은 문파에서 정통으로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외부에서 영입
된 자들은, 빼어난 실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독마와 수마가 그랬다. 무려 50년 간을 일백마에 들었지만, 친정이라
할 수 있는 만수문과 만독문에서는 그들을 대우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원로원과 각 문파와는 별개임을 강조하여 관계를 단절시켜버
린 것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원로원에 들 때 일백마 서열이 50위권이었다는 사실
도 크게 작용했다. 각 문파에서 최고 원로로 대접을 받기  위해선 적어
도 10위권 안에 있어야 하건만 두 사람은 서열 50위와 56위였다.
그러한 조건을 갖춘 원로는 도마,  종마, 검마 3인밖에 없다.  더하여
그들의 공통점은 일백마 시절에 속한 조직이 없었다는 거였다.
"으-아악!"
"저러다, 마도대전이 끝나면 마도련 전력 3할은 없어지겠구먼."
만수문 무인이 내지른 비명소리에 종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두  번
째 대결인데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5번씩 가진 도전권을 서로에게 사
용하고 있으니 만수문과 만독문은 10번의 비무를 벌이게 된다.
그들 중 몇 명이 죽어나갈지 알 수가 없다. 역대 마도대전 중 가장 많
은 희생자가 나는 대전이 이번이었다.
"잘못하면 철마문만 남을지도 모르겠군."
"이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탁자 위에 있는 도전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훑어보던 도마가 나지막이 말
했다.
"무슨 말인가. 이변 아니라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이걸 보게. 사황문 도전자들은 전부 한번씩 패했던 아이들이네."
종마의 말을 끊은 도마가 보고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허! 사황문에서 명예를 포기했단 말인가?"
도전자 명단을 살피던 종마가 실소를 머금었다. 한번 패한 자들을 다
시 도전자 명단에 올리다니. 안 된다는  규율은 없지만, 패했던 신진이
다시 도전하는 경우는 지금껏 없었다.
"하지만 이변을 창출하기는 시간적으로 늦은 것 같은데."
사황문 제자들이 도전한 자들의 명단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상대
를 바꿔 도전한 게 아니라 패했던 자에게 다시 도전장을 냈다.
물론 도전자의 입장에서도 상대를 알고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건
도전을 받는 철마문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들은 이겨본 경
험이 있질 않는가.
이변을 일으킬만한 변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 일과가 끝났을 때 나온 결과는 예상외였다. 전부 5명이  도전한
사황문에서 3명의 승자를 낸 것이었다.
첫날이야 그럴 수 있겠지, 사황문  제자들이 운이 따라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종마도 예외는  아니었
다.
그랬던 그들의 얼굴이 6일째 접어들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일백마에 포함된 사황문 무인들의  수가 25명으로 늘어난 것이
었다.
하지만 관람석에서 쳐다보던 무인들이 놀랐다 한들 철마문 수뇌들만
했을까. 그러한 광경은 철마문주인 유혁세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
다. 유혁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방심했군."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은 처음 실감했다. 지금껏 비무를  지켜보았
지만 특별하게 사황문이 잘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3명이 질 때도 있었고, 4명이 진 날도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진
것밖에 없는 것 같았던 사황문이 어느새 2위 자리로 치고 올라온 것이
었다.
"아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 2배가 많습니다. 이겼다는 생
각에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습니다.  따끔하게 야단을 쳤으니까  달라질
겁니다."
유마혼 또한 의아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느끼기에도  사황문
의 패배가 더 많았다. 그동안 일백마 15자리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한 느낌은 유혁세나 유마혼 부자만이 느끼는 건 아니었다.
반대되는 입장이었지만 사황문주인 냉운형 또한 지난 5일간 비무 결
과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놀라운 일이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지?"
누군가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 분명  사황문의 약진이었고, 춤을
추듯 기뻐해야 하건만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듯 정리가 되지 않
았다.
"이런 면이 인간 심리의 오묘한 점이지요."
뜻밖에도 대답은 고명지가 했다. 그녀의 심정도 냉운형과 마찬가지였
지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황실생활에 익숙해 있었기에 다른 이들보다
국면을 보는 눈이 냉철했다.
현 상황을 만들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개차반 세 놈이었다. 5일 전까
지만 해도 철마문에 도전한 사황문  제자들은 백이면 백 전부  패했다.
어쩌다 이긴 자들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연의 실력보다는 운
에 의존한 승리가 많았다.
결국 지난 한달 간  사황문 무인들에 대한 평가는  패하거나 아니면
운에 의해 이기는 자들이란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만수문과 만독문에서 벌이는 죽음의 비무는 사황문
의 승리를 더욱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5번의 비무에서 3번을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중인들은 운이라 치부해
버렸다. 사황문주인 냉운형마저 그렇게  생각했으니 다른 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부턴 쉽지가 않을 것 같은데. 철마문 무인들도 알아차렸
으니…."
그러나 고명지의 중얼거림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 날도 사황문은  두
번의 승리를 일궈냈던 것이다.
유혁세를 비롯한 철마문 진영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하여 같은 결과가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꾸준히 하루에 두 명씩
늘어가더니 마지막 날에 접어들어서는 4명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허허!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군."
목전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난 5일 동안 일백마
에 들어있는 부하들을 독려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간밤에 밤새도록 고민을 했으나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웅창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동생과 밤새도록 같이 있었는데  그라고 하여 답이 나올  리 없지만
답답한 마음에 건넨 말이었다.
"어젯밤 논의한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간밤에 3인이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은 애초의  계획대로 밀고 가자는
것이었다. 10위 권 안에 4명의 일백마가 포진한 철마문은  결코 사황문
에 뒤질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해서 압도적인 승리보다는 우선 천마령(天魔令)을 얻고 보자는  쪽으
로 계획을 변경했던 거였다.
"정 안되면 제가 냉운형에게 도전하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하자구나."
고개를 끄덕인 순간 비무대 위에 오른 사황문 인물의 도전 신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도대전 55일째를 알리는 외침소리였다. 언제나 만수문과  만독문의
비무로 시작했던 다른 날과는 달리, 오늘은 사황문에서  먼저 도전신청
을 해온 것이었다.
만수문과 만독문과의 비무는 이미 무인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져 버렸
기 때문이었다. 5천 마도련 무인들의 관심 속에 시작된  비무는 치열하
게 전개되었다.
사황문이 승리하면 곧이어 철마문이 도전하여 승리를 따내고,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중간 중간 만수문과 만독문 무인들의 혈전이  있었으나 그들만의 복
수전으로 전락해 버렸고, 무인들의 관심은 오직 사황문과  철마문에 쏠
렸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비무는 급기야 종반으로 치달았다. 각각 한  번
의 도전권을 남겨둔 상태에서 여전히 3명 차이였다.
"드디어 끝났는가?"
비무대를 쳐다보며 한도의 숨을 내쉬는 인물, 여전히 일백마 서열 17
위를 고수하고 있는 철권 묵자성이었다. 지난  10일, 그에겐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사황문 무인이 올라와 비무자를 호명할 때마다  등이 젖어
들었다. 혹여 자신의 이름이 나올까 노심초사하였고, 다른 자가 호명되
면 가슴을 쓸었다.
그랬던 비무가 이제 한번 남았다. 사황문 도전자 한 명을 남겨둔  상
태에서 자신이 선택될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봐야한다.  아니 안심해도
될 터였다. 더구나 비무대에 올라와  있는 자는 서열 80위에  도전했단
패한 백사(白蛇) 윤보성(尹輔星)이었다.  지금껏 사황문이 해왔던  도전
방식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서열 17위인 자신에게 도전할 확률은 거
의 없다. 묵자성의 얼굴이 느긋하게 변한 이유였다.
그러나.
"사황문의 백사(白蛇) 윤보성(尹輔星)이 일백마 서열 17위 철권 묵자
성 대협에 도전을 청하오이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5) - 만두와 사황문(2)
쿠웅!
편안한 얼굴로 비무대를 주시하던 묵자성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마
지막날, 아니 마지막 도전에서 자신이  지목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유혁세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라는 듯 비무대를  주시하
던 그가 싱긋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어떻게 해야하나. 말을 하면 살 수 있다."
내공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을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놓고 갈
등하고 있는 참에 유혁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민을  일거에 날려버
린 음성이.
"철권(鐵券). 저번처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끝내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문주님."
'결국 명예를 지키며 죽어야 할 팔자로군.'
참혹한 얼굴로 비무대를 향해 걸어나갔다. 지금에야 내공이 상실되었
다 한들 누가 믿어줄 것인가. 상대가 두려워 도망치려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는지도."
굴욕감에 평생을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놀랍게도 죽음을 결심하자 마음이 편해지는 듯하였다.
힘찬 걸음으로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철권 묵자성…. 도전을 수락합니다."
포권을 취한 묵자성이 철마권(鐵馬拳) 기마 자세를  취했다. 그의 모
습을 쳐다보던 중인들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철마권을 끌어올린 양손이 검게  변해야 하건만, 윤보성을 노려보는
그의 몸에선 어떤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일반 양민이 싸움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던 거였다.
그런 느낌은 윤보성도 마찬가지였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상대를 주시
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굳히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묵선배 나는 광혈무영각을 익혔소이다."
무시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비록 일백마에 들지 못하고  패하
기까지 하였지만 도전자다. 최소한 도전자에 걸 맞는  행동은 취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빌어먹을…."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낮은  욕설을 뱉어내며 돌진했
다. 지면을 박찬 윤보성의 신형이 반 장 높이로 솟구치며  전력을 다해
발을 날렸다. 묵자성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한 초식이었는데.
퍼억!
"으-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안면이 함몰된 묵자성의  신형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저럴 수가…."
비무를 관전하던 무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하오밀문의 문주를 물리쳤던 묵자성이 단 1초를 견디
지 못하다니.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윤보성의 발차기가 결코 대단한 초
식이 아니라는 거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발질이었고, 누구나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었다.
허나 지켜보던 무인들보다 더욱 놀란 사람은 발을 날렸던 윤보성 본
인이었다. 비록 전 내공을 실었다지만, 기분이 상해서 내지른 발질이었
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발이 상대를 저승으로 보내버리다니.
피를 쏟아내며 죽어 있는 묵자성이 눈앞에  널브러져 있는데도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귀신에 홀린 건가. 아니면…."
실상 윤보성보다 더 놀란 무리들은  따로 있었다. 사황문 진영 역시
윤보성과 마찬가지로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백마 서열 17위를 저렇듯 간단하게 이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내공도 없는 놈에게 1초면 되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한데. 빨리
내려오라고 해."
"무슨…."
야혼의 전음에 냉소소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지금껏 비무를  주
관했지만 전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야혼의 말은.
잠시 뭔가에 골몰하고 있던 냉소소가 그동안  비무를 치렀던 대전표
를 황급히 꺼냈다.
"세상에…. 전부가 내공이 없었어."
종이 뭉치를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야혼 일행이 패했던 12명 중 10
명은 사황문 무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패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이 3초 이상을 버틴 자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 골통들이 철마문 무인들의 내공을 없애면서 패했단 말
인가요?"
냉소소에게 묻고는 있지만 고명지의 시선은 야혼에게  못 박혀 있었
다. 네가 대답해보라는 듯한 얼굴로.
"꼭 내공을 없애려고 했던 건  아니고, 우리 셋은 낭심을 잘  노리잖
냐. 잘못 맞았나 보지 뭐."
"맞습니다, 첩형 시주. 어쩌니 저쩌니 해도 남자에겐 가장 중요한 곳
은 바로 물건 아니겠습니까? 해서 집중적으로 그곳만 노렸지요."
"허!"
냉운형이 나직한 신음을 토했다.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실력이 모자라
는 것처럼 하면서 상대의 내공을 없애버리다니, 비무를  주관했던 냉소
소조차 몰랐던 일이니 다른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황문이 지금처럼 약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하오밀문 3인 때
문이었다.
"무섭군…."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들 삼 인에게 마도련 무인 5천명이 전부  속아
넘어갔다. 더구나 사실을 밝히면서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사황문 소속인 저희들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서운  사람은
유혁세지요. 그놈만 없어지면 어떻게 해볼 수 있겠는데, 그자와 대적할
사람이 없으니…."
"아미타불! 맞네 연작문주. 무림 생활을 많이 해보진 않았지만 그 새
끼만큼 강한 놈은 처음이야. 옆에 가기만 해도 불알이 오그라 들더만."
"그럼 내가 오줌싸러 자주 갔던 게 그  새끼 때문이란 말이네? 씨팔
놈! 어째 춥다 했네."
"알았네 이 친구들아, 유혁세는 내가 맡아서 처리하지."
냉운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참으로 맹랑한 녀석들이란 생각이  들
었다.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돌려 말
하는데 이 자들은 돌려 말하는 게 사람을 더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기선제압을 위해선 내일 바로 하는 게 낫겠지?"
"아미타불! 연작문주 말이 맞네. 원래 부부란 말이야, 결혼을 하면 가
장 중요한 게 첫 주도권이거든. 첫 주도권 싸움에서 지면  평생 힘들게
살지 않은가."
"맞아, 한번 달라면 몸이 아프다는 둥 하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
며 거절하지. 그러다 제가 하고 싶을 땐 어쩐지 아냐? 안  해주면 집나
간다며 강짜를 부리는 거야. 결혼을 했으면 하는 건 의무라고 하면서."
"나만 이겨주면, 아니 유혁세를 나서지 못하게만 만들면 우리 사황문
을 마도련 주인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로 들리는데, 확신하나?"
냉운형의 어투가 차갑게 변했다. 음담패설처럼 하고 있지만, 향후 철
마문과 사황문의 관계를 빗대어 하는 말임에 분명했다.
어느 쪽의 승리로 끝이 나던 간에 사황문과 철마문은 비슷한 전력을
갖게 되고, 발언권이 세질 수밖에 없다. 그 중심엔 유혁세나 자신이 있
을 건 자명한 일인 게다.
"아!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  제가 익힌 색공 중에 색색만화공이
란 무공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  색공을 만들었던 운몽인가 하는  종자
가…. 아니 운몽 사부님이  요화문의 창시자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미 작살나기는 했지만 만수문은 냉소소의 시댁이니까…."
"허억!"
냉운형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요화문도들이 사황문 일백마에 도전하지 않았던 이유가 지금에
야 밝혀진 것이다. 야혼이 중간에 나서서 막았다는 말이었다.
"세 문파가 하나로 합쳐지는  경사스런 날인데 저  염병할 종자들이
있어서…. 니미럴타불이구만."
추기영이 비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유마혼을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
렸다.
"으음! 알았네. 자네들 말대로 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냉운형이 몸을 돌렸다. 세 녀석이 말하는 의미
를 이제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세대교체,  유혁세와 자신은 일선에
서 물러나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은퇴가 아닌 비무에 의해.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냉운형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묵천대마공(墨天大魔功) 사황문 최고 무공을 운기했을 때 나
타나는 현상이었다.
한편, 비무대로 올라선 유마혼은 내공이 가득 서린 음성으로  도전자
를 지목하고 있었다.
"철마문 소속 패천마룡(覇天魔龍) 유마혼(劉魔魂), 일백마 서열  16위
섭혼마(攝魂魔) 길상(吉上) 대협께 도전이오."
일순 비무장이 침묵에 휩싸였다. 삼천룡,  성모궁에 다녀왔던 마도련
의 영웅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3년 전 마도련을 떠날 때보다 강해졌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었
지만 아직 눈으로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가 드디어 비무장 위로 올라온 것이다. 첫 상대 또한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섭혼마 길상은 누구나 인정하는 강자였다.
극에 이른 환술(幻術)로 상대의 심령마저도 제압한다고 하여  섭혼마
라 불리지만 그의 주특기는 암기술이다. 환영 속에서  펼쳐지는 암기술
은 마도련 일절(一絶)로 통하는 무공이었다.
무인들의 반응을 쳐다보던 유마혼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드디어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하오밀문의 떨거지의 도
움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력으로 증명할 기회가 온 것이다.
느긋한 얼굴로 사황문 진영을 주시했다. 길상의 등장을 기다리며.
그러나.
사황문을 쳐다보며 한참을 기다렸지만 길상은 나오지 않았다. 관중석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상황은 사황문도 마찬가지였다. 당혹스런 눈빛의 냉소소가 부하
들을 불러 길상의 행방을 물었다.
"아미타불! 조금 전 내가 한 이야기를 못 들었습니까? 오늘은 세 문
파가 하나되는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말입니다. 그분들에게 물었습니다.
사황문을 마도련 주인으로 만드는데 몸을 희생할 수 있겠냐고."
"그분들?"
주변을 살피던 냉소소가 깜짝 놀란 눈으로 추기영을 쳐다보았다.  길
상을 포함하여 10위에서 20위권 안에 들어 있던 무인들이 보이지 않았
다. 분명 오전까지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그들이었다.
"아미타불! 이제야 알아차리셨군요. 사황문을 위해 기꺼이 몸을 희생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두를 먹었습니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여
기 엄 대협은 만두를 싫어하더군요."
"똑바로 말 안 할래!"
비무대를 흘깃 쳐다보던 냉소소가 빽 쏘아붙였다. 세 놈이 무슨 일인
가를 꾸민 게 분명한데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사황문을  위해 만
두를 먹었다니.
"소승이 알기론 서로 모르는  타인이 가장 가까워지는  방법은 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두를  준겁니다. 연작문주의 상비약인
춘약이 들어 있는 만두를."
"그럼?"
"아미타불! 맞습니다, 냉 시주.  그들은 쌍코피가 터지도록 사황문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겁니다. 물론 비지땀도  흘리고 있겠지요. 근데 말
입니다. 그 춘약이란 게 엄청납니다. 일반 춘약을 백 배로 농축해서 농
약이라 부르는데, 손톱만큼 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섯 사람의
경공이 배는 빨라지더란 말입니다.  얼마나 빨리 달리던지,  그 광경을
냉 시주가 봤어야 합니다."
"킥!"
"큭!"
옆에서 듣고 있던 고명지와 엄시우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
왔다. 웃음을 참아보려 하다가 저도 모르게 터지는 소리였다.
"세상에…."
냉소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해! 이번 비무 포기한다고 해야지."
"그래도?"
"맞습니다, 냉 소저. 저 놈은 비무를 위해 나온 놈이  아닙니다. 연장
문주가 도전했던 묵자성보다 한 단계 위로 도전한 걸 보면,  길상 대협
을 죽이러 나온 게 분명합니다.  비무가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새끼가
틀림없습니다."
"……?"
일장 연설. 참으로 말은 그럴싸했다. 아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
만 그 당사자가 태웅이란 데 문제가 있었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비무장에서 상대를 죽이고 다녔던 그가 아닌가.
그랬던 놈이 한다는 소리가.
"우리하고 같은 놈이란 건데 뭘 그리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쇼."
어이없는 듯 쳐다보는 일행을 향해 태웅이 빽 고함을 질렀다.
"어이 우호법, 약 먹을 시간 된 것 같은데. 좌호법도 마찬가지고."
"니미씨팔타불!"
좌우호법을 외치는 야혼의 말에 나직하니 불호를  외며 요화문 진영
을 흘낏 쳐다보았다. 요화문주 나령과  여옥상이 자리를 뜨는 게  보였
다. 약, 그녀들이 다려주는 정력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 야혼이 나령에게 색색만화공을 가르쳐 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
을 때만 하여도 좋았다. 나이를 좀 먹기는 했지만 상대는  요화문의 문
주가 아닌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릎에 화상을 입었다.
처음 알았다. 그 짓도 싫어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색색만화공 때문이었다. 그녀와 관계를 가지면서 가장 덕본
게 있다면 바로 색색만화공이었다. 색공의 달인답게 색색만화공을 이해
하는 속도도 빨랐고,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자신이 배우고 있다.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6) - 만두와 사황문(3)
"그놈의 정력제만 아니었어도, 내가  절대 안 갔을 거다.  가세 우호
법."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태웅을 불렀다.
"어디 가는데?"
두 사람의 표정이 이상함을 느낀 냉소소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꼭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는 듯하였다.
"저들 또한 사황문 무인들과 마찬가지야. 하오대문을 위해 몸을 희생
하는 중이다."
"왜 네가 안하고 저들에게 넘겼냐?"
냉소소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별일이다 싶었다. 여자라면 죽고 못사
는 야혼이 그녀들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짐승이 아닌 이상 이녁 식구와  그 짓을 하면 안되지. 암!  그게 이
야혼의 신조야."
"식구? 혹시…, 가족이냐."
고명지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야혼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고,
지금도 진행중이지만 그의 가족관계나 과거에 대해 알려진 건 전혀 없
다. 다만 마옥성(魔獄城) 출신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제 입으로 식구라 하고 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야혼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
왔다.
"오랫동안 같이 산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안 하는 이유가  뭔지 몰
라?"
"그거야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까…. 지겹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잖아."
일순 우물쭈물 대답을 못했다. 결혼한 사람도 아니고 결혼을  생각해
본적도 없는데 알 리가 없다.  아니 결혼해서 살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식구가 되었기 때문이야. 왜 개도 오래 키우다 보면 주인 닮는다 하
잖아. 부부도 마찬가지다. 한 20년 같이  살면 그때부턴 형제처럼 변해
버린 거야. 그래서 아랫도리가 소식을 보내지 않는 거고."
"에라!"
"어라? 고명지 네가 못 믿는 모양인데, 그건 남자새끼들을 보면 바로
나온다니까. 제 마누라보고는 소식 없던 그놈이 다른 여자를 보면 바로
탄력을 받는 다는 것 아니냐. 그런데 난 요화문 그년들과는 무려 300년
이다. 그때부터 식구였던 사람을 잠시 못 봤다고 짐승 같은 짓을 할 수
는 없지."
"훗! 호호호! 하하하!"
결국 만두 사건부터 참고 있었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제 몸  상할
게 걱정되어 태웅과 추기영에게 넘긴 녀석이 하는 말이라니. 기가 막혔
다. 천막 안에 있던 몇몇 사황문 무인들이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비무를 재촉하는 종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황문은 비무여부를 결정해 주시오."
"냉소소, 종치는 영감이 찾는 것 같은데?"
"냅둬! 좀 있다가 말하게."
"저 녀석 골탕 좀 먹이자고?"
"응. 1각 정도만 기다렸다가 내려가라고 하지 뭐.
"그래? 뒷간에 갔다고 잠시만 기다려 달랍니다!"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관중석을 향해 냅다 고함을 질러버렸다.
순간.
비무를 기다리던 무인들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두 세력간의
마지막 비무를 앞둔 무인이 뒷간이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
다. 야유를 질러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망연하게 비무대를 쳐다보았
다. 유마혼의 반응을 보기 위해.
"저런 개자식!"
느긋한 마음으로 길상을 기다리던 유마혼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졌
다. 비무에 나오지 않는 길상보다 뒷간에 갔다고 소리치는 야혼의 행사
가 더 괘씸했다.
길상뿐 아니라 자신까지 우스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흥분할 줄 알았느냐?"
내심 끓어오르는 노화를 내리 누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문득 자
신이 흥분하기를 노리는 야혼의 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기를 진정시키며 몸 상태를 하나 하나 점검해 나갔다. 먼저 단전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른 혈도들도 하나씩 점검했다.
최상의 상태임을 확인하고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얼마든지 기다릴
참이었다. 길상을 없애고 하오밀문 문주보다 더 낫다는 소릴 듣고 내려
갈 참이었다.
그러나.
"사황문에서는 이번 비무를 포기하겠습니다!"
부르르!
이어 들려오는 냉소소의 외침에 머리끝으로 피가 몰렸다. 한동안  움
직일 수가 없었다. 잔뜩 기다리게 해놓고 비무를 포기하다니. 확인이라
도 하듯 다시 한번 사황문 진영을 쳐다보았다.
자리를 뜨는 사황문 일행이 목격되었다. 아울러 귓전에 들려오는  한
줄기 전음.
"좆됐다, 임마!"
"이익, 야혼, 이 개자식!"
순간적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이성을 잃은 유마혼의  신형이
멀어지는 야혼 일행을 향해  폭사되었다. 비무대를 지켜보던  무인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는 사실도 잊었다.
오직 한가지, 야혼이란 놈을 없애버리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의 생
각을 대변이라도 하듯, 뽑아든 검에서 적색  광채가 솟구쳐 올랐다. 그
와 동시에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터졌다.
"혈풍무적강(血風無敵 )!"
혈풍무적강, 철혈무적검법의 1초였다. 겁천십웅의  무공답게 1초부터
강기의 경지였다. 성모궁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운기조차 불가능한
무공이었다. 성모궁의 2년 생활이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구결로만 전해 들었던 철혈무적검법을 2초까지 완벽하게 익혔다.  마
지막 초식이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익힌 초식만으로도 무림 최정상에
오를 거라 믿었다. 냉소소 또한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혔지만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철혈무적검법에 비하면  한령신공은 한참 아래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검에서 솟구친 1장 길이의 붉은 검강(劒 )이 광폭한 기세를 머금고
야혼의 등판을 향해 나아갔다.
"냉소소 저놈이 공격해 온다, 막아!"
야혼의 동작도 신속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짓더니,
재빨리 냉소소 앞으로 몸을 날리며 고함을 질렀다. 순간 냉소소의 몸에
서 새하얀 기운이 폭풍처럼 몰아쳐 나왔다.
그녀 또한 야혼과 마찬가지였다. 드러난 눈이 상큼 치올라 가더니 순
식간에 온몸이 백색으로 변했다.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대응이었다. 머리칼까지 완전하게 백색으로 변한 순간  그녀의 입
에서도 날카로운 고함이 터졌다.
"한옥빙마수(寒玉氷魔手)!"
둥근 원을 그리던 그녀의 두 손이 일순 투명하게 변했다. 죽음의  손
이라 불리는 백옥수(白玉手)가  나타나며 그곳으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저런 멍청한…."
비무대를 지켜보던 유혁세가 해쓱해진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창졸간
에 일어난 일이라 손쓸 겨를이 없었다.
공격의 성공여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온갖 비겁한 짓이 다  통용되는
마도대전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무장 내에서 한했다.
비무장을 제외한 장소에선 어떠한  싸움도 용납되지 않는다. 본인의
힘이 아닌, 권모술수에 의해 승자가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으로 지난 300년 간 가장 엄격하게 지켜져 왔다.
규칙을 어긴 자에 대한 처벌도 가혹했다. 마도련 존폐를 위협하는 위
험인물로 간주되어 영구추방 시키게 되어 있었다.
쉬이잉!
300년 만에 나타난 두 무공은 엄청났다. 마치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
한 광경이 중인들의 시야를 압도했다.  우선 중인들의 눈에 띤  광경은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붉은 강기였다. 무서운 속도로 나아가던 붉은 강
기들이 일순 주춤거린다 싶더니 그 사이로 백색 투명한 광채가 무자비
하게 파고들었다.
쿠과광! 과앙! 광광!
"아악!"
"커-억!"
커다란 폭음과 함께 두 마디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낮은 비명을
토해낸 냉소소가 가랑잎처럼 날아가며 붉은 피를 뿌렸다.
유마혼의 상태 또한 다르지 않았다. 뒤쪽 철마문 진영으로  날아가는
그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재빨리 몸을 날려 유마혼을 받아 안은 유혁세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
얼거렸다.
"당했어? 냉운형에게 철저하게 당해버렸어."
유마혼의 몸 속에 내기를 불어넣던 유혁세가 진득한 살기를  흘렸다.
일어서서 움직이는 냉소소의 모습이 보였다. 면사 주위가  붉게 물들어
있지만 생각보다 내상은 심하지 않는 듯하였다.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두고보자 냉운형, 이 빚은 반드시 갚아준다."
짓씹듯 말을 뱉은 유혁세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마도련 규칙을 어긴
행동에 대한 처벌은 나중 일이고 우선은 살려야 했다.
'성공했다, 냉소소.'
유혁세가 떠난 것을 확인한 야혼이 품안에 쓰러져 있는 냉소소를 향
해 슬쩍 전음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 또한 기절해 있었던 거였다.
"이런 바보!"
얼굴이 잔뜩 굳어진 야혼이 재빨리 그녀를 내려놓았다.
"비키게, 내가 보겠네."
냉소소의 명문혈에 내력을  주입하려던 야혼을 밀친  이는 뜻밖에도
종마였다. 냉소소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내려온 것이었다. 그가 느끼
기에도 유마혼을 자극한 쪽은 사황문이었다. 유마혼의 처벌은  어쩔 수
없다지만 상황에 따라 죄의 경중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내상이 심하네. 서둘러 의원에게 데리고 가도록 하게."
냉소소의 내부에 진기를 밀어 넣던 종마가 냉운소에게 말했다.  그녀
의 상태 또한 심각했다. 적어도 며칠 간은 요양을 해야만  정상으로 회
복될 정도로 중상이었던 거였다.
"이 양반이 노망났소? 고칠 것도 아니면서."
종마를 향해 고함을 지른 야혼이 냉소소를 업고 몸을 날렸다.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 한령신공을 익힌 냉소소가 더 강했는데…."
야혼 일행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느끼기엔 분명 냉소소가  한
단계 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패구상 하다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이것까지 계산하고 하고 한 일이라면…."
문득 몸을 부르르 떨며 사황문을 쳐다보았다. 냉소소를 다시  평가해
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일만에 25명의 일백마를 만들어낸
가공할 능력을 발휘한 것도 부족하여, 철마문의 약점마저 틀어쥐었다.
더구나 유마혼과 나눈 일장으로 보여준 그녀의  무공은 소문 이상이
었다.
"남은 5일이 재미있어 지겠구먼."
종마 뒤쪽으로 다가온 도마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사황문이  어떻게
나올지가 참으로 궁금했다. 비겁한 행위를 저질렀던 유마혼은 일백마에
서 떨어질 게 분명하고,  지금까지의 결과는 철마문이  2명 앞서 있다.
문제는 10위권 안에 있는 자들이었다. 철마문은 유혁세를 포함하여 4명
을 보유한 상태고 사황문은 냉운형 1명이다.
여전히 철마문이 유리한 입장이었다.
"자넨 유혁세가 천마령을 포기할 거라 보는가?"
"글쎄, 그건 알 수 없지. 하지만 이번 천마령은 비중이 너무 커서 말
이야. 내기를 하자면 포기하지 않는다에 걸겠네."
도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형님 오히려 잘됐는지도 모릅니다."
유마혼에게 응급조치를 끝낸 후 유웅창이 유혁세를  향해 넌지시 말
을 건넸다. 처음에야 조카 때문에 경황이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황문의 음모가 분명했다.
그들에게는 냉운형을 빼고는 고수가  없다. 해서 냉소소를 동원하여
유마혼의 공격을 유도한 것이다.
"냉운형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저지른 일이  분명합니다. 해
서 마혼일 자극한 겁니다."
"죽일 놈!"
"아버님!"
"깨어났느냐? 잘 들어라.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죽으면 철마문을
이끌어갈 사람은 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제 집은 마도련이 아니라 철마문입니다."
유마혼이 확고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왜 모
르랴. 천마령을 선택하겠다는 말인 것이다.
그건 유마혼 또한 바라는 일이었다. 마도련은 거쳐가는 장소일 뿐 결
코 목표가 아니었다. 마도련에 소속감도 없고,  마도련에 남고 싶은 생
각도 없었다.
"대신 이 아비가 한  가지는 약속하마. 사황문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해 놓으마. 놈이 도전을  해오지 않으면 내가 도전을  해서라
도."
유혁세의 눈에 번쩍 살기가 어렸다. 추방마저도 감수하겠다는 아들이
고마웠지만 마음까지 편한 건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이 냉운형의 머릿속
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니 피가 끓었다.
"죽여주겠다, 냉운형."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7) - 니미럴타불(1)
니미럴타불!
"그년 참 독하네. 참기가 쉽진 않을 건데."
고명지와 암흑루를 나서던 야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
다. 한사코 치료를 거부하는 냉소소 때문이었다.
이미 종마도 확인했으니 더 이상 누워있지  말고 일어나라 하였으나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3일간은 누워있어야 한다면서 고집을  부렸
다. 유웅창을 처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걱정되는 모양이다."
불편한 얼굴로 암흑루를  쳐다보는 야혼의 모습에  고명지가 빙그레
웃었다. 야혼의 또 다른 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알기론 야혼이란
인간은 자신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냉소소를 걱정하다니, 마치 딴 사람을 보는 듯하였다.
"당연히 걱정되지. 우리 하오대문 청해분타주가 될 사람인데. 총문주
되는 사람이 수하의 아픔을 모른척해선 안되지."
"그게 달까?"
"암만, 그 이상은 없어. 어머닌 일찍 돌아가시고,  애비라는 작자에게
이용만 당했잖아 불쌍해서 그런 거야."
"훗! 그랬구나."
역팔자 걸음걸이로 앞서 나가는 야혼의 등에 대고 낮게 웃었다. 녀석
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가 유일하게 돕는 사람은 불행한 과거를 가진 이들이었다.  서로간
의 차이는 있지만 양지와 냉소소를 돕는 이유가 같지 싶었다.
"같이 가 임마. 이 어두운  곳에 숙녀를 팽개치고 혼자 가는  녀석이
어딨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천루에 도착한 두  사람을 추기영과 태웅
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가져왔네 연작문주, 그런데 이틀만에 가능하겠는가?"
"당연히 가능하지, 다른 놈의 글 모사하는덴 이 야혼을  따를 사람
이 없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추기영에게서 종이를 건네 받았다.
"그건 뭐냐?"
"이거? 보현보살이 가져온 종이는 만수문주 글씨체고, 태웅이 가져온
건 만독문주 글씨체."
"너희들?"
"또 놀란다. 너무 자주 놀라니까 이젠 예쁘지도 않아. 가끔가다 한번
씩 놀라라고, 알았어? 그리고 부하들은 불렀냐?"
"응? 응…. 내일 비무전에 도착할  것 같아. 근데 정말 말  안 해 줄
거냐?"
예쁘다는 말에 화들짝 놀란  고명지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부하들이
필요하다고 하여 부르긴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다.
"알았어 보채기는…. 부하들이 오면  종치는 영감 옆으로 자리를  옮
겨."
"그건 또 왜?"
더욱 황당한 말이었다. 처음엔 비무를 시킬 것처럼 하던 녀석이 이제
는 종마 옆 최상석에서 구경만  하라니. 도무지 야혼의 계획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내일 그 자리에 앉아 있어보면 알아. 오랜만에 글 쓰는 연습 좀  하
겠네."
싱긋 미소를 지으며 준비해둔 붓을 집어 들고는 대충 무엇인가를 휘
갈겼다.
"너희들 자신 있는 거냐?"
야혼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고명지가 낮게 물었다.
"우리는 셋이고 놈들은 둘이잖아."
"숫자만 많으면 전부 이긴다는 것처럼 들린다."
"당연하지, 더구나 상대는 늙다리들 아니냐. 이거나 외라."
"이건…?"
눈앞에 내밀어진 종이를 받아든 고명지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야혼
을 쳐다보았다. 내일 아침 마도련 인물들 앞에서 낭독할 연설문임을 왜
모를까 만 그 글씨체가 문제였다.
그동안 양지로부터 받았던 보고서의  필체와 일치했던 것이다. 이내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야혼이란 녀석에 대해 양지의 평가가 후하다 생각
했었는데 전부 제 녀석이 쓴 글이었다.
"그동안 네 얼굴에 금칠하느라 힘들었겠다."
"몰랐냐? 내가 금강철피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아예 금강철면피 신공(神功)이라 해라 이 나쁜 자식아."
그동안 속았다는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야
혼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지 않았던 건 양지의 보고서가 결정적이었다.
자신이 생각나서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둥, 가족관계를 물었다는 둥,
보고서의 주된 내용이 야혼의 신변잡기였다. 양지의 보고서  때문에 야
혼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에 끌어들일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다 잠시나마 너를 기쁘게  해주려는 이 야혼의 씀씀이  아니었겠냐.
사람은 말이다, 그런 조그마한 것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거다."
"됐어, 임마. 내용이나 말해봐."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야혼의 말대로 그
당시에는 내심 즐거웠다. 때로는 양지의 보고서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뭐 별 것 없어. 이번 마도대전에서 선출된 인물을  마도련주로 인정
하고 그와 같이 일을 하겠다는 그 정도야."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네. 좋아 해주지."
흔쾌히 승낙했다. 다른 때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마교의 동태가 감
지된 지금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만 들어가서 자라. 춥거나 외로우면 말하고."
"하여간 말하는 것하고는. 한 가지만 명심해라, 네가 글 쓰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서찰을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슬쩍 미소를 머금은 고명지가 몸을 돌렸다. 글쓴이의 마음가짐에  따
라 다른 형태의 글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했으나, 이해할 녀석도
아니기에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방금 한 말조차도 야혼과  추기영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심오한 말이라는 사실을.
"보현보살 무슨 말 같냐?"
"아미타불! 신경 써서 똑같이 모사하란 말이  아닐까 싶네. 조금이라
도 틀리면 좆된다는 소리를 돌려 한말로 들리는구먼."
"제발! 너희 두 놈은 밝히지만 말고 공부  좀 하고 그래라. 걱정이다
이래가지고 하오대문을 어떻게 끌어 나가냐."
한쪽에 있던 태웅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서 잘난 년들을 분타주로 만들고 있잖아, 새꺄!"
"오잉? 그런 의도가 있었던  거냐? 가만있어라…. 청해분타는 냉  소
저, 천의분타는 당 소저, 총타주는 완 소저가 되는 거고,  그럼 한 사람
이 남잖아?"
손가락으로 꼽아가던 태웅이 턱으로 고명지가 나간 문을 가리켰다.
"황실엔 분타 안 세우냐?"
"그럼 황실까지 먹어버리려고?"
"당연하지 임마, 이 세상 가장 이쁜 년들이 다 모인 곳인데."
"그럼 좆나게 고생한 우린 뭐하냐?"
"뭐하긴 임마, 나는 통 돌리고, 곰새끼 너는 차력술…."
"에라! 나쁜 새끼야. 한 자리 준다면 어디 덧나냐?"
"이 염병할 시주들아, 황실의  궁녀를 처먹는 일은 나중이고  우선은
이것부터 해결해야할 것 아냐."
"아, 맞다. 꿈은 접어두고 현실에 집중해야지."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다시 붓을 들어 먹을 듬뿍 찍었다.  하지
만 멈칫거릴 뿐 글을 써내려가지는 못했다. 조금 전 고명지가  했던 말
이 여전히 걸렸던 탓이었다.
"아미타불! 곰시주 조금 전에 했던 말은…. 혹시  어렸을 때 서당 근
처에서 살았는가?"
야혼의 모습을 쳐다보던 추기영이 태웅을 향해 물었다. 뭔가 아는 것
처럼 잘난체 하였기에 묻는 말이었다.
"그건 아니고, 개봉에 오기 전에 나랑 같이 동업하던  녀석의 아버지
가 훈장이었다."
"그럼 그놈이 뭐 좀 가르쳐 주던가?"
"글도 그놈에게 배웠는걸. 그놈이 말하길 글은 밥과 같다고 했다. 아
니 밥 먹는 동작이라 해야겠네."
"밥?"
야혼과 추기영의 얼굴이 뜨악하게 변했다. 태웅에게 들은 말 중 가장
황당한 말이었던 탓이었다.
"밥이 아니고 밥 먹는 행동이라니까? 잘 들어 봐라. 객잔에 들어갔는
데 어떤 놈씨 하나가 밥을 정신 없이 처먹고 있었단 말이다. 그걸 보면
뭘 느낄 수 있을까?"
"돼지 같은 새끼가 더럽게 배가 고팠구나, 정도."
"그럼 인상을 푹푹 쓰며 신경질적으로 처먹고 있을 땐."
"마누라가 바람나서 화났겠지 뭐."
동시에 대답하는 야혼과 추기영을 향해 태웅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
다.
"너희 둘 그놈이 누군지 알아?"
"당연히 모르지…. 오라!"
"아미타불! 그런 심오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지  정말 몰랐군. 앞으
론 밥 먹는 놈들을 자세히 살펴봐야겠네. 그럼 연작문주는 이렇게 하면
되겠구먼. 살기를 펄펄 풍기며 글을 쓰면 말이네."
"좋아 한번 해보자."
고개를 끄덕인 야혼이 힘차게 써 내려갔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처럼 들리긴 하지만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도록 글을 쓴 야혼은 새벽녘이 돼서야 두 사람의 필체를 완벽하
게 모사할 수 있었다.
"내가 봐도 너무 잘 썼네. 허미, 벌써 이렇게 되었나?"
자랑스런 얼굴로 글을 쳐다보던 야혼이 슬쩍 손으로 비벼 재로 만들
어 버린 다음 밖으로 나왔다.
"냉 영감이 시작한 모양이네?"
비무장에 도착한 야혼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비
무장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야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비무장을 쳐다보는 군웅들의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였던 첫 번째 사건의 주범은 종마  곁에 앉아 있는 동창첩형
고명지였다.
지금껏 사황문 진영에서 비무를 지켜보던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밝
힌 것이다. 관복을 입은 10명의 관리들마저 나타나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으니 신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간단한 축하 말과 함께 폭탄선언을 하였다.
이번 마도대전에 의해  선출된 련주와 마교척살  대사를 논하겠다고
하였다. 마도련 무인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에서 인준하는 마도련주, 100년 전 정사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
이었다. 그것만해도 엄청난 일이거늘.
5천 마도련 무인들을 더욱 놀라게 한 사건은 다음이었다.
사황문주 냉운형이 철마문주인 유혁세를 향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2명이 부족한 사황문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냉운형이 첫 도전자로 나설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그가 나설 시기를 마지막 날 정도로 예상했다. 그
것도 철마문과 같은 수의 일백마를 보유한 상태에서만.
그러한 상황은 비무장으로 올라선 유혁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일이군, 자네가 먼저 나를  부르다니.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 여긴 건가."
"후자라 생각하는 게 편하면 그렇게 하게나. 하지만, 자네는 하지 말
아야 할 짓을 했더군. 아들에게 암습을 시키는 행위 말이네. 무공도 없
는 양민을 개(犬)로 만들더니 이제는 뒤에서 공격이라…."
"어이가 없군. 자네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있나? 딸을 팔아먹는  것도
부족하여 희생양으로까지 이용하는 파렴치한이 자네 아닌가. 자네가 도
전하지 않았으면 내가 하려고 하였네."
차갑게 말한 유혁세의 전신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하
였다. 문득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비열하게 마도대전을 이끌어
온 자가 냉운형이다. 오히려 화를 내야할 사람은 자신일진대.
"각오해야 할거야!"
"역시 겁천십웅의 무공이라는 건가?"
냉운형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딸을 이용하였다는 유혁
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눈앞에 서 있는 한 자루의 검
(劒)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겁천십웅을 넘기 위해 무려 300년을  노력했던 사황문이건만 그들의
무공 앞에 서면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놀지 않았다. 사황문의 지존 무공을 끊임없이 발전시
켰다. 그 무공이 바로 묵천대마공(墨天大魔功)이다."
낮게 소리친 냉운형이 사황문의 최고 무공인 묵천대마공을 끌어올렸
다. 일순 그의 몸 주변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기경이었다. 끊임없이 흘러나온 검은 기운은 두 사람의 신형을  숨긴
것도 부족하여 비무장 전체를 감싸버린 것이었다.
"저 양반이 미쳤나? 저래가지고 어떻게 유혁세의 검법을 파악하나."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야혼이 잔뜩 볼멘소리를 했다.  비무장을
가득 채운 검은 운무는 철혈무적검법을 관찰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나중에 기회가 있으니 그때  보기로 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세. 밤새도록 굶었더니 배가 등가죽에 달라 붙어버린 모양일세."
"아직 안 먹었냐?"
"문주가 식전인데 좌우호법이 먼저 먹을 순 없지. 사이 좋게 같이 먹
어야지. 갑시다 연장문주."
사이 좋게란 말을 유난히 강조하며 태웅이 맞장구를 쳤다. 더구나 야
혼을 향해 문주라 꼬박꼬박 부르는 모양새가 이상했다.
"일 끝나면 준다니까."
"아미타불! 왜 이러시나 연작문주. 이제 4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우리
도 써먹어 봐야 할 것 아닌가. 만두 하나 만들 분량만 주게나."
그랬다. 두 사람이 간절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농약 때문이었다. 엄
청난 효과가 증명된 춘약.  야혼이 두 사람을 나령과 여옥상에게  보내
면서 대가로 지불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알았어 자식들아."
주방으로 들어선 야혼이 품속에서 두 개의 봉지를 꺼내 건넸다.
"아이고, 이 이쁜 것들. 그런데  이건 기름종이 아닌가. 정말  대단한
머릴세 그려."
기름을 먹여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만들어진  봉투를 받아든 추기영
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분말로 만들어진  춘약을 보관하기엔
최고의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밥 안 먹고 어딜 가?"
"혼자 처먹고 게시게. 연작문주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확인하고 오
겠네."
환한 미소를 남긴 추기영과 태웅이 경공을 이용하여 사라져 버렸다.
"그럼 나도 병문안이나 가볼까?"
주방에서 고기 몇  점을 챙겨들고 비무장을  빠져나와 무풍무영술을
펼쳤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 암흑루에 도착하자 경계를 서고  있던 무
인들이 반갑게 야혼을 맞았다.
"역시 세상 사는데는 뇌물이 필요하단 말이야. 만두 하나만  줘도 이
정돈데…."
만두를 먹고 요화문에 갔던 자들임을 알아보곤  슬며시 미소를 머금
었다. 순식간에 3층까지 올라온 야혼이 방문을 살짝 열며 말했다.
"냉 과부, 몸은 괜찮나?"
"웬 일이래? 바쁘신 양반이 이곳을 다 오고. 요화문에 박혀  있을 줄
알았더니?"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8) - 니미럴타불(2)
"좋다는 표현을 꼭 그런 식으로 해야겠냐?"
"좋아서 하는 말이라는 것 몰라?"
머리맡으로 다가온 야혼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야혼의 방문에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다고 긴장하면 내가 미안하지. 참! 이것 봐라."
야혼의 얼굴이 어색하게 변하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예, 안 돌려주기로 작정을 했구나?"
냉소소가 내민 물건은 저번에 가져갔던 혈신월 2개였다. 손으로 잡지
도 못한다는 그것들로 목걸이를 만든 듯 하였다.
"네가 나에게 선물 줄 사람은 아니잖아. 그래서  직접 구했지 뭐. 날
을 제거해서 그렇게 날카롭진 않아."
"잘한다, 어쩌면 내 목숨을 구해줄지도 모르는 무기를 가지고 장신구
나 만들고."
"야혼이 목숨을 잃는다고 누가 그래? 무공이  없는 상태에서도 살아
난 사람을. 나 한가지만 물어도 돼?"
"뭐가 또 궁금해서…. 아무것도 없는 놈인데."
"음…! 아냐 됐어. 비무대 상황은 어때?"
사실 그녀가 묻고 싶었던 것은 야혼의 본명이었다. 야혼이란  이름은
그 스스로 지은 이름이 틀림없을 것이다. 밤의 혼이라 이름지을 부모는
없을 것이기에. 하지만 이내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굳이 야혼의 과거
를 들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싱겁기는…. 철혈무적검법에 대해 좀 알아보려 했더니 삽질했다. 네
아버지 때문에 아무것도 안보여."
"아! 내가 말 안 해줬구나. 묵천대마공이라 불리는 무공이야.  겁천십
웅의 무공을 이겨보기 위해 만든 사황문 300년 업적."
"그럼 유혁세를 보낼 수 있겠네?"
"글쎄, 유혁세라 하여 놀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완전하지도 않은
철혈무적검법에 당하진 않을 거야."
냉소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비무장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은 거의 백중지세였
다. 검은 운무 속에서 끊임없이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대단하다, 냉운형. 그동안 너를 잘못 보았다는 걸 인정한다."
애검인 철장검(鐵匠劒)을 가슴  앞으로 세우며 숨을  골랐다. 단순한
사공이라 생각했던 묵천대마공은 대단했다. 냉운형의 몸에서 나온 검은
운무는 시야만 가리는 게 아니었다. 그의 동체마저도 운문 속으로 사라
져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묵천대마공은 2인자에 어울리는 무공일 뿐이다. 결코 최고가
될 수 없단 말이다!"
급격하게 다가오는 검은 기운을 향해 몸을 날리며 힘차게 검을 뿌렸
다. 유마혼이 한번 선보인 혈풍무적강의 초식이었다.
검끝에서 솟구친 붉은 검강이 냉운형으로 짐작되는  검은 덩어리 속
으로 파고들었다.
냉운형의 동작 또한 신속했다. 양손을 말아 쥐더니 커다란 원을 그리
며 회전시켰다. 묵천대마공의 1초인 암흑천지세(暗黑天池勢)였다.  그의
동작에 검은 운무들이 맹렬하게 회전하였고, 점점 하나의  덩어리로 모
양을 갖췄다. 마침내 두 개의 권(拳) 모양을  형성한 그것들은 붉은 강
기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다.
차르륵! 과앙!
"으음!"
비무대 바닥이 들썩일 정도의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3장 정
도 밀렸다. 자신들 앞에 새겨진  선명한 발자국을 바라보던 두  사람이
낮은 신음을 뱉어내며 재차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타핫!"
유혁세의 입에서 짧은 고함이 터지고 그의  철장검이 공간을 조각조
각 잘라내기 시작하였다. 단순히 허공을 자르는 칼질이 아니었다.
철장검이 지나간 곳에는 초승달 모양의 붉은  광채가 생기며 냉운형
을 향해 빠른 속도로 밀려갔다. 검탄강기(劒彈 氣), 검강을  먼 거리까
지 날려보내는, 강기의 경지보다 한 단계 위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유혁세가 만들어낸 검탄강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의 철장검
이 흔적을 남길 때마다 1자 길이의  검탄강기가 공간을 잘라내고 있었
다.
"암흑천지풍(暗黑天池風)!"
눈앞으로 다가오는 검탄강기를 쳐다본 냉운형의 입에서 짤막한 고함
이 터지고, 초승달 모양의 강기를 향해 주먹을 뻗어냈다. 그의 무공 또
한 검탄강기와 유사했다. 다만 냉운형은 권으로 강기를  만들어내는 차
이가 있을 뿐이었다.
팡! 팡팡팡! 팡팡!
검에서 쏟아진 강기와 권에서 흘러나온 강기가  커다란 굉음과 함께
부딪쳤다 소멸되었지만 두 사람의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
"걸렸다, 유혁세! 이 상태로 가는 거다.  우리 둘 중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끊임없이 위아래로 검을 휘두르는 유혁세를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공대결, 그가 원하는 대결이었다. 서로의 쌍장을 붙이고 하는
대결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은 내공을 겨루는 것과 비슷하다.
서로간에 공격을 멈출 수가 없다. 유혁세는 끊임없이 검탄강기를  만
들어야 하고, 냉운형은 그 검탄강기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권을 뻗어내
야 한다. 멈출 수도 주춤거려서도 안  된다. 한순간의 멈칫거림은 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서로간의 진기가 고갈될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죽일 놈!"
유혁세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냉운형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물러서고자 하여도 물러설 수가 없는 상황이다.  두 사람 사이, 2장 공
간은 온통 강기의 바다로 변했다. 틈을 보여 물러서게 되면  마치 봇물
터지듯 강기가 흘러들 것이다.
아무리 강한 무공을 소유했다 하여도 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강기
엔 견딜 재간이 없다. 그의 말대로 끝날 때까지 가야만 한다.
"그거 아나 유혁세,  나에겐 후사를 맡길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놈!"
냉운형의 의도를 알아차린 유혁세의  온몸이 붉게 변했다. 동귀어진
(同歸於盡), 놈은 목숨을 담보로 이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게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아들인 유마혼은
마도련에서 추방당하게 생겼고, 사촌 동생인 유웅창은 그런  아들을 돕
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제거되면 문주자리를 차지하려 할 것임에 분명했다.
"죽이겠다. 없애버리겠다고!"
붉은 얼굴, 붉은 팔, 그리고 붉은 검. 전력을 다한 유혁세의 모습이었
다. 그러나, 어느덧 시간은 2시진을 훌쩍 넘겼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
작은 여전히 같았다. 도끼질하듯  철장검을 휘두르는 유혁세와  양손을
번갈아 내뻗는 냉운형. 입에서 흘러내린 피로 가슴팍이  붉게 변했음에
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과 함께 생긴 변화는 또 있었다. 냉운형의  묵천대마공에
의해 만들어진 흑무가 점점 엷어지더니  마침내 비무장 전경이 군웅들
의 시야에 드러났다.
"허억! 저런 무모한…."
궁금한 얼굴로 비무대를 주시하던 무인들이 나직한 신음을 내질렀다.
두 사람의 대결 형태 때문이었다.
웬만큼 무공이 있는 자라면 두 사람의 대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
로 알아볼 것이다. 말로만 듣던 내공 대결이었다.
그러한 현상은 상석에 있는 종마  일행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당혹한
얼굴로 비무장을 주시했다.
"허허! 난감한 일이 벌어졌구먼."
종마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냉운형의 도전이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마도련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
이 내공 대결을 벌이다니.
"저 둘 중의 한 명이 마도련주가 될 줄 알았는데…. 그럼 새로운  신
진이 마도련주가 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대인. 내공대결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
이 지속된다면…."
"폐인이 된다는 말이시오? 그럼 말려야 하지 않습니까?"
야혼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지금의  상황
을 예측하고,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게다.  목표물을 밖으로 유인해 내
기 위해.
사황문 쪽을 힐끗 쳐다본 고명지가 엄하게 말했다.
"이번 대결은 어쩔 수 없다지만 내일부터는  저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좋겠소. 마교라는 대적을 앞둔 상황에서 너무 큰 손실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대인. 저들의 대결이 끝나면 대인의 뜻을 전달하겠습니
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직 자능한과 갈융이 남아있기  때문이
었다. 오히려 지금 싸우고 있는 냉운형이나 유혁세보다 그들 두 사람이
더 문제였다.
"쉽진 않겠군."
내심 중얼거리며 비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대결은  절정
으로 치달았다. 입과 코로 연신 피를 흘리며 전방을 향해 검과 권을 휘
두르고 있다.
팡! 파앙! 팡팡팡! 팡!
적색의 강기와 검은 색 강기가 두 사람의 중앙에서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마치 두 사람의 운명처럼.
점심나절에 시작된 기이한 대결은 해가 석양으로 넘어가고 있음에도
끝나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의 의복은 자신들의 피로 붉게 변했고, 급
기야 붉은 핏방울이 비무대 바닥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서로간에 쏟아내던 검탄강기의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10여 개의 검탄강기로 시작했던  대결이 5개로 줄었고, 지금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고갈. 샘물처럼 솟구치던 내공이 완전하게 말랐다는 의미였다.
"이제 끝낼 시간이 되었다,  유혁세. 너와 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거다. 이야합!"
낮게 중얼거린 냉운형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리며 유혁세의 전면
으로 돌진했다.
"기다렸다, 냉운형!"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유혁세가 검을 들어 돌진하며 고함을 질
렀다.
"저런!"
두 사람을 주시하던 궁웅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들
의 공격방법 때문이었다. 내공대결도  부족했던지 방어를 도외시한  채
서로를 향해 달려든 것이었다.
"크윽!"
"커억!"
두 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짤막한 비명이 터졌다. 유혁세의 철장
검은 냉운형의 옆구리를 관통하였고,  냉운형의 권은 유혁세의  단전을
때린 것이었다.
"혼자가지 않는다, 냉운형!"
단전에서 느껴지는 통렬할 고통에 냅다 고함을 질렀다. 기해혈의  파
괴, 더 이상 내공을 모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으득 이를 갈아붙인 유
혁세가 오른손을 힘차게 옆으로 그었다.
턱!
왼쪽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유혁세의 검을 손  하나가 덥석 거머쥐었
다. 냉운형의 오른 손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내공이 없다는 사실도 잊
고 검날을 잡아버린 것이었다. 냉운형의 손이 붉게 변했다.
순간.
"멈추시오!"
데-엥!
"커-어억!"
"크-윽!"
내공이 가득 실린 종소리가 두 사람의 신형을 떼어놓았다.
기나긴 비무의 끝이었다. 사황문주 냉운형과 철마문주 유혁세의 비무
는 승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도련 최고 무인이라  할 수 있던
두 사람은 더 이상 강자로 군림할 수 없게 되었다.
무인이라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내공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마도련 무인들이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종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일부터는 오늘과 같은  대결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
다. 냉운형과 유혁세는 재빨리  각 문파의 의원으로  옮겨졌고, 우울한
가운데 비무는 막을 내렸다.
쏴아악!
마도련 남쪽 파안객납산에 검은 먹구름이 몰려온다 싶었는데 어느새
비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차갑게 식혀진 산자락은 연신  희뿌연 안개를
토해내며 봉우리를 항해 올려보내고 있다.
쉬이익!
쏟아지는 비를 뚫고 검은 인형이 빗살처럼 달리고 있었다.
"갈융, 놈!"
잔득한 살기를 흘리는 이자는 만수문의 문주인 만수존자 자능한이었
다. 종마를 따로 만나 만독문주와 비무시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돌
아온 그에게 뜻밖의 서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수마제 갈융에게서 온 서찰이었다. 그것을 펼치는 순간 저도  모르
게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비밀리에 만나 은원을 해결하자는 단순한 글
귀였지만, 그곳에서 엄청난 살기가 스며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동창 첩형 때문에 전력을 다한 비무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부하들에게도 숨기고  은밀히 만
수문을 빠져나와 갈융이 기다리겠다고 하였던 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울창한 수림을 뚫고 산을 오른  자능한이 장곡(長谷)이라 불리는 계
곡으로 들어섰다. 만수문에서 20리  떨어진 이곳이 약속장소였던  것이
다.
"왔다, 갈융!"
장곡 안쪽 깊숙이 들어온 자능한이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미안하군, 갈융이 아니라서."
"네 놈은? 하오밀문의…?"
자능한이 두 눈을 한껏 치떴다.  한쪽 풀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갈융이 아니었다. 비대한 몸집을 가진 하오밀문의 문주인  야혼이란 놈
이었다.
"하오밀문이 아니고, 하오대문이라 정정해 주었으면 좋겠군."
"네 놈이었더냐?"
어이없는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  듯
했다. 갈융은 만독문에서 하지 않았다며  끝까지 부인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들을 공격했던 이유는, 만독문을 제외하고는 의심할
문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었는데.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아들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껏 만난 적도 없
는 사람이 야혼이다. 그와  같이 온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다. 밥 한끼
같이 먹은 적 없는 자들이 아들을 독살하다니. 전생에 원수진  일이 있
으면 모를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옥성(魔獄城)을 알고 있나?"
"헉!"
제  목:[하오대문] 하오대문(109) - 니미럴타불(3)- 4권 끝.
마옥성이란 말에 자능한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마옥성(魔獄城)
이란 곳이 세상에 알려진 것 100년 전이었다.
정마대전이 무림인들의 승리로 끝나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건 수십
만에 달하는 마교도들이었다. 대부분이 무공을  모르는 양민들이었기에
없앨 수도 없었다. 극렬분자들은 전부 처형했지만 여전히  마교도는 십
만이 넘었다. 그들 전부를 수용한 곳이 바로  마옥성(魔獄城)이었다. 그
또한 정사 무림인 수뇌와 황실  고관들만 알고 있는 극비사항이었기에
일반인들은 마옥성 자체를 모른다.
그리고 100년, 작금에 와서는 마옥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냐?"
"내가 살던 곳을 13연옥(煉獄)이라 부르더군."
"그럼 네놈은…."
"그래, 그때는 혈광아(血狂兒)라  불렸다. 어미와 누이를  잡아죽이고
그 육신을 씹어먹었다고 해서."
조금씩 살기를 쏟아내던 야혼이 가만히 옷을 벗었다. 도축장  지하에
서 알게된 마옥성, 도백회에서 파악한 마옥성의 수는  13개였고 상당수
강호 무인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무당파의  청운자와 앞
에 있는 만수존자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놀랍군, 폐쇄된 13연옥의 생존자가 있었다니…."
자능한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도  13연옥(煉獄) 사고에 관해 들었다.
그곳의 사고는 인재가 아닌 천재라 하였다. 지하에 흐르던 화맥이 폭발
하여 마옥성 안에 있던 2천여 명의 인물 중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다
고 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놈이 그곳 출신이라 한다.
"그래서 복수를 하고 싶어 나를 찾은 게냐?"
"복수? 설마, 나 같은 놈이 무슨 수로 복수를 하겠냐. 그냥 지금처럼
살다 죽으면 몰라도."
"그럼 왜 찾아왔나?"
"알고도 그냥 갈 순 없잖아. 이곳까지 어려운 걸음  했는데 쳐죽이고
가야지. 운이 좋다면 다른 놈의 행적을 알아낼 수도 있고. 마도련에 너
혼자 있진 않을 것 아냐."
"자신 있는 것처럼 들리는  구나. 마도련 일백마가  강한 줄 알았더
냐?"
자능한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무공이 약해 마도련 서열  3
위에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니었다.  굳이 전면에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이번에 사황문과 정혼을 맺었던 건, 냉소소가 가져왔던
무공 때문이었다. 마옥성에서 얻지 못했던 무공들.
"나도 알아, 걔들 좆도 아니었어.  그리고 냉운형이나 유혁세보다 네
가 더 강하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너는 이곳에서 죽어!  갈가리 찢겨
서."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금강철피공을 끌어올리며 투견공 자세를
취했다.
"크! 하하하! 그까짓 투견공(鬪犬功)으로 나를 상대하려 했단 말이더
냐? 성모척살대 무공 중 20위 권에도 들지 못했던 무공으로."
"성모척살대에 대해 많이 아는 모양이군. 투견공이 20위 권에도 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 보면."
"당연하지 않겠느냐, 내가 바로 성모척살대…."
말을 하던 자능한이 흠칫 표정을  굳혔다. 저도 모르게 실언을 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야혼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기이한 눈으로 자능한을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비결을 가르쳐 줄 수 있나? 백살이  넘은 놈이 어떻게 새끼를
깔 수 있는지. 아니 아랫도리를 100년 넘게 써먹을 수 있는  비법 있으
면 말 좀 해줘."
내심 기절할 지경이었다. 과거  개봉에서 주천상을 만났지만 그보다
더한 놈이 바로 자능한이었다. 100년 전 성모궁에서 전부  죽었다고 알
려진 성모척살대가 눈앞에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말투로 보건대 성모궁에서 살아온 놈이 분명했다.
"쯧! 몰랐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야혼의 말을 인정하는지 가볍게 혀를 찬 자능한이 양손을 앞으로 내
밀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그의  열 손가락에서 은빛 손톱
이 한 치 가량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이었다. 더하여 자능한의 동체가 푸
른색으로 변했다.
"100년 전엔 이 무공을 청랑마도법(靑狼魔刀法)이라 불렀느니라."
청랑마도법, 100인의 성모척살대  일인으로 떠났던  청랑마도(靑狼魔
刀) 능자한(能仔漢)의 독문도법이었다. 그랬던 그가,  60대의 얼굴로 살
아 있었다.
"씨발 놈! 새끼 까는 방법 좀  알려달라니까 별 그지같은 소릴 하고
자빠졌네."
낮게 소리친 야혼이 자능한을 향해 몸을 날렸다. 흑돈이란 별호를 얻
었지만 그의 신형은 돼지처럼 느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자능한의 면전으로 다가가며 오른손을 힘차게 휘둘렀다.
챙!
검게 변한 손과 푸른색의 자능한의 손이 맑은 쇳소리를 남겼다.
붉은 불통과 함께 자능한의 오른손이 야혼의  목을 목표로 쾌속하게
뻗어나갔다. 푸른색 손에 은빛 손톱은 기이한 살기를 사방으로 뿌렸다.
야혼의 동작도 빨랐다. 내밀고 있던 오른  팔을 뒤로 돌림과 동시에,
왼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했다. 자능한의 손톱을 피하는 동작과 몸을 돌
리며 공격하는 동작을 동시에 펼친 것이었다.
"우웃!"
낮게 소리친 자능한의 신형이 순식간에  1장 여를 물러났다. 놀라운
몸놀림이었다. 일반적인 무인의 경공이 아닌, 마치 맹수가 움직이듯 훌
쩍 물러나는 것이었다.
"무공이 청랑마공이라고 하더니 하는 짓도 늑대네?"
애꿎은 허공을 가른 손을 거둬들이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강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쉬이 볼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마천루 원로들에
육박한 무공을 가진 자가 자능한이었다.
"공연히 청랑마공이겠느냐?"
비릿한 살소(殺笑)를 머금은 자능한 또한  야혼과 같은 자세를 취했
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양손으로 땅을 짚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한 마리의 늑대를 연상시키는 동작이었다.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튀어 올랐다.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온 자능한의 양손이 거칠게 휘둘러졌고, 그에
맞서 야혼의 양손이 쾌속하게 뻗어나갔다.
동작 또한 비슷했다. 허공에서 서로의 두 손이 교차하는 순간 두  사
람의 다리가 동시에 상대를 향해 날았다.
빠악!
돌덩이가 부딪치는 듯한 거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공중제비를 넘었고, 착지하는 순간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투견공이 뭔지 아냐? 10대를 맞고 한방을 노리는 무공이다."
금강철피공을 잔뜩 끌어올리며 그대로  돌진했다. 잔뜩 날선 손톱이
가슴팍을 노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카앙! 캉!
야혼의 가슴팍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한 걸음 주춤 물러나던 야
혼의 신형이 좀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가들었다.
그리고는 양쪽 어깨를 노리고 다가오는 자능한의  양손을 재빨리 틀
어쥐었다. 엎드린 상태에서 맞잡은 팔에 힘줄이 서고 두 사람이 신형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그 순간.
몸을 세우던 야혼이 자능한의 상체를 당김과 동시에 턱을 향해 머리
통을 쳐 올렸다.
그러나 자능한 또한 녹녹한 자가 아니었다. 힘을 풀렸다고 느끼는 순
간 야혼의 명치를 향해 무릎을 차올렸다.
퍼억!
빠악!
고개가 사정없이 제켜진 자능한의 신형이 뒤쪽으로 1장 가량 밀렸고,
그와 비슷한 거리를 야혼도 물러났다.
"씨발! 재미없군."
별반 타격을 주지 못하자 야혼이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자능한의  신
체 또한 금강철피공을 익힌 자신과 비슷했다.
외적인 타격엔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하였다.
후-욱!
"좋다, 한번 가보자고."
깊게 숨을 들이킨 야혼이 사정없이 땅을 박찼다. 그 때부터 시작이었
다. 잔뜩 자세를 낮춘 두 사람의 신형이 사방에서 부딪치며  거친 굉음
을 토해냈다. 손과 손이 마주치고, 몸과 몸이 마주쳤다. 발과 발이 엇갈
리고 머리와 머리가 부딪쳤다.
청랑마공과 투견공, 늑대와 개의  싸움은 거의가 허공에서 이루어졌
다. 바닥을 박찬 두 동체가 한번씩 엇갈릴 때마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
었다.
"하지만 내가 더 유리해 임마. 네 놈보다 더 무겁거든."
그랬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능한의 동체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똑같은 자세와 똑같은 공격이었으나, 내공과 체중에서 자능한이 밀리고
있었다.
"또 한가지는 뭔지 아냐? 청랑마공엔 몸통을 잡는 동작이 없지만 투
견공은 있거든."
사지를 활짝 벌리고 날아가던 야혼이 일순 몸을 공처럼 말며 자능한
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헉!"
지금까지완 전혀 다른 공격에 자능한이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곰같
이 뚱뚱한 녀석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럼 네놈의 등은 어떻게 할거냐?"
허리 쪽으로 조여드는 팔을 느끼며 양손을 힘차게 쳐들었다.  한순간
의 고통만 참아내면 놈의 등판에 손톱을 박아 넣을 수 있을 터였다.
자능한의 손톱에서 강기 같은 기운이 서리고  무서운 속도로 아래쪽
을 향했다. 마지막 목적지는 벌판처럼 보이는 야혼의 등이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야혼의 동작을  빨랐다. 자능한의 허리를 감
은 상태 그대로 빙그르르 몸을 돌려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재빨
리 그의 등을 타고 머리  쪽으로 올라갔다. 아래쪽을 향했던  자능한의
손톱이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 머리 쪽으로 간다고 안전할 것 같더냐?"
야혼의 동체가 등을 타고 오름을 감지한 자능한이 몸을 구부리며 양
발을 허공을 차올렸다. 하지만 야혼의 머리를 감으려 했던 동작이 실수
였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개봉의 파락호인 야혼을 무인으로 생각했던 탓이었다. 어쩌면 무인이
란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있어 나온 동작인지도 몰랐다.
"비었다 임마!"
낮게 소리친 야혼이 불끈 틀어쥔 주먹을 자능한의 낭심을 향해 힘차
게 박아넣었다.
퍼엉!
"으음!"
극성으로 익힌 청랑마공은 금강불괴보다 한  단계 아래의 금강체(金
剛體)를 주었지만 낭심까지 완전하게 보호하지는 못했다.
아랫도리로부터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허공으로  솟구치던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콰악!
두 사람의 자세가 묘하게 변했다. 다리를 이용하여 서로의 목을 감은
채 지면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두 사람의 손은 쉬지 않았다. 끊임없이 서로의 몸통
을 공격했다.
쿵! 쿵! 쿵쿵쿵!
공이 튄들 저러할까, 둥글게 말린 두 동체가 사방에 구덩이를 만들며
움직여 다녔다.
"그 새끼 엄청나구먼. 혈신월에는 어떻게 되나 보자."
자능한에게 알아낼 게 있어 지금껏 투견공으로만  상대했는데 더 이
상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손을 활짝 편 상태에서 자능한의 옆구리를  향해 사사만화류를 펼
쳐버렸다. 야혼의 양손에서 붉은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왔다.
"커억!"
두 사람의 대결 중 처음으로 붉은 피가 뿌려졌다. 대여섯 개의  혈신
월이 자능한의 옆구리를 뚫어버린 것이었다.
조이고 있던 다리가 스르르 풀리자 야혼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혈신월이 파고들었던 그곳을 향해 검은 주먹을 정신 없이 박아 넣었
다.  두 주먹이 붉게 물들고 자능한의 입에선 연신 비명소리가  흘러나
왔다.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생기고 그곳으로부터  갈비뼈 부서
지는 소리가 나자 그때서야 야혼의 공격은 멈췄다.
"아이고 죽겠네. 진작 혈신월로 끝낼걸…."
피를 넘기는 자능한의 모습을 확인한 야혼이 몸을 굴려 일어났다. 놀
랍다는 생각뿐이었다. 유혁세나 냉운형보다  강한 자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 구약종의 무공까지 쓰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혈신월이 그의 몸을  완전하게 관통하지 못했다
는 데 있었다. 금강불괴지신마저  파괴하는 무기가 혈신월이  아니었던
가.
"이 자식들도 아직 끝내지 못했나?"
갈융을 처리하기로 하였던 태웅과 추기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
이 있을 법한 쪽을 쳐다보던 야혼이 이내 걸음을 옮겼다.
혈신월을 찾기 위해선 비천묵령도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바위 아래쪽에 두었던 옷을 집어들기 위해  걸어가던 야혼의 신형이
주춤 멈춰 섰다.
갑자기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머리털이 쭈뼛 섰다.
"살기? 이런…."
흠칫 표정을 굳힌 야혼이 비천묵령도와 옷가지를  집어들고 냉큼 몸
을 굴렸다.
순간.
"크앙!"
엄청난 포효소리가 야혼의 귓전을 때렸다.
"저럴 수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야혼의 입에서 경악에 찬 신음이
새어나왔다. 조금씩 변하는 자능한의 모습  때문이었다. 주먹이 들락날
락할 정도로 찢겼던 옆구리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일었다.
찌익! 찌이익!
연신 눈을 비벼보았다. 마치 꿈인가 싶어서였다. 자능한의 동체가 점
점 커지는 것이었다. 입고 있던 옷들이 갈가리 찢기고, 그 사이로 흰색
털이 자라나고 있었다. 거품이 일던 그곳에서는  새살이 돋고 있다. 결
코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없었다.
죽지 않는 불사신공이 있다는 말은 물론이고, 야수처럼 변하는  무공
이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자능한은 살아있는 야수로 변
하고 있다.
폭발적인 살기를 내뿜는 괴수로.
"저놈이 인간이었단 말인가? 아무리 청랑마공을 익혔다지만 어찌 늑
대인간이…."
무공이라 보기엔 너무 황당했다. 우뚝 서있는 자능한의 키는 거의  1
장(3m)에 육박했다. 더하여 온몸을 덮어버린 은색 털과 뾰족 튀어나온
입, 그리고 도(刀)처럼 생긴 10개의 손톱은 그  길이만 해도 1척(30cm)
에 달했다.
정력제를 연구하면서 영수에 대한 많은 그림을 보았지만 자능한처럼
생긴 괴물은 보지 못했다.
"씨팔! 사람도 100년을 넘게 살면 영수(靈獸)로 변하는 건가? 내단이
라도 있으면 좋겠네."
무시무시한 살기를 풍기는 자능한의 모습에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
다. 자신 또한 왜소한 체구가 아니지만 1장 크기에 달하는 자능한의 동
체는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 마치 거대
한 벽 앞에 서있는 듯,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죽·인·다-! 놈! 크앙!"
띄엄띄엄 말을 내뱉던 자능한의  동체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야혼의 키 만한 두 팔이 공간을 휘저었다.
늑대의 움직임에서 창안하였다는  청랑도법(靑狼刀法)의 1초인 청랑
포효(靑狼咆哮)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도처럼 생긴 10개의 손톱에서 나온 백색 광채는 전
부 도강(刀 )이었다. 원래의 청랑도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경지가
야수인간으로 변한 자능한의 몸에서 구현되었다.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희번득 눈을 치뜬 야혼이 낮게 소리치며 지면을 찼다. 3장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자능한의 공격은 물러나면서 방어할 수준이 아니었다.
돌진! 결정을 내리자 행동은 빨랐다.
뒤쪽에 깊숙한 족적을 만든 야혼의 동체가 검은 잔상을 남김과 동시
에 자능한의 하체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등뒤로 10개의  백색 광채
가 무자비하게 꼽혀들고, 비천묵령도는 자능한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
갔다.
"크아-악!"
커가란 비명소리가 울리며 1장에 달하는 자능한의 동체가 거칠게 처
박혔다. 어른 몸통 만한 허벅지가 쩍 갈라지며 그곳으로부터 검붉은 피
가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샘물처럼 흘러나오던 피는 이내 멈추고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치 구멍이 뻥 뚫렸던 옆구리처럼.
그리고는 급격하게 아물었다. 칼에 베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었
다.
"니미씨팔타불!"
급기야 야혼의 입에서 추기영만의 독문불호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5권 시작
내단(內丹)은?
아늑함, 안개 자욱한 파안객납산이 보여주는  첫 느낌이다. 산봉우리
위의 구름은 거센 빗줄기가 뿌렸으나  대지를 식혀주는 감수수 정도로
여기는지 산은 조용하니 말이 없다. 하지만, 산의 고요함은 외향적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했다.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결코 한가롭지 않았다. 이곳  저곳에서
조그마한 물줄기들이 합쳐져, 파안객납산의 무수한 계곡 속으로 빨리듯
사라졌다.
물을 빨아먹는 계곡 중에는 사곡(死谷)이라 불리는  곳도 있었다. 빽
빽한 원시림과 그 속에  살고 있는 독충들 때문에  마도련 무인들조차
들어오지 않아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곳, 그러나 오늘은 사람이 있었
다. 3장(9m) 거리를 두고 삼각형을 이루고 서 있는  3인은 독수마제(毒
手魔帝) 갈융(葛隆)과 추기영 그리고 태웅이었다.
벌써 상당한 격전을 치렀는지 세 사람의 행색은 엉망이었다.
"지금껏 실력을 속이고 있었단 말이더냐?"
갈융이 낮게 소리쳤다. 갈융 또한 자능한과 마찬가지로 한 장의 서찰
을 받았다. 그가 알고 있는 자능한의 필체가 분명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사곡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기다린다하였던 자능
한은 없고, 눈앞의 녀석들만 있었다.
처음 두 명을 보았을 땐 가소로워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오밀문
의 파락호였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웃음도 잠시 놈들의 무공에 경악하
고 말았다. 자신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밀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비무장
에서는 온전한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는 결론인 게다.
"아미타불! 속인 게 아닙니다, 시주. 실력 발휘할 상대를 만나지 못한
거지요. 이름만 거창했지 속은 텅빈 강정이었지 뭡니까?"
"저 놈이!"
철탁을 두드리려는 추기영의  행동에 급격히 내공을  끌어올려 귀를
막았다. 지금껏 몇 번을 당했던 수법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드리는 철탁은 가공할 음공이었다. 더하여 태웅이란 놈의  무형권이 가
슴팍을 노리고 들어오곤 하였다.
딱! 딱딱딱!
"이야합! 허미, 독에 당했나봐, 내공이 세워지질 않아."
패천마영권을 펼치듯 양손을 거칠게 휘두르던 태웅이 고개를 갸웃거
리며 말했다.
"죽일 놈들!"
아무런 충격도 없자 갈융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또다시 허초였
다. 두 놈의 공격은 언제나 같았다. 중놈이 먼저 철탁을 두드려 상대방
에게 충격을 주면 그 다음은 곰 같은 놈의 무형권이다.
둘의 공격은 참으로 절묘했다. 똑같은 초식이지만 단 한번도 같은
공격을 한 적이 없다. 시간차를 조정하며 절묘하게 상대의 허점을 파고
들고 있는 것이다.
"곰 시주, 내공이 세워지지 않으면 색공을  펼치게나! 아니면 요화문
에서 자던 생각을 하던지. 온다, 발라!"
광폭한 기세를 머금고 달려오는 갈융을 발견한  추기영이 철탁을 두
드릴 채비를 하며 냅다 도망을 쳤다. 태웅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경
쟁이라도 하듯 추기영의 뒤를 쫓았다.
지금껏 두 사람의 싸움 방식이었다. 독공의 고수인 갈융에게 감히 다
가서지 못했다. 언제나 3장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상대해야만 했고, 갈
융이 디뎠던 땅바닥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육승 얼마나 남았냐?"
"니미럴타불! 벌써 다 써버렸네."
"나도 그래, 비만 오지 않았어도….  씨팔, 아까운 농약을."
패천마영권과 저주파멸음말고도 두 사람의 필살기는 또 있었다. 하루
전날 야혼에게 받았던 농약 또한 무서운 무공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처럼 갈융이 몸을 날려 쫓아올 때만 그의 진행방향에 조금씩 뿌
렸을 뿐인데 벌써 다 떨어진 것이었다.
"비 때문에 효과가 반감됐나 보네, 천상 실력으로 때려죽이는 수밖에
없나 보이."
뒤쪽을 힐끗 쳐다본 추기영이 수중의 철탁을 힘껏 두드렸다.
데엥! 데엥!
"끄으으-!"
갑자기 들려오는 철탁소리에 갈융이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그러나,
그의 신형은 멈추지 않았다. 더욱 내공을 끌어올려 둘을 향해  몸을 날
렸다. 몸 속에서 이는 기묘한 기운 때문에 내심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신열이 오르는 듯 몸에서  열이 났다. 처음엔 끊임없이 도망만
다니는 놈들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으나 열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더하
여 문득 문득 떠오르는 상상이라니.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여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이야합!"
3장 거리 앞에서 몸을 날리는  두 놈의 등을 향해  양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갈융의 양손에서 검은 독강(毒 )이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갔
다. 마도련 초강자 중의  한 명답게 그의 무공은  대단했다. 검은 빛을
띤 독강이 나아가는 주변이 순식간에 녹아 내렸다.
그러나, 추기영과 태웅의 동작도  빨랐다. 짤막한 고함을  지르며 두
사람의 신형이 빠르게 좌우로 나눴다.
"마라환영참(魔羅幻影斬)!"
뎅-! 데엥!
눈앞에 있던 나무를 박차며 몸을 돌린 태웅과 추기영이 동시에 그들
의 절기를 쏟아냈다. 태웅의 손에서 나온 패천마영권이  갈융의 단전을
노리고 쏘아졌고, 그보다 한발 늦게 추기영의 저주파멸음이 울었다.
"크아악! 죽인-다!"
주춤 두 걸음 물러난 갈융의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온몸에 솟구친 열기가 욕정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무인이란 놈들이…. 하지만 춘약 정도론."
약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던  갈융의 얼굴이 해쓱하
게 변했다. 온몸이 들끓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또한 젊었을 때 춘약을 복용하기도 하였다. 결코 자신의 무공으로
제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몸에서 일고 있는 욕정
은 과거 경험했던 춘약과는 차원이 달랐다. 머릿속을 잠식하는 상상 속
여체들로 인해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었다.
"독공(毒功) 대결에선 우리가 승리할 것 같소이다, 갈시주. 우리가 사
용한 독은 농약이라 부릅니다. 시주가 사용한 독의 명칭은 뭐라 부르시
는 지요?"
"알고 싶더냐? 가르쳐 주마. 앙천마마묵독공(殃天魔魔墨毒功)이라 부
른다!"
급기야는 겁천십웅의 일인인 독마존(毒魔尊)  서음래(徐陰來)의 독공
을 끌어올렸다. 불완전한 무공이기에 가급적 사용을 자제했으나  더 이
상 방법이 없었다. 앙천마마묵독공을 끌어올리자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달
랐다. 단지 운기만 했을 뿐인데 그가 움직이는 1장(3m) 주변이 흐물흐
믈 녹아 내렸다.
"곰 시주, 우린 이제  좆됐네. 저 무공은 겁천십웅의  무공인가 보네
그랴. "
갈융의 모습을 질리듯  쳐다보던 추기영이 열나게  철탁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냥 가자! 연장에게 맡겨야지 별수 있냐?"
두 사람으로선 갈융을 처리하기엔 무리였다. 불완전한 겁천십웅의 무
공 때문이 아니라 그 무공이 독공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너는 철탁만 두드려라! 이동은 내가 하마."
추기영을 덥석 안은 태웅이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목적지는
야혼이 있는 장곡(長谷)이었다.
"씨팔!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추기영이나 태웅만큼은 아니었지만 야혼 또한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
다. 부글부글 거품을 뿜어내며 새살이 돋아날 때부터  괴물일거라 짐작
했다. 하지만 늑대인간으로 변한 자능한을 없애지 못할  거라곤 생각하
지 않았다. 겁천십웅의 무공 두 가지를 알고 있는 자신이 아닌가.
그러나 공격을 하면 할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죽지 않는 불사신
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1장 크기의 놈의 몸에 무수한  주먹과
발을 난사했다. 강기가 가득 서린  주먹과 발은 자능한의 몸에  그대로
박혀들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셔졌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처음 살아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글부글 거품이  일면 어느새 새살
이 돋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불사의 신체였다.
"야차무적금강체에 흠집을 내는 손톱이라니…."
가슴팍을 쳐다보며 막연히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칼이 지나간 듯, 아
래쪽으로 길게 이어진 다섯 개의 줄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자능한의 손톱에 의해 만들어진 상처였다.
"크르륵! 이 중원 무공으로는 나를 죽일 수 없다. 겁천십웅이 살아온
다 해도 마찬가지니라."
자능한의 늑대 얼굴에 강한 자신감이 서렸다. 벌서 10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성모궁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성모궁에
도착한 일행을 기다린 것은 5천 마교도의 죽음이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그가 나타났다. 끝에 붉은  구슬이
달린 특이한 지팡이를 든 인물. 검은  천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그의 능력은 가공했다.
100인의 성모척살대 중 누구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사
실은 죽지 않는 불사의 신체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잘린 팔이 재생하고, 파괴된 심장이 다시  뛰었다. 신을 보는 듯하였
다. 그리고, 마법(魔法)이라 하였다. 100인의 성모척살대가 가진 무공과
마법이 합쳐지면 겁천십웅을 능가하는 무공을 이룰 수 있다 하였다.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인들이 그를 따랐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
인지, 무엇 때문에 자신들 앞에 나타났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성모척살대가 아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사실과, 죽지  않는 불사의
신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겁천십웅을 능가하는, 천하제일인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
"중원 무공으로는 죽일 수 없다고? 그럼 네  놈이 익힌 그 불사신공
은 중원 무학이 아니라는 결론이 되는 건가?"
"신(神)이 내려준 선물이다. 청랑마도법을 극대화하기 위해 늑대인간
을 택한 것이니라."
그를 따라 도착한 곳에서 놀라운 사실을 목격했다. 반인반수의  인간
들, 가진바 힘의 끝을 알 수 없다는 무수한 괴물들이 있었다.
놀라운 눈으로 반인반수를 쳐다보는 자신들에게 그는 더욱 충격적
인 말을 했다. 반인반수의 그들은 원래 인간이라 하였다. 지난 200년간
인간을 상대로 실험을 진행중이라 하였고, 일부 몇 가지는 성공을 이뤘
다고 하였다. 성공한 반인반수법의 하나가 바로 늑대인간이었다.
청랑마도법(靑狼魔刀法)과 늑대인간은 완전한 궁합이었다. 과거에 비
해 3배 이상 강해진 것이었다.
300년 전 최고의 절대자들인 겁천십웅이 살아온다 하여도 이길 자신
이 있었다.
"그럼 그 신이란 놈이 수명을 늘려 준거냐?"
"중원의 무공을 아무리 극성으로 익힌다  한들 200년이란 수명을 보
장받을 수 있겠느냐."
"그럼 죽기는 한다는 말이네. 나는 영원히 사는 괴물인 줄 알았잖아!
그럼 해볼 만 하네 뭐."
손바닥에 침을 뱉어낸 야혼이 비천묵령도를 거머쥐었다. 황당한 말이
긴 했지만 거짓말 같아 보이진 않았다. 100년 전  성모척살대로 떠났던
능자한(能仔漢)이 분명했다.
태웅과 추기영의 말로는 성모궁에 성모척살대로 떠났던 무인들의 시
체가 거의 없었다고 하였다. 결국 죽은 자들을 제외하면 나머진 어딘가
에 숨어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눈앞에 있는 자능한처럼.
"한가지만 물어봐도 되나? 성모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이냐?"
"크르르! 저승 가서 알아보거라. 그때 죽은 자들이 먼저 가있을 테니
까."
낮게 으르렁거린 자능한이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자세를 잡았다.  은
빛으로 빛나는 10개의 손톱이 맹렬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퉁겨냈다.
"그럼 마옥성에 있는 놈들은 그때 살아난 놈들로 보면  되겠군. 좋다
고, 언젠가는 만나게 될 테니까."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비천묵령도를 쳐들었다.  태을건곤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하자 그의 몸에서 안개와  같은 백무가 뭉클거리며 솟구
치고 들어올린 비천묵령도가 검게 변했다.
"살아온 겁천십웅의 무공이 바로 이거야!"
무풍무영술로 땅을 박차며 자능한을 향해 뛰어들며 비천묵령도를 힘
차게 휘둘렀다. 일도(一刀)에 50개의 점을 찍는 지옥수라참(地獄修羅斬)
이었다. 야혼의 비천묵령도에서 생겨난  검은 점들이 일제히  자능한의
동제를 향했다.
"지옥도법(地獄刀法)? 크-아!"
야혼의 무공을 알아본 자능한이 양손을 치켜들며 포효했다. 그  다음
동작은 더욱 놀라웠다. 야혼의 도에서 흘러나온 강기를 향해 양손을 사
정없이 뿌리며 훌쩍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늑대가 뛰어오르는  동작과
같았으나 그 높이가 달랐다.
가볍게 바닥을 찬 동작으로 3장 높이까지 솟구친 것이었다.
"이건, 지옥수라파(地獄修羅破)라 부른다."
자능한을 따라 허공으로 솟구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순간 비천묵령도
에서 솟아 나온 강기들이 하나 둘씩 분리되어 자능한의 전신을 노렸다.
"놈! 내 몸이 불사신체란 사실을 잊었단 말이냐?"
낮게 그르렁거린 자능한의 신형이 도탄강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그의 양손도 쉬지 않았다. 상하좌우로 빠르게  움직여, 전면에 청색 강
기로 만들어진 방패를 배치했다.
끼이익!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은 도탄강기와 강기벽이 조금씩 사라지고
그 뒤를 두 동체가 따랐다.
"재생되기 전에 잘라내면 되는 거야!"
허공답보의 경공을 이용하여 재빨리 왼쪽으로 1장  가량 이동한 야
혼이 왼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팔목 비호에 있던 혈신월이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자능한의 전신으로 박혀 들었다.
"커-억!"
기회,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 자능한의 동체를 따라  몸을
날리며 비천묵령도를 내리쳤다.
까아앙!
보물이라 하였던 비천묵령도는 강했다. 쇳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자능
한의 왼팔은 뎅겅 잘려나갔다.
"이크!"
나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도를 사정없이 쳐 올렸다. 자능한의 오른 손
톱이 백색 광채를 뿌리며 다가오고  있었던 거였다. 일순 야혼의  도가
환상처럼 움직였다. 일 수에 9번의 움직임을 보여야 하는 공공십팔수를
비천묵령도로 펼친 것이었다.
차르륵!
비천묵령도가 한번 변화를 보일 때마다 자능한의 손톱이 잘렸다.  다
섯 개의 손톱을 전부  잘라낸 비천묵령도가 이번엔 그의  손목을 향해
날았다. 그곳에서 전부 4번의 변화가 생기고 털이 숭숭난  손목 하나가
잘린 손톱들의 뒤를 따랐다.
쉬이익!
등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에 재빨리 아래쪽으로  이동하며 몸을
회전시켰다. 동시에 비천묵령도에서 폭발적인 광채가 솟구쳤다.
지옥수라멸(地獄修羅滅), 이기어도의 단계라 하였던  지옥도법의 3초
가 자능한의 다리를 자르는 목적에 쓰이고 있었다.
"크아악!"
두 자리가 잘린 자능한의 거대한 동체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지면
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야혼의 칼질은 멈추지 않았다.
추락하는 자능한을 따라 붙으며 더욱 거칠게 비천묵령도를 휘둘렀다.
왼팔은 이미 완전한 모양을 갖췄고, 조금 전 잘렸던 오른손마저 급속도
로 재생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노리고 날아오는 자능한의 왼팔을 지옥수라멸을 운용한 도를
휘둘러 잘라냄과 동시에 오른 팔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심장은 어떤가 보자 놈!"
거칠게 고함을 지르며 자능한의 허리를 감싸안고  그의 등뒤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능한의 심장을 향해 비천묵령도를 깊숙이  찔러 넣
었다.
푸-욱!"
"아-아악!"
"씨팔! 이번엔 인간의 목소리냐?"
손목을 사정없이 비틀며 투덜거렸다. 자능한의 입에선 야수와 인간의
목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온다. 어쩔 땐 살기 가득한  야수의 포효소리가
흘러나오고 어쩔 땐 원래 자능한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 또한 전율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타핫!"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비천묵령도를 횡으로 그었다. 여전히 야혼이
운용하는 무공은 지옥도법의 3초인 지옥수라멸이었다.
퍼억!
"아이고! 씨팔!"
엄청난 충격과 함께 야혼의 동체가 가랑잎처럼 날렸다. 어느새  재생
된 왼손에 강타 당한 것이었다. 창졸간에 당한 기습이라 제대로 대응하
지 못했는지, 야혼의 입에서 한 움큼 핏물이 넘어왔다. 더하여 그의 등
판은 다섯줄의 골이 패이며 그곳으로부터 붉은 피가 점점이 떨어졌다.
"아미타불! 연작문주 이 거머리 좀 처리해 주게나! 남자 취향이 아니
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자꾸만 쫓아오고 있다네."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내며 일어서는 야혼의 귓전에 추기영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악!"
갈융 역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이미 농약의 성분이 뇌 속까지  침투
했는지, 혈관이 터진 눈에서는 빗물에 섞인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
다.
"곰 새끼, 저 자식 앞으로 유인해!"
재빨리 몸을 빼낸 야혼이 재생 과정을 거치고 있는 자능한을 가리켰
다. 앙천마마묵독공의 독이면 자능한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 때문이었다.
"저건…? 영물?"
털이 숭숭난 1장 크기의 괴물을 쳐다보던 태웅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반쯤 몸을 일으킨 괴수는 난생  처음이었다. 찢어진 옷을 걸친  것으로
보아 인간임에 분명할진대,
"서둘러 임마. 저놈이 완전해 지면 방법이 없단 말이야."
야혼의 고함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태웅이 빠른 속도로 자능한 동
체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아-악!"
"크아앙!"
짐승 같은 포효소리와 함께 갈융과 자능한이 서로를 향해 공격을 감
행했다. 앙천마마묵독공이 운기된 갈융의 양손이 자능한의 심장으로 파
고들었고, 길다란 다섯 개의 손톱은 갈융의 목을 후벼팠다.
"으-아악!"
"아아악!"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능한의 손톱에 목을 관
통 당한 갈융은 즉사해버렸고,  앙천마마묵독공이 운기된 손을  심장에
박은 자능한의 동체는 조금씩 녹아 내리고 있었다.
"근에 저 영물은 뭐냐?"
자능한의 동체를 망연하게  바라보던 태웅이 야혼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글쎄, 나도 몰라!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저놈을 죽일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거지."
태웅과 추기영을 향해 지금까지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순전히
자능한이 강하다는 말을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해서 아무리  칼질을 해
대도 새살이 돋아난다는 말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목을  잘라보지 않아
모르지만 그것도 아마 새롭게 돋아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러나, 태웅과 추기영은 더 이상 야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육승, 저 놈 말이야, 늑대인간이  본 모습일까 아니면 자능한이라는
인간이 본모습일까? 나는 전자로 보는데…."
"아미타불! 소승도 곰  시주와 같습니다.  영수(靈獸)가 오랜 세월을
살게 되면 변신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항은 변
신 가능한 영수는 중요한 물건을 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왔을
때 거의 죽어 자빠져 있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한 추기영이 야혼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중요한 물건을 네가 챙기지 않았냐는 얼굴로.
"중요한 물건 뭐?"
"내단(內丹)!"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야혼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잘린 팔다리가 다시  자라나는 동물이 어디 있단  말인
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분명했다.
"이런 개자식들…. 이 등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자능한의 손톱에 의해 피가  줄줄 흐르는 등을 내밀어  두 사람에게
보였으나 태웅과 추기영은 반응이 없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의심스럽단 말이네. 내상을 입었으니 더욱 내단이 필요할
게 아닌가. 그러지 말고 우리 3등분으로 나누세, 조금만 나눠주면 내가
연작문주의 극락왕생을 빌어줌세. 물론  나중에 뒈지고 난  다음이겠지
만."
"씨팔놈들!"
나직이 욕설을 뱉어낸 야혼이 비천묵령도를 들고  조금씩 녹아 내리
는 자능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목이라도 잘라놓을 심산이었다.
"네 도(刀)로는 놈을 소멸시킬 수 없다. 이걸 써야한다."
3인의 귓전으로 고명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순
백색의 조그마한 소검이 들려 있었다.
"저놈하고 친해?"
의아한 얼굴로 고명지를 쳐다보았다. 늑대인간으로 변한 자능한의 모
습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는 그녀의 행동 때문이었다.
더구나 죽인다는 표현 대신 소멸시킨다고 하였다. 자능한이 불사의 신
체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다. 하지만 고명지는 고개를 좌우
로 저었다.
"아니? 자능한은 모르지만 저런 괴물을 알고 있다. 일단 저놈을 먼저
없애라. 천천히 이야기해 주마."
"아미타불! 첩형 시주, 이건 은(銀) 아닙니까?"
"맞다. 하지만 그냥 은은  아니고 진은(眞銀)이라 부른다. 저  수인을
죽일 수 있는 무기다."
"세상에 이게 은이면 도대체 얼마야. 아미타불!"
여전히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1척 길이에 달하는 은검을  쳐다보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태웅 또한 마찬가지였다.  늑대인간으로 변한 자능
한에게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기이한 문양으로 가득한  은검을 탐욕스
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이 문양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군."
검면 가득 새겨진, 문자처럼 생긴 문양을 쳐다보는 야혼의 얼굴엔 의
문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성모 천애설이 누워있었던 관  전면 새겨진
문양과 거의 비슷했다. 아니 같은 글자임에 틀림없었다.
"설명은 나중에, 우선 자능한부터 없애라. 저놈 움직이는 것 같다."
고명지 또한 야혼의 반응에 내심  놀랐다. 칼에 적힌 기이한 문양은
결코 현세의 물건이 아니었다. 무려 500년 전부터 황실에  은밀하게 내
려온 물건으로 그곳에 있는 문자는 누구도 해석하지 못했다.
한데 야혼은 검에 새겨진 그 문양을 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럼 안 되지."
이내 고개를 든 야혼이 자능한의 동체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갔
다. 은검이 어떤 역할을 할지는 모르지만,  고명지의 말대로 해볼 참이
었다.
"허미, 씨-팔! 진짜 영수(靈獸)다!"
"허억! 아미타불!"
야혼을 따라 자능한 곁에 도달한 추기영과 태웅이 놀람에 찬 비명을
토했다. 야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늑대인간의  동체는 두 가지 기
능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독에 의해 녹아가던 자리에 거품과 함
께 새살이 돋아나고, 다시  녹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더하여 늑대인간의 눈동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자능한, 이게 뭔지 아냐?"
고통스런 표정으로 그르렁거리는 자능한의 눈앞에 은검을 디밀었다.
"제마성검(制魔聖劒)?"
기절할 듯 놀란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마법을 전수 받을 때  누누
이 들었던 말, 제마성검(制魔聖劒)과 황금수(黃金手), 그리고 풍뢰궁(風
雷弓)엔 절대 몸을 내주지 말라 하였다.
불사신체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  바로 그것들이라 하였는
데. 그 천적을 들고 있는 이가 바로 앞에 있다.
"맞는 모양인데?"
자능한의 눈을 쳐다보던 야혼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자신이
보기엔 은검은 별 것 아니었다. 오히려 비천묵령도보다 훨씬 약해 보였
다. 그런 약한 검을 보고 두려움에 떨다니.
"한번 볼까?"
치이익!
"크아악!"
자능한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은검으로  오른팔을
잘라내자 그곳으로부터 흰 연기와 함께  팔이 가루로 흩어지는 것이었
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거품과 함께 급격하게 재생했던 피부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재미있군, 그럼 지금부터 질문해도 되겠네? 마도련에 너와  같은 족
속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데, 안될까?"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제마성검이라 불리는  은검을 자능한의
왼손으로 가져갔다.
"크으윽! 죽여라! 내 입에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치이익!
"아-아악!"
다시 뿌연 연기가 솟아오르고 자능한의 왼손이 사라졌다.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방금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했거든."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제마성검을 이용하여  자능한의 손과 발
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더 이상 재생을 못하도록 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는 태웅에게 제마성검을 건넸다.
"한가지가 궁금해 자능한, 제마성검에 의해 재생능력이  사라진 부분
을 다시 칼로 잘라내면 어떻게 될까?"
낮게 속삭이는 야혼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요동쳤다. 명교도를  잡
아들여 짐승을 만드는 마옥성에 대해 알고 싶었다. 300년 넘게 살아 있
다는 시체 같은 놈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살소를 슬쩍 머금은 야혼이 비천묵령도를 힘차게 들어올렸다.
파악!
검은 기운이 가득한  비천묵령도가 자능한의 오른손  팔꿈치를 향해
사정없이 떨어졌다.
"아-아악!"
"니미씨팔타불! 정말 영수가 맞구먼, 팔이 다시 살아나고 있네  그랴.
몇 년이나 되었을까. 이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만 년 이상은 되야 하지
않을까?"
불편한 얼굴로 자능한을 쳐다보는 추기영의 말소리가 떨려 나왔다.
현실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부글부글 거품이 끓고 다시 살아나는 팔
이라니. 1척으로 자라난 손톱이  백색 광채를 뿌리는 순간  제마성검이
자능한의 팔을 잘랐다.
"재밌네? 이번엔 요기, 팔꿈치에서 조금 위를 잘라봐라. 재생하는 데
얼마나 걸리나 보게."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태웅이 잘린 자능한의  팔꿈치 위를 손가락으로
찍었다.
야혼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자능한의 눈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태웅이 가리켰던 그곳을 향해 비천묵령도를 내리쳤다. 말을  할 때까지
고통을 주겠다는 심산이었다.
"아미타불! 연작문주 좀 제대로 잘라보게. 어쩌면  우린 평생 식량걱
정 안 해도 될지 모르는데."
"낄낄낄! 맞다. 실력이 녹슬었다 연장. 도축장 생활 10년이라고  뻐기
더니…. 가루가 되는 걸 못 막으면 되겠어."
비천묵령도에 의해 잘려나간 부분이 가루로 변해버리자 태웅이 이죽
거렸다.
"이번엔 좀 잘해 보시게 연작문주. 배에 힘을 잔뜩 주고! 하나, 둘!"
퍼억!
"으아악!"
"아이고 이런…. 부처님도 너무하시네. 저  아까운 고기를 다 가루로
만들어 버리다니. 곰 시주 쳐다보지만 말고  방법을 찾아보세. 혹시 쾌
도(快刀)로 잘라내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농약을 한번 먹여보던지."
야혼은 말이 없었다. 오직 태웅과 추기영의 주문에 따라 빠르게 혹은
느리게 도끼질을 할 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도 말이  없었다. 자능한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야혼이 잘라낼 장소만 표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세 사람은 자능한의 다리 쪽으로 옮겨가 있었다. 더 이상  잘
라낼 팔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가 튀고 살이 튀는 잔인한  장면을 한
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해내고 있다.
결국 야혼일행을 말린 사람은 지켜보던 고명지였다.
"야혼! 물어봐야 소용없다. 저들에겐 저주가 걸려있다고 한다. 자신들
의 조직에 대해 한마디라도 발설하면 제마성검에 당한 것과 같은 상태
가 된다고 하더라."
"그럼 어차피 죽는단 말이네?"
묵묵히 자능한의 육신을 잘라내던 야혼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
러나왔다.
"크-으윽! 꺼어억! 제발 부탁이다. 저 여인의 말이 맞다. 우린 비밀을
실토하면 처절한 고통 속에 죽게 되는 저주마법에 걸려있다. "
자능한이 애원했다. 제마성검이 나타난 이상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불사신체라 자결도  하지 못한다. 불사신체가  된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워진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야혼은 그럴 생각이  없는지 다시금 도를 들어  올리며 낮게
말했다.
"선택은 네 몫이다 자능한. 편하게  죽던지, 아니면 고통스럽게 죽던
지. 너희 마옥성 놈들이 상투적으로 써먹는  수법 아닌가. 나는 편하게
빨리 죽는 방법을 택했다, 자능한."
야혼의 몸에서 점점 강렬한 살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더하
여 잔뜩 붉어진 두 눈은 지옥에서 빠져나온 악마를 연상  시켰다. 야차
혈마지체(夜叉血魔之體)의 본성이 완전하게 발휘되었다는 의미였다.
폭발적으로 솟구친 살기에 질겁한 사람은 바로  곁에 있던 추기영과
태웅이었다.
"이런 염병할 문주가 호법마저 죽이려 드네, 아미타불!"
내공을 잔득 끌어올린 추기영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솟구쳐 나왔
다. 무음항마혈탁이 저절로 반응하여 생긴 변화였다.
"크아악! 말하겠다. 이곳에 있는 마옥성…, 마천루의 창…. 으-아악!"
놀라운 일이었다. 추기영의 항마혈탁에서 솟구친 금광을 쏘인 자능한
의 동체가 허물을 벗는 뱀처럼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허미, 이젠 포까지 떠지네. 저건 또 뭐야?"
추기영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능한의 이마에 새기듯
생겨나는 문양 때문이었다. 마치 손으로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원이 생겨
나더니, 그 안쪽에 별 문양이 자리하는  것이었다. 왼쪽부터 시작한 별
문양이, 완전한 형태를 갖춘 순간 그곳으로부터 푸른색  광채가 폭발적
으로 새어나왔다.
그리고.
자능한의 거대한 동체가 머리부터 시작하여 가루로 화하는 것이었다.
제마성검에 잘린 부분이 가루로 변한 것보다 더 황당했다.
어도술(馭刀術)을 이용해야만 자를 수 있었던, 무림인들로 치자면 거
의 금강불괴지신에 해당하는 동체가 순식간에 가루로 변하다니. 그나마
남아있던 가루조차도 빗물에 씻겨 흘러가 버린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니미럴타불!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내단은 연작문주가 챙긴 게 분
명해."
일행의 정신을 일깨운 사람은  추기영이었다. 방금 전까지 자능한의
동체가 있던 곳을 뒤적거리며 낮게 투덜거렸다. 혈신월을  제외한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새끼는 150년짜리라서 내단이 없다. 이 영물들의  수괴가 있다는
데 그놈에겐 있을지도 모르지."
흐르는 빗물로 대충 피를 닦아낸 야혼이 옷을 걸쳤다. 그리고는 고명
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갈수록 난해하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알아낸 비밀보다 새로운 궁금증이 더 많이 생겨난 밤이었다. 묻고 싶
은 게 많았지만 시기도 아니고 장소도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어떻게 할거냐?"
오히려 앞으로의 일을 묻는 사람은 고명지였다.
"괴물에 관한 거라면 나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별
수 없고, 만일 눈에 뜨인다면 내단을 취해야지."
고명지의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제마성검을 들고 다니는 걸  보
면 고명지가 찾아다니는 자들이 그들이지 싶었다.
황실에서도 찾지 못한 자라면, 자신은 말할 나위가 없다.
놈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가자! 쉬고 싶다."
"아무래도 연작문주가 수상해, 분명 내단이  있었을 텐데…. 혹시 혼
자 처먹으려고."
"그럼 인간이 아니지, 정력제를 많이 처먹어 저렇게 돼지새끼가 되었
는데 설마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근데 정말 내단 없었냐?"
"이 새끼들이 그 짓 한번 하더니 아예 쌍으로 노네 이제. 궁합이  척
척 맞는다, 찰떡 궁합 말이다!"
"이런 빌어먹을 시주가, 아예 뒈지려고 환장을 했네 그랴. 어디 한번
죽어보자 이 씨팔문주야."
어기적거리며 걸어가던 추기영과  태웅이 야혼의 등을  향해 철탁과
주먹을 동시에 휘둘렀다.
퍼억! 팍!
"으아악! 야 개자식들아 그곳은 상처 난 곳이란 말이다."
하지만 태웅과 추기영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칠게  철탁과
주먹을 휘두르며 욕을 해댔다.
"연작문주 너는 침만 바르면 낫지만 우린  마음의 상처란 말이다 이
개종자야. 왜 나아가는 상처를 들쑤셔. 잊을  만하면 자꾸 떠오르게 하
냐고."
"야혼, 나는 네가 부럽다."
한 몸이 되어 엉긴 세 사람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야혼의 과거를 일부 알게된 두 사람이 벌인 일이다. 울적해
있는 그를 달래기 위해.
그런 그들의 모습이 문득 부러웠다. 동창 첩형 지위에 있지만 아무도
없는 자신보다 훨씬 나았다.
"야! 고명지 빨리 와라! 그리고, 때로는 비를  맞아보는 것도 괜찮다.
아주 시원해!"
"훗! 녀석 다시 살아났구나."
이쪽을 쳐다보며 토닥거리는 세 사람의 모습에  슬몃 미소를 머금었
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의미였다. 분노를  묻고 사는 본연의 모
습으로.
"내일도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겠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린 고명지가 내공을 풀었다. 야혼의  말대
로 해보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순식간에 몸이 차가워지며 한기가 밀려오자 인상을 찌푸렸다. 공연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내공을 끌어올리려던  고명지가 이내 얼굴을 풀었
다. 흠뻑 젖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기분이 달라졌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물을  먹어 묵직해진 옷이 싫지가 않았
다. 가슴속이 뻥 뚫린 듯한 기분과 함께 머릿속이 환해진 듯했다.
그러나 환한 미소를 머금었던 고명지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지고 말
았다. 앞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첩형소저가 검은 옷을 입어서인지 안보이네."
"그러게 말이야, 내공을 끌어올리면 보일  줄 알았는데. 아직 내공이
약해서 그런가?"
"걱정 마라, 내가 다음에 고명지에게 흰옷을 선물할 테니까. 이 문주
를 믿어라. 하오대문의 문주가 뭘 못하겠냐."
"에라! 이 개자식들아."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세 명을 향해 양손을 사정없이 뿌렸다.
"들켰다, 도망가자!"
"거기 안서!"
세 사람을 향해 고함을 지른 고명지가 무서운 속도로 지면을 박찼다.
쏟아지는 빗속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연신 고함을 지르는 고명지와 킬킬거리며 도망치는  세 사람의 신형
은 마도련 쪽으로 사라져 갔다.
다음날.
간밤과 같이 폭우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비는 내렸다. 이슬비처럼  가
는 가랑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각 문파의 자리엔 무인들이 자리하
였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마도대전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전날 냉운형
과 유혁세의 대결로, 마도대전의 승자는 철마문으로 결정  났다고 생각
했던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방갓과 도롱이를  걸치고 이곳
에 나온 이유는 만독문과 만수문 때문이었다.
지금껏 동귀어진의 혈전을 벌였던 두 문파의  문주가 어떻게든 끝을
볼 거라는 기대가 그들을 새벽부터 비무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무인들의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비무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지, 반 시진이 지났지만 두 문파에
선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급기야 비무장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이대로 끝나려나 보네! 그냥 철마문의 승리로 끝내는 게 낫겠구먼."
"그러게 말이네, 공연이 나왔어, 가서 아침이나…."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던 무인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멈췄다.  그리
고는 비무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두 인물이 동시에 비무대로 올라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들은 또 왜?"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서열 10위권에 도전했다가 그나마 얻었던
일백마 자리마저 잃은 야혼과 태웅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황문 소속 흑돈 야혼, 일백마  서열 3위 만수존자(萬獸尊子) 자능
한(仔能漢)께 도전이오!"
"사황문 소속 거패 태웅, 일백마  서열 2위 독수마제(毒手魔帝) 갈융
(葛隆)께 도전이오."
"허억! 저런 미친놈들…."
순서대로 들려오는 도전 신청에 무인들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명성을 얻기 위해 환장한 놈들이라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게
다. 일백마 서열 2위와 3위에게 도전신청을 하다니.
전날 사황문주와 철마문주의 대결을 보았던 놈들이 아닌가.
그런 사정은 마도대전 주제자인 종마도 마찬가지였는지,  어이없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물론 둘의 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몇 번의 비무에서도 나타났듯이 두 사람의 실력은 50위권이 적
정 수준이었다. 그랬던 녀석들이 최고 서열로 도전을 하다니.
"자네들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우린 평소보다 아침밥을 많이 먹었소이다. 점심 저녁을 굶을 준비를
하고 나왔단 말이오."
"허…!"
"한번 시켜보시지요. 만수문주나 만독문주에게 적당히 끝내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야혼과 태웅을 힐끗 쳐다보던 고명지가 종마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이건 상대가 아닙니다, 대인.  적당히 끝낸다고 하여도 저들
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종마께서 그동안 비무를 제대로 관전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저들과
싸웠던 마도련 무인들 중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들이 있습니까?"
"그게 무슨, 10위 권에 도전했다가 전부…. 허억!"
종마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고명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오밀
문 3인과 비무를 했던 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패한 자들이나 이긴 자들 전부가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
었던 것이었다.
그제야 철권 묵자성의 죽음이 이해가 갔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단 1
초만에 묵자성을 없앨 수 있는 인물은 마도련 내에 없다.
그건 자신이라 하여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그의 상대였던 백사  윤보
성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내심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바쁜 일정 때문
에 넘어가고 말았었는데.
"허허! 마도련 5천 무인이 저들 3인에게 농락 당하고 말았군."
"무인들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만독문과 만수문에 수락여부를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그래야 하겠지요."
이번에도 역시 종마의 정신을 일깨운 사람은 고명지였다. 퍼뜩  정신
을 수습한 종마가 만독문과 만수문 진영을 향해 말했다.
"일백마에 대한 도전권은 마도련 소속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만독문과 만수문은 빨리 통보해 주시길 바라오."
그 말을 끝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도무지 벌렁거리는 가슴이  진정되
지 않았다. 마도대전에 다섯 번을 참여했고,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마도대전에서도 지금과 같은 경우는 없었다.
가장 많은 승리와 가장 많은 패배를 얻었던 자들이 바로 하오밀문의
3인이었다. 처음 한 달을 제외하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자들.
그들이 마도대전을 조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종마보다 더 참혹한 상황에 직면한 자들이 있었다. 도전자들
에 의해 지목된 만수문과 만독문 진영이었다.
"문주님께서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만수문의 2인자인 금모마원 앙림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문
주인 자능한이 나오지 않자 갈융과의 비무를 위해 몸을 추스르는 정도
로 생각했다. 한데 전혀 예상치 않았던 자의 도전을 받게 될 줄이야.
더욱 놀라운 일은 문주가 처소에 없다는 보고였다.  부랴부랴
부하들을 동원하여 만수문  전체를 뒤졌으나 어디에도  문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두 분이 따로?"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재빨리 만독문 측 상황을 살폈다. 그 곳  또한
만수문과 다르지 않았다. 독사혈왕(毒死血王) 혁군(爀君)이 초조한 얼굴
로 연신 뒤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분이 당할 리가 없다. 불사의 신체를 가지신 분이다.
갈융 정도는 상대가 아니라고 하셨다. 분명 어디선가 몸을 추스르고 계
실게 분명하다.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분이 돌아올 때까지…."
간밤에 비무가 있었다고 확신한 앙림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할말이 없었다. 무공이 약한  사람도 아니고, 극강의  경지에
도달한  문주가 아닌가.  그럼에거 불구하고 시간을 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시간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금 저의 문주님께서는  만독문
주와 대결을 위해 운기행공에 들었습니다. 두 시진(4시간)만 시간을 주
십시오."
종마의 시선이 야혼을 향했다. 그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의미
였다. 종마를 비롯한 대부분의  무인들은 야혼이 거부할  거라 여겼다.
싸우지도 않고 10위권 안에 들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그러나.
"좋습니다. 비겁하게 승리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도련 무인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마치 정당한  대결을
꼭 하고 싶다는 얼굴로.
"됐다! 모두들 문주님을 찾아라!"
야혼의 입에서 수락의 말소리가 나오자마자 만수문 무인들이 급하게
몸을 날렸다.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듯 자리가 텅 비어 버렸다. 그런 현
상은 만독문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천여 명에 달하는  만독문 무인
들이 자리를 떴다.
하지만  앙림이 요구했던 두 시진이 훌쩍 지났고, 다시 한번 연기신청을
하여 저녁 무렵이 되었으나 자능한은 나타나지 않았다.
"제가! 제가 대신하면 안되겠습니까?"
승자선언을 하기 위해 일어서는 종마를 향해  발악하듯 앙림이 외쳤
다. 이렇게, 싸움한번 없이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능한이 빠지면 만수문은 10위  권 안의 인물을 한  명도 보유하지
못한다. 설사 4공의 지위를 할당받는다 하여도 마도련의 대소사에선 철
저히 소외될 게 분명하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는데.
"그 또한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닐세, 도전자가 아량을  베풀어 그대의
도전을 수락한다면 가능은 하네만…."
종마가 말끝을 흐렸다. 원래 마도대전의 규정으론 결코 일어날 수 없
는 일이다. 상대가 50위권  밖에서 머물던 하오밀문  인물만 아니라면,
지금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야혼의 신분이 지금까지 머뭇거리게  하였고, 은연중에 앙림
과의 비무를 유도하게 만들었다.
"아니 되오이다. 마도대전 역사상 그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10년 뒤
엔 마도대전을 개최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강력한 반대를 표명한 사람은 야혼이 아니라  사황문 문주대행을 맡
고 있는 암흑사군(暗黑邪君) 냉운소(冷雲素)였다. 냉소소의 배다른 오라
버니.
"처음 련주대행께서 그랬소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마도대전을 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생존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규칙을
지금 깨트리려하고 있소이다. 6시진을 기다려 준 것만으로도 우리 사황
문은 도리를 다했다고 봅니다.  나머지 시시비비는 10년  후, 마도대전
때 결정해야 할 줄로 압니다."
냉운소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처음 야혼과 태웅이 두  문주에게
도전장을 던졌을 때만 하여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의 실력을 인정하지만 갈융과 자능한과 견주어 생각하기엔 무리
가 따랐다. 그런데,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다.
도전 받은 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비무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고, 도
전자의 승리가 된다.
기회, 사황문과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이미
내공을 상실한 아버지는 마도련주에 오르지 못할 것은  분명하고, 그럼
남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마도련주, 꿈의 자리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사황문 소속 흑돈 야혼을 일백마 서열 3위로 선언해 주시길 요구합
니다."
"으음!"
종마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서열
이 높다하여 특혜를 줄 입장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기다려 준  것만 해
도 엄청난 혜택이거늘……. 표정을 굳힌 종마가 나직하니 외쳤다.
"사황문 소속 흑돈 야혼을 승자로 선포한다."
여기저기서 야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종마의 선언은, 마
도련에 배신행위만 없다면 앞으로 10년 간 번복될  수 없는 절대 명령
이었다.
"허허! 마도대전에서 10마의  자리를 거저  줍는 자가 생길  줄이야.
300년 마도련 사상 처음일 걸세."
"내일도 장담할 수 없겠는걸?"
"글쎄 그렇진 않을 걸? 만독문에는 광독자(鑛毒子) 갈음석(葛 石)이
있지 않은가. 패배를 인정하고 바로 도전하면 될게 될텐데 뭘 그러나?"
"그 패배 선언이 문제가 아닌가. 다른 무공도 아니고  겁천십웅의 무
공인 앙천마마묵독공을 익힌 만독문주일세. 설사  만수존자와 비밀리에
비무를 했다 하더라도, 그가 패했다고 생각하겠는가."
마도련 무인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패배를 선언하고 갈융의 아들인
갈음석이 나설 거라는 의견과, 어딘가에 있을 갈융이  내일이면 나타날
거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있었다.
만독문은 결코 만수문처럼 허무하게 당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지배
적이었다.
죽고 죽이고.
"아직 소식은 없는 겁니까?"
만독문의 지존각인 독존루(獨尊樓)에서  초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만독문 전 무인들을 내보내 아버지 갈융의 행방을 찾고 있는 갈음석
이었다. 벌써 이틀째, 평소 아버지가 가실만한  곳을 전부 뒤졌지만 그
어디에도 흔적은 없었다. 이젠 더 이상 돌아볼 곳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8성에 불
과할지라도 앙천마마묵독공을 익힌 아버지가 아닌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곧 소식이 올 겁니다."
연신 밖을 쳐다보며 혁군(爀君)이 말했다. 그  또한 갈음석의 심정과
마찬가지였다. 갈융의 죽음에 대해선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다만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 생각했다.
"지금 수하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파안객납산으로 보냈습니다."
"가만 파안객납산이라 하였습니까? 이런 제기랄…."
혁군의 말을 듣던 갈음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황중이라  지
금껏 잊고 있었던 장소가 떠올랐던 거였다.
"부하들을 데리고 사곡(死谷)으로 오시오."
서둘러 나선 갈음석이 파안객납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사곡 가장 안
쪽에 있는 독지대는 아버지와 가끔 방문하던 장소였다.
만독문의 금지이자 최대 비밀이 있는 곳. 만일 부상당했다면  그곳에
서 내상을 다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갈음석이 몸을 날린 그 시간 사곡에서 빠져나오는 삼 인이 있었다.
"연작문주! 그 놈의 종자가 이곳으로 올 것 같은가?"
"글쎄, 내가 갈음석도 아닌데 어찌 알겠냐. 안 오면 말지 뭐. 일단 장
곡(長谷)으로 가자. 녀석이 안 올 때를 대비해야지."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전날 갈융에 의해 생겨났던 흔적을 따라
몸을 이동했다.
마도련 남쪽을 가로지르는 파안객납산은 만수문과  만독문의 터전이
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짐승과 독, 그 두 가지를 위해선 산은 필수였다.  해서 두 세력은 사
령봉(邪靈峯)과 장천봉(長天峯)의 중간지점을 경계로 서로의 영역을 나
누었다.
야혼이 가고자 하는 장곡은 만수문 영역으로 장천봉 아래에 있는 계
곡이었다.
세 사람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한 참 후. 20여명의 무
리가 사곡 입구에 내려섰다.
"혁군은 나를 따르고 나머진 이곳에서 기다린다."
짤막한 말을 남긴 갈음석이 주변을 살피며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빌어먹을…."
낮은 욕설을 뱉어낸 갈음석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온통  엉망으로
변해있는 주변 경관 때문이었다.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맨살을 드러
낸 땅이며 절반쯤 녹아버린  나무들, 앙천마마묵독공의 흔적이  분명했
다.
"소문주님!"
갈음석보다 먼저 안쪽을 살피던 혁군이 굳은 얼굴로 불렀다.
"이건?"
혁군 곁으로 다가온 갈음석이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가  가리킨
바위 아래쪽에서 발견한 종이 때문이었다. 빗물에 의해  대부분 사라졌
지만 알아 볼 수 있는 유일한 글이 있었다.
만수존자(萬獸尊子) 자능한(仔能漢). 흐릿하니 남아있는 글귀였다.
그리고, 서찰이 떨어져 있는 위쪽 바위에도 글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쓴 듯 엉성한 글이.
-석아야.
네가 이 글을 보고 있을 땐 아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
다. 도전장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놈을 믿었다. 일문을 다스리는 문
주가 비겁한 암수를 쓰지 않을 거라 여겼기에, 너에게 말도 없이  나왔
다.
그런데.
이곳에 도착해 보니  자능한 혼자가 아니었다.  20명의 부하와 같이
기다리고 있더구나. 하지만 앙천마마묵독공을 익힌 아비의 상대는 아니
었다. 이 아비는 승리를 확신했다. 해서 더욱 거칠게 몰아쳤다. 놈들이
춘약(春藥)만 쓰지 않았더라면….
숨을 쉴 수가 없구나. 보고싶구나 석아, 한 줌의  진기만 남아있다면
너의 얼굴을 보러 갈텐데…….
"아버지-!"
오열을 토한 갈음석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하늘같던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다 한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앙천마마묵독공을 설명해주신 분이었다.
올해의 마도대전엔 실패했지만 10년 뒤에는 반드시 마도련주가 되겠
다고 하였다. 그랬던 분이.
"춘약을 썼단 말입니까? 암습도 아니고, 춘약을…!"
갈음석의 몸에서 폭풍 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20명의 부하를  대동
하고 나타난 자능한은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끈 건 그들이 아니었다. 춘약(春藥), 삼
류 파락호가 사용하는 춘약이 사망원인이었다.
"혁군, 부하들을 이곳으로 불러라,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이곳으로
오라고 일러라! 춘약이나 사용하는 비열한 놈을 문주로 둔 문파라면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존명!"
낮게 소리친 혁군이 재빨리 복명하며 몸을 날렸다. 그 역시 갈음석과
같은 심정이었다. 춘약에 중독되어 적의 공격을 허용했을  문주를 생각
하니 미칠 것 같은 분노가 솟구쳤다.
"만수문 네 놈들은 오늘밤 경험하게 될 것이다. 춘약을  사용하는 삼
류 파락호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그 시간, 춘약을 사용했던 삼류 파락호는 다른 일로 무척 바빴다.
"야, 임마! 잘 좀  비벼! 아무리 손이 크다해도  그렇지 그렇게 크게
만들면 몇 명이나 먹이겠냐?"
장곡이 내려다보이는 으슥한 곳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장 문주, 꼭 이 아까운걸 놈들에게 먹여야겠냐? 내가 전부  패 죽
일 테니까 그냥 우리 주라."
"아미타불! 나도 곰 시주 의견에 동감이네. 합이 2천 명인데 이깟 만
두로 무슨 효과를 보겠는가."
은행 절반 크기의 흰색 알갱이를 조심스럽게  놓으며 추기영이 말했
다. 자꾸만 줄어가는 농약 반죽이 아까운지  연신 입맛을 다셨다. 장곡
에 도착한 세 사람이 지금껏 하고 있는 일은 농약 만두를 빚는 일이었
다.
"농약으로 갈융을 잡은 놈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농약은 말
이다 앙천마마묵독공보다 더 강한 독이라고. 한 300개 정도 되려나?"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듯 태웅과 추기영의  애원을 일축한 야혼
이 한쪽에 쌓아둔 농약 알갱이들을 조심스럽게 둘로 나눴다.
그리고는 두 장의 기름종이를 꺼내 한 장을 추기영에게 내밀었다.
"나는 안주냐?"
"태웅 너는 이거. 아껴서 써라. 비홍사 독이니까."
탐욕스런 눈으로 농약을 쳐다보는 태웅의 눈앞에  비홍사 독이 들어
있는 약병을 내밀었다.
"근데, 만독문으로 어떻게 들어가나? 이 얼굴로 들어 갔다간 당장 들
키고 말텐데. 좋은 방법 없냐?"
말끝을 흐린 태웅이 야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천면만환공(千面滿幻
功), 구약종의 열 가지 절기 중의 하나인 그것을 노리고 하는 말이었다.
딱히 지금 상황에서 필요하기보다는 기회가 있을  때 얻어내고자 하
는 속셈이었는데.
"꿈 깨라, 응? 요화문 할머니들에게 듣기론 색색만화공이  경지에 올
랐다고 하드만, 그걸 써. 간다!"
눈을 찡긋하며 미소를 남긴 야혼이 장곡 밖으로 몸을 날렸다.
"니미씨팔타불!"
"개종자!"
남은 두 사람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얼굴 좀 뜯어  고
쳐보려는 두 사람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어떻게든 여자를 후려보겠다는 욕심에 색색만화공을  익히기니 했으
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여자를 꼬시는데 도무지 긴장감이 없었다.
긴장감이 없으니, 성취감 또한 없는 건 당연지사. 정 다급할 때가 아
니면 결코 쓰고 싶지 않았다.
"씨팔! 육승, 여기 있는 진흙이나 처발라야겠다."
다시 한번 야혼이 간 곳을 향해 욕설을  뱉어낸 태웅과 추기영이 주
변에서 흙을 긁어 얼굴에 발랐다.
"아미타불! 흙을 처발라 놓으니까 훨씬 미남으로 보이는구먼. 그나저
나 연작문주는 그 놈들을 잘 데리고 오려나 몰라. 만독문  놈들이 도착
할 때가 되었는데."
"터지기만 하면 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냐."
태웅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만독문과 만수문에 기름이  잔뜩
발라진 상태다. 무려 한 달간을 줄기차게 싸웠던 그들에게 문주의 죽음
은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꼴이 되었다. 서로 만나게만 해주면 바
로 전쟁에 돌입할 건 분명했다.
"그럼 농약과 독은 불난 집에 부채질이 되는 건가?"
"그렇지, 야혼 저 녀석이 만든 부채질. 가끔  보면 저 녀석이 무서울
때가 있어."
태웅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꾸민 일은 전부가 세 사람
의 머리에서 나왔다. 하지만 자신들 두 사람과 야혼은 다른  점이 있었
다. 계획의 입안을 추기영과 자신이 한다면 마무리는 야혼의 몫이었다.
이번 일도 그랬다.
두 세력의 끝을 보기 위해 농약과 비홍사 독을 들고 나온 것이다.
"아미타불! 그런 우리는 뭐 다른가. 같은 놈들인걸. 준비하세 오는 것
같네."
나직하니 불호를 왼 추기영이 몸을 일으켰다. 야혼이 떠났던 곳과 사
곡 쪽에서 무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휙! 휙휙!
추기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수한 만수문  무인들이 장곡 안으
로 쏘아져 들어왔다.
"어디냐?"
금모마원 앙림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흘러나왔다.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을 때 뜻밖의 소식이 들어왔다.
그가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곡에 문주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여깁니다, 부문주님."
비대한 인물이 가리킨 바위로 다가간 앙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
러졌다. 그가 알고 있는 필체였다. 기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썼는지 지
렁이 기어가듯 쓰여진 글이었지만 문주인 자능한의 필체가 분명했다.
갈융을 없애는 순간 그의 아들인 갈음석의  암습에 당했다고 쓰여있
었다. 아울러 앙천마마묵독공은 수인(獸人)에게는  천적이니 반드시 없
애야 한다고 하였다.
"죽일 놈들! 감히 만수문에 도전을  했다 이 말이더냐? 그깟 독공으
로? 비천호(飛天虎) 게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부문주님!"
앙림의 물음에 호랑이 털을 뒤집어쓴 인물이 나타나며 부복했다.  비
천호(飛天虎) 장사인(張士仁), 놀랍게도 일백마에 들지 못한  그가 만수
문의 3인자였다.
"지금 당장 수인대(獸人隊)를 소집해라."
"그럼…."
"인육(人肉)과 인혈(人血)을 허락한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라."
"존명!"
고개를 깊숙이 숙인 장사인의 신형이 훌쩍  뛰어오르더니 장곡 밖으
로 사라졌다.
잠시 후.
크아-앙!
장사인이 사라졌던 곳에서 엄청난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허미, 이것들이 한 두 마리가 아니었나뵈?"
앙림 뒤쪽 한참 떨어진 곳에 있던 비대한 인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
다. 만수문 문도 한 명으로 변장한 야혼이었다.
만수문에 대하여 냉소소에게 듣기는 했지만, 앙림이 언급한 수인대라
는 조직은 처음이었다.
"영수들에게도 농약이 먹힐라나 모르겠네?"
앙림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야혼이 슬그머니 몸을 뺐다. 계획의  전면
수정이 필요한 시기였다. 수인대(獸人隊)라는  변수가 등장했기 때문이
었다. 어쩌면 부채질을 그들이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안될 것 같냐?"
다가온 야혼을 향해 태웅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  계획대로하
면 야혼이 돌아올 때가 아니었다. 치열한 전쟁이 될 때까지는  그들 속
에 숨어있기로 하였던 것이다.
"만수문에 영물들이 많은가봐."
"그럼 방금 전에 들린 호랑이 울음소리가…."
"그런가 보데? 별호가 비천호(飛天虎)래."
"아미타불! 그 종자에겐  내단이 있을려나 몰라.  늑대보단 호랑이가
더 영물인데…. 혹시 곰은 없던가 연작문주."
"두고 보면 알겠지. 웅담이 나오면 3등분하는 거 있지마라."
"어디 가냐?"
"고명지를 데리고 와야할 것 같아서. 장래 마도련주도 같이."
"갈 필요 없다. 이미 왔으니까."
몸을 날리려는 야혼의 귓전에  고명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해쓱한 얼굴의 냉소소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
이었다.
"일을 벌이면 벌인다고 말하면 어디 덧나냐?"
냉소소가 다짜고짜 다가서며 야혼을  향해 말했다. 갈융과 자능한이
비무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설명을 듣기 위해 하루종일 야혼을 기다렸으나 그는 오지 않았다. 대
신 고명지가 와서 전날 일어났던 일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야혼의 실력으로 간신히 이기는  괴물이라
니, 이기어도 수준에 달한 무인만이  잘라낼 수 있는 신체의  소유자가
자능한이라 하였다.
아직 내상이 낫지 않아  움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명지, 너는 오려면 먹을 거나 좀 싸들고 오지."
"안 그래도 싸왔다, 이 돼지야."
보자기 하나를 야혼에게 덥석 맡긴 고명지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
니 나뭇가지 몇 개를 이리저리 꼽았다.
"뭐하는 짓이냐?"
"진(陣)이라는 건데 들어보기나 했나 모르겠다."
"아미타불! 그럼 이 안에 있으면  우리의 모습이 숨겨진다는 말입니
까?"
"그렇다. 팔괘진(八卦陣)의 간단한 응용이지만 숨을  숨기는 덴 최고
지."
마지막 남은 나뭇가지를 땅속 깊숙이 찌르며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
었다. 우연히 배워둔 진식이 쓸모가 있을 줄 몰랐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진에 대해 잘 아는 냉소소나 고명지에게만 해
당했다. 진식이란 말을 들어보기만 했지 실제 보기는 처음인 골통 삼인
방은 의아한 얼굴로 장곡아래를 쳐다볼 뿐이었다.
주변에 기이한 기운이 흐른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자, 나가봐라!"
의아한 얼굴로 서 있는 야혼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마지막에 꼽았던
나뭇가지를 다시 뽑아내며 말했다.
"그럴까?"
"같이 가세나 연작문주."
"나도!"
3인이 동시에 밖으로 나왔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탓이었다.
"눈 크게 떠라."
세 사람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은 고명지가 조금 전 그 자리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꼽아 넣었다.
"헤엑!"
3사람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안쪽에 있던 두 여
인이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더구나 내공을 잔뜩 집중해야  안쪽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팔괘진의
간단한 응용이라 하였던 고명지의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러게, 춘서만 보지말고 공부도 좀 해라. 배워서  남 주는 것 하나
도 없다."
나뭇가지를 뽑아 해진한 고명지가 웃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럼 이진을 설치한 뒤 안에서  별 짓 다해도 들키지 않
는다는 말이구먼. 거 참 좋은 기능이로세."
"맞다, 중놈이 오입할 땐 최고겠다."
"무슨 소린가 연작문주. 자네가 더 필요하지. 동굴 찾는다며 산을 헤
맬 필요가 없지 않겠나. 나뭇가지 몇 개만 있으면 즉석에서  아늑한 방
을 만들 수 있으니…. 연작문주 때문에 개봉을 떠난 곰들이  열 마리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만해 새끼들아. 내가 배우면 될 것 아냐. 너희 두 새끼는 평생 춘
서나 파고 살아!"
두 사람을 향해 태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
어이없다는 듯 고명지가 실소를 내뱉었다. 진식을 가르쳐주겠다고 말
한 적은 없다. 다만 몸을 숨길  장소가 필요할 것 같아 진을  설치했을
뿐인데.
지금 세 녀석의 행동을 보면 진(陣)에  대해 누가 배울 건가를 물었
던 거처럼 느껴진다. 참으로 황당한 녀석들이었다.
"내가 왜 너희들에게 진식을 가르쳐줘야 하지?"
"일을 도와주는 대가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맞습니다, 첩형 시주. 오고가는 정(情)은 인간관계의 기본 중의 기본
입니다."
"암만, 연장과 육승 말이 백 번 지당합니다. 저놈들을 보십시오. 사곡
에서 만독문 놈들이 오니까 이쪽에선 만수문 놈들이 마중을 나가지 않
습니까. 오고가는 정의 한가지이지요."
삼박자의 마지막을 장식한 태웅이 좌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
대로 전날 앙천마마묵독공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길로 만독문 무인
들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만수문 놈들, 네 놈들의 뼈를 갈아 아버님 영전에 뿌리고 말리라."
장곡이 가까워지자 갈음석의 몸에서 더욱 차가운 살기가 흘렀다.  사
곡에서 장곡까지 앙천마마묵독공의 흔적이 이어져 있다.
사곡에서 시작된 비무는 이곳까지 이어졌고, 춘약에 당한 곳이  장곡
임에 틀림없었다..
"소문주님! 장곡에 만수문 놈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볼 것 없다. 바로 쳐라!"
"와-아! 와아아!"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만독문 무인들이 장곡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수인대(獸人隊)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고 만수군(萬獸
軍)은 앞으로 나서라! "
왼편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만독문 무인들을 쳐다보며 앙림이 고함
을 질렀다.
수인대(獸人隊), 전부 200명으로 구성된 비밀병기였다. 문주였던 자능
한과 앙림만 알고 있는 사실. 평소엔 인간과 다름없지만 봉인을 해제하
면 엄청난 능력을 가진 야수로 돌변한다.
앙림 뒤쪽에 도열하고 있는 그들이  낭인(狼人), 호인(虎人), 웅인(熊
人), 원인(猿人), 묘인(猫人)이라 불리는 수인(獸人)들이었다.
"와-아!"
앙림의 명령에 따라 전방에 포진하고 있던  만수문 무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고 만독문 무인들을 맞이하며 나아갔다.
그들의 무기 또한 특이했다. 새 부리처럼  뾰쪽하게 생긴 철취(鐵嘴)
를 비롯하여, 늑대 이빨 형상의 낭아도(狼牙刀), 그리고 짐승의 발 형태
를 본떠 만든 수조(獸爪)라는 무기가 대부분이었다.
차자장! 챙! 창창!
"으-아악! 아악!"
거칠게 맞닥뜨린 양 세력의 선두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지난 한 달간 쌓이고 쌓였던 적의가 폭풍처
럼 터졌다.
순식간에 삼사백의 무인들이 엉키며 피아구분을 힘들게 하였다.
"만독진(萬毒陣)을 구축하라!"
혁군의 입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터졌다. 지금과 같은 혼전은  만독문
에 불리했다. 상당수 부하들이 독검(毒劒)과 독도(毒刀)로 무장하고  있
지만, 만독문의 주력은 독분과 독암기다.
혁군의 명령에 따라 후위에  있던 만독문 무인들이 50여  명씩 조를
만들며 반원을 그렸다. 진(陣)이란 명칭을 달았지만 풍운조화와는 무관
하다. 단지 최고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만들어진 공격방법에 불과했다.
"발진하라!"
삐-이! 삐이익!
발진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2백여 명의 무인들이
자루를 풀어 만수문 진영을 향해 던졌다.
"으아악!"
엄청난 광경이었다. 만수문 전위에 있던 수백 무인들 위쪽으로  독사
를 비롯한 독지네, 그리고 사막에서만 서식한다는 전갈들이  비처럼 쏟
아져 내렸다. 독물을 뒤집어 쓴 만수문 무인들이 고통스런 고함을 지르
며 바닥을 굴렀다.
"명반(明礬)을 뿌려라!"
만수문의 대응도 신속했다. 독충들이  가장 싫어하는 명반을 사방에
뿌리며 만독문 무인들을 향해 돌진해 들었다.
독충과 독암기, 그리고 만수문 무인들의 무기가 진득한 살기를  뿌리
며 사방에서 충돌했다.
죽고 죽이는 두 세력의 혈전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주변이  온
통 시체들과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가득했다.
팽팽하던 접전이 한편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각은  싸움이 시작된 지
1시진 정도 흐른 후였다. 마도련  서열 2위답게 만독문의 전진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싸움 중에 틈틈이 뿌렸던 독들이 드디어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더욱 몰아쳐라! 만수문 놈들을 없애라!"
만독문 후위에 있던 갈음석이 차갑게  고함을 내질렀다. 벌써 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고, 지금도 여전히 죽어가고 있지만 멈추고 싶은 생
각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가지 밖에 없었다.
춘약, 비열한 짓으로 아버지를 숨지게 하였던 만수문 놈들을 전부 없
애버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몸 속에서 이는 분노의
불길을 잠재우는 게 먼저였다.
"춘약을 쓰는 놈들은 없어지는 게 나아."
"아미타불! 어떤 놈이 소승 욕을 하는 겐가. 귀가 왜 이러나?"
귀가 가려운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추기영이 오른 손을 사정없이 아
래쪽으로 훑었다.
찌이익!
천이 찢기듯 날카로운 소리를 낸 물체는, 명반 때문에 길을 잘못  든
뱀 한 마리였다.
고명지와 냉소소의 눈살이 찌푸려진  건 당연지사. 하지만 추기영은
그런 사정을 모르는 듯, 잔뜩 인상을 쓰며 쳐다보는 고명지를  향해 넌
지시 묻는다.
"첩형 시주, 이 안에서 불피워도 됩니까?"
"그렇게 먹고도 아직 배가 고프냐?"
"배가 고파서가 아니고, 이놈은 정력…, 아니 보양식이라서 말입니다.
이제 곧 겨울 아닙니까. 그리고 뱀은 동면하기 전이 제철입니다. 긴 잠
을 자야하기 때문에 이놈 또한 엄청난 보양식을 처먹은 거지요. 아미타
불!"
입맛을 다신 추기영이  고명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진(陣)안에서
불을 피워도 된다면 즉각 구울 태세로.
"어떻게 너 같은 녀석이  무음항마혈탁의 주인이 되었는지  그게 더
불가사의다. 이 안에선 불 피울 수 없다."
하루 이틀 보아온 것도 아니건만  볼 때마다 신기했다. 그래도 10여
년 이상을 상국사에서 살았던 녀석이 아닌가. 고기를 좋아하는 거야 그
럴 수도 있다지만 광적으로 밝히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고개를 흔들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게다.
하지만 뱀을 먹기 위한 추기영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냉소
소 쪽으로 간절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나에게 방법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미타불! 그런 게 아니고, 두반장이라도 있으면, 하다 못해  술이라
도 있으면 바로 먹을  텐데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해서 하는  말인
데…, 이 놈을 살짝만 얼려 주십시오. 내공을 많이 쓸 필요도 없습니다.
약간 차갑다고 느낄 정도면 됩니다."
"……?"
할말을 잃은 듯 냉소소와 고명지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문득  추기영
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상을 당해 운신이 불가능한 사람이 냉소소일진대,  뱀을 먹기 위해
한령신공을 시전해 달란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사람은 또 있었다. 야혼과 태웅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냉소소나 고명지와는 달랐다.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
이었다. 어떻게 그런 방법을 다 생각해냈냐는 듯한 얼굴.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이 이내 추기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미타불! 그렇게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지 말게나. 미식가라면 누구
나 알고 있는 사실일세. 날고기를 살짝 얼리면, 차가운 기운 때문에
입안에서 고기냄새를 느낄 수가  없다네. 특히 황하에서 막  건져
올린 생선은 참으로 별미라 할 수 있지."
"어련했을라고, 탁발하다 밥 한술  못 얻은 날은 황하에서  물고기를
잡아 배를 채웠을 텐데, 생선 비린내가 나기나 했겠냐? 뱃속에 넣기 바
빴겠지. 근데 고기는 무슨 수로 잡았냐?"
"고기 잡는 법? 그거야 쉽지, 객잔에서 두반장을 좀 얻어다가 주둥이
가 좁은 대바구니 속에 넣는 거야. 그 다음에 줄에 묶어  얼음을 깨
고 던져 넣으면…."
추기영의 말을 듣던 냉소소가 뱀 꼬리를  붙잡고 가만히 한령신공을
운기했다. 웃으며 재미있게 들을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다.
추기영의 비참한 과거사였다. 태웅이나  야혼만이 이해 할  수 있고,
맞장구 칠 수 있는 그런 이야기.
"어라? 벌써 해 주셨구먼. 고맙소 냉시주,  아마 마도련주가 되면 잘
다스릴 거요."
뱀이 차가워짐을 느낀 추기영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직!
"캬! 바로 이 맛이야. 불제자라 가능하면 생식을 멀리하고 싶지만 이
맛은 결코 잊을 수가 없어. 문주도 좀 먹어 볼 텐가?"
"조금만 줘, 나는 있는 정력만도 넘치니까."
"곰 시주도? 오늘은 내가 인심 좀 쓰지."
먹고 있던 뱀을 3등분한 추기영이 두 사람에게 한 조각씩 내밀었다.
"어, 맛이 괜찮네, 더 없냐?"
순식간에 뱀고기 한 덩어리를 먹어치운 야혼이  추기영에게 손을 내
밀었다.
"더 이상은 없네 연작문주. 내 것도 부족해."
"그래? 그럼 저기 영물들이 싸우는 것 좀 보고나서 더 잡아오자."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장곡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만수문  무인들 사이에서 앞으로  나서는 자들이
있었다. 지금껏 관전만 하고 있던 수인대였다.
"수인대(獸人隊)는 봉인을 해제하라!"
앙림의 고함소리가 장곡을 타고 울렸다. 뒤이어 짐승이 울부짖는  거
대한 포효소리와 함께 수인대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다.
찌익! 찌이익!
엄청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전방으로 나선 수인대의 몸이 조금씩
크기를 부풀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체면과 예절을 상징하던 옷이 찢겨
나갔고, 온몸에서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늑대, 호랑이, 원숭이, 곰 그리고 고양이 모습을 한 수인들이  진득한
살기를 뿌렸다.
"세상에…. 어찌 저런 무공이."
장곡을 내려보던 냉소소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설마하니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무림엔 수많은 무공이 있고, 그
중에는 신기에 가까운 무공도 꽤있다. 하지만 중원  무공의 대부분은
인간의 신체에 맞추어 창안된다.
지금 눈앞에 드러난 광경처럼 몸 자체를 변형시키는 무공은 거의 찾
아볼 수 없다. 그런데 수인대는 아니었다.
무려 1장에 달하는 거대한 동체의 야수로 변하고 있다. 내적인  성향
뿐만 아니라 외모자체가 야수와 동일해 지고 있는 게다.
"더욱 황당한 노릇은 저 놈들이 불사의 신체를 가졌다는 거다."
"불사의 신체?"
"일단 지켜봐라! 조금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크아앙! 캬우! 키키키! 캬아아악! 꾸억!
먹이를 덮치기 전 내지르는 짐승의 포효소리와  함께 200여명의 수
인대가 몸을 날렸다. 그들이 펼치는 무공은 경공이라 할 수 없었다.
마치 짐승이 뛰어오르는 모습 그대로 만독문  무인들을 향해 돌진하
는 것이었다.
"으아악!"
수인대에 의한 최초의 비명은  호인을 향해 독침을 한  움큼 뿌렸던
만독문 무인에 입에서 흘러나왔다.
날아오는 독침을 무시하고 상대의 목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밖아 버
린 것이었다. 더욱 경악할 광경은 다음이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발톱이
공포에 질려있는 만독문 무인의 가슴으로  파고들더니 붉은 덩어리 하
나를 끄집고 나왔다.
아직 팔딱거리며 뛰고 있는 심장이었다. 뚝뚝 피가 떨어지는  심장을
쳐다보는 호인의 눈에 핏빛 그림자가  어리더니 광폭한 포효를 내질렀
다.
크아앙!
장곡이 들썩일 정도의 포효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심장을 그대로 입
안으로 가져간다.  단지 호인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광경이 아니었다.
200명에 달하는 모든 수인들이 만독문 무인들의 심장을 씹어먹고 있는
것이었다.
"저럴 수가…."
갈음석과 혁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심장을 통째 씹어먹는 수인
들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까지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
질 않았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는 듯 전방의 부하들이 내지르는  고
함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은 잘리지 않는다. 죽지 않는 불사신체다!"
"무슨 소린가. 이 세상에 불사신체가 어디 있나. 수인들을 향해 모든
공격을 퍼부어라! 가자! 혁군."
잔뜩 인상을 찌푸린 갈음석이 수인들이 날뛰는 전방을 향해 몸을 날
렸다.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순식간에 200명의 부하들이  당했고, 사
상자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만독문이 멸문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앞섰다.
"탓핫!"
전면으로 나선 갈음석은  눈앞에 보이는  원인(猿人)을 향해 쌍장을
뻗었다. 앙천마마묵독공의 검은 기운이 어둠을 갈랐다.
"키-아악!"
동물의 울음과 인간의 비명이 섞인 묘한 소성을 내지른 원인의 동체
가 1장 가량 날아 처박혔다.
"별것도 아닌…저럴 수가."
급격히 녹아 없어지는  원인(猿人)의 오른  팔을 쳐다보던 갈음석이
기절할 듯한 놀랐다.
쓰러졌던 원인이 남은 왼팔로 녹아 가는 어깨 아래쪽을 가차없이 잘
라내자 그곳으로부터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정말로 팔이 다시 난단 말이냐?"
만수문과 전쟁중이란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거
품과 함께 조금씩 길어나는 팔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끝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 팔 모양이  만들어지고 있는
게다.
"목이 잘려도 살아나는가 보자 놈!"
갈음석 곁에서 지켜보던 혁군이 주변의 검을 주워 들고 몸을 날렸다.
"안-돼! 키-약!"
오른 팔을 쳐다보던 원인이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주춤거리며 물러
섰다.
"어림없다 놈! 인간의 심장을 먹는 짐승은 전부 죽어야 한다."
광폭하게 고함을 지른 혁군이 수중의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비록 검
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지만 전력을 다한 그의 무공은 대단했다.
일순 장검에 푸른 기운이 어린다 싶더니 원인의 목이 허공으로 떠오
른 것이었다.
푸스스!
"목입니다, 소문주님. 수인을 없애는 방법은 목을 자르면 됩니다."
순식간에 가루로 흩어지는 원인(猿人)의 모습에 혁군이 고함을  질렀
다.
"수인들의 약점은 목이다. 목을 집중적으로 노리되 사곡으로  후퇴하
라!"
"소문주님!"
"그 수밖에 없다.  나머지 부하들이라도  지키려면 그들을 동원해야
해."
갈음석이 짧게 외쳤다. 자신  또한 만독문의 비밀병기까지 동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상태
로 1시진 정도만 지나면 만독문은 멸문당할 게 분명했다.
"수인대는 저들을 쫓아라!"
캬-우! 크아앙!
살기 가득한 괴성과 함께 수인들이 무서운  속도로 만독문 무인들을
뒤쫓았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5장여를 훌쩍 훌쩍 뛰어가는  모습은 공
포스럽기 그지없었다.
"사곡(死谷)에 가면 무슨 수가 있나?"
멀어지는 두 세력을 쳐다보던 야혼이 냉소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만독문에서 독강시(毒 屍)를 제조했다는 말이  있
었어."
"아미타불!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죽어 마땅한 놈들이군요."
"독강시가 뭔지 아냐?"
느닷없는 추기영의 말에 냉소소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가  아는
바로는 야혼을 비롯한 3인은 무공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이들이다.
결코 흥분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그일진대.
"그거야 냉시주가 알지 소승이 어찌 알겠습니까. 저는 다만 이 뱀 요
리를 부탁하고 싶어서 하는 아부였습니다."
어느새 챙겼는지 살집이 토실토실한 뱀 두 마리를 흔들어 보인다.
"하여간…. 가면서 이야기해줄 테니까, 일단 움직이자. 뭐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냉소소가 야혼의 등을 툭 쳤다.
"알았어 이년아. 그렇게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하라고 했건만."
낮게 투덜거린 야혼이 냉소소 앞에 등을 대고 앉았다.
"너는 힘든 일을 해야 살이 빠지잖아. 이게  다 야혼 너를 위해서다.
독강시란, 독공을 익히다 죽은 무인을…."
야혼의 등에 업힌 냉소소가 독인에 대한 간단하게 설명했다.
독강시(毒 屍).
독공을 익히다 사망한 시체에 대법을 걸어  제조하는 강시의 일종을
말한다. 독지에 담가 제조하기 때문에 그들은 몸에서  흐르는 체액조차
전부 극독이라 하였다. 피부는 단단하기 그지없어 일반 무인의 무기로는 흠
집조차 내지 못한다는 절대적인 괴물이 독인이었다.
"그럼 너의 사황문도 그런 이상한 것들이 있냐?"
"우리뿐만 아니라 철마문도 있을 거야. 만수문의 수인은 예외지만."
"빌어먹을 완전히 삽질 투성이군. 산을 못 깎고 나무 몇 그루만 베어
냈어."
일순 온몸의 힘이 탁 풀렸다. 마도대전을 통해 마도련 세력의 일부를
줄였다고 생각했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힘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런 소리 마라. 지금 네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직도
모르냐? 철마문에서 지난 300년 동안  없애고 싶어했던 자들이 만독문
이었다."
그랬다. 야혼이야 인상을 푹푹 쓰고 있지만 하오밀문 삼인방이  해치
운 일은 마도련 사상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결코 단순한 일이 아
닌 것이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독강시는 어떻게 할래."
"내가 없애달라고 하면 없애줄 것처럼 들린다."
"다루는 게 어렵지 않다면,  소모품으로 써먹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 뭐."
"아냐, 감당할 수 없는 부하는 버리는 게 나아."
"그래? 어이 좌우호법, 가서 영물들에게 농약  먹여. 나도 곧 뒤따라
갈게."
"좋지, 영물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는데…."
고개를 끄덕인 추기영과 태웅이 전방을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농약?"
냉소소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야혼이 독인을 없애준다 하였을
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던 건 그의 무공 때문이었다.
그런데 야혼은 무공을 쓸 생각은 전혀 없는 듯하였다. 도대체 춘약으
로 뭘 어떻게 하려는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춘약을 우습게 보지 마라.  약으로 쓰일 땐 쾌락을  주지만. 독으로
쓰면 앙천마마묵독공보다 더 강하다. 어제 갈융이 농약 때문에 죽지 않
았겠냐."
"무슨…."
"두고 보면 안다. 다 왔네. 일단 저쪽에서 쉬고 있거라."
고명지에게 냉소소를 맡긴 야혼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전장으로 몸
을 날렸다.
"야혼을 사랑하세요?"
야혼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잡초같이
살아온 야혼과 사황문의 금지옥엽으로 자란 냉소소, 어디  하나 어울리
는 구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하
나처럼 보인다.
조금 전만 해도 그랬다. 냉소소는, 뭐해? 라는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야혼은 등을 디밀었다.
오랜 시간 같이 생활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앞으로는 어찌될지 모르지만 아직은…."
"야혼 때문이군요."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오래 기다려야 할 거예요. 저 녀석 가슴속에  있는 얼음덩
어리는 너무 커요. 그게 다 녹으려면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아니 어쩌
면 녹이지 못할지도 몰라요. 누군가 녹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내가 동창 첩형이란 사실을 잊었어요."
"제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냉소소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문득 고명지는 야혼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자신마저 모르는 사실을. 가슴속에서 뜨거
운 무엇인가가 불쑥 치솟았다.
"훗! 기분이 나쁜가 보네요. 내가 야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하지 말아요. 야혼에게 해될 일은 없을 테니까. 나 또한 그
녀석에 대한 건 짐작정도예요. 마옥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과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살아나고 말
았다는 것 정도."
"그럼?"
"내가 그 녀석의 가슴속에 있는 얼음덩어리를 말한 건, 나 또한 역적
의 자식이었기 때문이에요. 복수를 위해 몸을 팔았죠. 내시에게. 그런데
야혼을 보면 나를 보는 것 같아요…. 훗! 내가  왜 이런 말까지 하는지
모르겠네. 걱정하지 말라고 드리는 말이에요.  가능하다면 야혼을 도와
줄 참이니까요."
"미안해요. 공연한 말을 꺼내서."
이내 표정을 푼 냉소소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명지 또한 평탄
한 삶을 사는 여인이 아니었다. 동창 첩형이라는 권력의 정점에 있지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여인에 불과했다.
"아니에요,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전데요, 뭘.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해요. 저 위쪽이면 되겠네. 그리고 마옥성에  대해선 계속 알아보고 있
으니까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전해 줄게요."
냉소소를 번쩍 안아든 고명지가 계곡 위쪽으로 몸을 날렸다.  수인들
에 대한 사항은 야혼에게 맡길 참이었다.
잠시 후, 진을 설치하여 몸을 숨긴 고명지와 냉소소가 아래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양측의 격돌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들 사이에서 빠르게 움직여 다니는 야혼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괴물들이군…."
놀라운 광경이었다. 분명 공격력은 운신의 폭이 넓은 수인들이  강했
다. 하지만, 독강시는 철벽이었다. 오히려 공격했던  수인들의 팔다리가
녹아 내리는 기경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수인들 또한 불사지체에  달한 괴물들, 녹아  내린 팔다리가
급속하게 자라나며 다시 공격을 가하고 있다.
"연작문주! 농약이 맛이 없나보네. 수인들이 안  먹겠다고 하는데 어
쩌면 좋은가."
낭패한 기색의 추기영과 태웅이 야혼 곁으로 다가왔다. 수인에게  농
약을 먹이기 위해 몇 번 시도해보았으나 대부분이 독강시와 맞붙어 있
어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서 있는 놈말고 누워있는 놈들에게 먹이면 되잖아. 저 놈처럼."
한 곳을 가리킨 야혼이 빠르게  몸을 날렸다. 독강시와 맞붙어 있던
수인이 한 쪽 다리가 녹아버리는 바람에 기우뚱 쓰러지고 있었던 거였
다.
크아앙!
"3개다!"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지르는 호인(虎人)의 입안으로 농약 3개를 재
빨리 던져 넣었다.
"이크!"
태웅과 추기영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등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재빨리 오른 팔을 휘돌려 쳤다.
빠악!
"으-아악!"
만수문 무인 한 명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적은 만독문인데 왜 나를 공격해 새끼야."
낮게 중얼거린 야혼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또 다시 전방에 쓰러져
있는 수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허미, 이건 암컷이잖아?"
캬아악!
반라로 발버둥치는 수인은 긴 꼬리를 달고 있는 묘인(猫人)이었다.
"연작문주! 이건 봉이네 그랴. 이 고양이 시주는 생포하는 게 어떻겠
나."
"너는 연장이 작아서 안 돼 임마! 헛소리말고 농약이나 던져 넣어."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태웅이 묘인의 목을  향해 오른손을 슬쩍 휘
둘렀다. 그의 절기인 마라환영참이었다.
"아-악!"
"좋-고! 특별히 암컷이니까 인심쓴다."
쩍 벌어진 묘인의 입 속에 5개의 농약을 던져 넣은 추기영이 그녀의
턱을 향해 철탁을 사정없이 날려버렸다.
태웅과 추기영이 수인들에게 농약을 먹이는 방법이었다. 태웅의 무영
권이 수인의 목을 강타하면 벌어진 입안으로 추기영이 농약을 던져 넣
는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냈지만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묘인(猫人)
까지 합치면 벌써 5명에게 농약을 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어이, 곰 시주, 이번엔 저기 보이는 곰 새끼에게 가보세."
챙! 차앙! 챙!
"으아악! 아악!"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야혼 일행이 있는 오른편에서는 독인
과 수인들이 뒤엉켜 있고, 왼편엔 살아남은 만독문과  만수문 무인들이
서로를 향해 몸을 던지고 있다.
"죽어라!"
챙!
"옷 찢어졌잖아 개자식아."
오른쪽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친 검을 힐끗 쳐다본 야혼이 상대의 턱
을 향해 머리를 박아버렸다.
"웬 놈이냐?"
동료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오른쪽으로 옮겨가던 몇몇 만수문
무인들이 살기를 흘리며 다가왔다.
"동료도 몰라보는 놈은 죽어도 싸!"
"어? 비천호님!"
야혼을 향해 다가온 무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수인대의  대장
이었던 비천호 장사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뭣들 하느냐!"
"아-알겠습니다!"
야혼의 호통에 화들짝 놀란 일행이 서둘러 몸을 날렸다.
"이런 병신. 이 얼굴로 약을 먹이면 왔다 아냐."
머리통을 툭친 야혼이 수인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
였다.
"야!"
캬르르!
"비-천-호님!"
앞발을 번쩍 치켜들며  공격을 가하려던  낭인(狼人)이 이내 표정을
풀었다. 상대가 상관인 비천호였던 탓이었다.
"이 알약 먹어라. 재생능력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약이다. 그리고 이
건 다른 동료들에게 나눠줘라. 반드시 3알씩만  줘야 한다. 그 이상 욕
심부리면 몸이 가루로 변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크르르! 감사합니다, 비천호님!"
"이렇게 간단한걸…."
고개를 숙이며 다른  동료에게 뛰어가는 낭인을  쳐다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어떤 효과가 나올지  알 순 없지만 한가지는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발정난 야수가 될 거라는 사실.
"이제 대장 놈들 싸움을 한번 지켜보기로 할까."
주변을 휘이 둘러본 야혼이 절벽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갈융의 유
언을 적었던 바위 근처에 갈음석과 앙림이 있었던 거였다.
"독강시라…. 만독문도 많은 준비를 했군."
오히려 수인을 능가하는 독강시의 활약에 앙림의  얼굴이 잔뜩 찌푸
려졌다. 의지를 가졌으되 목이 잘리면 소멸하는  수인에 비해, 죽은 자
를 이용하여 만든 독강시의 살인능력은 훨씬 뛰어났다.
그들에 의해 목이 뜯겨 소멸되는 수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만수문이 더 놀라워.  수인대 같은 강력한 무인들이  있으면서
그동안 왜 침묵하고 있었는지."
갈음석이 의문어린 얼굴로 물었다. 독강시와는 달리 의지를 가진  수인
들은 마도대전에 참석할 여건이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가만있었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저들은 아직 완성품이 아니라서 말이다. 아마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나타날 일도 없었을 테지. 하지만 만족스러워."
앙림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어렸다. 그가 데리고 있는 수인은 삼류수
준의 무인들을 수인으로 양성했고, 어느 정도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시험 장소가 바로 이곳인 것이다.
"그럼 완성되면 더 강한 자들이 나오게 되는 건가?"
"그건 아니다 갈음석, 강한 무인이  강한 수인이 된다. 바로 나처럼!
키키키!"
찌이익!
기묘한 소리와 함께 앙림의 신형이 변이를 일으켰다. 의복이 찢겨 나
가고 점점 키가 커지더니 급기야 1장  크기에 달하는 거대한 원숭이로
변했다.
"금모마원(金毛魔猿)이란 별호가 그래서 나온 건가?"
온통 금빛 털로 뒤덮인 앙림의 모습에 문득 오한이 밀려들었다. 수인
으로 변하는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릎까지 내려온 팔과, 거의 반장 길이에 달하는 길다란 꼬리는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의심케 하였다.
"그건 무공 때문이지 변이 때문은 아니니라."
어눌한 목소리로 말한 앙림이 기마자세 비슷한 모양을 취했다.  길다
란 두 손을 앞쪽에 짚고 꼬리를 잔뜩  치켜올린 모습은 꽤나 우스꽝스
러웠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전율적인 살기만 제외한다면.
"쿡! 그 자세는 뭐라 부르나. 원숭이 말타는 자센가."
태연스레 말하고는 있으나 갈음석의 가슴은 폭발적으로 뛰었다. 앙림
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상상외로 강했기 때문이었다.
깊숙이 숨을 몰아쉰 갈음석이 앙천마마묵독공을 끌어올렸다. 점차 검
은색으로 변해 가는 그의 양손에서 번쩍 광채가 솟구쳤다.
"키-우!"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앙림의 동체가 그  자리에서 왼쪽으로 한바
퀴 굴렀다. 비록 수인으로 변이하였지만 앙천마마묵독공은 함부로 받아
칠 무공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다시 몸을 세워 처음 자세로  돌아간 앙
림의 두 다리와 팔을 동시에 퉁겼다.
공이 튀듯 훌쩍 뛰어오른 그의 신형이 갈음석의 전면을 향해 폭풍처
럼 날았다. 활짝 뻗어낸 양팔에서 금빛 찬란한 광채 터졌다.
갈음석의 대응도 신속했다. 앙림의 신형이 솟구치자마자 뒤쪽으로 몸
을 날리며 양손을 휘둘렀다.
팡! 팡! 팡팡!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접근
하여 승부를 보려는 앙림과 적당한 거리를 두려는  두 사람 사이에 쫓
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형은 서로의 영역에
서 멀어지지 않았다. 10여장 공간을 빙빙 돌며 서로에게 장력을 퍼붓고
있는 것이었다.
"연작문주, 저놈은 내단보단 털이 더 값나갈 것 같은데."
"농약은 다 먹였냐?"
"그럼, 짐승은 역시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말이 맛나보이. 곰 시주가
한방을 때려주니까 먹고싶다고 입을  쩍쩍 벌리는데, 방해하는  놈들이
있기에 해탈시켜주느라 좀 늦었네. 근데 저놈의 금털은  정말 탐스럽구
먼."
"아까 육승이 뱀 먹을 때  생각난 건데 말이야, 이번엔 저놈을  한번
얼려서 잘라볼까?"
"아미타불! 곰 시주. 그러다 마르면 다시 가루로  변해 날아갈 것 아
닌가."
"그러니까 마르기 전에 내다 팔아야지. 냉 소저에게 잔뜩  얼려 달라
해서."
"아마 안될 것 같은데? 마법(魔法)무공인가 하는 걸로 저렇게 만들었
다고 했잖아."
"잘라내면 마법이 풀려서 가루가 되어버린다 이 말인가? 연작문주."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나저나 물이  섞여서 그런지,
농약 효과가 늦네?"
"그런 면이 없잖아 있을 걸세, 어이구 지금 막 시작했네."
크-아앙!
캬-우우!
쿠-우-아!
추기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인들의 입에서 광폭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3알씩 먹었던 농약이  드디어 활동을 시작했는지, 수인들
의 몸에서 붉은 혈기가 솟구쳐 올랐다.
"역시 우리 처방이 맞았네  그려. 발정난 것들은 짐승이나  인간이나
똑 같다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네."
추기영의 말마따나 상황은 돌변했다. 지금껏 독강시에게 밀리던 수인
들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물체를 향해 무작정
돌진하여 하체를 비벼대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재
생력이었다. 독강시의 독에 녹아버린 신체가 더욱 빠르게  원래의 모습
을 회복하고 있다.
몸 속에 돌고 있는 피 때문이었다.  농약에 의해 빨라진 혈액순환은,
훨씬 빠른 재생력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캬- 악! 크-아앙!
찌익! 찌-이익!
발정난 수인들의 포효소리와 함께 독강시의 동체가 찢겨 나갔다.  솟
구치는 욕정을 풀 길이 없자,  독강시의 몸통을 통해 울분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동체를 잡게  되면 몸이 녹아버린다는  사실을
잊은 듯, 독강시를 찢어발기다가 두 팔이 녹아버리면 그 다음엔 이빨로
그들의 목을 잘라내고 있다.
"저 놈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니까 갑자기 시장기가  도는구먼. 어디
에 두었더라, 아! 여기 있구나."
품속을 더듬거리던 추기영이 장곡에서 잡았던 뱀 두 마리를 꺼냈다.
"육승, 그거 가지고 가서 냉 소저에게 얼려달라고 해라. 그리고 내려
올 때 제마성검 가지고 오고."
"그게 좋겠지?"
태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추기영이 절벽 쪽으로 잔뜩 밀착하여 사
곡 밖으로 몸을 날렸다.
"연장! 나 오늘 부로 독공 서열을 바꾸기로 했다. 부동의 서열 1위는
앙천마마묵독공이 아니라 농약이다."
태웅이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환하게  웃었다. 농약의 효과는 가공했
다. 독인들의 수가 조금씩 줄어가기 시작하자 상대를 찾지 못한 수인들
이 아군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었다.
농약성분이 극에 달했는지 코와 입으로 벌컥벌컥  피를 넘기기 시작
하였다.
"으악! 아악! 수인들이 미쳤…."
처절한 고함소리와 함께 무인들의 사지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만
수문 만독문 무인들을 가리지 않았다.  같은 편인 만수문 무인의  목을
꺾어버린 수인이 곧바로 앞에 있던 만독문 무인들을 짓이겨 버린다.
만독문 무인에 의해 팔이 잘려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오직 뜨거
운 입김을 불어내며 무인들  속에서 날뛰다 누군가의 칼에  목이 잘려
소멸되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왜 수인대가…."
수인대를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 이는  만수문 무인들뿐만이 아
니었다. 갈음석과 싸우고 있는 앙림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장을 교환하는 가운데 언뜻언뜻 보이는  수인들의 행동은 결
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수인으로 변이했다 하더라도 이성이 남아있는 그들이 아니던가.
"이 갈음석을 두고 한 눈을 한단 말인가."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전면에서  갈음석의 묵장(墨掌)이 쇄도해
들었다.
"서둘러야겠군."
더 이상 비무를 지속할 수 없다는 판을  내린 앙림이 갈음석의 묵장
을 향해 양팔을 내밀었다.
파악!
앙천마마묵독공의 위력은 대단했다. 비록 내공을 풀어 일부러 허용했
다 하지만 앙림의 양 팔꿈치 아래쪽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 버린 것
이었다.
"끝났다 놈!"
득의에 찬 미소를 머금은 갈음석이 무서운 속도로 몸을 날렸다. 다시
재생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양팔이 생겨나기 전에 앙림의 목을 잘
라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크억!"
검은 빛으로 물든 오른손을 횡으로 휘두르던  갈음석이 나직한 비명
을 지르며 목을 감쌌다. 양손이 사라진 앙림의 공격 수단은 5척 길이에
달하는 꼬리였다. 웬만한 어른 팔뚝보다 더 두꺼운 꼬리가 갈음석의 목
에 뱀처럼 감겨 있었다.
한 순간의 실수, 두 팔이 없다고 여겼고, 놈의 머리를 잘라내면 싸움
이 끝난다는 흥분 때문에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게 패인이었다.
우두둑!
승기를 잡은 앙림의 동작은 더욱 빨랐다. 꼬리를 이용하여  갈음석의
목뼈를 분질러 버림과 동시에 얼굴 앞으로 끌어당겨 부러진 목에 이빨
을 박아 넣었다.
파악!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갈음석의 목을 잘라버린  앙림이 승리의 미소
를 지으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꼬리! 그리고 다리!"
"아-악!"
느닷없이 가해진 공격에 속절없이 당한 갈음석이  처절한 고함을 지
르며 쓰러졌다.
"네 놈들은…."
싱긋 미소를 짓고 자신을 쳐다보는 3인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만독문과 만수문 싸움과는 전혀 무관한 자들, 하오밀문의  삼인방이 이
곳에 왜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네 놈 털이 욕심나서 견딜 수가 없어서 말이야. 이 금빛 나는  털만
주면 살려준다고 약속하지."
"대단하군! 암습에 성공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대들이 이곳엔 웬
일인가."
재생하는 팔을 재빨리 등뒤로 집어넣으며 물었다. 시간을 끌기  위해
서였다. 물론 불사의 신체이기에 죽음을 당할 일은 없지만 공연히 번거
롭게 하기 싫었다.
"그냥 한번 와봤어. 일백마 서열 3윈데 마도련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아야 할 것 아닌가. 어이구 저기 혁군하고 비천호란 놈이  동귀어진 하
네? 아아! 고개 돌리지 말고 그대로 있어."
고개를 돌려 전장을 쳐다보려는 앙림의 얼굴을 지그시 밟았다.
"내가 말해 줄 테니까.  듣기만 하라고. 지금 만수문  무인들은 50명
정도 남았는데 그들도 얼마 가지 않을 것 같아. 묘인 한 마리가 그들을
패 죽이고 있거든. 그리고 나머지 수인들은 독강시와  엉겨 붙어있는데
떨어질 생각이 없나봐."
"이놈!"
팔이 전부 재생되었음을 느낀 앙림이 등을  슬쩍 들어올리며 양손을
쾌속하게 뻗었다.
번쩍!
얼굴을 누르고 있던 발을  잡아가려던 그의 손보다 더욱  빠른 빛이
있었다. 은빛 섬광과 함께 앙림의 두 팔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곤 이내 가루가 되어 흩어져 내렸다.
"지금 상황은, 만수문 무인들은 30명 남았고 만독문 무인은  20명 남
았어. 수인들과 독강시는 여전히 교미중이고."
"아미타불! 연작문주 그러지 말고 이놈 가죽이나 한번 벗겨 보세. 혹
시 아는가, 불량품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불량품, 잘못 만들어졌다면 털이 가루로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는 말이었다.
"이럴 수가…."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앙림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분명  내공
은 살아 있다. 조금 전 갈음석과 대결 때문에 피로하기는  했지만 운용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킬 수가  없
다. 단지 하오밀문 문주가 얼굴을 밟고 있을 뿐인데.
더구나 방금 잘린 두 팔에선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놀라지 마 임마. 나는 이런 훌륭한 털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더  놀
라워. 더구나 뽑아내면 이렇게 가루가 되어버리잖냐."
역시 예상대로였다. 한줌이나 되는 금빛 털을 냅다 뽑아보았으나  앙
림의 몸을 떠나자마자 바로 가루가 되어 버린다. 자능한의 상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누구냐?"
하오밀문의 떨거지들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묻는 말이었다. 눈동자를
돌려 조금전 자신의 팔을 잘랐던 검을 쳐다보았다.
"허억! 제마성검(制魔聖劒)?"
앙림 또한 자능한과 같은 반응이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검을  쳐다보
며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 역시 제마성검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다 죽었네, 몇 놈은 살아서 도망쳤고, 수인과 독인은 전부 복상사했
다."
"아미타불! 그래도 행복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  연작문주가 언제나
원하는 죽음이 바로 복상사거든요. 연작문주 갑자기 원숭이  골 요리가
먹고 싶은데, 한번 잘라보는 건 어떻겠는가."
"아니야, 그전에 듣고 싶은 게 있어."
세 사람의 뒤쪽에 냉소소를 안은 고명지가 나타나며 말했다.
"잘 들어라, 앙림. 어제 자능한을  없앤 게 우리들이다. 아니  스스로
소멸하고 말았다. 너희 조직에 대한 비밀을 실토하면 처절한 고통을 당
하며 죽는다는 걸 알고 있다."
"클! 그랬었군. 어쩐지 문주가  너무 쉽게 당했다고  생각했다. 좋다,
원하는 걸 말해 봐라."
앙림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제마
성검이 나타났으니 더 이상 희망이  없다. 편하게 죽는 방법을  택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너희 조직에 대한 비밀을 제외한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내가 아는 건 별로 없다. 우리를 창조한 그는 나이를 알 수 없을 정
도로 오래 살았다는 것 정도다."
"중원 사람인가?"
"나도 모른다. 다만 북방 열사의 사막 어딘가에 신전(神殿)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열사의 사막이라…."
고명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온 목적 중의 한가지도  그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신전에 대한 건은 큰 비중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앙림의 말을 듣고 보니 신전을 찾는 일 또한 허투루 넘길 일
이 결코 아니었다.
"그럼 그곳에 가야 300년 묵은 영수(靈獸)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말
이네?"
"그럴지도…. 죽여줘라!"
앙림의 눈을 주시하던 고명지가 나지막이 말했다. 더 이상 알아낼 게
없었다. 그의 조직에 대해 묻게 되면 바로 가루가 될게  자명한 일이었
다. 하지만 추기영은 그녀 생각과는 달랐는지 한 걸음 다가섰다.
"아미타불! 앙림시주, 정말 이 가죽을 발라낼 방법이 없습니까?"
털, 여전히 금빛 찬란한 앙림의 털을  포기하지 못하고 묻는다. 그것
도 아주 간절한 어조로.
"모욕주지 말고 죽여라!"
"에라, 썅! 너 같으면 이런 엄청난 털을 포기하겠냐? 그냥 털도 아니
고 금털아니냐고, 이 빌어먹을 시주야. 이 새끼 살려두세,  그 신전인가
하는 곳에 가면 이  놈들 가죽을 원상태로 보존하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소용없다, 이 상태로 한나절만 지나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니미럴타불!"
푸욱!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추기영이 야혼의 손에  들려있던 제마성검을
빼앗아 앙림의 심장을 향해 찔러버렸다.
스스스!
자능한의 몸이 사라질 때와 똑같았다.  먼저 이마에 원과 별 모양이
동시에 나타나더니 천천히 가루로 흩어져 내린다.
"마법(魔法)이란 무공이다."
황당한 얼굴로 줄곧 지켜보고만 있던 냉소소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마법?"
"나중에 마법이란 무공에 대해 알아내면 그때 알려주마. 지금은 누구
도 모른다. 고명지도 마찬가지고. 업혀!"
"응? 응!"
퍼뜩 정신을 차린 냉소소가 야혼의 등에 업혔다. 살아생전에 가장 놀
라운 경험을 한 하룻밤이었다. 불귀동에 빠졌을 때보다 더한 충격을 받
았다. 말로만 듣던 불사신체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잘해!"
"응? 응! 그럼 잘해야지."
의미파악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절반의 의미.
3일째 아침은 기이한 침묵으로 시작되었다.
비무장 오른쪽에 배치되어 있던 두 세력 때문이었다. 무려 2천에  달
했던 무인들이 앉았던 그곳이 텅 비어버렸다.
만수문과 만독문의 수뇌는 물론이고, 부하들조차 나타나지 않은 것이
다. 단 하룻밤만에.
도전의 수락여부를 기다리기 위해 비무장 위에  올라온 태웅은 마도
련 무인들의 관심권에 있지 않았다.
그러한 사정은 마도대전을 주최했던 원로들이라 하여  다를 바 없었
다.
"허허! 이게 무슨 조화속인가!"
곤혹스런 얼굴로 만수문과 만독문 진영을 쳐다보던 종마가 나직하니
중얼거렸다.
"종마어르신!"
"그래, 어떠하더냐."
다가온 양홍기를 향해 황급히 물었다. 두 세력이 나타나지 않자 바로
양홍기를 만수문과 만독문으로 보냈던 거였다.
"텅 비었습니다. 만독문과 만수문에 무인들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습
니다. 문주를 찾기 위해 파안객납산으로 출동했다 합니다."
"뭣이? 설마 그들이…."
해쓱하게 변한 종마가 일행을 쳐다보았다. 두 세력이 공히  파안객납
산으로 갔고,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결론은 한가지 밖에 없다.
"기어코 일을 벌인 모양이네.  일단 마도대전을 잠시 멈추고  확인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네. 가서 3파 문주를 불러오너라."
옆에서 보고 있던 검마가 양홍기를 향해 말했다. 그 역시 종마의  생
각과 다르지 않았다. 두 세력은 파안객납산에서 전쟁을 벌였고, 양패구
상의 결과를 가져왔음에 분명했다.
잠시 후, 문주대행을 맡고 있는 유웅창과, 냉운소, 그리고 요화문주인
나령이 도착하자 서둘러 비무장을 빠져나갔다.
파안객납산으로 떠난 마도련 수뇌들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2시진 뒤
였다.
잔뜩 굳어진 얼굴의 종마가 궁금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무인들에
게 파안객납산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 소상하게 말했다.
"이곳에 마도련이 창설된 이래 최악의 사태가 생겼소이다. 본인의 충
고를 무시하고, 만독문과 만수문은 전쟁을 치렀소. 그래서…."
천천히 이어지는 종마의 말에 술렁이던 군웅들의  얼굴이 급기야 해
쓱하게 변했다. 두 세력의 상잔, 그리고 양패구상.
하룻밤만에 일어난 일의 전말이었다.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종마
의 말처럼 무려 300년 간 지속되어온 5문파였다.
물론 그동안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많은 일들이 발생했고, 언
제나 평화롭게 해결해왔던 5문파가 아니었던가.
믿을 수 없는 참사에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으레 그렇듯, 모든 사람이  다 침묵하는 건 아니었
다. 이번 사건의 가장 수혜자라 할 수  있는 사황문 진영에는, 기대 어
린 눈빛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냉운소 또한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암흑루를 향하는 그의  얼굴엔 빙그레 미소가
어렸다. 의외의 사건으로 인하여 태웅이  10위 권 안에 들게  됨으로서
철마문과 동률을 이루었다.
더구나 남은 3파는 마도대전을 계속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결
국 목전의 상황엔 상관없이 마도련주는 탄생하게 되어있다.
"아버님, 접니다."
"들어오너라. 어떻게 되었느냐?"
안으로 들어선 냉운소를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 이미 만독문과  만수
문에 대한 소식은 들었다. 그가 무엇보다 궁금해하는 건 마도대전의 지
속여부였다.
"마도대전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만독문과 만수문 사건
은 신임 마도련주가 처리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래? 크! 하하하!"
냉운형의 입에서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황문 300년 한이  풀
릴 기미가 보였다. 철마문엔 10대  고수에 도전할 만한 무인이  없지만
사황문에는 둘이 남아 있다. 딸인 냉소소와  아들인 냉운소, 그들 둘이
면 마도련주 자리는 결코 꿈이 아닌 게다.
"계획을 말해 보거라."
나름대로 생각해 둔 사항이 있긴 하였지만 우선은 아들의 의견을 듣
고 싶었다. 사황문이 마도련의 주인이 된다면 련주가 되어야 할 사람이
아들인 냉운소였던 탓이었다.
"우선 내일 소소를  혈륜마웅(血輪魔雄) 탁기성(卓基成)에게  도전을
시키겠습니다."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말이더냐?"
탁기성(卓基成)이 서열 9위라지만 내상을 치유하지 못한  냉소소에겐
버거운 상대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소소를 도전시키겠
다고 하는 아들의 의도가 더욱 궁금했다.
"제가 바라는 게 바로  그겁니다. 굳이 이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와
양패구상만 해주면…."
"마지막날 네가 탁기성에게 재도전하겠다 그 말이렸다."
냉운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이틀 동안 사황문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성공한다면 마도련의 주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있었다.
"만일 탁기성이 패배를 선언하고 다른 도전자가 나서면 어떻게 할거
냐?"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었다. 결국 사황문이 마도련의 주인이 되는  건
시간이 결정해준다. 물론 철마문엔 10대 고수에 도전장을  낼만한 무인
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또한 안심할 순 없는 일이다.
"그건 하오밀문 인물들을 이용하면 됩니다. 그들에게 사황문  무인들
을 도전시킬 겁니다."
"묵자성을 이긴 실력이란 사실을 잊었느냐?"
"묵자성이 그들의 한계입니다. 그보다 더 강할 거라곤 생각지 않습니
다. 하지만 대비는 해야겠지요. 그래서 오늘밤  야혼이란 놈을 만날 겁
니다. 돈이면 해결되리라 봅니다. 녀석이 마도대전에 참석한 이유가 돈
때문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비난을 감수할 자신은 있느냐?"
아들의 말대로만 한다면 사황문의  승리는 확실했다. 하지만 정당한
방법은 결코 아니다. 혈륜마웅에게 연거푸 도전하는 행위는  물론 하오
밀문 인물들을 이용하여 시간을 버는 행위도 비난받을 게 분명했다. 그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마도련주 자리에 오를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아버님! 마도련주 재임기간은 10년입니다. 그들의  인식을 바꾸기엔
충분히 긴 시간이란 말이지요. 더구나 하오밀문 떨거지들이  10대 고수
안에 들어 있는걸 좋아할 마도련 무인은 없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워하
지요. 그들을 이용한 행위는 금방 잊혀집니다."
냉운소의 얼굴에 자신감이 서렸다. 마도련주는 강한 무공만으로 되는
자리가 아니다. 실력과 머리를 겸비해야 진정한 마도련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백마를 가장 많이 배출한 문파를 마도련의 주인으로 뽑
는 이유가 바로 그때문인 게다.
"그렇겠지. 하오밀문 두 사람이 일백마에 들어있는 건 마도련의 수치
라 할 수 있으니까. 좋다 네 생각대로 해 보거라."
냉운형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부쩍 커버린 듯한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젊은이의 호승심을 버리고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사황
문을 마도련의 주인으로 만들고자하는 근성도 마음에 들었다.
두 부자의 웃음 속에, 그 날의 비무는 태웅의 승리 선언으로 끝났다.
"어서 오게!"
"이게 다 뭡니까?"
암흑루의 연회석으로 들어선  야혼이 깜짝 놀란  얼굴로 냉운형에게
물었다. 식탁 위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마도대전이 끝나려면 아직 이틀이나  남았지 않은가. 승리의 축배를
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일진대.
"왜 혼자 왔는가? 두 사람과 같이 오라 하였더니."
"그 녀석들은 낮보다 밤에 더 바쁜 사람들이라서 말이오."
냉운소의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먹으라고 차린
음식인데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다. 접시를 끌어당기며  게걸스럽게 음
식을 먹기 시작하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보군."
냉운소가 슬쩍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그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었지
만 잘먹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쑤셔 넣듯  음식을 먹어대는 야혼의 행
사가 천박하게 보였다.
"밥 한끼 주면서 그렇게 생색내고 싶소."
"아닐세, 실컷 먹도록 하게. 내가 잠시 잊었네. 자네가 하오밀문 사람
이란 사실을. 그럼 이건 어떤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냉운소가 야혼의 눈앞으로 몇 장의 전표를 내
밀었다.
"돈이네?"
"그렇네. 전부 3만냥이지. 그동안 자네들이  충분한 역할을 해주어서
수고비로 주는 돈일세."
"그럼 이 돈을 주려고 부른 거였소. 약소하지만 받기로 하지요. 당신
말대로 우린 엄청난 노력을 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전표를 곱게 접어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이제 그만 일백마 지위에서 내려오게. 그 자
린 자네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아닐세."
"에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일백마 자리에 어울리는 새끼들이
정해진 건 아니잖소. 그런데  이 음식 참 맛있네.  만든 사람이 누구요
얼굴 좀 보고 싶네?"
"무슨 말인가? 그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겠다는 말인가?"
냉운소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참으로 맹랑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연일 패하다가 운 좋게 주운 일백마 자리를, 마치 비무를 통해
얻은 자리로 착각하고 있는 게다.  일백마 서열 3위가 될 때  비무대에
앉아 콧구멍 후비는 일밖에 하지 않았던 놈이 아닌가.
"당연한 말을 입 아프게 하는 것도 재주인가 보군.  입장을 바꿔놓
고 생각해보쇼. 당신 같으면 힘들게 얻은 일백마 자리를 그냥  내놓겠
소?"
"그래서 돈을 주지 않았나.  3만냥이면 하오밀문 정도는 5개를  세울
수 있는 거금일세."
"말이 다르지 않소, 조금 전엔 분명 그동안 수고비라며 주지 않았소.
나도 그렇게 알고 받았고."
품속에서 전표를 꺼낸 야혼이 냉운소 앞에 흔들며 말했다. 영문을 모
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결국 보다못한 냉운형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같이 포함되어 있는 걸세. 그리고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우리 사황
문을 마도련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  약속을 지켜주길  바라
네."
"그러니까 제 말은 사황문이 마도련 주인이  되는 것과 우리가 일백
마 서열 2위, 3위 자리를 내놓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 이 말입니다."
"좋네, 내가 설명을 해주지."
냉운형이 좀 전에 아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 주었다.
"오라! 그러니까, 내상을  당해 골골하는 딸내미를  희생시켜 개뿔이
실력도 없는 작자를 마도련주로 만들겠다 이 말이오?"
황당한 얼굴로 냉운형을 쳐다보았다. 부모입장에선 자식의 흠이 보이
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자신이 보기엔 냉운소의 실
력은 10위권 안에 들기엔 무리였다. 각 문파의 신진 중 가장 처지는 인
물이 냉운소일진대. 그를 마도련주로 만들려 하다니.
"십만대산에 보내고, 정략결혼을 시키고, 이제는 나가서 싸우다 뒈져
라…. 당신네 부자들 참으로 편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구려."
"말을 삼가라, 이놈! 예가 어디라고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게냐?
너 따위가 사황문의 한을 알기나 하느냐?  우린 마도대전을 위해 사황
문 전체를 걸었다. 하오밀문 따위완 비교할 수도 없단 말이다."
잔뜩 얼굴이 붉어진 냉운소가 날카롭게 호통을 쳤다.
"아, 됐어! 원래 좆도 아닌 놈에게 치부를 들키면 더 쪽팔린 거니까."
"진정 죽고 싶은 게로구나 놈!"
급기야 냉운소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만하지, 내공도 없는 노인네를 앞에 두고 큰소리 칠  입장은 아니
라고 보는데."
"이런 개…."
"한발만 더 움직이면 이 뼈가 너 애비의 목구멍에  틀어박힌다. 누가
빠를까 냉운소."
우뚝 멈춰선 냉운소를 향해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냉운소를  쳐다보
는 야혼의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살기, 손에 들린 뼈를 냉
운형에게 던져버릴 듯한 모습이었다.
"네 놈은 살아날 수 있으리라 여겼더냐?"
태연한 듯 말하고 있으나 냉운소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설마
하니 아버지를 두고 협박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야혼의 말대로  두 사
람이 싸우게 되면 아버지는 견뎌나질 못한다.
"어째 던져주길 바라는 말처럼 들리네.  하기야, 너에겐 손해는 없겠
구나. 아버지를 잃는 대신 사황문을 얻게 될 테니."
"이-익!"
"그만해라, 자네도 그만하게."
결국 이번에도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은 사람은 냉운형이었다.  냉
운소와 달리 그는 침착한 얼굴로 야혼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들인 냉운소의 완패였다. 심리전에서도, 주변  환경을 이용하는 임
기응변에서도, 평생을 두고 키웠던 아들은 야혼의 상대가 아니었다.
야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건을 말해보게."
"좋소이다, 이제 말이 통하겠군요. 조건은 간단합니다. 이  사황문 가
치의 절반을 돈으로 만들어 주시오."
"그건 너무 무모한 조건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냉운형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호위무사들에게 손짓 한번이면 없
앨 수 있음에도 지금껏 참았던  이유는, 설사 운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공을 인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가 지나쳤다.
그러나 야혼의 얼굴은 태연했다.
"마도련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사황문의 모든  것을 건다 하였던 말
은 장난인 모양이군요. 남 앞에서 말할 때만 그런 식으로  하는 가보지
요. 협상은 없소이다. 이 길로 철마문으로 가겠소."
"멈추게, 자네는 지금 나를 막판으로 몰아가고 있네. 나의 손짓…."
"그럴지도…. 하지만 당신은 물론이고 냉운소  이놈도 죽어. 내가 운
으로 일백마 3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나 당신 아들은 마도련
주 자격이 없어."
"허-억!"
냉운형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그동안 별일 아니라며 넘겼던  일
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것이었다.
사윗감으로 내정되었던 자룡의 죽음부터 시작하여, 자신과  유혁세의
대결, 그리고 동창 첩형임을 밝혔던 고명지.
별개의 사건처럼 발생했지만, 전부가 하나의  고리로 이어지고 있다.
바로 사황문을 마도련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한 절차였던 것이다.
"그럼…?"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냉운형의 귓전에 더욱 엄청난 말이 들려왔다.
"철마문에 가면 제대로 흥정이 되려나 모르겠네. 만수문의 비급은 냉
소소 소유지만 만독문의 그 많은 비급은 주인이 없는 것들이니…."
결정타였다. 온몸을 부르르 떨던 냉운형이 황급히 야혼을 불렀다.
"멈추게! 주겠네. 자네가 원하는 걸 다 주겠네."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만독문과 만수문의 양패구상으로 경황이 없었
다지만 그들은 주인이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비상사태 속에
주인 없는 문파의 지휘는 마도련주가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런 상
태로 일 이 년만 지나면 자연 흡수되게 될 것이다.
"아버님!"
냉운형의 말에 기절할 듯 놀란 사람은 냉운소였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던 탓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마도련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앞에 있
는 야혼이란 녀석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냉운형은 야혼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조금 손해본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문주님  말씀대로
하지요. 일단 문주님이 차용증을 써 주십시오. 보증인은 아드님으로 해
주시고요. 그런 다음 동창 첩형의 공증을 받겠습니다. 지불은 마도대전
이 끝남과 동시에 지불하기로 하지요. 대금 지불이 늦어지면 이자는 월
1할로 하겠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철저하군, 좋네. 그렇게 하도록 함세."
나직하니 신음을 흘린  냉운형이 재빨리 지필묵을  가져와 차용증을
작성했다. 야혼의 주장으로 큼직하게  쓰여진 차용증의 맨  마지막에는
문주 인장과 더불어 두 사람의 장인이 선명하게 찍혔다.
하지만, 글을 쓰는 냉운형이나,  손바닥 인장을 찍었던  냉운소는 글
중간에 있는 사황문 재산의 절반이란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서둘러 계약서를 작성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아무런 생각  없이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동창 첩형을 만나러 가야하기 때문에."
"약속 잊지 말게."
"걱정 마십시오, 문주님. 제가 처음 이곳에 방문할 때 그러지 않았습
니까. 냉소저에게 목숨을 구해  받은 은혜를 갚겠다고.  다행이 원하는
대로 된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두 사람을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마치 빚을 받게 되어 감사하다는 얼굴로.
"그럼 다음에 또 이용…. 이건 아니군."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야혼이 재빨리 밖으로 나
가 버린다.
"아버님! 정말 저자에게 사황문 재산 절반을 줄…."
"참 이 말을 안 했네. 두 분이 서명하신  이 문서는 고명지 그년, 아
니 동창 첩형이 정식문서로 보관하게 될 겁니다. 고명지 그년은  내 말
이라면 끔뻑, 아시죠?"
두 사람을 향해 말을 남긴 야혼이 총총 사라졌다.
"빌어먹을…."
냉운형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아버님! 지금 저자의 말은 거짓입니다. 동창  첩형을 년이라 부르면
우리가 말을 잘 들을 거라 여기고 하는 말이 분명합니다."
"처음이 아니다."
"네?"
"저 녀석이 동창 첩형을 년이라 부른 게 처음이 아니란 말이다."
그랬다. 야혼은 고명지를 년이라 부른  적이 있었다. 2달 전,  암흑루
연무장에서 그의 별호를 흑돈이라 하였을 때 분명 년이라 하였다.
더구나 년이라 부르는 야혼의 호칭에 대하여  고명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미소까지 짓지 않았던가.
정부가 아니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아니 여자가 남자를 끔찍이  좋
아하지 않으면 결코 묵과하지 않는 호칭이 바로 년이다.
마치 하인처럼 부릴 때나 쓸 수 있는.
"제기랄…."
냉운소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올가미, 빼도 박도  못하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사황문 재산의 절반이라 하였지만 얼마나  될지 자신
조차 알지 못한다. 재산을 평가하는 데만 해도 며칠은 족히  걸릴 터인
데, 현금마저 마련해야 하다니.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천천히 생각하자꾸나, 잃을 걸 생각하지 말고 얻을  걸 생각해
라. 우리가 훨씬 이익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은 일정대로 추진하겠습니다."
"소소에겐 말했느냐?"
"네, 저녁나절에 말했습니다. 내일 비무 해야 하니까 몸을 추슬러 두
라고요."
"그래 잘했구나. 하지만 잘하는 짓인지…."
조금 전 야혼이 했던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사황문의 번영을  위
해 딸을 파는 아버지란 말.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강한 무공과 뛰어난 머리를 가졌기에 어느 곳에  두어도 잘 해나갈 것
이라 여겼다.
만수문의 자룡과의 정혼도 그래서 추진했었다. 물론 사황문을 위한다
는 명목이 더 컸지만, 나이 먹은 과년한 딸을 출중한  청년에게 보내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도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소소야. 이번 한번만 부탁한다."
그러나, 그가 이용하려는 딸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울러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야혼이란 사실도.
"내일 도전자가 누군진 알고 있지?"
"알고는 있는데, 아버지와 오빠가 인정할까 몰라."
냉소소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저녁 무렵 다녀갔던 냉운소  때문
이었다. 오빠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마도련주가 되면 사
황문의 지원은 기대하지 말라고 하였다. 친정에서조차 지원해주지 않는
상황이라면 마도련주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하루종
일 시간이나 끌어."
"근데 꼭 분칠까지 해야하냐?"
"네가 분칠의 효과를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내가 개봉에 있을 때 말
이다,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하고 계집년들에게 접근…. 이건  아니네.
좌우간 창백하게, 최대한 백짓장처럼 해서 놈을 이기라고."
"환자라 속이고 접근하면 금방 넘어오데?"
"당연…, 뭘 그런걸 물어!  좌우간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나
간다."
"야-! 그냥 가면 어떡해."
"그럼 그냥 가지, 자고 가리?"
"너?"
"맞다, 내상을 치료해야 되지. 먼저 가있을 테니까 빨리 와."
냉소소의 콧잔등을 튕긴 야혼이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타릉호 동굴에 흑의를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다. 주변을 훑듯이 살핀
두 사람이 재빨리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참! 고명지가 설치했던 그 진식(陣式) 있잖아 입구에 설치해."
"응! 알았…."
얼굴이 잔뜩 붉어진 냉소소가 머뭇머뭇 진(陣)을  설치했다. 문득 추
기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가장 먼저 실천한  사람이 자신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을 피우기 위한 듯 나뭇가지를 모으는 야혼을 힐끗 쳐다보던 냉소
소가 재빨리 용봉환락무를 운기했다. 내상을 치료한다는 목적으로 왔지
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불귀동에서 야혼의 동굴을 처음 찾았던
그때의 기분이 들었다.
뭉클거리는 백무를 쳐다보던 냉소소가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뜨거운
기운이 몰아치며 온몸이 급격히 달아올랐다.
"야혼!"
"아이구! 뭐가 이리 급해."
냉소소의 부름에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야혼  역시 용봉환락무를 운
기했다. 야혼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요동쳤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둘지 않았다. 백무와 적무 속에서 가만히 응시하
던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두 개의 입술이 하나로 겹쳐들고 그 속에서 서로의 혀가 뜨겁게 얽혔다.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한편이 도망치면 한편이 따라가는 조그마한 입안에
서 무수한 움직임이 일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냉소소의 몸을  부드럽
게 쓸던 야혼의 손에 의해 옷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고,  그녀의 손길에
야혼의 누더기가 내팽개쳐졌다.
"소소!"
"쉿! 나중에, 나중에…."
뭔가 말하려는 야혼의 입을 막았다. 고명지의 말대로 하기로 하였다.
그의 가슴에 들어차 있는 얼음덩어리가 녹을 때까지,  그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야혼의 입술이 가슴에 와 닿는 걸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를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아릿한 아픔과 함께 뜨거운 기운이 확 끼쳤다.
야혼의 몸을 따라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허벅지를 간질이는 그의 손
길을, 엉덩이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끼고 싶은 뿐이다.
"하-악!"
갑작스레 온몸에 불이 확 일었다.  어느새 그의 입술이 아랫배 쪽에
닿아 있었다. 뜨거운 불꽃은  그곳에서 일었다. 그  불길에 화답이라도
하듯 냉소소도 손을 뻗었다. 온통  흉터로 도배된 그의 등을  쓰다듬었
다. 이제는 느낌으로도 알 수 있다. 지금 만져지는 흉터는 채찍에 의해
만들어졌고, 지금 만져지는 흉터는 검상이다.
겨드랑이 쪽에서 만져지는 흉터는 뾰족한 무기가 관통한 흉터.  야혼
의 흉터를 하나씩 탐색하며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허억!"
야혼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레 동작이 빨라진
야혼이 재빨리 냉소소를 뉘였다.
쿠르릉!
백무와 적무가 서로 어우러지며 나온 소리는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
나온 격정적인 신음을 삼켜버린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선  더 이
상 신음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치의 틈도 없이 봉인된 입술 때문이
었다.
냉소소와 야혼의 몸을 감싼 백무와 적무는 어느새 끈끈한 액체로 변
해 있었다. 용봉환락무의 10성 경지였다.
10성에 달한 용봉환락무가 가져다준 효과는 엄청났다. 관계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냉소소의 내상은 말끔히 치유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상
대의 몸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령신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냉소소의
차가운 기운이 야혼의 몸 속으로 밀려들어갔고, 용봉환락무와 태을건곤
심법은 그녀의 내공을 변화하여 다시 되돌려 보냈다.
두 사람의 몸을 넘나드는 내기(內氣)는 파도가 되었고, 그 파도의 끝
에는 쾌락이 남았다.
한 밤에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뿌연 먼동과 함께 끝이 났다.
"오늘은 도망가지 않을 거야?"
가슴에 기대있는 냉소소를 쳐다보며  나직이 물었다. 그녀와 관계가
끝나면 언제나 잠이 들어야 했다.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았잖아."
"그럼 지금부터 잠들도록 해봐야겠네."
쪽!
야혼의 입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냉소소가 몸을 일으켜 옷을 걸쳤다.
야혼의 시선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몸이다.  십만대산에서부터 그
는 줄곧 자신의 몸을 보았던 사람. 몸 속 구석구석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인 게다.
"훗!"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야혼을 쳐다보던 냉소소가 맑은 하늘처럼 청명한
웃음을 남겼다.
"과부로 만들어도 여전히 어렵네. 허미, 내공은 엄청 늘었다."
몸 속에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에 화들짝 놀란 야혼이 재빨리 허리를
더듬었다. 그러다 이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허리 살은 전혀 변화가
없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제길…. 잠이나 자자, 살은 포기 이미 포기했는데 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내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나직하니 코고
는 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일출과 함께 마도대전은 속계 되었지만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달랐다.
두 문파의 멸문이 가져다준 충격 때문인지 조용한 가운데 무인들은 련
주 대행인 종마를 주시했다.
금일 아침에 중대한 발표가 있을 거란 소문이 빠르게 돌았기 때문이
었다. 중대 발표란 다름 아닌 두 문파의 멸망과 함께 공석으로 변한 일
백마 20자리에 관한 사항이었다.
마도대전을 연장할지도 모른다는 추측과,  이번 마도대전 승자가 된
문파에서 선출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왔다!"
군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마를 비롯한 각  문파의 수뇌들이 비무
장에 도착했다.
"방금 각 문파 수뇌들에 의해 논의된 사항을 말씀드리겠소. 마도대전
은 예정대로 내일까지만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단 공석으로  변한 일백
마 자리는 신임 마도련주가 지명하기로 하였습니다."
종마의 말이 떨어지자 무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처방이라 할 수 있었다. 두 문파가 멸망한 시점에서  새로운 일
백마를 뽑는다며 비무를 벌일 수 없는 일이다.
서둘러 마도대전을 끝내고, 신임련주를 주축으로 두 세력이 남긴  상
처를 치유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제 그들의 관심은 두 곳으로 쏠렸다.  철마문과 사황문, 동일한 수
의 일백마를 보유한 두 세력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염노사 저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소."
철마문 진영, 사황문을 지그시 노려보던 유웅창이 염융을 향해  물었
다. 지난 두 달 동안 4문파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던 철마문은  더 이
상 마도대전에 내보낼 무인이 없다.
"저들 또한 별다른 수가 없을 줄 압니다. 냉운소는  10고수에 도전할
실력이 되질 않습니다. 그나마 가장 강력한 도전자가  냉소소일텐데 그
녀 역시 내상이 심해 움직일 기력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럼 마지막에 결판을 봐야 한다는 말인데…."
아침에 논의된 사항은 공석으로  변한 일백마 자리뿐만이 아니었다.
양 문파 문주였던 유혁세와 냉운형은 그대로 두기로 합의를 보았다. 즉
그들에겐 쌍방이 도전을 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물론 요화문주 나령의 반발이 있었지만, 그들에겐 공석인 일백마  20
자리 중 1/3을 주는 것으로 무마시켰다.
"제 생각도 그편이 나을  듯 싶습니다. 지금 사황문에는  문주대행을
앞설 무인은 없습니다."
염융이 확신하듯 말했다. 두 세력에서 최고 고수가 나와 자웅을 결하
는 비무는 마도대전이 동률로 끝났을  경우에 한하여 개최되는 규칙이
있다.
"형님과도 그렇게 이야기했네만 개운치가 않아서 말일세."
수성, 간밤에 유혁세와 협의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남은 이틀동안은
방어만 하고, 마지막 최고수의 비무에서 승자를 결정짓기로  하였던 것
이다.
"그런데 소문주는 어떻게 하기로 하였습니까?"
"외부로 내보낼 참이네. 당분간은  마도련 내에서 보이지 않는  것도
명예회복에 도움이 될 테니까. 물론 내가 신임마도련주가 된 다음에 처
리할 일이겠지만."
유웅창의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어렸다. 어쩌면 올해가 자신의  최고
의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운형의  도전으로 문주였던
유혁세가 재기불능이 되었고, 그  대신 철마문을 이끌어야할  유마혼은
냉소소를 암습하는 바람에 마도련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다.
결국 철마문을 이끌어 갈 사람은  자신밖에 남지 않은 게다. 더하여
마도련의 신임련주 자리까지. 생각지도 않은 운이 굴러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마도련주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을 그리던  그의 환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비무대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온 여인 때문이었다.
"사황문의 무면미봉(無面美鳳) 냉소소(冷素素), 일백마 서열 6위 검왕
(劒王) 유웅창(劉雄蒼) 대협께 도전하겠습니다."
"뭣이?"
유웅창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전혀 예기치 못한 도전에 어안이  벙벙
했다. 불과 하루전날만 해도 거동조차 하지 못했던 냉소소였다. 그랬던
그녀가 도전이라니.
다시 하번 비무대에 올라온  냉소소를 쳐다보았다. 면사를 벗어버린
맨 얼굴의 그녀는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내상이 완전하게 낫지 않
았다는 반증인 게다.
"설마, 부상당한 딸을 미끼로 마도련주가 되고자 하였더냐!"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비단 비무  당사자인 유웅창뿐만은 아니
었다. 창백한 냉소소의 얼굴을 쳐다본 대부분의 무인들이 혀를 찼다.
"세상에, 정략결혼을 빙자하여 딸을 팔더니,  이제는 사지로 밀어 넣
는구먼."
"잔인한 사람들이구먼. 아무리 첩의 자식이라도 그렇지 딸을  미끼로
삼다니…."
비무장을 주시하던 무인들의  적의 가득한 시선이  사황문 천막으로
향했다.
"이런…, 빌어먹을."
냉운소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동생인 냉소소가 유웅창을 비무상대
로 지목했다는 사실보다 주위 시선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철마문이나 요화문 무인뿐만 아니라, 부하들인 사황문 무인조차 적의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아미타불! 이러다 정말 큰일나겠소이다, 문주 대행."
나직하니 불호를 읊조린  추기영이 벌떡 일어나  비무장 가장자리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전면을 향해 목청껏 외쳤다.
"이곳에선 어떤 암수나, 비겁한 짓도 허락된다고 하였소이다. 냉소저
는 남이 아니외다. 다른 사람의  자식도 아니고 자기 자식을  희생시켜
마도련주가 되겠다는데 그게 왜 욕을 먹어야 하는 거요. 그녀가 사황문
을 위해 한 일이 뭐가 있소. 무공이 부족한 것 같아 강해지라고 십만대
산에 보냈소. 그녀는 고마운 마음에 성모궁에서 10권의 비급을 들고 왔
소. 그 비급으로 부하들을 훈련시켜 이번 마도대전에 참가한 거요."
추기영의 말에 군웅들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연환마장 육반성
의 40년 아성을 무너뜨린 투견공을 보았다. 그런 무공이 사황문에 10가
지가 있다는 말이다. 이번 마도대전 동안 사황문의 약진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을 향해 추기영의 말이 이어졌다.
"딸이 얼마나 장하였겠소. 그래서 딸의 공을 치하하고자 시집을 보내
기로 한 거요. 아버지가 신랑감까지 골라서  말이오. 물론 지금은 신랑
이 뒈져 과부가 되었지만. 그 모든  일은 그녀를 위해서였소. 냉소저가
잘되라고 하는 일 말이오. 그녀에게 뭔가를 요구한 건 이번이 처음이란
걸 아셔야 하오. 부상당한 딸마저 이용해야 하는 사황문의 입장을 여러
분은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면…, 마도련주는 사황문 부자의 꿈이기 때
문이오, 아미타불!"
유창하게 일장 연설을 끝낸 추기영이 싱긋 미소를 머금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죽일 듯이 노려보는 냉운소를 향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냉소협 제 말이 먹힌  모양입니다. 군웅들이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습니까. 사황문의 꿈이란 말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맞다, 육승. 난 지금도 가슴이 벅차. 300년 사황문의  꿈이라 하였을
땐 눈물이 쏟아지려 그랬어."
"허미, 니미럴타불! 300년을  빼먹었다. 가장 결정적인  말을…. 가만
다시 올라가서…."
"됐네 됐어, 육승.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있는  사람들이 안
보이는가. 사람 그만 울려라. 어차피 냉소저도 올라갔는데 비무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철마문 소속 검왕 유웅창 도전을 수락하오."
어색한 얼굴의 유웅창이 수락 선언을 하였다. 상대가 부상당한  환자
라 하여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조금 전 하오밀문의 중  녀석이 했던 말처럼 그녀는  오직 사황문의
두 부자에게 이용만 당하며 살았다. 성인이 돼서도 그런 대접을 받았는
데 어린 시절에는 오죽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투지조차 일지 않았
다.
하지만, 이 비무는 개인으로  승부를 결하는 자리가  아닌, 철마문과
사황문의 결전. 결코 봐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굳은 얼굴로 냉소소 앞으로 다가간 유웅창이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도 너를 비난할 사람은 없다. 그만 내려가도록 하거라."
"글쎄요. 아직은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
다."
검을 뽑아든 냉소소가 공손하게 포권을 취했다.
"한령신공을 펼칠 정도도 되지 않는단 말이냐?"
겁천십웅의 무공인 한령신공  대신 검을 뽑아드는  냉소소의 행동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냉소소는  빙긋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좋다! 야속타 원망하지 말아라. 일단 검을 뽑으면 용서가 없다."
굳은 얼굴로 냉소소를 쳐다보던 유웅창이 검을 뽑아 들었다. 얼만 전
까지 유혁세의 검이었던, 철마문 문주 신물인 철장검이었다.
"저를 무인으로 보아주시길…."
나지막이 중얼거린 냉소소가 수중의 검을 가슴 중앙으로 세웠다.  그
녀의 몸에서 뿌연 운무가 뭉클거리고 쏟아져 나오더니 가슴 중앙에 세
운 검이 붉은 꼬리를 뽑아 올렸다.
"저건…. 남궁세가의 검법인 무적제왕검형(無敵帝王劒形)의 기수식이
다!"
냉소소의 검법을 알아본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  추기영이
했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남궁세가의 독문검법을  펼친 것이
었다.
"하지만 지금 이 검법의 이름은 제왕혈세검(帝王血世劒)이라  불립니
다. 제왕혈세멸(帝王血世滅)!"
수직으로 1장 가량 떠오른 냉소소가 유웅창을 향해  수중의 검을 힘
차게 휘둘렀다. 제왕혈세검의 1초인 제왕혈세멸은 검기를  폭풍처럼 쏘
아 내는 검법이었다. 그녀의 검에서 만들어진 검기 덩어리가 무서운 속
도로 쏘아져 나갔다.
"나는 철혈무적검법 한가지 밖에  익히지 못했다. 그러니 네가  이해
하거라. 혈풍무적강(血風無敵 )!"
나직한 외침과 함께 유웅창이 검에서 솟구친 1장  길이의 검강이 냉
소소가 쏘아보낸 붉은 검기들을 소멸시켰다. 차마 공격을  가하지 못하
겠는지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냉소소의 일갈은 더 이상 태만하지 못하게 하였다.
"제왕혈세파(帝王血世破)! 제왕혈세폭(帝王血世暴)!"
순식간에 10장 높이로 올라간 냉소소가 아래쪽으로  내리 꼽히며 연
거푸 두 초식을 펼쳐냈다. 그녀의 검에서 나온 검법 또한  강기의 경지
였다. 온통 주변이 붉은 강기로 가득 들어찼다.
"굳이 피를 봐야겠단 말이더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유웅창이 내공을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철
혈무적검법이 겁천십웅의 무공이라지만 남궁세가 무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철혈무적검법은 완전한 검법도 아니질 않는가.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혈풍무적강(血風無敵 )!"
조금 전과 같은 초식이었지만 그 위력은 천양지차였다. 비처럼  쏟아
지는 붉은 기운을 향해  철장검이 무수한 원을 그리자  커다란 방패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슈캉! 카가강!
두 사람의 중앙에서 붉은 기운이 파도처럼 퍼져나가고, 그  반탄력으
로 냉소소와 유웅창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한번 터진 냉소
소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5장여를 밀린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터지고 아미파의
대표검법인 대라수미혜검이 펼쳐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대라수미혜
검이 끝나자 무당의 청운검법이 군웅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소림의 무영각이 허공을 갈랐고,  철장신마의 철장마공이 선을 보였
다. 그녀의 손에서 나오는 모든 무공이 성모척살대의 초절기들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무인들은 숨을 죽였다. 일방적으로  밀릴
거라 여겼던 냉소소가 대등한 비무를 이끌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연신 고함을 지르며 반격하는 모습은, 알 수 없는  감
동을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냉소소가 이기길 바라는  무인들마저 생겨
나고 있었다. 냉소소가 비틀거리면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고, 다시 힘을
모아 반격을 가하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세기가 약해, 차라리 하나만 집중적으로 연마하여  완성했더라면 불
완전한 철혈무적검법에 밀리진 않았을 텐데…."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종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처음  대등하게
보였던 비무는 3시진 째 접어들면서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였
다. 냉소소가 펼치는 무공에 점점 적응되어 가는 유웅창이 승기를 잡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3년이란 짧은 시간동안 저 많은 걸  전부 연성해 낸다는 것
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하여간 야혼 네 녀석은….'
내심 감탄사를 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다가
냉소소의 승리로 끝난다면 마도련주는 그녀가 될게 분명했다.
아니 그녀가 거부해도 마도련주로 추대할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올 성모척살대의 무공을 얻기 위해선 그 수밖에 없음으로.
이 모든 게 하오밀문 삼인방과 냉소소가 꾸민 일이다. 항상 같이  있
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한 사이에.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리 없는 나머지 일행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
다.
"쯧쯧! 냉운형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저런 엄청난 인재를 곁
에 두고도…."
도마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비롯한 대부분
의 무인들이 느끼는 바였다. 유혁세와 냉운형이 없는  상황에서 마도련
의 1인자는 유웅창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를 상대로 냉소소는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더구나 내상을 당한 그녀가 아닌가.
최고의 인재를 곁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냉운형이 바보처럼 느껴
졌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입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발견한 종마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상이 더욱 심해졌다는 의미이리라.
"저랑 내기하시겠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대인."
고명지의 말에 종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분명 비무장에 있는 두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유웅창의 승리
를 점칠 수 있는 상황에서 내기를 하자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저는 냉소저가 이긴다에 2만냥을 걸겠습니다."
2만 냥은 종마가 야혼에게 주기로 하였던 이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대인의 의도는 알겠지만 저희는 걸게 없습니다."
곤혹스런 얼굴로 쳐다보는 종마를 대신하여 곁에  있던 도마가 말을
받았다.
"돈은 없을 테니 안되겠고,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냉소저
가 이기면, 그녀 곁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 말입니다. 마도련주가 되던
안되던…."
"그거 괜찮은 내기군요. 종마는 죽었다 깨어나도 2만냥을  벌진 못할
테고…. 어떤가 종마, 이 기회에 2만냥을 벌어서 그 개차반에게 줘버리
는 것이. 새로운 련주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자네 지금 대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의미는 무슨, 마천루에서 먹던  밥을 만수문에 가서 먹어야  한다는
말이지. 그리고 마천루는 양홍기 그놈 혼자 지켜야 하고. 저 아이가 이
겼을 때 이야기지만."
연신 비틀거리며 밀리는 냉소소를 가리켰다. 금방 끝나리라는 종마의
예상을 뒤엎고 그녀는 아직 버티고 있지만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아마 첩형소저께서 자네를 도와주려고 내기를  하자고 한 모양이구
먼. 어쩔 텐가? 나는 찬성일세."
"나도 찬성일세!"
"그거 재미있겠네, 나도 찬성이네."
"나도…!"
도마와 검마가 찬성의 의사를 밝히자 나머지  원로들도 그들을 따라
내기에 응해버렸다.
"좋소이다, 대인. 내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허락하는 걸로 알고 문서를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아니외다. 계약은 매사에 확실히 하는  게 좋습니다. 냉소저가 졌을
때 제가 오리발 내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종마의 말에 싱긋 미소를 머금은 고명지가 옆에  있던 붓을 들고 빠
르게 글을 써내려 갔다.
"제가 먼저 서명하겠습니다, 대인."
이번에도 역시 도마였다. 고명지가 쓴 문서 아래쪽에 별호와  이름을
쓰고 검마에게 붓을 넘겼다.
'훗! 벌써 도마(刀魔)까지 꼬드겨 두었구나. 하기야 한집안이니까.'
적극적으로 나서는 도마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
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도마와 그의  제자인 기천세 또한 도백
회 인물이었다.
'이 물귀신 같은 놈아! 마천루가 싫으면 그냥 떠날 일이지 왜 우리를
전부 물고 들어가!'
마지막으로 붓을 잡은 종마가  도마를 향해 잔뜩 불만  어린 전음을
보냈다.
'이 친구야, 자네도 양홍기 그놈이 해준 밥은 지겹다고 했지 않은가.'
'그래도 하오밀문 그 개차반보단 양홍기의 모래밥이 더 나아.'
늙은 생강이 맵다는 속담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껏 냉소소
를 동정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원로들이 내기라는 고명지의  말에, 상황
을 금방 알아차린 것이었다.
냉소소는 결코 내상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런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원로들뿐만이 아니었다. 비무 당사자인
유웅창 또한 냉소소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기절하겠군. 그럼 지금껏 마도련 전체를 속이고 있었단 말인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쳐다보며 허탈한 듯 말했다. 초반엔  냉소소
를 동정하는 마음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갈수록 힘든 표정은 지었지만 단지
얼굴만 그랬을 뿐이었다. 냉소소의 손에 들린 검은 단 한번도  힘이 줄
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 종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께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니까요."
"허허! 냉대협은 분에 넘치는 딸을 두었군.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다.
나를 이겨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냉소소가 수중의 검을 비무장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는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으음!"
온통 백색으로 변해 가는 냉소소의 모습에  유웅창이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한령신공이 운기됨에 따라 그녀의 몸에서 폭발적인  한기가 쏟
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하늘로 치솟은 그녀의 머리칼이  백색으로 변
함과 동시에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비무장을 강타했다.
"한옥백마수(寒玉白魔手)!"
가슴 앞에 모았던 양손을 빠르게 내밀자  그곳으로부터 백색 투명한
강기가 유웅창의 전신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타핫!"
차가운 한기에 대항하기 위해 순식간에 진기를 일주천시킨 유웅창의
입에서 광폭한 고함소리가 터졌다. 하루 종일 수십 번을 펼쳤던 혈풍무
적강이었다. 점심나절에 펼쳤던 때보다 색은 약해졌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의 철장검에서 솟구친 검강이 백색 강기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
았다.
쿠아앙!
"커억!"
"한옥빙마수(寒玉氷魔手)!"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는 유웅창을 향해 한령신공 2초를 무자
비하게 펼쳤다. 계속된 격전으로 그녀의 몸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승
기를 잡았을 때 서둘러 끝내야할 필요가 있었다.
냉소소의 손을 떠난 백색 강기가 일순 투명한 화살처럼 변하더니 유
웅창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혈풍무적탄(血風無敵彈)!"
수비형태로 초식을 바꾼 유웅창이 전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철장
검을 휘둘렀다. 검탄강기를 이용한 방어막이었다.  그의 검에서 흘러나
온 붉은 강기가 하나씩 떨어지는가 싶더니 붉은 방패가 만들어졌다.
그곳을 향해 냉소소가 쏘아보낸 백색 투명한 강기 화살이 작렬했다.
"크으윽!"
급기야 유웅창의 입에서 피가 넘어오기 시작하였다. 더하여 그의  신
형이 자꾸만 뒤로 밀렸다. 냉소소의 양손에서 튀어나온  투명한 화살은
끊임없이 강기막에 부딪쳤다.
"이야합!"
이번엔 붉은 낫이었다. 낫 모양으로 구부러진 붉은 강기가  철장검으
로 만들어진 강기막을 향해 폭풍처럼 몰려들었다.
쿵쿵쿵! 쿵쿵쿵!
끊임없이 밀리던 유웅창의 신형이 결국 비무대 끝으로 몰렸다.  그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방법이 없었다.  냉소소가 한령신공을 끌어올
리는 순간부터 밀리기 시작하여 단 한번도 공격하지 못했다. 오직 뒤로
밀리다가 이곳까지 오고 만 것이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녀의 머리에 지고 말았다. 비무에 이기는  방법
은 두 가지다. 상대를 쓰러뜨리는 방법과,  비무대 밖으로 상대를 밀어
내는 방법.
냉소소가 택한 방법은 후자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입술을 질끈 깨문 유웅창이 수중의 검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현실을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 내공을 집중시킨  검을 힘차
게 뿌렸다.
그러나.
그 상황 또한 냉소소의 의도 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유웅창이 내공을 일주천 시키는 짧은  틈을 이용하여 냉소소의 오른손
이 허공을 쳤다.
한옥광마수(寒玉狂魔手), 한령신공의 마지막 4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냉기였다. 유웅창의 검이 들려지며 생긴 허점을  무형의 냉기가
파고들었다.
"커-억!"
가슴에 와 닿는 엄청난 충격에 유웅창의 신형이 비무대 밖으로 가랑
잎처럼 날렸다.
비무의 끝, 어쩌면 마도대전의 마지막 비무가 될지도 모르는 두 사람
의 대결은 냉소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또 다시 찾아온 이변에 정적이 찾아 들었다. 냉소소의 실력이 유웅창
보다 위라 여겼던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더구나 내상까지 당했던 그녀
가 아닌가.
뎅!
"아미타불! 승패를 떠나 멋진 비무를  보셨으면 박수라도 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하오대문의 떨거지는 개안한  기분입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명 승부였습니다."
"맞소이다. 이 유웅창이 무공을 익힌 이래 가장 멋진 승부였소. 패했
지만 후회는 없소이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 감사합니다."
추기영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선 이는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던 유
웅창이었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냉소소를 향해  포권을 취하
며 패배를 시인했다.
"와-아!"
유웅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중석 이곳저곳에서 함성소리가 울
려 퍼졌다. 철마문 무인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철마문 최고수가 패했다는 생각도 잠시 하루 종일 열심히 싸웠던 두
사람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동안 하오밀문 삼인방으로 인하여
엉망으로 변했던 마도대전이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정당한 승부와, 패배의 시인은 두 사람의 영웅을 만들어내기엔  충분
했다.
하지만, 냉소소의 승리를 모든 무인들이 반기며 축하해 주는 건 아니
었다. 한 사람, 사황문의 승리를 가장 기뻐해야 할 냉운소는 잔뜩 구겨
진 얼굴로 자리로 돌아온 냉소소를 노려보았다.
"쯧! 냉소협은 사황문의 승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가 봅니다 그려."
냉운소의 얼굴을 살피듯 쳐다보던 야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나. 소소의 승리가 너무 의외라서 그런 거라네."
서둘러 표정을 수습한 냉운소가  더듬거렸다. 간밤에 세웠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변해버렸다. 동생인 냉소소가 승리해버렸으니  자신이 도전
할 상대가 없다. 일백마에 들지 못하면 마도련주 자리는 물론이고 사황
문의 문주 자리도 위태롭다.
"그건 나하고 같구먼. 나도 댁과  같았네. 설마하니 냉소소가 유웅창
을 이길 줄이야. 아마  유웅창이 실수했을 걸세. 어찌  되었던 좋은 일
아닌가. 내일만 잘 버티면 사황문이 승리하게 되었으니. 참! 내일은  태
웅과 내가 시간을 끌겠네. 적당한 상대를 붙여주도록 하게."
'이 자식이?'
느닷없이 반말로 나오는 야혼의 어투에 냉운소의  입꼬리가 슬쩍 말
려 올라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황문 무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뭐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 내심으론 이를  갈지언정 지금은 웃어야 할  때였
다. 냉소소의 승리를 축하하며.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자네들 명예에 누가 되지 않을  정도의 인물
을 붙여주도록 하겠네. 기대해도 좋을 걸세."
냉운소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문득 위기를 빠져나갈 방법이  생각났
다. 마도련 일백마에 대한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냉운소라는 이름을 알
릴 방법이.
부자는 닮아야 해.
냉소소의 승리로 인하여 사황문은  축제 분위기였다. 아직 하루라는
시간이 남았지만 철마문  최강자인 유웅창을 이겼다는  사실이 그들을
들뜨게 하였다. 실내에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은 밝은 얼굴로 술을 마셨
으나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냉운형과
냉운소 두 부자였다.
"공연한 짓을 했어."
냉소소를 쳐다보는 냉운형의 얼굴에 잔뜩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사
실은 지금 연회도 그가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
야혼을 비롯한 삼인방이 유웅창을 이긴 역사적인 날이라며, 잔치라도
열어야 할 것 아니냐고 적극 주장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일
이었다. 일백마에 들었던 무인들을 전부 암흑루 연회장으로  불러 조촐
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해달라 했는데 그렇게 힘들었더냐?"
그의 걱정거리는 다음날 있을 비무가 아니었다.  마도련주로 만들고
자 하였던 아들의 입지가 좁아진  사실이 못마땅했다. 그것도 딸에  의
해. 낮에 있었던 냉소소와 유웅창의  비무에 대해 듣고 얼마나  놀랐던
가. 다른 사실을 다 젖혀두더라도, 소소가  마도련 최고 인물로 등장하
는 바람에 아들인 냉운소를 영웅으로 만들 방법이 없다.
마지막 한가지 방법은 남아있지만, 냉운소가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유웅창을 이긴 냉소소만 하겠는가.
냉운형이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아이고, 문주님도 죽을 쌍이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약속
한대로 사황문은 마도련의 주인이 될  테니까. 어떻게 다스릴 건지  그
연구나 하시오."
어색한 얼굴로 앉아 있는 냉소소 곁에 털썩 주저앉은 야혼이 냉운형
을 향해 말했다.
"우리 가족끼리 이야긴데 좀 비켜주겠나?"
냉운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자신을 파렴치한 아버지로 만들어
버린 자, 무공만 잃지 않았다면  한방에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바로 야혼 일행이었다.
하루라는 일정이 남지 않았다면 연회에 참석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야혼은 비킬 생각이 없는지 냉운형과 냉운소 부자를 빤히 쳐
다본다. 그리고는 낮게 말했다.
"어쩔 때 보면 당신네들은 가족인가 의심스러워. 꼭 지금  그런 이야
기를 해야겠어? 내상 당한 딸을  붙잡아두고 싶냐고. 혹시 계부  아냐?
아니 계부라도 당신같이 하진 않아."
참으로 대단한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웅창과 비무를 벌였던  냉
소소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내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붙잡아 두고
하는 짓이라니. 승리를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쉬게는 해주어야 할 게 아
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부자는 그녀를 질책하고 있다.
진정 친아버지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혹시 말이오. 이 상태로 냉소저가 무공이라도 잃기를 바라는  게요?
그럼 댁의 잘난 아들이 마도련주가 될 것 같아서."
"닥쳐라 이놈! 더 이상 나서면…, 죽여버린다!"
갑작스런 냉운소의 고함에 연회장  안이 찬물을 듯 끼얹은 조용해졌다.
영문을 알지 못한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석으로 향했다.
"길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줍듯  주운 일백마 자리를  저들과 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알아들어? 네 놈은  말이야, 돈 값만 하면 되
는 게야. 우리 사황문에서 지불하는 돈 말이야."
부하들의 시선을 의식한 냉운소가 야혼의 볼을 툭 치며 낮게 말했다.
그러나, 돈이란 냉운소의 말을 다른 무인들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야혼을 바라보는 부하들의 눈길이 차가워졌음을 느낀 냉운소가 비릿
한 조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이번엔 야혼이 아닌, 냉랭한 얼굴로 하오밀문 삼인방을 쳐다보는  부
하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지금 현실이 우리 사황문의 처지다. 이 따위 떨거지들에게까지 도움
을 청해야 할 정도로 초라한 지경이란 말이다. 하지만, 우린 해냈다. 여
러분의 힘으로 마도련의 주인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여기  이자들이 아
니라 너희들의 힘으로…."
선입관은 참으로 무섭다는 게 지금과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말인지.
지금껏 야혼일행을 향해 선망의 눈빛을  보내던 사황문 무인들이 냉운
소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일부는 나직하니 욕설마저 뱉어내며  야혼 일행을 노려보는
자도 있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비열한 짓을 한 놈들이라며.
'놈! 네 놈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오밀문 종자라는  사실은 결코 변
하지 않는다. 저들에게 강호  거대문파인 사황문 일원이라는  자존심을
심어주기만 하면 네 놈은 곧 잊어버린단 말이다.'
부하들의 반응을 쳐다보던 냉운소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대로 되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부하들의 머릿속에선 그동안  하오밀문
삼인방이 이루어냈던 승리는 사라지고, 그 승리를 위해  행했던 비겁한
짓만 남게 된다.
"그렇군, 당신들의 힘으로 마도련 주인이 된 것 맞지. 하지만, 태웅과
내가 빠져나가도 당신네 사황문이 마도련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주변의 냉랭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야혼의 얼굴은 태연했다.
오히려 싱긋 미소를 지으며 냉운소를 직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냉운소, 일이란 말이야 너무 서두르면  언제나 탈이 나게 되어있다.
마도대전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었구나.  하루라는 시간은
운명을 바꾸기엔 충분하다는 사실도. 좋다, 네 말대로 그만 꺼져주마."
"허억, 막아!"
해쓱해진 냉운소가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랬다. 놈의 말처
럼 아직 마도대전은 끝나지 않았다. 놈이 사황문에서 제시했던 돈을 포
기해버리면 마도련의 승자는 철마문으로 바뀐다. 그 점을  망각하고 있
었다.
냉운소의 외침에 사황문 무인들이 재빨리 입구를 막아섰다.
"쿡! 웃기는 새끼들이군. 우리가 일백마 서열 2, 3위를 줍기 전에, 도
전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를 않아."
쿠웅!
사태를 관망하듯 쳐다보던 냉운형의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그랬
다. 자신뿐 아니라, 마도련 무인 전체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사실.
두 사람이 도전하기 전에는 누구도 자능한과  갈융이 동귀어진 했다
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결국  야혼과 태웅은 자능한과 갈융을  감당할
자신이 있던지, 아니면 죽지 않을  정도의 무공을 갖췄다는 의미인  게
다. 죽을 줄 알면서 도전하는 사람은 결코 없기에.
"멈추어라!"
금강철피공을 끌어올려 검게 변해 가는 야혼을  보고 급하게 소리쳤
다. 하오밀문 삼인방을 제압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들 때문에 야기될
희생이 걱정되었던 탓이었다.
혹여 암흑루의 소란이 담을 넘어 철마문에  들어간다면 내일의 상황
은 불 보듯 뻔하다. 사황문의 패배가 눈앞에 그려졌다.
"모두 물러가라!"
"아니오, 할말 있으면  부하들이 있는데서 하시오.  유혁세가 잠들기
전에 만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오이다."
"으음!"
냉운형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뿐만 아니었다. 야혼
의 앞을 막아섰던 자들 대부분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앞에 있는 두 사람의 행동여하에 따라  마도대전
승부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미안하게 되었네, 내 아들이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그런 것 같은
데 자네가 이해하게."
"아버지!"
"닥치지 못할까! 다 잡은 승리를  놓치고 싶은 게냐? 우리 사황문의
사활이 저들에게 달렸다는 사실은 진정 모른단 말이더냐?"
냉운소를 향해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마치,  사황문이 지면 그 모
든 책임이 아들인 냉운소에게 있다는 듯.
'이것 보게 연작문주, 저 늙은이가 우릴 완전히 병신 취급하네  그랴.
제 아들을 꾸짖는 것처럼 하면서 우린 천하없는 악당으로 만들어 버렸
구먼. 저 비굴한 표정을 짓는 얼굴 좀 보게.'
냉운소를 가만히 쳐다보던 추기영이  야혼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의
말 대로였다. 사황문 무인들의 표정으로 보건대 하오밀문  삼인방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는 듯 하였다. 세 사람을 향한 무인들의  시선에는 적
의가 가득했다.
'상관없어.'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간절한 얼굴로  쳐다보는 냉운형에게 나
지막이 말했다.
"어차피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하겠소. 조금 전 저놈의  말 때문
에 값이 올랐소. 나에게 주었던 돈의 절반을 더 주시오. 그럼 철마문으
로 가는 걸음이 멈춰질지도 모르오. 반  시진을 기다려 주겠소이다. 그
럼!"
"멈추게!"
"멈추시오!"
냉운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황문 무인들이  야혼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추기영의 손에서 울린  철탁소리는 그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데-엥!
"크윽!"
"커억!"
일행을 막아섰던 사황문 무인들이 머리를 감싸쥐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특히 무공을 잃은 냉운형의 충격은 그 누구보다 컸다.
백짓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울컥 피를 토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추기
영의 엄한 훈시가 이어졌다.
"자고로 돈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하였소.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가진 자는 베풀라 하였고, 능력이 있는 자는 그 힘을 아끼지 말라 하였
습니다. 소승은 지금 힘을 쓰고싶다는 생각이 마구 치밀어 오르고 있소
이다. 부디 저를 자중하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미타불!"
추기영의 나직한 불호를 끝으로 하오밀문 삼인방이 연회장을 나섰다.
"아버님!"
냉운형을 부축하는 냉운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 또 다시
놈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비열한 인간으로 만들어 밑바닥까지 끌어내리
는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약점을 잡혔다.
절반, 남은 사황문의 재산의 절반을 또다시 요구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처 죽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더욱 화가 났다.
"가서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이왕 준  돈인데…. 그리고 계약서는 소
소 네가 가져다 주도록 해라."
"아버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제가 가서 잘 말해보겠습니다."
냉소소 또한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야혼이 어느 정도 돈을  요구했
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아버지나 오빠가 허락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
었다. 그랬던 상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아니다, 됐다. 말이 통하는 놈들이 아니다. 뭐하고 있느냐 지필묵 가
져오라니까."
"알겠습니다, 아버님!"
'두고보자 개자식! 네 놈만은 반드시  없애주겠다. 우리 사황문을 우
습게 보았다는 말인데, 내일이면  얼마나 잘못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지필묵을 가지러 가는 냉운소의 온몸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줄기줄
기 쏟아져 나왔다.
야혼에 대한 분노는 사황문의 장자인 냉운소만  가지는 감정은 아니
었다. 마천루 지하 석실에서도 분노에 찬 함성을 지르는 이가 있었다.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 있는 인물, 추방자 명단에 올라있는  유마혼이
었다.
"야혼 이놈! 네놈만큼은 반드시 갈아 마시고 말 테다. 두고 봐라,  이
놈!"
내공이 폐쇄 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유마혼의  몸에선 전율적인
살기가 흘러 넘쳤다. 지하 석실에 갇혀 있으면서 그때와 상황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결코 그렇게 분노할 상황이 아니었다.
단지 한마디 때문이었다. '좆됐다 임마' 라고 하였던 야혼의 말.
과거 성모궁 입구 철탑 앞에서 들었던 말과 같았다. 냉소소가 일어나
자 그녀 곁으로 다가서며 이죽거렸던 그 말.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껏 눌러 참았던 노화가  폭발하였고 이성을
잃었다. 그 모든 게 야혼 놈의 농간이었다. 개처럼 기어가게 하였던 복
수를 그런 식으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유마혼이 여기서 끝난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놈. 반드시
재기하고 만다. 그래서 네 놈의 사지를 부러뜨려 정말 개로  만들고 말
것이다. 하늘에 대고 약속한다 야혼."
"그렇게 하려면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으응?"
귓전에 들려온 느닷없는 소리에 유마혼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지
난 10일간 밥을 가져다준 양홍기를  제외하곤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던
곳인데.
"누구십니까?"
검은 복면을 쓰고 나타난 인물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이곳에서 살아나는 것보다 내 정체를 아는 게 더 중요하더냐?"
"쿡! 댁이 아니라도 나는 살아날 자신이 있소이다."
"양홍기가 말을 안한 모양이구나. 너 애비는 냉운형과 양패구상(兩敗
俱傷)하여 내공을 잃었다, 그리고 너의 삼촌인 유웅창은…."
"그게 사실이란 말이오, 정녕 사황문이 이기고 있단 말입니까?"
유마혼이 경악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자신이 이곳에 올 때만 하
여도 2자리를 이기고 있었다. 지키기만 하여도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
고, 마도련주로 등극한 아버지가 구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랬었는데.
"사황문에서 마도련주가 나오면 너는 영구 추방된다. 물론 내공은 전
폐될 테고. 아참 이  말을 안 했구나, 너의  삼촌인 유웅창이 철마문의
문주 대행을 맡고 있다."
"빌어먹을…."
유마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삼촌인 유웅창의 야심은
자신도 알고 있다. 기회만 생기면 철마문의 문주가 되고자 하였던 그였
고, 능력 또한 갖추고 있다.
결국, 사황문이나 철마문 양쪽에서 공히 필요 없는 사람이 바로 자신
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하여 앞에 있는 복면인을 믿고
따를 순 없는 일이다. 오히려 삼촌인 유웅창보다 더욱 모르는  자가 그
아닌가.
"일단 이걸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꾸나."
여전히 의심스런 얼굴로  쳐다보는 유마혼 앞에  왼팔을 들어올린
복면인이 자신의 오른손으로 힘차게 내리쳤다.
툭!
"헉!"
팔꿈치 부분을 잘라내는 괴인의 행동에 질겁한  유마혼이 비명을 내
질렀다. 느닷없이 나타나 살고 싶냐고  물었던 자가 제 팔을  잘라내다
니. 도무지 복면인의 의도를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복면인의 잘린 팔을 똑바로 쳐다보던 유마혼의 두 눈이 점차
커지더니 이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매끈하게 잘린 그곳으로
부터 부글부글 거품이 일더니 점점 길어나는 것이었다.
"세상에…."
비릿한 혈향이 풍기는 걸 보면 분명 꿈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어떻
게 잘린 팔이 다시 자라난단 말인가. 눈앞에서 바로 보았으니 속임수라
할 수도 없다. 기절할 지경이었다.
"네가 한번 잘라보겠느냐?"
"아닙니다. 지금 본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다, 한번 잘라보거라. 선택은 신중할수록 좋은 거니라."
유마혼 앞으로 다가온 복면인이 방금 생겨난 팔과 함께 시퍼런 날이
번뜩이는 검을 내밀었다.
"지금 너의 상태론 자르기  힘드니까 내가 도와주마,  이 손을 잡거
라."
"괜찮습…."
하지만 유마혼의 의사와는 달리 하나밖에 없는  그의 오른손은
상대의 팔을 잡고 있었다. 왠지 시키는 대로 해야할 것만 같은 생각
이 들었다.
그의 팔을 잡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잘 보거라!"
싱긋 미소를 머금은 복면인이 들고 있던 검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일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는 건 그의 생각뿐이었다.
부릅뜬 두 눈은 여전히 자신의 오른손을 노려보고 있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복면의 팔은 가루로 흩어지고 그의 왼팔엔 붉은
거품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망연한 얼굴로 재생되는 팔을 쳐다보던 유마혼이 고개를 들었다.  사
실이었다.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불사신공이었다.
문득 자신의 왼팔로 시선이 갔다. 복면인이 익힌 불사신공이라면  3년
전에 잘린 왼팔도 재생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불사신공을 익히면 네 잃어버린 팔도 재생이 가능하다."
유마혼의 내심을 읽었는지,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에게 원하는 게 뭡니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임에 분명했다. 겁천십웅의 무공과 불사신공, 그
두 가지만 있다면 천하제일인은  결코 꿈이 아니다.  하지만, 복면인의
저의가 궁금했다. 그가 보기엔 결코 아쉬울 게 없는 자였다.
"우린 꿈을 성사시켜줄 전사를 찾고 있다. 아울러 강호를  다스릴 인
물도."
"왜 하필이면…."
"그건 네가 따르겠다면 자연적으로 알게 되느니라. 물론 따르지 않겠
다면 모르고 죽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구려. 하지만 죽음이 두려워 따르는 건  결코 아니
외다. 강호를 다스릴 수 있다는 당신의 말  때문이오. 그리고 이 팔 때
문이기도 하고."
"잘 생각했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나직한 웃음을 흘리던 복면인의  목소리가 이내 잠잠해졌다. 전음을
사용하여 지시사항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날밤.
마천루에서 나온 한 인물이 어둠을 뚫고 길을 떠났다.
"아-함! 자식 가려면 빨리 갈 일이지,  철마문은 왜 들려, 졸려 죽겠
구먼."
"아미타불! 그래도 낳아주신 부몬데 하직인사는 해야할 것 아닌가."
"저놈이 다시 강호에 나오는 날이 연장문주의 제삿날이구먼."
"그건 나중 일이고, 우선은 이곳을  먼저 정리해야지. 보현보살 네가
먼저 시작해라."
"아미타불! 알았네. 연작문주. 드디어  소승도 마도련 10고수 간판을
달게 되는가 보오이다. 당분간은 이 마빡에 써 붙이고 다녀야겠네."
나직하니 중얼거린 추기영이 천천히  철탁을 두드렸다. 해죽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추기영은 분명 일백마 자리라 하였다. 마도대전을 하루 남겨
둔 시점에서 더 이상 도전할 필요가 없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추기영의 말을 이해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해줄 수 있겠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종마가 비무대 위에 올라온 추기영을 향해 확
인하듯 물었다. 마도대전의 마지막 날이니 만큼 유종의  미를 거두자는
일장 연설을 마치자마자 일은 벌어졌다.
느닷없이 사황문 진영에서 추기영이 벌떡 일어나 비무대로 올라오더
니 도전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금일 첫 순서는 철마문이니, 기다려  달라 하였으나 반 시진, 아니
일각이면 끝낼 수 있다며 도전하게 해달라며 떼를 쓰고 있다. 일각이라니, 지
금 남아있는 10대 고수 중 추기영이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자들은 아무
도 없다.
해서 묻는 말이었는데.
"아미타불! 소승은 불자입니다. 불자는 거짓말을  못하게 되어있습니
다. 지더라도 1각 안에 끝낼 테니까 도전을 허락해 주십시오. 마도대전
에 참석했는데 최소한 10대 고수에 도전했다는 말은 들어야 하지 않겠
습니까."
"허허!"
허탈한 웃음을 토해낸 종마가  철마문 진영의 유혁세를 쳐다보았다.
내공을 상실하였으나, 마지막 날이라 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마도대전
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유혁세가 고개를 끄덕이자 종마의 입에서 수락의 말이 떨어
졌다.
"좋네, 도전을 수락하네. 하지만 1각이  넘어가면 련주대행 직권으로
비무를 중단시키겠네. 그래도 좋은가?"
"편하실대로 하십시오. 소승은 그저 경험을 쌓기를 원합니다."
"그래 도전자는 누구로 정했나?"
"사황문 소속 육승 추기영, 일백마 서열 1위인 철마황 유혁세 대협께
가르침을 바랍니다."
"허억!"
종마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귀를 의심해야했다.
유혁세와 냉운형에 대해선 도전하지 않기로 이미 약조를 하였다.
물론 대외적으로 발표를 하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만 보면 바
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요화문이 비무에 참석하지 않는  상황에서 남은
곳은 철마문과 사황문일진대, 상대편 문주에게 도전하여 분란을 일으킬
부하는 아무도 없다.
그랬던 분위기를 일거에 날려버리며 추기영이 도전을 해버린 것이다.
"저런 미친놈…."
화들짝 놀란 무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비무장을 덮었다.
"자네 지금 하는 행동…."
"아미타불! 소승,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질책하듯 말하는 종마의 말을 자른 추기영이 나지막하니 말했다.
"마도대전에 참석하는 무인들은 신분이 동일하다고 들었소이다. 오직
힘에 의해 상위 서열로 올라갈 수 있고, 힘있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 하
였소이다. 이 말은 개회식 때 련주대행께서 직접 한 말로  알고 있습니
다. 맞습니까?"
"그렇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그 힘엔 과거의 신분도 들어가는 겁니까?"
"으음!"
종마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추기영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만독문과 만수문이 양패구상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충격적인 일을 겪은  터라, 서둘러 진화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뿐 결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직한 한 숨을 내쉰 종마가 말을 꺼냈다.
"아닐세, 마도대전이 열리는 순간부터 일백마를 비롯한  마도련 무인
들은 동일한 위치가 되네."
"그렇다면…."
"맞소이다. 추소협의 도전은 정당하오."
추기영이 말을 이어가려는 찰라 철마문 진영에서 커다란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그였다. 일백마 서열 1위인 유혁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형님!"
"웅창아! 우린 졌다. 사황문에 진  게 아니고, 저들 세  명에게 졌다.
여기서 그만 포기하자."
완전하게 패했음을 절감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이번 마도대전에서 사황문의 약진은 하오밀문 삼인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마도련 전체가 그들에게 패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모르겠느냐? 지금 저 친구는 나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명예롭게 물
러날 기회를."
문득 깨달았다.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앞으로 10년간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문주라는 입장에 있기에 부하들이 별다른 거
부감 없이 받아들일 터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하여 높은 신분에 있는 자는 지고도 일백마  자리를 유지할 수 있
다는 선례를 남기게 된다. 그런 특혜가 이어지면 결국 마도련은 해체될
수밖에 없다. 추기영이 꼬집은 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냉운형보다 내가 먼저라는 것이다."
마음이 편해졌는지 싱긋 미소를 머금은 유혁세가 비무대의 추기영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지금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자네의 도전을 받아들일 수 없네. 하지만
앞으로 10년 뒤 자네에게 다시 도전하고 싶네. 그렇게 해줄  수 있겠는
가?"
"아미타불!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까지 제가  살아있다면 문
주님의 도전을 기필코 받아보겠습니다."
"와-아! 와아아!"
일순 철마문 진중에서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깨끗하게  패
배를 인정하는 유혁세의 모습 때문이었다.
더하여 다음 마도대전 때 도전하겠다고 하였다. 남은 10년 동안 몸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는 다짐을 모든 무인들 앞에서 한 것이다.
진정한 거인의 모습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아들하고는 전혀 다르네?"
유혁세의 모습을 보고 감탄한  사람은 철마문 무인들만이 아니었다.
작금의 사태를 연출했던 야혼 또한 놀라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막판까지 몰렸다 하지만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한 문파의 문주가 아닌가. 그동안 철마문이 득세하였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연작문주도 좀 배우시게. 그런 의미에서 문주가 가진 춘서
를 소승에게 전부 넘기는 게 어떻습니까?"
"어림없습니다, 보현보살. 나 같은 개차반  문주가 있어야 저런 사람
들이 빛을 발하는 겁니다. 다 저 사람처럼 행동하면 좋은  세상이야 오
겠지만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양념으로 한 명 정도는 있어도 상관없
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미타불! 내가 서열 1위가 되었다고 말을 올리면 불편하네 연작문
주. 목소리 깔지 말고 니 생긴 대로 사시게. 그나저나 그거 아나? 이번
마도대전에서 우리 세 사람이 1, 2, 3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맞아, 지난 두 달간 고생했던 일들이 물밀 듯 밀려오는구먼. 그렇지
않소?"
추기영의 말에 곁에 있던 태웅이 맞장구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
지만, 사황문 무인들의 시선은 그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모든 무인들
의 시선은 냉운형을 주시하고 있었다.
"으음!"
나직한 신음을 발한 냉운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다른 수가  없었
다. 수많은 눈동자들이 말을 해왔다. 너도 그만 물러나라는 말을.
"소생 사황문주 냉운형 일백마 자리를 철마문에 넘기겠소."
간단한 한마디를 끝으로 몸을 돌렸다. 사황문은 승리했지만 유혁세에
게는 패하고 말았다. 먼저  나서서 일백마 자리를  반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버님!"
"나머지 일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 잊지  말
고."
뒤따라 일어서는 냉운소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남겼다. 이제  한가지
밖에 남지 않았다. 가능할지 모르지만 무공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알겠습니다, 아버님!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제가 욕을  먹겠
습니다."
입술을 깨문 냉운소가 몸을 돌려 야혼을 쳐다보았다.
"이제 약속을 이행할 때다. 돈 값을 해라."
"그런가? 좋지 뭐. 그럼  도전신청을 해야지. 우린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좋다. 군철 올라가라. 태웅에게 도전신청을 하거라."
"소문주님!"
군철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냉운소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이미 사황문의 승리로 결정된 상황에서 비무신청이라니.
더구나 그 상대가 태웅이라 한다.
'시키는대로 하거라. 놈을 마음껏 유린하고 와라. 이건 명령이다.'
하지만, 군철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던 냉운소는 비무 당사자인  태웅
과 추기영이 슬금 사라지는 걸 보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소문주님."
고개를 숙인 군철이 미적거리는 걸음으로 비무장 위로 올라섰다.  결
코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연
출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상관의 명령이기에 마지못해 고함을 질렀다.
"사황문 소속 거치도 군철, 일백마  서열 2위인 태웅께 도전  신청이
오."
마도대전이 끝났다는 생각으로 종마의 마지막 말을 기다리던 무인들
이 황당한 얼굴로 비무장을 주시했다.
같은 사황문 소속을 두고 비무신청이라니. 그러나 의아한 얼굴도  잠
시 무인들의 얼굴이 흥미롭게 변했다.
거저 줍다시피 하여 일백마에 든 하오밀문  인물들의 무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군웅들의  반응을 기다리던 냉운소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군철을 내보냈는데  군웅들의 반응
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가지 않을 텐…."
고개를 돌려 야혼을 쳐다보던 냉운소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없었
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닥거리던 두 놈이 동시에 사라져버린 것이었
다.
"무슨 짓이냐. 약속을 어길 참이냐?"
"글쎄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이 어디 갔는지 알 길이 없지. 기다려
봐라. 설마 도망치기야 하겠냐? 똥이라도 싸러 갔나보지 뭐."
콧구멍을 후비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태웅과 추기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1시진을 기다린 끝에  야혼이
판정관인 종마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질 것 같아서 도망쳤나 보네요. 그냥 패했다고 선언해 주십쇼."
"일백마 서열 2위에 사황문 소속 거치도 군철을 임명한다."
"이런 죽일 놈들이!"
종마의 목소리와 함께 냉운소의 입에서 낮은 고함이 터졌다.  그러나
야혼은 태연했다. 싱긋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이봐 뭘 흥분하고 그래. 태웅이 졌잖아, 그럼 된 것 아냐?"
"약속이…."
"약속 지켰잖아 임마. 잔말말고 다음 놈 내  보내라. 어이구 저기 우
리 패배자 온다. 그럼 추기영도 곧 오겠네. 어이 거패,  육승은 언제 온
다고 하던가."
"곧 온다고 하데. 아침부터 속이 안 좋아서.  밥에 뭘 탔나? 계속 뒷
간만 들락거리게 되는구먼."
"개자식들…. "
거친 욕설을 뱉어낸 냉운소가 다른 무인을 올려 보냈다.  추기영이란
녀석이 나타나든 말든 상관없이 일백마 자리를 빼앗을 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있다가 온다 하였던 추기영은 1
시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역시 태웅과 마찬가지로 사황문 무
인을 새로운 일백마로 선언한 다음에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마치 정말 뒷간에 다녀온 것처럼 허리춤을 치켜올린 채로.
잔뜩 흥미를 가지고  비무대를 쳐다보던 무인들이  이내 재미없다는
얼굴로 종마 쪽을 주시했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올라온 인물 때문에 다시금 비무대를 주시
할 수밖에 없었다.
"사황문 소속 암흑사군 냉운소, 흑돈 야혼께 도전이오."
유마혼, 자룡, 그리고 갈음석과 함께 최고의 후기지수로 여겨졌던 냉
운소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하오밀문의 야혼, 다른 자
들과는 달리 그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도대전 마지막을 장식할 비무로는 참으로 적당한  대결이 아닐 수
없었다.
"좌우호법! 여기서 졌다고 해버릴까 아니면  올라가서 실컷 맞고 올
까?"
말은 두 사람에게 하였지만 야혼의 시선은 냉소소를 향했다.
"그래도 하오대문의 문준데 싸워보기는 해야하지 않겠는가. 문주마저
졌다고 하면 우리의 위신은 뭐가 되겠나. 잔말말고 나가서 한바탕 하고
오시게. 여기서 열심히 응원해 줄 테니까."
"그럴까?"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냉소소의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머금었
다.
"일백마 서열 3위 흑돈(黑豚) 야혼(夜魂), 도전을 수락하오."
"냉공자! 하오밀문의 문주에게 마도련의 힘을 보여주시오."
"옳소, 하오문에 걸맞은 자리로 돌려보내시오!"
사황문 진영에서 들려온 비난을 시발점으로 관중석 여기저기서 함성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무도 하지 않고 일백마 서열 3위에  오른 야혼을
인정할 수 없다는 얼굴들이었다.
한쪽 구석에 옷을 벗어놓은 야혼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비무대 중앙
으로 걸어나갔다.
"저들이 보이느냐 야혼, 마도련 사람들은 누구도  너희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운이 좋아 지금껏 버텼다 생각할 뿐이지."
군웅들의 뜻밖의 반응에 냉운소의 얼굴은 잔뜩 고무되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어떻게 할래? 그냥 져줄까 아니면  비무를 하
는 시늉이라도 할까? 입맛대로 해줄게."
"실력발휘 해도 좋다. 네 놈이 가진 모든 능력을 뽑아내 보거라."
"후회할텐데…"
"후회? 프! 하하하! 네 까짓 놈에….헉!"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던 냉운소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비릿하게
웃고 있던 녀석의 몸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아직 상호간의 인사도 없었기에,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음은 물론이
고, 마음의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피하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한 냉운소가  양손을 들어올려 십(十)자로
교차시키며 안면을 방어했다. 안면을 향해 야혼의 검은  주먹이 다가오
고 있었던 것이었다.
퍼억!
그러나, 야혼의 목표는 냉운소의  얼굴이 아니었다. 탄력  받은 몸통
자체가 냉운소의 전신을 덮쳐버린 것이었다.
"크-억!"
붕 떠서 날아가던 냉운소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었다. 뒤쪽으로 날리면서도  재빨리
몸 내부를 점검하였다. 내상의 기미가 없자 방어자세를  취하며 바닥으
로 내려섰다.
"어흥!"
움찔!
또다시 달려들 채비를 하는 야혼의 모습에 냉운소가 움찔 뒤로 밀려
났다.
"아깝네, 나에게 검이 있었으면 목에 확실한 구멍을 낼 수 있었을 텐
데…."
"야비한 놈! 그래서  하오밀문을 무림문파로 인정해주지  않는 거야.
지금과 같은 치사한 짓 때문에."
"상관없어. 그래도 네 녀석보단 나으니까.  적어도 난 남이 이뤄놓은
공은 가로채진 않거든. 어떻게 할래? 그냥 져줄까 아니면  비무를 하는
시늉이라도 할까?"
"개자식!"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묵천대마공을 끌어올렸다. 일순 냉운소의 몸에
서 검은 운무가 뭉클거리며 쏟아져 나와 주변을 검게 덮었다.
"나중에 돈을 돌려 달라는둥 딴말하기 없기다."
급격하게 시야를 가로막는 운무를 향해 고함을 지른 야혼이 몸을 낮
추며 투견공 자세를 취했다.
"죽일 놈! 암흑천지세(暗黑天地勢)!"
거친 욕설을 뱉어낸 냉운소가 야혼의  면상을 향해 묵천대마공(墨天
大魔功) 1초를 사정없이 뿌렸다.
"호! 환술(幻術)이 이런 거였구먼."
야혼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처음 접하는 환술은 참으로  놀
라웠다. 자신을 공격하는 물체는 냉운소의 두 정권이 아니라 주변에 포
진하고 있던 검은 운무들이었다. 유영하듯 움직이던 운무들이  주먹 형
태로 변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상당한 무공이긴 했지만  세기
가 약했다. 완전하게 익히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몸을 벌떡 일으켜 다가오는 검은 덩어리를 정면으로 맞았다.
쿠앙!
"아-악!"
거친 타격음과 함께 반 장 가량 밀려난  야혼이 처절한 고함을 내질
렀다.
"좆나 아프긴 하네. 근데 한가지 궁금한 게 있거든? 너는  내가 보이
냐?"
사실 그 또한 궁금한 점이었다. 자신의 시야에는 냉운소의 모습이 보
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움직임과 호흡으로 위치를 알아내고 뿐이었다.
"두고보면 안다, 놈!"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야혼을 노려보았다. 비명을 질러 충격을  받은
것처럼 하였지만 녀석의 얼굴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싱긋 미소마저 짓고 있다. 문득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온몸
을 잠식해 왔다. 재빨리 내기를 일주천 시킨 다음 전  내공을 양손으로
모았다. 암흑천지풍(暗黑天地風), 묵천대마공 2초였다.
냉운소 양손에서 생겨난 압력에 의해 검은  운무들이 움직이기 시작
하였다. 권풍(拳風), 환술과 내공이 결합된 묵천대마공 2초는 검은 운무
로 만들어진 강기의 바람이었다. 냉운소 주변에서 생겨난  강기의 바람
이 점차 그 범위를 넓히더니 급기야 야혼의 몸마저 집어삼켰다.
"이거 재미있네?"
온몸을 할퀴듯 부딪쳐오는 강기들을 쳐다보던 야혼이 고개를 갸웃거
렸다. 느낌이 묘했다. 분명 눈앞에 다가온 강기에 집중해야할 상황임에
도 불구하고 냉운소의 행동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오잉! 비명을 안 질렀잖아? 으-아악! 아-아악!"
강기의 태풍에 휘말린 듯 몸을 움직이며 연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야혼의 얼굴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어떻게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지. 냉운소가 만든 강기를 향해 몸을 가져다 대면서도, 다른 생
각을 했다.
"암흑천지폭(暗黑天地暴)!"
통렬할 고함소리와 함께 냉운소의 양손이 거칠게 전면을 향했다.  마
지막 초식인 암흑천지폭은 강기의 폭풍 속으로 권강을 찔러 넣는 기술
이었다. 냉운소의 양손에서 솟구친 검붉은 기운이 야혼의  동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이 놈은 가슴에, 이놈은 복부에, 저놈은 막아야겠다.  여기에 장단으
로 비명을 넣으면? 아악! 악! 크-억!"
신이난 사람은 야혼이었다. 강기에 경지에 달한 치명적인 공격이  이
어지고 있음에도 야혼의 얼굴에는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동시에 다가오는 강기들의 순서를 매기고 있다. 과거처럼  무
작정 맞아주는 게 아니라, 제 몸을 강기 쪽으로 가져다  대며 영약기운
을 내공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놈! 매에는 장사가 없다 하였다. 비록  투견공을 익혔다지만 그걸로
묵천대마공을 막을 수 있으리라 여겼더냐!"
차갑게 소리친 냉운소가 야혼 곁으로 다가들며  묵천대마공 각 초식
을 무차별하게 난사하였다. 피부에 먹히지 않는다면 내부를  먼저 부셔
버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검은 운무 속에서 가죽북 터지는 소리와  화음
을 이뤄 야혼의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허! 맷집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구먼."
비무장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하는 말이었다. 두 사람이 비무를  시작
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상황은 같았다.
냉운소의 공격이 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야혼의 비
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하여도 금방 끝나리
라 여긴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벌써 1시진, 여전히 똑  같은 비명소리에 군웅들은 감탄사를
발할 수밖에 없었다.
"저러다 냉공자가 먼저 지치는 것 아닌가 몰라!"
일부 군웅들의 우려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검은 운무  속에서는
그들이 말한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야혼의 동체를 향해 연신 양손을 뻗어내는  냉운소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들어올린 양팔이 점점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으나 결코 멈출 수 없
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 또한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잡을 수 있다. 조금 만 더…."
강기에 강타 당해 벌겋게 변한 야혼의 몸통을  보며 더욱 공격에 박
차를 가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지만 여전히 야혼의 동체를 눕히
지 못했다. 비틀거리면서도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내고 있다.
공격하는 자와 공격을 받아주는 자.
한쪽으로 치우친 일방적인 비무는 어느덧 2시진 째 접어들었고, 상황
은 변화가 없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냉운소의 의복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사실과, 야혼의 동체가 전보다 더 붉게 변했다는 사실이
었다.
"이거 진짜 재미있네."
하지만 야혼은 자신의 몸에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일
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신 없이 이어지는 공격에도 제법 여유가  생기자 이번에는 다른
작업을 해보았다. 냉운소의 공격에 의해 내공으로 화해가는  진기를 붙
잡고 운기행공을 시도해본 것이었다.
완전한 형태의 운기행공이 아닌, 잠시 잠깐씩 하는 요상에  불과했지
만 효과가 있었다.
"허미, 그러고 보니 이놈은 양심신공(兩心神功)이란 것 아녀?"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쳤다. 귀곡에서  익혔던 양심신공이 떠올랐다.
그동안 거의 잊고 있었는데 비무를  계속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양심신공이
발휘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얼레, 저놈 지쳤나? 그럼, 지금부터는 취선보(醉仙步)와  무풍무영술
(無風無影術)의 짬봉이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걷히자 야혼의  움직임이 현저하게 달라
졌다. 마치 술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는  모양새가, 그동안 쌓였던 충격
이 이제야 나타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야혼의 그러한 모습에 더욱 고무된 냉운소는 마지막 남은 힘까지 전
부 뽑아내 묵천대마공을 시전하였다.
"이야합!"
거의 바닥에 쓰러질 듯 몸을 눕힌 야혼을 향해 암흑천지폭을 펼쳤다.
그의 양손에서 흘러나온 검은 강기가  야혼의 뱃살을 향해 무자비하게
작렬했다.
"끄-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른 야혼의 신형이 비무대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기
며 1장 가량 쭉 밀렸다.
"끝났다, 놈!"
꿈틀거리기만 할 뿐 일어나지 못하는 야혼을  쳐다보며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마천루 원로들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
다. 승리 선언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저런! 일어난다."
군웅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저런 죽일 놈이!"
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려 반쯤 일어난 야혼의 몸통을 향해  뻗어냈다.
갑자기 내공을 끌어올리는 행위가 몸에  무리를 주는 것임에 분명했
으나, 기회가 왔을 때 끝내고자 하는 마음에 무시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그의 공격은 비대한 돼지를 잡지 못했다. 절반쯤 일어난
야혼의 신형이 왼쪽으로 굴러버린 것이었다.
나려타곤(懶驢打滾), 맨 처음 태웅이 썼던 무인의  수치가 또다시 발
휘되었다.
"그렇다하여 나의 승리는 변하지 않는다."
진득한 살기를 쏟아낸 냉운소가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야혼
앞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영원히 기어다니게 만들어주마."
간신히 몸을 세운 듯  비틀거리는 놈의 단전을 향해  양손을 힘차게
뻗어냈다. 단전부위에서 뜨끔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애써 참아내며 공격
을 이어갔다.
하지만 야혼의 동작 또한 신속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비틀
거리면서도 상체를 빠르게 뒤쪽으로 눕혔다.
뒤쪽으로 몸을 눕히는 철판교 수법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나려타곤의
연속이었다. 거친 소리와 함께 야혼의 등이 지면을 쳤고, 그 위로 냉운
소의 공격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다렸다 놈!"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있는 야혼을  향해 몸을 날렸다. 먼 거리에서
안 된다면 직접 몸통을 가격하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손을 뻗어내던 냉운소가  한가지 놓친 게  있었다. 야혼의
입술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는 사실과, 세워진 무릎이 검게 변했다는 사
실.
"타핫!"
냉운소의 입에서 통렬한 고함이 터지고, 체중마저 실은 그의  양손이
야혼의 가슴팍에 작렬해 들었다.
"아-악!"
"커-억!"
동시에 들려온 두 마디 비명소리에 군웅들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
했다. 분명 공격한 사람은  냉운소였고, 아래쪽의 야혼은  방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비명소리라니.
"어떻게 된 거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비무장을  주시했다. 공격을 성공시킨 냉운소
나, 공격을 받았던 야혼 두 사람 전부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냉운소도 당했다! 저 무릎에 당했다고."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그랬다. 엎드린 상태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
는 냉운소의 가랑이 사이에 맨살의 무릎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결국 냉운소의 공격은 성공했으나, 가만히 세워져 있던 야혼의  무릎
을 향해 몸을 던진 꼴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급소 중의 한 곳인 회음혈
을.
"일어나기만 하면 이긴다."
두 사람이 동시에 기절한 상황에  직면한 미묘한 상황이었다. 둘 다
일어나지 못한다면 무승부로 기록되어 일백마의 서열은 변화가 없지만,
냉운소가 먼저 일어난다면 승리는 그의 차지가 될게 분명했다.
"소문주님이다! 소문주님이 이겼다."
사황문 진영에서 환희에 찬 함성이  쏟아졌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철마문 진영에서도 동조하는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하오밀문 문주보다는 냉운소가 일백마에 드는 게 훨씬 낫지. 이제야
간신히 체면치레는 한 것 같구먼."
그랬다. 철마문 진영에서 흘러나온 환호는 냉운소를 좋아해서가 아니
라 하오밀문 문주인 야혼이 일백마에 들었다는 사실이 못마땅해서였다.
"크응!"
열화와 같은 환호성을 들으며 냉운소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상하
게 몸에 힘이 없었지만 공격하다가 당한 내상 때문이거니 하였다.
여전히 기절해 있는 야혼을 힐끔 쳐다본 후  사황문 진영을 향해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와-아! 와!"
환호하는 무인들을 향해 싱긋 미소를 머금은  냉운소가 원로들 쪽으
로 몸을 돌려 나아가려는 순간,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세워져 있던 야혼의 무릎이  쭉 펴지며 한발 옮기던  냉운소의 발이
걸려버린 것이었다.
"어어? 헉!"
중심을 잡기 위해 양손을 내졌던 냉운소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내상을 당했다지만  단전이 비어버린 것과, 내
공이 사라진 현상은 분명 차이가 있다..
내상 때문이 아니라 내공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머릿속이 아득해 지는 순간 안면에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끄응!"
"헉! 하오밀문 문주가 일어난다."
"허! 냉운소가 넘어지면서 저 자를 깨운 모양이네? 하지만 저래가지
고 제대로 설 수나 있을까? 다시 기절하겠구먼."
그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간신히 일어난 비대한 야혼의  동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연신 비틀거렸다.
"아-안돼!"
사황문 무인들 입에서 안타까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비틀거리던 야혼
의 발이 쭉 미끄러지며 쓰러지기는 했는데 그 위치가 문제였다.
공중으로 몸을 띄운 거대한 동체가 쓰러져 있는 냉운소의 몸통을 덮
쳐버린 것이었다.
"저 친구는 운이 따르는  모양이네. 어떻게 넘어져도 냉운소  위쪽인
가. 쯧 쯧! 이제는 깨어나고 싶어도 불가능하게 되었구먼."
철마문 무인의 말 대로였다. 그나마 정신을 차려가던 냉운소는  거대
한 동체에 짓눌려 개구리 뻗듯 뻗어버렸다.
"임마! 부자(父子)는 말이다, 모든 면에서 닮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옆집 아저씨 아들이라 의심 산다고."
기절하여 알아듣지도 못하는 냉운소의 얼굴을 툭툭친 야혼이 힘겨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사황문 소속 흑돈 야혼을 일백마 서열 3위로 임명한다."
"크-아-아!"
역대 어느 대전보다 많은 이변이 속출하였고, 만수문과 만독문의  멸
문이라는 엄청난 사고를 불러왔던 마도대전 비무는 야혼의 포효소리와
함께 끝을 맺었다.
"이번 마도대전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생각하기도 끔찍한  불
행한 일이 있었고, 많은 죽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희생은 마
도련을 더욱 강하게 결속시키고, 더 강한 단체로 만드는 초석이  될 것
입니다. 새롭게 탄생할 마도련주와 함께 강호를 질타하는  마도련이 되
길 빌어마지 않습니다."
"와-아!"
"3일간 휴식을 취한 다음 천비동에 입관하도록 하겠소.  사황문은 마
도련주를 지목하여 원로원에 통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영약을 발견했으나.
"어서 오게, 부문주!"
암흑루 지하 연공관, 추레한 얼굴의 냉운형이 석실 안으로 들어온 인
물을 맞았다. 사황문의 부문주직을 맡고 있는 혈환사 엄시우였다.
"부르셨습니까, 문주님!"
이번 마도대전에서 사황문이 승리했지만 냉운형 부자 앞에선 기쁨의
표정을 지을 수 없다. 두 부자가 동일하게 내공을 잃는  불행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침울한 얼굴로 다가온 엄시우가 냉운형 부자를  향해 말했
다.
"곧 연회가 열린 참인데 나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일세, 아무리 폐관수련을 한다고 하지만, 부하들의 수고는 치하
해주어야지.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자네가 련주직을 맡아줘야겠네."
"문주님!"
엄시우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단순한 일이 아닐 거라  짐작은
했지만 설마하니 마도련 서열 10위안에도  들지 못한 자신에게 마도련
주를 하라니.
마도련 역사상 그런 예가 한번도 없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엄시우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냉운형은 태연한 얼
굴로 말을 이었다.
"자네 혼자 마도련주 직을 맡으라는 건 아닐세. 내  딸과 공동련주가
되라는 말이네. 그 아이 혼자 마도련을 이끌어 간다는 건  무리라는 걸
알지 않는가."
"그렇다 해도…."
"다른 건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수락만 하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걸세. 단 자네는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되네. 이 냉운형 사람이란 사실을
말이네. 알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달가운 제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그를 모셔온 부하로서 따
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통해서 마도련을 다스리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알기 때문이었다.
"좋네, 그 소릴 하려고 자넬 불렀네. 그만 올라가세. 너도 가자."
"아닙니다 아버님. 이곳에 그냥 있겠습니다."
냉운소가 말끝을 흐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고 싶은 심정이었
다. 다 이긴 비무를  어이없는 실수로 놓쳐버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분하고 원통했다.
분명 놈은 기절해 있었다. 오므리고 있던 다리도 근육이 이완되는 바
람에 무의식적으로 펴진 것이었는데, 그 다리에 걸려 기절해 버렸다.
더욱 환장할 일은 넘어지면서 놈의 정신을 깨우고 말았다는  거였다.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해서 비무가 끝나자마자 바로 이곳으
로 오고 말았다. 아니, 부하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냉운
형은 그게 아니었는지 냉운소를 향해 엄하게 소리쳤다.
"바보 같은 놈! 누가  뭐래도 너는 사황문의 소문주야.  내 다음으로
사황문을 이끌어갈 사람이라고! 잔말말고 따라 오너라!"
"그렇습니다, 소문주님. 오늘은 경사스런 날입니다.  불편하더라도 참
석하는 게 나을 듯 싶습니다."
"끄응!"
나직한 신음을 발한 냉운소가 어기적거리며 저만큼 앞서가는 아버지
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연회실에 도착한 3인을 맞이한 사람은  뜻밖에도 태웅과 추기영이었
다. 연신 주변을 둘러보던 두 사람이 엄시우를 발견하곤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늦으셨습니다 엄 대협.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십시
오. 엄 대협이 오셨습니다!"
안에다 대고 크게 소리친 태웅이 엄시우를 이끌고 가장 상석으로 안
내했다.
'이 놈들이?'
냉운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알은체조차 하지 않은 태웅  때문
이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호들갑을 떨며 맞이한 사
람은 엄시우뿐이었다. 내심 기분이 상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엄시우 뒤
를 따랐다. 그러나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두 분은 이쪽입니다."
두 사람의 옷깃을 잡은 사람은 빙긋 미소를 짓고 있는 추기영이었다.
"저곳은 일백마에 속한 무인들만 앉는 자리입니다. 저쪽에 따로 자리
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 것들이. 내가 누구…."
불현듯 치미는 분노에 고함을 지르려는 찰라, 이번엔 늙수그레한  목
소리가 그의 말문을 막았다.
"축하하네, 냉 대협. 훌륭한 딸을 둔 덕분에 3백 년 한을 풀었구먼."
"종마께서 어인 일로…."
화들짝 놀란 얼굴로 종마를 쳐다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종마를
비롯한 원로원 무인 전부와 철마문의 문주 대행인 유웅창까지 같이 자
리하고 있었다.
"그럴 일이 있다네, 오랜만에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싶지 뭔가. 일
단 이쪽으로 오시게."
'빌어먹을….'
나직한 욕설을 뱉어내며 종마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리배치가 묘하게 되어 있었다.  상석이 분명했지만 사황문  무인들과는
차별되는 자리였다.
즉 사황문 문도가 아닌 외부인들을 위한 자리가 바로 그곳이었던 것
이다. 그런데 문주인 자신에게 그 자리를 배정해 두다니.
문득 고개를 돌려 일백마에 속한 사황문 무인들을 쳐다보았다.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자는 마지막에  추기영으로부터 일백마
서열 1위를 얻었던 마령도(魔靈刀) 관운상(寬雲上)이 앉아있었고, 그 건
너편엔 거치도(鋸齒刀) 군철(窘哲) 등, 이번 마도대전에서  일백마 자리
에 올랐던 모든 무인들이 순서대로 앉아 있었다.
"죽일 놈!"
시선이 마주친 야혼이 손을 들어 웃어 보이자  고개를 홱 돌린 냉운
형이 배정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잠시 여기를 주목해 주시오.  연회를 시작하기 전에 마도련주가  될
분을 먼저 뽑았으면 싶습니다. 신임맹주와 함께 자축  연회를 개최한다
면 더욱 의의가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사황문 무인들의 입에서 동의의 소리가 흘러나오자 종마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통상적으로 마도련주는 일백마 10위권 안에서 선출되었습니다. 이곳
사황문에는 그런 자격조건을 갖춘 일백마는 네 명이 있습니다. 이건 어
디까지나 지금까지의 관례를 말씀드린 것일 뿐 사황문은 또 다른 기준
을 적용하여도 됩니다. 우선은 추천을  받겠습니다. 마도련주의 재목이
라 생각되는 분을 기탄 없이 추천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대부분의 사황문 무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침묵으로  일
관할 뿐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게 일백마 서열 1, 2, 3위가 전부 사황문
출신이지만 딱히 추천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관운상이나 군철은 비무라기 보다는 그냥 주웠다고 봐야했고, 야혼은
사황문 소문주인 냉운소를 이기고 지켜낸 일백마 자리다.
그들을 제외하면 냉소소가 유일한데 그녀는 문주인 냉운형이 원하지
않기에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맨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다름
아닌 냉운형이었다.
"내가 한마디하겠소이다. 우선은 그동안 최선을 다해 마도대전을  승
리로 이끌어준 여러 사황문 무인들을 치하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무공
을 잃지 않았다면 사황문 문주직을 계속 수행했을 터이나 사정이 그렇
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해서 이 자리에서 문주직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
고 싶습니다."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냉운형에게로 쏠렸다. 문주직을  넘기겠다는
말은 마도련주 추천의 우회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주시하는 무인들에게 한번씩 눈길을 준  냉운형이 단호히 말
했다.
"제 다음으로 사황문을 이끌어갈 사람은  그동안 부문주로 사황문을
위해 일했던 혈환사 엄시우 대협입니다."
냉운형을 주시하던 무인들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딸인 냉소소가
아닌 엄시우에게 사황문을 넘겨주겠다는 냉운형의 말은 충격이었다.
설사 그동안 사황문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지만 그에게 마도련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무인은 없었다.
그런 그를 마도련주 후보로 추대한 냉운형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
다.
"알겠습니다. 사황문을 이끌어갈 분은 엄시우 대협으로 결정이  났습
니다. 마도련주로 추대하실 분은 없습니까?"
'내가 엄시우를 지명했는데 다른 사람을 추대할 수가 없겠지.'
냉운형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스쳤다. 그가 엄시우를 전면으로
내세운 건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다. 설사 일이 잘못
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공동련주를 만들 수 있다는 복안에서 나온 말이
었으니.
그러나, 언제나 예외가 있다는 사실을 냉운형은 잠시 잊었다.
"아미타불! 음식이 다 식습니다. 빨리 빨리 진행해야겠습니다. 소승이
추천을 해도 되겠습니까?"
나직한 불호를 외며 일어난 추기영이 사황문  무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그대도 사황문을 위해 지금껏 싸웠으니 말할 자격이 있네.  기탄 없
이 말해 보시게."
"고맙소이다, 종마 영감. 지금까지의 선례를 비추어 보건대 마도련주
로 자격을 갖춘 사람은 무면미봉 냉소소 소저와  흑돈 야혼 두 분입니
다. 제가 추천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흑돈 야혼입니다."
추기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
려왔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추기영은 말을
이었다.
"물론 많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니면 마도
련을 이끌 사람이 없습니다. 실력 면에서는 냉소저가 한 수위란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녀는  두 가지 제약이 따릅니다.
우선은 여자라는 점과, 두 번째는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일가
친지들조차 외면한 사람이라면 인격적인  장애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부모조차 외면한 사람입니다."
추기영의 말이 계속될수록 사황문 무인들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말과 인격적인 장애 때문에 부
모가 외면했다는 말이 나왔을 땐 대부분 살기를 흘리며 추기영을 노려
보는 자도 있었다.
1년간을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냉소소의
인간됨됨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때로는 엄격한 교관으로, 때로는 다정다감한 누님같이 자신들을 지도
해주었던 그녀가 아닌가. 아울러 이번 마도대전에서는 또  어떻게 했는
가. 오직 그녀의 계책덕분에 철마문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다.
무엇하나 부족한 면이 없는 사람이 그녀일진대.
하지만 그들의 삼엄한  눈길에도 불구하고 추기영의  열변은 끝나지
않았다.
"인격적인 장애를 가진, 쉽게 말해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여자를 마
도련주에 앉힌다면 마도련의 미래는  뻔합니다. 제가 하오대문  문주와
친해서, 그곳의 좌호법이라 하여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 마도련을
걱정하기에 하는 말입니다. 마도련의 미래를 위해선 흑돈  야혼을 마도
련주로 추대해야 합니다. 그 만이  마도련을 강호의 주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 하였습니다. 흑돈 야혼
은 하오대문의 문주외다. 이미 경험이 있단 말이지요. 하지만 냉소소는
어떻습니까? 누가 나서줍니까? 1년 동안 무공을 배운 이들조차 그녀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자파에서마저 무시당한 그런 여인이 철마문이나 요
화문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지도자의 역량이 없다는 말입
니다. 다른 추천이 없다면 흑돈 야혼을 마도련주로 정했으면 합니다."
추기영의 말을 옹호하는 태웅은 한 술 더  떠 지금 바로 마도련주를
정하자고 하였다. 흑돈 야혼으로.
"저런 개자식들…."
냉운형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야혼을 마도련주로 추대한다는 그
들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추대했던 엄시우에 대해선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오직 딸인 냉소소와 야혼만 비교하는 그들의 언행 때문이
었다.
냉소소를 비하하고 야혼을 추켜세우는 것 같지만  그 내면을 가만히
살피면 마도련주는 두 사람만이 자격이 있다는 의미인 게다.
더욱이 냉소소를 정신병자로 몰아붙이며 아비인 자신을 비정한 사람
으로 만들고, 딸에겐 엄청난 동정심을 유발시키도록 하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무인들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붉으락푸르락 인상을 쓰던 무인들이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
다.
"소생 화악숭, 무면미봉 냉소소님을 마도련주로 추대합니다."
"소생 윤보성, 화악숭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소생 군철, 동의합니다."
"소생…."
순식간의 일이었다. 신진 고수들의 수좌라 할 수 잇는 화악숭을 선두
로 모든 무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소소를 추대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야혼과 엄시우가 유일했다.
"별수 없네, 마도련을 거저 먹나 했더니. 소생 흑돈 야혼 냉소소님을
마도련주로 추대하는데 동의합니다."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실내가 떠나가도
록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는 엄시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너는 어떻게 할거냐는 얼굴로.
"끄응! 소생 혈환사 엄시우 여러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만장일치,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일백마에 속한 전원이 냉소소를
마도련주로 추대했다.
"마도련주님 뭐하십니까, 인사말이라도 하셔야지요."
머뭇거리고 앉아있는 냉소소를 향해 야혼이 벙글거리며 소리쳤다.
'꼭 이런 식으로 해야했냐?'
내심 곤혹스러움을 감출 길 없었다. 야혼은 아버지와 자신을  갈라놓
는 작업에서부터 일을 추진했다. 문득 아버지 얼굴을  쳐다보기가 미안
했다.
'어쩔 수 없다. 네 아버지가 조금만  사람 같았어도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을 거다. 잔말말고 상석에  올라가서 치하의 말이라도  해라. 내가
줄 선물은 아직 남았다. 아니 고명지가 주는 선물인가?'
'무슨…?'
'전부 쳐다보잖아 이년아. 빨리 안 올라가고 뭐해?'
의아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던 냉소소가 느닷없이 들려온 이년이란
야혼의 말에 서둘러 단상위로 올라갔다.
"련주님!"
아예 확정을 짓겠다는 듯 화악숭을 비롯한 전원이 련주를 외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미천한 저를 마도련주로 추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여러분들
께 드릴 말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을 드리
고 싶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마도련주! 내가 선물을 한가지 준비했습니다."
냉소소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상으로 올라간 고명지가 냉소소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아래쪽 무인들을 향해 말을 꺼냈다.
"얼마 전 마도련주가 유웅창 대협과 비무를  벌일 때 마천루 원로들
과 내기를 했습니다. 내가 이기면  마도련주가 되는 것과 상관없이  냉
소저를 돕기로 말입니다. 다행이 냉소저가 비무에 승리하는  바람에 내
기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해서 원로원 10천마들은 금일부터 신임 마도
련주의 호위가 되었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맞습니까."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10천마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냉소소 앞으로
다가가 섰다.
"련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열 명의 모습을 지켜보던 무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로
원의 10천마,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마천루에서만 생활하던  그들이
급기야 현역으로 복귀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별호는 제가 지어 드렸습니다. 앞으로 천마십호(天魔十護)라
불릴 것이며 오직 련주만의 지시만 받을 것입니다. 마천루 원로들은 문
파에 소속되어선 안 된다는 규칙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입
니다. 비록 내기라고는 하지만 본 동창  첩형과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
이 영원히 지켜지길 바라겠습니다."
이의제기를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버린 고명지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은 당연 냉운형 부자였다.
10천마가 사황문 잔치에  참석했을 때부터 이상함을  느꼈지만 설마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올 줄이야. 기절할 지경이었다.
가장 힘이 없을 거라  여겼던 냉소소가 역대 어느  련주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시작일 뿐이었다.
느닷없이 단상을 내려온 냉소소가 유웅창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정
중하게 부탁을 하고 있다.
"마도련 부련주 직책을  맡아 주십시오. 부족한  저를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련주님!"
유웅창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완전한 패배, 비무뿐만 아니라 인간적
인 면에서마저 철저하게 패하고 말았다. 자신 또한  마도련주가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보았고, 장차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해 구상도 했었다.
하지만 상대를 위한 배려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냉소소
는 그렇게 하고 있다. 마도련 공식 직함에도 없는 부련주를  만들어 자
신에게 맡아달라고 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련주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세! 마도련주님 만세!"
유웅창이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실내에 있던  무인들이 양손을 쳐들
며 환호했다.
무면미봉 냉소소가 마도련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은  마도련 전역으
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마도련 사상 첫 여성 련주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명 이의를 제
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철마문 무인들마저도 냉소소의 마도련주 등극
을 환영했을 정도였다.
그러한 내면에는 하오밀문 문주인 야혼이 강력한 경쟁자였다는 사실
과, 유웅창이 부련주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
위가 없었다.
삼일 후, 마도련 전 무인이 참석한 가운데 냉소소의 련주 취임이  성
대하게 열림으로 해서 천비동(天秘洞) 입관을 제외한  31번째 마도대전
의 모든 행사는 막을 내렸다.
휘이잉! 쏴아아!
풍신(風神)이라도 강림했는지, 산봉우리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섬뜩했다. 참으로 기이한 봉우리였다. 마치 벌집처럼 온통 동굴로 가득
한 봉우리는 바위산이었다.
천 개의 바람이 불어나온다 하여 풍천봉(風千峯)이라고도 불리는  마
도련의 성지 귀곡봉(鬼哭峯)에 일단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천마십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될 마천루 원로들과 이번 마도
대전에서 일백마에 들었던 마도련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귀곡봉 아래쪽에 천비동(天秘洞)이 있기 때문이었다. 기연의 장소, 천
여 개의 동굴 어딘가에 있다는 철혈무적검법과 앙천마마묵독공은 이곳
에 모인 모든 무인들의 꿈이었다.
두 무공 중 하나만 완전하게 익혀도 일거에 태상의 지위에 앉게된다.
명예직이긴 하지만 신임마도련주인 냉소소와 동일한 지위를 갖게 된다
는 것이다. 무공을 얻는 기연과 더불어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는 장소
가 바로 천비동이었다.
하지만, 천비동에 들어가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전에 와보신 분은 알겠지만, 무작정  천비동에 들어갈 수 없소이다.
저곳에 3치 이상의 흔적을 남겨야만 하오."
종마가 가리키는 곳엔 2장 높이의 철벽이 세워져 있었다.
"아미타불! 저 놈은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
무수한 흔적이 남아있는  철벽을 쳐다보던 추기영이  냉소소를 향해
물었다.
"자오금철(磁烏金鐵)이라 부른다. 일반 철보다는 몇  배 강하다고 알
려져 있다."
"그럼 일백마는 저 자오금철이란 놈을 향해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자
격요건에 불과했구려, 정말 니미럴타불이네 그랴."
따-악! 딱딱딱!
"글쎄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이곳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자들은
더욱 분발하여 무공에 정진할거 아니냐. 아마 그래서 저런 관문을 두었
는지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여 하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얼굴도 추기영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마도련 일백마에 들었다는 명예가 있긴 하지만 목
숨걸고 마도대전을 치른 보답치곤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얼굴로 자오금철을 쳐다보는 일행의 귓전에  종마의 말이 들
려왔다.
"여기 자오금철의 시험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
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마도련  일백마는 결코 대단한 지
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과거 겁천십웅의 무공과  자신을 비교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시고 시험에 응해주시기 바랍니다. 저 위쪽에
있는 흔적이 이곳을 만들었던 두 분이 남긴 것입니다."
웅성거리던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종마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깊숙이 새겨진 두 개의 흔적. 검으로 베어낸 듯한 일직선으로  파인 흔
적과 손바닥 장인이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앰병할타불! 1자는 되겠군. 곰 시주 저 거 보고 느낀 점 없는가?"
질린 듯, 검과 장의 흔적을 쳐다보던 추기영이 태웅을 향해 물었다.
"왜 없겠냐? 겁천십웅이란 작자들 무공만 강했지, 좆나  쩨쩨한 놈들
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맞네 곰 시주. 저 아래쪽에 보면 수백 개의 흔적이 있지만 1자 깊이
로 새겨진 것은 어디에도 없네 그랴. 결국 제 놈들이 최고란 말을 저런
식으로 남긴 거라네. 갑자기 들어가기 싫어지는구먼."
태웅의 말에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던 무인들의  얼굴이 일제히 변
했다. 모군상과 서음래가 남긴 흔적의 의미를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
었다.
추기영의 말대로 그들의 무공에 근접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
장 깊이 새겨진 흔적이 6치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철혈무적검법과 앙천마마묵독공을  익히면
저 정도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말이 되겠지."
일행 뒤쪽에 서있던 고명지가 싱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녀 역시 냉
소소의 배려로 천비동에 도전할 자격을 얻었던 거였다.
"좌절과 꿈이라….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외
인지."
자오금철을 쳐다보던 야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묘한 기분이었다.
모군상과 서음래가 만들었다는 흔적을 주시하는 순간 무엇인가 가슴속
에서 불끈 치밀어 오른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묘하게도 그 느낌은 투기였다. 본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
이 남긴 흔적을 향해 투기를 느끼다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고개를 돌려 전방을 주시하는 순간 입동 여부를 결정하는 시험이 시
작되었다. 시험은 간단했다. 본인이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겼나 하는
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자오금철에 3치 이상 흔적을  남기면 천비동 전면을  가로막고 있는
철문이 저절로 열리도록 기관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일백마 서열 100위에 오른 무인이 전면으로 나섰다.  철마
문 소속으로 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일검탈(一劒奪) 만철(萬哲)이란
자였다. 전면을 향해 호흡을 고르던  만철이 힘찬 고함을 지르며  몸을
솟구쳤다.
3장 높이로 솟구쳤던 만철이 대붕이 먹이를 노리듯 자오금철을 향해
수중의 검을 휘둘렀다. 전력을 다한 만철의 검에서는 푸른 기운이 잔뜩
넘실댔다.
카앙!
그러나, 커다란 쇳소리와 함께 푸른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을 뿐 천비
동을 가로막은 철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기(劒氣)를 구사하는 무공으로 남긴 흔적은 고작 1치에 불과했다.
본인이 만들었던 흔적을  확인한 만철을 비롯하여  대부분 무인들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자신들의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무려 1
자 깊이의 흔적을 남긴 겁천십웅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무공을.
만철의 뒤를 이어 많은  무인들이 나섰으나 굳게 닫힌  철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천비동이 최초 숨결을 토해낸 순간은 만철의 도전이  있고 난
반 시진 후였다.
쿠르릉!
사황문의 신진인 사도(邪刀) 곡운성(谷雲成)의 도가 자오금철에 작렬
한 순간, 지난 10년 동안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미약한 소음을 내며 좌
우로 갈라졌다.
"축하하네, 운성. 부디 기연을 얻길 바라네."
주변 인물들의 축하 인사를  들으며 한 사람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도록 입을 벌린 동굴 속을 향해 곡운성이 몸을 날렸다.
"적어도 검사(劒絲)의 단계엔 올라야 들어갈 수 있단 말이군요."
고명지가 냉소소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검사(劒絲), 곡운성에  의해서
는 자연스럽게 펼쳐진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경지라 할  수 있
다.
보통 강호 무림에선 무인들을 나눌 때, 내공이 거의 없는 초식위주의
무공을 펼치는 무인을 삼류무인이라 하고, 내공심법을 통해  제대로 무
공을 익힌 무인을 이류라 칭한다.
그리고 일류무사는 내공이 반 갑자,  즉 30년 이상을 보유한 자들로
검기(劒氣)정도를 구사할 수 있어야 듣게 되는 호칭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수 무림문파에서도 일류무사 소리를 들을 정도의 무인
은 1할에 불과할 정도로 드물다.
고명지가 감탄하듯 말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검기를  명주실
처럼 유형화 시킬 수 있는 곡운성의 무공은 강기( 氣)의  단계에 근접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고수(高手) 소리를 듣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강
자만이 입동을 허락하는 곳이 천비동이었다.
"지금부터는 대부분이 전부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냉소소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곡운성을 시작으로 일백마에 속한  무
인들은 자오금철에 3치 이상의 흔적을 남기고  천비동 안으로 몸을 날
렸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들어가고 자오금철 앞에는 각 문파의 수뇌급이라
할 수 있는 자들만 남아 있었다.
"자네들은 안 들어가나?"
여전히 자오금철을 쳐다보고  있는 태웅과 추기영을  향해 탁탑마왕
염융이 말을 걸어왔다. 하위권에 머물러 있던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
아 있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미타불! 혹시 우리가  련주님께 묻어갈까  걱정되어 그렇습니까?
그런 거라면 신경 끄십시오."
"하지만 나는 걱정이 되는 걸 어쩌겠나. 자네들 실력은  50위권 밖으
로 알고 있는데, 산을 내려간 무인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네."
염융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일백마 서열 1, 2, 3위를  거머
쥔 적이 있지만 비무를 하지 않았기에 진정한 실력이라 인정하는 사람
은 누구도 없었고,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서 하는 말이었는데.
"저도 물론 그 겁천십웅인가 하는 무공을 얻고 싶지요,  하지만 이곳
에 영물이 한 마리  있어서 말입니다. 그 놈에게  내단(內丹)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해야할 것 같아서요, 안 그렇습니까? 창마(槍魔) 대협."
추기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머지 원로들이  창마를 포위한
하며 몸을 움직였다.
"허억!"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인 듯 창마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
왔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다. 유웅창을 비롯한 각 문파의 수뇌들 또
한 휘둥그레진 눈으로 창마를 주시했다.
"놀라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군요. 그럼 원래의 영물의  모습으로 돌
아가는 건 어떻습니까? 아미타불!"
"무슨 말이냐, 내가 영물이라니."
이내 표정을 수습한 창마가 수중의 창을 불끈 틀어쥐며 외쳤다.
"킬! 창마, 왜 이러나 이거. 능자한이  뒈지면서 다 말했다고. 하지만
네 놈의 정체는 말하지 못했어. 말하는 순간 가루가 되어버렸거든."
한쪽에 가만히 서있던 야혼이 앞으로 나섰다.
"으음! 그럼 능자한은 갈융과 싸워 죽은 게 아니란 말이더냐?"
"아냐, 갈융과 싸워 뒈진건 맞아. 자꾸 살아나기에 손을 봐줬을 뿐이
지만."
"어떻게 너희들이…."
잠시 말을 더듬던 창마가 고개를 돌려 고명지의 허리춤을 주시했다.
"그랬군, 제마성검(制魔聖劒)을 가지고 있었어."
은색으로 빛나는 검 손잡이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
든 정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수문주를 비롯한  수인대의 전멸은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앙림이란 놈이 먼저 시작했어. 근데 과거 이름은 뭐냐?"
"쿡! 과거의 이름이라…. 100년  전엔 전대용(全大勇)이란 이름이 있
었다."
"구유창(九幽槍) 전대용(全大勇)!"
유웅창이 질겁한 듯 고함을 질렀다. 구유창 전대용, 과거 성모척살대
로 떠났던 무인 중 비교적 상위권에 속했던 사람이다.
그의 성명절기인 구유창법은,  혈운마령창(血雲魔靈槍)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산동악가의 혈운창법과 쌍벽을  이룬다 할 정도로 대단했
다. 그랬던 자가, 전혀  다른 얼굴, 다른  모습으로 마도련에 있었다니.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 이름은 버린 지 오래다. 지금은 트롤 1호라 불리고 있다."
트롤, 이계 생명체라 하였다. 1장 키의 거대한 동체와 엄청난 재생력
과 파괴력을 가진 생물로, 생긴 건 추했지만 트롤의 특성과  무공이 합
쳐지자 상상할 수 없이 강해졌다.
"자신이 있나 보군?"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는 창마를 향해 나지막이 이죽거렸다.
"너희들은 모른다. 트롤 1호가 되어 내가 얻은 게 무엇인지를."
창마의 얼굴에 싱긋 미소가 어렸다. 처음 일백마가 되었을 때 자오금
철에 시험을 해 보았다. 8치, 그가 자오금철에 낸 흔적이었다.  물론 다
른 무인들 몰래 뒤편에 흔적을 남겼지만 그  때의 기분은 말로 표
현하기 힘들었다.
그로부터 50년의 세월이 흘렀고, 지금은 1자도  가능할 것이다. 결국
겁천십웅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서고 말았다.
창마가 편안한 얼굴로 일행을 향해 말할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야혼의 궁금증은 따로 있었다. 낭인 호인 묘인 등, 수인에 이어 트롤이
라는 이상한 명칭 때문이었다.
"트롤?"
"지금 보여주겠다. 트롤이 무엇인지…. 쿠아악!"
양손을 활짝 편 창마가 고개를 쳐들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일행
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찌이익! 찌이이!
마천루 원로들을 비롯한 철마문과 요화문 무인들의 얼굴이 경악스럽
게 변했다.
5척 단구였던 창마의 키가 점점 커지더니 어느새 1장에 달하는 거대
한 동체로 변했다.
"세상에…. 어찌 저런 괴물이."
유웅창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인물들 또한 나직한 신음을 토해냈다. 붉은 광채를 쏟아내는 눈
과 연녹색의 동체, 그리고 긴 팔다리는 괴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일행이 기절할 듯 놀란 건 단순히 창마의 모습 때문만은  아
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전율적인 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누구 한 명  고수 아닌 자가 없다. 나름대로 자
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아니던가.
초라함, 트롤로 변한 창마 앞에서 일행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트롤로 변해서 내가  얻은 건…. 겁천십웅에  필적하는 무공이었다.
아울러 무한한 생명도."
"까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씨팔! 기껏  200년 정도 사는걸 뭔 자랑이
라고. 그리고, 뭐 겁천십웅에 필적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옆에
없다고 막말을 해도 되는 거냐? 구약종  영감이 지하에서 울겠다 씹탱
아."
"멈추게, 자네가 상대할 자가 아닐세."
앞으로 걸어나가는 야혼을 유웅창이  가로막았다. 그의 생각엔 지금
이곳에 있는 무인들 중 1대 1로 창마를 이길만한 무인은  없었다. 최하
3명 이상은 합공을 해야 평수를 이룰 정도였다.
그런 자를 향해 혼자 나서는 야혼이 무모하게 보였다.
그러나.
"놔두십시오, 문주님. 우리  연장문주가 오랜만에 무공  자랑을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려. 원래 저 인간은  주변에 여자들이 많으면 참질
못하거든요."
"아미타불! 곰 시주 말이  맞습니다. 더구나 저 트롤인가  하는 놈은
겁천십웅을 모욕하지 않았습니까."
*********************
내일 귀면탈 완결본인 7권이 배포될 것 같습니다.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일단 제가 출판사에 보낸 분량은 조판으로 420페이지 였습니다.
최선을 다해 수정은 했는데 결과가 어찌 될지...
이 기회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완결나면 보시겠다는 생각은 버리시고, 책이 나올때마다 봐주십시오.
금강님도 논단에서 말했지만 완결날때까지 기다리시면 완전한 책을
보실 수가 없습니다. 대여점 체계의 단점이라 할 수 있지만 책이
나가지 않으면 출판사에서는 줄여달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작가 입장에서는 본인 책이 안나간다는데 길게 쓸수도 없지요. 흥도 나지 않고요.
신바람 없이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건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내용을 줄이고, 어설픈 마무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4권(7권 완결 예상)까지 책을 냈는데 5권에서 마무리 해달라고
하였답니다.
이제 전개 과정에 있는 소설을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책을 더 이상 쓸수 없습니다.
사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대여점을 통해서 빌려보시기만 해도 작가들은
본인의 글을 마지막까지 쓸수가 있습니다.
넷 상으로 보았다고 끝내지 마시고, 재미가 있으셨다면 대여점을 통해
한번씩 더 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대여점에 없다면 들여놓으라고 독촉도 해 주시구요.
나한의 부탁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유웅창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하오밀문을 창시한 인물이 겁천십
웅의 일인이었던 십전수 구약종이란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개파만 하였지 진신 무공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였던 그가 아
니었던가. 일부 남긴 무공은, 익혀봐야 삼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물론 몇 년 전에 구약종의 무공이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에 하오밀문
이 멸문당했지만, 누군가가 하오밀문을 노리고 낸 소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두고보시면 압니다. 그나저나 저 놈에게는 내단이 있어야 할텐데….
연작문주 조심해서 잡게나. 되도록 생포하는 쪽으로 말이네. 아미타불!"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속았단 말…."
야혼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유웅창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뿐만 아니
었다. 야혼의 본 실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 걸음씩 나아가는 야혼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뭉클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백무(白霧)와 함께 폭발적인 기운이  솟구
치기 시작하였다. 결코 창마에 못지 않은 엄청난 기세였다.
"크르! 태을건곤심법(太乙乾坤心法)을 익혔더냐?  큭! 무공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더니 거짓말이었군…."
"무슨 말이냐? 창마."
다가서던 야혼의 몸이 우뚝 멈췄다. 구약종을 만난 것처럼 하는 창마
의 말 때문이었다.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말거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되느니
라.  한가지는 말해줄 수 있다. 200년  전, 두 번째 패천십비(覇天十比)
가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일행의 얼굴이 일제히 변했다. 패천십비, 겁천십웅 10명의 비무를 일
컫는 말이 아닌가. 잠사옹에 의해  알려진 비무말고 또 한번의  비무가
더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200년 전에.
"그땐 누가 이겼나?"
뭔가 윤곽이 잡혀가는 듯한 느낌에 야혼이 재차 물었다.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 전부 졌다고 하더구나. 겁천십웅이라며 명
성만 높았지 별 볼일 없었단 말이다."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른 창마가 수중의 창으로 힘차게 바닥을 찍었다.
쿠-웅! 철컥!
땅울림 소리와 함께 창 끝에서 2척 길이의 칼날이 튀어나와 검은 광
채를 토해냈다. 남반부 지방에서 풀을 벨 때 쓰는 길다란  자루가 달린
낫이 창마의 무기였다.
그러나, 일행 대부분은 창마의 무기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겁천십웅
전부가 패했다는 그의 말은 그 어떤 사실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영원한 강호의 전설, 그들을 제외하곤 무림을 논하기 힘들다고  하였
던 겁천십웅이 패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무인들과 달리 하오밀문 삼인방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
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아미타불! 놀랄 일도 아니구먼. 200살이 넘었으면, 새벽에 물건도 서
지 않을텐데 지는 건 당연하지."
"암만, 육승 네 말이 맞아. 오입도 못하는 놈들에게 지는 게 더 이상
한 거야. 이겨봐야 본전치기 아니냐. 소문낼 일이 없지."
"연작문주, 저 늙은이에게 젊은이의 힘을 보여주시게. 5일 밤낮을 해
도 끄떡없는 문주의 정력을 말이네."
"쿡!"
"킥!"
고명지와 냉소소는 나직한 웃음을  토했다. 겁천십웅이 패한 이유가
정력 때문이라니.
"야혼, 빨리 해라. 이러다 입동 늦어지겠다."
간신히 웃음을 참아낸 냉소소가 천비동 입구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
다.
"냉 시주 말이 맞네 연작문주. 빨리 하시게. 더 이상 나올 것도 없구
먼. 자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우린 저쪽에 앉읍시다. 나령 누님, 식사 준
비는 해 오셨소?"
"무-물론이지 동생. 충분히 싸왔어. 10일은 먹을 수 있을 거야."
추기영이 자연스럽게 누님이라 불렀던 사실도, 여러 사람이 보고  있
다는 사실도 잊고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학!"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나령이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언니! 아예 자랑을 하슈, 동네방네 자랑을 해.'
'이 년아 나도 모르게 나온걸 어떡해,  그런 네년은 음식보따리는 왜
들고 가는데.'
'배고프니까 그러지. 하여간 요화문 망신은 언니가 다 시켜.'
"여누님은 뭘 그리 속달거리는 거요. 빨리 밥이나 가져오지 않고."
"아-알았어 태웅 동생."
"허!"
유웅창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창마와 싸우는 야혼에 대해선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다. 마치 놀러 나온 사람들처럼 후미진 곳에 자리
하더니 주섬주섬 음식을 꺼내고 있다.
하지만 유웅창이 기가 막힌다 한들, 트롤로 변한 창마만 할까.
태웅 일행을 쳐다보던 창마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몰아쳤다.  겁
천십웅을 뛰어넘기 위해 괴물이  되었다. 인간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은
무공이, 겁천십웅에 버금가는 무공을 익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즐기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죽일 놈들!"
"서운해하지 말아 임마. 원래 늙는다는 건 다  그런 거야. 그 시간에
내단이라도 좀 만들었으면  지금처럼 서운한  대접은 받지  않았을 텐
데…."
"쿠-아앙!"
야혼의 이죽거림을 참지 못한 창마가 거친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
다. 연녹색이었던 그의 동체에서 녹색 광채가 줄기줄기 쏟아져 나왔다.
1장 길이의 자루를 가진 낫 또한 창마의 피부색과 같이 녹색으로 빛났
다.
순간, 전면을 향하던 야혼의 신형이 10여 개의 환영을 남기며 사방으
로 움직였다. 허허환환보법(虛虛幻幻步法), 무려 18개의 환영을 만들 수
있다 하였던 구약종의 보법이 300년 만에 첫선을 보였다.
"이까짓 환영으로 이 탈혼겸(奪魂鎌)을 피할 수 있으리라 여겼더냐?"
백색 운무를 남기며 움직이는 환영을 향해  탈혼겸이라 이름지은 자
신의 무기를 사정없이 횡으로 쓸었다.
슈아악!
가공했다. 푸른 잔상을 남기며 움직이는 탈혼겸은 환영으로 만들어진
야혼의 동체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공간마저도 찢어버리는 엄청난 공
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야혼의 동작 또한  빨랐다. 탈혼겸에 의해  환영이 사라짐과
동시에 또 다른 환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전과는 또 달랐다. 환영들은 땅바닥에만 있는 게  아니라
허공 중에도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지상과 허공에 9개 씩, 전부 18개의 환영이 창마를 완전하게  포위하
는 순간 야혼의 공격이 터졌다.
모든 환영이 동시에 오른발을 치켜올리며 창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백색 광채를 뿌리는 야혼의 다리는 유일한 퇴법(腿法)인  무변무적퇴
(無變無敵腿)였다.
"타핫!"
야혼의 입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터지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던  오른
다리가 사정없이 공간을 찢었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동시에 18개의 발에서 솟구친 새하얀 강기( 氣)
가 창마의 전신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각강(脚 ), 검강 도강이
아닌 퇴법에 의해 강기를 시전하고 있었다.
"쿠아아!"
그러나 성모척살대 일인이었던 창마의 무공도 약하지 않았다. 실체와
허상을 구분할 수 없는 18개의 강기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은
태연했다. 강렬한 녹색으로 변한 동체를 흔들며 광폭한 고함을 내질렀
다.
"탈혼벽(奪魂壁))!"
짧게 쥔 탈혼겸을 전후좌우로 쓸어내며 그  자리에서 팽이처럼 회전
했다. 순식간에 사방 가득 푸른 기운이 가득 들어차고, 강기에 의한 벽
이 형성되었다.
슈카카앙!
백색과 녹색의 강기가 거북한 소리를 지르며 소멸해 감과 동시에 쭉
늘어난 창마의 탈혼겸이 호선을 그렸다. 놀랍게도, 창마는 18개의 환영
중에 야혼의 실체를 감지해낸 것이었다.
"이야합!"
목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오는 탈혼겸을 발견한  야혼이 짤막한 고함
을 내지르며 더욱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오른  손을 힘차게
뿌렸다. 일순 그의 팔목에서  붉은 광채가 한바탕  쏟아지더니, 창마의
전면을 가득 덮었다.
키이익! 키익!
음공에 비견할 정도로 엄청난 소음과 함께 진득한 살기가 사방에 요
동쳤다. 사사만화류(死死滿花流), 자능한과 대결에서 이미  겪은바 있기
에 이번에 전력을 다했다.
전력을 다한 사사만화류는 가공했다. 손가락 한 마디 만했던  혈신월
은 거의 주먹만하게 커졌다. 혈신월을 둘러싼 붉은 강기 때문에 크기가
커진 것이었다.
"탈혼무(奪魂舞)!"
전면을 붉게 장식하며  날아오는 혈신월을 발견한  창마가 쓸어가던
탈혼겸을 거두어 종횡으로 휘둘렀다.
캉! 캉캉캉! 카카강!
겁천십웅의 무공에 근접했다 하였던 그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
다. 무려 17개에 달하는 혈신월을, 장병기인 탈혼겸으로 막아내고 있었
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혈신월을 퉁겨낸  창마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
로 야혼을 향해 다가들었다.
"구약종 영감을 만났다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아야지."
근접전은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낮게 소리친 야혼이 왼손을  횡으로
쓸어냄과 동시에, 주저앉듯 자세를 낮췄다.
"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곤  트롤로 변이한 나를 어쩌
지 못한다."
야혼의 왼손에서 쏟아진 혈신월을  보고도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설사 강기라 할지라도 트롤로 변한  신체를 완전하게 자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무인이라면 꿈에라도  얻길 원하는
금강불괴지신을 이미 얻었다.
조그마한 상처는 무시하고 놈의 몸통을 잘라내는 게 먼저였다.
카앙! 깡! 파앗!
쇳소리와 함께 튕겨 나간 혈신월과 함께 창마의 몸 이곳저곳에서 핏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창마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는 인
간의 피처럼 붉은 색이 아니었다. 곤충들에서나 볼 수 있는  녹색의 피
가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다음이었다. 잠시 흘러내리던 피가 순식간에  멈
추더니 잘렸던 피부들이 급격하게 아물어 가고 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상처에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자세를
낮춘 야혼의 목을 향해 탈혼겸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어디로 피할 거냐? 놈!"
창마의 얼굴에 진득한 살기가 어렸다.  이미 사정권 안에 있는 놈은
피할 곳이 없다. 설사 나려타곤(懶驢打滾)수법으로 몸을 굴린다 하더라
도 탈혼겸의 방향만 바꾸면 될 터였다.
"좋아하지 마 임마! 나도 네 놈처럼 괴물수준에 올랐으니까?"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목에 칼날을 대기
는 싫었던 탓이었다.
카앙!
"허억! 네 놈도 금강불괴…. 크악!"
화들짝 놀라며 야혼을 주시하던 창마가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나
직한 비명을 내질렀다. 깜짝 놀라 내공이 약간 흐트러진 찰나에 뒤쪽으
로 날아갔던 혈신월이 파고든 것이었다.
"집나간 자식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임마."
중심이 흐트러져 잠시 비틀거리는 창마의 가슴팍으로 다가든 야혼이
탈혼겸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을  힘차게 틀어쥐었다. 그런 다음  무릎을
차올림과 동시에 쥐고 있던 창마의 오른팔을 사정없이 아래로 꺾었다.
빠악!
"크아-아악!"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창마의 팔꿈치가 직각으로 꺾였다.
"이건 공공십팔수(空空十八手)라 불러!"
바닥으로 떨어진 창마의 탈혼겸을 멀리 차낸  야혼의 양손이 무수한
그림자를 남겼다.
까앙! 깡! 깡깡깡!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창마의 전신에서 붉은  불똥과 함께 녹색의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으허엉!"
울부짖듯 고함을 내지른 창마의 왼손이 야혼의 등판을 향해 빠른 속
도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미 창마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던 야혼은
창마의 무릎을 타고 오르며 창마의 목을 잡고 몸을 수평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아래쪽으로 스쳐지나가는 창마의 왼팔을 향해 오른발을 힘차
게 질렀다. 물론 무변무적퇴를 운용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아-악!"
창마의 입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비명소리 흘러나왔다. 푸른빛을 발하
던 길다란 손톱이 자신의 가슴팍에 박혀든 것이었다.
손을 뽑아내면 금방 낫는다고 하지만 부상을 당할 때 생기는 고통까
지 덜어주진 않는다.
"늙으면 원래 힘 조절이 잘 안 되는 법이야 임마."
낮게 외친 야혼의 신형이 공중 제비를 돌더니 창마의 머리에 엉덩이
를 걸친채 두 다리로 목을 조이기 시작하였다.
"이건 목조르기 무공이라 불러. 너 같은 괴물을 잡을 때 흔히 쓰이는
무공이지."
문득 창마의 오른팔을 쳐다보던 야혼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창마
의 몸에서 새로운 발견을 했기 때문이었다. 피부의  재생속도는 자능한
에 비해 현저하게 빨랐지만 부러진 뼈는 원래대로 복구하지 못하고 있
다. 트롤로 변이한 자의 치명적인 약점이지 싶었다.
"죽인다-아!"
가래 끓는 소리를 뱉어낸 창마가 왼손을 뻗어 올림과 동시에 자신의
몸을 뒤로 내 던졌다. 그러나, 창마의 머리맡에 앉은 야혼은 내려올 생
각이 없는지 더욱 강하게 목이 조이며 창마의 왼팔을 잡아챘다.
그 다음 동작은 더욱 빨랐다. 뒤쪽으로 몸이 날아가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허리춤에서 비도 하나를 꺼내 창마의 면상을 향해 사정없이 찔러
버렸다.
"이건 혈향비도류(血香飛刀流)의 응용인데, 일명 눈알파기야."
그랬다. 야혼의 왼손에 쥔 비도가 파고든 곳은 다름 아닌 창마의  눈
이었다. 내공에 의해 이루어진  금강불괴지신이 아니라면 눈이나  귀속
같은 곳은 과거와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크-아악! 아-악!"
왼쪽 눈동자에서 밀려드는 엄청난 고통에 짐승  같은 비명을 토해낸
창마의 신형이 바닥을 향해 거칠게  떨어졌다. 목을 죄고 있는  야혼을
떨쳐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바위마저 부수고 땅속 깊이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야혼의  동
체를 떨구지 못했다.
눈에 박혔던 비도가 빠져나가며 더욱 강렬한 고통이 밀려왔다.  비도
만 빠져나간 게 아니다. 손목을 꺾어 뽑아낸 비도 끝에는 주먹
만한 눈알이 걸려 녹색 피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창마의 신형이 사방을 굴렀다. 강기로 가득 덮인
두 사람의 동체가 움직일 때마다 바위들이 부서져  나갔다. 울퉁불퉁하
던 계곡 바닥이 평지처럼 변해갔으나 두 사람의  동체는 여전히 한 몸
이었다.
"곰 시주, 이것 좀 먹어보게. 해구신을 잘게  썰어 포로 만든 것인데
아주 맛있구먼. 그나저나 연작문주는 드디어 제  짝을 만난 것 같으이.
벌써 반 시진 동안 엉겨붙어 떨어지질 않는 걸 보면 말이네."
연신 잘게 썰어진 육포를 집어먹던 추기영이 그  중 하나를 들어 태
웅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태웅은 추기영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잔뜩 인
상을 찌푸리며 뭔가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런 염뱅할 종자가, 묻는 말엔 대답은…."
"육승, 한가지만 물어보자. 저기 저놈 말이야. 상처난  부위가 저렇게
빨리 재생하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가 뭐라 생각하냐?"
"아미타불! 뭔가 알아낸 건가?"
느닷없는 질문에 추기영을 비롯한 일행의 시선이 태웅을 향했다.
"아니 알아낸 게 아니고, 저 놈의 피가 어떤 기능을 하지  않을까 하
는 생각 때문에…."
"피?"
"저 놈과 자능한이 다른 건 피밖에 없잖냐. 그래서 말인데…."
"어이 연작문주, 그 칼끝에 달린 눈깔 좀 이쪽으로 던져보게."
고개를 끄덕인 추기영이 돌려 야혼을 향해 소리쳤다.
"기절하겠군. 누가 그랬어 우리가 마도련 최고라고."
야혼과 추기영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던 종마가  잔뜩 불만스런 어투
로 중얼거렸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창마의 정체부터  시작하여, 모든
게 놀라움 투성이었다. 더더욱 황당한 일은 엄청난 무공을 보유한 야혼
이었다.
불과 2달 전, 아니 1시진  전까지만 해도 녀석을 이류정도로 취급했
다. 투견공마저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떨거지.
그런데 지금 보이는 무공이라니,  십전수 구약종의 무공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는 자가 바로 야혼이었다. 마도련 원로들보다 더한 강자.
"도마(刀魔), 너는 알고 있었지?"
"당연히 알았지, 비무도 해봤다."
"그래?"
종마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물론 눈앞에서 창마를 희롱하듯  가
지고 놀고 있지만, 실제 싸워봤던 도마의 말을 더 듣고  싶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내가 땅속 10장 깊이까지 도망쳤다."
"뭐?"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때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저 녀석
뿐만 아니라, 저기 있는 돌 중이나 곰 녀석도 마찬가지고."
도마가 손을 들어 추기영과 태웅을 가리켰다. 야혼이 던진 눈알을 가
지고 피를 받는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 또한 가관이었다. 피를 받으려면 새지 않는 단지
가 필요하다며 주변에 돌을 깎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맨손으로.
"씨팔! 도대체 저 놈들은 뭐야?"
결국 종마는 나직한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다. 세 놈 전부 자신보다
약하지 않았다. 추기영이나 태웅 놈은 원로원 무인들과 비슷했고, 야혼
은 오히려 앞서있다.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아이들이 그러지 않았나. 하오밀문의 개종자들이라고."
"개종자란 그 말은 맞다. 저 하는 짓 좀 봐라."
태웅과 추기영이 하는 짓을 쳐다보던 종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며 말했다.
그 순간, 태웅과 추기영은 야혼이 던진 창마의 눈에서 피를 뽑는  작
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그러니까 곰 시주  말은 이 피가  만병통치약이 될 거라
이 말인가?"
"이제 시험해 보면 알겠지. 첩형소저 칼 좀 잠깐 빌려주십시오."
"너희들 정말!"
해쓱한 얼굴로 태웅과 추기영이 행동을 지켜보던  고명지가 결국 고
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태웅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수인대나 창마의
몸에 대한 비밀이 아니었다.
그들의 몸을 재생시키는 매개체가 피라고 하면서  그걸로 약을 만들
어 팔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었다. 비밀이 아닌 돈벌 궁리.
"아미타불! 첩형 시주는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
로 저런 놈들을 무수히 보게 될 터인데….  곰 시주 얼른 잘라보게. 자
네 팔뚝을 길게 그어봐, 아주 깊이 파보라고."
"그래? 근데 연장문주가 지친 모양인데…."
"설마…. 5일간 하는 정력을 가진 앰병할…, 아앗!"
고개를 돌려 야혼을 쳐다보는 순간 팔뚝에 느껴지는 고통에 저도 모
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여기 피난다, 조심 좀 하지. 나보다  먼저 팔을 가져다 대면
어쩌란 말인가. 얼른 이 약을 발라보게나, 육승."
"이런 개씨팔타불 봤나. 아무리 내가  인간성이 좋아도 그렇지, 칼마
저 한번 달라고 달려든단 말인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추기영이 재빨리 푸른 액체를 찍어 상처에 발랐
다.
"얼레레! 된다, 정말 상처가 아물고 있어. 연작문주!"
자신의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추기영이 벌떡 일어나 몸을  날렸다.
태웅의 말 대로였다. 창마의 몸에서 흘러나온 녹혈은  엄청난 치료제였
다. 칼로 그었던 추기영의  팔목이 순식간에 아물어버리는  불가사의한
광경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같이 가자, 참 냉 소저도 오세요. 아무래도  저놈 피를 뽑아 얼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너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추기영과 태웅의 뒤를 따랐다. 거의  막바지
에 이른 싸움 때문이었다. 온 사방에 흔적을 남기던 야혼과  창마의 동
체가 조금 전부터 잠잠해져 있었다.
"수고했네 연작문주, 지금부터는 우리가 맡음세.  저기 가면 먹다 남
은 음식이 좀 있을 걸세. 열심히  찾아보면 해구신 가루도 좀 나올  거
야. 끙차!"
여전히 다리를 감고 있는  야혼의 몸을 들어올려 방금  전 있던 그곳을
향해 던져버린 태웅과 추기영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창마
를 살폈다. 죽었나 살았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살아있네, 빨대 같은 것 있나 한번 찾아보게나."
두 사람의 동작은 신속했다. 주변의 돌을 주워든 추기영은  황금빛으
로 변한 손으로 쓱쓱거리며 돌을 깎아 단지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태웅
은 멀리서 주워온 나뭇가지를 대롱형태로 다듬었다.
"아미타불! 다 됐는가?"
"준비 됐다. 단지 이리 줘!"
"이 친구들아 무슨 짓인가 그게."
잔뜩 찌푸린 얼굴의 종마가 두 사람에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그런 소리 마쇼 영감. 이 놈 피는 말이오, 절세의  영약이란 말이오.
내상은 몰라도 외상엔 직빵이오 직빵. 여기 있는 단지 5개만 채우고 그
만 둘 테니까 말리지 마쇼."
"이놈들아 그게 어디 단지냐, 물동이지."
"아! 거 참 말 많네. 내가  영감더러 피를 달라했소. 자꾸 말리면 이
놈 목을 잘라서 피를 뽑아낼 테니까 그렇게  아쇼. 육승 뭐해 임마, 목
에 대롱 안 꼽고."
"아미타불! 잠시만 기다리시게. 내공을 쫌 끌어올려야 할 것 아닌가."
잠시 호흡을 고른 추기영의 신형이 황금색 찬란한 빛을 사방에 뿌리
기 시작하였다. 단단한 피부에 구멍을 내기 위해선 그 또한  전 내공을
뽑아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임마. 피 식어버리면 그나마 뽑지도 못한다."
"알았네."
태웅이 만든 대롱에 대고 내기를 잔뜩 주입한 추기영이 창마의 목을
향해 천천히 찔러 넣었다.
순간.
"크아앙!"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던 창마가 목에서 오는 고통에 정신을 차렸는
지 거친 고함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런 염병할 종자가, 조금만 더 참아라 했잖아."
반사적이었다.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평소처
럼, 정신을 차린 창마를 기절시키기 위해 한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몸을 일으키는 창마를  향해 황금빛으로 변해있던  추기영의 철탁이
날았고, 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크아악!"
주변이 흔들릴 정도로 비명을 내지른 창마의  신형이 머리부터 천천
히 가루로 변해갔다.
"안돼! 약은 주고 가야할 것 아냐!"
"아미타불! 창마시주, 그  단단하던 몸이 어찌  철탁한방에 가버린단
말입니까? 개봉의 육덕칠은 수십 대를 맞았어도  끄떡도 안 했단 말입
니다!"
태웅과 추기영의 안타까운 고함소리에도 불구하고 창마의 신형의 깨
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야! 이 개자식아, 좀 살살 때릴 것이지, 그렇다고 가루로 만들면  어
쩌란 말이냐?"
"이 앰병할 종자가? 나는 그냥 휘두르기만 했을 뿐이란 말이다. 기절
만 시키려 했다고."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붓던 두 사람이  이내 허탈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내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생일대 최고의 약을 발견
했는데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기에  더욱 황당
했다.
"이 빌어먹을 시주가 피를  나눠주기 싫어서 자살한 모양이네  그려.
트롤 같은 놈, 피는 자꾸만 생긴다고 하드만."
낮게 투덜거린 추기영이 이내 야혼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서 작업해야지 임마.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냐 임마. 앞으론
좀더 신중하게 하라고. 그래도 1호라  했으니까 다행이다. 트롤이란 놈
들이 또 있을 테니까."
야혼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추기영을 향해 말했다. 아깝다는
얼굴로.
"아미타불! 소승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기 자오
금철 위쪽에 말입니다.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저것들 없어버리는 게 어
떻겠습니까. 소승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좆도 아닌 새끼들이 지랄을
떨어놓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타앗!"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오른 손을 활짝 펼치며 자오금철을 향해
날았다. 순간 태웅 근처에 뒹굴던 비천묵령도가 빨리듯 그의 손
의 딸려가고 잠시 후 검은 광채가 허공을 갈랐다.
스스스!
"누구 나랑 같이 폐관할 사람 없는가?"
가루로 흩어지는 자오금철 상층부를 쳐다보던 종마가 마천루 원로들
을 향해 말했다. 방금 야혼의  일도에 의해 모군상과 서음래가  만들어
두었던 1자 가량의 흔적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장강의  앞 물을 어쩌고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자신이 초라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도마영감! 이거 업무추진비로 주는 거니까 냉소소 잘 도와주시오."
냉운형과 냉소소에게 받았던 차용증을 도마에게 던진 야혼이 빠르게
천비동 안으로 들어갔다.
"뭡니까?"
잔뜩 궁금한 얼굴의 냉소소가 도마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자신이
야혼에게 가져다 주었던 그 차용증이었다.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가져다 주었을 뿐 아버지가 야혼에게 어느 정
도 돈을 약속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빚 문서입니다. 사황문이 야혼에게 빚을 많이 졌군요."
"네?"
냉소소가 의아한 얼굴로 도마를 쳐다보았다. 처음 듣는 말이었던  탓
이었다. 그러나 도마가 내미는 문서를 보고는 고명지를 향해 시선을 돌
렸다. 아래쪽에 그녀의 서명이 있었던 것이다.
"제가 증인이 되었어요. 앞으로 이자를 지불하지 않으면 강제 집행하
도록 동창에서 손을 써달라고 하더군요."
싱긋 미소를 지은 고명지가 자오금철을 향해 오른 손을 슬쩍 휘둘렀
다. 대여섯 개의 황금빛 금환이 전방으로  밀려가고, 닫혔던 천비동 철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세상에…."
어이없는 얼굴로 야혼이 들어간 천비동을 쳐다보았다. 설마하니 사황
문에서 지불하기로 하였던 돈이 이정도  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결국
사황문의 모든 재산은 야혼의 수중에 있었던 거였다.
"아미타불! 사실 옆에  없으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연작문주 돈버는
기술은 놀라울 정돕니다. 기루에 손님을 소개시켜주고 수고비를 받아먹
은 인간이 바로 연작문줍니다. 돈버는 덴  귀신이지요. 앞으로 돈 걱정
은 덜었으니 잘됐습니다 그려, 그만 들어가시지요."
"돈 걱정만 덜었나? 도마 영감이 고기도 가져다  줄 테니 먹을 걱정
도 덜었지."
추기영을 뒤따르던 태웅이 슬쩍 도마를 쳐다보며 말을 남겼다.
살아 있는 전설(傳說).
"연작문주는 저 놈이 욕심나는 모양일세."
천비동 안으로 들어온 추기영이 야혼 곁에 쭈그려 앉으며 말을 건넸
다. 야혼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장소는 광장이라 불러도  될 정
도로 넓었다.
"따로 돈 받을 필요 없이 저 놈들만 뽑아 가면 될 것 같아서. 저것들
10개면 10만 냥은 받지 않을 까 싶은데…."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야혼이 쳐다보고  있던
것은 광장 천장에 박힌 야명주(夜明珠)였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우린 맨 마지막에 가자."
추기영을 뒤따라온 태웅 역시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 곁에 앉았다.
"그런데 저 것들이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통로인가 본데…."
광장 안을 휘 둘러보던 태웅이 전면 벽에 있는 5개의 동굴을 가리켰
다. 천연동굴에 인공이 가미된 동굴에선 서늘한 바람이 불어 나오고 있
었다.
"각각의 동굴을 통과하면 폭풍지옥대살진(暴風地獄大殺陣)이라는  두
번째 관문이 나타나네."
맨 마지막에 냉소소와 같이 나타난 유웅창이었다.
"폭풍지옥대살진?"
하오대문 삼인방뿐 아니라  천비동이 처음인 냉소소와  고명지 또한
궁금한 얼굴로 유웅창을 쳐다보았다. 기관이라면 몰라도 동굴  속에 무
슨 진(陣)이 있을까 싶었다.
"나도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땐 그랬네. 하지만 두 번째 관문에 들어가
보곤 알게 되었지. 이곳은 풍혈(風血)이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났는지 유웅창의  얼굴에 싱긋 미소
가 어렸다. 봉우리 아래쪽에 있는 무수한 바위계곡과 수없이 많은 동굴
이 만들어낸 자연 현상이었다.
계곡에서 불어온 바람이 귀곡봉의 수많은 동굴을 통과하면서 때로는
강풍으로, 때로는 미풍으로 나타나기에  바람을 만들어낸 곳이라  하여
풍혈이란 말이 생긴 것이었다.
"각 관문의 왼쪽에 보면 한 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네.
관문을 포기하는 무인들이 나가는 길일세. 먼저 들어가겠네."
일행을 향해 말을 남긴 유웅창이 탁탑마왕과  혈륜마웅을 데리고 오
른편 동굴로 몸을 날렸다.
"나 문주, 그 폭풍지옥대살진인가 하는 것말고는 더 없소?"
유웅창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야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령을 향해
물었다. 자신들의 선조가 만든 곳이 천비동일진대 유웅창도  거의 알지
못한 듯 해서 묻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령 또한 별반 아는 게 없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 3백년간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10명이 넘지 않는다고
하였네. 세 번째 관문인 검탄지옥필살진에서 전부 포기했다고 하더군."
"참네! 그럴바엔 뭐하러 이런 관문을 만들었지? 철마문 무인조차 통
과하지 못하는 곳이라면…."
여전히 의문점이 남았다. 철마문의 후예를 기다리기 위해 만든  관문
이라면 적어도 그들은 통과해야 옳다. 하지만, 모군상이 남긴 철혈무적
검법을 완벽하게 익힌 후예들조차 관문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아미타불! 연작문주 들어가면 알텐데,  뭔 머리통을 굴리고 난린가.
빨리 보물이나 챙겨 들어가 보세."
"그러지 뭐! 시작하자. 응차!"
"타핫!"
"키요!"
동시에 고함을 지른 세 사람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뭐하는 짓이냐?"
세 사람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냉소소가 천장을 쳐다보며 고함을 질
렀다. 순식간에 10장 높이까지 솟구친 3인이 천장에 박힌  야명주를 뜯
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야혼 일행은 말없이 자신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앞으론 이곳에 들어올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이거 돈  좀
되겠네."
네 개의 야명주를 떼어온 야혼은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아래쪽
에서 볼 때와는 달리 야명주는 주먹만했다. 하나에 2만냥은  받을 성싶
었다.
"이곳을 뚫을 자신이 있는 거냐?"
"내가 못 들어가면 누가 들어가겠냐. 이곳의 기연은 우릴  위해 준비
된 거라고. 근데 언니들도 우릴 따라 올거유?"
"당연하지요, 한 식군데."
여옥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태웅 곁으로 다가가며 팔짱을 덥석 끼
었다.
"이거 왜이래요 누님! 색색만화공 전수는 전부 끝났습니다."
질겁한 태웅이 여옥상의 팔을 뿌리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여옥상은 굳건히 붙잡은 태웅의 팔을 놓지 않았다.
"동생은 색공 전수가 끝났는지 몰라도 나는 아직 멀었어.  적어도 몇
년은 더 배워야 한단 말이야."
"뭐해 임마! 빨리 안 들어가고."
당황한 태웅이 야혼을 향해  소리쳤다. 찰거머리에게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터였다.
"아미타불! 맞네 연작문주, 빨리 들어가세."
추기영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령의  눈치를 슬슬 살피는 것 같더니
재빨리 가운데 동굴로 도망치듯 몸을 날렸다.
잠시 후.
별다른 사건 없이 일직선으로  만들어진 동굴을 따라 10여  장 정도
전진한 일행 앞에 석문(石文)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네, 그냥 밀고 들어가면 되네."
의문스런 얼굴로 쳐다보는 야혼을 향해 나령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
다. 벌써 3번째 방문이지만 단 한번도 이곳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
었다.
"도대체 폭풍지옥대살진이 뭐 길래."
그르릉!
기관장치가 되어있는 듯, 두께만 해도 1장이나 되는 석문은 쉽게  열
렸다.
"아미타불! 참으로 묘하게 생긴 동굴일세 그랴."
가장 먼저 안쪽으로 들어선 추기영이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한 불호
를 읊었다. 그의 말대로  동굴은 단순했다. 위쪽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부채꼴 모양일 뿐 별다른 위험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오목한 전면 벽에 조그마한 구멍들이 촘촘
히 뚫려있다는 것과, 광장 가운데 1자 높이의 단이 세워져 있다는 정도
였다. 이런 동굴을 폭풍지옥대살진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여놓았
다는 자체가 이상했다.
"저기 보이는 단위에 올라서 보면 알 수  있어, 동생. 나머지 분들은
이쪽으로 몸을 피하는 게 좋아요."
입구 쪽의 조그마한 틈바구니를 나령이 가리켰다.  폭풍지옥대살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장소가 그곳이었던 거였다.
"구녁이 50개나 되네 그랴. 일단 올라타 보라고?"
고개를 끄덕인 추기영의 신형이 순식간에 단위로 올라섰다.
스르릉!
드르르! 드르르!
"아미타불! 연작문주 저기 보이는 동굴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
리는 것 같은데…."
추기영이 서 있던 단이 아래쪽으로 내려감과  동시에 각각의 동굴들
로부터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느닷없는 변화에 깜짝  놀란 추기영
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맞아 동생, 저기 보이는  갈수록 넓어지는 형태로 되어  있어. 문이
열림과 동시에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쳐, 그 속에…."
휘이잉! 푸아악!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50개의 동굴에서 엄청난 바람이 쏟아
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헛!"
깜짝 놀란 추기영이 내공을 끌어올려 천추근을 시전했다. 그러나, 점
점 세지는 강풍은 힘으로 막아설 성질이 아니었다.  조그마한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바람 줄기들의 목표는 추기영이 서 있는 단이었다.
슈아앙!
"추 동생 피해!"
거북한 음향이 울리자마자 나령의 신형이 추기영을 향해 날았다.  하
지만 요화문의 문주라는  그녀의 무공으로도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람
속을 뚫기는 쉽지가 않은지 나아가는 속도는 더뎠다.
"으아악!"
그런 와중에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추기영의 신형이 뒤로 날렸다.
"자오금철?"
추기영이 있는 곳을 주시하던 일행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
랬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밖에서 보았던 자오금철 조각들
이 암기처럼 날아들었던 것이다.
"울컥! 니미럴타불!"
한 움큼 피를 토해낸 추기영이 어이없다는 듯 전방 동굴을 쳐다보았
다. 단이 올라감과 동시에 문이 닫혔는지 광장 내부는 다시  정적 속으
로 빠져들었다. 아울러 조금 전 튀어나왔던 자오금철은 다시 원래의 자
리로 돌아가고 없었다.
"장대비보다 정력이 더 센 놈이 바람이구먼 그랴."
그저 놀랍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마음을 놓고 있었다지
만 무려 2갑자에 달한 공력을 가진 자신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씨부럴타불! 이번에 제대로 한번 해 보자고."
"그만 둬요 동생. 자오금철 전부를 한꺼번에 파괴하지 못할  거면 시
도하지 않는 게 나아요."
앞으로 나서는 추기영을 나령이 막아섰다. 수많은 무인들이 도전했지
만 지금껏 불패의 진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검기로
도 3치 흔적을 만들지 못했던 자오금철이 아닌가.
피하기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50개의 자오금철을 가루로 만든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봐야했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인 상황에서  유일하게 인상을 찌푸리는 인물.
비천묵령도를 불끈 틀어쥔 야혼이었다.
"자오금철도 50개, 지옥도법의 1초도 50개. 방향도 같고. 어째 기분이
으스스하네?"
"지옥도법? 그 무공도 익히고 있었어?"
곁에 있던 냉소소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십전수
구약종 무공과 투견공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었던 탓이었다.
"내가 말 안 했나? 너와 당가려가 불귀동을  빠져나갈 때 지옥도 꼬
리에서 구결이 떨어졌거든.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익혔지 뭐."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는 냉소소를 향해 그 때의 상황을 간단하게 설
명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옥도법 1초인  지옥수라참이면 방금 전 자오금
철을 전부 가루로 만들 수 있다고?"
"가루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오금철의 진행방향이 지옥수라참
을 펼칠 때와 같아."
"세상에…. 그럼 이곳에 만들어진 진은…?"
야혼이 지옥도법을 익혔다는 말보다  더욱 놀랐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모군상이 천비동을 만든 이유가 지옥도법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이상하단 말 아니냐. 어쩌면…."
이내 말을 흐렸다. 창마를 없앨 때, 그가 했던 말이 확신처럼 다가오
는 것이었다. 분명 창마는 모군상을 만난 것처럼 말했었다.
"가보면 알겠지…."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비천묵령도를 뽑아들고 앞으로 나섰다.
스르릉!
드르르! 드르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야혼의 몸에서  백색 운무가 뭉클거리
며 솟구쳐 올랐다.
푸아악! 슈아악!
비천묵령도를 가슴 앞에 세우는 순간 50개의  동굴로부터 엄청난 바
람이 쏟아져 나왔다. 지면에 발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비천묵령도를 수
평으로 세웠다. 온몸을 통해  돌아다니는 내기를 비천묵령도로  보내는
순간 전방에서 자오금철이 튀어나왔다.
거의 육안으로 파악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지옥수라참(地獄修羅斬)!"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비천묵령도가 전방에 점을 찍기 시작하였
다. 수십 개의 검은 점이 허공 가득 나타났다.
"으음! 하오문주의 진정한 실력인가…."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자오금철을 쳐다보던 나령이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겁천십웅 중 최고라 하였던 지옥도법은 가공했다.
단지 찌르는 동작만으로 50개의  강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유웅창의
철혈무적검법에 비하면 분명 한 수 위였다.
그르릉!
폭풍처럼 몰아치던 바람이 스러짐과 동시에 전면  동굴 아래쪽의 출
입문이 입을 쩍 벌렸다.
"들어가 볼까?"
50개의 자오금철이 기관을 파괴하는  열쇠인 모양이었다. 열린 출구
쪽에서는 더 이상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좌우를 힐끔거리고
쳐다보던 일행이 서둘러 야혼의 뒤를 따랐다.
"검탄지옥필살진(劒彈地獄必殺陣)이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3번째 관문으로 들어가는 석문을 밀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
나, 광장 안으로 들어선 야혼은 내심 욕설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전과 같았지만 뚫려있는 구멍의 모양이 달랐다. 커다란  도끼
날 모양으로 만들어진 구멍은 50개였다.
도탄강기를 이용하여 허공 중에 선을 만들어내는 지옥도법 2초와 동
일했다.
"이번에도 우리 문주 차진 모양이네. 연장문주 빨리 가서 없애버리고
와라."
"좋다, 씨팔! 끝가지 가보자."
깊게 숨을 들이마신 야혼이 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상황은 전과  다르
지 않았다. 1자 높이로 솟아있던 단이 내려감과 동시에  전방의 구멍에
서 폭풍 같은 바람이 쏟아져 나오고 그 속에 커다란 도끼 모양의 자오
금철들이 무더기로 날아왔다.
"타핫!"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던 비천묵령도를 힘차게 내리 그었다. 도탄강기
를 이용하여 50개의 선을 만드는 작업. 야혼의 전면에 생겨난  검은 선
들이 도끼모양의 자오금철을 맞이하며 나아갔다.
스스스!
무수한 가루가 휘날리며 50개에 달하는 자오금철이 순식간에 시야에
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열리는 석문.
더 이상 일행은 말이 없었다. 절대적인  야혼의 무공에 놀라고, 관문
에 놀랐다. 하지만 일행의 얼굴은 놀라움보다 궁금증이 더 했다.
마지막 관문을 지나면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3백 년 전설처럼 철혈무
적검법이 있을지, 그 또한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멈춰!"
추기영이 어검지옥멸살진(御劒地獄滅殺陣)이라 적힌 석문을 밀치려는
순간 야혼이 낮게 소리쳤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석문이 열리고  안쪽의 단을 밟아야  기관이 작동했는데
이번 관문은 달랐다. 1장 두께의 석문 넘어로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
고 있었다.
"세 번째 관문이 파괴되면서 이곳 기관이 바로 작동했어."
안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던 냉소소가 일행에게 말했다. 야혼의  말대
로 안쪽은 온통 바람소리로 가득했다.
"이곳은 3초를 시전하는 곳인 모양이네."
어검(御劒)이란 글 때문이었다. 지옥도법의 3초인 지옥수라멸(地獄修
羅滅)은 어도술이다. 도를 던져  마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무공. 무인들의 꿈이라 불리는 무공이 바로 어도술인진대.
"야혼…?"
걱정스런 얼굴로 야혼을 불렀던 냉소소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빙긋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령신
공을 대성한 자신을 넘어선 사람이 야혼이었다.
"뒤로 물러서!"
짤막하게 말한 야혼이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기이한 광경이었
다. 백무가 피어오르는 몸은 검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야차금강무적강(夜叉金剛無敵 ), 마도련에 도착하기 전에 완성한 호
신강기마저 끌어올린 그의 몸은 번쩍 번쩍 광채를 토했다. 검은색 강기
를 토해내는 비천묵령도와 완전하게 하나가 된 듯 보였다.
"후-욱! 간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야혼의 동체가 1장 두께의  석문을 향해 저돌적
으로 돌진했다.
꽈앙!
슈아악! 파앗! 푸아악!
엄청났다. 석문이 부서짐과 동시에 드러난 광경에 일행은 할말을  잃
었다. 10장 폭을 가진 광장에 수십 개의 소용돌이가 생겨 있었다. 벽을
비롯한 바닥에서 솟구친 바람은 그물망을 연상시킬 정도로 촘촘했다.
그 사이로, 검과 도, 그리고 조그마한 암기들이 셀 수 없이 떠다녔다.
사천당문 암기술의 최고라는  만화천우는 그저 애들  장난에 불과할
정도였다.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무기들은 육안으로 구분조차 불가능했다. 더구
나 광장 안을 쳐다보는 이들 개개인은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고수들
이 아닌가.
일행이 지켜보는 가운데 야혼의 입에서 천둥 같은 고함이 터졌다.
"지옥(地獄)-!"
가슴 앞에 머물던 비천묵령도에서 1장 길이의 도강이  죽 뻗어 나오
더니, 이어 허공으로 날았다.
"수라멸(修羅滅)!"
비대한 야혼의 동체가  제 자리에서 회오리바람처럼  돌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카앙! 카카캉!
사방을 날아다니던 검, 도, 창 등, 자오금철로 만들어진 수많은  병기
들이 야혼의 몸에 부딪쳐 가루로 변하고, 그의 수중을 떠난 비천묵령도
가 사방을 유린했다.
"저 무공이 말로만 듣던 이기어도술인가!"
나령을 비롯한 일행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처음 접하는  이기어도
의 경지는 단순하게 도를 던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인간의 신체도 도(刀)와 같았다. 검은색으로 변한 야혼의 몸이나,  사
방을 휘젓고 다니는 비천묵령도는 하나였다.
도가 움직이는 곳에서도 자오금철이 가루로 흩어졌고, 야혼이 움직이
는 곳에서도 자오금철은 가루로 변했다.
"타핫!"
나직한 고함소리를 끝으로 공동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자오금철로
만들어진 모든 무기들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폭풍이 사라진 것
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열린 석문과 함께 검은 어둠이 나타났다.
"관이라…."
야명주를 꺼내 주변을 둘러보던 야혼의 시선이  광장 가운데서 멈췄
다. 일행을 반긴 건, 지금까지 겪었던 것처럼 바람이 아니라, 검은 관이
었다.
"어? 왜 무덤이…."
냉소소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야혼 곁으로 다가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 이었다. 지옥도법으로만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  관문의 끝에,
무덤이 기다리다니.
"기다리다가 지쳐서 죽었…. 허미!"
드르르!
미약한 소리에 깜짝 놀란 야혼이 고개를 돌렸다. 시체가 들어있을 거
라 여긴 관이었는데,  뚜껑이 열리고 그 속에서 한 인물이 천천히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늘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옥마제의 후예였더냐?"
"니미럴! 이럴 줄 알았다, 씨팔!"
야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결국 예상이  맞고 말았다.
천비동은 철혈무적검법을 얻기 위한 관문이 아니라, 지옥도법을 기다리
기 위해 만들어진 관문이었다.
철혈마존(鐵血魔尊) 모군상(某窘相), 겁천십웅의  1인이었던 그 또한
자능한이나 창마처럼 살아 있는 것이었다.
야혼뿐만이 아니었다. 널따란 동굴로  들어섰던 모두가 할말을 잊은
듯 전면 인물을 쳐다보았다. 핏기 없는 하얀 얼굴과 송곳니  그리고 붉
은 광채를 뿜어내는 눈동자는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했다.
"아미타불! 이 추기영이 죽어서 극락정토에 와 있는 건가…. 왜 이렇
게 장수하는 인간이 많은 건지. 시주는  뭐라 부릅니까. 늑대인간과 트
롤이란 자는 이미 만났습니다."
태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심정은 그렇지 못했다. 놀라 기절할 지경이
었다. 강호 무림사상 최강자라 하였고, 무림  전설로 사라진 자가 살아
있다. 자능한과 창마를 보았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능자한과 전대용을 만났다고?"
모군상 또한 놀랐는지 붉은 눈동자에서 광채가 쭉 솟아 나왔다. 정마
전쟁이 끝날 즈음하여 만난 그들은 성모척살대 중에서 가장 친했던
자들이었다.
"늑대인간이나 트롤에 대해선 접어두고 우선  우리들의 궁금증 먼저
풀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모 시주. 그러니까 소승의 짐작으론 3백 년
전 겁천십웅이 전부 살아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아  참, 그것보다는
2백 년 전에 있었던 패천십비가 더 궁금합니다. 그것부터  한번 풀어놔
보시지요. 설마 겁천십웅의 일인인 모군상 대협께서 비밀을 발설했다고
재로 흩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놀랍군! 늑대인간과 트롤로 변이한 그들을 이기는 자가 있다니.  아
니, 이곳까지 들어왔다면 가능할지도…."
재로 흩어졌다는 추기영의 말에 흠칫 놀란 모군상이 이내 고개를 끄
덕였다. 적어도 두 명은 3백  년 전 자신들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있는
강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야혼과 냉소소를 가만히 쳐다보던 모군상이
나지막이 이야기를 꺼냈다.
"패천십비라…. 1차 패천십비의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 테
니까. 2차 패천십비에 대해서만 알려주마. 사실 겁천십웅의 두 번째 대
결은 패천십비라 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전부 한 사람에게 패했기 때
문이다. 겁천십웅에 포함되지 않았던 자에게…."
모군상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패배, 겁천십웅에 해당하
는 10명 전부가 한 인물에게 패했다는 거였다.
1차 패천십비를 가졌던 겁천십웅은 다음을  기약하고 각자의 은거지
에서 후대를 위한 준비와 무공연마에 여념이 없었다. 그 당시 모군상과
서음래에 의해 만들어진 문파가 바로 마도련이었다.
"각자 은거지에서 무공을 연마하던  우리는 한 인물의  도전을 받게
된다. 정확하게 100년만이었다."
"잠사옹(潛邪翁)!"
"응…? 맞다, 우리에게 도전했던 인물은 1차 패천십비의  관전자였던
잠사옹이었다."
흠칫 놀란 얼굴로 고명지를 쳐다보던 모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잠사옹이 도전장을 보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보
낸 한 장의 서찰은 나를 충격속으로 빠트리게 충분했다. 놀랍게도 그자
가 보낸 서찰에는 철혈무적검법의 파훼법이 적혀 있었다."
결국 은거지를 떠나 잠사옹이 만나자 했던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
다. 그곳에 도착해서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뿐만 아니
라 겁천십웅 전원이 와 있었던 거였다.
"우린 그곳에서 잠사옹과 비무를 했다. 물론 비무 조건은  이긴 사람
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들어주기로 하면서. 그런데…."
"전부 패했군."
"맞다. 지옥마제를 제외하곤 모두가 그자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럼 지옥마제는 이겼단 말이오?"
"글쎄, 이겼다고는 할 수 없다.  잠사옹과 지옥마제는 양패구상 했으
니까? 이철상은 떠나고 우린 모처로 옮겨졌다."
"그럼 당신이 이곳에 다시 온 다음에  이곳 관문을 바꾸었다는 말이
군."
"그랬다. 우리가 그의 거처에서 벗어난 건 100년 후였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잠사옹의 말에  일행은 기절할 듯 놀랐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250년을 넘게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감정과 이성이 살아 있으니 강시는 결코 아니었다. 먹고 마시는 평범
한 인간들과 모든 게 같았다.
황당한 얼굴로 몸을 살피는 자신들을 향해  잠사옹은 더욱 충격적인
말을 했다. 5백 년, 그가 살아온 세월이라 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태어났다. 철혈무적검법을 완성할 시간을  얻은
거다."
오직 어둠 속에서만  활동해야하고 흡혈의 제약이  있었지만 시간을
얻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영원히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철혈무적
검법을 완성할 시간을.
"그렇게 핑계 달지 않아도 당신  욕할 사람 없소.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으니까. 더구나 가진 게 많은 족속들일수록 더 오래 살
고 싶어하는 거서 아니겠소."
"아니다, 지옥마제가 잠사옹과 양패구상만 하지 않았던들  우린 그곳
에서 죽음을 택했을 거다. 이런  상태로도 살아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는… 지옥마제가 천하제일이기 때문이다."
모군상이 나직하니 말했다. 그를 비롯한 겁천십웅 9인은 여전히 천하
제일인으로 지옥마제 이철상을 꼽았다. 이곳으로 돌아와 관문을 바꾸고
무공을 익히며 지옥마제의 후예를 기다렸다.
"좋소이다. 당신 인생인데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까. 혹시 마옥성
에 대해 알고 있소. 잠사옹인가 하는 그 괴물이 살고 있는 곳 말이오."
"그건 여기서 살아난 다음에 물어야 할 것 같구나."
"그렇군, 당신을 없애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럼 3백 50년 동
안 익힌 철혈검법을 구경해보도록 합시다."
눈짓으로 일행을 뒤로 물러나게 한 후 전방으로 나섰다.
"네가 철혈무적검법을 이길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게냐?"
비천묵령도를 뽑아들고 앞으로 나서는 야혼을 쳐다보며 모군상이 말
했다. 그동안 끊임없이 철혈무적검법을 연마했다.  세월의 힘은 대단했
다. 철혈무적검법을 완전하게  완성했음은 물론이고 새로운  4초식마저
창안하였다.
비로소 철혈무적검법을 본래의 이름인 무적철혈검법으로  바꿀 자신
이 생겼다.
"말은 바로 합시다. 무적이란 말을 붙이고 싶으면 지옥도법을 이겨야
하는 거 아니요. 그것도 아니구먼, 잠사옹이란 절대자가 있으니까. 이제
당신은 2인자가 아닌 3인자가 되었소이다 그려."
"네가 모르는 게 있구나. 이젠 이철상이 나선다 해도  노부의 상대는
아니니라."
모군상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2인자, 남들은 겁천십웅의 일인이
라며 찬양할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그리고 잠사옹 그는 이미 신이 되어버렸다. 지옥마제를 넘어서지 못
하면 그의 근처에 다가서지도 못한다."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편한가 보군. 아무리 노력해도 잠사옹에겐 안
된다는 말을 돌려하는 걸 보니. 하지만 말이야, 한번 2인자는 영원한 2
인자야. 결코 바뀌지 않는다고. 당신이 나를  이긴다 한들 누가 인정해
줄 건가. 3백 년 넘게 살았던 걸로 만족하라고."
"그렇게 빨리 죽고 싶은 게냐?"
"쿡! 그 소린 벌써 세 번째  듣는 거요. 늑대인간 놈이 그랬고, 창마
란 놈도 그런 소리를 했어. 결국은 다  죽었지만. 내가 왜 그놈들을 죽
였는지 아냐? 마옥성 출신이기 때문이었어. 너도 마찬가지고."
순식간에 지면을 박찬 야혼이 모군상 앞으로 달려가며 비천묵령도를
찔러 넣었다. 그러나 모군상은 막을 생각이 없는지 미소 띤  얼굴로 야
혼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푸욱!
거북한 소리를 내며 비천묵령도가 모군상의 복부를 뚫고 들어갔다.
"다 했느냐?"
몸 속에 박힌 비천묵령도를 가만히 쳐다보던  모군상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멍청이! 내가 겪어보았다고 했잖아, 병신아."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야혼이 비천묵령도를 뽑아냄과 동시에 모군상
의 낭심을 향해 오른발을 날렸다.
팟!
흠칫 표정이 변한 모군상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으음!"
야혼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모군상의 복부를  찔
렀던 행동은 허초라 할 수 있었다. 그의 몸 또한  비천묵령도에 반응하
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차는 동작에 모든 내공을 실었다.
그런데 공격을 모군상이 피한 것이다.
"놀랐느냐?"
3장 떨어진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모군상이 급격하게 아무는 상처
를 쳐다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야혼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방금 내가 시전한 건 완전한 무공이 아니다."
"마법(魔法)인가 보군."
"정확하게 말하면 무공과 마법의 혼용이라 할 수 있다."
**********************
잠사옹에게 배운 마법 중의 하나로 몸을 빠르게 하는 마법으로 헤이
스트(HASTE)라 하였다.
그와 비무하면서 가장 놀란 점이 있다면 바로 마법이었다.  패천십비
관전자에 불과하였던 그가 겁천십웅의 무공을  깨트릴 수 있었던 결정
적인 이유.
눈으로만 보았던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건 물론이고,  마
법을 접목시켜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 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천하제
일인이라 알려졌던 겁천십웅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경공술을 능가하는 마법이 있었고, 자신의 모습을 사라지게 하는 마
법도 있었다. 물론 마법자체는 겁천십웅의 무공에 비해 그리 강하
진 않았다. 겁천십웅의 패배는 무공(武功)과 마법(魔法)의 결합 때
문이었다.
잠사옹의 말로는 언령제세공(言令除世功)이라 하였다. 패했다는 치욕
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다. 철혈무적검법을, 앙천마마
묵독공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마법에는 말이다. 내공이 없이도  무림인만큼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하물며 무공에 그 마법을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겠느냐?
눈으로 좇질 못한다. 이렇게 말이다."
팟!
"크-윽!"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야혼의 동체가 2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모
군상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모군상의 신형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아이고 알아야, 씨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젊은 놈 불알 망가지면
어떡하려고 그러쇼. 당신이야 다 늙어서 필요 없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
란 말이외다."
아랫도리를 쓱쓱 문지르며 일어난 야혼이 모군상을 향해 이죽거렸다.
하지만 내심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맨손이었기에 망정이지 검을 썼
더라면 벌써 신체 한 곳이 잘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놀란 사람은 야혼뿐만이 아니었다. 모군상 또한 놀라운 눈으
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
만 5성 공력이 전혀 충격을 주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프지 않은 모양이구나."
"당연하지, 3백 살이 넘은  늙은이 주먹인데. 솜방망이  수준밖엔 안
되는구먼. 그 검을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검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 게냐?"
"엥? 야! 보현보살 바로 눈치 까는데 어떡하면 좋겠냐?"
"어떡하기는, 3백 년이나 먹은 영물이 검으로 싸우겠다는데  말릴 재
간이 있는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도를 들고 한바탕 붙어보시게. 문주
가 뒈지면 이곳에서 명복은 빌어주겠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처음부터 검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기이한 눈으로 야혼과 추기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거 잘 생각했소. 이 어린놈에게 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치욕스런 짓
이지. 나이는 똥구녁으로 처먹는 게 아니니까. 그럼 시작해 봅시다."
비천묵령도를 한쪽으로 던져놓은 야혼이 거의 넝마로  변한 옷을 벗
었다. 그리고는 모군상을 쳐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이 마법을 결합시켜  새롭게 창안한 경공을  뇌광비(雷光秘)라
부르기로 하였다. 번개와 빛의 비밀을 간직한 경공이란 의미에서…."
팟!
뇌광비란 말과 너무 어울리는 경공이었다. 3장 거리를 순식간에 단축
한 모군상이 야혼의 왼쪽에 나타나며 오른 발을 내질렀다.
퍼억!
옆구리에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과 함께 야혼의 신형이  1장 가량 굴
렀다. 그러나, 맞았다는 사실을 잊었는지 벌떡  일어난 야혼은 전과 같
은 자세를 취하며 모군상을 노려보았다.
"놈!"
여전히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야혼의 모
습에 모군상의 입술이 실룩 밀려 올라가고, 길다란 송곳니가 드러났다.
"얼마나 견디나 보겠다."
슬쩍 살기를 내비친 모군상이 야혼 앞으로 쇄도해 들었다. 뒤쪽에 검
은 잔상이 남았다고 느끼는 순간 야혼의 전신으로 그의 주먹이 떨어져
내렸다.
퍼억! 파악! 퍽퍽퍽!
거의 일방적인 구타였다. 모군상은 경공이라고 하였지만 보법에도 적
용할 수 있는지, 무서운 속도로 야혼 주변을 돌며 손과 발을 날렸다.
넘어질 틈조차 주지 않았다.  뒤쪽으로 넘어갈라치면 어느새 야혼의
등뒤로 다가가 등을 향해 발을 날렸고, 앞으로 꼬꾸라지면 턱을 차올렸
다.
하지만, 얻어맞는 야혼 또한 대단했다.  끊임없이 맞으면서도 입만은
쉬지 않았다.
"약해! 3백 년  동안 무공을 익혔다면서  이래가지고 파리라도 잡겠
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모군상의 눈에서 핏빛 광채가 쭉 튀어나왔다. 이어 그의 전신에 검붉
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하였다. 무적철혈탄강(無敵鐵血彈 ), 철혈무적검
법을 극성으로 익히게 되면 저절로 나타나는 호신강기였다.
스치기만 해도 몸이 터져 나간다는 무적철혈탄강을 운용한 모군상의
정권이 야혼의 몸에 박혀들기 시작하였다.
"으음!"
급기야 야혼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야차금강무적강마
저 운용하고 있지만 모군상의 손과 발이 주는 충격은 대단했다.
"늙은이, 힘을 내라고. 나 정도를 처리 못하면 3백 년이 너무 아깝잖
아."
고통스런 얼굴로 연신 뒷걸음질치면서도 여전히 모군상을 도발했다.
"벽에 붙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보겠다."
어느새 동굴 벽까지 밀린 야혼을 쳐다보며 진득한 살기를  쏟아냈다.
언제부터인가 12성 전력을 다해 주먹을  뻗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끄덕도 하지 않고 있다.
무려 5갑자의 세월동안 무공을 익혔다는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철혈권(鐵血拳)!"
모군상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터졌다. 무적철혈검법을  완성
하고 남는 시간에 만든 권법이었다. 무적철혈검법을 권으로  변형한 무
공에 불과하여 창안이란 말이 무색했지만, 그 강함은 검법에 못지 않았
다.
광! 광광! 쾅!
검붉은 기운을 머금은  권강(拳 )이 야혼의  전신에 폭발하듯 박혀
들었다.
"꺼어억! 씨팔! 더 세게, 더 강하게 해주란 말이야."
"개자식! 무적권(無敵拳)!"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어낸 모군상이 천둥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검
법에서나 볼 수 있는 탄(彈)의 경지를 권을 통해 시전한 것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의 무적권은 대단했다. 약한 야명주 불빛으로  인
하여 희미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이 나아가는 모습이 선명하
게 보였다.
"아미타불! 이러다 오늘 송장 하나 치르게 될지도 모르겠네. 냉 소저
그만 나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야혼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추기영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야혼의 실력에 대해선 알고  있지만, 상대가 너무 강하
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냐, 그냥 둬."
하지만 냉소소는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긋 미소를  지
으며 두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네 녀석의 몸을 날씬하게 해줄 사람을…."
냉소소가 내심 중얼거렸다. 야혼과 모군상의 모습은 과거 불귀동에서
자신과 당가려가 야혼에게 시전해 주었던 상태와 비슷했다.
벽에 붙어 조금씩 올라가는 그를 향해 모군상의 권강이 끊임없이 작
렬해들고 있다. 물론 모군상의 무공이 그때의 자신들에 비해 훨씬 강하
지만 야혼 또한 그 당시의 몸이 아니다.
모군상의 공격은 충격이 아닌 기연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모군상으로부터 연신 공격을 당하는 야혼은 급격하게 단전으로 유입
되는 약 기운을 내공으로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양심신공(兩心神功)
이 또한번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야차금강무적강을 끌어올려 모군상의 공격을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충격에 의해 생성된 진기를 내공으로 만들었다.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 같군. 겁천십웅의 명예를 팔아서  얻은 무
공인데, 이렇게 약해서 어디에 쓰겠나. 힘내라 모군상."
"죽일 놈!"
모군상의 눈자위가 찢어질 듯 커졌다.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전력
을 다한 공격이었다. 과거의 경쟁자였던 겁천십웅이나, 자칭 신이라 부
르는 잠사옹을 제외하면 상대가 없으리라 여겼다.
오직, 3차 패천십비를 기다리며 살았던 세월이었는데.
"죽여주겠다!"
갑작스럽게 치민 분노에 이를 부드득 갈아붙인  모군상의 신형이 무
서운 속도로 야혼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군상의 신형에서  검붉은 기운
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쿡!"
야혼의 입에서 비릿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원하던 순간이었다. 분노
한 모군상은 최고의 강점인 뇌광비를 펼치지 않고 곧바로 달려들고 있
었다.
"같이 해보는 거다, 모군상!"
내심 고함을 지른 야혼이 지금껏 단전에 축적하고 있던 내공을 급격
하게 오른 다리로 보냈다. 아울러 야차금강무적강을 최고조로 끌어올렸
다. 야혼의 두 발이  동굴 절벽을 지지하는 순간,  비대한 몸에서 번쩍
검은 광채가 솟아 나왔다.
야혼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모군상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지금
껏 일방적으로 맞고 있던 상대의 모습에 변화가 생겼던 탓이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놓았다. 거의 1시진에 걸쳐 공격당한 자가  어떤
수작을 부리리라 여기지 않았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바닥으로 떨
어지는 상태로 간주하고 말았다.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모군상이 상체가 앞으로  쏠리는 야혼의 심장
을 향해 오른 손 정권을 힘차게 박아 넣었다.
깡!
카앙!
"크윽!"
"커억!"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모군상의 정권이 야혼의 심장을  강타
한 순간, 검은색 광채를 폭발적으로 뿌려대던 오른발이  모군상의 단전
을 찼다.
두 마디 비명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모군상의 신형이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되튕겼다.
그러나, 뒤쪽으로 날리는 모군상은 혼자가 아니었다. 벽에 깊숙한 흔
적을 남긴 검은 동체가 모군상을 뒤따랐다.
"지금부턴 내 차례야."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먹물처럼 검어진  오른 손을 모군상의
단전을 향해 또다시 박아 넣었다.
"크아악!"
모군상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미 금강불괴에 달한
몸이고, 무적철혈탄강을 운기하고 있었기에 내공을  상실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은 참기 힘들었다.
더구나 이어지는 단전의 충격으로 인하여 무적철혈탄강이 점점 약해
지고 있었다.
과앙!
허공을 날던 두 사람의 동체가 동굴 벽을 부수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와중에도 야혼은 쉬지 않았다. 모군상의 몸이 세워지자마자  그의
단전을 향해 무릎을 차올렸다.
"이제는 안 된다 놈!"
더 이상 단전을 허용할  수 없다는 생각에 통증을  무시하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일순 모군상의 전신에 검붉은 광채가 어렸다.
약해져가던 무적철혈탄강이 다시 원래의 위력을 되찾음과 동시에, 모
군상의 신형이 야혼의 몸을 타고 빙그르르 돌았다. 무릎을 차올리던 야
혼과 위치가 바뀐 것이었다.
야혼의 등을 점유한 모군상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리고,  무적철
혈탄강이 잔뜩 운기된 오른 주먹이 커다란 등판을 향해 무자비하게 작
렬했다.
"크윽!"
울컥하니 치미는 피를 삼기며. 목표를 잃은 무릎으로 벽을 치며 공중
제비를 넘었다.
"놈!"
야혼의 등에 찰싹 달라붙은 모군상이 낮게 소리쳤다. 참으로  놀랍다
는 생각뿐이었다. 12성 전력을 다한 자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 신체라
니. 방금 전에 놈의 허리에 작렬한 공격만 해도 자오금철을  가루로 만
들 수 있는 엄청난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의 신체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마치  마옥성에
서 만들어진 실험체를 보는 듯하였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한데 엉킨 두 사람의 신형이 동굴 바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추락
했다.
"이번도 견디나 보겠다."
여전히 뒤쪽에서 가슴팍을 감싸안은 모군상이 다시  한번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번쩍거리는 그의 오른 손이  노리는 곳은 인간의 신체  중
가장 약하다는 목이었다.
"타핫!"
낮은 고함을 내지르며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내 뻗었다. 그러나, 무적
철혈탄강을 잔뜩 운기한 모군상의 주먹은 허공을 쳤을 뿐 야혼의 목을
박살내지 못했다. 상체를 숙이는 간단한 동작으로 모군상의  주먹을 피
해버린 것이었다.
"기다렸다, 개자식!"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칼을 쳐다보던 야혼이 모군상의 팔을 틀어쥐며
전방으로 사정없이 패대기쳤다.
과앙!
굉음과 함께 모군상의 신형이 동굴  바닥을 뚫고 박혔다. 거의 반장
가량 파고든 모군상을 뒤따라 야혼의 신형이 파고들었다.
*************************
"아미타불! 저것들이 정말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추기영이 나직하니 불호를 읊었다.  참으
로 황당한 대결이었다. 천하제일이라는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근접박투술이라니.
그것도 떨어진 상태로 싸우는 게 아닌 완전하게 밀착된 상태에서 공
격과 방어를 하고 있다.
마치 살아 있는 쇳덩어리를 보는 듯하였다. 그런 심정은 태웅도 마찬
가지였다.
"이봐, 육승. 멀리서 내단을 찾지 말고 우리 연장문주 뱃속을 뒤져보
는 게 어떻겠냐?"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태웅이 내린 결론이었다. 3백 살이  넘은
모군상보다 야혼의 몸이 더 신비로웠다. 점점 강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웬만한 무인이라면 한방만  맞아도 가루가 될 그런  공격을
수백 번을 더 허용한 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혼은 전혀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모군상을  따
라 붙으며 더욱 거칠게 공격하고 있다. 경이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지
켜보는 일행의 귓전에 냉소소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지금 상황은 야혼이 일부러 만든 거야."
냉소소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어렸다. 처음 모군상을 도발할  때부터
지금 상황을 예견했다. 야혼의 무공 또한 약하지 않지만 모군상의 뇌광
비(雷光秘)라는 보법은 야혼의 실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경지였다.
무공자체로만 놓고 볼 때는 분명 모군상이 한 수위라 할 수 있었다.
"그럼 거리를 주면 연장문주는 작살난다는 말이네? 연장이 박살나면
그 다음은 우리고."
낮게 소리친 태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미타불! 나가는 길이라도 확인하려 그러는가?"
"당연하지 임마. 연장이 박살나면 우리는 상대가 아닐 거 아냐. 그냥
발라야지 별수 있냐?"
"하지만 갈 때 가더라도 한가지 시험은 해보고 싶은데…."
태웅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은  추기영이 철탁을 들어올렸다. 철탁이
황금빛으로 변했을 때 보였던 기이한 현상 때문이었다.
"자능한과 창마를 죽였을 때 보였던 현상 때문이냐? 그건 나도 이상
하기는 하더라."
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능한의 피부를 한 꺼풀 벗겨냈을 때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창마를 죽일 때 결코 아니었다.
추기영의 실력은 창마를 한 번에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정도는 아니
다. 결국 황금빛으로 변한 철탁이  어떤 작용을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마성검으로 찔렀을 때와 같은 효과가 무음항마혈탁을 통해 나타난
것이었다.
"그나저나 둘이서 뭐 하나 왜 이렇게 안나오는 거야?"
두 사람이 파묻혔던 구덩이를 힐끗 쳐다보던  태웅이 나지막이 말했
다. 귓전에 들리는 소리로 보건대  여전히 두 사람의 동체는  밀착되어
있는 듯하였다.
"곰 시주, 그만 앉게. 모군상이 아무리 강해도 연작문주를 이기지 못
하네. 왠지 아나? 3백 년 묵은 영수는 연작문주가 구약종  영감의 무공
을 익혔다는 사실을 모르거든."
"맞다, 태웅. 야혼에게는 금강불괴마저 뚫을 수 있는 무기가 있다. 그
러니 도망칠 준비는 않아도 된다."
냉소소가 편한 얼굴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볼 수 있는 이유였다.
그녀의 생각대로였다.
모군상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야혼은 사사만화류를  펼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커억!"
나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구덩이  속에 박혀 있던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모군상의  쌍장이 야혼의 가슴팍에  작렬했던
것이었다.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는 야혼을 떼어내기 위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야혼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두 다리로 모군상의 하체를 감
아 그를 끌고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기회?"
두 사람의 상체가 상당한 간격으로 벌어지자 모군상의 눈이 붉은 광
채를 쏟아냈다. 재빨리 시선을  돌려 검(劒)을 놓았던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근접박투술로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
이었다.
"그만 끝내자 놈!"
빛살처럼 날아오는 검을 야혼의 옆구리 쪽으로  유도한 모군상이 비
릿한 미소를 지었다. 검 또한  놈의 동체를 뚫는다는 장담은  못하지만
일순간 내공을 흩트릴 수는 있을 터였다.
그때가 마지막 공격을 가할 때였다.
"나도 그러려고 했다 모군상."
야혼 또한 오른쪽에서 다가오는 검을 알아차렸다. 검이 몸에  부딪치
는 순간은 서로간에 기회를 제공할 것임에 분명했다.
카앙!
"크아악!"
"타앗!"
"이야합!"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동시에 난무했다. 맨 처음 모군상의 검이  날
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2치 가량 파고들자, 야혼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
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천둥 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모군상의 쌍장이  야혼의 목을
향해 두 손이 뻗어나갔고, 그런 그의 단전에서는 붉은 광채가 폭발적으
로 솟구쳤다.
"크-아악!"
하지만 야혼의 공격이 한발 빨랐는지 모군상은  처절한 비명을 내질
렀다. 목을 노렸던 쌍장은 빗나가고 단전 어림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
들었던 것이다.
더하여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붉은 방울들은  모군상의 단전에서 흘
러나온 피였다.
사사만화류(死死滿花流), 모군상의 단전을 관통한 붉은  기운은 저주
의 혈신월이었다.
"그건…."
모군상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뻥 뚫린 단전으로부터 급속하게
내공이 흩어지고 있었다. 상처는 아물고 있지만 사라지는  내공에 대해
선 방법이 없었다.
설마하니 금강불괴지신을 파괴하는 암기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구약종 영감의  선물이야, 사사만화류라고.  만수문주처럼 불사신첸
줄 알았더니 아니었구먼."
피가 흘러내리는 옆구리를 감싸 쥔 야혼이 모군상 앞쪽으로 날아 내
리며 말했다. 마법을 익힌 무인들의 약점을  또 한가지 찾아냈다. 목을
잘라내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단전이다.
상대의 목을 자르고 단전을 파괴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터이지만 약
점을 찾았다는 사실은 고무적이었다.
"허허! 이 모군상이…."
허탈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지옥도법을 깨트리고 무적이란 호
칭을 되찾고자 하였는데, 지난 3백 년 간 익혔던 검법은 펼쳐보지도 못
하고 내공이 사라져버렸다.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늑대인간이나 트롤의 신체로 하지 않았소?"
허탈한 얼굴로 서 있는 모군상을 향해  물었다. 문득 궁금했다. 자능
한이 보여주었던 늑대인간의 신체는 트롤이라는 전대용이나 앞에 있는
모군상보다 훨씬 대단했다. 만일 모군상이 늑대인간의 신체를 가졌다면
자신으로서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 따위 사술(邪術)에 의존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으니까."
모군상이 나지막이 말했다. 겁천십웅, 비록 잠사옹에게 패해 그의 요
구를 들어주기로 하였지만 주고받는 관계였지 결코 종은 아니었다.
그의 실험체가 되는 대신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물론 수인이나 트
롤이라는 생명체에 대한 말도 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바꾸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시간, 자
신에게는 철혈무적검법을 완성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시간만 있으
면 늑대인간이나 트롤보다 더한 신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철혈무적검법은 이곳에 있소?"
"한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느냐?"
"뭐요? 가능한 거라면 들어드리겠소."
"잠사옹을 이겨달라는 부탁이다. 그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다만 오
랜 세월을 살았다는 정도뿐이다. 아울러 나머지 겁천십웅도…."
"빌어먹을, 당신 한사람도 꽁수를 동원해서 이겼는데 8명을  무슨 수
로?"
"아니다, 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천적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우선은 3가지를 찾아라, 제마성검(制魔聖劒)과 황금수(黃金手)그리고 풍
뢰궁(風雷弓)이다. 그것들이면 성모척살대 정도를  없앨 수 있다.  그리
고…, 마지막 한가지는 광명도(光明刀)다."
"광명도(光明刀)?"
광명도란 말에 야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잠사옹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
라 하였다."
"제길 그래 가지고…."
낮게 투덜거린 야혼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름 석자 가지고 무슨
수로 광명도를 찾는단 말인가. 그보다는 현실이 더 중요했다.
마옥성, 그곳에 대해 알아야 한다. 저주받은 그곳에 대해.
마옥성에 대한 말을 물으려는 찰나 뒤쪽에 있는 추기영이 앞으로 나
서며 말을 건넸다.
"아미타불! 모 시주 혹시 황금수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습니까?"
황금수라는 말과 무음항마혈탁이 자꾸만 연관지어졌던 탓이었다.
그러나, 모군상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보진 못했다. 중원에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그리고 철
혈무적검법과 앙천마마묵독공은 저 관속에 있다."
"이제 마옥성과 잠사옹에 대해 말해주시오!"
"그곳은 마법진(魔法陣)으로 가려져 누구도 찾지  못한다. 아마 창마
만 알고 있었을 게다. 그리고 잠사옹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다만 한
가지, 그가 명교와 관련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 정도다. 자신을 앙
그라 마이니우라 칭하더구나."
"앙그라 마이니우?"
두 번째 듣는 말이다. 성모궁에서 천애설은 자신을 향해 앙그라 마이
니우라 하였다. 명교에서 말하는 악신.
"보여줄 수 있느냐?"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 야혼을 향해 모군상이 말했다.
"알았소이다. 이건 지옥도법의 마지막  초식이요. 지옥마제도 익히지
못했다고 합디다. 아무리 빨라도 소용없소.  공간을 없애버리는 무공이
지옥수라황이니까."
한쪽에 떨어져 있던 비천묵령도를 향해 슬쩍  시전을 주자 그곳으로
부터 검은 운무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왔다. 그와 동시에 자리를  뜬
비천묵령도가 허공을 갈랐다.
"지옥수라황(地獄修羅晃)!"
비천묵령도를 잡은 야혼이 거친 고함을 지르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
랐다. 백색과 검은색이 한꺼번에 어우러지며, 그 속에서 생성된 투명한
기운이 전방을 향해 밀려갔다.
"대단하다. 공간을 없애는 무공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적어
도 10번 이상은 연속적으로 펼쳐야 한다."
투명한 기운을 잡아보려는 듯 모군상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야만 나머지 겁천십웅은 물론이고, 잠사옹과 대등하게  겨룰 수
준이 된다."
손끝부터 가루로 흩어지는 모양을 주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자신이
창안한 철혈무적검법의 4초보다 더 강한 무공이 지옥수라황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무려 3백 년 세월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했
다. 그걸로,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아미타불! 내단은 또 물 건너갔네 그랴. 연작문주 몸이 안 좋은가?"
눈발이 날리듯 사라지는 모군상의 동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추기영
이 야혼을 쳐다보며 물었다.
"우웩! 씨팔!"
쿠웅!
"야혼!"
피를 토하며 기우뚱 쓰러지는 야혼의 모습에  냉소소가 비명을 질렀
다.
앙그라 마이니우.
"으음!"
"정신이 들어?"
나직한 신음과 함께 깨어나는 야혼을 몸을  흔들며 냉소소가 소리쳤
다.
"다, 어디 갔냐?"
"응? 고소저가 데리고 나갔어."
슬쩍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는 고명지가  일
부러 일행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준 것이었다.
"근데 여긴…."
"모군상의 침실."
"쿡! 관치곤 꽤 넓네?"
두 사람이 누울 정도로 넓은 공간에 낮은 실소를 흘렸다. 바닥에  깔
린 푹신 요까지 있는 걸 보면 관처럼 꾸몄을 뿐 침실이라 불러야 마땅
했다.
"몸은 괜찮아?"
냉소소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기절한 야혼을 치료하기 위해  추
궁과혈까지 시전했으나 특별히 나아진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그렇게 얻어 터졌는데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모군상의 타격에 의해 생성된 내력을 양심신공으로 운기하였다고 하
지만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망가진 몸으로 지옥수라황까지 펼쳤으니.
결국 깊어진 내상에 의해 피를 토하며 기절하고 말았던 거였다.
"그런데 비급은 찾았냐?"
"응,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던지 여기에 비급을  남겨
두었더라. 그래서 태웅에게 줬어."
"그건 잘했네. 나중에 태웅이  돌려주면 검마와 유웅창에게 한  부씩
줘. 독마에겐 앙천마마묵독공을 주고. 그리고…."
"마도련 외부를 감싸고  있는 성라무연대진(星羅無緣大陣)도  바꾸고
당분간은 대문 닫아걸어라 이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건 그렇고.  우
선…."
다시금 창백해지는 야혼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냉소소가 말끝을 흐
렸다. 용봉환락무를 펼치자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탓이었다.
냉소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야혼의 입에서  낮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어머니는 알지만 아버진 누구인지 모른다. 나에 대해 알게 된
건 6살 때었어. 그들은 나를 야차혼(夜叉魂)이라 불렀다. 누군가 그러더
구나. 야차혼은 실패한 실험체였다고. 그땐 그 말의 의미를,  아니 야차
혼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다."
야혼의 눈동자가 아련하게 변했다.  철이 들면서부터 온통 머릿속을
채웠던 건 피의 충동이었다. 언제나 눈앞엔  붉은 피가 아른거렸고, 피
를 원하는 갈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옥성으로 들어온 부상당한 이리 한 마리를 발견했
다. 맹렬하게 솟구친 피의 욕구는 녀석의 목을 따게 만들고 말았다. 그
때의 기분이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칙칙한 기운이 환하게 걷히는 듯
하였다.
"그런데 그 광경을 어머니가 보셨어. 내 앞으로 다가온  어머니는 당
신의 팔목을 칼로 베었다. 그리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내 입으로
가져다 대시더구나. 그때부터였다. 매 보름마다  나는 어머니와 누이의
피를 마셨다. 그때만 해도 내가 왜 그래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왜 보
름마다 피를 갈구하는지, 그들은 왜 보름마다 나를 풀어주었는지."
야차혈마지체란 신체의 비밀 때문이었다. 그 당시 마옥성을 다스리던
자들과 어머니는 야차혈마지체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
다. 아니 마옥성을 다스렸던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체가 바로 야차혈
마지체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자능한이나 창마는  마법에
의해 수인(獸人)으로 변했지만 난 수인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거야."
"야혼…."
냉소소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야혼의 과거가 궁금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지금과 같은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만들어진 존재, 사랑에 의해 태어난 게  아니라, 어떤 실험의 부산물
이 바로 야혼이라는 말이었다.
부르르 떨고 있는 냉소소의 귓전에 야혼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에게서 야수의 본능이 표출되지 않자 그들은 살인을 강요하기 시
작했다. 먼저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죽이길 강요했다. 어머니와 누이의
목숨을 담보로…. 어느샌가 어머니와 누이를 제외하곤 주변에  아는 사
람이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어머니와 누이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고 두 사람을 철삭으로 묶었다.
그리고 마옥성 지하 동굴의 역청에 불을 붙였다. 8살 때 발견하였던 장
소였다.
"그곳에 불을 지르고 어머니와 누이의 시체 곁으로 달려가는 와중에
엄청난 폭발음을 들었다."
"그만! 그만해 야혼."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야혼의 과거,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을 뻔
했다. 이미 지워버린 기억이 아니던가.
"그런데 말이다. 14년 만에 다시 그곳을 찾아갈지도 모르겠다. 내 손
으로 없애버렸던 그곳을…."
"그만해, 이젠 됐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을게, 더 이상…."
눈물을 떨구던 냉소소의 얼굴이 천천히 야혼의 얼굴로 다가들었다.
깊은 입맞춤을 하던 냉소소의 몸에서 백무가  뭉클거리며 솟구쳐 올
랐다.
"우린…. 과거를 안고 살아가기엔 너무 젊어. 내일만  생각하자, 그리
고 지금이 순간만."
야혼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던 냉소소가 뜨거운  입김을 불어내며 말
했다.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참이었다. 야혼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을 참이었다. 지금 이대로, 야혼의  현재 모습만 생각하기로 하
였다.
"우선 내상부터…."
야혼의 얼굴이 풀어지는 걸 확인한 냉소소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
리고는 옷고름으로 손을 가가졌다.
"으음!"
야혼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희미한 운무 속에  드러난
냉소소의 알몸. 차갑게 식었던 가슴에서 뜨거운 열기가  빠르게 솟구쳐
올랐다.
"그때 생각나? 불귀동 동굴로 처음 찾아갔던 날."
속곳을 천천히 끌어내리며 말했다.  야혼은 잠들어 있다고 끊임없이
자기최면을 걸었었다. 그의 얼굴 보기가 부끄러워 관계가지는  내내 눈
을 감았었다.
"기억하지, 내 생에 최악의 날이었는데…."
"최악?"
야혼의 하체 쪽으로 손을 뻗어가던 동작을 멈춘 냉소소가 놀라는 얼
굴로 고개를 돌렸다. 25년 간 고이 지켜왔던 순결을 앗아간  그 순간을
최악이라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잖아. 그래서 그랬지 뭐."
"나빠, 임마!"
샐쭉 미소를 머금은 냉소소의 두 손이 야혼의 상징을 힘있게 거머쥐
었다.
"허억!"
유연한 냉소소의 손놀림에  나직한 비음을 토해낸  야혼이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달덩이를 힘차게 틀어쥐었다.  그와 동시에 야혼의  몸에서
붉은 적무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고명지가 말했던 얼음덩어리의 실체를 알아서인지, 냉소소의  행동은
거칠었다. 춘서를 통해 배웠던 갖가지 기교를 동원하여 야혼의 몸을 달
궜다. 굳게 밀착된 입 속에서 하나로 합쳐진 혀가 서로를 희롱했다.
잔뜩 일그러진 냉소소의 가슴이 아우성치며 소리를 질렀다.
"앉아봐!"
거친 숨결을 내뿜은 냉소소가 야혼의 고개를 잡고 상체를 일으켜 세
웠다.
"헉! 너 그러다 색녀…."
몸을 일으키던 야혼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팽팽한 가슴이  입
을 막아버렸던 탓이었다. 입안 가득 들어찬 육질을 혀로 부드럽게 쓸었
다. 냉소소의 떨림이 감지되자 야혼의  두 손은 그녀의 하체로  자리를
옮겼다.
"하악! 야혼…."
뜨거운 비음을 뱉어낸  냉소소의 몸에서 농염한  백무가 폭발적으로
솟아 나왔다. 몸 상태에 따라 용봉환락무가 저절로 위력을 발휘하는 것
이었다.
적무와 백무와 한껏 똬리를 틀며  엉키고, 그 속에선 뜨거운 비음이
흘러나왔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동
체가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반 시진 정도 흐른 다음이었다.
최초의 변화는 냉소소에게서 시작되었다. 농염한 백무를 뿜어내던 그
녀의 신형이 점점 변한 듯 하더니 어느 순간, 한 마리 봉황의 형상으로
변했다. 더하여 그녀 엉덩이를 붙잡고  있던 야혼의 동체 또한  적룡의
형상으로 변하며 붉은 기운을 폭발적으로 쏟아냈다.
무공 이름이 용봉환락무가 된 이유가 비로소 밝혀졌다. 거의 1장  크
기에 달하는 봉황과 용이 뜨겁게 얽혀 서로를 탐하는 모습은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12성, 용봉환락무의 마지막 단계였다.
완전한 음양이기로 변한 두 사람의 공력은 서로의 몸 속으로 폭풍처
럼 움직여 다녔다. 하지만 용봉환락무가 보여주는 변화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관속에 있던 두 사람의 신형이 천천히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
는 것이었다.
2장 가량 솟구쳐 오른 두 사람의 몸에서 백색과 적색 광채가 폭발적
으로 솟구쳐 나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자신들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알지 못한 두 사람은 끊임없이 비음
을 내지르며 서로를 탐했다.
2각 동안 지속되면 빛의 축제가 끝나고, 봉황과 용의 형상이  서로의
몸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지자, 두 사람의 신형이 천천히  원래의 위치
로 돌아왔다.
"하-악!"
"허억!"
격정적인 비음과 함께 야혼과 냉소소가 무너지듯 몸을 뉘였다.
"하아! 하아! 어때?"
절정이 주는 여운을 즐긴 사이도 없이 야혼의 상태를 물었다.
"좋았어, 최고야. 과부로 만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다 나은 모양이네?  그럼 지금부터는 용봉환락무를  펼치지 않아도
되겠네?"
"아무리 과부라지만 너무하잖아. 잠시 쉴 시간은 줘야지."
"여기는 쉬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그거야 이쁜 여자를 보면 자동으로 반응…."
문득 냉소소의 눈을 쳐다보던 야혼이 말을 끊었다. 물끄러미  쳐다보
는 울 듯한 눈동자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뭔가 의미를  찾아보도록 할게, 아니 벌써  할 일이
생겼나?"
"그 일이 끝나면?"
"끝나면? 개봉에서 통 돌릴 일밖에 더 있겠냐?"
"지금 그 말 약속할 수 있어?"
"자살을 두 번 시도하는  바보는 아니다. 이런 또  헛소릴 했네. 참!
내 허리 좀 만져봐. 살이 좀 빠진 것 같기는 한데."
"응, 많이 빠졌어. 이젠 과거의 모습으로 거의 돌아온 것 같은데?"
이내 표정을 풀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살을 빼기위한 나의 선택은 옳았어. 많이 해야 한다니까?"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순식간에 냉소소를 위쪽으로 올라서며
자세를 바꿨다. 잠시 후, 침대 크기의 커다란 관속에서 격정에 찬 비음
이 흘러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마도련 정문 쪽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2달간의 마도
련 방문 일정을 끝내고 떠나는 야혼 일행이었다.
2달 전 초라한 모습으로 들어왔지만 떠날 때는 아니었다. 마도련주인
냉소소를 비롯하여, 그녀의 그림자가 된 마천루 원로들과, 유웅창 그리
고 요화문 수뇌들까지 네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도마 영감!"
"왜, 이놈아!"
마천루 연무장에서의 일이 생각났던지 도마가 인상을  확 구기며 대
답했다. 도백회 웃어른인줄 알면서도 끝까지 반말 비슷하게  하는 야혼
의 행사가 괘씸했던 터였다.
"잘하쇼."
도마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이내 시선을  돌려 냉소소를
쳐다보았다.
"이거나 가져가라. 한 문파의 문주면 문주답게 살아 이 녀석아."
들고 있던 보자기를 불쑥 내밀며 도마가 소리쳤다.
"이 옷이 어때서. 아직 몇  년은 끄덕 없겠구먼. 어라?  언제 이렇게
떨어졌지?"
이미 넝마수준으로 변한 옷을 쳐다보던 야혼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
다. 그동안 깁지 못해 여기저기 찢겨나간 옷 사이로 살갗이  온통 드러
나 보였던 것이다.
'련주님이 준거다. 그런데 언제부터 련주님과 그런 사이가 된 거냐?'
냉소소를 힐끗 쳐다본 도마가 전음을 보냈다.
"고맙소, 그래도 나이 값은 하는구먼."
'과부 하나 꼬시는 게 뭐 어렵다고 그러시오. .'
재빨리 보따리를 받아들며 냉소소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너무 감격해 하지 마라. 혈신월을 선물로 받았잖아.'
'고맙다, 잘 입으마. 근데 추영객에게선 연락 왔냐?'
문득 궁금한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유마혼이  마도련을 떠날 때, 뒤
따라 보냈던 추영객의 소식이 궁금했던 탓이었다.
'히말라야산맥으로 들어간 다음부터 소식이 끊겼어.'
'히말라야?'
'응! 서역과 명의 국경지대에 있는 산이야.'
'서역이라.'
내심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앙그라 마이니우라 불리길 좋아했
다는 모군상의 말이 떠올랐다. 더구나  서역의 명교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왜?'
시선만 돌렸을 뿐  야혼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던 냉소소가
곧바로 물었다.
'아니야, 딴 걱정하지 말고 마도련이나 잘 지켜! 그럼 간다.'
공연히 머리 아프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나오지
않으면 만날 방법이 없는 자들이기에 시간을 두고 기다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떠나보겠습니다."
야혼과 냉소소를 유심히 쳐다보던 고명지가 작별인사가 끝났다고 생각
했는지 마도련 수뇌들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대인. 다음에 한번 더 들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가볍게 포권을 취한 고명지가 지면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아미타불! 그럼 소승도 가보겠습니다. 나 누님도 건강하시길 기원하
겠습니다."
"여 누님도요."
나령과 여옥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 추기영과  태웅이 고명지를 뒤따
라 몸을 날렸다.
'조심해! 몸 함부로 굴리지 말고.'
'걱정 마라, 다른 건 몰라도 아랫도리만큼은 확실하게 보존시킬 테니
까. 그리고…, 어머닌 나를 아월이라 불렀다. 달빛이라고….'
한쪽 눈을 살짝 깜빡인 야혼이 가볍게 지면을 찼다. 그러자 순식간에
일행의 시야에서 죽죽 멀어졌다.
'아월…. 훗! 여자 이름 같아.'
"부련주!"
야혼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냉소소가 나지막이
유웅창을 불렀다.
"네, 련주님!"
"부련주도 창마를 겪어 보았을 줄 압니다. 창마와 같은  자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겁천십웅마저 살아 있습니다. 그들
의 출현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럼?"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비급은 있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련주로서 첫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냉소소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솟구쳐 나왔다. 지금껏 망연한 눈
으로 야혼을 좇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3천 마도련 무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마도련주가  서 있을
뿐이었다.
"하명하십시오, 련주님!"
냉소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웅창을 비롯한  주변 무인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시간 부로 성라무연대진(星羅無緣大陣)을 발동하시오. 모든
업무는 전시형태로 돌입합니다. 외부에 나가있는  부하들에게도 그렇게
전하십시오. 기간은 분배된 무공을 완성할 때까집니다."
"존명!"
거부할 수 없는 명령. 봉문을 지시하는 련주의 첫 명령에 누구도  이
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창마만 해도  엄청난 자이거늘, 마도련을 창시
했던 그들마저 살아있다고 하였다. 그것도 사조가 아닌  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정파 무인들보다 오히려 그들의 출현을 더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유마혼 네 놈이 어떤 기연을 얻어올지  모르지만 더 이상 마도련엔
들어올 자격이 없다. 앞으로 개가 될 사람은 야혼이 아니라  바로 네놈
이 될 거다."
유마혼이 있을 곳으로 짐작되는 히말라야산맥 쪽을 바라보며 나지막
이 중얼거렸다.
*  *  *
쉬이익!
한 겨울 칼바람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야를 무섭게 할퀴었다.  황량한
벌판, 키 작은 초목조차 말라버린 이곳은 눈과 얼음의 마을이란 의미를
가진 히말라야산맥이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산을 오르는 인물, 한 쪽 소매가  바람에
덜렁거리는 유마혼이었다.
그가 오르는 산은 히말라야에서 가장  높은 산인 초모랑마봉(珠穆郞
瑪峰), 일명 대지의 여신이라 불리는 산이다.
"저곳인가? 저 어둠 속에 신세계가 있단 말인가."
아래쪽으로 검은 계곡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창마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었지만 그가 말하는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과 외로움을 벗삼아 5일을 헤매고 다닌  끝에 간신히 찾
아낼 수 있었다.
어둠의 계곡, 마치 천신(天神)이 만든 도끼자국처럼  파인 협곡이 창
마가 찾아가라 하였던 곳이다.
주변을 살피던 유마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의 10장 아래쪽에 불꽃 문양이 새겨진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마혼아, 이 길이 진정 원하는 길이더냐?"
아래쪽을 향해 몸을 날리려던 유마혼이 이내 그 자리에 앉았다. 불사
의 신체를 얻은 창마를 보았다. 그의 말대로 하면 자신  또한 이곳에서
불사의 신체와 극강한 무공을 얻을 거라 하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얻는 대신에 두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유마혼
이란 이름과 자유.
그가 내리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좋다, 우선은 저기 보이는 초모랑마봉이 나의 목표다."
만년설로 뒤덮인 초모랑마봉을 주시하던 유마혼이 벌떡 일어섰다. 하
늘아래 있지만 초모랑마봉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하나씩, 계단을 밟아가듯 올라가면 될 터이다. 결심을 굳힌 유마혼이
불꽃 모양이 새겨진 바위로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스스스!
"헉! 어떻게 이런 일이?"
유마혼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내려선 바위의 변화 때문이었
다. 불꽃 문양을 밟자마자 바위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더욱 놀라운 일은 주변에 어떤 기관장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바위가 허공답보의 경공술로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내려갈 건가."
문득 두려운 생각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도끼자국처럼
나 있던 계곡의 하늘은 어느새 사라지고 검은 어둠만이 두 눈 가득 들
어찼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유마혼. 이건 인공물이다. 자연이  아니지 않느
냐."
끊임없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바위를 보며 마음을 다독였다. 얼마나
깊이 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 족히 수천 장은 내려왔을 것 같은데 여전
히 바위는 움직이고 있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했다.
하염없이 내려가던 바위가 최초 변화를 보인 건 주변 대기가 따듯해
졌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방향을  바꾸어 수평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드디어 다 온 건가?"
쿵!
잠시 후, 바위가 멈춰선 곳은 지름이 100여 장에 달하는 거대한 광장
이었다.
"어떻게 나무가 빛을."
바위에서 내려설 겨를도 없이 눈앞의 나무를 쳐다보았다. 장정  수십
명이 팔을 뻗어야 간신히 닿을 정도의 엄청난  굵기의 나무는 붉은 광
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쉬이익! 쉬익!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산발한 머리처럼 셀 수 없이 많은 가지들이  저
마다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움직였다.
"세상에…. 식인혈목(食人血木)이었어."
살아 있는 나뭇가지의 모습에 몸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빛을 뿌
려 사방을 밝힌다는 점과 엄청난 크기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눈앞의 나
무는 꽤나 눈에 익었다.
성모궁을 찾아갈 때 보았던 식인혈목과 같은 종류였다. 바닥을  장식
한 수많은 줄기들이 곧 덮쳐올 것처럼 섬뜩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인간 얼굴형상을 하고 있는 나무둥치였다.  마치
몸체를 땅속에 묻은 거대한 거인이 얼굴만 밖으로  내 놓은 듯한 모습
이었다.
"진실의 나무라는 건가?"
문득 창마의 말이 생각났다.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
야할 곳이 바로 진실의 나무라 하였다.
깊게 심호흡을 한 유마혼이 진실의 나무 앞으로 다가섰다.
"앙그라 마이니우!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앙그라 마이니우! 나는 당
신을 따르겠습니다…."
팟!
앙그라 마이니우를 찬양하는 7번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놀라운 일
이 일어났다. 입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백색 광채가 솟구치며 둥근 원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리라!"
낮게 중얼거린 유마혼이 망설임 없이 둥근 원을 향해 몸을 던졌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마치 끈적끈적한 늪 속을 지나가는 듯했다. 손을
내밀어 주변을 감싼 물체를 만져 보았다.
"이럴 수가…."
형태가 없었다. 분명 눈에 보이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공기를
쥐었을 때처럼 아무런 촉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축지성촌(縮地成寸)이란 말인가?"
경악한 눈으로 천천히 지나가는  주변을 쳐다보았다. 오직 전설로만
내려온 경공의 최고 경지, 공간을 접어서 이동한다는  축지성촌이 아니
라면 지금과 같은 현상이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의문점은 여전히 남았다.  축지성촌은 무인이 펼치는 무공이
아닌가. 접혀진 공간을 장시간 유지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크! 하하하! 프! 하하하!'
의문도 잠시 유마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축지성촌의 무공이냐  아니
냐는 의미가 없다. 아니 축지성촌보다 더 어마어마한  기술임에 분명했
다. 자신이 아는 한 공간을 접어서 유지시킬 수 있는 무공은 강호 상에
없다. 그거 하나면 족했다.
잠시 후.
잔뜩 상기된 얼굴의 유마혼이 도착한 곳은 화려한 불이 밝혀진 대전
이었다. 진실의 나무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색 원이 나타나더니 그곳으로
부터 유마혼의 신형이 튀어 나왔다.
"어서 오게, 늦었구먼."
"자넨…?"
말을 걸어온 인물을 쳐다보던 유마혼이 화들짝 놀랐다. 천의맹에  있
어야할 남천악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따라 오게."
빙긋 미소를 지은 남천악이 유마혼을 일으켜 세웠다. 자신 또한 이곳
에서 유마혼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당파  장문인인 청운자
때문이었다. 주려화를 만나기 위해 무당파를 찾은 그에게  청운자는 뜻
밖의 제안을 해왔다.
성모궁에서 잃어버린 눈을 되찾을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반신반의
하는 자신을 향해 청운자는 엄청난 광경을 보여주었다.  바로 눈앞에서
손가락 두 개를 잘라 다시 자라나는 모습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여기는 어딘가?"
여전히 궁금한 얼굴로 남천악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글쎄…. 그분의 말로는 인간계(人間界)와 마계(魔界)의 중간  정도라
하더군."
"마계(魔界)?"
남천악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설명하자면 우선 명교에 대해서 알아야 하네. 그리고 그분에 대해서
도."
남천악이 나직하니 설명을 시작했다.
작금엔 마교라 불리지만 명교의 시작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대 파사국에서 시작된 종교로 천축을 거쳐 중원에 들어온 시기는 당나
라 때였다.
"명교에는 두 분의 신(神)이 존재하네. 선신을 아우라 마즈다라 하고
악신을 앙그라 마이니우라 부르지. 아울러 두분 신의 행적을 기린 책을
백서(白書)와 흑서(黑書)라 불렀다네. "
하지만 같은 신으로 존재했지만 앙그라 마이니우의 행적을 그렸다는
흑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아우라 마즈다라는 신을  찬양한 백서만
이 아베스타란 이름으로 전해내려 왔던 거였다.
"그분이 침묵(沈默)의 서(書)라 불리는 흑서를 얻은 시기는 500년 전
이었다고 하네."
그때만 해도 명교는 마니교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마니교의  호
법장로 잠사옹과 광사옹은 경전을 구하기  위해 파사국으로 수행을 떠
나게 되었다. 사막한가운데서 모래폭풍에  휘말린 그들이 떨어진  곳은
파사국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의 신전(神殿)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얻은 10개의 검은 석판이 흑서였다는 것이었다. 다시  중원
으로 돌아온 그는 10장의 석판을 해석하기 시작하였고, 모든 작업이 끝
났을 땐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잠사옹의 몸이었다. 흑서에 매달린  세월
이 100년일진대 그의 몸은 파사국에서 돌아올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
았다.
세월이 그를 비켜간 것이다.
"흑서엔 그것뿐만 있는 게  아니었다네. 우리가 술법이라 부를  만한
수많은 마법(魔法)과 함께 세상의 비밀이 적혀있었다네."
수 천년 전에 있었던 대 홍수는 인간  세상을 정화시켰을 뿐만 아니
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게 하였다. 홍수를 피해 지상을 떠났던 자들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된 거였다.
"이곳이 바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 하더군. 하지만 이곳을
지나면 바로 마계라는 곳이 나온다네. 인간은 건널 수 없는 곳이지. 성
모궁을 찾아갈 때 우리가 경험했던 마기의 숲을 생각하면 되네."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유마혼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묻는 말이 아니었
다. 이곳까지 오면서 이미 눈으로 확인했고, 몸으로 경험했다.
마치 꿈같아서, 확인하고 싶어 묻는 말이었다.
"이미 믿고 있으면서 뭘 그러나.  아마 이곳을 보면 더욱 놀라게  될
걸세."
유마혼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던 남천악이  불꽃 문양이 그려
진 문 앞에 섰다.
"이문은 의지의 문이라고 하네. 들어갈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문이
되지만 그럴 의사가 없는 자에겐 그저 돌이지."
주먹으로 문짝을 툭툭 쳐대던 남천악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볼수록 놀랍군."
이미 경험이 있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손으로 만져지는  촉감
은 분명 딱딱한 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흡수하듯 받아
들이고 있다. 중원의 진과 유사한 듯하면서도 차이가 났다.
남천악과 마찬가지로 문짝을 만져보던 유마혼이 이내 몸을 들이밀었
다.
"더 이상 놀랄 일이 뭐 있을…."
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남천악이  더욱 놀라게 될 거라 하였던
말이 실감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다란 통로는 바닥이 없었다.
깊이를 할 수 없는 협곡처럼 보였다. 그 위에 절벽에서 보았던  바위
가 있었다. 허공을 떠다니는 바위가.
"바위보다는 저 위쪽을 보게."
"저건?"
허공 또한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양쪽 벽으로 투명한 관이 줄줄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푸른 불꽃들이 하나씩 떠 있다.
그리고 액체가 가득한 관 안에는 난생 처음  보는 생명체가 한 마리
씩 들어있었다.
"이 괴물은 오크라 부른다네. 그분이 수집한 이계 생물 중 가장 힘이
약한 부류에 해당하네. 그리고 이 놈은 트롤이라 하고, 여기 보이는 이
놈은 오우거라 불린다고 하더군. 여기 트롤과 오우거는  무림인이라 하
더라도 쉽게 이길 수 없는 대단한 생물들이라네."
그들뿐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뾰족한 귀를 제외하곤 인간과  하등의
다를 바 없는 엘프라는 생물체가 있었고, 갖가지 수인들이 즐비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인간들마저 박제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분은 우수한 종족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셨네. 트롤이나  늑대인간
의 재생력을 가진 새로운 종족을. 처음엔  많은 실패를 했다고 하더군.
그러다 최초로 성공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겁천십웅이었다네.
금강불괴에 달한 피부 때문이었지."
남천악의 설명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별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리관 안에 들어있는 생물체들이 주는 충격이 그만큼 컸던 탓이었다.
더구나 인간으로부터 괴물로 변해  가는,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관들
앞에선 극심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겁천십웅을 상대로 실험에 성공한 그분은  이번에 성모척살대를 목
표로 삼았네. 겁천십웅보다 한  단계 낮다고 알려진  자들이지. 하지만
그들의 성공확률은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네. 전부 70명을  실험했는데
성공한 자들은 절반도 안되었다고 하더군. 바로 저들이네."
온몸이 갈가리 찢긴 괴물이 들어있는 관을 남천악이 가리켰다.  하지
만 괴물들의 상태는 전부 달랐다. 눈앞의 유리관속엔  어육이라 표현해
야할 정도로 처참한 시체가 들어 있는 반면, 나아갈수록 시체들의 모습
이 점점 완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관에  있는 시체는 심장을 제외하면  모든 부분이
정상이었다.
"다왔네."
남천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타고 있던 바위가 아래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를 부를 땐 언제나  앙그라 마이니우라 부르게.  성격이 생각보다
괴팍하다네.'
거대한 광장으로 들어섰을 때 남천악이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앙그라 마이니우여, 당신의 종이 될 유마혼을 데려 왔습니다."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감싼 인물을 향해 남천악은  오체투지(五體投地)
하며 외쳤다.
"이럴 수가…."
유마혼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검은 천으로 감싼 인물의  뒷모습
을 주시하자 저절로 무릎이 굽어지는 것이었다.
강기의 경지에 이른 자신을 기도만으로 제압하는 자기 있을 줄이야.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의 등은 바다처럼 넓었다. 아니 끝이 보이지  않
는 하늘이었다.
"찾아오느라 수고했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기이한 울림에  유마혼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공간을 타고 전해진 말이 아니었다. 상대에게 생각을  전달하는 무공인
혜광심어가 있다고 하였지만 실제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 앞에 발가벗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은 그걸 먼저 익히거라."
"헉!"
남천악과 유마혼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허공 중에
서 불쑥 나타난 서책 때문이었다. 어떤  흔적도 감지하지 못했는데, 바
로 앞에 책이 떠 있었다.
"언령제세공(言令除世功)?"
첫 장을 넘기던 두 사람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곳에 써 있는 글귀 때문이었다.
- 단전은 내기를 부르고, 심장은 마력을 부른다. 내기와 마력의 구현
은 말(言)이다.
말을 통해 무공을 구현한다는 의미였다. 초식명이 아닌 의지를  담은
말로서 무공을 구현한다는,  지금까지 알고 있는  무론(武論)과는 궤를
달리하는 이론인 게다.
물론 일반 무공도 초식명을 외친다. 하지만 초식명은 내기의  흐름과
몸의 움직임을 일치하도록 하는 역할을 할 뿐, 초식명 외치는 자체로는
커다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책자 안에 적힌 언령제세공은 달랐다. 초식명 자체가  무공이
었다.
강( )이라 외치면 몸이  금강불괴로 변하고,  허(虛)라 외치면 몸이
순간 이동을 한다.
의지(意志)가 곧 무공(武功)이 되는 엄청난 책자였던 것이다.
"세상에…."
놀람의 연속이었다. 언령제세공이란 책자에  적힌 모든 무공이 무기
없이 적수공권을 펼치게 되어 있었다. 풍환살(風環殺)이라고 고함을 지
르면 공기가 환을 만들며 상대를 향해 나아간다.
우검사(雨劒死)란 고함을 내지르면 주변의 대기가 검이 되어  상대를
격살한다.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개념이라 해야했다.
"심검(心劒)의 경지란 말인가?"
막연한 눈으로 책자를 읽어가던 유마혼이 중얼거렸다. 아직은 전설의
무공이라 알려진 경지, 마음만으로 상대를 격살할 수 있다는 심검의 경
지를 무공으로 표현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검의 경지가 아니니라."
또 다시 들려오는 머릿속의 목소리에 유마혼이 고개를 들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눈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
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는 심연, 감히 쳐다본다는 것 자체가 불경
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한 유마혼의 귓전에 눈동자처럼 깊은 언어가 흘러들었다.
"마법(魔法)은 곧 의지(意志)니라.  의지(意志)는 곧  언어(言語)니라.
언어(言語)는 곧 권능(權能)이니라."
"앙그라 마이니우여 저희들은 마법을 알지 못합니다."
유마혼의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엄청난 무공이긴 했지만 마법이  뭔
지 모르는 자신들에게는 그저 꿈에 불과했다.
개념조차 적립되어 있지 않은 자신들이 아닌가.
"너희들은 마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 그 힘은  내가 줄 것이다. 마계
에 살고 있던 어린  마룡(魔龍)의 심장과, 발록의 피는  너희들을 신의
사자로 만들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안 그런가 이철상."
"잠사옹! 그런다고 하여 당신이 신이 되리라  여겼소. 앞으로 천년을
넘게 산다 하더라도 당신은 신이 될 수 없소, 남들보다 오래 사는 인간
을 뿐이란 말이오."
"헉!"
갑자기 들려오는 쉰 듯한 목소리에 유마혼과  남천악의 얼굴이 해쓱
하게 변했다. 잠사옹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분명하건만  음색이 달
랐다. 더구나 잠사옹은 이철상이라 하였다.
"설마하니 지옥마제란 말인가?"
"맞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지옥마제 이철상이었다. 그의 몸을 잠시
빌려쓰는 사람은 나고. 우선은 언령제세공 상의 강( )을  익히거라. 그
것만큼은 중원무공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어 있다. 마룡의 심장과 발록
의 피를 견디려면 강철보다 단단한 몸이 필요하다. 완전하게 익히지 못
하면 회랑에서 보았던 그들처럼 터져나감을 명심하거라."
"알겠사옵니다. 앙그라 마이니우여!"
내심 기절할 듯 놀랐지만 두 사람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너무 황당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빙의(憑依)라니, 한 인간의 몸에 두 사람의 영혼이 공존하고 있는 초
자연적인 현실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좋다. 일단 묻어 둔다. 잠사옹이면 어떻고, 지옥마제면 어떤가.'
바닥에 다시 몸을 붙이며 오체투지한 남천악이 내심 중얼거렸다.
마룡의 심장이나 발록의 피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자신에게 힘을 주는 매개체가 그것들이다. 영수의
내단 정도로 생각하면 그만일 터였다
히말라야 최고봉인 초모랑마봉의 지하에서 유마혼과  남천악이 얻은
기연이었다.
"어떤가 이철상, 이로서 모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나?  마룡의 심장
은 천마광혈지체(天魔狂血之體)를 완성하게 될 터이고, 발록의 피는 태
양열화지체(太陽熱火之體)를 만들게 될 거네.  이제야 수천구신체의 배
치가 완전하게 끝났다네. 명교에 둘, 강호 무림에 둘,  그리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양민 쪽에 둘, 그리고  내가 창조한 둘을 합치면, 야차혈
마지체를 제외한 나머지 8명의 수천구신체가 쟁투를 벌이게 된다네."
유마혼과 남천악이 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잠사옹이 중얼거
리듯 말했다.
"허허! 대답하기 싫은가 보군."
머릿속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잠사옹이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그들의 쟁투를 보면서 신(神)임을 증명하고 싶은 게요! 그래
서 얻어지는 게 뭐요?"
"뭘 얻고 싶은 게 아니네. 다만 내가 창조한  천마광혈지체나 태양열
화지체와 그들과 싸움을 지켜보고 싶은 거네. 탄생의  신비가 우세한지
아니면 내가 더 뛰어난지 알고 싶다고나 할까…. 그런데 묘하게도 그들
이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혀가고 있더군. 세 번째  패천십비는 자네들과
자네들의 무공을 익힌 수천구신체의 비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드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잊었소? 당신의 무공이 겁천십웅을 전부 이겼다는 사실을…."
"물론 그랬지, 하지만 자네들은 수천구신체가 아니었지 않은가. 해서
자네도 지옥도법의 마지막 초식을 익히지 못했고. 이번에는  거의 비슷
한 조건이 될 걸세. 진정한 승부가 되는 거지."
"그러면서 명교의 신이라 외치는 당신이 더 우습군. 인간들조차 하지
않는 그런 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당신이 말이야."
"자넨 나와 같이 2백 년을  넘게 살고 있으면서도 아직  모르겠는가.
이건 신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놀이라네. 자신이 만든  창조물들의 노
는 모습을 쳐다보는 건 신의 권리란 말일세."
"광사옹(光士翁)은 어떻게 할거요."
이철상이 낮게 물었다. 광사옹, 잠사옹과 같은 시대를 살며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자였다. 무려 4백 년 동안 잠사옹의 일을  끊임없이 방해했
던 인물, 잠사옹이 중원을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참 말을 안 했군, 13연옥의 사자(死者)들의 보내기로 했다네. 강시대
법과 좀비술을 합하니까 쓸만한 물건이 나오더군. 그들  전부를 없애려
면 과거 겁천십웅 수준의 무인이  네 사람은 있어야 할걸세.  광사옹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그대들만큼은 아니질 않겠는가."
"정녕 그 저주대법을 펼쳤단  말이오. 죽은 자들마저 이용하려는  게
요."
이철상의 고함을 질렀다. 잠사옹의 영혼이 빙의 되면서 엄청난  비밀
을 접하고 말았다. 다른 세계, 반인반수의 많은 괴물들이 살고 있는 세
상이 또 있었던 것이었다.
잠사옹은 그곳을 마계(魔界)라 하였다. 흑서에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갖가지 악마적인 대법뿐만 아니라 이세계(異世界)에 대한  비밀마저 적
혀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다.
마계 또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과했다. 마계는 두 세계를
단절시키는 중간계였던 것이다.
마계와 마계를 건너 새로운 세상에서 사용하는 게 마법이었다.  죽을
자를 살려내는 수법 또한 마법의 한가지였다.
"그들은 시작일 뿐이다, 이철상. 명교인들에게 원한을 심어준 자들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었다. 나는  명교인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만들어
줄뿐이다. 죽어서라도 복수를 해야하는 게 우리 중원인의 특징 아닌가.
나는 오히려 자네가 더 걱정스러워.  천마(天魔)의 진전을 이은 자네가
아닌가. 자네 몸을 억압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잠사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처음  패천십비의 관전자가 되었을 때만
하여도 지옥도법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
지옥도법의 비밀을 알게 된 건 이철상의 몸에 빙의한 후였다. 천마도
법, 흔히, 중원마공의 조종이라 불리는 천마의 무공이 바로 지옥도법이
었던 것이다.
"중원인들은 결코 모르지. 고금제일인이라 부르는 천마가 불교 8부신
중 한 명인 아수라의 후인이었고,  그 아수라가 아우라 마즈다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네. 자네가 발록을 굴복시킨덴 다  이유가 있
는 걸세."
"발록은 잡은 건 나의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힘이었소."
이철상이 낮은 신음을 발했다. 발록, 1장에 달하는 키에 지성을 가진
거대한 괴수를 일컫는 말이다.
온통 불길을 머금고 다니는 발록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옥도
법을 익힌 자신이 초라하질  정도였으니. 마계에서조차 투마(鬪魔)라고
불린다는 발록을 잠사옹은 제압했다. 그것도 산채로.
"아닐세, 나의 정신력을 견딜 수 있는 자네 신체 때문이었네. 자네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했다면 발록을 잡지 못했을 거야."
마법(魔法)과 무공을 결합시켜 만든 무공이 강하긴 했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보통 인간의 신체는 강대한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철상의 몸은 견뎌냈다. 그뿐만 아니라 5백 년 동안  쌓았던
마력을 충분히 발휘할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참, 철혈마존이 죽었네. 제마성검이 나타난 것 같아."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외다. 당신에겐 좋은 선물이 되겠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마옥성에 비해 강호무림이 너무 약해서 걱정
했는데…."
"정말 악마가 되었구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앙그라 마이니우는  악마를 지칭하는 말이라
고."
한사람의 몸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모습은
전율적이었다. 때로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때로는 환하게 웃는  모습은
잠사옹의 말대로 악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만 참아보게,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거든. 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인간과 신이 대화하는 모습을. 내가 바라는  세상일세. 먼저 이곳을 그
렇게 만든 다음…."
이철상의 얼굴에 싱긋 미소가 어렸다. 지옥마제 이철상이 아닌, 자신
을 앙그라 마이니우로 여기는 잠사옹의 미소였다.
광명도(光明刀).
 수평선을 보는 듯,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은 고요했다. 간간이 불어
오는 바람이 모래를 운반하여 구릉을 만들곤 하지만, 그건 긴 시간동안
한 곳에 움직이지 않고 관찰해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막은, 한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이다.
타클라마칸,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온통 모래 천지
인 이곳에 방문자가 있었다. 청해성를  떠나 천산으로 길을 잡은  야혼
일행이었다.
"니미럴타불! 이곳은 저주받은  땅이 분명한가 보이.  밤낮의 차이가
이렇듯 심하니…."
낙타 위에서 연신 땀을 훔치던 추기영이 나직하니 투덜거렸다.
"그래도 너는 무공이나 익히고 있지, 대상들은 무공도 없이  이 사막
을 건너 다녔다."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온통 천으로 얼굴을 감싼 고명지가 일행을 돌
아보며 말했다. 지금 자신들이 가는 길은 천산남로라  불리는 비단길의
한 곳이다. 과거 이곳을 통해 많은 서역 문물들이 들어왔고, 명교 또한
그 중의 한 갈래였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녀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
았다. 가슴까지 차 오르는 뜨거운 열기에 숨쉬기조차  곤란한 지경이었
다. 사막에 들어온 지 20일, 무공으로 열기는 식히는 것도 한계에 달했
다.
"아홍 시주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아홍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살아가는 위구르족 안내인이다.
"앞으로 5일은 더 가야 천지(泉地)에 도착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온 길만 해도 만만치 않거늘…."
아홍이 감탄한 얼굴로 일행을 쳐다보았다. 40년 안내인 생활에  수많
은 사람들을 겪었다. 물건을  팔러 서역으로 가는  상인들을 비롯하여,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란 자들도 있었다.
처음 사막을 횡단하는 자들은 백이면 백 10일을 버티지 못했다.
물을 아껴야 한다고 골백번을 말해도 소용없었다. 한달 치 분량을 준
비한 물은 10일이면 바닥나고 만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달랐다. 지시 사항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사막을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 가장 특이한 사람은 당연  야혼이란 자
였다.
다른 자들에 비해 몸마저 비대한  그가 가장 적응이 빨랐다.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물을 마시지 않는 듯했다.
"야 공자! 물을 마셔줘야 합니다. 수분이 떨어지면 몸이 견디질 못합
니다."
"아…! 예."
아홍을 향해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양가죽으로 만든 물통을 들
어 올렸다.
"연작문주는 아무래도 사막체질인가 보네 그랴."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이라서 그런 것 아니냐.  하루빨리 옛날
몸으로 돌아가야…. 이봐 노인장 길을 잘못 든 것 아뇨?"
얼굴이 해쓱하게 변한 야혼이 아홍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저 멀리서
무수한 기둥이 목격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저 놈의 흑사풍이 왜 이곳에…."
아홍의 얼굴 또한 야혼과 다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백짓장처럼  창백
하게 변하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전설(傳說), 죽음의 땅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에 내려오는 이야기 중
검은 폭풍이 생성되는 지역이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흑사풍이  생성된다하여 사풍지(死風地)라 불리는
장소에 일행이 들어와 있었던 거였다.
"거패, 육승! 일이 잘못되면 무작정 북쪽으로 길을 잡아. 그럼 나무와
바위가 반반씩 섞인 산이 나온다. 그곳에서 죽치고 기다려!"
두 사람을 향해 고함을 지른 야혼이 고명지가  타고 있는 낙타의 고
삐를 틀어쥐었다.
"아미타불! 혹시 둘이 배 맞추고 싶어서…, 허미! 저건 뭐다냐?"
사막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야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추기영
이 100장 너머 보이는 광경에 화들짝 고함을 질렀다.
쉬이익! 휘이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모래들이 회전하는  듯하더니 이내 거대
한 회오리로 변하는 것이었다.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서 20
여 개에 달한 회오리들이 무서운 속도로 생성되고 있었다.
"남쪽으로 발라, 새끼들아!"
고함을 내지른 야혼이 고명지를 끌어당겨 자신의 뒤쪽에 태웠다.  그
리고는 힘차게 낙타의 엉덩이를 찼다.
야혼을 뒤따라 태웅과 추기영 그리고 아홍이 탄 낙타가 뿌연 모래먼
지를 날리며 달려나갔다.
그러나, 인간을 실은 낙타가  아무리 빠르다고 하여도  자연만 할까.
더욱 개수를 늘인 흑사풍은 일행을 할퀴듯 덮쳤다.
"물과 아홍은 반드시 챙겨라! 북쪽 잊지마라!"
폭풍에 휘말린 일행의 귓전에 내공을 가득 담은 야혼의 목소리가 흘
러들었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바람이었다.
무공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들어있는  모
래는 하나 하나가 암기처럼 강했다.
"니미럴타불! 이 짓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홍을 끌어당겨 안쪽으로 세운 추기영과 태웅이  모든 내공을 끌어
올려 모래 속으로 파고들었다.
꾸엑!
두 사람의 시야에 흑사풍에 휘말려 날아 올라가는 낙타의 모습이 잡
혔다.
"힘을 내! 조금만 더 들어가면 될 거야!"
하지만, 무려 4갑자에 달한 내공을 이용하여 모래 속으로 파고들었으
나 불가항력이었다. 흑사풍이라 알려진  모래 바람은 순식간에  30장에
달하는 모래 언덕을 없애버리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제기랄!"
야혼과 고명지의 상태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흑사풍에 휘말린 세 사
람의 신형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몸에서 힘을 빼, 그냥 맡겨."
야혼과 고명지 또한 추기영 일행과 다르지 않았다. 물 포대 두  개만
챙겨들고 흑사풍에 몸을 맡겨버린 것이다. 하늘과 같은 내공도, 겁천십
웅의 무공도 필요 없었다. 위대한 자연의 힘 앞엔 무력한  인간에 불과
할 뿐이었다.
하나로 엮인 두 사람의 신형이 흑사풍을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야혼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등에 업혀 있던 고명지를 앞
으로 이동시키더니 그녀의 옷을 사정없이 찢어냈다.
"무슨 짓이야?"
절반정도 뜯겨나간 윗옷을 보며 고명지가 고함을 내질렀다. 거의  젖
가슴이 드러날 정도로 찢어버린 것이었다.
"둘의 몸을 묶으려 그러지."
"그런데 왜 내 옷이냐고?"
"따지긴 뭘 따져 이년아. 이 바쁜 와중에 네 옷 내 옷이 어딨냐?  그
리고 벗겨놓으면 네가 더 그림이 되잖아."
"이 도둑놈아!"
"잔말말고 꽉 붙어 이년아, 죽기 싫으면."
냉큼 고명지를 끌어당긴 야혼이 방금 찢어낸 옷으로 두 사람 허리를
질끈 동여맸다.
"가슴이 크니까 푹신하기는 하다."
"이 개자…."
야혼을 향해 욕설을 뱉어내려던 고명지가 일순 입을 닫았다. 잔뜩 붉
어진 야혼의 얼굴 때문이었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전  내공을
끌어올려 흑사풍에 대항하고 있었던 거였다.
"준비 됐냐?"
"!"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50장
높이에서 야혼에게 투덜거렸던 것이다. 마치 지상처럼.
"자, 간다!"
빤히 쳐다보는 고명지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당긴  야혼이 이내 내
공을 풀어버렸다.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던 탓이었다.
"어디 보자, 저곳은? 일단 가보기나 해야겠네."
야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흑사풍이 생성되는 아래쪽에 건물인  듯
한 구조물이 언뜻 눈에 들어왔던  거였다.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하늘을 쳐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가고싶은 대로 나를 인도하거라. 기껏해야 사막 아니더냐!"
아련히 들려오는 야혼의 고함소리를 끝으로 고명지는 정신을 잃었다.
야혼 또한 마찬가지였다. 온몸으로 고명지의 몸을 감싼  상태로 흑사풍
에 몸을 맡겨버린 것이었다.
다섯 사람을 삼켜버린 흑사풍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남쪽으로 멀
어져 갔다. 나아가다 서로 갈라져 가는 것도 있었고, 두 개의 흑사풍이
하나로 합쳐져 더욱 강한 폭풍으로 변화한 것도 있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듯, 나아가던 흑사풍이 스러진 시기는 한낮
의 뙤약볕이 사라지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무렵이었다.
털썩!
흑사풍이 스러짐과 동시에 커다란 덩어리가 떨어져  모래 속으로 깊
숙이 박혔다. 옷으로 몸을 칭칭 감아 묶었던 야혼과 고명지였다.
한참 동안을 죽은 듯  꼼짝하지 않던 동체가 일순  미약한 움직임을
보였다.
"제길…. 이번엔 좀 좋은 곳으로 떨어졌나 모르겠군."
내심 투덜거리며 모래 구덩이 속에서 몸을 뺐다. 흑사풍은 오래 전에
한번 겪었던 바람이었다.
먹을 물도 없이 사막을 건너다 흑사풍을 만났었다. 빨리 죽었으면 하
는 바람으로 몸을 맡겼는데, 흑사풍이 데려다 준  곳은 천지(泉地)였다.
사막에서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곳.
그곳에서 대상행렬을 만나 중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얘는 완전히 맛이 갔군. 끙차!"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고명지를 안고 몸을 일으킨 야혼은 주
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사막에서는 나의 운을 따라올 사람은 없어."
조그마한 초지(草地)를 발견한 야혼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5장 폭
을 가진 작은 녹지는 수십 마리의 낙타 떼를 끌고 가는 대상들이 머물
기에 너무 작아 버려진 듯하였다.
아마 사막에서 살아가는 위구르인이나 가끔씩 들러가는 곳임에 분명
했다.
"잘됐네, 추위는 피하겠구먼."
온몸이 저리는 듯한 느낌을 무시하고 천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옹달샘 수준의 작은 연못과 함께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듯,
조그마한 토담집도 있었다.
"아이고 온몸이 전부 모래로 가득찼네. 추워지기 전에 빨리 씻어야할
텐데, 이년은 깨어날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안 하는 거야. 오랜만에
여자 목욕이나 한번 시켜 볼거나."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허리에 감았던 천을  풀어 팽개친 다음 기
절해 있는 고명지를 연못 속으로 사정없이 던져버렸다.
"꺄아악!"
갑작스런 기온변화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고명지가  뾰족한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다 이내 물 속임을  깨닫고 야혼을 향해 망연한  눈빛을
보냈다.
흑사풍에 휘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굴던 야혼 때문에, 다
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정신이 아득해져 올 땐  죽음을 생각했
었다. 그랬던 자신이 물 속에 들어와 있다니.
"어둠이 밀려온다, 빨리 씻어라. 나는 불피울 테니까."
장포를 연못 근처로 던지며 말했다.  어둠과 함께 뚝 떨어진 기온은
벌써부터 심상치 않았다. 검은 먹구름이 가득한걸 보면  눈이라도 한바
탕 뿌릴 것만 같았다.
"너, 나에게 아무 짓 안 했지?"
갑자기 야혼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더럭 겁이 난 고명지가 저
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만지기만 했으니까 서운해하진 말아라. 더 하고 싶어도 모래 때문에
못했다."
"너? 이 자식…."
"이 년아, 이곳까지 고이 모셔왔으면 그 정도는 대가로  지불해도 손
해는 아냐. 오고 가는 정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태웅의 말  못 들었어?
그리고 사내 앞에서 가슴을 그렇게 드러내고 다니는 네 잘못이 더 커."
"나쁜 새끼야, 내 옷을 찢어낸 사람이 바로 너잖아."
가슴 쪽을 내려보던 고명지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허공에
서는 경황중이라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가슴의 절반
이상이 드러나 있었다. 옷을 어떻게 찢었는지 가슴을  가렸던 속옷까지
사라지고 없었다.
"미리 말하는데, 행여 내 옷 빌려 달라고 하지 마라. 지금이야 네 옷
을 말려야 하니까 잠시 빌려주는  거지만 내일부터는 어림도 없으니까
알아서 해. 눈올지도 모르니까 빨리 씻어."
"나쁜 놈! 이쪽으로 고개만  돌려봐라 금환신공의 맛을  보게 될 줄
알아. 그리고 사막에서 눈은?"
야혼이 있음직한 곳을  연신 힐끔거리며 투덜대던  고명지가 서둘러
옷을 벗었다. 굳이 야혼의 말이 아니더라도 옷 속에 들어찬  모래 때문
에 온몸이 버석거렸다.
한시바삐 씻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터였다.
더구나 지난 20일간 세수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자신이 아닌가.
콧노래를 부르며 느긋하니 몸을 씻던 고명지의  행동은 그리 오래가
지 못했다. 머릿속에 쌓인 모래를  전부 털어 내고 본격적으로  머리를
감는 순간 하늘에서 하얀 꽃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눈이 온단 말이야?"
어깨를 차갑게 하는 기운에 고개를 든 고명지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
를 질렀다. 정말로 눈이었다. 비조차 내리지 않는 사막에  눈이라니, 놀
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름답네…."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던 고명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검은
하늘을 가득 채운 새하얀 눈발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점점이 떨어지는 눈송이 전부가 미소를 짓는 듯 하였다.
그저 망연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귓전에  음흉한 음성이 들려왔
다.
"정말 혼자보긴 아까운 광경이다.  지필묵만 있다면 그림으로 한  장
남기고 싶다."
"너? 이 자식 절로 안가?"
퍼뜩 정신을 차린 고명지가 맹렬하게 가슴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연못 속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고명지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옷을 벗어
버린 야혼이 연못 안으로 들어왔다.
"너? 너? 너?"
"등에 붙은 모래도 털어 내야 할 것 아냐. 안 잡아먹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매라."
멍한 얼굴로 쳐다보는 고명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풀
어 물 속에 넣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이 녀석 얼굴이 언제 이렇게 변했지?'
환하게 변한 야혼의 얼굴에 고명지가 일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과
거에 펼쳤던 색색만화공은 결코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살도 빠졌네?'
그랬다. 그동안 같이 있어 야혼의 변한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마도련에 들어오기 전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출렁이던 뱃살이 사라진 건 물론이고 허리마저도  안쪽으로 둥근 곡
선을 그린다.
"내 몸 구경하는 건 좋은데, 우선 등이나 좀 밀어."
고명지의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민 야혼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응? 응…."
재빨리 물 속으로 주저앉은 고명지가 야혼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 살 많이 빠졌다."
바위처럼 탄탄한 근육을 밀며 말했다. 손으로 만져보니 더욱  확실해
졌다. 성모궁에서 먹었던 약 기운 대부분이 내공으로  흡수되어 과거의
몸을 되찾아 가는 게 분명했다.
"내가 서찰에서 말했잖아. 정상적인 몸일 땐 개봉에 있는  모든 여자
들은 내 밥이었다고. 나만 지나가면 다리를 꼬며 쓰러지는 여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훗!"
"아직도 못 믿는 모양이네? 여호치 그년이 가져간 책자를 봤어야 하
는 건데. 무려 250명의 여자들의  신상명세서가 적혀 있었다. 지부대인
부인부터 시작하여…."
"믿는다 믿어. 그러니까 그만해라."
"그래야지, 이 야혼이 하는 말은 대부분이 진실이다. 돌아라."
"나는 됐…."
"시키는 대로 해 이년아. 발가벗고  같이 목욕까지 했으면 볼 장  다
본거지 뭘 빼고 난리냐."
고명지의 어깨를 붙잡고 강제로 몸을 돌린 야혼이 그녀의 등을 슬슬
문지르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진 머리를 들어올리고 쓰다듬듯  목을 씻
어낸 야혼의 손길은 그녀의 등을 타고 흘렀다.
"거봐라! 땀에 달라붙은 모래는 물로 헹군다고 해서 떨어지는 게 아
니란 말이다. 이대로 방치하면 이 고운 피부 속으로 파고들지도 모른다
고."
교묘한 손놀림이었다. 모래를 씻어낸다는 명목으로 야혼의 손길은 고
명지의 겨드랑이 깊숙한 곳까지 스스럼없이 들락거렸다.
"자꾸만 그러면…."
"함박눈이네?"
"아-!"
겨드랑이를 파고들며 가슴 선을 더듬는 손길을 뿌리치려던 고명지가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눈송이는  신비롭기 그지없
었다.
새하얀 정령들이 사막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하였다.
투박한 손길이 가슴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아름다
웠다.
"끙자!"
"어맛!"
불쑥 자신을 안아드는 야혼의 행동에 질겁한  고명지가 뾰족한 비명
을 질렀다.
"비는 맞아 봤으니까 이번엔 눈을 맞아봐라. 오랫동안 맞으면  몸 상
하니까 잠시 동안만…."
"이런 색마 같은 놈!"
바로 곁에 서 있는 야혼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낮게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불끈 솟은 상징이 전면을 향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 놈은 내 의사완 무관하게 제 혼자 움직이는 놈이야. 그러니 쓸데
없는데 신경 꺼라. 자꾸만 그렇게  나오면 하고 싶다는 의사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알몸으로 눈을 맞아 볼 거냐.
더구나 모래밖에 없는 사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 될 거다."
'이상하네, 분명 내가 손해보는 건데, 왜 마음은 더 편하지.'
곁눈질로 야혼을 힐끔 쳐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녀석 앞에 알몸으로 서있다는 사실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해방감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다.
얼마 전 흠뻑 비를 맞았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야홋!"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쳐들며 고함을 지른  고명지가 전방을 향해 몸
을 날렸다. 갑자기 눈 속을 달리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
었다.
맨살을 스치는 따가운 눈발마저도 기분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이고 저년을 누가 데리고 살아. 제 옷 정도는 널고 가야할 것  아
냐."
탐스런 엉덩이를 쳐다보며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주변에 흩어
진 고명지의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에라 너도 가라! 어중간히 남아 있으면 뭐하냐."
얼마 남지 않은 고명지의 상의를 냅다 던져버리고 불 옆에 몇 개 세
워둔 나뭇가지 위에 고명지의 옷을 걸쳤다.
"어이그 추워라! 빌어먹을 사막에 눈은 오고  지랄이야. 그나저나 이
불로 오늘  밤을 견디려나 몰라."
잔뜩 쌓아 두었던 나뭇가지를 불 속으로 던져 넣으며 투덜거렸다.
"야혼!"
연신 나뭇가지를 던져  넣는 야혼의 귓전에  모깃소리만한 고명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운데 뭐해? 빨리 안 들어오고."
"그게, 옷이…."
"장포는 바닥에 깔았는데? 그냥 들어와라, 조금 있으면  더욱 어색해
진다. 그리고 너 때문에 벗고 있는 나도 생각 좀 해 주라. 돌아 앉아있
을 테니까 빨리 들어와."
"그… 그래."
망설이듯 말한 고명지가 삐쭉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야혼의 등이
보이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빠른 동작으로 야혼의 윗옷을 주워들
었다.
옷을 걸치기 위해 머리를 집어넣던 고명지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갑자기 야혼의 등이 왜소해 보였던 탓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등 전
체를 가득 메우고 있는 흉터 때문이었다.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 그의 좁은 등에서 수많은 마옥성 인물들
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아이, 추워라!"
가만히 야혼의 옷을 내려놓은  고명지가 손을 호호 불며  불 앞으로
다가앉았다.
"눈 속을 달려보니까 기분 좋지?"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행동. 고명지가 불 앞으로  다가앉자마자
자연스럽게 말을 걸며 그녀의 등을 문지른다.
"응, 아주 상쾌해. 알몸으로 달린다는 게 그런 기분일 줄  몰랐어. 좀
세게 문질러 줘. 피부가 꽁꽁 얼었네."
"나야 좋…. 정말 꽁꽁 얼었다. 잘못하다간 동상 걸릴라."
슬쩍 말을 바꾸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거의 1각 동안을 돌아다닌 고
명지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뜨거운 기운을 양손에  집중시킨 야
혼의 양손이 빠르게 고명지의 등을 쓰다듬었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고명지의 등을 말린 야혼의  손이 이번에 겨드
랑이 속으로 스며들어 탄력 있는 가슴을 슬쩍 쓸었다.
"잘하네, 따뜻하고 좋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고명지가 야혼에게 몸을 스르르 기댔다.
"허거덕!"
야혼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 보였다. 천봉처럼 솟은
가슴을 비롯하여 아래쪽의 풋풋한 초지까지 한눈에 확 들어왔다.
더구나 고명지가 뒤쪽으로 기대자,  겨드랑이에 있던 그의 양손은
불쑥 솟은 둔덕으로 밀려나갔다.
"나는 냉소저처럼 너를 끝까지  도와줄 수 없다.  전면에 나설 수도
없…. 하악!"
야혼의 눈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이내 눈을 감았다. 양쪽 가슴에서 저
릿한 느낌이 다가왔다.
처음엔 아릿한 아픔이 밀려오던 그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돌더니 이
내 쾌락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이건, 야혼 네가 나를 도와준 대가야.  좀 전에 네가 말했던
오고 가는 정. 그 이상의 의미는…, 으웁!"
입안 가득 밀려드는 설육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손을 들
어 야혼의 목을 감싸안으며 열정적으로 입맞춤에 응했다.
딱딱하게 솟은 유실을 간질이던 손이 고명지의 온몸을 쓸고  다녔다.
오른쪽에서 놀다가, 왼쪽으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놀다 지치면 기름진
아랫배를 쓰다듬는다.
야혼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고명지의 아랫배는 묘한 율동을 보인다.
여전히 입을 붙인 상태로 야혼의 손길은 바쁘게 움직였다.  대리석처
럼 미끈한 다리를 쓸어 올라가던 그의 손길이  어느 순간 풀숲으로 모
습을 감췄다.
"하-아!"
고명지의 입에서 폭발적인 비음이 흘러나왔다. 15세가 되었을 때  이
미 성(性)을 알아버렸고, 그로부터 13년이 흘렀다.
복건성에서 야혼과 관계 이후 수개월 동안  쌓였던 욕정이 봇물처럼
터졌다.
오히려 바빠진 사람은 지금 상황을 유도했던  야혼이 아니라 나직한
신음을 내지르는 고명지였다.
목을 감고 있던 두 손이 어느새 자리를  떠나 야혼의 하체로 이동했
다. 앉은 자세였기에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하늘을 향해 불끈 고개를 쳐든 상징을 힘있게 틀어쥐었다.
"헉!"
야혼의 입에서도 거친 비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고명지의 행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입맞춤을 끝낸 그녀의 입술이 두 손을  따라 움
직였다.
"허억! 용봉환락무를…."
아래쪽에서 밀려오는 엄청난 쾌감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고마워!'
내심 감사의 말을 전한 고명지가 더욱 거칠게 머리와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그동안 구결로만 암기하고 있던 용봉환락무를 운용하기 시작
했다. 하지만 용봉환락무를 운용하는 건 쉽지가 않았다.
야혼의 손놀림에 의한 쾌락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낮은 비음을 내지르며 내기 운용에 집중하자  어는 순간 단전으로부
터 폭발적인 쾌락이 밀려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힘껏 틀어쥐었
다. 무엇인가 붙잡을 게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염없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아-아!"
절정, 용봉환락무를 운기하는 것만으로 극치의 쾌락에 도달해버린 것
이었다. 하지만 한 번의 절정은 시작에  불과했다. 여전히 운기되고 있
는 용봉환락무에 의해 또 다시 온몸에서 열기가 일었다.
"부르지 않았어, 그 놈을 부르지 않았다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절정의 순간이면 언제나 불러야  했
던 원수의 이름, 놈을 저주하기  위해 부르기 시작했던 이름이  어느새
절정을 표현하는 말로 변해버렸다.
눈물을 흘리던 고명지의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어리고, 두 사람의 몸
이 다시 엉켜들었다.
고명지의 몸에서 흘러나온 백무와 야혼의 몸에서  솟구친 적무가 함
께 어울리기 시작하였고, 끈적끈적한 비음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하-악!"
엉덩이가 번쩍 들어올려짐을 느낀 고명지가 야혼이  윗옷을 들어 입
을 틀어막았다. 아직은 자신을 믿을 수 없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내 옷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엉덩이가 내려가면서  느껴
지는 엄청난 충격에 입이 절로 벌어졌던 탓이었다.
두 사람의 신음소리는 토담을 넘어 눈발이  내리는 사막으로 퍼져나
갔다.
사막, 눈, 용봉환락무,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쾌락이 함께 하는 밤이
었다.
사막은 참으로 놀라웠다. 밤새도록 내렸던  함박눈은, 아침해가 떠오
름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이 내렸다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
이었다.
"어제 그곳으로 다시 가는 이유가 뭐냐?"
쾌활한 여인의 목소리가 사막의 아침을 깨웠다. 무릎까지 내려온  긴
장포를 걸친 고명지였다. 간밤 내내 시전했던 용봉환락무가  힘을 주었
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더하여 환하게 밝아진 얼굴이라니.
"역시 사랑은 좋은 거야, 지금껏 보아온 고명지 얼굴 중에 가장 예쁜
것 같다."
"너도 마찬가진 걸 뭐. 내 눈이 부실지경이다."
"그래? 역시 열심히 노력하면 살이 빠진다는 건 만고의  진리라니까.
이제 조금만 더하면 과거의 화려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물론
누구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어제처럼 그렇게 노력하면 가능하겠지 뭐."
"알고 있었어?"
"내가 어린애냐? 색마가 작업 들어간 것도 모르게?"
"그럼? 내가 당했…."
"당하는 게 어딨어? 좋은 인연을 쌓았으면 그걸로 된 거지.  그건 그
렇고 사풍지대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가 뭐냐니까?"
목덜미까지 붉게 물든 고명지가 잔뜩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 운기행공을 마치자마자 야혼에게 이끌려 몸을 날리고
있는 것이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읏차! 더워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좀더 속도를 내
야겠다."
고명지를 품안으로 끌어들인 야혼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모래 위
를 스쳤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가공할 속도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무공이 강하니까 좋기는 하네."
야혼의 목에 두 팔을 두른  고명지가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다. 아니 철든 이후로는 처음이지 싶었다. 빠
르게 지나가는 모래언덕들마저 평화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너-어? 손 안 빼!"
느닷없이 가슴팍으로 파고 들어온 손에 질겁한  고명지가 뾰족 고함
을 질렀다.
"가만있어 이년아, 무공 수련 방해하지 말고."
"무슨 놈의 무공수련이 여자 몸을 더듬으며…, 으음! 하는데."
아래쪽 깊숙이 파고든 손길에 나직한 신음을 지르고 말았다.  급격하
게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고서에서 못 봤어? 양심신공이라고 귀곡에서 얻은 무공이거든."
"무당파의 절세 신공을 그곳에서  얻었… 아-!. 그래도 지금  순간에
연공을…."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던 고명지의 얼굴이 이내 아득하게  변했다.
단순하게 몸을 더듬는 게 아니라  색색만화공마저 펼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야혼의 손놀림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고명지의 눈동자가 흰자위를 보이정도로 돌아간  다음에서야 야혼의
신형이 멈췄다. 가고자 하였던 장소에 도착한 것이었다.
"하-아! 나쁜 놈!"
눈앞에 있는 조그마한 바위위로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눈을 흘겼다.
온몸의 힘이 풀려 서 있기가 힘들었다.  지난 밤 몇 번에 걸쳐  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여전히 뜨겁게 반응하고 있다.
문득 헤어나지 못할 늪에 빠진 게 아닌가 싶었다.
"후-읍!"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깊은숨을 몰아쉰 고명지가 야혼을 쳐다보았다.
몸이 달아오기 전에 물었던 말의 대답을 듣고 싶어서였다.
"일단 네가 앉아있는 그곳을 한번 파보고."
고명지의 얼굴을 관찰하듯 쳐다보던 야혼이 바위를 가리켰다.
"그냥 바위가 아니었네?"
깜짝 놀란 고명지가 벌떡  일어났다. 풍화작용으로 마모되어 둥글게
변해있지만 인공이 가미된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주변을 자세히 살피니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크기가 다른 10여
개의 바위가 사방에 산재해 있었다.
"이곳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보물이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이야합!"
바위 주변 모래를 슬쩍 파보던 야혼은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쌍장을
좌우로 휘둘렀다. 그의 손놀림을 따라 바위 주변을 채우고 있던 모래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며 모습이 점점 드러났다.
"세상에…."
망연한 눈으로 야혼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단순한 바위 정도로 여겼던 물체는 지름이 5자 정도 되는 커다란 기둥
이었다.
"설마 이곳이 누란 왕국!"
주변을 둘러보던 고명지가 낮게 부르짖었다.  고대의 전설, 타클라마
칸 사막 어딘가에 황금과 꿀이 흐르는 왕국이 존재했다고 하였다.
황금의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던  곳인데 어느날 갑자기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누란 왕국에 대한 갖가지 전설이 떠돌았으나 아직까지 그 존재는 밝
혀지지 않았다.
"같이 하자."
호기심을 참지 못한 고명지가 야혼 곁으로  다가서며 모래를 치우기
시작하였다. 바위가 솟아 나온 곳으로 움직이며 계속하여  모래를 치우
던 두 사람이 입구로 짐작되는 곳을 찾은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콰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1장 높이의 석문이 부서지고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읏차!"
"그만해…."
가슴속을 향해 들어오는  야혼을 손길을 뿌리치려던  고명지의 눈이
아득하게 변했다. 조금 전 시전했던 색색만화공이 아직  풀리지 않았던
거였다.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데 안고 가야지."
고명지를 안은 야혼이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여기 야명주는 네가 들고 있어야겠다."
"별 위험도 없는 것 같은데 내려 줘."
야명주를 받아든 고명지가 애원하듯 말했다. 야혼의 손놀림에 자꾸만
달아오르는 몸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다. 간밤에 가졌던  관계가 떠오르
며 호흡이 거칠어졌던 것이었다.
"다 왔어, 근데 저놈은…. 제대로 찾아왔군."
고명지를 내려놓은 야혼이 측면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가있는 벽에는 3개의 얼굴과 3쌍의 팔을 가진 거대한 인물상이 부조되
어 있었다.
"아수라(阿修羅)!-"
야혼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고명지가 낮게 소리쳤다.
"아수라(阿修羅)가 아니고 아우라 마즈다라고 불러야 한다."
"아우라 마즈다라면 명교의 선신을 일컫는 말이잖아."
놀란 얼굴로 야혼을 주시했다. 자신이 알기론 눈앞에 있는  부조상은
불교의 8부신장의 한 명인 아수라가 분명했다.
3쌍의 손 중에 하나는 합장을 하고 있고, 나머지 두 쌍은 수정(水晶)
과 도장(刀杖)을 들고 있는 모습은, 아수라상만의 특징이다.
그런데 야혼은 명교의 선신인 아우라 마즈다라 하고 있다.
"지옥도법을 얻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아우라 마즈다가  천축으로
건너가면서 아수라로 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천마(天魔)로."
지옥도법의 구결을 적어 두었던 양피지에는 놀라운  사실이 적혀 있
었다. 불교 8부 신장이 되기 전에 제석천과 싸웠다는 아수라는 명교 신
이었던 아우라 마즈다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더하여 중원 마공의 조종이라 할 수 있는 천마는 아수라의 후인이란
것이었다.
"천마(天魔)라고?"
고명지가 들고 있던 야명주를 떨어뜨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천마(天魔), 역대 중원 무인  중 그를 능가하는 인물은  아직 없다고
하였다. 일찍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천계의 신인  제석천에 도전했
다는 인물. 비록 그  싸움에서 패해 지옥으로  떨어졌다하고 하였지만,
그는 영원한 중원 마공의 조종이다.
"내가 그런 게 아니고, 이철상의 말이다. 아수라가 지녔던 도장(刀杖)
이 바로 천마묵장(天魔墨杖)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고 하더라. 일단 들
어가 보자, 지옥마제의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어쩌면…."
고명지가 낮게 말했다. 아수라의 행적에 적힌 내용을 보면 일리가 있
는 말이었다. 고대불교에선 아수라는 모든 귀신의 왕이라 표현했다. 그
랬던 아수라의 지위가 어느 순간 8부신장의  한 명으로 승격되면서 이
번엔 광명신이 된 것이다.
더구나 아수라가 가장 많이 싸웠던 자는 천계의 신인 제석천이 아니
었던가.
"아우라 마즈다, 아수라, 천마,  그리고 지옥마제의 계보로  이어졌단
말이네? 같이 가."
떨어진 야명주를 집어들고 나아가는 야혼을 따라  붙으며 소리를 질
렀다. 잠시 후, 야혼과 고명지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대전이었다.
대전의 가장 안쪽 상석에는 곧 살아 움직일 듯한, 10장 높이의  아수
라상이 서 있었다.
그리고, 아수라상 아래쪽에 마련된 직사각형의 단 위에는 전부  10장
의 석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가 만들었을까?"
주변을 둘러보던 야혼이 말했다. 집회를 개최하던 곳인 듯  대전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었다.
"명교 신전이야."
"이걸 읽을 줄 알아?"
"응. 범어야."
"뭐라고 쓰여 있는데?"
"야혼 네가 한 말이 거짓말이고 적혀 있는데? 전부는 아니고, 천마에
대한 부분만."
석판을 꼼꼼히 읽어나가던 고명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야혼의  말
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고대 파사국에서 건너온 아우라  마즈다를 신으
로 섬긴 이들이 박해를 피해 도망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고향을 버리면서까지 따랐던 아우라 마즈다는 그들을 지켜주
지 못했다. 신전을 세우고 첫 제사를 지내기도 전에 흑사풍의 공격으로
모든 건물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들을 이끌고 온 인물이 바로 천마였다."
아득한 전설 속에 등장했던 천마에 대한  비사가 밝혀지는 순간이었
다. 명교, 아니 그때는 명교라 불리지  않았을 터였지만 아우라 마즈다
를 따르던 무리의 지도자가 바로 천마였다.
하늘을 원망하며 이곳을 떠난 천마가 도착한 곳이 중원이었다.  무인
으로서 천마의 일대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천마묵장과, 광명제세보주는 예지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신물이었다
는구나. 이 석판 좀 내려볼래? "
아수라상을 가만히 쳐다보던 고명지가 단위에 있던 석판을 아래쪽으
로 내려놓았다. 10개의 석판을 전부  내려놓은 고명지가 검은 색  단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천마묵장(天魔墨杖)?"
"에게!"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치는 고명지와는 달리,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석관을 쳐다보던 야혼은 잔뜩 실망스런 얼굴이었다. 참으로  볼품 없었
다. 5척(150Cm)에 달하는 길다란 쇠몽둥이로, 나이 든 노인네의 지팡이
로 쓰면 딱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보! 이 천마묵장이 몇 년쯤 됐을 것 같냐?"
나무라듯 야혼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천마묵장 손잡이를 잡았다.
"안 움직이네? 이익!"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고명지가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다. 그러나  둥
근 쇠막대기 모양의 천마묵장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비켜봐! 그렇게 힘이 없어서 애나 제대로 낳겠냐."
고명지를 슬쩍 밀친 야혼이 천마묵장의 손잡이를 덥석 움켜쥐었다.
찌르르!
머릿속을 파고드는 기이한 느낌에 가만히 천마묵장을 쳐다보았다. 문
득 천마묵장에서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너도 안돼?"
"안될 리가 있나? 내가 이 놈 주인인데."
"학!"
고명지가 깜짝 놀라며 천마묵장과  야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기가
막혔다. 전 내공을 동원했어도 꼼짝하지 않았던 천마묵장이 아닌가.
"좋은데!"
천마묵장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던 야혼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어
렸다. 예전에 잃었던 물건을  되찾은 느낌, 아니  부족했던 무엇인가가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였다.
"세상에 그게 바로 광명도(光明刀)였어."
다시금 석판에 집중하던 고명지가 질겁하며 외쳤다. 모군상이 말했던
광명도가 설마 천마묵장의 다른 이름일 줄은 생각지도 했다.
광명신(光明神)으로 추앙 받던 아수라의 다른 얼굴을 나타내는  말이
었던 것이다.
어둠과 빛의 두 가지 본성을 가졌던 아수라의 모습은 지옥도(地獄刀)
와 광명도(光明刀)로 대변되었다. 지옥도는 살아있는 자(者)들을 징계할
때 쓰였고, 광명도는 사자(死者)들을 다스릴 때 사용했던 거였다.
"아수라상에 있는 수정구를 광명도 뒤쪽에 꼽아봐."
"아이고 이놈아 그동안 얼매나 외로웠겄냐. 바로 옆에 짝을 두고…."
마치 사람에게 하는 냥을 말을 건넨 야혼이 아수라상에 있던 수정구
를 뽑아 천마묵장 뒤쪽에 가져다 댔다.
찰칵!
"야들이 급하긴 급했나 보다! 허미."
낮은 소성과 함께 수정구가 자리하자 천마묵장에서 폭발적인 광채가
솟구쳐 나왔다. 순식간에 백색 광휘가 지하 대전을 가득 메웠다.
"벌써 끝났어?"
사방을 밝히던 빛이 스러지자 신기한 듯  천마묵장을 쳐다보던 야혼
이 말했다.
"지금부터 잘 들어 야혼. 광명도로 펼치는 도법이니까."
"무공도 있어?"
일순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야혼은 고명지 앞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
다.
"1초는 혼을 태우는 붉은 빛이라는 초식으로 구결은…."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한 야혼을 쳐다보며 싱긋 미소를 지은 고명지가
석판에 있는 구결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광명도법이라 불리는 도법 역시 4초식으로 되어 있었다.
적광원혼염(赤光 魂炎), 자광귀혼멸(紫光鬼魂滅), 묵광회혼파(墨光回
魂破), 무광정화혼(無光淨化魂).
4가지 초식을 읽어가던 고명지가 부르르 떨었다. 빛의 무공이라 해야
옳았다. 무기를 던지는 이기어검술 같은 초식 운용의 무공이 아니라, 4
초식 전부가 심검의 경지에서만 펼칠 수 있는 무공인 것이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금환신공과는 차원이 달랐다.
"천마는 왜 이 수정구를 가지고 가지 않았지?"
연식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있던 야혼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
다.
"따르는 무리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 자책 때문이지 뭐.  그의 성정
이 선이 아닌 마로 흐른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 같아."
광명제세보주라는 수정구는 나아갈 길을 예지해주는 신물이었다.  그
보주가 가리키는 곳을 찾아왔다가 참변을  당하자 이곳에 두고 갔음이
분명했다.
"쯧! 소심하기는…. 지가 죽인 것도 아니고, 천재지변 때문이라면  아
우라 마즈다를 욕해야지, 지가 왜 자학을 해. 좌우간 이곳에서 얻을 건
다 얻었네?"
아수라상을 슬쩍 쳐다보던 야혼이 천마묵장 손잡이  부분에 달린 수
정구를 떼어냈다. 그 또한 천마묵장 주인의 의지에 의해 떼었다 붙였다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만질 땐 꼼짝도 하지  않던 수정구가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을 먹자마자 절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한번 펼쳐볼 수 있어?"
고명지가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야혼의 무공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천마묵장으로 펼치는  무공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이것부터 먹고."
"야혼!"
수정구를 날름 삼켜버리는  야혼의 행동에 고명지가  뾰족한 고함을
내질렀다. 천마묵장을 광명도로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물건이
바로 수정구일진대, 그걸 삼켜버리다니.
"켁! 체했다!  내려가지가 않아."
가슴을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삼켰던 수정구가 가슴에서 딱  걸
린 듯 멈춰서 있는 것이었다.
"뭐, 뭐야!"
야혼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마치 몸안에  불빛
이 있는 듯 그의 가슴한가운데서 백색 광채가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것
이었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조금씩  움직여 가더니 마침내  심장부근에
멈춰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이제야 내려갔네."
제 몸에서 일어났던 변화를 알지 못한 야혼이 속이 시원해졌다는 생
각에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천마묵장을 들어 올렸다.
내기 운용방식은 지옥도법과 일치했다. 다만 내공보다는 의지의 권능
에 더 의존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 또한  심검(心劒)의 요체니
별반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적광원혼염(赤光 魂炎)!"
"세상에…."
고명지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적광원혼염이란 고함소리가  울리
자마자 야혼의 온몸이 붉게 변해버린 것이었다. 더하여 들고 있던 천마
묵장 또한 미묘한 소성과 함께 붉은 광채를 쏟아낸다.
스르르!
기절할 노릇이었다. 수천 년 동안 제 자리를 지켜왔던 아수라상이 모
래처럼 스러지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읽었던 10장의 석판마저도 전부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이다.
"조금 힘드네, 내공이 부족해."
"그렇게 넘쳐나는 내공으로도 1초식밖에 펼치지 못한단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오늘밤은 이곳에서 추위를 피하고…."
고명지의 눈을 빤히 쳐다보던 야혼이 양손을 슬쩍 흔들었다.
"으-음! 나쁜 놈, 아직도 색색만화공을 안 풀어 줬구나."
"안 풀어준 게 아니고 한번 걸려들면 방법이 없어. 무조건 관계를 해
야해. 잘됐네 뭐. 너는 금환신공을 완성하고, 나도 광명도법을 완성해야
하니까."
거친 숨을 뱉어내는 고명지를 가볍게 끌어당겨  품안으로 끌어 들였
다.
"그런데…. 완성하려면 얼마나…."
야혼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중얼거리듯 물었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
던 터라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다만 야혼에게 너무  끌려가는 자
신이 싫어 잠시 앙탈을 부렸을 뿐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마. 광명도법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거니까. 혹여
금환신공을 완성했다고 도망치면 안 된다."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하-악!"
나직한 신음과 함께 고명지의 눈동자가 풀렸다. 곧이어 거대한  신전
내부에서 쾌락에 겨운 비음과 함께 백색과 적색 광채가 뭉클거리며 피
어올랐다.
사자(死者)들의 통곡.
이른 아침 신전을 빠져나온 두 사람의 신형은 북쪽으로 빠르게 내달
렸다.
"고명지, 힘 안 들어? 내 품을 침대로 썼던 년들도 있었다."
"싫어 임마.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샐쭉 혀를 내민 고명지가 빠르게 앞서 나갔다. 용봉환락무 때문에 육
체적인 피로는 없지만, 은밀한 그곳이 문제였다.
움직일 때마다 따끔따끔 한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프다  하여
약을 바를 수 있는 곳도 아닐진대 상처라도 나면 어쩌나 하고 더럭 겁
이 났다.
"야 닳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러냐?"
"닳아 임마! 웬 만큼 커야지. 그게 어디 사람이냐 말…. 아파 죽겠구
먼."
야혼을 향해 매몰차게 말하던 고명지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아프니까 안고 간다는 거잖아. 그리고 물건 큰 게 내  죄냐? 그렇게
타고난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러니까 과부들만 널 좋아했지…. 그만 안 할래?"
자꾸 야혼의 술수에 말려 들어가는  것 같아 고함을 내질렀다. 평소
같으면 도저히 언급할 수 없는 말들을 마구  뱉어내고 있는 자신의 모
습에 놀라고 말았다.
"널 만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 무공,  이 세상에 악을 멸하고
하오대문을 세워,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기….  좌우간 양심신공을 완성
하려면 너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나를 색마를  만드는 불상
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줘."
"한번만 더 색색만화공을 펼치면 그땐 얼굴 안볼 줄 알아."
"그러니까 업히란 말이야. 지금부터 셋의  여유를 준다. 그렇지 않으
면…."
"아-알았어, 업힐 테니까, 색공은 펼치지 마."
화들짝 놀란 고명지가 재빨리 야혼의 등으로 몸을 날렸다. 백 번  하
고도 남은 놈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취한 행동이었다.
"이럼 좋잖아. 서로가 편하고. 한숨 자."
"너?"
일순 고명지가 울 듯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쉬게 해주
려는 야혼의 의도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잠이 안 와? 잠이 안 오면 위금충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말해봐. 어
떻게 알았냐는 둥 그딴 건 묻지 말고. 그 놈도 수인(獸人)들과 같은 족
속이냐?"
"그때 안자고 있었구나…."
마도련에서 야혼이 건네준 춘서 때문에 화를 냈던 기억이 났다. 혼잣
말처럼 늘어놓았던 넋두리를 야혼이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5살 때였어. 이부상서로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아버지가 역적
으로 내몰리고 집안은 풍비박산 났지. 아버지와 오빠들은  전부 처형당
하고 나는 관노로 팔려갔다."
고명지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혼자만 간직하고 살았던 사
연, 원수를 알아냈지만 힘이 없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그들의 성적
노리개였다. 원수들에게 몸을 팔면서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갔고, 결국
위금충의 눈에 들었다.
그의 집안에 노리개처럼 굴러다니던 16개의 금환을  선물로 받을 정
도로 총애도 받았다.
"그런데 그 금환엔 금환신공이 적혀 있었어. 달빛을 받아야만 글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은밀하게 새겨져  있었지. 내가 범어를 공부하게  된
이유였어."
"그래 참 불쌍하게 컸구나. 나 같으면 그냥  자살해 버렸을 텐데, 그
래도 참 용타. 지금껏 살아서 복수할 생각을 다하고. 있잖아, 내가 대충
판단해 보건대, 고명지 네 원수는 한두 명이 아닐 것 같거든. 황실
이고 나발이고 다 없애버리면 좋겠지만 그도 쉬운 일이 아니고. 차라리
다 잊어버리고 내 첩이나 되는 건 어때?"
"…?"
눈물을 흘리던 고명지가 뜨악한 눈으로 야혼의 뒷머리를 쳐다보았다.
적어도 위로 정도는 해줄 줄 알았다. 아니 다른 사람 같으면 용기를 북
돋아 주면서 도와주겠다는 말을 한다.
더구나 이틀 밤이나 같이 보낸 사람이 아닌가.
"남의 사연을 들었으면 위로를 해야하는 것 아냐?"
"위로는 무슨, 지금이 좋으면  되는 거지. 그리고 너는  눈만 돌리면
나 같은 멋진 남자가 대기하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잔말말고 위금충
그놈을 어떻게 죽일 건가 그거나 말해봐."
"몰라."
"뭐? 그럼 열사의 사막에 있다는 신전은?"
"놈의 비밀을 알기 위해  나선 길이었는데 마도련에서  대부분 밝혀
져버렸지 뭐. 너희들 때문에."
"그럼 갈 필요가 없잖아."
빠르게 움직이던 야혼의 몸이 일순 멈췄다.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았어. 달탄에 가서 오이라트족을 끌고 들어오
라고."
"그럼 황실이 수인들 천지란 말이 되는 건가? 이 길을 가는 건 그들
의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서고? 뭣 때문에…? 그  자식의 애비가 네 부
모님을 해쳤잖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전 황제에 의해 아버지와 가족을
잃은 고명지가 아닌가. 그런 그녀가 황제를 돕기 위해 홀로 임무수행을
나섰다니.
"두 가지 때문이야. 복수와 아버지 명예회복."
"그럼 너는…."
"나? 야혼 네가 살아가는 이유와 같지 뭐."
"미친 년!"
나직하니 욕설을 뱉어낸 야혼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어쩔 수 없는
인간들, 스스로 굴레를 만들어 그 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아니 나올 생
각을 않는 자들이 바로 인간인 게다.
"그래도 네가 도와주니까 더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런 의미에서…."
이내 표정을 바꾼 야혼이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고명지의 엉덩이를
슬슬 쓸었다.
"그렇게 만지고도 아직 안 질렸냐?"
"네가 갈수록 예뻐지잖아. 얼굴은 발그레하니  빛이 나지, 무공이 강
해지니까 몸은 더욱 탱탱해지지, 도무지 참지 못하게 만드는 걸 어떡하
냐?"
"마음에도 없는 짓 하지말고 빨리 가기나 하자. 추워지기  전에 나무
가 있는 곳엔 도착해야 할 것 아냐."
"그럼 거기서 한번 하는 거다."
"아파서 안 된다니까?"
"응? 좋아 이제야 고명지로 돌아왔네, 그럼 꽉 붙잡아라,  좆나게, 아
니 겁나게 빨리 갈 테니까."
고명지의 엉덩이를 불끈 틀어쥔 야혼이 전방을 향해 힘차게 몸을 날
렸다. 한 몸이 되어 줄기차게 달리던 두 사람의 신형이 푸른 초지가 보
이는 산자락에 도착한 시각은 이틀 후였다.
동굴이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이곳  저곳을 헤맸으나, 쉴만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사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토굴을 파고 들
어가기로 하였다. 적당한 곳을 골라 열심히 작업하던 야혼이 갑자기 인
상을 찌푸렸다. 밤하늘을 뚫고 솟구치는 기이한 문양 때문이었다.
"씨팔! 방 만드는 진(陣) 한번 써먹나 했구먼."
"무슨…."
야혼의 입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목소리에 고명지가  흠칫 몸을 떨었
다. 지금껏 자신의 기분을 바꿔주기 위해 희희낙락하던  목소리가 아니
었다.
뭔가에 잔뜩 억눌린 듯, 진득한 살기가 스며있는 목소리였다.
"자능한의 이마에 있는 별 문양?"
엄청난 크기로 솟구치는 둥근 원과 별 문양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저
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푸른빛이 폭발적으로 솟구치는  장소는 야혼
이 태웅과 추기영에게 찾아오라고 하였던 곳이었다.
14년 전, 야혼 혼자 만이 살아 나왔던 마옥성(魔獄城).
"오늘밤은 건너뛰자. 대신 내일 두 번 하자."
나직하니 말을 마친  야혼이 고명지의 신형을  낚아채듯 끌어들이며
몸을 날렸다. 잠시후 두 사람은 과거 마옥성이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세상에… 저것들이 다 뭐야?"
야혼의 품속에 있던 고명지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과거  13연옥
이라 불렸다는 마옥성 폐허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폐허의 잔해를 뚫고 불쑥 불쑥 시체들이 튀어 나왔다. 강력할 폭발에
의해 죽음을 당했는지 두 팔이 떨어진 시체들부터 시작하여 얼굴이 반
쯤 뜯겨진 시체와  심지어는 짐승의 시체들까지  벌떡거리며 일어나고
있다. 한두 구가 아니었다. 수천 평의 대지 위에서 무수한 시체들이 솟
아 나오고 있다.
모두가 각각인 시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푸른  안광을 발하는 눈이
었다.
"사막기후라서 썩지도 못했나 보군."
목내이(木乃伊: 미라)처럼 바싹 마른 시체들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
얼거렸다. 푸른 안광을 발하며 일어서는 시체들은 죽었을 때와 별반 다
르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나까지 합쳐서 3천 명 정도가 살았다."
"아마티불! 기름 좀 얻어먹으려 왔더니 웬 시체 놀인가?"
망연한 눈으로 마혹성 폐허를 주시하는 두 사람의 귓전에 낯익은 목
소리가 들려왔다. 태웅 일행 세 사람이었다.
3인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추기영이야  머리가 없어 그나마 나아
보였지만 태웅과 아홍은 온몸에서 모래가 흘러내고 있었다.
"3천 명이 더 될 것 같은데? 저쪽 산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해골이잖
아!"
잔뜩 굳은 태웅이 오른 쪽  숲을 가리켰다. 광채를 쏟아내는 문양은
이곳에 묻힌 모든 사자(死者)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었다.
그곳에서는 뼈만 검은 시체들이 불쑥불쑥 일어나고 있었다. 전율적인
광경이었다. 푸른 안광을 발하는 해골들 또한 셀 수 없이 많았다.
쿠-어억!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괴상한 소리와 함께  시체들의 행렬이 이어졌
다.
"아미타불! 이곳은 분명 지옥일거야. 아니면  5천이나 되는 시체들이
살아 움직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 연작문주는 참으로 좋은 환경에서 자
랐구려. 어쩔 텐가, 저 강시들을 전부 해탈시키기엔 우리 정력이 좀 딸
릴 것 같은데."
우스갯소리처럼 말하고 있지만 추기영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명교인들, 사악한 마교인이라 하여 끌려간 이들이 대부분이다.
"저들도 독강시만큼 강할까?"
강시들의 행렬을 노려보던 야혼이 고명지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글쎄…."
고명지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중원
무림에도 강시대법이 있지만  한꺼번에 수백 구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없다.
3백 년 전통의 만독문조차 100여 구의 독강시가 전부였지 않은가. 그
런데 눈앞에 보이는 강시는 어림잡아도 5천구 정도 된다.
"만약 저것들이 중원으로 들어간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듯 눈을 감았다.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있어왔던
전쟁에 비할 바 아니었다. 나라의 멸망이 아닌 중원 전체가  폐허로 변
하게 될 것이다.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야혼이 광명도를 얻게  된
게 운명이지 싶었다.
"그걸 바로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거다. 10만 명교인들 마옥성에 넘겨
준 놈이 황제 아니냐. 그뿐이었냐, 지난  100년 간 그들이 붙잡아간 명
교인은 얼마나 될까?"
야혼의 몸에서 미약한 살기가 흘렀다. 자신이 있던 13연옥에도  언제
나 새로운 명교인들이 잡혀 들어왔다. 강시를 만들어낸  사람은 잠사옹
이 아니라 명 황제인 게다.
"아미타불! 연작문주 그래도  우리가 다스릴  종자들은 남겨둬야 할
것 아닌가."
"무림인들도 자존심이 있는데 다 죽기야 하겠냐?  살아 남을 놈들은
많을 테니까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 우리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일단 따라가  보자. 전부가 연장문주와 아는  사람들인데.
혹시 아냐, 이 태웅에게 기연을 안겨 줄지."
야혼을 유심히 쳐다보던 태웅이 어깨를 툭 쳤다. 철혈무적검법을  익
히면서 태웅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기였다. 모군상이 쓰던 검을  들고
오긴 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가벼웠던 탓이었다.
"맞다.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지금은 저 것
들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그게 더 궁금하다."
야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은 중원 쪽이  아니
었다. 오히려 사막으로 길을 잡아 이동하는 것이었다.
"연작문주, 이렇게 하면 저 놈들과 똑같은가?"
앞으로 손을 내밀며 고개를 약간 숙인 추기영이 일행을 쳐다보
았다.
"육승! 저기 들어가서 암컷 하나 골라서  장가가도 되겠다. 영락없는
강시다."
"아미타불! 곰 시주, 자네도 이렇게 해보게. 의외로 이 자세가 편하네
그랴. 잘만하면 새로운 보법을 창안할지도 모르겠네."
구억! 쿠억!
낮게 소리를 지른 추기영이 강시들과 똑  같은 자세로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던 강시들이 처음 변화를 보인 건 서쪽으로 길을 잡
은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끄아악! 꾸억!
선두에서 들려온 기이한 소성과 함께 푸른  광채가 솟구치는 듯하더
니 강시들이 패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아미타불! 저것들도 대장이 있는가 보네 그랴."
조그마한 모래언덕에서 고개를 쑥 내민 추기영이 놀란 듯 말했다.
"저곳이 자능한이 말했던 신전인가?"
멀리 보이는 계곡을 고명지가  가리켰다. 사막이 끝나는  지점인 듯,
두 개의 바위산 사이에 길다란 계곡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 자가 목표인가 본데?"
지붕만 지상으로 드러나 있는 건물을 주시하던  야혼이 검은 물체를
가리켰다. 검은 천을 뒤집어 쓴 인물이, 강시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사옹, 준비가 끝냈더냐, 아니면 이 광사옹 없이 혼자 살아갈 자신
이 생긴 거냐."
백색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이자는 잠사옹과 같이 흑서를 발견했던 광
사옹이었다.
"하지만, 내가 막아 보겠네. 100년 전 성모궁에서처럼…."
광사옹이 붉은 수정이 달린 지팡이를 불끈 틀어쥐었다.
"어르신…."
낮은 목소리와 함께 광사옹 뒤쪽으로 한 여인이 나타났다.
"빨리 떠나지 않고 뭐하고 있느냐! 더  이상은 잠사옹을 막을 수 없
다. 놈은 명교의 후예들을 이용하여 나를 공격하고 있단 말이다."
"풍뢰궁(風雷弓)이면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5천의 명교도를
죽인 죄인입니다. 저도 싸우게 해 주십시오."
"애설아…."
"그곳에 간다한들, 누가 제 말을 믿겠습니까? 마계로  잡혀갔던 엘프
의 말을 믿을 사람이 있으리라 여기십니까?"
그랬다. 은빛 투구와 갑주를 걸친 여인은 야혼이 성모궁에서  만났던
천애설이었다. 그녀가 광사옹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관을 타고 내려갔던 지하가 매몰되면서 새로운  공간이 나타난 것이
었다. 그곳이 과거 광사옹의  연구실이었다는 사실은 이곳에  도착해서
알게 되었다.
"그래도 가야한다. 한두 명이면 네 풍뢰궁이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저
들을 셀 수도 없다."
"여어! 좀 올라가도 되겠소?"
"헉!"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광사옹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전
방에서 몰려오는 시체들을 제외하곤 어디에서도 생의 흔적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재빨리 지팡이를 들어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을  걸어온 자들을 쳐다
보았다.
"야혼! 야혼 맞죠?"
광사옹을 따라 고개를 내밀었던 천애설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소리
를 질렀다. 놀란 사람은 비단 그녀뿐만 아니었다.
"어라? …너 뾰족귀?"
잠시 천애설의 얼굴을 쳐다보던 야혼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성모궁
에서 헤어졌던 천애설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3장 높이의 지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깐만 기다려요, 이곳은…. 들어왔네?"
야혼의 행동을 제지하려던 천애설이 의아한 얼굴로 광사옹을 쳐다보
았다. 빈 공간 같지만 자신들의 앞에는 의지의 문이라는 마법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었다.
"뭐해 너희들도 빨리 올라와!"
그런 상황을 알리 없는 야혼은 아래쪽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천애설
앞으로 다가섰다.
"어떻게 들어왔지요?"
"얘가 눈은 멋으로 달고 다니나. 오랜만에 만났으면 보고싶었다는 말
을 먼저 해야지…."
"그게 아니고…."
쿵!
"으아아-! 왜 우리 둘만 떨어지는 거야!"
아홍과 같이 바닥으로 추락한 태웅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네 사람이
동시에 위쪽으로 몸을 날렸는데 떨어진 사람은 자신과 아홍 두 사람뿐
이었던 것이다.
"나의 의지가 말한다. 열려라!"
느닷없이 출현한 야혼 일행을 유심히 쳐다보던  광사옹이 전면을 향
해 지팡이를 슬쩍 내 저었다. 그러자 그의 지팡이 끝에  달린 수정에서
붉은 광채가 솟아나와 전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올라와도 되네."
"이런 씨팔! 마법인가 뭔가 하는걸 펼쳤으면 말이나 해줄 일이지. 근
데 왜 나만 떨어지냐고, 앙?"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며 태웅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누구도  태웅
과 아홍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말 좀 해달라니까!"
"아미타불! 곰 시주 주둥아리 좀 닥치고 있게나. 나는 지금 무척이나
화가 나있네."
"왜, 임마. 바닥으로 떨어진 놈은 난데."
"누가 그것 땜에 그러는가. 저 황금빛 털을 보니까 앙림을 잘못 죽였
다는 생각이 들어서지. 그 놈은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건데, 니미럴타
불."
천애설의 투구 아래로 드러난 금발을 가리키며 추기영이 말했다.  추
기영의 말마따나 천애설의 금발은 황홀할 정도였다.
움직일 때마다 살짝 살짝 흔들리는 머리칼에서  무지갯빛 광채가 흘
러내리는 듯하였다.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야혼은 천애설을
향해 맹렬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야, 그리고 저  늙다리는 뭐고. 태을건곤심법은 전
부 익힌 거냐? 그리고 이 활은 또 뭐야? 참! 하오마 즙은 구했어?"
"그렇게 한꺼번에 물으면 어떡해요. 우선 친구들부터…."
"친구? 아, 여기는 고명지. 너에겐  동생뻘이야. 고명지 인사해라. 얘
이름은 천애설이다."
태웅과 추기영에게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고명지만 간단하게 소개한
야혼이 이내 천애설을 얼굴을 주시했다.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답을 요
구하는 얼굴로.
하지만 천애설이란 말이 흘러나오자마자 고명지의  얼굴이 경악스럽
게 변했다.
"설마…."
고명지뿐만이 아니었다. 금색 털을 가지고 한참 설전을 벌이던  태웅
과 추기영조차 동작을 딱 멈췄다.
"수인(獸人)은 아니니까 너무 놀라지 마라."
일행의 시선을 의식한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거보다 우선 저기 강시좀비들부터…."
"애설아, 내 잠시 다녀오마."
"어르신!"
강시들을 향해 날아가는 광사옹을 안타까운 얼굴로 불렀다.
"이것 보쇼 영감, 5천 마리를 어떻게 하겠다고 가는 거요. 공연히 개
죽음 당하지 말고 빨리 돌아…. 허미! 저 영감도 한 무공 하네?"
광사옹을 향해 고함을 지르던 야혼이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100
여 장 가까이를 날아가는 가공할 경공술 때문이었다.
"저건 무공이 아니에요."
"저것도 마법이냐?"
"어떻게…."
의아한 얼굴의 천애설이 물으려는 순간, 저 멀리에서 광사옹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내 의지로 말하나니, 대지의 힘을 빌어 생명을 받을 지어다."
고함을 내지른 광사옹이 강시들 전방으로 백색  물체를 힘차게 던졌
다.
"어? 저건 또 뭐야? 웬 해골들이…."
야혼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3일전 마옥성에서 보았던 광경과
비슷했다. 백색 물체가 박혔던 곳에서 해골들이 불쑥 불쑥 솟구쳐 나오
며 강시군단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것이었다.
"용아병(龍牙兵)이라 불러요. 하지만 이번에 용아병도 소용없겠어요."
챙! 챙챙챙! 챙챙!
강시들이 전진하는 선두에서 요란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
다. 순식간에 80여 마리로 불어난 용아병과 강시들이 서로를 향해 병기
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괴이한 광경이었다. 푸른 안광을 발하는 수천의 강시들과 그들  속에
섞여 있는 백색 해골들. 이미 죽어 시체가 된 자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
를 휘두르는 광경은 보기에도 섬뜩했다.
"혹시 자네들에게 마법무구가 있나?"
다시 신전으로 돌아온 광사옹이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조금 전, 의
지의 문을 통과한 사실 때문이었다.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무구가 없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던
거였다.
"이분은 광사옹 어르신이에요. 명교를 위해 지금껏 살아오셨어요. 과
거엔…."
"됐다, 과거를 들먹여서 뭐하겠느냐. 말해주겠나?"
천애설의 말을 막은 광사옹이 재차 물었다.
"얘한테는 제마성검이 있지만 우리  둘은 그런 것 없는데?  참 이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소."
고개를 갸웃하던 야혼이 메고 있는 천마묵장을 풀어 내려놓았다.
"광명도장(光明刀杖)!"
천마묵장을 쳐다보던 광사옹이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이어  천
마묵장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올린다.
'천애설, 이 영감 나이가 몇이냐?'
천애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천마묵장을 바로 알아보는 광사옹의 행동
때문이었다. 더구나 천마묵장이란 말 대신 광명도장이라 하였다.
명교 신자조차 모르고 있는 명칭이 광명도장일진대.
'정확한 나이는 저도 몰라요, 가끔가다 혼잣말처럼 하는 이야기를 들
어보면 적어도 5백 살은 넘었어요. 잠사옹과 같은 연배인가 봐요. 혹시
잠사옹은 아세요?'
'응, 그놈에 대해선 나도 들어봤어. 진짜 영물은 이 영감이구먼.'
'안 놀래요? 인간이 5백 년이나 살았다는데?'
'이년아 시체가 살아나고 있는 판에 5백 년 사는 게 뭐 대수야! 너도
100살이 넘었지만 나랑 했잖아. 그나저나 하오마 즙을 구해놨어?'
'하오마 즙은 이곳에 많이 있던데,  당신이 원하는 대로 줄  수 있어
요.'
'저 영감 것말고, 네가 꼬불쳐 둔 것 말이다.'
'꼬불쳐요?'
'나 주려고 숨겨둔 게 있을 거 아냐.'
'아! 숨겨둔 것, 얼마 안 되요. 한 말이나 되려나….'
'아주 잘했어. 사막을 건너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나 때문이 아니고, 하오마 즙 때문에? 그런 게….'
'둘 다야 임마. 이런 경우를 두고 님도 보고 뽕도 딴다고 하는 거야.'
얼굴을 붉히는 천애설을 쳐다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바로 그대 광사옹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혹시 자네…, 이 광명도장을 얻었을 때 둥근 수정구는  보지 못했는
가? 광명제세보주라 부르는 물건으로 이렇게 생겼네."
자신의 지팡이 끝에 달린 붉은 수정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건 없었소. 이것도 지팡이로 쓰려고 들고 다니는 것뿐이외다."
"잘 한번 생각해보게, 무척 중요한 물건이란 말이네."
"이것도 사막을 헤매다 주운 건데…."
야혼의 얼굴에 언뜻 이채가 서렸다. 광명제세보주를 말하는 광사옹의
얼굴에서 탐욕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뭔가 집착하지 않았다면 세월을 잊을 수 없
었을 테니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데 관심을 갖지 않기로 하였다.
"그럼 이 물건을 나에게…."
천마묵장을 들어올리려던 광사옹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꼼짝도 하
지 않았던 거였다.
"쯧쯧! 기력이 없어 들어올리지도 못한 사람이 욕심은? 거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빨리 갑시다. 저기 용아병이란 놈들도 다 뒈졌구먼."
야혼이 80장 안쪽까지 전진해온  강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80구에
달했던 용아병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곳을 지켜야만 하네."
아쉬운 얼굴로 천마묵장을 쳐다보던 광사옹이 나직하니 말했다.
"이곳에 보물이라도 숨겨 두셨오. 노인장이 아무리 마법을 잘한다 해
도 저들은 5천명이오. 저들을 전부 없앨 수 있다고 보는 게요?"
"아미타불! 맞습니다, 광 시주. 저 빌어먹을 시체들은 목을  잘라내지
않으면 퇴치가 불가능하더군요. 차라리 도망치는 게 더 낫겠습니다."
조금 전 용아병과 강시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던 추기영이 말했다.  마
도련에서 보았던 수인들처럼 강시들 또한 유일한 약점은 목이었다.
그러나.
"저들을 없애주면 잠사옹에 대해 말해 주겠소?"
뜻밖에도 떠나자는 일행을 반대하고 나선 사람은 고명지였다.
"고명지!"
"고 시주!"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해야지. 황실에 침투해 있는  첩자들의
명단을 알아내야 한다고!"
고명지가 확고하게 말했다. 제마성검을 들고 이곳을 찾은 이유가  바
로 그 때문이었다.
마도련에서 적의 수괴가 잠사옹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의  하
수인들이 황실에 어느 정도까지 침투해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황실에서 나오셨는가?"
"그렇소이다. 동창 제일 첩형 고명지라 하외다."
"좋네, 전부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수인을 비롯한 마법으로 구현된 인
물을 찾아내는 마법무구가 있네. 그것만 있으면 어렵지 않을 거네."
"빌어먹을 년!"
'야혼,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그분들이 저곳에 계
신다면 영원히 세상을 떠돌게 된다. 어떻게든 안식을 드려야….'
'그만해라. 나도 알고 있다.'
"씨팔! 그냥 도망가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데. 목만 잘라내면 된다
고 했소?"
"그렇다네, 저 시체들의 유일한 약점일세."
"광사옹이라 하셨오. 나야 얼마 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수명대로만
사는 게 가장 행복하고 합니다. 오래 살았다  하여, 죽을 때 후회가 없
는 건 아니란 말이오."
뜻 모를 이야기를 남긴 야혼이 아래쪽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스윽! 슥! 스윽! 슥!
"연장문주 알아 볼 수 있겠나?"
모래바닥을 천천히 쓸며 다가오는 수천 명의  강시들을 힐끗 쳐다보
던 추기영이 물었다.
"철삭으로 묶어 두었다. 철삭으로…."
"여긴 오지 않았을 거야. 내가 장담한다. 아마 저승에서 행복하게 살
고 계실 거다."
"여긴 오지 않았을 거야. 내가 장담한다. 아마 저승에서 행복하게 살
고 계실 거다."
태웅이 야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육승! 철삭으로 묶인 모녀를 가장 먼저  찾아. 저놈 보다 빨리 없애
야 한다. 알았냐?'
'염병할 놈….'
"아미타불! 그건 곰 시주 말이 맞을 걸세.  그런데 그건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재빨리 전음을 보낸 추기영이 표정을 바꾸어 태웅 어깨에 걸쳐져 있
는 길다란 몽둥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검이 시원찮아서 천 소저에게 무기로 쓸만한  것 하나 달라니까 주
더라. 이름은 거창해,  여의만병주(如意萬兵柱)라고 부른데. 5백  년 전
만승검왕(萬乘劒王)의 무기라나 하면서."
"아미타불! 곰 시주 연장  작은걸 어찌 알고  단단한 놈을 주었는지
모르겠네. 앞으로 그 놈은 여의만병주가 아니고 단단한 놈이라 부르세.
한눈에 보기에도 단단하게 생겼지 않은가."
"야! 지금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
기가 막힌 듯 고명지가 야혼 일행을 힐난하듯 쳐다보았다. 5천에  달
하는 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황실에 암약하는 첩자의 정보를 얻기
위해 없애주겠다고 하였지만 쉬이 생각할 일은 결코 아니다.
그나마 야혼이 천마묵장을 얻지 못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제발 좀 진지하게…."
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입을 닫았다. 그들은 말만 그렇
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시들을 노려보는 그들의 눈엔 아픔이 가득했다. 짐승처럼 사육  당
했던 것도 부족하여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  저들은, 태웅
과 추기영 그리고 야혼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보현…. 혹시 불경 아는 것 있냐?"
"아미타불! 많이는 모르고 딱 한가지 알고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연
작문주. 사부님께 회초리 맞아가면서 외운 거지요. 뜻은 모르니까 묻지
마시길…."
앞으로 나선 추기영이 가만히 철탁들 두드렸다.
뗑-! 뎅! 뎅뎅뎅!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수
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천수경?"
추기영의 모습을 주시하던 고명지가 나지막이 외쳤다. 놀라운 일이었
다. 언제나 색을 탐하며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추기영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독경소리는 가슴을 싸늘하게 적셔왔다.
가슴속에서 울컥하니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는 듯하였다.
손이 아닌 영혼으로 치는 목탁소리였던 탓이었다.,
데-엥! 뎅! 뎅뎅뎅!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  나무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지미 사바하,  나무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지미 사바하,
나무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지미 사바하.……, ……."
추기영의 천수경 독경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야혼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불끈 틀어쥔 비천묵령도에서  죽음보다 더한 기운이  흘러나왔
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언뜻 들었던 불경 한  구절을 중얼거리며 전방 강시들을  향해 일도
(一刀)를 그었다.
파악!
강시 다섯 구의 목이 잘리고, 그들의 몸이 가루로 스러진다. 그와 동
시에 온몸을 노리고 들어오는 십여 개의 무기들.
무심한 눈으로 그것들을 쳐다보던 야혼의 몸에서  일순 검은 광채가
일렁였다. 야차금강무적강을 운용하며 그 자리에서 팽이처럼 돌았다.
번쩍 검은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목을 잘라야 한다고 하였다.
오직 목만이 저들을 저승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허리가 잘려 버둥거리는 강시의 목을 자르고, 허공으로 도약해  오른
다. 횡으로 그어지는 비천묵령도에서 50여 개의 검은 광채가 솟구치고,
주변 강시들이 재로 흩어진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다시 한번 천수경 독경소리가 울려 퍼지고  비천묵령도가 허공을 그
었다. 여전히 같은 공격, 포위하듯 주위를  둘러싼 강시들이 몸이 폭죽
처럼 터져 나간다.
질끈 눈을 감고 사방에 비천묵령도를 휘둘렀다. 자신의 손에 죽은 사
람들, 죽지 못해 살아남았는데 그들을 다시 죽이고 있다.
무작정 왼손을 휘두르자 그곳으로부터 붉은 광채가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다.
도검(刀劍)이 불침 한다는 강시들이었지만  비천묵령도는 거침이 없
었다. 검은 광채가 빛을 토할 때마다 수많은 가루가 휘날렸다.
길다란 몽둥이가 사방을 휘저었다.
명교의 후예, 어머니는 명교를 믿었던 평범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단
단한 몸은 아버지를 닮았다 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칼조차 들어가지 않
았다고 하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또한 아들의 성장을 보지 못했다. 3살이 되던 해에 관아로 끌
려 가셨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혈풍무적강(血風無敵 )!"
태웅의 입에서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동안 틈틈이  익
혔던 철혈무적검법, 아직은 1초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형제였던 저들은 목을 잘라야 한다고 하였다.
어육을 만드는 패천마영권보다는 깨끗하게 잘라내는 검법이 더 나을
것 같아 펼칠 뿐이었다.
횡으로 갈라지던 여의만병주에 일순 붉은 기운이  어린다 싶더니 주
변을 포위하고 있던 강시들의 목이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카앙!
등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아예 무시했다. 아버지 덕에 몸 하나는  단
단하게 태어나지 않았던가. 검조차 들어가지 않은 괴물의 몸일진대, 무
슨 걱정을 하랴.
앞발을 힘차게 내뻗은 태웅의 여의만병주에서 붉은  빛 무리가 폭풍
처럼 터져 나왔다.
비명소리도, 붉은 피도 없다. 오직 사방으로  휘날리는 재가 있을 뿐
이다. 쏟아져 내리는 검은 재를 몸으로 받으며 앞으로 전진해 나간다.
모래로 뒤덮인 몸 속으로 시체들의 재가  쏟아져 들어왔으나 불쾌하
지 않았다.
찌르기 동작은 일절 없었다. 태웅의 공격방법은 오직 한가지, 횡으로
베는 동작이 전부였다.
구욱! 쿠욱!
스스스! 스윽! 스윽!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나모라 다나다라 야
야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데엥!
파악! 퍽퍽퍽!
황금 인간.
앙림의 금빛 털을 무던히도 원했고, 천애설의 머리칼마저 탐냈던  추
기영의 동체는 금빛 찬란한 빛을 사방에 뿌렸다.
그의 공격 방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입으론 끊임
없이 천수경 독경이 흘러나온다는 사실만 다른 날과 구분되었다.
마치, 장례를 주관하는 스님처럼 천천히 걸어다니며  무음항마혈탁을
두드렸다. 추기영의 공격은 무음항마혈탁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황금빛으로 변한 그의 몸에 닿아도 강시들은 가루로 흩어져 내렸다.
철이 들면서부터 유일하게 외웠던 천수경, 사부는 오직 천수경  한가
지만 가르쳐 주었다. 하루에 수십 번씩, 천수경을 외고 또 외었다.
어쩌면, 상국사에서 도망친 진정한  이유가 천수경 때문인지도 몰랐
다.
철탁을 혈탁으로 만들 팔자라 하였다. 그래서 천수경만 가르친  거라
하였다. 제 손으로 죽인 자들을 스스로 해탈시켜주려면 다른 불경은 몰
라도 천수경만은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어느새 천수경은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짧은 머리만큼이나 싫었던
불경. 그 천수경을 읊고 있다. 부모님이  형제로 여겼던 그들을 해탈시
켜주기 위해 천수경을 읊는다.
"황금수(黃金手)란 말인가!"
사방을 향해 전격마법을 날리던 광사옹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온통
황금색으로 변한 추기영의 모습은, 황금수가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이계에서 넘어온 성물 중, 가장 강력한 제마무기.
풍뢰궁이나 제마성검은 일인 공격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지금처
럼 죽은 자들을 상대할 때는 황금수만한 무기가 없다.
금빛 광채를 뿌리는 몸에 닫기만 하여도 마법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
이다.
"광명신이시여! 감사하옵니다. 허억…! 어떻게…."
부유마법을 펼쳐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던 광사옹의 신형이 지면으로
뚝 떨어졌다. 오른 쪽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백색  광채 때문이었
다.
광명신은 하늘에 있지 않았다. 왼손엔 살아 있는 자를 멸한다는 지옥
도를, 오른손엔 사자(死者)를 멸한다는 광명도를 들고 있는 자.
두 눈을 꽉 감은 채, 정신 없이 두 자루의 도를 휘두르고 있는 야혼
이었다. 백색의 광채가 퍼져나갈 때마다 강시들의 몸은 재로 흩어졌다.
"허허! 주인은 따로 있는 걸."
조금 전 광명도장을 탐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이었다.  하늘의
뜻인 게다. 명교를 위해 생을 바친 자신보다는 야혼이란 청년이 광명도
의 주인이었다.
"이제 공평한 싸움이 될 것 같네 잠사옹."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은 광사옹이 하늘을 향해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지팡이 끝에 달린 수정에 푸른 뇌전이 어리고, 이어 지상으로  사정
없이 내려 꼽혔다.
일순 주변이 환해진다 싶더니 수십 구의 강시들이 가루로 흩어졌다.
바람과 뇌의 기운을 머금은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투구 아래로 흘러
나온 금발은 바람을 맞아 휘날렸다. 천애설의 손에서 쏘아져 나간 화살
은 일거에 20여 마리의 강시를 가루로 만들었다.
"살이 많이 빠졌군요, 당신 때문에 어르신 말을 듣지 못했어요. 나에
게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해준 당신을 보고 싶어서요."
5천이나 된다는 강시가 두렵지 않았다. 그가 준 태을건곤심법을 완성
했고 풍뢰궁에 내기를 실어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
광사옹의 말로는 원래 풍뢰궁보다 5배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하였
다.
"당신 주변에 있는 강시는 제가 책임질게요."
왠지 모르게 야혼의 몸에서는 슬픔이 느껴졌다. 이년 저년하며  상소
리를 해대던 그였는데 지금은 오직 깊은 슬픔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의 사연을 알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다.
"그래도 너무 많군요."
시위를 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여섯 사람이 끊임없이 강시를  없애
고 있지만, 강시의 수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곡을
가득 메운 강시는 여전히 한 걸음씩 전진해오고 있다.
스스윽! 스윽! 슥!
하루, 이틀 그리고 삼일.
여섯 사람의 칼부림 속에 4일이 지났고, 다시 붉은 해가 사방을 밝혔
다. 정상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혼의 장포를 걸친 고명지는 여기저기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야혼
이 보물로 여기는 옷이라는 사실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 전쟁이 끝나면
호되게 야단맞을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점점 느려지는 동작이
못마땅하였을 뿐이었다.
그나마 제마성검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원거리는 금환을
날렸고, 근처에 다가든 강시를 향해선 제마성검을 휘둘렀다.
1척 길이 밖에 안되지만 죽은 자들을 없애는  데는 겁천십웅의 무공
인 금환신공을 능가했다.
"동생 힘을 내, 얼마 남지 않았어."
힘들어하는 고명지 곁으로 다가온 천애설이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는 곧이라도 쓰러질 듯하
였다.
"그래요, 언니."
고명지의 얼굴에 싱긋 미소가 어렸다. 천애설을 보자 갑자기 힘이 솟
는 듯했다. 일행 중 가장 힘든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녀일 것이다.
타국에서 온 사람도 아니고 다른 세상이라 하였다. 생김새 자체가 다
른 그녀가 기대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야혼이었다.
둘이 어떤 인연으로 얽혀있는지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황실에 얽매여 있는 자신보다는 천애설이  야혼에게 더 필요
한 사람인 게다.
얼마 남지 않은 강시들  때문인지 약간의 여유를 되찾은  두 사람이
야혼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하는 거지?"
야혼의 이상한 행동에 모습에  고명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이어질 수 없었다.
"위험해!"
뾰족한 고함소리와 함께  고명지를 밀친 천애설이  다가든 강시들을
향해 활을 휘둘렀다. 잠깐 동안의 휴식이 끝나고 또다시 접전이 시작된
것이다.
말없는 강시들과의 전쟁이.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이제는 입에 익어버린 천수경 구절을 읊었다. 냉소소가 만들어  주었
던 상의는 걸레처럼 찢겼다. 온몸의 흉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들과
같이 만들었던 상처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자신 앞으로 다가온 강시를 쳐다보던 야혼의 목소리가 점점  컸졌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지난 4일간 쉬지 않고 외쳤지만 아직 멀었
다. 지금부터는 저들을 향해 외쳐야 한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차라리 타서 재가 될 일이지, 그 화염 속에서 시체를 보존하고  말았
다. 심장을 찔렸으면 죽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살아있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14년 전이고, 다 잊었다고 여겼었다.  아
니 잊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퍼억!
검은 손 하나가 얼굴에 커다란 소리를  남겼다. 아프지 않았다. 마
옥성에서 가장 미녀였던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온통 흉터뿐인,
타다만 얼굴만 있을 뿐이다.
파악!
이번에 작은 손, 앙증맞게 작았던 그  손이 아니다. 손가락마저 떨어
져 나가고 없는 뭉툭한 조막손이 있을 뿐이다. 가슴팍을 때렸던  그 손
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수리수리를 외치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머니와 누이. 둘을 만나고
싶지 않아, 줄곧 눈을 감았었다. 지난 4일간 단 한번도 눈을 뜨지 못했
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었고, 눈을 떴는데.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날, 죽어서도 헤어지지
말라며 두 사람을 묶었다. 영원히 함께 하라고 철삭을 구해 묶었다.
그랬었는데.
급기야 야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옥성을 떠난 뒤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수가 없었다.  낳아주신 어머니와 누이마저 죽인
모진 놈은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머리로 떨어지는 두 사람의 손과 발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멍한 눈으로….
"아미타불! 연작문주 우린 해 냈네, 5일 동안  해대던 전륜한 정력으
로 강시를 전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하던 추기영이 일순 입을 닫았다.
20장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 때문이었다.
철삭으로 묵인 강시 두 마리가 야혼을 향해  연신 손을 뻗어내고 있
었다.
불에 탄 흔적이 여실히 드러난 얼굴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분명 여자였다.
반쯤 떨어져 나간 가슴을 지닌 여자들.
"저런 염병할 놈의 철삭…."
무릎을 꿇고 두 사람에게  몸을 내맡긴 야혼의 모습에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가장 우려했던 일. 녀석이 어머니  시신을 만나지 않기를 빌
고 또 빌었다. 천수경을  읊으며 부처님께 기원했다. 그런데,  어머니와
누이를 만나고 말았다.
"니미씨벌타불! 내 다시는  불경을 읊으면 그때부턴  개자식이다. 개
호로 자식이라고!"
"씨팔!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지지."
고개를 돌린 태웅과 추기영이 신전을 향해 몸을 돌려 버렸다.
키아! 쿠욱!
유일하게 남은 강시들이었다. 철삭으로 묶인 강시 두 구가 서로 엇갈
려 가며 야혼을 향해 주먹을, 발을 날리고 있다.
퍽억! 퍽! 퍼억! 퍽퍽!
퍼억! 퍽!
5권이 끝났습니다.
며칠 쉬었다가, 하오대문 6권 연재 시작하겠습니다.
당분간은 광풍무에 몰빵해주시길, 선작도 해 주시고요.^^
하오대문 6권
이별(離別)
"애설아 들어가서 하오마즙을 가져오너라."
야혼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광사옹이 천애설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도망치자 하였던 야혼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저들을 만날까봐 그랬던 거였다.
마옥성에서 죽어갔던 그의 가족들.
"잠사옹! 그대는 너무 많은 죄를 짓고 있네. 아베스타보다 침묵의 서
가 더 뛰어남을 증명한들 뭐가 달라지는가?  역사는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 가는 거라네."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들, 흑서의 비밀을 접한 자신과  잠사옹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
수레바퀴가 구르듯 새로운 신체에 빙의하면서 끊임없이 삶을 연장하
고 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죽고 싶어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인간적인 욕망이 머리를 쳐들었다.
결국엔 그 욕망에 굴복하여 빙의할 새로운 신체를 찾고 말았다. 수많
은 욕망과 감정을 가진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은 저주였다.
"어르신 여기…."
"그래……."
천애설이 가져온 하오마 즙 단지를 받아든 광사옹이 여전히 야혼을 툭툭 치
고 있는 모녀 뒤쪽으로 다가갔다.
"아우라 마즈다여! 여기 당신을 따르던 가련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두 사람 주변을 천천히 움직이던 광사옹의  몸에서 은은한 백색광채
가 솟아 나오기 시작하였다.
"부디 이들을 노래의 집으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믿고, 당신
을 따르던 불쌍한 종들입니다. 아우라 마즈다여!"
하오마 즙이 가득 들어있는 단지를 들어 철삭으로 묶인 모녀의 머리
위로부터 천천히 부었다.
치이익!
쿠아악! 키이이!
흰 연기가 솟구쳐 오르며 두 여인의 시체가 머리부터 시작하여 천천
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영혼의 정화, 하오마 즙의 또 다른 묘용이었다. 살아 있는 자에겐 환
각과 환락을 주지만 죽은 자의 영혼을 정화하는 약이었다. 하오마 즙의
원래 목적은 후자라 할 수 있었다.
두 여인의 시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야혼 앞에는 벌겋게 녹슨 철삭만
남았다.
"야혼……."
고명지가 낮게 야혼을 불렀다. 그동안 야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의 과거가 바로 저 모습일 줄은 생각지 못
했다.
그의 가슴속에 있는 얼음덩어리의 실체는 조금  전 살아났던 시체들
이었다. 딱히 위로해줄 말이 없었다.
"됐어, 벌써 14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이야. 여기 왔던 분들은 그들이
아냐. 마법 때문에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뿐이야. 마법 때문에…."
눈앞에 떨어져 있는 철삭을 주워들며 일어섰다. 어차피 과거의  일이
다. 어머니와 누이의 마지막 순간은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노래의 집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웃으면서…….
이내 표정을 바꾸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영감 뭐 하는 짓이래?"
아우라 마즈다를 외치며 하오마 즙을 뿌리는  광사옹을 발견한 야혼
이 천애설을 향해 물었다.
"원래 하오만 즙은 영혼을 정화하는 성수로도 쓰였어요."
"그럼 저 단지들이 전부 하오마 즙이라고……. 이봐요 영물 영감! 그
아까운 걸 다 뿌리면 어떡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광사옹을 향해 몸을 날렸다.
"녀석! 빨리도 묻는다. 자꾸만 가슴속에 얼음덩어리를 키우면 나중엔
어떻게 할래. 더 이상 키울 수 없을 땐 어떡해 할거냐고."
고명지가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과거의 천마처럼 마(魔)의 길로 접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증오하며, 막아서는 이들을 향해 철퇴를 내렸던 파괴의
신.
"그건 너의 선택이다 야혼, 지옥도와 광명도 중 어떤 선택을 해도 말
리지 않겠다. 강호 무림을 없애 버린다 하여도…, 도와주마."
"저기.…동생."
망연한 얼굴로 야혼을 주시하는 고명지의 귓가에 천애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세요 언니?"
"다른 게 아니고 야혼은……, 어떤 사람인가 해서."
"야혼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꽤나 친숙한 듯 보였던 두 사람이다. 더구나 야혼을 대하는 천애설은
시선은 연인을 바라보는 듯 했었다. 그런데 야혼에 대해 묻다니.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고명지를 향해 어색한  얼굴이 된 천애설이
낮게 말했다.
"없지, 만나자마자 바로 헤어졌는데. 서대시전에 와서 개차반 야혼을
찾으라고만 했어."
"훗!"
고명지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만했다. 만나자마
자 제 욕심만 채우고 줄행랑을 놓았음에 분명했다.
"맞아요, 개차반이."
"무슨…?"
"여자만 보면 침을 줄줄 흘리는 개차반이라고요."
"킥! 그래서 개차반이라 그런 거야?  그런데, 괜찮으려나 몰라. 많이
힘들텐데…."
낮은 웃음을 흘리던 천애설이 이내  표정을 바꾸며, 조금 전 야혼이
무릎을 꿇었던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걱정 마, 아주 쌩쌩하니까."
"학! 언제… 으읍!"
귓전을 자극하는 소리에 화들짝 고개를  돌리던 천애설은 말
을 잇지 못했다.
귓전을 자극했던 입술과 합쳐져 버린 탓이었다.
 "음! 아직은 달콤하군. 들어가자, 들어야 할 말이 많다."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천애설과 고명지를  허리를 와락 끌어당겨
신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야혼! 성모 언니는 어떻게 꼬신 거냐?'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야혼의 단단한 팔뚝을 음미하며 전음을 보냈다.
그의 머릿속에서 가족들에 대한 생각을 지우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겪어 보고도 묻냐? 여자들이 그냥 팍팍 자빠졌다니까? 더구나  천애
설은 할머니 아니냐, 120살이나 된 할머니를 꼬시지 못한다면 야혼이란
이름을 버려야지. 너도 처음 만났을 때 한방에 갔잖아.'
'그건 색공 때문이었잖아 임마. 설마 언니도 색공으로….'
'그만해 이년아, 어차피 애설이나 너나 나에겐 둘 다 같으니까.'
'무슨….'
'다, 내 재산이라고! 이 야혼의 재산목록 1호.'
'우리가 물건이냐 아 나쁜…. 아욱!'
눈을 흘기며 욕설을  뱉어내려던 고명지가 이내  흰자위를 드러내며
신음을 발했다.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손이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와 기이한 움직임
을 보인 것이었다. 여전히 그녀가 벗어나지 못하는 색색만화공이었다.
"나쁜 놈! 정말 괴물이 되고 말았구나."
야혼의 손이 사라지자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야혼은  자신과
천애설을 안고 가는 게 아니었다.
처음 허리를 안았던 양손을 놓아버린 채 오직  내공의 힘으로 두 사
람을 끌고 가는 것이다.
잠시 후, 허공을 날던 세  사람의 신형은 광사옹의 신전에 도착하였
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그러니까 잠사옹과 내가 서역으로  경전
을 구하러 갔을 때가 일의 시작이었네…."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자 지그시 눈을 감은 광사옹이 5백 년 삶을 풀
어놓았다.
"흑서연구로 백 년의 세월을 보냈을 때  우리는 마지막 비밀을 접하
고 말았다. 이 세상은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늘에 수많은 별이
있듯, 생명체가 살아가는 곳은 이곳말고도 또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
실은 그곳에 사는 생명체들은 인간에 비하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흑서에 적혀있던 마법과 이계 생명체는 현실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
했다.
명교의 전신이었던 마니교와 배화교가  멸망한 사실도 알지 못했다.
6, 7백 년의 생을 누리며 살고 있는 이계 생명체의 연구에 모든 정력을
쏟았다.
와중에 많은 이계 생명체를 잡아오기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서로
가 협조하며 같이 연구를 했었다.
다른 목적 같은 건 일절  두지 않았고, 창조의 비밀을 밝혀보겠다는
순순한 목적에서였다.
"잠사옹과 내가 서로 갈라서게 된  건 3백 년 전이었다.  패천십비라
불리는 겁천십웅의 비무 때부터였지."
"잠사옹이 그 때부터 수인을 만들어낼 준비를 했던 모양이군."
광사옹의 말을 듣고 있던 야혼이 나지막하니 말했다.
"맞다. 그는 나도 모르게 명교인들은 잡아다 생체실험을 하고 있었던
게야. 스스로 앙그라 마이니우가 되기로 한 거지."
우연한 기회에 잠사옹의 연구실을 방문했던 광사옹은 질겁하고 말았
다. 잠사옹의 연구실은 온통 시체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생명의 창조에 대해 고심하던 그는 두 세계의 생명체를 하나로 합치
는 작업을 시작하였던 거였다.
하지만 광사옹은 잠사옹을 막을 힘이 없었다. 이미 악에  물들어버린
그의 마력은 자신을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잠사옹에 의해 자신의 실험실에 감금당하고 말았다.
"연달아 실험에 실패하던 그에게 단서를  제공한 자들은 겁천십웅
이었다. 금강불괴에 달한 신체면  폭주하는 마력을 견딜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지. 사실은 패천십비라 불린 겁천십웅의 비무도 그가 제안해
서 이루어진 거다. 겁천십웅의 무공을 관전하고 온 잠사옹은 백  년 동
안 그들의 무공을 연구하여 제압할 방법을 찾아내고 말았다."
"그건 알고 있소. 모군상을 만나 대충 이야기는 들었소. 내가 궁금한
건, 겁천십웅 중 그의 하수인이 된 자가 몇이냐 하는 거요."
잠사옹에 의해 무한한 생을 얻었지만 모군상은  그의 수하를 자처하
지는 않았기에 묻는 말이었다.
"그건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적어도 절반 이상은 잠사옹의  심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명교는…."
"명교의 몰락은 주원장과 잠사옹이 손을  잡으면서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다. 9할 이상의 생체실험을 성공한 잠사옹은 많은 실험체가 필요하
게 되었다. 더구나 명교는 앙그라 마이니우의 주적인  아우라 마즈다를
믿었으니까. 그리고 주원장의 입장에서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무
림인들이 껄끄러웠던 게야."
주원장과 잠사옹의 만남은 명교 내에서 이루어졌다. 정마 10년  전쟁
이 일어난 배경이었다.
주원장은 끊임없이 무림인들을 십만대산을 투입하였고, 잠사옹은  명
교인들에게 마법을 걸어 무인들과 싸우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강했다. 마법으로  무장했다고 하지만 일반 양민
수준이었던 명교인들은 그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잠사옹과 주원장은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성모궁에
있던 5천 명의 어린아이들을 독살하기로 하였다."
전쟁에 참여하고 있던 명교도의 자식들, 그들과 성모가 머물렀던  장
소가 바로 성모궁이었다.
"중원 무림의 최강자들을 없애기로 한 거군."
야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모궁에서 주웠던 비급에서 보았던 내용이
다. 그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상태에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5천에 달하는 명교도의 자살은 충격적인 광경이 되었
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었을 테고, 잠
사옹은 불사지체를 들먹이며 그들을 자극했을 테니…."
"그렇다. 인간은 심리는 참으로 묘해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닥치면
본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습관이 있다. 어린아이 5천 명을
죽였다는 현실을 잊고자 불사신체와 무공을 택하고 말았다.  새로운 삶
은 선택했다고 해야겠지."
"아미타불! 복잡하군요, 그러니까 영물 시주님의 말을 간단하게 축약
하면 잠사옹인가 하는 그 개 시주가 신이 되고 싶어한다 이 말 아닙니
까. 그동안 명나라와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데 이제는  싫증나서 갈라
섰다는 소리고."
"하기야 백 년을 같이 살았으면  이제는 물릴 만도 하겠다. 참  영물
영감, 성모궁 지하에 있던 그 불의사제란 작자들은 뭐요?"
추기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태웅이 물었다.
"그들에게 손을 쓴 사람은 나였다."
잠사옹에 의해 감금을 당했지만 자신 또한  흑서를 연구했던 실력자
였다. 마법진을 만들어 무작정 탈출했던 곳이 바로 사막이었다. 놀랍게
도 이곳엔 고대의 신전이 만들어져 있었던 거였다.
"그러니까 여기서 똬리를 틀고  십만대산을 왔다갔다했다는 말이네?
불의사젠가 하는 놈들 참으로 불쌍하게 되었구먼. 늙은 영물 둘이서 자
신들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도 모르고, 스스로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
각하고 있으니…."
문득 성모궁 침묵의 탑에서 만났던 자가 생각났다. 명교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잘난 놈들, 잘난 사람들, 잠사옹, 광사옹, 불의 사제, 그리고 주천상과
강호 무림인들까지, 전부가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다.
"재미있겠어. 무림을 비롯한  명나라 전체가 완전히  개 박살나겠어.
나는 가만 지켜보기만 하면 하오대문을 만들 수 있겠구먼."
"명교를 돕지 않을 텐가?"
야혼의 몸에서 흐르는 미약한 살기를 감지한  광사옹이 심각한 얼굴
로 물었다. 잠사옹을 견제할 유일한 인물이  야혼일진대, 그는 전혀 관
심이 없는 듯한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명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광명도장이 그대를 선택했기 때문일세."
예지자 또는 구원자, 광명도장에  의해 선택인 자를  말한다. 명교의
교주나 성모보다 더 높은 신분을 지난 사람이 야혼인 것이다.
"그런가? 사정이 허락한다면  도와야지. 돕고 사는  건 좋은 일이니
까…. 뾰족귀 뭐하냐? 네 방으로 안내해야지."
"네?…. 네!"
투구를 때리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천애설이 황급히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몸이 끈적끈적해서 씻어야겠어."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천애설을 따라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허락한다면…."
야혼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고명지가 그의  마지막 말을 음미
하듯 중얼거렸다.
허락한다면 이라는 단서를 달았으니  도움을 주겠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들이 부탁을 하거나 아니면, 막판에 몰렸을 때까지 기다릴 것임
에 분명하다.
"잠사옹이 나선다면 무림은 망하겠군…."
"무슨 말인가 첩형!"
"아-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그런데  수인들을 판별해  내는 방법이
란…."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굳이 야혼의 내심을 알리고 싶은 생각이 없
었던 탓이었다.
"참! 그걸 주기로 하였지. 별다른 것 아닐세, 이 구일세. 이 구(球)를
통해서 보면 상대의 진실한 모습이 보이네. 일명 진실의 보주라 불린다
네."
"감사합니다. 혹시 마옥성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까?"
백색 보주를 받아들며 고개를 숙인 고명지가 재차 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마옥성의 위치인 것이다.
"전부 7곳으로 알고 있네. 아니 잠사옹이 숨어 있는 곳까지 합하면 8
곳인가? 중원 오악과 이곳, 그리고 대초원에 하나씩 있지."
두 신을 섬기는 명교의 교리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는지 잠사옹은 짝
수를 싫어했다. 해서 7곳의 마옥성도 1,3,5,7,이라는  홀수만을 이용하여
이름을 명명했다.
"하지만 설사 그곳의 위치를 안다고 해도 찾기가 쉽지  않네. 환영마
법이 걸려있거든. 자네에게 준 진실의 보주로 비추면  마옥성의 실체가
보일 걸세."
"그럼 생각보다 많은 수는 아니겠군요."
일순 고명지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야혼의 말을 빌리면  13혈옥에
3천 명 정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잠사옹이 숨어있는 곳까지  합치면 남
아 있는 마옥성은 7곳, 2만 정도의 병력을 예상하면 될 터이다.
"그들 전부가 수인(獸人)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네. 결코 적은 수가
아닐세."
"그래도 예상보다 절반은 줄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다행이지요. 문제
는 그들의 존재를 믿어 줄 무인이 정파엔 없다는 거지요."
"아미타불! 그럼 잠사옹의  졸개들이 나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겠군요. 참! 이 철탁 말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추기영이 잠사옹 앞에 무음항마혈탁을 내밀었다.
"그럼 지금껏 그게 황금수라는 걸 모르고 있었는가."
"엥? 그럼 정말 이 놈이 황금수란 말입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 듣고 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
다. 정파 최고 신물 중의 하나인 무음항마혈탁이 이계지물이라니.
"사실 자네들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는 이 세상 물건이 아닐세, 이세
계에 있던 물건들이 천축으로 건너갔고, 그곳을 통해 중원으로 흘러 들
어왔네."
세 가지 물건에 대한 광사옹의 설명이 간단하게 이어졌다.
이세계를 찾아간 사람은 자신들이 처음은 아니었다. 고대에도 그곳을
방문했던 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흔적은 흑서 상에 남아 있었던 것이었
다.
아득한 시절, 이세계를 방문했던 자들은 그곳으로부터 세 가지  마법
무구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제마성검, 황금수, 그리고 풍뢰궁이었다.
이름난 신검처럼 대단한 무기는  아니었다. 다만 마법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를 없애는 기능이 탁월한 반마법무기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아마 황금수가 목탁모양으로 변한 건 천축에서였을 거네. 그렇게 만
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마법사였을 걸세. 극락성음이라
는 항마음도 그가 깃들게 하였을 것이네."
광사옹이 무음항마혈탁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무음항마혈탁에는 두
가지 기능이 동시에 들어있다.
마법을 파괴하는 반마법적인 기능과,  음공을 시전하는 무공적인 기
능.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결합된 무기가 바로 무음항마혈탁인  것이
다.
그런 면에서 보면 무음항마혈탁을 만든 이는 마법과 무공에 전부 통
달했다고 봐야한다.
"아미타불! 그건 영물 영감의 말이 맞습니다.  마법은 모르겠지만 이
항마혈탁을 만든 사람은 엄청난 무인이임이 분명합니다. 운기행공을 할
때마다 정력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거든요. 염병할……."
정력이란 말을 하던 추기영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아래쪽을 쳐다
보았다. 가는 곳마다 여자가 기다리는 야혼 때문이다.
무슨 복을 타고났는지, 녀석에게는 끊이지 않는 게 여자다.
설마 전대 성모라는 천애설까지 꼬셔두었을 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
다.
"하여간 되는 놈은…."
되는 놈! 추기영과 태웅이 내린 야혼에 대한 평가였다.
한편.
되는 놈인 야혼은 천애설과 함께 신전 뒤편의 자그마한 방에 들어와
있었다.
"여기가 네 방이야? 그런데 웬 나무들이 이렇게 많아?"
온통 푸른 초목으로 가득한 천애설의 방을 보며 놀란 듯 물었다.  마
치 방 전체가 나무로 꾸며진  듯, 1자 폭의 통로를 제외하면  천장까지
온통 푸르렀다.
"제가 숲의 종족이라 그렇대요.  죽어가던 나무도 제 손길만  닿으면
바로 살아나요."
천애설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자신도  몰랐던
능력이었다. 이세계의 엘프라는 종족은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산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있어요, 마법이란 걸 배웠거든요, 보실래요?"
"너도 그런걸 배웠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마도련에서부터 지겹게 듣기 시작했던
말.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문득 알고 싶어졌다.
"나 천애설의 의지가 말한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여! 나타나라!"
팟!
천애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공 중에  주먹정도 크기의 푸른
빛이 나타났다.
"얼레, 정말이네? 그럼 나도! 나 야혼의 의지가 말한다. 꺼져라! 훅!"
깜짝 놀란 야혼이 천애설 흉내를 내며 허공 중에 떠 있는 빛을 향해
입김을 사정없이 불었다.
"호호호! 안돼요, 이 빛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내 말만
듣게 되어있다고요."
천애설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불빛 봤나. 그럼 다시, 나 아월의  의지가 말한다.
그만 죽어랏!"
팍!
"어맛! 어떻게…."
천애설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빛이 순식간에
소멸되어 사라진 것이었다.
"이 야혼의 능력이야,  그까짓 불빛 하나  만들었다고 좋아하기는….
백살이 넘었다는 것 맞아?"
"이상하네…, 어디 다시 한번 해봐요? 나 천애설의…."
고개를 갸웃거리던 천애설이  다시 마법의 빛을  만들어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문조차 외지 않고, 야혼은  입김만으로 푸른빛을 꺼버
린 것이었다.
"이건 사기야! 어떻게 마법 빛을…. 말해봐요, 어떻게 했는지 말해 보
라고."
"쓸데없는 소리말고…. 욕실이 어디야, 그리고 너도 이 투구 좀 벗고.
예쁜 얼굴을 왜 가리고 다니냐."
천애설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벗겨  한쪽 구석으로 내팽개치
며 말했다.
출렁!
순간 천애설의 황금빛 머리가 허리 부근까지  늘어지며 황홀한 빛을
뿌렸다. 더하여 그녀의 황금빛 머리  사이로 뾰족한 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 귀  때문에 그렇죠  뭐. 야혼  당신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에게
는…."
"별 걸 다 신경 쓴다. 예쁘기만 하구만. 잔말말고 욕실이나 안내해!"
"알았어요, 이쪽이에요."
귀를 가리려던 천애설이 화들짝 놀라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오솔길처럼 만들어진 통로를 따라 이리저리 걷다보니 대리석으로 만
들어진 아담한 욕조가 나타났다.
"아이고, 반갑다 물아."
갈가리 찢겨 옷이랄 것도 없는 천 조각을 찢듯 벗어 던지며 욕조 안
으로 들어갔다.
"뭐해?"
"네?"
"너도 모래 투성이잖아 두 사람은 충분하겠구먼. 들어와서 등이나 좀
밀어."
"싫어…, 어?"
야혼이 슬쩍 손을 흔들자 주르르 끌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있잖아, 나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있다고. 너를 끌어당기며 물
을 데우기도 한단 말이다. 마법보단 훨씬 유용하지. 그리고…."
천애설을 옷을 벗겨나가던 야혼이 이내 할말을 잊은 듯 손을 멈추고
말았다. 광애성모지체라는 그녀의 몸이 주는 충격 때문이었다.
성모궁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욱 아름답게 변한 듯하였다.
"사실 제 몸은 광애성모지체로 만들어졌어요."
야혼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재빨리 하의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
왔다.
"허걱! 금테네?"
그녀의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야혼이 나지막한 신음을 내질렀다.
머리만 금발이 아니었다. 새로운 발견. 몸의 털뿐만 아니라 아래쪽까지
전부 금색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금테, 그게 뭐죠?"
야혼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물 속에 몸을 담근 천애설이 궁금한 듯
물었다.
"아-아냐. 그보다 조금 전 만들어졌다는 말은 뭐냐?"
재빨리 얼버무린 야혼이 말을 바꿔 물었다.
"별 것 아니에요. 원래 엘프는  자연체라고 한다더군요. 태생 자체가
성스러운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요. 그런 엘프가  색공을 극성으로
익히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색공을 극성으로  익힌 엘프는 광애성모지체에  해당하는
기운을 타고난다 이 말이야?"
"맞아요. 어머니가 색색만화공을 극성으로 익혔다고 하더군요."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었군. 등이나 밀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수천구신체의 비밀을 이제야 알 것 같
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강호 상에 나타나있는 대부분이  잠사옹에 의해
만들어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고생 많이 했군요."
야혼의 등을 쳐다보던 천애설이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등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흉터를 발견했던 탓이었다.
"고생은…, 아직 살아 있으면 됐지. 세게 좀 밀어!"
"네? 알았어요."
울 듯한 표정을 하던 천애설이 이내 팔에 힘을 주며 야혼의 등을 밀
었다.
"근데 말이야, 엘프라는 종족은 수명이  어느 정도 되는 거야?  오래
살았으면 좋겠는데…."
문득 천애설의 나이가 백살이 넘었다는 생각에 묻는 말이었다.
"그게 좀…."
"말해봐, 나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할 것 아냐."
"사실 우리 종족에서는 저는 아직 성인이 아니래요. 적어도 2백 살은
되어야 성인으로 인정해 준다고 하네요."
광사옹에게 들은 말이었다. 숲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는 보통 6백에
서 7백 년의 수명을 산다고 하였다.  그것도 일반 엘프들이 그렇고, 그
들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하이 엘프는 정확한 수명조차  알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이 하이 엘프인지 아니면 그냥 엘프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한 가
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인 야혼보다는 오래 산다는 것이다.
"그럼 내가 할머니하고 잔 게 아니라 어린애를 겁탈한 꼴이 되는 거
야?"
"그거야 그쪽 세계에  해당하는 사항이지요.  저는 고향이 이곳인걸
요."
야혼의 목을 껴안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맞아 나는 어린애를 겁탈한 게 아니고, 처녀로 죽어  가는 할머니의
목숨을 구해준 거라고."
빙글 몸을 돌린 야혼이 천애설의 몸을 껴안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몸은 참으로 놀라웠다.
마치 기름칠을 한 동체처럼 온몸이 미끈거렸다.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쓸어가던 야혼의 손길이 어느새 앞으로 돌아왔다.
"저기 침대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 몸을 회복한 다음 가장 먼
저 야혼을 찾아 개봉으로 가는 것이었다.
한번의 만남이었고,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없었지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그였던 탓이었다.
아마 마법이란 걸 배우지 않았다면 벌써 개봉으로 찾아갔을 것이다.
"읏차! 그런데 하오마 즙은 안 먹을 거야?"
천애설을 안고 일어선 그녀의 몸을 훑듯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몸
은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
폭발할 듯 솟구친 가슴과 가는 허리는 지금껏 겪어보았던 여인들 중
최고였다.
"이젠 안 마실래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처음 그와 관계를 가질 때는 살아야겠다는 생
각이 거의 없었기에 얼떨결에 마시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당신을 기억하고 싶거든요."
"날 기억해? 이 개차반은 그냥 몸으로 기억되는…. 우읍!"
느닷없는 천애설의 기습에 하던 말을 멈추고  그녀의 입술을 받아들
였다.
'얘가 왜 이러나. 그동안 남자에 대해 공부 좀 했나?'
내심 중얼거리던 야혼이 이내 그녀의 입맞춤에 열렬히 응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입술에 와 닫는 부드러운 촉감과 함께  그곳으로부터 미끈한 물체가
입안으로 침입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혀였다. 야혼의 입안에서 두 혀가 서로 얽히며 춤을 추기  시
작하였다.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서로 꼬이고, 조그마한  입안에서 무수
한 움직임이 일었다.
어느새 침대로 옮겼는지 알지 못했다.
한번 시작된 입맞춤은 끝날 줄을 몰랐고, 두 사람의 손은 서로의  몸
을 부드럽게 쓸었다.
"하-아!"
천애설의 입에서 희열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가슴을 부드럽게  쓰
는 손길이 느껴졌던 탓이었다. 잔득 움츠렸던 유실이 발딱 일어서는 느
낌과 함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두 가슴을 부드럽게 쓸던 손길이
떠남과 동시에 뜨거운 입김이 밀려들었다.
또다시 아득해지는 느낌, 조금 전보다 더한 쾌감이 몰려오며  온몸에
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문득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가슴에
고개를 묻고 있는 야혼의 모습이 보였다.
흉터로 뒤덮인 등을 쓰다듬으며 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랫
배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이내 엉덩이 쪽으로  돌아갔고, 그곳으로부
터 움찔움찔 가려움이 일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치떴다.
"하-악! 야혼…."
그러나, 이내 고개를 뒤로 제키며 눈을  감고 말았다. 엉덩이에 머물
렀던 그의 손길이 허벅지 사이로 파고든 순간, 강렬한 충격이 머릿속을
강타했던 탓이었다.
남녀의 관계가 이런 느낌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때는 하오마 즙에
의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직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그를 탐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너무 선명했다.  허벅지를 간질이는 그의 손
길이 분명했고, 아랫배에 머물러 있는 그의 입김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인가 부족한 기분. 한 자리에만  머물고 있는 그의 입김
이 싫어 그의 머리를 붙잡고 아래쪽으로 힘껏 밀었다.
황금빛 찰랑이는 부드러운 초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은  늪이었다. 하염없이
빠져들어 헤어날 길이 없다. 그녀의 몸은 사막이다. 마셔도,  마셔도 갈
증은 풀리지 않는다.
야혼이란 이름을 달고, 수많은 여인들을 겪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완
전하게 푹 빠진 적은 없었다.
상대를 먼저 달궈야할 자신이 더 깊이 빠진 듯했다. 숨을 쉬고  있는
지, 그녀의 몸을 음미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제…."
천애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신에서 밀려드는 환희의  물
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허우적거리듯 손을 뻗어 야혼의 머리를 끌어올렸다.
부족한 무엇인가를 채워야할 시간이었다.
열기 가득한 입김을  뿜어내던 두  사람의 입술이 하나로  합쳐지고
천애설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참을 수 없는 환희에 야혼의 입술을 거칠게 빨았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날 줄을 몰랐다.
주변이 온통 검게  물들었을 즈음하여 천애설의  방에서 흘러나오던
신음소리가 멈췄다.
야혼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천애설이 먼저 잠들어버린 것이었다.
"쩝! 나는 아직인데…."
쌔근거리며 잠이 든 천애설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마법이란 놈은 의지를 이용하는 것 같던데…."
관계를 갖기 전, 천애설이 만든 마법의 빛을 꺼트렸던 때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처음 야혼이란 이름을 외치며 입김을 불었을  때는 꼼짝도
하지 않았던 빛이 아월이란 본명을 말하자 바로 꺼졌다.
"뭐라고 했더라…, 아 맞다. 나 아월의 의지가 말한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여! 나타나라!"
천애설이 깰까봐 조심스럽게 외쳤다. 하지만,  야혼의 손바닥 위에는
어떤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엥! 좀 약했나? 그럼 이번엔 정신을 집중해서….  나 아월의 의지가
말한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여! 안 나타나면 죽인다!"
파-악!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야혼의 심장부근에서 흰 빛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전방 허공에 엄청난 크기의 구체가 나타났다.
천애설이 만들어냈던 주먹크기의 빛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했다..
야혼 동체 절반정도 크기의 빛이 나타나 푸른 광채를 사방으로 뿌리
는 것이었다.
"이런 씨팔! 이번에도 불량이잖아? 줄어 임마!"
"무슨 일이…, 옴마!"
야혼의 외침소리에 설핏 잠이 깬 천애설이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기
절할 듯 놀랐다.
"어떻게…."
할말을 잊은 듯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야혼이 마법을 구사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신 또한 마법을 배웠지만 아무나 시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법을 펼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마력(魔力)이란 게  있어야 한다.
마력은 무인들이 사용하는 내기와는 근본이 달랐다.
마력을 쌓는 방법도 어려울뿐더러, 모이는 장소도 단전이 아닌  심장
이다. 수백 년을 수련한 광사옹마저도 마력구의 도움을 받아 마법을 펼
치지 않았던가.
"깼어? 미안해, 그런데 왜 내가 하면 불량이 만들어지지?"
"불량이 아니라, 마력이 너무 강해서 그래요. 어떻게 된 거죠?"
"그러니까 정력이 아니고 마력이 강해서란 말이지?  그럼 그때 먹은
그놈 때문인가?"
"뭘 먹어요?"
"응! 저놈을 얻을 때  광명제세보준가 하는 놈이 같이  있었거든, 왜
영물영감이 탐냈던 물건 있잖아."
"설마…."
"그 설마가 맞아.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수정구가 마력 덩어리란 말이
네?"
"그런가 봐요."
망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야혼이 마법의 빛을 꺼트렸던  상황
이 이해가 갔다. 엘프인 자신보다 더 엄청난 마력을 가진  사람이 야혼
이었다.
"혹시 다른 마법 알고 있는 건 없어?"
"있어요, 불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있고, 얼음화살을 만들어내는 방법
도 있어요. 또 바람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있고요."
사실 그녀가 알고 있는 마법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숲은  종족이라
는 엘프였지만 이제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지 3년, 기초적인 마법정도만
간신히 뗀 상태였다.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선 먼저 주문이 있어야 해요. 불을  만드는 마
법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싱긋 미소를 머금은 천애설이 벌떡 일어나며  눈을 감더니 나지막이
외쳤다.
"대지를 태우는 화염의 불꽃이여, 나  천애설의 의지로 말한다. 나타
나라!"
화르르!
그녀의 영창소리와 함께 두 사람 반 장  전면에 조그마한 불길이 나
타났다.
"호! 저놈은…."
주문을 욀 것처럼 하던  야혼이 이내 입을 닫고  천애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일어난 그녀의 상체가  고스란히 드
러나 보였기 때문이었다.
"안되겠다. 마법보다는 이 놈이 더 급하단다."
불쑥 솟구친 아래쪽을 가리키며 덥석 천애설을 끌어당겼다.
"지금 그게…, 으읍!"
잠시 앙탈부리듯 몸을 빼던 천애설이 이내  잠잠해지며 야혼의 목을
껴안았다. 허공에 솟구쳐 있던 불길이 팍 꺼지고 다시 신음소리가 사방
을 메웠다.
다시 시작된 사랑의 유희는 푸른 나뭇잎  사이로 아침햇살이 비춰들
때 즈음 끝이 났다.
"말해봐!"
천애설의 몸에 붙은 황금빛 머리칼을 하나씩 떼어 내며 물었다. 전날
과는 달리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기…. 고향에 가기로 했어요."
"고향? 성모궁을 말하는 거야? 성모궁은 이미 파괴되어  아무것도…,
너 설마…."
화들짝 놀라며 쳐다보는 야혼의 모습에 천애설은  고개를 가만히 끄
덕였다.
"언제 올 건데."
천애설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야혼이 나지막하니 물었다. 말릴
수 없다.
아니 수백 년을 산다는 여인을  데리고 살 자신이 없다고 해야했다.
어떤 선택이던지 그녀가 하는 대로 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게다.
"기다려줄 거예요?"
"난 먹여 살려야할 여자들 많아. 저 밖에 있는 고명지도 먹여 살려야
하고, 냉소소도 있고, 당가려 그리고…, 손가락이 부족해."
"개차반!"
"그래 맞아 나는 개차반이야. 기다리기는 하겠지만 찾으러 가지는 못
해. 여기서 할 일도 많고."
"가능하면 다시 오도록 할게요."
"가능하면…. 맞다. 너는 이곳보다는 그곳이 더 어울리는  여자지. 이
곳에 있어봐야 이상한 괴물로 취급당하기나 할 테고…. 일어날까?"
천애설을 번쩍 안아들며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광사옹을 비롯한 일행은 신전 가장 깊숙한  지하광장에 들어와 있었
다.
"영물 영감, 애설이 잘 지키시오. 행여 잠사옹을 막겠다며 설치지 말
란 말이오."
"걱정 말게, 놈의 약점만  확인하면 바로 돌아올 테니까.  가자 애설
아."
"저…. 야혼 나 반드시 돌아올게. 그러니까…."
"알았어, 이년아. 안 죽고 기다릴 테니까, 몸 건강히 잘 다녀와."
야혼을 빤히 쳐다보던 천애설이 광사옹의 뒤를  따라 광장 한가운데
로 들어갔다.
"아무 일도…."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던 야혼이 이죽거리는 순
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팔목을 그은 광사옹이 그가 서있던 주변 5곳에  피를 뿌리기 시작하
자 두 사람 주위로 커다란 원이 빠르게 생겨났다.
그리고, 원 안쪽으로 커다란 별 문양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파앗!
완전한 형태의 별 모양이 그려짐과 동시에 푸른 빛 무리가 폭발적으
로 솟구쳐 올라 두 사람의 모습을 완전하게 감쌌다.
"갔네?"
"아미타불! 정말 갔군요."
텅 빈 공간을 쳐다보던 일행은 누구랄 것도 없이 나직하니 중얼거렸
다. 계속 이어지는 신비한 경험에 더 이상 놀랄 겨를도 없다.
일이 일어나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야혼 너는 되게 섭섭한 모양이다. 이제 두 번째 만난거라면서."
야혼의 옆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고명지가 샐쭉  토라진 듯한 얼굴
로 말했다.
"내가 왜 섭섭해하냐, 여기 이렇게 고명지가 있는데."
"에라! 이 도둑놈아, 언니가 있을 땐 쳐다보지도 않더니…."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고명지를 허리를 확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원래 남자는 다 도둑놈이야, 아주 나쁜 새끼들. 아랫도리를 전부 잘
라버려야 한다니까. 내 것부터 잘라버릴까?"
"아미타불! 연작문주의 연장은 제가 자르도록 하겠습니다. 저기 있는
지옥도로 확 잘라버리던지 아니면 여기 어디 가위가 보이던데…. 곰 시
주 혹시 가위 못 봤나?"
"육승 네 혼자해라. 나는  평생동안 옥살이 하긴 싫다.  가위가 어디
있더라…."
"자꾸만 장난치면 정말 옥에 가둘지도 모른다. 동창 제일  첩형의 한
마디면…."
"명지 너 옷 기울 줄 알아?"
"옷? 그건 왜?"
"이거 안보이냐?"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명지 앞으로 걸레처럼 변한 옷을 가리켰다.
"옷이 떨어진 건 알겠는데, 왜 내가 해야하냐고. 신분으로 보나, 나이
로 보나 바느질은 네가 하는 게 더 어울리는데."
"그러니까 못하는 게 아니고, 못해준다 이거야 지금?"
"당연…, 으음! 바느질을 못해, 배울 시간도 없었고…. 정말 못한다니
까!"
얼굴이 잔뜩 붉어진 고명지가 추기영과 태웅의  눈치를 살피며 소리
를 질렀다.
'제발, 그러지 좀 마. 친구들이 보고 있잖아.'
애원하듯 전음으로 말했다.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야혼이 손만
들어 올리면 몸이 급격하게 반응을 보인다.
주변 여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달아오르는 몸  때문에 당혹스럽기 그
지없었다.
'이번에는 색색만화공 안 펼쳤는데?'
'정말? 나쁜 녀석….'
울 듯한 얼굴이 된 고명지가 재빨리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제는, 단순한 손짓만으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
웠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어쩌다 우리 연작문주의 그물에 걸려서는…. 불쌍한 첩형
시주. 참! 연작문주 언제쯤 떠날 예정이신가."
"날도 찬데 천천히 가지 뭐. 굳이 서두를  필요 없잖아. 가능하면 잠
사옹 녀석이 정파를 박살냈을 때 갔으면 더욱 좋겠는데…."
"첩형 시주는 바쁜 것 같던데…."
"그럼 빨리 가고. 어찌되었던  며칠은 더 머물다 가자.  모처럼 만에
휴식인데…. 먼저 가마."
두 사람을 남기고 지하 대전을 나온 야혼이  고명지를 찾기 위해 주
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참 동안 신전을 뒤진 끝에, 천애설의 방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는 그
녀를 발견했다.
"한참 찾았잖아, 그 뒤쪽으로 숨긴 건 뭐냐?"
"아, 아무것도 아냐?"
"또 말 안 듣는다. 빨리…."
"아- 알았어 그러니까 손 들어올리지 마."
재빨리 다가온 고명지가 뒤쪽에 숨긴 물건을 꺼냈다. 천애설의  방에
서 그녀가 챙겨들고 나온 건, 조그마한 바늘 쌈지였다.
"내 옷을 좀 만들려고…. 야혼의 장포도 벗어 줘야하고…."
"바느질 못한다며."
"바느질이 별건가? 하면 되는 거지."
"그래? 그럼 들어가자, 들어가서 옷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고명지를 이끌고 그녀가 머물렀던 방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고명지의 방에선 야혼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잘하는 게, 뭐냐 도대체. 어째 남자인  나보다 더 바느질을 못
하냐. 이리 줘 이 년아, 내가 발가락으로 해도 너보단 낫겠다."
"바느질 잘하네? 아예 그 길로 나서라. 일감은 걱정 말고."
"왜 동창 첩형 지위로 일감 물어오려고?"
"당연하지, 첩형이 일감 좀 달라는데 안줄 놈 있겠어? 입고  있던 옷
도 벗어야지. 야! 여기는 틀어졌잖아, 다시 해봐!"
모처럼 만의 휴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명지의  목소리가 꽤나 활기
찼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광사옹을 도와 마옥성 사자들을 없앴던 자신들의 행동은 히말라야산
의 잠사옹에게 낱낱이 보고되고 있다는 사실을.
"광사옹은 운이 좋군, 안 그런가 이철상."
숙적이라 할 수 있는 광사옹을 잡지 못했다는 보고를 접했음에도 불
구하고 잠사옹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묻어 나왔다.
"광사옹이 운이 좋은 게 아니고 당신이 운이 없는 거지."
"그런가? 아무려면 어떤가, 사실  광사옹이 죽으면 섭섭할  것 같아.
그래도 5백 년 지긴데…, 그마저 없으면  너무 심심할 것 아닌가. 그런
데 말이네, 좀 이상하지 않나?"
슬쩍 미소를 머금었던 잠사옹의 얼굴이 일순 경직된 듯 굳어지자 주
변에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잠사옹이 나지막
이 말했다.
"현 강호무림에서 모군상을  이길만한 자가 있을까?  아무래도 그게
궁금했단 말이네. 그래서 조사를 시켰더니…, 지옥도가 나타났더군."
"정말이오?"
"가만 가만, 함부로 나서지 말고 듣기만 해라 이철상."
"으음!"
"그럼 말이야, 그대의 지옥도법을 완벽하게 익혔다고  하여 이철상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게 문젠데. 내  생각은 아니란 말이야. 해서 내린
결론은 뭔고 하면, 모군상을 없앤  녀석은 적어도 겁천십웅의 무공  두
가지를 익혔다는 결론이 나오더군. 자네 생각도 그렇지 않나?"
침묵, 잠사옹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이철상의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
았다.
"또 대답을 않는군. 그럼 듣기만 하게. 그런데, 광사옹과 싸우는 와중
에 확실하게 밝혀졌네.  제마성검, 황금수, 풍뢰궁이  전부 나타났더군.
그 신물을 가진 녀석들이 광사옹을 도와주는 바람에 일이 틀어진 거라네.
재밌지 않나. 드디어 지옥도법을 익힌 자네 후예가  나왔단 말이네."
"당신 말대로 재미있게 되었구려. 지옥도법을 완전하게 익혔다면  당
신과도 해볼만 하겠고."
"그런가? …그래서 능력을 시험해 보려고 역천사황을 보냈다네."
잠사옹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어렸다.
역천사황(逆天邪皇) 소인걸(蘇仁桀),  겁천십웅의 일인으로  사(邪)의
대조종이라 불리는 자다.
"그 또한 역천사공(逆天邪功)을  대성했다더군. 이번엔  어떤 승부가
날지 나는 벌써부터 궁금하다네.  아니 역천사황이 졌으면  좋겠어. 내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거든."
잠사옹이 나지막하니 웃었다. 정사 기재라는 말이 어울리는 녀석들이
었다. 언령제세공을 쥐어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절반 이상
을 익혀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지옥도법을 4초까지 완벽하게 익혔다면  역천사황이라 할지라도 상
대가 아닐 거요. 그건 내가 장담하외다."
"오! 자부심이 대단하군. 나도 그 마지막 4초식을  알고 싶은데 가르
쳐 주지 않을 텐가?"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당신의 마지막 비밀을 알고 싶소. 그 비밀을
알도록 해주면 나도 마지막 비밀을 털어놓겠소."
한 몸을 사용하는 두 사람, 두 영혼이 존재하고 있지만 서로의  생각
을 완전하게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해서 마지막 비밀만큼은 서로가  간직한 채 이철상의 몸  속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뭐 몰라도 상관없네. 어차피 중원대륙은  피에 젖게 되어있네. 중원
무림들이 마교라 부르는  명교마저 등장했거든.  지금부터 시작이라네,
명교와 중원 무림은 서로 싸우게 될 터이고, 마옥성은 그들을  향해 복
수를 감행할 거네. 명교와 중원무림 양쪽에 의해 버림받은 그들이 말이
네. 그리고 자네와 나는 신이 될 터이고….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 말이
네."
잠사옹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렸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아니 이미 신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는  증
명하고 싶어할 뿐이다.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역천사황(逆天邪皇)
차가운 바람은 잊은 듯, 금침이  깔려 있는 방안에서는 벌거벗은 두
동체가 뒤엉켜 쾌락에 겨운 신음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자세히 살피면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우선 이곳은 일반 가정집이 아닌, 객잔의 별채라는데 있었고, 부부라
고 하기엔 나이차이가 너무 났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에 비해 위쪽의 남자는 50은 넘어 보였다.
여자를 사고 파는 객잔이기에 불륜이라고까지 할건 없지만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실내 한쪽 구석에 세워진 검이다. 용문양의 손잡
이가 달린 이 검을 강호에선 화룡검이라 부른다.
화룡검(火龍劒) 팽헌(彭憲).
그의 태생은 도의 조종이라 불리는 하북팽가였다. 그러나 팽헌은  도
보다는 검에 관심이 많았다.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산파에 투신하여, 하북팽가의 도법과 화산
파 검법을 합쳐 화룡이십수라는 검법을 탄생시키게 된다.
가문을 떠난 지 40년만에 화산파의 장로가 되었고, 고향인 팽가를 방
문하는 중이었다.
그가 아래쪽에 있는 소녀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산길을 가다 사람의 신음소리에 이끌려 찾아간 그곳엔 나이 어린 소
녀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엔 조그마한  약초 한 뿌리가 쥐어져  있었는데 그
게 문제였다.
춘약 재료의 한가지로 쓰이는 음양초(陰陽草)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녀를 안고 산을 내려와 의원을 찾았으나  이미 치료시기를 넘었다
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수없이 갈등하고 망설였다. 그렇다고 연고도 모르는 여인을 아무  남
자에게 맡길 수도 없어, 결국 객잔에 들고 말았다.
별채를 얻어 들어오자마자 시작이었다. 지금껏 몇 번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까무러칠 지경까지 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화로였다. 얼마나  많은 음양초를 먹었는지 끊임없이
요구를 해왔다.
기이하게도 그럴 때마다 몸이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
대견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네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구나, 이름이… 허-억!"
아래쪽에서 밀려드는 쾌감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뱉어내며 소녀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점점 더해 가는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은…."
"그래요, 저도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잘 가세요."
"무슨…."
가물거리던 정신을 붙잡고 있던 팽헌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차갑게
식어있는 듯한 소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우리 명교가 재림했어요. 훅-!"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침이 팽헌의 이마 깊숙이 박혀들었다.
암살.
100년 간 잠들어 있던 명교의 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화룡검 팽헌의 죽음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팽헌의 뒤를 이어 점창파 장로인 철장금도 옥천균, 아미파의  적련화
엄수진, 공동파의 정풍도장, 제갈세가의 만묘신수, 남궁세가의 천란무제
남궁창, 개왕 유일성 등 무수한 정파무림인들이 시신이  발견되기 시작
하였다.
연이은 강호 명숙들의 죽음에 강호 무림은 발칵 뒤집혔다.
몇 개월 전, 민산 마웅채와 분쟁에서 많은 무인들이 죽었지만 그때는
마도련 무인이라는 확실한 적이 있었다.
즉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복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암살은 달랐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객잔 또는 규방에서 독살을  당했기에 더욱 난감
했다.
그러한 현상은 천의맹이라 하여 다를 바 없었다.
천의맹 맹주전, 십여 명 남짓  앉아 있는 인물들의 얼굴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천의맹주 감연청을 비롯한 각 문파의 문주들이었다.
"철 방주 뭔가 나온 게 있습니까?"
상석의 감연청이 한 인물을 향해 물었다. 봉두난발의 이자는 항상 얼
굴이 붉어 있다하여 홍면개라 불리는 개방 방주 철조양이었다.
"깨끗합니다, 맹주."
간단한 대답. 철조양 또한 해줄 말이 없었다.
팽헌이 독살 당한 시점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조사를 해 왔지만 아직
어떤 단서도 잡지 못했다.
"마도련은 어떻습니까?"
"그쪽도 마찬가집니다. 마도대전에서 만독문과 만수문이 공멸하는 바
람에, 지금은 거의 봉문상태입니다. 천의맹을 노릴 여력이 없다는 거지
요. 다만 현 상황에서 가장 우려할 만한 곳은…."
"마교란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3년 전에 나타났다는 그들이 아니면 이런  짓을 할만한
세력은 강호에 없습니다."
"맹주 개파대전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루빨리 천
의맹 문을 열고 활동을 개시해야 할 줄로 압니다."
점창파 문주 사일검제(斜日劒帝) 유만량(儒滿梁)이  비분강개한 목소
리로 말했다.
독살 당한 무인들 중  한 명인 철장금도 옥천균은  그의 사형이었던
탓이었다.
"맞습니다. 그리고 천의맹에 파견하기로 하였던 제자들의 수도 더 늘
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각 문파 전력의 6할은 투입해야 합니다."
청성파 문주 태황검(太皇劒) 사일극(司一極)이 동의를 표하며 나섰다.
"우리 아미파도 사 문주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감 대협을 천의맹주로
뽑은 사람은 우리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서두르도록 합시다."
금정신니 우자령의 말에 대부분의 문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 요인들이 암살되는 상황에서 강한 힘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걸
모두가 인정하기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찬성하자 일의 진행은 빨랐다.
다가오는 신년에 개파대전을 개최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각 문파의
지원도 대폭 늘리기로 하였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우선은 천의맹의 모든 이목을 마교에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반가운  소식이 있습니다. 5대  세가에서 천의맹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동창과 금의위에서도  지원을 약속했습니
다."
"잘되었습니다. 오대세가와 황실에서 지원을 해준다면 지금껏 방관하
고 있던 소림도 나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공동파 장문인인 정풍도장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럼 서둘러 주십시오. 개파까지는 1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그럼…."
가볍게 고개를 숙인 감연청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음이  나
올 것 같아 자리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각 문파 요인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강호  무림의 구심점은 천의맹으
로 굳어졌다. 최하 5천의 병력을 지휘하는 맹주가 자신인 것이다.
어쩌면 황실에서 직위를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교여… 그대들이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감연청이 그제야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만족
스런 미소를.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무림 명숙들의 독살 사건은 한 여인의 머
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그녀 또한 지금의 상황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
실을 말이다.
*   *   *
사방에 횃불이 밝혀진 지하광장은 수백 인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침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전면 단상을 주시하는 그들의 시야엔 존경과 흠모의 빛이  역력했다.
여호치, 현 명교 성모인 그녀였다.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지하 공간에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가 울
려 퍼졌다.
"명교의 위대한 혼이여, 오늘… 우리는 성전(聖戰)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 부모를 형제를 헤친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백 년을 참았다. 백
년을 침묵하고 지냈다. 이제는 일어설 때다.  명교가 죽지 않았음을 보
여줄 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적에  의해 죽어간 교도들이 노래
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죽음은 그들을 만나기 위한  절차일
뿐이다."
점점 커지는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백색 광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성모의 무공이라는 무극대라미륵신공(無極大羅彌勒神功)을
운용한 그녀의 동체는 성스러운 기운이 흘러 넘쳤다.
하지만, 교도들을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5천 명, 신년을 기해 무림을 공격할 인원수였고 지하광장에 있는  이
들은 그들의 지휘자들이었다 .
그들 중 살아서 돌아올 교도들은 얼마나 될지, 또 앞으로 얼마나  많
은 교도들이 죽어갈지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여호치야, 너는 명교 성모다. 친구마저도 죽음으로 밀어 넣지 않았더
냐.'
내심 중얼거리며 무극대라미륵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휘리링!
그녀의 몸에서 백색 운무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오르고 그 속에서 나
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가라! 가서 그들을 징계하여 명교의 재림을 알려라!"
"존명!"
5백 교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제 1대는 나를 따르라! 목표는 화산이다!"
오른쪽 선두에서 뒤쪽을 향해 고함을  지른 인물, 불의 사제 수좌인
좌정인이었다.
"제 2대는 나를 따르라! 목표는 무당이다!"
"제 3대는 나를 따르라! 목표는 청성이다!"
"제 3대는…, 목표는 점창이다."
"……!"
"……!"
불의 사제 9명의 외침에 따라 지하 대전의  인물들이 속속 빠져나가
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총관, 내가 잘하는 짓일까? 성모라면서 명교도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짓이 말이야…."
"성모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택한 길입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
습니다."
뒤쪽에 있던 화소미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명교인들의 한(恨),  그
건 다른 누가 풀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본인 스스로, 자신들의 힘으로 복수를  하고자 하였고, 길을 떠
났다.
"성모님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뿐입니다."
"맞소이다, 성모. 어차피 겪어야할 일입니다."
"늦으셨습니다, 교주."
새롭게 나타난 인물을 향해 여호치가 고개를 숙였다. 놀라운  일이었
다. 성모인 여호치가 고개를 숙인 이자는 과거 개봉에 나타났던 주천상
이었다.
그가 어둠 속에 숨어있던 명교 교주였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서둘러 온다고  했는데…, 황실에 복잡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밖에서 교도들을 배웅했습니다."
주천상 또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성모와 교주, 두 사람의 지위는 주종관계가 아니었다. 지옥과 광명신
으로 대변되는 아수라는 두 사람의 지도자를 탄생하게 하였던 것이다.
정신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성모와 실질적으로 명교를 다스리는 교주
가 그 직책이었다.
"갔던 일은 잘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모. 황실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잘됐군요. 좀 쉬고 싶습니다. 그럼…."
주천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 여호치가 자리를 떴다. 그를 교주로 인정
하고 있고, 3년이란 짧은 시간에 명교가 자리를 잡았지만  여전히 신뢰
를 할 수 없었다.
그와의 만남 자체도 너무 작위적이었다.
성모궁을 떠나 3개월만에 만난 사람이 그였다. 놀랍게도 그는 무림세
력에 버금가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암중에 길렀다고 하지만, 마도련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100년 기다
렸다는 사실이 못내 걸렸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주천상은  숨기고 있는 듯하
였다.
"그가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주천상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그것은  중
요한 게 아니다. 그가 있음으로 하여 20년 이상을 준비해야할 거사가 3
년으로 앞당겨졌고, 명교인들의 한을 풀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것만 생각하기로 하였다.
"화 총관, 그는 지금 어디 있지?"
문득 누군가를 생각하는지 여호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지금 달탄으로 가는 중이랍니다."
화소미 또한 다르지 않았다. 슬쩍 붉어진 얼굴로 여호치의 눈치를 보
고 있다. 야혼에 대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녀석도 열심히 살고 있구나.  마도련도 네 녀석의 작품이겠
지?"
여호치의 얼굴이 아득하게 변했다. 강호 정세를 파악하던 중에  하오
문주 야혼이란 이름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불귀동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으로만 알았던 그였다. 냉소소나 당가
려가 같아 빠졌다는 말에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그랬던 녀석이 세상에 나와 무림을 향해 칼을 뽑았다.
"보고싶은 모양이네요?"
"나보다 화 총관이 더 보고싶은 얼굴이네."
"그럴리가요…."
하지만 부정하지 않는 듯 화소미는 배시시 웃었다. 솔직히 야혼이 보
고싶기는 했다. 내기를 빙자한  하룻밤의 관계였지만, 그  만큼 기억에
남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보고싶어, 그때가 그립고…."
"걱정 마세요 궁주님.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글쎄…. 그거야 내일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지, 화 총관이나
나처럼 내일이 없는 사람들은…. 그래도 꿈을 꿀 수는 있겠지?"
이내 표정을 바꾼 여호치가 활짝 웃었다.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살아 있으니 되었다 싶었다.
인연이 닿는다면 살아 생전에 만날 수 있을 터이고, 아니라면 노래의
집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어찌되었던 다시 본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살아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야혼은 한번 노린 먹이감을 절대 포기
하지 않거든요. 더구나 궁주님은 야혼의 책자 가장 앞에 적힐 여인일걸
요.'
여호치의 얼굴을 쳐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야혼을 향한 여호치의 감정을 알게 된 건 삼 년 전이었다.  좌정인으
로부터 야혼이 불귀동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나서 그녀는 며칠동안 알
아 누웠다.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명교 재건이란 사명 때문에 여호치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녀
는 야혼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여인의 고개가 서쪽 하늘로 향했다. 그곳에 야혼이 있을 지도  모
른다는 생각에.
한바탕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초원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말라비틀
어진 초목들의 사삭거리는 소리가 광활한  대지와 맞물려 황량함을 더
해준다.
끝간데 없이 이어진 대지에 문득 4개의 점이 나타났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그것들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인간 형상으로 변했다.
사막을 떠나 달탄으로 길을 잡은 야혼 일행이었다.
"저곳은 괜찮을까?"
멀리 달탄 인들의 가옥인 게르를 발견한 야혼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
했다. 저번 마을을 떠난 지 이틀만에 발견한  마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지금껏 대여섯 곳 마을을 지나치면서 보았던 광경 때문이었다.
"마찬가진 것 같은데? 생의 기운이 없어."
야혼 곁에 있는 고명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마을에 비해 상당히
큰 곳이었지만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죽어 있었다. 저녁나절임에도 불구하고 연기가 피어오르
는 곳이 없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다는 의미인 게다.
"아미타불! 이곳 역시 습격이 있었군요."
주변을 휘 둘러본 추기영이 낮게 혀를 찼다. 마을 입구부터 시작하여
안쪽으로 시체들이 줄을 이었다.
심장이 뜯겨나간 시체의 특징은 이곳까지 오면서  겪었던 몇몇 마을
과 같았다.
"고명지 어떻게 된 거냐?"
시체를 살피고 있는 고명지 곁으로 다가온 야혼이 물었다.
"내가 그랬냐? 왜 나한테 물어, 정 알고 싶으면 쫓아가면 될 일을 가
지고."
"지금 쫓아가면 잡을 수 있단 말이야?"
"지나간지 얼마 안됐어, 아직 피가 굳지 않았잖아."
아직 피가 흘러내리는 시체를 가리키며 고명지가 말했다. 그녀의  말
대로 가장 바깥쪽의 시체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됐을까?"
"글쎄? 보통 시체가 굳어지려면 1시진 정도  걸리거든? 대부분의 시
체는 상체부터 굳어지게 되어있어. 이 시체도 마찬가지야, 상체는 굳었
지만 하체는 아직 움직이고 있잖아."
"그럼 마을 사람들을 해친 놈들은  이곳을 지나간지 1시진이 안됐다
는 소리네? 그런 것도 동창에서 가르쳐 주냐?"
"책에서 봤어?"
"책? 나는 왜 한번도 못 봤지?"
"책 같은 책을 봐야지. 네가 보는  게 책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냐?
순…."
"순 뭐? 그 책이 어때서. 솔직한 말로 그 책을 가장 많이 보는  족속
들이 누구겠냐? 글도 모르고 돈도 없는 양민들이  그런 책을 볼 것 같
아? 많이 배우고 가진 것 많은 놈들  때문에 만들어진 책이 춘서란 말
이다. 이 나라 지식인들이 몰래 보는 책."
"알았어 임마. 어떻게 할거야."
"뭘 어떡해, 쫓아가서 없애야지."
"웬 일이냐?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하고."
"밥이 없잖아!"
"밥?"
밥이라는 야혼의 말에 뜨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새끼들이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바람에 밥을 얻어먹질 못하잖아.
초원 사람들은 인심이 후하다고 하던데. 가자!"
고명지의 허리를 덥석  끌어당겨 품안으로 끌어들인  야혼이 힘차게
지면을 찼다.
"야-!"
"둘이 붙어 가면 더 따뜻하잖아. 그리고 우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라는 건 저 놈들도 다 알아. 공연히 힘 빼지 말고 떨어지지 않게 꽉 잡
아! "
고명지 엉덩이를 불끈 틀어쥐며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래도…."
말끝을 흐리던 고명지가 이내 야혼의 품속에 고개를 묻었다.  반항하
면 더욱 짓궂게 나온다는 건 몇몇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에 취한 행
동이었다.
"니미럴타불! 다음 마을엔 또 언제 도착하려나.  뱃가죽이 등에 달라
붙었구먼."
멀어지는 야혼을 쳐다보던 추기영이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야혼의 말
대로 가장 급한 게 배고픔이었다.
마도련을 떠난 지 20여 일이 지났고, 요화문에서 준비해 주었던 음식
은 진작 바닥이 났다. 초원 마을에서 해결하고자 하였었는데 연이은 떼
죽음 때문에 벌써 3일째 굶고 있다.
"어떤 새끼들인지 몰라도 잡히면 그것들부터 구워버린다!"
태웅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전면을 노려보며 적의를 불태웠다. 허기로
인하여 가장 힘든 사람이 있다면 단연 그였다.
일행 중 덩치가 가장 먹는 양도 많았지만, 요즘 들어선 무공을  익히
느라 다른 일행에 비해 운동량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시체들을 묻어주고 간단하게나마 장례까지 치렀으니.
"빨리 가자!"
야혼의 신형이 어둠 속에 잠겨버리자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은 재빨리
몸을 날렸다. 무덤을 만드는 작업을 뒤로하고 놈들을 먼저 잡는  게 낫
겠다 싶었다.
북쪽으로 줄기차게 몸을 날린 야혼 일행이 새로운 마을을 발견한 건
다음날 저녁 무렵이었다.
크아앙!
"으아악! 살려줘!"
처절한 비명소리가 가득한 마을은  아비규환 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사방에 찢긴 시체와,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흥건했다.
"낭인(狼人)들이었구먼…."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쳐다보던  야혼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기
저기 있는 낭인들의 수를 헤아려보니 대충 50 마리 정도 되는 듯했다.
"아미타불! 신성한 네 봉우리에 산다는  놈들이 사냥 나온 모양일세
그랴."
신성한 네 봉우리는 달탄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쿠룬 동서남북으로
감싸고 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광사옹은 네 봉우리 중 북쪽의 테스트시검에  제 11마옥성이 있다고
하였다.
"밥이라도 한끼 얻어먹으려면 저 놈들을 전부 없애야 하겠구먼."
마을을 주시하던 태웅이 만병여의주를 꺼내들고 안쪽으로 몸을 날렸
다. 일순 만병여의주에 붉은 광채가 어린다  싶더니, 어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어가던 낭인의 어깨를 사정없이 잘라냈다.
"크아악!"
인간의 비명소리와 늑대의 포효가 반반 섞인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
짐과 동시에, 수인의 팔을 잘라낸 만병여의주가 수인의 목을 향해 날았
다.
이성이 없는 듯 보였던 수인들도 동료의  비명소리는 인식하는지 일
제히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미타불! 맛도 없는 피를 그렇게 맛있게  드시다니, 재주가 좋습니
다 그려."
데-엥!
내공을 실은 무음항마혈탁의 울음이 낭인들의 심령을 자극했는지, 수
십 쌍의 눈동자에서 붉은 혈기와 함께 전율적인 살기가 쏟아졌다.
낭인으로 변이하면서 발달한 동물적인 육감이 상대의 강함을 알아보
게 하였던 탓이었다.
크아앙! 캬우!
두려움은 곧 공격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십여 마
리의 낭인들이 거친 포효소리와 함께 일행을 덮쳐왔다.
"고명지 너는 내 뒤쪽에 붙어 있어!"
낮게 소리친 야혼이  비천묵령도를 뽑아들며 수인들  전면으로 몸을
날렸다.
쉬익!
허공을 가르며 다가오는 길다란 은빛 손톱을  피하며 수인의 가슴팍
으로 파고든 야혼의 비천묵령도가 검은 광채를 사방으로 뿌렸다.
구약종의 공공십팔수였다.
"크아악!"
툭! 툭!
커다란 포효소리와 함께 낭인의  양팔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야혼의
신형은 그곳을 떠났다. 그와 동시에 수인의 심장으로  고명지의 제마성
검이 파고들었다.
"여기!"
어느새 반장 거리를 옮긴 야혼이 다른 수인의  두 팔을 잘라내며 고
함을 내질렀다.
"타핫!"
짤막한 고함소리와 함께 고명지의 동체가 흐릿한  잔상을 남긴 순간
두 팔을 잃고 허우적거리던 수인의 몸이 가루로 흩어졌다.
"잘했…, 위험!"
의외로 호흡을 잘 맞추는 고명지의 행동에 싱긋 미소를 머금던 야혼
이 그녀의 몸을 거칠게 밀쳤다.
오른 편에서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수인을 발견했던 탓이었다.
찌이익!
은빛 섬광을 발하는 손톱이 고명지 어깻죽지의 옷을 한 움큼 뜯어가
고 비천묵령도가 수인의 팔꿈치로 떨어졌다.
"이런 개자식이 내 재산목록 1호를…."
몸을 날리며 수인의 팔을 잘라낸 야혼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
르고 비천묵령도가 검은 광채를 뿌렸다.
툭!
스스스!
"지금부터 무조건 찔러 넣어!"
낮게 소리친 야혼의 신형이 일순 정지하듯 허공에 멈춰 서더니, 그의
몸에서 백색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왔다.
뒤이어 수십 줄기의 검은  광채가 10여 마리의 수인들  전면을 향해
부챗살처럼 퍼져나갔다.
"크아악! 커어억!"
지옥도법 1초인 지옥수라멸이었지만 그 위력은 과거와 달랐다.  수인
열 마리가 동시에 지면으로 풀썩 풀썩 쓰러지며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
다. 강기를 분리하여 보낸다는 탄(彈)의 경지로 시전한 지옥수라멸이었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사신체라 하였던 수인들은 팔 다리가 떨어지고, 몸  이곳저
곳에 구멍이 뚫렸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온몸 곳곳에서 붉은 거품이 일며 새살이 돋는 광경은 섬뜩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개자식들…."
진득한 욕설을 뱉어낸 고명지가 쓰러진 수인들  사이를 누비며 제마
성검을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으라찻차!"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몽둥이 형태의 길다란  병기가 호선을 그
렸다. 수인을 으스러뜨리듯 잘라내는 길다란 그것은 단단한  놈이라 하
였던 만병여의주였다.
만병여의주 또한 신병임에 틀림없었다.
철혈무적검법을 완전하게 익히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금강불괴에
이르렀다는 수인들의 목을 뎅겅 뎅겅 잘라냈다.
대력패왕지체의 신체답게 태웅의 공격은 저돌적이었다.
방어동작은 일절 없었다. 수인의 손톱이 다가오면 피할 수 있는 것들
은 피하고, 그렇지 않으면 몸으로 막으며 목을 잘라낸다.
"아미타불!"
뎅-!
"크악!"
퍼-억!
추기영의 공격방식은 단순했다. 노리는 수인을 향해 음공을 시전하고
놈이 잠시 비틀거리는  순간을 이용하여 무음항마혈탁으로  놈의 턱을
날려버리고 있다.
이계 성물이라 하였던 황금수의 위력이 다사  한번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무음항마혈탁에 턱을 강타 당한 수인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가
루로 흩어져 내렸다.
"이크! 이런 빌어먹을  짐승이. 이  부처님을 공격하면 어쩌란  말인
가?"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주저앉듯 몸을 낮추며  위쪽으로 철탁을 휘
둘렀다.
퍼억!
잿빛 털로 뒤덮인 팔 하나가 가루로 흩어지고, 뒤이어 황금빛 철탁이
수인의 머리를 향해 날았다.
불사신체를 지녔고, 수인으로 변이하여 평소보다 몇 배 이상의  힘을
얻었다지만 네 명 고수들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50여 명에 달하는 수인들이 전부 제거되는 시간은  채 2각이 걸리지
않았다.
"니미럴타불! 배고프니까 움직이는 것도 싫구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추기영이 낮게 투덜거렸다.
"나도!"
태웅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마을 안쪽으로는 들어갈 생각도 않고,  추
기영 곁으로 자리를 깔았다.
"밥 달란 말도 못하겠네."
고명지와 같이 다가온 야혼이 마을 안쪽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말
했다. 안쪽은 정신이 없었다. 수인들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
전히 넋이 빠진 상태였다.
네 명의 이방인에 의해 수인들이 전부  처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움
직이지 못했다. 그저 망연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뭣들 하느냐? 시체를 치우고 마을을 정리해야지."
"무슨 말이래?"
안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소리에 야혼이 태웅을 쳐다보며 물었다.
"음-! 마을을 정리하자는 소리다."
슬쩍 인상을 찌푸린 태웅이 고명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맞다, 많이 늘었네?"
고명지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마도련을 떠나 이곳으로 오면서  태
웅에게 달탄 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또한 야혼의 지시였다. 달탄의 지배자인 바센을 만나 협상을 해야
한다고 하자, 대뜸 태웅에게 달탄 말을 배우라고 하였다.
처음엔 난색을 표하던 태웅도 이어지는 야혼의 다음 말에 헤벌쭉 웃
으며 순순히 승낙했다.
추기영과 태웅이 그렇게도 배우기를  원했던, 얼굴을 절세 미남으로
바꿀 수 있는 여면환공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참! 미남 되는 법은…."
"그거야 대부분 익혔지."
태웅이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야혼의 말이 아니더라도 태웅이  가장
집중하여 매달리는 무공은 여면환공이었다.
"잘했다. 쿠룬 하는 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완성해야  하니
까 열심히 해라."
"근데 궁금해 죽겠어. 우리 연장 문주가 무슨 바람이 불어 내 얼굴을
바꿔주려는지 말이야."
야혼과 고명지 두 사람 모두 꿍꿍이가 있음에 분명한데 도무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여면환공만은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하였던 야혼이 아니던가.
그랬던 녀석이 도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전부  익혀야 한다고 하다
니.
"물건도 부실한데 얼굴이나 미남으로 만들어 주려고 그러지 뭐, 아이
고 이제야 온다."
흰 이를 드러내고 웃던 야혼이 전면을 가리켰다.
마을 안에서 이쪽을 향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구시라고 하외다."
50대의 건장한 체격의 인물이 일행을 행해 고개를 숙였다.
"구시 대협이라면…, 혹시 호쇼트 부족장이십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고명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수많은 작은 부
족들로 이루어진 곳이 달탄이지만  그들 중 가장 강한  곳을 꼽으라면
네 부족으로 압축된다.
칸을 배출한 초로스 족을  필두로 호쇼트, 트르구트,  호이트 부족이
오이라트를 다스리고 있다고 봐야했다.
그중 호쇼트 부족은 초로스 족 다음으로 강한 부족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자가 호쇼트족의 부족장이라니.
문득 일이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날 아시오?"
오히려 놀란 사람은 구시였다. 분명 앞에 있는 네 명은 중원사람들이
다. 그런데 그들이 달탄 사람인 자신을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유명하신 분인데 알지요, 그런데 천산에 계셔야 할 분이 이곳엔…."
"쿠룬에 가는 길이외다."
'응?'
구시의 얼굴을 살피듯 쳐다보던 고명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못마
땅한 표정을 짓는 구시의 얼굴 때문이었다.
"칸의 소집 명령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이내 표정을 바꾸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동창 밀정들에게서  들어온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이라트는 초로스족의 바센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었지만 부족간의
갈등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천산에 둥지를 틀고 있는 호쇼트족은 바센칸에 대해 상당한 불
만을 가진 걸로 알려져 있다.
"정체가 뭔가?"
"정체는 무슨 지나가다가 도와줬을 뿐이지. 그리고, 부족장씩이나 되
는 사람이 한 겨울에 긴 여행을 할만한 사정이 뭐겠소. 더 높은 사람이
불렀을 때밖에 더 있겠소. 그나저나 도와줬으면 대가를  지불할 생각을
해야지 뭘 그렇게 묻고 그러요."
슬쩍 굳어진 얼굴로 묻는 구시를 향해 야혼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가?"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구시가 얼굴을 풀며 미소
를 지었다. 청년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탓이었다.
"대가를 바란다고 했는가, 원하는 게 뭔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면
해보겠네."
"밥 좀 주쇼!"
"밥? 지금 밥을 달라고 했는가?"
뜨악한 얼굴이 된 구시가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물었다. 대가  운운
하기에 돈을 요구할 줄 짐작했었다. 그런데 밥이라니.
초원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여인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밥이라서 말입니다. 저 모양으로 있는데 밥 달
란 말을 하기도 뭐하고…, 참! 나는 야혼이라 하오."
"아-알았네, 일단 들어가세."
더듬거리던 구시가 마을로 길을 잡았다. 하지만, 밥을 달라하였던 야
혼이나 그 일행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 마을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니미럴타불! 양고기 좀 먹나 했더니…."
추기영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멀리 달빛을 가르며  다
가오는 사람들, 5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엄청났
다. 특히 선두에 있는 자는  달빛마저도 튕겨버릴 듯한 극강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초모랑마봉을 떠나온 역천사황 일행이었다.
"지옥도법을 익혔다고 들었다."
일행 20장 앞으로 날아 내린 인물이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에게 들었나?"
지옥도법이란 말에 깜짝 놀란 야혼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개봉을
떠난 이후 타인들 앞에서 지옥도법을 펼친 건 두 번이었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해봐야, 도마와 냉소소, 그리고 요화문 몇몇이
전부가 아니던가.
결코 외부인이 알만한 사실이 아니었다.
"건방지구나,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이철상이 후예를 잘못 뒀구나."
"이런, 씨팔! 내단 없는 영물이  또 나타났구먼. 당신은 뭐라 불러야
하오?"
"남들은 나를 소인걸이라 하였다."
"역천사황-!"
소인걸이란 괴인의 말에 고명지가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두  번째로
만나는 겁천십웅, 소인걸 역시 모군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아득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독문무공인 역천사공을 대성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고명지와는 달리 야혼 일행의 얼굴은 태연했다.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소인걸의 전신을 살피듯 훑고 있다.
"아미타불! 연작문주, 대롱을 준비해야할까?"
"당연히 준비해야지, 전부 다섯 마리나 되는데, 약  담을 통은 큰 걸
로 준비해라."
"이런 죽일 놈들…."
소인걸 뒤쪽에 있던 한 인물이 나직한 욕설을 뱉어내며 전면으로 나
섰다.
"누구냐?"
검을 찬 인물을 쳐다보며 야혼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으로 보건대 그 또한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색이 바래긴 했지만 입은 옷은 도복이다. 살아 남은 성모척살
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한때는 왕위라 불렸다."
"자하선옹?"
고명지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자하선옹 왕위, 당시 성모척살
대로 떠났던 일행 중 10위 권 안에 드는 초강자였다.  그마저도 잠사옹
의 수족이 되어있을 줄은 결코 생각지 못했다.
"그럼 저 사람은…. 정수도장?"
왕위를 따라 말없이 앞으로 나선 인물을  쳐다보며 앓듯이 중얼거렸
다. 자하선옹과 정수도장의 무공이  성모척살대 상위권에 들었다  해서
놀란 게 아니었다. 화산파와 무당파였기에 기절할 듯 놀란 것이다.
"우릴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군…."
정수도장의 입에서 묵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나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무당파나 화산파에서도 전부 기억하고 있
습니다. 문파의 명예를 빛낸 선조로 말입니다."
"명예라…. 정수도장의 명예는 영원히 지켜지겠지. 이곳에 있는 나는
더 이상 정수도장이 아니니까."
"그럼 너도 트롤이냐?"
한발 앞으로 나선 야혼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 태웅과
추기영을 향해 장난말을 던지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질식할 듯한 살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많은 것을 알고 있군, 지옥도법으로 우릴 이길 자신이 있느냐?"
"킬! 니들 문파에서 받들어준다니까  스스로는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좆도 아냐 임마.  십만대산에서 너희들이 한 일
이 뭐냐? 기껏 양민들이나 때려죽인 일밖에 더 있냐. 수만 명의 양민을
때려죽이고 얻은 명예가 성모척살대란 말이다. 걱정 마라, 너희들 명예
를 내가 개떡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도록 말
이야. 어디 실력발휘 한번 해봐라!  그 늙은 놈의 하수인이  되어 얻은
실력 발휘를 해보란 말이다!"
전율적인 살기를 뿌리던 야혼이 정수도장 전면으로 쇄도해 들어가며
오른 손을 힘차게 휘둘렀다.
끼이익!
일순 기이한 소성과 함께 붉은 광채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헉!"
느닷없는 기습공격에 화들짝 놀란 정수도장 일행이 헛바람을 들이키
며 재빨리 뒤쪽으로 몸을 뽑았다.
가공할 움직임이었다. 가볍게 지면을 찼을 뿐인데 다섯 사람의  신형
은 5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겁천십웅과 성모척살대라는 이름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는 반증이었
다.
"병신 육갑하고 자빠졌네."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오른  손을 슬쩍 거둬들였다. 사사만화류를
이용한 허초였다.
"죽일 놈!"
속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소인걸 일행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짤막하게 소리친 정수도장이 검을 뽑아들며 야혼의 전면으로 득달같
이 달려들었다.
100년 전, 그가 익혔던  무공은 무당 일절(一絶)의  한가지로 꼽히는
대라검법이었다.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하는지 그의 검에서는  푸른 기운이
맺혀들기 시작하였다. 대라검법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청라강기(靑羅 
氣)였다.
"나를 욕하려거든 이긴 다음에 하거라. 나를 눕힌 다음에 말이다. 타
핫!"
정수도장의 검에서 청라강기가 벼락치듯 튀어나오고 야혼의 목을 향
해 직선으로 뻗어왔다.
"그까짓 강기로는 지나가던 개도 잡지 못해 임마."
검게 변한 야혼의 신형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허허환환보법과
무풍무영술이 동시에 발휘된 야혼의 움직임은 가공했다.
정수도장 전면을 포위하듯 무수한 신형이 생겨났다.
"놀랍군! 지옥도법에 태을건곤심법을  익혔단 말이더냐?  복이 많구
나."
헛되이 허공을 가르는 검을 회수하며 중얼거렸다. 조금 변형된 듯 보
였지만 청년이 운용하는 무공은  태을건곤심법상의 허허환환보법이 분
명했다.
겁천십웅 중 최강자라 알려진 이철상의 무공과  구약종의 무공을 동
시에 익히다니,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그게 다라고 생각하면 너는 바보다."
사방으로 움직이던 수많은 환상들이 일제히 오른 쪽 다리를 번쩍 들
어올렸다. 천비동 앞에서도 한번 선보인바 있던 무변무적퇴였다.
20여 개의 다리가 동시에 들어올려지고 야혼의  정수도장 주변이 검
은 광채로 들어찼다.
"타핫!"
짤막한 고함을 지른  정수도장의 수중의 검을  맹렬하게 회전시키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야혼의 완전한 실체를 찾아내지 못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뒤로 피한 그의 행동이 동료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
로 나타날 줄은 결코 생각지 못했다.
정수도장의 신형이 뒤로 빠지는 순간 20여 개의 환영 속에서 하나의
신형이 왼쪽을 향해 빛살처럼 날았다.
번쩍!
일순 초승달 모양의 검은 광채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두 사람의 대결
을 지켜보던 한 명의 목이 힘없이 떨어졌다.
"헉!"
목이 잘린 동료 곁에 서 있던 자가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자세를 취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야혼의 발은 더 빨랐다.
돌려 차는 야혼의 발바닥에서 검은 광채가 쭉 솟구쳐 나오더니 잔뜩
긴장하고 있던 자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크아악!"
허리를 잘라냈지만 야혼의 신형은 쉬지 않았다. 처절한 비명을  지르
는 상대를 쳐다보며 비천묵령도를 빠르게 휘둘렀다.
이번엔 비명도 없었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던 머리가 가루로  흩어
짐과 동시에 지면으로 쓰러지던 동체들도 풀썩 흩어졌다.
"기절하겠군!"
소인걸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선이 따르지 못할 정도의  엄청
난 빠르기였다. 자신이 알기론 무공만으로는 그런 빠르기가  나올 수가
없었다.
100년 동안 무공에 정진하였고, 잠사옹에  의해 마법까지 전수 받은
두 사람이 아닌가. 그런 그들이 상대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하고
말았다.
설사 자신이라 하여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재미있군…."
놀라긴 야혼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움직여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임
하기는 하였지만 실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원래 능력보다 두 배 이상 빨라진 것이었다.
하지만, 야혼이 아무리 놀랐다 한들 상대했던 정수도장만 할까.
해쓱해진 그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환영  속에서 실체를 찾아내지도 못했을
뿐더러 두 명의 동료를 해친 그의 움직임도 놓쳤다.
100년 간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겁천십웅 본인들을 제외하면 상대가 없을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눈
앞의 젊은이에게 두 명의 한꺼번에 당하다니.
비록 그가 겁천십웅의 무공을  두 가지나 익혔다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했잖아 임마! 너희들은 좆도 아니라고. 빨리 덤벼 새끼야."
낮게 소리친 야혼이 지면 깊숙이 흔적을  남겼다. 또 한번의 움직임,
잔상을 남길 정도로 엄청나게 빨라진 그의 신형은 어느새 자하선옹 앞
에 도달하여 비천묵령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자하선옹은 같은 방법에 당할 바보가 아니었다.
재빨리 오른 쪽으로 움직이며 검을 들어 올렸다.
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푸른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빌어먹을…!"
낮게 욕설을 뱉어낸 정수도장이 전 내공을 끌어올리며 몸을 날렸다.
"그걸 노렸어 임마! 이번엔 진짜야."
1장 길이의 검강이 솟구친 정수도장의 검을 발견한  야혼이 싱긋 미
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자하선옹의 단전을 향해 왼손을 쭉 밀어내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크아악!"
"아악!"
단전과 옆구리를 관통 당한 자하선옹과 정수도장  입에서 처절한 비
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명지! 너 차례다."
"타핫!"
야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마성검을 뽑아든  고명지가 두 사
람을 향해 몸을 날렸다.
호위가 되 드리겠소.
"내가 지금 사실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소인걸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겁천십웅의 무공 두 가지를  익혔다
는 사실을 알고 왔지만 설마하니  성모척살대 넷을 한꺼번에 없애버릴
줄은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라니. 잠사옹의 마법적인 움
직임을 보는 듯하였다.
"당연히 못 믿겠지, 나도 믿을 수 없는데. 짐승 같은 놈들을 보면 절
로 힘이 나는가봐. 죽기 전에 한가지만 말해주면 안될까?"
"놈!"
소인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위로 치솟았다. 처음이었다. 겁천십웅의
1인이란 꼬리표를 단지 3백 년, 잠사옹을 제외하곤 누구도 자신들의 죽
음을 언급하지 못했다.
오직 전설로만 남아있는 겁천십웅 아닌가.
그런데 앞에 있는 녀석이 죽기 전이란 말을 썼다. 마치 자신의  죽음
은 예견되어 있다는 듯.
하지만 이내 표정을 푼 소인걸이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그래, 죽기 전 알고 싶은 게 뭐냐?
"죽기 전?"
"아미타불! 연작문주 뭘  고민하고 그러십니까. 오입도  못하는 늙은
영물인데 빨리 없애고 가세. 배고파 죽겠구먼.  구시 시주 뭐하고 있습
니까? 들어가서 양고기라도 좀 가져오지 않고."
"밥? 아- 알겠네."
황망한 눈으로 쳐다보던 구시가 서둘러 마을 안쪽으로 내달렸다.  정
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중원 무림에 내려오는 겁천십웅의 전설은 자신도 알고 있다. 3백  년
전에 살았던 자들이고,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자들이 아닌가.
그랬던 자중의 한 명이 살아 있고, 눈앞에 있다니.
"연작문주 밥 먹고 싶으면 빨리 끝내도록 하시게."
야혼을 향해 싱긋 미소를  머금은 추기영과 태웅이 이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들었지? 지금 무척 배가 고프거든? 그러니까 빨리 하자고. 참! 묻고
싶은 건 말이야, 잠사옹 그 개자식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거야. 히말라야
산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데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말이야. 죽기 전에 꼭 말해줘야 한다."
빙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비천묵령도를 가슴  앞으로 세우며 자세
를 취했다.
"헐-! 배포만큼은 인정하마. 하지만… 주제를 알아야 오래 살아 남는
다. 무림에서는 말이다."
너털웃음을 터뜨린 역천사황이 양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겁천십웅의
1인에 들게 하였고, 역천사황이란 별호를 얻게 만들었던 역천사공을 끌
어올리자 그의 몸 주변으로 검붉은 운무가 들어차기 시작하였다.
1장, 2장,…, 10장, 20장.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운무는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갔고, 마침내 두
사람의 주위를 완전하게 감쌌다.
"호! 이건 묵천대마공과 비슷하잖아!"
주변을 꽉 채운 운무를 쳐다보던 야혼이 내심 중얼거렸다.  마도련에
서 냉운소가 펼친 묵천대마공의 현상과 아주 흡사했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냉운소와는  달리 역천사황은 존재자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텅빈 공간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전면을 응시하던 야혼이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갑자기 주변 전경이 변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수십 개의 건물이 나타나고, 하나  둘 인간의 형상이 생겨나고 있었
다. 꽤나 눈에 익은 모습. 아니 꿈에도 잊지 못할 곳이다.
마옥성(魔獄城), 제 13연옥이라 불렸고, 자신의 손으로 파괴시켰던 그
곳이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하하하! 아월…."
남매 인 듯, 무성한 초목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호수에서 두 남녀가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연신 서로에게 물을 끼얹고 장난치는 모습은 주변 모습과 함께 더욱
평화롭게 보였다.
"누나…!"
앓는 듯 비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이,  흡혈을 하기 전 누이와
같이 멱을 감던 장면이었다.
아득한 기억저편에 숨어, 꿈에서조차 나타나지 않는 광경이 잡힐  듯
가까이 와 있었다.
부르르 떨고 있는 야혼의 시야에 또 다른 장면이 잡혔다.
두 모녀를 향해 날카로운 검을 들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제발 살려줘, 너는 내 동생이잖아…."
"아월 제발…, 제발 살려다오. 같이 죽자 했던  건 그냥 해본 말이었
다. 이 어미가 잘못했으니 제발 살려다오!"
"아냐! 같이 죽기로 했잖아! 같이 죽기로 했으면서 왜  그런 소릴 하
는 거야? 셋이 함께 노래의 집으로 가기로 했잖아."
야혼의 입에서 느닷없는 고함소리 터져 나왔다. 저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 세 사람은 같이 검을 쥐고 있었다.
가장 안쪽을 자신이 잡았고, 그 다음은  누이가, 그리고 마지막엔 어
머니가 잡았다.
그리고 세 사람이 동시에 힘을 주었다.
"너 혼자만 살아 남으려고 그런 거잖아. 우릴 죽이고 너 혼자만 살아
남으려고."
"너 혼자만!"
"너 혼자만!"
"부모를 죽이고 친구를 죽이고  이웃을 죽인 패륜아!  너는 어쩔 수
없는 짐승에 불과해, 인간이 아닌 짐승 말이야."
"아냐! 아냐! 나도 죽으려 했어.  나도 죽고 싶었단 말이야! 잠을  잘
때마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길 빌고 또 빌었어. 잠을 잘 때마다…."
스르르 무릎을 꿇고 말았다.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져 뒤죽박죽이었다.
마치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어미를 죽이고 누이를 죽이고 마옥성 사
람들을 죽인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살아 있잖아. 지금까지 너만 살아 있잖아."
"복수를 하고 싶어, 우리를  그렇게 만든 놈들을 전부  없애고 싶어.
이젠 그럴 힘이 생겼어, 그러니…."
"그런다고 우리가 살아날 것 같아? 우린 이미 죽었어. 네가  무슨 짓
을 해도 우린 살아나지 못해. 차라리 모든 걸 잊고 그냥 와. 굳이 네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죽게  되어있어. 서로 싸우다  죽게 되어있단  말이
야."
"어머니…!"
"그래, 우린 네가 보고싶어. 아월이 너를 보고싶다. 그걸로 끝내는 거
야.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혼자 하기 힘들면 이 어미가 도와주마, 네
누이랑 내가 도와주마."
홀린 듯, 천마묵장을 풀어 내린 야혼의 손위로 두 쌍의 손이  겹쳐졌
다.
역천사공(逆天邪功).
소인걸은 겁천십웅의 1인으로 만들었던 역천사공은 물리적인 방법으
로 공격하는 무공은 아니었다.
인간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숨기고 싶어하는 과거를 현실 속에 풀어
놓는, 스스로를 파괴시키게 하는 정신무공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여자에 집착하며 현실을 잊고자 하였던  야혼의 내면에는 어
머니와 누이, 그리고 마옥성 인물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
었다.
얼마 전 강시로 변했던 그들을 없앤 다음이라 역천사공이 주는 충격
은 더욱 컸다.
"그럼 복수는…, 울컥!"
"어리석은 놈! 그  정도 정신 상태로  잠사옹을 잡겠다고 하였더냐?
이 역천사황도 넘지 못한 놈이…."
야혼의 뒤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2성 전력으로 역천
사공을 펼치고 있는 소인걸이었다.
"3백 년 전보다 2배 이상 강해진 나다. 잠사옹만  아니라면 겁천십웅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단 말이다."
잠사옹에게서 받은 환영마법이란 마법 때문이었다. 역천사공에  환영
마법이 더해지자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원래 역천사공은 환영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실물처럼 생생하지 못
했다. 그런 단점을 마법이 보완해 주었다.
눈앞의 환영을 만지면 실제처럼,  촉감을 주는 마법이 환영마법이었
다.
지금 녀석의 상태가 그랬다.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편하게 보내주마, 과거 속에서 죽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야."
역천사공의 위력에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은 소인걸이  오른 손을 천
천히 치켜들었다.
허공으로 올라가는 그의 손에 한  꺼풀 검붉은 막이 생겨나고, 잠시
후 스스로에게 천마묵장을 찔러 가는 야혼의 목을 향해 무자비하게 떨
어졌다.
그러나, 강기가 가득 실린 손을 내리치던 소인걸이 보지 못한 사항이
있었다.
야혼의 등에 은은한 백광이 어리고 있다는 사실을.
푸욱!
"크윽!"
나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소인걸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단전을
관통한 길다란 묵장을 따라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금강불괴에 달하는 몸이 뚫렸다는 사실
보다 역천사공이 만들어낸 환상을 깨트린 능력이 더 놀라웠다.
"별 것 아냐, 양심신공과 마법 때문이라고만 알아두어라."
천천히 일어선 야혼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역천사공에 제압  당했다
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빠져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 상태로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환상 속에서 나타났던 어머니의 말처럼, 복수를 하면 무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전을 향해 천마묵장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심장 부위에서 차가운
기운이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쳐든 또 하나의 사념.
그동안 꾸준히 익혔던 양심신공에 의해 생겨난 다른 의지였다.
"정말 마법을 익혔단 말이더냐?"
"글쎄 나도 몰라. 어찌  되었던 마법이 통하지 않는  신체라는 거지.
자 이제 말해봐라! 잠사옹이 어디 있는지."
급격하게 소멸되어 가는 검붉은 운무를 쳐다보며 물었다.
"쿡! 3백 년 동안 익힌 무공이….크! 하하하!"
허탈한 듯 하늘을 쳐다보던 소인걸 커다란 웃음을 토해냈다. 기가 막
힌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었다.
잠사옹에게서 많은 마법을 배웠다. 몸을 숨기는 마법도 배웠고, 경공
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마법도 배웠다.
굳이 역천사공이 아니더라도 지옥마제를 상대로 수백  초를 싸울 실
력을 지녔다.
그런데.
그 많은 무공을 한 가지도 사용하지 못하고 내공이 사라져버린 것이
다. 더구나 단전을 관통한 무기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피가 멈추지 않
고 있다.
"잠사옹이 있는 곳을 알고 싶다고  했나? 기다려라, 그럼 만나게  된
다. 머잖아 강호로 나올 테니까. 그만 끝내라."
체념한 듯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쳐다보며 말했다.
"기다리면 나온다고…. 그러지 뭐."
속삭이듯 말한 야혼이 천마묵장에  광명도의 기운을 주입했다. 일순
천마묵장에서 새하얀 빛 무리가 폭발적으로 솟구치더니, 역천사황의 몸
이 천천히 가루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또 울었냐?"
뒤쪽으로 다가온 고명지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야혼의 볼을  타
고 흐른 눈물을 보았던 탓이었다.
"요샌 계집애가 되었나 봐. 뻑하면 눈물이 나온다니까."
눈물을 훔치며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자꾸만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과거가 못내 당혹스러웠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던 일인데….
"아이고 배고파라! 내 몫은 남겨뒀겠지?"
이내 호들갑을 떨며 추기영과 태웅 피워놓은  모닥불 앞으로 다가앉
았다.
"이게 얼마만이냐…."
태웅의 손에 들린 고기 한  덩어리를 덥석 빼앗아 입으로 가져간다.
갑자기 구수한 음식 냄새를 맞자 시장기가 급격하게 치밀었다.
허겁지겁 양고기를 뜯고 있는 야혼을 향해  구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정말로 그자가 역천사황이었소?"
믿을 수가 없어서 묻는 말이었다. 자신 또한 무공을 익힌 무인이기에
겁천십웅을 잘 알고 있다. 한데 그들이 활동한 시기는 무려 3백  년 전
이다. 강한 무공을 익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들 또한 인간.
3백 년을 산다는 건 어불성설인 게다.
"역천사황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소.  이미 죽었는데. 그보다 쿠
룬엔 왜 가는 거요? 이 엄동설한에…."
"그게…."
구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집명령을 받긴 했지만 그  이유까지
는 알지 못했다. 다만 병력을 이끌고 쿠룬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
을 뿐이다.
"아마 조금 전 그 수인들 때문일 겁니다. 수인들의  근거지가 신성한
네 봉우리거든요."
야혼에게 양고기를 건네 받은  고명지가 나지막하니 말했다. 구시가
출동한 정황이 이해가 되었다.
"병력을 얼마나 데려오라고 하던가요?"
"5천이 보름 거리를 두고 뒤따르고 있네."
"수인들을 잡기 위해 다른 부족들을 이용하려는 모양이군요.  호쇼트
부족에 전사들이 많다고 하지만 수인들을  상대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
군요."
"으음!"
구시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수인들의 강함은 이미 몸으로  체험했
다. 선발대로 데려왔던 부장 절반 이상이 변변한 대항한번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물론 수인들이 검으로 찔러도 죽지 않는  괴물들이란 사실을 몰라서
당한 게 대부분이었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1대 1로 싸워서  이길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하물며 그들보다 더 약한 부하들이야 무슨 말이 필요하랴.
부하들의 죽음이 눈앞에 그려졌다. 하지만 바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미 전사로서 복종 맹세를 했고, 명령을 거부하면 배신자로  낙인찍
혀 세 부족의 공격을 받을 건 자명한 일이다.
"20만 냥만 내쇼."
발라먹던 뼈를 멀리 던져버린 야혼이 구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슨…."
"우리 넷을 호위로 쓰는 데 그 정도는 지불해야 하지 않겠소."
"정말인가? 하지만 왜…."
환하게 변했던 것도 잠시 이내 구시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수인
들을 잡을 때 보여준 무공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비록 돈을 요구하긴 했지만 자신을 돕고자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빚졌다고 생각하시오."
"빚?"
일순 구시의 얼굴이 날카롭게 변했다. 한 부족의 부족장으로서  타인
에게 빚을 진다는 건 단순한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빚이란 말을 너무 크게 받아들이면 곤란하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시오. 당신에게는 좋은 일이니까. 20만 냥은 개봉으로 보내주시오. 이제
는 잠 좀 자야겠소."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고명지의 손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알았네, 잠잘 곳을 알아봐 주도록 하겠네."
생각에 잠겨있던 구시가 황급히 일어나며 길을 잡았다. 많은 마을 사
람들이 죽어서인지 빈 게르는 많았다.
"똑바로 앉아, 이거 봐라 온통 먼지투성이다."
"그러게 그냥 자자니까."
"이런 몸으로 어떻게 잠을 자냐? 잠자리에 들기 전엔 몸을 깨끗하게
해야하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더구나 하늘같은 서방님을 모시는
자리에서 그럼 되겠어? 가정 교육이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물이 없는 걸 어떡해?"
고명지가 볼멘 소리를 했다. 몸을 씻고 싶은 생각이야 야혼보다 자신
이 더했다. 하나 있는 우물은 시체를 닦아내는  마을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 물을 떠오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해서 세수만 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려 했지만 야혼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부득 부득 옷을 벗겨 내더니 천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아내고 있는 것
이었다.
"일어서!"
"싫어!"
당혹한 표정을 지은 고명지가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상체를  고스란
히 드러내고 있는 것도 창피한데 이제는 하의까지 전부 벗으라는 의미
였던 탓이었다.
하지만.
"으음! 지금 사정이…."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번의 손짓, 색색만화공
은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던 거였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야. 이곳이 아니더라도 중원 전역에서
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 그들의 명복을 빈다며 관계를 갖지 않으면
자식이 어떻게 태어나겠냐? 그리고 우린 무공을 완성해야할 원대한 목
표가 있잖냐. 무공을 완성할 때까지는 다른 곳에  눈 돌림 틈 없어. 뭐
해!"
"일부러 외각의 게르를 달라고 했지."
저도 모르게 요대를 풀며 말했다. 무공은 강해지고 있지만 야혼의 색
색만화공은 대처할 방법이 없다.
어느새 길들어졌는지 야혼이 손만 들어올려도  색색만화공을 시전하
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자꾸 끌려가는 것 같아 불안했다.
"헉!"
허벅지 쪽에서 느껴지는 야혼의 손길에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추운가 보네?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뭐라고 했더라….아 맞다. 대지
를 태우는 화염의 불꽃이여, 나 아월의 의지로 말한다. 나타나라!"
화악!
"어멋!"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한 불덩어리에 화들짝 놀란  고명지가 풀썩 주
저앉았다.
"이크 너무 크다, 꺼져 임마!"
사람 크기의 거대한 불덩어리에 질겁한 야혼이  재빨리 입김을 불었
다.
팍!
"뭐-뭐야?"
황당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며 물었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느닷없
이 허공에 불쑥 나타난 화염구로 인하여 게르  안은 훈훈한 기운이 가
득했다.
"나도 몰라! 아마 여기 있는 이놈 때문에 되는 것 같아."
조금 전 백색으로 빛났던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법(魔法)?"
"그런가봐, 애설이에게 두 가지를 배웠어."
"세상에…, 그럼 아월은 또 뭔 말이야?"
"아! 그거 내 본명이라고 해야하나? 어머니와 누이가 불렀던 이름이
니까?"
"훗! 월(月)…. 여자 이름이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내 몸이나 닦아!"
벌떡 일어난 야혼이 걸치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너…. 아월이란 그 이름 냉 소저에게도 말해줬지."
자연스럽게 야혼의 등을 닦아내며 물었다.
"엥? 그걸 어떻게 알았냐? 마지막에 떠날 때 전음으로 말했는데."
"나쁜 놈!"
흉터로 뒤덮인 야혼의 등을 사정없이 문지르는  고명지의 눈에 반짝
이슬이 달렸다.
우연인 것처럼 말했지만 아월이란 한마디는 색색만화공보다 더 강한
족쇄가 되었음을 느꼈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심지어는  태웅이나 추기영조차 모르는 야혼의
본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냉소소와 자신 그리고 천애설뿐이다.
영원히 야혼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세 여인이 전부.
"설마 본명을 가르쳐준 것도 작업의 일환은 아니겠지?"
하지만 야혼은 고명지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듯,  조금 전 만들었던
화염구를 작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문을 외고 있었다.
그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게르를 태울 듯 컸던  화염구는 그의
머리정도 크기로 작아져 있었다. 더하여 화염구의 숫자도 다섯 개나 되
었다.
"명지야 이게 마력으로 조정되는 건가봐. 심장에서 흐르는 기운이 느
껴져. 정신을 집중할수록 조정하기가 쉬워."
이제야 화염구의 비밀을 알 것  같았다. 화염구를 만들며 몸 내부를
관찰하자 심장부근에서 빠져나가는 이질적인 기운이  감지되었다. 천애
설이 말했던 마력이란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내 사람에게는 작업 같은 것 안 한다."
"설사 작업이라 해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걸 뭐. 그런데 마법이란 것
정신 집중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보다."
다른 때와는 달리 힘없이 늘어진 야혼의 상징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말했다. 야혼의 상징을 가만히 주시하던 고명지가 이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참아봐! 이 놈들은 아주 작게  만들어야겠어. 크기가 작아질
수록 내포된 힘이 커질 것… 허억!"
팟!
나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허공 중에 떠 있던 화염구들이 일제히 꺼졌
다.
"알았다, 어울리는 짓을 하란 말이지?"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고명지를 안아들고 안쪽으로 향했다.
화염구 또한 상당한 무공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 만한
화염구를 손톱크기로 줄일 수만 있다면  사사만화류 못지 않은 대단한
무공이 탄생할 듯 싶었다.
잠시 후,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게르 안쪽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두
연인이 뱉어내는 비음은 게르 밖을 넘지 못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양심신공 덕분이었다.
한 편으로는 용봉환락무를 펼치고 또 한편으로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주변을 차단해버린 것이었다.
다음 날.
구시를 비롯한 야혼 일행은 새벽같이 길을 떠났다.
구시의 권유로 배우기 시작한 기마술 때문에 일행의 진행은  더뎠다.
수인들에게 습격 당한 마을을 떠난 지 보름만에  달탄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쿠룬에 도착했다.
쿠룬은 특이한 도시였다.
외각에 달탄 특유의 가옥인 게르가 줄줄이 서 있었고, 안쪽으로 들어
가자 그때서야 나무와 돌로 지어진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유목생활을 하는 달탄 인의 특성과 중원 문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이 쿠룬이었다.
쿠룬에 도착한 일행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객잔이었다.
"정말 이 보물을 선물로 주고 싶은 겐가?"
황당한 얼굴의 구시가 야혼 일행을 쳐다보며 물었다. 단순하게  호위
로 따라온 자들이 선물이라며 내놓은 물건은 엄청났다.
다른 것도 아니고, 5백 년 전 일대 기인이었던 만승검왕의 병기인 만
병여의주를 선물로 내놓겠다는 것이다.
일반인은 몰라도 무인이라면 목숨걸고 구하고자 하는 무기가 만병여
의주일진대. 더구나 전설에 의하면 만병여의주에는  만승검왕의 검법이
숨겨져 있다고 하였다.
"바센칸이 신병이기를 좋아한다면서요."
"아무리 그렇기로, 이건 너무 큰 것 아닌가."
"걱정 마시오. 잠시 맡겨두는 것뿐이니까. 다 먹었으니까 갑시다. 아,
그놈은 족장님이 주는 걸로 해 주십시오."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잔에서 나온 일행은 반 시진 정도 달려 달탄 최  심처라 할 수 있
는 쿠룬궁에 도착했다.
"호! 여긴 고수들이 많군."
쿠룬궁 안으로 들어온 야혼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실내  이곳저
곳에 은신해 있는 많은 무인들의 기척이 감지되었던 탓이었다.
특히 오이라트의 왕인 바센칸을 배알하러 가는  회랑은 온통 살기로
가득했다.
"멈추시오!"
회랑을 지나 화려한 대전에 도착했을 때 비대한 인물이 일행의 전면
을 막아섰다. 바센칸의 신변 호위를 맡고 있는 카탄이란 자였다.
"나다."
"이곳은 족장님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들은 내 호위다! 언제부터 그렇게 바뀌었나?"
구시의 몸에서 추상같은 고함이 터져나왔다. 지금껏 시골 노인네처럼
행동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20만 호쇼트 부족을 다스리는 대 족장 구시가 서있을 뿐이었다.
"그게 아니고…."
"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거라!"
"이곳은 칸의 궁전이외다! 누구라도 예외는…."
"카탄 안으로 모셔라!"
잔뜩 붉어진 얼굴이 카탄이 더듬거릴 즈음  안쪽으로부터 나직한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가십시오."
"이봐, 카탄 함부로 나서는 게 아냐 임마.  상전이 왔으면 조용히 들
어가서 주인께 보고만 하면 되는 거야. 그게 개(犬)의 역할이라고…."
카탄의 어깨를 쿡쿡 찌른 태웅이 유창한 달탄어로 말했다.
"아미타불! 곰 시주는 뭐라고 했는가?"
"개는 개밥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주인이 먹던 것과 똑 같은 걸  먹
으려 들면 사고가 생긴다고."
"오랜만에 곰이 사람 같은 소리를 하셨구먼, 백 번  지당하신 말입니
다. 본시부터 아랫것들의 잘못인 주인 탓이라  하였네. 개를 보면 집주
인을 알 수 있다고 말이야."
속삭이듯 말하고 있지만 두 사람의 말소리는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
을 넘었다.
"맹랑한 놈들이군…, 그렇지 않은가?"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이 좌우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
다. 뱀처럼 작은 실눈을 가진 이자가 자칭 푸른 늑대의  후예라 일컫는
오이라트의 왕 바센칸이었다.
바센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쿠룬궁에 들어와 칸을 비난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목소리엔  상당한
내공이 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시오 구시 족장, 먼길 오느라 수고했소."
"어서 오시오 족장 수고하셨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칸.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바센을 향해 고개를 숙인 구시가 출입구 쪽에 비어있는 탁자로 걸음
을 옮겼다.
"대단한 호위를 두셨습니다, 구시족장. 입심이 초원의 칼바람보다 더
무섭습니다, 그려."
구시를 기준으로 좌 우 그리고 뒤쪽으로 자리한 야혼 일행을 살피듯
쳐다보던 바센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조금 전도 목소리에 실린 내공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자신 못지 않
은 무공 고수들이었다.
"놀랍군요, 아녀자마저도 호위로 두셨단 말입니까. 호위로 쓰기엔 아
깝군요. 그것도 중원인을… 이쪽으로 오너라."
고명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바센이 손짓으로 불렀다.
멈칫 하던 고명지가 이내 걸음을 옮겨 바센 앞으로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파악!
"악!"
고명지가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앞으로 다가가자 마저 바센이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틀어쥔 것이었다.
"저런 개새…."
'참아!'
앞으로 나서려는 야혼의 귓전에 고명지의 다급한 전음이 들려왔다.
'이 놈 때문이 아냐? 다른 자들을 끌고 중원으로 가기 위해선 지금은
참아야해.'
"어떠냐? 구시를 떠나 내 곁에 있을 마음은 없느냐?"
틀어쥔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그의  시
선은 고명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구시를 비롯한 야혼 일행을 뚫어져
라 쳐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아미타불! 저런 쓰벌놈의 중생이 우리가  달려들기를 기다린 모양이
구먼. 중원이고 나발이고 다 열반을 시켜버리는 게 어떻겠나.'
'아냐, 명지가 참아 달라고 했다.'
바센의 눈을 직시하던 야혼이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차가운
눈으로 바센을 노려보는 야혼의 귓전에 고명지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지아비가 있는 사람입니다. 첩이 되라는 말씀 거둬 주시길…."
"저잔가? 얼굴은 희멀거니 잘생겼구나…, 하지만 남자는 얼굴로 사는
게 아니니라."
턱으로 야혼을 가리킨 바센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다른 두 사람
에 비해 가장 약해 보이는 자가 그였던 때문이었다.
"칸께서는 제 호위를 보기 위해 저를 부르셨습니까?"
바센의 행동을 지켜보던 구시가 나지막하니 말했다.
"아니오, 구시족장. 이 일은 그냥 여흥이었소이다. 물러가거라."
그제야 고명지의 가슴을 놓은 바센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나가 있거라!"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구시가 일행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하
고 또 고마웠다. 야혼이 참지 않았다면 바센을 비롯한 두  부족장은 벌
써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또 빚졌소, 구시족장.'
"자꾸만 빚을 지는군."
귓전에 들려오는 야혼의 전음에 내심 중얼거렸다.
"자 이제부터는 대사를 논해 봅시다. 내가 여러분을 부른 건 두 가지
때문이오, 우선은…."
야혼 일행이 밖으로 나가자 바센은  말을 꺼냈다. 그가 각 부족장을
불러들인 건 두 가지 일 때문이었다.
첫째는 신성한 네 봉우리에서  출몰하는 수인들 때문이었고, 둘째는
파병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조사를 한 결과  수인들의 출몰지역은 테스트시검으
로 밝혀졌소."
테스트시검은 쿠룬 북쪽을 가로막고 있는 봉우리로, 신성한 네  봉우
리 중 가장 높은 산이다.
"일단 그곳을 먼저 없앤 다음 그 여세를 몰아 중원으로 들어갈 것이
오."
바센을 주시하던 3인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수인들을 없애는 일
은 달탄을 위해 해야할 일이지만 중원 침공이라니.
달탄의 전 병력을 모은다 하더라도 25만, 3백만의 병력을 가진  중원
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가능하리라 보시는 게요?"
내심 신음을 뱉어낸 구시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칸의 결정이라 따
를 수밖에 없지만 너무 무모하다 싶었다.
만일 실패한다면 간신히 통일했던 달탄은 또  다시 부족간의 전쟁으
로 몸살을 앓아야 한다.
달탄의 내란을 막고자 바센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신일진대.
"나는 지금이 최상의 기회라 생각하고 있소. 지금 명  황실은 최악이
오. 금의위 도독인 사마군상과 동창제독 위금충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
소. 외부로 눈 돌릴 틈이 없단 말이오. 황제는 이미 유명무실해졌고, 거
의 자멸직전이라 봐도 되오. 명나라 전체를  원하는 게 아니오. 적당한
곳을 얻어내는 조건으로 화해를 하면 될 거요. 각 부족으로  전령을 보
내 내달 보름까지 병사를 집결시키도록 하시오. 장소는  항산초입과 거
용관이오."
"너무 촉박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공연히 해본 말에 불과했다. 지금은  한 겨울, 대부분의 달탄
부족들은 한 곳에 정착해 있고, 병력을 동원하기가 가장 쉬운  때인 것
이다.
"이건 명령이오!"
"알겠습니다!"
별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자신이라 하여도 바센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비록 통일이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 곳이 달
탄이다.
전 부족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전쟁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 방법을 바센이 쓰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랴. 나직하니 한숨을  몰
아쉰 구시가 탁자 위에 있던 상자를 바센 앞으로 천천히 밀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칸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을 가져오셨단 말입니까. 이건…."
"만병여의주라 불리는 검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되었습니다."
"이 검이 진정  만명여의주란 말입니까? 만승검왕의  무공이 숨겨져
있다는. 이런 보물을…. 허허, 우리 달탄의 보물이 돌아왔습니다."
만병여의주를 들어올린 바센이 희열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무슨…."
"구시 족장은 모르셨습니까? 이 만병여의주는 우리 초원의 물건입니
다. 초원에서 태어나 중원을 정복했던 병기란 말입니다."
중원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승검왕의 본명은 달뢰였다. 무공
으로 중원 무림을 정복한 최초의 달탄 인물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허! 알고 준건가 아니면…."
내심 중얼거린 구시가 내공을 끌어올려 밖의 동정을 살폈다.
"저 친구들이…."
도란 도란 들려오는 소리에 구시의  흠칫 표정이 굳어졌다. 조금 전
들어왔던 카탄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수작을 부리고 있는 듯하였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뭔가 보여주는 것도.'
슬쩍 미소를 머금고 바센을 쳐다보았다.
바센 또한 밖의 상황을 알아차린 듯, 잔뜩 흥미로운 얼굴로 귀를  기
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바센의 입가에 방긋 미소가 어렸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거친 숨을 몰아쉬는 카탄의 얼굴은 곧 폭발할 듯 붉었다. 밖으로  나
온 세 놈의 대화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대화 내용은 돼지에 국한되어 있다. 그것도 자신의  별명이
라 할 수 있는 검은 돼지. 비대한 몸과, 유달리 검은 피부로 인하여 자
신과 친한 이들은 대부분 흑돈으로 부르곤 하였던 것이다.
중원어를 쓸 줄은 모르지만 알아듣기는 하기에 세 놈의 대화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 구시 족장을 막아서다가 당한 것도 있고 하여 애써  외면하
고 참고 있지만 가슴속에서는 열불이 뻗쳤다.
그런 카탄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혼 일행  세 사람은 더욱 돼
지에 관한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아미카불! 흑돈문주 돼지를 잡을 때 말입니다.  정수리를 치면 바로
죽지 않습니까. 그 이유를 뭐라…."
"죽기만 하냐? 똥오줌을 싸고 난리가 아냐?  더러워서 돼지는 안 잡
았는데 오늘부터 잡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목을 홱
돌려서 잡으면 어떨까?"
마치 눈앞에 돼지가 있는 것처럼 카탄을 쳐다보며 목을 비트는 시늉
을 한다.
더구나 목을 비틀어 돌릴 때 야혼의 눈가에  번뜩 스쳐간 기운은 살
기였다.
"개자식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카탄은 벌떡 일어났다. 땡 중놈이  읊었던
불호조차 자신의 이름 첫 자를 집어넣은 아마카불이다.
명백한 도전임에 분명했다.
야혼을 죽일 듯 노려보던 카탄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겨뤄볼 자신이 있느냐?"
"옴마? 저 돼지…가 말을 할 줄 아나보네? 나는 돼지라서…,  아이고
미안하외다. 돼지란 말이 입에 붙어서. 댁이 달탄 사람이라서 우리말을
모른 줄 알았지 뭐요. 그러게 쓸데없이 많은걸 알고 있으면  피곤한 거
라고. 왜 모르는 게 약이란 말 있잖아. 즉 그게 먼 말인고 하면,  제 주
제에 맞게 살아라 이 말이지. 거패 내 말이 맞지?"
"백 번 맞는 말이다. 개가 사람 말을 알아들으면 편하고 좋긴 하겠지
만 잡아먹을 땐 힘들잖아. 그러니까…."
"나와 겨뤄볼 자신이 있냐고 물었다!"
마침내 노화가 폭발한 카탄이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고함을 질렀다.
"어디서 큰소리를 치고 지랄이야 새끼야!  그리고 주인도 아니고 개
(犬)한테 이겨서 뭐가 남는다고…. 네 볼일이나 보셔."
"목을 걸겠다. 이 카탄의 목을…."
"한 번 웃어볼래? 환하게 웃는 모습이 괜찮으면 고려해보도록 할게."
"거 좋은 방법이네 연작문주, 뭐니 해도 돼지는 웃는  얼굴이 최고거
든, 값도 많이 받을  수 있고…. 더구나 나중에  머리고기 만들었을 때
맛이 달라지거든."
"어흥!"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른 카탄이 야혼을 향해 돌진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칸에게 목이 잘려 죽는다 할지라도 놈을 없애야 할 것 같
았다.
멍하니 서 있는 놈의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려는 찰라.
"멈춰라, 카탄!"
한마디 날카로운 소성이 카탄의 동작을 가로막았다.
"크윽! 칸이시여, 저자와 결투를 하게 해 주십시오. 아니면 자결을 명
해 주십시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카탄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카탄! 누가 널 모욕했느냐?"
"그렇사옵니다, 칸이시여. 저기 저자들이 소신을 모욕했습니다."
"그랬느냐?"
바센의 시선이 야혼을 향했다.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다. 다
만 카탄의 결투를 받아들이겠느냐 하는 시선을 던졌던 것인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는 저자를 모욕  줄 의도가
전혀 없었소이다. 원래 제  직업이 백정이라서 말입니다.  시간도 때울
겸하여 돼지 잡는 이야기를 잠시 나눴을 뿐이외다."
"감히 칸 앞에서 거짓을 아뢴단 말이더냐?"
바센의 몸에서 자욱한 살기가  흘렀다.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카탄을 두고 돼지 머리는 웃어야 한다고 했던 놈들이 아닌가.
듣지 못한 것도 아니고  두 귀로 똑똑히 듣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한 얼굴로.
"거참 답답하시네. 그건 저 친구에게 한 말이 아니고 우리끼리, 여기
육승과 거패와 나눈 이야기란 말이오. 혹시 저 친구 평소에서  돼지 이
야기만 나오면 흥분하고 그런 것 아뇨? 왜 그런 놈들 있잖소.  제 이야
기가 아닌데 지레 짐작으로 화내는 이상한 놈들 말이오."
"아미타불! 맞습니다, 바 시주, 그런 변태 같은 놈들은 일명 정신병자
라 부르곤 하지요."
"그럼 저 자도 그런 족속이란 말이네, 겉모습은 멀쩡한 사람이 참 안
됐네. 내가 좋은 의원을 알고 있는데…. 쯧쯧!"
야혼부터 시작된 말이 태웅의 혀차는 소리로 끝을 맺자 구시의 얼굴
이 해쓱하게 변했다.
도를 넘어선 도발이었던 탓이었다.
'자네들 너무 심하네. 지금 상황도 수습하기가 힘들어.'
재빨리 야혼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나 야혼의 얼굴은 태연했다. 오
히려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센을 쳐다보고 있다.
"그래서 결투를 못하겠다는 말이더냐?"
"못하겠다는 게 아니고 남는 게 없다는 거지요."
"카탄이 목을 걸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또 답답한 소리하시네. 내가 저  돼지…. 아 죄송, 직업이  백정이다
보니…. 내가 카탄의 목을 가져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고사 지낼 일도
없는데. 좀 건설적인 내기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가령 저 돼지  같은
놈 목에 돈을 좀 얹어서 한다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네 놈은 사내가 아니로구나."
"사내가 아닌게 아니라 바보가  아니지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저
놈 목은 저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단 말입니다."
"돈을 걸면 결투에 응하겠다는 말이렷다."
"당연히 그렇지요. 돼지 목보단 돈이 훨씬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부
인이 바가지도 덜 긁고요."
"그래? 얼마를 원하느냐?"
"20만 냥 정도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걸게  목밖에 없는
데…."
"네 놈의 목과 부인을 걸어라!"
"내 부인까지 걸려면 20만 냥이 추가됩니다. 그래도 하겠다면 응하겠
습니다."
"계집하나 목숨 값이 20만 냥이라,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잘못 아셨습니다. 40만 냥이 전부 이 사람  몫입니다. 처음 20만 냥
은 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값이지요."
"아미타불! 저런 사악한 중생봤나. 밤마다 봉사를  하면서 또 점수를
따고 있네 그랴."
고명지의 눈치를 슬쩍 보던 추기영이 내심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만 해도 잔뜩 굳어있던 그녀의 얼굴이 마음을 아프게 한 값이 20만 냥
이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환하게 바뀌었다.
'곰 시주. 오늘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네. 연작문주 저 인간은 삶
자체가 작업일세.'
'나도 느꼈다. 저 자식 결투가 끝나면  엄청난 봉사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뼈가 삭는 그런 봉사가 말이야…. 니미럴.'
두 사람이 전음으로 야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그  순간 바센의
입에서도 수락의 말이 떨어졌다.
"좋다, 결투에서 네가 이기면 40만 냥을 지불하기로 하겠다. 결투 방
법은 어떤 걸로 하고 싶나?"
"방법은 그쪽에서 정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40만 냥을  걸겠다
는 그 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갈! 칸의 말은 곧 신성한 법이다. 약속을  어기는 자는 칸의 자격이
없느니라!"
"알겠습니다. 그럼 내기 방법을 정하시죠."
"전사는 때리고 맞는다. 그 이상의 방법은 없다."
"그러니까 똑바로 서서 한방씩 주고받자 이 말입니까. 한  쪽이 뒈질
때까지."
"사내끼리의 결투로선 최고가 아니더냐."
"쿡! 저 돼지새끼가 대단한 무공을  익혔나 보군. 뭐 좋습니다. 40만
냥을 버는데 그 정도는 해야겠지요."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이 대전  가운데로 나섰다. 카탄의 몸은 무공
때문에 비대하게 변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놈! 네 놈이 결투 방식을 선택해야 했다. 나는 말이다, 도검이  불침
하는 몸이다."
야혼 앞으로 다가온 카탄이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말했다.  유가합밀
공, 그가 익힌 무공의 명칭이었다.
천축에서 유래한 무공으로  온몸에 힘을 불어넣으면  공처럼 둥글게
변하여 충격을 흡수해 버린다.
검이나 도마저도 흡수해버리는 몸일진대 하물며 맨주먹이야.
"먼저 하겠느냐?"
득의만면한 얼굴의 카탄이 야혼 앞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참아, 돼지새끼. 내기는 공평해야해, 그래야 뒷말이 없거든. 네 주인
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은 알  수 없잖아? 바센께서 이 구리
돈을 던져 주시겠습니까. 나는 앞면입니다."
카탄을 향해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구리돈  한 닢을 꺼내 바센
에게 던졌다.
"공평하게? 좋다."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바센이 야혼에게서 받은 동전을 높이 던졌다.
딸랑!
"안됐구나 중원 놈! 네 놈의 부인은 칸의 차지가 되었다."
뒤집어진 동전을 확인한 카탄이 주먹을 슬슬  쓰다듬으며 싱긋 웃음
을 머금었다.
"쓰벌! 저 동전이 미쳤나, 암컷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엎드리고 지
랄이야. 자, 때려!"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야혼이 카탄 앞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야혼의 얼굴을 쳐다보던 카탄이  바센을 향해 고
개를 돌렸다. 한방에 죽일 건지, 아니면 좀더 가지고 놀다가 없앨 건지
를 눈으로 묻고 있었다.
바센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탄의 몸통이 공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하
였다. 시간 끌지 말고 한 방에 없애버리라는 지시였기 때문이었다.
"잘 가라, 샛님!"
속삭이듯 말한 카탄이 전 내공이 실린 오른  손 정권을 야혼의 면상
을 향해 사정없이 날렸다.
쉬익!
퍼억!
"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야혼의 신형이 2장 가량을  붕 날아서 대전
한쪽 구석으로 처박혔다.
"저런…."
바센 곁에 서서 사태를 관망하던 토르구트와  호이트 부족장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3장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
렸다. 바위마저도 부수는 카탄의 공력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
다. 그런 주먹을 맨 얼굴로 받았으니.
운이 좋다면 마지막으로 부인 얼굴이나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카탄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만족스런 얼굴로 추기영과 태웅을 쳐다보
았다.
"저 놈들이…?"
흠칫 놀란 얼굴로 대전 구석에 처박힌 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같이  노닥거리던 놈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의
얼굴은 태연했기 때문이었다.
"공연한 걱정을. 수고했…."
"니미씨브럴, 좆나 아프네."
카탄을 향해 치하의 말을 하려던 바센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
다. 죽었을 거라 여겼던 놈이 욕설을 뱉어내며 일어서고 있기 때문이었
다.
"어떻게…."
기절할 지경이었다. 유가합밀공을 운용한 카탄의 주먹은 자신이라 할
지라도 완전하게 받아낸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런 주먹을 얼굴로 받아내는 자가 있을 줄이야. 더구나 녀석의 얼굴
은 볼록 부풀어 오른 눈자위와 피를 약간  흘리고 있는 입을 제외하면
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는 그의 귓전에 더욱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돼지새끼, 정력이 그것밖에 안 되니까 마누라가 도망을  가지? 적어
도 이 정도는 돼야…."
팔을 빙빙 돌리던 야혼이 불끈 틀어쥔 주먹을  카탄의 입을 향해 사
정없이 박아 넣었다.
파악!
"커억!"
처절한 비명을 내지른 카탄의 신형이 주르르 1장 가량 밀렸다.  하지
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기우뚱 넘어가려는 몸을 가까스로 세우며 싱
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입안 사정은 엉망이었다.
대부분의 이가 부러졌고, 형언하기 힘든 고통이 밀려들었다. 슬쩍 바
센의 눈치를 살핀 카탄이 입안 가득 굴러다니는 이를 한꺼번에 삼켰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야혼을 향해 걸었다.
"이런! 약했나? 다른 돼지새끼들은 그 한방이면 개구리처럼 짝 뻗는
데…."
"내가 강해서…. 씨팔!"
부러진 이빨 때문에 말이  새어나가자 이내 말을 끊은  카탄이 다시
한번 전 내공을 끌어올려 오른손 주먹에 실었다.
"가랏!"
퍼-억!
"끄아악!"
이번에도 역시 처음과 같았다.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훨훨 날아간 야
혼의 동체가 대전 벽에 거칠게 부딪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헉!"
또 다시 꿈틀거리고 일어서는 야혼의 모습에  카탄의 얼굴이 해쓱하
게 변했다. 무려 1갑자에 달하는 전 내공을 실었다.
강기급에 달하는 힘을 실었는데 놈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
문득 눈앞이 아득해졌다. 인간이  아닌 괴물 같았다.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왼쪽 눈자위가 잔뜩 부어 올랐다는  점과 입 주위의 피가
더 많아졌다는 사실만 달랐다.
"씨팔 놈아, 남의 부인을 탐할  때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
야. 좆도 아닌 새끼가 남의 부인을 왜 노려!"
야혼의 공격 또한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팔을 빙빙 돌리며 카탄  앞
으로 다가서더니 그의 얼굴을 향해 비쾌하게 찔러 넣는다.
'얼굴을 돌려 피해야 한다. 다시 전면을 맞으면 끝장이다.'
내심 중얼거린 카탄이 두 눈을 부릅뜨고 얼굴로 다가오는 주먹을 노
려보았다. 맞으면서 주먹을 흘려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고개를
슬쩍 틀었다.
"커-억!"
나직한 비명을 지른 카탄의 얼굴에서는 코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틀었다는 건 그의 생각뿐이었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목이 굳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두 눈을 빤히
뜨고 코를 향해 날아오는 정권을 하용하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주먹의 수가 점점 늘어났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다만 카탄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다는 사실만
처음과 다를 뿐이었다.
"죽어…!"
숨을 쉬는 건 고사하고 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내공으로 놈이
있는 곳을 감지하여 그곳으로 주먹을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카탄의 주먹은 처음과 같이 힘이 실리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진 주먹질에도 상대를 죽이지 못하자 정신적으로나 육
체적으로 지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투지가 없는 주먹은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척! 척척척!
"또 한번 더 말해주마, 아무리 지체가 높다 하더라도  싫다는 여자는
절대 탐하지 말라. 이건 진리다. 좆달린 놈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진리.
이 개새끼야."
퍼억!
"크-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른 카탄의 신형의 허공을 날았다. 2각에 걸친  결투
에서 대전 바닥에서 카탄의 발이 떨어진 것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처음이 카탄의 마지막이었다.
털썩 바닥으로 떨어진 카탄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절명.
눈, 코, 입이 전부 망가진, 처참한 지경이 되어 카탄은 숨을 거뒀다.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오이라트의 칸인 바센은 물론이고, 그 곁에 서 있던 두 명의  부족장
과 야혼을 호위로 썼던 구시마저도, 죽어 자빠진 카탄의 시체를 쳐다볼
뿐이었다.
실내에 있던 인물들의 공통적인 느낌은 공포였다.
한 인간을 조각조각 부수면서도 표정변화가 전혀 없다.
마치 사람을 죽이도록 만들어진 강시를 보는 듯했다. 감정을 가진 인
간이었다면 지금까지 끌 수가 없다.
"아이고 주먹이야, 마지막 건 잘못 때렸나봐. 돈 벌기가 이렇게 힘들
어서야 원. 참 40만 냥은 언제까지 준비됩니까."
"오늘 저녁까지 전표로 보내주겠다."
"감사합니다, 바센칸님! 즐거운 여흥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에 또…."
하오대문 삼인방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수인들을 없앨 때도 실력발휘 하기를 바라겠다."
찬바람이 나도록 몸을 돌린 바센이 안쪽으로  들어가며 남긴 말이었
다.
불어오는 혈풍(血風)
"아이고 해골이야, 돼지 같은 놈이 웬 주먹이  그렇게 센지. 뭐해 가
서 달걀이나 좀 가져오지 않고."
"왜 그랬어?"
야혼을 쳐다보는 고명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자신이 바센에게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서지 않을 사람이
야혼이다. 순전히 가슴을 잡혔던 일 때문에 일부러 시비를 걸어 바센의
부하를 없애버렸다.
일종의 경고를 그런 식으로 남긴 것이다. 바센뿐만 아니라  구시족장
까지 노리고 한 행동이었다.
누가 되었던지 수틀리면 죽일 수 있다는 경고였다.
"있잖아 마누라가 많으니까 살기 힘들긴 하다. 돈을 많이 버는 것 같
은데 끊임없이 쓸데가 생겨. 하오대문에도 보내야 하고, 마도련에도 보
내야지, 아직은 아니지만 사천당문…, 당문은  안 보내도 되려나? 그리
고 너도 줘야지. 사람들이 한 여자하고만 사는 이유를 이제 깨달았다."
"거기에 왜 내가 들어가는데, 나는 넘치는 게 돈인데."
"이년아 지금이야 돈을 대주는 놈이 있지만 앞으론 없을 것 아냐. 위
금충과 사마군상까지 깡그리 없애고 나면 무슨 돈으로 다스릴래? 황실
창고도 텅텅 비었다면서."
"그래서 그 돈을 네가 다 벌어주겠다고? 통이나 돌리는 녀석이 무슨
수로 그 많은 돈을 벌어 주냐?"
"조금 힘들긴 하겠다. 그래도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이 1백만 냥 정도
되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뛰면 가능하지  않겠냐? 정 안되면 몸이라도
팔아야지 뭐. 돈 많은 부잣집 마나님들에게 적선 좀 하면  떼돈을 몰라
도 너희들 먹여 살릴 정도는 나오겠지. 씨팔 원래는 이게 아닌데. 냉소
소나 당가려 그년들에게 빌붙어 살려고 했었는데…. 재수 없는 놈은 뒤
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에라 도둑놈아! 남의 천금같은 딸들을 망쳐놓고 재수가 없어?"
"무슨 소리야 이년아. 냉소소나 당가려는 절대 내 책임이 아냐? 불귀
동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고, 선택은  그녀들 몫이었
다. 그리고 그곳을 빠져나와서는 전부 잊기로  했고. 나는 무지하게 많
이 노력했다. 그녀들에게 부담주기 싫어서 일부러 늦게  나오기까지 했
던 말이다."
"그러다 재수가 없어서 나를 만났고."
"거참 말해놓고 보니 이상하네? 중원의 미녀란 미녀는 전부 내 것이
되니까 좋은 건가?"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한다."
"원래 내 인생은 작업의 연속이거든. 설마 이렇게 퉁퉁 얻어터지면서
작업을 했는데 앞으론 배신하진 않을 것 아냐. 비록 같이  살진 못한다
하더라도…. 아니다 고명지가 정계에서  은퇴하면 그때부터는 같이  살
수 있겠네."
"그땐 나는 할머니가 된다. 너보다 내가 3살이나 많고."
"별소릴 다한다. 먹으면 늙지 않는  과일이 있다며. 주안과라고 했던
가?"
"그런 귀한걸 무슨 수로 구하냐."
고명지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빈말에 불과할지라도, 나중
에 늙어서 찾아오면 받아주겠다는 야혼의 말이 고마웠다.
"이런 바보 정계 최고 자리에 있으면서 그런 것도 못 구하면 죽어야
지. 하여간 그런 과일 있으면 남 줄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네가 먹어."
"냉 소저나 당 소저는 안주고?"
"나는 조금만 줘도 돼. 너 혼자 젊으면  남들이 욕하거든, 늙은 놈이
젊은 처자 끼고 산다고."
"훗! 생각만 해도 즐겁다. 정말 그런 시절이 왔으면…."
고명지의 얼굴이 아득하게 변했다. 문득 야혼의 말처럼 되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목욕이나 같이 할래?"
"그 지경을 해서도 하고 싶어?"
"얘가 왜 또 잔뜩 바라는  얼굴을 하는 거야. 나는 분명히  목욕같이
하자고 했다."
"내 말도 그래, 목욕 말이야. 삭신이 쑤신다며  목욕을 할 수 있겠냐
고."
"에라, 이 여우야. 물은 내가 준비할 테니까  너는 주방에 가서 달걀
이나 얻어와."
"알았어. 참! 바센 있잖아 그놈 가만히 있을까?"
"이젠 고명지도 바보가 되어 가는 구나. 가만있으면 그게  어디 남자
냐? 잘라서 개나 줘버려야지. 날 죽이려고 별 짓을 다하고 있을 거다."
"대비책은 있어?"
"대비책은 무슨? 수틀리면 푹 쑤셔버려야지."
"단순하기는…."
"그래서 우린 속 궁합이 맞는 거야. 단순한 년놈이 만났으니까."
"나 달걀 가져올게."
"올 때 밥상도 차려와."
"배고파?"
"그런걸 꼭 물어봐야 하냐? 배가 고프니까 밥 달라 했겠지."
"알았어."
삐죽거리던 고명지가 이내 주방으로 달음질쳤다. 혹시 주방에서 일하
는 사람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녀가 도착한 주방은 썰렁한 찬 공기가 감돌뿐 아무도 없었
다.
"미치겠네 이거.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주방을 둘러보던 고명지가 한숨을 푹 내 쉬었다. 할 줄 아는  음식도
없을뿐더러 이곳은 달탄 땅이다.
음식 재료조차 다른 곳에서 무얼 만들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훗! 바센이란 놈 때문에 별 짓을 다하게 되네. 주부 역할이라…. 나
이도 어린 녀석이 아는 건 많아 가지고."
주방을 뒤지던 고명지가 일순 동작을 멈췄다. 야혼의 의도를  이제야
알아차렸던 거였다. 앞으로 겪게될 1달 정도의 달탄 생활은  살아 생전
처음 갖는 휴식기간이라 할 수 있다.
그 기간 동안이나마 여타 다른 부부처럼  생활을 해보자는 의미에서
밥을 해오라고 하였던 것이다.
"작업이라도 상관없어.  아월이 뭘  좋아했더라….배만 채우면  되지
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양
고기와 야채를 찾아낸 고명지가 잠깐  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양손을
비쾌하게 휘둘렀다.
그녀의 손에서 금빛 광채가 번쩍거리며 흘러나옴과  동시에 도마 위
의 양고기가 가늘게 잘렸다.
겁천십웅의 1인인 금환신존이 보았다면 기절할 광경이었다. 그의  독
문무공이었던 금환신공이 한갓  양고기와 야채를 절단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그것도 3백 년만에 처음 드러난 무공일진대.
하지만 양고기를 자르는 고명지의 표정은 신중했다. 어차피 음식  맛
으로는 틀렸고, 모양이나 예쁘게 하려는 생각에서인지 정성을  다해 금
환신공을 펼쳤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무공은 금환신공 1초인  환우섬( 宇閃)이었
다.
"음식이 별건가? 배만 채우면 되지. 룰루…"
좀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며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는다. 솥에 넣고
요리를 하게 되면 잘랐던 모양은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듯, 환우섬을 펼치는데 온갖 정성을 다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요리를  하는 고명지와는 달리, 분노의 고함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죽일 놈! 네 놈을 반드시 죽여버리고 말겠다!"
10개의 술병이 뒹굴고 있는 실내. 만병여의주를 움켜쥔 바센의  얼굴
은 방 가운데 화롯불 보다 더욱 붉게 타올랐다.
부하에게 40만 냥의 전표를 보낸 다음부터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 여
흥은 재미있었냐고 하였던 놈의 목소리가 잊혀지지를 않았다.
끊임없이 귓전을 맴돌았다.
즉결 처단을 하고 싶어도 구시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호쇼트 부족을 자극하면 가까스로 이루었던 오이라트의 연맹은 바로
깨진다. 구시 또한 그것을 알기에 협조하는 실정일진대.
그의 호위를 죽인다 함은 곧 동맹을 깨겠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참았다.
"구시 중원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아주겠다.  중원에 들어갈 때까지
만….하지만 그 놈은 용서할 수 없다. 이번 작전에서 그놈의 목을 따고
말겠다. 혈칠랑(血七狼)은 들라!"
"부르셨습니까, 칸이시어."
나직한 음성과 함께 천장으로부터 늑대 가죽을 뒤집어  쓴 7곱 괴인
이 그림자처럼 내려앉았다. 혈칠랑(血七狼), 공히 1갑자에  달하는 내공
을 지닌 고수들로 바센의 최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다.
바센이 칸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들 때문이었다.
"이번 테스트시검에 우리도 출병한다. 날랜 군사 1천을 소집하라. 그
리고, …너희들의 목표물은 한 놈이다. 카탄을 죽였던 그놈. 알겠느냐?"
"존명!"
고개를 숙인 7곱 무인들이 소리 없이 자리를 떴다.
"이게 뭐냐?"
고명지가 내려놓은 소반을 쳐다보며 놀란 듯 물었다. 기름기만  번지
르르한 희멀건 죽이 놓여있었던 탓이었다.
"배고프다며?"
"음식 먹고 싶다고 했지 누가 돼지밥 먹고 싶데?"
"돼지밥? 내가 봐도 좀 심하긴 하다. 그거 생각처럼 안되더라고."
배시시 미소를 머금은 고명지가 젓가락으로 음식을  휘휘 저으며 말
했다. 별 것 아니라 생각했던 음식 만드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
다. 이리 저리 하다보니 결국은 멀건 죽으로 끝나고 말았다.
"머 상관없지, 얼마 전까지는 이 몸이 돼지였으니까. 후루룩!"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접시 채 들어 술을 마시듯 털어 넣어 버렸다.
"맛은?"
"맛은 그런 대로 괜찮아. 조금만  더 노력하면 훌륭한 아낙이 될  수
있겠다. 구시 부하들이 도착하려면 날짜가  좀 남았으니까…. 나아지겠
지 뭐."
"그럼 계속 밥을 하라고?"
"그럼, 내가 하리?"
"그냥 객잔에서 사먹자. 그게 훨씬 더 맛있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양지가 만들어준  음식이 자꾸만  생각이 나
서…."
"양지? 양지가 뭘?"
양지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명지의 눈자위가 상큼 올라갔다.
"아냐…. 공연한 소릴 했네."
"말해보라니까? 일녀가 뭘 어쨌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 고명지가 윽박지르듯 다가앉으며 물었다.
"그렇게 과민반응하면 내가 곤란하지. 다른  게 아니고, 개봉에 있을
때 양지가 음식을 해줬거든. 별다른 재료를  쓴 것도 아니었어. 쇠고기
와 야채를 잘게 썰어 볶았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더라고. 누군가 나에게
음식을 해준 게 처음이라서 그랬을 거야. 신경 쓰지마."
"처음이었다고…."
"당연히 처음이었지, 마옥성에서는 놈들이 준 음식이라고는 날고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리고 도살장에서 얻은 고기는  내가 손수 구웠지.
육승과 거패가 가끔 굽기도 하고…. 참 물 데워야지."
고명지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던 야혼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
를 떴다.
잠시 후.
안쪽 욕실에서 흥얼거리는 야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만 이 물을 데울 때 불꽃을 쓰면…, 나와! 임마."
허공을 향해 낮게 고함을 지르며 머리통만한 불꽃 하나가 불쑥 나타
났다. 더 이상 대지를 들먹일 필요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불꽃을 연상하고 의지를 발현하면 화염불꽃이 솟구쳐 나
왔다.
"자자! 저 물은 네 녀석하고 상극이니까 천천히, 여자를 다룰 때처럼
천천히 들어가라."
모든 정신력을 집중하여 화염불꽃을 탕 안으로 천천히 유도했다.
치이익!
그러나, 물 속에 완전하게 잠기자마자 불꽃을 나직한 소리를 내며 꺼
져버렸다.
"햐! 미치겠네. 내공보다 마력이 더 많은 것 같은데…."
그동안 심장 쪽의 마력을 관찰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무엇으로  만
들었는지 모르지만 광명제세보주라는 구슬에는  엄청난 힘이 내재되어
있었다.
단전에 있는 내공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힘을 사용할 방법이 없다. 천애설이 가르쳐준 마법으로 만
들어낸 화염구는 위험하게 보이긴 하지만 그 위력은 별 것 아니었다.
해서 커다란 화염구를 압축하려는 것이었다.
"천상 양심신공에 의존해야겠네."
"나와, 임마!"
화르륵!
"조심, 조심! 불조심."
조심스럽게 화염구에 의지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화염구
를 그대로 유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크기를 줄이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가슴팍에서 백색 광채가 솟구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모든
정신을 화염구에 집중했다.
쉬익!
붉은 광채를 넘실대던 화염구가 절반 크기로  줄어듦과 동시에 푸른
색 불꽃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어떠냐 요놈아. 이제는 물 속으로 잠수하거라."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푸른 광채에  휩싸인 화염구를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욕조 주위로 뿌연 수중기가 솟구쳐 올랐다.
"성공이닷!"
물 속에서조차 꺼지지 않는 화염구를 쳐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물 속
에 잠긴 화염구는 보석 같았다.
손을 이리저리 휘저을 때마다 푸른색 광채를 뿌리며 움직이고 있다.
"저게 뭐야?"
야혼의 고함소리를 듣고 욕실로 달려온 고명지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까 만들었던 화염군데, 아직 완전하건 아냐?"
마력을 거둔 야혼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손톱 크기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방법을 찾았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온도도 적당하고 목욕이나 해볼까. 달걀은…."
"응? 알았어 가져올게."
화들짝 놀란 고명지가 재빨리 식탁이 있는 곳으로 줄달음질 쳤다.
끝없이 강해지는 야혼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천마묵장과 같이 얻었던
광명제세보주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 끝이 어디일지, 내심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뭐해, 왔으면 들어와야지. 따듯하고 좋다. 맞다."
눈을 지그시 감은 야혼이 낮게 중얼거리자 그의 머리맡에 은은한 광
채를 뿌리는 빛 덩어리가 나타났다.
"어때 이정도면 분위기는 완벽하지."
"최곱니다, 서방님."
환한 미소를 머금은 고명지가 천천히 옷을 벗었다.
"얘가 이제 선수가 다 됐네. 그럼 씻기도 전에 덮칠지도 몰라."
"헹! 알아서 하세요."
"참, 금환신공의 성취는 어느 정도냐?"
재빨리 욕조 안으로 들어온 고명지를 껴안으며 물었다. 용봉환락무를
꾸준히 시전하고 있지만 그녀의 성취가 더딘 것 같아서 묻는 말이었다.
"11성까지는 성취했는데…. 금환신공이 남자 무공이라서 그런가…."
요즘 그녀의 고민이었다. 그동안 야혼의 도움으로 몸 안의 잠력을 전
부 내공으로 만드는데는 성공했지만 금환신공은 완성하지 못했다.
"마음을 편해 먹어. 서두른다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니까. 어디 단전
검사를 한번 해볼까?"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야혼의 고명지의 신형을  뒤집으며 그녀의 하
체로 손을 뻗었다.
잠시 동안 까실한 느낌을 음미하더니 그녀의  단전으로 내력을 천천
히 주입했다.
"으음! 그런 식으로 몸 검사를 하는 사람이 어딨어?"
슬금 아래쪽으로 파고드는 손길에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묘하게도
야혼의 손길만 닿으면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다.
개미가 스멀거리며 기어오르듯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져버리는
것이다. 항거할 수 없는 유혹.
"세맥들이 안 뚫려서 그런가? 그럼 오늘은 세맥을 한번 뚫어 작업을
한번 해보자."
"가능할까?"
고명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세맥 타동은, 무인으로서 최고 신체를
얻게되는 환골탈태(換骨奪胎)와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더하여 환골탈태는 금강불괴지신을 이루는  기본이 되고, 무공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무인이라면 꿈에 그리는 경지가 환골탈태일진대.
"네 자신을 믿어.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고명지를 번쩍 들어 몸을 돌리며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쓸었다.
"으음! 믿으라고? 믿으면 된다고…."
나직하니 중얼거리며 야혼의 손놀림에 온몸의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가슴을 쓰다듬던 손길을 느끼고, 아랫배를 문지르는 손길을 느꼈다. 그
의 손이 하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고 느껴지는 순간, 한숨처럼 신
음을 흘리며 용봉환락무를 끌어올렸다.
물안개처럼 뿌연 백무가 솟구쳐 오르고 그에 보조를 맞추듯 붉은 운
무가 야혼의 몸에서 솟아 나왔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백무가 점점 진해지더니  어느 사이 끈적끈
적한 액체처럼 변했고, 이내 봉황모양이 되었다.
용봉환락무 12성 경지였다.
혈기를 가득 머금은 적룡이 봉황의 전신을 칭칭 감아 돌자 고명지의
입에서 격렬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천장에 밝혀졌던  빛마저 사라지고 꿈틀거리는  봉황과 용만
남았다.
"하악!"
고명지의 입에서 뜨거운 비음이 흘러나왔다. 은밀한 그곳을 통해  들
어오는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던 탓이었다.
수십 번의 관계를 가졌고, 그때마다 용봉환락무를 시전했지만 지금처
럼 엄청난 기운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야혼의 내기는 이질적인 기운이 아니었다.
그동안의 관계로 인하여 거의 동일한 내공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내공과 합쳐진 그것들이 온몸을 헤집고 다녔다.
마치 몸 속에서 바람이 불고 있는 듯하였다.
툭! 툭툭툭! 툭!
문득 몸 속에서 무수한 소리가 들려왔고, 소리가 들려온  그곳에서는
시원한 느낌이 밀려왔다.
밀려들어왔던 내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가고 문득 공허한 느낌에 살짝
눈을 뜨고 말았다.
빙그레 웃고 있는 야혼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의 얼굴을 향해 입술을 내미는 순간 또  다시 엄청난 파도가 밀려
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만큼 입을 벌리며 격정에 찬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도 역시 조금 전 들었던 소리가 몸 속에서 들려왔다.
타동되는 소리임과 동시에 엄청난 기연을 얻고  있는데 당사자인 고
명지는 인식하지 못했다.
커다란 골을 만드는 파도에 몸을 싣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야혼의 어깨를 깨물며 앓는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야혼과의 관계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파도에 휩쓸렸던 고명지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야혼의 항해는
시작되었다.
찰랑거리던 물소리가 잠잠해진 것 사방이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녘이
었다.
"세맥 타동의 효관가?"
침대로 오자마자 널브러지듯 골아 떨어진 고명지를 쳐다보며 중얼거
렸다. 완전한 환골탈태을 이루지 못한 결과인 듯 싶었다.
일부 타동된 세맥과 아직 타동되지 않은  세맥들간의 불균형으로 그
녀가 피곤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도 쉬는 동안 불꽃이나 다듬어 놓자."
간밤에 하다만 불꽃을 피워 올려 크기를 줄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한가한 날들.
밤에는 용봉환락무를 시전하여 고명지의 세맥타동을 돕고, 낮에는 마
법으로 만들어낸 불꽃을 무기로 만드는 작업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에 일행은 달탄에서 새해를 맞았다.
고명지도 음식솜씨가 꽤나 늘어 제법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어 오곤
하였다.
금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미타불! 첩형 시주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좋은 것 있으면 혼자먹
지 말고 나눠 먹도록 하시지요."
오랜만에 두 사람의 처소를 찾은 추기영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고명지의 얼굴은 만개한 꽃을 보는 듯 화사했다.
모처럼 만의 휴식과 세맥 타동이 가져다준 효과였다.
원래부터 좋았던 피부에 환골탈태가  더해지자, 그녀의 피부는 거의
투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건 같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냐 임마. 혼자만, 그것도 밤에만 먹는
거지. 병력이 도착한 것 같던데?"
"내일 출병한다고 하더라."
태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구시를 뒤따라 왔던 5천 병력이  쿠
룬 외각에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던 것이었다.
"여면환공은 다 익혔지?"
"걱정 마라, 놈의 버릇까지 전부 익혔다. 그  놈이 다시 살아난다 해
도 못 알아 볼  테니까. 그럼, 여기일 마치고  바로 천의맹으로 들어갈
거냐?"
"오늘이 개파대전이라 했는데…. 아쉽지만 늦게라도 들어가서 비벼봐
야지."
태웅의 물음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천의맹이 완성되어  오
늘 개파대전을 연다는 사실은 고명지에게 들어 알고 있다.
그들의 시작과 같이하여 들어갔으면 일 처리가  수월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냐, 기회가 생길 것 같아."
음식을 들고 들어오던 고명지가 야혼 곁에 앉으며 말했다.
"다른 조심이라도 생긴 거냐?"
"응! 새로운 보고가 접수되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움직이고
있데. 1달 전부터 감지되었는데 이제야 그들의 행선지가 밝혀졌나 봐."
"구파(九派)?"
"응, 소림사를 제외한 나머지 문파들이 표적인 것 같아."
야혼의 물음에 고명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에 나가있는 동창  비
선들로부터 접수된 정보였다.
"아미타불! 드디어 기다리던 전쟁의 시작되었습니다, 그려."
"호치 생각보다 빨리 시작하는 구나. 적어도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잘해봐라 후회하지 않도록. "
고개를 들어올린 야혼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후일의 결과는 상관없이 여호치 또한 승부를 걸고 있는 게다.
삶의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 남았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   *   *
 새해 첫날은 순백의 눈과 함께 시작되었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과 기
암괴석으로 가득한 화산은 온통 백색의 천지였다.
슬쩍 한바탕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면 사방에서  뿌연 눈가루가 떨어
져 내린다.
누구나 그렇듯 새해가 되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전년에 이루지
못했던 일을 올해는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새로운 계획
을 세우는 등, 여러 가지 일로 바쁜 날이 새해 첫날이다.
하지만 금일 화산파는 달랐다.
산문 경비를 서고 있는 무사들을 비롯하여, 안쪽에 있는 대부분의 화
산 제자들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무슨 불만이 있는지 입이 튀어나온  자들도 있었고, 뜰에 쌓인 눈을
툭툭 차는 자들도 있었다.
속가문파의 최고라 알려진 곳으로 천의맹 초대맹주마저 배출하여 최
고의 성쇠를 구사한다고 할 수 는 화산파 제자들이 왜 이런 모습인지.
"니미럴……!"
매화검수의 거처인 매화각 한편에서 나직한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망연한 눈으로 처마 끝 고드름을 쳐다보는 인물, 소매 끝에 달린 3개
의 매화문양을 보면 매화검수 중 중견이라 할 수 있는 3제자가 분명했
다.
소청검(少淸劒) 진파(陳琶)라는 이름을 가진 자였다.
진파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천의맹 개파대전 때
문이었다.
새롭게 창설된 천의맹은 젊은 신진들에게는 기회의 장이라 할 수 있
었다. 더구나 천의맹의 주축은 화산파다.
산문을 떠난 많은 동료와 후배들은 그곳에서 이름을 얻게 될 터이고,
강호 영웅으로 우뚝 선 자들도 나올 것이다.
그들에게 뒤떨어진다는 자괴감이 진파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었다.
"휴우-! 그래도 일은 해야겠지."
나직한 한숨을 내쉰 진파가 산문이 있는 상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7백의 제자들이 떠나간 화산파는 텅 빈 절간처럼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맹주 처소인 자하각을 거처 화산에 처음  입문한 새내기들의 수련장
소인 수련각을 지나가던 진파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높게 세워진 담벼락 밖으로부터, 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던  탓이
었다.
"산짐승인가?"
내공을 끌어올려 외부를 살폈으나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배
가 고파 내려온 산짐승이라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들었던 소리는 결코 산짐승이 아니었으니.
"준비는?"
백설로 가득한 눈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색 옷을 걸친 이자는 얼마 전 명교 지하대전을 떠나온 좌정인이었
다.
"진격 준비는 끝났습니다."
"좋다."
고개를 끄덕인 좌정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전방을
향해 힘찬 고함을 내질렀다.
"명교의 제자들이여! 한을 곱씹으며 살아온  100년의 세월이었다. 이
제 그 한을 풀 때가 왔다. 위선에 가득한 적을 멸하라!"
"와-아!!
좌정인의 고함소리가 화산파 전역을 타고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거
센 함성이 호응하며 화산파  산문을 향해 백의를 걸친  명교 교도들이
돌진해 들었다.
"아-악! 적이닷!"
명교도를 발견한 경비 무사가 가슴에 박힌 화살을 붙잡고 고함을 내
질렀다.
뎅! 뎅뎅뎅! 뎅뎅!
비상을 알리는 타종소리가 급하게 상청을 넘어 안으로 스며들고,  이
곳저곳에서 화산제자들이 튀어나왔다.
그들 속에는 조금 전 산문으로 향하던 진파도 끼어있었다.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진파의 얼굴 또한 해쓱했다.
적이라니.
기절할 노릇이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천의맹 맹주를 배출한 화산파가 아닌가.
그런 곳을 공격할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악! 크아악!"
하지만 밖에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순백의 눈 위로 쏟아지는 선혈은 그 어느 때보다 붉었다.
"저들은…."
상청 쪽으로 몸을 날리던 진파의 신형이 우뚝 멈춰 섰다. 백의  걸친
수많은 인영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무기도 달랐고, 움직임도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불꽃 문양이 생생하게 수놓아진 옷이었다.
선배들을 통해 수없이 들었던 단체, 죽음과 저주를 몰고 다닌다는 사
악한 자들. 그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처단해야 할 악적이라 하였다.
"마교(魔敎)…!"
왼쪽에서 붉은 화염구가 날아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알아
차렸다 하더라도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불의 사제의 수장인 좌정인의 공격이었기 때문이었다.
"크아악!"
붉은 화염에 휩싸인 진파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날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우리 명교도인의 피가 중원 전역에  뿌려질 것
이다. 적의 피와 함께."
사방에서 솟구쳐 오르는 불길을 쳐다보며 좌정인이 중얼거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노래의 집에  가면 먼저간 형제들이 기다
리고 있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무엇이  두려운가! 아무것도 하
지 못하는 걸 두려워해야 한다!"
사방으로 화염을 난사하며 고함을 질렀다. 3백 여명에 불과했지만 화
산파 제자들은 강했다.
"하지만 오늘 화산파의 본산은 사라진다. 네 놈들은 천의맹  한 곳에
고립되어 살아야 한단 말이다. 전쟁은 그 때부터다!"
살기 어린 좌정인의 목소리가 불길을 타고 울렸다.
제2차 정마전쟁(正魔戰爭)은 백색의 눈과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천무맹 개파대전에 참석하고 있는 무인들은 자신들의 본산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일련의 암살 사건으로 인하여 침울해 있었던  강호 무림이 천의맹의
개파로 예전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 즐기고 있을 뿐이
었다.
화산에서 남서쪽으로 1백 리 떨어진 옥산 자락에  들어선 천의맹 건
물은 연일 쏟아져 들어오는 방문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수만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셀 수 없는  건물들은 5년 만에 태동한
천의맹의 위용을 보는 듯하였다.
수많은 건물들 중 단연 발군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천의맹 한가운데
세워진 7층 건물이었다.
청화를 쓴 듯 푸른빛을 발하는 기와가 덮인  이 건물이 천의맹주 감
연청의 처소인 천무전(天武殿)이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환한 미소를 머금은 감연청이 막 안으로 들어선 이들을 맞았다.
천의맹 주축이었던 구파는 전부 도착해 있었고, 무림세가의 인물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축하드립니다, 맹주님!"
백색 장검을 매고 있는 이자는 안휘의 패자인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
장순이었다.
그 뒤로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사천당가 가주께서 오셨습니다."
남궁장순을 안내하고 있는 순간 밖으로부터 커다란 외침소리와 함께
4남 1여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사천당문의 가주 당성의 그의 세 아들, 그리고 외동딸이라 알려진 당
가려였다.
"어서 오십시오 당가주님! 먼길을 오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맹주."
감연청을 향해 포권을 취한 당성이 곁에 있던 아들들을 소개했다.
"인사드리거라!"
"소생 당상운이옵니다."
30대 중반의 인물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함과 동시에 나머지 두
명 또한 포권을 취하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소생의 딸입니다. 강호엔 냉혈독봉이라 알려져 있
더군요."
"당 가주는 복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려. 건실한 아들에  미모의 따님
까지."
감연청의 얼굴에 놀라운 표정이 어렸다. 당성의 세 아들보다  당가려
에게 오히려 더 놀랐다.
백의 경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무공은 자신으로서도 측정하
기 힘들었다.
일행 중 가장 강자가 바로 그녀였던 탓이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계집아이가 무공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괜찮
은 신랑감이나 있으면 소개나 시켜주십시오. 내 단단히  한턱 쓰겠습니
다."
"설마 아직 정혼자가 없단 말입니까?"
호들갑을 떨던 감연청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굳이 당가려를  데리고
천의맹에 들린 당성의 의도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없었던 게 아니고, 이 아이가 혈린만독편을 완성했다는 소문이 돌자
접근하는 사내들이   없소이다. 사내녀석들이  그렇게  간이 작아서야
원…."
"정말이십니까? 진정 가주의 여식이 겁천십웅의 무공을 완성했단 말
입니까?"
구파의 장문인을 비롯한 실내의 모든 인물들이  놀란 얼굴로 당가려
를 주시했다.
혈린만독편이 당문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
다. 하지만 지난 3백 년간 혈린만독편을 완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까다롭고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 혈린만독편을 이제 24살인 당가려가 터득했다고 하였다.
"운이 좋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각파 장문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당가려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들의 시선보다는  혈린만독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 때문이었다.
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잊지 못했던 사람. 지난 3년은  가슴속
멍울로 변해버린 야혼의 존재를 확인했을 뿐이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작은아버지의 의도를 알면서도  선뜻 따라나섰던
이유는 야혼 때문이었다.
그가 천의맹으로 온다는 소식을 냉소소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개봉에 있다는 당 노야란 분에 대한 소식도.
"저는 그만 들어가 쉬겠습니다. 아버님."
"그래, 나가보거라."
당성과 안쪽 중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 당가려가 밖으로 나왔다.
"빨리 와! 야혼."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루라도 빨리 개봉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냉소소가 보내준  혈신월을 만들
었다는 당 노야란 분이  친아버지가 아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또다시 실망할까 두려웠다.
야혼이 오면 좀더 자세한 걸 알아보고 개봉으로 갈 참이었다.
사천당문 일가가 도착한 후에도 많은 무인들이 도착했다. 산동악가를
비롯하여 하북팽가, 그리고 은거했던 강호인들이  속속들이 천의맹으로
들어섰다.
감연청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예상을 초과한 인원수 때문이었다. 9파를 제외하고 그가 기대했던 무
인들의 수는 5백 명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새 1천 5백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처럼만 늘어난다면 천의맹 병력은 최소 7천이 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9파 1방을 제치고 천의맹이 강호 최대 방파로  우뚝 서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곳의 수장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화기애애하던 천무전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저녁나절 개파대전의 식을 시작하려는 찰라 개방을  통해 엄청난 소
식이 들어왔던 것이었다.
"무슨 소립니까, 본산이 기습당하다니요?"
해쓱해진 감연청이 방금 들어온 개방 방주 철조양을 향해 고함을 내
질렀다. 감연청뿐만이 아니었다.
실내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믿을 수가 없었
다. 감히 누가 있어 구파를 공격한단 말인가.
더구나 천의맹이란 단체까지 결성한 구파다.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공
격하지 못할 터인데.
"마교외다…! 마교가 재림했소이다. 맹주."
"마교라고요!"
"지금까지 들어온 보고를 보면  전 문파가 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희 개방 총단도 급습을 당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하지만 철조양의 말은 시작에 불과했다. 개방 인물들을 통해  연이어
들어오는 소식에 각 파의 장문인들을 넋을 놓고 말았다.
전멸, 각 문파에 남아있던 제자들을 비롯하여 수백 년 동안 내려왔던
대부분의 비전들이 소실되었다는 것이었다.
화산파의 자하각이 불탔고, 무당파의 태화궁이 불탔다고 하였다.
단 하루만에 근본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가봐야 하겠습니다, 맹주님!"
종남파 문주 대라만검 황철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본인  눈으
로 직접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황철군을 필두로 다른 문파 장문인들도 일어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자리를 떴다.
그러한 상황은 천무전 밖이라 하여 다를 바 없었다.
천무전을 나선 문주들을 따라 각파의 수뇌들이 서둘러 몸을 날렸다.
"무슨 일이에요, 백부?"
소란스런 주변 동정에 깜짝 놀란 당가려가  장대손 거처로 들어서며
물었다. 그 또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명교(明敎)다……."
"그럼 그녀가? 하지만 이제 3년인데…."
성모궁으로 갈 때 만났던 여호치를 떠올린  당가려가 고개를 갸웃거
렸다. 야혼에게 들은 바로는 여호치의 세력은 거의 없었다.
성모궁을 찾아갈 때도 화소미와 단 두 명이 전부였던 그녀가 아니었
던가.
그랬던 그녀가 구파를 치다니…….
"명교 교도들은 많으니까…. 그나저나 걱정이다, 이제부터 시작일 터
인데. 나도 그만 가봐야겠다."
"혹시…."
"그 녀석은 상관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럴 거예요, 꼴통 같으면 이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을 테니까요."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인지 알 길은 없지만 구파의 본산을 공격
한 건, 그녀가 보기엔 실수처럼 보였다.
본산을 잃었다지만 구파 무인들에게는 천의맹이라는  마지막 보루가
남아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구파는 더욱 강하게 결속될 것임에 분
명하다.
"자신이 있어 그랬는지도…. 그런데, 그  녀석을 소개시킬 자신은 있
는 거냐?"
당가려가 기다리는 사람이 야혼이란 사실을 알기에 묻는 말이다.  사
천당문의 여식과 하오밀문의 문주, 야혼에게 아무리 후한  점수를 줘도
어울리는 쌍이 아니다.
더구나 당성은 야망이 큰 사람이고 보니, 당가려가 상처받지나  않을
까 걱정이 앞섰다.
"저도 어린애가 아닌걸요…."
당가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정파인들 중 야혼의 능력에 대하여 알
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 또한 냉소소에게 듣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무공으로 치자면 그를 능가할 무인은 몇 명 없을 거라 하였다.  아니
어쩌면 무림에서 가장 강자가 그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단지 문제라면 야혼이 스스로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리고 꼴통은 잔머리의 대가고요."
"그래 잘되겠지, 일단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꾸나,  녀석이 천의맹에
들어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럼 다녀와서 보자."
당가려의 어깨를 두드린 장대손이 밖을 향해 몸을 날렸다.
"훗! 야혼을 겪어본 백부님이 그런 소릴 하는군요. 무공이 없는 상태
에서도 제 몸을 주물럭거렸던 녀석인데. 이 세상에 야혼을 막을 사람은
없어요. 왜냐고요? 저도 그를 도울 테니까요. 야혼이 원하는 대로…."
멀어지는 장대손을 쳐다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   *   *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 붉어진 얼굴로 허연
입김을 불어내는 그들은 수인들을 없애기  위해 출병한 오이라트군 선
발대였다.
"아미타불! 북쪽이라 그런지 더럽게 춥구먼. 이럴 땐 그저 개 거시기
에 화주 한 병이면 몸이 스르르  녹는데…. 저 염병할 문주 때문에  더
춥네 그랴."
차갑게 얼어있는 땅바닥을 툭툭 차며 추기영이 투덜거렸다. 테스트시
검에 오른 지 벌써 3일, 내공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도  한계에 달
한 일행은 준비한 양가죽으로 몸을 감싼 채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문주라는 놈이 하는 짓이라곤."
태웅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한쪽 구석을 흘기듯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가있는 곳은 조그마한 토굴이었다.
"니들도 우리처럼 하면 될 것 아냐 임마. 몸까지 허락한 사인데 무슨
걱정이냐?"
토굴 속에서 고개만 삐죽 내민 야혼이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산중에 오르자마자 야혼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굴을 파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갈만한 토굴을 퍼서는  양가죽으로 고명지와 자신의 몸
을 둘둘만 다음 그 안으로 들어가 여태껏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 잘났다, 개불알 문주야. 그렇게 살다 콱 뒈져라!"
야혼을 향해 눈을 치켜 뜬 두 사람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계속하여
말을 섞어봐야 손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주변의 눈들이 너무 많았다.
"원래 중원 사내들이 약하다는 건 알지만 그대는 좀 심하군."
사뭇 도전적인 눈으로  야혼을 노려보는  이 자는 혈칠랑(血七狼)의
대형인 투크였다.
"명지야 저 자식 하는 말을 해석 좀 해 봐라!"
투크를 빤히 쳐다보던 야혼이 가슴에 고개를 묻고 있는 고명지를 향
해 물었다.
'전음으로 말해, 알아듣는단 말이야. 그리고 제발 손 좀 가만있어라.'
고명지가 숨을 헐떡거리며 전음을 보냈다. 토굴 속에 있으면서도  야
혼의 손은 쉬질 않았다.
끊임없이 온몸을 쓰다듬었다. 물론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명분이긴
하였지만, 그 부분이 엉덩이 쪽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냐. 중원 말을 알아듣는  저 새끼 잘못이지. 나처
럼 못 알아들으면 기분 나쁠 필요가 없잖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방금 저 고양이가 했던 말이나 해석해봐."
"하-악! 너보고 약해빠진 놈이라…."
"그랬어?"
부르르 떠는 고명지를 더욱 거세게 껴안으며  투크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댁도 그렇게 생각하쇼? 하긴 좀  쪽팔린 짓이긴 해. 하지만  당신도
고양이털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마찬가지잖아."
"놈!"
푸욱!
투크의 발이 얼어붙은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저 새끼라 하였다. 더
구나 머리에 쓰고 있는 늑대 가죽을 고양이 털이라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솟아 올랐으나 이내 참았다.
"병력을 둘로 나눈다. 너희 둘과 우리는 동쪽 계속으로  들어가고 저
들은 서쪽이다."
"이봐 고향이 이 야심한 밤에 어딜 간다고 그러나.  오늘밤은 이곳에
서 자고 내일 하는 게 어때. 따뜻하고 좋은데."
고명지에게서 말을 전해들은 야혼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명령이다, 중원 놈!"
매몰차게 말을 남긴 투크가 휙 몸을 돌렸다.
"씨부럴 새끼들, 할말 없으면 전부  명령이래. 얘는 또 왜이래.  어디
아파?"
"나쁜 놈! 사람을 그런 식으로…."
고명지가 힘없는 목소리로 눈을 흘겼다.
문제의 발단은 양심신공이었다. 금환신공이 12성 달성하자 야혼은 마
법에 대항하기 위해선 반드시 익혀야  한다면서 양심신공 구결을 내밀
었다.
처음 양심신공 구결을 받았을 때만 하여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하지
만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양심신공의 기초가 잡히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을 더듬기 시
작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남에게 들킬까봐 전  내공을 끌어올려 주
변에 막을 쳐야만했다.
"양심신공을 빨리 익히기 위해선 어쩔 수 없잖아."
"그런데 왜 나만 대상이 되는데. 야혼 네가  익힐 때도 그랬고, 내가
익힐 때도…."
"어째 무공 익히기 싫다는 말로 들린다."
"그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열심히 익혀. 자리 깔고 앉아서 무공을 익힌다고 완성되는
게 아냐. 가장 중요한 게 환경이라고.  좀 어려운 말로는 필요성이라고
하지. 힘들면 그만할까?"
"아냐, 힘들다기 보다는 창피해서…."
재빨리 도리질을 했다. 야혼의 말마따나  양심신공의 성취는 빨랐다.
구결을 쉽게 풀이하여 적어주었다지만, 무당파의 최고 절학 중 하나다.
그런 무공을 벌써 5성 이상 성취를 본 것이다. 혹시 자신이 천재 아
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창피하기는, 이곳에선 우린 부부야. 부부가  사랑하는 건 창피한 게
아냐. 부부이면서 사랑을 못하는 게 창피한 거지. 읏차!"
하나로 얽힌 고명지와 야혼의 신형이 구덩이 속에서 불쑥 솟구쳐 올
랐다.
"이따 보자!"
태웅과 추기영을 향해 말을 남긴 야혼의  신형이 혈칠랑이 움직였던
곳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영약은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
소리마저 삼켜버린 듯 검은 어둠에 잠긴 고요한 지하대전.
차가운 기운이 가득한 이곳에도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는지, 대전  한
가운데 만들어진 반장 높이의 단에서 나직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데, 그 소리는 인간의 숨소리가 아니었다.
미약한 숨소리에 섞여 들리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숨소리의 주인공은 온통 은색 털로 뒤덮인 낭인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낭인이 가부좌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쉬리링!
일순 낭인의 몸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솟구쳐 오르고  1장 크기의 동
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몸에서 발산되는 기운에 절로 떠오르는 부공삼매의 절대 경지였다.
하지만 낭인의 몸에서 이는 변화는 시작에 불과했다. 다섯 가지의 빛
들이 낭인의 머리위쪽에서 하나로 모이더니 둥근 원으로 뭉쳐졌다.
스스스!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던 은빛 털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낭인의
모습도 변했다.
뾰족 튀어나왔던 입이 들어가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모습을 감췄다.
손과 발에 나 있던 손톱들이 사라지면서 동체가 작아지고, 머리 위의
오색 환(環)이 괴인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번쩍!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괴인의 눈이 번쩍 떠지고,  그곳으로부
터 광선 같은 광채가 전방으로 쭉 밀려갔다.
"프! 핫! 하하하!. 드디어 성취했다. 이 가주렴이 내력과 마력을 합치
는데 성공했단 말이다."
앙천광소(仰天狂笑)를 터트리는 괴인은 자신을  가리켜 분명 가주렴
이라 하였다.
오행신마 가주렴, 겁천십웅의  일인이자, 철혈마존에  이어 겁천십웅
서열 3위에 올랐던 자.
가주렴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가득했다.
1백 년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던 탓이었다.
"드디어 낭인(狼人)의 저주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반노환동(返老還
童)까지 이루어냈다. "
야혼이 오면 좀더 자세한 걸 알아보고 개봉으로 갈 참이었다.
사천당문 일가가 도착한 후에도 많은 무인들이 도착했다. 산동악가를
비롯하여 하북팽가, 그리고 은거했던 강호인들이  속속들이 천의맹으로
들어섰다.
감연청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예상을 초과한 인원수 때문이었다. 9파를 제외하고 그가 기대했던 무
인들의 수는 5백 명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새 1천 5백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처럼만 늘어난다면 천의맹 병력은 최소 7천이 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9파 1방을 제치고 천의맹이 강호 최대 방파로  우뚝 서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곳의 수장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화기애애하던 천무전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저녁나절 개파대전의 식을 시작하려는 찰라 개방을  통해 엄청난 소
식이 들어왔던 것이었다.
"무슨 소립니까, 본산이 기습당하다니요?"
해쓱해진 감연청이 방금 들어온 개방 방주 철조양을 향해 고함을 내
질렀다. 감연청뿐만이 아니었다.
실내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믿을 수가 없었
다. 감히 누가 있어 구파를 공격한단 말인가.
더구나 천의맹이란 단체까지 결성한 구파다.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공
격하지 못할 터인데.
"마교외다…! 마교가 재림했소이다. 맹주."
"마교라고요!"
"지금까지 들어온 보고를 보면  전 문파가 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희 개방 총단도 급습을 당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하지만 철조양의 말은 시작에 불과했다. 개방 인물들을 통해  연이어
들어오는 소식에 각 파의 장문인들을 넋을 놓고 말았다.
전멸, 각 문파에 남아있던 제자들을 비롯하여 수백 년 동안 내려왔던
대부분의 비전들이 소실되었다는 것이었다.
화산파의 자하각이 불탔고, 무당파의 태화궁이 불탔다고 하였다.
단 하루만에 근본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가봐야 하겠습니다, 맹주님!"
종남파 문주 대라만검 황철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본인  눈으
로 직접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황철군을 필두로 다른 문파 장문인들도 일어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자리를 떴다.
그러한 상황은 천무전 밖이라 하여 다를 바 없었다.
천무전을 나선 문주들을 따라 각파의 수뇌들이 서둘러 몸을 날렸다.
"무슨 일이에요, 백부?"
소란스런 주변 동정에 깜짝 놀란 당가려가  장대손 거처로 들어서며
물었다. 그 또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명교(明敎)다……."
"그럼 그녀가? 하지만 이제 3년인데…."
성모궁으로 갈 때 만났던 여호치를 떠올린  당가려가 고개를 갸웃거
렸다. 야혼에게 들은 바로는 여호치의 세력은 거의 없었다.
성모궁을 찾아갈 때도 화소미와 단 두 명이 전부였던 그녀가 아니었
던가.
그랬던 그녀가 구파를 치다니…….
"명교 교도들은 많으니까…. 그나저나 걱정이다, 이제부터 시작일 터
인데. 나도 그만 가봐야겠다."
"혹시…."
"그 녀석은 상관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럴 거예요, 꼴통 같으면 이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을 테니까요."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인지 알 길은 없지만 구파의 본산을 공격
한 건, 그녀가 보기엔 실수처럼 보였다.
본산을 잃었다지만 구파 무인들에게는 천의맹이라는  마지막 보루가
남아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구파는 더욱 강하게 결속될 것임에 분
명하다.
"자신이 있어 그랬는지도…. 그런데, 그  녀석을 소개시킬 자신은 있
는 거냐?"
당가려가 기다리는 사람이 야혼이란 사실을 알기에 묻는 말이다.  사
천당문의 여식과 하오밀문의 문주, 야혼에게 아무리 후한  점수를 줘도
어울리는 쌍이 아니다.
더구나 당성은 야망이 큰 사람이고 보니, 당가려가 상처받지나  않을
까 걱정이 앞섰다.
"저도 어린애가 아닌걸요…."
당가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정파인들 중 야혼의 능력에 대하여 알
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 또한 냉소소에게 듣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무공으로 치자면 그를 능가할 무인은 몇 명 없을 거라 하였다.  아니
어쩌면 무림에서 가장 강자가 그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단지 문제라면 야혼이 스스로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리고 꼴통은 잔머리의 대가고요."
"그래 잘되겠지, 일단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꾸나,  녀석이 천의맹에
들어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럼 다녀와서 보자."
당가려의 어깨를 두드린 장대손이 밖을 향해 몸을 날렸다.
"훗! 야혼을 겪어본 백부님이 그런 소릴 하는군요. 무공이 없는 상태
에서도 제 몸을 주물럭거렸던 녀석인데. 이 세상에 야혼을 막을 사람은
없어요. 왜냐고요? 저도 그를 도울 테니까요. 야혼이 원하는 대로…."
멀어지는 장대손을 쳐다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   *   *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 붉어진 얼굴로 허연
입김을 불어내는 그들은 수인들을 없애기  위해 출병한 오이라트군 선
발대였다.
"아미타불! 북쪽이라 그런지 더럽게 춥구먼. 이럴 땐 그저 개 거시기
에 화주 한 병이면 몸이 스르르  녹는데…. 저 염병할 문주 때문에  더
춥네 그랴."
차갑게 얼어있는 땅바닥을 툭툭 차며 추기영이 투덜거렸다. 테스트시
검에 오른 지 벌써 3일, 내공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도  한계에 달
한 일행은 준비한 양가죽으로 몸을 감싼 채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문주라는 놈이 하는 짓이라곤."
태웅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한쪽 구석을 흘기듯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가있는 곳은 조그마한 토굴이었다.
"니들도 우리처럼 하면 될 것 아냐 임마. 몸까지 허락한 사인데 무슨
걱정이냐?"
토굴 속에서 고개만 삐죽 내민 야혼이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산중에 오르자마자 야혼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굴을 파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갈만한 토굴을 퍼서는  양가죽으로 고명지와 자신의 몸
을 둘둘만 다음 그 안으로 들어가 여태껏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 잘났다, 개불알 문주야. 그렇게 살다 콱 뒈져라!"
야혼을 향해 눈을 치켜 뜬 두 사람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계속하여
말을 섞어봐야 손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주변의 눈들이 너무 많았다.
"원래 중원 사내들이 약하다는 건 알지만 그대는 좀 심하군."
사뭇 도전적인 눈으로  야혼을 노려보는  이 자는 혈칠랑(血七狼)의
대형인 투크였다.
"명지야 저 자식 하는 말을 해석 좀 해 봐라!"
투크를 빤히 쳐다보던 야혼이 가슴에 고개를 묻고 있는 고명지를 향
해 물었다.
'전음으로 말해, 알아듣는단 말이야. 그리고 제발 손 좀 가만있어라.'
고명지가 숨을 헐떡거리며 전음을 보냈다. 토굴 속에 있으면서도  야
혼의 손은 쉬질 않았다.
끊임없이 온몸을 쓰다듬었다. 물론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명분이긴
하였지만, 그 부분이 엉덩이 쪽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냐. 중원 말을 알아듣는  저 새끼 잘못이지. 나처
럼 못 알아들으면 기분 나쁠 필요가 없잖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방금 저 고양이가 했던 말이나 해석해봐."
"하-악! 너보고 약해빠진 놈이라…."
"그랬어?"
부르르 떠는 고명지를 더욱 거세게 껴안으며  투크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댁도 그렇게 생각하쇼? 하긴 좀  쪽팔린 짓이긴 해. 하지만  당신도
고양이털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마찬가지잖아."
"놈!"
푸욱!
투크의 발이 얼어붙은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저 새끼라 하였다. 더
구나 머리에 쓰고 있는 늑대 가죽을 고양이 털이라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솟아 올랐으나 이내 참았다.
"병력을 둘로 나눈다. 너희 둘과 우리는 동쪽 계속으로  들어가고 저
들은 서쪽이다."
"이봐 고향이 이 야심한 밤에 어딜 간다고 그러나.  오늘밤은 이곳에
서 자고 내일 하는 게 어때. 따뜻하고 좋은데."
고명지에게서 말을 전해들은 야혼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명령이다, 중원 놈!"
매몰차게 말을 남긴 투크가 휙 몸을 돌렸다.
"씨부럴 새끼들, 할말 없으면 전부  명령이래. 얘는 또 왜이래.  어디
아파?"
"나쁜 놈! 사람을 그런 식으로…."
고명지가 힘없는 목소리로 눈을 흘겼다.
문제의 발단은 양심신공이었다. 금환신공이 12성 달성하자 야혼은 마
법에 대항하기 위해선 반드시 익혀야  한다면서 양심신공 구결을 내밀
었다.
처음 양심신공 구결을 받았을 때만 하여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하지
만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양심신공의 기초가 잡히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을 더듬기 시
작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남에게 들킬까봐 전  내공을 끌어올려 주
변에 막을 쳐야만했다.
"양심신공을 빨리 익히기 위해선 어쩔 수 없잖아."
"그런데 왜 나만 대상이 되는데. 야혼 네가  익힐 때도 그랬고, 내가
익힐 때도…."
"어째 무공 익히기 싫다는 말로 들린다."
"그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열심히 익혀. 자리 깔고 앉아서 무공을 익힌다고 완성되는
게 아냐. 가장 중요한 게 환경이라고.  좀 어려운 말로는 필요성이라고
하지. 힘들면 그만할까?"
"아냐, 힘들다기 보다는 창피해서…."
재빨리 도리질을 했다. 야혼의 말마따나  양심신공의 성취는 빨랐다.
구결을 쉽게 풀이하여 적어주었다지만, 무당파의 최고 절학 중 하나다.
그런 무공을 벌써 5성 이상 성취를 본 것이다. 혹시 자신이 천재 아
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창피하기는, 이곳에선 우린 부부야. 부부가  사랑하는 건 창피한 게
아냐. 부부이면서 사랑을 못하는 게 창피한 거지. 읏차!"
하나로 얽힌 고명지와 야혼의 신형이 구덩이 속에서 불쑥 솟구쳐 올
랐다.
"이따 보자!"
태웅과 추기영을 향해 말을 남긴 야혼의  신형이 혈칠랑이 움직였던
곳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영약은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
소리마저 삼켜버린 듯 검은 어둠에 잠긴 고요한 지하대전.
차가운 기운이 가득한 이곳에도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는지, 대전  한
가운데 만들어진 반장 높이의 단에서 나직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데, 그 소리는 인간의 숨소리가 아니었다.
미약한 숨소리에 섞여 들리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숨소리의 주인공은 온통 은색 털로 뒤덮인 낭인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낭인이 가부좌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쉬리링!
일순 낭인의 몸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솟구쳐 오르고  1장 크기의 동
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몸에서 발산되는 기운에 절로 떠오르는 부공삼매의 절대 경지였다.
하지만 낭인의 몸에서 이는 변화는 시작에 불과했다. 다섯 가지의 빛
들이 낭인의 머리위쪽에서 하나로 모이더니 둥근 원으로 뭉쳐졌다.
스스스!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던 은빛 털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낭인의
모습도 변했다.
뾰족 튀어나왔던 입이 들어가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모습을 감췄다.
손과 발에 나 있던 손톱들이 사라지면서 동체가 작아지고, 머리 위의
오색 환(環)이 괴인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번쩍!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괴인의 눈이 번쩍 떠지고,  그곳으로부
터 광선 같은 광채가 전방으로 쭉 밀려갔다.
"프! 핫! 하하하!. 드디어 성취했다. 이 가주렴이 내력과 마력을 합치
는데 성공했단 말이다."
앙천광소(仰天狂笑)를 터트리는 괴인은 자신을  가리켜 분명 가주렴
이라 하였다.
오행신마 가주렴, 겁천십웅의  일인이자, 철혈마존에  이어 겁천십웅
서열 3위에 올랐던 자.
가주렴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가득했다.
1백 년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던 탓이었다.
"드디어 낭인(狼人)의 저주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반노환동(返老還
童)까지 이루어냈다. "
"어떻게 저런 무공을 지닌 여인이…."
발이 묵인 낭인을 골라  목을 치고 다니던 투크가  고명지의 모습을
흘낏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무공은 가공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명지가 조정하는 금환이었다.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반월도로도 간신히 잘라내는 낭인의 목을
두부 자르듯 잘라내고 있다.
저런 엄청난 무공을 가진 여인이 바센에게 가슴을 잡혔을 때 참았다
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놈 때문이었군."
고명지 뒤에 몸을 숨긴 채  연신 입을 놀리는 야혼의 모습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녀석의 모습을 보자 그때의 상황이 십분 이해가 갔다.
"계집보다 못한 놈. 일단 저 여자를 지치게 하는 수밖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명지가 있는 곳에 반해 자신의 부하들이 있는 곳은 엉망이었다.
갈가리 찍긴 수하들의 시체만 즐비했다. 마치 부하들끼리 싸움을  벌
인 듯한 모습이었다.
낭인 한 마리는 병사 5명의 목숨을 요구했다.
절반 이상의 병사들이 죽고 남아 있는 자들은 2백  명이 채 되지 않
았다. 그들의 숫자 또한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병사들은 퇴각하라!"
전장을 향해 뛰어들며 고함을 질렀다.
'부얀! 동생들과 함께 저들 뒤를 따라라!'
낭인 한 마리의 목을 자르고  있는 둘째에게 전음을 보냈다. 후퇴와
더불어 임무를 완수할 때가 된 것이다.
투크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이라트 병사들이  몸을 빼기 시
작하였다.
"명지야 후퇴하래."
고목에 매미 붙듯 고명지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야혼이 뒤쪽으
로 이동하며 말했다.
"하-아!"
전권에서 밀려난 고명지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싸웠는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조건 낭인이 있는 곳으로 금환을 보냈던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뒤쪽에 야혼이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 없이 싸웠
다. 문득 극심한 갈증이 밀려왔다.
"나 물먹고 싶어."
"물? 물을 왜 네가 먹어. 저 놈들을  물 먹여야지. 근데 오줌은 괜찮
아?"
"아니? 아직도 마려워. 그런데 저 자식들은 왜 이쪽으로 전부 몰려오
는데?"
야혼이 가리킨 곳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잔뜩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
다. 금환신공의 마지막 초식을  얼마나 펼쳤는지, 단전이  텅 비어비린
듯했다.
"네가 예뻐서 그런 거지 뭐겠냐. 발르는 건 나에게 맡기고 너는 저놈
들이나 상대해라."
"또? 아까 말한 하늘같은 서방님은 어디 갔냐!"
따라오는 수인들을 향해 신경질 적으로 양손을  뿌리며 고함을 질렀
다.
그녀의 손을 떠난 금환들이 다시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하였다.  하지
만 조금 전보다는 위력이 약해진 듯, 반투명하게 보였던 금환들이 선명
한 금색을 띠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 잘릴 줄 아냐?"
"크아악!"
이번에 낭인들의 팔 다리를 가리지 않았다. 동시에 십여 개의 수인들
사지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가루로 변했다.
"크-앙!"
"이크!"
"피해야지 수인에게 달려들어가면 어떡해! 나 힘없단 말이야."
낮게 고함을 내지른  고명지가 제마성검으로 수인의  팔을 잘라냄과
동시에 하나의 금환을 끌어들였다.
"고명지 엄청 말 많아졌네. 과묵하던 동창 첩형은 어딜 간 거야?"
"말 많은 게 싫어? 요옵!"
"커어억!"
"캑!"
"아니 더 좋아. 여자가 항상 웃고 있다는  것 행복하다는 말이고, 행
복하다는 것은 남편이 밤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말이거든."
두 마리 수인이 무너지듯 쓰러지는 모습을  쳐다보던 야혼이 이번에
제자리에서 한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동시에 고명지의 허리춤에서 불덩어리 하나가 낭인의  목을 향해 나
아갔다.
화르륵!
"마법도 굉장하네?"
순식간에 머리가 사라진 낭인의 모습에 고명지가  감탄한 얼굴로 야
혼을 쳐다보았다.
욕조에서 물을 데울 때 써먹었던 마법불이었던 까닭이었다.
"환우멸( 宇滅)!"
싱긋 웃는 야혼의 모습에 힘을 얻었는지 고명지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표정은 조금전보다 더 신중했다.
기회가 생겼을 때 실전을 완전하게 익혀두자는 생각에서였다.
"조금씩 없애, 내일까지는 끌고 다녀야 하니까?"
"뭐야? 그럼 내일까지 참아야 한다고?"
고명지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쫓아오는 낭인보다 소피를 참아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곤혹스러웠다.
"하여간 사람은 바빠야 해. 마음이 편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땀을 많이 흘리면 되니까 열심히 해."
"이 한겨울에 땀은 무슨…."
하지만, 한 겨울이고 찬바람이 씽씽 몰아치는 산 속에서도 땀을 흘린
다는 사실을 그녀는 터득하고 말았다.
처음엔 도망만 치던 야혼이 어느 순간부터는  적을 향해 돌진하기도
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낭인들의  공격범위에 허점을 노출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제마성검과 금환을 이용하여 간신히  위기를 넘기곤 하
였던 거였다. 야혼이 도와주겠지 하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도와주는 척 하면서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만들곤 하였다.
그런 현상은 고명지의 옷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룻밤의 결전으로 앞가슴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곤욕을 치렀을 뿐
아니라 온몸은 땀에 젖었다.
"다 왔다. 여기서 놈들을 정리하자."
밤새도록 도망치던 야혼이 처음 멈춰선 곳은  위압적인 절벽에 면해
있는 20여장 폭을 가진 공터였다.
"이제 6시진 정도는 지났겠지?"
10명 남은 수인들을 쳐다보던 야혼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6시진? 앙림이 말했던 한 나절 때문에?"
그제야 야혼의 의도를 눈치챈 고명지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마도
련에서 앙림이 했던 말이 생각났던 탓이었다.
원인(猿人)으로 버티는 시간이 한 나절이라 하였던 것이다.
"한꺼번에 전부 없애는 것 알지?"
"알았어."
싱긋 미소를 머금은  고명지가 천천히 다가오는  수인들을 쳐다보며
가슴으로 양손을 모았다.
"크르르! 드디어 끝났느…."
가장 선두에 있던 낭인이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진득한 실기를
뿜어냈다.
"병신들, 이제는 자야할 시간이란 것도 모르고…."
"잘 시간…? 크-앙!"
자신의 팔을 쳐다보던 낭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1척에 달했던
손톱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던 탓이었다.
수인 상태를 벗어나 인간으로 환원되는 현상이었다.
"타핫!"
고명지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터지고 16개의 반투명한 금환
이 수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스스스!
"우엑!"
수인 열 마리가 가로로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고명지가 한 움
큼 피를 쏟아내며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
"이제는 …되겠지?"
"응? 으응…. 볼일 봐."
울 듯한 표정으로 서있는 고명지의 모습에 깜짝 놀란 야혼이 바위를
가리켰다.
"한번만 더 그러면 죽여버릴 거야!"
긴장이 풀리자마자 급격하게 소변이 마려웠다. 아니 걸음조차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아랫배가 조금만 흔들려도 곧 쏟아질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야혼이 없었더라면 바로 바지를 내리고 소피를 보았을 터
이지만 끈질기게 쳐다보는 야혼의 시선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깁게 심호흡을 하여 아랫배를 진정시킨 다음, 할 수 있는 한  조심스
럽게 걸음을 옮겼다.
"쯧쯧! 나 같으면 그냥 싸고  말겠다! 아이고 저러다 쓰러지고 말지.
속 모른 놈들이 보면 나를 지켜주느라 내상을 당했다고 여기겠다."
"맞지, 뭘 그래!"
샐쭉 입을 내민 고명지가 바위 뒤로  돌아가자마자 철버덕 주저앉았
다. 바위라도 있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뿐 엄청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고명지의 말처럼 오해하는 자들은 분명 있었다.
낭인들을 뒤따라 왔던 혈칠랑들이 그들이었다.
"대형 분명합니다. 저년은 더 이상 내공을 쓰지 못합니다."
둘째 부얀이 투크를 향해 낮게 말했다. 지금껏 혈칠랑 일행이 이곳에
숨어있던 이유는 고명지의 무공 때문이었다.
야혼 놈만 있었더라면 진작에 덮쳐 끝장을 봤을 터이지만,  겁천십웅
의 무공인 금환신공 때문에 차마 나서질 못했다.
10명의 수인을 없앨 때만 하여도 내려가려는 생각을 했었다.
한데 그 다음부터 상황은 돌변했다.
물론 피를 토해냈다는 건 내상을 입었음을 의미하지만, 완전히  내공
을 쓰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탁한 피를 토해냄으로서 내기를 더 원활하게 다스릴 수 있고,
다시 내공을 모을 수 있다.
하지만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라면, 심한 내상을 당했다고 확
신해도 된다.
부얀이 서둘러 나서자는 이유였다.
"좋다, 시행하자."
고개를 끄덕인 투크가 몸을 일으켰다.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혈칠랑 중 가장 신중한 부얀이 확신했고, 자신 또한 같은 생각
이었다.
금환신공은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다는 확신.
"명지야 오줌발이 센 놈들은 정력도 좋다는 말 아냐. 네 오줌발은 웬
만한 지풍에 버금간다고 해야겠다. 혹시 바위에 구멍 뚫렸나 확인해….
빨라 싸라! 손님 왔다."
"무슨…."
화들짝 놀란 고명지가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었다. 장난말이  아니었
던 탓이었다.
"저런 개새끼들이…."
혈칠랑임을 알아본 고명지가 낮은  욕설을 뱉어냈다. 죽이고 싶다는
살의가 맹렬하게 끓어올랐다.
"내가 막을 펼쳐서 소리가 새어나가 않게 했으니까 맘편히  싸. 그리
고 나올 땐 이 옷 입고."
장포를 벗어 바위 너머로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기다려, 조금만 있으면 끝난단 말이야."
이제는 목까지 붉어진 고명지가  낮게 소리쳤다. 돌아버릴 지경이었
다. 야혼이 있는 것만 해도  죽을 맛인데 이제는 혈칠랑까지  몰려오고
있다.
"끝났다!"
내심 안도의 숨을 몰아쉰 고명지가 야혼이  던져놓은 장포를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이 아주 맑고 푸르게 보이지?"
"응! 세상이 달라 보여. 힘이 막  솟구치는 것 같고. 저 새끼들도 없
애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전면으로 속속들이 날아 내리는 혈칠랑을 가리키며 나직하니 말했다.
"그래선 안 되지. 너는 지금 다리에 힘도  없잖아, 이번엔 이 서방님
께 맡기라고."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혈칠랑 전면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런 죽일 년놈이? 저 자식부터 죽여! 아니 입부터 찢어버려!"
진득한 살기를 풍기며 투크가 고함을 내질렀다.
"타핫!"
투크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 뒤쪽에 있던  두 명이 지면을 박차
며 몸을 날렸다.
달탄 최고 무인이란 말이 결코 빈말은 아니었는지, 반월도와 늑대 송
곳니 모양의 낭아조에서 푸른 강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일단 팔이다 놈!"
낮게 소리친 두 명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양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야혼의 몸을 온통 허점 투성이었다.
더구나 동작마저 느려, 반 장  길이의 강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
다. 머리를 노려가던 반월도를 어깨 쪽으로 틀었다.
"웃어?"
어깨를 향해 도를 찍어간 인물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놈은 미소를 띠고 있다.
하지만,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악! 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야혼의 신형이 일순  빨라졌다 싶더니 활짝
폈던 양팔을 가운데로 합쳤다.
퍼억! 퍽!
"크악!"
"커억!"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웃어야지 그럼 울랴?"
"금강불괴(金剛不壞)?"
투크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설마하니 강기를 머금은 반월도와
낭아조가 통하지 않는 신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지금껏 무공을 속였단…."
"못 알아듣는다고 했잖아 개자식아. 그러니까 자꾸 말하지 말란 말이
야."
어느새 검게 변한 야혼의 동체가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다섯 명 사
이로 뛰어들었다.
"막앗!"
굳이 투크의 말이 아니더라도 남아있는 혈칠랑은  야혼을 막아설 수
밖에 없었다. 다섯 명 안쪽으로 뛰어들었지만 그의 행동은 조금전과 전
혀 다르지 않았다.
챙!
이번에 쇳소리를 낸 곳은 야혼의 목이었다.
"꼭 확인을 해야겠어?"
목에 걸린 도를 붙잡아 부러뜨린  다음, 상대의 면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와작!
"크아악!"
형체를 잃어버린 얼굴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지고 야혼의 오른손
이 횡으로 호선을 그렸다.
"커억!"
야혼의 손에 들려있던 반도에서 검은 광채가 터지고, 오른쪽에서  달
려들던 자의 얼굴이 절반으로 잘렸다.
하지만 야혼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오른손의 움직임을 쫓아  그
의 동체가 회전을 했고, 쭉 내민 왼손 손날에 또 다른 한 명의 목이 걸
려들었다.
비명소리조차 들여오지 않았다. 강기가 서린 손은 더 이상 인간의 피
륙이 아니었다. 이미 도이고 검이었다.
툭!
손날로 쳤음에도 불구하고 혈칠랑 셋째의 목은  이제야 바닥으로 떨
어졌다.
"이럴 수가…."
"조금전 입을 찢어버린다고 했던가, 그럼 이건 어떠냐?"
부르르 떨고 있는 투크를 향해 다가들며 그의  면상을 향해 오른 손
정권을 쭉 내밀었다.
"허-억!"
투크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조금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일순 눈
앞에서 사라진 듯했던 녀석이 어느새 주먹을 뻗어내고 있었던 거였다.
질끈 눈을 감고 왼손을 들어올렸다.
반월도를 휘두를 시간조차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크-아악!"
강기를 머금은 야혼의 정권은 투크의 왼손을  박살내며 계속 전진하
여, 쩍 벌어진 그의 입안으로 틀어박혔다.
"컥!"
투크의 머리가 박살나는 순간 바로 곁에서  부얀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고명지의 금환이 그의 목을 뚫어버린 것이었다.
"세상에…. 도대체 얼마만큼 강해질 건데?"
죽어간 혈칠랑보다 더 놀란 사람은 오히려 고명지였다.
일반 무인도 아니고 강기경지에 올라있는 6명을 없애는데 반각도 걸
리지 않았다. 더구나 강기가 서린 무기가 통하지 않는 몸이라니.
금강불괴지신이라 할지라도 강기가 서린 검을 맨몸으로 받지 못한다.
비록 상처는 없다지만 몸 내부에 오는  충격까지는 완전하게 흡수하
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물을 잡으려면 방법이 없잖아  강해질 밖에. 안  그렇소 영물 영
감."
투크의 입안에 틀어박혔던 정권을 뽑아낸 야혼이  고개를 들며 나지
막이 말했다.
"놀랍군! 이곳에 있는 나를 알아보았단 말인가?"
"헉!"
나직한 신음을 내지른 고명지가 산봉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무런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는 그곳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탓
이었다.
"그럼, 그렇게 자랑을 하고  있는데 못 알아볼 리가  있겠소. 오히려
나는 당신이 더 궁금해. 지금껏 나는 무공한번 제대로 펼친  적이 없었
는데."
문득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기운을 흘려내지 않았더라면  알
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강자라는 의미였다.
"지옥도 때문이다. 우리는  그 지옥도를 흑마신(黑魔神)이라  불렀다.
올라오겠느냐?"
"그랬나? 무덤은 한번만 파고 싶으니까 당신이 내려와."
"놀랍군. 이 가주렴의 무덤자리를 파주겠다고 하는 녀석이 있을 줄이
야."
"오행신마 가주렴!"
"저치 강해?"
화들짝 놀라는 고명지를 향해 야혼이 물었다.
"그 당시 서열 3위로 알려졌어."
"서열 3위가 저렇게 강해?"
의아한 얼굴로 허공을 주시했다. 점처럼 보이던 신형이 순식간에  확
대되어 계곡 전면으로 내려서는 것이었다.
"씨펄! 힘 좀 써야겠네."
폭발적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오행신마를 주시했다.  역천사황
이나 철혈마제보다 더한 강자가 오행신마였다.
"반노환동까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오행신마의 모습에 고명지가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반노환동의 고수는  처음이었다. 철혈마제나 역천사황마저도
이루지 못했던 어떤 경지를 오행신마는 성취했다는 반증이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소."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야혼이 오행신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거라. 내가 알고 있는 건 말해주마."
"다른 게 아니고, 혹시 금환신존(金環神尊)은  내시가 아니었나 해서
말이오."
고명지가 차고있는 금환 때문이었다. 보통  병기도 아니고, 겁천십웅
의 무공이 기록된 절대적인 무기를  아무렇게나 굴렸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금환엔 무공구결까지 적혀 있지 않았던가.
동창제독이나 되는 자가 범어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 또한 이치에 맞
지 않았다.
"맞다 금환신존 환성은 원래 내시 출신이었다. 지금은 위금충이란 이
름으로 살고 있지."
"세상에…."
고명지가 기절할 듯 놀란 얼굴로 오행신마를 쳐다보았다. 겁천십웅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가장 먼저 의심했던 자가 바로 위금충
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몸을 재생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내시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
각에서였다.
"환성은 태어나면서부터 불구였기 때문에 다시 살릴 방법이 없었다."
고명지의 의문을 해소해주려는 듯 오행신마가 환성에 대해 간단하게
말했다.
수인의 몸으로 변이하게 되면 과거에 잃었던 신체를 재생할 수가 있
다. 그러나 그건 정상적인 상태였다가 잘린 경우만 해당한다.
환성처럼 태생자체가 불구인 자들에게는 방법이 없다.
"쿡! 니미럴, 그럼 최소한 영물 3마리는 황실에 있겠군."
"응?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
나직한 야혼의 말에 오행신마가 놀라운 얼굴로 물었다.
"위금충 그놈 혼자 있었다면 진작에 황실은 아작 났을 건 아냐. 그놈
과 대치하고 있는 놈이 하나 있을 터이고, 황제 측근으로 있는 놈이 하
나 있겠지. 물론 다른 신분으로 있겠지만."
"그럼 사마세가!"
오행신마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고명지가 낮게 소리쳤다.  겁천십웅의
일인인 위금충과 힘 겨루기를 하고 있는 가문은 사마세가밖에 없기 때
문이었다.
"그럴 거다. 겁천십웅의 일인이 아니라면 위금충과 맞서지 못했겠지.
사마군상의 본명은 뭐요?"
고개를 끄덕인 야혼이 재차 물었다.
"그가 서음래다."
"염병할 종자들 살만큼 살았으면  저승으로 갈 일이지, 무슨  욕심이
남아서."
낮게 툴툴거린 야혼이 지옥도를 뽑아들고 전면으로 나섰다.
"놀랍구나. 지옥도법은 어느 정도 익혔느냐?"
야혼의 몸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는 기운을 감지한  오행신마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철혈마제나 역천사황을  이겼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정도 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거야 겪어보면 알겠지 뭐.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신도 저
놈들과 같이 묻힌다는 거야."
"이철상의 후예답게 광오하구나.  향후 10년만 지나면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터인데, 운이 없구나."
"내 말이 그 말이오. 이곳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잠사옹에게 구걸해서
얻은 삶을 조금이나마 더 유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안됐소이다 그려."
"놈!"
지금껏 초연한 자세로 일관하던 오행신마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지난 2백년간 떨치지 못했던 굴욕감이었다.
오행마공과 잠사옹이 넘겨준 마력을 합쳐 새로운 단계로 올라섰지만
잠사옹에게 패했던 일전은 여전히 마음속의 짐이었다.
"그렇다고 쪽팔려 할 것까지는 없소.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하
지만 말이야, 적어도 겁천십웅이라는 이름 값은 해야 했어. 적게 산 것
도 아니고 살만큼 산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병신 같은 짓을 했느냐
고. 겁천십웅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강호 무인들에게  미안하지도 않
아?"
"그건 겪어봐야 한다! 약한 자들을 결코 알지 못한다. 무(武)의 끝을
보기 위해 필요한 건 대단한 무공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 시
간을 원했고, 잠사옹은 주었다!"
절규하듯 말을 쏟아내며 양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순간 오행신마  몸
에서 오색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구쳐 올라 그의 주변을 배회하듯 움직
여 다녔다.
단지 의지만으로 오행마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비록 구걸하듯 얻은 세월이었지만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왠지
아느냐? 고개를 숙였던 것 이상을 얻었기 때문이니라. 바로 이것이다."
하늘을 향했던 오행신마의 대지를 자르듯 아래쪽으로 떨어지자, 그의
주위를 맴돌던 다섯 기운 중 불의 기운이 전방으로 튀어나왔다.
쉬이익!
화령폭풍(火靈爆風), 불을 만들어내는 마법과  오행마공 중 화(火)의
기운을 합쳐 만들어낸 무공이었다.
넘실대는 화염의 기운이 야혼 전면으로 물밀듯 밀려들었다.
"이크! 초장부터 너무 세게 나오는구먼. 그동안  살아온 세월도 정리
할 겸하여 천천히 합시다."
재빨리 고명지의 허리를 감싸안은 야혼이 뒤쪽으로  몸을 날리며 이
죽거렸다.
"대단하구나."
헛되이 허공을 치고만 오행신마가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몸
을 뺀 것처럼 보였지만, 놈의 몸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일순간 그가 움직인 거리는 10장이었다.
"3백 살이 넘은 늙은이도  못이기면 무공을 익힐 필요가  없지 않겠
나."
두 사람의 영향권 밖으로 고명지를 내려놓은  야혼이 오행신마를 쳐
다보며 웃었다.
"겪어보았는지 모르지만 이게 지옥도법 1초야!"
지면을 박찬 야혼의 신형이 조금 전과 같이 가공할 속도로 오행신마
를 향해 날았다. 하늘로 번쩍 들어올린 비천묵령도에 검은 기운이 잔뜩
어리고 길다란 도강이 쭉 튀어나옴과 동시에 천둥 같은 고함이 울렸다.
"지옥수라참(地獄修羅斬)!"
일순 지옥도가 기이한 변화를 보였고, 야혼의 전면에 무수한  점들이
나타났다.
"달라졌다!"
야혼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고명지가 낮게 소리쳤다. 마도련  천
비동에서 보았던 지옥수라참이 아니었다.
그때는 분명 50여 개의 점들이  무질서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야혼이 시전한 지옥수라참은 그 점들이 일정한 방위를 점하고 있다.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의미였다.
"놀랍군, 지옥마제의 작품인가 아니면…."
오행신마 또한 고명지의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3백 년 전 이철상과
비무했을 때 그 무공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보다 2배 이상 강해진 위
력을 보이고 있다.
"그럼 나도 보여줘야지."
일순 표정을 굳힌 오행신마가 양손을 쾌속하게 휘둘렀다.
"화령폭풍강(火靈爆風 )!"
순간의 그의 전면으로 통로처럼 보이는 길다란  공간이 나타나며 그
속을 백색 불길이 쏘아져 나갔다.
쿠과광!
"으음!"
"아이고!"
동시에 20여 장씩을 밀려난 두  사람이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처음
주고받은 공격에서는 누구도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또 간다, 영물! 지옥수라파(地獄修羅破)!"
정지하듯 멈춰서 있던 야혼이 재차 허공을  박차며 오행신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1장에 달하는 강기가 솟구친 비천묵령도가  도탄강기를 쏟아내기 시
작하였고, 그 강기들은 오행신마를 향해 몰아쳐 갔다.
"만전빙시(萬全氷矢)!"
오행신마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반달모양의 강
기를 향해 뿌리치듯 양손을 휘둘렀다.
일순 그의 주변에 차가운 한기가 몰아치고, 허공 중에 투명한 화살들
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오행마공 두 번째 무공은 빙공이었다. 허공에 머무는 수분과 몸 속의
빙(氷)의 기운을 합쳐 만든 극빙의 무공. 1백여 개에 달하는 모든 얼음
화살이 실체였다.
"허미! 정말 장난이 아니네."
야혼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같은 강기였지만 지옥수라멸로 만들어
낸 강기가 더 약했을 뿐만 아니라 숫자상으로도 밀렸다.
검은 강기들이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그 뒤로 수십 개의 백색 강기들
이 밀려들었다.
하오대문(157) - 태웅 출세하다
"이야합! 지옥수라멸(地獄修羅滅)!"
광포한 고함을 내지르며 수중의  비천묵령도를 던졌다. 그와 동시에
검게 변한 야혼의 동체가 전방으로 날아가는 비천묵령도를 따랐다.
픽픽픽! 퍽퍽!
"철골금령조(鐵骨金靈爪)!"
다급하기는 오행신마도 마찬가지였다. 만전빙시마저도 튕겨내는 검은
동체를 향해 잔뜩 구부린 양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오행마공 상의 금(金)의 기운과 낭인(狼人)의  손톱을 조합하여 만든
무공이었다. 일순 수십 개의 커다란 손이 나타나며 야혼의 동체를 찢어
발기듯 나아갔다.
쿠앙! 과앙!
"허억!"
"크윽!"
거대한 폭음과 함께 오행신마와 야혼의 신형이  지면으로 빠르게 추
락했다. 강기와 강기의 접촉이 아닌 육체끼리의 첫 부딪침이었다.
나직한 신음을 토해낸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솟구
쳐 오르며 뒤쪽을 향해 양손을 휘둘렀다.
이기어도술로 날린 비천묵령도와 만전빙시는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행신마! 지옥수라황(地獄修羅晃)!"
"허억!"
지옥수라황이라는 외침에 오행신마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심도(心
刀)의 경지였던 탓이었다. 전면 공간 전체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다.
죽음의 기운에 스치기만 해도 온몸은 가루로 부서진다.
재빨리 내기를 일주천 시킨 오행신마가 춤을  추듯 사방으로 양손을
휘둘렀다.
"오행합일(五行合一)!"
오행합일,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동시에  쏟아내는 초식이다.
화령폭풍의 화기와 만전빙시의 냉기, 철골금령조의  잔인함, 그리고 금
강불괴에 달한 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는 목령의 기운의 기운을 끌
어올렸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도저히 섞일 수 없다하였던 물과 불이 하나가 되었고, 그 둘을  금의
기운이 감쌌다.
그 또한 심검(心劒)의 기운이었다. 다섯 가지의  기운이 거대한 회오
리를 만들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무(無)의 상태로
만들었다.
"세상에…."
두 사람의 대결을 주시하던 고명지가 입을 턱하니 벌렸다. 무려  1백
여 장 떨어진 곳에서마저도 확실하게 감지되는 기운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온통 죽음밖에 없다.
두 사람 사이 20여장 공간은 죽음의 공간인 것이다.
어떤 물체가 되었던지 그 속으로 던져지면 가루로 흩어질 수밖에 없
는 사지(死地).
"하지만 야혼이 이긴다. 양심신공이 있기에."
이내 표정을 푼 고명지가 빙그레 웃었다. 야혼이 지옥도법만  익혔더
라면 양패구상(兩敗俱傷)할 상황이 분명했다.
서로가 공히 심검을 펼치는 것은 내공대결과 같다고 봐야한다.  끊임
없이 심검을 펼치는 것 외에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
지만 야혼은 다른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다.
우연히 익혔던 양심신공이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뭘 쓸 거냐 야혼, 광명도냐 아니면…. 약은 놈!"
야혼의 신형이 위로 솟구치는 걸 발견한 고명지가 낮게 웃었다. 끝까
지 광명도를 꺼내지 않는 야혼의 행동 때문이었다.
서로가 팽팽한 가운데 야혼의 마지막 수단은 혈신월이었다.
모든 혈신월을 날리는 것도 아니었다. 단 하나의 혈신월을 꺼내 허공
으로 던져 올린 것이었다.
"허-억!"
오행신마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느닷없이 붉은 암기를 뽑아  허
공으로 던진 야혼의 행동 때문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으로 펼치는 심검은 오직  정신력
싸움이라 할 수 있다.
누구라도 한 사람의 심기가 흐트러지면 그 사람은 곧바로 죽음에 이
르게 된다.
그런 와중에 암기를 던지다니, 더욱 놀라운 사실은 녀석의  평점심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내가 이긴 것 같군. 혹시 말이오…."
"말까지…. 이미 지옥마제를 넘어섰단 말이더냐."
절망적인 얼굴로 중얼거리는 오행신마의 귓전에 더욱 충격적인 말이
흘러들었다.
"나는 양심신공을 익혔어."
"커억!"
마음의 평정심이 급격하게  흐트러진 오행신마의 머리로  붉은 광채
하나가 빗살처럼 박혀 들었다.
고개를 숙여 머리가 뚫리는  걸 막기는 했으나 척추를  타고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더하여 심검을 펼치고 있던 정신세계가 무너지며 머릿속이 아득해졌
다.
"3백 년 노력이…."
머리부터 시작하여 가루로 변해가던 오행신마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
다.
"커억!"
승리하긴 했지만 야혼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몸 앞쪽의 옷들이 가루
로 흩어지고, 십장 높이에 머물던 그의 신형은 힘없이 추락했다.
"야혼!"
멀리서 지켜보던 고명지가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우엑!"
"괜찮아?"
"물을 걸 물어라! 이게 괜찮은 사람의 모습이냐. 아이고 죽겠다. 영물
하나 잡는 게 이리 힘들어서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벌러덩 몸을 눕혔다.
"광명도를 썼으면 빨리 끝낼 수 있었잖아."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밑천을 다 보이면 나중엔 어쩔 거야. 우엑!
아이고 죽겠네."
"그래도, 이런 식으로 가다간…."
"걱정 마라, 너희들 과부 만들진 않을 테니까."
"안되겠다. 저기 보이는 동굴에 가서 몸부터 치료하자."
점점 창백해지는 야혼의 얼굴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그를 번쩍 안았
다. 그나마 용봉환락무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뿐이었다.
"너, 나 때문이 아니고 하고 싶어서 그러지."
"그래 하고 싶어서 그런다. 이 나쁜 놈아.  그렇게 무안을 주면 기분
이 좋냐?"
얼굴을 붉힌 고명지가 냅다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전보다 밝았다. 야혼의 농담은 상태가 호전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아래쪽 이놈은 성능이 괜찮으려나 몰라. 지금 상황으로 봐서
는 도저히 무리일 것 같은데."
"성능이 제대로 안나오면 바로 잘라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야혼을 향해 눈을 흘긴 고명지가  재빨리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야혼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용봉환락무가 절실히 필요했다.
태웅 출세하다.
크아앙!
두두두두! 두두두두!
"으아악! 아악!"
"호쇼트 병사들은 후퇴하라! 화살을 쏘아라!"
대지를 찢어발기는 엄청난 포효소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이곳은
테스트시검 남쪽 광활한 벌판이었다.
뿌연 흙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오른 대지는 온통 혈향으로 가득했다.
낭인들과의 전쟁은 전날 선발대로 산을 올랐던  태웅 일행이 쫓겨오
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을 쫓아온 낭인들의 수는 무려 1천 5백이나 되었다.
순식간에 벌판으로 들이닥친 낭인들은 오이라트 병사들을 덮쳤다. 나
름대로 낭인들에 대한 대비를 했지만, 그들은 강했다.
그들의 손과 발이 스치고 지나가면 어김없이  병사들의 목이 허공으
로 떠올랐다.
낭인들보다 10배가 많은 1만 5천의 기병이었지만 상대가 아니었다.
이제 전쟁을 시작한지 4시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온 들판이  오이
라트 병사의 주검으로 가득했다.
"으음! 아무리 낭인이지만 이 정도까지…."
멀리 벌판을 쳐다보던 바센이 낮은 신음을 발했다. 수년간  낭인들에
대하여 보고만 받았을 뿐 실제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다.
한데, 상상이상이었다. 설마하니  1장 크기의 거대한  동체에 도검이
불침하는 불사신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무공을 익힌 자를 포함하여 10명 이상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낭인 한
마리의 발을 묶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발을 묶어도 문제였다. 목을 잘라내야만 낭인들을 없앨 수 있
다 하였는데, 마땅히 목을 잘라낼 병사들이 없다.
비록 5백 명에 달하는  칸 직할대가 있다지만  그들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군. 이러다간…. "
중앙을 맡았던 호쇼트 부족을 쳐다보던 바센이 만병여의주를 뽑아들
었다. 초원의 기병들 중 단연 발군의 실력을 보이는 자가  구시 족장이
었다.
달탄 최고의 전사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호쇼트  병사의
최전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창이 움직일 때마다 낭인들이 목이 툭툭 떨어졌다.
"구시에게 밀릴 순 없지. 나를 따르라!"
낮게 중얼거린 바센이 만병여의주를 번쩍 치켜들며,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앗! 타핫!"
두두두! 두두두두!
2백 명에 달하는 직할대가 엄청난 기세를 머금고 전장으로 달려나갔
다.
"어이쿠, 저놈 드디어 나왔다!"
벌판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봉환락무로 내상을 치료하고 산을 내려온 야혼과 고명지였다.
"그런데 바센하고 거리가 너무 멀다."
전장을 꼼꼼히 살피던 고명지가 낭인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초원
에서의 경험으로 낭인들 또한 명령을 내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껏 낭인들의 우두머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둘이 데려가면 되지 뭘 그래."
다른 낭인들과는 달리 은빛 털을 가진 낭인을 가리켰다. 낭인들의 지
휘자가 바로 그였다.
그의 지시에 의해 낭인들은 3패로 나누어 오이라트 병사들을 공격하
고 있었다.
"저기 저 놈을 타고 가자."
주인 잃은 말 한 마리를 발견한 야혼이 고명지를 안고 훌쩍 몸을 날
렸다.
"고삐는 네가 잡아!"
"알았어! 이럇!"
히히잉!
두두두! 두두두!
고명지와 야혼을 태운 말이 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나갔다.
크아앙!
"타핫!"
말 등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야혼이 측면에서 달려드는 낭인의 목을
향해 비천묵령도를 횡으로 그었다.
슈각!
살이 잘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늑대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
아 오르고, 비천묵령도는 왼쪽으로 이동했다.
"크아악!"
거칠게 없었다. 검은 광채가 궤적을 남기면 어김없이 낭인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혼이 노리는 곳은 오직 한  곳이었다. 먼저 다가오는 낭인의 팔을
잘라낸 다음 순간적으로 도의 방향을 틀어 머리를 잘라내고 있다.
썩은 짚단 무너지듯 낭인들의 동체가 우수수 쓰러졌다.
"크르릉! ."
은빛 털을 가진 수인 한 명이 살기 띤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부옥주인 여백승이었다. 그가 마옥성을 나선 건 뜻밖의 사건  때문이
었다.
환영마법을 이용하여 은폐시켜두었던 마옥성이 불화살의  공격을 받
았던 것이었다.
마옥성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수백
채에 달했던 건물이 불길에 타올랐고, 그 와중에 많은 부하들이  타 죽
었다.
결국 도망치는 오이라트 병사를 쫓아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테스트시검에 오르지 못하도록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이라트 병사들 또한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목이 잘리면 소멸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있었는지,  오이라트
병사들은 전부 낭인들의 목만 노렸다.
"크르릉! 준비를 많이 했다지만 너희들이 전멸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병사들 뒤를 받쳐주던 무인들이
하나둘씩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인들만 없어지면 더 이상 문제될 게 없다. 그야말로  무인지경처럼
되는 것이다.
"이제 저놈들만…."
방금 전 전장으로 뛰어든 바센 일행을 주시하던 여백승이 흠칫 놀라
며 몸을 돌렸다.
금강불괴지신에 육박한 낭인들의  동체를 두부 자르듯  잘라내며 한
인물이 낭인 중앙을 뚫고 있었다.
좌우로 연신 움직이는 도(刀)는 그 빠르기가  섬전같았다. 오직 검은
광채만이 사방에서 요동쳤다.
"이 늑대 새끼들아 날 잡아봐라!"
"크르릉! 놀랍군, 달탄에 저런 고수가 있었다니."
문득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오름을  느낀 여백승이 동체
를 부르르 떨었다. 낭인이 된 이후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것은 싸우고 싶다는 투기였다.
"날 따르라!"
낮게 소리친 여백승이 슬쩍 지면을 찼다.
크아앙!
키오오!
그와 동시에 100여 명의 수인들이 포효를 지르며  여백승 뒤를 따랐
다.
"온다! 바센 있는 곳으로…."
전방을 흘끗 쳐다보던 야혼이 고명지 앞으로  옮겨가며 고함을 내질
렀다. 5백여 장 떨어진 곳으로부터 은빛 털을 가진 수인이 무서운 속도
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꽉 잡아! 이럇!"
야혼이 앞쪽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고명지가 소리쳤다. 수십 마리
의 수인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던 탓이었다.
두두두! 두두두두!
"어딜 잡으라고?"
농담하듯 고함을 지른 야혼은 고명지의 허리를 다리로 감고 몸을 지
면과 평행으로 하였다.
그리고는 고명지의 몸을 주축으로 하여 회전하기 시작했다.
맷돌이 돌아가듯 빙글빙글 돌아가던 야혼의 신형이  이내 잔상을 남
기고 그의 주변으로 달무리 같은 검은 막이 생겨났다.
차라락!
"크-아악! 커억!"
순식간에 대여섯 마리의 수인들의 머리가 으스러지고 붉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날렸다.
"어지러워, 임마!"
눈앞을 스치며 휙휙 돌아가는 야혼의 모습에 내심 어이가 없어진 고
명지가 빽 고함을 질렀다. 잔머리의 대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
금 같은 방법으로 낭인들을 상대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말(馬)이 달려가는 게 아니라, 강기로  만들어진 커다란 륜(輪)이 달
리고 있는 꼴이다.
황당한 노릇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
었다.
야혼의 그런 모습에 놀란 사람은 또 있었다.
고명지와 야혼이 달려가는 전면에 위치하여 있던 바센이었다.
하지만 그의 놀람은 수인을 멋지게 처리하는 야혼의 무공 때문이 아
니었다.
"저런 미친놈이 하고많은 곳을 두고 왜 이쪽으로…."
주변을 휘 둘러보던 바센이 해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녀석의  뒤따
르는 낭인들 수는 엄청났다. 처음 1백여 마리였던 수인들이  점점 불어
나 지금은 거의 2백 마리에 달했다.
그들이 전부 이편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막아랏!"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한두 마리  정도
면 어떻게 상대라도 해볼 터인데 수인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도망치시오, 말을 조정하지 못하오."
"저런 미친 놈! 말도 타지 못한 것들이…. 이럇!"
야혼이 내지르는 고함소리를 들은 바센이 말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
려쳤다.
두두두두! 두두두! 두두두두!
크아앙!
'거패야, 구시영감에게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으라고 해라.  놈들이
견디는 시간은 6시진이다. 그리고 이쪽으로 와!'
멀리 태웅 쪽을 쳐다보며 전음을  보냈다. 전음의 최고봉이라 할 수
천리전음이었다.
'알았다!'
"좋아, 가자!"
태웅의 전음에 고개를 끄덕인 야혼이 바센을 흘낏 쳐다보았다. 1백 5
십 명은 수인들을 막기 위해 남았는지 그 주변에서 5십 명의 직할대만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수인들 역시 50여 명 정도 되었다.
"딱 좋군."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전면을 향해 힘차게 고함을 질렀다.
"살려주시오, 수인들이 뒤쪽까지 왔소이다!"
야혼의 말을 들었는지 20여 명의 직할대가  순식간에 말머리를 돌려
이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크아앙!"
"아악! 으악!"
"잘한다, 그렇게만 해라."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고명지 뒤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말안장 위쪽으로 몸을 살며시 띄웠다.
두 사람의 무게가 사라지자 말을 엄청난 속도로 내달렸다.
바센과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그를 따르던  직할대와 함께 뒤따
르던 수인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기를 반 시진, 이미 전장은 눈에 보이지
도 않았다.
멀리 하늘을 타고 오르는 뿌연 흙먼지만이  전쟁터의 위치를 알려줄
뿐이었다.
"이것 보쇼 바센. 다섯  놈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해치웁시
다."
여전히 말을 몰아 도망치는 바센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워-어!"
야혼의 말을 들은 바센이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이런 빌어먹을…."
테스트시검 쪽을 쳐다보며 낮게 욕설을 뱉었다. 도망치기에 급급해하
였던 자신의 행동이 못마땅해서였다. 1만이 넘는 부하를 두고  왜 도망
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고, 힘들어라. 왕이란 사람이 그렇게 도망쳐도 되는 거요?"
"놈, 감히 뉘 안전이라고!"
바센 곁에서 있던 직할대 한 명이 검을  뽑아들며 야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일거에 숨을 끊어 버리려는 듯 그의 검에서 붉은  강기가 어려
있었다.
혈칠랑이 제거하기로 하였던 놈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이런, 씨팔! 숨쉴 틈은 줘야 할 것 아냐?"
고명지 어깨를 짚고 몸을  날린 야혼이 날아오는 검을  오른 손으로
치며 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뒤쪽에서 따라오는 저놈에게 힘을 써, 임마."
20여 장 뒤까지 따라온 은빛 낭인을 향해  쥐고 있던 놈을 사정없이
던져버렸다.
"아-악!"
순식간에 목이 잘린 바센 부하 한 명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
졌다.
"저럴 수가…."
바센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조금 전 벌판에서 보았던 낭인들과
는 차원이 달랐다. 1척에 달하는 손톱 끝에서 흘러나온 광채는 분명 강
기( 氣)였다.
무공을 익힌 낭인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더구나 야혼이란 놈의 무공 또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저런 죽일 놈!"
바센 주변에 있던 나머지 무인들이 무기를  뽑아들며 전면으로 나섰
다.
"남자가 쫀쫀하게 돈 40만 냥 잃었다고 그럼 되겠소.  지금은 나보다
는 저기 짐승들을 신경 써야할 때란 말이오. 혈칠랑의 원수도  갚지 않
을 작정이오?"
"무슨…."
일순 바센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수인들에 의해 혈칠랑이  죽었
다는 야혼의 말 때문이었다. 살피듯 야혼을 쳐다보던 바센이 재차 물었
다.
"그럼 혈칠랑이 수인들에게 당했단 말이더냐?"
"그럼, 강기 경지에 올라있는 고수 7명을 없앨만한 사람이 있을 거라
보는 거요. 저 놈처럼 무공을 익힌 수인들이나 가능한 일 아니겠소."
"그럼 너는 어떻게 살아왔느냐?"
"이 옷을 보면 모르오? 불알을 흔들며 도망쳤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며 야혼이 말했다. 오행신마와 싸움 때
걸레가 되어버린 옷을 버리고 시체들에게 옷을 벗겨 입고 왔던 것이다.
"그랬던가?"
어느 정도까지 믿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 야혼과  고
명지가 입고 있는 옷은 달탄 병사들의 옷이다.
속이기 위해 일부러 바꿔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좋다 일단 수인들을 없애고 보자. 저들을 도와 수인을 없애라!"
고개를 끄덕인 바센이 부하들을 향해 낮게 말했다.
"그럼 우린 7명이네? 짐승 너 이제 큰일났다."
몸을 돌린 야혼이 빙긋 웃으며 여백승을 향해 말했다.
"크르릉! 네놈 손에 들린 도가 지옥도더냐?"
야혼의 손에 들린 도(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여백승이 길다란 손
톱을 안쪽으로 집어넣으며 물었다.
말로만 들었던 지옥도와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공으로 녀석의 몸을 슬쩍  살펴보았으나, 지옥마제의 후예라  판단할
정도로 강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조금 전 없앴던 무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옥도? 아-하! 이것과 비슷한 도(刀)를 들고 있던 그  친구를 말하
는구나. 그 친군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 같던데…. 명지 너도 봤지?"
"맞다, 그 사람. 수인들에게 포위되어 있던 우릴  구해줬는데…. 정신
이 없어 고맙다는 말도 못했어."
'하여간 잔머리하고는.'
곁눈질로 야혼을 슬쩍 쳐다본 고명지가 내심 웃음을 지었다. 뭔지 모
르지만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잡으려고? 저 자 또한 성모척살대의 일인 같은데.'
은빛 낭인(狼人)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  때문이었다. 테스트시검에서
만난 오행신마에게 필적할 정도는 아니지만 낭인 또한 평범한 자는 결
코 아니었다.
금환신공을 완성한 자신과 비슷한 무공 수위를 보유한 자가 바로 그
였다.
하지만 야혼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잔뜩
궁금한 얼굴로 여백승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더냐? 안타깝게 되었구나. 지옥도법을 견식해 보고 싶었는데….
가진바 모든 능력을 전부 끌어내야 할  게다. 지금 아니면 그 도를  쓸
일이 없을 테니까."
길다란 송곳니를 드러낸 여백승이  양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변이가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익힌 자신들은 문제가  없지만, 수인으로 양성한 명교인들은
상황이 다르다. 삼류무사 수준밖에 안 되는  그들은, 수적으로 많은 오
이라트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십상이다.
"내 다른 건 몰라도  도망치는 기술하나는 끝내주지.  자 시작해 볼
까?"
비천묵령도를 허리춤에 갈무리한 야혼이 등에 매고 있던 천마묵장을
풀어 내렸다.
"그 몽둥이도 무기 축에 드는 것이더냐?"
"당연하지, 우선 길잖아. 긴 건… 좋은 거야."
속삭이듯 말한 야혼의 신형이 여백승 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뛰
어들었다.
"크릉! 경공술 하나는 예술이구나."
코방귀를 끼며 한 걸음 물러난 여백승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녀석의
말대로 경공술은 대단했다.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빨
랐다.
허리춤을 스치고 지나간 몽둥이의 궤적을 따라  녀석의 면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쉬이익!
일순 길게 튀어나온 1척 길이의 손톱이 야혼의  목을 노리고 쾌속하
게 날았다.
"내가 말했잖아. 경공은 내 주특기라고."
머리를 재빨리 앞으로  숙이며 횡으로 쓸어가던  천마묵장의 방향을
틀어 여백승의 목을 향해 찔러 올렸다.
"크앙!"
여백승의 입에서 낮은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기운이 입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낭인(狼人)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었다.
"이런 죽일 놈이!"
낮게 소리친 여백승이 전 내공을 끌어올리자, 날카롭게 튀어나온  손
톱에서 3척 길이의 투명한 강기가 솟구쳐 나왔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야혼을 따라 붙으며 양손과  발
을 사정없이 휘둘러 댔다.
은색 털과 함께 여백승의 주위엔 온통 투명한 강기로 가득했다.
마치 거대한 공이 빠르게 움직여 다니는 듯했다.
하지만 야혼의 움직임은 여백승보다 더 빨랐다. 의지가 부른  마력의
힘이 기존의 무풍무영술에 더해진 결과였다.
"크아악!"
두 사람이 빠르게 움직이는 가운데 그들의  뒤쪽에서는 죽음을 알리
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낭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던 바센  부하들이었
다.
"역시 낭인(狼人)이야, 저렇듯 쉽게 없애는 걸 보면. 이 놈들 네 마리
는 내가 없앨 테니까 고 소저는 저 놈에게 빚이나 받으시오."
뒤늦게 일행을 따라온 태웅이 웃음을 머금고 고명지에게 말했다.
"그럴까요?"
고개를 끄덕인 고명지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서 있는 바센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바센 나도 지금부터 여흥을 즐기고 싶거든, 부디 기대에 부흥해주길
바래."
"감히 계집년이? 내가 우습게 보였단 말이냐?"
"너, 밤일 잘해? 내가 보기엔 말이야, 너는 분명 고자일 것  같아. 여
자 하나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고장난 물건을 가진 놈."
진득한 살소를 머금은 고명지가 바센을 향해 오른 손을 횡으로 그었
다. 순간 그녀의 손에서 네 개의 금환이 동시에 반출되어  바센의 오른
팔을 향해 날았다.
"죽일 년! 내가 허수아비로 보였단 말이지."
이를 악문 바센이 허공으로 들어올린 만병여의주를 힘차게 내리쳤다.
만병여의주 속에 감춰져 있던 여의탈(如意奪)이란 무공이었다.
일순 그의 전면에  10개의 여의만병주가 생겨나며  고명지의 금환을
맞아하며 나아갔다.
"호! 만병여의주를 맡겼더니 비밀을 풀어낸 모양이구나. 하지만…."
가볍게 지면을 차며 허공으로 솟구친 고명지가  이번에는 왼손을 가
볍게 뿌렸다. 또 다시 튀어나가는 4개의 금환.
쉬이익! 쉬익!
전부 8개의 금환이 사방에서 어우러지며 날아다니기 시작하였다.  황
금빛 나비가 춤을 추는 온통 빛 무리를  남긴 금환들은 허상과 실체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설마 금환신공이란 말이냐!"
바센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제야 금환의 전설이 생각난
것이었다. 겁천십웅의 일인으로 불렸던 금환신존의 무공이었다.
"왜, 너 같은 실력자가 구시의 호위로…."
"나는 명나라 동창 첩형이거든."
"설마…."
양팔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쥐고  있던 만병여의주가 바
닥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적국의 관리가, 그것도 동창 첩형이 달탄까지 들어와 있을 줄은 생각
지 못했다. 더구나 달탄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구시의 호위가 아닌가.
"내가 기분 나쁜 건 말이다. 밤일도 제대로 못한 놈이 나를 탐했다는
거야. 명나라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망연한 눈으로 쳐다보는 바센의 목을 향해 8개의  금환을 동시에 날
리며 말했다.
"크아악!"
"크어엉!"
비명은 두 곳에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첫 번째는 고명지의 금환에 의
해 목이 잘린 바센이 내지르는 생의 마지막 소리였고, 다음은 천마묵장
에 복부를 관통 당한 여백승의 비명소리였다.
"놈, 이제는 내 차례다."
복부를 관통한 길다란 물체를 쳐다보며 스산한 살소를 머금었다.  경
공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해서 내린 결론이 놈의 공격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목과 단전만 방어한다면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
론 고통이 따르긴 하지만 그 정도는 감내할 참이었다.
복부 쪽에 두어 번 허점을 만들자 놈은 쉽게 걸려들었다.
백색 투명한 빛으로 번쩍거리는 손톱을 놈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유언은 없느냐?"
"정말 잘 들어가네. 광명도장이 좋아서 그런 거야, 아니면 짐승 가죽
이 약해서 그런 거야. 좀 가르쳐 줄래?"
"죽을 때가 되니까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송곳니 사이로 한 줌  침을 흘린 여백승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목을 상상하며 오른 손을 힘차게 그었다.
아니 그었다고 생각했다.
"허-억!"
여전히 가만 멈춰서 있는  손을 발견한 여백승이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손만 가만있는 게 아니었다. 길다랗게 나와있던 손톱이 조금
씩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키도 작아지네?"
"어떻게…."
털이 사라지는 모습을 망연한  눈으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아직 1시진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마법이 풀리다니.
"아! 말 안 해줬구나. 네 놈 복부에  박힌 이 몽둥이는 광명도장이라
불러. 마법을 익힌 놈들에게는 상극인 물건이지."
"어떻게 그런 물건이?"
복부로부터 천천히 가루로 변해 가는 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궁금함을 안고 가면 병 되니까 가르쳐 준거야."
일순 야혼의 심장부위에서 백색 광채가 솟구치고  여백승의 몸은 빠
르게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안 그런가, 바센!"
"맞네. 연작문주!"
야혼의 말에 맞장구를 친 사람은 수인 네 마리를 없앤 태웅이었다.
그러나 그의 겉모습은 태웅이 아니었다.
조금 전 고명지에게 목이  잘렸던 바센칸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이제는 칸의 신물이 되어버린 만병여의주를 들고서.
"이젠 구시를 만나러 가볼까?"
싱긋 미소를 머금은 일행은 말을 잡아타고 전장으로 향했다.  전장의
상황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변이를 끝내고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단순한 삼류무사수중에 불과한 그들은 살아남은 무인들과
병사들에 의해 대부분 도륙당했다.
1만 5천의 병력 중 4천 명 정도만 살아남았지만 오이라트 군은 승리
했다.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칸. 수인들을 물리쳤단…."
희열에 들뜬 얼굴로 말을 건네던 구시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자
신을 쳐다보는 바센의 시선 때문이었다.
칸의 신물인 만병여의주를 들고 있었고, 바센의 얼굴을 했지만  그는
칸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건가?"
일순 해쓱하게 변한 구시가 한 걸음 물러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
다. 측정할 수 없는 무공을 가진 자들의 접근을 내심  의아하게 생각했
었지만, 바센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들이 노린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바센이었던 것이다.
"보는 대로요. 나와 같이 갔던 태웅과 칸의 부하들은 죽었소. 우리만
간신히 살아왔소."
"달탄을 원하나?"
"아닙니다. 저는 단지 명나라를 위해서  이 일을 시도했을 뿐입니다.
동창 제일 첩형 고명지라 합니다."
구시를 직시하던 고명지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더 이상 숨길 상황
이 아니라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세상에…."
할말을 잊은 듯, 고명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동창제
일 첩형이라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자신  곁에 있었다
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원하는 건 한가집니다.  바센이 추진하려 하였던 중원  침공을
계속해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침공에서 바센칸은 달탄의  영웅으로
전사하게 됩니다. 물론 칸의 자리는 구시족장에게 넘기고요."
"허-! 명나라가 그 정도로 다급했던가?"
"그리고 구시 칸은 명나라에서  퇴각할 때 황제를  볼모로 잡아오게
될 겁니다, 선택하십시오."
"으음!"
구시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명지의 말대로 된다면
결코 달탄은 손해날 일이 없다.
더구나 자신은 달탄의 칸으로 등극하게 되고, 명나라 황제까지  볼모
로 잡아온다면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성공했을 때 보장받을 수 있다.
전쟁에서 패하면 달탄은 물론이고  자신의 운명조차 끝장나고 만다.
아울러 고명지를 완전하게 신뢰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동창 제1첩형의 지위는 권력의 핵심에 있기는 하지만, 일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 인물의 말만으로 일을 추진하기엔 사안이 너무 컸다.
"명지를 믿지 못해서 그렇다면 일단 군사만 모집해서 기다리시오. 황
제 칙령을 달탄으로 보내주겠소. 그때 전쟁을 시작하면 될 것 아뇨. 저
들이 오기 전에 결정합시다."
트르구트와 호이트 부족장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야혼이 말했다.
"좋네…. 일단 자네들 말대로 하세. 하지만 명나라 황제 약속이 없다
면 움직이지 않을 걸세."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거절할 수 가 없다고 봐야했다. 이미 야
혼 일행의 무위는 알고 있고, 거절한다면 3명의 부족장을  비롯하여 상
당수가 이곳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각 부족장들의 죽음은 곧 달탄의 분열로 이어질 터이고 초원은 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변한다.
그 상황을 막기 위해선 고명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생각 잘하셨습니다. 힘든 일을 하게 될까봐 걱정했었는데."
"전부 죽일 작정이었는가?"
"글쎄요…."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의 모습에 구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혼
의 몸에서 풍기는 전율적인 살기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건졌군….일단 돌아가도록 하세. 세부적인 사항은 쿠룬에 가
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러시죠."
부하들을 향해 전장의 정리를 맡긴 수뇌부들은  쿠룬으로 길을 잡았
다.
그로부터 10일 후.
야혼과 고명지는 거용관을 통과하여 하북성에 도착했다.
1년여에 걸친 고명지 외유의 끝이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냐? 난 천의맹으로 가고 싶은데…."
객잔을 찾아 별채에 든 야혼이 고명지를 향해 말했다. 천의맹과 명교
와의 전쟁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 건데, 방법이 있어?"
욕조에 물을 받던 고명지가 의문스런 얼굴로 물었다.
"방법은 무슨…. 일단 천의맹에 들어가서 생각해 봐야지."
옷을 훌훌 벗어 던진 야혼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도련에
에 갔을 때도 그랬지만 딱히 계획 같은 건 세우지도 않았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도록 일을 추진해 나갈 뿐이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한번 해볼래?"
야혼을 따라 욕조 안으로  들어온 고명지가 그의 몸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쓸만하면…."
"으음! 그들의 기반을 전부 없애버리는 거야."
가슴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느낌에 야릇한 신음을  뱉어낸 고명지가
속삭이듯 말했다.
"기반?"
"그들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냐. 그러기 위해선 농사를  지어주는 사
람이 있어야 하고. 하-악! 이야기 좀 하고…."
"네 말은 알겠는데, 그것도 전(錢)이 있어야 하지. 내가  가진 돈이라
고 해봐야 50만 냥밖에 안 되는데."
"동창에서 운영하는 전장(錢莊)이 있어, 천하전장이라고 하는데. 벌써
천의맹으로 들어간 돈이 꽤 되는 걸로 알고 있거든."
결국 참지 못한 고명지가 몸을 돌려 야혼 위쪽으로 걸쳐 앉았다.
"천하전장이면 중원 최고의 전장이잖아."
고명지의 허리를 잡아 슬쩍 들어올려 말했다. 천하전장에 대해선  야
혼도 알고 있었다.
중원 3대 전장 중의 한 곳으로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
으로 알려져 있다. 더하여 강호무림을 장악한 정파와 밀접한 관련을 갖
고. 이번 천의맹 건설에도 막대한 금액을 빌려준 곳이다.
"학! 야-혼! 위금충과 사마세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황실에 있는 것
을 더하면…."
아래쪽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쾌락의 파도에 뜨거운 비음을 뱉어냈다.
"그럼, 북경에 좀더 머물러야겠네? 너만 곁에  있으면 나야 좋지 뭐.
그럼 황제는 언제 만나러 갈 거냐."
"5일 정도 있다가…. 안되겠어, 이야기는 나중에…."
뜨겁게 달궈진 몸을 주체하지 못한 고명지가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더 이상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번쩍 불이 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내 두 사람의 대화는 끊기고 찰싹이는 물소리와 함께 남녀의 비음
이 실내를 타고 울렸다.
그믐.
하늘 가득 들어찬 먹구름이 별빛마저 집어삼켰는지, 북경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차가운 한풍을 타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자금성 북쪽 신무문 근처로
떨어져 내렸다.
고명지를 업은 야혼이었다.
"가자!"
야혼의 등에서 내려온 고명지가 낮게  말하며 길을 잡았다. 잠시 후
그녀가 도착한 곳은 낮은 구릉으로 가려진 조그마한 바위 앞이었다.
그르릉!
바위 옆에 불쑥 솟은 부분을 향해 가볍게  지풍을 발사하자 둥근 바
위가 천천히 오른쪽으로 밀려났다.
"대단하군."
야혼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바위였던  그
곳에서 검은 통로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런 비밀통로가 셀 수 없이 많은 곳이 자금성이야. 나만 따라 와야
해."
통로 안에 설치된 갖가지 기관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 명지 네가 업고 가면 되지. 양심신공 펼쳐라."
빙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고명지의 등으로 몸을 날렸다.
"안쪽에서 기다린단 말이야!"
불쑥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온  야혼의 손에 눈을 치뜬  그녀가 낮게
소리쳤다. 지금 들어가는 비밀통로는  건청궁 아래의 자밀전(紫密殿)과
연결되어 있다.
"양심신공을 빨리 익혔으면 이런 일 없잖아. 뭐해, 기다린다면서."
"손버릇은…."
이내 표정을 푼 고명지가 전면 통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무
공은 가공했다. 야혼을 등에 업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발을 대
지 않았다. 1척 정도 높이에서  능공허도(凌空虛渡)의 경공을 이용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통로는 복잡했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통로가 만들어져 있
어,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자밀전을 찾아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모르고 들어오면 굶어죽기 딱 좋은 곳이네."
"보물창고를 노리고 들어왔던  도둑들이 많이 굶어죽었다고  하더라.
각 교차로에 보면 숫자가 쓰여있어. 1부터 시작하여 108의 숫자가 적혀
있는데 순서를 지켜야해."
야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밀전으로 가는 통로는 전부 108개의
교차로를 지나야한다. 각 교차로마다 최소 4개에서 5개까지  통로가 만
들어져 있고, 그 통로의 상층부에는 숫자가 적혀있다.
그 숫자를 따라 움직여만 자밀전에 도착할 수 있다.
"다왔어, 내려."
1각 여를 달려온 고명지가 석벽 앞에 멈춰 섰다.
이곳 또한 처음 도착했던 곳과 마찬가지로  기관을 작동하는 방법은
지풍이었다.
그르릉!
팟!
거대한 석문이 천천히 열림과 동시에 야혼과  고명지의 눈으로 밝은
빛 무리가 박혀 들었다.
착! 착!
갑자기 달려든 빛에 눈을 감는 순간 전면으로부터 진득한 살기가 밀
려들었다.
"이거, 뭐 이래! 상대를  확인할 생각도 않고  검(劒)부터 내미는 건
가?"
살기를 피해 한 걸음 왼쪽으로 옮기며 낮게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라,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목에  바람구멍이 나게 된
다."
차가운 외침과 함께 검 하나가 불쑥 목 앞으로 다가들었다.
"태사님 그는 적이 아닙니다."
야혼의 손이 어깨의 광명도로 향하는 것을  목격한 고명지가 재빨리
말했다.
"정말이냐?"
"이 양반이 속고만 살았나.  아니면 나이를 먹어서 판단력이  흐려진
건가. 같은 편이 아니면 미쳤다고 이곳에 왔겠소?"
목 앞에 있는 검을 한쪽으로 밀어내며 야혼이 투덜거렸다.  측정하기
조차 힘든 엄청난 기운, 이자 또한 겁천십웅의 한 명임에 분명했다. 야
혼의 짐작 대로였다. 야혼을 향해 검을 겨냥하고 있는 이자는  소림 출
신의 광불이었다.
광불의 얼굴은 흠칫 굳어졌다.
검을 가볍게 밀어내는 청년의 무위 때문이었다. 전력을 다하지는  않
았다지만, 검에서 흘러나온 살기만으로도 웬만한 무인은 움직이질 못한
다.
그런데 젊은 청년은 가볍게, 마치 제 물건인냥 한쪽으로 밀어내고 있
다. 겁천십웅의 일인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하는 동작이 아닐 수 없
었다.
"대단한 젊은이군."
자신에 필적하는 무공을 지닌 자가 무림에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이제 갓 약관을 지난 젊은이가.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고명지를 쳐다보던 그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앓는 듯한 신음을
뱉어냈다.
그녀의 몸에서조차 절대 고수에게서나 보일 수  있는 완성된 무인의
기질이 느껴졌던 탓이었다.
1년 전에 보았을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기연을 얻은 모양이구나."
기연만으로 절대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그밖
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단 1년 만에 절대자가 되어  돌아온 고명지
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암만, 이 야혼을 만난 사람은 전부 기연을 얻었다고 할 수 있지."
"혹시…, 야혼…."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말하는 야혼의 귓전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
들었다. 광불 뒤에 있던 한 인물이 야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 너는 뚱뗑이 법현? 반갑다, 야. 그나저나 네가 여긴 웬일이냐?"
광불을 밀치며 법현 앞으로 다가간 야혼이 그의 손을 흔들며 호들갑
을 떨었다. 거의 6개월만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혼자냐?"
살피듯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혼자가 아니면, 누구 다른 사람이라도 있을 가봐?"
"이상하네? 내가 보낸 선물 못 받았냐?"
"선물?"
오히려 놀란 사람은 법현이었다. 6개월만에 나타난 녀석이  선물타령
이라니. 그에게 받은 비급만으로도 엄청난 고난을 겪은 자신이 아닌가.
"응, 살 빼는 데 쓰라고 약을 좀 보냈거든."
"설마…!"
법현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2달 전에 겪었던 일 때문이었다. 성
모척살대의 무공비급을 가졌다는 소문이  돌기시작하면서 무수한 공격
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싸움을 했는지, 양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 이름 모를 산중  동굴에서 그녀들을 만났다. 음
약에 당한 세 여인은 죽어 가는 중이었다.
결국 그녀들의 목숨을 몸으로 구하게 되었고, 더 이상 중으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전부 야혼 놈의 술수였다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
았다.
"너, 이 자식!"
득달같이 달려들며 야혼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왜 이래 임마. 누가 너더러 책임지래? 불쌍한 아이들이긴 하지만 제
팔자가 지랄 같은걸 누굴  탓하겠냐. 운명이거니 하고  살아야지. 게들
전부 처녀였지?"
"나쁜 새끼!"
야혼에게서 떨어지며 털썩 주저앉았다. 녀석의 말대로 자신과 관계를
가졌던 여인들은 전부 처녀였다. 그것도 20살도 넘지 않은 소녀들.
그녀들 때문에 수많은 날들을 고민했었다. 관계를 가진 다음 바로 떠
났지만 그녀들의 얼굴은 잊혀지지 않았다.
"혹시 그녀들이 살고 있는 곳 알 수 있냐?"
"임마 너는 중이잖아. 중놈이 무슨 여자를…. 네가  신경 안 써도 시
집가서 잘 살 거야. 아! 애가 생겼으면 문제가 되겠다. 애 딸린  계집을
데려가서 살 놈은 없으니까. 잘 하면  사창가의 창기정도는 되겠다. 아
비 없는 자식을 키우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여자가
돈 버는 길이란 몸을 굴리는 것 밖에 없잖아."
"어디 사냐고, 개자식아!"
결국 참다 못한 법현이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내질렀다. 녀석의 말이
계속될수록 그 여인들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토굴처럼 생긴 빈민굴에 살면서 아이를 내쫓고  손님을 받는 여인들
의 영상이 점점 또렷해졌다.
"왜 이래 임마. 아랫도리 휘두른 건 내가 아니고 너야, 너. 그리고 너
는 대 소림사 중이잖아. 그런 하찮은 것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원대
한 일을 해야할 사람 말이야."
"어디 있냐?"
급기야 법현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손을
쓸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사람 치겠다. 걱정 마라. 내가 누구냐? 밤의 혼, 요화문의 화
왕(花王)이란 말이다. 내가 요화문주에게 잘 말해보마. 사생아를 낳아도
내치지 말라고."
"훗! 하여간 네 녀석은…."
야혼과 법현을 지켜보던 고명지가 내심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법현
에게까지 손을 써 두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이번 일로 인하여 법현은 더 이상 중이 될 수 없게 되었다.
파불이란 그의 별호처럼 법현은 파계를 하고 만 것이다. 오직 야혼의
술수에 의해.
"끄응!"
뜻밖에도 신음을 내지른 사람은 곁에서 지켜보던 광불이었다. 우연히
만나 황실로 데리고온 소림 제자가  파계하는 순간을 지켜보자니 황당
하기 그지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소림사 최고 기재라 할 수 있는 법현의  파계가
녀석의 농간 때문이라니.
"인상 쓰지 마시오, 영물 영감. 거창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소박하게,
식구들과 오순도순 사는 것도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라오. 이제 대강 인
사는 끝났으니까 앞으로 일을 상의해 봅시다. 법현 가서 차 좀 내와."
"내가 할…."
"넌 가만있어 이 년아. 오늘은 우리가 손님이야. 손님이 나서서 차를
준비하는 그런 집구석이 어딨냐."
"맞네. 손님이 차를 준비하는 곳은 없지."
"폐하!"
"폐하!"
입구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에  고명지와 광불, 그리고 법현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뭐해 야혼! 무릎을 꿇어야지.'
안으로 들어선 황제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야혼에게 고명지가 전음을
보냈다.
"왜! 왜 내가 무릎을 꿇어야 하지?"
'놈! 죽고 싶은 게냐.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이번에는 광불이었다. 날카롭게 호통을 치며 야혼을 향해 내공을  풀
었다. 야혼을 강제로 꿇어앉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영물 영감, 당장 내공을 거둬. 안 그러면 넌 이 자리에서 죽는다."
야혼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황제, 마옥성을 만들
고, 그들에게 명교인들을 건네주었던 인물. 그가 바로 앞에 있다.
수십만 명교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떵떵거리고 살았던 사람인 게
다. 그를 향해 무릎을 꿇을 수가 없었다.
"감히, 이 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광불이 야혼을 향해  양손을 쾌속하게 뻗어냈
다. 그러나 그의 손보다 더 빠른 게 있었다.
야혼의 등에 있던 천마묵장이 어느새 광불의 목 언저리에서 백색 광
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허-억!"
광불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분명 녀석은 아무런  행동
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력의 움직임조차 감지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길다란 무기가 목 앞에 와 있다.
극강의 경지에 이른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움직임조차  파악
하지 못할 정도인줄은 상상도 못했다.
망연한 눈으로 천마묵장을 쳐다보는 그의 귓전에  더욱 놀라운 소리
가 들려왔다.
"광불! 지금까지 내가 죽인 영물은 철혈마제, 역천사황, 오행신마까지
세 마리다. 네가 소림사 중이라서 살려주는 게 아니다."
"그대는 내가 이 나라 황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나  보군. 힘없는
황제라 그런 건가."
"아니외다. 힘없는 황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아니 우리를 버린
사람이기에 무릎을 꿇지 못하는 거요."
"무슨 말이냐? 나는 내 백성들을 버린 적이 없다."
황제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비록 힘없는 황제이긴  했지만
백성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위금충과 사마군상과  전쟁을 치르
지 못했던 이유도 어쩌면 백성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랬던 자신에게 백성을 버렸다니.
"어디까지가 당신 백성이오."
"네 이놈! 당장…."
"닥치라고 했다, 광불. 네가 잠사옹에게서  어떤 신체를 받았는지 모
르지만 네 눈앞에 있는 광명도장은 마법으로 만든 신체라 해도 가루로
만들 수 있다. 한번만 더 끼어들면 황실이고 나발이고 다 없애버린다."
천마묵장을 향해 손을 내치려던 광불이 우뚝 동작을 멈췄다.  잠사옹
과 광명도장이란 말 때문이었다.
강호 상에 잠사옹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아니 겁천
십웅이나 성모척살대 일원을 제외하곤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야혼은 알고 있다. 더구나 겁천십웅 세 사람을 직접 없앴다고
하였다.
"물러서시오, 태사!"
황제, 그 위험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닌지, 전율적인 살기를
뿌리는 야혼을 대하면서 그는 초연했다.
오히려 오연한 기세를 풍기며 야혼의 기운을 압도해나갔다.
야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황제가 나지막이 물었다.
"어디까지가 백성이라 했느냐?"
"그렇소, 어디까지가, 어떤 인간들까지 명나라 백성 축에 끼는 거요."
"전부다. 이 명나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백성이다."
"그럼, 잠사옹에게 팔아 넘긴 명교인들은 어떻게 된 거요. 한두 해도
아니고 무려 백 년간을 팔아 넘긴 수만 명의 명교인들은 어떻게 된 거
냔 말이오."
"그건…."
일순 황제는 할말을 잃었다. 명교인에 대한 사실은 황제면 누구나 알
고 있는 일이었다. 그들에 대한 처우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
금껏 묵인해왔다.
과거부터 그래왔던 일이었기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관
습처럼 묵인해왔고, 신하들 또한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황실에 반하는 사상을 퍼뜨리는 그들은 명나라에  필요한 존재가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명교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도 죽일 듯한 살기를 뿌리는 인물이.
"명교도인가?"
"아니오, 나는 마옥성(魔獄城) 출신이오. 그곳은 짐승들보다 못한  인
간들이 살아가는 곳이었소. 죽을 자유도 없이, 생체실험의 도구가 되면
서 말이오."
"으음! 마옥성이라….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나."
황제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명나라 초대 황제와  마옥
성주와의 협약에 의해 세워진 마옥성이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또
는 어디에 있는지 아는 황제는 없었다.
광불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쿡! 이제 와서….나도 우습군."
나직하니 툴툴거린 야혼이 천마묵장을 거둬들였다. 문득 우습다는 생
각이 들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고, 마옥성으로 끌려간 그들은 살아오
지 못한다. 수인이 된 그들은 강호를 상대로 한을 풀어낼 것이다.
"달탄으로 가시오. 황실이 안정될 때까지만 그곳에 있다가  돌아오시
오."
"날 용서해 주는 건가?"
"용서? 난 그럴 자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오. 다만 당신  같은 사람이
있으면 지금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그런 거요."
"어느 선까지 정리할 생각인가?"
"글쎄 올시다. 이왕이면 처녀가 더 낫지 않겠소? 새술을 새부대에 담
으라는 말도 있고."
"그럼 나는 편하겠군. 말 잘 듣는 신하들만  남을 테니까. 무림도 그
렇게 할 작정인가?"
"가능하다면."
"많은 피가 흐르겠군."
"마옥성에 명교인을 넘길 때부터 이미 정해진 일이오. 그들의  한 풀
이를 막진 않을 거요."
"어떤 자리를 원하나?"
야혼을 가만히 쳐다보던 황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리는 필요 없소이다. 황실이  안정되면 이 녀석에게 제독  자리를
주시오. 그리고 금의위를 동창 아래에 두시오. 동창 첩형 중에 한 명을
골라 금의위를 맡기면 될 거요."
"여자가 동창제독을 맡게 되면 중신들의 반대가 심할 거네."
"황권 회복의 일등 공신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시기한다면, 그  놈은
관리 자격이 없는 거요.  그런 놈은 아예 없애버리는  게 낫소. 그리고
동창 제독은 내시 아니오."
"클! 여자나 내시나 별반 차이 없다 이 말인가?"
"대화가 통하는 구려. 맞습니다. 내일부터 이 녀석은 남자가 될 겁니
다."
"좋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다시 황제로 복귀한다면 명교인
들에 대하여 정식으로 포고를 내리도록 하겠네."
"휴-우!"
팽팽하던 분위기가 풀어지자 고명지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야
혼 또한 황제를 인정하는지 지금까지  뿌려대던 살기를 거둬들이고 싱
긋 미소를 짓고 있다.
'저 녀석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야혼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짓궂은 미소를  발견한 고명지가 걱정스
런 얼굴로 귀를 세웠다. 그의  전공분야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짓는 얼굴표정이었던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야혼의 입에서 은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참! 한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뭔가?"
"혹시…. 부인이 몇 명이나 됩니까?"
"부인…? 밤에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자들 말인가?"
"물론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인들을 말하는 거요. 같이 잠자리를 하지
않는 여자는 부인이 아니지요."
"글쎄, 세어보질 않아서 모르겠네."
"니미럴! 셀 수도 없이 많다 이거네? 나는 아직 멀었구먼."
"클! 재미있는 사람이군 자넨. 그리고 다양한 얼굴을 가졌고."
황제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황제 앞에서 조금도 위축됨이 없
이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한 신하들만 대하다보니 야혼의 그런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고 첩형을 동창제독에 올리고 나면 자넨 뭐할 건가?"
"그거야, 내 본업인 통  돌리기와 여자 꼬시기…. 밥  벌어 먹고살건
많습니다."
등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에 이내 입을 닫았다. 고명지가  표독
스런 눈으로 흘겨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런가? 그럼 부탁하겠네. 그리고 고 제독은 따라 와라."
"네, 폐하!"
순식간에 동창 제독이 된 고명지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일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단순한  몇
마디 말로 동창제독 자리를 얻어내는 야혼의 능력에 그저 놀라울 따름
이었다. 아니 동창제독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자리라도  달라면 주었을
것이다.
'명지야, 궁지에 몰린 놈은 달라는 대로 줄 수밖에 없다. 수틀리면 죽
여버린다는데 지가 어쩔 거냐?  네가 자질만 출중했다면  황제 자리도
한번 노려볼텐데….'
'에라! 이 나쁜 놈아.'
야혼에게 전음을 보낸 고명지가 총총 황제의 뒤를 따랐다.
황실에 이는 풍운(風雲)
자금성에서 남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곳, 석경산이라 불리는 자그마
한 산을 뒤로하고 수백 채의 고루거각들이 어둠 속에 서 있다.
일명 금존각(金尊閣)이라 더 많이 알려진 동창제독 위금충의  저택이
었다. 사마세가와 같이 권력의 실세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금존각은 컸
다. 동창 무인 1천  오백을 비롯한, 위금충을  따르는 군부 실세들까지
무려 2천의 인물들이 금존각에 기거하고 있었다.
금존각에서는 위금충의 황제였다.
"황실은 근황은 어떻더냐?"
널따란 호수 중앙의 정자에서 가냘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길다란  손
톱이 무척 인상적인 이자가 바로  겁천십웅의 일인이자 동창제독인 위
금충이었다.
"아직 별다른 조짐이 없사옵니다, 제독합하!"
내시 복장의 한 인물이 정자 바닥에 얼굴을 붙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황실 내시의 우두머리인 사례감태감 낭서일이었다.
"사실이렸다!"
"그렇사옵니다, 합하. 황제는 앵속(罌粟)(아편)에 의존하여 하루 하루
를 살아갈 뿐입니다. 그나마 앵속을  끊으면 얼마 견디지 못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내일부터는 앵속의 양을 더 늘려라!"
"알겠습니다, 합하!"
"하양!"
낭서일을 물린 위금충이 주변을 향해 낫게 소리쳤다.
스스르!
미약한 소음과 함께 허공 중에 희미한 그림자가 어리더니 위금충 전
면에 부복한 채 나타났다.
동창 비밀세력이라 할 수 있는  환밀사(幻密士)들 만이 시전하는 극
고한 환술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검은 복면을 쓴 인물은 환밀사의 사주겸의  동창의 군사역할을 맡고
있는 하양이란 자였다.
"사마세가의 근황은 어떻더냐?"
"우리 금존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연일 전략회의를 한다면 장군
들을 소집하고, 각처에 파견되어 있던 금의위 무사들을  불러들이고 있
습니다."
"사마군상과 우리가 충돌한다면?"
"현 상황에서는 양패구상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단 말이냐?"
"네, 합하! 달탄을 이용하면 될 듯 싶습니다."
"달탄이라…, 그들이 전쟁을 일으킬 여력이 있다고 보는 게냐?"
"달탄 왕인 바센이 군사를 모집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사옵니다, 합하. 적어도 한 달 안에 국경을 넘을 것으로 보입니
다. 그들과 사전 조율만 할 수 있다면…."
"사마군상과 황제를 동시에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이구나. 그런데 사마
군상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텐데?"
"어차피 금력싸움입니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을 따르게  될
겁니다."
"우리에겐 자금의 여유가 없지 않느냐?"
손톱을 쓰다듬던 위금충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중원 최고의  전장
이라는 천하전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구파에  지원해준 돈 때문에 자금
사정이 많이 나빠진 상태였다.
"저당 잡은 땅까지 합하면 가능할 듯 싶습니다."
"그런데 달탄 놈들이 중원 땅을 받으려 할까?"
"크게 문제될 건 없으리라 봅니다. 달탄 인들이 직접  경작하는 것도
아니고 소작료를 받아 가는 것일  뿐이니까요. 어쩌면 더 바라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정 아니다 싶으면 팔아버려도 되는 것이고요."
"천하전장에 땅을 저당 잡힌 문파가 몇 곳이지?"
고개를 끄덕인 위금충이 물었다.  천하전장은 금력으로 무림 문파를
다스리기 위해 설립한 단체였다.
물론 동창에서 운영한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화산파, 무당파, 아미파, 청성파, 종남파 다섯 곳입니다. 임야까지 합
한다면 천만 평 정도 됩니다."
"좋다, 일단 천하전장의 현금과 땅을  가지고 협상을 시도해라. 아니
무조건 성사 시켜야 하느니라. 네가 직접 달탄으로 가서 바센을 만나고
와라."
"알겠습니다, 합하!"
"참! 고명지의 행적은 찾았느냐?"
"죄송합니다 합하. 마도련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행적이 오리무중입니
다."
고개를 숙인 하양이 말을 더듬었다. 최근 들어 동창 최대 손실을  꼽
으라면 단연 고명지의 실종이었다.
직책은 제1첩형이었지만 그녀는 제독 못지 않은 힘을 가졌었다.
그녀를 따르는 비밀 세력이  따로 있었을 정도였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문제는 그녀의  비밀세력을 동창 정보력으로도  잡아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결국, 임무를 핑계삼은 외유는  동창의 영향권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술수였던 것이었다.
"됐다, 고명지 건은 내 따로 맡기도록 할  테니까, 너는 달탄 일이나
신경 쓰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합하!"
위금충을 향해 고개를 숙인 하양의 신형이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
로 스르르 사라졌다.
"나에게서 고명지를 빼간 게,  광불 너였더냐?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명나라 황실은 내가 접수하게 되었단 말이다…."
자금성 쪽을 쳐다보던 위금충이 스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과  시
대도 다르고 사람도 달랐지만, 어린 시절 들어갔던 황실에서 받았던 수
모는 35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빚을 같고자 황실을 선택했다. 무공의 완성보다는 황실에 더 미련
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100년 정도만, 지겨워질 때까지 살아볼 거다. 나를 비웃었던
모든 놈들에게 복수하면서 말이다."
*   *   *
"말해봐! 동창에 너를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허공에서 조그마한 빛 무리가 춤을 추는 실내, 발가벗은 고명지의 가
슴을 희롱하듯 만지며 야혼이 말했다.
황실에 들어오면서 가장 놀란 점이 있다면 고명지였다. 위금충에게서
빠져나기 위해 달탄 행을 택했다는 건 짐작했지만, 그녀 독단적인 세력
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지금껏 달탄에서 받았던 정보는 그녀만의 세력을  통해서 전달된 것
이었다.
"동창 세력 3할 하고 금의위의 세력  1할 정도 될 거야. 5년  전부터
조금씩 포섭하기 시작했어. 나처럼  역적으로 몰렸다가 동창에  들어온
자들을 대상으로 삼았지."
놀랍게도 동창과 금의위에는 구족을 참수 한다하였던 역적의 자손은
꽤 있었다. 그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당했건, 아니면 실제 반역을 꽤
하다 당했건 그런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현 황제나 동창에 불만이 있는 자들은 전부 포섭대상으로 삼았다.
"무슨 방법으로 동창 눈을 피한 거냐?"
"으음! 그게, 가장 윗선 한 명만  포섭하는 거야. 그럼 그 자가 다른
자를 포섭하고. 그렇게 그물 망으로 조직을 만들면 윗선이 밝혀지기 전
에는 절대적으로 안전하지. 동료인 줄도 모르면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대단하네? 그나저나 좋다, 고명지  덕에 황궁에서 잠을  다 자보고.
개봉에서 통이나 돌리던 놈에게 이런 시절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휘황찬란한 광채를 뿌리는 가구들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근데 황제하고는 무슨 말했냐?"
"황제?"
"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황제가 너 끌고 갔잖아."
"빨리도 묻는다. 그게 며칠전인데…."
"네 사생활이잖아, 그래서 안  물었지 뭐. 설마 황제란  녀석이 한번
달라고 하지는 않았지?"
"얘가 미쳤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정곡을 찔린 듯 고명지의 얼굴이 벌게졌다. 사실 야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야혼과의 관계에 대해 이것저것 묻던 황제가 엄청난 제안을 해
왔던 것이다. 황후 바로 아랫자리인 비의 자리를 줄 테니 생각해보라고
하였던 거였다.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는 했지만 내심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나라면 그렇게 할 것 같거든. 그가 달탄으로 가면 황실은 고명지 네
가 다스리게 될 터이고, 신하들은 전부  네가 뽑아야하잖아. 돌아와 봐
야 황제사람은 하나도 없을 테니까 너라도 잡아야지. 자기 사람으로 만
드는 방법 중에 최고는 누가 뭐래도 배를 맞추는 거거든."
"하여간 눈치하고는…. 걱정 마,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 새끼가 말을 하긴 했구나. 어째 눈동자 돌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
고명지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야혼이 투덜거렸다. 황제로서 위엄은
갖추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지휘하는 자의 눈동자가 아닌 지시  받는, 즉 상전의 눈치를 살피는
데 더 익숙해진 눈동자였다.
"구시에게 말해가지고 좀 돌리라고 해야겠다. 아니다 다시는  헛소리
못하게 고자로 만들어 버려야 해야겠다."
"너?"
깜짝 놀라며 야혼을 쳐다보았다.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결코 농담
이 아니다. 한번 한다면 반드시 하고 마는 야혼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더욱 걱정스러웠다.
"태자가 있잖아. 더 이상 애새끼  낳아봐야 권력다툼이나 할 테고…,
씨팔놈들이 이 새끼 저 새끼 할 것 없이 다 남의 부인을 노려."
"내놔!"
"뭘?"
고명지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황실 청소하라고 그 자식이 준 물건 말이야."
"그것까지 알고 있었어?"
"그럼 제 마누라 얼굴에 써있는 것도 모르면 죽어야지,  도대체 언제
쯤 주려고 꼬불치고 있는 거냐?"
"나한테 하는 것 봐서 주려고."
 고명지가 배시시 웃었다. 사실 황제에게 받은  물건은 잠룡어사패(潛
龍御使牌)라는 물건이었다. 황제  부재시, 또는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할 때 황권을 대신하는 물건이 바로 잠룡어사패였다.
"그런데 왜 광불에게 안주고 너에게 줬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고명지보다 더 오랫동안 그를 위해 일했던 사
람이 광불이다. 그런 그를 젖혀두고 고명지에게 잠룡어사패라는 물건을
주었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걸 모르겠어.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잠사
옹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과거가 불안하기도 했겠지."
"그랬어? 영물 영감도 뭔가 있다는 말이네? 그건 그렇고, 혹시  태웅
에게서는 연락 왔냐?"
"응! 오늘 도착했어. 위금충과 사마세가에서 사람이 왔데. 이리 와봐,
불 좀 피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고명지가  한쪽에 마련된 비밀서고를 열었다.
황제로부터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다음 곧바로 장만한 장소였다.
"쩝! 어째 명지 너는 갈수록 예뻐지는 것 같다."
발가벗은 채 탁자로  걸어가는 고명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야혼이
나지막하니 탄성을 발했다.
어찌된 일인지 고명지의 몸은 갈수록 윤택해 지는 것 같았다.
흐릿한 달빛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빛을 발했다.
"이러다가, 내가 뽕 가는 거 아닌가 몰라!"
"하여간 입에 발린 소리는, 10개로 늘었네?"
야혼을 향해 기분 좋은 눈웃음을 친 고명지가 주먹크기의 불꽃을 가
리켰다. 약간 차가운 기운이 없지 않았던 방안이 순식간에 훈훈한 온기
가 돌았다.
"아냐 지금 있는 건 절반 정도만 뽑아낸 거야. 크기도 조정한 거고."
"정말?"
비밀 문건을 빼내기 위해 허리를 숙였던 고명지가 깜짝 놀라며 물었
다. 불꽃을 무기로 만든다며 고생하는 건 보았지만 성공했다는 말은 듣
지 못했던 탓이었다.
"볼래? 이요옵!"
살짝 고함을 지른 야혼이 허공 중에 떠오른 불덩어리를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쉬익! 쉬이익!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허공에 나타났다. 주먹만했던 불덩어리들이 조
금씩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손톱 크기로 변했다.
불꽃의 색 또한 달라져 있었다. 붉은 색에서 푸른색으로 변했던 불꽃
이 손톱크기로 줄어들면서 백색이 되었다.
"여기서 더 힘을 주면?"
픽!
"세상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허공 중에 있던 불꽃이 사라져버린 것이
었다.
"없어진 게 아니고 투명하게 변했어. 위력도 궁금하지?"
막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시험해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단
하나의 불꽃만 남은 것 같은데도 측정할 수 없는 거력이 느껴졌다.
"이 손톱 만한 불꽃 하나면 우리가 있는 방안은 재로 만들 수 있어."
"정말?"
"그렇다니까. 시험한번 해볼까."
"아냐 됐어. 네가 맞다면 맞겠지 뭐. 그런데  그런 불꽃을 몇 개까지
만들 수 있는데?"
"글쎄 그건 시험해 보지 않아서. 지금까지 만든 불꽃은 20개까지야."
"그럼 양심신공을 운용하면, 40개? 웬만한 문파하나는 그  불꽃만 가
지고도 없앨 수 있겠다."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마력을 무공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버린 야혼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예쁘다."
"또, 장난한다."
눈을 흘긴 고명지가 조금 전 찾다 만 서류를 꺼냈다.
"음! 위금충이 제시한 조건은  현금 5백 만냥과 1천만  평의 땅이고,
사마세가에서 제시한 금액은 현금으로 8백만 냥인데,  자신들이 집권했
을 땐 그 두 배의 금액을 더 주기로 했데."
"땅?"
"응, 내가 말했잖아, 동창에서는 천하전장이라는 전장을 운영하고 있
다고. 그곳에서 저당 잡힌 땅문서를 전부 들고 간 모양이야. 그런데 재
미있는 건, 그 땅문서가 구파 중 다섯 문파에서 저장 잡은 거래."
"오잉?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무조건 받으라고 해. 이렇게 되
면 일이 훨씬 쉬워지는 거네?"
"그럼 사마세가는?"
"그것도 받아야지. 어차피 두 곳으로 공격해 들어올 건데."
"그렇게 하라고 했어. 그리고 야혼 네 이름으로 마도련과 하오대문에
서찰 보냈다."
"뭐라고 써서 보냈는데?"
"은밀하게 북경으로 오라고."
"헥!"
"그럼 안도와 줄 작정이었어?"
"네가 기른 아이들 있다며, 어림 잡아도 천 오백 명은 될 것 아냐."
"그들은 동창과 금의위 속에 그대로 둘 거야. 갑자기  빠져나오면 의
심 살 염려도 있고…. 시키는 건 뭐든지 다할게."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야혼을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인 고명지가 야혼
의 가슴팍을 밀어 의자에 앉혔다.
"천의맹이나 명교 녀석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에 지그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다른 곳에 신경 쓸 정신 없어. 얼마 전 명교와 천의맹이  한
판 떴는데, 이번에도 천의맹이 패했나봐. 그리고  이곳에 오면 전부 동
창이나 금의위 복장을 하고 싸울 테니까…."
"그래도…."
"이제 딴소린 그만하고…."
헐떡거리던 고명지가 고개를 들어 야혼을 쳐다보았다.
"큰일났다. 30대가 넘어가면 더 밝힌다는 데 벌써부터 이지경이니."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색색만화공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되
었겠어?"
"내가 색색만화공에 그런 탁월한 효과가 있는지 알았냐?"
고명지의 상태는 야혼 또한 의아한 부분이었다. 그녀는 점점 색의 노
예가 되어 가는 듯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땐 전혀 반응이 없다가도 자
신의 손짓 몇 번이면 급격하게 달아오른다.
"너 나에게 정력제 많이 보내야  한다. 갈수록 네가 세지는 것  같아
요즘은 불안하다. 이러다 내가 말라죽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야."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성모궁에서 먹은 영약이 얼마나 많은데. 그
래도 열심히 구해보지 뭐. 용봉환락무 끌어올릴까?"
"이제 그만하지 뭐."
곧이어 방안 가득 야릇한 교성이 흘러 넘쳤다.
따스한 눈으로 야혼을 쳐다보는 고명지의 얼굴엔 더 이상 슬픔이 묻
어 나오지 않았다.
문득 이 모든 게 꿈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았다.
야혼이란 사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까 하는 생각
도 해보았다.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남들처럼 부
부가 되어 평범하게 살 수는 없지만 야혼과의  만남은 일생 일대 최고
의 복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행복.
더구나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상대가 행복하게 사는 것만 바
랄 뿐이다. 아니 더 많은 걸 주지 못해서 안달인 사람이 그다.
냉소소나 천애설 등이 그를 못 잊는 이유가 그때인 게다.
"고마워…."
야혼의 어깨에 기대며 나지막이  말했다. 고맙다는 말,  그 말밖에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내일부터는 바쁠 거야, 오이라트 군이 출병하기로 한 날이니까."
"당분간 분위기 잡는 건 힘들겠네? 그럼 오늘밤 뼈가 부셔지도록 힘
을 써봐야지."
고명지 허리를 붙잡은 야혼이 사정없이 방아를 찧었다.
다음날.
황실은 벌집을 건드린 듯 발칵 뒤집혔다.
북쪽과 서쪽으로부터 연일 봉화가 오르기 시작하였고, 게거품을 물고
달려온 파발마가 적의 침입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2십 5만에 달하는 달단 병들이 국경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은
황실을 침묵으로 빠트리기엔 충분했다.
위금충과 사마군상 그리고 황제를 제외한 나머지  신하들은 분명 그
랬다.
"누가 나갈 텐가?"
용상에 앉아있던 황제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시선이 가 있는 곳은 위금충과 사마군상 쪽이었다.
"폐하! 이번에는 폐하께서 직접 친정을 하셔야 할 듯 하옵니다."
먼저 운을 뗀 사람은 금의위  도독인 사마군상이었다. 비단 그 뿐만
아니었다.
사마군상 건너편에 있던 위금충도 황제의 친정을 주청하고 나섰다.
"놀랍군, 그대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할 때가 다 있고."
"적은 기껏해야 25만입니다. 다시는 명나라를 넘보지 못하도록  일벌
백계(一罰百戒)로 다스려야 할 주 압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친정을 명하소서."
위금충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소실려들이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햐! 저자식들 대단하네. 누가 황제인지 구분이 안가는 구만.'
용좌 뒤쪽 천장, 고명지와 야혼 그리고  법현이 숨어, 살피듯 아래쪽
을 쳐다보고 있었다.
"군병은 얼마나 되는가?"
"50만 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오이라트 군이 두 곳으로 나눠 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소신에게 10만의 병력을 주시면 거용관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겠
습니다."
황제의 물음에 사마군상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파발에 이르기를
거용관 쪽으로 진격하는 병력은 7만에 불과하다 하였다.
"위 도독의 의견은 어떤가?"
"사마 도독의 의견대로 하는 게 나을 듯 싶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각 진에 전쟁을 알리고 병력을 집결시키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하지만 특별히 전쟁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각 진에서 떠나온
병력은 북경 외각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들을 인솔하여  떠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사마군상! 7만 병력이라 하였더냐? 천만에 거용관으로  가는 오이라
트 군은 20만 명이다. 거용관을 전투가 끝나면 너는 혼자가 된다. 잠사
옹에게 가서 손을 비비던지 아니면 내 밑으로 들어와야 한단 말이다.'
먼저 나가는 사마군상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위금충이 내심 중얼거렸
다. 달탄의 정확한 작전은 알  길이 없지만 한가지는 확실하게  언질을
받았다.
북경 북쪽인 거용관으로 가는 병력의 수는  정확하게 20만 명이라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돈과 땅을 준 대가로 얻어낸 정보였다.
그 날밤.
달빛을 맞으며 자금성을 떠나는 두 명의 인영이 있었다. 광불과 법현
은 황제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금성에 남았고, 야혼과  고명지만 거
용관으로 길을 잡았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두 사람이 거용관 수비대에 도착한 시각은 자금
성을 떠난 뒤 한 시진 후였다.
거용관 정문을 넘어선 두 사람은 곧바로 수비대 장군 처소로 향했다.
곳곳에 피워진 횃불과, 수많은 병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으나  허
공을 날아가는 두 사람을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떤 장애도 없이 만력장군 허차수의 거처에 도착했다.
"누구냐! 억!"
앞을 막아서는 병사의 수혈일 집어 잠재운 뒤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
다.
"누군가?"
묵직한 저음, 60대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읽던 책을 덮고 두  사람
을 향해 물었다.
쉬익!
야혼의 품속에서 금빛 광채가 날아 허차수 앞 탁자에 깊숙이 박혔다.
"허억! 잠룡어사패?"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허차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잠
룡어사패를 향해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황실에서 나오셨소."
절을 마친 허차수가 야혼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잠룡어사패라는
절대신물을 가지고 나타난 인물이 뜻밖에도 너무 젊었던 탓이었다.
더구나 황실은 위금충과 사마군상의 휘하에 들어있다는  걸 알고 있
다.
그런데 느닷없는 잠룡어사패라니.
"여기서 20년 간을 근무했다고 들었소. 간단하게 대답하시오. 황제요
아니면 사마군상이요."
허차수를 가만히 쳐다보던  야혼이 비천묵령도에 손을  올리고 짧게
물었다.
"쿡! 드디어 올 것이 왔는가?"
허차수가 나직한 웃음을 뱉어냈다. 교묘한  질문이었다. 느닷없이 잠
룡어사패를 들이밀며 황제나 사마군상 둘 중의 한 사람을 선택하라니.
잠룡어사패는 분명 황제의 신물이긴 하지만  사마군상이 탈취했을지
도 모르는 일이다.
더구나 상대는 신분조차 밝히지 않았고,  무위 또한 측정할 수도 없
다. 대답여하에 따라 목이 잘리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 녀석은 가끔가다 보면 머리가 너무 좋단 말이야.'
고명지가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이곳을 먼저 방문하자고 했던  사람
은 자신이었다. 원래는 절차를 밟아 잠룡어사패로 허차수를 설득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야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하면 허차수의 정확한 노선을 알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누구 편인지 몰라도 자네를 얻은 사람은 황실을 거머쥐겠군."
허차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상황
이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음속의 진실을 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현 황제폐하를 따르는  사람일세. 사마군상이나 위금충과는
관련이 없네."
"그 말은 당신 목숨을 살렸소. 그럼 이곳에 있는  사마군상의 끄나풀
을 전부 불러모으시오."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탁자 위에 박힌 잠룡어사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폐하가 보내서 왔습니까?"
이내 공대로 바뀐 허차수가 감격스런 얼굴로 물었다. 황제가  보냈다
면 그 또한 황제와 같은 신분으로 대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영감 바쁘오! 지금 이곳으로 사마군상이  10만 대군을 데려오고 있
단 말이오."
"그럼?"
"이곳이 사마군상의 무덤자리요."
"알겠습니다, 어사대인. 즉각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게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장군님!"
"부장들을 전부 집합시켜라! 작전회의가 있다고 알려라."
일순 거용관 진영에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전령의  요란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마군상의 끄나풀로 확인된 부장은 전부 다섯 명입니다. 그들의 이
름은…."
"이름은 필요 없고, 전부 들어오면 한 놈씩 호명해 주시오."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의 얼굴에 허차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웃
는 얼굴이 분명한데도 찬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살기마저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절대 경지에 오른  무인이 바로 잠룡
어사패주였다.
"이제 황실이 제대로 서려는가."
급변하는 전시상황 때문인지 부장들의 움직임은 빨랐다. 전령이 돈지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0명 전원 허차수 거처로 들어
왔다.
"이것들 봐라?"
작전회의용 길다란 탁자를 두고  편을 가르듯 다섯  명씩 갈라서는
부장들의 모습에 야혼은 싱긋 웃었다.
굳이 이름을 호명할 필요도 없을 듯했다.  두 패 중 한 곳이 사마군
상을 따르는 자들임에 분명했다.
'명지야 너는 문을 막아라.'
고명지에게 전음을 보낸 야혼이 허차수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왼쪽에 있는 자들입니다.'
'좋소. 다른 자들에게는 한 걸음 물러나라고 하시오.'
고개를 끄덕인 야혼이 허차수가 지목한 다섯  부장들 뒤쪽으로 돌아
갔다.
"누굽니까? 장군님!"
작전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부장 한 명이 고명지와 야혼
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잠룡어사패주의 직권으로 너희들을 즉결처분한다."
탁자위로 잠룡어사패를 던짐과 동시에 비천묵령도를 뽑아 바로 앞에
있는 자의 목을 쳤다.
츄아악!
"무슨…, 으아악!"
목이 잘린 자의 왼쪽에 있던 부장이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으나
그의 목 또한 온전하지 못했다.
목을 자른 동작을 그대로 유지하던 비천묵령도가  그의 목마저 자르
며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챙! 챙챙!
살아남은 나머지 세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장검을 뽑아들었
다.
"애초에 사마군상 같은 영물에게 기대지 말았어야 했다!"
낮게 소리친 야혼의 신형이 품(品)자를 그리며  서 있는 삼 인을 향
해 돌진했다.
"막앗!"
다급하게 고함을 지르며 삼 인의 부장이 동시에 검을 쳐냈다.
그러나, 상대는 초 절정 무림고수  30년 남짓 공력을 가진 부장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야혼을 향해 뻗어냈던 검들이 일제히 잘리고, 선명한 피보라가  허공
을 수놓았다.
살아남은 다섯 부장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벌어진 참극에
마땅히 대처하지 못했다.
망연한 눈으로 바닥을 뒹구는 목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황제에 반하는 놈들은 지금처럼 처단된다. 이 놈들의 가족도 마찬가
지다. 이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구족을  참할 것이다! 허차수는 이들의
신상을 적어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야혼의 입에서 추상같은 고함과 함께 폭풍 같은 기운이 줄기줄기 뻗
어 나왔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기운.
"명을 받들겠습니다."
"허억! 잠룡어사패?"
그자에 잠룡어사패를 발견한 부장들이 허차수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구족참살, 방금 죽어간 다섯 명은 반역죄인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치워라!"
허차수의 명령에 따라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부장들이 죽은 동료
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은밀하게 포대가 들어오고 다섯 구의 시체는 거용관 뒤쪽 산에 암매
장되었다.
"이곳에 3천 명의 무인들이 은밀하게 숨어있을 곳이 있소?"
한해가 갔습니다. 그동안 힘들었던 일, 짜증났던 일들은 묵은 해와 함께
날려버리십다.
그럼 새로운 세상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겁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모든 분들의 집안에 만복이 깃들길 기원합니다.
HAPPY NEW YEAR.
"네! 거용관을 나서 오른 쪽 산자락에  보면 과거에 쓰던 막사가 있
습니다. 지금은 폐가처럼 버려진 곳인데 그곳이면 3천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잘됐군."
"그럼 앞으로 진행 사항을 알려주겠소. 달탄 병력을 이곳을 통과해서
갈 거요."
"무슨 말입니까?"
허차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거용관은  북경을 보호하는, 그야말
로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최 후방 방어진지다.
그런데 어사대인은 적을 통과시켜주라고 하고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문사항은 묻어두고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사마군상도 그들을  막
지 않을 거요. 허 장군이 해주어야할 일은 사마군상이 거느린 금의위와
5만 병력을 없애는 것이오. 그들을 없앨 장소는 이곳  팔달령 외각으로
하겠소."
전면 지도 앞으로 다가간 야혼이 팔달령과 밖 초원을 가리켰다. 팔달
령은 장성이 있는 곳으로 거용관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설마…."
"그 설마가 맞소. 사마군상 또한 달탄의 바센과 거래를 했소. 싸우지
않고 그냥 통과시켜주기로. 우린 그걸  역이용 할거요. 아, 소개하리다.
차후 동창과 금의위를 맡게될 고명필이오. 이미 황제의  어지는 떨어졌
소. 앞으로 나대신 잠룡어사패의 주인이 될 사람이기도 하오."
"어사대인께서는?"
"나는 황제를 보필하고 달탄으로 갈  거요. 그 동안 고 제독을  도와
황실을 안정시켜줘야 할 사람은 허  장군이오. 내말 무슨 말인지  알겠
소. 황제께 한가지 약속을 했소. 황실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기로. 그리
고 허 장군은 병부상서를 맡아줘야겠소."
"어사대인!"
허차수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놀라지 마시오. 한 사람 정도는 대쪽같은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서 당신을 임명한 거요. 그리고 고 제독을 도와 달라는 의미도 있고."
'씨팔 이렇게 머리가 좋아도 되는 거야.  내가 생각해도 이건 엄청난
발전이다. 얘들 다스리는 거 별 것 아니잖아.'
허차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
지만 지금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곁눈질로 고명지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녀 또한 현 상황에 만족했는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어느 선까지 처리해야 합니까?"
야혼의 말에 수긍했는지 허차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내가 처리한 걸 보았을 거요. 그렇게  하시오. 천 명을 죽여야
한다면 천 명을 죽이고, 만 명을 죽여야  한다면 만 명을 죽이시오. 다
시는…. 황실에 대항하는 놈들이 생기지 않도록."
"으음!"
"이것 보시오 허 상서. 우리 솔직히 말해봅시다. 나는 말이오 북경에
있는 그 놈들보다 이곳에서 죽어 가는 이름  없는 병사들이 더욱 불쌍
하오. 북경에 있는 몇 천 명을 죽이면 국경에 있는 수만 명의 병사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고 제독님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황실에 있는 자들이 잘했더라면 지금 팔달
령을 향해 진군해오는 달탄병사들도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야 그대로 통과시켜  준다하더라도, 다른  곳에서의 전쟁은
벌어질 것이고, 수만 명의 병사들이 죽어갈 것이다.
아무런 보답도 없이.
"고맙소, 그럼 우릴 폐가로 안내해주시오. 참 한가지 더 있소. 병부에
서 쓸 사람은 허 상서가 직접 뽑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사대인. 따라  오십시오. 자네들은 이곳에  있
게."
"네! 장군님!"
다섯 부장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놀랍게도
그들의 얼굴은 조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로 세 사람의 등을 좇았다.
어사대인이 남긴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병부에 근무할 사람은  직접
선출하라고 하였던 말.
자신들이 알기로 허차수 장군은 정계에 인맥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장 부장 자넨 어떤 자리로 가고 싶은가?"
"글쎄, 장군님 밑에서 사무나 봤으면 좋겠어. 이젠 피 냄새도 지겨워
서 말이야."
조금 전 처참했던 사건을 잊은 듯 다섯  부장의 얼굴은 꿈에 부풀었
다. 허차수 본인에게 사람을 선출하라 하였던 한 마디가 가져온 효과였
다.
"여깁니다, 어사대인. 그런데 좀 춥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부가 무인들인데 이까짓 추위가 대숩니까? 그나저나  올 때가 넘
은 것 같은데…."
서쪽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순간,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빠르
게 다가왔다.
"왔느냐?"
"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이쪽으로 은밀하게 모셔라."
"존명!"
고명지를 따르는 동창 비선이 허리를 숙이며 멀어졌다.
"허 상서도 그만 가보시오. 여긴 우리가 있겠소. 그리고 부장들 입단
속하는 것 잊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어사대인. 부장들에게 음식과 이불 등은 따로 보내겠습
니다."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 허차수가 거용관 본진으로 몸을 날렸다.
"명지야 어땠냐? 내가 생각해도  오늘 일은 너무 멋있게  처리한 것
같아. 이정도면 황제를 하라고 해도…."
"다 좋은데, 고명필이 뭐냐, 촌스럽게."
고명필이란 이름만 빼고는 오늘밤 일은 최고였다. 사마군상을 따르는
부장들의 목을 자를 때 보여준 단호함과, 병부상서라는  달콤한 미끼를
활용하여 목숨마저 맡길 수 있는 충성스런 부하를 얻은 날이다.
허차수를 얻었다 함은 곧 거용관 군부를 장악했다는 말과 상통한다.
혼자 왔더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느닷없이 말하려니 생각이 나야지. 그래서 대충 둘러댄다는 게 그렇
게 됐네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오늘밤 우리가 쉴 집은 치워야
지."
"우리가 아니고 냉 소저 때문이겠지."
"얘가 또 왜 이러시나. 근데 둘 중 누가 생일이 빠르지?"
"내가 9월이고, 냉 소저는 7월이야."
마도련에서 그녀의 나이를 물어보았을 때 우연히 알게된 사실이었다.
"그럼 소소가 언니네? 네 생일 소소에게 말했어?"
"아니?"
"그럼 명지 네 생일은 오늘부터 4월로 해라."
"그래도 돼?"
이내 얼굴이 활짝 갠 고명지가 야혼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생일 5달 앞당겨 주는 게 그렇게 좋냐?"
"내가 언니잖아, 둘째 언니."
"그렇게 되는 건가? 일단 청소부터 하자, 동생이 먼 곳에서 찾아오는
데 집이 더러우면 안되잖아."
"알았어. 일단 적당한 곳부터 찾아보자."
나직한 콧노래와 함께 집을 고르던 고명지가, 제법 쓸만한 집을 발견
했는지 싱긋 미소를 짓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야혼, 여기가 좋겠다."
"외각 쪽의 집이네?"
"그냥 안 넘어갈 것 아냐. 총각 처녀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후미진 곳
으로 잡았지. 야혼은 물 떠와. 안은 내가 치울 테니까."
"그럼 오늘 밤 우리 셋이 같이 자는 거야?"
"헹! 꿈도 야무지다. 헛소리 그만하시고요, 물이나 떠오세요! 다른 사
람은 몰라도 소소 동생은 씻어야 하니까."
물을 길어오고 집을 치우기 시작한 지 반 시진 정도 지났을까.  오른
폐가 전면으로부터 무수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동창 비선을 따라 이동해온 마도련 무사들이었다.
휙! 휙휙휙!
10여 명의 무인들, 냉소소를 비롯한 마천루 원로들과 철마문  문주인
유웅창과 요화문의, 나령까지 마도련 수뇌들이 야혼이 있는  가옥 앞으
로 떨어져 내렸다.
"어서들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자네?"
"야 소협?"
냉소소를 제외한 마도련 모든 수뇌들이 눈을 비볐다. 야혼과  헤어진
기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그대와는 천양지차였다.
살 떨릴 정도로 잘생긴 얼굴과 균형 잡힌 몸매, 그리고 윤기가  자르
르 흐르는 비단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여느 대갓집 자제라고  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아, 이게 나의 본모습이요. 잘생긴 내 얼굴에  대한 고민은 나 하나
로 족하니까 댁들은 신경 쓰지 마쇼."
"헐! 내가 나이를 먹기는 먹은 모양이네. 어째  귀신에 홀린 것 같단
말이야."
야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종마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도저히 믿어
지지가 않았다. 돼지처럼 비대한 몸을 가졌다고 하여  흑돈이라 불렸던
녀석이 아니던가.
하지만 다음에 들려온 말은, 그나마 정신을 차려가던 일행을 공황 속
으로 빠트리고 말았다.
"영약 기운은 전부 내공으로 만든 거냐?"
냉소소 뒤에 있던 도마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좀 됐소. 마도련을 떠나 사막으로 갈 즈음해서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까."
"컥! 그-그럼 그 돼지 몸뚱이가 영약 때문이었단 말이냐? 영약을 많
이 처먹은 부작용 때문에?"
"셈 나지 영감. 아마 내가 먹은 정력제 중 하나만 들고 왔어도  종지
기 영감은 30년은 젊어질텐데…. 다 타고난  복대로 사는 거더라고. 종
지기 영감은 생긴 것부터가 재수 없게 생겼어. 어이구 여기  검버섯 좀
봐. 이제 곧 관 장만할 때가 되었다는 표시가 여기저기서 보이네."
"정리 끝났으니까 들어오십시오, 어사대인!"
그때 안쪽에서 고명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창 제일 첩형이라 하였던 고명지가
야혼에게 공대를 하고 있다. 그것도 어사대인이라 부르면서.
의문스런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아! 별 것 아뇨, 잠룡어사패주라는 직책인데, 황제 다음으로  높다고
하더구먼. 싫다는 데 그 인간이 자꾸 떠맡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맡
게 됐소."
"그러니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신분이 바로 자네라고?"
"이런 종마영감 지금 실수하는 거야. 자네가 아니고  어사대인이라고
불러야해. 아주 정-중하게. 한번 해보겠소?"
목에 힘을 준 야혼이 종마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종마를  비
롯한 마도련 수뇌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벼락 출세란 말은  들어보았지
만 개차반 야혼이 잠사어사대인이라는 엄청난 신분을 가진 벼슬아치가
되다니. 천비동에서 전대용이 수인으로 변했을 때보다 더욱  놀라운 일
이었다.
더구나 동창 첩형인 고명지까지 공대를 하고 있다.
"종지기 영감 뭐하고 있는 거요?"
"이익…."
종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야혼을 몰랐으면 모르되,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자신들이 아닌가. 차마 어사대인이란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
다.
"그만해 야혼. 어르신들께 그런 게  아냐. 네가 잠룡어사패주라 하더
라도 이분들이 웃어른인 건 달라지지 않아."
구원의 손길, 뒤에서 야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냉소소가 꾸짖듯  말
하며 앞으로 나왔다.
사실 그녀 또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야혼의  신분이
잠룡어사패주가 되어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재미 좀 보게 냅두지. 한참 재밌어질 판인데…. 알았어 추운데 들어
가자."
즉각 꼬리를 내린 야혼이 냉소소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처리된 거지?'
냉소소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전음을 보냈다.
'그래도 너무 심했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텐데….'
마도련 수뇌들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알리고자 하는  야혼의 술수인
걸 알지만 종마에게 미안했다.
'잠룡어사패주 자리에 있을 때 확실하게 해  두려고 그랬지 뭐. 실은
잠룡어사패주는 내가 아니고 고명지거든.'
"설마, 고 소저까지?"
말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사실도  잊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잠룡어사패주라는 절대적인 지위를 야혼에게 넘길 정도면 고명지 또한
그의 사람이란 소리다.
마도련에 같이 왔을 때,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지만 불과 몇 달 사
이에 그런 사이로 발전할 줄은 몰랐다.
"도저히 안되겠다, 따라와!"
뒤에 마도련 수뇌들이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야혼의 귀를
틀어쥔 냉소소가 씩씩거리며 다른 방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아-악! 이 귀는 좀 놓고 가자."
"안돼, 이 나쁜 놈아.  도대체 몇 명이야.  고 소저도 이쪽으로 오세
요!"
콰앙!
"도마, 무슨 일이냐?"
커다란 소리와 함께 닫힌 방문을 쳐다보던 종마가 의아한 얼굴로 물
었다.
"무슨 일은…. 보고도 모르냐? 종마 너에게 새로운 상전이  생겼다는
의미지."
"그럼 개차반을 대공이라 불러야 한단 말이냐?"
"잠룡어사패주보다는 대공으로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 검마."
"그런가 보이. 괴물이네, 강호 최고의 괴물."
야혼에 대하여 검마가 내린 결론이었다. 어쩌면 황실과 강호를  총괄
하는, 무림 최대 단체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끄응!"
"들어오세요!"
종마가 나직한 신음을 뱉어내는  순간, 안쪽에서 냉소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모였으니까, 우리가 해야할 일을  간단하게 말하겠소. 많이 죽여
주시오! 이상입니다."
"그게 무슨…."
일순 허탈한 얼굴이 된 일행이 야혼을 쳐다보았다. 청해에서  이곳까
지 밤낮 없이 달려왔다. 그런데 작전명령이라고 떨어진 게 많이 죽여달
라는 한가지다. 상대에서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뭘 복잡하게 생각하고 그러쇼. 끝까지 살아 남는 쪽이  전쟁에 이기
는 것 아뇨. 그럴려면 많이 죽이는 수밖에 없잖소."
"나머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보다못한 냉소소가 나서서 현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아울러 마도련에서 맡아야할 적은 오이라트  군이 아닌 금의위라는 사
실도.
"그래서 우리더러 동창 무인의 복장을 하고 오라고 했던 건가?"
"그렇소 도마 영감! 뭐하쇼, 회의 끝났으면 나가봐야지."
전쟁은 살아남는 자가 이긴다.
둥! 둥둥! 둥둥둥!
전고의 울음소리와 함께 북경을 출발한 사마군상의 병사들이 하나둘
씩 거용관으로 찾아 들었다.
자색 복장의 금의위 3천과 사마군상의 직할대라 할  수 있는 5만 정
병이 도착한 거용관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적은 어디쯤 와있나?
작전회의실인 만력장군 허차수의 막사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약간 비대하다 싶은 정도로  두툼한 살집을 가진 이자가  금의위
도독이자 사마군상이란 이름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독존 서음
래였다.
"팔달령에서 하루거리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보고를 하는 허차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금의위 도독이라는  그의
신분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사마군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때문이었다.
전날 만났던 잠룡어사패주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었다.
"나머지 부장들은 어디를 갔느냐?"
"다른 관문으로 정찰 나갔습니다.  늦은 밤이나 돼야 돌아올  것입니
다."
허차수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정수리에 와 닿는 날카로운
기운은 내심을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듯 섬뜩했다.
"좋다! 지금 당장 출병준비를 서두르도록 하여라!"
"수비가 아니고 출정이란 말입니까? 적은 기병이라…."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내가 금의위를 데려온 이유가 그 때
문이니라."
사마군상의 얼굴에 싱긋 미소가 어렸다. 어차피 치열한 살상이  필요
한 전쟁도 아니고, 막는 시늉만 하고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팔달령과 거용관 사이보다는 오이라트 병사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초원이 낫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알겠습니다, 합하!"
깊숙이 고개를 숙인 허차수가 재빨리 막사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황실에 저런 고수가…."
전고소리처럼 둥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부장들에게 명령을 내렸
다.
둥둥둥둥! 둥둥! 둥둥둥둥!
느닷없이 울려 퍼진 전고 소리에 거용관 병영이 소란스러워졌다.  출
정을 알리는 전고소리였던 탓이었다.
망루를 주시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군장을 챙기고 무기를 들었다.
사마군상이 데려왔던 5만 군병에 거용관 수비대 5만을 합쳐, 전부 10
만 병사들이 팔달령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잠사옹! 보이시오. 저 행렬은 내가 선택한 길이오."
끊임없이 이어진 병사들의 행진을 쳐다보던 사마군상이 나지막이 중
얼거렸다.
넘을 수 없는 벽들, 지옥마제도 넘지  못했고, 같이 마도련을 세웠던
철혈마존도 넘지 못했다. 노력하면 그들을 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동
등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앙천마마묵독공을 완성했지만 여전히 나머지 겁천십웅과  차이는 좁
혀지지 않았다.
결국 황실을 선택하고 말았다. 무공에서 안 된다면 막강한  권력으로
천하를 도모하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황실을 장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공으로
강호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곳이 황실이었다.
더구나 강력한 경쟁자인 금환신존까지 있었으니.
"아버님! 그만 들어가시죠."
망연한 얼굴로 행렬의  꼬리를 주시하는 사마군상의  귓전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1 진무사이자 양자인 사마웅풍이었다.
"아냐 들어갈 필요 없어!"
"으응?"
느닷없이 들려온 소성에 사마군상과 사마웅풍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
다. 환자를 제외하고는 전 병력을 다 내보낸 상황이다.
결코 남아있는 병사가 있을 상황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목소리가 들
려온 곳까지는 10장. 그 정도로 접근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건
상대 또한 상당한 고수라는 반증이다.
"너는, 고명지?"
몸을 돌려 나타난 자들을 쳐다보던 사마웅풍이  화들짝 놀라며 외쳤
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비록 10장 뒤까지  다가오도록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양부와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특히 양부의 무공 실력은 강호 상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했다. 5년
동안 강호를 떠돌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일부러 죽을 자리를 찾아 온 것이더냐?"
사마웅풍의 얼굴에 다소 여유로운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사마군
상은 달랐는지 찌푸린 얼굴로 꼬리가 사라진 명군 쪽을 쳐다보았다.
문득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위금충을 떠났다고 하던데…. 너를 거둬준 사람이라도 있었더냐?"
사마군상이 인상을 찌푸렸던 이유였다. 자신이 알기론 분명 고명지는
위금충을 버리고 떠났다. 그랬던  그녀가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건 뭔가 다른 신분 얻었다는 결론이 된다.
"이 고명지를 거느릴 사람은 황제 밖에 없지요. 그분께서 말씀하셨습
니다. 두 영물을 없애고 황실을 바로 세우라고 말입니다."
"너희 셋이서?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진 않느냐?"
일순 사마군상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잠사옹의 사람이
아니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냐? 늦게 시작한 사람은 너야. 내가 나타나기 전에 황제를 갈아엎
었으면 3백년 꿈을 이룰 수도 있었을 터인데…. 늙으면 머리 회전이 늦
다는 말이 맞나봐!"
"뭣이?"
사마군상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젊은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3백
년 꿈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 양아들도 모르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있었다.
"쯧!쯧! 겁천십웅 중에  제일 약한 놈이  독마존 서음래라고 하더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어."
"헉!"
급기야 사마군상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1백년 전 버렸던 그  이
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패배자의 이름을.
"누구냐?"
"혹시 이 패가 뭔지 알아? 황제가 그러는데 잠룡어사패라고  하더군.
황제를 제외하면 내가 왕이라나 하면서…."
"잠룡어사패보다 더한 게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희 셋으
론 지금의 국면을 바꿀 수 없는 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우리 셋이 어떻게 전쟁을 치르겠나. 든든한 지
원군이 있으니까 나섰지. 소소야."
"마도련 무인들은 들어라! 그대들의 목표는 금의위다.  한 명도 남김
없이 추살하라!"
"존-명!"
냉소소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렁찬 함성소리가 울리며 거용
관 측면에서 수천 명이 쏟아져 나왔다. 거용관 전면 허공에  남색 물감
을 풀어놓은 듯했다.
그들이 나아가는 목적지는 팔달령 쪽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그리고 보내준 돈 고마워. 이왕이면 1천만  냥을
채울 것이지 쫀쫀하게 8백만 냥이 뭐냐?"
"그럼, 오이라트 군도…."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일이 터지고 말
았다. 오직 위금충과 자신만의 전쟁이라 여겼고,  둘 중 한사람은 새로
운 황제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어디에도 허점은 없었다. 무림 단체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도 않
았고, 그나마 위험소지가 있던 오이라트도 돈으로 매수했다.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는데.
"맞아, 오이라트 칸인 바센이 내 친구야. 참! 이건 말 안했다, 위금충,
아니 환성은 5백만 냥을 내놨어. 1천만 평의 땅하고. 그래서 그놈은 좀
더 살려주기로 했다."
"허허! 이 서음래가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구나.  그것도 새파란 핏덩
어리에게. 하지만 이 서음래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야혼을 주시하던 서음래가 단전을 개방하여 묻어두었던 내공을 천천
히 끌어올렸다.
일순 그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구쳐 오르고 비릿한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했다.
서음래를 겁천십웅의 일인으로 만들었던 앙천마마묵독공이었다.
"이걸 마라혈독강(魔羅血毒 )이라 부른다."
검은 독강(毒 )을 갑옷처럼 두른 사마군상이 야혼을 향해 소리쳤다.
무려 1자에 달하는 강기는 스치기만 해도  몸이 녹아 내리는 절독이었
다.
"나도 질 수 없지. 이건 말이다, 야차금강무적강이라 불러!"
전 내공을 끌어올리며 야혼이 소리쳤다. 마라혈독강과  야차금강무적
강을 끌어올린 두 사람의 모습은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다.
검은 두 동체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흘러나왔다.
"간다!"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야혼의 신형이 사마군상을  향해 무서운 속도
로 지쳐들었다. 뽑아든 비천묵령도가 번쩍 광채를 토하자, 야혼의 전면
으로 수십 개의 강기가 생겨났다.
"혈강(血 )!"
사마군상의 입에서 광포한  고함소리가 터지고 그의  양손이 가슴을
기점으로 반원을 그렸다. 그러자 커다란 반월 모양의 붉은 강기가 생성
되어 전면에서 다가오는 검은 광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비단 혈강이라 불리는 강기만 전진해 나가는 게 아니었다.  사마군상
의 동체도 강기를 따라 전진해 나갔다.
독공이 주무기인 그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조금이라도 상대와 가까
이 있어야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는 무공인 독공이기에,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과과광!
"타앗!"
"이야합!"
검은색과 붉은색 강기가 두 사람의 중간에서 폭죽처럼 터지고,  야혼
과 사마군상은 서로를 노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비천묵령도가 허공을 가르고, 사마군상의 양손의  십(十)자로 교차하
였다.
이어 쏟아져 나오는 강기의 폭풍들.
지옥도법 2초인 지옥수라파와 앙천마마묵독공의 2초인  묵강(墨 )이
었다.
쿠-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거용관 망루가 풀썩 주저앉았다. 이미 인간의 경
지를 벗어난 두 사람의 무공은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
무너진 망루가 가루로 변해 흩어지고,  3장 높이의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사마군상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이철상의 후예였더냐?"
"몰라 임마!"
허공을 박차고 10장 가량을 솟구친 야혼이 낮게 고함을 지르며 아래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비천묵령도를 수직으로 내리 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10장을 이동하면서 무려 108번의 칼질을
해대며 사마군상을 향해 다가갔다.
사마군상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백여  개의 달하는 도탄강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놈의 검은 동체가 가까워질수록 온몸을 옥죄는 힘이 느껴
졌던 탓이었다.
지옥도법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내공에서조차 자신보다 더 앞선다는
의미였다.
"제기랄!"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다른 무공도  아니고 지옥도법이다. 선기를
빼앗기면 회복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단전 바닥이 보이도록  내공을 끌
어올렸다.
정면대결.
자신은 아래쪽에서 올라가야 하고 상대는 허공에서  내리 꼽히는 중
이지만 맞받아 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야합! 무강(無 )!"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가슴으로 모았던 양손을 활짝 폈다.
무강(無 ), 일명 무형독이라 부르는 앙천마마묵독공의 최후  경지다.
정면으로 맞부딪친다면 금강불괴지신의 신체라 하여도 녹아 내리고 만
다. 강기마저 녹이는 무공이 무강인 것이다.
무강의 강기를 따라 몸을 날리던 사마군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무강에 대해 알지 못하는 녀석이  그대로 돌진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씨익!
"웃어?"
놈의 얼굴에 서린 미소를 발견한 사마군상이 일순 의아한 표정을 지
었다. 본인이 펼친 강기들이 녹아 없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웃
고 있다.
"병신, 강하면 뭐하냐 피하면 그만인데."
"허억! 크아악!"
낮게 비명을 지른 사마군상이 재빨리 허공을 박차고 상승했다.
눈앞으로 다가오던 놈의 신형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리 쪽에서 싸늘
한 기운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서늘한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이런 죽일 놈!"
없었다. 살기를 느낌과 동시에 몸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른 쪽 다
리가 발목에서부터 절단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번엔 내 차례다!"
이미 지혈이 필요 없는 신체이기에 곧바로 몸을 틀었다. 양손을 활짝
편 채 아래쪽으로 몸을 날리며 조금 전 펼쳤던 무강을 시전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조금전과 달랐다.
전면 3장에 달하는 공간을 무강의 영향권 내에 두는, 결코 막아낼 수
없는 절대공격이다.
"내공대결은 싫어, 임마."
빠져나갈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다가오는 무색의 독강을 보면서도
싱긋 미소를 지었다.
사마군상이 최후의 방법을 선택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정면 대결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자칫 미세한 틈이라도 만들어주면 그곳을 통해
절대 독강이 쏟아져 들어올게 분명했다.
야차금강무적강을 끌어올리고 있지만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럴 땐 발르는 게 최고지."
허공을 밟으며 몸을 뺐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5장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신형이 쉴새없이 공중을 날아다녔다.
*************************
삭제 공곱니다.
1/9일 일요일을 기해 5권 분량 삭제하겠습니다.
 한 편.
두 사람과 50여장 떨어진 곳에서는 경악한  얼굴의 사마웅풍이 고명
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믿을 수 없는 얼굴.
전력을 다한 자신의 공격은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고 여기저기 상
처를 입었다. 두 여인이 합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고명지만이 자신을 상대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거대한 벽을 보는 듯했다. 넘을 수 없는 철벽.
"너는 우물안 개구리였을 뿐이야. 우물 안에서만 큰소리치는  개구리
말이다."
고명지의 얼굴에 여유가 넘쳤다.
금환신공과 양심신공을 완성하자 더 이상 거칠게 없었다. 16개의  금
환을 허공에 띄운 것 오직 실전연습을 위해서였다.
금환을 조정하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순서대로 보내는 방법도 있고, 시간차로 날리는  방법도 있다. 두 개
를 쌍으로 보내기도 했고, 세 개를 쌍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만 끝내자, 사마웅풍! 아비를 잘못 둔 네 운명을 탓해라! 타핫!"
슬쩍 살기를 내비친 고명지가 합장하듯 양손을 가운데로 모았다.
쉬이익! 쉬리링!
"으-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사마웅풍의 신형이 조각조각 분리되었다. 16
개의 금환이 동시에 그의 몸을 통과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조각조각 분리된 사마웅풍의 동체를 향해 냉소소가 한령신공을 쏟아
냈고, 순식간에 꽁꽁 얼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다음이었다.
강철처럼 단단해진 사마웅풍의 시신 조각들을 야혼을 쫓아 움직이는
사마군상의 등을 향해 날려버린 것이었다.
"놈, 이제 끝장이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사마군상이 전면 검은 덩어리를 향해 소리쳤다.
벌써 일 각 이상을 쫓아다녔다. 하지만 여전히 놈을 잡지 못했다.
놈을 감싸고 있는 강기막이 조금씩 녹고 있지만 완전하게 무강의 영
향권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한데 기회가 왔다. 장시간 허공 중에 떠 있던 녀석이 힘이  다했는지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허공에 머무를 수 없다면 갈 수 있는 곳은 한곳.
지상으로 내려가는 순간이 최적의 기회가 된다.
운용하고 있던 마라혈독강마저 풀어 그 힘을 전부 무강에 집중했다.
추락하듯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놈을 향해 전  힘을 풀어놓으려는 순
간.
쉬이익!
"헉!"
뒤쪽에서 엄청난 기운이 밀려들었다.
금강불괴지신이라지만 마라혈독강을 풀어버린 등은 거의  무방비 상
태. 일순 사마군상은 고민해야했다. 아래쪽으로 추락하는 놈을 없앨 것
인가 아니면 등뒤에서 다가오는 암기를 쳐낼 것인가.
"지옥도법을 익힌 놈이 먼저다!"
이내 결심을 굳힌 사마군상이 아래쪽을 향해 더욱 강한 힘을 쏟아냈
다.
그러나.
퍼억! 퍼억! 퍽퍽퍽퍽!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암기들이 쉬지 않고 등을 두드렸다.
"크윽!"
급기야 나직한 비명을 토해냈다.
그리고 커다란 쟁반처럼 허공에 퍼져있던 무강(無 )의 기운이  흐트
러짐과 함께, 도망 다니던 놈의  등에서 길다란 백색 광채가  솟구치는
걸 보았다.
"빌어먹을…."
약해진 무강(無 ) 기운을 꿰뚫는 백색  광채를 쳐다보며 나직한 욕
설을 뱉어냈다.
"아이고, 힘들어라! 소소 네가 없었으면 난 죽을 뻔했다."
"엄살 부리지 마. 만독불침이 된지 언젠데 그런 소릴 해."
"맞다, 내 몸은 만독불침이었지. 공연히 도망 다녔네."
싱긋 미소를 머금은 야혼이 냉소소와 고명지를  허리에 끼고 팔달령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한편.
팔달령 장성을 지나 초원으로 나갔던 명군  진영은 지옥을 연상시킬
정도로 처참했다. 아울러 그들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전열을 정비하라! 전군은 전방과 후미를 방어하라!"
사마군상과 같이 왔던 오미장군 하태훈은 미칠  듯이 고함을 질러댔
다. 하북성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10일 간도 그랬고, 팔달령 관문을 지
나 초원으로 나올 때까지도 전쟁을 치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임무는 전쟁을 치르는 게 아니라  오이라트 군을 통과시켜주
는 역할이다.
7만 정도라 하였던 적의 수가 20만에 달했지만 크게 염두에 두지 않
았다. 형식상 몇 번의 접전만  치르면 자신의 임무는 끝이기  때문이었
다.
해서 하북성에서 같이 왔던 병사들을 먼저 내보내 싸움을 유도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초원을 가로질러온 오이라트군은 숨쉴 틈을 주지  않고 명군을 유린
하기 시작하였다.
더욱 기절할 노릇은 팔달령으로부터 수천 명의  인물들이 명군 배후
를 덮쳤다는 사실이었다.
전면과 후방에서 포위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허 장군! 허 장군은 어디 있나!"
거용관 수비대 책임자인 허차수를 찾아 고함을 내질렀다. 어찌된  일
인지 그들 따르던 거용관 수비대 5만은  팔달령 쪽으로 후퇴하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허차수 장군은 이미 전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우리 배후를 친자들은 누구더냐?"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함소리를 향해 재차 물었다.
"동창복장을 했습니다!"
"아냐 저들이 동창일 리가 없다. 동창 무인들은 이곳에 올 여력이 없
단 말이다."
동창 고유의 복장인 남색 옷을 입었지만 결코 동창 무인들은 아니었
다. 동창 무인이라면 저렇게 강하지도 않을 것이며, 금의위가 일방적으
로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내 꿈도 여기까진가?"
문득 사마군상을 택했던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동창제독인 위금충의 부하가  아닌 자들이 금의위를  공격한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인가.
사마군상이나 위금충도 모르는 제 3의 세력이 있다는 말이 된다.
아울러 제3의 세력은 사마군상이나 위금충을 누를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백주에 금의위를 공격하지  못할 테니
까.
두두두두! 두두두두!
챙! 챙챙챙! 챙챙!
"으아악! 아악"
"크아악!"
말발굽소리, 도검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병사들이 죽어 가는 소리.
초원은 지옥의 아수라장이었다.
"멈춰라!"
거대한 외침.
엄청난 외침이 초원을 강타했다. 서로를 향해 검과 도를 휘두르던 수
만 병사들의 동작이 일제히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지를 울리는 고함소리에는 항거할 수 없
는 힘이 스며 있었다.
더하여 그 목소리는 지상에서 10장 높이의 허공에서 들려왔다.
"잠룡어사대인 뵈옵니다!"
뒤쪽으로 물러난 마도련 무인들과 거용관 수뇌부들이  그 자리에 무
릎을 꿇으며 우렁차게 외쳤다.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10장  높이에서 고함을 지르는 인물에
놀랐고, 잠룡어사대인이라 부르며 부복하는 3천 무인들의  모습에 놀랐
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만력장군  하차수가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자, 그를 따르던 병사들 전체가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장면은 잠룡어사대인이란 자가  나타나자마자 오이라트
군이 천천히 물러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순 초원에 정적이 흘렀다.
"황제가 나섰단 말인가?"
경악한 얼굴로 하태훈은 중얼거렸다. 잠룡어사패,  비상시 황제와 같
은 힘을 발휘하는 지고지순한 패라 하였다.
그 패를 지니 사람이  나타났다 함은 황제가 손을  쓰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의 근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금의위의 눈에서 한번도  벗어나
지 못했던 사람이 그다.
지금껏 보고된 바로는 황제가 세력을 구축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무인을 이용한 속임순가?"
"맞습니다, 장군! 황제는 이런 일을 벌일만한 능력이 없소이다.  저들
은 무림인이 분명합니다."
한 인물이 하태훈 곁으로 다가서며 낮게 말했다. 금의위 부도독인 일
견살(一見殺) 이양(李梁)이란 자였다.
목전에 벌어진 상황도 그에겐 놀라움을 주지 못한 듯, 침착한 얼굴이
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닙니까."
"오이라트 군은 문제가 아닙니다. 저들은 이미 우리와 거래를 했습니
다. 자칭 잠룡어사패주라는 저자와 무림인들만 없애면 원래대로 돌아갑
니다. 더구나 우리에겐 도독님이 있습니다. 그분만 오시면 원래대로 돌
아갈 겁니다."
싱긋 미소를 지은 이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감히 무림인 나부랭이가 명나라 황군과  금의위를 공격했단 말이더
냐. 후환이 두렵지 않느냐!"
"갈! 닥치거라 이놈! 금의위 도독 사마군상과 동창 제독 위금충은 반
역을 기도한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들과 동조하는 자나, 도움
을 주는 자들은 전원 구족이 참살 당하는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지금부터 반 각의 여유를 주겠다. 그때까지 그곳에 남아있는 자들은 전
원 반역자로 간주할 것이다!"
야혼의 입에서 추상같은 고함이 터지자 하태훈  진영의 병사들이 불
안한 얼굴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오이라트 군과 전쟁이 아닌, 같은  편에 의해 죽게 생겼기 때문이었
다. 더구나 지금껏 따랐던 금의위 도독 사마군상이 반역자가 되었단 말
은 충격이었다.
"건방진 놈! 끝까지 속이려 드는  구나. 반역자는 오히려 네 놈이다.
무인이 황군을 공격하는 네놈이 반역자란 말이다! 금의위는 저들을  없
애 황실의 권위를 세워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공격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지면
을 박찼다.
바닥에 무수한 족적을 남긴 이양의 신형이 야혼이 있는 허공으로 솟
구쳐 올랐고, 그 뒤를 따라 금의위 무인들이 고함을 지르며 나아갔다.
"저런 병신들, 꼭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니까. 명지  소소 전력을
다해 한방씩 먹여."
고명지와 냉소소에게 말한 야혼이 양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허공을 향해 들어올린 손과  함께 그의 몸에서 백색  운무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천둥같은 고함소리가 대지를 갈랐다.
"사사만화류(死死滿花流)! 혈향비도류(血香飛刀流)!"
엄청난 광경이었다. 10장 높이에서 터진 붉은 광채가 전면 금의위 무
인들을 향해 우박처럼 쏟아져 나갔고, 그 뒤를 수십 자루의  비도가 따
랐다.
하지만 야혼 일행의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옥광마수(寒玉狂魔手)!"
"환우멸( 宇滅)!"
냉소소와 고명지의 입에서도 광포한 고함이 터지고 그녀들의 양손에
서 엄청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냉소소의 한옥광마수에 의해 생성된 반투명한  얼음덩어리들은 날카
로운 암기가 되어 금의위 무인들을 얼렸고, 16개의 금환은 금의위 동체
를 잘랐다.
"크아악! 아악!"
"으아악! 아악!"
후두둑! 툭! 툭!
겁천십웅의 무공, 천하제일이라 알려진 그들의 무공은 가공했다.
단 1초의 공격에 어육이 되어 죽어간 금의위 숫자가 100여 명이었다.
제대로 된 시체를 남긴 자는 몇 없었다. 대부분이 얼음덩어리로 부서지
거나, 분시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럴 수가…."
하태훈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무인들 전부가 나선 것도 아니다.
잠룡어사패주라는 자와 두 명의 여인에 의해  1백여 명의 금의위가 당
한 것이다.
더구나, 금의위를 공격했던 그들의 무기는, 여전히 허공에 머물고 있
다. 붉은 광채를 발하는  무기와 수십 자루의 비도,  그리고 금빛 환과
투명한 얼음 덩어리.
조금 전 금의위를 없앴던 그것들은 본인들에게  회수되지 않고 금의
위 무사 전면을 가로막고 있다.
멈춰선 금의위가 다시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인가?"
하늘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상대가 황제의 특명을 받은
잠룡어사패주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칭 잠룡어사패주란 자가 나타났고, 그를 이길 수 있는 무인은 아무
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군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 역시 당했다는 의미이리라.
툭!
나직한 한숨을 내쉰 하태훈이 검을 버렸다. 그리고는 병사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반항하지 말고 무기를 버려라!"
그와 동시에 야혼의 입에서도 강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반각이 지났다. 지금부터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자들은  즉결처분하
겠다. 살고자 하는 자들은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어라!"
툭! 툭툭툭!
병사들의 동작을 빨랐다. 수중의 창을 던져버리고 재빨리 갑옷을  벗
기 시작하였다.
"금의위는 듣거라. 무기를 버리고 무공을  파하라. 우리가 도착할 때
까지 무공을 가지고 있는 자는 즉결처분 할 것이다."
고명지와 냉소소를 비롯한  마도련 무인들이 사방을  휘젓고 다니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들의 행동은 매몰찼다. 이미 전쟁에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갑옷을
벗지 않은 병사나, 무공을 파하지 않은 금의위가 발견되면 가차없이 목
을 잘라내고 있다.
수만 벌의 갑옷이 바닥에 뒹굴고, 5만의  병사는 해산되었다. 고명지
를 따랐던 금의위를 제외한 나머지 1천 5백  명은 무공을 잃고 거용관
으로 압송되었다.
이번 작전이 끝날 때까지는 가둬둘 참이었다.
명나라 병사들이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인하여  지리멸렬해 가는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자들.
초원에 진을 친 오이라트 병사들이었다.
"아미타불! 저런 빌어먹을 종자가. 이젠 황실에서까지 사기를 처먹고
있네 그랴."
멀리서 야혼의 활약을 지켜보던 추기영이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쓰
며 말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어느새  잠룡어사대인이란 엄청난
신분으로 나타난 야혼의 능력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게 더 아랫도리를 잘 돌린 결과 아니겠냐.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친구지만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바센으로 변장하고 있는  태웅 역시 추기영과  마찬가지였는지 슬쩍
미소를 머금고 있다.
"더구나 이번 한판으로 떼돈을 벌지 않았냐."
오이라트 부족에 3백만 냥을  떼 주고도 1천만 냥이란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 돈이면 앞으로 만들어질 하오대문을 끌어가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족장님 병사들은 어떻습니까?"
"조금 동요하는 것 같아서 소족장들에게 단단히 일러놓고 왔네. 그나
저나 자네들 정말 대단하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단 세 명이 명나라와 오이라트를 반죽하듯  주무
르고 있다. 특별히 계획을 세워 행동하는 것 같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다.
명나라에서 무엇인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오이라트와  황권을 회복하
려는 명나라 황제 양측을 동시에 만족시키면서 원하는 걸 얻어내고 있
다.
더욱 놀라운 일은 어느 쪽과도 원한을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명나라 황실이나 오이라트는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이라트 입장에서 보면  이번 출정으로 명나라와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고, 명나라 황제는 잃었던 권력을 잡게 된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꾸려나가는  능력에 그저 감탄
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 몸으로 열심히 뛰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노력하는  자는 보답
을 받게 되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서 오게!"
부하들에게 안내되어 안으로 들어오는 야혼을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바센칸! 신수가 훤해졌습니다, 그려."
"킬! 염병할 놈, 잠룡어사대인은 또 뭐냐?"
"아 그거, 사실은 내 게 아니고 명지 건데 잠깐 빌렸지 뭐."
"그럴 줄 알았다. 황제란 놈이 바보가 아닌 이상 너에게 그런 물건을
줬을 리가 없지."
고개를 끄덕인 태웅이 이죽거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자식 말이야 손 좀 봐주려고."
"왜, 고 소저를 넘보기라도 하데?"
"그 개자식이 명지더러 첩이 될 의향은 없냐고 물었단다.  싸가지 없
는 새끼가 제 살길 열어주니까 날 물 먹이려고 그래."
"어떻게, 하려고."
사뭇 긴장한 얼굴이 된 태웅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그렇다고 긴장할 건 없고. 그 놈은 이미 자식까지 있으니까 더 이상
번식을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려고."
"아미타불! 내시를 만들겠단 말입니까 연작문주?"
"생각이 안 나면, 헛소리하지는 않을 것 아냐. 생각 같아선 없애버리
면 좋겠지만 명지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해서…."
말을 하던 야혼이 슬쩍 구시를 쳐다보았다.
"그걸 나보고 해달란 말인가?"
"가능하면 대동에서 해결을 할 테고 안되면 구시 족장이 수고 좀 해
주시오. 사고로 위장하면 될 것 아니요."
"그러다 들키면 우리 달탄은 끝장이란 사실을 모르는가."
"이 양반 또 답답한 소리하네. 들키면 병사시켜버리면 되지  뭐가 걱
정이오. 사람은 말이오, 길다가 돌멩이에 걸려 넘어져 죽을  수도 있고,
음식을 잘못 먹어 체해서 죽을 수도  있단 말이오. 상가 집에 몇  번만
가보시오. 큰 병으로 죽는 놈들보다 별 것 아닌 일로 죽은 놈들이 훨씬
많다는 걸 알게 될 거요.  그리고 그렇게만 해주면 구시족장이  나에게
진 빚을 감해 주겠소."
"으음! 좋네, 그렇게 하지.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 텐가. 적은 병력
도 아니고 20만이나 되는 대군인데."
고개를 끄덕인 구시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황제를 고자로  만드는
건 급한 일이 아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다급한 일은 20만 대군이 대통
으로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자형관으로 들어오기로 하였던  2진과는 대동에서  만나기로 하였고
10일밖에 남지 않았다.
야혼의 지시에 따라 거용관으로 오긴 했지만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
았다. 그렇다고 오이라트 병사를 데리고 명나라를 횡단하며  움직일 수
는 없는 일이다.
"별 걱정을 다하오. 관도(官道)는 괜히 만들어 놓은 줄 아쇼?"
"우리가 무슨 수로 관도로 움직인단 말인가. 명나라에 침입했다고 광
고할 일이 있는가?"
답답한 듯 구시가 언성을 높였다. 명 황실과 밀약에 의해 움직인다지
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뇌부들만의 약속이다.
명나라 지방군은 명 황실과 오이라트간의 밀약에  대해선 알지 못할
테고 공격을 가해올 것이다.
"오이라트 군대신 명나라 군대가 가면 되지 않겠소."
"그럼, 저 벌판에 있는 갑옷들이…."
"그뿐만 아니오. 거용관에 가면 10만 벌 정도의 갑옷이  기다리고 있
소. 전부는 아니더라도 2/3는 명나라 황군으로 변복이 가능할 거요. 오
이라트 군이 아니라 거용관에서 출병한 명나라 황군이 가는데 누가 막
을 거요. 아마 먹을걸 싸주는 이가 더 많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끄응! 그런 수가 있었군. 자네들과는 절대 적이 되면 안되겠군."
절묘한 방법이었다. 야혼의 말대로 오이라트 군은 명나라 군으로  변
장하여 대동으로 갈 것이고, 그곳에서 치를 전쟁에서도  상당한 강점으
로 작용할 게 분명했다.
"다 죽일 필요는 없소. 위금충을 따르는 오군도독부 병사들만 없애면
되오. 아니 수뇌들만 없애면 바로 해산 될 거요. 그럼 내일 봅시다."
"황실은 어떻게 할거냐?"
밖으로 나가는 야혼에게 태웅이 물었다. 오이라트 군에 명 황제가 포
로로 잡히면 황실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 된다.
누가 되었던 황실에 먼저  들어간 자가 태자를 앞세워  권력을 쥐게
될 것이고, 위금충은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기에 묻는  말이었
다.
"거용관 수비대 5만이면 황실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가짜중도 있
고. 그리고 우리 하오대문의 문도들도 있으니까…."
법현의 얼굴을 떠올린 야혼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녀석을  소림사로
보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면  하나 구해서라도 법현의  아들로 만들려고
했는데 다행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법현이 범했던 세 여인 중 한 명이  임신을 했다고 나령이 말해주었
던 것이다.
"그들까지 불렀냐?"
"내가 아니고 고명지가."
"그럼 위금충하고 동창 무인들만  없애면 이번 일은  일단락 되겠구
나."
"너도, 죽어야지. 용감한 오이라트의 칸으로 말이야."
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은 야혼이 파오를 나섰다. 황실에 하오대
문의 분타를 세우기 위한 작업은 막바지에 달했고 만족스런 결과를 얻
게 되어 흐뭇했다.
다음날.
거용관에서 출발한 20만 대군이  대동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관도를 타고 이동하였지만 그들은 어떤 제지도 받지 않았다.
야혼의 짐작대로 오히려 마을 사람들의 환성을 받으며 각 고을을 통
과했다. 그리고 그들 뒤쪽으로  야혼을 비롯한 3천에 달하는  무인들이
따랐다.
중원 북쪽이라 할 수 있는 산서성은 유독 눈이 흔하다. 겨울이면  거
의 눈에 파묻혀 산다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눈이 온다.
금일 또한 다르지 않았다. 전날  밤 불어닥친 먹구름은 급기야 눈을
뿌려대기 시작하였고, 온 사방에 눈꽃이 피었다.
"빨리 이 겨울이 지났으면 좋겠군."
막사 가운데 활활  타오르는 화롯불을 쳐다보며  위금충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동에 오면서부터 공연히 다급해져 조급증이 생기곤 하였
다. 어린 시절, 불구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줄곧 꿈을
꾸었었다. 내시가 아닌 황제가 되고자 하는 꿈을.
"구전성은 들라!"
길다란 손톱을 다듬던 위금충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구전성은 제1첩형이었던 고명지 실종 이후에 새로  임명한 동창의 2
인자였다.
"지금 황제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운명에 순응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과거에도 그랬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주변 병력은 이동시켰느냐?"
"네, 합하! 지금 황제 측근에는 5백여 명의  병사들만 남아있을 뿐입
니다. 그들 또한 오이라트 군과 접전이 시작되면 바로 퇴각하기로 하였
습니다."
"좋다! 그럼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순간 너는 발빠른 아이들을 데리
고 황실을 점거해라. 태자를 잡아두는 것도  잊지 말고. 거용관 소식은
없느냐?"
"네! 아직 거용관에서는 소식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시간이 좀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위금충이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을 거란  생각으로
묻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물어본  말일
따름이었다.
오이라트의 바센과 합의된 날이 되려면 이틀이 남았는데, 소식이  온
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이틀후면 알게 되겠지, 하늘의 선택을…."
가벼운 손짓으로 구전성을 물린 위금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차가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시간을 흘러  드디어 오이라트 군
이 침입해 오겠다고 하였던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울리기 시작한 전고의 소리는 점점 커졌고, 40만 병력이 모
여있는 장원평(長圓坪)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드디어 자형관을 너머에  오이라트 군 선발대의  모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이라트 군은 쉽사리 진격해오지 않았다.
자형관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진지를 구축하며 파오를 세우기
에 여념이 없었다. 하나둘씩 파오의 수가  늘어가고, 초원을 가득 채울
정도가 되자 어둠이 밀려왔다.
그러나, 장원평에는 어둠 홀로 온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 병사가 진을 구축하고 있는 뒤쪽에는  거용관을 떠나온 오이
라트 병사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고 있었다.
초저녁에 시작된 병사들의 도착은 이경까지 이어졌고, 삼경으로 들어
설 무렵 2십만 대군에 의한 공격진이 구축되었다.
"저 엄청난 곳을 돌격해 들어가란 말인가?"
자갈을 물린 말을 쓰다듬으며 구시가 말했다. 수천 개의 횃불이 밝혀
진 장원평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열십(十)자 두 글자를 가로로 붙여놓은 듯한 명군의 진영은 말로 형
언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
명나라 대군의 1/6밖에 안 되는 병력이 저럴진대.
저런 자들을 물리치고 원나라를 건설했던 조상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모이시오."
전면을 쳐다보던 태웅이 낮게 말했다.
"우리는 병력을 5만씩 네 개조로 나누겠소. 제일 먼저 막야 족장이 5
만의 병사를 몰아 돌진해 가시오. 그 다음은 구시족장입니다. 그리고….
불화살을 쏘아 올리시오."
"알겠습니다."
뒤쪽 궁수에게서 활을 건네 받아 불을 붙인  다음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자형관을 통해 들어온 오이라트 병사들에게 알리는 공격신호였다.
"쏴라!"
장원평 후미에서 불화살이  오름과 동시에 트르구트  족장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천지를 진동했다.
슈욱! 슈우욱! 쉭!
그와 동시에 수천 발의 화살이 명군 진영을 향해 날았다.
"크아악! 아악!"
"적이닷! 화살공격이다! 방패를 들어라!"
어둠을 뚫고 날아온 화살 비에 수백 명의  명군 병사들이 바닥을 뒹
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화살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쉬이익! 슈아악!
텅! 툭툭툭!
"으악! 아악!"
"시작되었는가. 저들의 죽음으로 이 위금충의 시대는 시작된다."
멀리 떨어진 황제의 막사를 쳐다보며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오이라
트 병사들이 야음을 이용해 자형관을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
적을 물리치기 위한 전쟁이 아닌 패하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었다.
"구전성! 시행하라!"
"알겠…!"
"와-아!"
두두두두! 두두두두!
"으응?"
뒤에서 들려오는 말발굽소리와 함성소리에 위금충의 얼굴이 흠칫 굳
어졌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탓이었다.
"설마…."
말을 타고 달려오는 병사들을 쳐다보던 위금충이 두 눈을 비볐다.
분명 명군 갑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었다. 북경 근처에 있던 모든  병
력을 동원하여 이곳 장원평에 진을 쳤다.
동원하지 않은 곳은 사마군상이 맡기로 하였던  거용관 수비대가 유
일했는데.
"중앙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수만의 기병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살피던 구전성이  놀란 얼굴로 소
리쳤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전면에서 화살을 날리던 오이라트  병사들조차
말을 몰아 명군 진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뒤에서 왔단 말인가? 왜…."
횃불사이로 보이는 반월도를 확인한 위금충이 앓는 소리를 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전면에 있던 오이라트 군은 그저 눈속
임에 불과했다. 오이라트군 대부분은 거용관을 넘어 명군  배후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미 바센칸과는 밀약이 되어있는
상태이고 돈까지 지불했다.
그들이 약속을 어기고 공격할 리가 없는 것이다.
멍한 얼굴로 오이라트 군을 쳐다보는 순간 명군 진영은 절반으로 잘
렸다.
더하여 배후에서 두 번째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2진은 우측을 갈라라!"
두두두두두!
"탓핫! 이럇!"
수만 명이 내지를 고함소리와 함께 또다시  오이라트 기병이 명나라
진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무려 40만에 달한 엄청난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명군이었지만,  속수
무책이었다.
눈보라 때문에 얼었던 몸은 움직이질 않았고, 더욱 큰 문제는 각  부
대를 맡았던 장군들이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데 있었
다. 적당히 응전하다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그들이었기에 병사들을
제대로 관리한 장군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상황파악을 못하고, 도망치는 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급격하게 무너지는 명군 진영을 쳐다보던 위금충의  얼굴이 흠칫 굳
어졌다.
오이라트 기병을 쫓아 이편으로 달려오는 자들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이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있
었다. 그들은 무인들이라는 것이다.
"금의위 무인들은 동창을 멸하라!"
"내가 당했군."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위금충이 피식 미소를 흘렸다. 금의위라
니, 거용관에서 사라졌어야할 그들이 나타났다 함은, 오이라트 군이 자
신보다 사마군상을 택했다고 봐야한다.
"승부는 우리 둘의  싸움으로 결정난다, 사마군상.  황제는 처음부터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구전성 너는 즉시 황궁으로 떠나라!"
구전성을 향해 고함을 지른 위금충이 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드디
어 30년 간의 기나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 온 것이다.
사마군상이나 자신, 둘 중 한사람만이 살아남을  터이고, 그가 이 나
라의 주인이 된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가….
**************************************
완전한 무협으로 탈바꿈한 광풍무 다시 시작했습니다.
좀더 조신한(?) 내용과 재미로 무장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선작을 팍팍 눌러도 결코 잘못된 선택은 아닐 것입니다.
나한.
천의맹으로
"서음래! 질긴 인연의 고리를  끊자! 패천십비 3차 비무를  시작하잔
말이다."
전방에서 달려오는 사마군상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양손을 사정없이
뿌렸다.
금환신공을 극성으로 익히자 더 이상 금환은 필요 없었다.
의지만으로 기환( 環)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고,  그 수마저도 마
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위금충의 손을 떠난 10개의 금환이 사마군상의 전면을 향해 물밀 듯
이 밀려들어갔다.
"타핫!"
하지만 상대 역시 강자. 검게 변한 그의 양손의 둥글게 원을 그리자,
두 사람 사이에서 커다란 폭음이 일었다.
그리고, 두 사람 좌우에서 밀려나온 동창 무인과 마도련 무인들이 서
로를 향해 무섭게 격돌해 들었다.
파앙! 파바방!
꽈앙!
포탄이 터지듯 사방에서 장력 부딪치는 소리가 진동했다. 3천의 동창
무인과 3천의 마도련 무인들, 전부 6천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상대를 향해 자신들의 절기를 쏟아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진영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황제가 어떻게 하
고 있는지, 오이라트 군은 어느 정도 수위로 공격을 하고  있는지 누구
도 신경 쓰지 못했다.
다만 한가지, 앞에 있는 적을 향해 자신의 최고 무공을 쏟아낼  뿐이
었다.
"으아악!"
최초의 비명소리는 위금충을 따르는 동창 무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창 무인들 또한 약자라 칭하긴 어렵지만  마도련 무인들에 비하면
분명 한 수 아래였다.
더구나 마도련에는 일반 고수들뿐만 아니라 절대  경지를 이룬 원로
들까지 있었으니.
그들의 일수 일수는 곧 죽음과 연결되었다.
"너는…. 서음래가 아니구나."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위금충이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얼굴은  분
명 사마군상이었다.
하지만 사마군상의 얼굴을 하고 있는 자가  펼친 장력에는 독기운이
스며있지 않았다.
"영물이라 그런지 눈치는 빠르네."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천면만환공을 풀었다. 이지러지듯 얼굴 근육이
움직이더니 곧이어 환상적인 미남 얼굴이 나타났다.
"으음!"
"이런! 내시가 내 얼굴을 보고 눈독들이면 안  되는데. 이럴 땐 나를
잘생기게 만들어준 하늘이 원망스러워."
"누구냐?"
불끈 틀어쥔 손에서 땀이 흐르고, 가슴은 폭발적으로 뛰었다. 버거운
적을 만났을 때마다 겪는 현상.
2백 년 전 잠사옹 앞에 섰을 때도 지금처럼 그랬다.
가슴 속 한편이 싸늘하게 젖어드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나? 맞다 내 소개를 안 했구나. 지금부터 잘 들어라, 하나씩 밝혀줄
테니까? 우선은 20년 전 네놈이 역적으로  몰아 처단했던 이부상서 고
청운을 장인으로 둔 사람이고,  하오대문의 문주, 즉  십전수 구약종의
진전을 이어 태을건곤심법을 익힌 사람이고…. 명지야 또 뭐가 있지?"
"지옥마제 이철상의 무공인 지옥도법을 익혔고,  철혈마제, 역천사황,
오행신마 그리고 독마존을 없앤 사람으로 야혼이라 불러."
"너는…. 고명지?"
위금충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아니 믿
을 수가 없었다. 겁천십웅을 없앴다는 자가 나타날 줄이야.
3백년 전도 아니고, 이미 모든 무공을 완성하고 끝을 보았던  자신들
이다. 겁천십웅을 해할 사람은 겁천십웅 자신들 밖에 없다고 믿었다.
더구나 고명지라니.
"허! 내가 죽어서 저승에 온 건가, 아니면…."
"아! 너무 앞서가지 말아. 저승은 조금 있다가 갈 거야. 네 부하들이
전부 뒈진 다음에. 그런데 너는 어떤 영물이 되었냐?  서음래는 영물로
변하지도 못하고 그냥 죽어버렸어."
"우리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구나. 하지만 네 놈이 겁천십웅을 없앴
다는 말을 나는 믿지 못하겠구나."
이내 표정을 푼 위금충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겁천십웅의  무공은
절기 중의 절기다. 그런  무공을 두 가지나 익히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상대는 이제 갓 약관을 지난 나이.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겁천십웅의 무공의 무공  두 가지를 익히려면  신이 되어야
한다. 죽지 않는 신이."
"그럼 나는 신(神)이겠네? 그럼 신 노릇도 한번 해 보지 뭐. 근데 계
속 이빨만 씹고 있을 거냐? 네 부하들과 수준은 맞춰야 할 것 아냐."
"죽일 놈!"
위금충이 진득한 욕설을 뱉어냈다.  놈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쓰러지는 자들은 대부분 동창무인들이었고 갈수록 그 속도도 빨라졌다.
특히 백발 여인의 무공은 꿰나 눈에 익었다.
"허억! 극음마후(極陰魔后)의 한령신공(寒靈神功)?"
나직한 신음을 뱉어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녀석의  말 대로였다.
사방으로 얼음 꽃을 뿌리는 무공은 완성된 한령신공이었다.
"하! 그 자식 더럽게  뜸들이네. 명지야 안 올  모양이다. 우리가 가
자."
위금충을 향해 이죽거리던 야혼이 이내 지면을 찼다.
팟!
"헛-!"
헛 바람을 들이킨 위금충이 재빨리 고개를 젖히며 뒤로 몸을 뺐다.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은 상대의 정권이 턱을  스치며 지나가는 모습
이 눈에 들어왔다.
기절할 지경이었다.
눈이 따르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빠르기라니. 잠사옹이래 처음  겪는
가공할 속도였다.
"아깝다! 저 큰 코를 납작하게 뭉개버렸으면  그림이 되는데. 물건도
없는 놈이 너무 큰 코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죽일 놈!"
얼굴이 잔뜩 붉어진 위금충이 야혼을 향해  튀어나가며 가슴 앞으로
모았던 양손을 활짝 폈다.
금환신공의 2초인 환우살( 宇殺)이었다. 하지만 4개의  금환을 날리
는 고명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려 16개의 기환이 생겨나며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직선으로 나아가는 기환이 있는 가하면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기환이
있었고, 상하 좌우로 움직이는 기환이 있었다.
양심신공을 익힌 고명지가 시전한 금환신공  4초의 경지를 위금충은
2초만에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돈 나도 할 수 있어 임마!"
야혼보다 더 빠른 사람은  고명지였다. 사방에서 요동치며 다가오는
기환을 향해 양손을 쾌속하게 뿌렸다. 그녀의 손에서 쏟아진 16개의 금
환이 엄청난 속도로 기환을 향해 밀려갔다.
그리고.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야혼의 양손 또한 허공을 그었다.
끼이익! 꺄악!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그의 비호에서 34개의  혈신월이 전방으로 밀
려갔다.
"믿을 수가 없군."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십전수 구약종
의 무공은 둘째 치고라도, 고명지가 자신의 무공을 완성했을 줄은 생각
지 못했다.
금환신공을 창안한 자신마저도 2백 년 이상 걸려  완성한 무공이 아
니던가. 아니 오히려 금환을 사용하는 상황에서는 과거  자신을 능가하
는 위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재빨리 내기를 끌어올린 위금충이 허공으로 몸을  띄우며 고함을 내
질렀다.
"기환겁( 環劫)!"
다급한 와중에 펼쳤다지만 위금충의 무공은 가공했다. 순식간에 그의
전면으로 금색의 물결이 들어찼다. 기환겁이라 명명한  금환신공 3초는
전부 64개의 기환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무공이었다.
기환으로 면을 만들어 상대를 공격하는 무공이 바로 기환겁이었다.
"이런 단순한 공격으로는 우리를 어쩌지 못해. 애들 장난은  그만 하
라고."
다리를 번쩍 들어올린 야혼이 금빛 광채를 내뿜는 기환 덩어리를 향
해 힘차게 내리 찍었다.
무변무적퇴였지만 십전수의 그것에 비해 월등해 개선된 무공이었다.
가슴에 있는 마법기운까지 적용시키자 다리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
다. 단지 번개가 치는 것처럼 번쩍 푸른 광채가 일렁였을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마력 속에 포함되어  있던 뇌전(雷電)의 기운을 다리
에 심어버린 것이었다.
마력의 힘은 놀라웠다. 위금충이 만든 기환이 수직으로 잘려버린  것
은 물론이고 그 사이로 뇌전기운이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가는 것이었
다. 강기와 마력이 합일되면서 한층 강한 무공으로 탈바꿈 된 거였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허공에 머물던 혈신월과 금환이 위금충의  전신을 향해 비처
럼 파고들었다.
"이야합! 기환멸( 環滅)!"
다급해진 위금충이 그 자리에 몸을 회전시키며 금환신공 4초를 펼쳤
다.
탁! 탁탁탁!
펑! 펑펑펑!
16개의 금환과 34개의 혈신월이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튕
겨 나갔다.
"몸으로 부딪치는 무공은 나도 있다."
일순 야차금강무적강을 끌어올린  야혼이 돌고 있는  위금충을 향해
뛰어들었다. 야차금강무적강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야혼의  동체는 온통
검붉은 기운으로 가득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철 기둥을 보는 듯, 제 힘을 견디지 못한 강기들
이 사방으로 요동치며 그 기운을 뿜어냈다.
"어서 와라! 놈, 이 기환에 부딪치는 순간 네 놈을 가루로 변할 것이
다."
느닷없는 몸통 공격에 위금충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금환신공 4초
를 운용한 자신의 주변은 온통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찼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정신을 잃게 될 것이고, 놈은 가루로 변할  것이
다. 곧이어 벌어진 광경을 상상하며 더욱 내공을 배가 시켰다.
쉬이익!
검은 덩어리 하나가 황금빛 광채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들었
고, 곧이어 장원평을 들썩이게 하는 거대한 폭음이 뒤따랐다.
콰앙!
10장 높이의 허공에서 이루어진 싸움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충격파는 지면까지 도달했고, 지면의 풀이며 바위들이  가루로 흩어
졌다.
"어라? 저런 썩을 영물 새끼 봤나. 감히 나를 밀어내?"
부딪칠 때 생긴 반발력에 의해 10여 장이나  밀린 야혼이 고함을 내
질렀다.
"얼마든지…."
"그래 임마 계속할거야. 나는  말이다 하던 짓을  절대 그만두지 않
아."
검은 철 기둥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고 조금전과 같은 상황이 재
현되었다. 하지만 충격파가 퍼지고 난 후의 상황은 조금 전과 달랐다.
야혼의 신형은 5장 여를 튕겨나갔고,  위금충 주변을 감쌌던 기환은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또 간다!"
또 다시 기환을 향해 돌진하는 검은 철 기둥, 저번보다 더욱  검어지
고 더욱 빨라졌다.
육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야혼의 동체는 빨랐다.
콰앙!
"또 간다!"
콰앙!
콰앙!
콰앙!
"커억!"
수십 회에 거처 이어진 몸통 공격에 급기야 위금충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허허! 이 위금충이 이렇게 당해야 하는가?"
기가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최후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심
검을 펼치고도 속절없이 당하고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 때문에 빙빙 도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곳을 몸을 뺄 수도 없다. 내기를 일주천 시키기 위해서는  지금
펼치고 있는 심검의 경지를 거둬들여야  하는데, 검은 철 기둥은  그럴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목으로부터 피가 넘어옴과  동시에 기환으로 펼쳤던  심검의 기운이
점자 엷어지기 시작하였다.
기환이 얇아지면서 몸에 오는 충격은 커지고 입으로 넘기는 피의 양
은 많아졌다. 한꺼번에 부서지는 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내부가 망
가지고 있었다.
급기야 피 속에 잘린 내장들마저 섞여 나왔다.
"빌어먹을…."
사람 몸통 하나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구멍이 기환에 생기자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통과하여 들어오는  16개의 금환을
보았다.
"내 무기가 나를 죽일 줄이야!"
팔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뇌까렸다.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가루로 흩어지는 다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목 없는 몸통을 보고 눈을 감고 말았다.
가루로 흩어지는 그것은 위금충, 아니 금환신존 환성의 동체였다.
"아이고 죽겄다. 먼 놈의 영물이 그렇게 단단하다냐?"
지면으로 내려선 야혼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뭘봐! 나 같은 미남 첨봤어?"
주변을 빙 둘러선 마도련 무인들을 향해 고함을 빽 질렀다.
싸움을 끝낸 마도련 무인들이 지금껏 야혼과  위금충의 싸움을 지켜
보고 있었던 거였다.
"꼭 그렇게 싸우고 싶었…소?"
종마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나이  90을 바라보고 강호 밥도 70년
이상 먹었지만 몸통으로 부딪쳐서, 그것도 방아질 하는 것처럼 하여 상
대와 싸우는 놈은 처음이었다.
"거 씨알도 안 먹히는 짓 하지말고 말 까쇼. 새파란 놈에게 말을  올
리고 싶소? 그리고 그 놈은 내시였단 말이요. 오입한번도  못해본 내시
말이오."
어색한 얼굴로 말을 더듬는 종마를 향해 일침을 가한 야혼이 엉덩이
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그러니까 남녀 관계를 가르쳐 주기 위해  그런 식으로 공격했단 말
인가?"
표정을 바꾼 종마가 재차 물었다.
"그 자식은 태어날 때부터 불구였거든. 그래서 성의 오묘함을 가르쳐
준 거 아니겠소."
"아미타불! 그럼 위금충의 사인(死因)은  복상사겠군요 연작문주. 원
래 복상사는 연작 문주의 꿈 아니었습니까?"
느닷없이 들려온 추기영의  말에 마도련 무인들의  얼굴이 기괴하게
변했다.
터지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구시는 갔냐?"
마도련 무인들을 힐끗 쳐다보던 야혼이 추기영에게 물었다.
"잘 갔습니다, 연작 문주. 곰 시주도 장렬하게 전사를 했고."
추기영의 말마따나 장원평에는 명나라 군사들만 남아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병사들은 10만도 채 되지 않았다. 대부분  병사들이
도망을 쳐버렸던 탓이었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뭣들  하는 거요. 이곳을 정리해야지.
그리고 오늘 마도련 무인들은 오지 않았소. 이곳에는 동창과 금의위 무
인들만 있었다는 걸 명심하쇼."
빠르게 말을 마친 야혼이 고명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녀석 갈수록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지 않아?"
"좀 음흉한 면이 있어서 그렇지, 원래 괜찮은 녀석이었어."
자랑스런 얼굴을 한 도마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야혼을 가장 먼
저 선택한 곳이 도백회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니 야혼이 선택 당한 곳은 도백회가 유일하다. 하오밀문이나  마도
련은 야혼이 도백회주 자격으로 선택한 곳에 불과할 뿐이다.
"아냐 이 친구야, 우리 련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  녀석은 여전히
개차반을 벗어나지 못했어."
"아미타불! 두 분 시주님, 복장 터지는 소리 그만하시는 게 어떻습니
까. 늙은이들보다 먼저간 젊은 중생들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수리수
리 마수리 수수리…! 어쩌다가 늙은 잡것들도 많은데 젊은 친구들을 먼
저 데려갔누, 하늘은 너무 불공평해!"
나지막하니 투덜거린 추기영이  경공을 펼치며 종마와  도마 곁에서
멀어졌다.
"저런 개자식…. 야! 거기 안서!"
느닷없이 늙은 잡것들로 변한 종마와 도마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
다. 그러나 추기영 또한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철탁을 두드리는 자세 그대로, 무릎조차 구부리지 않고 움직이고  있
는 것이었다. 추기영을 따라잡기 위해선 전력을 다해야 할 것 같았다.
"하여간 저 자식은 친구들까지 전부 같아!"
결국 추기영에 대한 징벌은 고명지를 다독이고  있는 야혼에게 쏟아
지고 말았다.
"또 감상에 젖어있다.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 줄이나 알고  있
냐?"
눈물을 흘리고 서 있는 고명지의 등을 두드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기회를 줘서."
야혼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20년 동안 길렀던 원
한을 갚았지만 마음은 더욱 허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이 사무치게 보고싶었다.
"쯧!쯧! 동창과 금의위를 거느려야할 최고 권력자가 이렇게 약해서야
원. 참! 명지 너도 천면만환공을 배워야겠다."
"왜 남장하고 있는 모습이 안 어울려?"
"그래 임마! 처음 나를 만났을 때도 바로 들켰잖아."
"맞아, 그랬지. 그날이 고명지가 인생의 기회를 잡는 날이었지."
야혼과 처음 만났던 날을 생각한 고명지가 살풋 미소를 머금었다.
"아-! 질투 난다. 다른 사람의  눈도 있는데 이제 그만  떨어지는 게
어떻습니까, 두분."
"질투 나면 소소도 이리 들어오지 그래."
"됐네요. 그런데 이곳에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황궁으로 간 위금충
의 부하들이 있을 텐데."
"말했잖아, 그곳엔 하오대문 부하들이 있다고."
"그러니까 하오대문 부하들이 누구냐고. 부하들이 있다는 말은  한번
도 안 했잖아."
"내가 말 안 했어? 왜 있잖아, 민산에 있던 네 부하들."
"정말?"
"내가 그랬던 건 아니고, 민산에 도착해서 보니까 태웅과  기영이 녀
석이 두목 노릇을 하고 있더라."
"훗! 빨리도 말해준다."
냉소소가 나직한 웃음을 토해냈다. 마웅채를 말아먹은 자들이 누구인
가 줄곧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야! 너희들 이쪽으로 와봐!"
한쪽에 모여있는 동창 무인들을 야혼이 불렀다. 마도련 무인들이  생
각보다 빨리 동창무인들을 제압하게 된 이유가 그들 때문이었다.
그동안 고명지에게 강호 정보는 물론이고 위금충의 근황을 전해주었
던 자들이었다.
"여기 있는 이분이 너희들 대장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을 테
니 인사해라. 그리고 동창과 금의위를 통합한 조직을  총괄할 분이기도
하니까 잘 모셔야 한다. 알았나!"
"알겠습니다, 제독 합하!"
6백여 명 정도 살아남은 동창 무인들이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무릎
을 꿇었다.
"한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제독 합하를 배신하지
마라. 황제와 제독 중 택일을 해야한다면  무조건 제독이다. 황제는 너
희가족을 죽인 놈이지만 제독은 너희들에게 삶을 주었다. 그 사실을 죽
을 때까지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음으로 따르겠습니다."
지면을 향해 머리를 찍어대는 동창 무인들을  바라보던 야혼이 흡족
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부터 황실까지 경공을 펼친다. 먼저 도착하는 순서대로  진무사
및 첩형을 결정할 테니 그리 알도록, 출발하라!"
"존명!"
야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6백여 명의 동창  무인들이 북경 쪽
으로 몸을 날렸다.
"우리도 가자!"
메뚜기처럼 날아가는 무인들을 쳐다보던 야혼이  냉소소와 고명지를
돌아보았다.
사마군상과 위금충을 없앴다고 하지만 아직도 넘어야할 산은 많았다.
신분을 숨기고 있는 사마군상의 위금충의 부하들을  찾아 없애야 하
고, 그들과 관련된 자들도 색출하여 처리해야한다.
황권 회복을 위한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실세의 탄생이군…."
멀어지는 야혼 일행을 쳐다보던 종마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거용관
에 있는 금의위 5백 명과 지금 북경을 향하는 동창무인 6백 명은, 조금
전 야혼의 말처럼 황제보다는 고명지를 더 따를 게 분명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진 않은가? 야혼을 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는 사
실이 말이네."
도마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게 어디 저 녀석이 잘나서 그런 건가?  주변 상황이 그렇게 돌아
갔을 뿐이지."
"과연 그럴까? 상황을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도 탁월
한 능력일세.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그건 맞다. 저 녀석에게는 운이 따라주는 것 같아."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야혼의 능력에 대해선 종마 또한 반론
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상황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녀석의  표적이 된 천의맹이나  마옥성은 불행한
거지. 특히 마옥성의 주인인 잠사옹은 패를 잘못 선택했어. 유마혼보다
는 야혼을 선택했더라면 신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하지만 걱정이네, 겁천십웅 전부를 이긴  사람이 그인데, 야혼이 상
대할 수 있을지…."
종마의 말을 듣던 도마가 우려 섞인 얼굴로 말했다. 야혼 또한  이곳
에서 겁천십웅 두 명을 없앴지만, 잠사옹은 2백 년 전에 겁천십웅을 이
겼다. 그동안 얼마나 더 강해졌을지 알 수가 없다.
"잘 될 걸세. 대가리는 야혼에게 맡기고 우린 조무래기들만 처리하면
되는 게야. 정 뭐하면 한 손 거들어 주면 될 것 아닌가. 그보다는 마도
련 방어에 더욱 심혈을 기우려야 할  때네. 성라무연대진도 불안해, 좀
더 변형을 해야겠어."
"이미 준비 시켰네. 이번에 들어가면 지금보다 몇 배  강해진 성라무
연대진을 보게 될 걸세."
도마가 자신감 있는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성라무연대진을 조금씩
변형하긴 하였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새롭게 변형된 성라무연대진은 난공불락이라 할 정도로 대단
했다.
"설사 신이라도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하네."
잠사옹이 있다고 하였던 초모랑마봉을 찾는지 도마의 시선이 남쪽을
향했다.
*   *   *
크아악!
쿠워억!
광폭한 소리, 푸른 빛 덩어리가 사방을 비추는 거대한 대전에서 가공
할 기운을 간직한 포효소리가 터져 나온다.
화르륵! 화르륵!
포효의 진원지는 넘실대는 붉은 불꽃 안쪽이었다.
가부좌를 하고 있지만 결코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머리 양쪽에  물
소 뿔처럼 생긴 커다란 뿔이 솟아있고, 얼굴은 사자를 닮았다.
앉아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보통 인간보다 컸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형상의 수인 곁에는 다른 형태의 수인이 있었다. 그의 몸
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칙칙한 마기(魔氣)였다.
마치 늪을 보는 것처럼 질척한 마기에 둘러싸인  그의 모습 또한 인
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꽃을 피어 올리는 괴인과 마찬가지로 양쪽 이
마엔 뿔이 나있고, 얼굴은 뱀 형상이었다.
유마혼과 남천악이었다. 마룡의 심장과 발록의 피를 복용한지  3개월
이 지났지만 완전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했다.
"크아앙!"
발록의 형태를 하고 있던 남천악의 입에서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흘
러나왔다.
마계에서 최고 투사라 불렸다는 발록의 피는 상상을 초월했다.  화산
파의 영단이라는 자소단을 복용한 경험도 있고 하여,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약효가 강한 영약 이상으론  생각하지 않았
다.
하지만 자신만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은 검붉은 피를  복용한 후에 알
게 되었다. 온몸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아니 잠사옹이 건네주었던 언
령제세공을 익히지 못했다면 결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만으로도 석벽을 가루로 만들고 있다.
더하여 온몸에 가해지는 고통이라니, 몸이 갈가리 찢기는 엄청난  고
통이 하루종일 수반되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운기행공에 몰두했다. 사라졌던 눈동자가  새롭
게 돋아났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한가지, 폭발할 듯 요동치는 열기를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들어라. 심장에 쌓이는 내력을 단전으로 유도해라. 그리고 명심해라,
잠사옹을 이기는 방법은 단전이다.'
"헉!"
내기를 다스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유마혼이 일순 몸을 부르르 떨
었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창노한 음성, 그것은 이철상의 목소리였던 탓
이었다.
잠사옹을 이기는 방법이라 하였다.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럼 잠사옹도….'
일순 등골이 서늘해졌다. 잠사옹의 건네준 발록의 피를 복용하기  전
유마혼과 약속을 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물려받는 순간 잠사옹을 없애기로 하였다.  잠사옹
의 의도대로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이철상은 알고 있었다. 더구나 심장으로 모여드는 마력을  단
전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슬쩍 눈을 돌려 유마혼을 쳐다보았다.  그 또한 같은 말을 들었는지
이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순 두 사람의 눈까풀이 동시에 상하로 움직였다.
이철상의 말대로 해보자는 무언의 동의.
'좋다 한다, 어차피 잠사옹이 시키는 대로하면 그를 넘지 못한다.  그
와 다른 방법으로 성취해야만 한다. 아, 안 돼! 정신을 잃으면….'
내심 중얼거린 남천악이 심장으로 몰려가는 마력을 단전으로 유도하
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눈앞이 캄캄하게
변했다.
"크아앙!"
남천악의 본성은 사라지고 발록의 본능이 눈을 뜬 것이었다.  고통스
러운지 남천악은 신형은 포효를 내지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살갗이 터지고 그곳으로부터 피가 튀어나오고 그  피마저 태워 없어
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저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를 뿐이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두 사람을 쳐다보는 자.
느긋한 얼굴로 차를 즐기는 잠사옹이었다.
잠사옹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흘렀다. 예상보다 더 빨리  언령제
세공을 익혀 가는 두 사람 때문이었다.
"이철상, 방금 자네가 저들에게 했던 말 때문에 시간이  더 당겨지게
되었다는 걸 아느냐?"
"헉! 알고 있었단 말이…."
"당연히 알고 있었지. 마력과 내력이 충돌할 때 생기는  충격은 보통
사람은 견디기 힘들다. 무인들은 그런 현상을 주화입마라  부르는 모양
인데. 지금 저들의 상태가 바로 그렇다."
잠사옹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미 이철상이 수작을 부릴 것을 알고
있었다. 해서 유마혼과 남천악의 영혼을 제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철상의 영혼에서 알아내지 못한 마지막 비밀 때문이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이철상. 저들은 완전한 나의  노예가 된
다. 너희 겁천십웅처럼 풀어주지 않을 작정이다."
머릿속의 이철상을 향해 말했다.
"내가 준비한 마지막이 뭔지 아느냐? 이철상 너도  잘 알고 있는 사
람들이다."
슬쩍 미소를 머금은 잠사옹이 남천악과 유마혼이  있는 바닥을 향해
슬쩍 손을 뻗었다.
그르릉!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바닥이 갈라지며 그곳으로부터 죽은 듯 누워있는 두 명의 여인이 올
라오는 것이었다.
"잠사옹! 당신은 더러운 종자가 되었군. 인간 말종 말이야!"
찢어질 듯 눈을 치뜬 이철상이  고함을 내질렀다. 나체의 두 여인은
과거 겁천십웅의 일인이었던 극음마후 빙염과 편후 당보영이었다.
"아니다 이철상. 발록의 피와 마룡의 심장을 본인들의 것으로 소화하
려면 10년 이상 걸린다. 하지만 극음마후와 편후가 있으면 간단하게 해
결되지. 그녀들의 내공이 저 녀석들에게 들어가면 마력과  내력의 균형
을 이루게 되고 언령제세공은 완성된다. 일어나라 나의 종들아!"
슬쩍 미소를 머금은 잠사옹의 입에서 사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죽은 듯  누워있던 빙염과 당보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아이들에게 가거라, 너희가 가진  모든 것을 넘겨주어라. 하나도
빠짐없이."
강시인 냥, 두 여인의 신형은 활활 타는 불길과 검은 마기 속으로 들
어갔다.
"크엉!"
느닷없이 감겨드는 여체에 남천악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시원함, 온몸을 상쾌하게 하는 기운이 전신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본능만 남아있는 그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직 온몸을  시원
하게 해주는 여체를 끌어안고자 하는 욕망뿐이었다.
감겨드는 여인의 허리를 붙잡고 힘차게 내리 눌렀다.
"헉!"
여인의 내공이 몸 안으로 유입됨과 동시에  정신이 돌아온 남천악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왜 여인을  안고 있는지,
눈앞에 있는 여인은 누구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혹시 이철상의 안배? …알았소이다, 당신의  뜻대로 하리다. 여기서
언령제세공을 운용하면 안 된다. 잠사옹의 노예가 되는 길 일 뿐이다."
내심 중얼거린 남천악은 잠사옹이 전해준 언령제세공 대신 화산파의
무공인 자하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유마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철상이 말했던 단전의 첫 번째  의미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였고 여인의 힘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가 운용한 심
법은 철혈무적심법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맹렬하게 움직이던 여인의 신형이 머리부터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
더니 이내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철상 보이느냐? 이 잠사옹 최고의 역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저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무공과  마력을 자유자재
로 이용하는 최고의 전사가 된단 말이다."
잠사옹이 흡족한 얼굴로 외쳤다.
그의 말대로 남천악과 유마혼은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
었다. 양쪽 이마에 우뚝 솟아있던 뿔이 사라지고, 사자모습이었던 얼굴
이 원래 인간으로 모습으로 바뀌었다.
쉬리링!
낮은 소성과 함께 두 사람의 몸에서 오색 광영이 튀어나오고, 가부좌
를 한 두 사람의 신형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뱀이 허물을 벗듯, 환골탈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으드득거리는 소
리와 함께 두 사람의 동체가 조금씩 모습을 바꾸었다.
하지만 유마혼과 남천악의 운기행공은 끝날 줄 몰랐다.
한 시진 두 시진 그리고 하루.
오히려 답답해진 사람은 잠사옹이었다. 그의 계산으로는 벌써 운기행
공을 끝내고 자신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그렇다고 하여 심령을 조정하여 운기행공을 끝내도록 할 수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 들였던 모든 공이 허사로  변할 수 있기 때
문이었다.
"100년을 참았다, 완전한 신체를 만들기 위해."
"그랬군. 새롭게 빙의(憑依)할 신체를  찾기 위해 저들을  만들어 낸
것이었군."
이철상이 나지막하니 이죽거렸다. 이제야 잠사옹의 의도를 알 것  같
았다. 발록의 피와 마룡의 심장으로 두 사람을 천상의 신체로  만든 잠
사옹의 목적은 완전한 몸을 얻기 위함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발록보다는 마룡이 더 나은  것 같은데 자네는 어
떤가?"
이철상의 말을 인정하는 듯 잠사옹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초
조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연신 유마혼의 동체를 흘끔거렸다.
"운기행공을 끝내야 하는데 아직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당신의 의
도는 실패한 것 같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잠사옹."
"웃기지 마라 이철상. 내  계산은 한치의 오차가 없었다.  유마혼 저
아이의 몸은 최고로 바뀌었다. 인간의  몸에 반신(半神)이라 불렸던 용
의 심장을 가졌다. 저 몸에 나의 영혼이 더해지면 신이 된다."
낮게 소리친 잠사옹이 여전히 허공에 머물고 있는 유마혼 곁으로 다
가갔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잘못 된 건 없다. 시간이 좀 걸릴 뿐이다."
유마혼 앞으로 접근한 잠사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의 종이여, 그만 눈을 떠라!"
조금 전 여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사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번쩍!
"헉!"
헛바람을 들이키며 재빨리 몸을 뽑았다. 하지만 움직이는 건  잠사옹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단전에 손을 박아 넣은 유마혼이 진득한 살소를
흘리며 따라붙고 있었다.
"타핫!"
"이야합!"
두 마디의 고함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유마혼의 등을 향해 양손을 휘
두른 잠사옹의 고함소리와 잠사옹의 단전에  양손을 박아 넣었던 유마
혼이 언령제세공의 풍환살을 펼치며 지르는 소리였다.
과앙!
"크으윽!"
등에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에 유마혼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
다. 그렇다고 하여 단전을 부셔버리고자 했던 그의 의도가 실패  한 것
은 아니었다.
그건 잠사옹의 상태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뻥 뚫린 그의
단전으로부터 붉은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마혼의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유마혼과 동시에 출 수한 남천악의 공격이 잠사옹의 단전을 재차 가
격했다.
"커억!"
당혹스런 얼굴이 된 잠사옹이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단지 이상했던 점은 극음마
후와 편후의 신형이 가루로 흩어졌다는 한가지뿐이었다.
원래의 계획에는 그녀들의 시신은 생체실험용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한가지로 지금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다.
"제길…."
급격하게 아물어 가는 단전을  쳐다보던 잠사옹이 욕설을 뱉어냈다.
지옥마제의 막강한 내공이 흩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철상의 내공이 없으면 본 실력의  절반밖에 쓰지 못한다. 그 힘도
엄청나기는 하지만 공연히 짜증스러웠다.
"어떻게 정신을 차렸는지 모르지만 너희들은 나의 상대가 아니리라."
표정을 바꾼 잠사옹이 유마혼과  남천악을 향해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심장에서 움직이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양손으로 엄청난 힘이 모여들고, 곧이어 투명하게 변했다.
그러나, 잠사옹은 양손을 떨치지 못했다.
"과연 그럴까, 잠사옹?"
이철상 때문이었다. 정신력을 바탕으로 펼치는 것이 마법일진대 이철
상의 영혼이 방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철상, 네 놈이?"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이철상의 음성에 잠사옹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
다. 그제야 유마혼과 남천악에게 펼쳤던 대법이 실패한  원인이 이철상
때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몰랐을 거다. 이 날을 위해 2백 년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나와 극음
마후 그리고 편후는 오직 네 놈을  잡기 위해 힘을 합쳤다. 네  놈에게
당하기 전에 그녀들은 원정지기마저도 끌어올려 내공으로 만들었다. 그
게 바로 나의 마지막 수다, 잠사옹."
원정지기, 일명 진원지기라고도 불리는  기운은 인간 생명의 원천을
말한다. 극음마후와 편후의 내공은 단순한 기(氣)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영물의 내단이 영성을 지닌 것처럼 그녀들의 내공 또한 영성을 지녔
고, 잠사옹의 대법을 깨트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죽여버리겠다 놈!"
"나도 바라는 바다 잠사옹!  우리는 어차피 한 몸이다.  뭣들 하느냐
어서 공격하지 않고."
"응? 타핫!"
망연한 눈으로 잠사옹을 주시하던 두 사람이  양팔을 동시에 휘두르
며 몸을 날렸다.
일순 허공 가득 황금빛 환(還)과 백색 검(劒)이 생겨나더니 잠사옹을
향해 물밀 듯 밀려갔다.
"이야합!"
하지만 잠사옹은 강했다. 머릿속으로는 이철상의 영혼과  싸우면서도
유마혼과 남천악이 펼친 환과 기검을 향해 양손을 뿌렸다.
과앙! 콰과광!
거대한 폭음과 함께 유마혼과 남천악의 신형이 10장 정도 밀렸다.
"허(虛)!"
표정을 굳힌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고함소리가 터지고 허공 중에
모습을 감췄다. 아니 허공 중에 신형을 감추는 것처럼 두  사람의 움직
임은 빨랐다.
"화도멸(火刀滅)!"
"빙수격(氷手擊)!"
화도멸, 빙수격, 언령제세공 상에 있던 제5 언령과 6언령이었다.
그러자 잠사옹의 입에서도 강렬할 외침이 터졌다.
"강( )!"
쿠아앙!
"크윽!"
나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잠사옹은 울컥 피를 쏟았다. 언령제세공  상
의 강( )을 시전하여 방어를 했지만 두 사람의 힘을  완전하게 막아내
지 못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만 손해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공격을 가했던 유마혼과 남천악도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서로가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전이 파괴된 잠사옹은 마력만으로 버티고 있는 실정이었고, 유마혼
과 남천악은 몸 안의 힘을 완전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한 쪽은 남천악과 유마혼이었다.
잠사옹의 코와 귀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이철상의 영혼마
자도 잠사옹을 공격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목을 잘라서, 마법진안으로  던져 넣어라. …마법진은  놈의 침실에
있다. 그곳에 피를  뿌리면 이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그리고 파
괴…"
"이놈!"
파앗!
잠사옹의 입에서 엄청난  고함이 터지고 그의  머리로부터 분수처럼
피가 솟구쳐 올랐다.
"괴물 같은 놈!"
낮게 소리친 유마혼과 남천악이 재차 몸을  날렸다. 죽지 않는 괴물,
칠공에서 폭포 같은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잠사옹은 움직이고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자신들을 쫓아 언령제세공상의 무공을 펼쳐댔다.
"탓핫!"
재빠르게 몸을 날린 유마혼이 잠사옹의 오른  팔을 사정없이 내리쳤
다.
"크아악!"
처절한 고함소리가 잠사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고함소리뿐
이었다. 잘린 그의 팔은 계속하여 움직이며 유마혼의  가슴을 파고들었
다.
"커억! 우릴 속였구나."
유마혼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령제세공의 강
( )을 뚫고 들어온 잠사옹의 손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않겠느냐. 내 손만은 네 놈들의 강( )을 뚫을 수 있게 해
두었단 말이다."
"하지만 네 놈이 먼저 죽는다는 건 변하지 않아.  무영창(無影槍), 우
검사(雨劒死)!"
"풍환살(風環殺)! 빙수격(氷手擊)!"
허(虛)를 이용하여 사방으로 몸을  움직이며 언령제세공을 무차별하
게 뿌렸다.
"놈에게 접근하는 방법밖에 없어."
조금 전 팔을 잘라냈던 순간을 떠올린 유마혼이 남천악을 향해 외쳤
다.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하는 공격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좋아! 마력은 빼고, 내공만 이용해. 그럼 승산이 있다."
"가자!"
서로를 쳐다보던 유마혼과  남천악이 잠사옹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지쳐들었다.
"기다렸다 놈들! 제세무(除世無)!"
일순 잠사옹의 몸에서 오색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왔다.  언령
제세공의 마지막 최후무공인 제세무였다.
유마혼이나 남천악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던 자신만의 무공.
"심검의 기운에 마력까지 합쳐진 제세무는 가공했다. 근처에  다가오
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마혼과 남천악은  벌컥 벌컥 피를 토해냈
다. 제세무에 포함된 죽음의 기운은 반항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엄청난 충격과 함께 허공에 머물렀던 두 사람이 신형이 바닥으로 추
락했다.
절체절명, 전혀 힘을 쓰지 못한 두 사람위로 제세무의 기운이 덮쳐드
려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잠사옹의 최대 숙적인 이철상의 영혼이 깨어나며  마지막 공격을 시
작한 것이었다.
"크아악!"
사방으로 퍼져나가던 제세무의 기운이 급격하게  소멸되기 시작하면
서 조금 전 생성되었던 팔이 뜯겨나갔다.
이철상의 마지막 공격은 자살이었다. 그동안 조금씩 축적했던 마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팔 다리를 잘라내고 있는 것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별다른 위협이 아닐 터이지만  지금은 유마혼과 남천
악이라는 적이 있는 상태.
"죽어라! 이철상."
"어서…."
"탓핫!"
"이야합!"
발악하듯 외친 유마혼과  남천악이 사지가 재생되고  있는 잠사옹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스악!
유마혼의 손날이 잠사옹 목을 스침과 동시에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
다. 하지만 잠사옹의 목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뒤따라온 남천악이 장포를 벗어 잠사옹의 목을  감더니 남쪽 잠사옹
의 침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서둘러!"
"크아악! 이놈들!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여겼더냐. 나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반드시 돌아온단 말이다."
"아냐, 당신을 돌아오지 못해. 마법진을 없애버릴 거란 말이야."
석문을 통과해 잠사옹이 침실로  사용했던 곳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바닥에 그려진 둥그런 원에 자신들의 피를 뿌렸다.
파앗!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잠사옹! 당신이 준  능력과 마옥성의 수인
들은 우리가 잘 사용하겠소."
푸른빛이 솟구쳐 오르고 가운데 별 문양이  완성됨과 동시에 장포에
쌌던 잠사옹의 머리를 던져버렸다.
"휴우!"
나직한 숨을 내쉰 두 사람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프! 하하하! 크! 하하하!"
서로를 쳐다보던 유마혼과 남천악의 입에서 호쾌한  웃음이 터져 나
왔다. 문득, 천하제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은 엉망으로 망가졌지만 불사신체에 겁천십웅을  제압했던 무공까
지 얻었다.
목숨을 걸었던 모험에서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다.
"이제 이곳만 파괴하면 세상은…."
"우리 둘만의 것이네. 그대 남천악과 이 유마혼의 세상 말이네."
"시작하세!"
벌떡 일어난 두 사람이 방금 사라졌던 둥근 원이 있던 곳을 향해 마
지막 남은 힘을 쏟아 부었다.
쿠르릉!
"무림은 잘 있나 모르겠군…."
"잘 있을 걸세.
마법진이 그려졌던 자리를 비롯하여 산산이 부서지는 잠사옹의 침실
을 쳐다보던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싱긋 미소를 던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강호 무림은 평안하지 않았다. 무림
인들이 마교라 부른 명교와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전쟁의 양상도 100년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는 명교의 근거지였던 십만대산에서 전쟁을 치렀고, 황실의 지원
을 바탕으로 명교도를 없앴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십만대산이 아닌 강호무림이 전쟁터였고, 오히려 정파 무인들이 추격
당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구파가 첫 공격을 당한 이후 2달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명교의 근거
지는 고사하고, 단 한번의 승리조차 거두지 못했다.
급기야 천의맹주인 감연청은 전 무림에 대고 담화를 발표했다.
신분 여하를 불문하고 무인들은 천의맹으로  초대한다는 포고문이었
다. 떠돌이 낭인들은 물론이고, 그가 마인이라 하여도 상관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단지 한가지,  마교를 척살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무인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무림맹주 감연청이 발표한 담화의 파급은 컸다.
명예를 얻어 영웅이 되고자 하는 자, 새로운 문파를 창설하고자 하는
자, 무인으로 우뚝 서고자 하는 꿈을 가진 무인들이 칼을 들고 집을 나
섰다.
수많은 무인들의 발길이 섬서성으로 향했다.
따닥! 따닥! 따닥!
커다란 깃발을 달고 한가한 듯 관도를 나아가는 사두마차 또한 마찬
가지였다. 하지만 마부석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은 여타 무림인들
과 달랐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듯 연신 책장을 넘기며 키득거리고 있
다. 머리를 바싹 밀어버린 중 한 명과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가진 이들
은 북경을 떠난 야혼 일행이었다.
"연작문주, 천의맹준가 하는  종자가 담화를  발표했다는 말 들었는
가?"
한참을 춘서에 몰두하던 추기영이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그거야 마도련 때문에 그런 거지. 마도련을 날로 먹으려는  수작 말
이야."
빼꼼 열린 마차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야혼이 심드렁하니 말했다.
말이 좋아 강호 동도를 들먹였지만 감연청의 의도는 뻔하다.  침묵하
고 있는 마도련을 천의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담화라는 것을 발표한
것이다.
더구나 마도련 련주는 이제 서른도 되지 않은 여자다. 마도련을 흡수
하기엔 최적의 기회라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침묵하고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자기편이  아니면
전부 적으로 치부하는 게 무인들의  오랜 전통인데. 거기 다른  책으로
좀 바꿔 주게나."
"이번엔 그럴 수 없을  거다. 발등에 떨어진  불끄기에도 바쁠 테니
까."
마차 한 쪽에 새롭게 만들어 단 서가에서 책을 한 권 뽑아낸 야혼이
밖으로 내밀며 말했다.
"근데 우린 어디쯤 와있냐?"
마차 창문사이로 멀어지는 산을 발견한 야혼이 물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봐라. 주변에 널린 무인들이 안 보이냐?"
"그래?"
태웅의 말을 들은 야혼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창문을 열었다.
그의 말마따나 관도에는 검과 도를 찬  각양각색의 무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거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보니 세월 가는 줄 몰랐네. 여어! 안녕
하쇼."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야혼이 지나가는 무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
며 알은체를 했다.
하지만.
누구 한 명 마차 쪽으로 시선을 주는 무인들은 없었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비릿한 조소를 남기며 멀어졌다.
"씨팔놈들! 우리가 뭐 전염병 환잔가?  한번 웃어주면 어디 덧나나?
어려운 때일수록 웃으며 살라 했거늘."
"아미타불! 빌어먹을 시주들이 우리 하오대문을 몰라서 그런  거니까
연작문주가 이해하게. 앞으로 나아질 걸세."
"클클클! 무인들이 너희들을  비웃고 지나가는  이유를 정말 모른단
말이냐?"
마차 뒤쪽에서 늙수그레한 음성과  함께 봉두난발(蓬頭亂髮)의 인영
이 세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시발탱이, 당신은 그 이유를 안단 말이요?"
"으응? 이놈 봐라!"
괴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뒤쪽에서 소리  없이 접근했다. 한데 녀
석들은 전혀 놀라는 눈치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묻고 있다. 더구나 상대의  신분
을 알아볼 생각도 않고 곧바로 씨발탱이라니.
일순 괴인의 얼굴에 흥미로운 빛이 떠올랐다. 사실 그는 장대손의 사
부이자 개방의 태상 방주인 개왕( 王) 황고성(黃高星)이었다.
장대손에게 녀석에 대하여 들은 말도 있고, 투개 사조의 투견공을 이
었다하여 찾아온 것이었다.
"넌 내가 누군지 아느냐?"
"당연히 모르지, 처음 본 사람인데. 괜스레 역을 생각하지 말고 방금
하던 말이나 해보쇼."
"허!"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황고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상식이  없
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무림의 대 선배를 앞에 두고 하는 행동이라니.
창문으로 고개만 삐쭉 내밀고 있던 처음 상태 그대로 묻고 있다.  그
것도 아주 따분한 얼굴로.
이내 얼굴을 고친 황고성이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들이 타고 있는 마차에 걸린 저 깃발 때문이다."
황고성이 바람에 펄럭이는 백색 깃발을 가리켰다.
"무슨 소리요 영감, 저 깃발이 어때서."
깃발 때문이란 황고성의 말에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태웅
이었다. 하오대문 깃발을 도안한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보던 책을 덮고 황고성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저 글을 한 번 읽어봐라!"
"이 영감이 미쳤나? 구인광고 중에  저 정도로 확실한 글이  어딨소.
우리는 누구처럼 치사한 짓은 안 한다고. 도움이 필요하면 자신을 까발
리고 솔직하니 이야기하고 말지. '동도 여러분 마교척살에 동참해 주십
시오.' 하면, 마도련 무인들이 '불러줘서  고맙습니다.' 하고 나올 줄 알
았소."
"얼레? 이놈들 봐라!"
일순 개왕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맹주의  담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뿐 별다른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데 이들은 담화의 속뜻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문득 춘서를 뒤적이며 시시덕거리는 녀석들이 다르게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저 깃발에 쓰인 글은 웃음거리밖에 안돼, 이놈들아."
이내 안면을 바꾼 개왕이 가리킨 깃발에는 왕희지 필체로 쓰여진 몇
개의 글귀가 있었다.
제자 구함.
문  파 : 하오대문.
문  주 : 흑돈 야혼
경력 : 투개 오자양의 투견공을 익혔고, 성모궁에 다녀옴, 마도련
마도대전에 참가하여 일백마 서열 3위에 등극.
우호법  : 거패 태웅
경력  : 만병여의주 소유자이며 성모궁에 다녀옴. 마도련 마도대전
에 참가하여 일백마 서열 2위에 등극.
좌호법 : 육승 추기영.
경력 : 무음항마혈탁의 소유자이며 성모궁에  다녀옴. 마도련 마도
대전에 참가하여 일백마 서열 1위에 등극.
상기 3인이 전부인 하오대문이지만 앞으로 무궁한 발전을 해나갈 것
임. 하오대문에 입문하는 전 제자들에게는 숙식을 무료로  제공함은 물
론이고, 천하최강의 무공을 전수함.
특이사항 : 여 제자 우대.
무려 반장 크기의 깃발에 쓰여진 내용이었다.
"야! 태웅 너무 길게 쓴 것 아냐?"
"글쎄 나도 그런 생각이 드네, 축약해서 좀더 간단하게  내용을 줄일
걸 그랬나?"
"아미타불! 아닙니다. 저 정도는 돼야, 하오대문을 확실하게 알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꼬일 것 아닙니까. 천의맹에 들어가서도 가
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야 합니다."
"끄응!"
개왕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6권 끝, 7권에서 계속>

 전주(殿主) 대우?(1)
 전주(殿主) 대우?

 천하제일 세력은 어디냐?
강호 무림인들뿐만 아니라 세상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 이면 누구나 확신하듯 말한다. 그곳은 천의맹이라고.
마교와의 전쟁에서 몇 번 패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마교의 발호 때문에 천의맹은 지금보다 커질 거라 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들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옥산 곤야평(鯤野坪)에 위치한 천의 맹에는 연일 무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전설의 물고기인 곤(鯤)이 누워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곤야평.
평원이 시작되는 어귀에 병풍처럼 처진 성벽 아래 세 개의 철문이 나 란히 서 있다.
팔각 지붕의 누각(樓閣)아래 자리한 3장 높이의 철문은 정의문(正義 門)이란 글이 양각되어 있고, 그 양편으로 1장 높이 문에는 충의문(忠 義門)이란 글이 쓰여 있다.
그리고, 왼편 충의문 앞으로 2백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길게 줄지 어 있었다. 천의맹에 입단하기 위해 기다리는 무인들이었다.
야혼 일행 또한 그들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발탱이새끼!"

열린 창문 너머로 반대편 충의문을 흘낏 쳐다보며 야혼은 낮게 투덜 댔다. 마차를 얻어 타고 왔던 거지 노인이 다음에 보자는 말만 남기고 그곳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세 개의 문은 신분을 나타내는 곳이었다. 이름 있는 세가나 또는 무 림문파 무인들은 오른쪽 충의문으로 드나들고, 하류문파나 뜨내기 무인 들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지금 자신들처럼.

"세상 참, 니미럴타불일세 그랴. 거지새끼도 바로 들어가는 곳을 하 오대문의 문주와 호법이 못 들어가고 있다니…."

"내 말이 그 말일세 좌호법! 이 추운 겨울날 문밖에 세워두고 뭐 하 는 짓인지 모르겠네. 이름 적는 거야 숙소에서 해도 되는 것 아닌가 말 일세. 이렇게 대접할거면 애초에 부르질 말았어야지!"

추기영과 태웅의 투덜거림이 시발점이었을까. 길게 늘어선 무인들도 불만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을 구하겠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멀리서 달려왔다. 그런데 천의 맹에 들어가는 절차가 이렇게 까다로울 줄이야.
천의맹에 도착했다고 하여 바로 들여주는 경우는 없었다. 일정 수준 인원이 모일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비로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 어 있었다.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소생은 화산파의 연부성(燕副星)이외다."

방명록에 이름을 받던 왜소한 인물이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그럼 대협께서 분광참혼검(分光斬魂劍)이란 말입니까?"

누군가의 외침 소리에 중인들은 놀란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분광참혼검 연부성, 매화검수의 일 인이자, 화산파에서도 중견으로 통하는 자다. 그런 자가 정문 앞에 있을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탓 이었다.
으레 그랬듯 동요하던 자들이 잠잠해진 모습을 보며 연부성은 만족 스런 얼굴로 말했다.

"오늘따라 유달리 많은 분들이 몰려서 그렇습니다. 이곳은 정파의 마 지막 보룹니다. 마교의 간세가 끼어드는 걸 방지하기 위한 절차이니 이 해해 주십시오."

하고 조금 전 무인들을 선동했던 하오밀문 인물들을 노려보았다. 마 치 대단한 인물이라도 되는 양 커다란 깃발을 달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자들.
결코 천의맹에 필요한 자들이 아니었다.

"아마타불! 그만 째리고 빨리 진행하시지요. 산자락이어서 그런지 배 도 고프고 춥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서러운 것은 춥고 배고픈 것 아니겠습니까."

노려보듯 쳐다보는 연부성을 향해 추기영은 슬쩍 미소를 던졌다.

"죄호법 말이 맞소이다. 추운데 말 씹지 말고 빨리 하도록 합시다."

"으음! 알았소이다. 서둘러 하지요. 다음 분 오시오."

나직이 신음을 내뱉은 연부성은 다음사람을 호명했다.
그나마 추기영과 태웅이 한소리씩 한 탓인지 조금 전보다 속도가 빨 라진 듯했다. 얼마잖아 야혼 일행의 차례가 되었다.

"이게 뭐요?"

방명록에 태웅이 쓴 글을 보던 연부성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대부분은 깃발에 쓰인 내용 그대로였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보였 기 때문이었다.
맨 아래 칸에 수금(收金)이란 글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수금(收金).
분명 돈을 받는다는 말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정의 구현의 기치를 걸 고 있는 천의맹에 입단 목적이 수금이라니.

탁!

그때, 마부석 뒤쪽 창문이 열리며 야혼이 머리를 쑥 내밀었다.

"자넨 쫄따구라서 모르는 모양인데, 천의맹을 구축한 9파가 나한테 빚을 졌다네. 우선 계약을 마무리짓고, 그 다음은 정의구현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기로 했다네. 좌호법 들어가세!"

탁!

마차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허!"

어이없다는 얼굴로 마차 꽁무니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조금 전 그 목 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참 오래 살다 보니까 채권자를 개구녁으로 들이는 곳은 처음일세.
안 그런가, 좌호법!"

"아미타불! 원래 세상 인심이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똥싸러 들어갈 때하고 똥싸고 나올 때 사람 얼굴 표정 못 봤는가. 금방까지 지가 퍼질 러앉아 똥을 쌌으면서도 더럽다고 쳐다보지도 않는다네. 언놈은 손까지 씻어버린다네."

"그럼 좌호법은 똥싸고 손도 안 씻나?"

"흠흠."

추기영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분류대상인가!"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연부성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가 정문에 나와 있는 이유. 바로 저런 자들을 골라내기 위해서였다.
거의 7천에 육박하는 많은 무인들이 모여있는 곳이기에, 그들을 일괄 적으로 통제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소한 일에도 불만을 가진 자들이 나오기 마련이고, 본인의 의지와 는 상관없이 그들은 선동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들을 가리켜 반골(叛骨)이라 부르는데, 조직에 불필요한 존재인 것 이다. 방금 마차를 타고 들어간 3인이 그런 자들이었다.

"쿡! 하오대문이라니……. 미친놈들!"

마차가 사라진 곳에 눈길을 주는 연부성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떠 올랐다.

한편.
연부성의 입가에 조소를 흘리게 만든 장본인인 야혼 일행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성벽 왼편을 따라 한참을 이동하자 허름한 건물 한 채가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다.

"마차는 저기 마구간에 두고 와야하오."

일야숙(一夜宿)이란 간판이 달린 건물 문 앞까지 마차를 끌고 가는 일행을 한 인물이 막아서며 말했다.

"아마타불! 알고 있네 졸(卒)시주. 다만 우린 하오대문의 문주님을 내려주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을 뿐이네. 좀 비켜주겠나."

훌쩍 뛰어내린 추기영이 안내인을 밀치며 공손하게 마차 문을 열었 다.
전주 대우?(2)
 "허험!"

헛기침을 하며 야혼이 나타나자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마차를 주시하 던 중인들은 놀란 얼굴을 했다.
세모꼴 얼굴에 염소수염을 기대했던 예상을 뒤엎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미남자가 걸어나온 탓이었다.
더구나 나이마저도 갓 약관을 넘은 듯 하지 않는가.

"새파란 놈이 배포 하나는 크군."

한쪽 구석에서 나직하니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대감 도를 메고 있는 자로 얼굴 전체를 뒤덮은 수염이 특이했다.

"어라? 지금 나보고 한 소리냐?"

깜짝 놀란 야혼은 제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연히 너지. 하오대문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우호법! 이건 분명 우리 하오대문에 대한 도전이지?"

"맞습니다, 문주님!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들은 그저 주둥이를 대패 로 빡빡 밀어버려야 합니다. 소승 대가리처럼 말입니다."

"들었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야혼의 신형은 장한을 향해 튀어나갔다.

"허억!"

야혼을 향해 이죽거렸던 거한은 나직한 비명을 내질렀다. 천의맹 인 물이 보고 있는 곳에서 공격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 다.
방어를 하기 위해 재빨리 대감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퍼억!

"크윽!"

나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거한의 몸은 허공을 날았고 뒤이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피해?"

야혼은 낮게 소리쳤다.

"이번에도 피하나 보자, 쌰-앙!

조금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거한 위쪽으로 몸을 훌쩍 띄웠 다. 일순 비스듬히 눕는 듯 싶더니 옆구리 아래쪽으로 팔꿈치가 불쑥 튀어나왔다.
투견공을 쓸 때 야혼이 즐겨 사용하던 몸통박기였다.

"저런……."

누군가가 안타까운 듯 탄성을 발했다. 허공에 붕 떠 있는 인물의 모 습은 보기에도 섬뜩했다. 옷 밖으로 드러난 팔이며 얼굴이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던 탓이었다.

"아미타불! 이 좋은날……."

나직한 불호소리에 중인들은 눈을 감고 말았다. 뒤이어 커다란 폭음 이 그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쿠앙!

"좋은 날이라서 봐준다. 앞으로는 상대의 말을 믿는 습관을 가져라."

"세상에…."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중인들은 탄성을 흘렸다. 장한의 얼굴 대신 그 옆에 있던 바위가 산산조각으로 부셔져 있었다.
깃발에 쓰여진 내용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오밀문 문주인 야혼은 성모척살대의 일인이었던 투개(鬪 ) 오자 양(午慈陽)의 투견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투견공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아깝게 됐군요. 세 치만 앞으로 갔더라면 부처님께 인신 공양을 할 수 있었는데……."

일순 중인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중이 말한 세 치는 장한의 얼굴 이 있던 자리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오문주를 말리듯 말한 사람이 지금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쯧쯧! 문주 그만하고 들어갑시다. 애들 놀라잖소."

"이 짓도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실력이 녹슬었나보네. 운 좋은 줄 알 아라 덩치."

장한의 볼을 툭툭 치며 몸을 일으킨 야혼은 천천히 일야숙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마치 물결이 갈리듯 중인들은 양편으로 나뉘었다.

"쩝! 이런 거지같은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단 말이군."

일야숙(一夜宿), 간판처럼, 소속 없는 무인들이 하룻밤 묵어 가는 곳 이라 그런지 안쪽은 썰렁했다. 한 가운데 커다란 화덕만 덩그마니 놓여 있을 뿐 군데군데 너부러진 이부자리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속이 정해질 때까지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그림 이 천의맹 조감돕니다."

일행을 맞이했던 인물이 다가오며 벽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럼 저 가운데 건물이 맹주가 기거하는 곳인가?"

조감도를 힐끗 쳐다보며 야혼은 물었다.

"여기 맞습니다, 맹주님께서 기거하시는 천무전입니다. 그리고 여기 왼쪽 두 곳을 와룡전(臥龍殿)과 선무전(仙武殿) 이라 부릅니다. 와룡전 은 세가 무인들이 있는 곳이고, 선무전은 무당파, 종남파, 청성파, 점창 파 무인들이 기거하는 곳입니다."

원래 그의 일인 듯, 조감도를 하나씩 짚어가며 장한은 일목요연하게 설명해나갔다.
천의맹은 넓었다. 한 가운데 천무전을 기준으로 왼편엔 와룡전과 선 무전이 자리했고, 오른 편에는 아미, 곤륜, 개방, 공동 무인들이 기거하 는 령무전(靈武殿)과 여인들만의 구역인 봉황숙이 있었다.
그리고 천의맹 뒤쪽으로는 맹주 직할대라 할 수 있는 비원(秘院)과 구파일방의 원로들을 비롯한 은거기인들의 집단인 정천원(正天元)이 자 리했다.

"그런데, 저기 바로 앞에 있는 연무장엔 몇 명 정도 수용가능한가?"

야혼은 조감도 맨 아래쪽, 즉 정문에서 바로 보이는 커다란 공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대연무장 말씀하시는군요. 저긴 만 명까지 수용가능 합니다."

"그럼 대 연무장 안쪽에 있는 건 호순가?"

"그렇습니다. 저 호수 때문에 이곳이 곤야평이라 불린다고 하더군 요."

"아미타불! 산도 있고, 호수도 있고. 돈만 빼고 다 있습니다, 그려. 미 안한 질문인데 보수는 얼마정도 받는가?"

조감도를 훑듯이 쳐다보던 추기영이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천하전장에 땅문서를 맡겨야했던 이유를 알만했다. 이 정도 건물을 지으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갈 것 같았다.
더더욱 궁금한 건 이런 엄청난 세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운영자금 이었다.

"보수요?"

장한은 뜨악한 얼굴로 추기영을 보았다. 보수라니, 화산파에 있을 때 는 물론이고 천의맹에 와서도 단 한번도 생각보지 않았다.

"하기야 시주 같은 졸(卒)이 그런걸 알 리가 없겠구먼.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보시게."

안됐다는 얼굴로 장한을 보던 추기영은 이내 손을 내저었다.

"식사시간은 한 시진 훕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아미타불! 수고했습니다. 우리 심심한데 계산이나 한번 해보세. 다른 건 몰라도 병사들 옷이며 무기는 천의맹에서 해 줘야 할 테니, 한 달에 2냥씩 잡으면 되려나? 부하들에게 한푼도 안나가니까, 니미씨팔타불! 2 만 냥이면 뒤집어쓰네, 그려."

어이없다는 듯 추기영은 손가락을 꼽아보며 말했다. 이 엄청난 세력 을 유지하는 데 한 달에 2만냥이라니, 완전히 날로 먹는 장사였다.
적어도 하오문 삼인방의 생각은 그랬다.

"그거야, 각 문파나 세가들은 스스로 알아서 하니까 그런 거지. 전시 (戰時)인데 손을 벌리지도 못할 거고."

"어? 덩치 또 나서냐?"

"씨팔! 아깐 얼결에 당했을 뿐야 임마. 정식으로 한판하면…. 넌 새 발의 피야 자식아. 나 고대용(高大勇)이다."

야혼의 투견공에 떡이 될 뻔했던 장한이 당당한 얼굴로 걸어오며 말 을 건넸다.

"어쭈! 화끈한 면이 있네? 좀 전에는 오줌을 지릴 것 같더니만."

손을 불쑥 내미는 고대용을 보며 놀란 듯 말했다.

"그럼 그 지경이 되고도 오줌 안 싸면 그게 사람이냐?"

"맞다, 씨팔! 그런 새끼는 사람도 아니지. 나, 야혼이다. 별호는 다 아 는 것처럼 검은 돼지새끼, 흑돈(黑豚)이고."

고대용의 손을 잡고 흔들며 야혼은 환하게 웃었다. 일순 경직됐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어색한 얼굴로 눈치를 보던 이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고, 야 혼 일행에게도 알은 체를 했다.

"자자! 일단 앉자,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문주!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마도련 이야기나 좀 들어봅시다."

"야! 금방 말을 올리면 어색하잖아. 그냥 대충 씹어 임마."

고대용의 어깨를 치며 야혼은 씨익 웃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여기서 문주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은 야 대협뿐인데."

"그런가? 그럼 뭐 각자 알아서 해. 그러니까 말이야, 여기 하오대문 의 좌우호법과 같이 마도련을 방문했을 때가……."

"아미타불! 그것보다는 성모궁에 찾아갈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아닙니까 문주. 문주가 투견공을 얻은 거하며 우리 우호법이 만 상여의주라는 절대 병기를 얻은 과정도 궁금해할텐데, 안 그렇습니까 시주님들."

"맞습니다. 기연을 얻게된 경위를 알고 싶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중인들은 추기영의 말에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마도련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대강 알고 있는 자들이 많은 모양인지, 중 인들은 오히려 기연의 대지라는 성모궁에 관한 것을 더 듣고 싶어했다.

"그런가 그럼 그 얘기부터 해야겠군. 그러니까 우리가 흠주현에 도착 해서 말이야……."

마도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황은 달랐지만 성모궁을 찾아갔을 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흠주현을 출발하여 성모궁을 찾아가기까지 삼인 방의 모험담은 식당으로 들어가서도 끊이질 않았다.
특히 유마혼을 구해주었던 부분은, 그때의 모습을 거의 재현하다시피 해 침까지 튀기며 늘어놓았다.

"이건 아무리 이야기해도 질리질 않아. 그 때 그 자식이 말이야, 우 리말을 무시하고 해약을 안 처먹었다고. 그래서 내가 내기를 제안했단 말이야. 나는 남천악이 '기절한다.'에 걸었고, 놈은 당연히…."

"아미타불! 남천악은 '기절하지 않는다.'에 걸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야, 그 치사한 새끼가 지가 이기면 우리 문주 한 팔을 잘라간다고 하지 않겠어? 무공도 없는 사람 팔을 잘라가다니 이게 말 이 되냐고! 우리 문주는 내기 조건으로 뭘 걸었는지 알아. 이거야!"

태웅은 불끈 틀어쥔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팔꿈치를 구부려 알통을 만든 채 말을 이었다.

"딱 한방만 때리기로 했다고. 나는 옆에서 이렇게 말했어. 저놈도 팔을 잘라간다고 했으니까 문주님도 팔을 자르라고. 근데 우리 문주님 은 고개를 흔들어버리더군. 사소한 내기로 팔을 잘라서 되겠느냐 이거 지. 내가 제일 못마땅해 하는 게 바로 그 점인데 우리 문주는 마음이 너무 여려 탈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기는, 남천악은 우리 문주님께 한방 빚졌지. 그때 상황을 자네들이 몰라서 그런데, 한 참을 열나게 이족들의 공격을 받던 놈이 꼬르륵 하며 늪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 육승이 재빨리 잠수를 해서 구하지 않았겠습니까. 녀석을 구해 나왔는데, 글쎄 아직 기절하지 않았지 뭡니까. 그래서 다시 한방 먹여 주었지요. 아미타불!"

그때처럼 오른 손 주먹을 힘껏 내리치며 추기영은 열변을 토했다.

"그럼 남천악을 다시 만나면 빚을 받을 겁니까?"

또다시 누군가가 물었다.

"당연히 받아야지. 이 야혼은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거든. 여기도 빚 받으러 왔다는 거 알잖아. 받을 건 받고 줄건 주는 게 우리 하오대문의 문규(門規)야. 어디까지 했더라?"
전주 대우?(3)
 "동굴에 들어가서 헤어질 때부터…."

"저기, 야 대협!"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순간 일야숙에서 일행을 안내했던 자가 야혼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천무전(天武殿)에서 찾으십니다."

"천무전, 왜?"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밖에 사람이 기다립니다."

"제길 한참 재미있는 판인데. 그럼 나머진 좌우호법이 알아서 해. 난 다녀올 테니까."

슬쩍 인상을 찌푸린 야혼은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고 밖으로 나섰다.

"어서 오게, 나는 구일도(具日道)일세."

자신을 구일도라 소개한 이는 비원 소속 암영당 당주로 천검수사 (千劍秀士)라 불리는 자였다.
구일도는 갸름한 눈으로 야혼을 살폈다.

'더럽게 잘생겼네!'

이곳에 오기 전, 기조당에 들러 녀석에 대한 대강의 신상명세를 보았 다.
별호가 흑돈(黑豚)이라 되어 있어, 비대한 인물 정도로 생각했다. 한 데 검은 돼지란 별호가 무색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다.
더구나 행색까지 비단옷으로 좍 빼 입고 있으니 모르고 왔더라면 대 갓집 자제로 착각했을 뻔했다.
하지만 이내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비단 옷이라….하오문은 돈이 많은가 보군."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원래 빚을 받으러 갈 때는 깔끔하게 하고 가 는 습관이 있어서 말이오. 그런데 하필이면 한 밤중에…. 혹시 뒤통수 에 철판 댈 필요는 없겠지?"

구일도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는 천의맹일세. 그리고 이곳에 속해 있는 이들은 명예를 아는 사람들이고,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네."

"큭! 그런 하찮은 놈을 밤중에 부르는 건 무슨 경우요? 그럼 낮에 봅시다. 아직 저들에게 해줄 이야기도 많이 남았고, 배도 덜 찼는데."

구일도의 눈을 직시하던 야혼은 휑하니 몸을 돌렸다.

"멈추게, 자넬 부른 사람은 내가 아니고 천의맹일세. 천의맹의 명령 을 거역할 셈인가?"

"구일도라 했나. 천의맹에서는 일문의 문주를 이런 식으로 부르나?
아직 못들은 모양인데 확실하게 말해주마. 난 하오대문(下午大門)의 문 주다."

그 말을 끝으로 야혼의 신형은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건방진 놈!"

구일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 놈을 잡아 버릇을 고쳐주고 싶지 만, 식당 안에는 2백 명의 무인들이 있다. 비록 그들이 하잘 것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정의구현을 위해 천의맹에 참여해달라는 맹주 포고령까지 발표한 상 황이고 멀리서부터 찾아온 자들이 아닌가.

"젠장!"

나직한 욕설을 뱉어내며 구일도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반 시진 후, 식당 앞에 나타난 자는 비원 기조당(企調堂) 당 주인 만전뇌(萬全腦) 제갈상운(諸葛相雲)이었다.

"반갑습니다, 동도 여러분. 우리 천의맹 대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 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이제 시작했고, 마교와 전쟁 와 중이라 대접에 소홀했던 점 맹주님을 대신해 사과 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한 제갈상운은 의외로 3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제갈상운은 이윽고 야혼 일행을 쳐다보며 말 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밤이라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알았소이다, 갑시다. 살짝 말하면 될 것을 소란스럽게. 아아! 그냥 앉아들 있으라고. 내 다녀와서 천무전에 대해 말해줄 테니까."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은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큭! 재미있는 사람이군.'

제갈상운은 내심 웃었다. 어딘가 모르게 특이한 구석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무전 앞에 도 착했다.
7층 건물.
밤임에도 불구하고 지붕을 덮은 청와(靑瓦)에서는 은은한 광채가 흘 렀다. 천무전을 쳐다보던 야혼은 문득 마도련의 마천루를 떠올렸다.
하지만 두 건물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마천루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반면에 천무전은 화려함의 극 치였다. 횃불에 비친 정원은 갖가지 조각상들과 정원수들로 가득했다.

"돈으로 처발랐네!"

하지만 야혼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갈상운 따라 천무전 1층 에 다다르자 무심결에 입이 벌어졌다. 족히 수백 평은 되어 보임직한 바닥에 파사국에서만 난다는 융단이 깔려 있었다.
연회석처럼 보이는 곳을 가로질러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를 때까 지도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질 않았다.

"당주라 했소?"

"그렇소이다. 문주."

"이 정도 문파를 분타로 거느리려면 일 년에 들어가는 예산은 어느 정도요?"

제갈상운을 따라 기조당(企調堂)이란 팻말이 걸린 방으로 들어서면 서 야혼은 물었다.

"네-에? 문파가 아니고 분타란 말입니까?"

제갈상운은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야혼을 쳐다보았다. 정신 나간 자 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강호 전 세력이 뭉쳐있는 천의맹을 분타로 거느 리고 싶다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자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야혼은 태연했다.

"어떤 놈은 이것보다 더 큰 곳을 다스리고 있는데 이까짓 게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시오."

"설마 황실을 두고 하는 말이오?"

놀라다 못해 경악할 지경이었다. 황실이 있는데 이까짓 천의맹이 뭐 가 대단하냐는 얼굴이다.
문득 정말 정신병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야혼의 얼굴을 빤히 쳐 다보았다.

"내가 미쳤다고 여기는 모양이군. 하지만 여기도 사상누각인건 마찬 가지 아닌가. 무슨 전(殿)하는 것들 다 떠나면 화산파만 남겠지. 천의맹 주는 마교에게 고맙다 해야할 거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거대단체 가 생기기나 했겠소?"

"으음!"

제갈상운은 나직하니 신음을 흘렸다. 야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마 교가 구파의 본산을 없애준 덕에 가장 득을 본 곳은 바로 천의맹이다.
갈곳 없는 구파 무인들이 천의맹으로 올 수밖에 없었고, 천의맹이 거대 세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꿈이야 누구나 꿀 수 있는 거지요."

이내 슬쩍 웃고 말았다.

"그런가? 뭐 사람 인생은 알 수가 없는 거니까. 나도 댁처럼 생각했 던 적이 있었소. 내 주제에 무슨 무공을 익히냐고. 언제 무공을 익혀 하고 싶은 일을 하냐고 말이요. 그런데 무공을 익혔단 말이야. 아직 서 른도 안됐는데."

"투견공(鬪犬功)만으로는 이런 거대세력을 세우는 게 가능하겠습니 까?"
전주대우?(4)
"머리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일단 당신이 말한 이런 거대세 력에서 날 불렀지 않소. 지금껏 충의문을, 그것도 왼쪽을 통해 들어온 무인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천의맹에서 직접 불렀던 자가 몇 명이 나 있었소?"

"딴엔 그렇군요."

제갈상운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방명록에 수금이란 말을 쓴 것과, 무인들을 선동했던 행위가 의도적이었다는 말로 들렸던 탓이었다.

"참! 빚 받으러 왔다고 했는데…."

이내 표정을 바꾸며 슬쩍 말을 던졌다. 비단 돈 때문에 야혼을 부른 건 아니지만 우선은 그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 참이었다.

"아! 천의맹 결성 전 일이라 당주는 모르시겠군요. 다른 게 아니 고…."

야혼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제갈상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계약서인지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제갈상운이 놀란 건 계약서 하단 에 공증인이라고 찍힌 관인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동창제독의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이건 사본이외다. 분실할 수도 있어도 원본은 동창에 맡겨두었소이 다. 왜 이번 황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아시는지 모르겠소. 전 동창제독 과 금의위 영반은 역모 죄로 처형당하고 새 제독이 임명되었소이다.
그분이 동창과 금의위를 총괄한다고 하더군요. 어찌하다보니 그분과 연 줄이 닿았소이다."

"그랬군요?"

계약서를 살피던 제갈상운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 역 모사건으로 인하여 가장 피해본 곳이 있다면 단연 천의맹이다.
동창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땅을 저당 잡히긴 했지만 무이자 로 돈을 빌려 썼다.
한데 새 제독이 등단하면서, 지금껏 받지 않았던 이자를 천하전장에 서 요구해왔다.
그 금액 또한 만만치 않았다. 6만 냥이라는 거금을 매달 지불해야 할 판이다.

"설마 이 거대한 세력에 10만 냥이 없다는 것 아니겠지요?"

야혼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돈 10만 냥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하지만 세 인들의 인식이 문제라서…."

곤혹스러운 듯, 제갈상운은 말끝을 흐렸다.

"10만 냥을 내주는 것은 싫고, 나와 우리 좌우호법은  이곳에 잡아둬 야겠고, 힘든 임무를 맡았소이다 그려."

"무슨…."

제갈상운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야혼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탓이 었다. 맹주를 비롯한 구파 문주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오밀문 삼인방을 이곳에 묶어 두라고 하였다.
그들보다는 그들이 가진 무공과 무기 때문이었다. 특히 무음항마혈탁 은 정파의 보물이라고까지 불린다.
더구나 비무를 하지 않고 거저 주웠다고 했지만 하오밀문 삼 인은 마도련 마도대전에서 1,2,3위를 차지한 자들이다.
장차 마도련을 끌어들여야 하는 천의맹 입장에서 보면 그들을 단순 하게 취급할 수가 없었다.

"간단하게 말하겠소. 나도 전주(殿主) 자리를 주시오."

"헉!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급기야 제갈상운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야혼이 원한 전주는 천 의맹에 세 자리밖에 없는 자리고 무당파, 아미파 두 장문인과 사천당가 가주만이 전주로 불린다.
그런데 하오밀문의 문주인 야혼이 그 자리를 원한 것이다.

"말이 된다는 건 당주도 잘 알고 있지 않소."

"끄응!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따라오십시오."

야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제갈상운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더니 자리 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7층 맹주전이었다. 잠시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 제갈상운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좋구나! 나는 언제 이런 곳에서 살아보나."

회랑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며 야혼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래 쪽 호수부터 시작하여 대 연무장은 물론이고 좌우에 있는 와룡전과 령 무전 건물까지 전부 보였다. 아마도 맹주전 안에서는 천의맹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으리라.

'어지러운가 보구나, 애송이!'

망연한 얼굴로 밖을 구경하는 야혼의 귓전에 나직한 전음이 들려왔 다.

"구일도였네. 그곳에 숨어서 뭐하냐?"

야혼은 싱긋 웃으며 어둠 속 한 곳을 주시했다. 십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의 기척은 처음 도착해서부터 알고 있었다.

'말 삼가라 놈! 맹주전에 들어가거든 최대한 공손하게 행동해라. 그 게 네 놈의 신상에 좋다.'

"병신 그런걸 협박이라고. 임마! 협박을 하려면 좀 그럴싸하게 해. 목 에 칼을 들이댄다거나, 아니면 팔이라도 하나 부러뜨리면서 하는 게 협 박이야, 멍청한 새끼야!"

고함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놀란 사람은 협박을 했던 구일도였다. 설마 맹주전 앞에서 고함을 지 를 줄은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설상가상, 맹주전 문이 활짝 열리며 제갈상운이 놀란 얼굴로 뛰어나 왔다.

"무슨 일입니까, 야 문주!"

"당신네 천무맹은 손님이 오면 매번 부하를 시켜 협박을 하나? 맹주 에게 공손하게 하지 않으면 목을 잘라버리겠다고 하냐고!"

제갈상운이 나오자 야혼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목소리에 내공까지 실었는지 주변 창문들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참으십시오, 야 문주! 기다리십니다, 들어가십시다."

빠른 걸음으로 야혼 곁으로 다가간 제갈상운은 그의 팔을 잡아 안으 로 이끌었다.

"일은 처리하고…."

못이긴 척 제갈상운을 따르며 고함을 지르던 야혼은 이내 말을 삼켰 다. 안쪽에서 날카로운 기운들이 밀려들었던 탓이었다.

"천무전이 만들어진 이후에 자네처럼 큰소리를 치는 사람은 처음이 네. 나는 감연청이네."

"나도 처음이외다. 날 모욕한 놈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경우는 말이 오. 야혼이오."
감연청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슬쩍 웃었다.

"방자하구나, 놈!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안쪽에 있던 비구니인 듯한 여인이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불 진을 들고 있는 그녀는 아미파 장문인자 령무전주인 금정신니 우자령
이었다.

"말이 지나치외다, 장문인! 이 야혼도 일문(一門)의 문주외다.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놈으로 불릴 신분은 아니란 말이오."

"이런 죽일 놈이!"
전주대우?(5)
 "참으십시오, 령무전주!"

몸을 날리려는 우자령을 막아선 인물은 선무전주인 청운자였다.

"더 이상 머물 곳이 못되는군."

길길이 날뛰는, 우자령을 비릿한 얼굴로 쳐다보던 야혼은 곧바로 몸 을 돌렸다.

"멈추게!"

감연청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면으로 십여 명 인물이 떨어져 내렸다. 조금 전 전음을 보내 협박했던 구일도와 그의 부하들이었다.

"어찌 하나같이 이런 줄 모르겠단 말이야. 이까짓 허수아비들을 가지 고 이 야혼을 막아보겠다는 건가! 그렇게도 완성된 투견공을 꼭 보고 싶은가!"

낮게 소리친 야혼의 몸에서 스멀거리며 살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 하였다. 뒤이어 옷 밖으로 드러난 그의 피부는 검은 색으로 변했다.

'맹주, 멈추게 하시오. 투견공(鬪犬功) 12성 경지요!'

개방 방주 화홍개(火紅 )개 감연청을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투견공은 완성할 수 없는 무공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자는 투견공을 완성했습니다.
일대일로는 저도 상대가 아닙니다.'

화홍개는 진땀을 흘렸다.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사조인 투개 오자양 그분조차도 투견공을 완전하게 익히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하오밀문의 문주는 투견공을 완전하게 익히고 있었다.

"구일도 하오밀문 문주께 사과해라!"

"맹주님…!"

야혼의 앞을 막아섰던 구일도는 당혹한 얼굴로 감연청을 보았다. 사 과라니, 맹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감연청의 얼굴은 냉랭하기만 했다. 내심 한숨을 내쉰 구일도 는 야혼을 향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 하외다. 내가 잘못했소."

하지만 야혼은 요지부동, 구일도를 밀치며 복도로 나가는 것이었다.

"용서하십시오, 문주님! 소생이 잘못했습니다."

구일도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좋네, 맹주님의 얼굴을 봐서 이번엔 용서하지. 그만 나가 보시게."

일순 몸을 돌린 야혼은 환하게 웃으며 구일도를 일으켜 세웠다.

"끄응!"

대번에 표정을 변화시키는 야혼의 모습에 실내 이곳저곳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리 와서 앉으시게."

감연청은 굳은 얼굴로 자리를 권했다. 하찮은 하오밀문 문주라는 청 년에게 첫 대면부터 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미 제갈 당주를 통해 본인의 의사는 전했소이다. 가부 결정만 내 려주시면 됩니다."

"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여기는 개봉의 서문시장이 아니고 천 의맹이야! 천의맹 안에 발을 들인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하거늘, 100 년 전에 하오밀문이 어떻게 취급당했는지 알기나 하는가!"

이번에도 역시 야혼을 향해 고함을 지른 사람은 우자령이었다.

"알고 있소이다, 장문인. 하지만 나는 하오밀문의 선대들이 참으로 옳은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하오. 왜냐면, 그들은 어린아이와 아녀자 5 천명을 살해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무슨 말인가?"

일순 일행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성모궁에 대한 내용은 분명한 데 처음 듣는 말이었던 탓이다.

"남천악이나 주려화가 말을 안한 모양이군. 방금 말한 건 내가 성모 궁에서 본 광경이오. 투개 선배도 그렇게 썼습디다. 성모척살대가 성모 궁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어린아이와 아녀자밖에 없었다고. …믿지 않 아도 상관없소이다. 믿으라고 하는 소린 아니니까."

"그래서 그 말을 발설하지 않은 대가로 전주자리를 달란 말인가?"

낮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감연청의 목소리에는 진득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단순히 성모궁에 대한 광견만을 이야기하는 건 결코 아니다.
그것을 빌미로 자신들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그 정도를 조건으로 내 걸겠습니까. 다만 성모척살대가 돌아오 지 않은 이면엔 그런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린 거지요. 내가 말하 고 싶은 건, 우리 하오대문 좌우호법의 신분에 대해섭니다. 좌호법은 무음항마혈탁의 주인이고, 우호법은 만승검왕의 후예요. 그리고 속임수 를 썼던 어쨌든 마도대전에서 1,2,3위를 했고. 그런 우리들이 이곳에서 잡일을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해서 그에 합당한 자리를 달라는 거지요."

"거절하면?"

여전히 굳은 얼굴로 감연청은 물었다. 그가 야혼을 부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오밀문이 아니라 무음항마혈탁의 주인과 만승검왕의 후예란 신분.
이미 소문이 날대로 난 그들을 함부로 내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 오밀문의 떨거지들에게 중책을 맡길 수도 없다.

"천의맹에서 원하지 않는다면 저는 10만 냥을 받아들고 개봉으로 꺼 지면 되겠지요. 사실 그곳에서도 할 일이 많습니다. 청오방인가 하는 자식들이 설치는 바람에 하오대문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거든요."

"으음!"

일순 청운자를 비롯한 감연청은 낮은 신음을 발했다. 청오방, 그곳은 현금마련을 위해 청성파에서 세운 단체라 하였다.

"그럼 내 의사를 전달했으니까 돌아가겠습니다."

의미심장한 얼굴로 일행을 쳐다보던 야혼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허허! 한 방 크게 먹었소이다, 그려."

일행을 보며 감연청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개방에서도 못 받겠다고 하니, 나로서도 참 난감합니다!"

화홍개를 쳐다보며 감연청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전주만 모 인 자리에 화홍개를 참석시켰던 이유는 하오밀문 문주에 대한 처리 때 문이었다. 투견공을 익히고 있으니 개방에서 받아주면 어떻겠냐는 의견 을 피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홍개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투개 오자양의 제자라며 하오문주를 받아들이면 그 의 신분은 개방의 최고 어른인 개왕( 王)보다 위가 되어버린다.
하오밀문의 문주가 개방 최고 어른으로 등극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화홍개가 반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감연청을 가만히 쳐다보던 제갈상운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말해보게, 당주."

"먼저 이걸 봐주십시오."

감연청에게 고개를 숙인 제갈상운은 품속에서 계약서를 꺼내 내밀었 다.

"사본이라고 합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원본은 동창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동창제독 직인이라니. 기절하겠군."

"왜 그러십니까, 맹주!"

"직접 보십시오 태극진인."

감연청은 청운자에게 계약서를 건넸다.

"이건 동창제독의 직인?"

청운자는 설마 하는 얼굴로 제갈상운을 보았다.

"맞습니다. 동창제독의 부관 중 한 명에게 뇌물을 준 모양입니다. 십 만냥 중 절반 정도를 상납하는 조건을 제시했을 겁니다."

"참! 여러 가지로 걸리는 족속이군."

우자령은 잔뜩 불만 어린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비워두었던 자리를 채우는 건…."

"참회당(慙悔堂)을 말하는 건가!"

  일순 감연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참회당이라 부르는 그곳은 천 의맹 죄인을 수감하기 위한 감옥으로 만든 곳이었으나, 각 전에서 별도 로 형당을 운영하고 있기에 폐쇄한 곳이었다.
제갈상운이 말한 그곳은 하오밀문 문주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리라 할 수 있었다.

"그곳을 적당한 이름으로 개명한 다음 직함은 원주(院主)로 내리고 직위를 전주(殿主)로 하면…."

"전주대우라…. 어떻습니까, 여러분!"

제갈상운의 말을 듣던 감연청은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별반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라면 상관없을 듯 싶습니다."

화홍개를 비롯하여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진 당주가 알아서하도록 하게. 그보다는 마교 놈들이 숨어있는 곳은 찾았는가? "

"일부 확인을 했습니다.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서둘러 주게. 맹도들의 사기가 말이 아닐세."

"걱정 마십시오. 조만간 승전보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럼, 소생은 나 가보겠습니다."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인 제갈상운은 밖으로 나왔다.

"야혼이라 했는가? 터전은 내가 만들어 주었네."

 다음날.
일야숙에서 밤을 보낸 야혼 일행은 같이 행동하기로 하였던 50여 명 의 무인들과 함께 참회당 쪽으로 길을 잡았다.

"어쩐 일이오, 당주!"

선무전을 우회하여 가고 있는 일행 앞에 나타난 제갈상운을 야혼은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길 안내를 하려고 왔습니다."

야혼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은 제갈상운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저곳이 선무전입니다. 2천명의 무인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죠."

수많은 건물을 담담하게 보고 있는 야혼을 향해 제갈상운은 간단하 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런가? 그럼 지금 가고 있는 하오대전(下午大殿)에는 몇 명이나 있 소?"

하오대전(下午大殿), 전 이름을 알아서 지으라는 제갈상운의 말에 야 혼이 지은 이름이었다.

"인원수가 중요한 게 아니질 않습니까. 일단 대우에 불과하지만 전주 가 되었고, 전주는 병력을 모집할 수 있으니…."

전주라는 명함과 함께 야혼이 갖게된 권한은 병력을 모집권과 참회 당 기존의 일이다.
그가 오십 명의 무인들을 데려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었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먼. 하오밀문 문주가 전주로 있는 곳에 들어올 바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거야 전주 능력이지요. 이 안에만 해도 7천 명이나 있지 않습니 까."

이번에도 역시 제갈상운은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병력을 모집 할 수 있는 권한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전 에 한해서다.
하오밀문 문주가 전주로 있는 곳에 부하를 자처하고 들어올 인물은 아예 없다고 봐야한다.
맹주를 비롯한 각 전의 전주들이 야혼에게 병력 모집 권한을 흔쾌히 맡긴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허! 재미있네? 제갈세가의 가주이자 천의맹 비원 당주가 우릴 돕다 니. 혹시 나중에 도와 주었으니까 한 덩어리 떼 달라는 말은 안 하겠 지?"

제갈상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묘한 친구였다. 식당에서 조소 어 린 눈길을 보냈던 그가 아니었던가.

"전주자리라고 해봐야 병력모집 권한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이름뿐인 명예직이지요…."

각 전의 전주회의인 천무회에 참석할 수도 없고, 천의맹에서 일어나 는 일에 관여할 수도 없다. 십만 냥이란 거금과 투견공, 무음항마혈탁 그리고 만병여의주로 하오전주 자리를 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문제가 아냐. 일단 시작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저곳이 와룡전 인 모양이군."

선무전과 비슷한 규모의 건물군을 가리키며 야혼은 물었다.

"맞습니다. 저 앞에 있는 산은 내성산이라 부릅니다. 하오전주가 근 무할 곳은 내성산(內城山) 뒤편입니다."

제갈상운은 전면의 50여장 높이의 낮은 산을 가리켰다. 내성산이라 불리는 그 산은 천의맹 북편을 가로막아 자연적인 방벽을 형성하고 있 었다.
세가 집단인 와룡전(臥龍殿)은 내성산 서쪽 끝에 자리했고, 가운데는 비원과 정천원이 그리고 동쪽 끝에는 봉황숙이 자리하고 있다.

"아미타불! 연작 문주! 우리 인기 만점이네 그랴. 저 시주들의 선망 어린 얼굴들 좀 보게. 갑자기 가슴이 뿌듯해지네. 나와서 손이라도 흔 들어 주지 그러나."

마차를 몰던 추기영이 뒤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와룡전 담벼락으로 수많은 무인들이 나와 이편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거야! 잠깐 나갔다 오겠네."

추기영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지른 야혼은 밖으로 나와 마차 위로 올 라갔다.
 "좌호법과 우호법도 올라오시게."

"아미타불! 그려야겠습니다. 고 시주 여기 고삐 좀…."

고대용에게 고삐를 맡긴 추기영과 태웅은 몸을 날려 마차위로 올라 왔다.

"여어! 반갑네! 이번에 새로 부임한 하오대전 전주 야혼일세! 앞으로 친하게 지내보자고!"

"아미타불! 소승은 하오대문의 좌호법 육승 추기영이외다. 여기 적힌 것처럼 마도대전에서 일등 먹었습니다, 그려!"

"나는 하오대문의 우호법 거패 태웅이오. 과거 전적은 여기 써있는 대로요. 잘 부탁하겠소!"

"허!"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제갈상운은 어이없다는 듯 탄성을 뱉어냈다.
와룡전 담 너머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이편의 초라한 행렬을 비웃고 있다. 그런 자들을 향해 자신들을 소개하다니.

"미친놈 소리를 듣기 딱 좋겠구먼."

나란히 서 있는 네 명의 인물을 쳐다보며 제갈상운은 중얼거렸다.
그들은 다름 아닌 와룡전을 이끌고 있는 사천당문의 세 아들과 당가 려였던 것이다.
제갈상운의 예상 대로였다.

"아버지 말대로 정신병자였군요, 형님!"

비릿한 얼굴로 말을 꺼낸 이는 만수무영(萬手無影) 당철영으로 사천 당가의 둘째였다.

"그래도 배포는 있지 않습니까?"

남궁세가의 차남 창궁검(蒼穹劒) 남궁성(南宮星)이 일행 곁으로 다가 오며 말을 건넸다.
그의 얼굴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마치 신기한 동물을 발 견한 듯,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배포라! 자넨 저걸 배포라 생각하는가. 저건 배포도 만용도 아닐세.
가진 것 없고, 능력 없는 놈들의 주무기인 발악이라는 거지. 왜 속된 말로 꼴통 짓이라 하는 것 말일세."

남궁성의 말을 받은 이는 첫째인 몽환귀영(夢幻鬼影) 당운상(唐雲上)
이었다.

"그런 거였습니까? 소제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우리를 웃게 해 주었는데 환영인사는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남궁성은 당운상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고 싶은가?"

 전주대우?(7)
 자못 흥미로운 얼굴로 당운상은 물었다.

"우리를 웃게 해 주었으니까 웃음으로 답례를 해야지요. 크게 한번 웃어주거라! 손도 흔들어주고!"

싱긋 미소를 머금은 남궁성은 좌우에 있는 남궁세가 무인을 향해 고 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곳엔 남궁세가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천당문, 산동악가, 하북팽가 등 수많은 무인들이 나와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그들은 마차를 향해 웃기 시작했다.

"와! 하하하!"

"어이! 하오대문 문주라고 했소. 왕년에 개봉에서 통을 돌렸다는 데 한번 보여줄 수 있소!"

심지어는 야혼의 과거까지 들먹여가며 고함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은 야혼을 보며 웃지 않았다.
허리에 붉은 채찍을 감고 있는 청색경장의 여인, 지난 세월 훌쩍 성 숙한 얼굴이 되어버린 당가려였다.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있는 그녀의 눈은 야혼의 일거수 일투족을 좇고 있을 뿐,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왔구나, 나쁜 놈!'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 다 언제나 같이 떠올랐던 사람.
작은아버지의 권유도 있었지만 천의맹까지 기꺼이 따라나섰던 건 오 직 야혼 때문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온다고 했기에 먼저 와서 기다리려 했다.
일순 당가려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어렸다. 이편을 보던 야혼의 시 선이 자신을 향했던 탓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로 고정되었다.

'죽이게 예뻐졌다! 보고 싶었다!'

귓전에 들려오는 소리에 당가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나 꿈속 에서 환청처럼 들어야 했던 그의 목소리였다.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얼마나 보고싶어 했던가.

"나도!"

중얼거림처럼 당가려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꿈꾸듯 야 혼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귓전에 느닷없는 소성이 끼어들었다.

"생긴 게 아깝지 않습니까, 당 소저? 저런 얼굴을 가진 자가 하오밀 문의 문주라니……."

당상운 곁에서 당가려를 지켜보던 남궁성이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당당해 보이는군요. 과연 이곳에 있는 자들 중 하 오문주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 을까요?"

"하하하! 그건 당 소저가 몰라서 그렇습니다. 제가 뒷골목에서 활동 하는 자들은 좀 아는데요, 저런 행동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족속들입 니다. 한마디로 제 주제를 모르는 거지요. 여기 있는 이들이 환호해 주 는 걸로 생각하고 스스로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한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의맹에 있는 무인들 중 하오밀문 문주 밑으로 들어갈 사람 이 있겠습니까. 지금 따라가고 있는 저들도 조만간 하오전을 탈퇴할 겁 니다. 그럼 셋만 남게 되겠지요. 광대 같은 행동을 하는 저들 셋 만요.
이건 내기….당 소저!"

남궁성은 당혹한 얼굴로 당가려를 불렀다. 몸을 돌려 멀어지는 그녀 의 전신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궁성의 귓전으로 나직한 전음이 흘러들었다.

'입 냄새나니까 다가오지도 말고, 말도 꺼내지 마라, 남궁성! 이건 경 고다.'

'빌어먹을…….'

내심 욕설을 뱉어낸 남궁성은 당가려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모습이었지만 입 냄새 운운하며 모욕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또 한방 먹었는가? 자네가 이해하게. 가려가 원래 말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서 말이네."

붉어진 남궁성의 얼굴을 보며 당운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 지는 남궁세가와 사돈을 맺고 싶어했고, 가려에게 은근 슬쩍 말을 건넸 다. 하지만 가려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보다 강하지 않은 자에겐 결코 시집을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남 궁성을 거부했다.
계속하여 강요하면 당문을 떠나겠다고 하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꺼 내지 못하고 있지만 웃어른들끼리는 어느 선까지 이야기가 된 상태였 다.
남궁성 또한 그런 사정을 알고 있다. 해서 인간적으로 먼저 친해져 보려고 몇 번이고 가려에게 다가갔지만 그녀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아닙니다. 점점 나아지겠지요."

당운상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남궁성은 고개를 돌려 마차를 주시했다. 당가려가 이곳에 있었던 이유가 놈의 얼굴을 보기 위해선 것 처럼 느껴지자, 하오문주 얼굴을 뭉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 었다.
그런 그의 귓전에 더욱 엄청난 말이 들려 왔다.
멀어지던 야혼이 보낸 전음이었다.

'병신새끼! 그래도 나는 너처럼 계집에게 꼬랑지는 흔들지 않아 자식 아. 너 같이 살 바엔 물건을 떼서 개 먹이로 준다 새끼야. 물건값도 못 하는 새끼들을 우리가 뭐라고 부르는 지 아냐? 내시라 불러 병신아. 쯧 쯧! 저것도 아들이라고…. 니 애비가 불쌍타!'

"개자식! 죽여버리겠다!"

남궁성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병-신! 지랄 육갑하네.'

"두고 봐라! 개자식, 네 놈만큼은…."

마차를 노려보며 욕설을 뱉어내던 남궁성은 이내 말을 끊었다. 처소 로 돌아가던 당가려가 이편을 쳐다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하오문주 일행을 구경하기 위해 나와있던 대부 분 인물들마저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뭘 보나!"

버럭 고함을 지른 남궁성은 씩씩거리며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편.
남궁성의 혈압을 올린 야혼은 나직한 콧노래를 부르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야혼이 자리하자마자 제갈상운은 물었다.

"글쎄, 자넨 자신을 가장 빨리 나타내는 방법이 몇 가지라 생각하는 가?"

"그럼?"

"맞아. 자신을 알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 대단한 명성을 쌓는 방법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아주 바보처럼 행동해서 기억하게 하는 방법이지. 전자는 나로선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후자를 썼던 것 뿐이야.
개무시를 당했지만 저놈들은 우리 셋을 머릿속 깊이 기억할 거라고. 지 금은 그 정도면 됐어. 그런데 남궁성인가 하는 새끼 말이야. 미친개처 럼 거품을 뿜어내는구먼."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제갈상운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설마하니 야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당가려와 남궁성에 대해 슬쩍 알려 주었을 뿐인데 그를 길길이 날뛰게 만들어버렸다.
무슨 말을 했을지 가히 짐작할만했다.

"뒷감당은 무슨. 지가 어쩔 거야. 명예직이지만 나는 전준데. 남궁장 순인가 하는 놈보다 더 높잖아. 근데 아직 멀었나?"

제갈상운을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짓던 야혼은 이내 마차 밖을 주시 했다. 어느새 잡목 우거진 산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참회로(懺悔路)를 죽 따라가면 됩니다."

제갈상운은 길게 이어진 반 장 폭의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옛날엔 계곡이었던 모양이구먼."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야혼은 중얼거렸다. 길을 가운데 두고 양 편으로 10장 높이의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져 절벽 끝은 30여 장에 달했다. 마치 거대한 도끼자국처럼 보였 다.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실망은 무슨, 집이 헐었으면 다시 꾸미면 될 터이고, 사람이야 모으 면 되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데 정확하게 내 권한의 범위는 어디 까진가?"

가볍게 제갈상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하오대전으로 간판을 바꿔단다고 해도 전주님이 가시는 곳은 참회 당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회당을 세웠던 기존 목적은 달라지지 않는다 는 말이지요."

"그럼 죄수를 수감하여 사람 만드는 것도 내 일의 한 가지란 말이 군."

"그렇습니다. 단 전주들의 요청이 있어야만 합니다."

제갈상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회당에 죄수를 받는 것 또한 병력 모 집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요청이라……. 뭐 잘되겠지."

5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하오전 자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 후였다.

"아미타불! 원래 감옥으로 쓰려고 만든 곳이었구먼."

주변을 휘 둘러본 추기영은 나직하니 불호를 읊었다. 참회당이 자리 한 곳은 삭막했다. 참회로 양편에 병풍처럼 서 있던 절벽은 길이 끝나 는 지점에서 좌우로 방향을 틀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즉 야혼 일행이 도착한 곳은 내성산 북쪽 30장 높이의 벼랑아래였다.
그리고 절벽에서 200여 장 떨어진 곳에 천의맹 성벽이 세워져 있었 다. 그곳 성루의 경계 또한 하오대전 일이었다.

"옥은 어디 있는 건가?"

야혼은 의아한 얼굴로 제갈상운에게 물었다. 참회당이라 하였던 곳은 세 채의 건물만 덩그마니 세워져 있을 뿐 옥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 다. 하지만 이내 의문은 풀렸다.

"절벽에 나 있던 동굴을 개조하여 옥을 만들었습니다."

야혼의 물음에 제갈상운은 절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다양한 크기의 20여 개의 동굴이 자리해 있었다.

"지금껏 저곳에 수감된 죄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죄인이 없었다는 건 말이 안되고, 결국 전(殿)내부에서 쉬쉬하며 처 리했다는 말이네?"

"그렇습니다. 수평적인 조직의 단점이지요."

"그런가? 하여간 나는 마음에 들어. 천의맹에서 가장 좋은 자리네.
뭐. 자 이쪽으로 모여라!"

만족스럽게 웃던 야혼은 일행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여긴 앞으로 우리가 살집이다! 지금부터 사람 사는 곳으로 꾸민다.
고대용!"

"네! 전주님!"

"너는 소 두 마리하고, 술과 식사도구를 장만해와라!"

"진상(眞尙)!"

"부르셨습니까, 전주님!"

"옥산 아래 가면 천하전장 옥현지부가 있다. 그곳에 가서 야혼이 보 냈다고 해라. 이부자리와 옷과 목재를 줄 것이다. 일단 잠잘 공간을 만 들어야하니까 충분히 가져오도록."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야혼을 향해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은 몇 명의 인원을 데리고 빠르게 몸을 날렸다.

"자 나머진 동굴을 치워라. 집을 지을 때까지 살아야 할 곳이다. 바 위를 자를 실력이 되는 자들은 각 동굴을 돌면서 도와라! 실시한다!"

"알겠습니다. 전주님!"

야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은 무인들은 각각 조를 짜더니 동 굴 쪽으로 뛰어갔다.

'뭔가 이건.'

제갈상운은 놀란 얼굴로 주변을 보았다.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이 들은 모습은 오랜 시간 연습을 해온 것처럼 보였다.

'이무기가 아니고 용(龍)이었던 말인가!'

문득 야혼을 다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호법! 만병여의검결(萬兵如意柱劒訣) 구경 좀 하자."

"좋아! 타핫!"

일순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태웅의 신형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 다. 이어 그의 몸에서 푸른 광채가 솟구쳐 나오고, 만병여의주가 절벽 벽면을 휘젓기 시작했다.

"으음! 용(龍)이었군!"

태웅의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상운은 나직한 신음을 지르고 말았다.
강기 경지에 이른 자라면 얼마든지 바위에 글을 새길 수가 있다. 하 지만 태웅은 20장 높이 허공에 머무르면서 글을 쓰고 있는 상황.
일반 무인들은 흉내낼 수 없는 고절한 경지라 할 수 있었다.
하오대전(下午大殿).
절벽에 새겨진 1장 크기의 네 글자였다.
천의맹에서의 자칭 하오대문 삼인방의 활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주면 밥값을 해야지(1)
전주(殿主)면 밥값을 해야지!

 참회당을 하오대전으로 개조한 야혼 일행은 바쁘게 움직였다. 정문을 통해 연일 목재와 일꾼들이 들어왔다.
기존에 세워져 있던 참회당 건물이 부서지고 그곳엔 새로운 건물들 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하루하루 늘어가던 건물의 수는 야혼 일행이 천의맹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오십여 채에 달하는 엄청난 수로 불었다.
내성산 뒤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대부분 소문으로 접할 수밖에 없 었지만 천의맹 소속 무인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50명이 전부인 곳이고, 성벽 경비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는 자들이 다. 그런 자들이 연무장을 만들고 건물을 세우다니.
어이없다는 듯 내성산 쪽을 보던 무인들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 온 소리에 포복절도하며 뒤집어지고 말았다.

천의맹 정문, 충의문 앞쪽에 세워져 있다는 깃발 때문이었다..
하오밀문 삼인방이 천의맹에 들어올 때 마차에 달고 왔던 구인광고 깃발이 버젓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친구들!' 어느새 야혼 일행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마교와의 몇 번의 전투에서 패해 의기소침해 있던 천의맹 무인들에 게 웃음을 선사한 유일한 이들이 바로 하오밀문 삼인방이었던 탓이었 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더 이상 하오밀문을 비웃지 못했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갖가지 가재도구들과 마감재 때문이었다. 일반 인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고급 자재들이 수시로 목격되었고, 심지어 는 서방에서부터 수입된 물건들도 부지기수라는 말마저 돌았다.
그들이 먹는 음식조차 고급 아닌 게 없다고 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수하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데, 한 달에 무려 10 냥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최 말단에게 10냥을 보수로 지급한다고 하였으니 간부쯤 되는 자들 은 말이 필요 없으리라.

문득, 충의문 앞에 세워진 하오밀문 구인광고가 천의맹 무인들의 눈 에 황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찮은 곳, 문파라는 이름을 달아주기가 부끄러운 곳, 같은 소속으로 있다는 사실조차 못마땅해 했던 무인들의 인식에 조금씩 변화의 조짐 이 일었다.

변화의 시작은 정문을 통해 천의맹에 가입하러 왔던 자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몇몇에 불과했지만 하오대전행을 택한 자들이 있었던 것이 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명칭이었다.
그들을 하오밀문이라 부르는 자들은 없었다. 천의맹에 속한 대부분 무인들은 그들이 있는 곳을 하오대전(下午大殿)이라 불렀다. 전(殿)을 돈을 나타내는 전(錢)이라 낮춰 부르는 자들도 있었지만 한 가지 분명 한 사실은, 더 이상 하오밀문이라 부르는 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오대전에 관한 말은 천의맹 소속 하급 무사들에 의해서만 언급되 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삼 일에 한 번씩 회동을 가지는 전주들 또한 하오대전에 관한 이 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본회의 의제가 아니라 식후 여담으로 하는 이야 기에 불과했지만 천의맹이나 여타 무림문파들이 아닌 하오밀문을 언급 한 예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참! 요즘 맹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던데……."

감연청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흥! 놈이 창기들 등쳐서 돈을 좀 모은 모양입니다. 참회당 자리에 건물을 세우고 병력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10여 명이 그 곳으로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금정신니 우자령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뿐이 아닙니다. 가당치 않게 급료를 지불하고 있답니다. 말단 부 하들에게는 10냥, 중간 간부는 20냥, 수뇌 급에게는 30냥을 준다고 하 더군요."

우자령의 말을 받은 자는 와룡전의 전주인 당성이었다. 우자령과는 달리 당성의 얼굴엔 우려의 빛이 역력했다.
급료를 지불하는 하오대전의 행위에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을 곳이 와 룡전이기 때문이었다.

와룡전은 각 세가인들과 개인적으로 천의맹에 발을 들인 자들의 연 합체라 할 수 있다. 그들 중 문제가 되는 곳은 당연 개인자격으로 천의 맹에 들어 왔던 자들이다.
와룡전에서 그들에게 지급하는 급료는 일인당 한 냥 정도에 불과했 다. 지금까지 한 냥으로도 만족해하였던 무인들이 불만을 가질 건 당연 한 일이고, 어쩌면 병력의 이탈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즐기듯 당성을 보던 감연청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당성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다른 전주들 또한 흥미로운 얼굴로 감연청을 보았다.

"다른 게 아니고 참회당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게 하는 겁니 다. 그곳은 이름만 하오대전일 뿐 하는 일은…. 내가 알기론 각 전에 불필요한 인력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소이다만."

"그들은…."

청운자와 금정신니 얼굴이 흠칫 변했다. 감연청의 말은 사문의 죄인 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그들은 본산에서도 수감되어 있던 자들이기에 마교의 공격을 받은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죄인이긴 했지만 내칠 수는 자들이 아니 어서 천의맹에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젠 우리 는 문파를 초월해야 합니다. 해(害)가 되는 자들은 과감하게 정리하여 조직을 단결시켜야 합니다. 언제까지 끼고 돌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 화산에서도 광검사수(狂劒四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분이 허락하셨단 말입니까?"

일순 중인들은 놀란 얼굴로 감연청을 보았다.
그가 말하는 광검사수는 단순한 자들이 아니었다. 20년 전까지만 해 도 그들은 화산사검(華山四劒)이로 불렸고 사부이자 삼존의 일인인 태 무검존(太武劒尊)을 능가할 유일한 기재들로 꼽았다.
화산파에는 그들이 익힐 검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 정도로 검에 대 한 공부가 깊었다.

하지만 그들의 명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산의 이름 모를 동굴에서 발견한 한 권의 검보가 그들의 일생을 바꿔놓을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매화검법주해라고 쓰여진 단순한 검보였지만 그 안의 내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공에 목말라했던 네 사람은 미친 듯이 매화검법주해에 매달렸다.
검성의 칭호를 받는 상상을 하며.
그러나 그들이 얻은 건 검성의 호칭이 아니라 주화입마였다.
주화입마 증상 또한 특이했다. 일반적으로 무인이 주화입마에 들면 무공이 파훼되어 폐인이 되기 십상인데 그들의 증상은 발작이었다.
이삼일에 한번씩 발작을 일으켜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공격을 해댔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펼치는 검법에 있었다.
새로운 검법, 광인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무공을 익히고 있 는지 그들은 점점 강한 검법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주화입마에 들어 있지만 그들 머리는 무공의 보고였다. 그런 광검사 수를 참회당으로 보낸다고 하였다.
당성을 비롯한 전주들이 놀란 이유였다.

"무음항마혈탁에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군요."

"태무검존 사숙께서 넌지시 말씀을 하시더군요."

감연청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참회당에 죄수를 보낼 생각을 하게 된 건 순전히 태무검존 사숙 때문이었다.
감연청으로선 손해날 게 없었다. 광검사수의 머리가 무공의 보고이긴 했지만 지금은 무공보다는 마교와의 전쟁에 힘을 쏟아야 할 때다.
비원에 두고 속을 썩이느니 보이지 않는 곳에 두는 게 더 낫다는 생 각을 했고, 참회당은 적격이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분류대상자로 낙인찍힌 제자들은 전부 보낼 예정 입니다."

(ps) 6권 말미에 있던 내용인데 생각나지 않을까봐 적습니다.
구인광고입니다.
제자 구함.

문 파 : 하오대문.

문 주 : 흑돈 야혼.
경력 : 투개 오자양의 투견공을 익혔고, 성모궁에 다녀옴, 마도련 마도대전에 참가하여 일백마 서열 3위에 등극.

우호법 : 거패 태웅.
경력 : 만병여의주 소유자이며 성모궁에 다녀옴. 마도련 마도대전에 참가하여 일백마 서열 2위에 등극.
좌호법 : 육승 추기영.

경력 : 무음항마혈탁의 소유자이며 성모궁에 다녀옴. 마도련 마도대전에 참가하여 일백마 서열 1위에 등극.
상기 3인이 전부인 하오대문이지만 앞으로 무궁한 발전을 해나갈 것임.
하오대문에 입문하는 전 제자들에게는 숙식을 무료로 제공함은 물론이고, 천하최강의 무공을 전수함.
 특이사항 : 여 제자 우대.

 전주면 밥값을 해야지(2)
 일행의 얼굴을 슬쩍 살피던 감연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담을 마 쳤으니 이젠 본연의 일로 돌아가자는 의미였다.

"그럼 쉬십시오, 맹주!"

감연청을 향해 포권을 취한 전주들은 맹주전을 나섰다.

 * * *

"고대용! 전부 집합시켜라!"

아래쪽 건물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동굴에서 야혼의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절벽 중간에 새롭게 조성한 이 동굴이 하오전주인 야혼의 거처였다.

고대용에게 명령을 내린 야혼은 자신의 처소가 된 동굴을 슬쩍 돌아 보았다. 지난 한 달간 비천묵령도를 이용하여 손수 뚫어 만들었다. 동 굴이라 하여 단순한 수평으로 뚫린 곳이 아니었다.
입구에서 직선으로 1장 가량 전진한 후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 면 그곳에 40평 정도의 공간이 나타난다.

4개의 침실과 서재, 그리고 거실과 욕실이 있는, 동굴이지만 일반 가 정집과 거의 유사하게 꾸몄다.
목재로 문을 만들어 달고, 천무전에서 보았던 융단을 바닥에 깔았다.

"씨팔! 당가려만 불러오면 완벽한데, 방법이 없으니."

호피가죽으로 장식한 침상을 보며 야혼은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천의맹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었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도착할 때 흘 낏 본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얼굴한번 보지 못했다.
여러모로 생각을 해보고 있으나 아직은 그녀를 데려올 방법을 찾지 못해 내심 애가 달았다.

"연작문주 고민할 것 없네. 우리 방식대로 처리하면 되지 않겠나."
추기영이 안으로 들어오며 야혼에게 말했다.

"그걸 몰라서 그러냐? 그 방법으로 해도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하니 까 그런 거지."

"니미럴타불! 손은 놔뒀다 어디에 쓸 건가. 이젠 부하들도 많아서 할 일도 없는데. 정 급하면 손장난이나 하다가 내려오게나. 참! 손은 씻고 오게 연작문주. 연장이 커서 두 손을 다 써야 겠구만, 킬킬킬!"

짓궂은 얼굴로 이죽거린 추기영은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에라! 개자식아!"

일순 멍한 얼굴로 추기영을 보던 야혼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절벽을 날아 내린 두 사람은 가운데 건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전주님!"

고대용을 비롯한 50명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야혼 일행을 맞이했다.

"그동안 수고들 했다.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씨팔 싸라!"

일순 실내에 있던 무인들은 놀란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모든 공사가 끝난 시점에서 그럴싸한 말을 기대했다. 그런데 '싸라.'니.

"뭘 쳐다봐 새끼들아! 많이 처먹고 많이 싸라는데. 뭐해 고대용!"

일순 와락 고함을 지른 야혼은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사실 이번 공 사에서 가장 고생한 사람들은 돈을 주고 부렸던 목수가 아니라 앞에 있는 이들이었다. 목수들의 지시에 따라 무공으로 나무를 자르고 대패 질을 하고 못을 박았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수십 채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오대문의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야혼의 선창에 이어 50명 무인들은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손을 쳐들 었다.

"문주님! 저희들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인중의 한 명이 야혼을 향해 감사의 표정을 보냈다. 비단 그 뿐만 이 아니었다. 야혼을 따랐던 대부분의 무인들의 심정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특별하게 갈곳이 없어 선택한 하오밀문이었지만, 지금은 누구 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들이 지어놓은 건물에 다른 무인들 이 꽉 찰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명심해라. 다른 전을 넘어 우리 하오대전이 천의맹 최고가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전주님!"

"내가 있으면 불편할 테니까…. 호법들과 고대용은 따라오게."

몇 명의 부하들에게 술을 한잔씩 따라준 야혼은 세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고대용 새로 들어온 소식은 없었냐?"

"아직 특별한 것 없습니다, 회주님! 이번에 출정했던 와룡전(臥龍殿)
도 허탕을 친 모양입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고대용은 야혼을 향해 전주나 문주가 아닌 회주라 하였다. 야혼을 향해 회주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한 부류밖에 없다.
그랬다. 고대용의 직책은 도백회(屠白會) 섬서 지부장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세 사람이 들어선 곳은 야혼이 기거하는 동굴 아래쪽이었다.
그곳 역시 야혼의 동굴처럼 동굴 안쪽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야혼의 동굴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문 대신 고명지에게 배웠던 진을 설 치하여 안쪽을 보이지 않게 해두었다는 점이었다.
진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간 사 인을 10여 명 인물이 맞이했다.
그들 또한 섬서 지부 산하 도백회 인물들로 고대용보다 나중에 들어 온 자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주님!"

십여 명의 도백회 인물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야혼을 맞이했다. 그들 은 앞에는 수많은 책들이 가득했다. 마치 개봉 도축장 지하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문서들이 이곳 저곳에 널려 있었다.
지난 한 달간 소를 들여오면서 가져온 정보들로, 도백회에서 수집한 것들이었다.

"수고들 한다. 전부 앉아라!"

"우선은 각 전의 근황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야혼이 자리하자 고대용은 보고를 시작했다. 도백회, 그들은 정육점 과 고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존재했다.
이곳 천의맹이라 하여 도백회의 시야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7천 여명이 넘는 대 인원이 있는 곳이기에 각 전마다 도살장을 별도로 두 고 있고, 그곳엔 도백회 인물들이 있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보는 일단 천의맹 외부가 나갔다가 다시 고 기와 같이 안으로 들어와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각 전은 하오대전을 본래 목적대로 운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 습니다. 아마 조만간 죄수를 보내올 걸로 보입니다."
 "아미타불! 그것들이 대가리에 기름칠을 좀 한 모양이네 그랴. 우리 하오대전의 인식이 좋아지니까 겁이 나는가 보이."

"육승, 그건 네 생각이고. 그 새끼들은 쓰레기를 이곳에 버리려는 거 다. 우리 하오대전에 어울리는 일거리는 주겠다는 거야!"

"왜 큰소리는 치고 그래 임마. 시간 때우기에 적당한 놀잇감이구먼.
근데 빵은 제대로 정비 됐냐?"

"아미타불! 최고급으로 수리했네. 서책도 비치해 두었고. 한번 들어가 면 다시는 나오기 싫을 걸세. 참 고지부장, 내가 조사해달라고 했던 건 다됐는가?"

"다 됐습니다, 그런데…."

추기영에게 자료를 내밀면서도 고대용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가 요구했던 자료는 와룡전 인물들 중 여자들에 관한 것이었던 탓이었다.

"다, 우리 연작 문주를 위해서 그런 것 아니겠나."

 전주면 밥값을 해야지(3)
 고대용에게 받아든 책자를 야혼에게 내밀며 추기영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적당한 인물을 골라보게. 무공은 말이네 목적에 맞게 써야하는 걸 세. 그리고 고 지부장, 우린 나가서 술이나 한잔하세. 다들 따라오시 게."

도백회 무인들을 데리고 추기영과 태웅은 밖으로 나갔다.

"참 별일이네? 육승이 이런 기특한 생각을 다하고."

야혼은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눈앞의 책자를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도백회 회주 체면 때문에 차마 조사해달라고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추기영이 알아서 처리를 해준 것이다.

'며칠 있다가 나도 휴가 가고 싶네. 노자 든든히 준비해 두시게.'

"알았다 임마! 푹 썩을 정도로 준비해 놓으마."

추기영의 전음에 만족스런 미소를 흘린 야혼은 책자를 들고 위쪽 처 소로 몸을 날렸다.

"당가려, 당가려…."

두툼한 책자로 만들어져 있으나 다른 곳을 볼 필요가 없다. 오직 당 가려가 주변에 있는 여자들만 조사하면 될 터였다.

"요년이네!"

잠시동안 책자를 넘기던 야혼은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고 꼼꼼하게 읽어 나갔다.
잠시 후, 서재를 향해 책자를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란 말이야."

일순 희미한 잔상만 남기고 그의 신형은 동굴 속에서 사라졌다.

 천무전 맹주 집무실 못지 않게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실내에서 나 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허허!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궁 가주!"

흐뭇한 미소로 말을 건네는 자는 사천당가 가주 당성이었다. 출정했 던 남궁세가인을 치하하는 자리를 마치고 여담을 위해 전주 집무실로 그를 초대했던 것이었다.

"마교 놈들이 숨어 있다는 곳으로 가장 먼저 뛰어들어간 사람은 이 녀석이었습니다."

남궁장순은 흐뭇한 얼굴로 남궁성을 보았다. 세가에 있을 때와는 달 리 빠르게 성장해 가는 아들 모습이 대견했다.
집안에서 응석부리던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저 아이 때문인데….'

슬쩍 고개를 눈을 돌려 당가려를 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 쉬었다. 아 들인 남궁성을 변화시킨 주된 요인은 그녀였다.
하지만 당가려는 요지부동, 성의 활약에 대한 소문이 들려와도 별다 른 변화가 없다.

"저건……?"

당가려의 손을 쳐다보던 남궁장순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치떴다. 장 난하듯 움직이는 그녀의 손놀림 때문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철구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공 모양 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전부가 암기였다.
공깃돌을 가지고 놀 듯 움직이는 그녀의 양손엔 손톱크기의 무수한 암기들이 있었다.

"수라만겁천화류(修羅萬劫千花流)?"

남궁장순은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만 개의 손을 가졌다고 하여 그는 만수(萬手)라 불렸다. 그가 몇 개 의 암기를 사용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사천당가 최고 무공이었던 만천화우(滿天花雨)를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 성모척살대에 소속되어 성모궁으로 떠났던 당참(唐站)의 무공이 수라만겁천화류였다.
지금 그녀가 보여주는 것처럼 둥근 모양으로 만들 수도 있고, 검 모 양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겁천십웅의 무공에 이어 당문 최고 무공마저 당가려는 완성한 것이 었다.

"가려야! 손님 있는 데서…."

남궁장순의 모습을 살피던 당성은 나무라듯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각각의 암기에 강기를 싣는 방법을 연구하느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양손을 신경질적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가슴 앞에 있던 검은 덩어리는 순식간에 해체되더니 그녀의 옷 이곳 저곳으 로 사라졌다.

"얼굴이 안 좋구나.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게냐?"

"아닙니다. 제게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당성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말처럼 그녀의 얼 굴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에 잔뜩 짜증이 나있는 얼굴이 었다.

'한번 와보기나 할 일이지.'

몸 이곳 저곳으로 숨어드는 암기들을 바라보며 당가려는 내심 중얼 거렸다. 야혼,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와룡전 정도면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사람이 그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찾아오지 않는 야혼이 야속했다.

"몸이 불편하면 먼저 들어가 쉬십시오."

'개새끼!'

이번에는 욕이다. 탐색하듯 자신을 쳐다보는 남궁성의 눈에 암기를 박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래라, 먼저 들어가서 쉬어라!"

"그럼!"

당성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당가려는 몸을 일으켰다. 남궁성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을 빨리 씻어 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방을 빠져나온 당가려는 곧바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화(花)야! 목욕물 준비됐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당가려는 시비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네, 아가씨!"

"목소리가 왜 그래?"

"아닙니다. 몸이 좀 안 좋아서…."

화들짝 놀란 시비는 재빨리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쁜 놈! 꼴통 같은 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풀며 욕설을 뱉어냈다. 그가 천의맹에 들어오면 서부터 불귀동 생활이 꿈속에서 부쩍 자주 나타나곤 했다.
그와 같이 수영을 했던 광경이, 냉소소의 눈을 피해 그의 동굴을 찾 았던 장면이 생생하게 다가오곤 했다.
물끄러미 동경을 보던 당가려는 야혼의 영상을 털어 내듯 암기들을 정리하더니 욕실로 향했다.

"뭐해? 옷 잡아줘야지."

뿌연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로 들어선 당가려는 시비를 향해 소리쳤 다.

"아-알았습니다."

일순 쉰 듯한 목소리와 함께 시비가 다가왔다.

"화야 너도 좋아하는 남자 있어?"

옷을 벗겨주는 화의 손길을 음미하며 낮게 물었다. 상의가 벗겨짐에 따라 당가려의 커다란 가슴이 출렁 나타났다.
일순 당가려의 옷을 벗겨내던 시비는 부르르 몸을 떨며 손을 멈췄다.
바로 눈앞에 나타난 당가려의 가슴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탓이었다.
더하여 가슴 위쪽에 자리해 있는 붉은 광채를 발하는 물체가 달린 목걸이. 냉소소에게 주었던 마안혈정으로 만든 혈신월이었다.

'아이고 야혼아, 빨리 좀 올걸.'

그랬다. 당가려의 시비로 변장하고 있는 이는 천면만환공으로 얼굴을 고친 야혼이었다. 점점 드러나는 당가려의 폭발적인 몸매에 숨쉬기가 거북한 듯 야혼은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아무래도 감기가 심한가 보다. 너도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해야겠다.
들어와라!"

야혼의 이마를 짚어보던 당가려는 욕조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과거에도 그랬지만 당가려의 뒷모습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다 웠다. 문득 아래쪽으로 급격하게 피가 몰림을 느낀 야혼은 당가려가 물 속으로 머리를 담그자 재빨리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전주면 밥값을 해야지(4)
 글자크기 과거에도 그랬지만 당가려의 뒷모습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다 웠다. 문득 아래쪽으로 급격하게 피가 몰림을 느낀 야혼은 당가려가 물 속으로 머리를 담그자 재빨리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꿀을 안 탔구나."

불쑥 고개를 내민 당가려는 책망하듯 야혼을 보며 말했다. 뒤이어 가 볍게 손을 휘젓자 한쪽에 놓였던 커다란 통이 빨리듯 그녀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저 년 피부가 좋은 이유가 꿀 때문이었구먼.'

상당 분량의 꿀을 입욕제로 사용하는 당가려를 보며 야혼은 입을 떡 벌렸다.

"참, 감기엔 꿀도 좋다고 하더라. 좀 먹어라."

야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당가려는 슬쩍 손을 흔들어 꿀을 던졌 다.

"감사합니다."

감사의 표정을 지으며 꿀을 받아든 야혼은 단지 채 입안으로 가져갔 다.

"응?"

일순 당가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꿀을 마시는 시비의 목에 불쑥 튀어나온 부분을 발견했던 탓이었다.
눈에 내공을 집중하여 상대의 몸을 살피던 그녀는 이내 환하게 미소 를 지었다. 수증기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그것들은 전부가 흉터였 다. 꿈에도 잊지 못했던 그 사람의 표식.

"나쁜 놈!"

일순 온몸의 피로가 확 풀리며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가 찾아온 것이다.

"화야 내 몸 좀 주물러라. 남궁성 그 놈 때문에 긴장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온몸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어!"

당가려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욕조 한 편에 마련된 단위로 몸을 뉘였다.

'허미, 저게 눈치 챘나?'

좌우로 한참을 움직이는 엉덩이의 율동을 보며 야혼은 침을 꿀꺽 삼 켰다.

"아닌 것 같은데?"

가슴을 드러낸 채 똑바로 드러눕는 당가려를 보며 야혼은 짓궂은 미 소를 지었다.

'이왕 속이는 것…. 가만 이 놈이 문제네? 우선은 수증기를 더 피운 다음에.'

터질 듯 팽창해 있는 아랫도리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짓던 야혼은 물 속에 손을 집어넣고 화구(火球)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목조에서 흘러나온 수증기가 욕실을 가득 채우며 시계가 불 투명해졌다.

"이 상태에서 허공섭물로 녀석을 한쪽으로 밀어붙이는 거야."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려 전면을 향하고 있는 그것을 허벅지 쪽으로 간신히 밀어붙인 야혼은 당가려가 누워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깨부터 좀 주물러 줄래?"

야혼의 기척을 느낀 당가려는 눈을 감은 채 꿈꾸듯 말했다. 하지만 느긋한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가슴은 폭발적으로 뛰었다.

'하악!'

어깨에 느껴지는 그의 손길에 내심 신음이 솟구쳐 올랐다. 얼굴이 붉 어지고 뜨거운 열기로 인하여 온몸에 불이 나는 듯했다.
애무가 아닌 주무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길이 스치는 곳에 서는 불길이 일었다.

'허미, 얘는 또 왜이래. 혹시 그동안 취향이 바뀐 것 아냐?'

당가려의 반응에 외려 놀란 사람은 야혼이었다. 여자를 한두 번 겪어 본 것도 아니고, 그녀의 반응이 무엇인지 왜 모르랴.
흥분했을 때 나타내는 증상이 분명했다.

'어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금슬금 양손을 우뚝 솟은 가슴으로 가져갔다.

'안 돼!'

가슴 쪽으로 다가오는 야혼의 손길에 당가려는 내심 터지려는 신음 을 삼켰다. 어떤 기대감으로 인하여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이 밀려들었던 탓이었다. 슬쩍 슬쩍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불꽃이었다.

물컹!

"하악!"
"허억!"

두 사람의 입에서 격렬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야혼의 손길이 당가려 의 가슴을 움켜쥔 순간 그녀의 손은 야혼의 상징을 틀어쥔 것이었다.

번쩍!
지금껏 감고 있던 당가려의 눈이 활짝 떠졌다.

"하악! 나쁜 놈! 얼마나 기다렸는데."

움켜쥔 상징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당가려는 낮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기쁨의 눈물이 가득했다.

"눈치챘나 보네?"

일순 야혼의 얼굴 근육이 묘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본래 모습이 나타 났다.

"빨리 오고 싶어도 일이 많아서 그랬지 뭐."

"몰라, 나쁜 놈아!"

몸을 일으킨 당가려는 야혼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소리를 질렀다.

"야, 그건 놔 줘야지."

"못놔! 절대로."

전보다 더욱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야혼의 입술을 향해 돌진했다. 그 의 실체를 느끼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온몸에 들끓는 기운을 잠재우는 게 먼저였다.

"우웁!"

화들짝 눈을 치뜬 야혼은 이내 그녀의 입맞춤에 열렬히 응했다. 혀와 혀가 오가고 두 사람의 손은 서로의 몸을 쓰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야혼의 손에 의해 커다란 그녀의 가슴은 잔뜩 이지러지고, 그녀의 손 에 의해 야혼의 상징은 몸살을 앓았다.
가슴에서 머물던 야혼의 손길이 아래를 향하고 당가려의 아랫배는 어떤 기대감으로 묘한 울림을 보였다.

"하-악!"

아래쪽으로 불쑥 파고든 야혼의 손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당가 려는 비명처럼 신음을 뱉어냈다. 그와 같이 했던 불귀동 생활에서 그녀 는 무공만 얻은 게 아니었다.
혈린만독편의 완성과 함께 성이 주는 쾌락마저도 완전하게 깨우쳐 버린 것이었다.
뜨거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더욱 거칠게 움직였다. 당 가려의 손길은 더욱 빨라졌고, 그에 발맞춰 야혼의 손길 또한 속도를 더했다.

"야혼! 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지 당가려는 야혼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애 원했다.

"나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당가려를 번쩍 들어올린 야혼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단 위로 올라갔 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단위에서 시작된 관계는 어느덧 욕조 안으로까지 이어졌고, 당가려는 광란의 몸짓과 함께 신음을 질러댔다.
그녀의 격렬한 움직임과 교성에 놀란 야혼은 양심신공까지 끌어올려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냉소소 또한 이미 경지에 올라 있었지만 당가려와 비교해서는 한참 아래라 할 수 있었다. 요부라도 되는 냥 당가려는 온갖 기교를 부리며 흥분을 표출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무공보다 더 세졌잖아."

 전주면 밥값을 해야지(5)
 "그때가 벌써 몇 년 전인데…."

뜨거운 입김을 불어내며 당가려는 환하게 웃었다. 그와 같이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실감나지 않았다.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 움직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뇌리 를 관통하는 전율적인 쾌감은 그의 존재를 입증해 준다.
아래를 가득 채운 느낌은 그가 왔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많이 컸다 이거지? 좋아 그럼 나도 봐주는 것 없다!"

짓궂은 미소를 지은 야혼은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무자비하게 움직 이기 시작했다.

"하악!"
"허억!"

두 사람의 입에서 또 다시 거친 비음이 흐르고 욕실 안에선 요란한 물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서로를 탐하던 두 사람이 털썩 널브러진 시각은 그로부터 두 시진 뒤였다.
무려 두 시진 동안 쉬지 않고 서로를 탐했던 것이었다.

"하-아! 지금부터 전부 다 이야기해. 그동안 뭐하고 지냈는지, 소소 언니랑 나 말고 계집은 몇 년이나 더 꼬드겼는지."

관계가 끝나고 침실로 자리를 옮긴 당가려는 야혼의 가슴을 쓰다듬 으며 물었다.

"너희 둘 말고는 없다."

"정말?"

"정말이라니까 그러네. 내가 여자에 걸신들린 줄 아냐?"

"걸신들린 것 맞잖아. 여자만 보이면 침을 질질…."

"얘가, 그거야 너희들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거지! 그나저나 가려 너 대단하더라. 내가 죽는 줄 알았다."

조금 전 상황이 생각났는지 야혼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야혼 너 때문이지. 거기서 본 춘서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내가 다른 여자에 비해 쎈…거야?"

야혼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당가려는 어색한 듯 물었다. 지금도 그때 보았던 춘서의 내용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특히 남자를 기쁘게 하는 방법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저도 모르게 따 라하곤 했던 것이다. 그랬던 세월이 2년 넘게 흘렀다.
어쩌면 강해진 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응! 그것도 아주!"

"그래서 싫어?"

"얘가? 내가 고자냐 마누라 강한 걸 싫어하게!"

"마누라?"

"그럼 마누라지, 나에게 시집 안 올 거냐?"

"자신 있어?"

"자신? 그러니까 내가 널 데려올 자신이 있느냐 이걸 묻는 거야?"

"응!"

당가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야혼이 마도련을 휘어잡고 있다는 사실은 들어 알지만, 천의맹에서 그의 신분은 여전히 하오밀문 문주일 따름이다. 식구들에게 그를 소개시키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너는 너와 내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당가려의 코를 슬쩍 비틀며 물었다.

"밤일이야 찰떡이니까 물을 필요도 없고, 그러니까 야혼 너는 신분을 말하는 거지? 신분에 있어선 내가…."

"아냐 임마, 네가 나 따라 오려면 사천당문 전체를 팔아도 안 돼. 나 그동안 엄청 출세한 것 모르지?"

"무슨 말이야?"

화들짝 놀라며 당가려는 야혼 곁으로 다가 앉았다. 처음 듣는 말이었 던 탓이었다.
그런 그녀의 귓전에 놀라운 말이 들려왔다.

"이번 황실에 일어난 일은 알고 있지? 잠룡어사대인인가 하는 자식 이 나타나서 동창제독과 금의위도독을 싸그리 몰살시켜버렸다는 소문 말이야."

"그거야 물론 들었…. 설마 그 잠룡어사대인이 야혼?"

"천하전장도 내 거고 동창제독 그년도 내…."

"뭐어?"

그년이란 말에 당가려의 눈이 상큼 치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여자는 둘밖에 없다고 했던 그다. 그런데 제독동창이 접수했다니.
문득 냉소소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야혼이 마도련을 방문했을 대 동창 첩형 고명지와 같이 있었다고 하였다.

"고명지가 동창제독?"

"그렇게 됐어. 하오대문 분타를 황실에다 세우다 보니까."

"세상에…."

그가 다른 여자를 첩으로 맞았다는 말을 듣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놀라움이 앞섰다. 제독동창이 여자라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그 녀를 거느린 사람이 야혼이고, 동창의 자금줄인 천하전장의 주인마저 그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는 잠룡어 사대인의 신분이 야혼이라니.
일순 사고기능이 정지해버린 듯했다.

"그런데 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 다른 사람들의 깔보는 시선을 견디며 사느 냔 말이다. 잠룡어사대인이고 천하전장의 주인이란 사실을 밝히면 야혼 의 신분은 그야말로 천의맹 최고가 된다.

"그럼 천의맹을 못 먹잖아. 그래서 그런 것 뿐이야."

"정말 그렇게 할거야?"

"왜, 구파 일방 장문인 녀석들에게 회주 사모님이란 말을 듣는 게 싫 어?"

"회주 사모님?"

"응, 회주 사모님!"

"한번, 해봐! 잘하면 고명지를 첩으로 들인걸 용서해 줄 테니까."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당가려는 야혼을 보았다. 문득 그의 말처럼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이불을 걷어낸 야혼은 몸을 날려 침상 아래쪽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 당가려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소림 방장 보장이 사모님께 문후드리옵니다."

"소림? 요즘 소림은 어떻습니까?"

활짝 미소를 지은 당가려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야혼을 향해 물었다.
문득 그의 말대로 강호를 지배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이었다.

"다른 건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운영자금이 좀 부족합니다. 올해는 조금만 더 올려 주실 수 없는지…."

"알았노라, 내 팍팍 쏠 테니 그만 올라오너라."

"알겠습니다, 사모님. 소승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미타불!"

나직한 불호와 함께 야혼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맛!"

일순 보장대사 얼굴로 바뀐 야혼의 모습에 당가려는 놀라 비명을 질 렀다.

"나에게 시집오는 년들이 좋은 점이 뭔지 아냐? 결코 질리지 않는다 는 거야.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얼굴을 바꿀 수 있거든. 여러 놈하고 살아 볼 수 있다는 거지. 어때 내 생각 괜찮지."

"싫어 임마, 그래도 나는 야혼 얼굴이 가장 좋아. 빨리 원래대로 해!"

징그러운 듯 몸을 피하며 당가려는 소리를 질렀다.
더 이상 야혼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그는 무림제일인일 뿐 아니라 황실 제일인 이기도 하였다.

"이리 와! 아직 밤이 끝난 게 아니란 말이야."

덥석 야혼의 아래쪽을 움켜쥐며 침대로 이끌었다.
전주면 밥값을 해야지(6)
두 번째 열풍은 침실에서 일었다.
이번에도 역시 야혼은 양심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음파를 차단해 야 했다.
당가려의 방에서 울려 퍼지던 비음은 밖이 뿌옇게 밝아질 때가 돼서 야 간신히 끝이 났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한다는 말은 당가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새벽 일찍 당가려의 침소를 찾았던 화(花)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주 인 아씨를 보았다.
이제 자고 난 얼굴일 터인데도 광채가 솟는 듯했다.

"좋은 아침이다 화(花)야."

더구나 투명하니 밝은 목소리라니.

"아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화는 활짝 웃으며 물었다.

"기분 좋은 일? 글쎄…. 아욱!"

빙그레 미소를 짓던 당가려는 몸을 일으키려다 낮게 비명을 질렀다.
간밤에 무리한 결과가 이제야 나타난 것이었다.

"아가씨!"

화들짝 놀란 화가 재빨리 당가려 곁으로 다가갔다. "아냐 괜찮아. 가서 아침 가져와라, 아주 많이."

"네에?"

아침이란 말에 방금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지금 껏 몇 년을 곁에서 모셨지만 아침을 준비했던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놀라긴, 배가 고파서 그래. 나 씻을 테니까 준비해 놔!"

"아-알았습니다."

욕실로 들어가는 당가려는 보며 화는 어떨 결에 대답했다.

"루루! 라라라!"

"별일이네…."

안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콧노래에 화(花)는 고개를 갸웃하며 밖으 로 나갔다.

"집을 만들어 두었다고 했어. 얼마 안 있어 그곳으로 데려간다고."

당가려의 입에서 절로 노랫가락이 흘러나온 이유였다. 야혼은 떠나면 서 방법을 찾아볼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맞다, 꿀!"

갑자기 생각난 듯 당가려는 꿀단지를 끌어당겨 욕조 안에 풀었다.

"뭐하고 있나 모르겠네."

간밤의 뜨거웠던 관계를 떠올랐는지 호흡이 거칠어진 당가려는 가슴 을 와락 움켜쥐었다.
그 시간.
하오대전에 도착한 야혼은 고대용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있 었다.

"그러니까 오늘 각 전에서 죄수를 보내온단 말이지? 읊어봐!"

"우선 천무전에서는 광검사수(狂劒四秀), 선무전에서는 청광이노(靑 狂二老), 령무전에서는 나찰혈불(羅刹血佛)과 곤륜왕(崑崙王) 대력자(大 力子), 복마일권(伏魔一拳) 운령자(雲靈子)를 보내겠다고 연락이 왔습니 다."

"어째 쓰레기가 아닌 것 같은데?"

고대용의 말을 듣고 있던 야혼은 고개를 갸웃하며 일행을 보았다. 쓰 레기라 하기엔 별호들이 너무 대단했던 탓이었다.

"그게…."

고대용은 더듬거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또한 명령서에 적힌 자들 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말해봐 임마! 어차피 받아들일 녀석들인데 뭘 망설여."

"알겠습니다. 그러니 광검사수는 미치지만 않았다면 화산파 제일 고 수가 될…."

고대용의 입에서 참회당 죄수로 들어올 자들의 신상이 줄줄이 흘러 나왔다. 무공이나 과거 경력으로 보건대 만만히 볼 자들은 한 명도 없 었다.

"그러니까 고대용 네 말은 이곳에 오는 잡것들이 전부 꼴통들이라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죽여선 안 되고?"

"네!"

"언제 보낸다고 하더냐?"

"지금 출발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그럼 마중을 나가야지. 손님이 온다는데."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후, 부하들을 대동한 야혼은 하오대전 출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열어라!"

고대용의 외침에 따라 4장 높이의 거대한 철문이 양편으로 천천히 열렸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면 큰일난다(1)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면 큰일난다.

 "저 새끼들 완전히 골통인갑네!"

멀리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며 놀란 얼굴로 야홍은 이죽거렸 다. 특히 선두에 있는 6명의 모습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처참했다.
덥수룩한 수염과 봉두난발, 그리고 속살이 훤히 드러난 옷.
비단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족쇄와 수갑을 사지에 채우고 다시 그것 들을 철삭으로 묵었다. 쇠사슬을 친친 감고 있는 그들에게 허락된 동작 은 걸음걸이가 유일했다.

"선두에 있는 네 명이 화산파 인물인 광검사수(狂劒四秀)고, 그들 뒤 에 있는 두 명은 무당파 인물인 청광이노(靑狂二老)입니다."

철삭을 감고 있는 자들을 가리키며 고대용이 말했다. 그 또한 야혼처 럼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광인들이고 죄인이라 하였지만 저 정도까지 심하게 다룰 줄은 생각 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방갓을 눌러 쓴 년은 나찰혈불이고 그 뒤에 곰같이 생긴 놈들 이 대력자와 운령잔가?"

"그렇습니다. 전주님! 나찰혈불은 오락가락 하는 상태고, 대력자와 운 령자는 정신이 멀쩡합니다. 다만 조직생활에 적응을 못해서…."

"그러니까 한 마디로 성질이 더러운 년놈들이란 말이지? 버리자니 아깝고 문파에 두자니 골칫거리인 쓰레기들."

"주둥아리 조심해라, 개자식!"

고대용에게 묻는 순간 한기(寒氣)가 펄펄 날리는 목소리가 야혼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이편을 향해 살기를 쏘아보내고 있는 이는 아미파 비구니인 나찰혈 불 자운이었다.

"어라? 저 년 내공을 금제당하지 않은 모양이네?"

야혼은 놀란 얼굴로 나찰혈불을 보았다. 그녀는 20여 장 떨어진 곳에 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면,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내공이 살아 있다는 말이 된다.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점혈을 한 후, 한 시진만 지나면 스스로 해 혈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 별난 재주를 가진 년이네…. 저 년의 죄명은 뭐냐?"

"살인(殺人)이다!"

재차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경이 좆나 좋은 년인가 보네. 중년이 사람을 쳐죽이고도 아직 살 아 있는 걸 보면. 그래 얼마나 쳐죽였더냐?"

흥미로운 듯, 야혼은 나찰혈불의 사저인 무정신니를 빤히 보며 물었 다. 야혼의 시선을 받은 무정신니는 일순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대뜸 들려오는 반말 때문이다. 자신은 아미파의 최고 어른, 천의맹주 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 서른도 넘지 않은 새카만 녀석이 아닌가.

"킬킬킬! 10명을 죽였다. 오늘 부로 11명이 될 터이고."

무정신니의 심정을 대변하듯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나찰혈불 이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갔다. 아미 일절의 하나로 꼽히는 신행미종보 (新行迷踵步)였다. 번쩍 하며 야혼 앞으로 다가온 나찰혈불은 양손을 쾌속하게 뻗어냈다.
일순 그녀 양손은 백색으로 물들고, 갈고리처럼 잔뜩 구부려진 손가 락은 야혼의 얼굴을 노리며 나아갔다.

"복호살수(伏虎煞手)!"

나찰혈불의 양손을 본 고대용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복호살수는 그 잔혹한 손속 때문에 마공(魔功)으로 분류된 무공이었다.
벌써 200여 년 전에 금지무공이 되어 아미파에서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무공을 나찰혈불의 손에서 재현된 것이다.

'자운(慈雲)이 익힌 무공은 복호살수뿐만이 아니다. 성천불마심공(星 天佛魔心功)을 바탕으로 이룬 복호살수는 극상의 백옥수(白玉手)로 이 어진다. 어떻게 대처하는가 보겠다, 놈'

슬쩍 몸을 피하는 야혼을 보며 무정신니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막내 사매인 자운의 자질은 아미파에서 최고였다. 그녀로 인하여 아미 파는 최고의 성세를 누리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늘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7백 년 전, 불마성녀(佛魔聖 女)로 이름이 높았던 비화군의 무공이 그녀에게 이어진 것이었다.
불마성녀, 그녀는 두 얼굴의 여인이었다. 왼쪽은 하늘이 놀랄 정도로 천하절색이었는데 반해 오른쪽은 파면이었다.

파면이 웃을 땐 혈겁이 일어나고, 절색의 얼굴이 웃을 땐 봄이 찾아 온다고 하였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성천불마심공의 마성 때문에 그녀는 두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성천불마심공이 불경을 모아둔 청음각에 있었을 줄은 누구도 생 각지 못했다. 그 뿐만 아니었다. 금서로 지정했던 복호살수 비급마저 성천불마심공과 같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막내 사매인 자운이었다.
성천불마심공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자운은 두 얼굴이 되었고, 얼굴이 변해감과 동시에 성격 또한 편협하게 바뀌었다.
그러다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면사로 얼굴을 숨기고 다녔던 그녀를 동료들은 용납하지 않았고, 어 느 날 그녀의 면사를 걷어버리고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일어난 우발적인 살인, 성천불마심공의 마성에 휩싸인 그녀는 동료들을 살해하고 말았다.

예정되었던 문주 자리를 포기하고 자운을 구했다. 자운을 키웠던 사 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운을 넘긴 여인은 울면서 부탁했었다. 쫓기는 와중이라 딸을 키울 수 없어 맡긴다고 하였다. 명교 여인이었던 그녀에게 2냥을 주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운의 자질이 그만큼 탐 아 났었다.

그동안 성천불마심공의 마성을 치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운의 상태는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처럼 킬킬거리며 웃으면 살인이 일어나고, 따스한 미소를 지으면 그녀는 불타(佛陀)가 된다.

"저 놈이?"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무정신니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하 오밀문 문주의 손이 나아가는 위치 때문이었다.
격렬하게 양손을 뿌리는 자운의 젖가슴을 향해 녀석의 손이 다가가 고 있는 것이었다.

"멈…."

하지만 무정신니는 말을 맺지 못했다. 아니 두고보자는 생각을 했다.
백색으로 빛나는 자운의 양손이 놈의 가슴을 강타하는 광경도 같이 보 였던 탓이었다.

파앙!

야혼이 젖가슴을 틀어쥠과 동시에 새하얀 백옥수가 그의 가슴을 때 렸다.

"조-타! 쌰앙!"

일순 한 걸음 물러나며 야혼은 고함을 질렀다. 가슴팍의 옷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흉터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젖가슴을 틀어쥔 오른 손 을 놓지 않았다.

"캬악!"

본능이었을까! 이성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도 자운은 날카로운 고함 을 지르며 야혼의 얼굴을 향해 무자비하게 양손을 휘둘렀다.

"이 년아! 나도 투견공을 익힌 몸이야. 단단하기로 따지면 저 철문보 다 더한단 말이다."

얼굴로 향하는 자운의 백옥수를 그대로 둔 채 철문을 향해 거칠게 그녀를 밀고 나갔다.

퍼억! 퍽!

과앙!

동시에 들려온 소리. 젖가슴을 잡힌 자운이 철문에 부딪치는 소리와, 그녀의 백옥수가 야혼의 머리에 작렬하면서 터진 타격음이 한꺼번에 울렸다.
하지만 손해는 자운이 더 본 듯, 방갓이 떨어져 나가자 고통스런 표 정을 짓는 파면이 드러났다.

"잡것이 생긴 것도 좆같은 게 사람을 때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면 큰일난다(2)
 자운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야혼은 이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얼굴 때문인지 비구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중이면 중답게 놀아야 할 것 아냐, 이 년아!"

거친 욕설을 뱉어낸 야혼은 거머쥔 그녀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잡아 챘다. 일순 두 사람주변으로 검은 머리칼이 휘날렸다.

퍼억!

머리칼을 뽑기 위해 뒤로 빼냈던 왼손을 다시 자운의 안면으로 박아 넣자, 머리가 확 젖혀지며 자운은 뒤쪽 철문에 거칠게 머리를 부딪쳤 다.

"아악!"

상당한 힘이 실린 공격이었는지 자운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야혼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안면에 박아 넣었던 왼손을 활짝 펴더니 다시 그녀의 머리칼을 잡아 당겼다. 앞으로 쏠리는 그녀의 단전 어림을 향해 오른 무릎을 차 올렸 다.

"이것까지 들어가야 한 방이 되는 거야."

"커억!"

뇌리를 관통하는 엄청난 충격에 자운은 입을 쩍 벌렸다. 야혼의 무릎 이 그녀의 회음혈에 박혀버린 것이었다.

"개자식!"

눈동자가 획 돌아간 자운은 진득한 욕설을 뱉어내며 야혼의 안면을 향해 머리를 날렸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 무릎은 야혼의 낭심을 향했 다. 그녀 또한 야혼과 같은 방법으로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번엔 야혼의 고개가 뒤로 홱 젖혀졌다.
그와 동시에 아래쪽에서도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약해, 이 년아! 그 정도로는 남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단 말이야!"

젖혀졌던 고개를 쳐들며 다시 왼손 정권을 그녀의 안면으로 내리 꽂 았다. 조금전과 상황은 같았다.
뻗었던 왼손을 회수할 때는 자운의 머리칼을 뽑아오고, 다시 그녀의 회음혈을 향해 오른 무릎을 박아 넣는다. 성천불마심공을 대성했다하지 만 자운은 아직 금강불괴지신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었다.
당연히 충격을 그녀가 더 받을 수밖에 없었고, 잠시 후 승패의 향방 이 갈렸다.

어느 순간부터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한 자운은 흐느적거렸다. 야혼 의 안면을 향해 머리를 디밀고 있으나 처음보다는 힘이 없었다.
무릎공격 또한 머리와 마찬가지였다. 야혼의 낭심까지 다가오지 못한 고 제풀에 꺾여 허공을 차기가 일 수였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하게 살아 있는 건 주변이 잔뜩 부풀어올라 실눈 이 되어버린 눈과 야혼의 공격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입이었다.

"개자식!"

"너는 개자식이란 욕 한가지밖에 모르냐? 남자에게 하는 욕은 말이 다. 아주 많아."

가슴을 틀어쥐고 있던 오른손을 풀어 그녀의 머리채를 거머쥐며 야 혼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철문을 향하도록 자운의 몸을 돌렸다.

"호로새끼도 있고!"

과앙!

"썅놈의 새끼도 있고!"

과-앙!

"씹할놈도 있고!"

과-앙!

"멈추지 못할까, 이 잔인 무도한 놈!"

야혼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리며 무정신니를 고함을 질렀다. 자운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틀어쥐고, 놈은 철문을 향 해 무자비하게 찍어대고 있다.
자운의 이마에서 흐른 피가 철문을 적시고 있으나 녀석은 보이지 않 는지 더욱 거칠게 행동한다.
하지만 무정신니는 야혼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이년의 가랑이를 찢어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바로 이 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말이다, 명예직이긴 하지만 엄연한 전주야! 전주가 뭔지 모르 면 천무전에 가서 알아보고 다시 오란 말이야!"

자운의 머리채를 잡고 한참을 뒤로 물러선 야혼은 다시 철문을 향해 돌진하며 말했다.

과앙!

"아-악! 개자식!"

"그래! 나도 아직 멀었어 이 년아!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고!"

퍼억!

잡았던 머리채를 사정없이 뽑아내며 체중이 실린 오른 손 정권을 자 운의 안면에 박아 넣었다.
자운의 안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철문에 부딪쳐 깨진 머리와 야혼 의 주먹에 강타 당한 코에서 흘러내린 피가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였 다.

"무량수불! 그만 하시게 전주!"

나직한 도호와 함께 한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청광이노를 데려온 양의검선 현운이었다.
현운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설마하니 하오밀문 문주가 나찰 혈불을 저토록 쉽게 처리할 줄은 몰랐다.
나찰혈불의 무공에 대해선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성천불 마심공과 복호살수를 익힌 그녀는 자신이라 해도 쉽게 제압하지 못한 다. 하지만 투견공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두고 보 았다.

투견공이 패하면, 전주 대우라지만 하오밀문에 대한 인식은 과거와 같아질 터이고, 설사 투견공이 이긴다 하더라도 나찰혈불이 죄수의 신 분이기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결코 비무가 아니었다. 시전에서 흔히 벌어지는 막싸움도 이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무정신니의 얼굴을 보다못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의검선의 외침도 야혼의 행동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이 년아! 사람은 말이다, 위아래를 알아야 하는 거야! 그건 미친년 이라 해도 마찬가지야!"

철문은 거대한 범종이었고 나찰혈불은 종을 치는 당목(撞木)이었다.
나찰혈불을 수평으로 들어올린 야혼은 그녀를 머리를 철문에 꽂아대기 시작하였다.
이미 기절했는지 나찰혈불은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그녀와 철문이 부딪쳐 나는 소리만이 끊임없이 울렸다.

털썩!

"아미타불! 문주는 마음씨가 너무 여려서 탈이네. 이왕 작살 낸 건데, 이까지 왕창 뽑아버려야지. 앞으로 죽만 처먹게 될 터인데 뭐 하러 남 겨 두었는가."

너부러진 자운 곁으로 다가간 추기영은 그녀의 볼을 툭툭 치며 씨익 웃었다. 이어 철탁을 번쩍 들어올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전주님!"

급기야 무정신니는 야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검은 철탁이 겨냥하 고 있는 곳은 자운의 입이었던 탓이었다.

"좌호법, 그만하게."

"아미타불! 얼굴 위아래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이왕 들어올렸는데 딱 한방만, 안되겠습니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으면 큰일난다(3)
"이 무식한 놈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 년은 여자야, 여자. 어 디 때릴 곳이 없어서 얼굴을 패냐.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자."

"…니미럴타불! 소승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일단 한쪽으로 피해 있겠 습니다. 아직 남은 일이 많은 것 같으니."

방금 네가 한 짓은 어떻게 설명할거냔 얼굴로 물끄러미 야혼을 쳐다 보던 추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찰혈불의 오른쪽 발목을 잡았다.

"나머지 잡것들은 우호법과 문주가 끌고 가야 하겠구먼. 참 무정신니 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정신을 차리게 될 겁니다. 빚 받는 것하고 미친 년놈들 정신차리게 하는 건 우리 하오대문의 주특기랍니 다. 끙차! 뭘 처먹었기에 이년은 이리 무거운 건지…."

나찰혈불을 들어보려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이내 질질 끌고 한쪽으로 비켜서며 추기영은 투덜거렸다.

"자! 하나는 처리됐고. 저것들도 넘겨주실 겁니까?"

양의검선 뒤쪽에 서 있는 광검사수와 청광이노를 가리키며 야혼은 물었다.

"그렇네, 하오전주가 좀 맡아줬으면 좋겠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절벽 위에서 한 인물이 날아 내렸다.

"오셨습니까!"

앞으로 다가온 인물을 향해 양의검선과 무정신니는 예를 차렸다. 태 무검존(太武劒尊), 정파 제일인 또는 삼존(三尊)의 일인으로 불리는 그 가 하오대전에 나타난 것이었다.
야혼 앞으로 다가온 태무검존은 형형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으음! 하오문에서 용(龍)이 나왔군."

내공을 흩트려 숨겼다고 하지만 태무검존은 정파 제일고수, 완전하게 는 아닐지라도 야혼의 강함을 금세 알아보았다.

"반갑네, 난 태무검존일세."

"반갑습니다. 천의맹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보는군요."

야혼의 눈에 언뜻 이채가 서렸다. 하오문이라 하였지만 그의 얼굴엔 다른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멸의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다 젊은 혈기 때문이 아니겠나. 나도 젊었다면 그들과 같았을 거 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좀 다르더군요. 그건 그렇다 치고. 저들을 어떻게 해주길 원합니까?"

한쪽에 가만히 서있는 광검사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비록 자주 발작 을 일으키는 광인들이지만 그들은 화산파에서 최 고수들이 분명했다.
지금껏 내공을 없애지 않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자네 짐작대로 저 아이들은 화산파 최고 고수네. 정신만 차린다면 말이네. 하오밀문 좌호법이 무음항마혈탁의 소리를 냈다는 말을 들었 네."

"그러니까 무음항마혈탁으로 저들의 정신을 되돌려 달라는 말인데…,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추기영의 얼굴을 떠올린 야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음항마혈탁이 란 천고의 보물을 무기로 사용하는 추기영이지만, 두드려서 상대를 제 압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상대의 턱을 까부시는 타격병기로 더 많이 쓰고 있는 그가 아닌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어보는 걸세."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태무검존은 말했다.

"그러다 광검사수가 우리 하오대문의 부하가 돼버리면 화산파로선 죽쒀서 개준 꼴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하오전주가 알아서 하게."

어이없는 듯 태무검존은 웃고 말았다. 광검사수, 그들이 미치기 전까 지는 화산파 최 고수였고, 골수까지 화산인이었다.
그런 그들을 하오밀문의 부하로 거느리다니.
하지만 야혼의 얼굴은 제법 심각했다. 실없이 웃는 태무검존을 가만 히 쳐다보더니 확인하듯 다시 묻는다.

"나중에 딴 소리 하지 않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한가지는 해결되 었고, 저기 청광이노는 왜 죄인이 된 겁니까?"

"나도 자세한 건 모르네. 타파의 일이라서 말이네."

양의검선을 슬쩍 쳐다보며 태무검존은 입을 닫았다.

"그렇겠군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태무검존을 향해 고개를 숙인 야혼은 이어 죄수들을 향해 고함을 질 렀다.

"잘 들어라! 문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이곳 하오대 전에서는 죄수일 뿐이다. 내 말을 따르는 놈은 편안한 삶이 보장될 것 이다. 하지만…."

"씨팔놈!"

짓씹듯, 나직한 소리가 야혼의 일장 연설을 끊었다. 지금껏 태무검존 과 야혼의 말을 듣고 있던 곤륜왕 대력자였다.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완전 한 시전 통 건달이었다.

"니미씨팔! 대 문파 출신이란 새끼들이 어찌 하나같이 좆같아!"

모처럼 만에 그럴싸한 말이 튀어나와 내심 만족해하였던 야혼은 거 칠게 욕설을 뱉어냈다.

"좆같아도 거지 발싸게 같은 하오문보다는 나아 자식아."

"이런 씨팔놈이! 뒈지려고 환장을 했구먼!"

일순 야혼의 신형이 대력자를 향해 내달렸다.

"그깟 하오문 잡술로 감히 곤륜의 무공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여긴 거냐?"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대력자의 신형이 뿌연 운무를 뿜어내는 듯하 더니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구름 속에서 용이 노니는 형상을 무공 으로 표현했다는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이었다.

"그게 구파일방의 한 곳인 곤륜파 최고 경공이라 불리는 운룡대구식 이란 말이지? 곤륜파의 대표 무공."

나아가던 몸을 멈춘 야혼은 구파일방과 곤륜파란 말을 강조하며 운 무에 휩싸인 대력자를 보았다.

"그렇다, 애송이. 자신 있으면 잡아봐라."

사방으로 무수한 백무를 휘날리며 대력자는 소리쳤다. 운룡대구식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신법이 아니었다.
운룡대구식은 신법 자체가 공격무공이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운룡대 구식에 몰두하여 알아낸 사실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운룡대구식을 바탕으로 펼치는 무공이 곤륜의 어떤 무공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강력한 신법을 바탕으 로 펼치는 운룡대구식을 따라올 무공이 없다고 봐야했다.
그런 사실을 알아내고 사문 어른들께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운룡대구식에 사파무공을 접목시켰다며 죄인 취급 을 당했다.

다시는 펼치지 않겠다고 맹세함으로 해서 내공이 파훼되는 걸 막았 지만 운룡대구식은 신법이 아니라 공격무공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 다. 그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이 바로 하오밀문의 문주인 것이다.

"우호법! 단단한 놈 좀 줘봐!"

이내 자리로 돌아온 야혼은 여의만병주를 만지작거리는 태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연장 문주 내가 하면 안 될까?"

공연히 좀이 쑤신 듯 운무를 쳐다보며 태웅은 말했다.

"아냐, 저 새끼까지는 내 몫이야."

채가듯 여의만병주를 빼앗은 야혼은 전방 운무를 주시하더니 오른 발을 힘차게 내딛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주변 대기가 쫙 갈라 지며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었다.

"저건?"

흥미로운 얼굴로 야혼을 보던 태무검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단순 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보법처럼 보이는 단순한 움직임 속에 주변 대기 를 속박하는 힘이 있었다.
얼마 전 강호 무림에 떠돌았던 무공. 하오밀문 문주가 어떻게 얻었는 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가 펼치는 보법은 무적군림마보(無敵君臨魔步) 가 분명했다.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공.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으면 큰일 난다(4)
 "아미파에 이어 곤륜이라……."

태무검존은 나직하니 중얼거렸다. 곤륜파에서 무슨 생각으로 대력자 를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건 있었다.
곤륜을 대표하는 무공인 운룡대구식은 야혼이 펼치는 무적군림마보 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
태무검존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뿌연 운무 속에 있는 대력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운룡대구식의 각 초식을 펼치며 몸을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오밀문 문주를 뿌리지지 못하고 있다.
비단 그뿐이라면 지금처럼 놀라지 않을 것이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움직임을 봉쇄하며 몸을 조여왔다. 마치 내공 이 고갈되었을 때처럼 몸이 둔해지고 있음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개자식!"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어낸 대력자는 더욱 강하게 내공을 끌어올렸 다. 사문에서 당했던 굴욕이 떠올랐던 탓이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공격무공으로서의 운룡대구식. 그 무공 하 나에 인생을 걸었는데 하찮은 하오밀문 문주마저 제압하지 못하고 있 다. 그 또한 보법만 펼치고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현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신룡신무! 용유자미! 신룡파미!"

연거푸 고함을 내지르며 양팔을 휘저었다. 대력자의 몸에서 더욱 농 밀한 운무가 쏟아져 나오고, 그의 신형은 잠시 빨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그건 그의 생각일 뿐, 대력자를 뒤쫓는 야혼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개처럼 짖어봐야 길은 정해 졌어 개자식아!"

일순 운무 속으로 불쑥 몸을 들이밀며 단단한 놈을 횡으로 그었다.

"헉!"

대력자의 짤막한 비명소리가 운무를 뚫고 나왔다. 허리춤으로 날카로 운 기운이 다가들었던 탓이었다.
일순 보법을 펼치던 발이 엉겼고, 운룡대구식이 흩트려졌다. 동시에 희미해진 운무 사이로 언뜻 대력자의 신형이 드러났다.

"죽었어, 새꺄!."

깊숙한 족적을 남긴 야혼은 드러난 대력자의 신형을 향해 개 패듯 여의만병주를 휘둘렀다.

퍼억!

"허억!"

엉겁결에 손을 들어 여의만병주를 막은 대력자는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분명 놈과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한데 그의 무기를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악!"

이제야 고통을 느낀 듯 대력자는 커다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게 시작이란 걸 그는 알지 못했다.
야혼은 나찰혈불을 상대할 때처럼 여의만병주에 내공을 싣지 않았다.
다만 육체적인 힘만을 실어 대력자를 패기 시작하였다.

퍽! 퍼억! 퍽퍽!

대력자의 전신에서 무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몸통을 때리던 여의만 병주가 어느새 다리 쪽에 가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가죽 북 터지는 소 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커억! 아-악!"

"개자식아, 나는 하오대전의 전주란 말이다. 곤륜파 장문인은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주더냐? 남을 욕하려면 먼저 제 주제를 알아야 하는 거다. 이 씨팔놈아!"

빠악!

"크아악!"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대력자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와 동시에 대력자의 신형이 기우뚱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지면에 몸을 누이지 못했다.

"쓰러지는 것도 내 허락을 받아야 해. 앞으로 하오대전에서는 그래야 한단 말이다!"

오른쪽으로 넘어가는 대력자의 신형을 여의만병주를 이용해 쳐 올리 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타격.

빠악!

"아-악!"

이번엔 대력자의 왼쪽 다리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다리가 부러져 풀썩 주저앉은 대력자의 몸 위로 다시 여의만병주 가 비처럼 쏟아졌다.

"개-자-식!"

결국 게거품을 물며 야혼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대력자는 나찰혈불 과 마찬가지로 기절하고 말았다.

"후-!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지랄을 떨어!"

태웅에게 여의만병주는 건넨 야혼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이들 을 보며 낮게 소리쳤다.

"다시 한번 경고한다. 할말이 있으면 여기서 해라. 철문 안으로 들어 가서 지랄을 떠는 놈은 다리와 대가리를 까부시는 건 물론이고, 염통을 꺼내 면도를 해버릴 테니까…."

"험! 연장문주 전주 신분에 어울리는 말투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

"맞아, 전주에 어울리는 말을 쓰기로 했는데…. 이 씨팔새끼 때문이 야!"

퍽!

태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야혼인 기절하여 너부러진 대력자를 걷어차며 인상을 썼다. 제 입에서 나온 상스러운 말에 대한 책임이 전 부 대력자에게 있는 것처럼.

"더 이상 불만 없으면 하오대전으로 들어간다! 출발해라!"

"이 새끼는 내가 끌고 가겠네. 이놈도 저 년처럼 머리에 기름칠을 좀 해야할 것 같네. 그만 들어가세 좌호법!"

대력자의 한 쪽다리를 치켜들고 질질 끌고 가며 태웅이 말했다.

"허!"

일순 태무검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오밀문 좌우호법의 행동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죄인이란 낙인이 찍혀 있지만 나찰혈불이나 대력자는 아미파와 곤륜파 대표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다.
기절시킨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거늘, 정신을 잃은 그들을 질질 끌고 간다. 하오밀문 좌우호법이 끌고 가는 건 나찰혈불과 대력자 개인이 아 니었다. 구파일방의 두 곳인 아미파와 곤륜파였다.

'대단한 녀석들이군.'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부르르 떨고 있는 무정신니를 보며 태무검 존은 내심 중얼거렸다.
천의맹주의 명령으로 죄인을 호송해 왔기에 이제와 물릴 수도 없는 일. 그저 분노를 짓씹으며 쳐다볼 뿐 그녀가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 다. 하오밀문 문주는 그런 사정을 알고 일부러 저지른 일인 것이다.

'미풍으로 끝날지 아니면 강풍으로 쓸어갈지 모르지만 바람은 확실하 군.'

드르륵! 쿵!

태무검존의 중얼거림과 함께 하오대전의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지르 며 닫혔다.

"얘들 어떠냐?"

대력자와 나찰혈불을 끌고 가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며 야혼은 물 었다.

"글쎄, 좀 다듬으면 쓸만할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사람을 먼저 만 들어야지."

대력자를 끌고 가던 태웅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으면 큰일 난다(5)
 "그래야지. 고대용!"

고개를 끄덕이던 야혼은 앞서가는 고대용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회주님!"

"저기 청광이노 있잖냐. 저것들이 왜 미친놈이 되었는지 사연 좀 알 아봐."

"그게…."

"벌써 알아봤어?"

"아닙니다. 전혀 정보가 없습니다. 단지 현 장문인인 청운자와 관련 이 있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입니다."

"그럼 그 자식이 마옥성(魔獄城) 출신이란 사실을 저들이 알아내기라 도 했다는 거냐?"

"으음!"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신음소리에 야혼의 입꼬리가 슬쩍 밀려갔다.
청광이노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던 탓이었다.

"그것까지는…."

이번에도 역시 고대용은 말끝을 흐렸다.

"그래? 그럼 그때 뒈진 놈들 무덤을 파보라고 해. 가루로 변하지 않 았다면 뼈는 있을 거야."

철컹!
무덤을 파보라는 말과 동시에 뒤따라오던 청광이노는 걸음을 멈췄다.

"살기 뿌리지 마라. 청운자 그놈의 사형제라는 사실만으로도 네 놈들 은 죽을죄를 졌다. 그러다 이 자리에서 명줄 놓게될지도 모른다."

뒤에서 다가오는 살기를 감지한 야혼이 차갑게 말했다.

"으음!"

오른편에 있던 자의 입에서 두 번째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이 쏟 아낸 살기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지독한 살기가 밀려들었던 탓이었 다.
그러나 청광이노는 뿜어내는 살기를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발설하 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살기에 실어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못 알아듣는군. 잘 들어라 청정(靑淨), 청류(靑流)."

여전히 살기를 쏟아내는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린 야혼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나지막이 말했다.

"수틀리면, 무당 도사새끼들 씨를 말려버린단 말이다. 내가 못할 것 갔나?"

일순 청광이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점점 강해지는 살기는 자신들 로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오한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은 한 걸음 물러나라고 종용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한 걸음씩 물러난 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야 혼을 보았다. 조금 전 나찰혈불이나 대력자를 상대했을 때의 모습은 전 부가 아니었다. 자신들로서도 결코 상대할 수 없는 강자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네 놈들이 청운자를 싸고도는 이유를 묻지 않겠다. 하지만 그놈이 마옥성 출신이란 사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나에게 죽는다. 방해하는 놈 들도 마찬가지고."

성큼 청광이노를 향해 다가간 야혼은 두 사람을 뚫어져라 노려보았 다.

"연작문주 죽일 것 아니면 그만하시게. 고 시주, 이것들 전부 1호 감 방으로 수감하게나."

야혼을 막아선 사람은 추기영이었다. 다른 면에 있어서는 해죽거리며 넘어가지만 마옥성 일만큼은 가만있지 않는 야혼을 알기에 나설 수밖 에 없었다.

"그래, 아직은 죽일 때가 아니지."

고개를 끄덕인 야혼은 자신의 처소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천의맹을 없애려는 거요?"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청정도장이 나직하니 물었다.

"그럴 목적으로 이곳에 들어왔다면 믿겠나?"

"으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믿소이다."

산발한 머리칼로 가려져 있던 두 도장의 얼굴은 해쓱하게 변했다. 십 여 년 이상을 무공을 사용하지 않아 과거에 비해 약해졌지만 한때는 이기어검을 접했었다.
그랬던 자신들이 그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난생 처음 대 하는 강자였다.
삼존의 일인이라는 태무검존마저 속일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 더구 나 그는 문주로도 불리고 회주로도 불리고 있다.

"그게 문제란 말이야. 당신들은 믿는데 이 하오대전 밖에 있는 잡것 들은 아무도 믿질 않아. 이 야혼을 하찮은 버리지 정도로 알고 있단 말 이야."

믿어줘서 고맙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천의맹 인물들이 알아주지 않 아 불만이라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야혼은 청정을 향 해 말했다.
"우릴 보내줄 생각이 없나보군요."

"아냐, 가고 싶다면 보내줄 거야! 단지 머리하고 몸이 따로 나가야하 겠지만."

"쿡!"

청류도장 뒤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공동파에서 분류대상 으로 낙인찍힌 운령자였다.

"우호법! 이젠 네가 힘 좀 써라! 장단맞추는 것도 지겹다."

스윽!
야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웅의 신형이 공간을 단축했다. 뒤 이어 처절한 비명소리가 계곡을 타고 울렸다.

"아-악!"

자세를 잡기도 전에, 패천마영권 1초가 소리없이 운령자의 가슴에 작 렬했다. 그 다음 순서는 야혼이 대력자를 상대할 때와 같았다. 단단한 놈으로 운령자의 전신을 안마하듯 두들기더니 결국 두 다리를 분질러 놓고 말았다.

"저 새끼…, 10일간 굶겨!"

운령자에 대한 처벌을 내린 무슨 할말이 남았냐는 얼굴로 청광이노 를 보았다.

"우리 둘이 합공하면 문주와 동귀어진은 가능할 것 같은데…."

"그래서 남는 게 뭔가?"

"강호 평화!"

청정은 짤막하게 말했다.

"평화라…, 강호 무림인들을 데려다 자원봉사 시키는 걸 평화라 부른 다면 너희들 말이 맞다. 정의라는 어설픈 이념으로 무인들을 현혹하는 게 평화라 부른다면 너희들 말이 맞다. 마옥성 출신이 선무전주를 하고 있는 상황을 평화라 부른다면 너희들 말이 맞다. 명교와 전쟁을 벌이는 상황을 평화라 부른다면 너희들 말이 맞다! 대답해라. 어떤 게 평화 냐?"

"무량수불! 우리가 들어갈 방은 어딥니까?"

야혼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청정은 조용히 물었다.

"따라 오십시오."

죄인들을 안내하여 고대용은 절벽에 면해있는 동굴로 향했다.

"연작문주 말문이 드디어 틔었네 그랴. 금방 한 말은 지금껏 개차반 주둥이에서 나온 말 중 최고였네. 들어가세. 그나저나 오늘 연작문주가 저지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모르겠구먼."

"어떻게 받아들이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고 있겠 지."

태웅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천무전에 모인 각 전의 전주들은 무정신니와 양의검선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게 정말이란 말입니까?"

감연청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나찰혈불과 대력자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기절한 그들을 질질 끌고 갔다니.

"허허!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으면 큰일 난다(6)
 당성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일행을 보았다. 다른 부하들을 데려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자칫 소문이라도 난다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게 분명했다.

"과민하게 생각할 필요 없소이다, 와룡전주. 어찌되었던 하오대전은 참회당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오대전을 거론하고 있는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그보다는 이번 출정에 대해서 논의하도록 합시다. 최근 기조 당에 접수된 정보에 의하면 사천(四川) 금불산(金佛山) 근처에 마교 거 점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엔 선무전에서 출정을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무량수불! 알았소이다, 맹주."

나직한 도호와 함께 청운자는 고개를 숙였다.

"2천 명 정도가 있다고 하니까 병력 차출에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세부사항은 따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와룡전주만 남고 나머진 분들은 나가보십시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난 전주들이 포권을 취하며 자리를 떴다.

"따로 분부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당성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감연청과 독대할 일이 전혀 없었던 탓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머뭇거리던 감연청은 결국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꺼낼 수밖에 없었 다.

"자금을 좀 댔으면 해서 말입니다."

돈 이야기였다. 어느새 천의맹 병력은 7천을 넘어 8천에 육박하고 있 다. 기본적인 경비만 들어간다지만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땅문서를 맡기고 빌렸던 돈은 바닥을 보이는 실정인데, 천하전장에서 는 또다시 이자를 올리겠다고 통고해왔던 것이다.
더욱 곤란한 일은 종남파 문제였다.
구룡표국에서 운송해주기로 하였던 동창 물건이 강탈당한 바람에 그 배상을 해줘야 하는데, 그 금액만 무려 30만 냥에 달했다.

"어느 정도나 필요하십니까?"

당성은 곤란한 얼굴로 물었다. 강호 세가들이 천의맹에 들어와 있는 건 마교발호 때문이지 구파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전(殿) 체제를 유지한 것도 그 때문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돈이라니.

"최하 백만 냥은 필요합니다."

"백만 냥이라고요?"

당성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세가를 운영하는 데도 년 간 10만 냥 이면 족하다. 물론 천의맹 규모가 엄청나긴 하지만 그 열 배를 달라니.

"그런 거금을 가진 곳이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당성은 재차 물었다. 비록 각 세가들이 그 지역의 유지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땅을 가지고 있을 뿐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더구나 전쟁이 끝나면 강호는 무주공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때 강 호를 지배하는 힘은 무력이 아니라 돈이 된다.
그대를 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압니다. 하지만 마교의 복수 대상엔 세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결코 천의맹만이 목표가 아니란 말이지요."

"으음!"

당성은 나지막이 신음을 뱉어냈다. 감연청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각 세가의 본가 또한 언제 공격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일단 가주들과 상의를 해보겠습니다."

마침내 당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어찌 되었 던 천의맹과는 공동 운명체가 되었고, 감연청이 말마따나 천의맹이 망 하면 그 다음은 세가들이 마교의 목표가 될 것은 분명하다.
서로 하나가 되었을 때 마교를 없애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천하전장과 거래를 하십시오. 어쩌면 동창제독과 연줄이 닿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천의맹에 들리기로 하였습니다."

당성의 표정을 살피던 감연청은 동창제독의 방문을 힘주어 말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당성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강호 무림이 독립된 세계처럼 보이지만 황실에 연줄을 대지 않으면 살아나기 힘드는 게 사실이다.
해서 이번 정변을 통해 실세로 등장한 동창제독을 만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아직 접견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동창제독이 이곳을 방문하다니.

"그렇습니다. 그런데 동창제독 나이가 이제 29살이랍니다. 물론 내시 는 아닙니다."

"세상에…."

당성은 경악한 얼굴로 감연청을 보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29살 청년이 동창과 금의위를 장악한 황실 최고 실세라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던 당성은 재차 물었다.

"혹시. 총각은…."

"총각은 맞는 것 같은데…. 정혼자가 있는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 다. 워낙 창졸간에 등장한 분이라."

당성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감연청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의도가 능히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의미심장한 얼굴을 한 감 연청은 지나가는 투로 슬쩍 물었다.

"동창제독께서 오시면 내가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볼까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야 좋지요. 가주들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어쩌면 돈을 모으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언제까지 해 드려 야 합니까?"

감연청을 향해 포권을 취한 당성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와룡전에서 도움을 주지 않으면 급전이라 도 끌어다 쓸 판입니다."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서둘러 만들어보도록 하지요. 동창제독 일은 맹주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럼."

환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당성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동창제독의 취 향도 파악해야 하고 선물을 준비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 었다.

"일이 잘 풀린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맹주님."

당성이 맹주전에서 나감과 동시에 제갈상운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동창제독 덕에 일이 쉽게 풀렸어. 그런데 얼마나 내 놓을 거라 보는 가?"

감연청은 만족스런 얼굴로 제갈상운을 보며 물었다.

"일단은 있는 대로 전부 거둬들여야 할겁니다. 그들 또한 천의맹과 공동운명체란 사실을 주지시켜야 하니까요."

와룡전에 돈을 요구한 배경은 운영자금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문 파들과는 달리 와룡전은 별개의 세력처럼 행동하고 있었고, 그 이면엔 그들이 가진 막대한 자금력이 있다.
그 자금력을 천의맹으로 흡수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번 일을 추진하 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수하들 보수도 지급하셔야 합니다. 무인들이라 하지만 그들 또한 사람입니다. 술도 한 잔씩 먹게 해 주어야 할 줄 압니다."

"하오대전처럼 말인가?"

"하오대전은 한 예에 불과할 뿐입니다. 맹주 이름으로 내리는 금일봉 입니다.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는 맹주님도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사천당가와 동창제독을 무조건 엮어야겠군."

"그럴수록 많은 자금이 나오게 될 터이고, 천의맹은 맹주님을 중심으 로 하나가 될 겁니다."

"그런데 하오대전에 대해선 알아 봤나?"

"알아보긴 했는데…, 드러난 게 없습니다."

제갈상운은 고개를 저었다. 다방면으로 조사를 진행했으나 하오대전 의 자금이 어디에서 나오는 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의 자금력이 와룡전 세가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될 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돈이 없는 것보다 낫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따로 운영자금을 내려줄 필요가 없으니까요."

"좋아. 그럼 그들의 자금줄을 캐는 건 중지하고, 본연의 임무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맹주님!"

  미친개는 몽둥이면 족하다(1)


 규모가 크건 작건 간에 외부로 나가는 부하들을 전송하는 건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길이 평범한 외출이 아닌 전쟁을 치르러 나가는 길임에야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번엔 또 몇 명이 거친 황야에 몸을 묻을지, 몇 명이 불구가 되어 돌아올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보내는 이의 마음 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대연무장 단상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천의맹 수뇌들의 심정이 그랬 다. 감연청을 비롯한 구파 장문인들, 그리고 각 세가의 가주들은 빗속 에 연무장으로 모여드는 선무전 무인들을 굳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당주! 별다른 정보는 없는가?"

선무전 무인들을 보던 감연청은 제갈상운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 었다.

"최근까지 다섯 번을 조사했습니다. 그곳은 마교 본거지가 분명합니 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2천5백 명 정도가 그곳에 기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제갈상운은 확신 어린 얼굴로 말했다. 천의맹이 창설된 지 1년 남짓, 이번에 발견된 마교 본거지는 마교 전력 삼 할에 해당할 정도로 그 규 모가 컸다.
앞으로 있을 전쟁을 위해서도 반드시 없애야할 곳이 바로 금불산 마 교 거점이었다.

"집합이 끝났습니다, 맹주님!"

선무전 무인들을 지휘하던 청운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감연청을 불렀 다.

"알았습니다, 전주!"

희뿌연 안개로 가득한 연무장을 둘러보던 감연청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다가갔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내공이 가득 실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변함 없는 사실이 있다. 그건 바로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강호 무림의 주인이란 것이다. 강호는 여러분들의 집 이고 나의 집이다. 제군들은 집에 침입해 들어온 도적무리를 소탕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가 라! 그리고 천의맹의 힘을 보여줘라. 강호 무림은 영원히 제군들 것임 을 증명해라!"

탁! 탁탁탁! 탁탁탁!

언제부터인가 출정식 행사가 되어버린 무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연무 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각자의 무기를 뽑아든 무인들은 서로 부딪쳐 소 리를 냄으로서 마음을 대신했다.

"종남원은 출발하라!"
"청성원은 출발하라!"
"……."

선무전에 소속되면서 파대신 원으로 바뀐 각 문파가 천의맹 정문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질서정연한 움직임은 천의맹 내부에서 뿐이었다. 활짝 열린 세 개의 문을 나서자마자 10명씩 뭉치더니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 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맹주님!"

"수고들 해 주십시오."

청운자를 비롯한 4파 장문인을 향해 감연청은 미소와 함께 포권을 취했다.
네 명의 장문인들이 몸을 날려 떠나자, 일순 대연무장은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참! 도백회 회주는 밝혀졌는가?'

망연한 눈으로 연무장을 보던 감연청은 문득 생각난 듯 제갈상운을 향해 전음으로 물었다.
금불산에 마교의 근거지가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낸 곳이 바 로 도백회였던 탓이었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제갈상운은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조당 요원이 마교 근거지에 대해 알아낸 것은 우연이었다.
정육점에 고기를 사러 갔다가 그곳 주인으로부터 들은 말을 토대로 금불산을 조사하여 밝혀내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금불산을 조사하면서 밝혀진 것은 마교 근거지뿐만이 아니었 다. 정보의 신뢰성을 확인하기 위해 정육점 주인마저 조사를 하게 되었 는데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곳은 강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세인들에게 잊혀진 도백회 사천 지부중 한 곳이었다.
도백회가 개방이나 기조당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졌다는 사실은 충 격이었다.
해서 기조당에 도백회 회주를 찾으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그를 천의 맹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백회 회주의 행방은 오리무중,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보만큼은 확실합니다.'

몇 번에 걸쳐 조사하고 내린 결론이다. 정보를 얻는 과정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마교에서 준비한 함정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럼 다행이고. 일단 도백회주를 찾는 일은 계속하게. 개방에는 비밀 로 하는 것 잊지 말고.'

개방에 알려 조사를 한다면 도백회주의 정체를 더 빨리 알아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연청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개방이나 도백회 두 곳은 공히 정보를 다루는 곳이다. 자칫 잘못하여 개방을 자극하기라도 한다면 구파 공조에 차질을 가져올 수가 있다.
그가 기조당만으로 비밀리에 도백회주를 찾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응!"

전음을 보내던 제갈상운은 흠칫 놀랐다. 우연히 바라본 내성산 봉우 리에서 일단의 무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가?"

"아닙니다. 참회로 쪽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본 것 같아서 말입니 다."

"흥! 하오밀문 개종자가 구경나왔나 보군."

내성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금정신니가 차갑게 말했다. 야혼이 사 매인 자운에게 했던 행위를 들었던 탓이었다.
비록 죄인이라지만 자운은 엄연한 아미파의 제자. 당장이라도 쫓아가 서 물고를 내고 싶지만, 참회당에 자운을 보내기로 했던 건 자신의 결 정이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전주 대운데 다음부터는 참여시켜 주는 건…."

"무슨 소린가 당주! 저 개종자를 이곳에 참석시키잔 말인가!"

제갈상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정신니는 벌떡 일어나며 고함 을 질렀다.

"그게 아니라…."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쫓아내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살기마저 흘리며 고함을 지른 금정신니는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당성을 비롯한 세가 가주들 또한 금정신니와 다르지 않았다.  어이없 다는 얼굴로 제갈상운을 쳐다보았다.

'허…! 이래서야.'

제갈상운은 내심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오밀문 문주조차 받아 들이지 못한 이들이 과연 마도련을 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더구나, 야혼을 비롯한 하오밀문 삼인방은 결코 평범한 자들이 아니 었다. 자신의 약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활용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천의맹에 들어와 많은 사람을 겪었지만 그들만큼 무서운 자들은 아 직 보지 못했다.

더구나 마도련에서의 그들의 활약은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간이 없어 조사를 하지 못하고 있지만 일백마 자리를 거저 주웠다 는 소문을 제갈상운은 믿지 않았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일백마 중 서열 1, 2, 3위다. 운으로 얻을 수 있 는 자리가 결코 아닌 것이다.
해서 그들을 받아들이자고 했는데.

"혼자 커야겠습니다, 전주!"

멀리 내성산을 봉우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니미씨팔타불! 소승은 언제쯤 저곳에 오줌을 갈길 수 있을는지."

텅 빈 연무장을 바라보며 추기영은 투덜거렸다. 마도련을 주워 삼킬 때와는 달리 천의맹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머리를 쥐어짜 봐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전쟁의 와중이라 각 세력간에 이간질시켜 싸움을 시킬 수도 없다.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걱정 말아라, 육승. 조만간 저곳에 오줌이 아니라 똥을 쌀 수 있을 거다. 한 가운데다 말이다."

"약속했네, 연작문주. 우리 셋이 나란히 저곳에 똥을 싸기로."

"그거 멋있겠다. 저 한가운데 나란히 앉아…."

 미친개는 몽둥이면 족하다(2)
 "크아악!"

야혼이 맞장구를 치려는 순간 아래쪽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 다.

"저 새끼들 또 약 먹을 시간 됐나보다, 가자!"

절벽을 향해 몸을 날리며 고함을 질렀다. 화산파의 광검사수(狂劒四 秀)였던 것이다.

잠시 후.
절벽을 타고 내려온 야혼 일행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1 호 감방이라 이름지은 가운데 동굴은 엉망이었다.
감방의 쇠창살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고, 검푸른 광채를 뿌리는 네 사람은 청광이노를 향해 무섭게 살수를 펼치고 있었다.

"씨팔! 어째 죄수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내공이 금제되지 않은 거야!"

동굴 안으로 들어선 야혼은 거칠게 욕설을 뱉어냈다. 광검사수의 몸 에서 풍기는 기운은 엄청났다.
그들 근처에 있는 바윗덩어리들이 가루로 부서지고 있었다.

"무량수불! 광기 때문에 평소보다 2배 이상 강해져 있소이다. 우엑!"

야혼을 보며 말을 하던 청류는 한 움큼 피를 토했다. 광검사수와의 한번의 격돌로 인하여 내상을 당한 것이었다.

"저따위 미친 새끼들도 못이긴 것들이 뭐 동귀어진을 해?"

청광이노를 향해 이죽거린 야혼은 가공할 기운을 쏟아내고 있는 광 검사수를 향해 다가갔다.
그들 또한 청광이노와 격돌하면서 충격을 받았는지 주춤해 있는 상 황이었다.

"니미럴타불! 이런 씨벌 종자들이 창살이 얼만줄 알고."

본인 특유의 불호를 읊은 추기영은 이마 가득 주름을 잡으며 엿가락 처럼 휘어진 창살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 손날을 이용하여 창살 두 개를 잘라내더니 야혼에게 하나를 던 졌다.

"미친개종자들은 몽둥이로 다스려야 하는 거라네. 죽이진 말고 팔 하 나씩만 잘라버리세. 밥 먹을 손은 있어야하니까 왼팔로…."

일순 추기영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폭발적으로 흘러나왔다. 무음항 마혈탁의 모든 기운을 흡수하여 완전한 전륜마왕지체를 이룬 추기영의 기세는 광검사수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을 누르며 동굴 속을 잠식해 나 갔다.
뒤이어 그 기운 속으로 절대적 강함을 간직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대 력패왕지체의 몸에서 흘러나온 철혈기(鐵血氣)였다.
그리고, 황금빛 광채와 검푸른 광채를 누르며 퍼져나가는 한 가지 기 운, 일순 동굴 속을 차갑게 만들어버린 그것은 건들기만 해도 살이 베 일 것 같은 살기였다.

"내가 경고했지. 여긴 하오대전이니까 함부로 나대지 말라고!"

"캬아악!"

조금 전 충격에서 몸이 회복됐는지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광검사 수는 야혼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과 발을 묶었던 철삭은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무기가 되었고, 그 끝에서 차가운 한기를 머금은 매화 (梅花)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일순 동굴 안은 향긋한 매화 향으로 가득 들어찼다.

"씨팔새끼들!"

낮은 욕설을 뱉어낸 야혼은 추기영에게서 받은 철봉을 번쩍 쳐들었 다.

"그 따위 매화검법으로는 파리도 잡지 못해 자식들아!"

전면을 가득 채우며 다가오는 매화송이를 향해 들어올린 철봉을 힘 껏 내리쳤다. 일순 야혼의 전면은 검은색 점이 무수히 나더니 백색 매 화들을 무차별하게 짓이겼다.
지옥도법 1초인 지옥수라참(地獄修羅斬)이었다.

딱!

"커억!"

추기영의 왼손에 들린 무음항마혈탁이 거북한 소리를 토해내자 일순 광검사수의 한 명이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부처님이 말하길, 방금 육승이 시전한 무공을 광견구타신공이라 부 른답니다. 니미럴타불!"

일순 공간을 단축하여 광검사수 전면으로 다가선 추기영은 비틀거리 는 광검사수를 향해 수중의 철봉을 불쑥 내밀었다.
하지만 광검사수 또한 매화검법을 극상으로 익힌 자들. 스스로 몸을 보호하는 단계에 이르렀는지 순식간에 반장 가량을 뒤로 물러나며 양 손을 쾌속하게 휘둘렀다.
또다시 동굴 가득 매화가 피어났다. 하지만 이번 매화는 처음과 달랐 다. 주먹만한 크기로 커진 매화들은 각각 팽이처럼 회전하며 추기영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종자가!"

딱! 딱딱딱! 딱딱딱!

낮게 소리친 추기영은 항마혈탁을 무자비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과 거 서대시전에서, 장사를 공쳤을 때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던 그 소리.
철탁은 같았으나 상황은 달랐다.
저주파멸음이 가득 실린 무음항마혈탁의 울음은 매화 사이를 뚫고 광검사수의 귓전으로 무자비하게 박혀 들었다.

팡! 팡팡팡! 팡팡!

"커억!"

"크윽!"

태웅의 손발에서 흘러나온 소리 없는 장력이 광검사수의 가슴팍에 격중하고, 그들은 고통에 겨워 나직한 비명을 내질렀다.
150년 전에도 그랬지만 저주파멸음과 패천마영권은 환상적인 궁합이 분명했다. 두 사람의 공격으로 광검사수는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 고, 그들의 쏟아내던 매화들도 물방울 터지듯 픽픽 꺼졌다.

"죽엿!"

그와 동시에 야혼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빠악!
검은 강기를 가득 머금은 철봉이 내밀어진 광검사수 한 명의 팔을 강타하자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야혼의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숨돌린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5척에 달하는 철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머리며 몸을 가리지 않았다.

퍽! 퍽퍽! 퍽퍽퍽!

세 곳에서 동시에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야혼에 이어 추기영 과 태웅도 광검사수 두 명을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사형, 방금 그 무공들 알아보겠습니까?"

태웅과 추기영이 펼친 무공을 보던 청류가 청정을 향해 물었다. 문득 두 사람이 생각났던 탓이었다.

"저주파멸음과 패천마영권이다."

청정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황 금빛 광채를 뿌리는 자, 검푸른 광채를 뿌리는 자 그리고 들고 있는 철 봉만 검게 변하는 자.
그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광검사수를 제압했다.
아니 광검사수는 제대로 된 실력을 채 펼쳐보지도 못했다. 저주파멸 음과 패천마영권에 의해 잠시 주춤거린 순간, 광검사수의 대항은 끝났 다고 봐야했다.

"그리고, 저주파멸음이나 패천마영권은 가장 약한 무공이다. 더구나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저자!"

청정은 야혼을 가리켰다. 그 앞에 있던 광검사수의 행동을 묶어버린 힘은 저주파멸음이나 패천마영권이 아니었다.
하오밀문 문주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가 두 명을 꼼짝 못하게 해버 린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야혼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는 무공에 의해 생 성된 기운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알기론 그런 기운을 풍겨낼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밖에 없었 다.

"설마…, 야차혈마지체!"

일순 청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사형. 무음항마혈탁을 가진 저 자는 전륜마왕지체 를 타고났습니다."

데-엥!

"아-악!

격렬하게 몸을 떨고 있는 두 사람 귓전으로 투명하니 맑은 소리가 흘러들었다.

"극락성음(極樂聖音)!"

일순 청정은 나지막이 부르짖었다. 무음항마혈탁으로 내는 최고의 성 음, 일명 제마성음이라 불리는 극락성음이 동굴을 타고 울린 것이었다.
하지만 극락성음을 울린 추기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턱을 강타 당 해 쓰러진 광검사수 한 명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니미씨팔타불! 실력이 녹슨 모양일세 그랴. 옛날엔 뼈가 부서지는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는데…. 니미럴 한번 더 시험해 봐야겠구먼."

나직하니 욕설을 뱉어낸 추기영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자를 향해 몸을 날리며 황금빛으로 변한 철탁을 무자비하게 날렸다.
언제나 그렇듯 철탁이 나아가는 곳은 상대의 턱이었다.

데-엥!

역시 마찬가지였다. 추기영의 기대와는 달리 무음항마혈탁은 맑은 종 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씨발타불! 한번 더."

데-엥!

"씨팔!"

데-엥!

"씨…."

 
 미친개는 몽둥이면 족하다(3)
 "그만해 새꺄! 이빨까지 다 나갔는데 네가 밥 먹여 줄래?"

재차 철탁을 들어올리는 추기영을 야혼이 말렸다. 추기영이 맡았던 광검사수의 입 주변은 붉은 피로 범벅이었다.

"무슨 소린가 연작문주. 이제 네 대밖에 안 때렸단 말이네. 육덕칠은 몇 대를 맞아도…."

과거 서대시전의 육덕칠을 들먹이던 추기영은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철탁에 강타 당했던 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정력이 세져서 그런지 몇 대만 때리면 전부 기절해버리는구먼. 손맛 잃게 생겼어. 혹시 기절하지 않은 놈은 없는가? 아미타불! 저것들은 굽 기만 하면 되겠네 그랴."

야혼에게 당했던 두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철탁에 맞은 놈의 얼굴은 양반이었다. 야혼에게 당한 둘은 얼굴 자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망 가져 있었다.

"아미타불! 아직 정신을 잃은 건 아닌 모양이네."
 나직한 신음을 흘리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간 추기영은 철탁을 번쩍 치켜들었다.

"시주들에 대해선 아는 거라곤 광검사수로 불린다는 것뿐입니다. 즉, 내 말은 광검사수는 한 몸이란 거고, 한 몸이면 상태가 같아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의 종소리와 함께 야혼과 태웅에 의해 망가졌던 광검사 수 세 명은 추기영이 상대했던 한 명처럼 이가 깨진 채 정신을 잃었다.

"아미타불! 청류도장 이 새끼들 감방에 처넣어 주십시오."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무음항마혈탁을 칠겁니까?"

엉망으로 망가진 광검사수를 보며 청류는 추기영에게 물었다.

"제가 이 철탁을 두드리는 방식입니다. 더구나 이 것들은 머리가 돌 아버린 놈들이 아닙니까. "

청정과 청류를 향해 추기영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제가 장담합니다, 앞으로 한달 안에 이 시주들 정상으로 돌아올….

연작문주 어딜 들어가는가? 그녀는 연작문주 취향이 아니란 말이네."

안쪽으로 들어가는 야혼을 발견한 추기영이 하던 말을 멈추며 그를 불렀다. 야혼이 여자를 보기 위해 움직이는 경우는 한 가지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순찰!"

짤막한 말을 남긴 야혼은 안쪽 깊숙이 들어왔다. 일행이 있는 곳에서 3장 가량 안으로 들어가면 동굴 벽을 뚫어 만든 2평 가량의 조그마한 공간이 나타난다.
불조차 켜지 않는 이곳이 나찰혈불의 거처였다.

"가져다 놨구먼."

나찰혈불이 수감되어 있는 동굴 앞에 놓여있는 보퉁이를 보며 야혼 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잠깐 들어가겠다."

안쪽 어둠을 향해 나지막이 말한 야혼은 보퉁이를 집어들고 철창문 을 열었다.

"어둡군!"
"그냥 두세요."

한쪽 구석에 마련된 촛불을 켜려는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허! 천상의 옥음이 따로 없네."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어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사심도 들어있지 않았다. 며칠 전 상소리를 뱉어내며 달려들었던 나찰혈불과 동일인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얼굴 때문에 불빛이 싫은 건가, 불가의 제자로 끊임없이 살인 충동 을 느껴야하는 죄의식 때문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그녀를 조사하면서 알게된 사실이었다. 성천불마심공을 익히게 되면 하루의 절반은 피를 보고자 하는 충동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낮에는 악마의 심성을 가진 마녀가 되고, 밤에는 성녀로 돌변하는 무 공이 바로 성천불마심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이편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 때문은 아닌가 보군. 그럼 살인 충동 때문이란 말인데…. 나는 말이야 하루종일 살인 충동을 느끼며 살아.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이곳 에 있는 것들을 비롯하여, 무인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을 전부 없애 버리고 싶어. 그 한가지 목적을 위해 살고 있고."

야혼의 말을 듣던 자운은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처절한 말 투는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강호 무림에 원한이 많은가 보군요."

슬쩍 야혼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눈이 확 띨 정도로 잘생긴 얼굴의 사내. 희멀건 얼굴은 고생한번 해보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자가 강호무림을 없애버리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다니.
문득 야혼이란 사내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원한이라기보다는 발악이라 하는 게 나을 거야. 왜 가진 자들이 하 는 말 있잖아. 없는 놈이 지랄발광한다는, 내가 그래. 참, 그 지경이 돼 서도 살고 있는 이유가 뭐지?"

"왜 자살을 하지 않았냐고 묻는 건가요?"
 "맞아, 나는 8살 때 자살을 시도해 봤거든. 죽지 못해서 지금까지 살 아 있지만."

"무-섭지 않았나요?"

두 번째 떨림, 8살 때 자살을 시도했다는 말에 가슴속에서 싸늘한 기 운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야혼을 똑바로 보았다.
어둠 속이라지만 안력을 집중하면 상대의 얼굴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도 역시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무서울 수가 없었지. 어머니도 있었고, 누이도 있었고 마옥성에 끌 려왔던 명교인들이 있었으니까. 나까지 합치면 거의 3천 명 정도 되었 어. 그들은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지도 몰라. 하지만 방법이 없었어.
지하에 흐르던 역청에 불을 붙일 수밖에.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 고 생각했거든."

"그럼 3천 명이 전부…? 무슨 권리로?"

자운은 경악한 얼굴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우리에겐 살 권리는 물론이고 죽을 권리도 없었다. 그들의 명령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실험체일 뿐이었다."

"나무관세음보살!"

마침내 자운은 불호를 읊고 말았다. 3천 명의 죽음을 태연하게 말하 는 사람. 그는 그 모든 책임을 마옥성을 만들고 명교를 핍박했던 무림 인에게 돌리고 있다.
실험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결코 강호 정의나 천의맹을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운은 참 순진하네. 지금껏 내가 한 말을 전부 믿는 거 야?"

"네?"

일순 자운은 뜨악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껏 암울한 기운을 풍 기던 야혼의 모습이 갑자기 밝게 변했던 탓이었다.

"아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기에 하는 말이야. 나는 벌써 잊어버렸 거든. 참! 이거 익혀."

슬쩍 미소를 머금은 야혼은 품속에 있던 책자를 꺼내 자운에게 내밀 었다.

"이건?"

"잠시만 불을 켜자."

엉겁결에 책자를 받아든 자운을 보던 야혼은 오른 손바닥을 활짝 폈 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 자그마한 푸른 불꽃이 솟아 나와 자운의 손어림으로 다가갔다.

"양심신공(兩心神功)!"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자운은 책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기이한 빛 에 대해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책자 전면에 적혀 있던 네 글자는 사고를 마비시켜버리기에 충분했 다. 양심신공, 성천불마심공의 저주를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대안으로 생각했던 책자.
단 한번이라도 보기를 원했던 그 무공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음을 둘로 나눌 수만  있다면 피를 갈구하는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고, 더 이상 마음속 악마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왜?"

바닥에 떨어진 양심신공 비급을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하 오밀문 문주가 자신에게 양심신공을 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번 달라고 주는 거야."

 미친개는 몽둥이면 족하다(4)
 "뭘 제가 드릴게 뭐…."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오대전에 처음 들어올 때 그에게 틀어 잡혔던 가슴이 생각났던 탓이었다.

"휴-우!"

나직하니 한숨을 내쉰 자운은 양심신공이 적힌 책자를 야혼 앞으로 밀었다.

"농담이야, 내가 비록 여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임자 있는 여편네를 건들지 않아. 다만 한가지만 부탁할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중에, 혹 시라도 내가 천의맹 무인들을 전부 없애버리려고 하면 말려 줘."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하여간 약속해."

"아-알겠습니다."

강경하게 말하는 야혼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하고 말았다. 설사 야혼이 천의맹 무인들을 전부 없앤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무슨 힘이 있 어 그를 말리겠는가. 공연히 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그런데 양심신공은 어떻게 얻었습니까?"

이제야 정신을 차린 자운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당 최심처에 보관 되어 있어 장문인조차 빼내지 못하는 무공이 양심신공이다.
오죽했으면 아미파에서조차 구하지 못했을까.
그런데 하오밀문 문주인 야혼이 양심신공을 가지고 있다니.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그건 나만의 비밀이니까 묻지 말고. 그나저나 자운 되게 예쁘다. 중 의로 썩기는 너무 아깝네. 35살이라고 했던가?"

"네?"

"놀라긴. 남자로서 느낌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뿐이라고. 그리고 이 거. 떨어지면 나에게만 살짝 말하라고."

가져왔던 보퉁이를 자운 앞으로 밀어놓은 야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보자기를 풀고 있었던 탓이었다.

"너무 맘 상해하지 마. 하루 종일 사람 죽일 궁리를 하는 나 같은 놈 도 있으니까."

"아미타불! 알겠습니다, 문주."

야혼을 배웅한 자운은 풀다만 보자기를 풀었다.

"이건?"

안쪽의 내용물을 확인한 그녀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보퉁이 안에는 여자의 필수품이 가득 들어있었던 것이었다.
달거리 때 써야하는 서답을 비롯하여 20여 벌의 속곳이 차곡차곡 개 켜져 있었다.
더구나 그것들은 생전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던 최고급품이었다.

"아미타불! 고맙습니다, 전주님."

가만히 속곳들을 만지며 자운은 감사의 표정을 지었다.
야혼이 떠나간 자리를 보던 자운은 서둘러 양심신공을 집어 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양심신공을 익혀 마음속의 심마를 몰아내고 싶을 뿐이 었다.
그녀가 양심신공에 몰두하기 시작한 그 시간, 밖으로 나온 야혼은 두 호법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니미럴타불! 아주 고단수를 썼더구먼 연작문주. 몸으로 말려달란 말 도 하지, 그 말을 왜 빼먹었는가."

야혼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선 추기영은 이마에 주름을 팍팍 잡으며 이죽거렸다.
야혼을 볼 때마다 놀랍기 그지없었다.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몇 개월, 심지어는 몇 년 후를 내다보며 그물을 치고 있다.
자운 또한 마찬가지다. 당가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야 혼은 그녀를 도와줄 사람으로 자운을 선택했다.
조금 전 과거를 들먹이며 자운의 심성을 자극한 것은 먼 미래를 위 한 포석인 것이다.

"그건 지가 알아서 하는 거야 임마. 아미파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년 인데…. 가져온 것 내놔!"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은 태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게 먹힐까?"

조그마한 보퉁이를 내밀며 태웅은 물었다.

"안 먹히면 죽여버려야지 별수 있냐. 일단 물어나 보지 뭐."

보퉁이를 받아들고 대력자와 운령자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여어! 다리는 괜찮아? 내가 너무 심했지."

"개자식!"

쇠창살로 만들어진 물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대력자의 입에서 상스런 욕설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 죽여버린다고 하였던 야혼의 말을 들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허풍으로 생각했을 뿐 결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저 새끼는 연장문주의 말을 믿지 않은 모양이네."

단단한 놈을 들고 안쪽으로 들어오며 태웅이 말했다.

"운룡대구식에 있던 숨겨진 무공을 찾아낸 것을 보면 머리는 좋은 놈인데 상황파악은 좀 느린 모양이다."

"쿡! 멍청한 놈. 아부할 필요 없다. 그래봐야 네가 하오밀문 문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대력자는 나직하니 코웃음을 쳤다. 기가 막혔다. 처음으로 운룡대구 식에 공격무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무인이 나타났는데 그가 하오 밀문 문주라니.

"씨팔놈이 매를 벌어. 이 새끼 다리가 어느 정도 아물었을 거야. 태 웅 다시 원래 상태로 만들어 줘라."

"마음대로 해라 개자식들아. 언젠가는 이 원한 반드시 갚아줄 거다!" 두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대력자는 짓씹듯 말했다.

"병신 너는 이 모멸을 갚을 기회는 영원히 없어 임마. 부러진 다리는 또 부수면 네 뼈가 어떻게 될까?"

"죽어서도…."

퍼억!

"크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대력자는 바닥을 굴렀다. 아물어가던 다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던 탓이었다.

"우리 연장문주는 말이다. 네 놈을 죽이지 않아. 스스로 죽게 만들면 된다 이 말이다. 다리뼈를 가루로 만들지도 않아. 단지 운룡대구식을 펼치지 못할 정도로만 해 줄 거야. 영원히 운룡대구식을 펼칠 수 없게 되면 네가 택할 길은 한가지 밖에 없겠지."

퍼억!

"헉!"

이번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태웅이란 놈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비 수처럼 박혀 들었던 것이다.
놈들은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운룡대구식을 펼치지 못할 정도만 두 다리를 망가뜨리려 하고 있다.

"으으!"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놈들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더럭 겁이 났다.
지금까지 죄인으로 사문에 남아있었지만 단 한번도 운룡대구식을 펼 칠 수 없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사문에서도 인정해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놈들은 그럴 기회조차 박탈해 버리려 하고 있다. 운룡대구식 을 펼칠 수 없다면, 놈들의 말대로 자살할 수밖에 없으리라.
신음을 뱉어낸 사람은 비단 대력자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곁에서 지 켜보고 있던 운령자도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태웅과 야혼을 보고 있었 다.

툭!

그런 그들의 앞으로 야혼은 두 권의 책자를 던졌다.

"무적군림마보(無敵君臨魔步)와 혼세광마장(混世狂魔掌)이다. 익히고 안 익히고는 너희들 자유다. 그리고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고."

두 사람을 향해 차갑게 말한 야혼은 석실을 나갔다.

"제기랄!"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대력자는 눈앞에 떨어져 있는 책자를 주시했 다. 무적군림마보, 하오대전에 처음 들어올 때 문주인 야혼이 펼쳤던 무공이다. 그가 펼친 무적군림마보에 운룡대구식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무적군림마보만 익힌다면 불완전한 공격무공인 운룡대구식을 완전하 게 보완할 자신이 있다.
아니 곤륜파 최고 무공으로 만들 자신이 있다.

"씨팔! 엄청난 유혹이군."

운령자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냅다 욕설을 뱉어냈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100년 전 성모척살대로 떠났던 무인들의 무공이 눈앞에 있다.
기연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선뜻 잡을 수가 없다.
선택, 하오밀문의 부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사문의 죄인으 로 남을 것인가를 선택해야하기 때문이었다.

"니미럴!"

대력자의 입에서 또 다시 욕설이 흘러나왔다.

미친개는 몽둥이면 족하다(5)
 하지만 두 사람과는 달리 격동에 찬 눈으로 눈앞에 떨어진 비급을 향해 절을 올리는 자들이 있었다.
청광이노의 절을 받고 있는 대상은 사람이 아닌 책자였다. 복마청운 검법(伏魔靑雲劒法) 100년 전 무당파 제일 고수였던 해진자(海眞子)의 독문검법이다.

"이 무공을 익히면 너희 둘의 신분은 무량도존(無量道尊)보다 높아진 다. 즉 너희들이 무당 최고 배분이 된단 말이다."

"무량수불!"

청정과 청류는 감격스런 얼굴로 도호를 읊었다. 하지만 그들의 놀라 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책은 태을건곤심법(太乙乾坤心法)이다. 광검사수에게 줘 라."

"허억!"

나직한 신음을 흘린 청광이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리고 막연한 눈으로 야혼을 보았다.
태을건곤심법이라니, 다른 무공도 아니고 무림사에서 가장 뛰어나다 는 내공심법을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각 문파들은 자파의 무공이 유출되는 걸 극도로 꺼린다. 무공을 유출한 제자는 반도로 다스리고 있지 않은가.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두 사람의 귓전에 나직한 야혼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익히는 건 너희들 자유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천의맹을 비롯한 명교 그리고 마옥성 놈들을 전부 없애버릴 참이다. 할 수 있느냐 없느 냐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하게 약속할 수 있다. 100 년 전보다는 더 많은 피가 강호 상에 흘러내릴 것이고 그때보다 더 많 은 사람들이 죽어갈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한다. 너희들에게 비급을 주 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여보기 위해서다."

"무량수불! 문주는 무서운 사람이구려."

청정은 해쓱한 얼굴로 말했다. 하오밀문 문주 야혼, 그의 진면목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그가 익힌 무공 중 투견공은 가장 약한 무공일 뿐이었다.
하오밀문 창설자인 십전수 구약종의 무공마저도 완전하게 익히고 있 는 사람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야혼을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더 무서웠다.

"아니다, 청정. 이 정도는 무서운 게 아니다. 진정 무서운 건 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뿌리는 광기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 지를 선무전이 돌아오면 알게 될 거다.."

"무슨 말이오?"

몸을 돌리는 야혼을 향해 청정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야혼의 말이 뜻한 바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너희들이 마교라 부르는 명교를 이끌고 있는 여인은 과거 내 친구였다. 광애성모지체를 타고난 천재. 너희들을 불러 낸 사람은 바로 그녀다. 그리고 그녀는 살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같이 죽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운명처럼…."

"그럴 수가…. 알려야 할 것 아닙니까. 문주도 천의맹 사람인데 알려 야 할 것 아닙니까!"

"누구에게 말할까 청정. 이곳 천의맹에서 하오밀문 문주 말을 믿어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래도…."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는다. 설사 그가 명확한 증거를 들이댄다 해도 믿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다. 각 문파의 죄인들과, 문파라고 생각하 지도 않는 하오밀문 문주, 야혼과 자신들의 현실이었다.
수천 명 무인들의 신음소리가 이명처럼 들리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운이 좋다면 절반 정도는 살아올 것이다. 대신 명교인들은 그보다 더 많이 죽겠지. 그래도 천의맹 입장에서 보면 남는 장사 아니냐."

"원시천존이시어!"

청정과 청류는 탄식을 하고 말았다.

'나는 말이다 너희들이 얼마가 죽던지 상관없다. 다만 호치 그년이 걱정이다. 그년은 나처럼 차가운 심장을 지니지 못했으니까.'

동굴을 나서며 야혼은 중얼거렸다. 얼마 전 온 소식에 의하면 금불산 에서 명교를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여호치였다.
도백회에서 그들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아니라 여호치가 흘린 정보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가?"

뒤따르던 추기영이 야혼에게 물었다. 여호치에 대한 소식은 벌써 며 칠 전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야혼의 처리방식대로라면 천의맹이 떠날 때 같이 갔어야 했다.
선무전을 없앨 수 있는 최상의 기회이고 야혼은 결코 놓칠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상대가 명교이기 때문이고, 그곳에 여호치가 있기 때문이다.

"육승! 그들을 없애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추기영에게 묻는 말이 아니다. 자신에게 묻는 말이다. 무엇을 얻고자 그들을 없애려는 건지. 문득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미타불! 소승도 잘 모르겠네. 다만…, 전에 문주가 말한 것처럼 발 악이라고 해두는 게 나을 듯 싶어. 죄라면 아비와 어미를 명교인으로 둔 것이겠지. 우리가 가는 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 그건 생각하지 말자.
그냥 가보는 거야. 가다가 힘이 딸리면 우리가 뒈질 것 아닌가."

"맞아, 나는 하오밀문의 개차반이고, 명교에서 버림받은 마옥성 출신 이니까. 달리다 숨이 막혀 죽어도 하등의 손해날 것도 없지."

야혼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왔다. 앞 을 가로막는, 적이라 생각되는 자들을 향해서는 가차없이 죽음을 내렸 고, 그들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번에 없애야할 자들은 적이 아니다. 추기영과 태웅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이 믿었던 명교다.
그들 역시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무림을 향해 칼을 뽑았다. 그들마저 희생시켜 무림을 장악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가야겠지, 명교가 되었던 천의맹이 되었던 전부…."

"회주님!"

주먹을 불끈 틀어쥔 순간 첩지를 손에든 고대용이 다급한 얼굴로 들 어왔다.

"새로운 소식입니다."

"이건?"

첩지를 받아든 야혼은 깜짝 놀라며 고대용을 보았다.

"도백회에서 내린 결론은 내분입니다."

고대용은 나직하게 말했다. 야혼의 지시로 그동안 도백회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조사했던 사항은 명교의 동태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명교에 이상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장 많은 인원이 모여있던 금불산에서 명교인들의 이탈이 목격되었 다. 금불산이 명교 거점이란 정보를 흘린 자들이 그들이 아닌가.
함정을 파서 천의맹 무인들을 없앨 생각을 해야할 그들이 금불산을 이탈하다니. 적을 기다리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다. 내분으로 결론지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성모 측근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금불산에 명교 거점이 있다는 사실도 교주파에 의해 유 출된 듯 싶습니다. 그리고 금불산에 사천 지방군이 출병해 있습니다."

"빌어먹을…."

나직하니 욕설을 뱉어냈다. 금불산 상황은 이제야 고명지에 들어갔을 터이고, 사천까지 장계가 내려가려면 아직 보름정도 더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군이라니.
고명지조차 모르는 일이 사천에서 일어나고 있음에 분명했다.

"교주놈의 정체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고대용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명교 교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백방 으로 뛰었으나 그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미타불! 혹시 교주란 놈이 과거 성모궁 사건을 재현하려는 것 아 닌가."

"호치를 제물 삼아 선무전을 없애겠다는 생각이군. 성모의 죽음은 명 교도를 더욱 단합시킬 테니까."

추기영의 말에 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세력도 없는 그녀에 게 교주라는 자가 접근했다기에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그 이 유를 알 것 같았다.

"씨팔! 병신 같은 년, 그깟 교주란 놈 하나 요리하지 못하고."

또다시 욕설을 뱉어낸 야혼은 당 노야가 만들어 주었던 상자를 거칠 게 열어 안쪽에서 조그마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한쪽 구석을 향해 손을 내밀자 광명도가 빨리듯 다가왔다.

"이곳은 너희 둘이 알아서 정리해라. 고명지에게 연락해서 동창 사천 지부에 있는 녀석들을 남천으로 오라고 해!"

광명도를 갈무리한 야혼은 한쪽 동굴 밖으로 향해 몸을 날리며 소리 쳤다.
천의맹 수뇌부들의 시선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연작문주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네 그랴."

"저 녀석이 가장 마음에 두었던 사람이 여호치 아니었냐. 그래서 그 런 거지."

성벽을 타고 넘어 시야에서 사라진 야혼의 뒷모습을 좇으며 태웅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재회(1)


 구절(九折), 구층(九層), 구봉(九峰)이란 뜻에서 구절산(九折山)으로 불렸던 금불산은 사천 남부 남천에 위치하고 있다.
금불산에 처음 오른 사람은 제일 먼저 산 속 이곳저곳에 있는 대숲 을 보며 놀란다.
마치 푸른 융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펼쳐진 죽림은, 이곳이 산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더하여 금불산에 있는 또 하나의 절경은 풍취령 정상에 있는 자연 동굴들이다.

금불동, 영관동, 고불동, 양이동, 연지동 등 수많은 동굴이 산재해 있 고 그 깊이 또한 측정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금불산 동굴은 금역처럼 되어버렸다.
그곳 동굴에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당신이 이런 짓을…."

금불동 안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천상을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인, 현 명교 성모인 여호치였 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여호치는 주천상을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그를 신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교주, 설사 다른 목 적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명교 교도들만은 지켜주리라 믿었다.
한데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명교 경전인 아베스타와 성모인 자 신의 목숨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곳에 명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천의맹에 알 린 자가 바로 그라는 것이다.
풍취령 동굴 속에 있는 2천 명교인들 그들은 무공조차 익히지 않은 평신도들이다. 그런데 주천상은 그들과 남천에 도착해 있는 선무전 무 인들의 목숨을 바꾸려 하고 있다.

"허허! 명교의 정신적 지주라는 성모가 맞소? 이승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러시오. 노래의 집으로 가는 게 아니냔 말이오. 성모를 비롯 한 2천 명교인의 희생으로 2천에 달하는 선무전 무인들을 잡을 수 있 는 기회요. 그 일을 성모가 해달라는 것이오."

은색 광채를 뿌리는 책자를 들고 주천상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수십 년 전부터 원했던 물건, 아니 잠사옹의 정체를 알고 난 후부터 아베스 타를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잠사옹의 마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아베스타였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아베스타를 여호치가 가지고 나왔고 명교 교주로서 자연스럽 게 접근했다.

원래의 목적대로라면 지금 그녀를 버릴 시기가 아니었다. 명교가 중 원을 지배할 때까지는 그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돌변했다. 수십 년 간 노력하여 구축했던 황실 기반은 새로운 동창제독이 들어서면서 물거품으로 변했고, 천의맹과의 전쟁도 지지부진했다.
무엇인가, 명교도들은 전사로 만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해서 선택한 방법이 성모를 비롯한 평신도의 죽음이다.

"성모가 태어나기 전이지만 100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일이 있었소.
전대 성모인 천애설과 평신도 5천명이 성모궁에서 자결을 했소. 그 덕 에 성모척살대라 알려진 무림 최고 고수 100명을 폐인으로 만들었소.
이번엔 천의맹을 극악무도한 단체로 만들어야 하오. 아울러 선무전 무 인들 또한 이곳에서 대부분 죽게 될 것이고."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해야하오 성모.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이곳에 있는 2천 명교인들의 죽음은 변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럼 금불산을 막아서고 있는 군병들도 당신이 불러들였겠군요."

"그렇소 성모. 지금은 금불산 어귀를 포위하고 있지만 내 말 한 마디 면 이곳까지 치고 올라올 것이오. 5일의 시간을 벌어 삶을 도모해보느 냐, 아니면 오늘밤이라도 전부 죽느냐는 성모의 선택에 달린 거요."

"잔인하군요. 교주라는 자가 신도들의 죽음을 몰아 넣는 짓을 서슴없 이 하다니. 극악한 살인마가 되어서 얻고 싶은 게 뭡니까? 교도들의 희 생으로 노래의 집을 중원에 세운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잊었소 성모. 수만 명에 달하는 명교도들이 마옥성으로 끌려갔소.
그 같은 일을 다시는 당하지 않기 위해서요."

"역겹군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수천 명교인을 희생시키는 자가 그런 말을 하다니. 마옥성으로 끌려갔던 그들은 결코 교를 배신하지는 않았 어요. 당신같이 비열한 짓으로 살아남지 않았단 말입니다."

"닥치거라!"

일순 주천상의 몸에서 백색 광휘와 함께 차가운 살기가 몰아쳐 나왔 다.

"헉!"

나직한 신음을 뱉어내며 여호치는 급하게 무극대라미륵신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쿵!쿵!쿵!

"우엑!"

여호치는 주천상의 상대가 아니었다. 동굴 벽면까지 물러난 그녀는 급기야 무너지듯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해냈다.

"당신은?"

목을 타고 넘어온 피가 가슴팍을 적시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여 호치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언제나 편안한 듯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은 무공에 의한 것 이었다. 기생들에게나 필요하다고 하였던 그 무공. 염라환희소였다.
더하여 백색 운무를 쏟아내는 내공심법은 태을건곤심법이 분명했다.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걱정 말거라. 나는 명교의 교주니라. 영원히 명교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마."

일순 주천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리고 주변을 잠식했던 살기는 눈 녹듯 사라졌다.

"왜…? 당신은 약자를 사랑했던 사람이지 않았습니까. 비천한 자를 위해 문파를 세웠던 사람이지 않습니까?"

절규하듯 고함을 내질렀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하오밀문을 세웠던 사람. 하오밀문이 커지면 비천한 자들을 외면할까봐 무공조차 남기지 않았던 그다.
그랬던 그가 2천 평신도들의 죽음을 요구하다니.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보다 그의 가치관이 변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에게 힘을 주었어야 했 다. 구파일방이나 여타 세력보다 더 강한 힘을. 그랬더라면…."

"하오밀문을 없앤 사람도 당신이겠군요."

"버리고 싶었던 과거를 지운 것뿐이니라."

"하-아!"

여호치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하오밀문의 창시자인 구약종이 분명했다.

"어떻게?"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냐는 물음이다. 하지만 구약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염라환희소를 펼쳤는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여호치를 향 해 말했다.

"너를 따르는 자들이 300명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들과 같이 선무전 무인들을 죽호곡(竹壺谷)으로 유인해와라. 그 쪽이 유일한 생로 니라."

"당신들도 교를 배신하겠단 말입니까?"

구약종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여호치의 시선이 왼쪽으로 향했다. 백색 사제복을 입고 있는 자들, 그들은 성모궁에서 탈출해온 불의사제들이었 다.

"아베스타가 있는 곳에 명교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베스타를 수호하 는 사제들이고요. 먼 훗날 노래의 집에서 뵙겠습니다."

여호치를 향해 고개를 숙인 좌정인을 비롯한 불의 사제들은 구약종 의 뒤를 따라 동굴을 나갔다.

"아우라 마즈다여!"

신음처럼, 여호치는 아우라 마즈다를 외쳤다. 금불산에 제2의 성모궁 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곳에 백색의 궁을 세워 핍박받는 명교인의 안식처로 만들고자 하 였다. 그랬던 모든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그들을 죽음의 길로 인 도하는 성모가 되고 말았다.
전대 성모처럼.

 
하오대문7권 - 재회(2)
 "궁주님!"

일단의 무리가 여호치를 부르며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화소미를 비 롯한 개봉에서 기녀노릇을 했던 청빈사기(淸貧四妓)였다.

"화총관! 나는 거짓말의 집으로 가게 될 것 같아. 저 많은 이들은 전 부 죽음으로 이끄는 성모가 되고 말았어."

화소미의 품에 고개를 묻고 여호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닙니다 궁주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아직 5일이 남았습니다. 죽음은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 습니다."

말을 그렇게 하고 있지만 화소미의 얼굴 또한 절망적이었다. 성모를 따르는 300명의 무인들이 있으나 그들은 내공을 억제하는 산공독에 중 독된 상태. 적어도 5일이 지나야 무공을 되찾게 될 것이다.
풍취령에 있는 2천 교도들 중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이는 여호치가 유일했다.
더구나 교주를 따르는 무인들마저 동굴 전면 곳곳에 은신해 있다. 설 사 그들을 뚫고 간다하더라도 이번엔 금불산에 들어와 있는 군병들을 피해야 한다.
무공조치 익히지 못한 평신도들를 데리고 나갈 방법이 없다.

"하지만…."

"궁주님, 우린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요."

"그래, 그래야겠지."

화소미의 말을 듣던 여호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성모궁에 갔을 때도 그랬고, 구약종을 만나 명교를 재 건할 때도 그랬다. 확신을 가지고 일을 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어려움이 닥쳤고, 이겨내지 못하면 죽음을 달 게 받을 밖에.

"화 총관, 횃불을 준비해서 동굴 안쪽을 살펴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궁주님!"

여호치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옴을 확인한 화소미는 청빈사기를 데리 고 동굴 밖으로 달려나갔다.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하지만 전대 성모의 전철은 결코 밟지 않은 겁니다. 제가 죽어 저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막막한 어둠을 보며 여호치는 확고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금불산 풍취령에 있는 여호치와 다른 이유였지만 초조한 얼굴을 하 고 있는 자들은 또 있었다.
마교 척살의 기치를 걸고 천의맹을 출발했던 선무전 무인들 또한 곤 혹스런 얼굴로 금불산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의맹을 출발하여 한 달에 걸친 대 장정 끝에 사천 금불산에 도착 했다. 그러나 마교도가 숨어 있다는 풍취령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온 산을 점령하고 있는 병사들 때문이었다.

"언제 끝난다고 합니까?"

남천의 객잔 2층. 선무전 전주인 청운자는 방금 들어온 종남파 장문 인 대라만검(大羅滿劒) 황철군(黃鐵君)을 맞이하며 물었다.

"앞으로 4일은 금불산에 더 머무를 예정이랍니다."

황철군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금불산에서 군부의 작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해결하겠다며 자신 있게 나섰다.
군부에 안면이 있는 자가 몇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불산 어귀에 도착하여 자신들 또한 마교를 척살하러 왔다고 말하 며 작전을 같이 수행할 의사를 비쳤다.
그러나,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했던 그는 군부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핀잔만 들어야 했다.

"으음!"

청운자는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비 밀유지다. 그런데 남천에 도착하여 벌써 이틀을 허비하고 있다.
요소 요소에 은신하고 있다지만 2천 명이나 되는 대 병력인데 적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저번 와룡전이 실패했던 것처럼 적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 조하기 그지없었다.

"심려 놓으십시오. 안찰사에게 허락을 얻어왔습니다. 군병들이 퇴각 함과 동시에 산을 올라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랬습니까?"

황철군의 말에 청운자의 얼굴은 환해졌다. 황철군의 말대로라면 선무 전 무인들이 이곳에 와 있다고 소문이 난다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금불산을 통제하고 있는 병사들 때문에 마교도는 고립되어 있는 상황, 그들이 떠난 자리를 선무전 무인들이 메우면 될 터이다.

"5만냥을 달라고 하더군요."

"허허! 마교도를 잡으러 나온 우리에게 돈을 요구했단 말입니까?"

어이없다는 얼굴로 청운자는 황철군을 보았다. 이번 출정에 군자금으 로 가져온 돈은 2천냥에 불과했다. 그런데 5만냥을 달라니.

"북경엔 개혁 바람이 불어 연일 탐관오리들이 숙청되고 있다고 하던 데…."

"아직 지방까지는 북경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 또 한 옷을 벗지 않으면 숙청될 잡니다."

"그래도…."

"돈을 주지 않으면 금불산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미안한 얼굴로 황철군은 물었다. 안찰사를 찾아가지 않느니만 못한 상황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더라면 그들은 알아서 철군했을 것이다.
공연히 찾아가는 바람에 약점만 잡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달라는 데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이곳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내일 중의로 천하전장에 차용증을 써주고 돈을 빌도 록 하시오. 천하전장과는 이미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보다는 더 기다리는 건 어떻습니까. 명령을 받는 자들인데 언제까 지 머물진 않을 것 아닙니까."

황철군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아 하는 말이었다.

"아니 되오. 그자가 설사 10만냥을 요구해도 주시오. 반드시 마교도 를 척살해야하오. 이번에도 허탕치면 맹내 수하들 사기는 회복하기 힘 들 정도로 떨어집니다. 그자가 돈을 요구하는 건 문주 잘못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선무전주."

"별말씀을 그보다는 금불산 감시하는 부하들에게 더 신경을 써 주십 시오.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종남파 청성파 점창파 세 장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그만 가 보십시오. 일이 생기면 즉각 연락하도록 하겠소."

"그럼!"

청운자를 향해 고개를 숙인 세 사람이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금불산에 올라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삼 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하게 사라지자 청운자의 입에서 스산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 표정 또한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 천의맹을 걱정하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청운자의 모습은 혼자만의 비 밀을 간직한 자의 얼굴이었다.

"마옥성의 강호 지배는 금불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었다. 그가 돈에 상관없이 금불산을 올라야 한다고 강조했던 이유가.
 재회(3)
 금불산에 파견된 군병들로 인하여 한 바탕 몸살을 알았던 남천 관아 는 또 다른 방문자로 인하여 초비상 시국에 돌입했다.
그는 이름도 직급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본인의 신분을 말하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광경을 남천 현감은 봐야했다.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는 2백 동창 무인들, 느닷없이 남천 관아에 들 이닥친 그들은 젊은 청년을 향해 극진한 예의를 차리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군…."

남천 현감 도대금은 동창 무인들이 들어가 있는 후원 별채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곳은 살을 엘 듯한 살기와 함께 건드리면 곧바로 터져버릴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온통 별채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상부에 보고는 했나?"

야혼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무지 현 상황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고명지의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군이 출병하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천 지방군이 출병하자마자 곧바로 장계를 올렸습니다."

야혼 앞에 무릎을 꿇고 보고를 올리는 이자는 동창 사천지부장인 섬 뢰도(閃雷刀) 오양(吳陽)이었다.
오양은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듦을 느꼈다. 잠룡어사대인, 북경에서 언뜻 보았던 그가 이곳까지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천으로 발령 받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했기에 더 욱 난감했다.

"군을 출병시킨 놈은 누구냐?"

"도지위사사 강마상(姜麻上)이란 자로 정3품입니다."

"그래? 자충선이라 했느냐."

이번엔 야혼의 시선이 오양과 같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자에게 향했다.

"네 어사대인, 이번에 금의위 사천지부장으로 발령난 무영궁(無影弓)
자충선(紫忠善)입니다."

"너는 지금 당장 금불산으로 가서 강마상이란 놈을 잡아와라. 반항하 면 다리 정도는 잘라내도 상관없다."

"존명!"

얼굴이 해쓱해진 자충선이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대답했다. 잠룡어사 대인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흘러나왔던 탓이었다.
직책도 직책이지만 무공에 있어서도 상대할 수 없는 거인이 바로 그 였다.

"오양, 지금 동원 가능한 동창과 금의위는 몇 명이냐?"

"사천에서 활동하는 금의위와 동창은 전부 2백 명입니다."

"2백 명이라…."

야혼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선무전 무인들이 2천, 명교 또한 선무 전과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되었다.
두 세력을 양패구상 시키기에는 2백 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마도련 무인들을 불러들이는 방법도 있으나, 시간도 없을뿐더러 혹여 정체라도 노출되면 큰일이기에 그럴 입장도 아니다.
결국 이곳에 있는 동창 무인들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만 나가봐라. 나는 잠시 눈 좀 붙여야겠다."

오양을 내보낸 야혼은 침상으로 몸을 던지며 눈을 감았다. 4일 동안 밤낮으로 달려왔던 탓에 몸이 물찬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선 잠시라도 잠을 자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로부터 야혼이 잠을 깬 건 다음날 저녁 무렵, 금불산으로 강마산을 잡으러 떠났던 자충선이 돌아온 다음이었다.

"무슨 일이오. 아무리 동창이라 해도 작전중인 장군을 잡아오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후원 뜰에 도착하여 아혈을 풀어주자마자 강마산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자충선이 심하게 다뤘는지 강마산의 갑옷은 사방이 찢겨 있 었다.

"그 새끼 더럽게 시끄럽네. 죄가 있으니 데려왔겠지."

"누구요?"

야혼을 찬찬히 살피던 강마산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상대가 너무 젊 었던 탓이었다.

"지금부터 묻는 건 내가 한다. 강마산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 알았 느냐?"

"나는 정3품 관리요. 관리를 취조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고 알고 있소이다. 이건 동창이 아니라 황제라도 마찬가지요! 제대로 대접을 해주시오!"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다. 아무리 동창이 득세하는 세상이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답을 제대로 하면 대접을 해주겠다. 첫 번째 질문이다. 너에게 금 불산으로 출병하라고 명령한 자가 누구냐?"

"무슨 말이오? 지방군의 출병은 도지휘사사의 고유권한이오. 급박한 상황에서는 처리 후 보고를 하도록 되어 있소!"

"쿡! 그럼 한가지 묻겠다. 금불산에 마교도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느냐?"

"소생도 운영하는 정보통이 있소이다. 그들을 통해 알아냈소이다. 이 곳 금불산에 5천의 마교도가 숨어있다는 정보를 얻었소이다."

"5천이라, 내가 듣기론 2천 정도라 했는데 너는 정보통이 대단한가 보구나. 그럼 마교도를 많이 잡았겠구나. 몇 명이나 잡았느냐?"

"그건…."
 "쯧! 대답을 못하는 걸 보니 마교도를 잡지 못한 모양이구나. 하기야 잡을 수가 없겠지. 금불산을 포위만 하고 있었으니…. 금불산으로 출병 을 지시한 사람은 누구였느냐?"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야혼의 몸에서 조금씩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 작하였다.

"이미 말하지…."

"오양, 저 새끼 오른 팔을 잘라!"

야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양의 도(刀)가 허공을 갈랐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강마산의 잘린 오른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 다.

"녀석 앞에 팔을 가져다 놔라!"

"알겠습니다. 어사대인!"

"어사대인?"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강마산은 해쓱한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현 황실에서 어사대인으로 불릴만한 사람은 자신이 알기엔 한 명밖에 없다. 잠룡어사대인, 황제와 동일한 권력을 지녔다는 그가 바로 앞에 있는 자였다.
일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 그의 귓전에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눈앞에 있는 팔을 잘 보아라.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 면 사지가 차례로 놓일 것이다. 딸린 식구가 많다고 알고 있다. 네 놈 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다시 묻겠다. 금불산으로 출병을 지시한 놈은 누구냐?"

하지만 강마산은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팔과 야혼을 번갈아 쳐다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른쪽 다리!"

"아-악!"

백광이 주변을 번쩍 밝히자 다시금 강마산의 비명소리가 후원을 뒤 덮었다.

"노래의 집으로 간다는 생각은 버려라. 이미 그곳은 수많은 명교인들 로 넘쳐나고 있다."

"헉!"

쓰러져 있던 강마산은 비명처럼 신음을 뱉었다. 노래의 집, 오직 명 교도만 알고 있는 말이다. 더구나 잠룡어사대인은 마교도라 하지 않고 명교도라 하였다.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목이다. 어차피 금불산에 있는 놈들은 명 교가 되었던 천의맹이 되었던 전부 죽는다. 누구냐 네 놈에게 출병을 사주했던 놈은."

"교주님이오. 그는 황실에서 야공(野公)이라 불렸소."

"주천상!"

야혼은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잊어버렸던 이름, 개봉에서 만났던 그가 명교 교주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재회(4)
 "킥킥! 재미있군. 정말 재밌어. 치료해줘라!"

실실거리며 웃던 야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심문할 필요가 없다. 주천상을 밝힌 강마산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남천 관아로부터 막대기처럼 생긴 길다란 무기를 둘러멘 인형이 빠 르게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금불산을 찾아가는 야혼이었다.

"미친 년. 세상에 공짜가 어딨다고, 내가 말했잖아. 뭔가 얻기 위해 선 한번씩 줘야 한다고. 바보 같은 년."

투덜거리며 욕설을 뱉어내던 야혼의 신형이 일순 빨래 줄처럼 전방 을 갈랐다. 금불산을 점령했던 군이 철수함과 동시에 선무전 무인들이 투입될 거라 하였다. 그날이 바로 오늘밤이었다.

 "궁주님, 천의맹 무인들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금불동, 초조한 얼굴로 오락가락 하는 여호치를 향해 다급한 얼굴의 화소미가 다가오며 말했다.

"방향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이곳을 포위한 채 올라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여호치는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지난 5일간 피할 곳을 찾기 위해 동 굴을 탐사했으나 2천 정도가 숨을 장소는 여태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 남은 곳은 금불동이 유일했고, 이곳마저 숨을 장소가 없다면, 그 뒤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글쎄요…."

화소미는 말끝을 흐렸다. 300명, 무공을 회복했다고 하지만 2천의 적 을 상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동굴에 숨어 암습을 가한다 하더라도 이틀이나 삼 일이면 전부 당할 게 분명했다.

"수호대(守護隊)를 집합시켜. 얼굴이라도 봐야지."

"알겠습니다, 궁주님."

잠시 후 금불동 아래 공터에 성모 수호대라 불리는 삼백 명 무인들 이 모여들었다.

"여러분!"

대부분 여인들로 구성된 성모 수호대를 보며 여호치는 나직하니 입 을 열었다. 개봉에서부터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 그들에게 희망찬 미래 를 열어주고 싶었는데.

"우린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 여기까지라 할지라 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기 때문입니 다. 어쩌면 이곳이 우리의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승의 마지 막일 뿐입니다. 먼저간 형제들이 기다리는 노래의 집이 있습니다. 그곳 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곳엔 고통이 없 습니다. 그곳엔 슬픔도 없습니다. 그곳엔 기쁨만 있습니다."

여호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많 명교도의 정신적 지주라 하였던 성모지만 지금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죽음은 행복한 것이라 말하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할 뿐이다.

"모두들 각자가 맡은 동굴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살아 남길 바랍니다. 여러분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마지막 말을 남긴 여호치는 성모 수호대를 한 명 한 명을 쳐다보더 니 산 아래로 길을 잡았다.
무극대라미륵신공을 일으킨 그녀의 몸에서 백색 광채가 사방으로 솟 구쳐 나왔다.

"성모님!"

300명 성모 수호대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통한의 눈물 을 흘렸다. 홀로 떠나는 성모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적진으로 들 어가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려 있는 평신도를,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부터 아 녀자들, 하나의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남아야 한다.

"서둘러라! 월향 너는 아이들을 데리고 금불동을 조사해라."

청빈사기를 향해 말을 남긴 화소미는 재빨리 여호치 뒤를 따랐다.

"궁주님!"

"화 총관 그들이 나 하나로 만족할까?"

얼마나 내려왔을까, 희미해진 풍취령 동굴을 돌아보며 여호치는 힘없 이 물었다.

"네 목이 구파 무인들보다 비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너는 마교 우두머리에 불과할 뿐이야."

"킥!"

전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여호치는 낮게 웃었다. 그였다. 이 길을 결정하면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 다. 그런데 그가 왔다. 3년이란 세월을 건너 그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 다.

"왔으면 얼굴을 보여야지. 숨어서 뭐 하는 거냐."

"원래 나는 숨어서 여자들 보는 걸 좋아하잖냐."

환한 미소와 함께 나무 뒤쪽에서 걸어나온 야혼은 여호치를 뚫어져 라 보았다. 과거보다 더욱 성숙된 모습을 제외하면 그녀의 얼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예뻐지면 뭐하냐, 아랫도리는 소식을 보내지 않는데."

"변한 게 없구나."

문득 개봉에서 생활했던 때를 떠올린 여호치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 다. 소매치기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일생을 통해 가장 행복했던 시절 이었다. 갈 수만 있다면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큰 색시는 더 커졌네. 그거 무겁지 않아?"

"훗! 무공이 강해지더니 옷 속까지 꿰뚫어 보는 모양이죠?"

화소미 또한 여호치와 다르지 않았다.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야 혼의 시선을 대하자 서문시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 죽음을 생각했냐 싶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한번 만져봐도 돼?"

"헉!"

불쑥 가슴 앞으로 다가오는 야혼의 손에 화들짝 놀란 화소미는 재빨 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줄 것 다 줘놓고 놀라긴. 앉아 봐."

"시간 없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앉아, 이 년아."

연신 아래쪽을 보는 여호치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지른 야혼은 그녀 손을 잡아 강제로 앉혔다.

"큰 색시는 뭐 하는 거야. 안 만질 테니까 이리 와서 앉아. 뒈질 때 뒈지더라도 그동안 밀린 이야기는 하고 가야할 것 아냐. 아직 반 시진 정도 시간은 있다."

"동생은 사람 정신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나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화소미는 야혼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겪어봐서 잘 알잖아. 나와 같이 잔 년들은 하나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몰라? 자 이제 말해봐. 동창 녀석들 말로는 죽호곡인가 하는 곳에 주천상이 있다고 하던데 맞아?"

"어떻게…."

일순 여호치와 화소미는 놀란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야혼이 마도련 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주천상에 대해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그는 동창 녀석들이라 하 였다.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셔."

"맞아. 그곳에 유일한 생로가 있다고 선무전 무인들을 유인해 오라고 했어.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온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야혼에게 물었다. 야혼이 마도련을 접수했다는 사실을 끝으로 그에 대한 소식이 끊어졌다.
구파와 전쟁을 치르느라 야혼의 소식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말이다, 호치 네가 여기서 며칠이고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 까?"

"우린 그들을 막아낼 실력이 없어. 무인도 300명밖에 없고, 더구나 일류도 아니고."

그 또한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성모 수호대 개개인의 실력은 선무전 무인들을 막아낼 정도가 되지 않았다.
여호치가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그들을 구해보려 했던 이유가 거 기에 있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막는다."

"네가 무슨 수로…."

야혼을 빤히 쳐다보던 여호치는 경악한 얼굴을 했다. 야혼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지금껏 그는 무공을 숨기고 있었다. 무극대라미륵신공을 대성한 자신 을 속일 정도로 엄청난 내력이었다.
구약종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한 놈씩만 다가온다면 2천명이 아니라 2만 명이 몰려와도 전부 없 앨 수 있다. 정력이나 무공에서는 나보다 강한 놈은 무림에 없다고 보 면 된다."

  재회(5)
 "그렇겠구나."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혼이 야차혈마지체를 타고났다는 사 실은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그럼 나는 살았네?"

문득 희망찬 얼굴로 야혼을 보며 말했다. 구세주, 야혼은 간절히 바 라고 바랐던 아우라 마즈다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한번 줘!'

음흉한 얼굴로 말하는 야혼을 보던 여호치는 내심 말했다. 야혼이 저 표정을 지을 때 나올법한 소리는 한 가지밖에 없다.

"내가 구할 사람 수만큼 줘! 풍취령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앞으로 구할 명교인들을 합친 만큼."

"컥!"

여호치와 화소미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구할 사람 수만큼 달라니.
풍취령 동굴에 있는 인원만해도 2천명이다.
그런데 야혼은 그들 뿐 아니라 앞으로 구할 명교도 수를 이야기했다.

"명교를 구하려면 나로선 방법이 없네."

야혼을 똑바로 쳐다보던 여호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어쩌면 야 혼의 말을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광애성모지체의 몸을 보고도 이성을 잃지 않는 유일한 사람.
지금껏 성모가 혼인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만일 혼인을 하 게 된다면 그가 남편감임에는 분명했다 "맞아 방법이 없어. 일단 계약이 성사 됐으니까, 계약금."

"야-아!"

입술을 쭉 내미는 야혼을 보며 여호치는 어이없는 얼굴로 소리를 질 렀다. 바로 곁에 화소미를 앉혀둔 채로 입을 맞춰달라니. 기가 막혀 말 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야혼은 요지부동, 더욱 황당한 말을 하고 있다.

"입술만 닿는 건 무효야. 완전하게 해야한다."

'궁주님 해 주세요. 저렇게 원하는데.'

여호치에게 전음을 보낸 화소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풍취령으로 몸을 날려 멀어져 갔다.

"너는 나쁜 놈이야!"

화소미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여호치는 야혼 의 입술을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입맞춤이란 게 쉽게 할 수 있 는 것이던가. 야혼의 얼굴을 향해 입술을 가져가던 여호치는 이내 멈추 고 말았다.

"못하…,학!"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빼는 순간 허리를 와락 틀어쥐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으읍!"

느닷없는 기습에 여호치는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바로 눈앞으로 길 다란 속눈썹이 급격하게 확대되어 다가오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더하여 입안으로 생전 처음 대하는 이물체가 불쑥 밀고 들어왔다.

'이건…?'

입안을 온통 헤집고 다니는 부드러운 물체는 사고를 정지시켜버리기 에 충분했다. 일순 머릿속이 아득해 지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 다.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올려 야혼의 목을 감쌌다.
심장 뛰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귓전을 강타했다. 감기려는 눈까풀을 애써 들어올려 앞을 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야혼의 모습이 보 였다.

'너는 나쁜 놈이야.'

웅얼거리듯 내심 중얼거린 여호치는 입안을 헤집고 다니는 그것을 이로 잡았다. 그리고 타는 목마른 사람처럼 그것을 힘차게 빨아 당겼 다. 한참을 그것에 몰두하고 있는 순간, 가슴팍에서 아릿한 아픔이 밀 려왔다. 허리춤에 머물러 있던 그의 손길이 어느새 옷깃을 파고들어 가 슴을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안 돼…. 아!'

가슴까지는 허락하고 싶지 않아 도리질을 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 러나 그의 손을 떼어내지 못했다. 자잘한 흉터로 가득한 그의 손등은 거북이 등처럼 거칠었다.
문득, 한겨울 주루 앞에서 통을 돌리던 야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의 모습이 너무 슬퍼 언제나 멀리서 지켜보곤 했다.
그때 야혼은 인생을 포기한 상태였다. 누군가에게 죽길 바라며 행인 들에게 끊임없이 시비를 걸었으리라.
야혼의 손등을 쓰다듬던 손을 들어 다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가슴을 더듬던 손길이 어느새 아래쪽으로 들어갔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아래쪽에서 선무전 무인들이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도 잊었다.
그의 손길을 느껴보기 위해 모든 감각을 집중했고 어느 순간 그의 손길이 가있는 아래쪽에서 뜨거운 기운이 확 끼쳐 올라왔다.
뇌리 속을 관통하는 엄청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야혼의 목을 사정 없이 끌어당겼다.

"억!"

"하-악! 나쁜 놈!"

나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입술이 풀리자 야혼의 가슴에 고개를 묻으 며 흐느끼듯 말했다.
아래를 더듬던 야혼의 손길이 점점 대담해지고 있었던 탓이었다.

"야혼…."

"아월이야. 마옥성에 있던 어머니와 누나는 아월이라 불렀어."

"하-아! 마옥성…. 아월."

두 번째 입맞춤, 마옥성과 아월이란 말은 제자리를 찾아오던 이성을 멀리 날려버리고 말았다. 슬픈 표정으로 아월이라 말하는 야혼을 향해 이번엔 자신이 입을 맞춰버린 것이었다.
또 다시 시작된 입맞춤. 조금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를 탐했다. 온 몸을 더듬고 다니는 그의 손길을 느껴보기 위해 애를 썼다.
그의 손이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들썩이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옥성, 그렇게 알기를 원했던 야혼의 과거였다.

"하-아! 그-그만."

급기야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났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여호치는 아래 쪽 깊숙이 들어가 있던 야혼의 손을 잡았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그에게 모든 걸 허락해 버릴 것만 같았다.

"참! 나에게 빼앗아간 그 책자 가지고 있어."

"버렸어 임마. 뭐 대단한 거라고 그걸 여태 가지고 있냐."

야혼의 손이 빠져나가자 내심 허전한 마음에 여호치는 야혼을 흘겼 다. 실은 야혼의 여인들이란 제목을 가진 책자는 아직 보관하고 있다.
야혼과 추억이 어린 유일한 물건이었기에 차마 버리지 못했던 것이 다.

"쩝! 그곳 첫 장에 무테 여호치라 적으려 했는데."

"무테? 그건 뭔 말이래?"

"그런 게 있다. 남자들의 비밀이니까 알려고 하지 마라. 그나저나 나 치료 된 것 같아."

"무슨 치료?"

의뭉스런 눈으로 야혼은 보던 여호치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야혼이 말한 무테라는 말을 대강 짐작했던 탓이었다.

"왜 십만대산에서 내가 그랬잖아. 호치 네 알몸을 봐도 반응이 안 온 다고. 그런데…."

퍼억!

"아이고 알이야. 거기는 때리지 말라고 했지. 한번만 더 때리면 호치 너 그곳이 무테라는 걸 소문내버린다고, 내가 분명히 그랬지."

"알아서 해 나쁜 놈아! 사내자식이 치사하게."

야혼을 향해 인상을 쓴 여호치는 풍취령을 향해 몸을 날려 버렸다.
살아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풍취령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어 느 때보다 가벼웠다.

"제길 시간만 좀더 있었어도…."

아쉬운 얼굴로 여호치의 엉덩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야혼은 이내 몸을 놀려 아래쪽을 째렸다.

"니들 다 죽었다 개자식들. 감히 내 정부가 될 여자를 넘봤다 이거 지."

 금을 넘으면 죽는다(1)
금을 넘으면 죽는다.

 조심스런 동작.
금불산을 오르는 선무전 무인들은 혹여 있을 지도 모르는 암습에 대 비하여 최대한 몸을 사렸다. 전방에서 조그마한 소리라도 들려오면 일 제히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조사하곤 하였다.
당연히 산을 오르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금불산 남쪽 능선을 타고 풍취령으로 올라가는 남색 도복을 걸친 무 인들은 청운자를 비롯한 무당파 도인들이었다.

"장문인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되지 않은가?"

청운자 곁으로 다가온 양의검선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금불산을 오른 지 1시진. 2천에 달하는 마교도가 숨어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껏 단 한번도 공격을 받지 않았다.
남천에 있을 때는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만 마교의 근거지라 하였던 곳이 금불산 아니던가.
내심 불안했다.

"아직도 병사들이 산을 통제하고 있을 거라 여긴 모양이지요."

"그럴 리가 있는가. 저들도 병사들을 주시하고 있었을 터인데."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병사들 대신 우리가 가고 있는데. 오늘 밤 우린 복수를 하게 될 겁니다. 본산 제자들의 복수를."

풍취령 쪽을 바라보며 청운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정운!'

'헉!'

귓전을 파고든 차가운 목소리에 청운자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다 급히 삼켰다. 더구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반말을 하다니.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조금 전 그 목 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라. 풍취령까지는 아무도 없다. 빠르게 진격하도 록 해라. 그리고, 풍취령에서 일이 끝나거든 죽호곡으로 이동해라! 그곳 에서 이번 일을 마무리짓겠다.'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내심 욕설을 뱉어내면서도 전음으로 정중하게 물었다. 인생사 새옹지 마라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를 초모랑마봉으로 보낸 사람은 자신이었 다. 그런데 그는 상전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진법사자라 불러라.'

"제길…."

전음을 보냈던 자의 기척이 사라지자 청운자는 나직한 욕설을 뱉어 냈다. 떠날 때 내려다보았던 그는 자신을 넘어서 까마득히 멀어져 있었 다. 그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서둘러라 매복한 마교놈들은 없다!"

암중에 나타났던 자에 대한 질투 때문인지 주먹을 불끈 틀어쥔 청운 자는 전방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외침소리가 신호탄이었을까, 다른 편에 있던 각 문파 장문인들 도 수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2천에 달하는 선무전 무인들은 무서운 속도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 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지만 주저하는 제자들은 없었다. 그들 또한 팽팽한 긴장감이 싫었던지 경공을 펼쳐 산을 오르라는 말이 떨어지기 가 무섭게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금불산을 오르던 선무전 무인들이 금불산 최 고봉인 풍취령에 도착한 시각은 그로부터 반 시진 후였다.
수많은 동굴로 이루어진 풍취령은 커다란 절벽이었다. 마치 병풍을 세워놓은 듯 30장 높이의 절벽에 무수한 동굴이 뚫려져 있다.
그리고 그 동굴들 앞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20여 장 폭의 공터가 자 리해 있었다.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올라온다 하더라도 풍취령을 오르기 위해서는 동굴 앞 공터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청운자를 비롯한 무당 도인을 필두로 천의맹을 출발했던 선무전 무 인들이 하나둘 풍취령에 도착했다.

"저 자는?"

풍취령 공터에 도착한 선무전 무인들은 드러난 광경에 일순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십여 개의 횃불이 밝혀진 동굴 앞에는 회색 무복을 걸 친 인물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명, 수천 마교도가 진을 치고 있다고 하였던 풍취령에 단 한 명이라니.

"나머지 마교도는 저 동굴 안에 있는 모양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 하면 이곳 금불산 동굴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다고 하였습 니다."

종남파 장문인 황철군이 다가오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 었다. 그 뒤로 청성파 문주인 태황검(太皇劒) 사일극(司一極)과 점창파 의 사일검제(斜日劒帝) 유만량(儒滿梁)이 따르고 있었다.

"마교도인가?"

전면 동굴 아래쪽을 쳐다보던 황철군은 내공이 잔뜩 실린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다. 풍취령에 마교도가 있을 거라 하였 고, 상대 또한 마교도 일행일 거라 확신했다.
다만 뭔가 구실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에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

"마교도는 죽호곡에 있다. 이곳에는 명교도밖에 없다. 마교도를 없애 고 싶으면 죽호곡으로 가라."

"죽호곡?"

청운자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조금 전 전음으로 받았던 명령 또한 죽호곡으로 가라고 하였던 탓이었다.

"내분이 일어난 것처럼 속이려 하였더냐?"

청운자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금불산에 오를 때부터 어떤 공격 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선무전 무인들을 죽호곡으로 유인하기 위한 미 끼에 불과할 뿐이었다. 적당히 싸우다 마지못해 밝혀야할 사실을 미리 말해 버렸다는 사실이 이상하기 했지만 마교도의 뜻대로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너의 마교도는 원래부터 그랬다. 겉으론 양민들을 위하는 것처럼 하 면서 텅 빈 문파를 공격하는 잔인 무도한 놈들이었다. 마교는, 박멸해 야 할 악(惡)이다."

청운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함께 선무전 무인들은 살기를 흘려대기 시작하였다. 본산에 남아 있다가 죽어간 사형제들이 얼마이던가.
그들 중에는 이제 무공에 입문한 제자들도 있었고, 무공을 익히지 않 았던 자들도 있었다.
그들을 몰살시킨 자들이 눈앞에 있다. 선무전주 말처럼 무공을 익혔 던 익히지 않았던 동굴 속에 있는 자들은 악(惡)일 뿐이다.
선무전 무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가 주변 대기를 잠식한 순간, 야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전면을 향해 차갑게 소리쳤다.

"너희들 앞에 길다란 금이 있다. 그 금을 넘어서는 놈은, 어른, 아이, 여자, 남자, 또는 늙은이를 막론하고 전부 죽는다. 지금부터 그 금을 저 승 갈 때 넘어야 하는 강인 삼도천이라 부르겠다."

목소리를 변조하고 천면만환공으로 얼굴을 바꾸었지만 야차혈마지체 에서 생성된 살기는, 선무전 무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엄청 났다.
그러나, 상대는 한 명. 결코 위험한 인물이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허허허! 사악한 마공을 익힌 놈답게 광오하구나. 감히 선무전 무인 들을 협박하다니."

기가 막힌 듯 황철군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절벽아래에서 들려온 야혼의 목소리를 들은 대부분의 선무전 무인들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협박인지 아닌지는 보면 안다, 황철군. 시험해 보고 싶은 놈은 앞으 로 나서라!"

 무심한 얼굴로 황철군을 노려보던 야혼은 오른 손바닥을 활짝 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가운데에서 다섯 개의 푸른 불꽃이 천천히 솟아나 왔다. 그동안 익히기만 했고,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마법불꽃이었다.

"흥! 건방진 놈, 그따위 화공정도로…."

황철군 곁에 있던 종남파 무인 한 명이 낮게 코웃음을 치며 바닥에 그어진 금을 넘었다.

"응?"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방으로 튀어나가는 부하의 행 동에 깜짝 놀랐던 황철군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종남파 장로 중 한 명인 폭쾌검(爆快劒) 장나수(張羅首)였던 탓이었 다. 종남파 대표 검법인 태을무형검법(太乙無形劒法)을 익힌 장나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종남파 고수다.

급한 성격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손해를 많이 보는 편이지만, 쾌검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정평이 나있다.
놈의 가슴에 장나수의 검이 틀어박힐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 생각은 돌진해 들어가는 장나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놈의 장심 에서 생성된 푸른 불꽃은 별반 위험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모름지기 내기에 의해 만들어진 불꽃은 위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백 색으로 변하고 멀리 떨어진 곳까지 힘을 발산하게 된다.
하지만 놈이 만든 불꽃은 아무런 기세도 풍기지 않고 있다.
결국 겉모습만 요란한 속 빈 강정이란 소리다.

"웃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던 장나수는 일순 의아한 얼굴을 했다. 거리 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음에도 놈은 태연한 얼굴로 웃고 있다.
일순 무엇인가 잘못되었나 싶어 다시 한번 푸른 불꽃을 보았다.

"놈!"

그러나 불꽃은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장나수 는 검병을 잡아챔과 동시에 전면을 향해 힘차게 뿌렸다.
그 순간, 장나수는 보았다.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크기를 줄인다 싶 더니 일순 꺼지듯 사라진 것을.
그리고 머릿속은 먹물을 뿌린 듯 깜깜해졌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 았다. 나아가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도, 이마 한가운데 서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흘러나온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털썩! 푸스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황철군 앞으로 떨어져 내린 장나수의 머리가 재 가되어 흩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들.
선무전 무인들의 얼굴이 그랬다. 특히 종남파 문주인 황철군은 벌어 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라 하더라도 100초 이상 겨뤄야 하는 고수가 장나수다. 그런 그가 단 1초만에 당할 줄이야.
더더욱 놀라운 일은 놈의 화공이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장나수 는 머리가 없는 시체로 변했다.
단순한 불꽃처럼 보였던 푸른 불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화 공이었던 것이다. 놈의 속임수였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고개를 들어 야혼을 보는 황철군의 귓전에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왔 다.

"어른 말을 듣지 않으면 그렇게 된단 말이다. 금을 넘지 말라고 했으 면 넘지 말아야지. 저승으로 가고 싶은 놈들은 금을 넘어라! 참! 조금 전 그 불꽃은 무영화라 부르기로 했다."

여전히 다섯 개의 불꽃을 머리맡에 세워둔 야혼은 차갑게 소리쳤다.

"죽일 놈!"

"무당에서 처리하는 게…."

장나수 시체를 가만히 쳐다보던 청운자는 말끝을 흐렸다. 묘한 분위 기를 풍기는 말이었다.
어찌 들으면 선무전 소속이니까 무당에서 처리하겠다는 말처럼 들리 기도 했고, 또 어떻게 들으면 너의 종남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니 무 당파가 하겠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당연 황철군이 받아들인 건 후자였다.

"무슨 소리요, 저 놈은 우리 종남파에서 처리할 것이오!"

문파의 자존심 문제였다. 수백 년 간 구파일방에 속해 있었지만, 소 림과 무당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도교와 불교를 숭상하였기에 두 문파가 세인들에게 후한 점수를 받 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칠영(七靈)은 나서라!"

잔뜩 붉어진 얼굴로 황철군은 뒤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존명!"

황철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칠 명이 전면으로 나섰다.
종남칠영(終南七靈), 개개인의 실력보다는 일곱 명이 하나가 되어 펼 치는 합공에 능한 자들로, 조금 전 죽었던 장나수보다 한 단계 아래 서 열이었다.
나직하니 소리친 종남칠영은 북두칠성 모양을 형성하며 야혼 곁으로 쇄도해들었다. 종남파가 자랑하는 검진 중의 하나인 칠성취회진(七星聚 會陣)이었다.

칠성취회진의 가장 강점은 내공이 강하지 않아도 엄청난 힘을 뿜어 낸다는 것이다. 지금 칠성취회진을 구성하고 있는 일곱 명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일인이 반 갑자 정도의 내공을 지닌 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능히 초극의 고수를 상대할 정도로 강했다.

"진(陣), 합(合)!"

국자 머리부분에서 움직이던 자가 고함을 지르자 나머지 일행들은 각자의 양손을 앞에 있는 동료의 명문혈에 밀착시켰다.

쉬이익!

일순 칠성취회진을 구성하고 있는 일곱 명 주위로 미약한 바람이 불 어 나온다 싶더니 푸른 광채가 솟구치기 시작하였다.
놀랍게도 그들은 움직이는 상태에서 공력을 전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움직인다는 잠영보(潛影步)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광경은 다음이었다.
국자 모양으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던 칠성취회진이 뱀이 똬리를 트 는 모양으로 둥글게 뭉치기 시작하더니 검 모양의 푸른 빛줄기를 뽑아 내는 것이었다.

대형인 일영(一影) 낭마(郎麻)의 검에서 뻗친 기운은 강기( 氣)였다.
적어도 2갑자 이상 무인들만 시전할 수 있다는 강기를 반 갑자의 공력 밖에 없는 낭마가 시전하고 있었다.

"무엇이 와도 상관없어. 네 놈들이 죽는다는 건 변하지 않아!"

야혼의 가슴에서 백색 광휘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오고 다섯 개에 불과했던 푸른 불꽃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가랏!"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야혼의 양손이 전방을 향해 휘둘러지고 손톱 크기로 변한 불꽃들이 종남칠영을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갔 다.

"태을분광(太乙分光)!"

낭마의 입에서도 거친 고함소리가 터졌다. 조금 전 사숙의 죽음을 목 격했기에 그 또한 전력을 다했다.
몸 안으로 유입된 사제들의 내공을 노도처럼 쏟아냈다. 그의 검에서 솟아 나온 십여 줄기의 광선은 칠성취회진 전면을 방패처럼 둥글게 감 쌌다.

파앙! 파바방!

"으음!"

강력한 폭음소리와 신음소리가 뒤섞인 가운데 칠성취회진 덩어리가 뒤로 밀렸다. 하지만 물러섬 또한 진식 운용의 한 방법, 1장 가량 물러 났던 종남칠영은 재차 잠영보를 펼치며 야혼 곁으로 다가들었다.

"만합(滿合)!"

낭마는 광포한 고함을 내질렀다. 한 번의 격돌로 칠성취회진을 구축 한 자신들이 손해를 보았다. 물러서되 피해가 없어야 하건만 막내사제 는 피를 토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는 생각에 전력을 다했다.
만합, 모든 공력을 전이하라는 명령이다.
일순 명문혈을 타고 엄청난 공력이 들어옴을 낭마는 느꼈다. 무엇인 가 꽉 찬 느낌에 낭마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했다. 몸 안에 들어찬 기운을 쏟아내기만 하면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여주겠다 놈!"

 금을 넘으면 죽는다(3)

야혼을 보며 진득한 살기를 쏟아내 푸른 광채를 쏟아내는 검을 번쩍 들어올렸다.
뒤이어, 떠나갈 듯한 고함소리가 풍취령 절벽을 타고 울렸다.

"태을만광(太乙滿光)!"

빛이었다. 구름 속에 가렸던 태양이 빛줄기를 쏟아내듯 낭마의 검에 서 푸른 색 길다란 빛줄기가 어둠을 갈랐다.

"변하지 않는다니까!"

심장어림에서 백색 광휘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양손에서는 무수한 불꽃들이 떨어져 내렸다.
아래를 향하던 불꽃들은 이내 손톱크기로 변했다. 악마의 눈처럼 새 파란 빛을 발하던 그것들은 낭마가 쏟아낸 푸른 광채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과앙! 콰과광!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보는 듯, 종남칠영과 야혼 사이에서 무수한 불 꽃이 터졌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불꽃은 중인들의 시야를 가리기에 충분했다.

쿵! 쿵쿵쿵!

엄청난 광채에 눈이 부셨을까. 칠성취회진을 구축했던 종남칠영의 신 형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이런…."

황철군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물러나는 것도 진식 운용의 한가지 라 하였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별다른 충격이 없었다면 발자국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

"저 놈이?"

제자들의 상태를 보기 위해 안력(眼力)을 세운 그의 시야에 오른 팔 을 사정없이 휘두르는 야혼의 모습이 보였다.

"미친 놈!"

그러나 이내 표정을 풀었다. 놈의 손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허초라 생각하고 제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일이 벌어졌다.

"크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선무전 무인들의 귓전을 강타했다.

"허억! 어떻게…."

제자들을 보던 황철군은 해쓱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종남칠영의 신형이 모래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아무런 기척도, 어떤 징후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손을 휘둘렀을 뿐인데, 제자들이 가루로 스러진 것이다.
황철군뿐만이 아니었다. 세 문파 문주를 비롯한 선무전 무인들은 목 전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방금 전까지 종남칠영이 서 있던 곳을 망연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우-!"

누군가 입에서 두려움에 질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나수와 종남칠영 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그들의 무공을 최고라 생각한 무인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상당한 고수로 인정한 그들이 아닌가.

"이러다 큰일나겠군.."

겁에 질려 동요하는 선무전 무인들을 보던 청운자는 곤란한 듯 인상 을 찌푸렸다.

"마교도답게 사공(邪功)을 연성했구나. 하지만 너는 혼자다. 혼자서 우리 선무전 공격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더냐?"

나직했지만 내공을 가득 실은 청운자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던 선 무전 무인들 귓전으로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맞아! 사공을 연성했다. 사공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더구나 놈은 혼 자다. 죽이자!"

청운자의 말을 받은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죽이자!"

"죽인다!"

뒤이어진 목소리는 주술이었다. 동요하던 선무전 무인들은 전보다 더 한 살기를 흘리며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무량수불! 안됩니다. 저 자가 비록 사공을 익혔다지만 우린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전주.'

군웅들을 막아서는 청운자를 향해 황철군은 힐난하듯 전음을 보냈다.
'저 자가 한 말을 잊으셨습니까. 적은 죽호곡에도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자들이 주력입니다.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선 시간을 끌어야 합니 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그들이 나올 거란 말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끄응!"

황철군은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청운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앞 에 있는 한 명보다 죽호곡에 숨어 있다는 그들을 목표로 작전을 수행 해야한다.
선무전이 출병한 이유가 그들 때문이지 눈앞의 한 명을 잡겠다고 나 온 것은 아니었다.

'알겠소이다. 저 놈은 우리 종남파에게 맡겨 주시오.'

청운자에게 전음을 보낸 황철군은 몸을 돌려 분노한 군웅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멈추시오!"

황철군의 고함소리에 한 걸음씩 나아가던 무인들은 저도 모르게 멈 춰 섰다.

"저 놈은 우리 종남파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없앨 것이오. 그러니 여 러분들은 뒤를 지켜주시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우리가 적의 암습에 대비하고 있겠습니다. 가십시다."

황철군에게 고개를 숙인 청운자는 점창파와 청성파 장문인과 함께 아래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종남파에서 처리한다고 하였으나 그들 또한 많은 희생이 날 것은 자 명하고 수하들에게 동료의 죽음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눈으로 보면 겁을 집어먹지만 귀로 듣게되면 분노하는 게 인간이지.'

청운자는 내심 중얼거렸다.. 화공을 펼치는 놈의 무공은 생각보다 강 했다.
종남파 무인들 중 1대1로 그를 물리칠 자는 없을 것이다. 결국 종남 파가 이기는 방법은 연환공격으로 녀석을 지치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는 결론을 내렸다.
그 와중에 죽어 가는 종남파 무인들은 선무전 무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게 될 것이고, 분노한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함정여하를 불문하고 죽호곡으로 달려갈 게 분명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바지. 이곳에서 살아갈 선무전 무인은 무당 을 제외하면 1할이 채 안될 것이다.'

어둠 속에 잠긴 금불산을 주시하며 청운자는 스산하게 웃었다.

 "씨팔! 지랄 염병들을 하는구나. 너희들이 가장 잘하는 짓이 떼거리 로 덤비는 것 아니냐. 명예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한꺼번에 덤벼 새 끼들아."

몸을 돌려 내려가는 선무전 무인들을 보며 야혼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도무지 놈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꺼번에 떼거지로 덤빌 때를 대비하여 여호치에게 농약 뿌릴 준비 까지 시켜두었는데, 목표로 삼았던 무당파 도인들은 산을 내려가 버리 고 있다.
그들이 내려가는 건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선무전 무인을 줄이겠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 내심 짜증이 치밀었다.
해서 도발을 해보았던 것인데.

"우릴 너희 마교도와 같은 악인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놈. 정당하게 싸워주마, 일대일 비무로 말이다."

"킬! 그러니까 연환공격으로 내 힘을 빼보겠다 이 말인갑네? 쯧쯧!
꼴값을 떨어라 자식아. 정력하면 내가 중원에서 최고다. 며칠 동안 해 도 끄덕 없단 말이다. 어디 한번 보내봐라. 저 금을 넘어선 보란 말이 다."

 "걱정하지 말거라, 지금부터 양껏 싸우게 해주마. 현천신궁(玄天神弓)
君)은 나서라!"

얼굴 가득 살소를 머금은 황철군은 나지막하니 고함을 질렀다.

"존명!"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이 굳은 얼굴로 나섰다. 현천신궁 갈대양, 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종남파에서 유일하게 궁(弓)을 익힌 인물로 진기를 화살로 이용하는 무영시(無影示)의 경지를 이룬 궁의 달인이라 하였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놈이 지칠 때까지.'

'알겠습니다, 문주님.'

전음으로 짤막하게 대답한 갈대양은 전면으로 몸을 날리며 시위를 먹였다. 갈대양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고 한 대의 화살이 야혼을 노리 며 빛살처럼 나아갔다.

"금을 넘으면 죽인다고 했잖아!"

신경질 적으로 야혼은 오른 손을 저었다. 파리를 잡듯 단순하게 휘두 른 동작이었지만 그 움직임에 따라 투명하게 변해버린 불꽃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는 자는 바보다 놈!"

가공할 기운이 빠르게 다가옴을 느낀 갈대양은 재빨리 내공을 끌어 올리며 지면을 찼다. 경공술, 무인들이 기본으로 익히는 무공이지만 갈 대양은 특히 경공술을 부단하게 연마했다.
궁의 특성상 접근전보다는 원거리 공격을 해야하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을 아래쪽으로 흘린 갈대양은 세 대의 화살을 뽑아 활에 걸었다.

하지만 갈대양이 보지 못한 게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은 하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시위를 먹이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는 순간 심장 어림에서 뜨거운 기운이 불쑥 밀려들었다.

"크으윽!"

화악!

나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갈대양의 신형이 불길에 휩싸였다.

"싸움을 할 때는 말이다, 상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 목숨 을 부지할 수 있단 말이다. 황철군 기다리고 있다. 빨리 다음 놈을 보 내라!"

"이-놈!"

야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종남파 제자 한 명이 천둥처럼 고함을 지르며 전면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 또한 전에 죽어간 자들과 마찬가지였다.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재가 되어 풍취령 바닥으로 뿌려졌다.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하였던가.
사숙과 사형들이 눈앞에서 죽어나가자 종남파 무인들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먼저 죽어간 동료 뒤를 이어 전방으 로 달려나갔다.

몇 번 검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재로 스러지고 있음에도 누구 한 명 망설이는 자가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건 오직 한가지였다. 사숙과 사형제를 해친 악적을 없애고 말겠다는 일념.
야혼이 그어놓은 금 위로 재가 쌓이기 시작했다.
간혹 불어온 바람이 재를 쓸어가지만 그것보다 새롭게 쌓이는 재가 더 많았다.

밤부터 쌓이기 시작한 재는 아침까지 계속하여 쌓였고, 태양이 대지 를 비추기 시작할 즈음에는 종남파 무인들 삼분지 일이 줄어 있었다.
백 오십 명, 하룻밤만에 죽어간 종남파 제자들의 수였다.

'정운! 뭐하고 있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죽호곡으로 진격해라. 그 리고 그곳에서 밤까지 버텨라.'

풍취령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던 정운에게 날카로운 전음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저 자를 없애지 못하면….'

'그럴 필요 없다. 풍취령 동굴에 있는 마교도는 300명 정도에 불과하 다.'

'그걸 왜 이제야….'

'그들을 없앤 여력으로 죽호곡으로 보내려 했었다. 그런데 그 한 놈 때문에 일이 틀어진 거다. 여긴 종남파에 무인들에게 맡겨라.'

'알겠습니다.'

"끄응!"

청운자는 나직하니 신음을 내뱉었다. 100년 전, 성모척살대 임무를 마치고 정운도장이란 이름과 함께 버렸던 정의감이 다시 돌아왔는지 밤새도록 고민했다.
선무전 수하들을 이끌고 풍취령으로 올라가 놈을 없애고 싶다는 생 각이 간절했다.
종남파 무인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을 떨어야 했다.
몇 번이고 일어서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진법사자가 되어 돌 아온 남천악의 전음 때문이었다.
자신이 선택하여 십만대산으로 보냈던 남천악은 상전이 되어 강호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정운도장이 아니다. 마옥성 소속의 청운자일 뿐이다.'

"선무전 무인들은 죽호곡으로 진격하라! 가서 마교놈들을 죽여라!"

떠오르는 상념을 털어 내기라도 하듯 청운자는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살기를 흘려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무전 무인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종남파 무인들의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뭣들 하느냐, 저곳은 종남파가 할 일이다. 우린 죽호곡에 숨어있는 마교도를 잡는다. 서둘러라!"

청운자의 고함이 재차 이어졌다. 남천악의 말처럼 간밤에 종남파 제 자들이 죽어가며 지른 비명소리로 인하여 선무전 무인들의 분노는 극 에 달했다.
그 분노를 표출할 계기만 만들어주면 동귀어진을 불사하고 싸울 것 이다. 그곳은 풍취령이 아닌 죽호곡이 되어야 한다.

'사 대협, 유 대협, 서두르시오. 지금 상황에서 종남파를 돕는다면 황 대협은 자결하고 말 것이오. 우리가 떠나주는 게 그를 돕는 거란 말입 니다.'

'알았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황철군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도움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다수도 아니고 단 한 명 아닌가.
수하들을 전부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종남파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청성파 무인들은 나를 따르라!"

"점창파 무인들은 나를 따르라!"

풍취령 쪽을 흘끔 쳐다본 사일극과 유만량은 고함을 지르며 죽호곡 으로 몸을 날렸다.

"마교도를 척살하자!"

어찌할 수 없는 분노로 살기만 흘리고 있던 두 문파 무인들은 기다 렸다는 듯 고함을 내지르며 문주들 뒤를 따랐다.
메뚜기 떼가 날아가듯 천 오백 선무전 무인들이 떠나고, 그들이 있던 곳으로 검은 야행복을 걸친 인물이 조용히 내려섰다.
검은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인물.
십만대산을 떠나온 남천악이었다.

  "놀랍군, 성천화(聖天火)가 나타나다니."

가렸던 안대를 슬쩍 들어 전면을 보며 남천악은 중얼거렸다. 잠사옹 이 남긴 글에서 보았던 내용.
명교 경전인 아베스타 안에는 어떤 마법보다 강한 두 가지 마법이 서술되어 있다고 하였다. 일명 성천화라 부르는 그 불은 눈에 보이지 도, 끌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풍취령 동굴 앞에 있는 자가 성천화를 이용하여 종남파 무인 을 없애고 있다.
처음엔 잘못 보았나 싶어 몇 번이고 확인했다. 마력으로 만들어내는 성천화가 분명했다. 성천화가 아니라면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교주가 등을 돌려서."

남천악이 청운자를 죽호곡으로 보낸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성천화를 얻은 자가 마교 교주와 힘을 합쳤다면 상대하기 쉽지가 않을 터이지만, 그가 거느린 명교 무인들은 기껏해야 300명이다.
우려할 만한 수치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네 놈과 여호치는 강호를 접수한 다음에 천천히 없애주마. 오늘은 네 놈보다 교주가 이끄는 마교와 선무전을 없애는 게 먼저다. 순서대로 하나씩 접수해 나갈 거다. 이 강호를."

다시 한번 위쪽을 힐끔 쳐다보던 남천악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지고, 그가 있던 자리엔 새벽바람만 남겨졌다.
야혼이 쏟아낸 무영화를 보며 놀란 사람은 또 있었다.
금불동에서 밖을 가슴을 졸이며 밖을 내다보고 있던 여호치였다.

"네가 예지자였구나. 네가 구원자였구나."

야혼의 뒷모습을 보며 여호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환희의 눈물 이 아니었다.
아베스타에 서술되어 있던 예지자에 대한 구절 때문이었다.

'그는 악의 소굴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에게는 빛과 어둠이 주어질 것이다. 그는 명교도에 의해 버림받을 것이다. 그에겐 생사를 주관할 힘이 주어질 것이다.'

막연하게 쓰여진 글귀, 하지만 한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있었 다. 광명도, 야혼의 등에 메어진 막대처럼 생긴 길다란 물건은 아베스 타에 그려져 있던 광명도였다.
그가 할 짓이 그것밖에 없다며 목숨처럼 갈았던 검은 도(刀)는 어둠 을 상징하는 지옥도였다.
그리고, 야혼은 마옥성(魔獄城)에서 태어났다 하였다. 명교의 정신적 지주인 성모에게 버림받았다.

"궁주님!"

"화 총관, 저 녀석이 구원자라는 게 말이 돼? 여자만 밝히고, 정력만 생각하는 개차반이 우리 명교를 구원해줄 예지자라는 게 말이야."

"당연히 말이 안되지요. 어떻게 이 세상에 구법(九法)을 알고 있는 예지자가 어디 있습니까?"

화소미 또한 여호치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다. 설마 개차반 야혼이 명 교 구세주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여호치의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구법(九法)이 뭐지?"

"구법요?"

"금방 구법이라 했잖아."

"처녀가 별 것 다 묻네요. 구법은 남녀가 관계를 가질 때…."

야혼이 예지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지 한결 여유를 되찾은 화소 미는 짓궂은 미소를 짓더니 구법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니까 화 총관과 저 개차반 녀석이 그 구법인가 하는 걸로 내기 를 했다 이 말이야? 좋았어?"

"궁주님, 그 말은 3년 전에도 물었어요."

"그랬어? 저기 말이야, 그 구법이 나온 책 구할 수 있을까…."

"배우시게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이 년아. 그런 책은 나에게 넘치도록 많으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부 하들이나 풀어!'

"헥!"

느닷없이 들려온 전음에 화들짝 놀란 여호치는 얼굴을 붉히며 야혼 을 보았다. 그의 주변은 온통 푸른 불꽃으로 가득했다.

"힘이 딸리는 가보네?"

간밤에 비해 위력이 약해진 듯 불꽃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럼 밤새도록 해 댔는데 아직 할 힘이 남아 있으면 그게 사람이냐 물개지.'

그랬다. 불꽃을 만드는 공격은 마력만 소모하는 게 아니었다. 마력보 다는 집중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게 문제였다.
투명했던 불꽃은 어느새 푸른색으로 변했고, 아침나절부터는 붉은 빛 을 간간이 뿌리기 시작했다.
약해진 야혼의 모습을 알아차린 사람은 여호치만이 아니었다. 제자들 이 죽어 가는 모습을 밤새도록 지켜보던 황철군, 그도 야혼의 상태를 알아본 것이었다.

"놈! 이젠 끝이다. 네 놈을 시작으로 동굴 속에 있는 마교도 전부를 갈가리 찢어 줄 테다."

조금 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동굴을 힐끗 쳐다보며 황철군은 이를 갈았다. 강자, 수십 년 강호 생활 중 처음 겪는 강자였다.
다른 문파 무인들이 있을 땐 자존심 때문에 합공을 하지 못했고, 나 중엔 놈의 무공 때문에 합공을 하지 못했다.
결국 놈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분루를 삼키며 제자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서 힘들어하는 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 끔씩 이었지만 비틀거리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놈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력이 다했다는 의미이리라.

"시대를 잘 타고났더라면 너는 천하제일인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놈이 지쳤다. 한꺼번에 쳐라!"

천하제일인, 야혼에 대한 황철군의 솔직한 평가였다.

"와-아! 죽여라!"

기다렸다는 듯, 천둥 같은 함성을 지르며 종남파 무인들은 동굴을 향 해 몸을 날렸다. 이 세상에게 가장 힘든 일은 사형제의 죽음을 지켜보 는 것이리라.
복수하고 말리라 맹세했던 시간이었다. 나가면 죽는다는 두려움에 떨 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복수를 하느냐 아니면 삶을 택하느냐, 그 두 가지로 밤새도록 번민했 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동료를 살해했던 놈에게 칼을 휘두를 수 있고 네놈을 죽이겠노라고 고함을 지를 수 있다.
종남파 무인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떠오른 감정. 그것은 밤새도록 갈 았던 살기였다.
이른바, 군중심리라는 것이었다.

놈을 향해 다가가면 분명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고 있다. 그러나 이번엔 혼자가 아니다. 사형제들과 같이 가고 있다.
어느새 종남파 무인들의 머릿속에서는 죽음이란 말이 사라져 버렸다.

"기다렸다!"

전면을 새카맣게 뒤덮고 다가오는 종남파 무인들을 보며 야혼은 진 한 살소를 머금었다. 기다렸던 순간.
일순 야혼의 몸에서 백색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오고 그의 신 형은 전면 공간을 갈랐다. 40여 개의 달하는 불꽃이 야혼의 몸 주변으 로 자리하는 순간 야혼은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슈아악! 끼이익!

거북한 소성과 함께 야혼의 양팔에서 붉은 혈광이 터져 나오고 뒤이 어 몸 주변을 배회하던 불꽃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마안혈정이 내는 소리는 귀곡성이었다. 스친다는 표현이 무색할 지 경,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붉은 광채는 종남파 무인들의 몸을 난자하듯 관통했다.

"크아악! 아악!"

"커어억!"

아비규환 지옥도, 재로 흩어졌던 지난밤과는 달리 이번에는 사방 곳 곳에 붉은 피가 휘날렸다. 목에서 피를 쏟아내는 자, 심장에서 피를 쏟 아내는 자, 복부에서 피를 쏟아내는 자, 마안혈정에 당한 종남파 무인 들은 폭포처럼 피를 쏟아내며 몸을 뉘였다.
그리고, 그 핏물 위로 메케한 냄새를 동반한 재가 쌓였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주변을 둘러보며 황철군은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제자들은 무인이 아니었다. 썩은 집단이라 할지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터였다.
단 일수, 단 한번의 손짓에 50여 명이 일거에 목숨을 잃었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밤새도록 무공을 펼쳤던 자이고,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고 여겼다.
그랬었는데.

"황철군, 돌아가라. 나머지 부하들이라도 구하고 싶으면."

"이-익!"

황철군은 주변을 보았다. 망연한 얼굴로 놈을 보고 있는 문도들. 밤 새도록 갈고 또 갈았던 살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시체들 속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 실에 안도하는 평범한 양민들만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무인은 더 이상 무인이 아니다.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무심한 눈으로 막대기처럼 길다란 무기를 풀러내고 있다. 그는 아직 본인의 진신무공을 펼치지 않았다는 의미다.
하지만, 200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잃고 무슨 명목으로 돌아간단 말인 가. 그들의 복수는 또 어떻게 하고.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던 황철군은 힘없는 목소리가 말하고 말았다.

"돌아…간다."

풍취령 동굴에서 하나둘씩 내려서는 자들을 보았다. 지금껏 숨어있던 마교도들로 그들 또한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있나?"

"천마이세(天魔二世)!"

"허억!"

천마이세란 짤막한 대답에 황철군을 비롯한 종남파 무인들은 헛바람 을 들이켰다. 천마(天魔), 영원한 마의 대 조종이자 고금제일인. 까마득 한 시절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칼을 쥔 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의 후예가 나타난 것이다.

"그럼 그 무기가 천마묵장(天魔墨杖)?"

"그렇다 황철군, 가서 감연청에게 전해라. 나를 따르는 이들만 명교 도다. 지금 죽호곡에 있는 자들에 대해선 너희들이 어떻게 해도 상관하 지 않겠다. 단 이곳에 있는 우리는 건들지 말라고 해라. 그렇지 않으 면…."

속삭이듯 말한 야혼은 천마묵장이라 불리는 광명도를 들어 뒷면 절 벽을 가리켰다.
일순 천마묵장에서 쏟아져 나온 백색 광채가 부챗살처럼 퍼지며 절 벽 한 면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스스스!

황철군은 두 눈을 비볐다. 무려 10장에 달하는 절벽 면이 유리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것은, 말로만 듣던 심검(心劒)이었다.

"가자!"

제자들을 향해 낮게 소리치며 황철군은 몸을 날렸다.
심검의 경지에 올라있는 자를 향해 검을 들이댈 자신이 없었다. 그 혼자만으로도 벅차거늘 300명에 달하는 명교도들까지.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떠나는 그의 귓전에 천마이세라 하였던 자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 다.

"종남산으로 떠나라. 그곳에서 종남파를 다시 세워라. 그게 네가 할 일이다."

"빌어먹을…. 후퇴한다!"

"우엑!"

황철군을 비롯한 종남파 무인들이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야혼은 피를 토해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수많은 정력제를 처먹고, 광명제세보주까지 삼켰지만 종남파는 구파 일방의 한 곳,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을 보내기 위해 펼쳤던 마지막 1초는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야혼!"

피를 토하며 주저앉은 야혼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여호치가 몸을 날 려 다가왔다.

"괜찮아?"

"제기랄…. 하룻밤도 못하다니, 그동안 약해졌어. 보약을 먹던지 해야 지, 이래가지고. 좋은 의원 아는 곳 없어?"

"훗! 살만한 모양이구나. 우리 명교에도 좋은 의원 있다."

안도의 숨을 내쉰 여호치와 화소미는 야혼을 부축하여 동굴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았다.
성모궁에서 살아 남은 이야기도 듣고 싶었고, 무공을 익히게 된 경위 도 알고 싶었고, 광명도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아니 지난 3년 간의 그의 행적에 대해 모두 알고 싶었다.

"내 말이 맞았어. 큰 색시 가슴은 더 커진 게 맞아."

"야혼!"

왼손 팔꿈치로 화소미의 가슴을 불쑥 건들며 말하는 야혼의 모습에 여호치는 황당한 얼굴로 낮게 말했다.
명교도들은 화소미를 총관이라 부른다. 성모 다음으로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 그녀다. 그런 그녀의 가슴을 들먹이며 희롱하다니.

"그런 소리 말아 이 년아. 나는 하오대문의 문주야, 그리고 큰 색시 는 당주고. 세월이 흘렀다고 화소미가 당주라는 건 변하지 않는단 말이 다. 어이 월향이, 난향이 내 말 맞지? 참! 육승하고 거패도 잘 있어."

"네?"

여호치 주변을 호위하고 있던 월향과 난향은 느닷없는 야혼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정력도 무지하게 세졌다. 아마 너희들은…."

"환자가 웬 말이 이렇게 많아. 그만…."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야혼의 말을 끊은 여호치는 금불동 안 쪽, 자신의 거처로 몸을 날려버렸다.

"어라? 너도 나처럼 집을 꾸몄네?"

동굴을 둘러보던 야혼은 놀란 얼굴로 여호치를 보았다. 작은 공간이 었지만 그녀의 거처는 천의맹 동굴에 만든 자신의 거처와 비슷한 구조 였다. 동굴 벽을 파고 그곳에 두 개의 방을 비롯하여 주방까지 만들어 져 있었다.

"저 쪽 방은 큰 색시 방인가?"

"응!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

"그러게 여자는 시집을 가야한다고 했잖아. 여름이야 밤이 짧아 문제 없지만 기나긴 겨울밤은 견디기 힘들거든. 뭐해? 이쪽으로 오지 않고."
머뭇거리는 화소미를 부른 야혼은 두 사람에게 지난 삼 년 간 세월 을 풀어놓았다.

여호치와 화소미는 눈을 반짝이며 야혼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의 이야기에 웃고 울었다. 마옥성 이야기가 나올 때는 눈물을 훔치 며 울었고, 기연을 얻는 장면에서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있잖아, 그때 너희 두 년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지금 이 야혼이 없었을 거라 이 말이야. 남천악 그놈의 장(掌)을 맞고 끝을 알 수 없는 동굴에 떨어졌을 땐, 정말 죽고 싶더라. 무공이 있길 하나. 먹을 게 있 길 하나. 개봉 서문시전 개차반의 목숨이 드디어 끝나는 가 싶었지."

"미안하다고 했잖아."

"우리가 잘못했어요, 동생. 그러니 그만…."

여호치와 화소미는 울먹이며 말했다. 방금 야혼이 했던 말을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른다. 그가 얻은 모든 기연은 자신들이 그를 버렸기 때문이 라 했다.
버림을 당하지 않았다면 지옥도법을 얻지 못했을 거라 했다. 버림을 당하지 않았다면 광명도를 얻지 못했을 거라 했다. 버림을 당하지 않았 다면 잠룡어사대인이 되지 못했을 거라 했다.

"옛날 이야기 하는 건데 왜들 그러는 거야. 오히려 나는 너희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좌정인 그 새끼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 게 지옥도법을 익힐 수…."

"야혼 그만해! 그만 하란 말이야!"

결국 여호치와 화소미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천악과 좌정인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야혼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옛날 이야기라 하였지만, 그는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살았을 것이다.

"알았다. 그렇다고 울 것까지는 없잖아. 참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데 나 몸 좀 닦아 주라."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두 여인을 슬쩍 쳐다보던 야혼은 이내 옷을 훌훌 벗어 던지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여호치의 '미안해'란 말과 함께 두 여인의 입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오 기 시작했다.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야혼의 등.
흉터로 가득한 그의 등을 처음 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가 마옥성 출신이었단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단지 싸움질을 많이 해서 생긴 흉터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마옥성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내 누이와 어머니는 나를 아월이라 불렀어. 여자이름 같지. 뭐해 등 좀 밀어달라니까."

울면서 여호치와 화소미는 야혼의 등을 닦았다. 이미 흉터로 변해버 린 그곳은 혹여 다시 터지기라도 하듯 조심 또 조심했다.
그리고, 그가 겪었던 아픔이 자신들의 가슴속에 자리함을 느꼈다.
그것은 늪이 되었다.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늪이.

"참! 청해로 가. 마도련에 가면 빈집이 널렸어. 그곳에서 당분간 지낸 다음 정착할 곳을 알아보자."

 빚 받는 데는 내가 선수야!

 청죽(靑竹)이라 불리는 푸른 대나무와 주호(酒壺)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죽호곡이라 하였던가.
대나무 숲이 바다 같다고 하여 죽해(竹海)라 부르기도 하는 죽호곡 은 인간들이 벌이는 쟁투로 인하여 때아닌 몸살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고고한 듯 아련한 향기를 풍기던 대나무들은 쏟아지는 피를 머금은 혈죽(血竹)으로 변했고, 늘어진 가지에는 찢긴 육편들이 빨래처 럼 널렸다.
지옥(地獄). 지금 죽호곡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이었다.

"자세를 낮춰라! 진세(陣勢)를 구축하라!"

점창파 문주인 사일검제(斜日劒帝) 유만량(儒滿梁)은 일그러진 얼굴 로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풍취령을 떠난 일행은 아침나절에 죽호곡에 도착했다. 세 문파 병력 을 합치면 1천 5백 명. 강호 최고라 할 수는 없지만 감히 상대할 자들 이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해서 자신 있게 문도들을 대동하고 죽호곡으로 들어섰다.

죽호곡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일행을 반긴 것 5장 높이의 대 나무들이었다. 팔뚝보다 더 두꺼운 대나무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대숲의 방대함에 놀라 경공을 펼쳐 대나무 끝으로 올라간 유만량은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제야 죽호곡이란 말이 실감났다. 좌우 폭은 200장이나 되었고, 계 곡 끝까지는 5리나 되어 보였다.

죽해라 불렸던 이유를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문득 엄습한 불안감에 청운자와 청성파 장문인 사일극을 보았다.
내키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청운자와 사일극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떠나올 때 감연청의 당부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승전보와 함께 돌 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 사람의 의견에 유만량도 동의했다. 천의맹이 창설된 지 상당 기간 지났고, 마교와 전쟁을 치렀지만 단 한번의 승리를 일궈내지 못했 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 출병한 선 무전은 명실공히 천의맹 최정예. 다른 이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던지 자 신들은 분명 그렇게 여기고 있다.
선무전이 빠지면 천의맹의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는 자부심으로 살 아온 자신들이 아니었던가.
그랬던 자신들이 마교도를 피해 도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무전 마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간다면 천의맹 창설 의의가 사라지게 된다.
무리를 하더라도 죽호곡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선 선무전 무인들은 세력을 세 패로 나눴다. 한가운데는 무당파가, 우측은 청성파 그리고 좌측은 점창파가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명예와 전통 그리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처 참했다.
가장 먼저 일행을 덮친 것은 군(軍)에서 흔히 쓰였다는 철질려(鐵  藜)였다. 철질려는 삼각형 모양의 각 모서리에 날카로운 날을 박아 넣 어 바닥에 뿌리는 암기형태의 무기로, 쫓아오는 적의 걸음을 늦추기 위 해 사용되어 진다.

보통의 철질려는 발바닥에서 파고들어 상처만 입히지만 날에 극독을 발라두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걸음을 느리게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살상용 무기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런 철질려가 나뭇잎이 잔뜩 쌓인 바닥에 셀 수 없이 뿌려져 있었 다. 선두에서 진입하던 대부분의 문도들은 철질려에 당하고 말았다.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50여 명의 문도들이 이승을 떠난 것이다.
두 번째는 기습이었다. 철질려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점창 파 무인들을 향해 마교도는 기습을 감행해온 것이었다.
무기 또한 다양했다. 대나무 사이로 날아오는 비수가 있는가 하면 대 나무를 잘라 만든 죽창이 있었다.

"크-아악!"
"타핫!"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흠칫 놀란 유만량은 그곳을 향해 수중 의 검을 사정없이 뿌렸다. 일순 그의 검에서 솟아 나온 강기가 좌측을 강타했다. 사일검법(射日劒法)의 1초인 일수초현 초식이었다.

"커억!"

수십 그루의 대나무가 쓰러지고 그 사이로 나직한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푸른색 옷을 걸친 복면인 한 명이 가슴을 틀어쥐며 아래로 떨어 지고 있었다.

"환사무영술(幻邪無影術)?"

유만량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환사무영술, 과거 정마대전에 참여했 던 선배들로부터 무수히 들었던 무공.
심장 뛰는 소리마저 감추는 가공할 무공이라 하였고, 환사무영술에 당한 정사 무인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하였다.

"빌어먹을…. 놈들은 환사무영술을 익혔다. 가로막은 대나무는 전부 잘라라!"

낮게 욕설을 뱉어낸 유만량은 주변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진퇴양난 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철질려가 깔려 있는 바닥은 함 부로 디딜 수도 없고, 위쪽엔 환사무영술을 익힌 마교도가 은신해 있 다.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은 대나무를 잘라 그것들을 밟고 가는 수 밖에 없을 듯했다.

"타핫!"
"이야합!"

유만량의 말이 신호탄이었을까 이곳저곳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며 하 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던 대나무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50명의 부하들과 같이 전진하는 유만량도 마찬가지였다. 전면을 향해 사일검법을 펼치며 대나무들을 잘라냈다.

슈우욱! 쉬이익!

널따란 공터를 만들고 한숨 돌리는 순간, 사방에서 무수한 죽창들이 날아들었다.

"후예만궁! 반마만궁!"
"회풍불류!"
"항마불인!"

유만량을 비롯한 점창오노(點蒼五老)는 전면으로 한 발짝 나아가며 본인들의 절기를 쏟아냈다.
일순 유만량 일행이 있던 전면으로 번쩍 광채가 어리고 날아오던 죽 창들은 폭죽 터지듯 터졌다.

파악!

"피해라!"

대나무가 터짐과 동시에 백색 분말이 확 피어오르자 유만량은 고함 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50명 전부가 몸을 피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커억!"

대여섯 명의 문도들이 목을 감싸쥐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문주님…."
 처량한 얼굴로 유만량을 보며 손을 내밀던 점장 제자들의 몸이 이내 잠잠해졌다.

"으아아! 사양무광! 사양요요! 역만거궁!"

광포한 고함을 지른 유만량은 전면을 향해 무차별하게 검을 휘둘렀 다. 푸른색 광채를 뿌리던 그의 검에서 1장 가량 검강이 솟구쳐 나왔 고, 난자하듯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사일검법의 각 초식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길다란 공터가 만들어졌다.
유만량 곁에서 있던 점창오노가 가세하자 점창파 무인들의 전진속도 는 더욱 빨라졌다.

검강이 전면을 강타하여 대나무를 잘라내면 점창오노의 검과 장이 빈 공간을 갈랐다. 그리고 무수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환사무영술로 몸을 숨기고 있던 마교도들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공격할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그들은 피를 뿌렸다.
그런 현상은 비단 유만량이 있는 곳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점창파 무인들이 있던 좌측을 비롯하여 청성파가 있는 우측 그리고 무당파가 진입하는 가운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하늘에서 보았다면 대나무 숲이 사라지고 있음을 목 격했으리라.

그러나.
각자의 최고 무공을 펼쳐 죽호곡 대나무를 없애고 있는 선무전 무인 들은 지금 상황까지 예측하고 준비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 다.
 "어서 오노라! 구파여, 그대들에게 줄 선물은 아직 많이 남아있느니 라. 아니 선물은 아직 주지도 않았단 말이다."

죽호곡 끝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대숲을 보며 중얼거리는 인물. 300년 전에는 십전수라 불렸고, 지금은 명교 교주라 불리는 구약종이었다.

"불의 사제는 준비하라!"

죽호곡을 내려다보던 구약종은 낮게 말했다. 화공(火攻), 그가 선무전 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수백 년 간 대숲을 이룬 죽호곡 바닥에는 한자 높이의 마른 대나무 잎이 쌓여있다. 그 속에 사천에서 난다는 흑유를 흘러 넣었다.
계곡 중간부분 바닥을 채운 흑유는 죽호곡을 죽해가 아닌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존명!"

좌정인을 비롯한 아홉 명의 불의 사제는 낮게 소리치며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바로 그 시간, 죽호곡 입구에서도 안쪽으로 진입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형제들이여! 복수의 시간이 왔다. 저들을 죽여 먼저간 형제들을 넋 을 위로하라! 빙혼대(氷魂隊)는 전진하라!"

백의를 걸친 한 인물이 주변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빙혼대(氷魂隊), 지난 100년 간 구약종이 심혈을 기울려 키웠던 세력 의 일부다. 주로 마옥성으로 잡혀간 명교도의 후손으로 구성된 그들은 얼음처럼 차가운 심성을 지녔다고 하여 빙혼대라 부른다.
전부 500명으로 선무전 무인들을 없애기 위한 결사대였다.

"교주님! 부디 명교천하를 이루십시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듯, 구약종이 있는 죽호곡 끝을 향해 절을 올 린 빙혼대 무인들은 일제히 죽호곡 안으로 몸을 날렸다.
흑유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는 자신들 또한 살아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 다. 모질게 살아온 이유가 바로 복수에 있기 때문이었다.
빙혼대까지 합치면 죽호곡 안으로 들어간 명교인의 수도 1천 명에 달했다.
도합 3천명 무인들이 전쟁을 치러야 할 곳이 죽호곡이었다.

 "명교도는 몸을 은신하라!"

죽호곡 허리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자 구약종은 후면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명령에 따라 명교도들의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 했다.
일부는 죽호곡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고, 남아 있는 이들은 각각 풀 숲에 몸을 숨겼다.

"구파일방 중 세 곳이 오늘 사라진다. 천의맹 전력 삼 할이 불길 속 으로 사라진단 말이다."

하지만 구약종이 꿈에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다.
죽호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는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과 100여 장 떨어진 숲 속에서 한 인물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명교 교주라, 정체가 뭘까. 평범한 놈은 절대 아닌데…."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서있는 구약종을 바라보며 남천악은 중얼 거렸다. 100장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 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이기어검을 넘어선 초 강자란 의미였다.

"운이 좋구나 마교 교주. 성천화(聖天火)를 익힌 그놈만 아니라면 너 는 오늘 죽었을 터인데. 네 놈이 데려온 명교도만 제물로 받아갔겠다.
마옥성 출범 기념으로 말이다."

안대를 떼고 전면을 바라보던 남천악은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마교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어 교주를 살려주기로 했다.
마교가 두 세력으로 나눠져 있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너희들보다는 천의맹 접수가 먼저다. 그런 다음 마교를 없앨 것이 다. 강호 영웅으로 등장하면서."

검은 연기로 뒤덮여 가는 죽호곡을 주시하던 남천악의 신형도 스르 르 모습을 감췄다.
천의맹, 명교 그리고 마옥성. 강호 지배를 원하는 세력들이 총 출동 한 이곳은 금불산 죽호곡이었다.

한편.
죽호곡에서 100리 가량 떨어진 풍취령에서는 떠날 준비를 위해 바쁘 게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금불동 안으로 몸을 피했던 명교도들은 본래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 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2천에 달하는 대 인원. 간단한 짐밖 에 없다고 하지만 한두 시진에 끝날 일은 결코 아니었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유일하게 한가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야혼이었다.
아니 한가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야혼은 다른 일로 바빴다.

"출입구에 진(陣)을 설치하면 문제없다니까? 그리고 네 방은 안쪽으 로 꺾여서 만들어졌잖아. 다른 사람은 절대 볼 수 없다니까 그러네."

"제발, 야혼! 지금은 때가 아니잖아. 불안해하는 저들이 보이지도 않 아. 일단 저들을 보낸 다음에, 응?"

여호치는 애원했다. 지금 야혼은 그의 행동 철학인 '한번 줘!'를 외치 며 끈질기게 쫓아다니고 있다. 이유 또한 가관이었다.
거시기가 치료되었는지 확인을 해봐야 한다며 조금 전부터 쫓아다니 고 있는 것이었다.

죽호곡에서는 천의맹과 교주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터이고, 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관계를 갖자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해서 명교도를 보낸 다음이라는 핑계를 달았다. 명교도들은 이끌 사 람은 자신밖에 없고 그들과 같이 떠나야 하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뱉 어낸 말이었다.
그녀의 실수였다.

"저들을 보낸 다음에? 그럼 서둘러야겠구나. 이 새끼들은 왜 안 오는 거야."

확답을 들자마자 야혼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금불동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궁주님, 웬만하면 한번 주고 가십시오. 저렇게 몸이 달아 있는…."

"화 총관이 더 달아 있는 것 아냐! 그리고 지금 상황이 한번 할…."

저도 모르게 과거 서문시전에서 쓰던 말투가 튀어나오자 여호치는 급하게 입을 닫았다.
그런 여호치의 모습을 보며 화소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야혼 앞에 서만큼 그녀는 성모가 아니었다. 소매치기였던 옥면호리 여호치일 뿐이 었다.

"그게 글쎄 개차반이, 아니 야공자가…. 호칭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 르겠네."

"아무러면 어때, 아예 서방님이라 불러라."

"궁주님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요. 일단 동생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동생이 구한 명교도 수는 2천 명이고 앞으로도 계속해 서 구해올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1만 명은 넘을 텐데. 달 거리 하는 날을 뺀다 해도 1년이면 300번 10년이면 3000번, 30년 간 하 루도 쉬지 않고 줘야…."

"화 총관 너 죽을래!"

얼굴을 붉힌 여호치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화소미는 빙긋 웃을 뿐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줘놔야 한다 이 말입니다. 더구나 궁 주님은 성모 직책을 수행해야 하니 혼례도 올리지 못할 것 아닙니까.
또 개차반 동생은 부인이 한둘도 아니니까 매일 밤 궁주님을 찾아올 리도 없을 테고…."

"화 총관 넌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나쁜 년."

결국 목까지 벌겋게 붉어진 여호치는 찬바람을 날리며 거처를 나가 고 말았다.

"야, 나오지 말고 들어가서 준비하고 있어."

금불동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쾌활한 야혼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수백 명 인원을 데리고 야혼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누구…?"

"동창 애들인데, 청해성까지 명교도를 호위할거야. 짐은 버리고 몸만 나오라고 해."

"헤엑!"

여호치는 뜨악한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조금 전 야혼에게 들었던 내 용 중에 동창을 부하로 부린다는 말은 없었던 탓이었다.
"정착할 때까지만 내가 도와줄 거야. 그 이상은 나도 힘들어. 오양 뭐하나! 서둘러라. 해 떨어지기 전에 남천에 도착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어사대인!"

"잠룡어사대인!"

마침내 여호치는 넋을 잃었다. 명교에서도 파악한 정보였다. 이번 북 경 혈사와 함께 새롭게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한 인물. 그는 단지 잠룡 어사대인이란 이름으로만 불리고 있을 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바로 야혼이었다.

"호치야, 소미야 그러다 턱 떨어질라."

입을 턱 벌리며 있는 두 여인에게 싱긋 웃어 보인 야혼은 여호치의 팔을 붙들고 금불동 안으로 이끌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의 거처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팔이 들어올려 지고 겉옷이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다만 한가지, 이제부터 명교는 극악한 마교 취급을 당하지 않을 거란 사실만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수백 년 동안 바랐던 명교의 소망. 도교나 불교와 같이 포교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나는 명교인이란 말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게 되 었다. 서문시전 개차반이었던 야혼에 의해.

"학!"

문득 싸늘한 기운에 정신을 차린 여호치는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알 몸으로 서 있는 자신을 야혼은 넋 나간 듯 쳐다보고 있었다.

  "너-?"

재빨리 양손으로 아래쪽과 가슴을 가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야혼이 옷을 찢듯이 벗어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의 일이라 말릴 틈도 없었다.

"…!"

이젠 비명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입을 쩍 벌린 채 망연한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야혼의 알몸, 물론 처음은 아니다. 서문시전에서 그의 남성을 향해 칼을 휘둘렀던 자신이 아닌가.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의 알몸을 보자마자 심장이 폭발 적으로 뛰었고, 몸에 열이 이는 듯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온몸을 장식하고 있던 흉터는 등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가슴부터 시작하여 아랫배, 그리고 다리까지 그의 전신은 흉터로 도 배되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렸던 손을 내린 여호치는 야혼의 눈을 직시하며 그 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길게 나 있는 흉터를 천천히 쓸었다.
그가 말한 마옥성의 흔적이리라.

"너무 쉽게 넘어가면 재미가 없는데…."

여호치를 향해 빙그레 웃던 야혼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이 흉터…. 내가 치료할 수 있으면 좋겠다. 치료해 줄 수만 있다 면…."

급격하게 확대되어오는 야혼의 얼굴을 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여 기서 멈추라고 하면 그는 멈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 다. 그의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든 자들은 명교인이고, 자신은 그들을 다스리는 성모이기에.
아니 그보다는 그를 사랑하고 있기에.

"아월…."

서로의 입술이 닿기 전에 그녀가 내뱉은 말이었다. 더 이상 그 앞에 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손은 불씨였다. 그의 손길이 스치는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일었 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 앉아버릴 것만 같아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어느새 입술을 떠났는지 귓전에서 그의 뜨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해!"

뜨거운 입김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는 주술이었다. 등을 타고 흐르 던 그의 손길이 허리를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불쑥 찾아든 손길에 그녀는 나직한 비음을 뱉어 내고야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일순 여호치를 번쩍 안아든 야혼은 뒤쪽 돌 침상위로 그녀를 눕혔다.

"이제 다시는 방황하는 일이 없을 거야. 명교는 물론이고 호치 너 도."

뜨거운 눈으로 여호치를 보며 말했다. 명교가 둘러 나눠져서 다행이 다 싶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교주라는 놈과 함께 그녀마저도 단죄했 을 지도 모른다.

"아월 너도…."
"맞아, 나도!"

두 사람이 입술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세 번째 입맞춤,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하나의 혀가 들어왔다 나가면 다른 혀가 뒤따랐다.
두 사람의 손 또한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투박한 야혼의 손은 연 신 위아래로 그녀의 몸을 쓰다듬었고, 덩달아 그녀의 손길도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악!"

턱하니 입을 벌리며 비명을 내지른 여호치는 야혼을 등판을 사정없 이 꼬집었다. 지금껏 좋았던 기분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고통이 아래 쪽에서 밀려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야혼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아프단 말이야 이 나쁜 놈아!"

급기야 눈물마저 흘리며 애원했다. 남자와 관계가 이런 기분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좋았다고 했던 화소미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화 총관, 너 죽었어. 이런 걸 좋다고….아욱!"

화소미를 욕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나직한 비음을 질렀다. 느닷없이 아래쪽에서 짜릿한 느낌이 전해온 것이었다.
고통이 완전하게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느낌이 뇌 리를 찌르르 타고 울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 느낌을 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하-악!"

또 다시 다가오는 느낌, 이번엔 전보다 더 강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 로 강렬한 쾌감이 전신을 타고 오르는 듯했다.

"화 총관이 말한 게 이것?"

새로운 발견이었다. 야혼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며 조금 전 그 느낌 을 찾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거다!"

여호치는 환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아픔을 대신할 감각을 찾은 것이다. 그 감각에 몸을 맡기기 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야혼의 등을 꽉 틀어쥔 그녀의 입에서 어린아이의 웅얼거림 같은 소 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내가 미쳐! 성모가 맞기는 한 거야? 어떻게 처음부터…."

두 사람이 있는 동굴 밖, 화소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쫑알거렸다.
안에서 들려오는 비음은 분명 쾌락에 겨운 소리다.
방금 전까지 처녀였고 고통에 비명을 질렀던 그녀가 아닌가.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온갖 비음을 내지르고 있다니.

"내가 가르친걸 누굴 탓해. 그나저나 빨리 끝내기나 할 일이지. 다를 떠날 준비에 정신이 없는데. 제길…."

안에서 들려온 나직한 사내의 비음에 욕설을 뱉어낸 화소미는 서둘 러 자리를 떴다. 문득 가슴속에서 울컥하니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 던 탓이었다.

"후-우!"

금불동 밖으로 나온 그녀는 서늘한 바람에 열기를 식히며 깊은 한 숨을 몰아쉬었다.

"내 몫이라도 좀 떨어져야 할 텐데…. 도무지 저 개차반을 따라갈 인 간이 없으니."

그녀의 고민이었다. 많은 남자를 겪어보았지만 야혼만큼 출중한 실력 을 가진 이는 아직 보지 못했다.
야혼처럼 자신을 거처간 남자를 책자에 적는다면 가장 앞쪽에 적힐 이름은 당연 그였다. 머리는 아니지만 몸을 그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끝나려나…. 설마 밤을 세우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녀가 우려한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의 관계는 해가 지기 전 에 끝이 났다.

"그러니까 명교 교주란 자가 십전수 구약종이란 말이냐? 지금은 주 천상으로 살고 있고?"

깜짝 놀란 야혼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고함을 질렀다. 기절할 노릇이 었다. 십전수 구약종이 살아 있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주천상이 그였다는 사실은 정말 의외였다.

"그가 하오밀문을 멸문시켰어."

"씨팔! 좆같은 세상이구만. 300살이 넘은 새끼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어떻게 할거야?"

 "어떻게 하긴, 원래대로 만들어야지. 개자식이 이 야혼을 가지고 장 난쳤단 말인데…. 씨팔, 생각할수록 열 받네."

"그만해 녀석아. 어차피 만나게 될 텐데 그때 정리하면 되지. 아욱!

야혼을 따라 몸을 일으키던 여호치는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이라서 그래. 몇 번만 더 하면 그 느낌이 그리워질 거다."

"죽을래!"

"업혀, 이 년아. 그러게 내가 조금만 하자고 했잖아. 수만 번이나 남 았는데 하루아침에 그게 갚아지냐?"

"이런 나쁜 놈. 나를 못살게 군 사람이 누군데."

얼굴을 붉히며 여호치는 야혼의 어깨를 쳤다. 고통은 한번 밖에 없었 다. 그 다음부터는 그 느낌이 좋아 오히려 자신이 요구했다.
놀랍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찌되었던 호치 너는 한가지만 알아두면 된다."

"뭔데?"

"너도 선수 기질을 타고났다는 거다. 첫 경험부터 뿅가는 년은 네가 처음…. 으읍!"

"저기 화 총관 온단 말이야."

급하게 야혼의 입을 틀어먹은 여호치가 그의 귓전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나 화소미 또한 야혼과 같은 생각이란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저도 처음 보았습니다. 어떻게 처음부터 그런 광란의 소리를 지를 수 있는지, 다른 아이들의 접근을 막느라 혼쭐났습니다."

"화 총관 너까지!"

결국 여호치는 야혼의 등에 고개를 묻고 말았다.

"큰 색시 지금부터는 네가 업어."

화소미에게 여호치를 넘겨주며 야혼은 말했다.

"죽호곡으로 가려고?"

화소미의 등으로 업히며 여호치는 물었다.

"끝장내야할 놈들이 있거든."

"구약종?"

"아니 그놈은 좀더 살려 줄 거야. 어찌 되었던 하오밀문의 설립자 아 니냐. 나에겐 사조가 되는 사람이고."

"거짓말!"

야혼의 얼굴을 빤히 보며 여호치는 말했다. 하오밀문의 창시자란 이 유 때문에 살려주는 게 아니다. 혼란, 야혼이 원하는 것이고, 그 일을 해줄 사람이 구약종이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소리말고. 마도련에 가면 냉소소 말 잘 들어. 그녀가 너보 단 언니니까. 그리고 큰 색시 네가 제일 큰언니지? 애들 싸우면 전부 네 책임이니까 알아서 해."

"알았어…요."

큰언니라는 말에 화소미는 감격한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오양!"

의미심장한 얼굴로 화소미를 보던 야혼은 이내 고개를 돌려 오양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어사대인!"

"청해성까지 이들의 인솔을 네가 책임지고 해라.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는 그날로 아랫도리까지 동창 무인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

"존명. 신명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내시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야혼의 말에 화들짝 놀란 오양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고함을 질렀다.

"그럼 다음에 보자."

여호치와 화소미 두 사람의 어깨들 툭 친 야혼은 죽호곡을 향해 몸 을 날렸다.

 "궁주님!"

"왜?"

"좋았습니까?"

"모르겠어,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보십시오. 원래 처음 하고 나면 궁금한 것이 많은 법입니다."

"다른 게 아니고, 그거 큰 거야?"

"훗! 궁주님도 느꼈나 보네요?"

화소미는 나직하니 웃었다. 야혼과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 가장 놀란 점이 있다면 그의 절륜한 정력보다는 물건이었다.

"우리 화류계에서는 그걸 가리켜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뭐라고 부르는데?" 여호치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크다는 말보다는 말(馬) 또는 말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물(聖物)
이라고도 하고요."

"화 총관!"

"또 뭐가 궁금하십니까?"

"청해성까지 날 업고가."

"네-에? 궁주님 그건 하루면 괜찮아 집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요!"

화소미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어지는 여호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언니 노릇을 하려면 날 업고가. 안 그러면."

"끄응! 알았습니다. 업고 가겠습니다."

"야혼은 괜찮겠지?"

화소미의 어깨를 꽉 틀어쥐며 여호치는 죽호곡 방향으로 고개를 돌 렸다. 구약종이 준비했을 함정이 걱정되어 하는 말이었다.

"지옥에서도 살아 나온 분입니다."

화소미 또한 죽호곡 쪽을 보며 말했다. 그는 잡초였다. 누구의 도움 도 받지 않고 오직 혼자 힘으로 살아 남았다.
이 세상에 그를 해칠 존재는 없다는 게 그녀의 믿음이었다.

 화르륵!

펑! 퍼엉! 퓨-우!

어둠을 밀어내는 엄청난 불길이 죽호곡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죽호 곡을 가득 채운 검은 연기와 그 사이를 비집고 대나무 터지는 소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아니 죽호곡은 전쟁터가 분명했다.
메케한 연기가 가득한 곳에서 처절한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끊이질 않고 흘러나왔다.

"점창파 제자들은 대열을 정비하라!"
"멈추지 말고 전진하라!"

유만량과 사일극을 검은 연기로 가득한 전면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 다. 두 사람의 얼굴은 참혹했다.
아니 절망적이라 해야 했다. 구파일방의 일문으로 당당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화마(火魔) 때문이었다. 환사무영술을 익힌 마교 도들을 없애기 위해 정신 없이 무공을 펼쳤다.

대나무 숲을 없애며 빠르게 전진하였고, 이제는 되었다는 생각에 한 숨을 내쉬는 순간,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 다. 공기 속에 섞여 있는 그것은 기름 냄새였다.
후퇴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뒤쪽에서 불길이 올랐다.
그뿐만 아니었다. 불길이 오름과 동시에 적의 공격이 이어졌고, 부하 들은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대나무가 터지는 소리와 검은 연기는 적의 기척을 철저하게 숨겨 버렸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마교도를 격살하기 위한 전쟁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었다.
어느 순간 방향감각마저 잃고 말았다. 화마를 피하며 적을 쫓아 다녔 다. 얼마나 많은 적을 없앴는지 모른다.
내공이 바닥을 보일 정도로 무공을 펼쳤으나 여전히 죽호곡을 벗어 나지 못하고 있었다.
 퍼엉! 파앙!

"차앗!
"크-아악!"
"청운자(靑雲子)는 어디 있습니까?"

전면에서 달려드는 세 명의 적을 없앤 유만량은 사일극을 향해 고함 을 내질렀다. 우측에서 진입했던 청성파 무인들보다 무당파를 먼저 만 났어야 했다.

"모르겠소이다! 우리보다 먼저 나갔던지 아니면…!"

사일극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명의 제자들이 살아 남았는지 알 수가 없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고, 적은 은신술마저 익히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경험해보지 않은 제자들이 과연 버텨낼 지 그게 더 걱정이었다.

"서두릅시다. 한 명의 제자들이라 살려야 할 것 아닙니까."

재차 검을 틀어쥐며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두 사람의 전면을 막아서 는 자들이 있었다.

"너희들이 갈 곳은 한 곳밖에 없다."

검게 그을린 백색 장포를 입고 있는 좌정인과 불의사제들이었다.

"누구냐?"

상대의 기도가 범상치 않음을 느낀 유만량은 으르렁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명교에선 우릴 불의사제라 부른다."

"명교를 함부로 논하지 마라 좌정인. 네 놈들은 더 이상 명교도가 아 니다. 사악한 마교도일 뿐이다."

"누구냐?"

이번엔 좌정인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생각보다 깔끔한 상대의 옷 차림 때문이었다. 지금껏 죽호곡에 있었다면 저처럼 옷이 깨끗해서는 안 된다. 화공을 익힌 자신마저 검게 그을렸지 않은가.

"저 자는?"

놀란 사람은 좌정인뿐만이 아니었다. 사일극과 유만량 또한 놀란 얼 굴로 그를 보았다. 2천 선무전 무인들을 향해 당당하게 도전장을 던졌 던 자. 종남파에게 처리를 맡겼던 자가 멀쩡한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야혼이었다.

"네 놈들은 성모 직권으로 명교에서 제명 당했다."

사일극과 유만량을 향해 싱긋 미소를 남긴 야혼은 좌정인을 보며 나 지막이 말했다.

"쿡! 건방진 놈! 불의사제를 제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 우라 마즈다께서 우릴 선택했기 때문이다."

여호치가 보낸 자란 사실을 알았음인지 좌정인은 비릿한 조소를 머 금었다.

"미친 새끼들! 너희들은 명교 교도도 아냐. 그저 강한 놈에게 빌붙어 목숨을 구걸한 비열한 새끼들일 뿐이야. 불의사제? 개좆같은 소리하지 말아 썅놈의 새끼야! 네 놈이 따르는 그 자식이 누군지 알아? 바로 구 약종이다, 병신아. 명교를 마교로 만들었던 잠사옹의 끄나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놈!"

좌정인보다 먼저 몸을 날리며 고함을 지르는 자, 그는 이 사제인 염 화수라(炎火修羅) 광운소(廣雲笑)였다.
전면으로 나아가는 광운소의 양손이 불길에 휩싸이고 그곳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나왔다.

"웃긴 새끼들, 뭐 너희들이 있어야 명교가 있다고? 그 소린 지옥에 가서 해 개새끼들아. 너희들은 명교의 좀이야. 좀 벌레 말이다."

비릿한 얼굴로 소리를 지른 야혼의 신형이 일순 공간을 단축하며 광 운소를 향해 돌진했다.

"커억!"

일순 광운소는 다급한 경호성을 발했다. 놈이 바닥을 차는 것까지는 보았다. 그런데, 분명 눈앞에서 움직이는 녀석의 모습이 순식간에 코앞 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의 양손은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광운소의 귓전에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 들었다.

"침묵의 탑이 기억나려나 모르겠다. 그땐 네 놈들이 나를 죽이려 했 었지."

"네 놈은?"

우두둑!

광운소는 말을 맺지 못했다. 목을 틀어쥐고 있던 야혼의 양손이 압착 하듯 그의 목을 짜버렸기 때문이었다.

"놈! 열화수라폭(熱火修羅爆)!"
"타핫!"

좌정인 뒤쪽에 있던 두 명의 사제가 전면으로 나서며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고, 그와 동시에 광운소의 목을 압착했던 야혼의 오른손이 포물 선을 그렸다.

"사제들 물러서라!"

야혼의 장심에서 쏘아져 나간 불꽃을 감지한 좌정인은 다급한 얼굴 로 고함을 질렀다. 두 사람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한발 늦고 말았다.

"끄아악!"
"아악!"

야혼을 공격했던 두 사람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쥐어뜯었 다. 그곳으로부터 푸른 불꽃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불은 내 말만 듣는다. 내가 꺼지라고 해야 꺼지는 불꽃이란 말이 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타들어 갈 거다."

급기야 살갗마저 뜯어내는 두 사람을 보며 야혼은 진득한 살소를 흘 렸다.

"이제 좌정인 네 놈만 남았구나. 조금 전 그놈에게도 말했지만 나를 기억하려나 모르겠다. 침묵의 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럼? 그때 그놈이 바로?"

좌정인은 경악한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자. 단지 기억나는 거라곤 성모궁에 있던 영약을 한꺼번에 복용한 멍청 한 놈이었다는 사실뿐이다.

"맞아. 바로 나야. 네 놈에게 빚 받을 게 있어서 다시 돌아온 거야.
방금 뒈진 놈과 지금 죽고 있는 저놈들은 이자로 생각하면 돼. 네 놈은 말이다, 뼈마디를 하나씩 분질러 줄 거야."

"죽일 놈! 어디서 사공을 훔쳐 배운 모양이다만 나에겐 어림없다. 화 염뢰(火焰雷)!"

사공(邪功)이라며 애써 격하시켰지만 조금 전 사제들을 공격한 무공 은 결코 경시할 게 아니었다. 해서 좌정인은 1초부터 전력을 다했다.
불길이되 불이 아니었다. 푸른 뇌전 기운을 내포한 불꽃은 광폭한 기 세를 머금고 야혼을 향해 밀려갔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전면을 가득 채우 며 밀려가는 화염뢰의 기운을 향해 좌정인은 재차 양손을 무자비하게 뻗어냈다.

화염신장(火焰神掌) 2초와 3초인 화염풍(火焰風)과 화염폭(火焰爆)이 었다. 뇌전 바람, 그리고 폭풍으로 이루어진 불길은 이미 불바다로 변 한 주변을 재차 태웠다.
그러나 야혼은 빙긋 미소만 지을 뿐, 느긋한 얼굴로 좌정인의 장을 직시했다.

"이 야혼 앞에서 불을 피우다니. 네 놈이 만들 불은 그저 잔재주일 뿐이야 임마."

화악!

일순 야혼은 전신에서 뜨거운 기운이 흘렀다. 지금껏 조그맣게 만들 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던 그 불꽃을 전신에서 피워 올린 것이었다.

기묘한 광경.
반투명한 불꽃에 휩싸인 야혼의 모습은 불교 팔부신장의 하나인 가 루라 (迦樓羅)라를 연상시켰다.
한 걸음 내 디딜 때마다 야혼의 주변은 초토화되었다. 타다만 대나무 며 검게 그을린 낙엽들을 가루로 흩어지며 사방으로 날렸다.

"이럴 수가…. 성천화(聖天火)란 말이냐?"
해쓱한 얼굴로 좌정인은 부르짖었다. 인세에 존재하는 16가지 불을 합쳐 만든 불이 성화라 하였다. 그 성화를 정제한 불이 있으니 그걸 일 컬어 성천화라 했다.
성천화에는 어떤 불도 무용지물이다. 불의 제왕이고, 모든 불을 다스 린다.

"아우라 마즈다여!"

양팔을 활짝 펴며 다가오는 상대의 모습에 좌정인은 아우라 마즈다 를 찾고 말았다. 자신이 시전한 화염신장이 먼지처럼 스러지는 광경을 보았다. 단지 양팔을 벌리고 한발 내딛었을 뿐인데.

"네 놈은 아우라 마즈다를 찾아서는 안 된다, 좌정인. 거짓말의 집으 로 가게 될 거다. 그곳에서 영겁의 세월을 보내라."

나직하니 고함을 지른 야혼은 활짝 펴졌던 양손을 합장하듯 가운데 로 합쳤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좌정인의 신형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그의 몸은 조금씩 타들어 갔다.
가장 먼저 코가 가루로 변했고, 그 다음엔 눈썹이, 입술이, 점점 가늘 어지던 좌정인의 몸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넋을 잃어버린 사람들.

"저건 무공이 아니야. 인간의 몸으론 저런 무공을 펼칠 수 없다고."

유만량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뜨거운 열기에 비지땀이 흐르고 있음에도 인식하지 못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무공, 인간의 몸으로 펼쳤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는 무신(武神)이었다.

"헉!"

유만량은 놀람에 찬 신음을 뱉어냈다. 불의사제를 없앤 그가 이편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날 그를 공격했던 자신들이 아닌가.
그가 자신들을 죽이고자 한다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 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앞에서는 싸우고자 하는 투지조차 일지 않았다. 달려들면 바로 죽 을 거라는 두려움만 온몸을 잠식해 들었다.
점창파 제자로 그리고 문주로 살면서 단 한번도 죽음을 떠올려 본적 이 없었다.
다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늙어 죽는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놀란 모양이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까. 조무래기들을 찾아서 떠나라!"

"우릴 살려주는 거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유만량은 물었다.

"당연히 살려 줘야지. 너희들마저 없으면 무슨 재미로 내가 살겠느 냐. 종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다."

스르르 불꽃이 사그라지고 싱긋 미소짓는 야혼의 얼굴이 나타났다.

"고맙소이다."
"멈춰!"
"왜?"

몸을 날려 떠나려던 두 사람은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한가지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다. 여기에 청운자가 없는 이 유를 잘 생각해 봐라."

"알겠소이다. 오늘 은혜 잊지 않겠소."

야혼을 향해 포권을 취한 두 사람은, 혹시 살려주겠다고 하였던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전력의 경공을 펼쳐 물러났다.
그리고 야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 물러선 두 사람은 내공 을 실어 고함을 질렀다.

"청성과 점창 제자들은 후퇴하라! 죽호곡 입구 쪽으로 물러나라!"

"아직 다섯 놈이 더 남았다. 그 놈들은 이자다. 이자까지 받아야 부 채가 청산된단 말이다."

유만량과 사일극의 모습을 주시하던 야혼은, 광명도를 말았던 천을 풀었다.

"그리고 네 놈들은 덤이다."

일순 지면을 박찬 야혼은 순식간에 20여 장을 이동하며 광명도를 횡 으로 그었다.

"끄아악!"

백색 광채가 어둠을 밝히자 그곳으로부터 처절한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선무전 무인들을 없애기 위해 출병했던 빙혼대가 지르는 비 명소리였다.
검붉은 불길 속에서 또 다른 불길이 사방을 작렬했다.
남천악과 좌정인이 성천화(聖天火)라 불렀던 백색 투명한 불길은, 앞 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은 전부 재로 만들었다.

"죽호곡을 떠나지 않는 놈들은 전부 죽는다. 한 놈도 남김없이."

빛(光)을 나타낸다는 광명도(光明刀)를 들었지만 야혼은 지옥의 마신 (魔神)이었다.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을 천천히 걸었다.

"추워, 정말 추워 미치겠단 말이야!"

절규처럼, 야혼의 고함소리가 불길 속에서 울려 퍼졌다.

 십전수 구약종.

 외침소리는 죽호곡 안에서만 들려오는 게 아니었다.

"정멸대(正滅隊)와 복명대(復明隊)는 죽호곡 입구로 간다!"

유만량과 사일극이 퇴각 명령을 내리는 그 순간, 죽호곡이 내려다보 이는 산등성이에서도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울렸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구약종이었다.

처음 죽호곡 입구에 배치한 명교도는 500명이었다. 퇴각을 염려해서 가 아니라 죽호곡으로 들어가지 않고 낙오된 자들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금 전 죽호곡에서 들려온 외침은 천의맹 무인들이 전원 퇴 각을 알리는 소리였다.
이곳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불의사제들이 늦는군."

빠르게 몸을 날려 떠나가는 교도들을 보던 구약종은 죽호곡으로 시 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간 빙혼대는 그렇다 쳐 도 불의사제들은 벌써 나왔어야 했다.
더구나 천의맹 무인들은 퇴각하는 상황이 아닌가.
문득 일이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정은 완벽했다. 적어도 6할 이상은 저 속에서 죽었다."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구약종은 확신하듯 말했다. 죽호곡 안으로 들어온 무당파와 점창파 그리고 청성파 무인 1천5백 명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명교도의 수를 2천명으로 알고 왔다.
대등한 전력이라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승리가 간절히 필요한 그들이 아닌가.

"누구든 한 명은 나와야…."

답답한 마음에 중얼거리던 구약종의 얼굴이 일순 환해졌다. 멀리서 화염에 휩싸인 인물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광경이 목격되었던 것이 다. 화공(火攻)을 익힌 불의사제 중의 한 명이 분명했다.

"저건?"

반가운 마음에 한발 앞으로 나갔던 구약종은 일순 걸음을 멈췄다.
다가오는 자는 불의사제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화공을 운기하고 있 어 불꽃처럼 보였던 게 아니었다.
실제 그의 몸을 불타고 있었다.
입고 있던 의복은 이미 재가 되어 사라졌고, 살갗마저도 조금씩 떨어 져 나가고 있었다.

"교주님! 엄청난 적이…. 감당할 수 없는 적이 저 안에…."

"무슨 소리냐? 선무전 무인들 중 너희들에 필적할 무인이! 허억!"

불의사제를 향해 다급하게 묻던 구약종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인기척, 명교도가 은신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무수한 인기척이 감지 되었기 때문이었다.

"적이다!"

"공격하라!"

구약종과 남천악의 목소리가 동시에 밤하늘을 관통했다.
그리고.

찌이익! 찌익!
크아앙! 캬우우!
천 조각을 찢어내는 소리와 함께 광포한 짐승의 포효가 뒤를 이었다.

"으-아악! 괴물이다, 괴수가 출현했다!"

"설마….그가 나왔단 말인가! 그렇다 해도 어떻게 이곳을."

구약종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우려했던 일. 잠사옹의 출현을 항 상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잠사옹은 완전한 수인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세상에 나올 사람이 아니었다.
여섯 시진만 지나면 일반 양민처럼 변하는 그들이 아닌가.
그런 자들을 데리고 모험을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고, 아직은 충분 한 시간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가 이곳에 수인을 보낸 것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명교의 동태를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천의맹조차 알지 못했던 사실을.

"빌어먹을…. 교도들은 들어라. 수인들의 약점은 목이다. 합공하여 목 을 잘라내도록 하라!"

명교인들을 향해 무자비한 살수를 펼치는 수인들의 모습을 보던 구 약종은 다급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1장 크기에 달하는 괴수들은 명교도의 상대가 아니었다.
수인들이 긴 팔과 다리를 휘두를 때마다 명교도의 머리가, 몸통이, 그리고 사지가 찢겼다.
극악한 공포에 명교도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갔다.

"잠사옹! 이따위 짐승으로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여겼더냐!"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고함을 지른 구약종은 전면으로 몸을 날리며 명교도를 찢어발기고 있는 수인들을 향해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일순 그의 양손으로부터 붉은색 강기가 눈꽃처럼 쏟아져 나왔다.
혈향비도류(血香飛刀流)였다. 하지만 그가 펼치는 혈향비도류는 야혼 이 시전하는 것과는 달랐다. 야혼은 허리춤에 촘촘히 박힌 비도로 펼치 지만 구약종은 강기로 혈향비도류라는 비도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가 비도로 사용하는 무기는 내공으로 만든 검탄강기(劒彈 氣)였 다. 하지만 검탄강기가 전부가 아니었다.

전면으로 날아가는 그것들을 향해 슬쩍 손을 내젓자 일순 검탄강기 들이 수인들의 목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다.
심령으로 무기를 조정한다는 검술의 최고봉인 어검술(御劒術)이었다.
검탄강기를 만들고 그것들을 어검술로 조정하는 구약종, 겁천십웅의 일 인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크아악! 캬악!"

인간과 짐승의 소리가 뒤섞긴 기묘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일 수 에 열 마리의 수인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목을 잘라라! 수인들의 약점은 목이다!"

수인들이 가루로 흩어지는 모습을 목격한 누군가가 동료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다섯 명씩 조를 짜라. 강기를 다루는 자들은 다리를 잘라내라!"

순식간에 당한 기습이었지만 수인들의 약점을 파악한 명교도의 대응 은 신속했다.

"놀랍군. 명교 교주가 구약종이었다니."

전장으로부터 50여장 떨어진 곳에 있던 남천악은 수인 열 명을 한꺼 번에 없애버린 구약종을 보며 중얼거렸다.
잠사옹이 행적을 파악하지 못했던 유일한 인물.
변수로 생각하고 있는 구약종이 명교 교주로 나타난 것이다. 더욱 놀 라운 사실은 그를 따르는 명교도들이었다.
이곳에 남아있던 명교도는 5백 명, 그들을 덮친 수인의 수는 1천명에 달한다. 처음 기습을 당했을 때 수많은 명교도가 죽어갔음에도 불구하 고 그들을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고 있다.

"너희들은 한이라 부르겠지. 하지만 수인으로 변한 그들 또한 한을 곱씹으며 살아왔다.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너희들보다 더."

이내 남천악은 싱긋 웃었다. 수인 한 명과 두 명의 명교도가 동귀어 진을 하는 상황, 발악을 한다하더라도 이곳에 있는 명교도의 전멸은 정 해졌다.
물론 지금 있는 이들이 전부가 아니겠지만 구약종이 이끄는 명교에 막대한 타격을 줄 것이고 앞으로 자신의 행보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 다.

"구약종 수고하시오. 당신은 좀더 살려주기로 했소. 나는 죽호곡 입 구로 가볼 것이오. 그곳엔 2천 명의 수인을 보냈는데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서 말이오."

사방으로 강기를 날려 수인들을 격살하는 구약종을 물끄러미 주시하 던 남천악은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사사만화류(死死滿花流)!"

밤하늘에 불꽃 잔치가 벌어진 듯했다. 구약종의 양손이 둥글게 호선 을 그리자 일순 주변이 환해졌다.
사사만화류 또한 그는 암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내공으로 생성 해낸 강기를 이용하여 수인들을 공격하고 있다.
혈향비도류보다 더 많은 검탄강기가 생겨났다는 것과, 더 잔인한 무 공이란 사실을 제외하면 두 무공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18개에 달하는 구약종의 신형이 사방으로 움직이며 수인들을 격살하 고 다녔다.

무변무적퇴가 수인들의 몸을 수직으로 잘라내고, 공공십팔수가 수인 들의 목일 쳐낸다. 수많은 명교도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그와 비슷하게 수인들도 가루로 흩어지고 있었다.

"정말이었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수인들을 격살하고 다니는 구약종을 보며 나 지막이 중얼거리는 인물.
조금 전 죽호곡을 나온 야혼이었다.

  그곳에서 주워온 대나무 이파리를 질겅절겅 싶으며 구약종의 활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여호치에게 듣기는 했지만, 구약종이 살아 있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 할 줄은 몰랐다.
하오밀문의 설립자.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를 사조라 부르며 공대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하오밀문을 멸망시킨 자가 그이기 때문이다.

"씨팔! 저들은 전부가 명교도들인데…."

원수를 대하듯 서로를 죽이는 자들. 그들은 같은 신을 모셨고, 황실 의 핍박을 같이 견뎌냈던 형제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명교와 마옥성으로 갈려 서로를 향해 검과 도를 날리 고 있다.
누가, 무든 권리로 저들을 싸우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더욱 황당한 노릇은 저들의 싸움을 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 다. 그들의 한을 알기에, 자신 또한 저들과 같은 방법으로 한을 풀어내 고 있기에 말릴 수가 없다.

100여 년 동안 맺힌 한을 풀어낼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상대가 누구이건 그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명교와 마옥성과의 싸움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죽음으로 수인들 을 막아내고 있지만 숫적으로 밀리고 있는 명교가 점점 불리해지고 있 었다.

겁천십웅의 일인인 구약종이 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었고, 어느 순간 살아 있는 명교도는 30여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강기를 구사하는 무인이거나 강기의 초입에 이른 자들로 그들은 교 주인 구약종을 호위하는 자들이었다.

"크아앙!"

"캬우우!"

"타핫!"

"크아악!"

수인들의 울음소리, 명교도들의 비명소리, 수인들의 포효소리가 뒤섞 여 아비규환 참상을 더욱 암울하게 하였다.

"젠장…."

떼거지로 달려드는 수인들을 향해 사사만화류를 펼치며 구약종은 나 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벌써 몇 번에 걸쳐 같은 무공을 시전했는지 모 른다. 수십 번, 아니 수 백번을 펼친 것 같았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수인들, 1천이라는 숫자가 지금처 럼 많아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호위를 제외한 명교도는 이미 차디찬 시체가 되었다. 어차피 이용하 려던 자들이었기에 그들의 죽음에 대해선 별다른 감흥은 없다.
다만 지난 100년 간 힘들게 만들었던 노력에 비하여 너무나 쉽게 사 라지고 있어 그 점이 못내 안타까웠다.

"하지만 잠사옹의 거점 또한 한 곳이 사라지게 된다. 천의맹도 마찬 가지고."

그나마 구약종이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점이었다.
자신의 세력뿐만 아니라 천의맹과 마옥성이 한꺼번에 동귀어진을 하 고 있다.

"힘을 내라! 얼마 남지 않았다."

200여 마리까지 줄어든 수인들을 보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비록 수인 들이 강하긴 하지만 강기( 氣)를 구사하는 무인이라면 얼마든지 목을 잘라낼 수 있다.
다만 강기 경지에 오른 무인이 적다는 것일 뿐.
구약종의 생각 대로였다.
명교 일반 무인들과 싸울 때는 명교도 2명과 수인 한 마리의 목숨을 바꿨지만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수인 3마리와 명교도 한 명의 목숨을 교환하고 있다. 그들 곁에서 자 신이 조금만 힘을 쓰면 조만간 수인들을 몰살시킬 수 있을 듯 싶었다.
하지만 조만간 그들을 없앨 수 있을 거라 하였던 건 구약종 혼자만 의 생각이었다.

300마리의 수인을 전부 없애고 나자 뿌옇게 아침이 밝아오게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지키고 있던 호위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1천여 마리의 수인들 공격으로 500명 마교도는 전부 죽임을 당했고, 생존자는 자신이 유일했다.

"응!"

피비린내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던 구약종은 놀란 얼굴로 한 곳에 시 선을 고정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30여 장 떨어진 곳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있는 인물을 발견했던 탓이었다.

"마옥성에서 나왔더냐?"

수인들을 데려온 자가 아니라면 지옥으로 변한 이곳에 있을 리가 없 다는 생각에 물었다. 더구나 상대의 얼굴은 거의 무표정에 가깝다.
익숙한 광경을 보는 듯 따분함마저 엿보였다.
명교도는 아닐 터이니 그를 마옥성 인물로 보는 건 구약종으로선 당 연했다.

"아니오. 짐승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소이다. 물어볼 게 있어서 지 금까지 보고 있었소."

바위 위에서 훌쩍 뛰어 내려 구약종 앞으로 가다가며 말했다.

"밤새도록 있었구나."

이슬에 의해 다른 부분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반면에 녀석이 일어난 곳은 하얗게 말라 있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하기야 귀가 어두워질 때도 되었지."

"나를 알고 있더냐?"

흠칫 표정을 굳힌 구약종은 나직하니 물었다. 녀석의 기도가 상상 이 상이었던 탓이었다. 보통 강한 무공을 익힌 무인들의 몸에서 은연중에 풍기는 기운이 있다.
그 기운을 일컬어 기도라고도 하고 기세라고도 부르는데, 무공이 강 하면 강할수록 그 기세 또한 강해져 무공이 약한 자는 함부로 접근하 기 힘들다.

방금 전까지 수인들을 향해 무공을 펼쳤던 자신은 최고의 기세를 풍 기고 있다. 그럼에도 녀석은 아무 거리낌없이 다가옴은 물론이고 오히 려 자신의 기세를 내리 누르고 있다.
무공 또한 약하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글쎄요. 참 아까 물어보려 했던 건데. 300년 이상 산 사람이 무슨 욕심이 있어서 명교도를 데리고 장난을 치는 거요."

"으음! 여호치를 만났더냐. 아니 너 때문에 상당부분 일이 틀어진 거 로구나. 불의사제들도 네가 없었고."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구약종은 놀란 얼굴로 청년을 보았다. 여호치 곁에 남아있던 자들은 선무전 무인들을 묶어둘 전력이 되지 않는다.
결국 여호치는 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선무전 무인들을 이곳으로 유 인해 왔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오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세세하게 알고 있는 청년이 나타났다.
이곳에 나타나지 않은 종남파를 묶어둔 장본인이고 불의사제들을 없 앤 장본인이 분명했다.

"틀어진 것은 없소이다. 마옥성 수인들이 나타난 것은 나도 의외였으 니까. 그건 그렇고 묻는 말엔 대답 안 해줄 거요?"

"혹시 사문을 말해줄 수 있느냐?"

궁금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마옥성을 알고 있는 것하며, 나이에 비해 엄청난 무공까지. 자신의 상식으로는 눈앞에 있는 청년을 키울만 한 문파는 강호 상에 없다.

"쿡!"

야혼은 나지막이 웃었다. 하오대문 문주가 자신이라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하지만 굳이 알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미 하오밀문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사람이다. 아니 과거를 지워버렸다고 해야했다. 그는 하오밀문의 사조가 아닌 명교 교주일 뿐 이다.

"대답하기 싫은 모양이구나. 내가 왜 명교 교주가 되었냐고 물었더 냐. 그들이 강했기 때문이다. 무공이 아닌 이곳이 말이다. 그리고 나는 강한 문파를 세우고 싶었고."

구약종은 머리를 가리켰다. 핍박의 세월을 견뎌온 명교도들에게는 일 반무인들이 갖지 못한 것이 있었다. 불굴의 투지였다.
그들이 가진 불굴의 투지를 조금만 다듬어주면 강호 제일 세력으로 일어서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여겨졌다.
그리고 잠사옹에게 대적하기 위해선 명교경전인 아베스타가 필요했 다. 십전수 구약종에서 명교 교주로 신분을 바꾼 이유였다.

  "내가 세웠던 문파를 강호인들은 하찮은 벌레 정도로 취급하더구나.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설립된 하오밀문을 말이다. 화가 났다. 강호를 지배했던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황실마저 하지 못했던 일을 내가 했 다."

"그래서 하오밀문을 세웠던 과거를 바꾸고 싶었던 게요."

"내가 죽어버렸다면 하오밀문이 어떻게 되던 상관하지 않았겠지. 하 지만 나는 살아있었다. 그리고 하오밀문의 현 주소를 보았다. 나의 거 처였던 하오비동조차 개방했더구나. 하오밀문 문도는 인간이 아니었다.
강호 무인들의 말처럼 벌레였다. 하찮은 벌레 말이다."

"그래서 다 죽인 거요. 벌레 같은 놈들이 살아보겠다고 꿈틀거리는 게 불쌍해서."

"맞다.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꼴이 불쌍해서, 다시는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해 주었다. 내가 뿌린 씨앗, 내가 거둬들인 것뿐이다."

"씨팔! 죽어도 아베스타 때문에 그들을 이용했단 말은 안 하는군."

야혼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하오밀문을 없애려 했다면 100년 전, 즉 정마대전에 초대받지 못했을 때 없앴어야 했다.
무려 100년 간을 침묵하고 있었던 그다.
결국 하오밀문을 없앤 것은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기 위해 저지른 비 열한 행위에 불과했다.
명교 교주로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뭐 좋소. 그건 당신 인생이니까. 하지만 이것 하나만 명심하시오. 세 운 당사자마저 버린 그곳에 애착을 갔고 지키려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 을 말이오. 오늘은 그냥 가겠소. 다음에 만나면 당신을 죽일 거요. 하오 대문의 현 문주로서, 명교의 예지자로서."

구약종을 똑바로 직시하며 야혼은 뒤로 이동했다. 하오밀문을 세웠던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것.

"무풍무영술(無風無影術)! 설마…."

멀어지는 야혼의 무공을 알아차린 구약종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오비동에 남겨두었던 자신의 무공.
지난 300년 간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던 태을건곤심법을 익힌 이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분명 하오대문이라 하였다. 명교의 예지자라 하였다.

"하지만, 세상은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를 넘어서 지 못하면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내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섰다.
자신감으로 팽배했던 시절, 300년 전에는 자신도 저랬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덜떨어진 공명심으로 하오밀문을 세웠다.
그랬던 꿈들이 잠사옹을 만남으로 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녹녹한 곳이 결코 아니었다.

"이곳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하오대문의 문주여!"

야혼이 떠난 곳을 향해 다시 한번 시선을 준 구약종은 바닥을 차며 몸을 날렸다.
죽호곡 입구는 가볼 필요도 없을 터이다. 그곳은 이곳보다 더 많은 수인들이 투입되었을 것이다. 자신과 교주 호위대가 있는 곳도 전멸 당 했거늘 그 곳은 무슨 말이 필요할까.
수천 명의 인간과 수인들이 드잡이를 벌인 곳, 검은 연기와 화염 속 에서 시작된 참극은 구약종의 말처럼 시작에 불과했다.
경악 분노, 그리고 허탈.

금불산 소식을 접한 강호 무림인들의 반응이었다.
마교 척살의 기치를 걸고 출병했던 선무전 무인들 1천 여명이 돌아 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천의맹 개파대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아무런 방비도 없이 기습을 당했다지만 이번엔 만반의 준비 를 갖추고 출동했던 선무전이 아닌가.
더욱 황당한 사실은 선무전 일원으로 나갔던 종남파였다.
종남파 문주인 황철군은 천의맹을 탈퇴하겠다는 첩지만 보내고 종남 파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허허! 어찌 이런 일이…."

천무전 안, 개방으로부터 날아온 첩지를 읽던 감연청은 탄식을 뱉어 냈다. 종남파가 돌아간 것은 큰 문제라 볼 수도 없다.
종남파로 찾아가 황철군을 설득하면 얼마든지 다시 데려올 수가 있 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맹주님!"

감연청 곁에 있던 제갈상운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종남파 탈퇴도 이 미 알고 있었고, 대승은 아니자만 그래도 3천 마교도를 척살했다고 하 였다. 세인들과는 달리 제갈상운 그가 내린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다였 다.

"7백 생존자 중 무당파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하네."

"설마…!"

"설마가 아니다. 무당파는 희생자가 100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더 구먼. 그것도 사망자는 50명이고 나머진 경미한 부상이라네."

"세상에!"

제갈상운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맹주의 말처럼 보통 일이 아니 었다. 물론 다른 문파에 비해 무당파가 강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점창파와 청성파는 부상자까지 포함해서 150명 정도씩 살아남았다고 하였다.
세 문파간의 불협화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감연청이 제갈상운을 부른 이유였다. 그곳에 있지 않아 명확한 내막 을 알 길이 없지만 설사 자신이 점창파나 청성파 문주라 할지라도 그 냥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두 문파를 무당파와 분리할 필요가 있 겠습니다. 와룡전이나 령무전으로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 장난하는 겐가. 대부분의 부하들을 잃고 치욕스러워할 사람들 을 그곳으로 보내서 웃음거리로 만들자고?"

감연청은 언성을 높였다. 자신 또한 제갈상운이 말한 바를 생각해보 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상책이 아니었다. 전쟁의 승패 여부와는 상관없이 점창 파와 청성파는 구파 중 가장 약체가 되었다.
다른 문파의 시선을 견디느니 종남파처럼 탈퇴를 선택할 것이다.
그건 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할 터였다.

"그럼 남은 곳은 한 곳밖에 없는데…. 점창파나 청성파 무인들이 기 거할 충분한 공간은 있지만 그들이 가려고 하겠습니까?"

"나는 그 반댈세. 오히려 그들과 같이 있으면 더 빨리 일어설 것 같 은데.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그건 그렇기는 합니다 만."

"일단 의중을 떠보기나 해야겠어. 싫다면 어쩔 수 없고. 참! 동창제독 을 맞을 준비는 잘 되어 가는가? 그분의 방문에 우리 천의맹 미래가 달려있다는 걸 명심하게."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실 줄 압니다."

제갈상운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감연청이 가장 기다리는 사람.
황실 최고 권력자인 동창제독의 방문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황실을 대신하여 마교와 싸우고 있다는 명분을 얻게 될 것이고, 그보 다 더욱 중요한 일은 마도련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창제독에게 요청하여 마도련을 천의맹으로 불러들일 참이었다.

"잘됐군.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하게. 돈은 얼마가 들 어가도 상관없네."

"와룡전에서 자금을 가져온 모양이군요."

"당성은 야망이 큰 사람이니까. 좀더 요구할 생각이네. 이번엔 선무 전 무인들의 가족에게 위로금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능구렁이 같은 사람.'

비상하게 머리를 돌리는  감연청의 모습에 제갈상운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무전 무인들 가족에 대한 위로금은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일 이었다. 무당파를 제외한 점창파나 청성파는 속가 문파이고 그곳에 속 해 있는 자들은 대부분 가족이 있다.
그들에 대한 위로금은 원래 각 문파에서 지불해야하지만 두 문파의 제정상태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아마 삼분의 일 정도는 위로금으로 쓰고 나머진 천의맹 운영비로 사 용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각 문파의 본산도 지어줘야 할 것 아닌가. 별장처럼 쉴 수 있도록 말이네. 참! 하오대전은 또 공사를 시작하는 것 같던데."

  "알 수 없는 친구들입니다. 들어올 사람도 없는데…. 아니, 어쩌면 그 곳에 들어갈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제갈상운은 엷게 웃었다. 하오대전 삼인방만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났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오는지.
곤륜파의 대력자와 아미파의 나찰혈불을 질질 끌고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물건, 지금껏 그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다.
지금까지 지어진 건물만 해도 70여 채, 거의가 삼층 건물로 지었으니 한 집에 50여명 정도가 생활한다고 보았을 때, 그들이 지은 건물은 3천 5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내심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드디어 죄수가 아닌 일반 무인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우연처럼 이루어진 일이지만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마지막일걸세. 그것도 잠시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용될 뿐 오래 머물진 않을 테니까. 또 마도련 무인들이 오면 마땅히 기거할 곳 도 없었는데 잘됐지 뭔가."

감연청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떠올랐다. 마도련 무인들이 오기를 바라 면서도 그들의 거처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하오밀문이 그 일을 대신해 주고 있다. 굳이 말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제갈상운은 물론이고 감연청조차 알지 못한 일이 있었다.
하오대문을 세우기 위해 야혼이 추진했던 일이 드디어 결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일성은 홍택호가 있는 강소성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하오밀문이라 하였더냐? 강호 무림인들이 문파로도 인정하지 않는 그 하오밀문으로 철갑기병을 데리고 들어가겠단 말이더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대청아래 무릎을 꿇은 인물을 향해 고함을 내 질렀다.
강소성 중소 문파의 한 곳인 소천문(蘇天門) 문주인 칠령창(七鈴槍)
육운유(陸雲儒)는 황당한 얼굴로 둘째 아들을 보았다.
집 떠난 지 5년 만에 돌아온 둘째의 첫마디는 하오밀문의 제자가 되 었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비록 중소문파지만 소천문은 400명의 문도를 가진 강서 성에서 명망 있는 문파다. 더구나 소천문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철갑 기병은 중원 어느 문파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5년 만에 돌아온 둘 째는 소천문 주력인 철갑기병(鐵甲騎兵)
을 달라고 하고 있다.
그 이유 또한 가관이었다.
하오밀문의 문주가 전주로 있는 하오대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란다.

"이유를 말해 봐라! 네가 그를 따르고자 하는 이유를 말이다. 합당하 다면 네 뜻을 들어주도록 하마."

5년 만에 돌아온 아들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분은 저에게 무공을 주었습니다. 우리 때문에 하오밀문이 멸문당 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겁천십웅의 일인이었던 십전수 구약종의 태을건곤심법을 주었고, 남궁세가의 검법인 제왕무적혈검을 주었습니다."

"정년 네가 태을건곤심법과 제왕무적혈검을 익혔더란 말이냐?"

기절할 듯 놀란 얼굴로 육운유는 둘째를 보았다. 처음 녀석이 집안으 로 들어왔을 때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객지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무공이 약해졌을까 하는 생각에 측 은하게 여겼다.
그런데 퇴보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외부로 발산되는 기운을 갈무 리할 정도로 고수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다른 무공도 아니고 내공심법에서는 고금제일이라는 태을건 곤심법을 익혔다고 한다. 아울러 남궁세가의 검법인 제왕무적혈검도.

"그렇습니다, 아버님. 자질이 미천하여 10성밖에 터득하지 못했지만 분명 태을건곤심법과 제왕무적혈검을 익혔습니다."

"좋다, 일어서거라!"

놀란 눈으로 둘째를 보던 육운유는 자신의 독문 병기인 칠령창을 들 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들의 말이 사실인지 시험을 해보고 싶었다.

"나를 이겨라, 그럼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그럼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아버님!"

부친을 향해 고개를 숙인 육만우는 이곳에 오기 전 허름한 대장간에 서 구했던 청강검을 뽑아 가만히 들어올렸다.
이어 그의 몸에서 뭉클거리며 백무가 솟구쳐 나오고 부친을 겨냥한 청강검은 막 노에서 꺼낸 것처럼 붉은 색으로 변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점점 농밀해진 백색 운무는 이내 육만우의 몸을 감쌌고 그가 서있던 자리엔 붉은 광채를 뿌리는 검만이 남아 있었다.

"으음!"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육운유는 급기야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 다. 단지 검을 들어올렸을 뿐이다.
그런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발짝만 떼면 붉은 색 검에서 무엇인 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문득 눈앞에 붉은 피가 그려지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신검합일(神劒合一)의 경지, 둘째 아들은 이미 검과 하나되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자신보다 몇 단계 위였다.

"좋다, 데리고 가거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육운유는 나직하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결코 소천문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 니다. 그리고…."

일순 기세를 푼 육만우는 아버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품속 에서 두 권의 책을 꺼내 형님인 육만성(陸晩成)에게 내밀었다.

"이건?"

태을건곤심법과 제왕무적혈검임을 확인한 육만성은 놀란 얼굴로 동 생을 보았다. 비록 그가 익힌 무공이라지만 두 무공의 주인은 하오밀문 의 문주다.
그의 허락 없이 타인에게 함부로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저는 하오대문의 제자지만 형님은 소천문의 문주가 될 몸입니다. 소 천문의 내공심법인데 태을건곤심법정도는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문주 님께서도 허락했으니까 받으십시오. 열심히 연구해서 변형시켜 보십시 오. 태을건곤심법보다 더 뛰어난 내공심법으로 말입니다. 형님 머리면 가능할 겁니다."

"만우야!"

육만성은 감격한 얼굴로 동생의 손을 잡았다. 가문의 모든 관심이 자 신에게만 쏟아졌고 언제나 소외되었던 동생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가문에 기연을 몰고 왔다.

"너?"

동생의 손을 잡았던 육만성은 울먹이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사람 손 이라 할 수가 없었다. 곰 발바닥을 만진들 이럴까.
손바닥 전체가 굳은살로 도배되어 있었다. 얼마나 검을 휘둘렀으면, 얼마나 노력을 했으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녀석이 겪었을 고생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분이 그랬습니다. 목숨을 걸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익힐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알았다. 나도 목숨을 걸어보마. 네가 했던 것처럼 목숨을 담보로 내 공심법을 만들어내마."

다음날.
200명의 기마대가 강서성 소천문 정문을 나섰다.
중소 문파 무인들의 출발은 강서성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복건성 해룡문에서 구칠우를 선두로 200 해룡단(海龍團)이, 강서성에 서는 서영상을 비롯한 사해표국 무사 50명이, 절강성 화화방에서는 소 녀차혼대(少女借魂隊) 100명이 매난설을 따라 길을 떠났다.

그리고 무산(巫山) 신녀곡에서는 무산신녀 3백 명이 곡을 나섰다. 선 발대로 나선 그들의 목적지는 섬서성 천의맹에 있는 하오대전이었다.
*****
방 "이야합!"

한 인물의 입에서 묵직한 고함이 터져나왔다. 일순 그의 주변으로 가 공할 살기가 들어차고 평범한 검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와 전 면 절벽 속으로 스며들었다.

스스스!
모래성이 스러지듯 돌가루들이 아래쪽으로 수북히 쌓였다. 1자 깊이, 청정이 펼친 검법이 절벽에 만든 동굴의 깊이였다.
상당히 오랜 기간 검법을 펼쳤는지 청정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방울 방을 맺혀 있었다.

"휴-우!"

폐 속 깊이 공기를 들이마신 청정은 가루로 변한 벽면을 살폈다. 방 금 그가 펼친 무공은 얼마 전 야혼에게서 받은 복마청운검법이었다.

"타핫!"
"차앗!"

절벽 앞에서는 청정도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청류도장 비롯한 나찰 혈불과 그리고 대력자와 운령자가 10장 간격으로 서서 절벽을 향해 자 신들의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아미타불! 시주님들 대패로 다듬은 것처럼 매끈하게 해 주십시오.
사람이 살아야할 집입니다."

"제기랄!"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대력자는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절벽에 동굴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지, 10일이 되었다.
야혼이 던지고 간 책자를 눈앞에 두고 며칠을 고민했다.
무적군림마보를 익힌다는 건, 곧 그를 따르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니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설사 야혼이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혔다고 하여도 그가 하오밀문의 문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죄인이라지만 곤륜파의 제자. 사문에 누가 되는 행동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무적군림마보와 사문의 명예, 그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하던 대 력자의 마음을 무공 쪽으로 선회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무당파 죄인인 청광이노가 야혼이 놓고 간 복마청운검법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복마청운검법이 무당파 검법이지만 그건 100년 전의 일. 지금의 주인은 하오밀문의 문주가 분명하다.

청광이노는 하오밀문 문주를 따르기로 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무적군림마보로 급격하게 마음이 기울었다.
운룡대구식을 최고로 만들어 사문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물 밀 듯 밀려왔다.
결국, 눈앞에 떨어진 무적군림마보를 집어들고 말았다.
그리고 무적군림마보의 의미를 대강 파악했다고 생각되는 순간 작업 이 시작되었다.

절벽에 동굴을 뚫어 집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지어진 집만 해도 70여 채에 달했고, 이곳에 있는 자들이라 야 기껏 50여명, 집은 넘치고 남는 그들이 아닌가.

"저건?"

고개를 들어 추기영을 보는 순간 그는 황금빛으로 변한 철탁이 벽면 을 향해 나아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데엥!

"으음!"

대력자는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벌써 수십 번을 보았던 광경, 하 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뿐이다.
황금빛으로 변한 철탁으로 절벽을 치는데 범종소리가 들려온다. 더욱 놀라운 일은 무음항마혈탁 소리를 듣노라면 심신이 편안해 진다는 것 이었다.
일순간이지만 머릿속이 맑아지며 막혔던 무공 구결들이 번쩍하며 떠 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더하여 추기영의 무공이라니.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알아보았지만 자신은 그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무음항마혈탁으로 절벽을 강타할 때마다 범종소리와 함께 1자 가량 의 동굴이 만들어진다. 그 폭 또한 반 장에 달했다.
더구나 그는 5장 높이의 허공에 머물러 있는 상태. 자신과 운령자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경지에 올라 있는 자였다.

"그나저나 우리 연작문주가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우호법 소식 들어 온 것 없는가."

"왜 없겠냐. 들리는 소문에 일이 잘 되었다고 하더라. 종남파 문주는 300명 남은 부하들을 데리고 종남산으로 돌아갔고, 점창파와 청성파는 거의 멸문지경이라네."

태웅의 말에 절벽에 동굴을 만들던 이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이 번에 선무전이 출병한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고, 승전보를 가지고 돌 아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 종남파는 천의맹을 탈퇴했고, 두 곳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당했다고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얼굴로 태웅을 보았다.

"참! 무당파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고 하더군. 부상자만 몇 명 있었 다던가."

"무량수불!"

청정은 일그러진 얼굴로 도호를 읊었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마교뿐만 아니라 마옥성마저 금불산에 나타났음이 분명하리라.
암울한 얼굴로 하늘을 보던 청정은 긴 한숨을 뱉어냈다.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 사문의 치부를 누구에게 말할 것인 가. 지켜보자니 수많은 무인들이 죽어갈 터이고, 밝히자니 무당파는 매 장될게 분명하다. 아니 이제는 밝히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마옥성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대력자는 추기영과 태웅의 대 화로 엉뚱한 상상을 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하오밀문의 문주가 수작을 부려 그렇게 되었단 말이오?"

조금 전 두 사람은 분명 일이 잘되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대화로 짐 작컨대 하오밀문 문주 또한 그곳으로 간 듯했다.

"미친 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선무전 무인뿐만 아니라 마교도 3 천 명이 금불산에서 몰살당했다. 우리 연장문주가 그런 일을 할 수 있 으리라 보는 거냐?"

"그래도 알고는 있었을 것 아니오."

"물론 알고 있었다, 대력자. 그곳엔 마교말고도 다른 암중의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하오대문에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

"천무전에 알려야 할 것 아니오. 그럼…."

"미친 놈. 그런 너는 우리가 말하면 믿을 거냐? 인간도 짐승도 아닌 수인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다는 말을 너는 믿겠냐? 마옥성(魔獄城)이 세상에 나왔다면 너는 믿겠냔 말이다."

"씨팔!"

마침내 대력자는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다. 태웅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보는 자신조차 그들을 무시하고 있는데, 천무전 다 른 무인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절벽을 향해 신경질 적으로 양손을 쳐내는 그 의 귓전에 태웅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마옥성 수인(燧人)들은 목을 잘라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대력자 너 정도 무인 두 명은 있어야 수인 한 마리를 없앨 수 있다."

"수인이 뭐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수인이란 말에 대력자는 손을 멈추고 물었다. 마 옥성이란 곳은 알고 있다. 하지만 수인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더구나 자신 정도 수준의 무인 두 명이 있어야 상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수인이 뭐냔 말이오?"

"평상시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네. 그러다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1 장 크기에 달하는 늑대인간이나 곰 인간 등으로 변하네. 잘라낸 사지는 다시 재생되고, 심장을 찔려도 죽지 않네. 불사의 신체를 가진 자들일 세. 수인의 유일한 약점은 목이네. 목을 잘라내면 가루로 흩어지네. 여 기 이 바위들처럼."

편치 않은 듯, 수인에 대한 설명을 하던 청정도장은 전면 동굴을 향 해 수중을 검을 신경질적으로 뿌렸다.

푸스스!
 "우엑!"

무리했음인지. 두 자 깊이의 동굴을 뚫어버린 청정은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피를 토해냈다.
격정을 이기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무공을 펼친 결과 내상을 당 하고 만 것이었다.

  "으음!"

청정도장을 보던 대력자는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청정과 청류, 두 사람이 무당파 죄인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수인 때문이란 사실을 직감 적으로 깨달았다.

"무량수불!"

청정의 입에서 나직한 도호가 흘러나왔다.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과 거가 자꾸만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다.
그날, 막힌 무공 때문에 심란해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청류와 같이 산책을 나섰다. 그러다 자소봉 한 계곡에서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고 말 았다. 20명에 달하는 무당파 제자들이 흡혈을 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무당제자들과 동일한 수의 양민들이 숨져 있었다.
대노한 두 사람은 그들을 단죄하기 위해 검을 뽑았고 수인으로 변한 그들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정운 사조를 만났다. 100년 전 성모척살대에 소속되어 십만 대산으로 떠났던 그를.
그는 침묵하지 않으면 무당파 모든 제자들이 죽는다 하였다. 스스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옥으로 들어가는 자신들을 향해 그는 말했다. 침묵하고 있는 한 무당 파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맨 끝에 있던 나찰혈불이 청정과 청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어떡하긴 강해지면 되지."

일행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금불산을 떠나온 야혼이었다.

"강해지는 것만으로는 무림을 구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야혼의 출현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나찰혈불은 놀란 표정도 없이 물 었다.

"글쎄, 그건 강해진 다음에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보는데. 그동안 더 예뻐졌네."

"네?"

느닷없는 없는 말에 나찰혈불은 화들짝 놀라며 야혼을 보았다. 양심 신공을 익히고 있지만 아직은 미숙하여, 완전하게 마음을 통제하지 못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얼굴 또한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그럴 말할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예뻐졌다니.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이야기한 거라네. 자 오늘은 그만하고 들어가 서 쉬지."

"연장 문주 신수가 환해졌네 그랴. 좋은 일이 있었나 보이."

반가운 얼굴로 내려온 추기영이 야혼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래 잘 풀렸다. 일단 마도련으로 보냈다. 나머진 냉소소가 잘해주 겠지."

"아미타불! 잘됐습니다, 그려. 그럼 마도련에 돈이라도 좀 보내야 하 는 것 아닙니까? 2천명을 먹이려면 만만치 않을 텐데."

"천하전장에 지시해서 2십만 냥을 보냈으니까 당분간은 걱정 없을 거야. 소소가 원하면 달라는 대로 주라고 해두었다."

"응?"

뒤따라 움직이던 청정과 청류도장은 흠칫 놀란 얼굴로 앞서가는 야 혼 일행을 보았다. 그 뿐만 아니었다. 대력자와 운령자 그리고 나찰혈 불까지 가던 걸음을 멈췄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이야기들.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본인들끼리 하는 이야기인지 모르 지만 천의맹 다른 무인들이 들으면 기절할 내용들이 일상 적인 대화 속에서 마구 튀어나온다.
조금 전 분명 그랬다. 마도련이라 하였고, 소소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하전장이라도 하였다.

"자네 혹시 냉소소란 이름을 가진 여인을 아는가?"

많이 들어본 듯 하여 청정은 대력자를 향해 물었다.

"마도련주의 이름이 냉소소라 알고 있습니다. 극음마후 빙염의 한령 신공을 대성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정말 마도련주를 말하는 것일까 요?"

의심스러운 듯 야혼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대력자는 물었다.

"남는 게 뭐 있다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가 듣기론 저들은 마도 대전에 참석했고, 1, 2, 3위를 차지했다고 했습니다. 저들 세 사람 때문 에 사황문이 마도련 패자가 되었고요."
두 사람 사이로 조용히 끼어들며 나찰혈불이 말을 건넸다.

"그거야, 그들이 나올 형편이 되지 않아서, 거저 주웠다고 하지 않았 습니까."

"대력자께서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만독문주나 만수문주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지요. 저들이 도전을 했다는 사 실이 더 중요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전 받은 자들이 나오지 않아서 거저 주웠다 는 사실은 변하지…. 세상에."

일순 대력자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생각하 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만독문주나 만수문주를 이길 실력을 가졌든지, 아니면 그들이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저는, 후자라 생각합니다."

"그럼 저 세 사람이 만독문과 만수문을 양패구상시켰단 말입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력자를 부르르 떨며 고함을 질렀다. 한두 명도 아니고 만독문과 만 수문 병력을 합치면 건 2천명에 달한다.
그들을 단 세 사람이 없애버렸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 만 그의 고함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자신 또한 나찰혈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저들 세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는 걸 제외하면 마도련은 평 상시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이가 좋지 않은 곳은 계기만 만들어 주면 알아서 싸우게 되지요."

"무량수불!"

신음처럼 청정은 도호를 읊었다. 야혼은 천의맹의 무인들의 희생을 줄이려면 따르라고 하였다. 그랬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저의가 뭘까요?"

감방으로 쓰이는 동굴로 들어간 야혼의 모습을 좇으며 대력자는 물 었다. 조금 전 야혼이 말했던 이야기들은 타인에게 함부로 발설할 내용 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밀이 새어나갈 걸 걱정해야하지 않는가.

"우리가 스스로 움직이기를 원하는 거지요. 협박한다고 말을 들을 사 람들이 아니질 않습니까?"

"흥! 그렇다고 그에게 굴복…. 씨팔!"

결국 대력자는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다. 야혼에게 하는 욕이 아니었 다.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욕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용을 써봐야 방법 이 없다. 설사 이곳을 탈출하여 나간다 해도 자신의 말을 누가 믿어 줄 것인가. 이번에는 정말로 정신병자 취급을 당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루빨리 무공을 완성해야 합니 다. 그래야만 사문을 구할 수 있습니다."

문득 서답을 가져왔을 때 야혼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 천의맹 무인들 을 전부 죽이지 않도록 말려달라고 하였다.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번 점창 파나 청성파의 멸문에 관련이 없다고 하였지만 그 또한 믿을 수 없다.
관여하진 않았을지라도 그가 방조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무슨 능력으로.'

내심 소리쳤다. 설사 성천불마심공의 저주를 극복한다 하더라도 아미 파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의 손에 죽어간 사매들의 극락왕 생을 위해 불공에 전념해야 한다.

"휴-우!"

급기야 나직한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힘없이 동굴을 향하는 그녀의 귓전에 야혼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여어! 자운은 날 따라오고 나머진 들어가서 밥 먹어."

"왜?"

일순 의아한 얼굴로 자운은 야혼을 보았다. 그가 가는 곳은 지어만 놓았을 뿐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 중의 한 곳이었던 것이다.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따라와."
"?"

그녀는 잡아먹는다는 의미를 아직 알지 못했다.

 최고의 사윗감(?)

 "마도전(魔道殿)이 뭐죠?"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서던 자운은 위쪽에 걸린 편액을 보며 물었 다.

"짐작대로야, 마도련 무인들이 들어오면 기거할 곳이지. 참, 몰랐지?

여기 건물은 성라무연대진이라는 진을 구축하고 있어. 마도련에 구축된 진을 축소했지만 위력은 별반 다르지 않아. 건물 한 채만 완성하면 끝 나."

"그럼 지금 만들고 있는 그 건물이…."

자운은 입을 턱하니 벌렸다. 동굴 만드는 작업을 할 때 언뜻 보았던 건물 배치도는 분명 별 모양이었다. 대부분 건물은 완성되어 있는 데 유일하게 세우다만 건물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마도련을?"

"마도련주가 여자잖아. 나는 남자고."

"그래도 그렇지."

"뭐가 그래도야. 너도 내 얼굴에 뻑 갔잖아."

"억!"

불쑥 눈앞으로 다가온 얼굴에 자운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크윽! 냄새, 여자가 돼 가지고."

손을 들어 연신 부채질을 하며 야혼은 인상을 찌푸렸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자운은 야혼의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렸다. 하 오대전에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는 목욕 한번도 하지 못했다.
죄인의 신분으로 누구에게 부탁할 입장도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하오 대전에는 여자가 없었다.

"얼굴이 예쁘면 뭐하냐. 여자는 말이야, 몸에서 은은한 방향이 풍겨 야 하는 거야. 사향 또는 울금향 냄새에 처녀 특유의 냄새가 합쳐지면 그걸 가리켜 우리 세계에선 천국의 냄새라 불러."

"전엔 어떤 세계에서 살았죠?"

문득 야혼의 과거가 궁금했다. 그와 만났을 때는 무자비하게 맞았다.
맞을 땐 거의 이성이 없어 몰랐지만 나중에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몸을 살피니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에게 잡혔던 가슴과 무릎으 로 맞았던 아랫배의 통증은 며칠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랬던 자가 여자의 필수품인 서답을 챙겨주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세계? 좋아 지금 보여주지.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고."

불쑥 자운의 손을 잡은 야혼은 넓은 대전을 가로질러, 한쪽 끝에 마 련된 방문을 활짝 열었다.

"아-!"

손을 잡혔다는 사실도 잊고 자운은 낮게 탄성을 발했다. 서너 사람은 들어가 목욕을 할 수 있는 대리석 욕조가 방 가운데 놓여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욕조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이었다. 무엇을 풀었 는지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이었다.

"피부에 좋다고 해서 꿀을 좀 풀었다. 그렇다고 물을 먹으면 안 된 다. 참! 내 전직이 뭐냐고 물었지. 일단 물부터 따뜻하게 해 놓고."

"저건?"

야혼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불꽃을 자운은 놀란 눈으로 보았다. 보 면 볼수록 놀라운 사람이었다. 태을건곤심법, 투견공, 그리고 무적군림 마보, 복마청운검법 등 그에게서 무수한 무공이 흘러나온다.
지금 보는 불꽃 또한 무공의 한가지임에 분명했다.
물 속에 들어가서도 꺼지지 않는다면 극 상승의 화공일 것이다.

"자자! 그러고 있지 말고, 내 전직은 이거였어."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조그마한 통 세 개를 가져온 야혼은 안마를 위해 만들어둔 단위로 그것들을 나란히 엎었다.

"혹시 기념될 만한 것 가진 것 있어?"

"기념될만한 것이라고요?"

통 세 개를 흥미로운 눈으로 보던 자운은 품속을 더듬더니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냈다. "이거면 되겠어요?"

그 속에서 옥반지를 꺼내 야혼에게 내밀었다. 자신의 유일한 소유물 로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좋네. 지금부터 이 놈을 찾아내는 거야. 무공을 써도 상관없어. 나는 공공십팔수라는 무공으로 이것들을 섞을 테니까."

"좋아요."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전에 갔을 때 광경을 떠오르자 자 운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야혼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 내공을 끌어올리며 야혼의 손을 주시했다.

탁! 탁탁탁! 탁탁!

빠르게 오가는 야혼의 손을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전에 떠올랐던 미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반지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 졌던 탓이었다.

"이거요."

가장 왼쪽에 있는 통을 가리켰다.

"어라? 솜씨가 있네. 첫판부터 맞추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맞다 그 때는 주로 취객을 상대했으니까…. 저 만치에 차력술을 하는 태웅이 있 었어."

반지가 나온 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야혼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듯한 얼굴로 욕실 구석을 가리켰다.

"대력패왕지체를 타고난 녀석은 거의 금강불괴지신에 가까운 몸을 지녔지. 녀석의 준비물은 날이 바싹 선 도끼였어. 그 도끼를 손님에게 주고 자신을 나무 패듯 치라고 했던 거야. 제가 신음을 지르거나 물러 서면 걸었던 돈의 세 배를 준다면서. 그리고 그 놈과 20여장 떨어진 곳 에는 시주 통을 놓은 추기영이 있었지. 시커먼 철탁을 두드리며 하루종 일 절을 하는 거야. 비가 오나 눈이오나. 지나가던 행인이 구리돈 몇 문을 던져주면 우린 하루를 배불리 살았어."

"당신은?"

울 듯한 얼굴로 묻는 자운의 물음은 나직한 노랫소리가 회답했다.

"자! 골라보십시오. 여기 있는 이 새카만 놈을 찾아내면 세 문을 드 립니다. 어두운 밤에 마누라 거시기 찾는 것보다 더욱 쉽습니다. 월향 이 그곳같이 새카만 놈을 골라내면 구리돈이 세 문입니다. 불과 3년 전 의 일인데 아득하게 느껴져."

슬픔이 가득한 노랫가락과 함께 야혼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 했다.

"손님! 버리는 셈치고 구리돈 한문만 걸어보십시오. 오늘 밤 운을 시 험해 보는 겁니다. 혹시 압니까 운이 좋으면 청빈사기를 안아보게 될 지요. 자 골라보십시오. 마누라 그곳보다 더 찾기 쉬운 이놈을 찾아내 시는 분께는….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네 문을 드리기도 합니다."

"흑!"

야혼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자운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 다. 그의 모습은 너무 슬펐다. 소면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구리돈 한 문을 벌기 위해 그는 비를 맞으며 통을 돌렸으리라.
하루라도 통을 돌리지 않으면 그는 밥을 굶었으리라.

"자! 골라보세요, 이 놈을…."

"그만, 그만하세요."

어색한 움직임으로 통을 돌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더 이상 들을 수 가 없었다. 나지막한 그의 노랫소리는 절규처럼 들렸다. 희망이 잃은 자의 한탄처럼 들렸다.

"어? 손님이 아니었네? 미안해.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인지 비 오는 날로 착각했지 뭐야. 비가 오면 공치는 날이거든. 아이고 왜 이리 눈이 맵냐."

"미안해요. 제가 공연한 부탁을 해서…."

야혼의 눈가에 반짝 물기를 발견한 자운은 더욱 미안한 얼굴로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자운이 왜 미안하나. 태어나기를 지랄같이 태어날 걸. 지금생각하면 취객들도 대단했어. 구리돈 한 문 잃었다고 칼을 휘둘러 대질 않나. 돌 로 사람을 찍질 않나. 여기 봐라, 하여간 술 취한 놈들은 상종을 말아 야해. 칼로 사람만 찌르면 됐지 판은 왜 없냔 말이야. 이것들이 전부 그놈들에게 찔리고 맞아서 이렇게 된 거야. 참, 물 데워졌겠다. 씻어.
나 밖에 있을 테니까 물 더 필요하면 말하고."

 최고의 사윗감(2)
"자운이 왜 미안하나. 태어나기를 지랄같이 태어날 걸. 지금생각하면 취객들도 대단했어. 구리돈 한 문 잃었다고 칼을 휘둘러 대질 않나. 돌 로 사람을 찍질 않나. 여기 봐라, 하여간 술 취한 놈들은 상종을 말아 야해. 칼로 사람만 찌르면 됐지 판은 왜 없냔 말이야. 이것들이 전부 그놈들에게 찔리고 맞아서 이렇게 된 거야. 참, 물 데워졌겠다. 씻어.
나 밖에 있을 테니까 물 더 필요하면 말하고."

자운의 손을 천천히 떼어낸 야혼은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바보같이, 왜 그런걸 물어 가지고. 멍청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간 자운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자신을 자책했 다. 옷을 들어 보여준 그의 상체는 온통 흉터로 가득했다.
슬픈 얼굴로 빗속에 통을 돌리는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취객들에게 맞아 쓰러져 신음하는 야혼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만 울고 씻어. 옛날 일을 가지고 자꾸 울면 내가 더 힘들어 진다 는 것 몰라?"

"네? 네, 알겠습니다. 울지 않겠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물을 훔친 자운은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의 말처럼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할 필요가 없다.
지금 그는 과거를 잊고 새롭게 살고 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미래일 뿐 어두운 과거가 아닌 것이다.

"야 공자, 물 식었어요!"

야혼이 과거를 떠올리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하는 말이었다.

"그래, 불꽃이 안으로 들어갈 거야. 방향을 가리켜 줘!"

"오른 쪽으로 그래요 좀더 됐어요. 그런데 이건 무슨 무공이죠?"

"몰라 나도. 우리 같은 놈들이 무슨 무공 이름 알고 익히나. 눈에 보 이면 대충 익히는 거지. 발 있는데 보면 배수구를 막아둔 게 있어. 물 이 더러워지면 그걸 뽑아내면 돼."

"알았어요."

다리를 쭉 뻗어 야혼이 말한 물체를 찾아낸 자운은 싱긋 미소를 지 었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전과 같아졌기 때문이었다.

"물이 더럽기는 한데…."

거의 한달 이상을 씻지 못해서인지 물은 금방 더러워졌다. 야혼이 말 한 물체를 빼내려다 손을 멈췄다.
준비한 물이 있다고 했지만 욕실 안쪽이 아니라 밖에 있다.
몇 번을 망설이던 자운은 결심을 한 듯 욕조의 물을 배수시키기 시 작했다.

"저기…. 야 공자. 물을 좀."

"이런 바보, 물통을 안에 두고 나왔으면 되는데. 애들한테 시킨다는 게 깜박했네. 걱정하지 말아. 눈감고 들어갈 테니까. 강한 무공이 있으 니까 별…. 어이쿠!"

"그냥 들어오세요."

벗어두었던 옷을 들어 앞을 가리며 말했다.

"미안해!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커다란 물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며 야혼은 미안한 얼굴을 했다.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이제 막 돌아왔는데 쉬지도 못하 게 했으니."

목까지 붉게 물든 자운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을 대충 가리고 있다지만 벌거벗고 있는 상태.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이런 바보. 다 치웠으면 동경도 치워야 했는데."

"학!"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야혼의 모습에 일순 자운은 경악한 얼굴을 했 다. 앞을 가렸던 옷이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도 잊고 몸을 돌렸다. 지금 껏 잊고 있었다. 처음 욕실에 들어설 때 보았던 전신 동경이 바로 뒤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았던 눈을 떴는지 동경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망연한 눈으로 서로를 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자운이 었다. 그 앞에 모든 게 드러났다는 생각 때문인지 떨어졌던 옷을 들어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습네요. 나는 당신의 마음속을 다 보았는데…."

가슴을 가렸던 손마저 내려버린 자운은 태연한 얼굴로 야혼을 직시 했다. 문득 겉모습이 무슨 상관이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가슴속을 속속들이 봐버린 자신이 아닌가.

"물 부어주세요. 이왕이면 등도 좀 밀어주고."

"나이답지 않게 몸매는 예술이네. 알았습니다. 참 엉덩이에 있는 그 상처는 뭐지?"

홀린 듯 자운의 몸을 보던 야혼은 이내 욕조에 물을 부었다. 불꽃을 만들어 물을 데운 다음 그녀의 지시대로 목석처럼 등을 밀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아미파에 저를 맡길 때 일부러 만들어 두었대 요. 제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추유미라고."

"떼 좀 봐라. 까마귀가 울고 가겠네. 아무래도 물 한 통 더 준비해 와야겠어."

그녀의 말을 듣던 야혼은 이내 화제를 바꿨다. 그녀의 아미파 입문 도한 사연이 있는 듯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좋은 대로하세요. 참 제가 양심신공 고맙다는 말했나요?"

"참, 양심신공의 성취는?"

"굳이 완성할 필요는 없어요. 치솟아 오르는 마기를 억제할 수준만 되면 되니까.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편안해 질 것 같아요. 다 당신 덕이 지요. 내일은 제 머리 좀 잘라주세요."

"정말 부처가 되어버렸구먼."

"당신이 뽑았으니까 마지막 정리까지 해주셔야죠."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운은 싱긋 웃었다.

"가만있어. 자꾸 자극적인 행동을 하니까 내 기분이 이상해지잖아."

물 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그녀의 가슴을 보며 야혼은 신경질적으 로 말했다. 지금까지 작업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훗! 같이 목욕을 하자면 기절하겠군요. 잠깐 저쪽으로 갈게요."

편안함 때문인지 그녀의 어투에서 점차 노련함이 묻어 나오기 시작 했다. 고개를 들어 야혼을 흘낏 보던 자운은 이내 일어서더니 동경이 정면으로 보이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원래 대화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하는 거예요."

동경을 향해 한 바탕 물을 끼얹은 자운은, 그곳을 통해 야혼을 직시 하며 싱긋 웃었다.

"으이그 내가 못살아! 좀더 위쪽으로 올라와!"

그녀의 겨드랑이에 불쑥 손을 집어넣고 위로 들어올렸다.

"여자 목욕을 많이 시켜보았나 보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목욕을 시 켜주는 것 같아요. 크! 냄새. 당신은 나보다 더한 것 같군요. 피비린내 도 많이 나고. 벗고 들어와요. 아니 물부터 준비해 와요."

"제길…. 이게 아니잖아!"

결국은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요구는 집요했다. 물을 두 번이나 떠오고 몸에 묻은 피까지 전부 닦아냈지만 그녀는 욕조를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얼굴로 야혼의 몸을 살피며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 했다.

"오랜만에 목욕을 해서 그런지 나가기가 싫어요. 참, 남자들은 다 그 렇게 생겼어요?"

"그럼 다 이렇게 생겼지, 다를까봐."

"신기하게 생겼네. 그렇게 길다란 걸 달고 다니면 불편하지 않아요."

"허! 서른 다섯 살 맞아?"

"확실히 서른 다섯 살이에요. 다섯 살 때 아미파에 들어가서 삼십 년 을 보냈으니까. 그거 한번 만져봐도 돼요?"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왜 내걸 만지는데."

몸을 움츠리며 그녀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욕조 구석으로 이동했다.

"손을 잡는 거란 뭐가 달라요. 그것도 몸의 일부분인데."

"너도 처음엔 가슴을 가렸잖아. 그거랑 같은 거야."

"지금은 안 가리잖아요. 정 손해난다는 기분이 들면 당신도 만지든 지."

물살을 해치며 다가온 자운은 야혼의 아래쪽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 어 버렸다.

"으악! 이거 미치겠네. 도대체 아미파에서는 교육을 시킨 거야 만 거 야. 서른 다섯이나 되는 여자가 아무것도 모르니."

"남자가 웬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요. 뭐해요, 물 식었는데…. 어머?
어머? 웬일이래."

화들짝 놀라던 자운은 탄성을 내질렀다. 쥐고 있던 그것이 점점 크기 를 부풀렸던 탓이었다.

'아이고 이걸 덮쳐야 하는데. 콱 잡아먹어야 하는데.'

그녀의 맑은 눈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얼굴만 파면으로 변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덮쳤을지도 모른다.
보기 거북해서라기 보다는 그녀의 처지가 불쌍해서 차마 손을 댈 수 가 없었다.

"허억!"

내심 이를 갈던 야혼은 결국 나직한 신음을 뱉어내고 말았다. 그것을 가만히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어느 순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호기심에서 그랬겠지만 당하는 야혼의 입장은 결코 아 니었다. 그곳으로 피가 몰린 듯한 느낌과 함께 짜릿한 쾌감이 밀려들었 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세게 쥐었나? 아닌데 투견공을 익힌 사람이 아 플 리가 없잖아. 아하!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거구나."

갈수록 가관이었다. 야혼의 얼굴을 빤히 보던 그녀는 탐색하듯 손을 움직였다.

"헉! 자운 제발 그만 하자. 계속 이렇게 나오면 나도 책임 못 진다.
널 덮칠지도 모른단 말이다."

"야 공자, 편할 대로하세요. 대신…, 천의맹 무인들을 구해주세요."

"씨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알잖아!"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문득 그녀는 일부러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심신공을 건네주면서 말려 달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그녀는 알고 있 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힘이 있어요. 세 사람일 때도 만독문과 만수문을 없앴어요. 무공 또한 천하제일인이고."

"머리 좋은 것들은 이래서 싫어."

그녀에게 허를 찔린 것 같아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당신을 속인 건 아니에요. 정말 남자 몸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사실 궁금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남자는 한번 흥분하면 멈추기 힘들다던데."

"알았어. 천의맹 무인들을 살리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볼 테니까 그 만 손 빼 줘. 시원한 바람만 맞으면 그냥 죽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야혼이란 이름을 달고 여자를 밝히기는 했지만, 정말로 하고 싶지 않 다는 생각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 하기 싫었다.

"거짓말 말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정력제를 너무 많이 먹 어서 안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정력제를 입에 달고 살 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신은 참으면 병이 된다고 …. 혹시 제 얼굴 이 못나서 그런 거면, 가릴게요. 죄송해요."

"와! 이거 정말 돌아버리겠네. 누가 그래, 네 얼굴이 밉다고."

손에 힘이 빠졌다. 울 듯한 얼굴로 쳐다보는 자운의 눈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야혼은 욕조에서 수음을 하고 말았다. 자운에 의해.

"육승, 이 개자식 너 오늘 죽었다고 복창해라."

마도전을 나서며 야혼은 씩씩거리며 추기영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 다. 그동안 자운을 세뇌시킨 놈은 다름 아닌 추기영이었다.
끊임없이 그녀 주변을 맴돌며 자신에 대해 주입시킨 것이었다.

"니미럴타불! 하고 왔으면 기분 좋게 들어와야지 왜 오두방정을 떨 고 지랄인가."

야혼의 방에서 춘서를 보고 있던 추기영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너 이 새끼!"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번쩍 손을 쳐들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미파에 팔렸다고 하더구먼. 불쌍한 여자더란 말 이네. 그리고 그녀의 파면은 양심신공으로도 고치지 못해."

이어지는 추기영의 말에 야혼은 손을 내려놓고 말았다.

"무슨 말이냐?"

"연작문주가 떠난 다음에 도백회를 통해서 조사를 해 봤네. 그랬더니 석년의 불마성녀도 파면을 간직한 채 죽었다고 하더군. 결국 그녀도 파 면을 고치지 못했다는 말이네. 그런데 우리 연작문주에게는 방법이 있 더라고."

용봉환락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녀의 몸 속에 있는 마성을 뽑아내 서 없앨 수 있는 사람은 야혼밖에 없다.
해서 은연중에 나찰혈불에 야혼에 대해 주입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얼굴에 신경 안 써 임마. 자운의 애인은 부처님이야."

"그거야 나찰혈불의 선택이고. 연작문주는 그저 얼굴만 고쳐주면 되 는 것 아닌가. 세상에서 말일세, 가장 큰 설움이 먼고 하니 바로 안 생 긴 설움일세. 그동안 많은 여자들을 울린 죄 값하는 셈치고 그녀를 고 쳐주게. 네가 맡아줬으면 좋겠지만 그녀가 싫다면 어쩔 수 없고."

"너 정말 그녀가 불쌍해서 그런 거냐, 아니면…."

이상한 느낌에 추기영을 보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눈빛이 깊숙 이 가라앉아 있었던 탓이었다.
문득 그녀의 엉덩이에서 보았던 화상 흉터가 떠올랐다. 추유미란 이 름이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추기영과 같은 성씨의 이름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그래도 그녀는 살아 있잖냐. 또 만났고."

추기영은 우울하게 웃었다. 비록 누님이라 부를 처지는 못되지만 야 혼보다는 나았다. 녀석은 어미와 누이를 죽이고 살아남은 놈이기에.

"얼굴도 몰랐잖아, 임마."

"어머니께 들었다. 배다른 누이가 있었다고. 팔았다고 하더라. 두 냥 에. 씨팔! 그런데 그녀가 이놈과 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

"옥반지?"

추기영이 꺼내든 푸른 반지를 본 야혼은 조금 전 작업할 때 보았던 반지가 생각났다. 그녀는 어머니의 유품이라 했었다.

"왜, 말 안 했냐?"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나 보지 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팔렸고 또 어머니에 대해 물으면 할말이 없잖아. 그리고 아미파를 없애야 할지 도 모르니까. 모르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

"미친 새끼, 생전 처음 만난 누이를 나 같은 놈에게 맡기고 싶냐?"

"너는 돈을 잘 버니까 팔아 넘길 일도 없을 것 아니냐. 그리고 그녀 를 고쳐줄 유일한 사람이고."

"의원처럼?"

"맞아, 의원처럼!"

"씨팔, 좆같은 인생들이네."

추기영 곁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선택은 그녀의 몫이니까."

"그래 그녀 몫이지. 태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추기영의 말처럼 선택은 그녀 몫인데 미리 부터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패는 일이 있잖아. 도백회에서 올라온 정보를 정리하고 있겠지 뭐. 정보가 많이 올라온 모양이네. 하오밀문 제자들이 출발을 했다고 하더구먼. 한 1천 정도 된다고 하던데?"

"누구?"

하오밀문의 제자란 말에 야혼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개봉에 있는 이들을 전부 합쳐봐야 100명도 되지 않는데 1천이라니.

"신녀곡, 소천문, 해룡문, 사해표국, 화화방이다. 그들은 또 언제 꼬드 겨 두었냐?"

안쪽으로 들어온 태웅은 놀랍다는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어라? 집나간 자식들이 애 배서 돌아온 모양이네? 니들 만나기 전 에 녀석들을 만났거든. 태을건곤심법은 초 사형이 익히고 있었고, 나는 무공 몇 개 던져준 것밖에 없어야."

"아미타불! 그리고 멋지게 한마디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무릎을 꿇었 던지."

"맞아 무릎을 꿇었지. 하오대문으로 다시 돌아와 달라고. 내가 생각 해도 그땐 참 대단했어. 잘됐네 뭐. 빈집이 널렸는데."

"하여간 부처님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애새끼들은 키워주면 절 대 안 된다고 했는데."

제 얼굴에 금칠을 하는 야혼을 보며 추기영은 나직하니 혀를 찼다.

"아냐 임마, 그땐 입에 기름칠이 됐는지 주둥이에서 멋있는 말들이 알아서 기어 나오는데 미치겠더라. 내가 감동 먹어버렸다나까."

"됐네, 이 사람아. 그것보다 고 소저 곧 오는데 준비할 건 없냐?"

"준비는 무슨. 여기서 보름 정도 묵어갈 거니까. 맛있는 거나 많이 준비해 놓으면 되겠지. 참! 월향이와 난향이가 보고싶어 죽겠다고 하더 라."

"아미타불! 당연히 보고싶어 해야지. 이 육승을 잊으면 지옥으로 바 로 떨어지는데."

추기영과 태웅은 헤벌쭉 입을 벌렸다. 여호치와 인연이 끊어지면서 잊고 있었던 여인들이다. 문득 그녀들이 보고 싶었다.

"길바닥에서 돈 주운 기분이겠다."

"니미럴타불! 꼭 그런 식으로 표현해야겠는가."

"맞지 뭘 그래 임마.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생각도 안 했잖아."

"금이라면 몰라도 돈이 뭔가 돈이. 앞으로 금 덩어리라 부르시게."

"킬! 하하하하!"

"푸! 하하하!"

서로를 쳐다보며 세 사람은 요란하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차질 없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여전히 결과는 미지수지만 최소한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남궁세원은 전위로!"

"와-아아!"

"곤륜원은 후위로 물러나라. 공동원과 아미원은 전방으로 나서라!"

"와-아아!"

인해(人海), 천의맹 대연무장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었다. 도합 4 천 무인들이 모여있는 대연무장은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열기로 인 하여 흥분의 도가니였다.
더구나 금일 훈련은 와룡전과 령무전의 진법비무(陣法比武). 복마천 강진(伏魔天 陣)을 구축한 령무전과 오합만상진(五合萬狀陣)을 구축한 와룡전 사이의 진법비무는 엄청났다.

아울러 4천에 달하는 무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수백 장 떨어진 곳 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진법비무는 점점 치열해졌고, 점심나절이 되자 절정 에 달했다.

"당가원은 우측으로 돌아라!"

왼편 단상 위에서 내공이 가득 실린 여인의 목소리가 대연무장으로 퍼져 나가자, 한 덩어리가 된 사천당문 무인들은 오른쪽으로 선회하여 빠르게 복마천강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양손의 깃발을 연신 흔들어대고 있는 여인, 꽉 조인 붉은 경장을 입 고 있는 당가려였다. 깃발을 흔들 때마다 상하로 요동치는 그녀의 가슴 은 곧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제길…."

흔들리는 가슴을 내려다보던 당가려는 나직하니 욕설을 뱉어냈다.
성모궁에서 탈출하여 나온 이후로 한번도 입지 않았던 옷을 오늘은 입고야 말았다. 더구나 진을 지휘하는 것도 자신의 임무가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작은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흥! 가슴과 엉덩이 큰 여자를 좋아한다고?"

온갖 경로를 통해 동창제독의 취향을 알아낸 작은아버지는 차마 말 로 하기는 무안했는지 꼼꼼하게 적어서 화를 통해 보냈다.
그런데 그곳에 적힌 내용이 가관이었다.
황실의 절대권자인 동창제독은 가슴과 엉덩이가 크고, 붉은 색 옷을 좋아한다고 적혀 있었던 것이었다.

"젠장!"

아래쪽에서 비무에 열중하고 있는 모든 무인들이 전부 이편을 쳐다 보는 것 같았다. 와락 짜증이 밀려와 신경질 적으로 깃발을 휘둘렀다.
바로 그 순간.

끼이잉!

정의문이 열리는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귓전으로 들려왔다.

"빨리 좀 오지!"

당가려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다렸던 사람. 드디어 동창제독이 천의 맹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랬다.
금일 와룡전과 령무전의 진법비무는 동창제독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 시용이었다. 감연청은 침울해 있던 천의맹 무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로 동창제독의 방문을 이용했다.

동창제독에게는 천의맹의 힘을 보여주고, 무인들에게는 황실의 비호 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서 사기진작을 노렸던 것이다.
감연청의 의도는 적중했다.
네 마리의 백색 설리총이 이끄는 화려한 사두마차가 천의맹 안쪽으 로 들어오자 진법비무에 열중하고 있던 무인들은 더욱 가열찬 함성을 질러댔다.

"엄청나네?"

동창제독의 행렬에 당가려는 입을 턱하니 벌렸다.
수행한 인원만 200명에 달했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걸친 장군들부터 시작하여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는 동창무인들까지.
한반도 경험하진 못했지만 황제의 행차가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흥! 바보 같은 놈,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게."

마차를 향해 달려가는 감연청과 각 문파 수뇌들을 보며 당가려는 낮 게 코웃음쳤다. 그들 속에는 작은 아버지인 당성도 끼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독합하!"

마차문이 열리기도 전에 감연청은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드드륵!

"예까지 나올 필요가 없는데. 대단하군요."

'어떻게!'

마차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인물을 본 감연청은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동창제독 얼굴 때문이었다. 북경 제일인이라 불리는 그의 얼굴은 지극히 평범했다.

아니 평범하단 말이 과할 정도였다.
쭉 찢어진 눈과 콧구멍이 훤히 보이는 코, 그리고 언청이처럼 보이는 입, 오관이 얼굴 가운데로 잔뜩 몰려 있었다.
그런 사람이 동창제독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사팔뜨기?'

급기야 혀를 깨물었다. 처음엔 곁눈질로 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동 창제독을 가만히 살피다보니 그는 사시였다.
정면으로는 사물이 초점이 잡히지 않는 사람.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아- 아닙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단상에 있는 여인은 정혼을 했는가? 보기 좋구먼."

'어떻게 할거냐, 당성. 아무리 권력이 좋다해도 저런 사람에게 딸을 맡길 거냐?'

동창제독의 얼굴이 보통으로만 생겼어도 감연청이 본인이 직접 당가 려는 아직 정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혹여 자신이 나서서 그렇게 되었다는 소 리를 듣기 싫었던 탓이었다.
해서 간단히 소개하는 선에서만 끝내고 나머진 당성에게 일임하고 말았다.

"사천당가 여식인 당가려라고 합니다. 이쪽이 그녀의 아버집니다."

"소생 당성입니다. 제 여식인 가려는 아직…. 정혼을 하지 않았습니 다."

잠시 망설이던 당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호, 그래요? 저런 처자가 아직 혼자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이따 저 녁 때…."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당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데려 갈까 내심 고민했었는데, 동창제독이 요구를 하고 있다.
문득 찬란한 미래가 성큼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쉬고 싶군…."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따라들 오십시오."

황급히 고개를 숙인 감연청은 동창제독 행렬을 천무전으로 안내했다.
동창제독 일행이 천무전 안으로 사라졌으나 와룡전과 령무전의 진법 비무는 끝나지 않았다.
다만 와룡전을 지휘하던 당가려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을 뿐 두 전의 연무는 저녁나절까지 계속되었다.
 "아직 멀었느냐?"

당가려의 처소 앞, 초조한 얼굴로 천무전 쪽을 흘끔거리며 당성은 안 쪽을 향해 소리쳤다.
동창제독을 위한 연회는 벌써 시작되었는데 당가려의 준비가 늦어지 고 있었던 탓이다.

"가주님 다 됐습니다."

화의 목소리와 함께 당가려 처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어 화사한 모습의 당가려가 밖으로 나왔다.

"오-!"

일순 당성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보았던 그 조카딸인 가 싶었다. 옅은 화장기 어린 얼굴은 투명하게 빛났고, 틀어 올린 머리 아래의 목은 사슴처럼 길었다.
반짝이는 그녀의 입술은 묘한 색감마저 불러 일으켰다.

"가시죠, 숙부!"

"그-그래."

차가운 당가려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당성은 어색한 얼굴 로 앞장섰다.

"가려야, 지금은 모르겠지만 사람은 얼굴로 사는 게 아니다. 살다보 면 얼굴의 미추는 보이지도 않는다."

"동창제독이란 사람이 못생겼나 보죠? 그래도 남궁성보다는 낫겠지 요."

"마-맞다. 그 녀석보다는 백 배 낫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 아니 더냐. 우리 사천당문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다행이 그 사람이 너를 보자고 해서…."

"됐어요. 못생겨봤자, 사람이겠지요. 남궁성만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 없어요! 그 거머리 같은 자식만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왼편에 있는 나무를 보며 마치 들으라는 듯 당가려는 크게 말했다.

"죽일 년…,"

당가려가 주시했던 나무 뒤쪽에서 격렬한 파동이 일었다.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쥔 이자는 어제까지만 해도 당가려의 남편감으로 알려져 있 던 남궁성이었다.

멀어지는 당가려의 뒷모습을 보는 남궁성의 얼굴엔 진득한 살기가 어렸다. 굴욕감, 남궁세가의 차남으로 부러울 것 없는 세월을 보냈다.
년초가 되면, 딸을 가진 수많은 가문에서 예물을 보내왔다. 자신을 사위로 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거절한 사람은 자신이었 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가문에서 손을 내밀었고 사천당문 또한 그들 중 한 곳이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발가락에 때 정도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른들 이 맺어주겠다고 하였기에, 자존심을 죽이며 기다렸다.

"후회하게 될 거다, 당가려. 이 남궁성을 무시한 대가는 반드시 돌려 준다. 그것도 조만간."

시야에서 사라진 당가려를 노려보는 남궁성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요동쳤다.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실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십여 명 인물들이 연신 출입문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감연청을 비롯한 천의맹 실세라 할 수 있는 이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동창제독 고명필이었다.
연회를 시작한지 반 시진이 지났지만 아직 그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 이다.

"오십니다!"

밖에서 들려온 짤막한 소리에 안쪽 인물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 났다.
드디어 기다리던 동창제독이 등장한 것이었다.

"앉으시오, 늦어서 미안 하외다."

작달막한 체구의 인물이 손을 저으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당가주께서 오셨습니다."

"쯧! 눈치 없는 사람.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내심 혀를 차며 감연청은 동창제독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조금 전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당가려를 접한 동창제독은 넋을 잃은 듯 그녀를 쳐 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 소저?'

'네 언니. 그런데 얼굴이 그게 뭐예요?'

그 순간 고명지와 당가려는 전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그 사람이 시켜서 이렇게 했지 뭐. 나라고 이런 얼굴로 오고 싶었겠어?'

대뜸 언니라며 살갑게 대하는 당가려의 언행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 다. 소문에 듣기론 성격이 괄괄하다고 하여, 싫어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해! 표정관리가 안되고 있잖아.'

언뜻 미소를 보이는 당가려의 모습에 고명지는 재빨리 주의를 주었 다.

'죄송해요, 언니. 반가운 마음에.'

"당가려라…, 하옵니다."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며 숙이며 당기려는 연기를 시작했다.
우선은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부르르 떨렸다.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실내에 있던 모 든 이들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무인들은 일제히 당성을 보았다. 비웃음, 당성에게 보내는 무인들이 모든 눈빛이 담고 있는 감정이었다.

처음엔 동창제독에게 팔 조카딸이 있는 그의 처지를 부러워했다. 동 창제독을 사위로 맞아들이면 사천당문은 황실권력을 얻게되고, 천의맹 에서도 최고 실세로 등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이번에는 그의 결점을 찾기 시작했다. 애써 격 하시키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들에게 빌미를 제공한 사람은 동창제독이었다.
당가려보다 작은 키에 사팔뜨기 눈을 가진 사내. 내시는 아니라고 했 지만 가는 목소리로 보건대 그 또한 장담할 수 없다.
얼굴은 차 꿈에 나타날까 무서울 정도로 생겼으니. 씹기에 딱 알맞은 사람이 그였다.

어느새 그들은 권력이 뭐 대수냐 하는 식으로 동창제독을 깔보기 시 작했고, 그런 덜떨어진 자에게 조카딸을 팔려는 당성을 파렴치한 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친딸이 아닌 조카딸이니까 팔아먹는다고 단정지어버린 것이다.

"험험! 이쪽으로 오르십시오, 제독합하!"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감연청이 재빨리 아래쪽으로 내려가 고명지 를 상석으로 이끌었다.

"너도 이쪽으로 와서 앉거라!"

가장 상석으로 자리한 고명지는 사시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스듬히 쳐다보며 손짓했다.

"네…."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해쓱하게 변한 당가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얼굴로 고명지 옆자리에 앉았다.

"술이나 한잔 따르거라. 내가 옆으로 보더라도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거라. 보통은 똑바로 보는데 제대로 보고 싶은 때는 고개를 돌려야 하느니라."

'에고 힘들어, 야혼 이 자식 만나면 죽여 버릴 거야. 하필 사팔뜨기를 주문해 가지고.'

'그거 힘들어요?'

'말도 마. 사팔뜨기로 하려면 눈동자를 돌려야 한단 말이야. 집에서 무려 5일간을 연습했어. 어쩔 땐 진짜 사팔뜨기가 된 것 같다니까. 아!
잊고 있어내?'

술잔을 받아들며 당가려를 향해 눈을 찡긋한 고명지는 누군가를 찾 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제독합하, 누굴 찾으시는지요?"

불편한 얼굴로 실내 인물들을 한 명씩 쳐다보는 고명지를 향해 감연 청은 넌지시 물었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탓이었다.

"다른 게 아니고 내 불알친구가 이곳에서 출세했다고 해서 말이오.
그 녀석 말로는 분명히 한자리 얻었다고 했는데…. 이 자식이 나에게 사기 친 것 아냐?"

"무슨…."

실내에 있던 무인들은 일제히 고명지를 보았다. 동창제독의 친구라 니. 천의맹에 들어온 무인들은 세세하게는 아니지만 대강의 신상을 파 악한다. 그런데 동창제독 아니 황실과 관련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얼마 전에 녀석이 소식을 보내왔지 뭡니까. 이곳에 자리를 잡았 으니 한번 놀러오라고. 해서 겸사겸사 왔던 겁니다. 어렸을 때 녀석에 게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성함을 말해주시면 그분을 찾아보겠습니다."

감연청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창제독이 불알친구라 칭할 정도면 보 통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외다. 워낙 사기성이 농후한 녀석이라서. 내가 또 당한 모양이 외다."

이내 고명지는 손을 흔들며 엷게 웃었다. 하지만 말을 아니라고 하였 지만 여전히 섭섭한지 고개를 비스듬히 하여 무인들을 살피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찾지 못했는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야혼 이 자식, 감히 불알친구인 나에게까지 사기를 쳐. 천의맹에 돈 받아야 한다고 해서 직인까지 찍어줬더니. 다른 놈에게 팔아먹고 발랐 구나. 두고 봐라 나쁜 새끼."

"허억!"

"커억!"

"캑!"

감연청을 비롯한 천의맹 수뇌부들은 마시던 술을 쏟아내며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지만 동창제독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자 들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분명 야혼이라 하였다. 하오대전의 전주인 야혼.

  그물은 확실하게 쳐야한다.

 "제길…. 그러게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하오대전 전주도 대소사에 참석시키자고."

참회로를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사람, 다급한 얼굴로 연신 바닥을 찍 어대는 그는 기조당 당주 제갈상운이었다.

"내 말대로 했으면 얼마나 좋아. 사천당문에 기댈 필요도 없잖냔 말 이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제갈상운은 연신 투덜거렸다. 연회장에서 느닷 없이 흘러나온 소리는 황제가 붕어했다는 말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하오대전 전주인 야혼이 동창제독과 친구였다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부하들에게조차 말도 없이 기조당을 박차고 나와 하오대전으로 방향을 잡았다.

"기조당 제갈상운이오! 전주님을 만나러 왔소이다."

커다란 철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고함을 내질렀다. 야혼에게 전후사정 을 이야기하고 입을 맞춰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하지만 굳게 닫힌 철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니 하오대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평소에 보이던 경비무사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길….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듣던지 일단 그를 만나야 한다."

이내 표정을 굳힌 제갈상운은 내공을 끌어올려 바닥을 찼다. 3장에 달하는 철문을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저건…."

철문 위쪽에 올라선 제갈상운은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수십 채의 건물엔 전부 불이 밝혀져 있었다.
분명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밤하늘을 밝히는 휘황한 불빛 들이라니.

"허억! 성라무연대진이 어떻게…."

너무 놀라 제갈상운은 철문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입구에 경비무사 가 없는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이었다. 그동안 하오밀문에서 지었던 건물 들은 진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도 마도련 최고 진신이라 불리는 성라무연대진을.

"허허! 냉소소만 련주로 만들어준 줄 알았더니 그곳마저 접수했단 말이오?"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만독문과 만수문의 양패구상에 하오밀문 삼인 방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짐작했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라 여겼다. 중간에 수작을 부려 두 세력을 싸우게 하는 건 어떤 여건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마도련을 통째로 말아먹는다는 건 아무리 뛰어난 머리를 가 졌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곳은 힘으로 정복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 머리를 잘라 저 친구에게 줘야겠군."

야혼 일행이 마도련을 접수했다고 생각하는 건 성라무연대진 때문이 었다. 마도련 전역을 감싸고 있는 성라무연대진은 극비 중의 극비다.
지난 300년 세월동안 단 한번도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던 진이 성라무 연대진이 아닌가.
그런데 야혼이 알고 있었다.

"제길…. 머리를 좀 굴려봐야겠군."

일순 제갈상운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어렸다. 진이라면 누구에게도 져서는 안 되는 숙명을 타고난 사람. 그들이 바로 제갈세가인이다.
도전적인 얼굴로 하오대전 안쪽으로 들어간 제갈상운은 건물들이 모 여있는 곳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이상하네. 분명 성라무연대진이 맞는데…."

"아냐, 저쪽에 하나가 빠졌어. 그래서 겉모습만 성라무연대진처럼 보 이는 거야."

"헉!"

전면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제갈상운은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철문 근처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야혼은 자신의 출현을 알고 있다.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고수가 이곳에 있다는 의미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야혼의 말대로 중앙의 한 곳을 보강하기만 한다면 하오대전은 용담 호혈과 변하게 될 것이다. 주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금지.

"저…."

이내 표정을 바꾼 제갈상운은 야혼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 을 꺼냈다. 하오대전에 대한 놀람은 접어두고 이곳을 찾은 임무부터 먼 저 수행해야 했다.

"명필이가 날 찾았나 보지?"

"끄응!"

주저앉고 싶었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측하고 이곳 에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계획을 세우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갈상운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짓던 야혼은 뒤쪽을 향해 나지막이 말 했다.

"누님 아까 그 옷 좀 가져다 주시오."

"제기랄!"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야혼이 누님이라 불렀던 여인은 이 곳에 죄인으로 보냈던 나찰혈불이었다.
바로 옆에 나찰혈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고 있던 모든 옷을 하나 씩 벗어붙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은 명필이 녀석에게 뻥을 쳤어. 천의맹에서 엄청난 대우를 받고 있다고."

"그런데, 왜?"

야혼의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상운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속곳까 지 완전하게 벗은 그는 나찰혈불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었다.
비단 그뿐이라면 제갈상운이 지금처럼 놀라진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받아든 옷은 걸레라 불러야 할 정도로 헤진 누더기였다.

"마땅한 옷이 없지 뭔가, 그래서 청정도장에게 빌렸어. 그 친구들에 겐 새 옷으로 한 벌씩 쫙 빼줬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주님!"

급기야 제갈상운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걸치는 누더기를 입고 연회장으로 들어간다면, 동창제독의 진노는 전부 천의맹으로 향할 것이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온 말에 의하면 동창제독과 불알친구라 하였 다. 아니 동창제독이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친구가 야혼이라 하였다.

"이런 머리 좋은 녀석이 왜 이러나 이거. 하오대문을 세우겠다는 야 망을 가진 내가 천의맹을 없앨까. 나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살려서 다스리고 싶어. 아무도 없는 무림은 생각하기 싫거든."

"아미타불! 연작문주, 신발하고 옷하고 어울리지 않으니까 맨발로 가 게. 그리고 천무전까지 뛰어가는 것도 잊지 말고."

"땀이 안 나면 호수에서 세수를 해. 오랜만에 만나 불알친군데 맨발 로 뛰어왔다는 모습은 보여야 할 테니까."

이어지는 추기영과 태웅의 말에 제갈상운의 얼굴은 해쓱하게 변하고 말았다.
혼란스럽던 머리가 이제야 정리가 되었다. 협조, 기조당에 그대로 있 으면서 하오대문을 만드는데 참여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이! 엉덩이에 흙 묻잖아. 기다리는데 그만 가자고."

망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제갈상운의 어깨를 툭 친 야혼은 태웅의 말처럼 참회로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맨발로.

"명필아! 명필이 이 자식아!"

  "전주님! 전주님!"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제갈상운은 경공을 펼치며 야혼의 뒤를 쫓았다.

"저기 추 동생."

"말씀하십시오, 누님시주."

나찰혈불의 부름에 움찔 놀란 추기영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 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야 동생을 말릴 수 있을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무공에서는 천하제일인이지만 그 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여자들?"

추기영에게 이미 들었던 말이다. 여자를 좋아해서 연작으로 불린다고 하였다. 하지만 추기영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했 다.

"녀석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지요?"

"응, 여덟 살 때라 했어."

"그때 그 녀석 앞에는 어머니와 누이가 같이 있었습니다. 녀석이 생 명처럼 걸고 다니는 그 철삭이 그녀들을 묶었던 겁니다." "아미타불!"

야혼이 멀어진 곳을 보며 자운은 불호를 읊고 말았다. 동반 자살을 시도했던 그는 혼자만 살아 남았던 것이었다.

"누님! 염불소리는 녀석이 가장 싫어하는 거니까 앞으로 하지 마십 시오."

"동생은 하…."

이내 말을 멈추고 말았다. 추기영이 습관적으로 읊는 염불은 염불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한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계속 동굴에 계실 겁니까?"

동굴을 쳐다보며 추기영은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다. 그녀만큼은 정상 적인 곳에서 생활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곳이 편할 걸. 그냥 그곳에 있고 싶어. 고마워. 근데 동생을 보고 있으면 참 마음이 편해져. 아미 우린 전생에 형제였나 봐."
추기영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자운은 엷게 웃었다. 어쩐 일인지 추기영하고 대화를 나누면 가슴이 따스해지곤 했다.
그가 머리를 자르고 있어서 그런가 하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건 결 코 아니었다. 욕설을 섞어 불호를 읊는 그를 친숙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그런 모양입니다, 누님시주."

'니미럴타불!'

내심 욕설을 뱉어낸 추기영은 빠르게 동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울 컥 동생이란 사실을 밝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영영 고치지 못하게 된다.
서로 모르는 상태라야만 야혼에게 맡길 수 있다. 그때까지는 그저 타 인처럼 지낼 참이었다.

"그런데, 야 동생을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모르겠어."

"빛과 어둠을 한꺼번에 가진 녀석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녀석이 어둠 을 택하면 무림은 멸망할 것이고, 빛을 택하면 무림은 살아 남습니다.
녀석이 무엇을 선택하던 나와 태웅은 같이 합니다."

"빛을 택했으면 좋겠어. 아니 빛을 택하도록 할거야."

다시 한번 천무전 쪽을 보며 자운은 전의를 불태웠다.
그 시간, 내공을 운용하지 안고 줄기차게 달린 야혼은 비지땀을 흘리 며 천무전 연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뒤따르던 제갈상운이 땀이라도 닦고 들어가라며 애원했지만 야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연회장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는 안쪽을 향해 힘차게 고함을 내질렀다.

"야! 명필이, 너 이 자식!"

"야! 연장!"

야혼의 고함소리에 회답하여 벌떡 일어나던 고명지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고명지뿐만이 아니었다. 실내에 있던 모든 무인들은 경악한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속살이 훤히 비칠 정도로 헤진 옷에 신발조차 신지 않 은 발에는 누런 황토가 발가락 사이로 삐쭉 나와 있다.

그리고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몸에선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나 온다. 개방 거지가 보면 할아버지하고 절을 올려도 하등의 이상할 게 없는 몰골로 야혼은 등장했다.

"성공했다고 했잖아 임마. 그 따위 모습을 보여주려고 제1첩형 자리 를 거절했냐?"

야혼의 모습을 보며 고함을 지르던 고명지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무공에 의한 기운이 아니었다. 권력의 최 정점에 서 있는 자의 추상 같은 위엄이 주변을 강타했다.

'제길!'

감연청을 비롯한 천무맹 수뇌들은 해쓱한 얼굴로 고명지를 보았다.
사팔뜨기, 들창코, 뱁새눈, 내심으로는 한껏 무시했던 동창제독의 숨겨 진 모습은 무공을 익힌 자신들보다 못하지 않았다.
아니 무공으로 만든 기운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다.

"첩형은 들라!"

"부르셨습니까, 합하!"

고명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기를 뽑아든 동창무인들이 안쪽으 로 쏟아져 들어왔다. 순식간에 연회장 안은 살을 애는 듯한 살기로 가 득 들어찼다.

"아냐 임마. 지금 일하다 와서 그래. 네 녀석이 왔다는 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무슨 말이냐? 천의맹 전주가 이 시간에 일을 하다니 그게 말이냐 되는 소리냐?"

핑계라고 댔던 야혼의 말에 고명지는 더욱 강한 기세를 풍기며 고함 을 질렀다.

"내 이것들을. 첩형들은 뭐하고 있느냐?"

"그만해 새끼야. 오랜만에 만났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꼭 그렇게 분위 기를 깨고 싶어! 여기 힘 자랑하러 온 거냐!"

"알았다 임마. 물러가라!"

동창 무인을 물린 고명지는 야혼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보고 싶 었던 사람, 황실 일만 아니었던들 진작 그를 보러왔을 것이다.

"야혼!"
"명필아!"

뜨거운 눈으로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은 이름을 부르며 몸을 날렸 다. 일순 중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제자리에서 불쑥 솟아오른 고명지의 신형이 허공을 밟으며 나아가는 것이었다. 북경을 장악하고 있는 동창제독은 무공에 있어서도 상당한 고수였다.

와락!

중인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굳게 안았다.

'보고 싶었어.'

야혼의 품에 덥석 안긴 고명지는 환하게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냐? 가슴이 작아졌잖아.'

'작아진 게 아냐. 천으로 친친 동여매서 그런 거지.'

'그러다 병 생기겠다. 대충 마무리짓고 하오대전으로 가자.'

전음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그리고 또 다시 응시하는 눈길. 만일 남녀가 그런 눈을 했다면 두 사람을 연인으로 착 각할 정도로 서로를 향한 눈은 강렬했다.

턱!

고명지를 보던 야혼이 불쑥 손을 내밀어 그녀의 아래쪽을 와락 움켜 쥐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명지 또한 야혼과 같은 방법으로 손을 내밀더니 그의 물건을 움켜쥐었다.

"하하! 요즘은 작동 잘 하냐, 옛날엔 몇 달에 한번밖에 작동 안 한다 고 했잖아."

고명지의 아래쪽을 잡았던 손을 위아래로 요란하게 흔들며 야혼이 소리쳤다.

"그 병이 어딜 가겠냐. 그래도 오늘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잖아.
그러니 조만간 회복될 거다. 그나저나 너는 전혀 변함이 없구나."

고명지 역시 태연한 얼굴로 야혼의 물건을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어이없다는 얼굴들,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는 중인들의 표정이었 다. 설마하니 서로의 물건을 흔들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
 비단 놀란 사람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명지야, 마음을 차분히 해라. 지금은 가쁜 숨을 내쉴 때가 아니란 말 이다.'

잔뜩 불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내쉬는 고명지를 향해 야혼은 전음을 보냈다. 연기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흥분해버린 것이었 다.

'그게 어디 마음대로 돼? 얼굴만 봐도….'

더 이상 야혼의 물건을 잡고 있으면 안될 것 같아 재빨리 손을 놓았 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던 이들은 천의맹 최강자들.
거칠어지니 호흡과 목까지 붉어졌던 고명지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세상에…."

감연청은 재빨리 말을 삼켰다. 내시가 아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가늘어 이상하다 여겼었는데 동창제독 고명필은 남색을 밝히 는 인물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당가려를 보았다.

'못 본 모양이군. 하지만 당성은 본 것 같은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당가려의 얼굴엔 별다른 변화가 없는 반면에 당 성은 태연한 표정을 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어쩔 거냐 당성. 이 상황이 되었는데도 조카딸을 동창제독에게 팔아 넘길 거냐?'

참으로 묘했다. 분명 당가려가 동창제독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성이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했다.

"자자! 이러고 있지 말고 저쪽으로 가서 뭐 좀 먹자. 꼴을 보니 저녁 도 아직 못 먹은 것 같은데."

야혼의 손을 잡아끌고 조금 전 앉았던 상석으로 감연청은 황급히 자 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맹주님이 일어나시면 안되지요. 저쪽에서 의자를 가져오겠 습니다."

거의 직각으로 허리를 꺾으며 야혼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런 나쁜 놈! 천무전에 들어와서 협박을 했던 놈이 동창제독 앞이 라고….'

황송한 얼굴로 굽실대는 야혼의 모습에 감연청은 치를 떨었다. 자신 을 죽이려 했던 자를 살려둔 경우는 처음이라 하였다.
꼭 완성된 투견공을 보고 싶냐고 했었다. 그랬던 놈인데.
하지만 감연청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오 저기 남는 의자가 있네. 맹주님은 그냥 앉으십시오. 저를 죄인으 로 만드시려고 하십니까."

정중하게 말을 뱉어낸 야혼은 한쪽 구석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당가 려와 고명지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참! 네가 보냈던 그 계약서 말이다. 10만 냥을 받아내겠다고 했던 것 혹시 받았냐? 설마 그 돈으로 하오전주 자리를 산 건 아니겠지?"

야혼을 보며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막 의자에 앉은 감연청을 보며 묻 고 있었다.

'헉!'

내심 터지는 비명을 급하게 삼켰다.

"아냐, 그때 돈이 급하다고 해서 내가 잠시 빌려줬어. 이자도 꽤 쳐 준다고 했거든."

"그렇습니다, 제독합하. 그때는 자금사정이 좀 좋지 않아서 잠시 빌 려 썼습니다. 제가 이자까지 합쳐서 20만 냥을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래요? 역시 거대단체를 운영하는 분이라 통이 크시군요. 그럼 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네. 종남파 일은 들었을 줄 압니다. 세배로 변상하기로 했으니까 30만냥이 되더군요. 그것까지 합쳐서 하오대전으 로 보내도록 하시오."

"아냐 임마. 내가 무슨 돈이 필요하다고. 우리 하오대전엔 50여 명밖 에 없어 그냥 천의맹에 쓰게 하는 게…."

감연청을 흘낏 보며 야혼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정말로 필요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건 네가 순진해서 그래 임마. 친한 사람일수록 돈 거래는 신중하 게 해야하는 거야. 구리돈 한 문 가지고도 형제간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단 말이다. 안 그렇습니까, 맹주님."

"맞습니다, 제독합하. 그 돈까지 합쳐서 50만 냥을 하오대전에 보내 도록 하겠습니다. 야 전주,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게. 그동안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렇게나마 보상할 수 있으니, 오히려 내가 고맙네."

"그렇게 하시오 야 전주. 우리 와룡전에서도 20만 냥을 따로 보내드 리겠소이다. 앞으로 부하들도 들어올 거고 그럼 지금보다 많은 돈이 필 요하게 될 겁니다."

감연청의 말을 듣고 있던 당성이 질세라 말을 꺼냈다.
당가려라는 건실한 바람막이가 있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당가 려보다는 동창제독의 마음이 돌아설 때를 대비하여 야혼에게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잘못했으면 명필이 녀석에게 해를 끼칠 뻔했는 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야혼은 돈을 준다고 하였던 감연청과 당성을 향해 넙죽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이냐 나를 곤란하게 할 일이란 게."

"다른 게 아니고 하오대전이라고 배정 받은 자리가 허허벌판 아니었 냐, 그래서 네 이름을 좀 팔았다. 천하전장에 가서 네가 준 계약서를 들이밀고 돈을 빌려달라고 하니까…."

"얼마를…."

일순 고명지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그게…. 70만 냥이었거든. 천의맹이 잘되면 한 밑천 떨어질 거고 그 럼 갚을 수 있는 돈 아니냐."

야혼의 말을 듣고 있던 감연청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의 자금 출처가 이제야 밝혀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먹고살라고 준 돈으로 빚을 갚겠다. 그럼 앞으로는 뭘 로 먹고살 거냐. 내가 너 뒤를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천하전장은 텅 빈 국고를 채우는데 가장 중요한 곳이란 말이야. 담보물 없이는 누 가 와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곳이라고. 이제부터는 웬만한 담보물은 돈 을 빌릴 수도 없단 말이다."

"알았어 임마. 그래도 이자는 좀 내려줄 수 있지?"

"너야 최저 이자로 처리가 가능하지. 그나저나 이자도 만만치 않을 텐데, 저기 와룡전에서 좀 더 쓰면 안되겠소. 어차피 한 집안이 될 것 같은데…."

초점을 맞추려는 듯 비스듬히 당성을 쳐다보던 고명지는 말끝을 흐 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30만 냥을 더 만들어 보겠습니다."

한 집안이란 말에 고무된 당성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대답해버렸 다. 울 듯한 얼굴로 앉아 있는 당가려의 얼굴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고맙소, 그럼 나는 이만 나가보겠소. 앞으로 보름을 머물다 갈 예정 이오. 참 숙소는 하오대전으로 할 것이오."

눈앞에 놓인 술잔을 훌쩍 들이킨 고명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야 혼의 손을 잡고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순 당성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조금 전 분명 한 집안이라고 했던 사람이 그다. 그런데 당가려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나가버리다니.
도무지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당 가주께서 알아서 해야할 것 같소이다."

운을 뗀 사람은 감연청이었다.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하 는 말이다. 조금 전 동창제독은 분명 한 집안이라고 하였다.
결국 당성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당가려를 보내야 한다.
 "가려야,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은 얼굴로 사는 게…."

잔뜩 찌푸린 당가려를 설득하려는 순간 나갔던 야혼이 고개를 불쑥 디밀었다.

"명필이 녀석이 날을 잡고 싶답니다. 미안하기도 해서 말을 못했답니 다."

"가려야 따라 가거라."

결국 당성은 당가려의 등을 떼밀고 말았다. 동창제독이 날까지 잡자 고 했는데 싫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한 당가려는 망연한 얼굴로 출입구를 항해 걸었 다.

"허허! 겁천십웅의 무공이 권력 앞에선 무용지물이구먼. 힘든 결정을 하셨습니다, 당 가주."

축 늘어진 당가려의 어깨를 보며 감연청은 한탄스런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당가려를 지칭했지만 딱히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처지, 동창제독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했던 방금 전의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린 명분을 얻었습니다. 100년 전처럼 황실과 하나가 되었 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당 가주. 앞으로 가주의 역할이 참으로 큽니다. 많은 도 움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연청의 뒤를 이어 령무전주인 우자령이 당성 앞으로 다가오며 말 했다. 날을 잡고 싶다고 하였던 한 마디의 위력이었다.
조금 전까지 조카딸을 팔아먹는 당성의 행동을 비웃던 자들이 아니 었던가.
그랬던 그들이 금세 마음을 바꿔 당성을 위로하는 말을 던지는가 하면 잘 부탁 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걱정 마십시오. 이 당성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중인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는 당성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이제 시작인 게야. 지금부터 사천당문의 시대가, 아니 당성의 시대가 열린단 말이다.'

"좋은 날입니다. 우리끼리 술 한잔하도록 합시다."

조마조마했던 마음에 지금껏 마시지 못했던 술잔을 쳐들었다.

"우리 천의맹은 승리할 겁니다. 무림사에 영원히 기억될 문파로 남을 겁니다."

중인들을 둘러보는 당성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자신을 따라 잔 을 들어올리는 사람들. 문득 맹주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한껏 고무된 얼굴로 당성은 재차 고함을 질렀다.

"위하여!"
"위하여!"

각 문파의 문주들과 가주들의 함성소리는 천무전을 떠나는 야혼 일 행의 귓전에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병사들을 뒤로 물리고 손수 마차를 몰던 야혼은 천무전에서 들려오 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지게 좋기도 하겠다, 자식들."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야혼은 마차 안에 앉아 있는 당가려를 흘낏 보았다.

"명지와 이리 와서 고삐 좀 잡아봐라."

"알았어요?"

마차 문을 열고 몸을 날린 고명지가 마부석으로 자리하자 그녀에게 고삐를 맡긴 야혼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심란해?"

당가려 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물었다. 비록 같이 모의하여 꾸몄다 고 하지만 의사도 묻지 않고 팔아 넘기듯 넘겨버린 당성의 행사가 못 내 섭섭했을 것이다.

"심란하기는, 우리가 꾸민 일인데. 그런데 기분이 묘해. 정말 팔렸다 는 기분이 들어. 나는 가문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그런 느낌 말이 야. 내가 너와 같이 일을 꾸미지 않았더라면 아마 남궁성에게 보냈을 거야. 강제로."

"그건 맞다. 그래서 하는 말이 있잖아.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말이야. 이 잘난 야혼을 만났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저 애나 쑥 쑥 많이 나주면 된다."

"애? 그러니까 너와 나의 자식을 말하는 거야? 근데 한가지만 물어 보자. 그동안 너와 내가 가진 관계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은데 왜 난 애 가 안 들어섰지, 소소 언니도 그렇고. 또 명지 언니도."

애라는 말이 나오자 문득 궁금해졌다.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한 두 번이야 어떻게 넘어간다지만 야혼과의 관계는 거의 셀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야혼을 아는 사람은 절대 그런 말 안 한다."

"선수란 말이야?"

"당연하지, 항상 먼저 떨어진 너희들이 이 야혼의 고충을 알기나 하 겠냐. 처녀가 애를 배면 큰일 아니냐."

"훗! 차라리 애를 낳아버릴 걸 그랬어. 그랬다면 오늘 같은 더러운 기분은 들지 않았을 텐데."

마차 밖으로 스쳐 가는 나무들을 보며 당가려는 나지막이 중얼거렸 다. 가문을 위한답시고 야혼이 구한 비급을 외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 던가. 야혼과 관계를 갖기 전에는 비급을 훔쳐보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었다.
그런 노력을 누구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
문득 서럽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저러다 울겠다, 야혼. 내 마누라 울리면 죽는다.'
 울먹이는 당가려의 목소리를 들은 고명지가 전음을 보내왔다.

'걱정 마라. 이 야혼은 절대 여자를 울리지 않는다. 환희의 교성을 지 르게 만들지.'

고명지를 향해 전음을 보낸 야혼은 당가려의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려 무릎위로 앉혔다.

"왜이래…. 언니 있는데서."

시커먼 손이 불쑥 가슴속으로 들어오자 질겁한 고명지는 살피듯 마 차 밖을 보며 낮게 말했다.
하지만 야혼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귓전에 대고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오늘 넌 너무 예뻐! 미치도록."

"언니가 듣는단…. 학!"

가슴을 더듬던 손이 빠르게 엉덩이 쪽으로 내려가자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싫…. 으읍!"

앙탈부리듯 발버둥치던 당가려는 이내 잠잠해졌다. 야혼의 입술에 막 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탓이었다.

'나쁜 놈!'

반짝 눈물을 떨군 당가려는 눈을 감고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말았 다. 이제는 가족보다 더 편해진 사람.

'언제 시간 나면 개봉에 가자. 그분 장인어른이 맞다. 하오대전 내 방 에 가면 장인어른이 만들어준 상자도 있어.'

전음보다 한 차원 높다는 심어가 그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말로만.'

'전부 다 줄게.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의 입술을, 혀를 음미하며 심어를 보냈다. 아버지, 어린 시절 아버 지로 불렀던 그가 숙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중원을 헤매고 다녔다.
붉은 색 혈린만독편을 숨기기 위해 튀는 옷을 입은 이유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자신의 소문을 아버지가 듣게 된다면 더 빨리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도발적으로 입곤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개봉에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십여 년을 같이 살아왔단다.

"그럼 증명해봐."
 '여기서?'

"괜찮아. 양심신공을 익혀서 밖으로 새나갈 소리는 없으니까."

'정말?'

양심신공을 익혔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당가려는 심어를 계 속 보냈다.

"정말이라니까 그러내. 믿지 못하겠으면 명지를 불러봐."

"그래? 언니!"

언제 우울한 표정을 지었냐 싶게 환한 미소를 띤 당가려는 고명지를 불렀다.

"거봐, 안 들리잖아. 그러니까…."

"미쳤나봐. 그러다 돌아보면 어쩌려고."

급하게 치마를 걷어올리는 야혼의 손을 잡으며 당가려는 정색을 했 다. 양심신공이 신기했을 뿐이지 마차에서 관계를 갖겠다는 의미가 아 니었다.

"에게! 조금 전에는 전부 준다고 했잖아."

"그거야 둘만 있을 때 이야기지."

"둘만? 그럼 또 방법이 있지."

마차를 잠시 둘러보던 야혼은 천장에서 천장부근에서 몇 개의 나뭇 조각을 뜯어냈다.

"내가 동굴말고 확 트인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거든."

"진식(陣式)? 그만해 임마."

마침내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그렇지 마차 안에 다 진식을 설치하다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급기야 치마를 들어올린 야혼은 당가려의 속곳 한쪽을 잘라내더니 벗겨버리고 말았다.

"미쳤어? 으읍!"

'이 나쁜 놈아. 적어도 몸을 씻고 해야 할 것 아냐. 이렇게 냄새나는 몸으로 여자를 안는 무식한 놈이 어디 있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심어를 보냈다.
그녀의 말이 효과가 있었을까. 바지가랑이를 내리려던 야혼은 굳은 얼굴로 우뚝 동작을 멈췄다.

"내가 한 말 때문에 짜증나는 거야?"

자신의 말 때문이라 생각한 당가려가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아냐. 한 놈이 이 마차를 쫓아오는 것 같아서."

"난 또, 남궁성일 거야. 와룡전을 나설 때 나무 뒤에 숨어 있었어. 치 마 내려 줘."

"가만 있어봐. 저 자식을 어떻게 잡을 까 생각 좀 해보게."

당가려의 엉덩이를 슬슬 쓰다듬으며 야혼은 생각에 빠졌다. 남궁성, 남궁세가를 하오대문 아래로 이끌어줄 녀석으로 점찍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온 것이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일단 그물을 쳐놓고 하던 일 계속하자."

당가려의 볼에 소리나게 입을 맞춘 야혼은 창문을 통해 마차 밖으로 나왔다.

"계속하지 왜 나오십니까?"

"명지 네가 섭섭해 할까봐 위로해주려고 나왔지. 모든 마누라에게 평 등하게 대하자는 게 나의 신조거든. 언니는 두 번, 동생은 한번."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은 고명지를 눈앞으로 양손을 기이하게 휘둘 렀다.

"하악!"

색색만화공이 발휘된 야혼의 손에 나직한 비음을 뱉어내며 놀란 눈 으로 그를 보았다. 색색만화공만 펼친 게 아니라 내공으로 자신을 끌어 당기고 있었던 탓이었다.

'네가 나를 덮친 것처럼 해.'

'학! 왜?'

'그물을 쳐야 하거든. 어서!'

"아흑!"

급기야 참지 못하고 고명지는 야혼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야혼의 품속으로 뛰어든 그녀의 행동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 마차를 따르던 남궁성이었다.

"저럴 수가….제독 놈이 남색을 밝혔단 말인가."

싫어하는 하오전주를 겁탈하듯 껴안는 모습을 보며 남궁성은 경악한 얼굴을 했다. 말로만 듣던 남색을 목격하고 있다.
그것도 당가려는 빼앗아간 동창제독이. "확실해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차가 움직이는 전면을 보던 남궁성은 멀리 보이는 커다란 바위쪽 으로 몸을 날렸다.
그곳에 몸을 숨기면 마차와는 3장거리 정도 떨어진다. 마부석에서 벌 어지는 광경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잠시 후.
바위 뒤쪽에서 고개를 내민 남궁성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내공으로 안력을 키울 필요도 없었다. 두 명의 사내가 선명하게 보였 다. 더하여 그들의 실랑이까지.

"싫다니까 왜이래. 나는 싫다고."

"제발 야혼 나는 네가 더 좋단 말이야. 그러니까…."

흥분한 듯 코맹맹이 소리가 남궁성의 귓전에 들려왔다. 그리고 하오 전주의 바지를 찢듯이 벗겨내는 동창제독의 모습이 보였다.

'우욱!'

구토가 치밀어 올랐으나 애써 참았다. 확실하게 봐둘 참이었다. 동창 제독이란 놈이 남색을 밝히는 광경을.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남궁성의 시야에 야혼의 기둥을 쥐고 흔 드는 동창제독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야혼의 불기둥을 흔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헐떡이던 동창제독 은 급기야 그곳을 향해 고개를 처박았다.

"죽일 놈! 한 여자의 일생을 그런 식으로 망쳐놓다니. 권력을 쥐었다 고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여겼더냐! 이 천의맹이 허수아비 집단인 줄 알았단 말이냐!"

진득한 살기와 함께 짓씹듯 말을 뱉어낸 남궁성은 마차에서 멀어졌 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있던 곳에서 토악질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 작했다.

"네 놈만큼은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이 남궁성의 목숨을 걸겠단 말이 다."

누군가 그랬다. 여자의 질투는 남자의 일생을 망치고, 남자의 질투는 파멸을 불러온다고. 참회로 안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보며 남궁성은 다 시 한번 분노에 몸을 떨었다.

"녀석 떠났으니까 그만해."

"아이고 힘들어라. 그 자식 빨리 좀 가지 사람을 힘들게 해."

고개를 들어올린 고명지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입으로는 힘들다고 투덜거렸지만 결코 힘든 얼굴이 아니었다.
아쉬운 듯 야혼의 물건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슬슬 쓰다듬 으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잊은 게 있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고명지가 아닌 고명필이란 사실을.
진저리 치듯 몸을 부르르 떨던 야혼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꿈에 나타날까 무서우니까 얼굴 바꿔!"

"아이고, 조금 전에는 좋아 죽더니만."

고명지의 얼굴 근육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그녀의 본래 모습이 나 타났다.

"마차는 당신이 몰아요. 나는 가려 동생하고 이야기나 좀 해야겠어 요."

야혼의 바지를 여며준 고명지는 야혼이 했던 것처럼 전면 창문을 통 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마차를 종종 애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이럇!"

도란거리며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야혼은 채찍을 휘둘렀다.
 화들짝 놀란 말들이 낮게 울더니 참회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렸다.

"아미타불! 가려시주 오랜만입니다.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그려. 첩 형 시주는 더욱 예뻐졌습니다. 어서들 오십시오, 하오대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아-!"

마차에서 내린 고명지와 당가려는 전면 광경을 보며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수십 채의 건물의 처마에 색색의 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 이었다.
마치 연등회에 와 있는 듯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어느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전부가 빈집들이니까 선택만 하시면 됩 니다. 내부는 천무전이 부럽지 않도록 최상의 자재를 사용했고, 하인들 도 항상 대기중입니다."

전면 집들을 가리키며 태웅은 시종처럼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야혼은?"

집들을 쳐다보던 고명지가 야혼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뒤에 서 들려왔다. 역시 조금 전처럼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태웅이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옛날부터 연장문주는 동굴을 좋아했습니다. 여 자를 꼬시면 언제나 동굴을, 아 실수를 했습니다. 여자를 자빠뜨릴 때 는…. 또 실수군요. 좌우간 연장문주가 가장 선호했던 곳은 곰이 살던 동굴이었다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나는 가서 씻고 올게."

"당연히 씻어야겠지요. 오늘 같이 좋은날 씻지 않는다면 잘라서 개를 줘야지 남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지요. 두 분은 그만 침실로 들 어가시지요."

"태웅 너 점잖아 진 거냐, 아니면 바보가 된 거냐?"

제법 정중한 얼굴로 연신 공대를 하는 태웅을 보며 고명지가 물었다.

"아미타불! 점잖은 것도 아니고 바보가 된 것도 아닙니다. 제독시주.
우린 그냥 배가 아플 따름입니다. 사돈이 땅 산 것도 아닌데 왜이리 배 가 아픈지. 무슨 복을 타고났는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정력제를 처 먹지 않나, 가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여자들은…. 어쩔 땐 소승은 자살하고 싶어집니다. 새로운 인생을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황실에 좋은 정력제 같은 것 없습 니까. 황제 녀석이 꼬불쳐 두고 혼자 먹는 그런 것 말입니다."

"에라 이 썩을 놈아. 제발 부탁이니까 머리 길러라, 응? 왜 머리를 잘라 가지고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냐고. 동생 가자."

두 사람의 넉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고명지는 당가려의 손을 잡 더니 야혼의 집이라 하였던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잘 꾸몄네?"

집안으로 들어온 고명지는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환하게 웃었다.
네 개의 침실과 하나의 거실 그리고 서재까지 겉보기에는 동굴이지 만 안쪽은 일반 가정집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바닥에 깔린 파사국 양탄자는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킥!"

서재를 살피던 당가려가 나직한 웃음을 토해냈다. 바위를 파서 책장 을 만든 그곳에는 온통 춘서들로 가득했다.
문득 불귀동에서 생활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던 것이다.

"이상하지?"

뒤따라온 고명지가 춘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가요?"

"저런 걸 모으는 사람을 사랑해버린 우리들 말이야."

"언니도, 저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한번 보면 빠져나오질 못해요.
야혼의 말을 빌리면…."

"중독된다고 하지."

"어? 뭔 목욕을 그렇게 빨리 하냐."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당가려는 슬쩍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땀만 씻어내면 되는 게 목욕이라고 할 것 있나. 그것들은 나중에 보 고 일단 이쪽으로 와라. 태웅 녀석이 재미있는 소식을 가져왔다."

"재미있는 소식?"

의아한 얼굴을 한 고명지와 당가려는 야혼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나왔 다. 그곳엔 태웅과 추기영이 제법 심각한 얼굴로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뭔데?"

자리에 앉자마자 당가려는 물었다. 지금까지 야혼 일행이 해왔던 일 은 순조로웠다. 오늘 연회장에서도 몇 마디 말로 1백 만냥이라는 거금 을 갈취했으니 어쩌면 천의맹에 들어와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고 있데. 남천악이."

야혼의 표정 또한 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조사된 바로는 남천악의 공백은 1년이 넘었다. 그동안 몇 번에 걸쳐 남천악에 대해 조사했지만 도백회의 정보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선무전 무인들과 같이 천의맹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공을 완성하기 위해 떠났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

"뭐가 걱정이야, 무공으로 치자면 야혼을 따라갈 사람이 어디 있다 고." 야혼의 말에 고명지는 피식 웃고 말았다. 심각한 말이라기에 뭔가 했 다. 그런데 기껏 남천악의 귀환이라니.
그런 현상은 당가려도 마찬가지였는지 고명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재미있는 소식은 맞네. 못 받았던 빚을 받게 됐으니까."

남천악이 야혼에게 진 빚은 두 가지다. 내기를 해서 졌던 빚과 성모 궁에서 야혼에게 일장을 날렸던 빚.
내기에 의한 빚은 몰라도 성모궁에서 야혼이 당했던 일장에 대한 빚 은 반드시 갚아야하는 것이다.
당사자인 야혼보다는 고명지가 더 살기를 흘리며 말했다.

빚에 대한 이야기는 하오대전에서만 언급되는 말이 아니었다.
곤야평이 내려다보이는 옥산 정상. 안대를 손에 든 남천악은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천의맹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의맹에 들어와 있다고 들었다 버러지 놈! 네 놈 때문에 난 십만 대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네놈 때문에."

십만대산에서 기연을 얻고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버리지 같은 놈 때문에 그곳으로 갔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받은 대로 갚아주겠다."

낮게 소리친 남천악은 뒤편을 향해 가볍게 손을 저었다. 마치 부채질 을 하는 것처럼.

"저 바위처럼 만들어 주겠다. 존재를 지워주겠담 말이다."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는 바위를 가만히 주시하던 남천악은 이내 꺼지듯 정상에서 사라졌다.
이상했다. 그는 분명 5장 높이의 바위를 향해 무공을 펼쳤다. 하지만 수천 년 간 옥산 정상을 지켰던 바위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이었을까.
결코 그건 아니었다.

서늘한 바람이 스치듯 불어오자 남천악이 했던 말의 의미가 확연하 게 드러났다.

스스스!

가공할 광경이었다. 5장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가 위에서부터 천 천히 가루로 흩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일 수에 가루로 만드는 것이 아닌, 그가 떠난 한참 뒤에 가루로 흩어 지는 가공할 광경. 심검을 넘어선 자가 아니면 결코 꿈도 꾸지 못할 엄 청난 무공이었다.

언령제세공(言令除世功), 겁천십웅 10명의 무공을 바탕으로 만들었던 잠사옹의 무공을 대성했다는 의미였다.

하오대문 8권

이건 그동안 쌓인 이자다!




기대치에 이르지 못한 성과는 실패했을 때보다 더한 실망을 안겨주는 경우가 살다보면 종종 있다.
지금 정의문을 통과하여 천의맹으로 들어가는 선무전 무인들이 그랬다.
한 달 전 정의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 때만 해도 그들은 사기충천했다. 강호 무림을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천의맹으로 복귀하는 그들의 모습은 전쟁터에서 도망쳐온 패잔병을 방불케 하였다.
힘없는 걸음걸이, 신음하는 부상자들,
그리고 측은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무인들의 모습은 더 이상 강호의 지배자라는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힘을 내라, 우린 승리했다!"

애써 자위하며 고함을 질러보지만 유만량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500명이 출병하여 천의맹으로 돌아오는 점창파 제자는 불과 150명에 불과하다.
천의맹에서 더 이상 점창파가 설자리가 없다. 강호 무림의 중소문파보다 못한 전력으로 전락한 점창파.
뒤를 돌아보던 유만량은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런 심정은 청성파 문주인 태황검(太皇劒) 사일극(司一極)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 문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금불산을 떠나오면서 내내 고민했던 일은 앞으로의 거취였다.
죽호곡에서 후퇴하며 본 광경, 무당파 도인들은 거의 진입을 하지 않았었다.
점창파와 청성파만 제자들을 희생시키며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처럼.
청운자는 교묘했다. 동시에 진입하기로 하였던 약속을 어기고, 늦게 진입했음에 틀림없었다.
은신해 있던 마교도들이 청성파와 점창파로 몰린 건 당연하고,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렇다고 무당파를 욕할 수도 없다. 옆에서 지켜본 상황이 아니고,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추측이 확실하다고 유만량은 믿고 있다.

"선무전에는 발을 들이지 않을 겁니다. 일단 일야숙으로 들겠습니다."

멀리 떨어져 오는 청운자를 흘낏 본 유만량은 짓씹듯 말했다. 비열한 무당파 무인들과 한 지붕 아래 있을 수가 없다.
종남파처럼  탈퇴를 선언하고 본산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본산은 건물  한 채 남아 있지 않고, 타버린 건물을 다시 세울 자금도 없다. 천의맹은 마지막 보루였다.

"저도 그래야 겠습니다. 청성산으로 돌아가던지…."

고개를 끄덕인 사일극은 뒤를 돌아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청성파 제자들은 일야숙으로 간다. 일단 그곳에서 대기하라!"

"점창파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일야숙으로 간다!"

사일극과 유만량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점창파와 청성파 무인들은 일야숙으로 방향을 바꿨다.
대연무장에서 있을 귀환보고에 참석할 여력을 가진 무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끙!"

일야숙으로 이동하는 점창파와 청성파 무인들을 보며 청운자는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마라 정운. 어차피 돌아오게 돼있다. 저들은 선무전이 아니면 갈곳이 없다.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놈들 아니냐.'

남천악은 비릿하게 웃으며 청운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섭섭한 마음에 지금이야 일야숙으로 가고 있지만 자존심이 강한 그들은 결국 선무전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리라.
마교 척살이라는 한 가지 이념으로 뭉친 곳이지만 천의맹도 엄연한 경쟁사회.
대우를 받기 위해선 그들에게는 선무전 만한 곳이 없다.

'일단 우리는 대 연무장으로 간다. 많은 희생이 마교와의 전쟁에서 승자는 우리다.'

'알겠습니다, 진법사자님.'

고개를 슬쩍 숙이며 전음으로 대답한 청운자를 무당파 제자들을 돌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제자들은 대 연무장으로 간다. 지금부터 복귀식을 거행하겠다."

'돌아왔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천의맹부터 시작하여 중원을 아우르게 되리라.'

우뚝 멈춰선 채 천의맹 건물들을 노려보던 남천악은 천무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부이자 맹주인 감연청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다른 전에 비해 별다른 임무도 없고,
집을 만드는 일 외에는 별다른 할 일도 없는 하오대전의 시작은 언제나 해가 중천에 오를 때 시작된다.
다만 아침을 준비하는 자들만 깨어있을 뿐이었다.
그들 또한 다른 자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어 하오대전의 아침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그러한 사정은 야혼의 동굴이라 하여 다르지 않았다.
양탄자 위에 어지럽게 뒹구는 술병들이며, 여태껏 빠지지 않은 술 냄새가 동굴 안에 가득했다.
더욱 가관인 나체로 누워있는 세 사림이었다.
천장을 보며 똑바로 누워있는 야혼의 한 팔씩을 점령한 두 여인이 
각자의 다리를 야혼의 다리위로 걸친 상태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아이고 머리야."

세 사람 중 가장 정신을 차린 사람은 오른편에 있던 고명지였다.

 "도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그래도 남자 품에서 깨어나는 기분은 괜찮네."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아직 잠들어 있는 야혼의 가슴을 천천히 쓸었다. 
그의 몸에 난 흉터를 음미하며 아래쪽으로 내려가던 고명지가 일순 손을 멈췄다.

"…?"

있어서는 안될 게 손에 잡혔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게?"

번쩍 눈을 떠 손에 잡힌 그것을 확인한 고명지는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건너편을 보았다.
당가려였다. 자신과 똑 같이 발가벗은 채 야혼의 배 위에 한 쪽 다리를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이야?"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태웅이 가져다 주었던 술을 마신 기억은 분명히 났다.
오랜만에 야혼을 만났고, 그의 거처라 그 독하다는 죽엽청을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가 몇 번의 손짓을 하자 몸은 뜨겁게 반응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였다.
다른 날보다 더 뜨겁게 그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엔 자신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등뒤에 당가려가 있었다. 
그녀 또한 반쯤 풀린 눈으로 야혼을 탐하고 있었다. 문득 폭발적인 그녀의 몸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사막에서 보았던 천애설의 몸에 필적할 정도로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는 컸다. 질투였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그녀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열정적으로 야혼을 탐했다.
어린 시절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했던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야혼을 녹였다.
당가려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 심정이었는지 미친 듯이 야혼을 탐했다. 야혼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싸움을 벌였을지도 몰랐다.
몇 번의 관계를 가졌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욕정에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나중엔 당가려를 만지기까지 했다.
꿈이기에 가능하다고 여겼다. 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간밤의 상황은 꿈이 아니었다.

"설마…."

화들짝 놀란 고명지는 바닥에 뒹구는 술병 하나를 허공섭물로 당겼다. 

"이런 나쁜 놈들."

상큼 눈을 치뜨며 나직하니 소리쳤다. 주향과 섞인 희미한 냄새. 야혼의 상비약인 농약냄새였다.
간밤에 광분하여 서로를 탐했던 원인은 바로 춘약이었다.

"내가 미치고 말지, 그 놈들을 그냥. 헥! 깼어?"

내심 투덜거리며 당가려를 보던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당가려가 이편을 보며 싱긋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질 있나봐, 놀라지도 않는걸 보면."

"맨 정신으로 한 적도 있는데요, 뭘."

"혹시, 소소랑?"

"그때는 그럴 상황이었어요. 이 녀석 몸 속에 들끓고 있던 약 기운을 내공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랬어요.
야혼이 안나오려 했거든요.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고."

불귀동 생활을 생각하는 지 당가려의 얼굴이 아득하게 변했다. 그에게 모든 걸 허락했던 곳.
단 몇 개월에 불과했지만 그때만큼 행복했던 시절은 없었다.
만일 다시 그때와 같은 상황이 온다면 이번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야혼과 같이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걱정 말아. 그때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테니까. 나를 믿어. 남자를 보는 눈은 지금껏 틀린 적이 없거든."

당가려의 손을 잡으며 고명지는 말했다. 순탄하게 크진 않았지만 전날 겪었던 일은 충격이었음에 분명했다.

"그래요. 내가 유일하게 믿는 남잔데."

"헛! 완전히 짐승이다, 짐승. 어떻게 또 반응을 하냐?"

아래쪽을 보던 고명지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하는 말이었지만 실제 그녀는 놀랐다.
상식을 뒤엎는 야혼의 몸 때문이었다. 밤새도록 두 여인에게 시달린 그가 아닌가.
보통 남자 같으면 코피를 쏟고 며칠 동안 몸져누워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의 물건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 

"그건 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배설 욕구 때문이래요."

"맞다, 남자는 말이다, 아침이 되면 방광에 들어찬 물을 버려야해. 버리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보내는 경고야."

눈을 뜬 야혼이 두 여인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집어 넣어 가슴을 틀어쥐며 싱긋 웃었다.

"씨팔! 완전히 천국이다. 이렇게 몇 천년을 사는 방법 없을까?"

"우리와 몇 천년이나 살고 싶어?"

곁눈질로 고명지의 얼굴을 살피며 당가려는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고명지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야혼에게 가슴을 잡혔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같은 입장, 서로를 보며 웃고 말았다.

"이렇게 예쁜 여자들을 두고 억울해서 어떻게 죽어. 몇 천년 아니라 몇 만년을 살아야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번 더…."

"싫어 임마. 벌건 대낮에 무슨…."

화들짝 놀라며 당가려는 고개를 흔들었다. 간밤에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구나 밖은 환하게 밝았을 것이 아닌가.

"알았어. 그럼 밤에만 하지 뭐."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도 알아, 앞으론 가려 너부터 해줄게. 농약기운이 생각보다 강해서 어젯밤엔 나도 이성을 잃었거든."

"농약?"

앞으로도 계속해서 같이 자겠다는 야혼의 말보다 약이란 말이 더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간밤의 상황이 이상했다.
아무리 술을 먹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타오를 만한 상황은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술 먹은 다음부터는 거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끙차! 따라 와봐."

두 여인을 안은 채 벌떡 일어난 야혼은 서재로 들어갔다.

"여기 있는 이놈이 장인 어른이 만들어준 선물. 그리고…,"

번호를 눌러 뚜껑을 열어 안쪽에 들어있는 자루를 꺼냈다. 

"세상에, 이게 다 농약이란 말이야."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고명지는 놀란 눈으로 자루를 보았다. 자신의 무릎 높이 까지 올라오는 자루였다.
마도련에 있을 때 야혼이 농약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새끼손톱 크기의 농약에 수인들은 발정난 짐승처럼 헐떡거렸다.
그런 농약이 한 자루나 있었다.

"이 농약과 하오마즙을 섞어서 특제농약을 만들어 냈거든. 아마 태웅 녀석이 시험하느라 술에 탓을 거야."

"얼마나 탔는데."

입을 턱 벌리며 고명지는 물었다. 하오마즙으로 반죽한 농약이라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한 건 나도 몰라. 다만 하오마즙과 농약을 섞으면 무색 무취로 변한다는 말은 들었어.
앞으로도 실험을 많이 해야 할거야. 얼마나 넣으면 골로 보낼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하니까."

"그럼 우리가 그 실험대상이 돼야 한다고?"

아버지가 만들었다는 상자를 살피던 당가려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셋은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냐. 실험 대상으로는 왔다지. 싫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볼게."

"알았어 임마, 우리가 하면 되잖아."

다른 사람을 찾아본다는 말에 당가려는 빽 고함을 질렀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우리가 안 돼. 이제 간신히 동창제독에 올랐는데 좀더 오래 살고 싶단 말이야."

또다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는 야혼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고명지와 당가려는 문을 열고 도망쳤다.

"캬! 좋다, 곰굴보다 백배 좋구나."

좌우로 흔들리는 두 여인의 엉덩이를 주시하며 야혼은 기분 좋은 웃음을 날렸다.

"그런데 특제농약을 어디에 쓰지?"

만들기는 했지만 마땅히 써먹을 곳이 없었다. 처음 목적은 천의맹 무인들을 단체로 색마를 만들려고 했었다.
그런데 손을 쓰기도 전에 알아서 뒈져주고 있다. 만들기는 했지만 특별히 쓸 곳이 없었다.

"일단 만들어두는 거야. 정 안 되면 정력제로 팔아도 되니까. 그것도 안되면 내가 먹지 뭐."

이내 마음을 정한 야혼은 자루를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야혼! 욕실에 물 받아 놨으니까 씻어. 손님 오기로 했데."

밖으로 나서는 야혼의 귓전에 당가려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 이제 빈집을 채울 때가 된 건가?"

손을 번쩍 쳐들며 기지개를 편 야혼은 나직한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향했다.
야혼이 욕실로 향하는 그 시간, 참회로를 따라 점창파와 청성파 무인들이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이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는지."

선무전 쪽을 힐끔거리며 사일극은 유만량을 향해 말했다.
제자들을 일야숙에서 쉬게 한 후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제갈상운이 찾아왔다.
그 역시 점창파와 청성파가 선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왔는지 대뜸 하오대전으로 가는 게 어떻겠다고 했다.
내심 어이없어 그를 빤히 보았다.
하오대전이라니, 아니 하오밀문이라니. 미래가 막막했고, 답답했지만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곳이다.
단 한마디, 최소한 선무전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말 때문에, 하오대전 행을 결정하고 말았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오대전에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나마 좀 낫겠지요."

"유문주님 말이 맞습니다. 지금 점창파나 청성파 무인들이 그나마 기를 펼 수 있는 곳은 하오대전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빈집과 자금이 있고, 두 문파에는 무인이 있습니다. 금력과 힘의 결합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제는 하오전주를 무시할 사람은 천의맹에 없습니다. 먼 미래를 위해서도 서로 친해지는 게 좋은 줄 압니다."

유만량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상운이 말했다. 그런데 제갈상운의 행동 또한 이상했다.
청성파나 점창파의 하오대전 행을 감연청이 잠시 쉬는 것이라 하였을 때, 동의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지금 행동은. 마치 두 문파를 하오대전에 잡아두려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물론 동장제독의 불알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야혼의 신분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제갈상운의 행동은 단순히 그 때문은 아닌 듯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도움을 주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의 행동이 분명했다.
잠시 후.
청성파와 점창파 무인들 앞에 사장 높이의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대단하군…."

검은 색 철문을 유만량은 놀란 눈으로 보았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열어나 줄지…."

내심 걱정이 앞섰다. 나찰혈불이나 대력자를 기절시켜 끌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
구파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좋은 감정을 지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무려 100년 간을 무시당하며 살았던 하오밀문이 아닌가. 하지만 유만량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문을 열어라!"

절벽 위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4장 높이의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하여간 머리는.'

곧바로 문을 열어 일행을 맞이하는 하오대전을 보며 제갈상운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찰혈불과 대력자를 맞이할 때는 철문 밖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던 그들이 이번에는 한마디 말도 없이 즉각 문을 열어주고 있다.
자신이라 해도 그렇게 했을 것 같았다. 더욱 놀라운 일은 안쪽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하오대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야 전주님!"

환하게 웃으며 일행을 맞이하는 야혼의 모습에 제갈상운은 깜짝 놀라며 그를 불렀다. 바로 문을 열어줄 것이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전주가 직접 마중을 나와있을 줄이야.

"뭘 놀라고 그런가. 사람이 있다고 청성파나 점창파라는 사실은 변한다던가.
수백 년 전통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게 아니란 말이네. 안 그렇습니까, 두 분 문주님."

"고맙소이다, 하오전주!"

"감사합니다, 하오전주!"

'허! 저런 능구렁이.'

감격스런 얼굴로 포권을 취하는 두 문주를 보며 제갈상운은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또한 야혼의 술수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있는 무인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하오대전에 대한 경계심을 없앴다.
단 한마디로 그들의 마음을 풀어버린 것이었다. 흐뭇한 얼굴로 야혼을 보던 제갈만승은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저기, 여기 있는 분들 중 음식 만드는데 자신 있는 사람 있습니까?"

패잔병처럼 서 있는 두 문파 무인을 보며 야혼을 고함을 질렀다.

"갑작스런 방문이라 준비를 아직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도와 주면 빨리 끝날 것 같습니다."

"제가 음식을 좀 합니다."

"저도 해봤습니다."

"저도…."

'더 이상 생각해 줄 필요도 없네.'

여기저기서 나서는 무인들을 보며 제갈상운은 감당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였다. 야혼은 가장 단순한 방법을 쓰고 있다.
일장 연설이나 감동적인 말이 아닌, 한끼 식사로 점창파와 청성파 무인들을 휘어잡고 만 것이다.
나찰혈불이나 대력자를 이겼다는 소문이 돌았기에 그의 무공은 천의맹에 알려져 있다.
더구나 대우이긴 하지만 전주라는 직함을 가진 그가 직접마중까지 나온 상황이니.

"자자! 다른 분들은 들어가서 씻으십시오. 저기 보이는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입을 옷은 이삼 일 내로 준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편하더라도 우선은 참아주십시오."

"할말이 없소이다, 전주! 오늘의 환대 가슴 속 깊이 새겨 놓겠소."

다시 한번 야혼에게 포권을 취한 유만량과 사일극은 제자들을 인솔하여 야혼이 가리켰던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춰야했다. 절벽에 면해 서 있는 자들 때문이었다.
청광이노, 나찰혈불, 대력자, 운령자,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각 문파에서 죄수로 보냈던 자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각자의 무공을 펼쳐 동굴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청광이노와 나찰혈불은 5장 높이의 허공에 머물러 있고, 그들 아래쪽에는 대력자와 운령자가 있었다.

"두 손들었습니다. 전주님. 최고의 연출입니다."

"내가 마도련을 말아먹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줄곧 침묵한 네가 더 멋진 연출을 했다고 봐야지."

"알고 계셨습니까?"

"버리지 문주에게 너무 잘해줘서 생각을 좀 해봤거든."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그런 생각은 없었습니다. 바보가 되기 싫어서 말을 못했을 뿐이죠."

"어찌 되었던 비밀을 지켰잖아. 그런데 도백회주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나?"

"헉!"

나직한 신음을 뱉어내며 제갈상운은 야혼을 보았다. 기조당의 비밀, 개방에조차 알리지 않았던 비밀을 야혼이 알고 있었다.
기조당에서 찾던 사람이 그임에 분명했다. 도백회의 당대 회주.

"밝혀내기 전에 미리 말하는 거야, 잊어버리라고."

"제길…. 지금이라도 천의맹을 접수하십시오!"

"아냐, 아직은 체할 염려가 있어. 마교도 남아있고, 마옥성도 있거든."

"마옥성에 대해 아십니까? 수인들에게 대해서요."

궁금한 얼굴로 제갈상운은 물었다. 마옥성 수인에 대해서는 선무전 전주인 청운자로부터 들었다.
점창파와 청성파 무인 대부분이 수인들에 의해 당했다고 했다.

"그건 네 일이잖아. 수인의 약점을 밝혀내면 내게도 말해 줘."

"끙! 독하시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본인에 대한 것을 전부 가르쳐 주면서 정작 전쟁에 필요한 사항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천의맹이 곤란한 지경에 처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미다. 무섭고 지독한 사람. 제갈상운이 야혼에 대해 내린 평가였다.

"남천악을 천무전 전주로 삼을 것 같습니다."

"선무전은 무너졌고, 당성이 크는 걸 견제하겠다는 말인데. 기회를 잘 잡는 사람이군."

야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연청으로선 최고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동창제독과 연이 닿은 당성은 위세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다른 문파나 세가들은 그를 이용하고자 하면서도 은연중에 경계를 할 것이다.
당성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는 감연청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는 방법밖에 없다.
다른 문파나 세가들로선 당연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럼 남천악이 나보다 높아지는 건가?"

"아닙니다. 직급은 같습니다. 서로 동등한 위치라 보시면 됩니다."

"나는 전주 대우잖아."

"상관없지 않습니까."

"맞아 전주 대우든 전주든 의미가 없지. 내가 전주라는데 누가 뭐랄 거야."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기조당을 너무 오래 비우면…."

"이거 가져가."

"뭡니까?"

보퉁이로 싼 그것들은 책인 줄 왜 모르랴. 하지만 야혼이 자신에게 책을 줄 이유가 없기에 묻는 말이었다.

"궁금하면 풀어보던지."

"그렇지요."

야혼이 보는 앞에서 보자기를 푸른 제갈상운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가 건넨 건 춘서였다.

"뇌물이란 것만 기억해둬. 앞으로도 잘 봐달라는 의미로 주는 거니까.
앞으로도 여덟 권 정도는 더 줄 수 있을 거야. 조사를 해봤더니 제갈세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공이드라고."

"무공요?"

흠칫 놀란 제갈상운은 재빨리 책장을 넘겼다.

"허억!"

비명처럼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겉모양만 춘서였다. 안쪽에 있는 내용은 천기마해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전주님! 전주님!"

"부르지 마 임마. 지금 내가 사라져야 네가 더 감동 먹잖아. 나는 효과를 극대와 시키고 싶단 말이야.
참! 점창파와 청성파는 그대로 두는 게 낫겠지? 스스로 찾아올 때까지."

"씨팔! 맞소, 그대로 두면 그들은 나처럼 감동 먹고 알아서 찾아 올 거란 말이오."

천기마해를 품에 안으며 제갈상운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천기마해뿐만 아니라 무공비급까지 있다고 하였다.
제갈세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진식에 있어선 천하제일이라 말은 무공이 약하는 말과 상통한다.
진식보다는 강한 무공이 있어야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길이 열린 것이다. 앞으로 여덟 권 비급을 더 준다고 하였다.
청성파와 점창파 무인들이 들어갔던 건물로 사라지는 야혼의 뒷모습을 보며 제갈상운은 단언하듯 말했다.

"돕겠소이다. 하오대문이 세워지도록."

또 한 명의 동조자.
숨기지 않고 모든 걸 드러냄으로서 야혼은 천의맹 심장부에 있는 제갈상운을 완전히 하오대전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이고 머리야. 아침 댓바람부터 난리를 치고 다녔더니 해골이 흔들리네. 어이 마누라들 식사준비는 됐어?
뭐야 이거! 서방은 지들을 먹여 살리려고 죽어라 일하고 있는데 마누라라는 것들이 잠을 퍼자!"

동굴 안으로 들어온 야혼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커다란 침상에 두 여인이 큰 대자로 뻗은 채 잠을 자고 있었던 탓이었다.

"웬만큼 괴롭혔어야죠. 당신도 들어와서 잠 좀 자요. 밥은 한숨 자고 일어나서 그때 먹도록 하자고요."

설핏 잠이 깼는지 당가려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하며 이불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러다 또 덮치면 어쩌려고."
 
"그럼 당분간 당신은 우리를 안지 못하겠지 뭐. 우린  의원을 만나러 가야할 테니까."

"하여간 여자들이 이렇게 약해서야…."

"우리가 약한 게 아니고 당신이 강한 거라고요. 아무리 큰 게 좋다지만 당신은 너무 심해요. 빨리 들어와 잠이나 자요."

가운데 자리를 만든 당가려는 팔이 아픈 듯 들어올렸던 이불을 내렸다.

"나 참! 이걸 누가 믿어줄까. 마누라가 둘이나 되는 사람이 밥을 굶는다는 사실을."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말(馬)이 여자 둘을 반병신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어요."

"그게 나 때문이냐, 약이 너무 강해서 그랬던  거지. 근데 정말로 많이 아파?"

주섬주섬 옷을 벗은 야혼은 그녀들 가운데로 몸을 누이며 물었다. 

"아뇨, 아픈 것보다는 피곤해서 그래요."

품속으로 파고들며 당가려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우리 집은 이상해. 다른 집은 남편이 밤새도록 봉사하면 아침 반찬이 달라진다고 하드만…."

"원래, 신혼 때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하잖아요."

자는 척하고 있던 고명지가 미안한 얼굴로 말하며 야혼을 껴안았다.

"그래 배가 부르다, 배가 불러 죽겠다. 히히힝!"

말소리를 내며 두 여인을 끌어당긴 야혼은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앞으로의 일을 잠시 정리하고자 함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남천악이란 새로운 변수.
무당파의 청운자와 같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걸렸다. 더구나 밝혀지지 않은 1년 간의 행적.

"만나보면 알겠지. 언제 생각하고 일했냐. 그런데 야들은 작당을 했나. 힘들어 죽겠다면서 홀딱 벗고 자는 건 또 무슨 심보래."

맨살로 착착 감기는 두 여인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당신 철학 있잖아요. 친숙해지고 싶으면 옷을 벗어라!"

반짝 눈을 뜨며 야혼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고명지가 말했다.

"나는 아닐 테고, 가려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야혼의 물음에 고명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혼에게 듣기는 했지만 당가려는 만나건 이제 하루. 아직은 어색한 점이 많았다.
전날 춘약 때문에 가졌던 기이한 경험이 당가려와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서 침대에 들어올 때 먼저 옷을 벗어버린 것이었다.

"농약은 당신이 넣으라고 했죠?"

"누가 넣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두 사람이 자매처럼 친해지면 그걸로 된 거지. 참! 남천악 그놈에 대해 나온 건 없어?"

공연히 묻는 말이다. 도백회에서조차 감지하지 못했던 일을 동창이라하여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야혼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백지예요. 활동한 흔적조차 없어요. 당신 그 녀석을 이용해서 뭔가 꾸미고 싶어서 그렇죠?"

아래쪽 깊숙한 곳으로 스르르 손을 미끄러트리며 고명지는 짓궂게 웃었다. 그가 남천악에 집착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있나. 무슨 수로 그놈을 자빠뜨리나. 여자면 몰라도. 그런데 이제부터는 전주 모임에 나도 부르려나?"

"부르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동창제독과 불알친군데."

"그런가? 기다려보면 알겠지."

야혼의 기다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 저녁 무렵, 기조당 요원을 통해 천무전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보가 왔던 것이다.
통보를 받자마자 야혼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점창파와 청성파 두 문주가 있는 곳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주!"

안으로 들어선 야혼을 사일극이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두 분이 같이 계셨군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습니까. 애로사항이 있으면 부담가지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너무 편해서 탈입니다. 전주의 환대 정말 고맙소이다. 그리고…,"

사일극은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제자들을 데리고 하오전으로 오긴 했으나 막막했다.
실의에 빠진 부하들을 위로를 하고 싶어도 수중에 가진 돈이 없었다.
출정 전, 천무전에서 받았던 보조금은 도착하기도 전에 바닥이 나버렸다.
다시 청구를 해야하는 데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하오전주 이름으로 10만 냥의 거금이 도착한 것이었다.

"아이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불편하지요.
다름이 아니라, 천무전에서 소생을 불렀소이다. 전하고 싶은 말이나 요구사항이 있으면…."

"점창파와 청성파는 선무전은 하오대전 소속으로 남겠다는 말을 전해 주십시오."

사일극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하오대전이란 간판을 걸긴 했지만 이곳은 분명 하오밀문이다.
그들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 소생을 놀리는 겁니까?"

'이 새끼들이 아직 배가 불렀구먼.'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야혼은 언성을 높였으나 내심은 달랐다. 사일극은 하오대전에 남겠다고 했지 받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여전히 명문정파라는 자만심이 머릿속에 가득 차있다는 반증이다.

"여긴 하오밀문이 만든 곳입니다. 점창파나 청성파 같은 대 문파가 있을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두 분을 도와주었던 건, 겪어보았기에 때문입니다.
지난 100년 간 우리 하오밀문이 지겹도록 겪어보았기에 도움을 주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소이다.
방금 그 말, 안 들은 걸로 하겠소이다."

기분이 나쁜 듯, 매몰차게 말한 야혼은 찬바람이 나도록 몸을 돌렸다. 일순 사일극과 유만량의 얼굴은 참혹하게 변했다.
단 한 명의 무인이 더 필요한 곳이 하오대전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제의를 거절하다니.
어떻게 해야할지 갈등하는 그들의 귓전에 문 앞까지 다가간 야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금은 얼마든지 지원해 드리겠소이다. 동창제독을 불알친구로 둔 덕에 돈은 넘쳐나니까요. 
제자들이 안정되면 데리고 떠나도록 하십시오.
하오밀문은 잠시 쉬어 가는 곳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정착할 곳은 못됩니다. 문파의 명예를 생각하십시오."

"아니외다, 문주!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제자들과도 이야기했습니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그 때까지라도 하오대전 소속으로 남게 해주십시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동창제독 그리고 불알친구. 그 어떤 무공보다 강했다.
그러나 야혼은 요지부동, 무심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야혼을 보며 사일극과 유만량은 애원하듯 말했다.

"받아주십시오."

"휴-우! 알겠습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곳에 있는 것 또한 말리지 않을 것이며 떠난다해도 잡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하오대전 이름으로 일을 해야할 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셔야 합니다. 그것만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싱긋 웃은 야혼이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씨팔 놈들, 좆도 아무것도 없는 새끼들이 뻐기기는. 그나저나 불알친구라는 말 대단하네. 천무전에서도 한번 써먹어 볼까?"

동창제독과 불알친구라는 말에 뻑 간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 야혼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미타불! 좋은 일이 있었나보구먼, 연작문주!"

"좋은 일까지는 아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하오대전에서 기생하겠대."

"전쟁이 끝나면 무슨 수라도 생기는 모양입니다 그려. 그때는 정말 길바닥으로 나앉게 될 터인데."

두 문주가 있는 건물을 보며 추기영은 비릿하게 웃었다. 거지, 그들을 표현하는 가장 어울리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은 불쌍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는 우리가 구해줘야지, 별수 있겠냐. 그래서 하오대문 아니냐. 클 대(大)자. 다녀오마."

"그렇게 하시게. 용봉환락무 구결 누님께 전해줬네. 좋은 날 한번 잡게나. 그리고 제독시주 마차 대기시켜 놓았네."

"애들은 몇 명이지?"

"동창제독 불알친구 행찬데…. 절반 정도 투입했네. 마음 편히 다녀오기나 하시게."

"알았다. 시원하게 질러버리고 오마."

추기영과 태웅을 향해 찡긋 눈을 깜빡인 야혼은 하오대전 정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100여 명의 수행원을 대동한 마차가 하오대전을 떠나 천무전으로 향했다.
천무전 7층 맹주전.
10명의 무인들이 하나들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선무전주인 청운자가 먼저 들어섰고, 뒤이어 우자령과 당성 그리고 각 문파 문주들과 세가 가주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맹주전 문이 열리고 감연청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섰던 중인들의 시선은 가장 먼저 탁자 위 명패로 향했다.

"으음!"

명패를 주시하던 당성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평소와 다른 배치도였기 때문이었다.
맹주를 비롯하여 네 곳 전주들이 동석했던 상석에는 단 감연청의 명패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자신과 우자령 그리고 청운자의 명패가 나란히 놓여 있다.

'쿡! 나는 견제를 해야할 상대로, 하오밀문 떨거지는 이용할 사람이라 이건가?'

자신의 명패 아래 놓인 야혼의 명패를 보며 내심 비릿하게 웃었다. 
전주대우인 야혼의 자리는 세가나 문주와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의 좌석을 전주와 같은 곳에 배치해 두었다함은 동창제독의 친구라는 그를 어떻게든 이용해 먹겠다는 의미다.

'벌써 모종의 합의가 있었군. 하지만 이 당성을 우습게 보다간 큰 코 다친다.'

태연한 얼굴로 서 있는 우자령과 청운자를 힐끗 보던 당성은 자신의 이름이 써진 자리에 가 털썩 앉았다.

"자자! 전부 자리에 앉읍시다."

모호한 얼굴로 당성을 보던 감연청은 호들갑을 떨며 상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심 흐뭇했다. 제갈상운의 의견에 따라 좌석배치를 했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지금 상황을 인정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얼굴에 나타난 미소를 지운 감연청은 중인들을 보며 나직하니 운을 뗐다.

"오늘 천의회(天義會)를 개최한 이유는 몇 가지 변수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번 선무전이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이 났던 이유는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마옥성 때문이란 사실을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우리 천의맹은 그들 두 곳과 전쟁을 치러야할 힘든 입장에 처했습니다.
즉 지금과 같은 조직체계로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이오. 전(殿) 체제로 되어있는 현 조직을 바꾸기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비꼬듯 당성은 도전적인 어투로 말했다. 감연청에게 모든 권력이 몰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카딸을 팔아먹은 파렴치한 놈이라는 욕을 감수하고 추진한 일이었다.
동창제독의 위세를 등에 업고 이제 막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와룡전주. 전주께서 부맹주를 맡아 주셔야 겠습니다."

"지금 부맹주라 하셨습니까?"

당성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부맹주라니.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라 일순 머리가 멍해졌다.
마땅히 할말을 찾지 못해 망연하게 있는 그의 귓전으로 감연청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빌어먹을…. 내가 뒤통수를 맞고 말았군.'

내심 욕설을 뱉어낸 당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맹주 직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부맹주 직을 수행할 인물은 얼마든지 있다.
일단은 그들보다 위라는 사실에 만족해야했다.

"고맙소이다, 부맹주. 와룡전의 신임 전주는 부맹주가 임명하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맹주님."

당성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부맹주직책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감연청은 상전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다음 안건은 하오대전에 관한 것입니다. 하오대전을 천의맹 제5전으로 승격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의 있으신 분 있습니까?"

하오밀문 문주를 전주로 승진시킨다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오밀문 이야기만 나오면 살기를 흘렸던 우자령마저 침묵했다.

"반대하는 분이 없음으로 참회당을 하오대전으로 승격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천무전을 이끌어갈 신임당주로는 화산파 대제자인 남천악을 지명했습니다."

일순 실내에 있던 각 문파 문주들과 세가 가주들은 의아한 얼굴로 한 인물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가 있는 자는 개방 방주인 홍면개(紅面 ) 철조양(鐵鳥陽)이었다.
령무전과 비원 두 곳에서 활동하고 있다지만 천무전 전주를 맡아야 할 인물은 당연히 그라고 생각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난 1년 간, 보이지도 않던 남천악에 전주 자리를 내릴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험험! 소생이 사양했소이다. 천무전은 맹주 직할대 성격을 띤 단체인데 제가 맡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중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철조양은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감연청으로부터 천무전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대부분 화산파 제자로 이루어진 천무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더구나 그는 개방에도 알리지 않고 도백회주를 찾고 있었다.
도백회주마저 그의 휘하에 들어간다면 더더욱 개방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이름뿐인 자리에 앉느니 차라리 지금처럼 있는 게 낫다는 생각에 천무전 전주 자리를 거절하고 말았다. 
천무전 전주 자리를 거절한 이유였다.

"두 사람을 들게 하라!"

고개를 끄덕이는 중인들의 모습을 본 감연청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덜컹!

"저런!"

맹주전 문이 열림과 동시에, 시야에 잡힌 광경에 안쪽에 있던 자들의 표정이 흠칫 변했다.
20여 명의 동창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야혼이 들어서고 있었던 탓이었다.

"대기하고 있으시오."

"알겠습니다, 공자!"

"허! 정말 살 떨리게 잘생겼군."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탄성이 안쪽 중인들의 심경을 대변했다. 
이틀 전, 걸레 같은 옷을 입고 들이닥쳤을 때와는 천양지차의 모습. 연녹색 비단으로 감싼 야혼에게서는 귀티가 줄줄 흘렀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이내 야혼을 떠나 막 맹주전으로 들어서는 남천악으로 향했다.

"대단하군, 1년 전에 비해 몇 배는 강해진 것 같지 않은가."

우자령의 입에서 나직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화산파 제일 기재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천악의 전신에서 무형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옷만 그럴싸하게 입은 하오밀문 문주와 극명하게 대비가 되었다.
백로와 까마귀, 그녀를 비롯한 중인들의 평가였다.

'맹주가 이걸 노린 모양이군. 주제를 알아라 이 개 아들놈아.'

만족스런 얼굴로 우자령은 두 사람을 주시했다.

"소생 남천악 인사 올립니다. 그동안 대사에 참여하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천의맹을 위해 신명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야혼 옆으로 나란히 선 남천악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파 출신다운 깔끔한 인사,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남천악의 행동에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공연히 명문정파라 부르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엔 야혼에게 시선을 주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소!"

전주로서의 포부정도를 기억했던 중인들은 일순 의아한 얼굴을 해야했다.
전주로 승진한 자의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던 탓이었다.
감연청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동창제독과 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전주로 승진을 시켰지만, 내심까지 전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부족함을 알도록 하기 위해 남천악과 같이 세웠다.
야혼을 빤히 쳐다보던 감연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승진소감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인가. 말해보게."

"다름이 아니고, 이 자식에게 빚 받을 게 있는데 지금 해결을 했으면 해서 말입니다!"

"컥!"

사래 걸린 듯 여기저기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이 중요한 순간에 빚이라니. 더구나 남천악을 향해 이 자식이라 하였다.

"꼭 해결을 해야겠는가. 이 자리가 끝나고 나중에 둘이서 해결을 보는 게 어떻겠나."

어이없다는 얼굴로 감연청은 말했다.

"서로 전주가 되기 전에 해결을 보는 게 나을 듯 싶어서요.
앞으로는 얼굴도 자주 볼 터이고, 협조를 구할 일도 있을 터인데,
찜찜한 상태에서 시작하면 서로가 좋지 않을 것 아닙니까.
왜 있지 않습니까, 똥싸고 나서 뒤를 닦지 않았을 때 기분.
그런 더러운 기분으로 같이 일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 남천악도 내 의견과 같을 겁니다."

'개자식!'

남천악은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십만대산 늪지대에서 했던 내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이기면 놈의  팔을 자른다고 했었고, 녀석은 제가 이기면 한 방만 치겠다고 하였다.
3년 전의 일을 이 자리에게 꺼낼 줄은 생각지 못했다.
슬쩍 내공을 끌어올려 야혼이 몸을 살핀 남천악은 미소를 배어 물었다.

"그래, 받아야할 빚이 무엇인가."

남천악의 입가에 흐른 미소를 발견한 감연청은 흥미로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때 말이오. 우린 장독으로 가득한 늪을 건너가게 되었단 말이오. 거기서 일은 벌어진 겁니다.
글쎄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해독약을 복용하라는 우리의 말을 무시하고…."

내기에 관한 상황이 장황하게 이어졌다. 뗏목을 만들던 때부터 시작하여 이족들의 공격을 받을 일까지.
무려 1각에 걸쳐, 야혼은 내기의 경위를 늘어놓았다.
야혼의 말을 듣고 있던 중인들은 일순 허탈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그 내기라는 것이 주먹으로 한 방 치는 거라 이 말인가? 그걸 빚이라 했고."

"물건 달린 사내는 주먹 아니오.
무공도 없는 사람의 팔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는 놈보다는 훨씬 낫지 않소. 안 그렇습니까, 부맹주님!"

"허허! 그건 하오전주 말이 옳네. 상황을 들어보니 그 빚은 받아야 할 것 같구먼."

기회다 싶었는지 당성은 야혼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야혼을 자신의 아래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7천이나 되는 대 병력이 있는 곳이지만 천의맹의 가장 큰 약점은 역시 자금이다.
그 자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자신과 하오대전의 전주 야혼인 것이다. 

'천악아 어떻게 할 테냐? 저 놈은 투견공을 완성했다.'

실내 분위기를 살피던 감연청은 남천악에게 전음을 보냈다. 중인들의 얼굴엔 흥미로운 빚이 가득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건 빚하고는 거리가 멀다.
완성된 투견공과 화산파의 무공을 비교하고 싶어하는 눈들이다. 더구나 남천악은 1년 전에 비해 몇 배 강해져 있다.
나이 또한 비슷한 또래이고 보니, 때리고 맞는 단순한 비무차원으로 보지 않는다. 개방과 화산파의 비무인 것이다.
감연청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야혼을 보는 철조양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투견공(鬪犬功), 익히기가 까다로워 잊혀진 무공이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개방의 어떤 무공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무공과 화산파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인 남천악과의 대결이다.
문득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빌어먹을 내가 내친 사람인데.'

장대손이 야혼을 받아들이는 게 어떻겠냐고 했을 때, 그 따위 소리하려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라며 일축한 사람이 자신이다.
틀어쥐었던 주먹을 슬며시 폈다. 그리고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전면을 주시했다.
그때 남천악은 감연청을 향해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사부. 투견공 정도로는 저를 어쩌지 못합니다. 내공을 쓰도록 제안해 주십시오.
다시는 주먹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언령제세공 강을 믿고 하는 말이었다. 의지만으로 몸을 금강불괴지신에 도달하게 만드는 무공.

'좋다, 내공을 사용하도록 해보마.'

남천악의 말에 흠칫 놀란 감연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의 무공은 이미 자신을 넘어서 있었던 것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상태에서 상대의 
주먹을 으깨버린다는 말은 이미 금강불괴지신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위험이 닥치면 절로 호신강기가 발휘되어 자신보다 약한 자는 그 반탄력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당하게 된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나. 이제는 무인이 되었으니까, 무인답게 하는 것 말일세."

"내가 투견공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러다 저놈 다치면 어쩌려고."

"내 걱정은 하지 마시오. 투견공 따위로 날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 화산파를 무시하는 겁니다, 하오전주."

야혼을 무시하고자 정중한 얼굴로 뼈있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이 실수였다는 사실을 남천악은 알지 못했다.

"투견공 따위라…. 투개(鬪 ) 사부님이 들으면 지하에서 벌떡 일어나겠군."

"응?"

나직한 야혼의 중얼거림을 들은 남천악은 흠칫 표정을 굳히며 곁눈질로 철조양을 보았다.
원래부터 붉었던 얼굴이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입고 있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 정도로 흥분해 있는 것이었다.

'놈에게 또 당했군.'

그제야 야혼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다.
조금 전 했던 말을 실력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준비하시오. 최선을 다해야 할거네."

'발악을 해보아라, 버러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보란 말이다.'

"투개 사부를 씹었으면 실력으로 증명하면 되는 거야. 개방 무공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욕하지 말란 말이야 자식아."

"으음!"

마침내 철조양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철조양을 힐끔 쳐다본 야혼은 서 있던 자리에서 1장 가량을 물러나 그 자리에 덥석 엎드렸다.
투견공의 기본 자세. 왼팔을 앞으로 내밀어 땅을 집고, 오른 팔은 허리로 가져갔다.
엉덩이와 고개를 바싹 치켜들고 남천악을 노려보는 남천악을 노려보는 순간, 야혼의 동체가 검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오!"

강렬한 눈으로 야혼을 지켜보던 철조양은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말로만 듣던 투견공, 번쩍거리는 검은 광채를 토해내는 야혼이 경이로웠다. 온 몸에서 폭발적인 힘이 느껴졌다.
놀란 사람은 비단 철조양뿐만이 아니었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야혼은 보던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모척살대의 무공, 겁천십웅이래 가장 강자라고 하였던 호칭은 괜히 생겨난 게 아니었다.

"후-욱! 준비해라, 남천악."

깊게 숨을 몰아쉬며 나지막이 소리쳤다.

"와라, 놈!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알려주겠다. 하늘을 왜 하늘이라 부르는지 알려주겠단 말이다."

양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며 남천악을 소리를 질렀다. 다른 이들도 눈도 있고 하여 지금껏 정중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놈이었다. 놈은 하오밀문의 문주로, 버러지로 취급하면 될 터였다.

"그래? 좋아, 눈감지 마라 남천악, 간다!"

낮게 소리친 야혼은 바짝 치켜올렸던 엉덩이를 아래로 내림과 동시에 양발에 힘을 주어 사정없이 튕겼다.

"헉!"

긴장된 얼굴로 야혼을 주시하던 중인들은 깜짝 놀라며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빛살 같은 속도로 나아가는 검은 동체 때문이었다.
뒤쪽에 잔상을 남길 정도의 엄청난 빠르기라니. 암기를 던진다 한들 저보다 빠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놀랐다 한들 당사자만 할까.
느닷없이 눈앞으로 다가든 야혼의 모습에 남천악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내심 외쳤다.
언령제세공의 강( )이었다. 금강불괴지신을 이룸과 동시에 온몸을 강기 덩어리로 만드는 무공.
일순 남천악의 몸에서 백색 광휘가 솟구친다 싶은 순간, 번쩍거리던 야혼의 정권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저럴 수가…."

두 사람을 쳐다보던 각 문파 수뇌들은 벌떡 일어났다. 남천악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백색 광채의 정체는 호신강기였던 것이다.
이제 갓 서른살인 남천악이 금강불괴지신을 이루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신들보다 더한 강자가 바로 그였다.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백색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가는 검은 정권, 번쩍거리는 야혼의 주먹은 조금씩 파고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 또한 남천악보다 약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허허! 저 상황에서 웃는단 말인가."

야혼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발견한 수뇌들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쪽으로 파고들던 검은 주먹이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남천악에 비해 야혼이 한수 밀린다는 의미였다.
그런 생각은 당사자인 남천악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야혼이 보였던, 같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에서 멀어지는 정권을 보았다. 
언령제세공의 승리였다. 아니 화산파 제자가 개방 무공을 이기고 있다.

'이제 끝이다 놈! 조금만 기다리면 네 손은 가루로 변하게 된다.'

마침내 백색 광휘 끝에 걸려 있는 녀석의 정권을 보며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처음 녀석이 달려들 때는 섬뜩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투견공은 그만큼 저돌적인 무공이었다.
일순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야혼의 얼굴을 보며 남천악은 잠시 언령제세공을 풀었다. 완전하게 푼 것은 아니었다.
8할 정도, 강( )에 강( )의 기운을 더하면 강기는 중첩되고 그 위력 또한 두 배가된다.
힘들어하는 놈에게 주는 선물로는 최고일 터였다. 문득 놈에게 말을 하고 싶어졌다.
오른 손을 사용하는 마지막 순간이니까 제대로 봐둬야 할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고, 녀석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잘 봐둬라 놈, 네 녀석의 그 손은 이제…,헉!"

비릿한 조소를 날리며 말을 하던 남천악은 일순 다급한 신음을 내질렀다.
저만치 물러났던 검은색 광채가 급격히 확대되어 들어오고 있었다.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강의 기운을 한번 더 끌어올리기 위해 내공을 풀었던 게 첫 번째 실수였고, 놈의 표정을 보고싶어 말을 했던 게 실수였다.

파악!

"커억!"

입안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지른 남천악은 아득한 상황에서 뒤쪽으로 새처럼 날았다.

우지끈!

"말이 많은 새끼들이 가장 싫어. 우엑!"

맹주전 벽을 뚫고 날아가는 남천악을 보며 이죽거린 야혼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빈집을 채우는 사람들.
          
          
          
"거참! 하늘은 왜 이리 맑냐."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며, 마치 벼슬아치들이 하는 것처럼 팔자로 걸어가는 인물,
어둠이 깔린 하늘을 보며 연신 해죽거리는 그의 모습은 길가다 돈이라도 주운 사람 같았다.
연신 콧노래를 부르며 가는 이자는 조금 전, 천무전을 나선 홍면개 철조양이었다.
우자령을 비롯한 령무전 소속 문주들이 함께 저녁이라도 하자고 하였으나 바쁜 일이 있다며 혼자 떨어져 나왔다.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감동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들과 같이 있으면 이 격정이 사그라질 것만 같아 혼자 나오고 말았다.
투견공(鬪犬功)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했다. 금강불괴지신을 이룩한 화산파 대 제자를 개 패듯 패버렸다.
투견공을 익힌 야혼을 내쳤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만일 이곳이 천의맹만 아니라면 고함을 내지르며 춤을 쳤을 것이다. 개방의 무공이 최강임이 밝혀진 순간이 아닌가.

"거참! 완전히 싸움개였어. 그런 싸움개는 처음이네 그려. 어떻게 했더라, 이렇게. 아 맞다 이렇게 했지."

고개를 바싹 치켜들고 상대를 노려보던 야혼의 모습을 떠올린 철조양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조금 전 야혼이 했던 동작을 취하며 전면 어둠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마치 본인이 야혼이라도 되는 것처럼.

"쯧! 쯧! 나이나 작으면 재롱이 귀엽기나 하지. 뭐 하는 짓이냐?"

"어? 이 오밤중에 사부님이 웬일이십니까? 정천원에 박혀 꼼짝도 하지 않으시더니."

손을 탁탁 털며 일어선 철조양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결과가 궁금해서나왔다, 이 녀석아."

개방 방주인 철조양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인물, 야혼 일행이 천의맹에 들어오기 전에 만났던 개왕( 王) 황고성(黃高星)이었다.

"사부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철조양은 일순 의아한 얼굴로 사부를 보았다. 그가 말하는 결과는 조금 전, 야혼과 남천악의 비무를 두고 하는 말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맹주전에서 방금 나온 사람이 자신 아니던가.
설사 조금전 투견공 자세를 취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맹주전에서 있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머리가 그 정도로 좋은 분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비무를 그런데 사부가 알고 있다니,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손이가 그러더라. 맹주전에서 투견공을 익힌 녀석이 싸움을 걸 거라고."

"허! 사제가 말했다고요? 남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나는 믿지 않았거늘, 오늘에서야 우리 개방의 진가를 믿게 되는군요."

"하여간, 방주자리를 대손이에게 주는 건데. 이런 놈을 제자라고…. 소 잡는 녀석에게 들었단다. 도살장에서 소 잡는 놈 말이다."

"제길…."

철조양은 나직하니 욕설을 뱉어냈다. 도백회를 말하는 것을 왜 모르랴.
방금 맹주전에서 일어난 일을 도백회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또 바보 같은 짓 한다. 도백회가 방금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았느냐를 생각해야지, 개방보다 빨리 알았다고 삐치기나 하고.
한심하다 이 녀석아."

"누구 염장 지를 일  있습니까. 무슨 영문인지 말을 해줘야 알지요. 
정말 사제에게 방주자리 넘겨버릴까 보다. 사부가 제자를 이렇게 무시하는데 감연청은 오죽 할까.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한숨을 내쉬며 철조양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그 녀석이 직접 말했단다. 오늘 남천악을 자빠뜨릴 거라고. 제 입으로 직접 말했단 말이다."

"세상에, 그럼…."

철조양은 말을 잇지 못했다.
비밀에 쌓여 있던 도백회주, 감연청이 기조당 요원을 풀어 찾고 있는 도백회주는 천의맹에 있었던 것이다.

"마도련도 그놈 거라고 하더라. 그리고 강호 전역에서 중소문파 1천여 명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하오밀문의 제자라고 한다 더구나."

"니미럴! 어찌 그런 일이."

마침내 철조양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마도련의 주인, 도백회주 그리고 하오밀문의 문주. 전부가 한 사람이었다. 

"사제는 어떻게 알았답니까?"

"3년 전에 알고 있었단다. 너에게 그 녀석을 받아들이라고 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고 하더구나."

 "끄응! 그럼 언질이라도 좀 해 주지."

"그 녀석이 도백회주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받아 들였을 것처럼 말하는 구나."

"알았습니다. 다 제가  못나서 그렇게 됐습니다. 개방을 부흥시켜줄 인재를 제 잘못으로 놓쳤다고요."

공연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하오밀문 문주라는 한가지만으로도 그를 거부한 자신에게 도백회주가 그란 말은 꺼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감연청이 도백회주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제야 털어놓은 것이리라.

"어디 갔습니까? 사제는."

"녀석 만나러 간다고 갔다. 왜, 개방으로 끌어들이고 싶어서?"

"끄응!"

'바보 같은 녀석, 저리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하기야 나도 그랬으니까.'

야혼 일행과 처음 만남을 생각한 개왕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비웃은 커다란  깃발을 자랑스럽게 달고 천의맹으로 들어온 녀석들.
3명밖에 안 되는 녀석들이 천의맹을 뒤흔들고 있다. 놀랍다는 생각뿐이었다.

"일단은 대손이에게 맡겨 두자. 녀석이 도백회주란 사실도 비밀로 하고. 그만 일어나라. 다 늙어서 이슬 맞으면 몸에 해롭다."

"정말 사제에게 방주자리 넘겨야 할까 봅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

"한잔가지고 되겠습니까. 단지가 필요합니다. 술독이 필요하다고요."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난 철조양은 흐느적거리며 사부를 따랐다.

"참! 투견공이 화산파를 이겼습니다. 금강불괴에 달한 신체를 깨트려 버렸습니다."

"개방(  )의 무공이다."

개방의 무공이란 한마디로 개왕은 마음을 대신했다. 

"사부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대손인 그 녀석을 개차반이라 불렀다고 하더라. 그 녀석은 대손일 시발탱이라 불렀고."

만나자마자 자신을 향해 시발탱이라 불렀던 야혼의 언행이 생각나는 듯 개왕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녀석임에 분명했다.

그 시간. 마차에 몸을 싣고 가던 야혼은 장대손과 조우하고 있었다.

"어이, 시발탱이!"

마차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장대손을 야혼은 반갑게 불렀다.
티격태격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무공이 없던 시절 알았던 유일한 무인이 그였다.

"일문의 문주가 됐으면 말 좀 가려서 해라, 개차반 녀석아!"

동창 무인들이 길을 터 주자 마차로 다가오면 장대손은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 또한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3년만의 만남, 꼴통 기질이 다분했지만 결코 그가 무인이 되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기댈 곳도, 도와주는 사람 한 명 없던 그가 아니었던가.

"지도 마찬가지면서, 그나저나 웬일이오? 개차반이 좋아서 온건 아닐테고."

마차 문을 열어주며 의뭉스런 얼굴로 물었다. 도백회를 통해 개방에 알리긴 했지만, 지금처럼 빨리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찾아오라고 했던 것 아니냐?"

"물론 얼굴 좀 보려고 그랬지. 하지만 너무 빨라서 말이야."

"그보다 가려는 어떻게 된 거냐?"

그가 직접 야혼을 만나러 온 이유였다. 동창제독이 당가려를 데려갔다고 했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
가려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지금까지 기다렸던 사람은 야혼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순순히 동창제독을 따라나섰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천의맹 정도는 가볍게 도망칠 수 있는 그녀가 아닌가.
해서 그동안 은밀하게 동창제독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선 알려진 사실이 전무했다.
새롭게 조직을 정비하고 있는 동창과 금의위는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기용되고 있어 어떤 정보가 흘러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장대손이 실마리를 찾은 건 북경이 아닌 이곳에서였다.
동창제독 고명필이 당가려를 데리고 야혼에게 갔다는 사실이 단서를 제공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 할지도 모르지만, 야혼을 알고 있는 장대손을 그렇질 못했다.
야혼의 친구는 추기영과 태웅이 유일하다고 알고 있었다.
문득 야혼이 마도련에 갔을 때 동했다는 동창 첩형의 이름이 고명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장대손은 급기야 무릎을 치고 말았다.
밤임에도 불구하고 야혼을 찾아 나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가려를 데려올 방법이  없잖아. 그래서 명필이 녀석에게 부탁했지 뭐. 가려도 좋다고 했고."

"너?"

일순 장대손을 허탈한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던 탓이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고명필의 본명이 고명지라고 확신하고 있다. 다만 야혼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또 무슨 소문을 듣고 와서 이러나. 시발탱이도 생각해봐.
거지새끼들도 받아주지 않는 나 같은 놈이 사천당가의 딸을 무슨 수로 자빠뜨리냐. 그래서 꽁수를 썼지."

"으음!"

장대손을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거지새끼들도 받아주지 않는 다는 말, 개방을 두고 하는 말이다.
투개(鬪 )사조의 투견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개방은 야혼을 부르지 않았다.

"그럼…. 개방에서 부르면 와 줄 텐가?"

"개방이 아쉬운 게 뭐가 있다고 개차반을 부르겠어. 투견공이 필요하면 말해. 자세하게 적어서 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이왕 왔는데 가려 만나보고 가. 요즈음 심란해 하는 것 같으니까, 시발탱이가 위로 좀 해줘."

"끄응! 안이 좀 더운 것 같다."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화끈거려 야혼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시발탱이가 왜 쪽팔려하는데. 그런 복잡한 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살아. 설마 그 많은 개방 문도를 전부 죽이기야 하겠어?
더구나 가진 것도 없는 거지새끼들인데. 근데 남천악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데?"

"몰라 임마. 도백회주가 모르는 일을 개방이 무슨 수로 아냐?"

"그럼 마옥성(魔獄城)밖에 없다는 말인데…."

"시간만 죽이고 있으면 화산파가 수중으로 떨어지는 대 제자다."

그럴 리가 없다는 얼굴로 장대손은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화산파의 대제자이자 천의맹주를 사부로 둔 행운아.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남천악이다. 그런 그가 마옥성과 관련을 맺는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시발탱이는 평생 거지로 사는 거야. 사람은 말이야, 많이 가진 놈일수록 더 바라는 게 많아.
우리하곤 뇌 구조가 다른 놈들이라고. 두고보면 알게되겠지. 다 왔네."

야혼이 말하는 순간 전면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다녀오셨습니까, 전주님!"

마차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렁찬 고함소리가 절벽을 타고 울렸다. 

"어떻게 저들이."

장대손은 놀란 눈으로 전면을 보았다. 아니 눈을 비비며 조금 전 목례를 취했던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일극과 유만량, 청성파와 점창파 문주 두 사람이 분명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이제 이틀, 대부분 제자들을 잃었다지만 그들은 여전히 구파일방에 속한 점창파와 청성파다.

"뭘 따지고 그래 인간아. 개방도 하오대전에 들어오고 싶어했잖아."

"언제…."

'또 따진다, 그냥 그런갑다 해!'

뜨악한 얼굴을 하는 순간 야혼의 전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에라, 이 나쁜 자식아. 가려 때문이 아니고, 저들 때문에?'

야혼의 의도를 눈치챈 장대손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런 게 아냐 시발탱이. 저들이 나와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단 말이야. 아직은 완전히 고개를 숙이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 녀석이 개방을 왜 들먹여! 가려보러 왔다고 하면 되지.'

'그래야 쟤들이 덜 쪽팔릴 것 아냐.'

'알았어 나쁜 녀석아. 빨리 가기나 해.'

전음으로 고함을 빽 지른 장대손은 이편을 보며 웃고 있는 사일극 유만량을 보더니 마차에서 내렸다.

'이왕 도와주는 김에 확실하게 못을 박아. 개방도 하오대전에 들어오고 싶어서 왔는데 내가 거절했다고 해.'

'알았다, 다 해주마.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 이 개차반 녀석아.'

"오랜만입니다, 두분. 하오대전에 잘 오셨습니다."

"네? 아-네! 오랜만입니다."

장대손의 인사를 받은 사일극은 일순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하오대전에 잘 왔다는 말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인사말인지, 아니면 개방도 하오대전에 속해 있다는 말인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재빨리 유만량에게 전음을 보냈다.

'유 문주 무슨 의미일까요?'

'글쎄요, 저도 잘….'

혼란스럽기는 유만량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의반 타의반 해서 이곳에 나왔다.
전주 대우에 머물렀던 야혼이 정식으로 전주가 된다는 말을 듣고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개방의 장대손을 만날 줄이야.

"혹시 개방도…."

급기야 유만량은 묻고 말았다.

"대외적으로 공표 할 상황은 아닙니다. 하지만 야혼 전주님은 투개(鬪 ) 사조님의 제잡니다. 소홀히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이야 령무전과 비원에 소속되어 있어 몸을 뺄 수가 없지만…. 공연히 번거롭게 하기 싫어서 말입니다."

"아! 전주님은 투견공을 익혔지요. 허허,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활짝 웃으며 유만량은 장대손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오히려 제가 부탁을 드려야지요. 개방보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았는데…."

"하하! 그럴 수야 없지요. 투개선배의 제자면 개방에서 가장 높은 신분 아닙니까. 일간 시간 나면 술이나 한잔하십시다."

유만량은 호쾌하게 웃었다. 하오대전은 더 이상 부끄러운 곳이 아니었다. 개방마저 살고 싶어하는 곳이 하오대전이었다.

"쯧!쯧!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남자는 어린애라더니."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고명지가 나직하니 혀를 찼다. 사일극과 유만량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처음 이곳에 나와 야혼을 기다릴 때만해도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들이다.
그랬던 자들이 지금은 어깨에 힘을 주며 활짝 웃고 있다.
문득 황실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했다.

"다 그런 것 아니겠냐. 그리고 장대손 앞에서는 계속 고명필로 행세해라."

"알았어요. 참! 가려를 짝사랑했던 그 작자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데요?"

"옥산 객잔에서 술 푸고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걸려들까요?"

"그 놈은 명지 네가 금환신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모르잖아."

천무전 연회장에서 보여주었던 허공답보는, 무공을 익힌 사실을 알고 있는 그들을 속이기 위해 시전했을 뿐이다.

"그만하고 들어가자. 우리도 술 한잔해야지, 정식 전주가 된 기념으로."

"이번에도 농약 넣으면 알아서 해요!"

곁에 있던 당가려가 술이란 말에 야혼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낮게 말했다. 세 사람의 신형은 허공으로 떠올라 절벽으로 향했다.
사일극과 유만량에게서 풀려난 장대손이 동굴로 들어오자 그곳에서는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주향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하오대전의 정식 출범을 축하하는 술자리였다.

*   *   *
          
황실에 의해 국책사업이 시작되거나, 거대 문파가 들어서게 되면 그 주변으로 많은 인구의 유입이 있고, 도시들은 발달하게 된다.
천의맹의 발족과 함께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는 도시가 있다면 단연 옥현(玉縣)이다.
옥산에서 50리 떨어진 옥현은 여타 일반 고을과 다름없는 평범한 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천의맹이 들어서면서 옥현은 변하기 시작했다.
천의맹 무사를 상대로 한 상권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상인들이 옥현으로 몰려들어 점포를 열었고,
그들을 따라 기루와 객잔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옥현은 밤이 없는 도시가 되었다.
화양루(火陽樓).
옥현에서 성업중인 기루의 한곳으로 화양루 주인은 50줄에 접어든 가장(加將)이란 자였다.
가장은 잔뜩 인상을 쓰며 2층을 힐끔 보았다.
만신창이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있는 자들, 그들이 이곳에 들어온 건 하루 전이었다.
처음엔 반가운 마음에 그들을 맞았다. 화양루의 돈줄인 천의맹 무사들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오대세가로 이름을 날리는 가문의 자제들.
일순 봉을 잡을 느낌에 가장은 온갖 정성을 다해 그들을 접대했다.
어쩌면 하루 매상 정도는 그들이 뽑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예상은 맞았다.
다만 안주가 아닌 술로 매상을 올려주고 있다는 사실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아니 말막로 술로 매상을 올려주던 안주를 시켜 매상을 올리던 그건 문제가 아니다. 돈만 벌면 됨으로.
문제는 그들이 나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졸리고, 피곤하여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오늘은 나갈 줄 알고 직원들을 퇴근시켰던 게 잘못이었다.

"이봐 주인장 여기 술 한 병 더 가져와!"

꾸벅 고개를 처박는 순간 술에 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궁세가의 차남인 남궁성이었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남궁성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술잔을 응시하던 남궁성은 이내 술잔을 내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당가려 이 나쁜 년! 나를 거절하더니, 기껏 남색을 밝히는 놈이란 말이냐!"

전날부터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말.
그날 밤 보았던, 동창제독이 야혼이란 놈의 하체에 고개를 처박던 광경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 아버지를 찾아 자신이 보았던 광경을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신랄한 꾸지람과 함께 당가려를 잊으라는 말을 들어야했다.

"그만하게 아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남궁성을 달래는 인물, 그는 산동악가의 장남인 악운보였다. 악운보는 안쓰러운 얼굴로 남궁성을 보았다.
접해보지 않았으면 한때 사마군상을 따라다녔기에 권력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금의위 수장 아들이었던 사마군상만 해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그를 괄시한 무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남궁성이 이를 갈고 있는 자는 동창제독, 사마군상과는 차원이 다른 자. 잊어버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빌어먹을…."

문득 사마군상을 떠올리던 악운보는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상주에서 만났던 놈이 생각났던 탓이다.
자신의 이를 몽땅 뽑아버린 자. 천의맹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할 수가 없다.
아니 이젠 복수할 기회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놈은 하오대전의 전주이고 동창제독 고명필의 친구라 하였다.
당가려를 잃은 남궁성이나 야혼이란 놈에게 당한 치욕을 갚지 못하는 자신이나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문제의 발단은 말입니다, 그 놈입니다. 사내놈이 계집행세를 하는 그놈. 그놈만 없어지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더란 말입니다. 제가 술을 안마실 수 있겠습니까."

"맞다 남궁성! 그 놈만 없어지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다. 네가 원하는 당가려를 취할 수 있게 된다."

"헉!"

계단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악운보의 얼굴은 해쓱하게 변했다. 늦은 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놀라긴, 안 보이는 데서는 나라님도 욕하는 게 사람이지 않겠나."

뜻밖에도 계단을 올라온 자는 남천악이었다.

"그대가 어떻게…."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남천악을 주시했다.

"경계할 필요 없네. 나는 자네들에게 한가지 충고를 해주려 들렸을 뿐이니까."

"무슨…."

"사부님께 들었는데, 동창제독은 허공답보를 구사하는 수준이라고 하더구먼. 당가려는 겁천십웅의 무공을 완성했고.
그들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는다면…. 더구나 자네들은 네 명 아닌가."

"무슨 말인가. 그를 없애라고 사주하는 건가?"

악운보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아닐세. 내가 살인루(殺人樓)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네."

"으음! 그럼 청부를 하겠다는 말인가?"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악운보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같이 일을 하자는 말이었던 탓이었다.  

"원한다면 해줄 수도 있다는 말이네. 나도 오늘 전주들 앞에서 놈에게 한방 먹었다네. 그리고 놈은 하오전주로 승진했고.
참! 혼례 날이 잡혔다고 하더군. 한 달 후 장소는 북경이라네."

"씨팔!"

악운보는 짓씹듯 욕설을 내뱉었다. 동창제독을 친구로 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거늘 이제는 전주가 되었다고 한다.
문득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끓어올랐다.

"나는 하겠소."

악운보와는 달리 남궁성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소리쳤다.

"아우!"

"형님!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그가 죽는다해도 인재는 많습니다. 북경엔 인재가 널리고 널렸단 말입니다.
새 틀을 짜는 겁니다. 하오밀문 떨거지나 사천당문이 아닌 새로운 틀을 말입니다."

"좋네, 자네가 한다면 나도 하겠네. 청부는 내가 맡도록 하지. 날은 그들이 떠나는 날로 잡고."

"좋소. 나도 하겠소."

남천악마저 거들고 나서자 악운보를 비롯한 두 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는 이미 물색해 두었네. 곡령(谷嶺)이란 곳이 좋겠더군."

"알았소이다. 곡령 기억해 두겠소."

"참! 세가 무공말고 평범한 무공을 쓰도록 해야 할거네."

내공을 이용해서 술기운을 몰아내는 남궁성을 보며 남천악은 활짝 웃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네. 자네들은 내일 오전이나 돼서 오도록 하게. 경비무사에게 보여봐야 좋을 일 없으니까.
그럼 동창제독이 떠나는 날 보도록 하세."

네 사람을 찬찬히 보던 남천악은 아래층을 향해 빠르게 내려갔다.
남천악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악운보 일행은 재빨리 창문으로 다가갔다.
멀리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점차 어둠 속으로 묻혀 가는 남천악의 뒷모습을 좇던 악운보가 남궁성을 향해 말을 건넸다.

"살수들이 나타나면, 일을 하는 것이고 아니면 백지화시키면 됩니다. 
남천악도 야망이 있는 친구니까 야혼이란 놈의 성장이 편하진 않겠지요. 그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놈 때문 아닙니까?
더구나 남천악은 혼자고 우린 네 명입니다. 이 일이 들통난다 하더라도 남천악의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 술에 절어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술기운을 몰아낸 남궁창은 냉철한 머리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비록 남천악이 화산파의 대제자자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와룡전을 구성하는 네 가문의 자식들이다.
남천악에 비해 꿀릴게 없다는 게 남궁성의 판단이었다.

"좋네. 아우 말대로 일단 기다려보기로 하세."

악운보의 말을 끝으로 이틀에 걸친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술을 마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술자리가 끝나자 가장 좋아한 사람은 화양루 주인인 가장이었다.
일행에게 잠잘 곳을 안내한 가장은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거참 이 나이에 벌써 노망이 났나. 헛것이 다 보이고…."

안채로 이어진 복도를 걷던 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밖으로 나간 사람 때문이었다.
처음 화양루에 들어올 때는 분명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다시 내려올 때는 한쪽 눈을 가렸던 안대가 보이지 않았다.

"거참 조금 전에 보았던 사람인데 왜 기억나지 않는 건지."

얼굴을 떠올리려 했으나 백지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얼굴을 보았음에도.

"보약을 좀 먹던지 해야지 워."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 들어 안대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보다 잠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침상으로 들어가며 기장은 다짐했다.
밀린 잠을 보충하기 전까지는 절대 일어나지 않겠다고. 곧이어 가장이 들어간 안채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저절로 눈이 떠지기 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 하였던 가장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 밖으로부터 소란스런 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빌어먹을, 잠 좀 자나 했더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창문을 열고 밖을 보던 가장은 화들짝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대로를 따라 길다란 인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의맹으로 가는 무인들의 행렬은 가장의 입장에서는 별반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잠이 확 달아날 정도로 놀란 이유는 그 행렬이 전부 여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도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녀들. 그러나, 가장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미녀들의 행렬이 끝나고 반 시진 정도가 흐르자 이번엔 200여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말을 끌고 나타났다.
그들 또한 먼저 갔던 미녀들과 마찬가지로 전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화양루 앞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그렇게 화양루 앞을 지나쳐 간 무인들은 전부 여섯 부류였다.

"무산신녀대(巫山神女隊)는 2열로 정비하라. 지금부터 천의맹까지 전력질주로 달려갈 것이다!"

가장이 보았던 미녀들 선두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색 경장을 걸친, 소녀처럼 보이는 가녀린 여인.
1년 전 다시 하오밀문의 제자가 된 초영완, 아니 완초령이었다.

"철갑기병은 대오를 정비하라. 우리 또한 천의맹을 향해 전력질주 한다."

"해룡단도 마찬가지다. 천의맹까지 전력질주 한다. 낙오하는 놈은 바로 해룡문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사해단 도 마찬가지다. 낙오하는 자는…."

"소녀차혼대는 출발하라!"

다섯 번의 고함소리와 함께 색색의 옷을 입은 여인들이 가장 먼저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남색 경장을 한 여인들이 지면을 박차며 그녀들을 따랐고, 철갑기병대의 말들이 요란한 발자국 소리를 남겼다.
그리고 짧은 박도를 쥔  자들과 표사복장을 한 이들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지면을 찼다.
중원 전역을 떠나온 하오대문의 제자들이었다.

"저들도 모이니까 무시 못할 전력으로 변하는구나."

메뚜기처럼 불쑥 불쑥 튀어 오르는 수많은 무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자들. 섬서 본가를 떠나온 영호풍 일행이었다.
영호풍의 얼굴엔 감탄의 빛이 역력했다. 조금 전 천의맹으로 향했던 그들은, 강호 상에 알려진 자들이 아니다.
이곳에서인지, 아니면 미리부터 이야기가 됐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별개가 아니었다.
서로 뭔가를 상의하는 듯하더니 일제히 천의맹으로 몸을 날리고 있다. 그런데 그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기다란 포물선을 남기고 가는 자들, 말에  박차를 가하는 자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자신감이 넘쳤다.
오대세가의 위세에 밀린다는 사실 때문에 몇 번을 망설였고, 마지못해 천의맹으로 와야했던 영호세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마냥 부럽기만 했다.

"오라버니! 힘을 내세요. 무력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래, 전쟁은 무력으로만 치르는 건 아니니까."

동생인 영호화연의 말에 영호풍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무력은 다른 곳에 비해 딸리지만 영호세가가 자랑할 수 있는 건 있다.
그것은 수대에 걸쳐 내려온 엄청난 금력이었다. 지금 자신과 동생의 품속엔 10만 냥 짜리 전표 다섯 장이 들어있다.
하지만 지금 가져온 돈은 일부에 불과했다.
앞으로 영호세가를 대하는 천의맹 상황을 보면서, 가져온 몇 배의 돈을 더 내놓을 생각이었다.

"걱정하지 말고 가요. 출발하세요!"

싱긋 미소를 지은 영호화연은 뒤편에 서 있는 세가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100명, 세가에서 돈을 주고 고용한 무인들이다.
영호화연의 외침과 함께 100명의 무인들이 천의맹을 향해 몸을 날리자,
수많은 무인들로 들끓었던 옥산 어귀는 일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올 때가 됐는데."

충의문 앞, 연부성은 산등성이쪽을 연신 주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한 달 전부터 정문 근무를 그만 두었던 그가 새삼스레 이곳에 나온 이유는 맹주전에서 내려온 명령 때문이었다.
강소성 소천문, 복건성 해룡문, 강소성 사해표국, 절강성 화화방,
무산 신녀곡 그리고 섬서 영호세가 인물들까지 전부 1천 여명 옥현을 출발했다고 하였다.
다른 문파들이야 별반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무산 신녀곡과 섬서 영호세가는 대충 넘길 이들이 아니었다.
무산 신녀곡은 구파일방과 맞먹는 세력을 가진 곳이고, 섬서 영호세가는 신녀곡 무력에 버금가는 금력을 가진 곳이다.
벌써 그들에 대한 배치도 끝냈다.
신녀곡과 다른 문파들은 인원이 대폭 줄어든 선무전에 투입하기로 하였고,
영호세가는 천무전 아래에 두어 맹주가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억! 저들이…."

일순 시야 가득 잡혀드는 수많은 인영을 보며 연부성은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지면을 박차며 날아오는 자들의 무공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소수정예란 말이군."

몇 몇 고수만으로 강한 문파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 연부성은 싱긋 웃었다.

"정의문을 열어라!"

멀리서 다가오는 무인들을 보며 연부성은 수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천의맹 소속 무인들이 출병할 때와 귀환할 때 등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개방했던 정의문이 이례적으로 열렸다.

휙! 휙휙휙! 휙!

천의맹 앞쪽으로 무인들 내려서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가장 먼저 내려선 이들은 부하들을 먼저 보내고 맨 나중에 출발했던 완초령을 비롯한 다섯 명이었다.

"킥!"

일순 충의문 옆을 보던 완초령은 나직하니 실소를 흘렸다. 제자모집이라 쓰여진 커다란 깃발을 보았던 탓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던 나머지 네 명 또한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풋! 하하하!"

"크! 하하하!"

잠시 서로를 응시하던 네 사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자들이?'

연부성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신녀곡의 소곡주를 제외한 네 명은 강호 상에 이름조차 변변히 알려지지 않은 자들이다.
아니 신녀곡의 소곡주도 마찬가지다. 별호조차 얻지 못한 그들이 아닌가.
천의맹 앞에서 입을 벌려 웃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닌 것이다.
마교와의 전쟁이 아니라면 천의맹 근처에 오지도 못할 자들이 아니던가. 울컥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참아야했다. 아무것도 없는 자들이지만 그들 또한 힘을 더하겠다고 천의맹으로 온 자들이기에.
치미는 화를 눌러 삼키며 여전히 웃고 있는 자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소생 분광참혼검(分光斬魂劍)연부성(燕副星)이라 하외다.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으레 그랬던 연부성은 상대의 놀란 얼굴을 기대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연부성의 기대는 무참하게 구겨지고 말았다.

"죄송하외다. 부하들을 먼저 정리한 다음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연부성을 향해 간단한 목례만 남기고 육만우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오는 기병들을 향해 커다랗게 고함을 내질렀다.

"철갑기병대는 우측으로 집합하라!"

"해룡단은 좌측으로 집합하라!"

"소녀차혼대는…!"

"……!"

이어지는 고함소리에 연부성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곳에서 무인들의 안내를 맡은 이후 지금처럼 무시를 당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대부분 무인들은 연부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분광참혼검이란 별호를 외치며 놀랐었다. 
이름 없는 중소문파에 소속된 자들이기에, 모를까 싶어 별호를 일부러 가르쳐 주었다. 
런데, 녀석들은 단 한 명도 놀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부하들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이래서 개나 소나 다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거라고."

한참을 정리에 여념 없는 무인들을 보며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다.
그가 다섯 사람과 정식으로 마주보게 된 것 그로부터 반 시진 후였다.
부하들의 옷매무새까지 전부 점검하도록 지시한 다섯 사람은 몸을 돌려 일제히 연부성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강소성 소천문의 육만우라 하오이다."

"복건성 해룡문의 구칠우라 하오이다."

"강서성 사해표국의 서영상이라 하오이다."

"절강성 화화방의 매난설입니다."

"신녀곡의 완초령입니다."

"반갑소. 연부성이오. 잠시만…. 타핫!"

육만우 일행을 향해 포권을 취하던 연부성은 나직한 고함을 지르며 지면을 찼다.
멀리 영호세가 무인들이 보고, 몸을 날린 듯했지만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조금 전 녀석들에게 받았던 수모를 갚고자 펼친 경공이었는데. 이번 역시 육만우 일행은 누구도 놀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쿡! 저러면 놀랄 줄 아나보지?"

자랑이라도 하듯 부하들의 머리를 넘어 날아가는 연부성을 보며 육만우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별것도 아니구먼."

서영상이 나직하니 웃으며 육만우의 말을 받았다. 과거 같으면 부러운 눈으로 보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연부성보다 더 높은 무공을 지닌 자신들이 아닌가.
떨떠름한 얼굴로 서 있는 일행 곁으로 다가온 연부성은 영호풍과 영호화연을 소개했다.

"이분들은 섬서 영호세가에서 오셨습니다.
이분은 풍운선(風雲扇) 영호풍(令狐風)이고, 이 분은 비선녀(飛仙女)라 불리는 영호화연(令狐花蓮) 소접니다. 인사들 하십시오."

풍운선과 비선녀라는 별호를 힘주어 말하며 연부성은 두 사람을 소개했다.

"영호풍이라 합니다. 그리고 여긴 제 동생….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육만우요. 여기는 동생인 서영상, 구칠우….  우린 별호 같은 건 없소. 그냥 이름으로 부르시오."

"별호가 중요한 건 아니지요."

육만우를 보며 영호풍은 싱긋 웃었다.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조금 전 광경이 떠올랐다.
인사를 나누던 연부성은 자신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몸을 날렸다.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모욕감까지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많이 겪어,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리라.
문득 답답했던 무엇인가가 내려간 듯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자자! 인사가 끝났으면  여러분이 가야할 곳을 말하겠습니다.
원래 다른 무인들은 천의맹에 들어오면 일야숙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다음날 배치를 받게 되는 데 여러분은…."

"벌써 자리가 정해졌단 말이오?"

빠르게 이어가는 연부성의 말을 끊으며 육만우는 물었다.

"그렇습니다. 신녀곡을 비롯한 여러분들은 선무전에서 생활하시게 될 터이고, 영호세가는 천무전으로 소속으로 정해졌습니다."

"듣기론, 가고싶은 곳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던데…."

"물론 그렇소. 하지만 선무전을 제외하면 수용할 공간이 없소. 
령무전이나 와룡전은 더 이상 인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나마 선무전에 자리가 있기에…."

"그럼 됐소이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구먼. 선택은 우리가 하겠소."

"무슨 소린가?"

연부성은 의아한 얼굴로 육만우를 보았다. 선무전이 어떤 곳이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의맹 최 정예라 알려진 곳이다. 아니 무당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무게는 측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삼류문파 나부랭이들이 선무전으로 배치된 걸 못마땅해 하다니. 문득 미친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무전은 죽어도 들어가기 싫고, 와룡전과 령무전은 인원이 꽉 찼다고 했으니까 그럼 남은 곳은…, 초 사제 깃발 뽑아라!"

"무슨…."

"무슨…."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부성은 육만우를 보았다. 초 사제라니, 조금 전 소개를 받을 때만해도 사제란 말은 하지 않았었다. 
옥현에서 만나 안면을 트고 온 자들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연부성의 놀람은 시작에 불과했다.
육만성을 향해 고개를 숙인 완초령이 충의문 옆 바닥에 박혀 있던 하오문 깃발을 뽑아드는 광경을 경악한 눈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완초령의 확고한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우린 하오대문의 문도들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선무전이 아닌 하오대전입니다."

"철갑기병은 다시 한번 복장을 점검하라!"

"해룡단은 복장을 점검하라!"

급기야 연부성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오대전이라니. 

"출발한다! 대오를 정리하고 열을 맞춰라!"

"허허!"

분명 누군가 지르는 고함소리였지만 연부성의 귓전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정의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1천 무인들을 망연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화연아!"

1천 무인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던 영호풍은 동생을 불렀다. 

"오빠 생각대로 하세요. 이곳에서는 오빠가 영호세가의 가주잖아요."

"고맙다."

싱긋 미소를 지은 영호풍은 대오를 정비하고 서 있는 무인들을 향해 돌아섰다.

"나는 저들과 함께 하오대전으로 갈 것이오. 하오밀문 아래로 들어가는 게 싫은 사람은 떠나도 좋소.
선금으로 지불했던 돈도 받지 않을 것이오.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따라 오시오."

100여 명 무인들을 찬찬히 보던 영호풍은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야 그들을 데려가고 싶다.
하지만 하오밀문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강요할 수도 없다. 그들의 결정에 맡길 참이었다.
일순 정의문 밖에 남아있던 무인들은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기껏 이곳까지 따라 왔는데 떠나라니.
물론 영호풍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혹시 불명예라 생각하고 불만을 가진 자들이 나올까봐 그런 것이리라.
자신들을 위해 하는 말이라지만 내심 섭섭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인간적인 정도 들었던 사람이 아닌가.

"우리도 따라 갑시다. 하오밀문이라면 괄시받을 일도  없을 테고…. 또 어차피 갈곳도 없는 몸 아니오."

누군가의 말이 신호탄이었을까 남아있던 무인들은 하나 둘 영호풍 뒤를 따라 정의문 안으로 들어섰다.
연부성은 더 이상 놀랄 겨를도 없었다. 무인들을 받기 위해 처음 열린 정의문으로 들어선 자들은 전부 하오대전 행을 택했다.
아니 본인들 스스로 하오대문 문도라고 하였다.

"허! 천의맹이 발칵 뒤집어 지겠군."

연부성의 짐작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금일 들어온, 신녀곡을 비롯한 1천 무인들이 전부 하오대전을 택했다는 소문을 순식간에 천의맹을 강타했다.
천의맹 소속 대부분 무인들은 경악한 얼굴로 하오대전 쪽을 보았다.
선무전 무인 절반이 희생당했을 때도 지금처럼 놀라지 않았다. 전쟁에서 희생이야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하지만 하오밀문의 빈 건물에 사람이 채워지리란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그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곳이 채워졌다.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 집안이 번성한다.
          
          
신분 상승이 가져오는 삶의 변화는 여러 가지다.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변화는 그 집안에 출입하는 사람들이나 일하는 시종들의 행동에서 나타난다.
거만해진 걸음걸이와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들,
비단으로 싼 조그마한 상자를 들고 당성의 거처로 가는 총관 이풍성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은 뭘 보냈으려나…."

품안에 들린 상자를 보며 이풍성은 흐뭇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평소에도 많은 지인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는 가주지만, 요즈음 들어오는 선물은 그들이 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성의 사위이자 동창제독인 고명필의 선물인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당가려가 그를 따라간 다음부터 매일 크고 작은 선물이 당도했고, 그때마다 자신이 가져다 주었다.

"부맹주님 접니다."

당가전(唐家殿)에서 부맹주전으로 현판을 바꾼 당성의 거처 앞에서 이풍성은 나지막이 아뢰었다.

"무슨 일이냐?"

"저 동창제독께서…."

"들어오너라!"

'선물도 자주 받으니까 싫은 모양이네.'

마뜩찮아 하는 듯한 당성의 목소리에 이풍성은 슬며시 웃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보내오는 선물.

'답례를 하는 것도 만만치 않겠지. 그래도 이게 어딘데….'

아랫사람이 보내오는 선물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위라고 하지만 상대는 동창제독이다.
그에 선물에 대한  답례는 반드시 해야한다. 어쩌면 그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이풍성은 생각했다.

"거기 놓고 가거라!"

"그럼!"

탁자 위로 검은 상자를 놓은 이풍성은 힐끗 당성의 표정을 살피더니 이내 밖으로 나갔다.

"으음!"

비단 천으로 싼 상자를 뚫어져라 보던 당성은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사위의 선물, 아니 동창제독의 선물. 
처음 그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날아갈 듯했다. 
비록 벼루에 불과했지만 황실에서 황제가 쓰던 물건이라 하였다.
황제가 쓰던 물건, 부맹주가 된 자신에게 그처럼 어울리는 물건도 없다고 생각했다.
답례를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고민하던 당성은 결국 그가 보낸 상자 안에 현금을 넣어 보냈다.
동창제독의 취향을 조사하던 중 선물은 현금으로만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고맙다는 서신과 함께 황제가 사용했다는 붓이 들어있는 선물 상자가 도착했다. 
그날부터 시작이었다. 그가 보낸 선물상자에 돈을 넣어 보내면 치하의 말과 함께 다른 선물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가 보낸 선물이 방 이곳저곳을 장식함과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돈이 나갔다.

"끄응! 이번 상자는 어제보다 더 크네."

은은한 향이 흘러나오는 상자를 보며 당성은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실내를 둘러보면 온통 황제가 썼던 물건들밖에 없었다.
서탁 위에는 5개의 벼루와 10개의 먹, 그리고 20 자루의 붓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 옆으로는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책들이 쌓여있다. 그 책들 중 상당수는 춘서들이다.
그 또한 황제가 애용해서 보았다는 책이니 내다 버릴 수도 없었다.
황제가 쓰던 물건을 선물로 받았다며 자랑할 수도 없는 것들이 방안에 가득한 것이었다.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뚫어져라 보던 당성은  결심한 듯 비단 천을 풀었다.
동창제독의 선물인데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상자 안에 현금을 채우기 위해서는 풀어봐야 한다.

"이건…?"

뚜껑이 열리고 안쪽에서 나온 물건을 확인한 당성은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했다. 몇 마리의 용이 정교하게 새겨진 항아리였다.
겉보기에는 상당한 가치를 지닌 듯한 도자기를 보며 인상을 쓰다니. 
하지만 당성이 인상을 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밤에 화장실 대용으로 쓰이는 요강이었던 것이다.

"웬 가루가?"

요강을 들어 한쪽으로 치우려던 당성은 안에 있는 조그마한 주머니를 보며 깜짝 놀랐다.
동창제독의 선물은 요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요강 옆에 있는 조그마한 비단 천을 풀자 깨알같이 적힌 글이 나타났다.

'생활차(生活茶) 또는 회춘차(回春茶)라 부르는 차요. 
황제폐하께서 귀빈이나 황후의 침소에 드실 때만 조심씩 마시는 차인데 이번에 구해왔소이다.
함부로 빼돌릴 수 없는 물건이라 그곳에 넣어왔으니 양해하시오.
아시는 분들에게 선물로 돌려도 무방할 정도로 양은 넉넉하오. 더 필요하시면 말하시오.'

"냄새는 나지 않는군. 그나저나 회춘차라…. 문주들에게 위신이 좀 서겠군."

그나마 지금껏 보내온 선물 중 가장 낫다는 생각에서인지 당성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동창제독을 사위로 맞은 다음부터 자신의 처소엔 부쩍 각 문파 문주들의 출입이 잦았다.
얼굴이나 보러 왔다며 들르는 그들이지만 빈손으로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들어오기 전 총관에게 맡겨두었던 것이다. 마땅히 답례할 것도 없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숙부 접니다."

"응! 왔구나."

밖에서 들려오는 당가려의 목소리에 탁자 위를 치운 당성은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은 물론이고 당가의 번영을 가져다줄 당가려였던 탓이었다. 
이어 문이 열리며 당성의 세 아들을 비롯한 당가려가 안으로 들어왔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당성 앞으로 다가온 당가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오늘 고명지와 함께 북경으로 떠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래. 고맙다, 우리 당문의 번영은 전부 네 덕이다."

당가려의 두 손을 덥석 쥔 당성은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과 같이 내치지 않고 떠맡았던 조카딸이 당문의 번영을 가져다줄 줄은 생각지 못했다.
혈린만독편을 완성한 것보다 더한 영광을 그녀에 의해 얻게 된 것이다.

"이젠 너는 고씨문중 사람이니라. 그곳에 뼈를 묻어야 한다. 그리고 조만간 형님도 복권시켜 줄 것이니라."

당가려의 괄괄한 성격과 겁천십웅의 무공을 완성했다는 사실 때문에 하는 말이다.
혹여 그녀가 동창제독부를 뛰쳐나온다면, 그 모든 책임은 당문에서 지게 될 터이고, 당문은 몰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무표정한 얼굴로 당가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문득 숙부라는 사람이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동안 아버지라 부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동창제독의 됨됨이에 대해선 한 마디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친부를 들먹여 협박을 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연민마저도 날려버리는 사람. 한시바삐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도 나가마."

문을 열고 나가는 당가려의 등을 향해 당성은 활기차게 말했다.
천의맹 수뇌들이 있는 곳에서 다시 한번 세(勢)를 과시할 때가 온 것이다.
그녀가 천의맹 문을 나서는 순간, 동창제독은 당문의 사위로 굳어진다.

"앉아라! 차나 한잔해야겠다. 이게 너희들 처남이 보내온 차니라."

동창제독이 보내온 생활차를 끌어 당겼다. 차를 담아온 상자에 전표를 가득 넣어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저 만치 날아가 버렸다.
당가려가 그곳에 있는 이상, 몇 달 안에 보충될 터이고, 보낸 돈보다 더욱 많이 들어올 것이기에.

"아버님! 그래도 버리지 않고 키운 보람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면 보은을 받는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첫째인 당운상이 삼매진화의 공력으로 주담자를 데우며 웃었다.

"그나저나 남궁세가에 전주자리를 물려준 일은 잘하셨습니다."

그랬다. 부맹주로 승진한 당성은 남궁세가를 달래기 위해 가주인 남궁장순의 섭섭함을 달래기 위해 와룡전주자리를 권했다.
처음엔 난색을 표했던 남궁장순은 못이긴 척 수락했고, 당가려 일로 자칫 소원해질 뻔했던 두 가문의 관계는 원만하게 풀렸다.

"섭섭해도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 상대가 동창제독인데."

"그렇지요. 우리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동창제독의 눈에 들어 그렇게 되었는데 누굴 탓하겠습니까. 향이…, 좋군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던 당운상은 인상을 찌푸렸다. 동창제독이 보냈다는 차에서 기이한 냄새가 났던 것이다.
마치 오래 동안 신었던 신발에서 나는 그런 냄새가 나는 듯했다.

"건강을 지켜주는 차라서 그런 게야. 맛으로 마시는 게 아니니라.
자주 마시면 괜찮아 질 거다. 그런데, 하오대전엔 선물을 보냈느냐?"

기이한 향이 나는 차를 홀짝 마시며 당성이 말했다.
그 또한 역겨운 냄새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일단,
혹시 동창제독이 맛이 어땠냐고 묻기라도 하면 대답을 해야하기에 마셔둘 수밖에 없었다.

"네, 보냈습니다. 하오밀문 문주가 무공 비급을 원하다는 말을 은근히 비췄더니 각 문파에서 알아서 주더군요."

구파나 각 세가들로 봐서는 대단한 무공은 아니었다. 문파에 막 입문하는 제자들이나 익히는 기본무공들에 불과했다. 
그것들을 모아 하오대전에 전달해준 것이었다.

"그 외에 하오밀문 문주가 가장 즐겨먹는 것들도 잔뜩 보냈습니다."

"정력제 말이냐?"

야혼의 얼굴을 떠올린 당성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눈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잘생긴 녀석이, 이제 서른도 안 되는 자가 정력제를 밝힌다고 했을 때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제 주제에 딱 어울리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해 왔습니다. 무공비급에 대해선 언급조차 안 했더군요."

당운상 또한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눈앞에서는 무시하지 말아라. 무공도 무공이지만 동창제독 친구 아니냐.
거시기를 잡고 흔들 수 있는 친구 말이다. 쿡! 하하하!"

"픗! 하하하! 아버님! 이젠 그만 하십시오. 그러다 소자 배꼽 빠져 죽습니다."

일순 부맹주전 안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그 시간.
당문 네 부자를 웃게 만들었던 야혼은 연신 입을 오물거리며 마차를 이리 저리 오가며 마차를 점검하고 있었다.

"연작문주! 체통을 지키시게. 마누라들 떠난다고 그렇게 좋아하면 수하들이 욕한단 말이네. 그러다 입 찢어지겠네."

육만우를 비롯한 다섯 명은 킥킥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부터 이어지는 추기영의 한마디 한마디는 폭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처음 야혼으로부터 동창제독이 부인이란 말을 들었을 때 기절할 듯 놀랐다.
하오대문을 만들겠다며 호언했던 그는 그동안 놀지 않았다.
자신들이 목숨걸고 무공을 익힌 것만큼 많은 일을 해두었던 것이다.
비단 동창제독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마도련 또한 하오대문 휘하에 있다고 하였다. 
동창제독과 마도련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그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너희들도 알 권리가 있기에 말해준다.'라고 했다. 일순 다섯 명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하오대문은 꿈이 아니었다. 문파는 이미 만들어졌고, 그곳으로 가는 길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바위를 치우고, 풀을 잘라내는 작업을.

"무슨 소리야 임마. 여기서 북경이 얼마나 먼데."

"아미타불! 그런데 정력제는 왜 씹어먹고 있는가. 앞으로 쓸 일도 없는데."

야혼을 보며 말하던 추기영의 시선이 완초령에게로 향했다.
또 기분이 나빴다. 과거 초 사제라 부르던 그녀마저도 야혼의 마수에 걸려 있었다.
한 명 나가면 다른 한 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그 한 명이 자리를 뜨면 또 다른 한 명이 들어와 야혼 곁에 자리한다.
지금껏 보아왔지만 녀석의 작업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영호세가 여식인 영호화연은 야혼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소리 마라 임마. 몸은 말이다,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단 말이야.
언제 가려나 명지가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일 아니냐. 자! 준비는 끝났고, 무쌍사왕(無雙四王)도 준비해!"

일순 주변에 있던 이들은 의아한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무쌍사왕이라니, 누구도 그런 별호를 가진 이가 없었던 탓이다.

"쯧! 제 별호도 모르는 놈들을 데리고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뚫고 가냐.
육만우 너는 무적제왕(無敵帝王)이다. 구칠우 너는 마도천왕(魔刀天王)이다. 서영상 너는 무영퇴왕(無影腿王)이다.
매난설 너는 염화미왕(艶花美王)이다. 너의 넷을 합쳐 무쌍사왕이라 부르기로 했다. 맘에 들어?"

"감사합니다, 문주님! 별호에 어울리는 실력을 쌓도록 분골쇄신하겠습니다."

감격한 얼굴로 네 사람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무공을 익힌 이래 처음 가져보는 별호다.
그것도 별호의 마지막은 전부 왕(王)이다.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별호에 어울리는 실력을 배양하라는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는 말이었다.

"더 노력할 필요는 없다. 지난 1년만큼만 한다면 향후 10년 안에 너희들 위로는 몇 명 없을 것이다.
자! 그만 출발하자, 가서 병사들 데려와라."

"존명!"

벌떡 일어난 육만우의 신형이 병사들과 동창 무인들이 머물고 있는 건물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제독합하, 준비 끝났습니다."

마차 문을 활짝 연 야혼은 자신의 집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야혼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고명치가 날아 내리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뭘, 이렇게 많이 실었어?"

 안으로 들어선 고명지는 놀란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마누라 떠나보내는 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해. 얼굴 좀 봐라! 해쓱하니 말라가지고는…."

"그거야 당신에게 시달려서 그런 거지 일 때문인가."

 "내 말이 그 말이야. 나 하나도 감당 못하면서 어떻게 이 나라를 운영할거냐고.
전에도 말했지만 어떻게든 주안과 구해서 먹고. 나도 열심히 구해볼 테니까."

"당신…?"

눈시울이 뜨거워진 고명지는 야혼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울지 말고. 내가 뭘 해준 게 있다고 그래. 앞으로도 당신 신세를 져야하는데."

"알았어요. 최선을 대해 당신을 도울게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나직한 밀어 속에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빠르게 이동하여, 얼마 후 천의맹 정문에 도착했다.

"아미타불! 하여간 연작문주는…."

보통이 하나를 꼭 쥔 채 서 있는 당가려를 보며 추기영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성벽아래 그늘진 곳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연상시켰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독합하!"

마차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감연청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분분히 다가오며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뭐하느냐! 어서 마차에 오르지 않고."

하지만 그들은 동창제독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수뇌들을 힐끔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당가려를 먼저 불렀다.

"저기…."

서지도 않고 곧바로 정의문을 나서는 마차를 따라 붙으며 감연청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그에게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었던 탓이었다. 며칠 전 하오대전에 방문하여 마도련에 관한 부탁을 했었다.
그때 생각해보겠다는 말만 들었을 뿐 확답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마도련주에게는 말하겠소."

"감사합니다, 합하!"

멀어지는 마차에서 들려오는 냉랭한 목소리에 감연청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것이었다.

"옥현까지 따라가지 그런가, 어린 시절 친구가 떠나는데."

다시 정의문 안으로 들어서는 야혼을 보며 감연청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물었다.

"바쁜데 들어가라 하였습니다. 나중에 또 보면 되는데요, 정 보고싶으면 북경으로 찾아오라고 하더군요."

"그랬군요, 그런데 좋은 낮을 놔두고 하필 밤에…."

야혼이 경직된 얼굴로 말하자 감연청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거야 본인 마음이지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럼 소생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한 야혼은 몸을 날려 일행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건방진 놈! 동창제독을 친구로 둔 덕분에 전주가 된 줄 알아라. 언감생심 너 같은 놈이…."

멀어지는 야혼을 보며 감연청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병력도 생겼던데 출병을 시키는 것 어떻습니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감연청 곁으로 잔뜩 붉어진 얼굴의 남궁장순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미 생각하고 있소이다. 다음 출병 땐 령무전과 같이 내보낼 작정입니다. 그런데 둘째는 괜찮습니까? 충격이 클텐데."

남궁창에 관한 말이었다. 그가 당가려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소문으로 돌았다.
그런데 동창제독에게 당가려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이겨내야지요. 오히려 녀석에게 득이 된 것 같습니다. 며칠 간 폐관하겠다고 하더군요."

우쭐한 얼굴로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당성을 흘낏 보며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가 지명한 와룡전 전주자리를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전주자리라도 차지하고 있어야 둘째를 영웅으로 만들 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동창제독을 선택한 당성에게 복수하는 길은 그 방법밖에 없다.
둘째를 강호의 영웅으로 만들어 그가 후회하는 꼴을 반드시 보고 말리라.
문득 추레한 얼굴로 돌아왔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린 남궁장순은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녀석은 들어오자마자 혼자 있고 싶다며 연공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축 처진 녀석의 어깨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기다려라, 내 반드시 너만은 강호 제일의 영웅으로 만들어주마. 만인이 부러워하는 영웅으로 말이다."

아들이 있는 와룡전 쪽을 보며 남궁장순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영웅으로 만들길 원하는 둘째는 연공관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지 않았으니.
남궁장순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둘째를 위시한 몇몇 세가의 자식들은 은밀하게 천의맹을 나섰다는 사실을.
곡령(谷嶺). 곡령이란 이름처럼 이곳은 특이한 지형이다.
높다란 봉우리와 깊은 계곡이 동시에 존재하여 사시사철 음습한 바람이 불어온다.
천의맹 입구에 있는 옥현을 가거나, 아니면 옥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야 할 계곡길이다.

"올 것인가?"

곡령 봉우리 장군석이라 부르는 커다란 바위 아래에서 흥분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래편 계곡을 내려보며 거친 숨을 내쉬는 이자, 연공관을 빠져나온 남궁성이었다.

"명심하게 아우, 살수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오늘 일은 무조건 백지로 해야하네.
남천악을 만났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려야 한단 말이네."

확인하듯 악운보는 남궁성을 보며 말했다.
남천악을 믿고 일을 하겠다고 했지만 며칠 간 생각해본 결과 무모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차마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어 남궁성과 같이 나왔지만,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포기할 참이다.
아니 살수들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해야했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무모한 일에 목숨을 걸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설사 살수들이 온다고 해도 완전한 기회가 아니면 나서지 않을 참입니다."

남궁성 또한 악운보와 다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동창제독을 없애겠다고 호언했지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혹여 오늘 일이 새어나가기라도 가문은 그야말로 풍비박산된다. 그렇게 되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완전한 기회. 동창제독 혼자만 남는 순간이 아니면 결코 나설 생각이 없다.

"우리 넷이면 동창제독을 없앨 수 있습니다. 제가 기다리는 건 그땝니다. 응?"

짓씹듯 말하던 남궁성은 흠칫 놀란 얼굴로 살기를 드러냈다.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냐!"

재빨리 몸을 날려 방금 인기척이 났던 곳으로 몸을 날리며 외쳤다.

"이런 곧 동창제독 행렬이 올 터인데 고함을 지르면 안되지."

"남천악?"

뽑았던 검을 거둬들이며 남궁성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같이 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던 남천악이었던 탓이었다.

"이곳에 올 사람이 나밖에 더 있겠나. 나는 준비가 끝났다. 나머진 너희들이 알라서 해라."

"몇 명이나 왔나?"

"200명이 왔다. 살인루가 전부 출동했다고 보면 된다."

"호! 돈을 많이 썼군."

"동창제독을 없앨 수만 있다면, 자네들이 줄 것 아닌가. 해서 무리를 좀 했지."

"하지만…."

"아! 알고 있네. 완벽한 기회가 아니면 나서지 않을 거라는 걸. 나도 알고 있으니까 설명하지 않아도 되네.
단, 일을 하던 안 하던 우리가 만났던 사실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할 걸세. 그렇지 않으면…."

"헉!"

남천악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공할 기운에 남궁성을 비롯한 네 명은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그가 전주가 되었다고 했을 때, 사부인 감연청의 후광을 얻은 행운아라 여겼었다.
그런데 실제 대하고 보니 단순히 화산파의 후광만은 아니었다. 전주에 어울리는 무공을 가진 자가 바로 남천악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바라는 바요."

이내 표정을 풀며 남궁성은 차갑게 말했다. 서로의 입장이 같았기에 그와 같이 일을 하고 있을 뿐 결코 그를 신뢰해서가 아니다.
단지 동창제독을 없애는 시점까지만 같은 배를 타고 있을 뿐이다.

"좋네. 그럼 행운을 빌겠네."

싱긋 미소를 지은 남천악은 일행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멀어졌다.

"나는 저 자식이 더 기분 나빠.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친단 말이네."

시야에서 멀어지는 남천악을 보며 악운보는 짜증난 듯 말했다. 남천악의 눈빛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던 눈은 과거 일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도 말이 새어나가게 만들었던 그 사건.
어둠 속에서 놈의 주먹에 당해 십여 개의 이가 부러졌다. 남천악의 외눈은 그때 보았던 놈의 눈빛과 흡사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녀석을 보고 있으면 그 놈이 떠오릅니다. 남색을 밝혔던 그놈이 말입니다."

남궁성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말했다. 이 일은 발단은 그날 보았던 광경이다.
바로 그 시간, 남궁성 일행과 멀어진 남천악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채 조금 전 떠나왔던 장군석을 보고 있었다.
답답한 듯 안대를 풀자 남천악의 얼굴을 기이한 변화를 보였다. 이어 싱긋 웃는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야혼이었다.

"너희들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왜냐면, 살인루주는 이미 저승으로 갔고, 태웅이 신임 살인루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루주님, 목표물이 5리 밖에 도착했습니다."

절벽 아래, 어둠 속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검은 무복에 복면을 하고 있는 자, 그는 살인루 5사객의 대형인 귀살(鬼殺)이었다.

"으음! 살객들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

전면을 보고 있던 자의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인루주로 변장하고 있는 태웅이었다.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굳이 해야하는가, 상대는 동창제독인데."

태웅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살인루를 이번 일에 끌어들일 결심을 한 것은 마도련으로 들어가기 전 없앴던 사접(死蝶)때문이었다.
그들이 아직 야혼에 대한 청부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살인루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짐작대로 야혼의 목을 청부한 사람은 남천악이었다. 그때부터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살인루주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의 거처를 확인했다.
그리고 살인루주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농약과, 뼈까지 녹이는 화골산이라는 독이었다.
그리고 남천악으로 변장은 야혼은 청부를 했다.

"동창제독을 직접 암살하는 것도 아니고 병사들을 유인해주는 대가로 우리가 받는 돈은 50만 냥입니다.
더구나 하오밀문 문주 암살 건에 대해선 불문에 붙이겠다고 했습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복면 속에서 태웅은 빙그레 웃었다. 사실 이번 일의 관건은 살객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창제독을 공격하는 일이 아닌가.
해서 두 가지를 강조했다. 동창제독을 직접 암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과, 50만 냥이라는 거금.
다소 난항을 예상했던 청부 건은 5사객으로 인하여 쉽사리 해결되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건 야혼에 대한 청부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있지만,
전쟁이 끝나면 살인루의 존재 자체가 불투명해진다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했다.
50만 냥은 모험을 해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습니다. 성공만 생각하십시오."

"알았다. 가서 자리를 지켜라!"

"존명!"

고개를 숙인 귀살은 어둠 속으로 스르르 몸을 숨겼다.

"남천악 어떻게 나올 테냐. 궁지에 몰린 네가 어떻게 나올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지 나는 그게 궁금하단 말이다."

멀리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마차를 보며 태웅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슨 소린지 아직은 알 수는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었다.
동창제독 암살을 모의한 이번 작전은 와룡전 세가들뿐만 아니라 남천악마저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각 대(隊)에 연락하라! 연막탄을 던지며 동시에 치도록 한다."

"존명!"

어둠 속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를 끝으로 계곡은 다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따각! 따각!

전방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아는지, 마차를 호위하는 병사들의 표정은 한가했다.
어두운 밤길을 가야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긴장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명심해라! 놈들은 죽이면 안 된다.'

언제 마부석으로 돌아왔는지, 야혼은 마차 안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고명지에게 보내는 전음이 아니었다. 마차 안 짐 속에 숨어 있는 육만우 일행에게 하는 말이었다.

'두 가지를 필히 없애야 한다. 단전과 오른 팔!'

'알겠습니다, 문주님!'

쉬익! 슈욱!

"크아악! 아악!"

펑! 퍼엉!

육만우의 전음이 야혼의 귓전으로 울리는 순간 사방에서 날아온 덩어리들이 폭발하듯 터지며 검은 연기와 함게 비명소리가 울렸다.

"적이다! 마차를 보호하라!"

화들짝 놀란 동창무인들이 마차를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연막 속으로 검은 인형들이 벌떼처럼 뛰어들었다.

"살수들이다, 마차를 호위하라, 아-악!"

"크아악!"

어둠 속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검광이 충천했다.

"말을 몰아라!"

누군가의 고함소리와 함께 복면의 살수 몇몇이 말 등으로  올라탔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마부석에 있는 야혼을 향해 한 움큼 암기를 뿌렸다.

"으-아악!"

"타핫! 이럇!"

옆으로 픽 쓰러지는 마부를 흘낏 본 복면인의 신형 역시 말 등으로 몸을 날렸고, 이어 마차는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동창무인들은 마차를 따라라!"

전면으로 내달리는 마차를 따라 동창무인들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마차를 따를 수가 없었다.
수많은 암기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검과 도를 휘둘러 암기를 막아내는 순간 마차는 벌서 20여 장 밖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북대(北隊)는 마차를 추격하라!"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마차를 뒤쫓으며 고함을 질렀다. 마차 전면을 막아서고 있던 귀살과 그 부하들이었다.

"성공이다!"

전면으로 내달리던 귀살은 희열에 찬 고함을 질렀다.
부하들이 끌고 가는 마차는 계곡 길을 통과하여 10여 리 떨어진 와선곡(臥仙谷)으로 들어가게 된다.
와선곡까지만 간다면 마차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터이고 살인루의 일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50만 냥을 챙겨들고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활을 쏴라!"

빠르게 달려가는 부하들을 보며 귀살은 소리쳤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작전이 만족스러웠다. 
150명 살객이 병사들과 동창무인들을 붙잡고 있는 사이에 자신을 따르는 50명은 마차를 뒤쫓기로 했다.
당가려를 마차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몸을 나리며 오십 여명의 살객들이 시위를 당기자 내공을 가득 실은 화살이 전면 마차를 향해 빛살처럼 나아갔다.

"감히 동창제독을 넘보다니 죽고싶어 환장했구나."

마부석 쪽에서 한 인영이 굴러 떨어짐과 동시에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울렸다. 야혼의 지시에 의해 마차를 내린 당가려였다.

"쳐라!"

귀살의 명령에 따라 다섯 명의 살수들이 스치듯 지면을 밟으며 당가려 전면으로 쇄도했다. 

"타핫!"

쉬이익!

삼 장 거리까지 접근한 살객들은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양손을 비쾌하게 뿌렸다.

"건방진 놈들, 내 앞에서 암기를 뿌리다니."

낮게 소리친 당가려는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려 둥글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 앞으로 환처럼 둥근 막이 생겨나더니, 그 안으로 암기들이 빨리듯 들어왔다.

"내가 사천당가의 출신이란 사실을 잊으면…."

진득한 살기와 함께 당가려의 양팔이 전방으로 활짝 펴졌다.

"크아악!"

"아악!"

거의 동시에 다섯 살객이 얼굴을 감싸쥐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죽는다!"

다섯 명 살객들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당가려는 말을 마쳤다.

"저럴 수가…!"

귀살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나가떨어진 부하들의 얼굴이 천천히 녹아 없어지고 있었던 탓이었다. 
부하들이 던진 암기에도 독이 발라져 있지만 살을 녹일 정도는 아니다. 그녀가 반격을 하면서 독기운을 심었음에 분명했다.
독과 암기의 조종이라 불리는 사천당가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놀랍군, 살인루 살수 따위가 동창제독을 노리다니."

"헉!"

일순 귀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동창이나 관부에서 자객집단을 이루고 있는 살인루를 몰라서 가만두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때로는 동창도 살인루를 통해 살인을 청부하곤 했기에 그들은 필요악으로 방치하고 있었을 뿐인데.
동창제독 암살에 살인루가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을 비롯한 살객들은 중원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그들은 살인루 살객들을 찾아낼 것이고, 그 때마다 구족이 참수 당할 것이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한 가지.

"비객(飛客), 루주님과 동생들을 불러와라! 정체가 들통났다고 알리고."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비객이 조금  전 떠나왔던 곳으로 몸을 날리자 귀살은 전면으로 나서며 당가려를 주시했다.

"이젠 살인멸구를 하려는 모양이구나."

"부인하지 않겠다. 우리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가족도 있는데 평생을 도망자로 살순 없지 않겠나.
공격하라! 하지만 동창제독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 네 놈들이 여기서 다 죽어도 가능할까?"

"물론이다 당가려. 동창제독을 죽이는 건 우리 일이 아니었다."

스스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는지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 살수들이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처럼 시간을 끌어보기 위한 공격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귀살이라 부르면 되나? 나도 알고 있다. 동창제독을 노린 놈들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놈들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놈들은 지옥으로 발을 들인 거다. 파멸의 문으로 말이다."

당가려 얼굴에 슬쩍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 몸을 숨기고 있던 살수들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필살의 공격, 단 한번의 공격이 실패하면 자신이 죽어야하는 동귀어진의 공격을 살객들은 펼치고 있었다.
여덟 방위, 인간이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한 그들의 공격은 보기에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당가려의 얼굴은 태연했다. 아니 흥미롭다는 얼굴로 다가오는 살객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살객들의 검이 반장 근처로 다가왔을 때 당가려는 첫 움직임을 보였다.
그 자리에서 가볍게 3치 가량 떠오른 당가려의 몸이 팽이처럼 돌았다.
그리고 터지는 고함소리.

"가랏!"

슈아악!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변은 번쩍이는 광채로 가득했다. 헤아릴 수 없는 광채들, 그 모든 광채들은 전부가 암기였다.
수라만겁천화류(修羅萬劫千花流), 
사천당가의 최고 무공인 만천화우(滿天花雨)를 뛰어넘은 극강의 암기술이 100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것이었다.

"크아악!"

"끄아악!"

"아악!"

끊임없이 비명이 울렸다.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던 여덟 명의 살객은 형체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어육이 되어버렸고,
그들 뒤에 있던 자들마저도 암기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허억! 그 무공은…."

귀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단 일수만에 20여 명의 부하들이 당하고 말았다. 겁천십웅의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독문 병기라 하였던 혈린만독편은 꺼내지도 않은 상황이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라만겁천화류란 무공이다. 이것 가지고 놀라면 안 되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지금부터 잘 봐둬라! 겁천십웅의 무공이니까."

쫘악!

일순 길다란 채찍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남기자 그녀 전면은 붉은 혈광으로 가득 들어찼다.

"타핫!"

십 여명 살객들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탓이었다.
점점 커지는 두려움은 어느 순간이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걸 알기에 공격을 시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당가려, 겁천십웅의 무공뿐만 아니라,
성모척살대의 무공인 수라만겁천화류라는 절대적인 암기술마저 대성한 그녀가 아닌가.
일순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졌다.

"혈운사파(血雲死波)!"

혈린만독편으로 펼치는 2초의 무공. 당가려의 전면은 온통 붉은 광채로 들어찼다.
파도처럼 붉은색 기운이 요동쳤다. 죽음을 동반한 붉은 파도가.

푸스스!


비명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혈린만독편이 만들어낸 독강은 살객들의 시체를 남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독기운에 녹아가던 시체들은, 그 기운에 포함된 강기에 의해 가루로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붉은 기운을 머금은 혈린만독편과 함께 당가려는 사방을 휘젓고 다녔다.

"멈춰라!"

"늦었소, 루주. 우린 받지 말았어야할 청부를 받았소."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루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귀살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절대적인 무위에 할 말이 없었다.
루주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그저 망연한 눈으로 주검으로 변하는 살객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맞다, 귀살. 너희들은 처음부터 이 야혼을 죽여달라는 청부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군."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소리에 귀살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아니 놀랄 경황이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한편의 연극처럼 살인루는 완벽하게 당한 것이다.
붉게 변한 당가려의 신형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뒤쪽에서 뼈마디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몸은 그대로인 채 머리만 돌아간 귀살의 눈에 환살의 목을 틀어쥔 루주의 모습이 보였다.

풀썩!

살인루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리였다.

"이제 잡어(雜魚) 말고 큰 고기를 잡으러 가볼까?"

"언니가 연기를 잘해야 할텐데…."

"걱정 마라, 내가 확실하게 교육을 시켰다. 도살장에서 선지하고 내장까지 얻어다 주지 않았겠냐."

당가려의 엉덩이를 툭 친 야혼은 이내 그녀의 허리를 틀어쥐더니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웬 놈들이냐?"

서슬 퍼런 목소리가 와선곡을 타고 울렸다. 제법 당차게 말을 하고 있으나 주변을 둘러보는 모양새가 잔뜩 겁에 질린 듯했다.

"쿡! 주변에 부하가 없으니 겁이 나느냐, 놈."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남궁성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조소를 머금었다.
주변을 샅샅이 살폈고, 동창제독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더 이상 권력의 최 정점에 있는 동창제독이 아니다. 그저 그물에 걸려든 물고에게 불과했다.

"흥! 내가 동창제독임을 알고 있는 걸 보면 평범한 놈들이 아니로구나. 누가 사주해서 나를 노리는 것이더냐?"

"알 것 없다, 놈.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은 조용히 죽어주는 것이다. 저승으로 떠나면 된단 말이다."

일순 검을 뽑아든 남궁성은 전면으로 쇄도하며 고명지를 향해 찔러 넣었다. 명가의 후예답게 그의 찌르기는 날카로웠다.
백색 광채를 머금은 검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건방진 놈! 동창제독을 우습게 본 모양이구나."

슬쩍 몸을 움직여 검을 피한 고명지는 남궁성의 오른 팔을 향해 사정없이 쌍장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황금색 광채가 쏟아져 나와 남궁성의 전면으로 빛살같이 밀려들었다.

"여기도 있다, 놈!"

남궁성 오른편에 있던 악운보가 재빨리 전면으로 나서며 황금빛 광채를 향해 오른 손을 쭉 내밀었다.

우르릉!

"네 놈은?"

재빠르게 1장 가량 물러난 고명지는 의아한 얼굴로 소리쳤다. 푸른 뇌기를 내포한 장법은 산동악가의 뇌음장법이었던 것이다.

"형님!"

남궁성 또한 놀랐는지 악운보를 불렀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복면까지 쓴 자신들이 아닌가. 그런데 첫 출수부터 뇌음장법이라니.

"저놈 혼자네. 다른 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고 가는 게 나을 듯 싶어서 말이네."

복면을 벗어 내팽개친 악운보는 기이한 눈으로 이편을 보는 동창제독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좋습니다. 자네들도 나서게."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계곡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사람을 향해 고함을 지른 남궁성은 악운보를 뒤따라 몸을 날렸다.
숨기기로 하였던 가문의 무공을 끌어올린 네 사람의 공격은 대단했다.
남천악이나 유마혼의 그들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을 뿐, 네 사람의 무공은 거의 강기경지에 근접해 있었던 것이었다.
넷 중 발군의 실력을 보인 자들은 남궁성과 악운보였다.
남궁세가 검법의 최고봉이라는 제왕무적검형이 진득한 살기를 뿌림과 동시에 악운보의 뇌음인이 작렬했다.

파앙! 팡팡팡!

백색과 푸른색 그리고 황금색 기운이 사방에서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남겼다.

"대역무도한 놈들, 감히 일개 무부 따위가 동창제독을 향해 살수를 펼치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느냐?"

연신 뒤로 물러나면서도 고명지는 고함을 질렀다. 공연히 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실제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네 가문의 자식들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1초지적도 안 되는 녀석들에게 밀리는 시늉을 하려니 느닷없이 울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금환신공을 일으켜 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녀석들을 미끼로 써먹기 위해선 반드시 부상을 당해야 했으니.

"으음!"

악운보의 장을 받은 고명지가 급기야 나직한 신음을 내지르며 1장 가량을 물러났다.

"기회!"

많은 실전을 쌓은 남궁성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뻗어내던 검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왼손을 힘차게 밀어냈다.
천의맹에 와서 실전을 통해 터득한 세가의 장법인 폭뢰신권(爆雷神拳)이었다.
남궁성의 왼손을 떠난 장력은 악운보의 공격으로 빈틈을 보인 고명지의 가슴팍으로 무차별하게 파고들었다.

퍼엉!

"아-아악!"

여자의 소리도, 그렇다고 남자의 소리도 아닌 기이한 음색의 비명소리가 와선곡을 타고 울렸다.

"놈, 다시는 말을 못하도록 주둥이를 짓이겨 버리겠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고명지를 향해 남궁성은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다가들었다.
기다렸던 순간, 가장 먼저 놈의 주둥이를 뭉게버리고 싶었다. 사내를 탐해서 계집의 목소리처럼 변한 놈의 목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웃기지 마라 놈!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낮은 고함소리와 함께 전면에서 황금빛 광채가 폭발적으로 밀려왔다. 하지만 그 공격 또한 남궁성 앞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황보세가의 천왕삼권(天王三拳)이 금빛 장을 해소시키는 순간,
뒤이어 하북팽가의 혼원벽력도에서 쏟아진 도기(刀氣)가 전면 공간을 잠식해 버렸다.

"커억!"

"끝났다, 놈!"

허공을 가득 수놓은 핏속에 조각조각 잘린 내장이 섞여 있음을 확인한 남궁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고명지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들었다.
자신의 검을 가져올 걸 공연히 청강검을 구해왔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두고 온 용형검을 가져왔더라면 진작 놈의 목을 잘라냈으리라. 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의미가 없게 되었다.
어쩌면 앞으로는 수중의 청강검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리라. 싸구려 청강검이지만 동창제독의 목을 잘라낼 것이기에.

"반드시 기억하마. 남궁세가, 산동악가, 하북팽가, 황보세가, 너희들은 죽어서도 반드시 기억하마."

지독한 살기가 실린 목소리에 다가가던 남궁성은 흠칫 걸음을 멈췄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편을 노려보는 동창제독의 눈을 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자신 또한 얼마 전 저런 눈빛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며칠 전 그랬다. 네놈이 하오밀문 개종자의 하초를 입으로 애무할 때 나도 그런 눈을 했단 말이다."

1장 거리를 남겨둔 남궁성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청강검을 치켜들었다. 일순 그의 청강검에서 백색 광채가 한치 가량 솟아나왔다.
흥분해서인지 능력이상의 내공을 끌어올렸고, 그 결과 강기가 형성된 것이었다.
문득 기이한 느낌에 검을 보던 남궁성은 희열에 찬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강기( 氣)를 형성하는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아직은 미숙했지만 강기를 접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앞으로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검 끝에 튀어나온 강기는 자신의 것으로 소화될 게 분명하다.

"저승에 가거든 절대 남색을 밝히지 말거라."

나직한 외침소리와 함께 전면으로 몸을 날리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동창제독의 목에서 흐를 붉은 피를 상상하며.
그러나.

쉬익!

챙!

남궁성의 검은 고명지의 목을 잘라내지 못했다. 고명지 뒤쪽 절벽 위에서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남궁성의 검을 쳐내버린 것이었다.

"멈춰라!"

"허억!"

일순 남궁성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동창제독이 있던 절벽 위와 와선곡 입구에서 동창복장을 한 무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소제 여기 복면. 어서!"

악운보가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동창제독을 죽이는 것보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는 게 먼저였다.
악운보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남궁성은 그가 던진 복면을 걸쳤다.

"없애야 해, 없애야 해."

복면을 걸치자마자 동창제독이 있던 곳을 향해 무작정 몸을 날렸다. 
이미 그곳에 한 명의 무인이 내려서 있다는 사실도 망각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가지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동창제독의 머리를 잘라 입을 막아야만 가문이 산다는 사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등 쪽이 훤히 노출되었다는 사실도 잊고 남궁성을 따라 동창제독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타핫!"

"이야합!"

"하핫!"

"요옵!"

네 명의 입에서 동시에 천둥 같은 고함이 터지고 전력을 다한 그들의 공격이 전면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이 한번의 공격을 성공시키고 절벽을 타고 도망치려는 심산이었다.

"킬! 씨팔놈새끼들."

일순 고명지 곁에 서 있던 자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터지고 그의 전신에 백색 운무가 뭉클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파파팡! 팡팡!

"커억!"

"크억!"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짤막한 비명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전 내공을 동원하여 공격을 가했던 네 사람은 폭포 같은 피를 쏟아내며 뒤쪽으로 쿵쿵거리며 물러났다.

"이럴 수가, 어찌 인간의 몸으로…."

남궁성은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놀랄 시간이 있으면 도망을 칠텐데…."

"헉!"

남궁성을 비롯한 네 사람은 나직한 비명을 내질렀다. 상대의 엄청난 무공에 놀라 뒤에서 다가오던 동창무인들을 잊었던 것이다.

과앙! 과앙!

"커억! 아악!"

"아악!"

화들짝 몸을 돌렸던 네 사람은 동시에 두 번에 걸친 비명을 내질렀다.
첫 고통은 상대의 정권과 발이 단전에 박히며 받은 고통이었고, 두 번째는 허공을 날고 있는 오른 팔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악운보의 팔을 잘라냈던 한 명이 전면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잘라낼 태세였다.

"급하다, 합하께서 기절하셨다! 우선은 북경으로 먼저 간다. 무쌍사위는 길을 터라. 다른 놈들이 매복해 있을 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이 놈들은 당두들을 시켜서 잡도록 하겠습니다. 각 당두는 합하를 호위하라!"

급하게 고함을 지르며 동창제독을 들쳐업은 일행은 와선곡 입구를 향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크윽!"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남궁성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검어야할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들이닥친 동창 무인들. 그들의 무공은 엄청났다.
내상을 당한 상태였다고 하지만 단 일초만에 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더구나 오른 팔이라니.

"죽겠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한쪽에 떨어진 자신의 팔을 보며 남궁성은 나지막이 말했다.

"내장까지 토막토막 끊긴걸 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결코 살아날 수가 없네. 내가 장담하네."

참담한 얼굴이었지만 악운보는 확신하듯 말했다. 신이 아닌 이상 살아 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잘린 내장을 토해내는 걸 눈으로 직접보았다. 더구나 그들은 북경으로 간다고 하였다. 수중에 절세영약이 없다는 말이다.

"그나저나 집엔 뭐라고 해야할지…!"

잘린 팔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악운보는 나직하니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오른 팔이다. 무엇을 하다 팔을 잃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더구나 네 사람이 공히 팔을 잃지 않았는가.

"일단…. 허억!"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남궁성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기해혈에서 꿈틀거려야할 내공이 한 톨도 모아지지 않았다.
조금 전 단전을 강타 당하긴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형님도…."

털썩 주저앉은 악운보를 보며 나지막이 부르짖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네 사람이 공히 내공이 사라져버렸다. 단전을 강타 당한 순간에 단전인 기해혈이 파괴된 것이었다.

"이 일을…,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꿈 같았다. 아니 꿈속에서조차 생각지 못한 일이다. 오른 팔을 잃은 것만 해도 청천벽력이거늘.

"아냐, 아냐, 이건 아니라고!"

"저기다! 저쪽에 제독합하를 암살한 놈들이 있다. 생포하라는 명령이다 쫓아라!"

남궁성이 참혹한 얼굴로 고함을 지르는 순간, 멀리서 동창무인들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세. 어서 움직이세."

"그럼 뭐합니까. 오른 팔도 없고, 내공도 없질 않습니까?"

남궁성은 처연하게 말했다.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폐인이 되어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산단 말인가.

"죽는 건 문제가 아냐. 우리가 잡히면 그 뒤를 생각해 보았는가.
구족을 멸한다고 했네. 외가까지 전부 당한다는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그랬다. 팔이 잘리고, 내공을 잃었지만 움직여야 한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가문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피해야만 한다.
떨어진 자신들의 팔을 주워든 네 사람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동정호에 감도는 전운.


이른 아침에 들이닥친 서슬 퍼런 군병들과 동창무인들로 인하여 천의맹은 발칵 뒤집혔다.
창칼을 뽑아든 그들을 맹주전이며 여자들만 기거한다는 봉황숙을 가리지 않았다. 천의맹 전역을 헤집고 다니며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타인의 간섭을 극도로 꺼리고, 강요당하는 걸 싫어하는 무인들이지만 살기 띤 동창무인들을 향해 감히 항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칼이, 창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살기를 흘리며 뱉어내는 그들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천의맹을 떠났던 동창제독이 옥산에서 피습 당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천의맹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던 동창제독이 피습 당하다니,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가 감히, 어떤 미친  작자가 동창제독을 암습한단 말인가.
더구나 동창제독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자 천의맹 수뇌부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들 중 가장 놀란 자가 있으니. 며칠 전 와룡전 전주로 승진한 남궁장순이었다.

"휘야,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초조한 얼굴로 연신 손을 비비며 남궁장순은 큰아들을 향해  물었다. 
동창제독이 피습 당했다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연공실로 달려갔다.
느닷없이 무공을 정리한다며 연공실로 들어갔던 둘째의 행동이 미심쩍었던 탓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을 줄 알았던 둘째는 보이지 않았다.
수발을 들던 시비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녀 또한 고개를 흔들었다.
초조한 가운데 시간을 흘렀다. 살기를 풀풀 날리는 동창무인들이 남궁세가인들의 숙소를 뒤지고 다닐 때는 숨을 죽여야했다.
다행이 연공실까지는 찾아보지 않았지만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몰라 전전긍긍해야했다. 그런데 녀석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없습니다, 은밀하게 알아보았지만 천의맹에는 녀석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느냐?"

남궁장순은 다급하게 물었다. 큰아들인 남궁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탓이었다.

"나머지 세가들 또한 없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뭣이? 그럼 성아와 어울리던 아이들이 전부 없단 말이냐?"

아버지의 물음에 남궁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이일을 어쩌란 말이냐, 이 일을…."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남궁장순은 탄식을 했다.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자식들이 관련되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남궁세가란 가문은 중원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계 최 권력자를 암습한 일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오대전에 가봐야겠다."

문득 생각난 듯 남궁장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아버지."

"무슨 말이냐! 걔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곳엔 살인루 살수의 시체가 널렸다 하였습니다."

"맞다, 살인루!"

남궁휘의 말에 남궁장순의 얼굴이 환해졌다.
동창제독이 부상당했다는 생각만 했지 그가 당하게 된 경위에 대해선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겁천십웅의 무공을 완성한 당가려가 곁에 있었다.
웬만한 무인들은 그녀 근처도 접근하지도 못하고 핏물로 녹아낼 게 분명하다. 더구나 동창제독 또한 허공답보를 구사하는 강자.
당가려와 동창제독을 떼어놓은 세력이 살인루였다.

"개방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살인루 살객이 200여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살인루가 전부 동원됐다는 말이렸다."

"그렇습니다."

"청부금!"

남궁장순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살인을 청부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돈이다.
더구나 살인루 전체를 살 정도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하다. 아들인 남궁성이나 나머지 세가의 아들들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다.
둘 째가 관련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것이다.

"휴-우!"

깊은 한숨을 내쉰 남궁장순은 주담자를 끌어당겨 차를 따랐다.

"너도 한잔해라. 이게 맛은 지랄 같아도 황제가 보신용으로 마셨던 차라고 하더구나."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남궁휘에게 찻잔을 밀었다. 문득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깊이 생각했더라면 둘째가 관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터인데 공연히 혼자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크! 아무리 보약이라지만 이건 좀 그렇군요."

인상을 찌푸리며 남궁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차를 마실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린내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을 차라니.

"그런 소리 말거라. 나도 처음엔 너처럼 생각했다. 남자끼리니까 하는 말이다만, 효과가 있더라."

"네?"

남궁휘는 뜨악한 얼굴로 아버지를 보았다. 효과가 있다니, 무슨 말인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험험! 일단 좀 덜어가서 마셔 보거라. 그럼 알게 된다."

헛기침을 내뱉은 남궁장순은 무안한 듯 말했다. 나이 먹은 아들이라 하지만 밤일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궁창 냄새가 나는 차를….'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남궁휘는 내심 웃고 말았다.
밤일에 도움이 되는 차, 수많은 첩실을 거느린 황제정도면 좀 더러운 맛이 나더라도 마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연작문주! 요즘 힘이 딸리는 것 같던데 차 한잔하시는 게 어떤가! 이 생활차는 순전히 연작문주를 위해 만든 것이란 말이네."

하오대전에서도 일행의 주제는 차였다. 
조그마한 돌절구를 들어올려 갈았던 가루를 단지 안으로 부으며 추기영은 짓궂게 웃었다.

"싫어 임마, 네 녀석 발꼬랑 내를 맡느니 차라리 고자로 살란다."

홀로 콧구멍을 후비던 야혼은 진저리를 치며 한편으로 도망치듯 물러났다.
생활차 또는 회춘자라 부르는 차는 갖가지 가루가 들어간 잡탕차였다. 
가장 많이 들어간 재료는 차를 우려내고 난 찌꺼기들이다.
그것들을 햇빛에 말린 다음 돌절구에 넣어 가루로 빻고, 그 다음엔 약간 구린내가 풍기는 재료가 들어간다.
주로 제 녀석 신발이나, 주방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들이다.
그것들 또한 물기가 완전히 빠질 때까지 말린 다음 돌절구에서 가루로 빻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전부 혼합한 후, 특제농약을 적당량 집어넣으면 회춘차가 탄생한다.

"그런데 특제농약은 어느 정도 넣는 거냐?"

"아미타불! 약간 혼미할 정도만 넣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돕니다.
평소 연작문주의 상태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여자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겠네?"

"흘리기야 하겠습니까. 꿀꺽 삼켜버리겠지요."

야혼의 물음에 추기영은 음흉한 얼굴로 말했다.
생활차라 이름을 지은 선물은 천의맹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보낸 건 아니었다.
다만 특제농약이 들어간 차를 마심으로 해서 판단력이 흐려진다면
천의맹을 접수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꿈을 꾸었을 뿐이었다

"참! 미친 것들은 요즘도 계속 책만 파고 사냐?"

"약발이 받는데 당연한 것 아닙니까.
소승의 광견구타신공이 효험을 발휘하는 게 확실합니다. 간간이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더군요."

"그래? 주문 밀리면 힘들어 질지도 모르니까 많이 만들어둬라!"

"킬! 걱정 마시게. 여길 말아먹는 일을 실패하면 약장수로 나설 모양이니까. 그때를 대비해서도 실력을 배양해둬야지."

1호 감방으로 들어가는 야혼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추기영은 혼자 킬킬거렸다. 
감방 안으로 들어온 야혼은 화산파의 광검사수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댁들은 길을 잘못 들었어. 학자로 나섰으면 대성했을 텐데."

사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태을건곤심법에 몰두하고 있는 네 사람을 보며 야혼은 중얼거렸다.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네 사람은 태을건곤심법에 미쳐버린 것 같았다.
정신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들은 비급을 놓지 않는다. 비급 때문에 저지경이 되었음에도.
마치 책을 위해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 꿈이었소, 학자가…."

오른 쪽에 있던 한 명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는 광검사수, 아니 화산사검의 대형인 매화(梅花)일검(一劒) 유약수(劉約首)였다.

"나보단 못하지만 쌍판이 괜찮네?"

유약수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산발한 머리로 가려졌지만 상당한 잘생긴 편에 속하는 얼굴이었다.

"하오대전에 사람이 많아진 것 같소이다."

"좋은 일인가?"

"빈집엔 귀신보다는 사람이 사는 게 훨씬 좋은 것 아니겠소."

"그런데 맹주란 놈은 하오대전에 사람이 모이는 게 싫은 모양이야. 출정을 나가라고 하더군.
얼마 전만 해도 문파로 취급도 안 해준 녀석들이 말이야.
실력도 없는 놈들이 전쟁터에 가면 뒈질 일밖에 없을 테니. 다시 빈집이 많아지겠지."

"하오밀문을 인정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겠소."

"내가 이기고 왔을 때 이야기겠지…. 참! 내 정신 좀 봐라,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우리 없을 때 집 좀 지켜 줘."

"무슨…?"

의아한 얼굴로 유약수는 야혼을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태을건곤심법에 몰두하던 세 사람마저도 고개를 들었다.
하오대전에 온 이후 동굴에서 나간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간간이 일어나는 발작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들 스스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 자신들에게 집을 지켜 달라니.

"별일은 아냐. 신녀곡 소곡주 도움으로 진(陣)을 보강하긴 했는데 아직은 부족해서 그래. 도둑이 많이 들 것 같거든."

하오대전 건물로 구축한 성라무연대진은 허공에서 보면 건물 배치도가 고스란히 들러난다는 단점이 있었다.
내성산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하오대전으로선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단점을 보완해준 사람이 바로 완초령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들어오는 도둑을 잡아달란 말입니까?"

유약수는 재차 물었다.

"다섯 명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그런 거야. 그리고 도둑을 잡을 필요는 없어."

"그럼?"

"번거롭게 생포할 생각말고 그냥 그어버려. 여기 해진도.
들어올 곳은 여섯 방향밖에 없으니까 그곳만 중점으로 지키면 될 거야."

네 사람을 빤히 보던 야혼이 둘둘 말린 종이를 그들 앞으로 던졌다.

"끄응! 우린 아직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걸 알잖소."

나직한 신음을 발한 유약수가 눈앞에 놓인 해진도를 보며 말했다. 물론 밥값이라 생각하고 야혼의 말대로 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확신이 서질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진에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이야기 하나 해줄까? 우리가 성모궁을 찾아갈 때, 광혼마림이란 곳을 지나가게 되었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곳인데, 그곳에서 가장 먼저 맛이 간 것들이 누구냐 하면.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힌 냉소소와 당가려였어. 무공도 없는 나는 말짱했다고."

"야차혈마지체 타고난 것 때문에?"

야혼이 야차혈마지체를 타고났다는 말을 청광이노에게 들어 알고 있기에 묻는 말이었다.

"아냐? 나도 궁금해서 같이 같던 여호치에게 물었지. 그랬더니 그년이 하는 말이 가관이었어. 
단순해서 그랬데. 계집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는 단순함 말이야."

"그 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것 아닙니까?"

유약수는 재차 물었다. 광혼마림, 겪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가려와 냉소소가 미쳐버릴 정도면 무공이 없는 일반인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단순함 외에 다른 어떤 게 있었기에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당신은 학자가 됐어야 했어. 그때 나는 죽는 다는 걸 무서워하지 않았어.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단 거지. 아니면 누군가 죽여주기를 바랐던지."

네 사람을 보며 미소를 던진 야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여간 잘 지켜, 죽이는 것 잊지 말고."

"사형! 못한다고 해야합니다. 어떻게 이곳을…"

둘째인 창해검(蒼海劒) 종리을(鐘里乙)이 유약수를 보며 말했다. 빈집을 지켜달라는 간단한 부탁이 아니었다.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하오대전을 위해 일을 하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부하가 되라는 말.

"사제, 태을건곤심법을 익히는 순간 우린 그를 따르기로 한 거다. 화산파를 떠났단 말이다."

조금 전 느낀 점이었다. 그가 화산파 장문인을 향해 맹주 놈이라 하였을 때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았다.
화산파의 명예를 생각했다면 분명 기분이 나빠야 했다. 그런데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덤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진(陣)속에서 결정하고 싶다. 앞으로도 광인으로 살 건지 아니면, 끝낼 건지."

유약수는 확고하게 말했다.
태을건곤심법이 최고의 내공심법이긴 하지만,
본 내공을 버리고 새롭게 익히는 것이 아닌 바에야 원래의 절반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아니 몇 십 년 동안 익힌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야혼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진(陣)을 들먹인 것이리라.
환영과 환상 속에서 본심을 잃지 않는다면 더 이상 발작은 없을 것이기에.
야혼이 말한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말, 목숨을 걸라는 의미였다.

"이번에 출정에서 돌아오면 그는 영웅이 될 거다. 그 뿐만 아니라 하오대문 좌우호법 전부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야혼의 흔적을 더듬으며 유약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음날 아침.
대연무장에서 출정식을 가진 령무전과 하오대전  무인들이 정의문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언제나 그랬던 밖으로 나온 령무전 무인들은 10여 명씩 짝을 짓더니 남쪽을 향해 멀어져 갔다.
수하들을 전부 보낸 령무전주 우자령은 비릿한 얼굴로 하오대전 무인들을 보았다. 

"쯧! 쯧! 준비도 제대로 안된 자들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밖으로 나온 하오대전 무인들은 멀어지는 령무전 무인들은 그저 쳐다보고만 있다.
전혀 준비를 안 했다는 의미이리라.
동창제독의 승인 하에 치르는 전쟁이지만, 마교와의 전쟁은 여전히 무인들의 일이다.
즉 황실의 공식적인 일 아니라는 말이다. 조를 편성하여 목적지로 이동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말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야혼일행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우자령의 귓전으로 더욱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대오를 맞춰라!"

"전주! 령무전 무인들이 출발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가?"

결국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령무전 무인들에 비해 무공도 약한 자들이고, 먼저 떠난다해도 령무전 무인들보다 늦게 도착할 것이다.
그런 자들이 대오를 정비하다니. 

"출정식을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곳에서 허비할 시간이 없네."

"무슨 소리요, 출정식이라니?"

"그럼 출정식을 하기 위해 모이는 게 아니란 말인가?"

외려 놀란 표정을 하는 야혼을 보며 우자령은 꾸짖듯 물었다.

"출정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출정을 하기 위해 줄을 맞추는 거요. 이왕 가는 거 똑바로 줄맞춰서 가면 멋있지 않소."

"그럼 1천 명이나 되는 병력을 끌고 관도로 가겠다는 말인가!"

급기야 우자령을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천여 명의 병력이 한꺼번에 이동하는 길은 관도밖에 없다. 
관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더구나 마교 척살을 위해 가는 길이 아니던가.

"참, 답답하네. 좋은 길을 두고 왜 산으로 간단 말이오. 산적으로 전업할 거면 몰라도 그럴 생각 없소이다. 출발하라!"

"멈추지 못할까!"

"닥쳐, 할망구! 쟤들은 내 부하야. 죽이 것도 살리는 것도 내가 책임진다고! 네 새끼들이 잘 챙기란 말이야!"

앞으로 나서려는 우자령을 막아서며 야혼은 광포하게 고함을 질렀다. 

"이런 죽일 놈."

일순 우자령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무정신니와 두 문파의 장문인 또한 놀란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상식이 없는 자인 줄 알고 있었지만 령무전주를 향해 할망구라 부를 줄이야.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니미씨부럴타불! 망구시주, 방금 그 말 안들은 걸로 하겠소이다. 그리고 우리 연작문주를 부를 때 반말 비슷하게 넘기지 마시오.
댁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그건 문제가 아니지만 일문의 문주고, 하오대문의 전주요. 그 점을 가만해 주시길…."

"우리 좌호법 말이 맞소.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말고 망구는 망구 일을 하시오. 그래야 노망났다는 소릴 듣지 않는 거요.
그리고, 동창제독이 인정한 일인데 숨어서 가면 더 멋있소? 제발 생각 좀 하고 사쇼. 
머리는 멋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니란  말이오. 가세 연작문주. 참! 동창제독 명령서는 챙겼는가?"

"당연히 챙겼지 임마. 우리 밥줄인데. 그런데 관에서 준비한 밥은 괜찮을까?"

"아미타불! 고기를 많이 준비하라고 미리 연락을 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고기가 최고 아닙니까."

"허허!"

공동파 장문인 일학자는 망연한 눈으로 멀어지는 삼 인을 주시했다. 
관도를 따라 갈 생각을 한 것만도 놀랍거늘 음식조차 관에서 조달해 주기로 했다니.
가는 길에 객잔에서 해결해야하는 령무전 무인들과는 천양지차였다. 
하오대전은 천의맹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동창제독의 명령을 수행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래봐야, 전쟁터에서 결정납니다. 동창제독 명령서가 칼을 막아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짓씹듯 말하며 우자령은 몸을 날렸다. 그녀가 움직이는 방향은 야혼 일행과 반대방향이었다. 시작부터 계획이 어긋난 것이다.
야혼 일행의 이동은 순조로웠다. 옥현을 출발하여 10여일 간 남으로 길을 잡은 하오대전 일행이 행군을 멈춘 곳은 한수(漢水)였다.
한수에는 복건성에서 출발하여 장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온 해룡문 선박이 대기하고 있었다.
전부 15척의 배에 나눠 탄 일행은 한수를 따라 남으로 이동하여 장강 어귀로 들어섰다.
이번 출정의 최종 목적지는 다름 아닌 동정호였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동정호 안쪽에 있는 군산(君山)이었다.
야혼 일행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순간 중원 곳곳에서 출정을 알리는 함성소리가 있었다.
그 일성은 동악이라 불리는 태산에서 시작되었다.

"마옥성 형제들이여! 기다리던 때가 왔다. 너희를 팔아 넘긴 위선자들에게 복수할 때가 도래했다.
가라! 가서 세가인들과 천의맹에 남아있는 자들을 박멸하라!"

"크아앙! 카앙!"

느닷없이 터진 포효소리에 산짐승을 비롯한 맹수들은 숨을 죽여야했다.
곧이어, 태산의 이름 모를 계곡에서 3천 수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희이 복수할 대상은 마도련이다!"

"너희들이 복수할 대상은 소림사와 천의맹이다. 가라! 가서 인혈을 마음껏 취해라!"

"너희들이 복수할 대상은 군산에 있다. 마교와 천의맹 잔당을 멸하라!"

북악인 오태산에서, 중악인 숭산에서 그리고 남악인 형산에서 터진 일성은 잔인한 여름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쏴-아아!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점점이 뿌리던 빗방울은 이내 손가락 굵기의 폭우로 변하여 대지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중원 최대의 담수호의 한 곳이자, 그 끝을 할 수 없는 거대한 호수. 거친 파도가 치는 이곳은 그 폭이 8백 리나 된다는 동정호였다.
동정호 서편, 쏟아지는 빗속에  15척의 배가 나란히 정박해 있었다. 장강을 따라 동정호에 도착한 야혼 일행이었다.
관도와 배를 타고 움직였기에 하오대전의 이동은 령무전 무인들보다 훨씬 빨랐다.
령무전 무인들과  합류하기로 날짜는 하루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야혼 일행은 동정호에 도착해 있었다.

"초 사형! 저게 호수란 말이야?"

커다란 우비 아래에서 작업을 거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란 얼굴로 동정호를 가리키는 사람은 야혼이었다.

"저기, 초 사형이란 말은…."

잔뜩 얼굴이 붉어진 완초령은 몸을 슬쩍 빼며 더듬거렸다.
문주와 부하로 입장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 사형이라 부르는 야혼이 부담스러웠던 탓이었다.

"서로 편하고 좋잖아. 편한 길을 놔두고 굳이 불편한 길로 갈 필요는 없잖아. 근데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어두운 것 같아?"

"아-아니에요, 제가 무슨 불편한 일이 있겠습니까."

화들짝 놀라며 완초령은 사문을 떠나올 때를 떠올렸다. 과거엔 능력이 없어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태을건곤심법을 비롯한 십전수 구약종의 다른 무공을 수습하여 다시 신녀곡으로 돌아갔다. 
신녀곡을 완전하게 떠나기 위한 마지막 절차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발목을 잡혀버렸다.
신녀곡주이자 어머니는 신녀곡을 맡아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해왔다. 
혈육의 부탁,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야혼의 마음을 몰라 거절하지 못했다고 봐야했다. 혼자만 그를 좋아했기에.
어머니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하오밀문 아래로 들어가게 해준다면 곡주자리를 수락하겠다고 하였다.
어머니를 비롯한 신녀곡 원로들은 펄쩍 뛰었다.
설사 하오밀문 문주가 겁천십웅의 무공을 완성했다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결국 이 전쟁이 끝나는 시간까지만 한시적으로 하오밀문을 돕기로 합의를 보았다.
야혼을 그렇게 해서라도 돕고 싶었다. 그에겐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바보처럼.

"후-우!"

"얼레? 이젠 한숨까지. 초 사형!"

"헉! 네?"

와락 허리를 감는 손길에 완초령은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젊은 사람은 한숨쉬는 것 아냐. 내가 부인이 좀 많기는 하지만 초 사제 정도는 먹여 살릴 능력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풋!"

저도 모르게 화사하게 웃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도무지 인상을 찌푸릴 수가 없다.
문득 그의 심장 소리가 듣고 싶어 가만히 고개를 기댔다.

"어디 보자, 그동안 얼마나 컸나."

"문주님!"

질겁한 완초령은 재빨리 야혼의 가슴을 밀쳤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길에 힘이 가해지고 그에게 정면으로 안기는 형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가슴에 압박이 가해지며 머리가 어찔해졌다. 그의 숨결이 이마에서 느껴졌던 탓이다.
갑자기 힘이 빠지며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두 다리에 힘을 주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러나 태을건곤심법이라는 엄청난 무공도 현 상황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자꾸만 다리의 힘을 빼앗아 갔다. 결국 그의 등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뜨거운 숨결이 코끝으로 느껴지자 눈을 감고 말았다.

"우읍!"

따스함, 첫 느낌이었다. 그의 등을 껴안았던 손이 어느새 목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을 잃지 않기 위해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지, 이를 간질거리는 그것을 덥석 물어 당겼다. 그 사람의 혀인 줄도 모르고.
당과를 먹을 때 기분이 이랬던가. 꿀을 찍어 먹을 때 기분이 이랬던가. 따스함과, 달콤한 그리고 아늑함.
생전 처음 하는 입맞춤이 주는 느낌이었다.
등을 타고 스르르 흐르던 손길이 앞섶을 뚫고 들어왔는지 갑자기 서늘해졌다.
이어 그곳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밀려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거부할 수 없다. 아니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이미 차기 신녀곡주 완초령이 부황으로 지정했기에.
혼자 살아야하는 전통상 혼례를 올릴 수는 없지만 그의 자식을 낳을 수는 있다. 우산이 가려주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뿐이었다.

"이제 힘이 나?"

"몰라요!"

"걱정거리 있으면 야혼에게 말해. 내가 전부 해결해 줄 테니까. 그런데…. 3년 전에 배운 그 많은 기술을 다 잊어버린 거야?"

"무슨…, 사제!"

일순 완초령은 뾰족 고함을 질렀다. 무공을 찾기 위해 춘서를 탐독했던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족히 수백 권은 보았다. 묘하게도 다른 책에 비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책임에 분명했다.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있는 것을 보면.

"그때가 좋았는데. 참! 초 사형을 하오대전 군사로 발령 냈으니까 오늘부터 내 옆에 생활해. 항상 반 장 거리 안에 있어야 한다."

"나뻐요."

하지만 말뿐, 완초령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입맞춤 한번 더, 이번엔 정식으로…."

다시 한번 완초령의 허리를 끌어당기는 순간, 짜증스러움이 잔뜩 묻어난 추기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연작문주 작업 그만하고 들어오게나. 비 오는데 무슨 청승인가."

"알았어 임마! 너희들도 발령 냈다. 짐 싸들고 신녀곡 배로 꺼져라."

"정말인가? 문주님!"

신녀곡 배로 발령 났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쏟아지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추기영과 태웅은 선수로 달려왔다.

"그걸 왜 이제야 말씀하시는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문주님!"

두 사람은 거의 부르지 않았던 문주님을 연발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 우린 가겠습니다. 재미 많이 보십시…, 아니 좋은 꿈 꾸십시오. 초 사형도."

"훗! 재미있는 분들이에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완초령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동안 배를 타고 오면서 웃는 모습을 도통 볼 수가 없어 이상하다 여겼었는데 이제야 그 원인이 밝혀진 것이다.
잠시 후.
간단히 짐을 챙겨 나온 두 사람은 야혼과 완초령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빗속을 뚫고 몸을 날렸다.

"우 호법!"

허공을 날아가던 추기영이 몸을 멈추더니 자신의 아래위를 쳐다보며 태웅을 불렀다.

"왜 그러나, 좌호법!"

"내 모습 어떤가?"

"좌호법 모습? 그러니까 꼬라지를 말하는 것인가."

"당연하지, 꽃을 따도 괜찮겠냐 이 말일세."

"대가리에 물기 흐르는 것만 빼면 그런 대로 봐 줄만 하네. 나는 어떤가."

"최골세, 여기서 내공만 좀 일으키면."

맨 끝에 있는 신녀곡 배를 보던 두 사람은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일순 추기영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사방으로 퍼지고 빗방울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태웅 또한 다르지 않았다. 철혈무적검법에 의해 형성된 붉은 혈기가 둥글게 막을 형성하면서 비를 튕겨냈다.

"음! 핫핫핫!"

"허허허! 나무관세음보살!"

만족스런 웃음소리와 함께  황금빛 덩어리와 붉은 덩어리가 천천히 허공을 날았다.

"우우! 대단하군!"

두 사람의 웃음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어나왔던 이들이 소리가 들려왔던 곳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오대문의 좌우호법, 말로만 들었던 그들의 무공을 실제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감탄사를 발하던 무인들이 이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공을 펼칠 상황이 아니었던 탓이다.
적이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령무전 무인들이 도착한 것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공을 펼칠 상황이 아니었다.
누가 알겠는가.
두 사람이 전 내공을 끌어올린 이유가 신녀곡 여인들에게 잘 보이겠다는, 그 한 가지 때문이란 사실을.

"호호호!"

완초령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야혼과 그의 친구들은 정말 엉뚱한 구석이 있다.
천박한 행동임에 분명한데도 그들이 하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적성이라서 그러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들어가자!"

물안개와 비로 가려진  군산(君山)쪽을 힐끔 보며 야혼은 완초령을 이끌었다. 
야혼이 군산을 보는 바로 그 시간, 군산에서도 야혼 일행의 선박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명교인들의 한을 이용하여 천하제일이 되고자 하는 십전수 구약종이었다.

"쌍마(雙魔)! 적은?"

"하오대전 소속인 1천 무인들은 호숫가에 정박 중이고, 령무전 소속 무인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종 뒤쪽에 시립해 있던 두 사람 중 백의를 걸친 인물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오대전?"

일순 구약종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하오밀문을 지칭하는 말이 분명했다.
그런데 하오밀문을 가리켜 하오대전이라 하였다. 더구나 1천 무인이라니.

"천의맹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에 전으로 승격한 곳입니다. 하지만 크게 문제될 세력은 아닙니다."

"그럴까?"

'놈!'

왜일까, 금불산에서 보았던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바보같이 사는 게 보기 싫어 스스로 없애버렸던 하오밀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곳이 천의맹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말을 듣자 내심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하오대전 전주라는 자를 금불산에서 만났다. 그런데 흑백쌍마 너희들은 그의 상대가 아니라면 내 말을 믿겠느냐?"

놀라운 말이었다. 구약종은 뒤에 있는 자들을 향해 분명 흑백쌍마(黑白雙魔)하였다.
흑백쌍마(黑白雙魔). 50년 전. 두 괴인이 나타나 중원을 향해 일성을 토했다.

'우린 오늘부터 생사 비무행을 시작한다!
명예를 아는 자라면 비무에 응해라. 용기 있는 자는 우리의 도전에 응해라! 비겁한 자는 중원을 떠나라!'

이제 30대 초반이었던 두 사람의 말에 무림인들은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도전을 감행했고, 천하를 위진 시키기 시작하였다.
명성을 날리던 많은 무인들이 그들의 손에 죽어갔고, 그들 속에서는 구파일방의 제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중원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산동성에 도착했을 땐 어느새 흑백쌍마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산동성 패자였던 산동악가 가주의 목을 벤 그들은 천하를 향해 자신들의 이름을 밝혔다.
백의를 입은 자는 혈우검마(血雨劒魔)  진명(陳命)이라 하였고, 흑의를 걸친 자는 섭혼광마(攝魂狂魔) 위종산(魏宗産)이라 하였다.
그들의 진정한 신분은 명교의 광명우사와 좌사였다.

"설마 하오밀문 문주 나부랭이가…."

혈우검마와 섭혼광마를 경악한 얼굴로 구약종을 보았다. 자존심이 상했던 탓이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조차도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는 자신이다. 그런데 하오밀문 문주 따위가 자신들보다 강자라니.
그런 말을 한 사람이 교주가 아니었다면 당장 찢어 죽였을 것이다.

"믿을 수 없습니다!"

진명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맞아. 믿을 수가 없지. 나도 자네와 마찬가지네. 그건 그렇고 병력 배치는 어떻게 했나?"

진명을 보며 빙긋 미소를 날린 구약종은 화제를 바꿨다. 300년 세월동안 형성된 인식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문주가 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녔다해도 하오밀문은 하오밀문일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령무전에 8할을 하오대전 쪽에는 2할을 배치했습니다. 수전에 참여할 명교도는 2천 5백입니다.
그리고 수공단(水功團) 5백 명을 물 속에 배치할 예정입니다."

"알았다, 나머진 우사가 알아서 해라."

고개를 끄덕인 구약종은 호숫가로 걸음을 옮겼다. 

"하오밀문 문주라 해서 봐주거나 하진 않는다.
네 말처럼 하오대문을 세우고 싶으면 나를 넘어서고, 천의맹을 넘어서고, 잠사옹을 넘어서야 한다.
나를 넘지 못하면 네가 죽는다, 이곳 군산에서."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구약종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둥! 둥둥! 둥!

폭우가 쏟아지는 빗속에 뚫고 북소리가 나직하니 울렸다. 군산을 향해 출정준비를 하는 천의맹 무인들이었다.
령무전 무인들이 준비한 25척을 포함하여 천의맹 선박은 전부 35척이었다.

"우리가 우측을 맞겠네. 하오대전은 뒤따라오던지 아니면 왼쪽을 맡도록 하시오."

작전회의가 한창인 이곳은 우자령의 선박이었다. 명목상 이번 작전의 지휘자가 된 우자령은 야혼 일행을 보며 말했다.

"알았소이다, 우리가 방해된다는 말인데…. 하오대전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소.
방해될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은 붙들어 두시오. 그보다는 상륙해서는 어떻게 할거요?"

고개를 끄덕이며 야혼은 물었다.

"우린 서쪽에서 동쪽으로 치고 나갈 걸세. 하오대전은 남에서 북으로 치고 나가도록 하게. 물론 마교 무인들은 척살하면서 말이네."

"그게 다요?"

어이없다는 듯 우자령을 보며 물었다. 방해지 말아라. 남쪽에서 북으로 달려라. 단 두 마디가 작전회의라니.
공연한 걸음을 했다는 생각에 불현듯 짜증이 났다.

"그게 다요. 잘해보시오."

우자령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천의맹 정문에서 당했던 수모를 조금이나마 갚아준 것 같아 내심 흐뭇했다.

"공연히 왔구먼. 전부 내 배로 모여라!"

우자령을 빤히 보던 야혼은 수하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왔다.

"놈! 이번 전쟁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다. 오합지졸과 구파의 차이를 말이다."

하오대전 선박을 향해 몸을 날리는 야혼 일행을 보며 우자령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오밀문과 구파의 차이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줄 참이었다. 서로 별개의 세력으로 편성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천왕! 후위를 담당하기로 했던 배는 어디 있나?"

배로 돌아오자마자 야혼은 구칠우를 찾았다. 하오대전에서 준비한 배는 지금 있는 15척이 전부가 아니었다.
배가 침몰할 경우에 대비하여 따로 10척을 더 준비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네? 네! 지금 원수(沅水)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천왕이란 별호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구칠우는 야혼이 자신을 쳐다보자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동정호를 호수라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호수가 아니다.
호남의 사대 하천인 농수, 상강, 원수, 자수의 4개 하천이 흘러들었다가 장강으로 빠져나가는 강줄기의 하나일 뿐이다.
동정호가 아니더라고 배를 숨겨둘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선단의 진형은 1자형이다. 선박의 운항은 해룡문이 전담한다. 지휘자라 할지라도 배의 움직임에 대해선 간섭하지 마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문주님!"

14명의 선박 지휘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수전에 대비한 야혼의 작전은 운항과 싸움의 분리였다.

"좋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기 바란다. 이상!"

"보중하십시오!"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고 있으나 무인들의 얼굴은 잔득 굳어있었다. 첫 전투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었다.
고향에서 크고 작은 싸움을 경험했지만 목숨을 담보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입장. 긴장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네. 천생 우리가 정리해야겠다."

떠나지 않고 있는 추기영과 태웅 그리고 무쌍사왕을 보며 야혼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미타불! 소승에게 전부 맡겨 주십시오. 이 무음항마혈탁으로 박살을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단 신녀곡 배 앞으로 오는 놈들에 한해섭니다."

"난 화화방 배 앞이네."

"알아서 해 자식들아!"

여전히 여자들 앞만 고집하는 두 사람을 보며 야혼은 빽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뿌우! 
령무전 선박에서 나발소리가 길게 울렸다. 

"출전이다! 노를 내려라! 속도는 저속이다!"

해룡문 무인의 지시에 따라 노가 내려지고 빗속을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배와 달리 전선은 갑판과 노잡이들이 타고 있는 선저가 구분되어 있다.
전부 20명의 노잡이가 있는  선저의 제일 앞에는 커다란 북을 앞에 둔 타수가 있다.
그가 두드리는  북소리에 맞춰 노잡이들은 노를 젖는다.
타수가 두드리는 북소리가 빨라지면 배의 속도가 높아지고, 북소리가 늦어지면 배는 천천히 항해한다.
둥! 둥! 둥!
느릿한 북소리에 따라 하오대전 선단이 일정한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자로 길게 늘어선 상태로 전진해가던 대형이 점점 모습을 바꾸더니, 마치 하늘을 나는 기러기 모양을 취했다.
가장 선두로 나선 배는 야혼의 배였고, 그들 좌우로 신녀곡과 소천문 배가 5장 간격을 유지하며 따랐다.
그리고, 가장 위쪽 선실 위에는 커다란 백색 깃발이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 펄럭이고 있었다. 
하오대문(下午大門), 깃발 안쪽에 수놓아진 글씨였다.
35척의 선단이 일대 장관을 이루며 항진하기를 반 시진,
군산의 모습이 희미하게 시야에 잡힐 즈음하여 전방에 적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허미! 먼 배가 저리 많아?  하나, 둘, 셋…. 초  사제가 한번 세 봐! 그리고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세 치 안으로 들어와."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완초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혼은 그녀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문주님!"

일순 완초령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갑판에 나와있는 모든 부하들이 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곳에서 껴안듯 끌어당기다니.

"이게 다 재들 긴장 풀어주기 위해서 그런 거야. 너도 눈이 있으니까 보았을 것 아냐. 저 놈들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그래도…."

야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수중의 화살을 죽어라 틀어쥐고 있지만 그들의 손을 보면 미미하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전투가 주는 중압감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다행이다, 우리 쪽으로는 몇 척 오지 않아서."

두 패로 나눠지는 명교 선단을 보며 야혼은 중얼거렸다.
하오대전을 노리고 다가오는 배는 전부 10척이었다. 그들 정도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듯 싶었다.

"자 이제 나는 나가봐야 하니까…."

"무슨…,우흡!"

느닷없는 기습에 완초령의 두 눈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보는 순간, 입안으로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100여 명의 무인들이 지켜보는 상황이 아닌가. 그들 앞에서 입을 맞추다니.
더욱 황당한 일은 자신이었다. 너무 놀라 기절할 듯 하면서도 그와의 입맞춤에 집중하고 있었다.
더구나 자꾸만 감기는 눈이라니. 내심 나직한 신음을 발하며 그의 혀를 끌어당기려는 순간 입안이 허전해졌다.

'나빠요!'

시야에서 멀어지는 야혼을 보며 전음을 보냈다. 문득 자신은 색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입맞춤에 열렬히 응하다니. 
내심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봐라! 우리 입맞춤 한번이 쟤들의 긴장을 풀어놓지 않았냐.'

'그래도 나빠요.'

"어딜 가세요?"

이편을 보며 미소를 보내고 있는 부하들을 흘끔 보며 전음을 보내던 완초령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선수 쪽으로 걸어가던 야혼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재빨리 몸을 날려 선수 끝으로 간 그녀의 시야에 세 사람의 모습이 잡혔다.
야혼과 태웅 그리고 추기영이었다. 그들은 전부 물위를 평지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야혼의 의도를 눈치챈 완초령은 낮게 신음을 뱉어냈다. 

"당신 머리를 따라가려면 저는 아직 멀었어요."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녀의 귓전에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하오대문 문도들이여! 여기 이 자리는 앞으로 천하를 경영할 하오대문의 시발점이다.
무시당하고 천대받았던 하오밀문이 아니라, 천하를 제패할 하오대문이란 말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야혼이 있고, 여기 좌우호법이 있다!"

좌우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키던 야혼은 허리춤에서 비천묵룡도를 뽑아 번쩍 치켜들었다.
뒤이어 그의 몸에서 백색 운무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오고 허공을 향해 쳐들었던 비천묵령도는 검은 광채를 길게 뽑아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무음항마혈탁을 들고 있는 추기영의 신형은 황금색 광채를 토해냈고, 여의만병주를 든 태웅은 혈광을 줄기줄기 쏟아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동정호의 거센 파도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는 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들.
삼색 광채를 날리며 물을 박차고 나아가는 야혼 일행이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선박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삼 인은 전력으로 내달렸다.

"연작문주! 신녀곡 처자들이 내 모습을 못 볼지도 모르는데 속도를 좀 줄이는 게 어떻겠나?"

왼쪽에서 달리던 추기영이 싱긋 미소를 물며 말했다.
하지만 말만 그럴 뿐 멈출 생각은 없는 듯, 스치듯 수면을 나아가는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나도 좌호법과 같은 생각이야. 저 자식은 몰라도 나는 거의 작업에 성공했다고. 화화방 처자 몇이 꼴깍 넘어오는 순간이었는데."

"배 한 척씩을 박살내봐라. 그럼 치마를 내리고 달려들 거다. 왔다!"

태웅을 향해 말하던 야혼의 신형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일순 그의 뒷면으로 길다란 물길이 생겨났고, 물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친 야혼은 천둥 같은 고함을 터져나왔다.

"나를 탓하지 마라, 더러운 세상에 태어난 운명을 탓해라! 지옥수라참(地獄修羅斬)!"

폭풍이었다.
정 중앙에 있는 배를 향해 검은 엄청난 기세를 머금은 검은 기운이 밀려갔고,
뒤이어 야혼이 질렀던 고함보다 더한 폭음이 빗속을 뚫었다.
쿠앙!

"크아악! 적이닷!"

10장에 달하는 전선의 갑판이 일직선으로 갈라지고, 그곳으로 무수한 선혈이 튀었다.
활을 쏠 준비를 하고 있던 명교 무인들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검은 기운에, 가랑잎처럼 날렸다.
허공을 날아가는 자, 그 자리에 쓰러진 자. 순식간에 명교도가 타고 있던 배는 아비규환 지옥으로 변했다.

"대오를 정비하라! 적은 한 명에 불과하다!"

야혼을 발견한 누군가가 고함을 내질렀다. 상대가 수면을 밟고 왔다는 생각은 할 겨를 이 없었다.
우선은 눈앞으로 다가온  적을 없애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꺼번에 모이는 건 내가 바라는 바란 말이다. 가랏!"

지옥도법 1초를 펼치고 그 여력을 빌어 내려가던 야혼의 몸에서
구슬 모양의 반투명한 불꽃이 튀어나와 그들을 향해 공폭하게 밀려갔다.

"크아악! 아악!"

"으아악!"

비명, 비명, 비명들, 살이 타는 메케한 냄새와 함께 수십 명이 비명을 내지르며 가루로 흩어졌다.

"혈풍무적강(血風無敵 ), 만병여의탄(萬兵如意彈)!"

야혼의 오른 쪽배에서 터진 고함소리였다. 태웅이 휘두른 여의만병주에서 튀어나온 붉은 광채가 사방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야혼이나 추기영에 비해 내공이 부족한 태웅은 한번에 가공할 공력을 쏟아내지 못한다. 해서 그는 단발 공격을 택했다.
배 위로 올라서자마자 전방 무인들을 향해 철혈무적검법과 만병여의검결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수많은 화살과 적의 칼이 다가왔으나 무시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며 여의만병주를 휘둘렀다.

"수리수리 마수리 수수리 사하바!"

데-엥!
나직한 천수경 독경소리와 함께 범종이 울리듯 웅장한 소리가 뱃전을 강타했다.
쿠웅! 

"아악!"

"커억!"

엄청난 광경이었다. 마를 제어한다는 항마혈탁이란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단 한번의 울림에 선실이 무너지고 배에 있던 무인 절반이 칠공에서 피를 뿌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살상력이 가장 강한 무공이 음공이었다.

"부디 노래의 집으로 가시길…."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린 추기영은 무음항마혈탁을 틀어 자신의 머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데엥! 데엥! 데엥!
연속해서 세 번을 두드린 추기영은 일순 비틀거렸다. 

"미친놈아, 우린 발악하는 거야! 학대하지 말란 말이다. 저승엔 거짓말의 집은 없어.
여기, 네 놈과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지옥이고 거짓말의 집이다. 전부 죽여. 저 것들을 전부 죽이란 말이야!"

배 한 척을 박살낸 야혼은 다른 배로 몸을 날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슈우욱! 쉬익!
이미 시작되었던 쌍방 간의 화살 공격은 20여장거리로 좁혀지자 더욱 거세졌다.
야차무적금강을 끌어올려 검게 변한 야혼은 다른 배를 찾아 몸을 날렸다. 날아오는 화살은 아예 무시했다.
하오대전 소속 배에서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완초령의 모습이 보였다.
왼쪽 배에서는 육만우가, 오른 쪽에서는 구칠우가 명교 선박을 향해 정신 없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아미타불! 알았습니다, 연작문주. 죽입시다. 전부 죽여버립시다.
우리를 이 길로 들게 한 명교 놈들을 전부 죽여버리잔 말입니다."

"맞다, 육승. 우린 말이다. 그저 만들어진 놈들이다.
전륜마왕지체, 대력패왕지체, 야차혈마지체는 잠사옹이란 놈이 만들어냈다!
네 어머니를 태웅의 어머니를, 그리고 내 어머니를 겁탈시켜 만들어낸 종자들이란 말이다.
우리는 그런 놈들이다! 세상을 전부 없애버려도 괜찮은 놈들이란 말이다!"

"나무관세음보살!"

야혼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본 추기영은 나직하니 불호를 읊었다. 빗물에 섞여 있지만 녀석은 분명 울고 있다.
사막의 신전에서 강시가 되었던 부모님을 만났을 때 그는 울었고, 여기서 그는 또 울고 있다. 

"그래보세, 죽여 보잔 말이네. 수리수리 마수리 수수리 사바…!"

찬연한 황금빛 광채를 쏟아내며 추기영은 다른 배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지옥도를 불끈 틀어 쥔 야혼이 뒤따랐다.
둥! 둥둥둥!

"좌현 노를 걷어라!"

쿠웅!
해룡단이 노를 걷어들임과 동시에 두 척의 배가 거칠게 부딪쳤다.

"쏴라!"

두 척의 배가 부딪치는 순간 적선을 향해 몸을 날리며 완초령은 고함을 내질렀다.
뒤이어 수십 개의 갈고리가 던져지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으-아악!"

"사사만화류(死死滿花流)!"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속에 붉은 광채가 섞여 들었다.
적선에 올라탐과 동시에 펼쳐진 사사만화류, 수십 개의 암기가 전면 공간을 수놓으며 적을 주살 했다.
하오대전 무인들의 동작도 신속했다. 각자의 무기를 틀어쥐고 완초령을 따라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명교 선박 위에선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벌어졌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두 명씩 짝을 지은 하오대전 무인들은 명교 무인들을 향해 돌진하며 검과 도를 휘둘렀다.
명교인의 칼에 맞아 한두 명씩 쓰러지는 자들이 있었으나, 그에 비해 월등히 많은 명교 무인들이 쓰러졌다.
비단 완초령이 타고 있는 배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대부부분 명교 선박 위에서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십여 장 길이의 배에서 200명에 가까운 무인들이 서로를 향해 창과 검과 그리고 도를 휘두르고 있다.
동정호 물은 어느새 붉게 변했고, 배에서 떨어진 시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저럴 수가…."

후미에서 명교 선박을 지휘하던 사림은 경악한 얼굴로 전장을 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오밀문 또는 하오문이라 불렀다. 100년 전 정마대전에도 나가지 못했던 떨거지라 불렀다. 
더구나 3년 전에는 멸문까지 당했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명교 정예가 지고 있다.
아니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오합지졸이라 여겼던 그들은 멀리서 싸우고 있는 령무전 무인들보다 강했다.
그리고, 수면 위를 달려온 삼 인. 명교의 패배는 그들 때문이었다. 1인당 배 한 척씩을 박살낸 놈들.

"빌어먹을…."

사림은 나직하니 욕설을 뱉어냈다. 해안 가에 설치한 함정은 오직 령무전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
하오밀문 떨거지들은 이곳에서 박멸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랬었는데.

"후퇴하라!"

결국 후퇴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10척의 배가 투입되어 자신이 타고 있는 배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아냐, 너는 갈 수 없다. 여기서, 이 동정호에 뼈를 묻어야한다. 씨팔! 뼈를 묻는다는 건 말이 안되네.
그럼 정정하겠다. 여기 동정호에 뼛가루를 뿌려야해. 이 배에 있는 놈 모두. "

선미에서 살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삼 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온몸이 피로 점철된 야혼 일행이었다.

"네 놈들은?"

일순 사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놈들이었다. 물 속과 배 위를 마음대로 오가던 놈들.

"맞아, 내가 하오대문 대장이고, 이들은 좌우호법이야."

"건방진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죽여라!"

뒤쪽을 흘끔 쳐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부터 살 기회를 주겠다. 살고 싶은 놈은 물 속으로 뛰어들어라. 
그런 다음 악양으로 헤엄쳐 가라. 군산으로 들어가면 전부 죽는다."

중얼거리듯 말한 야혼은 사림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태웅과 추기영도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전면 명교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막아…. 커억!"

일순 백안으로 변하며 고함을 지르던 사림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검은 도가 심장에 관통해버렸던 탓이었다.

"어떻게…."

고개를 숙여 검은 도를 보았다.
탈백마안(奪魄魔眼) 사림(獅林),
절세사흉(絶世四兇)의 일 인이자 명교사호법의 한 명인 자신이 손 한번 써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놈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내공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더하여 미혼술마저 시전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놈은 탈백마안의 영향도 받지 않았고, 그 빠르기조차 섬전(閃電)같았다.
 
"악마니까!"

"악마….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사림의 심장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지옥도에 불꽃의 힘을 실어버린 것이었다.
잠시 후, 쏟아지는 빗속으로 가루로 변한 탈백마안 사림의 흔적이 씻겨내려 갔다.

"끝났나?"

사림이 죽자, 남아 있던 명교 무인들은 일제히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야혼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났군."

"끝났어."

추기영에 이어 태웅까지 야혼 곁으로 다가오며 철버덕 주저앉았다.

"육승!"

"왜, 그러신가 연작문주!"

"정말 지옥이란 게 있기는 하는 거냐?"

"난 돌파리 중입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지옥은 우리가 있는 이곳이라고 말입니다.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어디있겠습니까?"

주변을 가리키며 추기영은 말했다. 그랬다. 진정 지옥이란 게 있다면 동정호가 분명할 것이다.
화살이 꽂힌 시체들, 팔이 잘린 시체들, 내장이 비어져 나온 시체들,
수백 구의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는 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어디가 지옥이란 말인가.

"맞아! 여긴 지옥의 시작일 뿐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야혼은 벌떡 일어났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남아 있는 명교도만 해도 수천 명이고, 마옥성이 있고, 천의맹이 있다.
수백 구의 시체가 떠다니는 동정호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저들은 속임수를 쓰는 모양이다."

멀리 보이는 령무전 선박과 명교 선박의 추격전을 보며 야혼은 중얼거렸다.
전부 60척이 격돌했는데 남아 있는 배는 절반이 조금 넘어 보였다.
령무전보다는 명교도들이 더 많이 당했는지 도망치는 배는 15척에 불과했다. 

"가서 말해줘야 하나?"

"그 정도는 저들도 알고 있을 거야…."

추기영의 말에 야혼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보다 경험이 훨씬 많은 사람들이 함정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함정을 돌파하고 적을 없애는 건 령무전의 능력이다.

"일단은 좀 쉬었다 출발하자."

"문주님!"

고개를 돌려 배를 찾는 순간 완초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속 항진하라! 활을 쏘아라!"

격앙된 목소리, 명교 선단을 쫓아가는 우자령은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고함을 내질렀다.
조금 전 전쟁으로 10척의 배를 잃었지만, 물에 빠졌던 자들이 많았을 뿐 사상자는 생각보다 적었다. 
반면에 적은 20척을 잃었고, 물위에 떠다니는 대부분 시체가 명교도들 것이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했다.

"함정이 있을 줄 알고 있다. 끝가지 쫓지는 않는다. 더욱 거세게 몰아쳐라!"

두 척의 적선이 따라 잡히는 광경을 접한 우자령은 더욱 크게 소리쳤다.
배가 서로 접안하자마자 명교인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승리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전주! 멈추게 하시오. 군산이 보이고 있소이다."

만족스런 얼굴로 명교인들의 시체를 보는 순간 앞서나가던 곤륜선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뿌우! 뿌우! 뿌우!
세 번의 나발소리와 함께 전속으로 나아가던 배들이 일제히 멈췄다.

"각 배의 지휘자들은 상황을 보고하라! 저놈들은?"

만족스런 얼굴로 자리에 앉던 우자령은 놀란 얼굴로 눈을 가늘게 모았다.
멀리서 이편으로 다가오는 하오대전의 배를 보았던 탓이다. 놀랍게도 그들의 배는 처음 출발할 때 숫자 그대로였다.

"그 정도도 이기지 못하면 전주 자리를 반납해야 한다 놈! 우린 2배나 많은 적을 이겨냈단 말이다."

마교도에게는 승리했지만 하오밀문 떨거지에게는 패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주 너무 그러지 마시오. 저들도 천의맹소속인데 승리했으니 좋은 일 아닙니까."

우자령의 배로 건너온 곤륜선인이 보다못해 나섰다.
하오전주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마교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상황이고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서로 합심하여 적을  물리쳐야할 때에 자꾸만 하오전주를 시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압니다, 하지만 놈이 싫은 걸 어떡합니까. 자꾸만 화가 치미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허허!'

곤륜선인은 내심 탄식했다. 선입견, 인간을 가장 천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 또한 그랬다.
제자가 운룡대구식에  공격 기능이 있다고 했을 때 사파 무공을 접목시켰다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녀석을 구석으로 내몰았다. 선입견 때문이었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을 너 따위가 발견할 리가 없다는 자만심 때문이었다.
녀석이 하오밀문 문주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금정신니 또한 자신과 다르지 않다.
하오밀문은 떨거지라는 선을 그어두고, 선 안으로 들어오는걸 용납하지 않는다. 언제나 선 밖에 있어야 그들을 인정할 뿐이다.
자신이 제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식적이라 할지라도 대우를 해주시오. 필요한 사람이니까."

나지막하니 말을 남긴 곤륜선인은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나마 하오전주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수고했소 하오전주. 고생 많으셨소."

"엉?"

우자령 배로 건너왔던 야혼은 놀란 얼굴로 곤륜선인을 보았다. 태무검존 이후 처음대하는 마음이 담긴 말이었던 탓이다.

"우리만 선입견을 가진 줄 알았더니 전주도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구려."

"아니외다, 내가 가진 건 선입견이 아니고 패배의식이외다. 항상 위축된 상태에서 상태를 경계하는 것 말이오."

야혼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곤륜선인의 얼굴에서 진실이 느껴졌다. 그는 하오대전을 동료로 인정하는 듯 보였다.

"참! 대력자 그 녀석에게 무적군림마보를 주었소. 처음엔 싫다고 하드만 죽인다고 하니까 받습디다.
머잖아 곤륜은 엄청난 무공을 보게 될 것이오. 사람은 아니고 무공만."

"전주가 소생보다 낫소이다. 나이 먹은 나보다 말이오. 어쩌면 하오전주를 돕게 될지도 모르겠소…."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며 곤륜선인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야혼에게 또 한 곳의 동조세력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구파일방의 한 곳을.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자는 곤륜선인뿐만이 아니었다.
동정호 남쪽을 흐르는 상강, 그곳에도 쏟아지는 폭우를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돌아왔다, 강호로."

창문너머 빛줄기를 보며 중얼거리는 인물, 그는 십만대산을 떠나온 유마혼이었다.
그가 굳이 강호로 나온 이유는 강호 전역을 도모하자는 남천악의 연락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동정호에 있는 놈 때문이었다.
언령제세공의 첫 재물로 삼고 싶었던 놈.

"야혼, 내가 왔단 말이다. 네 놈을 잡고 싶어서 마도련도 들르지 않았다. 네놈이 보고싶어 곧바로 왔단 말이다."

원래는 마도련 공격에 참여했어야 했다. 하지만 마도련보다 더 보고 싶은 녀석이 있었다.
마도련에서 도망치게 만들었던 놈.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며 개처럼 짖었던 그놈을 먼저 보고 싶었다.

"네 놈의 목을 들고 마도련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냉소소의 목을 들고 천의맹으로 갈  것이다.
그게 이 유마혼의 계획이다. 어떻게 됐느냐?"

중얼거리던 유마혼은 밖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일단은 천의맹이 승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이라…."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유마혼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대로 되어가고 있다.
천의맹 무인들이 완전하게 군산으로 상륙하는 순간 마옥성의 작전은 시작된다.
섬 주변에 정박하고 있는 그들의 배를 불태운 다음, 형산에서 출발한 수인대 3천을 군산으로 풀어놓을 작정이었다.
수인의 힘을 발휘하는 시간이 여섯 시진에 불과하지만, 섬에 갇힌 모든 생명체를 말살할 시간은 충분하다.
수인들 또한 전부 죽게 될  테지만 상관없다. 강호를 접수한 다음엔 수인들보다는 정상인이 필요하기에.

"좋다, 지금부터 출발한다!"

 "존명!"

"아느냐 강호여! 저 비보다 더 많은 피가 강호무림을 적시게 된다는 사실을.
마옥성의 저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프! 하하하!"

전면을 노려보는 유마혼의 눈에서 붉은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왔다.

*          *         *

"크아앙!"

"아악!"

뎅! 뎅뎅뎅! 뎅뎅뎅!
잔인한 여름을 알리는 비명은 무림의 태산북두라 일컫는 소림사 산문에서 가장 먼저 울렸다.
비상을 알리는 타종소리가 소림사 전역에 울리고 공양 중이던 소림 승려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갑작스런 비명소리에 놀란 보장대사는 밖으로 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적입니다. 수인(獸人)입니다!"

"크아앙! 캬악!"

피를 철철 흘리던 승려가 풀썩 쓰러짐과 동시에 산문 쪽에서 엄청난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아미타불! 어찌 이런 일이…."

질겁한 보장은 산문 쪽을 몸을 날렸다. 이곳 저곳에서 나온 제자들 또한 각자의 무기를 들고 보장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입구 쪽 석림 근처에 도착한 보장은 경악한 얼굴로 제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정말로 수인(獸人)이었다.
늑대 얼굴, 고양이 얼굴, 원숭이 얼굴 등 수많은 수인들이 담을 넘고, 산문을 넘어 밀려들고 있었다.
금불산에 나타났다는 말은 들었고 경계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공현을 비롯한 소림사 주변을 철저히 감시했고, 외부에서 들어온 자들조차 은밀하게 조사했다.
그런데 그 어떤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무려 3천에 달하는 수인들이 나타났음에도.
먼저 나온 백여 명의 승려들이 그들을 막고 있으니 역부족이었다.

"잘라도 죽질 않습니다! 불사지체입니다!"

"으아악!" 아악!"

"목을 잘라라! 놈들의 약점은 목이다!"

불사지체란 말과 목을 잘라야 한다는 함성소리 속에 죽음을 알리는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크아앙! 마옥성 전사들이여. 지난 백 년간의 한을 풀어라! 마음껏 인혈을 취해라."

"결국 왔던가….!

보장대사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마옥성(魔獄城)이었다.
지난 백 년간을 맘졸이며 기다렸던 자들, 영원히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나타났다.
저들을 저렇게 만든 사람은 소림을 비롯한 강호무인들이다.
하지만, 마옥성으로 끌려갔던 명교인들이 아무리 불쌍하다해도 소림제자들의 죽음은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보장대사는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고함을 질렀다.

"나한승(羅漢僧)은 저들을 막아라! 팔대호법은 나서라! 사대금강은 살계를 열어라!"

"아미타불!"

범종소리가 울리듯, 우렁찬 불호소리와 함께 수백 승려들이 허공을 날아 전면으로 나섰다.
전면에 백팔나한승이 자리했고, 좌측에는 팔대호원 소속 승려들과 1백여 명의 제자들이 나섰다.
그리고 우측엔 사대금강을 비롯한 1백 제자가 수인들의 진로를 막아서며 각자의 무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뛰어나온 제자들 또한 탑림(塔林)부터 시작하여 안쪽으로 길게 늘어서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크아앙!"

전율적인 포효소리와 함께 수인들을 소림승려를 향해 몸을 날려왔다. 

"아미타불!"

백 팔 명으로 구성된 백팔나한승의 위력은 가공했다.
나직한 불호소리와 함께 전면을 향해 쌍장을 천천히 밀어내자. 그곳으로부터 백색 장인이 엄청난 기세로 쏟아져 나왔다.
소림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백보신권이었다.

"크아앙! 아악!"

인간과 짐승의 소리가 뒤섞인 비명소리가 울리며 20여 명의 수인들이 가루로 흩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전면에서 동료들이 가루로 흩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수인들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한 살기를  뿌리며 밀고 들어왔다.
수인들의 몸에 황금빛 광채가 터지고, 백색 강기가 격중했다. 하지만 수인들을 멈추게 할 수지는 못했다.
잠시 주춤하던 그들은 손발톱을 앞세우며 승려들의 몸을 찢었다.

"끄아악! 아악!"

"크아악!"

뿌연 피안개가 피어오르고 소림승려와 수인들이 하나가 되어 쓰러졌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는 자는 수인이었다.
목을 잘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소림 승려들은 무기보다는 적수공권이 더 많다. 강기를 뿌리는 이들만 간신히 수인들을 없애고 있을 뿐이었다.
전면에서부터 소림승려들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아미타불!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복호항마장(伏虎降魔掌)!"

"보리옥룡인(菩提玉龍印)!"

"사자모니인(獅子牟尼引)!"

사방으로 몸을 날리며 무차별하게 쌍장을 쏟아내는 자들. 그들은 소림 최고 배분인 소림사법불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법천은 정신 없이 양팔을 휘둘렀다. 수많은 소림 제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더 이상 강호 일에 나서지 않기로 하였다. 해서 성모궁을 찾는 일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명교를 친다는 천의맹에서 참석하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커억!"

달려드는 자를 향해 양손을 뿌리려던 법천은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3척 길이의 길다란 손톱이 심장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가 비명을 지르건 결코 고통 때문이나, 소림 최강자라 여겼던 자신이 당해서가 아니었다.
가슴을 파고든 손톱이 보였던 변화 때문이었다. 아주 눈에 익은 변화.

"달마삼검(達摩三劒)? 어떻게…?"

늑대 얼굴을 한 괴인이 손톱으로 시전한 검법은 분명 달마삼검이었다. 소림의 유일한 검법.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늑대 얼굴을 한자, 그것도 마옥성 출신이 달마삼검을 익힌단 말인가.
아득해 지는 가운데 괴인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알고 싶었다는 눈으로. 법천의 의문은 이내 풀렸다.

"십만대산은 나를 불자가 아닌 악마로 만들었다.
광자(廣慈)사형은 죽음을 택했지만 나는 욕망을 택했다. 영원한 생명과 함께 불사신체를 말이다."

속삭이듯 말한 낭인은 법천 가슴에 박혀있던 손톱을 사정없이 횡으로 그었다.
츄아악!

"광진(廣眞)사조…"

가슴이 절반정도 잘린 법천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랬다. 광진(廣眞), 그는 백년 전 성모척살대로 성모궁으로 떠났던 소림의 또 다른 제자였던 것이다.

"지금은 광진이 아니니라. 마옥성의 성주일 뿐이니라. 악마 말이다."

진득한 살기를 뿌리며 광진은 손톱에 묻은 피를 천천히 핥았다.
그날부터 악마가 되기로 했다.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지, 얼마나 많은 양민들의 목을 땄는지 모른다.
십만대산에 투입될 때만 해도 악의 무리를 없앨 수 있는 기회를 준 부처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악의 무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명교인들의 피로 심장을 적셨을 때 깨달았다.
이 세상엔 악이란 없었다. 악은 인간의 마음속에 탐욕이란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탐욕을 가장 많이 가진 자들이 바로 무림인이었다. 정의(正義)로, 선(善)으로 포장된 그들.
성모척살대로 자신을 보낸 사문을 저주했다. 다시 살아난다면 반드시 그곳만은 없애버리겠다고 맹세했다.
자신의 손에 죽어 가는 명교인들을 보며 맹세했다.

**********

"크아앙! 마옥성 전사들이여, 죽여라! 백 년 동안 쌓아왔던 한을 쏟아내거라!"

스스로 수인이 된 자, 명교인들을 수인으로 만든 자. 명교인들의 한을 가슴에 품어버린 광진의 절규였다.
          
"죽여라! 너희들을 짐승으로 만든 자들이다! 죽여라! 백 년 한을 풀어라!"

숭산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 산동성에서도 같은 고함소리가 울렸다. 
금빛 털을 가진 자, 원숭이 얼굴을 한 자가 얼마 남지 않은 악가 무인들의 목을 부러뜨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악가는 빈집이었다.
50여 명의 경비무사를 제외하면 남아 있는 무인들을 거의 없었다. 경비무사 또한 도망치다 잡힌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크르르! 집을 비우고 도망쳤단 말이더냐. 그렇다고 그냥 갈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불을 질러라! 악가 놈들의 집을 태워라!"

잠시 후, 백여 채에 달하던 모든 건물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출발하라! 산길을 통해 하북성으로 간다!"

"크아앙!"

엄청난 포효소리와 함께 3천 수인들은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받으며 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각 세가의 주력이 머무르고 있는 천의맹이었다. 

"허허! 이일을 어찌할꼬, 이 일을 어쩌란 말이냐!"

창백한 얼굴, 홀쭉한 볼, 지난 며칠 간 얼굴이 반쪽으로 변한 남궁장순은 하늘이 꺼져라 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강건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처럼 변한 건 보름 전이었다.
잠시 놀러나갔을 거라 여겼던 둘째가 돌아오면서 일은 시작되었다.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녀석은 오른 팔이 없었다.
기절할 듯 놀라, 이유를 물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청천벽력이란 말이 그때처럼 실감난 적은 없었다. 동창제독을 압습한 사람이 녀석들이었다.
죽이겠다며 검을 뽑아든 자신에게 아들은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자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러 왔다고 했다.
지난 10여 일간 산 속에 숨어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자수였다고 한다.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동창제독의 암습은 제 녀석들의 죽음으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다. 
만일 녀석들의 죄상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남궁세가는 그날로 끝장이다.
지금 동창제독의 권력으로 보건대 구족을 멸한다고 해도 하등의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동창제독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으나,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확인했느냐? 그가 토해낸 게 내장이라고 확신하느냔 말이다."

무릎을 꿇고 앉은 둘째를 향해 물었다.
이 또한 몇 번을 묻는지 모른다. 수십, 아니 수백 번을 물었다. 묻고 또 묻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아버지. 동창제독은 살아날 수 없습니다."

남궁성은 확신하듯 말했다. 자수를 하겠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했던 말에 불과했다.
동창제독의 죽음이 확인 될 때까지만 숨어서 기다린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남궁장순은 앓는 듯 중얼거렸다. 가장 바라는 일이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고명필의 죽음은 황실에 혼란을 불러올 터이고,
남은 이들은 동창제독이 쥐었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일 것이다.
권력을 쥐기를 원하는 자들의 암투 속에 고명필을 암습했던 범인들에 대해선 묻혀버릴 게 분명하다.
남궁장순이 바라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선행되어야할 일, 그것은 고명필의 죽음이었다.

"휴-우! 형이 올 때까지 꼼짝 말고 있거라."

나직하니 한숨을 내쉰 남궁장순은 연공실을 나와 밖으로 향했다. 다른 가문의 가주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서 오시오, 가주!"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선 남궁장순을 삼 인이 맞이했다. 산동악가, 하북팽가, 황보세가 가주들이었다.

"일단 남천악을 만나보고 향후 일을 결정하도록 합시다."

내실로 들어서자마자 인사도 하지 않고 남궁장순은 곧바로 말을 꺼냈다.
살인루 살수를 동원한 배우인물이 남천악이었다는 사실을 아들들로부터 들었던 탓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산동악가 가주인 환우제일창( 宇第一槍) 악봉구(岳峯九)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남천악은 야망이 큰 인물입니다. 우리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정 안되면 입막음을 해야지요.
비원 전주실에 도착하면 세분은 음파를 차단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주십시오."

"알겠소이다. 남궁가주."

시선을 교환한 네 사람은 내실을 나와 비원으로 향했다.
바로 그 시간.
비원 전주실 주인인 남천악은 의아한 얼굴로 탁자 위를 보았다. 탁자 위에는 서찰을 싼 듯한 곱게 접힌 비단 천이 놓여 있었다.
조금 전 부하가 은밀히 가져온 물건으로 발신자는 북경이라고만 말했다고 하였다.

"북경이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북경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주려화가 전부다.
하지만 그녀는 전 황제를 따라 달탄으로 가있는 상황. 자신에게 서찰을 보낼 이유가 없다.

"일단 풀어 보고 나서…."

내심 결정을 내린 남천악은 붉은 색 끈을 손가락으로 살짝 안쪽의 서찰을 꺼내 들었다. 서찰 또한 대충 보낸 게 아니었다.
꼼꼼하게 밀봉되어 오직 본인만이 뜯어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허억!"

내심 웃으며 서찰을  펼쳐들었던 남천악은 해쓱해진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나 잠룡어사대인이오.

"잠룡어사대인이 왜?"

문득 잘못 전달 된 서찰이 아닌가 하여 비단 천을 다시 한번 보았다. 
하지만 비단 천에 수를 놓아 새긴 이름은 남천악, 분명 자신이었다.

"일단은 봐야겠지."

고개를 흔든 남천악은 다시 고개를 숙여 서찰을 보았다.
          
-서찰로 인사를 하게 되어서 미안하게 됐소.
내가 그대에게 서찰을 보낸 이유는 동창제독  때문이오.
이번 그의 암살은 내가 꾸민 일이오. 그의 권력이 너무 커지고 있기에 방법이 없었소.
그를 계속 방치하다간 달탄에서 돌아올 황제는 설자리가 없기 때문이오.
하지만 직접 나설 수가 없었소. 그래서 그대의 얼굴을 잠시 이용했던 거요.
          
"이럴 수가…."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남천악은 급기야 부들부들 떨었다.
이번 동창제독 암살사건의 배후는 잠룡어사대인이 아닌 남천악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놀라진 마시오. 동창제독은 며칠을 넘기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황실의 조사는 피할 수 없을 거요.
아니 권력을 쥔 내가 지시를 내릴 거요. 동창제독을 암살한 자를 찾아내 구족을 멸하라고.
그대가 피하는 길은 천의맹을 장악하는 한가지 밖에 없소.
아니 솔직하니 말하리다. 천의맹을 내 휘하에 두고 싶소. 그 일을 남 대협이 해 달라는 말이오.

"미치겠군."

엄청난 제안이었다. 사부가 아닌 자신과 일을 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서찰을 밀봉한 상태나 찍힌 잠룡어사패의 직인으로 보았을 땐 가짜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문득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남천악은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서찰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바였다.
하지만 화산파와 개방 그리고 와룡전 및 천의맹에 속한 많은 세력들이 있다. 그들이 인정할 리가 없는 것이다.
곤혹스런 얼굴로 재차 서찰을 읽어내려 가던 남천악은 이내 환하게 웃었다. 방법은 서찰에 있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오.
우선은 감연청을 맹주자리에서 내치도록 하시오. 그건 내가 보낸 특제농약을 이용해도 좋고 남 대협 스스로 방법을 찾아도 상관없소.
그를 처리한 다음 사천당문의 가주인 당성에게 맹주직을 주시오. 정식 맹주가 아닌 임시직 말이오.
그렇게 되면 일단 기본 틀은 전부 짜졌다고 할 수 있소.
          
"쿡! 당가려를 이용하라는 말이군. 당성을 파렴치한으로 몰아서."

더 이상은 볼 필요가 없었다. 당성을 몰락시킬 방법으로 적어둔 내용은 그동안 자신이 생각해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초 사형?"

추기영과 태웅은 동시에 고함을 질렀다. 이제야 녀석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제 놈은 물 속에서 아예 나오지 않을 생각이고, 완초령에게 공기를 퍼 나르라고 하려는 생각이다.
공기가 주머니에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내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니미럴타불!"

"너희들은 안 돼 임마! 찾을 수가 없잖아."

"개소리 마십시오 연작문주. 이 황금빛 광채는 물 속에서도 환히 보입니다. 거패시주는 몰라도 소승은 전혀 상관없습니다."

"나도 상관없어 임마, 야명주를 가지고 있는 여인을 꼬셔놨거든! 한 명 가지고는 힘들지도 모르니까 한 세 명에게 부탁을 해야겠네."

동시에 두 사람의 신형이 선실 밖으로 사라졌다.

"뭐해? 배를 일렬로 묶어야 한다며?"

 "네? 알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구칠우는 고개를 흔들며 밖으로 나왔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졌지만 세 사람의 행동은 과거 하오비동에서 보았던 모습과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일상사의 최우선 순위는 여자를 엮는 것이다.

"문주님!"

"둘만 있을 때는 사제라 부르라니까!"

"그래도…."

"그럼 당신이라 부를래? 아니 지금 당장 당신이라 부르도록 해줄까!"

"알았어요, 사제.!"

앞섶을 잡고 옷을 벗기려드는 야혼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완초령은 한 걸음 물러나며 야혼을 불렀다.
여전히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해가 안 된다고? 별 것 아냐. 주머니 가지고 있지. 그 속에다 공기를 담아서 물 속으로 가져오면 돼!"

"어떻게?"

눈이 휘둥그레진 완초령은 야혼을 빤히 보았다. 주머니에 공기라니.

"방법이야 초 사형이 알아서 해야지!"

"문주님! 여기 수어피 가져왔습니다."

"수어피?"

"오! 수어피, 그거 작은 걸로 한 벌 더 가져와!"

과거 성모궁에 갔던 기억을 떠올린 야혼은 환하게 웃었다. 당가려에게 수어피를 입히고 얼마나 흐뭇했던지.
곁눈질로 완초령의 몸매를 대강 가늠해본 야혼은 밖으로 나가는 구칠우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어린아이용으로 가져와. 가장 작은 걸로.'

"끄응!"

나직한 신음을 내뱉은 구칠우는 자신의 배로 몸을 날렸다.

"자 한번 입어볼까? 수어피를 입을 땐 말이야,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아야 해. 그래야 물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사제!"

완초령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훌러덩 옷을 벗어버린 야혼의 알몸을 전부 보았다.
아니 아래쪽에서 덜렁거리는 그것을 가장 먼저 보고 말았다.

"허미, 촉감 죽이네. 물이란 것들이 저절로 미끄러지겠다."

과거 하오밀문에서 준비했던 수어피와는 차원이 달랐다. 
우선은 두께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얼마나 얇은지 몸의 흉터 표시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일단 물에 들어가서 시험을 해봐야겠다. 빛이 나오는 곳에 내가 있을 거다."

'어멋!'

선실을 나가는 야혼을 배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완초령은 얼굴을 붉히며 내심 소리쳤다.
마치 맨살에 검을 칠을 한 것처럼 양쪽으로 갈라진 엉덩이 선이 선명하게 드러난 때문이었다.

'저런 걸 나보고 입으라고?'

슬쩍 몸을 내려다보던 완초령은 부르르 떨었다.

"초 사제, 여기!"

"휴-우!"

구칠우가 내미는 수어피를 보며 완초령은 나직하니 한숨을 내쉬었다.

"끄응! 일단은 입어야겠지."

밖의 동정을 힐끔 살핀  완초령은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 빠르게 수어피를 입었다.
그리고.

"끼약!"

낑낑거리며 수어피를 걸친 그녀는 나지막이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옷이 아니라 얇은 망사 옷을 걸친 기분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불쑥 고개를 내민 유실이며 배꼽아래 선명한 자국까지. 저도 모르게 엉덩이 쪽을 더듬었다.

'미치겠네!'

엉덩이 사이 계곡이 선명하게 느껴지자 얼굴을 붉혔다.

"나쁜 사람! 그래도 옷은 참 편하네."

벗어두었던 겉옷으로 대충 몸을 가린 완초령은 밖을 흘끔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낑낑거리며 입어야했던 노력에 비해 수어피는 너무 편했다. 정말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수공도 못한다면서…."

선실을 나온 완초령은 걱정스런 얼굴로 선수 쪽으로 걸어갔다.
일직선으로 묶인 배는 천천히 해안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물 속엔 야혼을 비롯한 세 사람과 해룡단 200명이 들어가 있다.

"저기 있네?"

물 속에서 나오는 환한 빛을 보며 완초령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야혼이 분명할 터였다.

"차라리 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

주변을 흘끔 보던 완초령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자마자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세상에…."

물 속으로 깊숙이 잠수했던 그녀는 놀란 얼굴로 전면을 보았다.
물 속은 온통 빛으로 가득했다. 무려 5장 주변이 환했다. 적이 숨어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이쪽으로 와!'

머릿속으로 야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딸싹이지 않고 머릿속 생각을 전달하는 심어였다.

'이건 무슨 무공이죠?'

빠르게 헤엄쳐가며 역시 심어로 물었다.

'캬아! 역시 내 눈은 정확해. 극상품이다, 최상품!'

완초령의 위아래를 훑듯이 살피며 야혼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청초한 얼굴 아래 저런 몸매가 숨어 있을 줄이야.
문득 아래쪽으로 피가 몰리는 듯해, 재빨리 빛을 꺼트렸다. 

'초 사형, 숨 가쁘다! 주머니 줘!'

문득 입을 불룩하게 만들며 완초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순 야혼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했다.

'나빠요.'

얼굴이 화끈거려 그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주머니의 의미는 물 속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귀식대법을…우읍!'

입이 막히면 심어도 보낼 수 없는 것인지, 완초령은 더 이상 말일 잇지 못했다. 또 다시 밀려들어오는 혀에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이번엔 혀뿐만이 아니었다. 등을 껴안았던 손이 온몸을 쓰다듬는 것이었다.

'아, 안….'

엉덩이 골을 타고 미끄러지는 선명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소리를 질렀다는 건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의 입술에 막힌 입에선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부끄럽고 은밀한 곳에 침입한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빠지는 호흡을 견디다 못해 야혼의 혀를 힘차게 빨았다. 그의 왼손은 가슴에서, 오른손은 아래쪽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하-!'

어느덧 허전해진 입안에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있는 곳이 물 속이고, 적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문득 아래쪽에서 움찔거리는 느낌이 들자 부끄러워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배 위에서 보았던 남성임에 분명했다.

'예쁘다, 예뻐 죽겠다. 그런데 막 화가 나려고 해.'

'왜요?'

'이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 놈들이 나타나고 있거든.'

'맞아요! 어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심어를 보냈던 완초령은 깜짝 놀란 나머지 야혼의 목을 더욱 세차게 껴안고 말았다.

'니미럴타불! 연작문주야, 언제까지 살을 비비고 있을 텐가. 적이 왔는데.'

'헤엑!'

번쩍이는 황금빛 머리가 두 사람 눈앞으로 불쑥 나타나자 깜짝 놀란 완초령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공기 주머니 채워서 기다리고 있어.'

재빨리 완초령의 입을 막으며 야혼은 나지막하니 말했다.
완초령은 흠칫 놀랐다. 그의 심어임에도 불구하고 진득한 살기가 서려있었던 탓이었다.
완초령을 올려보낸 야혼은 전면을 노려보며 마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일순 그의 몸에서 새하얀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왔다.
갑자기 터진 빛무리에 전방에서 다가오던 자들이 흠칫 멈춰서는 게 보였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일부러 빛을 만들었던 건, 오지 말라는 경고였단 말이다.'

내심 중얼거린 야혼은 전면을 향해 움직였다.
무풍무영술에 마력이 합쳐지자 물 속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야혼의 신형은 빠르게 움직였다.
갑자기 앞으로 다가온 야혼의 신형을 향해 상대는 길다란 창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그러나, 야차금강무적강마저 끌어올린 야혼의 동체다. 창이 통할 리가 없었다.
가슴팍을 찔렀던 창이 부러지고 명교도 몸에선 붉은 피가 확 번졌다.
동료의 죽음에 화들짝 놀란 명교인들이 흠칫 놀라며 달려들었다.

'불은 물 속에서도 통한다는 걸 확인했단 말이다.'

일순 빙그르르 회전하는 야혼의 몸에서 투명한  불꽃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물 속이라 해서 예외는 없었다. 마력 불꽃에 적중된 적들은 일순간에 내부가 가루가 되어 하저(河底)로 천천히 사라졌다.

'의지로 불꽃을 만들면 얼음인들 못 만들까.'

정신을 집중하자 눈앞에 커다란 얼음 창이 나타났다. 

'더 나와 자식들아!'

재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야혼 앞에는 하나둘 씩 얼음 창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이내 40여 개로 불어났다.

'이걸 이기어검처럼 조정하면 되는 거야. 의지를 가진 얼음 창으로 말이다.'

사방에서 다가오는 명교인들을 보며 야혼은 진득한 살기를 머금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손을 들어올릴 때마다 시체가 생겨났다. 손을 휘두를 때마다, 얼음 창이 박힌 시체들이 하저(河底)로 가라앉았다.
가라앉는 시체들, 떠오르는 시체들. 야혼 주변으로는 무수한 주검이 생겨났다.
그런 현상은 추기영이라 하여 다를 바 없었다. 물 속에서도 음파는 전달되었다.
자신의 머리를 향해 무음항마혈탁을 휘두를 때마다 적은 머리가 부서지고, 피를 토했다.

'니미럴타불! 그러고 보면 육덕칠 그놈이 대단하기는 했어. 이렇게 아픈 걸 놈은 수십 대를 맞았으니….'

눈앞에서 죽어 가는 적을 보며 추기영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세 사람이 없애는 적의 수는 한계가 있었다.
많은 적을 세 사람이 없애고 있지만 상당수는 삼 인을 피해 해룡단 쪽으로 가고 있었다.
쌍방이 치열하게 얽히며 호수 물이 검붉은 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잘린 팔 다리와 함께 몸통을 잃은 목이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소리 없는 전쟁은 고함을 내 지르는 육지의 전쟁보다 더 잔인했다. 마치 숙명처럼 서로를 향해 무기를 뿌리는 자들.

'씨팔!'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야혼은 전력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뭍에 비해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수공이란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마력을 동원하고서야 적보다 조금 빨리 이동할 수 있을 뿐이다.
무작정 적이 있는 곳으로 돌진하며 비천묵령도를 휘두르고 마력으로 만든 불꽃을 쏘아댔다.
몇 명의 적을 죽였는지, 몇 명을 베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식대법으로 멈췄던 숨이 가빠져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하지만 나갈 수가 없다. 해룡단들이 죽어가고 있기에.

'야혼!'

대여섯 명의 적을 없애고 다시 몸을 움직이려는 완초령이 부르는 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렸다.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의 신형이 하나로 합쳐지고 격렬한 숨결이 오갔다.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면서도 야혼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얼음으로 만든 창을 만들어 전방으로 쏘아보내며 끊임없이 발을 내저었다.
답답하던 가슴이 풀어지자 야혼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불로 태우고, 얼음 창으로 찌르고, 비천묵령도로 베었다.
그러면서 해안을 향해 움직였다. 어느 순간, 발끝에 무엇인가 걸려드는 게 있었다. 재빨리 발을 휘저었다. 

'모래?'

일순 야혼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해안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분명 모래였다. 사정없이 바닥을 차며 물살을 갈랐다.
츄아악!
이내 고개가 나오고 몸이 따랐다. 1장 깊이, 어느새 해안 가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가슴 깊이 공기를 들이킨 야혼은 재빨리 재차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여기저기서 시체들이 솟구쳐 올랐다.




좋다는 말,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부상자를 안쪽으로 옮겨라!" 구곡환영진(九曲幻影陣) 구축하라!"

백사장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뾰족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하들로부터 겉옷을 빌려 입은 완초령이었다.

"제길, 지랄발광을 해도 마찬가지구먼…."

주변을 둘러보던 야혼은 나직하니 욕설을 뱉어냈다. 해룡단 무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많은 희생이 나고 말았다.
200중 살아 나온 무인들은 120여명에 불과했다. 80명이 수중 고혼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산에 상륙한 지금부터가 더 위험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해룡단 무인들을 안쪽으로 배치하고 나머지 무인들은 완초령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진을 구축했다.
구곡환영진의 묘용은 공격보다는 수비에 중점을 둔 진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한 배치였다.

"아미타불! 우리가 상륙한 걸 알고 있을 텐데, 조용하네 그랴."

야혼 곁으로 다가오며 추기영이 말했다. 여전히 수어피만 걸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를 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중 전에서 가장 많은 적을 살상한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야혼이나 태웅에 비해 추기영에 의해 당한 자들은 확연하게 표시가 난다.
칠공에서 피를 흘리고 죽은 자들은 대부분 추기영에게 당했다고 할 수 있는데 가장 많이 떠오른 자들의 모습이 그랬던 탓이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겠지. 참! 부상자들은?"

"배 한 척에 태워서 장강으로 보냈어요."

완초령이 야혼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잘했네."

완초령의 어깨를 두드리며 야혼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먼저 보낸 부상자보다 앞으로 생길 부상자들이 더욱 문제였다.
움직일 수 없는 자는 그 자리에 굴을 파고 몸을 숨기고 있으라고 지시를 내려두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날 수 있을지는 장담을 하지 못한다.
피를 많이 흘려 죽을 수도 있고, 적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까지 돌볼 여력이 없다. 이번 전쟁엔 명교만 있는 게 아니기에.

"마옥성의 현 위치는 어디래?"

이번 싸움에도 예외 없이 마옥성은 배후를 노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군산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천의맹 무인들이 상륙한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어요. 우리를 섬에 고립시키고 싶은 모양이네요."

어둠에 잠긴 호수를 보며 낮게 말했다.

"좋아, 시작하자."

 "하오대전은 삼성질풍진(三星疾風陣)을 구축하라!"

고개를 끄덕인 완초령은 하오대전 무인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삼성질풍진(三星疾風陣). 진식의 형태는 삼각형이다.
삼각형의 각 모서리에 진영의 최강자를 배치하여 그를 중심으로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지는,
고수가 부족한 하오대전으로선 최상의 진식이라 할 수 있었다.
완초령의 지시에 따라 하오대전 무인들은 삼성질풍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섬 안쪽으로 향하는 선두는 야혼을 중심으로 육만우를 비롯한 철갑기병대가 자리했고,
왼쪽에는 추기영을 중심으로 사해단과 해룡단 생존자들이, 오른쪽에는 태웅과 소녀차혼대가 진영을 구축했다.
그리고 삼성질풍진의 가운데는 신녀곡 무산신녀대가 들어갔다. 무산신녀대의 대형 또한 특이했다.
안쪽으로 들어간 그녀들은 태극 문양의 배치를 이루는 것이었다.
삼성질풍진을 실질적으로 운용하는 이들이 바로 무산신녀들이었던 것이다. 

"발진하라!"

다시 한번 완초령의 고함소리가 터지고, 진의 중앙 신녀곡 여인들의 몸에서 기이한 기운을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태극 문양의 중심에서부터 솟아 나온 반투명한 기운은, 점점 그 범위를 넓히더니 어느 순간 삼성질풍진 전체를 감싸안았다.

"사제, 여기!"

진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자 완초령은 야혼에게 길다란 물체를 내밀었다.
지금껏 선실에 두었을 뿐 사용하지 않았던 광명도(光明刀)였다.

"쿡!"

광명도를 쌌던 검은 천을 벗겨내며 야혼은 비릿하게 웃었다. 광명도를 든 자를 가리켜 명교인을 구원할 예지자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명교인들 도륙해야하는 사람일 뿐 구원자가 아니다.
거무튀튀한 광채를 뿌리는 광명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야혼은 마음을 굳힌 듯 전면 숲을 향해 외쳤다.

"명교인들이여! 너희들에게 말한다! 군산을 떠나 청해성으로 가라! 
그곳에 가면 성모가 있고, 금불산에서 살아남은 형제들이 있다. 그곳에서 다시 시작해라. 
성모와 함께 아우라 마즈다를 따라라! 너희들에게 버림받고 마옥성에서 태어나야했던 이 야혼의 마지막 자비다.
아수라의 후예이자, 광명도장의 주인으로 내리는 마지막 자비다! 지금 이 야혼은 지옥도가 아닌 광명도를 들었다!"

"아미타불!"

느닷없이 터진 야혼의 외침에 추기영은 흠칫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야혼이 마옥성 출신이란 사실을 스스로 밝혔기 때문이었다.
다시는 기억하기 싫었던 곳, 해서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그곳이 마옥성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가 마옥성 출신이란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만큼 힘들어하고 있다는 의미다.
놀란 사람은 비단 추기영뿐만이 아니었다.
당혹한 얼굴로 해변을 보고 있는 인물, 그는 광명좌사인 섭혼광마(攝魂狂魔) 위종산(魏宗産)이었다.

"놀랍군, 성모나 교주보다 더한 권위를 가진 광명도가 현세했다니."

새하얀 광채를 토해내는 광명도를 보며 위종산은 나직한 침음성을 발했다.
까마득한 시절의 전설, 명교에서조차 광명도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설사 광명도장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자라 할지라도 그 형태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본인 입으로 광명도를 가졌다고 하는 자가 나타날 줄이야.
더구나 그는 명교인에게 버림받은 마옥성 출신이라 하였다.

"하지만, 과거의 전설을 따르기엔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위종산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설사 그가 구원자라 할지라도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수백 년 동안 고통 속에 살아왔던 명교인들, 오직 복수할 날만 기다리며 살아왔다. 아니 복수를 위해 생을 유지했다고 봐야한다.
그런 자신들에게 복수를 포기하란 말은, 죽으라는 것과 같다.
휘황한 광채를 뿌리는 광명도를 보던 위종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명교인들이여. 우린 삶을 원하지 않았다. 오직 복수를 위해 구차한 삶을 연명해왔다.
저자의 말을 믿지 마라, 저자는 금불산에서 명교도를 해쳤던 마옥성의 앞잡이일 뿐이란 말이다. 
공격하라! 지난 세월 쌓인 한을 풀어라!"

"와-아!"

"죽여라! 먼저간 형제들의 혼을 위로하라!"

기다렸다는 듯, 위종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명교인들은 고함을 지르며 해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쿡! 결국…."

허탈한 웃음을 토해낸 야혼은 광명도를 틀어쥐었다. 그들이 떠나리라고 바라지 않았다.
다만 일부라도 배를 타고 떠나줬으면 하는 마음에 말했을 뿐이다.

"이 세상은 지옥이었다. 나에겐 현세가 바로 거짓말의 집이였다."

이번엔 지옥도를 뽑아 왼손에 쥐었다. 그와 동시에 야혼의 전신에서는 백색 운무가 뭉클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오른 손에 들린 광명도는 백색 투명한 광채를, 왼손에 들린 지옥도는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오대전 무인들을 나를 따라라!"

광명도와 지옥도를 번쩍 치켜든 야혼은 고함을 내지르며 전면으로 움직였다.

"삼성질풍진은 전진하라!"

뒤이어 진 중앙으로 들어간 완초령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지고
8백여 명으로 구축한 거대한 진이 천천히 전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휘이익!
진이 움직임이기 시작하자 주변 대기가 급격하게 요동치며 내리는 빗물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300명 신녀곡 여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내공이 삼성질풍진에 의해 가공할 힘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와-아아!"

떼로 몰려드는 명교 무인들을 무심한 눈으로 보던 야혼은 바닥을 차며 솟구쳐 올랐다. 이어 터진 통렬한 외침!

"붉은 색 광채는 혼을 태운다. 적광원혼염(赤光 魂炎)!"

3장 높이에서 엄청난  혈광이 폭발하듯 터졌다. 적광원혼염, 인세에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무공.
죽은 자의 혼백마저 되돌려 보낸다는 광명도가, 명교인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혈광이 장악한 전면 공간 속으로 검은 광채가 점점이 섞여들고 있었다. 야혼의 왼손에 들린 지옥도였다.
오른 손으론 광명도법을  펼침과 동시에 왼손은 지옥도법을 시전한 것이었다. 무당파의 양심신공에 의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크아악! 아아악!"

"아아악!"

붉은 폭풍이었다. 명교인들의 전면을 강타한 붉은 광채는 태풍이었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가루로 변하는 자, 가랑잎처럼 날리는 자, 육신이 조각조각 잘린 자.
단 일수에 50여 명의 명교인들이 이승을 떠났다.
하지만, 야혼의 동작은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재차 바닥을 찍어 솟구쳐 오르며 두 번째 고함을 내질렀다.

"수라의 힘을 지옥을 파괴하고, 자색의 빛은 귀신을 멸하네!"

이번에 검은 선이 먼저였다. 50여 개에 달하는 강기의 선이 촘촘하게 자리하고 그 사이로 자색 기운이 스며들었다.
지옥도법의 2초인 지옥수라파(地獄修羅破)와 광명도법의 2초인 자광귀혼멸(紫光鬼魂滅)이었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았다.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그들을 보며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이기를, 명교도를 죽이는 마지막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황금빛동체로 변한 추기영의 입에서 천수경 독경소리가 나직하니 울렸다. 

데-엥!

뒤이어 무음항마혈탁이 황금빛 광채를 발했고, 빗방울을 가르며 나아가는 선명한 기파(氣波)가 보였다.
그리고.

"끄아악!"

"끄윽!"

나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두 손으로 귀를 감싼 명교인들이 칠공으로 피를 토하며 픽픽 쓰러졌다. 

"아미타불! 수리수리 마수리 수수리 사바하…."

데-엥! 데-엥!

연거푸 울리는 무음항마혈탁의 소리는 죽음을 부르는 진혼곡이었다. 무음항마혈탁이 울 때마다 명교인들의 짚단처럼 쓰러졌다.
선두의 열이 쓰러지면 그 다음 열이 뒤를 이어 쓰러진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서영상과 구칠우의 신형이 쏘아져 나갔다.
장단이라도 맞추듯, 무음항마혈탁이 울고 나면 서영상의 발이 수많은 그림자를 남기고, 구칠우의 도(刀)는 적의 피를 끌어왔다.

"아-악!"

"아운아!"

창에 가슴을 찔러 비명을 지르는 부하를 보며 구칠우는 고함을 내질렀다.
이제 갓 20살인 아이, 해룡문을 강호 제일문파로 만들겠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지원한 녀석이다.

"그동안 행복…."

"으아아! 환살운(幻殺雲)! 환살풍(幻殺風)!"

처절한 고함을 지르며 구칠우는 전면을 향해 내달리며 환영마도법을 펼쳤다. 1초에 이어 2초를 펼치고, 2초에 이어 3초를 펼쳤다.
도풍에 이어 도기가 도기에 이어 도강이 전면을 폭풍처럼 잘랐다. 조각 조작 분시된 명교인들의 시체가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윽!"

문득 아래쪽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밀려들었다. 옆구리를 관통해 들어간 길다란 물체하나, 아운이 당했던 창과 같은 종류였다.

"어림없다 놈! 나는 해룡단의 단주이자 마도천왕 구칠우란 말이다."

창대를 잘라낸 구칠우는 더욱 거칠게 명교인을 유린하고 다녔다.
광포한 고함을 지르며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사람은 비단 구칠우뿐만이 아니었다.
육만우가 그랬고, 서영상이 그랬고, 매난설이 그랬다.
강해지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가족들로부터 인정받고, 타인에게 인정받아 명예를 얻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착각이었다.
부하들의 죽음을 감내해야 하고, 그들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는 자리가 강자의 위치였다.
그들의 마지막 눈빛을, 그들의 마지막 몸짓을 가슴속에 담아야하는 고통스런 자리였다.

"자중해라! 머리는 차갑게 해라. 분노는 형제들과 함께 가슴에 묻는 거다! 그리고…, 전진하는 거다." 

전면에서 들려온 야혼의 나직한 외침에 네 사람은 흠칫 몸을 떨었다. 
뒤쪽엔 아직 수많은 부하들, 그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말이었던 탓이다.

"알겠습니다, 문주님!"

이내 정신을 차린 네 사람은 자신의 위치로 몸을 날렸다.
빠른 속도의 전진, 뿌연 운무에 휩싸인 삼성질풍진은 북쪽을 항해 무작정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적이 나타나면 검과 도를 휘둘러 없앴고, 가로막는 장애물이 나타나면 각각의 무공을 휘둘러 부셨다.
나무가 잘리고, 바위가 부서졌다, 달려드는 명교인들이 죽었다. 그리고 죽어간 동료들의 시체를 남겼다.

"어찌 이런 일이…."

위종산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오밀문 또는 하오문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소천문이라 하였다. 해룡문이라 하였다. 사해표국이라 하였다. 화화방이라 하였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문파와 무인들.
그들에게 1천 명교도들이 쓰러지고 있다. 무음항마혈탁, 여의만병주, 그리고 광명도와 지옥도.
그들은 지옥에서 막 뛰쳐나온 악마였다. 죽음을 부르는 사신들이었다.
목탁이 울면 부하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죽어갔고, 여의만병주가 붉은 광채를 토하면 부하들은 분시가 되어 죽어갔다.
광명도와 지옥도는 부하들의 시체를 남기지 않았다.

"저놈들을 잡아야 한다. 저놈들을! 하호법과 구호법은 나를 따라라!"

전면으로 몸을 날리며 위종산은 사대호법 두 명을 불렀다. 강호 상에는 혈영신마와 뇌정잔마로 이름이 나있는 자들이었다.
위종산의 부름에 한편에서 교도를 지휘하던 두 사람이 나직한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이미 좌사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아 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교도를 이용해 배를 채우려는 놈들, 네 같은 놈들 때문에 명교는 마교가 되었다.
네 같은 자식들 때문에 정마 전쟁이 일어났고, 마옥성이 만들어졌단 말이다.
네 같은 놈들 때문에 저주받은 야혼이 태어났단 말이다!"

광포하게 고함을 지른 야혼은 위종산을 향해 돌진했다.
방어자체를 도외시한 행동.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야혼이 택한 방법이었다. 

"건방진 놈! 우린 복수를 원했을 뿐이다, 복수를…."

"그래, 너는 무림인을 상대로 한을 풀어라. 나는 무림인과 명교, 그리고 마옥성 무리를 향해 한을 풀겠다!"

이어 감정이 격해진 두 사람은 탐색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서로를 향해 돌진하며 양손을 거칠게 뿌렸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머리가 사라진 위종산의 동체가 멀리 날아갔고, 그 뒤를 이어 어육으로 변한 뇌정잔마와 혈망신마의 시체가 따랐다.

"해변으로 가라! 그곳에 가면 배가 있다. 배를 타고 청해로 가라! 그곳에 가면 성모가 있다!"

단 1초만에 위종산을 베어버린 야혼은 더욱 광포한 고함을 지르며 전방으로 내달렸다.
죽고 죽이는 고함소리는 하오대전 진영에서만 있은 건 아니었다.
널따란 평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은침차를 재배하는 차밭이었다. 수천 평에 달하는 넓은 평원은 온통 번쩍이는 광채로 가득했다.
향긋한 냄새가 났던 차밭에서는 진한 혈향이 진동했고, 차밭의 각 고랑에는 피 흘리는 시체들이 겹겹이 싸이기 시작했다.
하오대전이 있는 곳과는 달리 이곳은 진과 진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령무전 무인들은 호랑이가 엎드린 모양이라는 항마복호진을 구축하고 있었고, 
이에 대응한 명교 무인들은 혈무미혼진(血霧迷魂陣)이라는 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진영을 유지하라! 항마복호진(降魔伏虎陣)을 유지하라!"

네 개의 거대한 덩어리 쪽에서 내공이 가득 실린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비를 도외시한 오직 공격일변도의 진이었기에, 령무전의 피해는 엄청났다. 
하지만 령무전 무인들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항마복호진은 와해되기 때문이었다.
동쪽으로 전진해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우자령은 항마복호진을 택한 것이었다.

"마교출현(魔敎出現)!"

네 곳의 항마복호진에서 내공이 가득 실린 고함이 울리고 뒤따르듯 2천 령무전 무인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항마출수(降魔出首)!"

일순 네 곳의 항마복호진에서 백산 광채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진이 만들어낸 거대한 기운이 전면을 휩쓸었다.
그리고 거대한 호랑이가 달려가듯 항마복호진은 그 기운을 따라 무서운 속도로 전진해 나갔다.
항마복호진의 2초식, 무려 2천에 달하는 무인들이 동시에 각자의 내공을 떨쳐내는 광경은 보기에도 섬뜩했다.
바람이 숨을 죽이고, 비가 멈췄다.
그러나 명교인들의 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혈무미혼진(血霧迷魂陣) 안쪽에서 진명의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나왔다.

"1백년 한을 풀리라!"

"혈운만광(血雲滿光)!"

음습한 기운을 머금은 함성소리와 함께 혈무미혼진 선두에 배치되어 있던 5백 명교인들은 일제히 자신의 오른 손 손목을 그었다.
그리고, 주문을 외듯 나직하니 중얼거리며 솟구치는 피를 천천히 뿌려대기 시작했다.
이어 그들 주변으로 붉은 혈무가 솟구쳐 나오고 명교 무인들의 신형을 가렸다. 완전한 혈무미혼진이 발동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속으로 항마복호진을 구축한 령무전 무인들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챙! 챙챙챙!

"크아악! 아악!"

"죽어라!"

"으-아악!"

어둠과, 비, 그리고 혈무 속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생의 마지막을 알리는 비명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나왔다.
멈출 수 없는 자들인 항마복호진과, 1백 년 한을 풀고자 하는 명교인.
서로가 서로를 향해 검과 도를 그리고 창을 찔러 넣으며 죽어갔다.

"밀어붙여라! 멈추지 말라!"

전방을 향해 곤륜선인은 처절한 고함을 내질렀다. 명교도들, 그들은 강했다. 무공보다 정신력이 더 강했다.
설사 이곳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돌진해 들어온다.
설사 눈앞의 적을 없앤다 하더라도 뒤쪽에서 다가오는 적의 칼을 허용하고 만다.
두 명의 명교인이 죽으면 한 명의 령무전 무인이 숨을 거둔다. 죽음마저도 초월한 그들은 결코 약자가 아니었다.
령무전 무인들보다 더욱 강한 자들이었다.

"명교인들이여, 우리들에게 죽음은 곧 축복이다, 노래의 집에서 기다리는 형제들이 있다. 그들을 보러 가는 길이다. 
죽음을, 칼을 두려워하지 말라. 적을 피해 도망쳐야했던 과거를 두려워해야 한다."

혈무미혼진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명교 교주인 구약종이었다.

"물러서지 말라.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칼을 휘둘러라! 아비를 보내고, 어미를 보내야했던 한을 풀어라!"

뒤쪽을 돌아보며 고함을 지르던 구약종의 눈에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광채가 들어왔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뇌전은 결코 아니었다.
녀석이었다. 구원자이자 예지자의 신물인 광명도장의 주인이라 하였다. 

'마옥성 출신이라 하였더냐. 명교와 무림에서 버려진 자식이라 하였더냐. 광명도와 지옥도의 주인이라 하였더냐.
넘어서라, 나를 먼저 넘어서라!'

"떠나라! 배를 타고 청해성으로 가라! 그곳에 가면 성모가 있고, 형제들이 있다. 떠나라!"

"떠날 수 없다 하오대문의 문주여. 떠나기에는 지난 100년 한이 너무 컸다.
그들은 이곳에서 죽기로 하였다. 군산을 무덤자리로 택했단 말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구약종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떠날 수 없다는 말을 중얼거린 사람은 구약종만이 아니었다.

"떠날 수 없다! 놈! 이곳 군산은 너희들의 무덤자리로 정해진 곳이다. 6천 명교도와 3천 천의맹 무인들의 무덤으로…."

일렬로 정박된 하오대전의 배를 보며 유마혼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라! 배를 태워라!"

"존명!"

선실 밖에서 나직한 외침과 함께 수백의 마옥성 무인들이 저마다 통을 메고 하오대전 선박으로 몸을 날렸다.
비단 그쪽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남쪽과 서쪽 해안에서 검은 연기가 비속을 뚫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옥성 전사들이여! 진격하라! 마음껏 인혈을 취해라!"

검은 연기가 섬 주변을 채운다 싶은 순간, 유마혼의 입에서 천둥 같은 고함이 터져나왔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군산에 고립되어 짐승들의 사냥감이 될 거란 말이다! 크! 하하하!"

군산을 보며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던 유마혼의 신형이 선실 천장을 뚫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의 눈에 섬으로 상륙하는 마옥성 무인들의 모습이 잡혔다. 3천, 군산에 풀어놓을 수인들의 숫자였다.

"크아앙!"

최초 수인으로 변이한 무인의 포효소리와 함께 유마혼의 신형 또한 군산을 향해 폭사되었다.
하지만 파도치는 해변에는 유마혼이 끌고 온 마옥성 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옥성 수인들의 모습이 군산으로 완전하게 모습을 감추자 어둠 속으로부터 10척의 배가 천천히 다가왔다.

"클! 마옥성이라…."

배 선수에서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인물.
일자형의 짧은 도를 허리에 차고 있는 그는 마도련에 있어야할 도왕(刀王) 기천세(其千勢)였다.

"형제들, 작업을 시작하세."

"킬! 나는 저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불꽃놀이는 딱 질색이란 말입니다."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선실 이곳저곳에서 무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무복에 일자형의 짧은 도.
기천세를 위시한 그들은 도백회 무인들이었다. 도백회, 단 한번도 무림 일에 나서지 않았던 그들의 첫 등장이었다.

"그럴 순 없지, 지금 회주는 하오대문 무인들을 단련시키고 있으니까.
그들 힘으로 저 곳을 뚫고 나오지 못한다면 하오대문 창설은 포기해야 한다네."

군산을 바라보며 기천세는 낮게 말했다. 자신을 비롯한 도백회 무인 100명은 회주인 야혼이 불러서 온 것이 아니었다.
한 달 전, 태상회주인 이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군산에서 야혼을 만나 천의맹으로 들어가라고 적혀 있었다.
야혼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어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해룡문 무인들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천의맹을 출발 할 때 청성파와 점창파 무인은 데려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비록 그들이 300명에 불과하지만, 하오대전을 구성하고 있는 중소문파 무인들보다는 무공이 강하다.
그런 자들을 두고 왔다는 것은 하오대문 소속 무인들만으로 이번 일을 처리하겠다는 야혼의 의지였다.
그는 지금 명교도를 없앰과 동시에 하오대문의 초석을 다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나서지 못하는 이유였다.

"가세!"

일행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은 기천세가 슬쩍 바닥을 찼다.
일순 그의 신형은 유마혼이 타고 왔던 선박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았고, 뒤이어 다른 도백회 무인들이 따랐다.
잠시 후.
해안 가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도백회 무인들은 마옥성처럼 불을 지르지 않았다. 도를 뽑아들더니 선박을 향해 각자의 무공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검은 강기를 쏟아낸 무인, 붉은 강기를 쏟아내는 무인.
그들의 도에서 흘러나온 색색의 기운은 배를 자르고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닻을 내리고 있던 유마혼의 선단은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가루가 되지 못했던 파편만 떠다녔다.

"출발한다! 방향은 북쪽이다!"

도백회 무인들이 전부 배에 오르자 해룡문 무인들이 힘차게 노를 저었다.
북쪽, 남에서 북으로  횡단해올 하오대문 무인들을 기다려야 할 곳이었다.

"마라환영참(魔羅幻影斬)! 마라환영폭(魔羅幻影暴)! 마라환영멸(魔羅幻影滅)! 혈풍무적강(血風無敵 )! 혈풍무적탄(血風無敵彈)!"

전면을 향해 내달리며 태웅은 광포한 고함을 내질렀다.
왼손으로는 연신 패천마영권을 쳐내고, 왼손이 쉬는 순간 여의만병주로는 철혈무적검법을 펼쳤다.
무음, 무형의 장력이 폭발하듯 터지고 그 사이로 붉은 혈강이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전면에서 밀려오던 수많은 적들이 어육으로 쓰러지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그들보다는 장차 하오대문의 기둥이 될 부하들이 더 중요했다.
한 명 두 명 대열을 이탈해 가는 그들. 다리가 성한 자들은 부축을 받고 달렸고, 다리가 잘린 자들은 낙오되어 남는다.

"아미타불!"

딱! 딱딱딱딱!

"방금 그 소리는 저주파멸음의 광시(狂詩)라 합니다. 이건 사운(死韻)이라 합니다."

따악!

"그리고 이건, 저주파멸음의 마지막 초식인 멸곡(滅曲)입니다. 니미럴 다 뒈져버려라!"

따앙! 따앙! 따앙!
신경질적으로 철탁이 울자 왼쪽에서 달려들던 명교 무인들인 낙엽처럼 쓰러진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추기영은 제 머리에 대고 정신 없이 철탁을 두드려댄다.
더 이상 무음항마혈탁이 아니었다. 그저 피를 머금은 혈탁에 불과했다.
사부님이 했던 말, 혈탁을 만들 팔자라 하였다. 아니 혈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다. 황금빛 무음항마혈탁을 피로 덧칠하고 있다.
철탁에 흐르는 건 자신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와 죽은 명교도의 피다.

"으-아아!"

데-엥!
일순 고함을 내지른 추기영의 몸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거대한 범종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달려라!"

"진을 유지하라!"

전면을 향해 검을 내지르며 육만우가 고함을 질렀고, 환영마도법을 펼치며 구칠우가 고함을 내질렀다.

"호호호! 호호호!"

미친 듯한 여인의 교소가 울렸다. 소녀차혼대, 그녀들의 무기는 1장 길이의 채대였다.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채대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선혈이 빗속으로 섞여 들었다.
웃음을 팔고, 춤을 팔았던 여인들. 그녀들의 웃음소리는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힘을 내라!"

야혼의 고함소리가 들려오자 전방으로 내달리는 삼성질풍진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온 힘을 다해 백사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배를 대라!"

백사장에 도착하자마자 야혼은 전방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해룡문 무인들이 조정하는 배가 이미 도착해 있었던 탓이었다.

"각 조 조장은 각자 맡은바 임무를 다하라!"

빠르게 다가오는 배를 보며 야혼은 재차 고함을 지르며 몸을 뺐다.
지금부터는 하오대전 무인들이 배에 오를 시간을 벌어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태웅과 추기영이 나아가던 몸을 멈추고 야혼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크아앙!

"허미, 빨리 움직이라고 해라!"

수인들의 포효소리를 들으며 야혼은 흘끔 뒤를 보았다. 일렬로 길게 늘어진 배를 향해 하오대전 무인들이 빠르게 승선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옛날부터 느낀 바지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까?"

제법 여유가 생겨서인지 추기영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야혼의 아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게 사람 거냐, 말이나 소지. 아니 말이나 소도 저 정도는 아닐 거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그래 자식들아. 그걸 물건이라고 달고 다니느니, 나 같으면 떼서 개나 준다. 애들도 아니고…."

두 사람의 아랫도리를 쳐다보며 야혼을 혀를 끌끌 찼다.

"쯧! 쯧! 일문의 문주가 됐으면 좀 점잖아 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잉?"

뒤쪽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소리에 야혼은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기천세의 목소리였던 탓이었다.

"백정이 여긴 웬일이래?"

"허! 참! 정말 튼실한 놈을 두셨습니다, 그려!"

하지만 기천세는 야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 추기영과 태웅이 말했던 그놈을 보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옷은 또 뭡니까?"

그랬다. 세 사람은 상륙할 때 입었던 수어피를 지금껏 벗지 않고 있었던 거였다.

"이거, 물고기를 잡느라 입었는데, 바빠서 갈아입질 못했지 뭐. 온다! 그만 배로 가!"

"여기선 제가 도와도…."

"아미타불! 저기 오는 수인들은 우리 몫입니다. 백정 시주는 그만 돌아가십시오."

"좌호법 말이 맞소. 공연히 남의 잔치에 나서지 말고 배로 돌아가시오."

"허, 참!"

기천세는 난감한 얼굴로 삼 인을 보았다. 군산을 가로질러오면서 줄기차게 싸우고 왔던 그들이다.
공연히 나왔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려는 순간 그의 귓전으로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좌호법! 수어피를 입고 싸우면 더 멋있겠지?"

"당연하지. 등의 우람한 근육들이 요동을 칠텐데. 그리고 물건은 연장보다 못하지만 엉덩이에는 자신 있잖는가.
신녀곡 무녀들과 화화방 기녀들이 오줌을 지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게."

"컥! 이러다 내가 주화입마에 들고 말지."

배로 돌아가라 하였던 이유를 알아차린 기천세는 사래 걸린 듯 기침을 토해내고 말았다.
도움을 거절했던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이었다.
아니 수어피를 지금껏 벗지 않았던 이유는 바빠서가 아닐 터였다.
몸매 자랑하려고,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수어피를 입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크아앙!
기천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순간 전면 숲에서 20여 마리의 수인들의 광폭한 기세를 머금고 튀어나왔다.

"전부 내거야!"

"내가 전부 처리하겠네."

일순 추기영과 태웅 두 사람은 서로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수인들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저번에 보니까 수인들 물건 엄청나게 길더라. 하나씩 떼서 달아. 가자고."

경쟁하듯 수인들을 없애고 다니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더니 야혼은 이내 몸을 돌렸다. 

"그냥 놔두고 갈 겁니까?"

"애들 노는데 어른이 끼면 안 되잖아. 참 백정도 애들 수준인가?"

기천세의 아래쪽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어찌 애들하고 비교를 하십니까. 빨리 가시죠."

데엥!

"커억!"

배를 향해 나아가던 기천세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충격에 일순 비틀거렸다.

"크윽! 엄청나군."

기천세는 경악하고 말았다. 1년 전 마도련에 들렸던 그들이란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무음항마혈탁이 보물이라지만 이미 초극의 반열에 오른 자신이 아닌가. 그런데 방금 종소리에 내부가 흔들렸다.

"나 먼저 갈 테니까 애들끼리 놀다와."

안됐다는 눈으로 기천세를 보던 야혼은 마지막 한 척 남은 배를 향해 몸을 날려 버렸다.

"저는 애가 아닙니다!"

힐끗 추기영을 보던 기천세는 고함을 지르며 배로 향했다.
하오대전 무인들을 태운 배는 전부 호수 가운데로 나갔고, 마지막 한 척 남은 배로 오른 야혼은 또 다른 이유로 놀라야 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주님!"

100여 명의 도수(刀手)들이 야혼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험! 이거 모양새가 양 아니구먼. 일어들 나쇼."

어색한 얼굴로 인사를 받은 야혼은 고개를 돌려 기천세를 보았다.

"태상회주께서 소집령을 내렸습니다. 저들은 도백회 최 정예인 예도단(藝屠團)입니다."

"그 양반이 노망났나? 하오대문 세우는 일에 저들을 보내면 어쩌라고?"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사실 도백회를 동원하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육만우나 구칠우가 부하들만 데려오지 않았더라도 도백회를 동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백회를 제외한 새로운 부하들이 들어왔고, 그들을 초석으로 하오대문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들만 데리고 군산에 온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태상회주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군산에서는 도움을 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도단 선두에 있던 한 인물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참! 저는 잡돈(雜豚) 막광(漠狂)입니다. 잡놈으로 불러도 되고, 잡돈 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별호는 누가 지어준 거요?"

본인을 잡놈이라 불러달라는 막광을 빤히 보며 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생긴 건 정말 험했다.
인상만으로 고수반열에 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라고 할 정도로 생김새는 독특했다.

"별호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니요. 너무 어울려서 하는 말이지. 그게 어디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건가. 고사지낼 때도 못쓰겠는데."

"켁!"

"쿡!"

"킬킬!"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친한 사이도 아니고 첫 만남이다. 그런 자리에서 할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광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신임회주를 향해 태연하게 잡종돼지라 불러달라고 했던 그가 아닌가.

"회주님 별호도 흑돈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검은 돼지새끼 말입니다. 
원래 제 별호는 돼지를 많이 잡아서 생겼습니다. 특히 100근 정도 나가는 흑돈 맛은 최고 아니겠습니까."

"어쭈? 잡놈이라고 고기 맛은 아는 모양이네. 맞아. 고기는 뭐니뭐니 해도 돼지가 최고지. 그러고 있지 말고 편히 앉으쇼."

하지만 고개를 든 예도단 무인들은 자리에 앉지 못했다. 비로 인해 젖은 갑판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을 앉지 못하게 한 주범은 다름 아닌 수어피를 걸친 야혼,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아랫도리였다.
부러운 눈으로 야혼을 보던 막광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회주, 그런데 그거 진짜요, 아니면 몽둥이를 따로 집어넣은 거요."

"보여 줘?"

"끄응! 됐소이다. 지금 이 시간부터 회주를 형님으로 모시겠소."

나직한 신음을 발한 막광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물건크기로 야혼이 형님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야 좋지 뭐. 동생이 생기는 건데. 그나저나 저 자식들은…. 미친놈들 지랄발광을 해요."

몸을 돌려 백사장을 보던 야혼은 급기야 나직한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다.
추기영과 태웅은 수인들을 상태로 온갖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수어피가 찢어지는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몸을 디밀곤 하는 것이었다.

"왜 저러는 겁니까? 대물(大物) 형님."

두 사람의 행동이 궁금한 듯 막광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가 보기엔 두 사람의 무공은 자신보다 더 강했다.
그런 자들이 수인들에게 쩔쩔매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된다, 소물(小物) 동생아."

빙긋 미소를 지은 야혼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태웅과 추기영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좌우호법, 배들이 이미 호수 가운데로 나갔네. 자네들의 화려한 모습을 봐줄 사람은 불알 달린 놈들밖에 없단 말이네."

그 순간.

"아미타불!"

데-엥!

"혈풍무적강(血風無敵 )!"

"세상에…."

백사장을 보던 예도단 무인들은 입을 쩍 벌렸다.
황금빛 광채와 함께 거대한 범종소리가 울리더니 추기영 전방에 있던 수인 5마리가 순식간에 가루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길다란 병기에서 쏟아진 붉은 색 광채는 남아 있는 수인들을 어육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펼친 무공의 여파는 20장 떨어진 배에서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으니.

"니미럴타불! 연작문주 신녀곡 처자들이 없다는 걸 이제야 이야기하는가!
세상 하직하고 싶은…, 그런데 여기 떼로 몰려 있는 불알들은 전부 뭔가?"

고함을 지르며 배로 날아온 추기영은 의아한 얼굴로 예도단을 보며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싸우고 있었던 게…. 괴물들이군."

너덜해진 수어피를 보며 막광은 웃고 말았다.
20장 거리를 한방에 날아오는 가공할 고수들이 지금껏 싸웠던 이유가 여자들 때문이라니.
더구나 그는 예도단을 보며 불알들이라 하였다. 회주인 야혼만큼이나 괴물 같은 자들이었다.

"예도단이다. 인사해라. 이쪽은 잡돈이라 부르면 된다. 후진하라!"

두 사람을 소개시킨 야혼은 선저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마지막 두 사람을 태운 배는 천천히 후진하여 2각 정도 지난 후에 호수 가운데 정박해 있는 다른 배와 조우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야혼의 선실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희생자는?"

"철갑기병, 60명 해룡단 50명, 소녀차혼대 50명, 사해단 20명, 총 180명이 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육만우는 차분한 얼굴로 보고했다. 군산에 상륙해서 희생된 숫자만 180명이다.
상륙하기 전 치렀던 해전까지 합치면 300명이 사망했고, 그와 비슷한 인원이 부상을 당했다.
처음엔 부하들의 죽음에 분개했고, 그들의 복수를 위해 무차별하게 적을 도륙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분노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머릿속이 투명하니 맑아지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부하들, 그들을 한 명이라도 구하기 위해선 지휘자가 먼저 침착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겪는 전쟁이었지만 중요한 것을 배웠다.
적을 죽이기 위한 전투가 아닌, 부하를 살리기 위한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의 죽음은 우리 하오대문의 초석이 될 거다. 그들의 이름은 하오대문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전쟁은 없다. 이제부터는 하오대문을 만들어 갈 것이다. 막아서면 부수고 간다. 수하들에게 그렇게 전해라."

"알겠습니다!"

야혼의 눈에서 확고한 결심을 일어낸 육만우 일행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전쟁이 없다는 말. 
무력으로 천의맹을 접수하겠다는 의미였다. 더 이상 하오대전이 아닌, 하오대문으로 거듭나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너무 급한 것 같은데요."

육만우 일행이 전부 나가자 완초령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이곳에서 령무전이 몰락한다지만 천의맹에 남은 자들은 아직 4천에 달한다.
야혼의 말대로라면 그들을 무력으로 눌러야 해야 하는데, 현 상황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초 사형은 그런 걱정말고 어떻게 하면 신녀곡을 탈출할 건지 그걸 걱정해야지. 무림은 나에게 맡겨 둬!"

방긋 미소를 지은 야혼은 완초령을 품안으로 끌어들이며 말했다.

"알고…, 계셨어요?"

몇 번의 입맞춤과 그의 손길 때문이었을까, 자연스럽게 야혼의 품에 안긴 완초령은 울 듯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신녀곡주가 바보가 아니라면 하오밀문 같은 삼류문파를 돕진 않았겠지."

"미안해요. 당신을 도울 방법을 찾다보니…. 그 방법밖에 없었어요."
 
완초령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오비동에서 그가 태을건곤심법을 가르쳐 줄 때 머리에 담고, 두 번째 만났을 때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그를 도와주기 위해 태을건곤심법을 완성했다.
그랬었는데, 그를 도울 수는 있지만 같이할 수는 없게 되고 말았다. 문득 서러움에 와락 눈물이 흘렀다.

"그럼 나에게 맡겨볼래?"

완초령의 눈물을 닦아내며 야혼은 낮게 물었다.

"방법이 있어요?"

이내 표정을 푼 완초령은 잔뜩 기대어린 눈으로 야혼을 보았다.

"우리 하오비동에서 춘서를 공부할 때 말이야. 그 아들 낳는 법이라고 있었잖아."

"아들?"

완초령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아들,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신녀곡주가 되면 반드시 수행해야할 의무를 가짐과 동시에 권리를 가진다.
반드시 수행해야할 의무는 후대를 잇는 것이고, 권리는 부황의 선택권이 곡주에게 있다는 것이다.
부황은 이미 야혼으로 선택을 했고, 그에게서 얻어내야 할 후대는 반드시 딸이어야 한다.
아들의 의미는 그것이었다.

"우선 낙천적인 성격을 가져라."

빙긋 미소를 지으며 야혼은 완초령의 가슴속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으며 말했다.

"음! 규칙적인 관계를 가져야…."

과거에 보았던 춘서를 떠올리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던 완초령은 나지막이 말을 받았다.
무공을 찾겠다며 춘서를 탐독했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엔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춘서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그가 떠난 후에도 상당기간 그것들을 탐독했다.

"여자는 채식을 위주로 하고."

완초령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며 야혼은 말했다.

"남자는 육식을 해야 하고요."

가슴을 그러쥐는 손길에 지그시 눈을 감으며 완초령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깊숙이 삽입을 해야하고?"

"여자가 절정에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싸늘한 공기 때문인지 완초령은  야혼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어느새 야혼의 손길에 의해 상의는 물론이고 하의까지 전부 벗겨져 있었던 거였다.

"깊숙이 삽입하기 위해선?"

"둔부 아래 베개를 넣어야 하는데 당신은 크니까 필요…."

야혼의 옷을 벗겨가던 완초령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입을 닫고 말았다.

"맞아, 베개는 필요 없지만, 초 사형은 절정을 모르니까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고. 뭐해! 하던 일은 마저 해야지."
하의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아래로 밀어내며 야혼은 슬쩍 웃었다.

"어맛!"

아래쪽으로 고래를 숙였던  완초령은 불쑥 튀어나온 그것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얼마 전 옷 갈아입을 때 보았던 그것이 아니었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태웅이 야혼을 부를 때 연장이라 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춘서에서 보았던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아니 평균치란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그럼 초 사형은 가슴이 불편해?"

"그럼요, 달리거나 할 때는 흔들리니까 불편하…. 자꾸 이상한 것만 물어요."

눈을 흘기며 완초령은 불쑥 솟구친 그것을 부드럽게 쥐었다.
놀랍게도 남자가 좋아하는 행동이라든지, 만지면 흥분하는 부위라든지 하는 것들이 술술 떠올랐다.

"초 사형처럼 예쁜 여자만 보면 불편해지지, 특히 이런 가슴을 가진 여자를 보면 말이야."

아래쪽에서 오는 짜릿한 느낌을 음미하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이어 선실 안에서는 열풍이 불어 나왔다. 아직은 미숙하여, 주로 야혼에게 배우는 입장이었지만 완초령은 최선을 다했다.
곡주 자리와 야혼, 둘 다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섬에서 수인들의 살기 어린 포효소리가 진동했으나 그녀의 귓전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을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혼의 가르침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고, 그의 손길을 몸으로 느껴보기 위해 전심 전력을 다했던 탓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책으로만 접했던 남자를 즐겁게 하는 방법을 몸소 실천해야했다.

"왜 저는 못 느끼죠?"

새벽녘, 온 몸이 땀에 젖은 완초령은 제법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밤새도록 야혼의 애무에 몸을 맡겼고 그를 애무했으나, 야혼이 말한 절정의 느낌은 없었다. 
혹시 말로만 듣던 석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났다.

"첫술에 배부른 게 어디 있어.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재차 완초령을 가슴으로 끌어당기며 음흉하게 웃었다. 

"맞아요, 책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어요. 석녀라면 아래쪽이 그렇게 될 리가 없으니까."

이내 배시시 웃으며 야혼의 품속으로 더욱 밀착해 들어갔다. 그의 손길이 재차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으음! 천의맹 이야기 하다가 말았잖아요!"

저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완초령은 놀란 듯 물었다.
천의맹을 접수하겠다는 야혼의 말을 듣다가, 지금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마옥성 수인들이 내일을 대신 해주고 있잖아."

"무슨 말인지 제대로…. 하악!"

좀더 격한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완초령의 반응을 지켜보던 야혼은 그녀가 다시 조금 전 느낌에  집중하려는 듯 보이자 재빨리 이야기를 이었다.

"무슨 말이야 하면 나 같으면 이번 기회에 강호 전역을 쓸어버릴 것 같거든."

"그러니까 마옥성은 이곳뿐만 아니라, 천의맹이나…. 아-아! 기분이 이상해요."

"집중하려 하지말고 마음을 편하게 먹어.
아마 그럴 거야, 천의맹에는 4천의 병력밖에 없고, 선무전주인 청운자는 마옥성 주구니까."

"그럼, 청운자가 반란을 획책한다는 말인데…. 야-혼!"

아래쪽으로부터 짜릿한 느낌이 밀려오자 저도 모르게 야혼의 상징을 틀어쥔 완초령은 앓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그럼 천의맹은 청운자가 대강 정리해 줄 테고, 마도련 쪽은 소소가 정리할 테니까…."

이번엔 야혼이 말을 끊었다. 완초령의 손놀림이 유연하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소소 언니 쪽은 수인을 퇴치할 방법이 있어요?"

조금전과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반응을 관찰하듯 야혼을 빤히 보며 완초령은 물었다.

"여섯 시진만 버티면 되거든,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고 가려와 명지를 그곳으로 보냈으니까 걱정…허억!"

"여섯 시진? 그럼 아직 반나절이나 남았네? 하-아!"

야혼의 모습에 덩달아 달아오른  완초령은 비음을 토해내며 물었다.   
미약하게만 느껴지던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 스스로 야혼의 손 위치를 지시한다는 것이었다.

"어서!"

급기야 완초령의 입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던 마도련이나 천의맹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버렸다.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건, 야혼의 손길이었다.

"처음이라 아플 텐데."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했잖…, 어서!"

두 번째 재촉하는 소리를 들은 야혼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그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악!"

고통에 겨운 비명소리가 선실 가득 울렸다. 좋았던 기분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아픔을 선사한 것은 그놈의 몽둥이였다.





복상사.
          
          
          
의미는 달랐지만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또 있었다. 아니 그것은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수천 수인들이 내지르는 짐승의 포효소리가 청해성 청장고원 하늘을 뒤덮었다.
뿌연 운무에 휩싸인 마도련을 뒤로하고 수인들을 바라보는 수백의 무인들이 있었다.

"많군요."

걱정스런 얼굴로 종마는 냉소소를 보며 말했다. 뿌연 흙먼지를 남기며 달려오는 수인들의 모습은 마치 메뚜기 떼처럼 보였다.

"상관없습니다. 우린 마도련은 천하최강이니까요."

냉소소는 확고한 얼굴로 말했다. 전방에서 몰려오는 수인들의 수는 마도련 전체 인원수와 비슷했다.
하지만, 마도련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세력이 있다.
냉소소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했다.
부련주 유웅창을 필두로 하여 철갑으로 무장한 2백 기병들이 서 있었다.
그들을 가리켜 철마군단(鐵魔軍團)이라 부른다.
내공은 약하지만 강시술과 유사한 외공을 익혀 거의 도검이 불침하는 자들로 철마문이 보유한 비밀세력이었다.

"부련주, 출발하세요!"

"존명!"

철갑으로 무장한 유웅창이 냉소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쪽으로 몸을 돌리며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철마군단은 진격하라!"

"크아아!"

두두두두! 두두두두두!
짐승의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각자의 무기를 뽑아든 철마군단은 전면 수인들을 향해 말을 몰아 뛰쳐나갔다.

"요공은 출발하세요."

철마군단의 모습을 지켜보던 냉소소가 이번엔 요화문 문주 나령을 보며 소리쳤다.
그녀가 이끄는 무리는 요화문의 비밀병기인 나찰마녀대(羅刹魔女隊)는 전부가 차혼강시대법을 걸친 강시들이었다.

"호호호! 나찰마녀들아 나를 따라라!"

사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나령의 신형이 빨랫줄처럼 전방으로 튀어나가고 그녀의 뒤를 이어 3백 나찰마녀대가 소리 없이 따랐다.

"이제 우리 차례가?"

냉소소 곁에서 나찰마녀대의 모습을 좇던 복면인 한 명이 나직하니 말했다. 

"그래요 언니. 우리의 힘을 보여줄 차례지요."

냉소소는 싱긋 웃었다. 세 복면인은 고명지와 당가려 그리고 여호치였던 것이다. 

"련주님! 저희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곳을 지켜주십시오. 오늘 많은 마도련 무인들이 죽어갈 겁니다. 련주라 해서 놀고 있을 수만 없지요."

"빨리 가요, 언니!"

곁에 있던 당가려가 재촉했다. 먼저 나갔던 철마군단이 수인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야지. 마혼사령대(魔魂邪靈隊)는 진격하라!"

당가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냉소소는 뒤쪽을 보며 낮게 소리쳤다.
우우우! 우우우!
귀곡성처럼 나직한 소리, 그리고 흐느적거리듯 전면으로 나아가는 백포인들, 그들은 사황문의 비밀병기인 마혼사령대였다.

"허! 이제 무림은 여인천하로 변하겠군."

마혼사령대 선두에서 허공을 밟으며 나아가는 네 명을 보며 종마는 나직하니 감탄사를 발했다.
한령신공(寒靈神功), 금환신공(金環神功), 혈린만독편(血鱗滿毒鞭), 그리고 무극대라미륵신공(無極大羅彌勒神功).
일인 일인이 천하제일인이었던 겁천십웅, 그들의 무공 세 개가 하나로 뭉쳤고, 거기에 명교 성모의 절세 신공이 합쳐졌다.

"변하는 게 아니고 이미 여인천하가 되었네. 우리도 준비하세.
저들이 얼마나 유인해 줄지 모르지만 나머진 우리가 처리해야 하니까."

종마의 어깨를 툭 친 도마가 뒷면 성벽위로 몸을 날리며 말했다.
거의 3천에 달하는 수인들, 6시진을 버티면 된다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라무연대진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것도 미지수였다.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성라무연대진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테지만 상대는 정신이 혼미한 수인들.
성라무연대진의 환영에 현혹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아라! 마도련 제자들이여. 우리 마도련 선봉엔 언제나 련주님이 있다.
련주님이 있는 한 우리 마도련은 강호 제일문파가 될 것이다!"

"와아! 와-아아!"

우렁찬 함성소리가 터져 나온 곳, 그곳은 성벽 위쪽과 성라무연대진의 생문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3천에 달하는 마도련 무인들 또한 마도련 이곳 저곳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수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아악! 키우!

두두두두! 두두두두!

"철마군단은 중앙을 뚫어라!"

2백 철마군단 선두에서 유웅창은 고함을 질렀다.
1장 길이의 검강이 튀어나온 철장검은 그 어느 때보다 진득한 살기를 머금었다.

"우리 철마문은 마도련 최고 세력이다. 사황문이나 요화문과는 수준이 다르단 말이다."

손수 선봉에 선 이유였다.
마도대전에서 패하여 사황문에 련주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마도련 최고 세력이 철마문이란 자부심은 버리지 않았다.
철마문이 없으면 마도련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다른 문파에게 결코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선봉을 지원했다.

"혈풍무적강(血風無敵 )! 혈풍무적탄(血風無敵彈)!"

전면에서 달려드는 수인들을 보며 양손으로 거머쥔 철장검을 수직으로 내리 그었다.
일순 유웅창의 철장검은 폭풍 같은 살기를 토해냈다.
전방을 가득 채운 붉은 강기 덩어리들은 수인들의 몸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크아악! 아악!"

목이 잘린 수인들은 가루로 흩어졌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수인들은 짐승과 인간의 소리가 뒤섞인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그들을 처리할 시간이 없다. 무작정 중앙을 관통하여 치고 나갈 뿐이다.

"크-아악!"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철마군단의 고함소리가 귓전으로 생생하게 들려왔다.
혼이 없다고 하여 그들을 무혼인(無魂人)이라 부른다.
무공을 익히다 주화입마에 당한 자들이나, 병으로 죽어 가는 자들로 구성한 철마군단. 
명령에 따라 주어진 임무만 수행할 뿐, 그들에게는 인간의 감정이 없다.
다른 문파와 경쟁 때문에 죽음의 안식조차 얻지 못했던 그들이다.
그들을 안식의 세계로 보내주기로 하였다. 그 또한 련주인 냉소소의 제안이었다.
비인간 적인 행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각 문파에서 보유중인 비밀병기들을 수인들과의 전쟁에 소모시키기로 하였다.

"잘 가거라! 형제들이여."

수인들의 손에 목이 뜯기고 몸이 뜯기는 철마군단의 모습에 유웅창은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크아악!

"혈풍무적어(血風無敵御)!"

전면에서 들려오는 수인들의 포효소리에 흠칫 놀란 유웅창은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철장검을 던졌다.
최근 터득한 철혈무적검법의 마지막 초식.
아니 지금은 3초로 명명되었지만 300년 전에는 혈풍무적어는 철혈무적검법의 최후 초식이었다.
강기를 가득 머금은 검을 심령으로 조정한다는 이기어검술이다.
유웅창의 의지를 머금은 철장검은 전면을 누비며 수인들 목을 잘라냈다.
붉은 광채가 번쩍일 때마다 먼지처럼 뿌연 가루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호호호! 

"캬캬캬!"

나령의 웃음소리에 뒤이어 심령을 자극하는 거북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3백 나찰마녀대, 인성을 상실한 그녀들의 힘을 가공했다.
1장 크기의 수인들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녀들의 손은 웬만한 병기보다 날카로웠다. 백색으로 변한 양손을 휘두르면 수인들의 목이 깨끗하게 절단되고 있다. 
마도련 문파 중 가장 약자라고 하였던 요화문이었지만, 나찰마녀대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다섯 문파가 비밀세력까지 동원하여 전쟁을 벌인다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문파는 요화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요화문주인 나령의 얼굴은 편안한 상태가 아니었다. 나찰마녀대 또한 지면으로 몸을 누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잘 가거라! 이제야 너희들에게 보낼 수 있게 되었구나.'

한 방울 눈물을 훔친 나령은 전면을 향해 쌍장을 뿌리며 고함을 질렀다.

"얼마 남지 않았다. 진격하라!"

그녀가 맡은 곳은 철마문 왼쪽, 가능한 많은 수인들을 유인하여 청장고원으로 나가야 한다.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한령신공이 수인들을 향해 작렬했다. 붉은 채찍이 수인들 몸을 녹였다.
황금빛 금환이 수인들의 목을 잘라내고, 온화한 기운은 머금은 광채는 수인들을 가루로 만들고 있다.
천하제일인이라 하였던 종마의 말처럼 네 여인의 무공은 가공했다.
냉소소의 한령신공이 터질 때마다 수인들은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당가려의 혈린만독편이 춤을 출 때마다 수인들은 핏물로 녹아 내렸다.
그리고 황금빛 금환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수인들은 가루가 되었다.
수인들을 가장 많이 격살한 이들은 다름 아닌 그녀들이었다. 하지만 수인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바로 곁에서 동료들이 얼음으로 부서지고, 독에 녹고, 가루로 스러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광포한 포효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크아앙! 

캬우우!

"한옥혈마수(寒玉血魔手)!"

"혈운사파(血雲死波)!"

"환우살( 宇殺)! 환우겁( 宇劫)!"

"현세구복(現世求福)! 만민평안(萬民平安)!"

한령신공의 붉은 얼음덩어리가 전방을 찢어발겼고, 붉은 독강의 파도가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덟 개의 금빛 광채가 수인들의 목을 자르고, 부챗살처럼 퍼진 백색 광휘는 수인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아우라 마즈다여!"

가루로 변한 수인들을 모습에 눈을 흘리며 여호치는 아우라 마즈다를 불렀다.
수인으로 변한 저들 또한 아우라 마즈다를 따랐던 명교인들이다. 
그들은 무림인을 상대로 한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승에서는 아무런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그들은 수인이 되어 복수를 하고 있다.
그런 그들을 성모인 자신 막고 있다. 노래의 집으로 보내고 있다.

"아픕니다. 가슴이 쓰리고, 마음이 아픕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뿌옇게 흐려진 눈에 길다란 입을 가진 낭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침을 흘리는 모습, 이 땅에서 짐승으로 취급당해야 했던 명교인이었다.
짐승으로 취급당하다 정말로 짐승이 되어버린 것이다. 명교인으로 태어난 자의 모습이었다.

"가십시오, 노래의 집으로 가십시오. 그곳엔 슬픔이 없습니다!
그곳엔 고통이 없습니다! 그곳엔 눈물이 없습니다! 오직, 즐거움만 있습니다!"

주문을 외듯, 고함을 지른 여호치의 신형이 허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1장, 2장 , 3장.
허공으로 떠오르는 그녀의 몸에서 백색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여호치의 몸은 온통 백색 광휘에 휩싸였다.
그리고.

"망혼지사(亡魂之死)!"

그녀의 입에서 장중한 외침과 함께 몸을 감쌌던 백색 광휘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극대라미륵신공의 마지막 초식이었다. 
일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달려들던 수인들의 동작이 일제히 멈췄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여호치를 향했다.

"성-모-시-여!"

"아-우-라 마-즈-다여!"

백색 광휘에 휩싸인 수인들의 몸이 머리부터 시작하여 가루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광채에 쏘인 모든 수인들이 성모와 아우라 마즈다를 부르며 가루로 화해갔다.

"궁주님…."

성벽 위에 있는 화소미는 나직하니 여호치를 불렀다. 그녀가 펼치는 무공.
성력과 내공으로 펼치는 망혼지사는 무극대라미륵신공을 완성했다 하더라도 함부로 펼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던 탓이다.
세 번의 망혼지사를 펼치고 나면 그녀는 평범한 여인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수인들을 노래의 집으로 인도하기 위해 무극대라미륵신공을 포기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눈에 두 번째  터지는 성력의 빛이 들어왔다. 또 다시 백여 명 수인들의 몸이 가루로 변했다.

"궁주님!"

급기야 화소미는 아래로 몸을 날렸다.
여호치의 몸에서 세 번째 광휘가 터지는 광경이 목격되었기 때문이었다.

"동생!"

백색 광채를 사방으로 뿌려대던 여호치의 신형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자, 깜짝 놀란 고명지가 그녀를 받아 안았다.

"저는 괜찮아요, 언니. 저들을 노래의 집으로 인도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여호치는 고개를 떨궜다.

"동생!"

"제가 돌볼게요. 저들을…."

여호치를 부르는 순간 뒤쪽에서 화소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화소미를 향해 고개를 숙인 고명지는 그녀에게 여호치를 맡기고 다시 전방으로 나섰다. 
뒤이어 그녀의 전면으로 황금빛 광채가 떠오르고 전면 수인들의 목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마혼사령대는 초원으로 간다! "

선두에서 수인들을 격살하던 냉소소가 고함을 질렀다. 드디어 수인들의 숲을 뚫고 확 트인 공간으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냉소소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절반밖에 남지 않은 마혼사령대 중 다시 돌아올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6시진 동안 수인들을 유인해 다니다 한 명씩 죽어갈 것이기에.

"언니는 저들을 도와주세요. 저는 련으로…."

고명지를 향해 말하던 여호치는 일순 부르르 떨었다. 오른 쪽에서 엄청난 기운이 다가서고 있었던 탓이었다.
묘인과 낭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겪었던 수인들이 아니었다.
원숭이 형상과 늑대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절대자의 그것과 진배없었다.

"뭐라 불러야 하는지요."

둘을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과거엔 살인마권(殺人魔拳) 정치웅(鄭治雄)이라 불렀다. 이 친구는 낭겸(狼鎌) 운천(韻川)이라 불렸고."

"그랬군요."

냉소소는 씁쓸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살인마권과 낭겸은 1백 년 전 마도련에 소속된 무인들이었다.
성모척살대란 영광스런 이름으로 떠났던 그들이 묘인과 낭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수인의 비밀을 알고 있었구나."

낭인 모습을 하고 있던 운천이 그르렁거리며 물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마도련 무인을 1천에 가까운 수인들이 쫓아가고 있었다.
조금 전 마도련 비밀 병기들과의 격돌에서 1천 정도가 당했고, 마도련 본 건물로 돌진하는 수인들은 총 병력의 1천에 불과했다.
마도련 점령이 실패했다는 의미였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신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잠사옹이란 사실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야 했습니까?"

"크릉! 저들처럼…,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꿈을 잃어버린 자들이 가야할 곳으로 가질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운천은 마도련 성벽을 타고 넘는 수인들을 가리켰다. 

"그렇겠지요, 산다는 건 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차가운 눈으로 운천을 보던 여호치는 몸을 날려 1장 가량 물러났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상황.
정치웅과 운천은 겁천십웅의 무공과 겨뤄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유일한 목표가 바로 그것이었다.

"준비하세요? 지난 100년 간 연마했던 모든 실력을 다 토해내야 할 겁니다. 우린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운천을 직시하던 냉소소가 전 내공을 동원하여 한령신공을 운기했다. 
자신들을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도련 원로들보다 더한 강자들이 운천과 정치웅이었다.
일순 백색으로 변한 그녀의 몸에서 차가운 한풍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혈린만독편을 뽑아든 당가려의 신형은 혈운(血雲)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1장 길이의 혈린만독편만 기이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크릉! 안다, 너희들을 이기지 못하면 겁천십웅은 쳐다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콧김을 불어대던 운천의 손가락 끝에서 백색 손톱이 천천히 밀고 나왔다.
한 자 가량 튀어나왔던 손톱이 이내 검은 색으로 물들자 운천은 하늘을 향해 번쩍 치켜들었다.

"크앙!"

살기 가득한 포효를 남기며 운천의 신형이 공간을 단축했다. 경공과는 거리가 먼 움직이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대단했다.
단 한번의 도약의 10여 장 가량 떨어져 있는 냉소소 전면으로 접근해 든 것이었다.

"타핫!"

냉소소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졌다.
가슴으로 모았던 양손을 활짝 펼치자 그곳으로부터 백색 투명한 기운이 운천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갔다.
한령신공의 1초인 한옥백마수였다.

"묵겸마참(墨鎌魔斬)!"

눈앞으로 다가온 백색 투명한 기운을 향해 운천은 거칠게 양손을 휘둘렀다.
손톱에서 흘러나온 검은 색 기운은 냉소소가 쏟아낸 백색 강기를 향해 밀려갔고, 뒤이어 커다란 폭음이 터져나왔다.

"타핫! 한옥혈마수(寒玉血魔手)!"

5장 가량을 밀린 냉소소는 허공을 박차고 튀어 나가며 한령신공 3초를 시전했다.
이미 수인들을 향해 시전한 적이 있지만 한옥혈마수는 대단했다. 그녀의 전면이 온통 붉은 광채로 가득했다.

"크아악! 묵겸마폭(墨鎌魔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운천은 광포한 포효를 지르며 양손을 정신 없이 휘둘렀다.
눈앞으로 가득 채우며 밀려오는 그것들은 일상적인 방법으로 막아낼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앙! 과앙! 과과광!
두 개의 강기가 맞부딪치자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쿵! 쿵! 쿵!

"놀랍군!"

선명하게 찍힌 자신의 발자국을 보며 운천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이번 격돌에서 자신이 밀렸던 탓이었다.
겁천십웅 본인도 아니고, 그의 무공을 익힌 신진에게 밀릴 줄은 결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한번의 물러남이 시작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운천은 알지 못했다.
재차 자세를 취하는 그의 귓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한옥광마수(寒玉狂魔手)!"

"크아앙! 심검(心劒)?"

전면을 가득 채운 죽음의 기운에 운천은 거칠게 고함을 내질렀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무공의 극이라는 심검이라니.
재빨리 지면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정면 충돌은 손해라는 사실을 깨닫고 취한 행동이었다.

"늑대의 몸으로는 절대 심검을 깨칠 수가 없어요. 무공은 인간만이 익힐 수 있기에."

차갑게 소리친 냉소소는 더욱 빠르게 전면으로 나아가며 한옥광마수를 연거푸 펼쳤다.
그를 잡을 방법은 심검밖에 없었고, 내공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혼과 같이 시전한 용봉환락무로 인하여 그녀의 내공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던 것이었다.
정치웅과 싸우는 당가려 또한 다르지 않았다.
혈린만독편의 마지막  초식인 혈운폭풍(血雲暴風)을 연거푸 펼치며 정치웅을 몰아치고 있었다.
혈린만독편이 붉은 광채를 토해낼 때마다 정치웅의 몸은 조금씩 녹아 내렸다.
혈린만독편의 독기운은 묘인의 피부를 녹일 정도로 독했다.

"끼이! 빌어먹을…."

급속하게 회복되는 몸을 보며 정치웅은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자신이 익힌 무공은 권법이다. 요컨대 상대의 면상까지 다가들어야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질 못했다.
혈린만독편에서 나온 독기운은 도저히 접근한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지독했다.
혈린만독편에 의해 생성된 붉은 기운은 불사지체의 몸이라 하여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독에 의해 녹은 피부는 완전하게 재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팔을 희생하고 달려들 수밖에 없군."

왼팔로 혈린만독편을 붙잡은 다음 그 팔이 녹을 때까지는 촌각의 시간이 남은 터이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좋다, 간다!"

일순 눈앞으로 다가온 채찍을 왼손으로 거머쥐며 정치웅은 몸을 날렸다.
치이익!

'걸렸다.'

거리를 좁히는 정치웅을 보며 당가려는 내심 외쳤다. 

"내가 혈린만독편만 익혔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바보야. 가랏!"

낫게 소리친 당가려는 가슴을 활짝 폈다. 그러자 그녀의 전신에서 수백 개의 검은 암기들이 전면을 향해 밀려갔다.
수라만겁천화류(修羅萬劫千花流)였다. 하지만 정치웅의 얼굴은 태연했다.
수라만겁천화류가 엄청난 암기술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몸을 뚫리면 죽어야 하는 일반 무인들이 보는 관점일 뿐이다.
잘린 팔 다리마저 새롭게 돋아나는 수인들에게는 애들 장난에 불과한 무기가 암기인 것이다.

"안됐구나. 수인에 대해 잘 아는 것 같더니."

한꺼번에 뭉쳐진 형태로 심장으로 파고는 암기를 무시한 채 정치웅은 오른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믿는 구석이 있더냐? 끼이!"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당가려를 보며 정치웅은 의아한 듯 물었다.
눈웃음을 치는 걸 보니 복면 안의 얼굴은 웃고 있음에 분명했다. 아니 실제 웃음소리가 귓전으로 들려왔다.

"맞아요 우스워서 웃었어요. 방금 당신 심장으로 들어간 암기에는 제마성검이 들어 있었거든요."

고명지에게 받았던 제마성검을 암기 속에 숨겨 날렸던 것이다.

"끼-익!"

점점 커지는 가슴을 보며 정치웅은 두려운 눈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제마성검이라니, 꿈에도 보지 말아야할 물건을 상대가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허허!"

하늘을 쳐다보던 정치웅의 신형이 가슴부터 시작하여 천천히 가루로 변해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냉소소와 싸우던 운천 또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냉소소의 심검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던 것이다.

"언니 괜찮아?"

냉소소 곁으로 몸을 날려 다가온 당가려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부축했다.
제마성검으로 정치웅을 쉽게 제압한 자신에 비해 그녀는 힘겨운 싸움을 했던 탓이었다.

"괜찮아!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우선 저들을 없애야지."

목으로 차오는 비릿한 느낌을 꿀꺽 삼기며 냉소소는 희미하게 웃었다.
겁천십웅의 무공만으로는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운천은 강자였다. 
야혼을 만나 용봉환락무를 완성하지 못했더라면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저들을 없애고 그가 있는 곳으로 가야해. 천의맹으로!"

힘들어하던 표정도 잠시 냉소소의 얼굴은 환하게 변했다.

"그래요."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두 여인이 마도련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6시진 후. 방어로 일관하던 마도련 상공에 승리의 함성이 터져 올랐다.
수인에서 인간으로 변이한 그들은 더 이상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리측 피해는…."

어두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냉소소는 물었다.
목이 잘린 수인들은 가로로 흩어졌기에, 여기 저기에 쓰러진 자들은 전부가 마도련 무인들이었다. 

"칠 백 명 정도가 당했습니다."

냉소소 곁으로 다가온 종마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수인들의 강함은 진작에 알고 있었고, 대처 방법 또한 인지하고 있었지만 내심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초원으로 떠났던 자들 중 돌아온 이는 몇 명 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린 최선을 다했습니다. 3천에 달하는 수인들과 전쟁에서 마도련을 지켜냈습니다.
시신을 정리하고 장례를 치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천의맹으로 갑니다."

"알겠습니다. 련주님!"

냉소소를 향해 고개를 숙인 마도련 원로들은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다음 날. 마도련 정문을 통해 무인들이 몰려나왔다. 

"저희들은 나중에 따라 가겠습니다."

배웅하러 나온 듯 냉소소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종마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천의맹 근처에 은신하여 계십시오. 도백회를 통해 연락을 하겠습니다. 출발하라!"

그날, 냉소소를 비롯한 5백 마도련 무인들은 천의맹으로 길을 잡았다.
마도련 무인들이 천의맹으로 길을 잡은 그 시간, 옥산에 위치한 천의맹 역시 마도련과 같은 이유로 신음을 앓고 있었다.

"우리측 피해는 집계 됐는가?"

천무전 7층. 잔뜩 굳은 얼굴의 감연청은 제갈상운을 향해 물었다. 기가 막힌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지.
와룡전을 구성하고 있는 오대세가의 본가가 수인들에 의해 유린을 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옴과 동시에 천의맹도 공격을 받았다.
수인, 금불산에서 선무전과 무인들을 공격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들의 능력에 대해선 반신반의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1장 크기에 불사지체라니.
금일 경험했던 수인들은 선무전 무인들의 설명이 오히려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했다.

"1천 명이 당했습니다."

"으음!"

제갈상운의 보고에 감연청은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첫날 전투치고는 너무 많은 희생이 났기 때문이었다.
더욱 황당한 노릇은 수인을 얼마나 없앴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비원 전주가 돌아오면 뭔가 가닥이 나올 줄 압니다."

일행을 돌아보며 제갈상운은 말했다. 
목을 제외한 다른 약점이 있는지를 알아본다며  남천악과 청운자가 수인들을 쫓아갔던 탓이었다.

"그랬으면 좋겠군. 좋소이다, 일단 수하들을 편히 쉬어주도록 하시오. 오늘밤 경계는 천무전에서 서도록 하겠소."

"알겠소이다, 그럼!"

당성을 비롯한 실내에 있던 무인들이 자리를 떴다. 
그 시각.
수인들을 뒤쫓아온 남천악과 청운자는 천의맹에서 남쪽으로 20리 가량 떨어진 옥산 끝자락에 도착해 있었다.

"준비가 철저하군."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수인들을 보며 남천악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지, 옷을 걸치고 나온 마옥성 무리는 십여 명씩 짝을 지어 산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6시진의 시간을 보내고 이곳으로 모여들 것이다.
대부분 마옥성 무리가 빠져나가자 청운자를 남겨두고 남천악은 전면에 보이는 동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굴입구로 다가간 남천악의 귓전에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불호였다.

"쿡! 다시 불심이라도 돌아온 건가! 수천 명을 죽이고서."

동굴 안쪽에 홀로 남은 자는 숭산에 세워진 마옥성 성주였던 광진(廣眞)이었다.

"불심은 아니겠지요. 그냥 연민이라 해 두지요."

안으로 들어온 남천악을 물끄러미 보며 광진을 말했다.
강자, 그에 대한 첫 느낌이었다. 아울러 잠사옹만이 익혔다는 언령제세공의 기운의 그의 몸에서 풍겼다.

"잠사옹이 보내서 온 겁니까?"

"아니오. 내 의지로 왔소. 잠사옹은…, 죽었소."

일순 몸을 부르르 떨던 광진은 남천악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곤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입니까. 그가 정말 죽었단 말입니까?"

"그렇소. 이철상의 목을 잘라 다른 곳으로 보내소이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소."

"내가 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할 것 아니요. 하던 일은 마무리지어야지요."

눈앞의 청년을 돕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수인으로 변해야 했던 명교인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이승에서의 질긴 인연의 끈을 잘라내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마옥성 수인들과 함께 죽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소림사는 완전하게 없앤 거요?"

"아니외다. 일부는 살려 두었습니다. 짐승이면서도 인간의 정을 완전히 끊지 못한 모양이오."

광진은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처음 소림사 산문을 넘었을 때는 그곳의 씨를 말려버릴 생각을 했었다.
대부분 소림 승려들이 죽고, 무공을 익히지 않는 500여 승려들이 남았을 때 방장인 보장이 나섰다.
자신의 죽음으로 소림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진정한 살신성인을 보았던 탓이었다. 과거 자신이 추구했던 삶이었다. 그런 삶을 살기를 원했었는데 오히려 미친 살귀가 되었다.
결국 소림사 모든 건물을 불태우는 것으로 해서 정벌을 마치고 말았다.

"그건 알아서 하시오. 그런데 태산에서 출발한 이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요?"

남천악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아마 내일이나 도착할 것 같소이다. 그들이 오면 천의맹은 더욱 많은 희생이 날 것이오."

"좋소. 그럼 잘 해주리라 믿고 가겠소."

"시주!"

싱긋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리려는 남천악을 광진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나지막하니 말했다.

"내가 광진으로 변했을 때 죽여주시오."

"알겠소이다."

광진을 한동안 보던 남천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죽음을 통해 강호 무림에 경종을 울리려 하고 있다.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잘 해 주리라 믿겠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남천악은 동굴을 떠났다. 

"쿡! 프! 하하하!"

빠른 속도로 몸을 날리던 남천악은 통쾌한 웃음 터뜨렸다. 광진을 만나러 오면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잠사옹이 아닌 자신의 말을 들을지 또한 의문이었는데, 뜻밖에도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잠룡어사대인의 서찰부터 시작하여 모든 일이 원하는 데로 풀려 가는 것 같아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동쪽 하늘을 뚫고 오르는 태양이 자신의 모습처럼 보였다. 중원 무림을 지배하는 천의맹주 남천악.
20리에 불과한 거리였지만 남천악은 점심나절이 돼서야 천의맹에 도착했다.

"어서…."

반가운 얼굴로 남천악과 청운자를 맞던 감연청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얼굴이 어두웠던 탓이었다.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옥산 끝자락까지 갔던 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곤혹스러운 얼굴로 남천악은 말했다. 아직은 그들을 밝힐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당성에게 맹주자리가 넘어갈 때까지는 참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으음! 수고했소. 그만 나가 보시오."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감연청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문득 불안함이 엄습했다. 청운자를  넘어 올라선 자리가 천의맹주고 찬란한 미래를 그렸었다.
구파의 본산이 공격당했을 때도 내심으론 기뻐했다.
천의맹이 더욱 견고해질수록 맹주인 자신의 입지도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그 모든 게 흔들리고 있다.
군산에서 얼마나 살아올지 모르지만 현재 천의맹에 남아있는 무인의 수는 3천5백에 불과하다.
이들 또한 얼마나 살아 남을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빌어먹을…."

마시던 찻잔을 보며 감연청은 나직하니 욕설을 뱉어냈다. 차 기운이 몸 안으로 퍼져 나가자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올랐던 탓이었다.
시시때때로 솟구치는 욕정 때문에 당혹스러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차를 끊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초조해지면서 생활차를 점점 많이 마시기 시작했고, 급기야 농도마저 진하게 하고 말았다.
지금 나타난 증상은 생활차를 걸쭉하게 만들어 마셨기 때문이었다.

"끄응!"

낮게 신음을 지른 감연청은 서둘러 침실로 향했다. 잠시 후, 감연청이 들어간 내실에서는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비를 붙들고 정사를 갔던 감연청이 밖으로 나온 시각은 저녁나절이었다. 
그리고. 어둠과 함께 수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크아앙! 어흥!
전날보다는 덜했지만 검은 어둠과 하께 시작된 수인들의 공격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공격방법 역시 전날과 같았다. 다른 곳은 일절 접어둔 채 오직 천의맹 정문 쪽을 향해 달려들고 있을 뿐이었다.

"성문을 열어라!"

수인들이 100여 장까지 다가 온 순간 감연청은 고함을 내질렀다. 전날처럼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성문을 열어 수인들을 대연무장으로 밀어 넣을 참이었다.
해서 정문에서 대연무장으로 이어지는 길 양편으로는 천무전 무인들을 배치했다.
수인들을 대연무장으로 유인할 미끼로 천무전 무인들이 나선 것이었다.
낭인, 웅인, 호인, 묘인, 원인.
각양 각색의 수인들이 세 개의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고, 천무전 무인들은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아앙!"

"아악!"

또 다시 죽음을 알리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천의맹 건물을 타고 울렸다. 거친 포효를 내지른 수인들은 여전히 강했다.
서너 명이 달려들어서야 간신히 수인 한 마리를 없앨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조금씩 후퇴한 천무전 무인들은 대연무장 안쪽을 통해 빠르게 빠져나갔다.

"와룡전은 오합만상진(五合萬狀陣)을 펼쳐라!"

"선무전 무인은 대천강검진을 펼쳐라!"

기다렸다는 듯 당성과 청운자의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한번의 경험 때문인지,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지만 와룡전과 선무전 무인들의 동작은 신속했다.
두 개의 진에서 쏟아진 경력이 대연무장으로 퍼져나가자, 수인들의 동작이 일순 느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감연청의 목소리가 천의맹을 강타했다.

"정천원 원로들은 진안으로 들어가시오!"

그동안 제갈상운이 연구하여 세운 작전이었다.
1백 명 원로들은 대부분 강기 경지에 올라 있기에 수인들의 목을 단숨에 잘라낼 수 있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감연청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의를 걸친 1백 무인들이 진안으로 몸을 날렸다.

"무량수불!"

무당파 원로인 무량검존(無量劒尊)의 입에서 나직한 도호가 울리고 그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백색으로 변한 검이 수인들 사이를 스칠 때마다 뿌연 먼지가 날렸다. 
이기어검술, 무당파 최고수인 무량검존이 펼친 무공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광검사수의 사부인 태무검존 또한 자색으로 광채를 쏟아낸 검을 던져냈다.
화산제일 신공인 자하신공(紫霞神功) 최후 초식인 자하광성우(紫霞光星雨)였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하늘로부터 자색의 비가 내린 듯했다.
온통 번쩍이는 광채가 폭발할 때마다 수인들은 가루로 흩어졌다.

"더욱 세게 조여라!"

삼존의 무공에 고무된 감연청은 거칠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들뿐만 아니라 1백 명에 달하는 원로들의 검과 창, 그리고 권이 빛을 발할 때마다 수인들은 가루로 흩어졌다.
그러나, 수인들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정천원 원로들 또한 한 명씩 쓰러지고 있었다.
강기를 구사하는 강한 무공을 가졌다지만 매 초식마다 수인들의 목을 잘라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수인은 떼거지로 달려드는 상황.
정천원 원로들이 진 안쪽으로 투입된 지 반 시진이 지나자, 그들 또한 견딜 수 없었는지 진 밖으로 몸을 피했다.
그 다름 투입된 자들은 와룡전과 천무전에 속해 있는 강자들이었다.

"아-아악!"

"크아앙! 아악!"

 정천원 원로들에 비해 무공이 약한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했다.
많은 수의 수인들의 목을 잘랐지만 그들 또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그렇게 수인들의 공격을 받은 두 번째 날은 흘렀고 삼경이 됨과 동시에 전날처럼 수인들은 천의맹에서 멀어졌다.
도망치는 수인들을 쫓아 그들을 격살했지만 완전하게 박멸하지는 못했다.
전사자 500명. 금일 전쟁에서 천의맹이 입은 피해였다.

"헉! 허억!"

엄청난 속도로 여인을 찍어누르는 사내. 간단한 작전회의를 마치고 나온 감연청이었다.

"허억!"

붉게 물든 얼굴, 반쯤 돌아간 눈동자. 정신이 없이 몸을 움직이는 감연청의 상태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자신의 상태가 스스로도 이상했는지 감연청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벌써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여인을 탐했지만, 욕망을 재우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오른 듯했다. 바로 지금처럼.

"헉!"

다시금 밀려드는 욕정에 감연청의 눈동자는 백태를 보이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선 끊임없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 없이 여인을 탐하는 감연청은 지금의 정사가 생의 마지막임 움직임을 알지 못했다.
아울러 제자가 풀어놓은 특제농약을 마셨다는 사실도.
감연청의 죽음은 해가 중천에 올랐을 무렵, 감연청의 노리개가 되었던 시비의 비명소리에 의해 알려졌다.
가장 먼저 맹주실로 들어온 구지경은 시비의 입을 봉하고 각 전에 맹주의 죽음을 알렸다.

"허허! 어찌 이런 일이…."

연락을 받고 맹주전에 도착한 당성은 놀란 얼굴로 먼저 와있던 이들을 보았다. 이유를 묻고자 함이었다.

"그게…. 복상삽니다."

망설이던 홍면개는 결국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신음을 내지른 당성은 제갈상운을 보았다. 홍면개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천의맹의 맹주가, 그것도 전쟁 와중에 복상사를 당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승리할 것인가를 연구해야할 맹주가 아닌가.

'아니지? 이렇게 되면 내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밝아진 얼굴 표정이 들킬까 봐 당성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맹주자리, 다른 때도 아니고 전쟁 와중이다. 맹주의 죽음은 부맹주인 자신이 맹주로 등극함을 의미하는 사건인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우선은 부맹주가 맹주대행을 맡아주셔야 겠습니다. 이미 각 세가 가주들이나 원로분 그리고 홍면개 방주와도 의논이 되었습니다."

"허험! 알겠소이다. 그럼 소생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일행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당성은 수락했다.
맹주가 아니고 맹주대행이란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차차 바꾸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임 맹주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이내 표정을 바꾼 당성은 원로들을 보며 물었다.

"우선 시신은 비원에 모시기로 하고, 수하들에게는 와병중이라 하지요."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청운자가 했다.

"좋습니다. 시신은 저녁에 옮기도록 하고 일단 수인들에 대해 의논해 봅시다."

감연청의 시신을 흘낏 쳐다본 당성은 내실을 나서 맹주전으로 향했다. 

'쿡! 그 자리에 얼마나 있을 것 같나.
네 곳의 가문에서 보낸 자객이 지금쯤 북경에 도착해 있다, 당성. 너의 몰락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맹주전을 향하는 당성의 뒷모습을 보며 남천악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리고 유마혼이 마도련 무인들을 데리고 돌아오면 너의 몰락은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때부터는 이 남천악의 시대가 온단 말이다.'

남천악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하지만 당성을 비웃는 남천악이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마도련으로 가서 냉소소를 없애고 마도련을 장악할 거라 하였던 유마혼은 군산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사실을.





빚 받을 사람은 나야 자식아.



줄기차게 쏟아 붓던 비가 그치고 붉은 해가 불쑥 고개를 내민 새벽녘,
긴 빛줄기가 수면을 비추자 호수는 일순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광채를 쏟아냈다.
호수 물이 붉게 보이는 현상은 비단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군산에서 흘러내리는 핏물,
지난 이틀 동안 죽어간 명교도와 령무전 무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빗물을 타고 호수로 흘러들었던 탓이었다.
두 사람, 붉은 호수를 배경으로 서 있는 그들을 유마혼과 구약종이었다.

"놀랍구나! 잠사옹말고 언령제세공을 익힌 자가 있다니."

구약종은 놀란 얼굴로 유마혼을 보았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과거 잠사옹을 만났을 때와 같았다.

"잠사옹은 별 것 아니었소. 너무 오래 살았지요. 댁도 마찬가지고."

구약종을 보며 유마혼은 비릿하게 웃었다. 언령제세공을 완성하고 가장 만나고 싶었던 자들이 있다면 겁천십웅이었다.
그들을 이기고 천하제일인이 유마혼이란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겁천십웅을 만나게 되었다.
명교와 마옥성 수인들은 대부분 죽어 봐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지금 잠사옹이 죽었다는 말을 하는 게냐?"

구약종은 놀란 얼굴로 유마혼을 보았다. 잠사옹이 길러낸 자로 알았다. 그런데 청년은 잠사옹이 죽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잠사옹은 이미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500년을 살았고, 타인의 몸에 빙의하여 삶을 연장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마법과 무공을  합친 언령제세공을 익혔다.
겁천십웅의 무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무공이 언령제세공이고, 현 강호에서는 언령제세공을 깨트릴 만한 무인은 없다.
자신이 아베스타에 집착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는데.

"그렇소, 목을 잘라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소.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요.
그리고 겁천십웅도 대부분 죽었소이다. 광불과 당신만 남았소. 내일이면 광불만 남게 되겠지만."

"으음! 놀랍구나."

진위여부를 파악하려는 듯, 구약종은 유마혼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잠사옹과 나는 또 다르니라. 강호를 정복하고 싶으면 나를 넘어야 한다. 이 구약종을 말이다."

유마혼의 눈에서 야망을 읽어낸 잠사옹은 태을건곤심법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나에겐 큰 문제가 아니외다. 강( )!"

백색 운무로 모습을 감춘 구약종을 보며 언령제세공상의 강을 외쳤다. 일순 유마혼의 몸은 검붉은 광채를 사방으로 쏟아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아래쪽에서 밀어 올리듯 그의 신형이 천천히 허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럴까?"

덩달아 허공으로 솟구친 구약종은 비릿한 미소를 날렸다. 품속에 부적처럼 간직한 아베스타를 믿었다.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마법적인 현상을 일정부분 제어해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베스타였던 탓이다.
더구나 눈앞의 젊은이는 왼팔이 없는 불구, 불사신체를 갖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아니 언령제세공을 완성했는지 그것조차 불투명한 상태다. 결코 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맞소. 언령제세공은 무적이오. 이렇게, 허(虛)!"

낮게 소리친 유마혼의 신형은 꺼지듯 허공에서 사라졌다. 너무 빨라 마치 눈앞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탓이었다.
하지만 구약종의 대응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일순 허허환환보법으로 18개의 신형으로 변한 잠사옹은 양손을 거칠게 뿌리며 원래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내공으로 만든 사사만화류의 암기는 유마혼을 향해서가 방금 자신이 서 있던 공간을 목표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만큼 유마혼의 신형이 빨랐던 탓이었다.
과과광!
방금 전 잠사옹이 있던 자리에서 날카로운 폭음이 울렸다.

"풍환살(風環殺)!"

폭음과 함께 날카로운 고함이 터지고, 허공 중에서 불쑥 황금빛 환(環)이 나타났다.
금환신공을 바탕으로 잠사옹이 만들어낸 무공이었다.
황금빛 광채를 사방으로 뿌리며 가공할 속도로 구약종을 향해 나아가는 환은 무음이었다.

"기다렸다, 혈향비도류(血香飛刀流)!"

구약종의 양손이 쾌속하게 휘둘러지고 그곳에서 생겨난 검탄강기들은 황금빛 환을 향해 밀려갔다.
과광! 콰과광! 쾅쾅!
끊임없이 폭음이 울리고 그 사이로 유마혼의 고함이 재차 이어졌다.

"하하하! 어떻소, 구약종!"

잔뜩 흥분된 목소리. 구약종의 혈향비도류에 의해 풍환살이 스러지고 있지만 유마혼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방금 시전했던 풍환살은 5할의 힘으로 펼친 무공이었던 탓이었다.
가공하다는 표현이 무색했다. 아니 고금제일 무공이 바로 언령제세공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환(環)의 생성 위치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강한 힘을 끌어낼수록 상대와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상대의 몸 속에서 풍환살의 무공을 펼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건 이철상의 검법에서 나온 무공이오, 우검사(雨劒死)!"

조롱하듯 이번엔 구약종과 1장 떨어진 거리에서 기검(氣劒)을 만들어냈다. 

"놈! 사사만화류(死死滿花流)!"

낮게 소리친 구약종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줄기를 향해 양손을 빠르게 휘저었다.
과거, 잠사옹에게 패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잠사옹은 강기와 심검을 하나로 합친 무공을 사용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잠사옹이 쏟아낸 기운이 몸 내부에서 폭발했다는 사실이었다.
겁천십웅의 다른 자들은 물론이고, 자신 또한 그 때문에 패했다.
완전한 금강불괴지신을 이루어 도검이 불침하는 신체를 가졌지만 내부에서 이어진 끊임없는 폭발엔 견딜 재간이 없었다.
결국 내공이 바닥남과 동시에 금강불괴지신이 무너지자 잠사옹에게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젠 몸 내부를 허락하는 일은 없다. 왜냐면…. 아베스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베스타는 마법을 방어하는 역할을 한단 말이다. 무변무적퇴(無變無敵腿)!

일순 구약종의 품속에서 백색 광채가 폭발한 듯 터지고 그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강한 마력을 접하자 아베스타가 절로 반응하여 나온 현상이었다.

"헉!"

일순 유마혼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느닷없이 구약종의 움직임이 빨라진 것처럼 보였던 탓이었다.

"허(虛)!"

재빨리 의지를 발현하여 몸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구약종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림자처럼 따라 붙으며 열여덟 개의 발이 동시에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타핫!"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오른 정권을 힘차게 뻗었다.
콰앙!
커다란 폭음소리와 함께 유마혼의 신형이 10여 장 뒤쪽으로 밀렸다.

"놀랍군."

경악한 얼굴로 유마혼은 구약종을 쳐다보았다. 방금 일어난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약종이 빨라진 게 아니라 자신의 움직임이 느려진 탓에 공격을 허용했던 것이었다.

"이제야 알았느냐, 네가 시전하는 언령제세공은 반쪽에 불과하단 말이다. 반쪽에 불과한 언령제세공은 나의 상대도 아니고."

낮게 소리친 구약종은 재차 전면으로 몸을 날리며 거칠게 양손을 뿌렸다.
오른 손에서는 비도 모양의 강기가 쏟아져 나가고, 왼손에서는 암기모양의 강기가 쏟아져 나왔다.

"흥! 나에게 마력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면을 가득 채우고 날아오는 강기를 보며 유마혼은 낮게 코웃음을 쳤다. 자신에게는 언령제세공만 있는 게 아니었다.
편후 당보영의 내공을 고스란히 흡수했고, 단전의 내공은 넘치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그리고, 비장의 한 수가 아직 남아 있다. 나만의 비밀 말이다."

길게 심호흡을 한 유마혼은 단전에 잠들어 있던 내력을 끌어올렸다.
일순 검붉은 광채에 휩싸인 유마혼은 오른 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철혈무적검법의 3초인 혈풍무적어(血風無敵御)였다.
구약종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강기검으로 이기어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수십 개에 달하는 백색 투명한 강기와, 검붉은 색의 강기가 두 사람 전면에서 거칠게 부딪쳤다.

휘리링!

스스스! 

너무 강해서 일까, 거력의 부딪침에서는 미약한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멀리 보이는 동정호 수면처럼 두 사람 주변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있는 10장 아래 지상의 상황은 달랐다.
폭풍이라도 불어닥친 듯, 수십 그루의 나무들은 꼭대기부터 시작하여 가루로 흩어지고 있었다.
무려 30여장 공간이 평지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탓핫!"

"이야얍!"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날카로운 고함을 지른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며 자신들의 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군산의 지형이 바뀌고 있었다. 커다란 바위가 사라지고, 군산의 명물이라는 은침차 나무들이 가루로 흩어졌다.

"아미타불! 저것들이 인간이란 말입니까?"

구약종과 유마혼이 싸우는 곳에서 300여 장 떨어진 배 위, 군산을 보고 있던 추기영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려 300장이나 떨어진 곳이 아닌가. 두 사람이 쏟아내는 힘에 의해 파도가 치고 있었다.
그저 놀랍다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둘 다 짐승이라서 그래. 인간이면 저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태웅 또한 추기영과 같은 심정이었는지, 파도치는 수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우리 연작문주도 짐승이란 말입니까?"

"두 말하면 잔소리. 연장은 원래부터 말(馬)이었잖아. 그게 어디 인간이냐?"

태웅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가 있는 곳은 섬에서 살아남은 령무전 무인들이 있는 배였다.

"그래서, 령무전준가 하는 할망구가 그렇게 무시하는가 보네 그랴. 살려 줘도 불만이니 원."

태웅을 따라 고개를 돌린 추기영은 낮게 툴툴거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자가 령무전주였다. 
하오대전에서 동쪽에 배를 대기시켜 놓지 않았더라면 령무전은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생명의 은인이 하오대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보내 자신의 배로 건너오라며 호출을 했다.
추기영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야혼을 대하는 우자령의 얼굴은 결코 고마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야혼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뻔뻔하군, 령무전 무인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이곳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니. 그러고도 전주라 할 수 있는 겐가!"

야혼을 빤히 노려보던 우자령은 느닷없이 고함을 질렀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령무전 무인들이 당하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오대전 무리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만 살겠다며 수인을 피해 호수로 도망을 쳐버리고 말았다.
그랬던 자가 몇 척의 배로 섬을 빠져나온 령무전 무인을 구해줬다며 목에 힘을 주고 있다. 마치 생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주 지금 상황에서는 뻔뻔하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니오.
많이 배웠다는 사람은 다 당신처럼 행동하는 거요. 생명의 은인에게 욕을 하느냔 말이요."

"생명의 은인이라 했느냐? 너희 하오밀문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령무전을 함정으로 빠트린 첩자였다.
너희 때문에 령무전 무인들이 천오백 명이나 죽었단 말이다!"

우자령은 부르르 몸을 떨며 소리쳤다. 배를 준비한 정황으로 보건대 하오밀문 놈들은 수인들의 출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령무전에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우습군. 제 머리가 부족하다는 말을 안하고 또 남의 탓을 하고 있군.
내 한마디만 묻지. 만일 내가  수인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대비하자고 했으면 당신이 응했을까?
아니겠지, 어디 하오밀문 떨거지가 나서냐며 비웃었겠지."

야혼은 비릿하게 웃었다. 고맙다는 말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령무전 무인들의 죽음마저도 하오대전에 돌릴 줄은 몰랐다.

"잘 들어. 천오백 령무전 무인들을 죽인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대가리 속에 명예욕만 가득한 당신 말이야.
우리 하오대전은 전멸위기에 처한 령무전을 구해준 은인이고."

"건방진 놈. 멈추지 못할까!"

벌떡 일어나는 야혼을 향해 우자령은 살기를 흘리며 고함을 질렀다.

"아가리 닥쳐라 우자령. 지금 나는 배를 대기시켜두었던 행동을 엄청 후회하고 있다. 더 이상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네 까짓 령무전이 무서워서, 천의맹 따위가 겁나서 참고 있는 게 아니다."

"허억!"

해쓱하게 변한 우자령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야혼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운 때문이었다.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엄청난 기운. 야혼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에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온몸이 난자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현상은 우자령 곁에 있는 곤륜선인이나 일학자도 마찬가지였다. 경악한 얼굴로 야혼을 볼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지금껏 우릴 속이고…."

우자령은 간신히 입을 뗐다. 하찮은 하오밀문 문주라 치부했고, 그가 익힌 유일한 무공이 투견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자신을 비롯한 곤륜과 공동파 장문인의 몸을 동시에 묶어버릴 정도로 그는 강자였다.

"속인 게 아니다. 너희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한번만 더 하오대문을 무시하면, 자운의 부탁이고 나발이고 천의맹을 없애버린다."

세 사람을 노려보던 야혼은 살기를 풀고 밖으로 나왔다. 이곳으로 출동했던 마지막 정리를 하고자 함이다.
멀리 군산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 구약종과 마옥성 수뇌를 없애야할 시간이었다.
우자령의 배에서 훌쩍 뛰어내린 야혼은 수면 위를 천천히 걸었다.

"아미타불! 지옥도로 할 텐가 아니면 천마묵장으로 할 텐가!"

"둘 다!"

멀리서 들려오는 추기영의 물음에 희미하게 웃었다.

"세상에…."

선실을 나와 야혼을 쳐다보던 곤륜선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겁천십웅 중 최강자인 지옥마제의 지옥도, 그리고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는 천마의 천마묵장이라고 하였다.
고금제일인과 천하제일인의 무공을 소유한 무인이 바로 야혼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무공은?

"중원 최강자군."

끌려가듯 야혼의 머리 위에 둥둥 떠가는 두 무기를 보며 곤륜선인은 나지막이 말했다.

"저자는?"

야혼을 주시하던 곤륜선인은 일순 눈을 빛냈다. 군산 백사장으로부터 야혼을 향해 다가오는 한 인물을 발견했던 탓이었다.
그는 구약종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남천악이었다.

"다행이구나,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어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야혼을 보며 유마혼은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짐승새끼를 피해 도망칠 정도는 아니니까. 그런데 숨겨두었던 한 수를 써먹어서 어쩌나."

유마혼의 왼팔을 가리키며 툴툴거리며 웃었다.
창마의 지시를 받아 마도련을 떠날 때 이미 예견했지만 녀석도 역시 수인이 되어 돌아왔다.

"걱정 마라, 설사 왼팔이 없었다해도 네 놈 정도는 우습게 없앨 수 있으니까."

왼팔을 들어 보이며 유마혼은 말했다. 녀석의 말처럼 숨겨둔 왼팔이 아니었다면 구약종과 힘겨운 싸움을 했을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구약종의 목을 잘라낸 비장의 수가 바로 왼손이었다.

"역시 너는 단순해. 내가 네 앞을 가로막는 이유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는단 말이야. 그저 제가 잘난 줄만 알지."

"쿡! 그래서 그 알량한 재주로 날 막아 보겠단 말이냐?"

"천만에 유마혼 널 막는 게 아니라 죽일 거다. 바로 이 자리에서 가루로 만들어 버린단 말이다!"

지옥도와 광명도를 틀어쥔 야혼은 유마혼을 향해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응!"

유마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야혼의 모습 때문이었다. 구약종에 비해 손색이 없는 몸놀림이었다.

"숨겨둔 수가 있는 모양이구나! "

이내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유마혼은 내심 '허(虛)!'를 외쳤다. 야혼이 다가온 만큼의 거리를 계산하여 움직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헉!"

일순 눈앞으로 다가든 야혼의 모습에 유마혼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좆도 아닌 새끼가!"

짧게 고함을 지른 야혼은 유마혼은 면상을 향해 왼손의 지옥도를 거칠게 휘둘렀다.
지옥도 끝에서 흘러나온 1장 길이의 검은 강기가 유마혼의 몸을 난자하듯 떨어져 내렸다.

"제길! 강( )!"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유마혼은 재빨리 왼팔을 들어올렸다. 당장은 떨어지는 강기를 막아낼 방법은 외팔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과앙!

"우욱!"

머릿속을 파고드는 고통에 유마혼은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팔이 잘리는 게 아니라 뼈가 부러졌던 탓이었다.

"짐승을 잡는 방법은 말이다. 온몸의 뼈를 자근자근 분질러 놓는 거야. 
아마 새롭게 생기는 것보다 내가 부수는 게 더 빠를 거다. 개자식!"

말보다 야혼의 동작은 더 빨랐다. 검붉은 광채를 뿌리는 유마혼의 왼팔을 보며 이번엔 광명도를 횡으로 그었다.

"우검사(雨劒死), 화도멸(火刀滅)!"

오른 팔로 광명도를 막아가며 유마혼은 고함을 내질렀다. 
과과광! 과쾅!

"좆까, 새꺄!"

가슴을 비롯한 온몸으로 쏟아지는 강기 세례를 받으며 야혼은 소리쳤다.
야차무적금강을 극한으로 일으킨 자신의 몸은 유마혼의 몸과 다를 바 없다.
와작!

"우욱!"

오른 팔이 부러지며 극심한 고통이 밀려들자 이번에도 역시 유마혼은 나직한 비명을 내질렀다.

"어떻게 언령제세공의 약점을?"

정신이 없었다. 완벽해 보이는 언령제세공이라지만 약점은 분명히 있었다.
정신집중을 하지 못하면 원래 위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무공이 바로 언령제세공이었던 것이다.
놈은 그 약점을 알고 공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냐고? 나 또한 마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언령제세공! 웃기지 마, 임마."

낮게 소리친 야혼은 더욱 거칠게 달려들었다. 끊임없이 놈을 부셔놓을 참이었다.

"건방진 놈! 풍환살(風環殺)! 무영창(無影槍)!"

끊임없이 수반되는 고통을 무시하고 유마혼은 정신을 집중했다.
모든 무공이 심검수준인 언령제세공은 팔다리가 필요한 무공이 아니다.
명경지수처럼 정신만 맑다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무공인 것이다.
고통을 무시한 효과가 있었는지 엄청난 기운이 유마혼과 야혼 사이로 들어찼다.
두 사람 사이에 들어찬 검붉은 광채는 심검의 기운이 형상화 된 형태였다.

"지옥수라황(地獄修羅晃)!"

아래쪽에 머물렀던 지옥도를 들어올리며 야혼은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심검엔 심검으로 대항하는 방법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일순, 백색으로 변한 야혼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와 전면을 항해 밀려갔다.
찌이익! 찍찍!
더 이상 초식 싸움이 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펼치는 무공은 의지로 펼치는 심검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주변의 호수 물이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호수는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화도멸(火刀滅)! 빙수격!"

"적광원혼염(赤光 魂炎)!"

재차 이어지는 고함소리. 유마혼은 불과 얼음의 기운으로 심검을 펼쳤고, 야혼은 광명도법 1초식을 펼쳤다.
호수 바닥에 있던 바위들이 가루로 흩어지고, 밀려났던 호수 물은 수증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급기야 두 사람은 심검대결을 넘어 내공을 겨루는 상태로 들어섰다.
하지만 일반 무인들의 내공대결과는 차원이 달랐다. 심검 기운을 이용한 내공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넋을 잃은 사람들.
배에서 두 사람의 대결을 천의맹 무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령무전 무인들은 놀라움을 너머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놈이?"

찢어질 듯 두 사람을 쳐다보던 우자령은 앓는 듯 신음을 뱉어냈다. 
200여 장이 떨어진 곳이라지만 내공을 집중하면 두 사람의 싸우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둥글게 밀려난 호수 물이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수증기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천의맹은 아무것도 아니라 하였던 놈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투견공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펼치는 무공은 투견공이 아니다.
심검(心劒), 오직 전설의 경지라 여겼던 그 무공을 펼치고 있다.
꿈인가 싶어 연신 눈을 비볐다. 잘못 보았나 싶어 전 내공을 끌어올려 눈에 집중했다.
그러나, 결코 꿈일 수가 없었다.
높은 파도 때문에 배가 출렁이고 있고, 주변에 령무전 무인들이 감탄사를 발하고 있다.

"허허!"

힘이 풀린 우자령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발가락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던 야혼이 심검을 터득한 고수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 자를 모욕하고 무시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을 보며 녀석은 즐겼으리라. 강자의 여유로.

"죽일 놈!"

문득 맹렬한 살의가 솟구쳐 올랐다. 놀라움보다 그동안 속았다는 사실이 더욱 기분이 나빴다.

"천한 하오밀문 문주 놈이 감히…."

야혼을 바라보며 욕설을 뱉어내던 우자령은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래쪽에서 진득한 살기가 밀려들었던 탓이었다.
벌떡 일어나 선수로 다가간 그녀의 귓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입을 꿰매버리겠습니다, 시주! 참는 것도 한계가 있소이다."

속삭이는 것처럼 말하는 추기영의 목소리는 령무전 무인들이 타고 있는 모든 배로 퍼져나갔다. 

"건방진 놈!"

데-엥!

"커억!"

귓전을 강타한 범종 소리에 우자령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내부에 충격을 받은 듯 그녀의 얼굴은 해쓱하게 변했다.

"우엑!"

내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그녀는 결국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하고 말았다.

"니미럴타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생명의 은인을 욕하는 건 짐승밖에 없다고 했소이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소. 그런 짐승들은 극락으로 빨리 보내야 한다고 말이오."

"선인 뭐하고 있소. 저놈을, 저놈을…."

"그만하시오, 전주. 저들의 말이 틀리지 않소이다.
우리 목숨을 구해준 이들은 하오밀문이오. 나는 하오밀문 문도에게 감사하고 있소이다."

언짢은 얼굴로 우자령을 보던 곤륜선인은 선수가 다가갔다. 그리고 추기영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곤륜을 구해 주었는데 고맙단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경황 중이라 그랬으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구려."

그 뿐만 아니었다. 공동파 장문인인 일학자 역시 추기영과 태웅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당신들…. 우엑!"

울화가 겹쳤던 탓인지 우자령은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문주!"

곁에 있던 무정신니가 재빨리 우자령의 등에 양손을 밀착시켰다.
자칫 잘못하다간 주화입마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던 탓이었다. 

"아미타불! 구제불능이군요. 하여간 난 할망구 시주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 하오대문을 자극하지 말라고. 우리 문주가 화를 내면 말입니다, 무림은 멸망합니다.
지금 저 모습이 우리 문주의 본 모습입니다."

추기영은 손을 들어 군산을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야혼과 남천악이 서서히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백색 광채를 뿌리는 길다란 막대기가 놓여 있었다.

"유마혼! 지금 우리 이것이 뭘까?"

"헉!"

느닷없는 야혼의 말에 유마혼은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심검의 기운으로 내공 대결을 펼치고 있는 상황. 
결코 말을 뱉어낼 상황이 아닌 것이다.
조그마한 허점만 생겨도 심검의 기운은 그 틈을 파고들어 상대를 가루로 만들어 벌인다.
그런 와중에 말이라니. 하지만 유마혼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야혼은 말을 이었다.

"이 앞에 있는 건 말이다, 천마묵장(天魔墨杖)이라 불렀다. 마도련에 있었으니까 천마묵장이 뭔지는 알지?"

일순 유마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천마묵장이라니,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는 천마의 유물을 녀석이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천마묵장은 상당히 눈에 익었다.
확인이라도 하듯 천마묵장을 쳐다보는 유마혼의 귓전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천마묵장의 또 다른 이름은 광명도장이다. 명교 예지자의 신물 말이다."

"허억!"

일순 유마혼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일생 일대의 실수였다.
심검을 펼치고 있는 상태에서는 가장 중요한 건 내공의 대소가 아니라 누가 얼마나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광명도장이란 말에 유마혼의 평정심은 급격하게 흔들렸고,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검붉은 기운에 틈이 생겼다.

"캬아악!"

짐승의 포효인 듯 처절한 비명소리가 유마혼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벌어진 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심검의 기운은 복부를 관통하여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백색 광휘를 발하던 물체가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빌어먹을…. 어쩐지 눈에 익는다 했더니."

심장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광명도장을 망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천마묵장이 눈에 익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잠사옹의 거처에서 보았던 그림. 명교의 선신인 아우라 마즈다의 신물이고, 아수라의 신물이라 하였다.

"빌어먹을…."

심장에 박혀 빙빙 돌고 있는 광명도장을 보며 유마혼은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빙빙 돌아가는 광명도장에서 흘러나온 백색 광채는 점점 영역을 넓혀가며 몸을 가루로 만들고 있다.
놀랍게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마혼, 빚은 말이다, 내가 받아야 해. 빚을 진 놈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란 말이야. 빚을 받는 데는 내가 선수고.
참 한가지만 물어보자. 잠사옹은 어떻게 됐냐?"

"쿡! 그건 버러지 네가 알아내야지."

"그걸 머리라고, 죽었잖아 임마. 이제 남은 놈은 남천악과 천의맹 몇 놈인데…. 정보, 고맙다."

싱긋 미소를 지은 야혼은 몸을 돌렸다. 커다란 성과를 거둔 출정이었다.
유마혼을 잡은 것보다 구약종의 죽음은 더욱 의미가 크다.
명교의 실권은 다시 여호치에게 돌아왔고, 더 이상 강호를 향해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마교가 아닌 명교가 되었기에.

"크아악!"

마지막 처절한 비명소리를 끝으로 유마혼의 신형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유마혼의 신형을 가루로 만든 광명도장은 천천히 허공을 날아 야혼 뒤를 따랐다.
뎅! 뎅! 뎅뎅뎅! 뎅뎅!
하오대전 선단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야혼을 웅장한 범종소리가 반겼다.
선단의 선두 수면 위에 서 있던 추기영이 무음항마혈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오대문! 하오대문! 하오대문!"

뒤이어 선박에 있던 무인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첫 전투에서 많은 동료를 잃었다.
하지만 전면에서 다가오는 야혼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들어라!"

흠모의 눈으로 야혼을 보는 그들의 귓전에 천둥 같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우린 저기 보이는 군산에 많은 동료를 묻었다. 왜 그들이 죽었는가! 왜 그들을 묻어야 했는가!
내가 약했고, 그대들이 약했기 때문이다!
소천문이 약했고, 사해표국이 약했고, 화화방이 약했고, 해룡문이 약했고, 하오밀문이 약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는 분명 그랬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동료들의 죽음 속에서 우린 하오대문으로 거듭났다. 강호 제일 문파로 거듭났단 말이다!
이 야혼을 믿어라. 선봉은 언제나 내가서겠다. 여러분들은 내 등만 책임지면 된다. 할 수 있겠는가!"

데-엥!

"할 수 있습니다!"

데-엥!

"해 내겠습니다!"

데-엥!

"목숨을 걸겠습니다!"

하오대전 무인들이 있는 배들은 광란의 도가니였다. 여자 남자가 따로 없었다.
신녀곡 여인들조차도 야혼을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다.
결코 야혼이 매끄럽게 말을 잘해서가 아니었다. 언제나 선두에서 싸웠던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한 명의 부하를 살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그의 모습은 남은 하오대전 무인들을 하나로 묶고 말았다.

"천의맹으로 돌아간다!"

야혼의 외침을 끝으로 하오대전 선단이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영감! 당신이 원했던 하오대문은 내가 세울 것이오. 이 야혼이 말이오."

구약종의 시신이 있을 군산을 보며 야혼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기, 문주…."

"아이고 죽겠네."

등뒤에서 완초령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그래야 하는 것처럼 야혼은 털썩 주저앉았다.

"오빠!"

해쓱해진 완초령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야혼을 불렀다.

"거봐! 어렵지 않잖아!"

"괜찮은 거예요?"

"아이고 죽겠네. 그 자식은 정력제를 얼마나 먹었기에 그렇게 힘이 센지. 아이고!"

"오빠!"

"그럼 괜찮지. 오빠 소릴 들으니까 힘이 벌떡 벌떡 난다. 오빠 소리가 정력제다."

"장난하지 마세요. 걱정했잖아요."

일순 안도의 숨을 내쉰 완초령은 야혼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얘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이냐? 유마혼은 겁천십웅보다 더 강자였어, 임마."

실상 야혼이 웃고 있긴 하지만 그의 몸은  그다지 편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의 정신상태를 무너뜨리지 않았더라면 힘겨운 싸움을 될 뻔했다. 유마혼은 그만큼 강자였다.

"그럼 당분간 아들 만드는 공부는 못하겠네?"

야혼의 귓전에 대고 완초령은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 소릴, 그거하곤 전혀 상관없다. 이 놈은 내 의지완 상관없이, 제 혼자 노는 녀석이라고."

"킥! 이젠 어떻게 할거죠?"

낮게 웃음을 토해낸 완초령은 이내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하오대문의 야망을 령무전 무인들에게 밝혔기에 하는 말이었다.

"또 오빠란 소릴 빼먹는다. 해봐!"

"오빠!"

"역시 듣기 좋아. 우선은 개방이나 도백회를 통해 마교 교주의 죽음도 알려야지."

"그럼?"

"그렇게 되면 강호에 남은 세력은 마옥성과 천의맹 아니냐. 마도련도 당한 것으로 했으니까.
그런데 남천악은 마옥성의 주인이란 말이야. 천의맹 비원 전주이기도 하고."

"아! 남천악 스스로 수인을 정리하게 하려고?"

완초령은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남천악의 입장에서 보면 수인들은 이용할 대상일 뿐, 보살펴야할 자들은 아니다.
마교의 교주가 죽은 이상 강호 전쟁은 끝났다고 봐야하고, 남천악은 한 가지를 선택할 것이다.

"맞아, 녀석은 영웅이 되어야 해. 그래야 천의맹을 접수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죠?"

완초령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남천악이 천의맹을 접수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감연청의 죽음을 모르는 그녀로선 당연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야혼은 싱긋 웃기만 할뿐이었다.

"아들을 낳기 위해선 낙천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고 했잖아.
초 사형은 복잡한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아들을 낳을 것인가 그것만 생각하는 거야.
일은 이 오빠에게 맡기고. 혹시 신녀곡에 좋은 약 같은 것 없어?"

"천의맹에 돌아가면 곡에 사람을 보낼게요. 그런데 얼마나 가져오면 되죠?"

"낙천적인 생각을 하라고 했지?"

"알았어요, 전부 가져오라고 할게요. 하나도 남김없이."

"암만, 그런 게 낙천적인 생각이란 거야. 머리통을 굴릴 필요가 없어.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하는 거야. 생각나는 대로. 음! 일단 들어가자."

잠시 후, 배 상층에 마련된 선실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닫혔다.

두 사람이 이야기했던 영웅은 천의맹에서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몇 사람이 작당하여 영웅을 만드는 건 참으로 쉬웠다.
더구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수인들임에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동정호를 출발한 하오대문 무인들과 마찬가지로 옥산 천의맹 또한 축제 분위기였다.
수일에 걸친 수인들과의 전쟁이 승리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감연청을 비롯한 2천에 달하는 엄청난 희생이 났지만 결국엔 천의맹이 승리자가 되었고, 살아 남은 자들은 영웅이 되었다.
특히 남천악의 공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며칠 동안 수인들을 뒤쫓아 다닌 끝에 약점을 알아낸 사람이 그였다. 
더하여 수인들을 퇴치할 때 보여준 그의 무공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고, 
급기야 각 세가 가주들의 추천을 받아 비공식적이지만 천의맹 부맹주로 올라서게 되었다.

"어서들 오시오!"

천무전 맹주실, 얼마 전까지 감연청의 처소였던 이곳에서 잔뜩 들뜬 듯한 흘러나왔다.
맹주 대우로 천의맹을 이끌고 있는 당성이었다.
절반 이상의 부하들이 죽었지만 당성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기조당과 개방, 두 곳을 통해 접수된 내용 때문이었다.

"군산에서 마교 교주가 죽었다는 연락이 왔소이다. 아군도 많은 피해가 났지만 령무전 또한 승리를 했다고 합니다."

마교 교주의 죽음은 전쟁의 끝을 의미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 함은 사천당문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뜻한다. 아니 가주인 자신의 시대가 온 것이다.

"마교 교주를 없앤 자가 누구라 합니까?"

남천악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교 교주는 구약종이다. 겁천십웅의 일인인 그를 없앤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글쎄요, 신분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하더군요. 양패구상해서 알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혹시 화공을 사용한다고 하지 않던가요."

"부맹주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소이다, 형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렸지만 마교 교주와 동귀어진 했던 그자는 극에 이른 화공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마교라는 곳이 원래 불을 숭상하는 곳 아닙니까."

얼버무린 남천악은 내심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가장 우려했던 자, 금불산에서 보았던 성천화를 만들어냈던 자가 분명했다.
결국 마교는 내분으로 멸망한 것이리라.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우선 한잔하도록 합시다."

"무슨 소립니까, 맹주! 지금 밖에는 수천 수하들의 죽음 때문에 통곡 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소이다.
그리고 아직 성모가 남았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오?"

청운자의 고함소리에 화기애애하던 실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허허! 말이 과하십니다. 많은 희생자가 났지만 우린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부하들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도 분위기를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편한 듯 당성은 청운자를 보며 말했다.
전쟁의 끝은 언제나 처절하고 힘들다. 하지만 언제까지 실의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같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부하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게 지휘자로서 할 일인 것이다.

"제 말은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란 말이외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성모를 따르는 무인은 3백에 불과하다 했소이다.
그들을 걱정할 정도로 천의맹은 약하지 않소이다. 정 그들이 걱정되면 선무전이 출병하도록 하십시오.
이번 전쟁에서도 가장 피해가 적었던 곳이 선무전 아닙니까. 금불산에서 처럼요"

당성은 비아냥대듯 청운자를 보며 말했다.
이번 전쟁으로 분명하게 밝혀진 사실이 있다면 청운자가 이끄는 무당파는 더 이상 무림의 태산북두가 아니었다. 
죽음을 피해 이리 저리 도망 다니는 비겁자 집단에 불과했다. 당성은 그 점을 꼬집은 것이었다.

"닥치시오, 맹주. 지금 맹주의 발언은 우리 무당파에 대한 모욕이요. 그 말에 책임을 지셔야 하오이다."

"화를 내는 걸 보니 찔리는 구석이 있는가 봅니다."

청운자를 보며 당성은 비릿하게 웃었다. 금불산 이야기를 꺼낸 건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지리멸렬해진 구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될 청운자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강호를 재건한 사람은 동창제독을 등에 업고 있는 자신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찔리는 구석이라뇨? 빈도는 전혀 그런 것 없소이다. 아무려면 조카딸을 팔아먹은 사람만 하겠습니까.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보시오. 언청이이고 사팔뜨기인 사내에게 딸을 주겠느냐고 말이오.
백이면 백 고개를 흔들 것이오!"

"허허! 청운자께서는 말이 과하십시다. 그나마 그 덕에 우리 천의맹의 미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동창제독이 돈줄을 끊어버리면 우린 거지가 됩니다. 길바닥으로 나 앉아야 한단 말이지요."

보다못한 듯 앞으로 나선 남궁장순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하지만 그의 말을 교묘했다.
언뜻 듣기엔 당성에게 천의맹 미래가 달려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포된 의미는 전혀 달랐다.
당가려가 없으면 맹주자리도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말이었다.
남궁장순이 한 말의 의미를 당성이라 하여 모를 리가 없었다.

'두고 봐라. 어차피 너희들은 고개를 숙이게 되어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당성은 이를 갈았다. 돌아가는 상황이 대강 짐작이 갔다.
와룡전 세가와 무당파가 합심하여 사천당문을, 아니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사람인 이상은 먹어야하고, 먹기 위해선 나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

"맹주님!"

애써 노화를 가라앉히고 있을 때 제갈상운이 들어오며 당성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서찰이 왔습니다."

"서찰? 오호, 동창제독이 깨어났나 보군."

비단 천의로 곱게 쌓인 서찰을 보며 당성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적절한 순간에 도착한 서찰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만끽하며 당성은 서찰을 펼쳐 들었다.

"허억!"

당성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창제독, 사(死)!'

"어찌 이런 일이…."

손에서 서찰이 흘러내렸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동창제독이 죽다니, 천의맹 맹주자리를 안겨 주었던 그가 죽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쉬고 싶소이다!"

따가운 시선에 흠칫 정신을 차린 당성은 바닥에 떨어진 서찰을 주어들고 내실로 향했다.
          





밤의 황제 야혼(夜魂)



동창제독의 죽음이 가져온 파급효과는 컸다.
맹주 대우 당성과 관련된 모든 일정은 취소되었고, 천의맹 수뇌부는 조심스럽게 황실을 주시했다.
동창제독의 죽음과 함께 새롭게 등장할 권력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알아보았는가?"

맹주전. 얼굴이 반쪽으로 변한 당성은 안으로 들어온 제갈상운을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다른 수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최대 관심사는 황실이었다.
동창제독이 죽었지만 그가 키운 자들은 상당히 남아 있다.
그들에게 황실 권력이 이양된다면 고명필에게 시집간 당가려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터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되리라 확신했다.

"잠룡어사대인입니다."

"무슨 소린가, 잠룡어사대인은 동창제독을 밀어주는 사람이었는데, 혹시…."

당성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 고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토사구팽이라기 보다는 두 사람이 암투를 벌인 모양입니다."

"그럼 동창제독이 천의맹에 온 건 그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동창제독 고명필의 암살에 와룡전 세가들이 관련되었다고 합니다."

"죽일 놈들."

당성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남궁세가를 비롯한 네 곳 세가의 자제들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고 여겼었는데 결국 그 때문이었다.

"잠룡어사대인이 그들을 사주했다고 하더군요. 지금 황실은 잠룡어사대인 차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으음!"

당성은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잠룡어사대인의 사주로 일을 꾸몄다면 그들을 처단할 수도 없다.
정식 취임도 하지 못하고 맹주자리를 물러나게 생긴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맹주님께 남은 건 재산밖에 없습니다. 그걸로 협상을 시도해 보십시오."

"모든 걸 다 털어 넣으란 말인가?"

당성은 곤혹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동안 감연청에게 만들어 준 대부분의 돈을 네 가문에서 충당했고, 당문의 재산은 최대한 아꼈다.
전쟁이 끝난 후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제 생각일 뿐입니다. 각 문파들은 불타버린 본산을 세워야하고 세가들 또한 마찬가지니까, 천의맹에 가장 필요한 건 자금이지요."

"쿡! 좋은 말이군. 하지만 그렇게 맹주자리를 보존한다고 해서 누가 나를 따르겠나. 공연히 꼴만 우습게 되는 거지."

"맞아요, 숙부. 음모로 형님을 몰아낸 사람은 가주 자격은 물론이고 맹주자격도 없어요."

맹주전 입구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당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보퉁이를 안고 있는 당가려였다.

"무슨 말이냐?"

제갈상운을 흘끔 쳐다보며 물었다. 음모로 형님을 몰아냈다는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가주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나셨던가요."

고명지와 함께 마도련을 떠나 개봉에 들렀다. 하오대문 건물을 만들고 있는 그곳에서 그분을 만났다.
그동안 찾아 헤맸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자식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들었다.
사건의 시작은 검독인의 죽음이었다. 새로운 독을 만들어낸 당신은 검독인에게 시험을 했다.
그런데 독을 시험했던 다섯 명의 검독인 전부가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사인을 조사했다. 그런데 조사하는 와중에 놀라운 사실을 밝혀내고 말았다.
누군가 검독인에게 다른 독을 주입해 두었고, 새로운 독은 그들의 발작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검독인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바로 당성이었던 것이다.

"형님을 몰아낸 것도 부족하여 조카딸마저 팔아먹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숙부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죽였을 겁니다."

차갑게 말한 당가려는 몸을 돌렸다. 아버지는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숙부를 용서하기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산 세월이 너무 길었다.

"가려야…."

힘없이, 당성은 무릎을 꿇었다.

"식솔을 데리고 당문을 떠나세요.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당문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허허!"

당가려의 뒷모습을 보던 당성은 참혹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다음날. 와룡전에서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모든 직위를 반납한 당성은 식솔을 데리고 천의맹을 떠났고, 와룡전 소속으로 있던 사천당문은 하오대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부맹주 직위로 올라섰던 남천악은 와룡전과 선무전의 지지를 얻어 맹주로 등극했다.

"안녕하셨습니까, 맹주님!

"어서들 오십시오."

맹주전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한 남천악은 환한 미소로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을 맞이했다. 
맹주,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말이다. 
무공을 익히면서부터 꾸었던 꿈을 드디어 이룬 것이다.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와 표정관리를 해야할 정도였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식사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청성파나 점창파 문주는 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일행을 둘러보며 남천악은 말끝을 흐렸다. 하오대전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몸이 아프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제갈상운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금불산 전쟁이 이후 두문불출하고 있는 사일극과 유만량은
맹주가 식사 초대를 했다는 연락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전갈을 보내오지 않았다.
몸이 아프다는 말은 자신이 지어낸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가? 어쩔 수 없지. 그럼 우리끼리 합시다."

인상을 찌푸리던 남천악은 이내 표정을 바꾸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전쟁은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많은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참! 잠룡어사대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조만간 천의맹을 방문하겠다고 하더군요."

"오!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소생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로 하였습니다. 이 일을 수하들에게 알리도록 하십시오."

남궁장순의 물음에 남천악은 자랑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허허! 경사가 났습니다. 잠룡어사대인이 천의맹을  밀어주기로 했다면, 고명필과 연계되었던 일을 잊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소이다, 남궁 가주.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없었지만 고명필과 관련된 자들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해서 여러분들을 불렀습니다."

"굳이 우리들 의견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자를 전주로 임명한 이유는 고명필의 친구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용가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백해무익한 존잽니다. 아니 오히려 해가 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당가려와 같이 내보내는 게 천의맹을 위하는 일이라 사료됩니다."

남궁장순의 말에 다른 자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내일이면 마도련 무인들이 온다고 합니다.
그들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마도련 련주에게 부맹주 자리를 주고 싶소이다.
부맹주 거처는 지금 하오대전 자리로 마련했소이다."

유마혼이 마도련을 접수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이었다. 
초모랑마봉을 떠났을 때 유마혼과 상의했던 내용이었다.
자신은 천의맹을 접수하고, 유마혼은 마도련을 접수하여 두 세력을 하나로 합치기로 하였다.
정사를 대표하는 거대 세력을 만들어보자는 게  자신과 유마혼의 꿈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가장 먼저 대답한 이는 남궁장순이었다.

"수하들 인사는 맹주님의 고유권한입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5백 명에 불과하다지만 마도련은 마도 최대 세력입니다.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좋소이다. 그럼 마도련주에게 부맹주 직위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 처리에 남천악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맹주로서 완전한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흐뭇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잠룡어사대인이란 든든한 배경 덕을 보고 있지만 그 또한 몇 년 안에 벗어날 자신이 있다.
강호 무림은 무주공산이고, 수많은 이권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들만 잘 정리하여 천하전장에 잡힌 땅문서들만 돌려 받는다면 잠룡어사대인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이고,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자자!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합시다.
내일 마도련주가 도착하면 그와 함께 원로들께 인사를 갈 예정입니다."

아직 공식적인 맹주 취임 전이라 정천원에 통고만 했을 뿐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니 유마혼이 오면 같이 찾아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맹주로서 주도한 첫 공식만찬은 끝이 났고, 천의맹 수뇌들은 자신들의 처소로 돌아갔다.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나…."

여전히 맹주전에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남천악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정천원 원로들을 찾아갈 때 입을 옷을 고르는 것으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이거면 되겠네."

마침내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른 남천악은 환하게 웃었다. 희미하게 용문양이 새겨진 녹색 비단옷이었다.
그러나. 남천악은 용문양이 들어간 비단 옷을 입어보지도, 맹주전으로 찾아가지도 못했다.
500명의 무인들을 데리고 천의맹으로 들어온 이는 기다렸던 유마혼이 아니고, 냉소소였기 때문이었다.

"마도련에 대해 들어온 것 없나?"

맹주전으로 돌아온 남천악은 제갈상운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유마혼의 부제,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언령제세공을 익힌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천하무적이다.
설사 겁천십웅의 무공을 익힌 냉소소라 할지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지 않다니. 문득 등골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기존에 보고 들었던 내용이 전부입니다.
수인들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무인들이 당했다는 것 밖에는, 알아 낸 것이 없습니다."

"제길…. 군산 싸움에 대해서는?"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물었다.
유마혼이 마도련으로 가지 않았다면 버러지 놈이 있는 군산으로 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니 그랬을 것만 같았다.

"최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마교 교주와 싸운 사람은 둘이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화공을 썼고, 또 한 사람은 심검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서로 협조하여 마교교주를 공격했고, 마교 교주가 죽자 남은 두 사람은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래?"

'호! 이것 봐라?'


잔뜩 찡그렸던 남천악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가만 생각하니 유마혼의 죽음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유일한 경쟁자가 사라진 것 아닌가.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쿡! 혼자 먹으라면 먹어주마, 유마혼.'

"령무전 무인들은 어디쯤 와 있나?"

"그들 역시 내일이면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하오대전 무인들의 처리는…."

"일단은 안으로 들이도록 하게. 쫓아내는 건 천천히 해도 되니까. 아니 스스로 나가도록 해 줘야지. 도망치듯 나가도록 말이야."

야혼의 얼굴을 생각하자 맹렬한 살의가 솟구쳤다. 맹주전에서 놈에게 맞았던 한방. 
불사신체를 얻지 못했더라면 입안의 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받은 만큼은 반드시 돌려준다. 무공을 폐하여 내보낼 테다. 버러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말이다.'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내심 중얼거렸다.
한편. 장강과 한수 그리고 위하, 세 개의 강을 이용한 하오대전 선단은 어느덧 섬서성에 도착해 있었다.

"아미타불! 저 물개종자는 언제쯤 나와보려는지."

야혼이 들어있는 선실을 보며 추기영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동정호를 떠난 후 지금까지 선실에서 하고, 먹고, 자는 바람에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아니 딱 한마디를 하기는 했다. 아들을 만들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육승! 부하들 정렬 다 끝났는데, 연장은 아직이냐?"

"말도 마시게, 초 사형에게 용봉환락무까지 가르쳐서는 그 짓을 해대고 있다네.
저 인간은 육지에 둬서는 안 되. 물개들이 사는 바다로 보내야 한단 말이네."

"나는 물개보다, 그 물개를 견디는 초 사형이 더 대견하다. 생긴 건 청순가련 형인데…."

"그게 어디 초 사형 잘못인가. 물개를 만나면서 변한 거지. 좌우간 먼저 출발하도록 하세. 언젠가는 나오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추기영은 몸을 돌렸다. 

"하오대문 무인들은 출발하시게!"

데-엥!

커다란 범종소리를 시작으로 하오대전 무인들을 비롯한 예도단은 옥산을 향해 길을 잡았다.

"오빠 다 출발하고 있어요, 우리도 그만 가는 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완초령은 밖을 흘끔거리며 말했다. 동정호에서 이곳까지 오는 한달 동안 수십 번을 이야기했다.
부하들 보기 민망하니까 낮에는 밖에 있자고. 하지만 야혼은 듣지 않았다.
식사마저도 방안으로 가지고 오라고 해서 오직 선실 안에서만 생활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쉴새 없이 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을 무공 익히는 데 썼다고 봐야했다.
그에게 용봉환락무를 전수 받았고, 성모궁에서 가져왔다는 열 가지 무공 또한 외워야 했다.
그 모든 걸 하기엔 한 달이란 기간은 너무 짧았다.

"낙천적인 생각!"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천의맹에 가면 냉소소도 있고 당가려도 있다고 초 사형과 놀아줄 시간이 별로 없단 말이야.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뭐냐면 초 사형과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마구 소문을 내야해.
안 그러면 소소하고 가려에게 나는 맞아 죽는다고. "

"한번씩 눌러주면 된다면서요."

"그거야 화가 풀렸을 때 이야기지. 자자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우리 일이나 하자. 용봉환락무 시전해."

"조금 전에 했잖아요."

"그래서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오빠 몸 상할까봐."

완초령은 배시시 웃었다. 성이라는 것 참으로 놀라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이 주는 쾌감은 커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야혼의 손길을 기다리게 되었다.
아니 알게 모르게 그를 자극하여 관계를 갖곤 하였던 것이다.

"이상해요, 이러다 색녀가 될 것만 같아요."

용봉환락무를 운용하자마자 급격하게 밀려드는 쾌감에 완초령은 헐떡거리며 말했다.
벌써 수십 번의 경험이지만 용봉환락무는 쾌락을 제외한 모든 사고 기능을 정지시켜버릴 듯 강렬했다.

"원래 그런 거야. 괜히 환락무겠냐."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야혼은 말했다. 지금까지 몰랐던 용봉환락무의 비밀 한가지가 또 밝혀졌다.
색색만화공처럼 용봉환락무도 여인을 색의 노예로 만드는 기능이 있었다.
냉소소나 당가려가 적극적인 여자들로만 알았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그녀들을 변화시킨 건 용봉환락무였던 것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인지 완초령의 행동은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고, 잠시 후 선실 안에서는 두 남녀의 원색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온통 선실을 채운 적무와 백무가 서로 엉키고 설키는 광경은 무려 반나절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동정호를 떠난 한 달만에 야혼과 완초령은 햇빛을 보았다.

"가자, 천의맹을 접수하러."

완초령을 품안으로 끌어들인 야혼은 옥산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배를 떠난 뒤 반나절만에 먼저간 일행을 따라 잡았고,
다시 반나절을 이동한 다음 하오대전을 비롯한 령무전 무인들은 옥산 어귀에 도착했다.

"응?"

령무전 무인들을 인솔하여 옥산을 오르던 우자령은 흠칫 놀란 얼굴로 뒤를 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하오대전 무인들의 수가 점점 많아진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 시진 전부터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자령의 표정을 살피던 곤륜선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천의맹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우자령과는 달리 곤륜선인은 하오대전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거의 드러나지 않게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옥산에 들어서면서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하오대전의 인원수는 어느새 1천5백에 육박하고 있었다. 

"세상에…."

우자령은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동정호에서 야혼의 야망을 알았고, 처리방안을 놓고 지금껏 고민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를 내치자고 하자니 천의맹에는 야혼을 감당할만한 고수가 없다.
아니 야혼뿐만 아니라 추기영이나 태웅 또한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였다. 더구나 야혼을 따르는 100명의 도백회 고수들까지 있다.

"포기하시오 전주! 이미 그는 천하를 접수했소이다."

방금 나타나 야혼을 향해 알은 체를 하는 무인들을 알아본 곤륜선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은 마도련 최강자라는 마천루 원로들이었다.

"신수가 훤 하외다, 대공!"

환한 미소를 머금은 종마가 야혼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영감들도 좋구먼. 혹시 꼬불쳐둔 정력제라도 있는 거요? 혼자 먹으면 지옥가니까 알아서들 하쇼."

"들리는 소문엔 대공께서 정력제를 숨겨놓고 드신다고 하더구먼요."

"어떤 자식이 그런 소릴 합디까? 내가 정력제가 어딨소. 먹고 죽자해도 없구먼."

"그럼 손에 들고 있는 건 정력제가 아니고 뭐야 임마!"

"어라? 법현 네가 여기 웬일이냐?"

오백 여명의 승려들과 같이 나타난 법현을 보며 야혼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소림이 당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법현이 나타날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알고 있었지."

"글쎄 내가 알려 주었다고 해도 소림에서는 믿지 않았겠지. 그리고 믿지도 않는 놈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광불의 내공을 물려받은 모양이구나."

법현의 몸에서 느껴지는 거력에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랬다. 소림이 당했다는 말을 들으시곤 모든 걸 물려주셨다. 그런데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야혼을 대하며 느낀 점이다.
기존의 내공에 광불사조님의 내공까지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야혼 앞에 서자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녀석은 황실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욱 멀어져 있었다.

"아냐 잘했어. 너 같은 녀석이 한 명 정도 있어야 소림을 무시하지 않지.
다른 이야기는 짐승을 잡고 나서 이야기하자. 예도단은 앞으로 나서라!"

이내 몸을 돌린 야혼은 후면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멀리 천의맹 정문이 눈에 들어왔던 탓이었다.

"환영식을 거창하게 할 모양이야. 대문을 열어놓은 걸 보면 말이야."

활짝 열린 정의문을 보며 야혼은 차갑게 웃었다.
야혼의 짐작대로였다.
대연무장에는 천의맹에 소속된 모든 무인들이 나와 귀환하는 령무전과 하오대전 무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또한 남천악의 지시로 이루어진 일이다.
하오대전에 있는 마도련, 당문, 청성파 그리고 점창파 무인들을 끌어내기 위해서 오늘의 자리를 마련했다.
예상대로 하오대전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밖으로 나왔고, 그들은 오른쪽에 자리하여 령무전 무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야혼 네 놈을 내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우선은 개봉으로 보낸 다음, 그 다음에 네 놈을 없애 주겠다.'

"옵니다, 맹주님!"

"허험!"

제갈상운의 말에 낮게 헛기침을 한 남천악은 단상 위에서 활짝 열린 정의문을 주시했다.

"저놈이?"

정의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야혼을 발견한 남천악은 흠칫 표정을 굳혔다.
녀석은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두 자 가량 허공에 뜬 상태로 대연무장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야혼 뒤쪽으로 150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따라 오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야혼과 같은 상태였다.
그리고.

"마천루 원로들…? 어떻게."

남천악은 나직한 신음을 뱉어내고 말았다. 도를 찬 자들 속에 섞여 있는 노인들은 분명 마천루 원로들이었다.
더구나 그들 뒤쪽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병력이라니. 1300명 정도 된다했던 령무전과 하오대전 무인들은 그 두 배에 달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령무전 무인들은 5백에 불과할 뿐이고 나머진 전부 하오대전 무인들이라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쉬운 일이 없군.'

마도련 무인들을 힐끔 쳐다보며 남천악은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마도련이 천의맹을 접수하고 싶은 거요?"

상황파악을 위해 던진 말이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5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였던 마도련은 대부분 무인들이 살아 있고, 하오대전에는 처음 보는 고수들이 부지기수다.

"아니다 남천악, 마도련은 이미 하오대문의 분타가 되었다. 천의맹을 접수할 곳은 마도련이 아니고 하오대문이다."

"쿡! 픗! 하하하! 으! 하하하!"

남천악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도련이 천의맹을 접수한다고 했더라면 천의맹 무인들은 전의를 잃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오대문이라니. 이곳에 있는 누가 하오대문 밑으로 들어가려 하겠는가.
오히려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게 분명하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선무전이나 와룡전 무인들은 살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하오밀문 문주.
여기 있는 무인들은 말이다 하오밀문 휘하로 들어가느니 자결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꿈을 깨는 게 좋다."

"그럴까? 하지만 짐승을 선무전주로 모시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내 말이 틀렸소, 청운자. 아니 정운도장이라 불러야 하나?"

"허억!"

해쓱해진 청운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운도장, 성모척살대의 일원으로 떠났던 그 이름을 누가 모르랴. 무당을 빛낸 이름 중의 하나가 아닌가.
대연무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은 청운자에게로 향했다.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남천악의 시선 또한 청운자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의 팔을 잘라볼 수도 없는 일이니 정운도장 스스로 부정하면 증명할 방법이 없다. 놈은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된 것이다.

'정운 부정해라! 네가 부정하면 증명할 방법이 없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천의맹과 전쟁을 하고 싶으면 좀더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었어야 했네. 하오밀문, 문주."

이내 표정을 바꾼 청운자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정운도장이나 남천악이 잊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외다, 사조. 사조는 정운도장이 맞소이다. 1백 년 전 성모척살대의 일원으로 무당파를 떠났던 그 정운사조 말입니다."

무당파의 죄인으로 하오대전 참회동에 갇혔던 청광이노였다.

"빌어먹을…."

'맹주님, 맹주님이 몸소 처단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내심 욕설을 뱉어내는 남천악의 귓전으로 제갈상운의 전음이 흘러들었다.

'무슨 소리냐. 그대도 청광이노의 말을 믿는단 말이냐?'

'믿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청광이노의 모습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만일 저들 말이 사실이라면 맹주님까지 관련되었다고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제길!"

또 다시 흘러나온 욕설.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당혹한 얼굴로 서있는 그의 귓전으로 이번엔 청운자의 전음을 들려왔다.

'진법사자, 저를 처단하십시오. 저들은 저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사조라는 것 때문에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었던 아이들입니다.'

'알았다.'

더 이상 결단을 미룰 형편이 아니었다.
모든 무인들의 시선이 이편을 향하고 있고, 제갈상운의 말처럼 자칫하면 자신까지 마옥성 무리로 오인 받게 생겼던 것이다.

"청운자 대답하시오. 당신이 진정 성모척살대로 떠났던 정운도장이란 말이오!"

"크앙!"

남천악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포효를 내지르며 청운자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허억! 저럴 수가…."

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중인들의 얼굴은 해쓱하게 변했다.
천의맹 무인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소리. 그것은 수인의 울부짖음이었다.

"잘 가라 정운, 너의 복수는 반드시 해주마!"

나지막이 중얼거린 남천악은 오른손을 슬쩍 내저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자색 광채는 청운자의 목을 스치듯 지나갔고, 중인들은 가루로 흩어지는 청운자의 동체를 보아야했다.
일순 대연무장에 침묵이 흘렀다.
수십 년을 무당파 문주로 살아왔던 그가 정운도장이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정운도장이 수인이란 사실에 경악했다.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시작해 불과했다.
망연한 얼굴로 방금 전 청운자가 서 있는 자리를 쳐다보는 그들의 귓전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제 동료를 그런 식으로 죽이다니. 역시 짐승이라 어쩔 수가 없구나, 남천악."

"이제 나까지 수인으로 몰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 말 책임 질 수가 있느냐?"

남천악은 비릿한 조소를 물었다. 청운자는 청광이노가 있었지만 자신은 누구도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조금 전 청운자가 죽음으로 해서 마지막 한 사람마저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그런 자신을 향해 수인이라니.

"당연히 책임지지. 나랑 내기 한번 할래? 이번엔 서로의 목을 거는 거다. 주먹이 아닌 목 말이다."

"쿡! 미친놈! 좋다, 목을 건다. 말해봐라!"

남천악은 자신 있게 말했다. 팔이나 다리를 잘라보지 않는 이상 증거가 없다. 결코 밝혀낼 수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남천악은 잊고 있는 게 있었다. 자신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안대를 벗어봐라 남천악. 나는 안대 속의 눈이 정상이라는 데 걸겠다. 네 놈도 수인이라면 눈이 정상일 테니까 말이다."

"허억!"

급기야 남천악은 비명을 뱉어내고 말았다.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약점.
눈을 치료했음에도 천의맹에 들어올 욕심에 안대를 풀지 않았다.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했었는데.

"목을 길게 늘여라 남천악. 아주 깨끗하게 잘라주마!"

광명도를 뽑아들고 남천악 전면으로 다가가며 야혼은 말했다.

"쿡쿡쿡! 니미럴, 조용히 천의맹을 접수하나 했더니."

낮게 웃으며 남천악은 안대를 풀었다. 없어졌던 눈이 새로 생겨 좋아했었다. 그런데 그 눈이 발목을 잡고 말았다.
야혼을 노려보는 남천악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흘러나왔다.

"크억!"

"우엑!"

남천악 주변에 있는 천의맹 무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피를 토했다.
그들의 얼굴은 경악스럽게 변했다. 단지 몸에서 풍기는 기운에 쏘였을 뿐인데 내상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남천악은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너의 정파 새끼들은 야비해. 내기를 해서 졌으면 조용히 목을 늘여야지.
상대를 없애서 살인멸구를 시키려 든단 말이야. 너의 정파 새끼들이 써먹는 상투적인 수법이지."

"닥쳐라! 개자식. 다른 건 몰라도 네 놈만큼은 반드시 없애주마. 그런 다음 새로 시작할 거다.
비록 수인이 되었지만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난 화산파 대 제자 남천악이란 말이다. 풍환살(風環殺)!"

허공을 솟구쳐 오름과 동시에 남천악은 공격을 시작했다. 언령제세공을 잔뜩 일으킨 그의 몸을 타오르는 불덩어리였다.

"불이라며 나도 자신 있다, 남천악."

일순 야혼의 가슴이 백색으로 빛난다 싶더니, 그의 몸은 반투명한 불길로 휩싸였다.

"네 놈이었더냐, 네 놈이 마교 구원자였더냐?"

"맞다 남천악, 마교가 아닌 명교 구원자가 나다. 아울러 잠룡어사대인의 신분이고.
마도련의 주인이고, 도백회의 회주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통합하는 하오대문의 문주고."

광명도를 던져올린 야혼은 양손을 거칠게 휘저었다.
휘리릭! 쉬이익!
순간 그의 양손을 떠난 수십 개의 투명한 불덩어리들이 남천악이 펼친 풍환살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갔다.

쿠왕! 과과광!

"피해라!"

아래쪽에 있던 무인들은 재빨리 호수 쪽으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열기는 내공을 끌어올린다 하여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검사(雨劒死)! 화도멸(火刀滅)!"

이번에도 역시 선공은 남천악이었다. 가공할 열기를 간직한 우검사에 이어 초열의 단계인 화도멸이 야혼의 전면으로 밀려갔다.
태양열화지체의 몸으로 펼치는 화도멸은 야혼의 무영화와 상태가 유사했다. 

"묵광회혼파(墨光回魂破)!"

전면에서 다가온 거력을 향해 야혼은 광포한 고함을 내질렀다. 온통 검은색 광채가 사방에 번쩍였다.
천마묵장으로 펼치는 3초식은 엄청났다.
우검사와 화도멸 기운이 없앤 검은 광채는 그래도 힘이 남았는지 남천악 전면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밀려갔다.

"제길…, 무영창(無影槍)! 풍환살(風環殺)!"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남천악은 재빨리 양손을 휘둘러 두 무공을 동시에 펼쳤다.

과앙! 광광광!

"크윽! 이럴 수가…."

나직한 비명을 내지른 남천악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야혼을 보았다. 설마하니 언령제세공을 익힌 자신에 필적할 줄이야.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자라 여겼다. 유일한 상대는 유마혼이라 여겼었는데.

"쯧! 쯧! 유마혼도 너와 같은 소리를 했다. 이 천마묵장을 보며 기절할 듯 놀랐단 말이다. 마지막이다 남천악 최선을 다해라!"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야혼은 수중의 천마묵장을 하늘 높이 던져 올렸다. 그리고 남천악을 향해 몸을 날리며 광포한 고함을 질렀다.

"무광정화혼(無光淨化魂)!"

하지만 광포한 고함소리와는 달리 여호치가 무극대라미륵신공을 펼쳤을 때처럼 아무런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듯한 기운이 천의맹 전체를 감싸는 듯했다.

"안 돼!  제세무(除世無)!"

마력이 사라짐을 느낀 남천악은 전력으로 언령제세공을 펼쳤다. 동귀어진을 불사하고 펼친 무공이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기운은 온몸을 방어하듯 둘러싸더니 부드럽게 다가서는 기운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포기해라 남천악! 지금 펼치는 무광정화혼은 광명도장으로 펼치는 최후 무공이다.
내 가슴속에 있는 광명제세보주로 펼치는 마지막 무공이란 말이다."

그랬다. 무광정화혼은 무영화를 만들게 하였던 광명제세보주를 전부 동원해서 펼치는 무공이다.
광명도법상의 최고 무공이지만 단 한번밖에 펼치지 못한다.

"빌어먹을…. 제세무! 제세무!"

연거푸 제세무를 펼쳐보지만 소용없었다. 방어하기 위해 펼쳤던 제세무의 기운은 점차 엷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 기운은 자신의 몸을 가루로 만들기 시작했다.

"제기랄…."

절반쯤 사라진 몸을 보며 남천악은 눈을 감았다. 평생을 추구했던 맹주의 지위에 올랐고, 세상을 얻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가루로 변해가고 있다. 마치 자신의 몸처럼.

"으아악!"

몸이 완전하게 사라지는 순간 처절한 비명소리를 남기며 남천악의 신형은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싸움의 끝이었다. 하지만 야혼은 허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 말을 들어라. 앞으로 강호무림은 하오대문이 통치할 것이다. 불만 있는 자는 지금 나서라."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그는 하오대문의 문주만이 아니었다. 마도련의 주인이었고, 도백회의 회주였다. 그리고 잠룡어사대인이었다.

"없나?
그리고 남궁세가를 비롯한 네 가문은 동창제독을 암살한 범인을 은닉하고 있는바, 그 죄는 따로 묻도록 하겠다. 제독은 들라!"

"커억!"

남궁장순을 비롯한 네 가문의 가주는 해쓱한 얼굴로 정의문을 쳐다보았다.
사팔뜨기에 언청이, 죽었다고 알려진 동창제독이 수십 명의 동창무인들에게 둘러싸여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정천원에서 나온 개방의 태상방주 개왕은 야혼을 향해 예를 취했다. 개방의 가장 어른이 되는 순간이었다.

"좋다, 내 대행으로 천의맹을 맡아서 다스릴 사람은 사천당가의 현 가주인 당가려다.
그녀를 보필하는 데 추호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천의맹주인 당가려를 보필할 사람은 부맹주인 소림의 속가 장문인인 법현이 맡을 것이며
우호법으로는 개왕이 맡을 것이며 좌호법은 태무검존이 맡을 것이며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을 구룡권존과 무량검존이 도울 것이다.
그리고 선무전은 청정과 청류가 다스릴 것이며 령무전은 자운이 다스릴 것이며, 비원은 화산사검수가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상운은 천하전장을 운영하도록 한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따르실 분들은 조용히 계시고 이의가 있는 새끼들은 당장 나서는 게 좋다.
아무도 없으면 바로 시행하도록 한다."

조그마한 틈도 주지 않고 일사천리라 말을 뱉어낸 야혼은 당가려를 향해 눈을 찡긋 했다.

"아미타불! 이제 모든 일이 일단락 됐습니다, 그려. 여편네들한테 전부 맡겨두었으니 연작문주는 뭐할 겁니까?"

"나? 나야 원래부터 확실한 직업이 있잖아. 공공십팔수가 완전해 졌으니까 사람들 속이는 건 일도 아닐 것 아냐.
참! 고명필, 냉소소에게 물으면 초모랑마봉에 있는 마옥성 위치를 가르쳐 줄 거야.
화약 오천 관 정도 던져서 없애버려라! 호법! 가자!"

"아미타불! 시주들 열심히 하십시오. 우릴 보고 싶으면 개봉에 와서 개차반을 찾으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개차반 야혼입니다."

데-엥!

일순 세 명의 신형은 꺼지듯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형님! 우린 뭐 하러 여기 왔소?"

예도단 단주인 잡돈 막광은 한발이나 튀어나온 입으로 기천세를 향해 물었다. 뭔가 그럴싸한 일을 할거라 믿으며 나왔다.

그런데 한 일이라곤 허공에 떠올라 경공을 펼친 게 전부였다. 하다 못해 돼지 한 마리 잡아보지 못한 것이다.

"아미타불! 잔치를 열어야 하는데 할 일이 왜 없습니까."

"이 야 돌 중놈아, 우리가 소나 잡으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아냐?"

멀리서 들려오는 추기영의 목소리에 막광은 고함을 빼 내질렀다. 하지만 추기영의 목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소 다 잡으면 개봉으로 와. 개봉에 하오대문 건물이 다 지어졌어. 거기서도 소를 잡아야 해.
그리고  하오대문 일이 끝나면 마도련에 가서 소를 잡아야하고.
그곳 일이 끝나면 황실에 가서 소를 잡아야 한다. 전국을 돌면서 소를 잡는 일이 너희 일이다!"

"알겠습니다, 회주님! 

야혼의 목소리에 막광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조직체계가 어찌 될지 모르지만 중원 전역의 감찰 업무를 도백회에서 하게 된 것이다.
황당한 사람들, 제 말만 하고 몸을 날려 도망쳐버린 야혼의 모습에 가장 허탈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 여인들이었다.

'가려야, 신녀곡의 소 곡주 있잖아. 내가 자빠뜨려 버렸다. 그러니까 외롭지 않도록 잘 대해 줘.'

"야! 이 나쁜 놈아. 보이는 여자마다 전부 자빠뜨리면 우린 어쩌라고!"

"가려야!"

당가려의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란 냉소소가 재빨리 그녀를 불렀다.

"나봐, 언니! 아무리 그래도 할말을 해야겠어. 도대체 여자가 몇이야, 동창제독까지 자빠뜨렸으면 됐지!
신녀곡의 소 곡주까지 제 여자로 만들어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다시 만나면 몽둥이를 잘라버릴 줄 알아!"

"험험! 맹주님. 수하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만 하시는 게."

한편에 서 있는 태무검존이 앞으로 나서 당가려를 말렸다. 하지만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야혼을 욕하는 것처럼 하는 말이지만, 그 내면엔 완초령과 야혼의 관계를 대외적으로 공포하는 말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완초령은 신녀곡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방법이 없게 되었다.
천하제일인의 부인을 수절시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알았습니다. 언니 저 인간이 언제 저렇게 말을 잘하게 되었죠?"

일순 표정을 바꾼 당가려는 냉소소를 보며 물었다.

"오는 길에 제가 가르쳐 줬어요. 자꾸만 말해 달라고 하기에."

한껏 붉어진 얼굴의 완초령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킥!"

"풋!"

"호호호!"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정리해야지. 지금부터는 바쁘게 움직여야해. 
우선은 천의맹을 먼저 정리하고 그 다음에 개봉에 가야하고, 마도련 황실, 1년으로도 부족하겠다.
방금 총회주님께 호명 받은 분들과 각 문파의 문주님들 그리고 수뇌 분들은 하오대전으로 오십시오.
앞으론 그곳이 맹주전이 될 겁니다."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고명지가 태무검존과 개왕을 향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제독합하!"

삼존을 비롯한 각 문파 수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며칠 후. 천의맹의 눈이 되었던 정의문에 커다란 글이 쓰여졌다. 하오대문 천의분타. 
천의맹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천의맹이 새로운 이름으로 거듭나는 그 순간, 개봉에서도 집안 청소에 열을 올리고 있는 자가 있었다.

"가만있어라. 정력제를 숨겨둘 비밀 창고는 여기가 좋겠다."

야혼이었다. 추기영과 태웅은 비화와 비연을 만나러 간다며 하오대문으로 갔고, 혼자 집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마지막 비밀창고를 손보는 것으로 해서 집안 정리를 끝낸 야혼은 집을 나와 서문시전으로 향했다.

"흐흡! 냄새 좋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이런 냄새가 나야해."

한껏 숨을 들이킨 야혼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떠날 때와 거의 변하지 않는 곳이 바로 서문시전이었다.
사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야혼은 적당한 물건을 발견했는지 환하게 웃었다.
잠시 후.

"자 여기서 주사위를 찾아내면 열 배 돈을 드립니다. 마누라 그곳을 찾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자자! 운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사위가 들어 있는 통을 요란하게 흔들며 야혼은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일순 시끄럽던 서문시전이 적막강산처럼 변했다. 한 동안 듣지 못했던 그 소리가 다시 서문시전에 울려 퍼진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 여기 있는 도끼로 소생의 몸을 자르십시오. 손톱만큼이라도 흠집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건 돈의 열 배를 드립니다."

"아미타불! 시주님들의 간절한 기도는 이 철탁을 황금색으로 변하게 합니다.
이 철탁이 황금색으로  변하면 시주님들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똑 같은 자리에 다시 영업을 시작하는 그들은 몇 년 전 서문시전을 떠났던 개봉사괴 중 삼인방이었다.
과거와 달라 진 게 있다면 야혼과 태웅은 내기 돈을 열 배로 올렸고, 추기영은 기적을 보여준다고 하는 점이었다.

"자네 야혼 맞지. 이제 살이 전부 빠졌구먼."

"아 맞다 사 영감. 돼지…."

"걱정 말게, 아주 좋은 놈으로 준비해 두었으니까! 그런데 어디 갔다가 이제 왔나. 옥면호리는 진작 돌아왔는데. "

"무슨 말이래, 옥면호리가 왜?"

옥면호리란 말에 야혼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마도련에 있어야할 여호치가 이곳에 와 있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무공마저 완전히 잃었다고 하였다.

"언제 만났소?"

"그러니까 보름 전…야혼 자네 어딜 보나?"

"캬! 저년 완전히 죽이는 몸매를 가졌네. 영감 저런 엉덩짝 본적 있소?"

"아이고 그…."

"돼지머리는 육승하고 거패한테 가져다 주시오. 나는 잠시 다녀올 때가 있으니까."

"쯧!쯧! 아무리 오랜만이라도 그렇지, 옥면호리도 몰라보고."

야혼이 멋진 엉덩이를 따라 사라지자 정육점 주인 사 노인은 낮게 혀를 찼다.
한편 앞서가던 여인을 쫓아간 야혼은 은근한 어조로 그녀를 불렀다. 

"저기 낭자! 소생은 북경 사는…."

"주전상씨 아닌가요?"

"허걱! 허미! 저놈을 가슴 좀 봐라, 막 흔들린다, 흔들려."

조금 전 여인이 주전상이라 말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여인의 가슴은 폭발적이었다.

'가만 조금 전 나를 보고 주전상이라고….'

그제야 생각난 듯 야혼은 가슴을 향했던 시선을 들어올렸다.

"뚱뗑이 아저씨!"

"커억!"

품안으로 파고드는 그녀는 하오대문에서 무인들을 가리켰던 양지였다.
더구나 고명지가 동창제독이 되면서 양지는 그녀 아래로 들어갔다고 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곳에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명지는 어쩌고 나왔냐?"

"보름 전에 새로운 임무를 받았어요. 임무는 뚱뗑이 아저씨 감시.
내가 가장 적임자래요. 다른 년을 절대 못 보낸다면서. 내가 밥 준비 해놨는데 가요."

"언제?"

"조금 전에 집에 들렀다가 왔지요."

양지는 배시시 웃었다.

"끄응! 그래 가자. 그나저나 넌 소원 성취했구나."

"아저씨도 살이 무진장 빠졌는걸요. 이젠 여자들이 오줌을 지렸다는 아저씨 말 믿기로 했어요."

"돼지머리 주문해 놓고 왔는데."

"그건 육승 아저씨하고 거패 아저씨께 맡겨요."

야혼의 손을 잡아끌며 양지는 집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한편 과거의 인연을 만나고 있는 사람은 야혼만이 아니었다.

"시주 이것이 뭐로 보입니까."

"철-탁! 아니 금탁, 아니 철탁!"

추기영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 추기영의 영원한 밥인 육덕칠이었다. 

"맞습니다, 시주. 이건 철탁입니다. 그동안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무림인이란 놈들이 말입니다. 이 철탁 한방도 견디지 못한다는 겁니다. 육시주가 최고였습니다.
이 육승의 호적수는 육덕칠밖에 없었단 말입니다. 요즘 청오방이 잘 돌아간다고 하던데…."

"이따가 오백 냥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개업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

육덕칠, 모두가 떠나간 청오방을 거저 주운 행운아였다.

"알았습니다, 육 시주. 그럼 오늘은 이만 하지요."

싱긋 미소를 지은 추기영은 황금빛으로 변한 철탁을 거둬들였다.

"왜?"

놀란 사람은 오히려 육덕칠이었다.
딱 한방, 그동안 익힌 무공을 자랑할 요량으로 추기영에게 덤볐다가 철탁에 맞은 회수였다.

"옛날 생각이 난다면 더 때려 줄 수도 있습니다."

"아, 아닙니다. 지금 당장 가서 오백 냥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육덕칠은 재빨리 줄행랑을 놓았다.

"어이, 거패 오늘 참 좋은 날이지 않은가!"

"맞아, 행복한 날이야. 장사도 잘되고."

"그럼 시작하세."

데-엥!

"소승 육승이 서문시전에 돌아왔습니다! 이 육승이 서문시전으로 돌아왔단 말입니다!"

데-엥!

"이 거패도 왔소이다. 언제 떠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이 거패가 돌아와 새롭게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부디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은은한 범종 소리 속에 두 사람의 고함소리가 서문시전을 타고 울렸다.



대미(大尾)
 

끄응!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하오대문을 마쳤습니다.

연재로나마 글을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